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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박근혜는 대통령 당선 직후의 인수위 시절부터 이미 여러 가지 문제점을 보였다. 게다가 박근혜를 뒤에서 조종하며 호가호위하던 최순실이 탄로나면서, 박근혜의 부실한 자질은 봇물처럼 튀어나왔다. 대한민국 대통령은 모두 빛과 그림자가 뚜렷하지만, 적어도 박근혜만큼 능력이 부족했던 사람은 없다.비록 박정희가 악랄한 독재자이지만, 그의 리더십은 많은 사람들이 인정한다. 애초에 20년 이상 장교로 복무하면서 조직을 지휘했던 관록 덕분이었다. 게다가 모든 대통령은 저마다 역경을 이기고 권좌를 차지했다. 지도자의 자격을 본인 스스로 입증했다는 소리다.
2. 역대 대한민국 대통령
2.1. 이승만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자기 나름대로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여담이지만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본인을 지도한 사람이 우드로 윌슨이다. 6.25 전쟁이 터졌을 때는 시민을 속이고 도망쳤지만, 사고만 치고 다닌 국방장관 신성모가 국민방위군 사건이라는 도저히 쉴드칠 수 없는 병크를 저지르자 바로 내쫓았다. 어떻게든 전쟁 지도자로서 최소한 밥값을 하려고 뛰어다녔다는 소리다. 또한 미국을 압박하려고, 반공포로 석방같은 도박도 감수했다. 이미 외교정치적 술수는 검증된 셈이다. 정부가 수립되기 전에, 미국을 포섭하려고 정읍발언을 꺼냈고, 미국에 국군 작전권을 일임하여 남북한 문제를 미국의 문제로도 키웠다. 그것 때문에 대한민국과 미국이 어떻게든 서로를 돕도록 했다. 여기서 비롯된 한미상호방위조약은 지금까지도 대한민국을 제대로 지킨다. 참고로 저 조약은 그때 미국이 엄청 싫어했다. 단지 전쟁이 난다는 것만으로 미국 국회의 의사에 상관없이 미군을 투입하고, 핵우산까지 해줄 마당이었기 때문이다. 독도와 동해의 배타적 경계수역에 대한 집착도 엄청나서, 독도 근처로 조업하러 오던 일본 어선들을 발견하는 대로 모조리 나포했었다. 게다가 4.19 혁명이 일어나고 많은 사람들이 자신에게 하야를 선언하자2.2. 윤보선, 장면
윤보선도 영국 유학을 다녀와 독립운동 및 이승만 정부에 대한 반대운동에 투신했다. 대통령의 업적은 전무해도, 박근혜보다는 유능했다. 윤보선이 대통령이던 제2공화국에서는 장면 내각에게 실권이 몰렸기 때문에, 본인은 거의 아무것도 못했다. 5.16이 터졌을 때, 윤보선은 본인에게 권력이 올 줄 알고, 박정희를 지지했다. 물론 이 사람도 끝내 권좌에서 쫓겨났다.게다가 장면도 자기 나름대로 유능한 존재다. 박사 학위를 받고, 종교지도자, 외교관, 교육자로 움직였다. 무엇보다 대한민국 정부 초대주미대사에 국무총리까지 지냈으니, 능력은 이미 검증된 셈이다.
