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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철기 시대
본래 예맥이 살던 영역으로서 고조선에 속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기원전 128년에 예군(濊君) 남려가 위만조선의 우거왕을 배반하고 전한에 귀속됨으로써 한나라 창해군의 일부가 되었으나, 유지 비용 문제로 2년 만에 폐지되었다.[1]기원전 108년 위만조선이 멸망하고 한사군이 설치되면서 강릉을 비롯한 동해안 지역은 임둔군으로 개편되었다. 기원전 82년, 토착민 세력의 반발로 인해 임둔군이 폐지되고 현도군으로 재편성되었다. 7년 후인 기원전 75년에 현도군마저 서쪽 요동으로 축출당하자, 옛 임둔군의 15개 현 가운데 함경남도와 강원도 북부의 7개 현은 낙랑군 동부도위에 편입되고 강원도 중남부 해안의 8개 현은 자립하여 동예를 이루었다.
서기 60년경에는 남쪽 실직국(지금의 동해시, 삼척시)을 공격해서 실직국왕인 안일왕이 울진까지 피난했다는 전승이 있다.
2. 삼국시대
313년 고구려 미천왕이 이 지역을 점거하고 하슬라(何瑟羅) 또는 하서량(河西良)이라는 명칭으로 불렸다. 그러나 신라와 접해 있어서 이 지역과 삼척 일대까지 양국 간의 충돌이 있었다. 옥계면 일대는 고구려의 우곡현(羽谷縣), 연곡면과 주문진읍 일대는 지산현이 있었다.내물 마립간이 신라를 다스리던 4세기 말 시점에서는 하슬라(何瑟羅) 일대가 이미 신라의 영역이 된 것으로 보인다.[2] 5세기 중반 눌지 마립간 때에도 하슬라성(何瑟羅城)으로 등장해 신라의 북쪽 전선으로 고구려와 충돌한 기록이 나오다가[3] 468년 장수왕의 삼척 공격과 함께 고구려의 영역으로 넘어간 것으로 추정된다.[4]
6세기 초, 고구려와 신라 사이의 전쟁 기록이 사라지는 지증왕 시절에는 다시 신라 쪽의 북쪽 변경 하슬라주(何瑟羅州)로 등장한다. 이때 부임한 인물은 이사부로, 젊은 시절 하슬라의 군주로 온 512년에 우산국을 정복했다.[5] 이후 561년 건립된 〈창녕 진흥왕 척경비〉에는 하서아(河西阿)로 언급되는데, 비문에서는 우추(于抽)[6] 및 실지(悉支)[7]와 함께 하나의 군(郡)을 이루었던 것으로 나타난다. 선덕여왕 때인 639년에는 신라판 광역시쯤 되는 하서소경이 되었다가[8] 태종 무열왕 때 소경이 폐지되었다. 659년에 고구려와 말갈이 신라를 공격해 오자 신라가 방어선을 경계로 했다.
3. 남북국시대
통일신라 경덕왕 때 지명 한화 정책이 이루어져 명주(溟州)로 개칭되었다. 한자 명(溟)이 '아득하다'는 뜻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본래 고유어 지명인 하슬라(何瑟羅) 또는 하서량(河西良)[9]이 '아스라하다'와 유사하다는 이유로 명주(溟州)로 개칭된 것일 가능성이 있다.[10] 신라 9주 5소경 중 하나인 명주의 치소, 지금으로 치면 도청(행정)을 두고, 도지사에 해당하는 도독이 부임했다. 그리고 우곡현이 우계현(羽溪縣)으로 개칭되고 지산현이 명주의 속현이 되었다.신라 말기에는 원성왕과의 왕위다툼에서 밀려난 김주원의 후손들이 호족이 되어 이 땅을 다스렸다.
4. 후삼국~고려 시대
후삼국시대에는 명주 호족 순식이 다스렸으며, 초창기 궁예가 양길에 맞서 세력을 키울 때 큰 도움이 되었고, 훗날 궁예가 축출된 후 왕건에게 저항하다가 끝내 항복했다. 이후 순식은 왕씨 성을 하사받아 왕순식이 된다. 위에서 언급한 김주원의 영지였음에도 불구하고 순식은 정작 김주원의 후예라는 증거가 없는데 김주원의 후예로는 똑같이 명주에서 활동한 김예라는 호족이 따로 있었다.임영(臨瀛), 동원경(東原京), 명주, 하서부(河西府), 명주도독부, 명주목, 경흥도호부(慶興都護府), 강릉대도호부(江陵大都護府) 등으로 이름과 지위가 자주 바뀌었다. 현종 때 지산현을 연곡현으로 개칭하였다.
5. 조선 시대
전국적 대도시였다.1775년 우계현, 연곡현을 완전히 병합하고 연곡면, 옥계면으로 개편했고, 1789년에는 강릉부가 되었다.
1895년 23부제 실시로 영동 지방 8개군을 포함하는 강릉부관찰부 소재지인 강릉군이 되어 22개 면을 관할하였다가 이듬해 13도제 실시로 강원도에 소속되었다.
1906년 9월 이후 강릉군 (노란색) 1. 신리면(新里面, 현 주문진읍) 2. 연곡면(連谷面) 3. 사천면(沙川面) 4. 성산면(城山面) 5. 정동면(丁東面, 현 행정동 경포동) 6. 북이리면(北二里面) 7. 북일리면(北一里面) 8. 남일리면(南一里面) 9. 남이리면(南二里面) 10. 덕방면(德方面) 11. 구정면(龜井面, 1914년 상구정면) 12. 구정면(龜井面, 1914년 하구정면) 13. 자가곡면(資可谷面) 14. 옥계면(玉溪面) 15. 망상면(望祥面, 현 동해시 북부) |
1906년 월경지 및 땅거스러미 정리로 태백산맥 서쪽인 임계면, 도암면(현 평창군 대관령면)을 정선군으로, 진부면, 봉평면, 대화면을 평창군으로, 내일면과 내삼면을 인제군으로 넘기면서 관할 지역이 위 지도의 면적으로 무려 절반 가량 축소되었다.