2.3. 박정희
박근혜의 친아버지인 박정희는 비록 5.16을 일으켜 권력을 잡고 독재를 휘둘렀으나, 경제 발전, 새마을 운동 등으로 대한민국을 발전시키는 등 명암이 뚜렷한 인물이다. 박정희가 류태영 박사에게 지시한 새마을 운동은 아웃풋이 꽤 쏠쏠해서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뽑혔다. 그리고 성공적인 경제 개발 계획 실현, 경부고속도로 건설 등등 경제 개발에 확실히 기여한 공이 있다. 또 산림 녹화사업도 전세계에서 손꼽히는 성공 사례다. 녹화사업의 일부인 그린벨트는, 당시 개발도상국이던 한국에서 난개발이 일어나지 못하도록 했다. 이것 덕분에 북한처럼 숲이 벌거숭이가 되지 않았다. 지금은 한국도 국가 경제력이 충분하고 환경에 대한 관심도 높아졌기 때문에 그린벨트에 대한 논란이 다소 생겼지만, 이 당시에 그린벨트라도 시행하지 않았다면 한국은 뒤늦게 큰 돈을 들여 막대한 나무심기 사업을 해야됐거나 아예 지금의 북한처럼 키 큰 나무가 없는 민둥산 천지에 울창한 숲으로 뒤덮인 한라산이나 지리산, 북한산, 도봉산, 무등산등을 못 봤을지도 모른다.2.4. 최규하
최규하도 외교관으로서 능력을 인정받아, 외무부장관을 거쳐서 국무총리까지 역임했다. 임기가 너무 짧고 거의 허수아비 대통령이었기에 이렇다 할 업적이 없긴 하지만, 적어도 그 전후로의 업적은 있다.2.5. 전두환, 노태우
전두환, 노태우는 철권통치와 부정부패로 악명이 높지만, 실책만큼이나 내세울 공적도 있다. 무엇보다도 불법 군내 사조직인 하나회를 결성하고 장군 진급까지 해냈고 자기들보다 계급도 높은 선배를 제치기 위해서[1] 목숨을 걸고 군사 쿠데타를 일으키는 위험한 작업의 리더를 도맡았을 정도면, 비록 나쁜 방향이긴 했지만 리더십과 배짱은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니까 적어도 최소한 자신이 직접 리더로서 권좌에 앉을 사람이라, 박근혜처럼 찌질하게 남한테 조종당할 리가 만무하다.전두환은 "경제는 당신이 대통령이야." 라면서 자신이 잘 모르는 분야는 직접 도맡지 않고 전문가들을 모아서 전적으로 일임했을 정도로 인재를 발굴하는 안목은 있는 편이었으며[2], 덕분에 지금까지도 그가 집권하던 시기에 경제성장을 했다는 업적을 그나마 내세운다.[3]
노태우도 다른 것은 몰라도 임기 중에 소련, 동유럽, 중국, 베트남 등 구 공산권 국가들과의 국교 관계 수립이나 남북 고위급 회담 및 남북 기본합의서 타결을 성사시킨 업적이라도 있다.
2.6. 김영삼, 김대중
김영삼과 김대중은 목숨을 걸고 군사 독재정권의 폭거와 탄압에 대항했다.김영삼은 만 25세에 국회의원이 된 최연소 국회의원 기록과, 최다선 국회의원 당선 기록이 있다. 여기서 최연소 기록은 20대 총선까지도 깨지지 않았다. 민주화 운동 당시의 김영삼 비록 대통령으로서 평가는 좋지 않았지만[4] 적어도 중요한 정치적 고비마다 본인이 직접 앞장서서 정면 돌파를 감행했고, 재임 중 대형 참사가 잇달아 터져나왔을 때 본인이 직접 대국민 사과를 하면서 민심 수습에 나서는 등 무슨 일이 터지면 참모들에게 떠넘기고 자신은 그 뒤에 숨어서 이미지 관리에만 매달리는 인물은 결코 아니었다. 또한 차명계좌 등을 완전히 막진 못해 약간 아쉽다는 평은 있긴 해도 대체로 잘 실행된 금융실명제, 김영삼이 아니었으면 못했을지도 모른다는 평가를 받는 하나회 척결 등 긍정적인 업적은 확실하다. 그리고, 김대중과 마찬가지로 이쪽도 제명 파동, 각목 사건, 질산 테러를 비롯한 온갖 탄압을 이겼다. 또한 노무현, 이명박, 이회창, 이재오, 손학규, 정의화, 안희정을 비롯한 여러 인재를 발굴했는데, 이들은 현재 친노계, 친이계의 및 기타 정치계의 수장 및 중진 역할으로 분류될 정도로 김영삼의 인재 발굴이 이후 정치계에 미친 영향은 매우 크다.
김대중은 정계에 입문하기 전인 20대 시절에 이미 향토 기업 대표로 움직였고[5], 40대 후반에 제7대 대통령 후보로 뽑혀서 박정희와 격돌했다. 나중에 유신과 신군부를 물리치고[6], 헌정사상 첫 수평적 정권 교체를 이뤄냈다. 그리고 김대중이 당했던 고난과 역경은 참으로 끔찍했다. 박정희는 해외에서 김대중을 죽이려 들었다.[7] 또한 대통령으로서도 IMF 외환위기를 성공적으로 극복했고, 햇볕정책도 평이 갈리지만 남북관계 개선의 시도를 해봤다는 점은 사실이다. 지지율 역시 박근혜와는 천지차이로, 임기 5년 동안 단 한 번도 20% 밑으로 떨어진 적도 없었다. 퇴임할 당시에는 30%가 넘는 높은 지지율로 퇴임했다. 무엇보다 현재까지 대한민국에서 유일한 노벨상 수상자이다![8]
2.7. 노무현, 이명박, 문재인
노무현은 가난한 고졸인데도, 고학으로 어려운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부림사건부터 인권 변호사로 움직였고, 정치에 입문한 이후 지속적으로 지역주의를 깨기 위해서 고군분투했다. 이 과정은 한 편의 드라마처럼 참으로 파란만장했고 대통령으로 당선될 때까지 온갖 정치적인 역경과 고난을 겪었다. 또한 역대 대통령 중에서 적어도 인격적인 측면에서는 가장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9] 실제로 노무현을 싫어하는 사람들 중에서도 노무현을 인성이나 인격이 나쁘다면서 까는 사람은 보기 매우 힘들다. 그리고 노무현 정신[10]을 이어가는 친노와 친문의 정치세력은 오늘날의 민주당계 정당에서 핵심세력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친노의 정신을 계승한 후계자로 문재인이 19대 대선에서 41.1%의 지지율로 압승을 하고 제19대 대통령으로 당선되면서 정권교체를 이뤄내기도 했다. 이처럼 오늘날의 친노와 친문 세력은 "노무현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그의 정치적 후계자 집단과 전국정당화를 목표로 하는 정치 세력 및 그의 동맹 세력을 지지하는 것"으로 정의하는 의견도 있으며 노무현 전 대통령은 현재까지도 대한민국 정치계에서 매우 큰 영향력을 끼치고 있다.[11] 서거 이후 현재까지도 그의 정치적인 사상은 더불어민주당의 구심점이자 핵심목표가 되었다는 것과 한국 정치사에 끼친 영향력이 매우 크다는 사실을 부인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또한, 더불어민주당은 김대중, 노무현 정신의 계승이라는 강령을 두고 있으며, 친문계의 문재인 대통령뿐만 아니라, 이해찬, 안희정 등이 의심할 여지가 없는 친노 직계이며, 정의당의 유시민, 천호선 또한 의심할 여지가 없는 참여계로 친노 직계 출신이다. 거기에다가 정세균, 박원순[12] 등도 친노 방계(범 친노계)로 분류되는 등, 현재까지도 노무현 전 대통령은 더불어민주당의 정신적인 지주이자 대부로서 크게 작용한다.이명박은 궁핍한 환경에서, 자기 공부만으로[13] 고려대학교에 들어갔다. 한일수교 반대의 일환인 6.3 항쟁의 주역[14]이었으며, 대기업 새내기 직원에서 출발해서 계열사 대표 자리까지 차지했다. 퇴사한 뒤부터는 대한민국 국회의원과 서울특별시장까지 거쳤고, 마침내 대통령이 되었다. 비록 최근 들어 이명박 본인의 4대강 사업과 자원외교 및 친 기업적 성향을 비롯한 각종 실책들과 현재 노무현의 긍정적인 평가가 점차 늘어나는 와중에 과거 재임 중 노무현 표적수사 논란 및 노무현의 자살로 인한 서거가 재조명되면서, 친노계 및 진보 계층들이 현재까지도 대부분 적대적인 관점으로 바라보는 대통령인지라 부정적 평가도 상당하다. 그러나 진보 지지층에서 이명박근혜로 싸잡기는 해도 박근혜와 달리 '무능'한 인물은 절대 아니며, 재임 중 이명박 대통령이 남긴 공적[15] 또한 상당히 많다. 비판하는 측에서도 '유능하지만 부패한 인물'로 평가하는 경우를 많이 볼 수 있다. 