6. 일제강점기
1914년 부군면 통폐합 이후 강릉군 (노란색) 1. 신리면(新里面) 2. 연곡면(連谷面) 3. 사천면(沙川面) 4. 성산면(城山面) 5. 정동면(丁東面) 6. 군내면(郡內面) 7. 성남면(城南面) 8. 덕방면(德方面) 9. 상구정면(上龜井面) 10. 하구정면(下龜井面) 11. 자가곡면(資可谷面) 12. 옥계면(玉溪面) 13. 망상면(望祥面) |
1916년 동리통폐합 때에 강릉읍내에 일본식 정(町)이 생겼다.
1920년에 성남면과 덕방면이 성덕면(城德面)으로 통합되었고, 군내면을 강릉면으로, 정동면을 경포면으로, 자가곡면을 강동면으로, 신리면을 주문진면으로, 상구정면을 왕산면(旺山面)으로, 하구정면을 구정면으로 개칭하였다.
1931년 4월 1일에 강릉면이 강릉읍으로 승격되었다.
1940년 11월 1일에 주문진면이 주문진읍으로 승격되었다.
1942년에 망상면이 묵호읍(墨湖邑)으로 승격되었다.
7. 대한민국
1980년대말 강릉시 및 명주군 | |
하얀색= 독립시 1. 강릉시 | 노란색=명주군 1. 주문진읍 2. 연곡면 3. 사천면 4. 성산면 5. 구정면 6. 강동면 7. 왕산면 8. 옥계면 |
1945년 북한 치하로 들어가지 않은 삼팔선 이남의 양양군 현남면 전역과 현북면, 서면 각 일부를 편입하였다. 이때에 양양군 서면 편입지역을 신서면으로 편제하였다.
1946년에 일본식 정(町)을 동(洞)으로 개정했다. (강릉읍 8동 7리, 성덕면 리, 경포면 리)
개정 전 | 개정 후 | 비고 |
본정(本町) | 성내동(城內洞) | 현재 행정동 중앙동 소속 |
욱정(旭町) | 성남동(城南洞) | |
대정정(大正町) | 남문동(南門洞) | |
용강정(龍岡町) | 용강동(龍岡洞) | |
임정(林町) | 임당동(林塘洞) | |
대화정(大和町) | 명주동(溟州洞) | |
금정(錦町) | 금학동(錦鶴洞) | |
옥천정(玉川町) | 옥천동(玉川洞) | 현재 행정동 옥천동 소속 |
1955년 7월 1일에 강릉읍, 성덕면, 경포면을 통합해 강릉시 (39동)로 승격하고, 강릉군 잔여 지역을 후기신라 때 이름인 '명주'에서 따와 명주군으로 개칭하였다. 이때에 옛 강릉읍 지역인 교동리(校洞里)가 교동으로, 강문동리(江門洞里)가 강문동으로, 견소진리(見召津里)가 견소동으로 개칭되었다.
1963년 1월 1일에 현남면을 양양군에 환원하였다.
1980년, 명주군 묵호읍이 삼척군 북평읍과 통합해 동해시가 되었다. 이후 묵호읍의 역사는 동해시/역사 참고.
1995년 1월 1일에 강릉시와 명주군이 합쳐 도농복합시가 되었다.[11]
2006년에 왕산면의 한자를 '旺山面'에서 '王山面'으로 바로잡았다.
[1] 참고로 창해군은 압록강 지류 유역에 있었다는 학설도 있다.[2] 내물왕 42년 7월(397년), 하슬라에 흉년이 들어 죄수를 사면하고 세금을 면제하여 주다.[3] 눌지왕 34년 7월(450년), 삼직이 고구려의 변방 장수를 죽이다.[4] 장수왕 56년 2월(468년), 신라의 실직주성을 빼앗다.[5] 지증왕 13년 6월(512년), 이사부가 우산국을 정벌하다.[6] 3세기 중반 진한의 소국이었던 《삼국지》의 우유국(優由國) 및 4세기 초 신라의 지명으로 기록된 《삼국사기》의 우유촌(于柚村)과 같은 지명으로, 지금의 경상북도 울진군에 비정되나 확실한 것은 아니다.[7] 524년 건립된 〈울진 봉평리 신라비〉에도 등장하는 지명으로, 《삼국사기》에 기록된 실직주(悉直州)와 동일하며 지금의 강원도 삼척시이다.[8] 선덕여왕 8년(639년), 하슬라주(何瑟羅州)를 북소경(北小京)으로 삼고 사찬(沙飡) 진주(眞珠)에게 지키게 하다.[9] 량(良)은 고대 한국어 표기에서 '라' 또는 '아'를 표기하는 데 사용되었기에 실제 발음은 '하서라'에 가깝다.[10] 실제로 '아스라하다'의 중세 한국어 형태는 '아ᅀᆞ라ᄒᆞ다'이며, 어근인 '아ᅀᆞ라'는 고대 한국어에서 '*아ᄉᆞ라'였을 것으로 재구되어 '하서라'와 유사하다. 국내 사서에 등장하는 '북명(北溟)'이라는 지명과도 유관할 가능성이 있다.[11] 옛 명주군청사는 현재 교동에서 시내 넘어가는쪽 우편에 "행복한 모루"라는 이름의 복합 문화센터+도서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