그리고 뭔가를 열성적으로 하다가 도중에 문제점이 생겨 그르친 것은 반대로 표현하자면 최소한 계속 발전한다는 가능성을 보여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문재인도 가난한 극빈층 가정에서 태어나 궁핍한 환경에서 고학을 통해 경희대학교 법률학과에 들어갔으며[16], 유신반대 시위 등으로 인해 옥고를 치르고 군대 특전사 강제 징집을 겪은 뒤 제대 후 사법시험에 붙는다.[17] 사법연수원 제12기를 차석으로 졸업했으나[18], 시위 전력이 문제가 되어 판사로 임용되지 못했다. 부산에서 인권변호사로 활동할 때에는 그나마 순탄했다. 이후 참여정부에서 민정수석비서관을 지냈는데, 격무에 시달리다가 임플란트를 박았다. 실제로 어느 정도 쉬다가, 민정수석비서관을 다시 맡았고, 마침내 대통령비서실장이 되었다. 이후 정당인, 정치인으로서의 능력을 보여주었다. 새정치민주연합 시절에 안철수와의 갈등으로 인해 국민의당으로 갈라져서 집단으로 탈당을 하는 위기도 있었지만 20대 총선을 앞두고 더불어민주당으로 당명을 변경하고 사회의 각계 분야에서 수많은 인재들을 영입하는 인품과 능력을 보여주었으며 20대 총선에 출마시켜서 많은 인재들을 국회의원으로 당선시켰을 정도로 당 내의 리더십을 크게 인정받았다.[19] 비록 18대 대통령 선거에서 박근혜에게 패배했지만[20][21], 대선 패배 이후 4년간 권토중래를 하면서 다시 야권의 유력 대선 주자로 떠올랐고, 19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승리하면서 정권교체를 이뤄냈다.
이 세 사람은 출신 성분이 당시 기준으로도 하류층이었으며, 하류층에서 대통령까지 올라간, 개천에서 용난다는 속담의 대표격이 될 만한 인물이다. 공과에 대한 평이 엇갈릴지언정 지도자의 자질 면에서는 박근혜와 비교 불가.
3. 다른 정치가들 및 역대 대통령 후보들
그리고 대통령뿐만 아니라 현재/과거의 대통령 유력 후보 및 한나라당/새누리당에서 박근혜와 각을 세웠던 타 인물들을 보면, 전부 학업이나 정치적인 업적이 대단하다. 경선에서 낙선한 사람까지 보더라도 박근혜는 이들의 역량에도 한참 못 미친다. 역대 최저 득표율이라는 불명예스러운 기록을 세웠던 전관조차도 오랜 군 생활 끝에 장군[22]까지 올라간 사람이며, 심지어 노동자 출신 후보들도 고학력자는 아니고 고소득 직업자도 아닐지언정 노동자들을 하나로 묶을 만한 리더십과 결단력이 있었기에 일반인에 가까움에도 대통령 후보에 이름을 올릴 수 있었던 것이다.- 박원순
비록 19대 대선 경선에 불참하긴 했지만 정계에 입문하기 이전에도 인권변호사와 사회운동가로서 명망이 드높던 인물이었다. 서울대 우조교 성희롱 사건, 부천 경찰서 성고문 사건 등을 변호했었다. 또한 대한민국 시민 운동을 대표하는 인물 중 한 명으로, 참여연대를 설립했고, 부적격 정치인 낙선 운동, 소액주주 권리 찾기 운동, 결식 제로 운동 등을 추진하였으며, '아름다운재단'과 '아름다운가게'를 운영한 것으로 특히 유명하다.[23] 그가 본격적으로 대중적인 인지도를 지니게 된 것은 2011년 10월 서울시장 재보선을 앞두고 안철수와 단일화를 이루고 나서부터 유명해졌고, 본격적으로 당선되면서 정치인으로서의 길을 걷게 되었다. 서울시장 취임 이후 정책 추진 과정에서의 공청회 개회, 다수의 현장 방문, 정보소통광장 웹서비스(행정정보 공개) 등 시민과 소통하는 시장을 내세우고 있으며 재선까지 해냈고 대권주자로도 손색이 없는 노련한 정치인으로 성장하였다. 여기에 서울특별시장 재임 동안 동남아시아 정부 관계자들과 인맥을 맺는 등 다양한 활동으로 인해 지(知)동남아파로 분류되며, 결국 문재인 정부 들어서 아세안 (ASEAN) 특사로 지명되었다.
- 홍준표
검사일 때 대단한 수사 실적을 세웠고[24], 도지사로서 어느정도 능력을 보여주었으며[25] 국정농단 사태의 공범으로 찍혀 공중분해되기 직전의 정당을 수습하여 2위 정당 자리를 지키는 데 성공하면서 (여러 의미로) 정당 정치인으로서의 능력도 입증했다. 또한 이 사람 역시 자수성가의 아주 모범이 되는 인물이기도 하다.
- 안철수
서울대 의대 출신으로 겨우 20대 중반에 교수에 임용되었고, 나중에 벤처기업을 세워서 상당한 경영능력을 보여주었다. 특히 V3는 2000년대 초중반 국내 컴퓨터 백신 시장에서 한동안 1위를 차지한 소프트웨어였다. 뿐만 아니라석학은 아닐지언정자신의 학위를 위한 공부라도 많이 했으며, 카이스트와 서울대학교에서 교수를 할 수 있었을 정도면 뛰어난 사람임에는 분명하다.
- 유승민
고등학생 때부터 우등생으로 유명했고, 서울대학교 경제학과를 나온 뒤에, 미국에서 경제학 석사 & 박사 학위를 받았다. 학위를 받은 뒤에, 한국개발연구원에서 선임연구위원으로 활동했다. 그래서 경제 동향을 매우 잘 아는 정치인이며, 이 행적으로 인해 한때 문재인 정부에서의 경제부총리 임용설도 나돌았다.
- 심상정
서울대학교를 졸업한 엘리트였으며, 차후 노동운동가로 전향하여 노동 분야에서는 전문가 기질을 보여주는 정치인이다. 이후 민주노동당을 원내정당으로 만들었고 진보정당의 적은 의석수의 한계 속에서도 여러 의미 있는 법안을 많이 발의했다.
- 김문수
서울대학교 동문인 심상정과 함께 노동운동의 전설로서 활동했으며 이재오와 함께 김영삼에 의해 발탁되어 비록 전향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곳에서도 노동인권을 위한 활동에 전념했다. 국회의원으로서도 많은 활동을 펼쳐 2006년에는 국회출입기자단으로부터 약속 잘 지키는 국회의원 1위와 일 잘 하는 국회의원 1위에 선정된 바 있다. 국회의원 활동 이후 경기도지사에 당선되었으며 특히 그의 가장 큰 성과로는 수도권 통합 요금제 도입이 거론된다. 문제는 이후 도지삽니다 한 방에 모든 이미지를 말아먹었고, 이후 20대 총선에서 대구 수성구 갑에 출마해 당시 야당이었던 김부겸에게 패배하는 등의 모습을 보이긴 하지만 어쨌거나 능력있는 정치인임은 분명하다.
- 이재오
비록 19대 대선에서는 군소 후보에 속했지만, 엄연히 과거 5선 중진 의원 출신에 이명박 정부의 특임장관까지 거친 정계 중진 인사이자 친이계의 2인자로, 과거 유신독재 반대 운동 겸 노동운동(PD계열)의 대표적인 운동권 인사로 통하고, 이명박, 손학규와 더불어 6.3 항쟁의 주역이었으며, 국어교사를 하면서도 박정희-전두환 시절 감옥을 계속 왔다갔다하기까지 한 인물이다. 이후 실력을 인정받아 김영삼이 직접 발탁했으며, 이명박 정부 시절 특임장관까지 역임한 인물이다. 거기다가 노회찬, 심상정도 이재오와 인맥 관계가 형성돼 있어[26], 노회찬과 심상정도 현재까지도 이재오를 운동권 선배라고 존중할 정도다.
- 안희정
학생운동가 출신으로 군사정권에서 고초를 겪었으며, 충청남도 도지사로서 광역자치단체장 중 직무수행능력 연속 1위를 차지했을 정도로 도정을 잘 이끈 인물이다.
- 이재명은 매우 불우했던 환경을 극복하고 중앙대학교 법학대학에 입학하여 변호사 겸 시민운동가로 활약하였으며, 기초자치단체인 성남시장으로서 전임시장이 남겨놓은 빚을 청산하고도 재정을 흑자로 돌려놓은 뒤 성남시 복지사업에 매진하고 있다.
- 최성
고양시장으로 당선된 이후 고양시의 시정을 잘 이끈다는 평가를 받고 있으며 재선까지 성공했다. 그리고, 19대 대선 경선 출마 이후로는 차기 경기도지사로 출마한다는 설이 있을 정도로 앞날이 전도유망한 정치인으로 봐도 부족하지가 않다. 고양시장으로 당선되기 이전에는 한국기독교사회문제 연구원 상임연구원, 아태평화재단 책임연구위원 등을 역임했으며 김대중 대통령의 국민의 정부 시절에는 청와대 행정관, 고려대학교 아시아문제연구소 연구교수를 역임하였다. 정치적인 커리어를 보자면 문재인이나 이재명, 안희정보다도 직책이 더 많은 경험을 쌓았다고 봐도 부족하지 않았을 정도로 경력이 노련한 정치인으로 봐도 부족하지 않다.
- 손학규
불우한 환경에도 서울대학교 정치학과에도 입학하였으며, 일찍이 고등학생 때인 6.3 항쟁 때부터 민주화운동에 투신한 인물이다. 심지어 이후 노동계와 학계까지 모두 체험한, 몇 안 되는 정치인 중 한 명이며, 제 31대 경기도지사를 역임한 후 노무현 정부 시절 이명박, 박근혜와 쌍벽을 이루던 한나라당 톱 3 중 한 명이었을 정도로 정치적 역량이 뛰어났다.
- 박주선
검사 출신으로 2000년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당선되면서 정계에 입문하였으며, 2006년 서울시장 선거에서 비록 3위를 하였지만, 당시 낮은 당 지지율에 비해 상당히 선전하였을 정도로 정치적 수완도 뛰어난 인물이다.
- 남경필
비록 아버지의 지역구에서 정계입문을 하긴 했지만 경선을 제외했을 때 역대 선거 전승을 거뒀던 인물이기도 하며, 초선 때부터 이회창 당시 당 총재[27]와 당권-대권 분리 문제로 각을 세운 바 있었으며, 이후 박근혜 정권의 국정화 교과서 문제에 대해서 반대를 한 인물이기도 하다. 2000년대 중반부터 원희룡, 정병국과 함께 속칭 남원정이라고 불리는 보수정당 내 개혁파의 핵심 인물 중 한 명이었으며, 18대 국회 당시 국회선진화법을 발의한 의원 중 한 명이었다. 경기도지사가 된 이후 아예 도정을 연정으로 이끌고 나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정치인이며, 향후 원희룡과 함께 바른정당 차기 대선주자로도 계속 언급될 정도로 정치적 역량이 높은 인물이다.
- 원희룡
비록 19대 대선 경선에는 불참했지만, 가난한 집안 형편에도 1982년 대입학력고사 수석을 차지하고[28] 서울대학교 법대에 수석으로 진학하였고, 이후 사법고시도 단 2년만 준비하고 수석으로 패스했던 엄친아였으며, 나중에 보수 정당에 입문해서도 위의 남경필, 정병국과 마찬가지로 개혁파 정치인으로서 별다른 배경없이 오직 자신의 노력과 실력으로 정계 핵심인물까지 되었다. 심지어 2007년 당시 만 43세로 한나라당 대선 경선에 출마하여 이명박, 박근혜에 이어 3위를 거둔 인물이며, 2012년 이후 중앙정치에서 상대적으로 멀어진 이후에도 NH농협은행카드, KB국민카드, 롯데카드 등 '금융 3사 고객정보 유출 사태'가 발생하자 사법연수원을 갓 수료한 젊고 유능한 변호사들과 함께 ‘개인정보유출 국민변호인단’을 꾸려 국내 피해자 5만 여명을 대리하여 무료 공익소송을 사회적으로 주도해 나갔다. 비록 현재 제주특별자치도 지사라는 직책과 위치 때문에 상대적으로 주목을 못 받고있기는 하지만, 향후 바른정당 내에서 남경필 등과 더불어 차기 대선주자로 꼽히는 인물이다.
- 김관용
초등학교 교사로 임용되어 행정고시에 합격하고 9급 공무원으로 시작하여 구미시 시장을 거쳐 경북도지사 3선에 11년 동안 경상북도를 잘 다스렸다. 도지사로서 업무처리 능력은 전국에서 2~3위를 차지할 정도이다.
- 이인제
서울대 출신의 법조인으로 45세 나이에 최연소 노동부 장관을 지냈으며, 이후 경기도지사를 거쳐 15대 대선에서 스스로 당을 만들어 19.2%라는 득표율을 받았다. 이후 피닉제, 철새라는 비판을 받으며 여러 정당을 전전하면서도 국회의원 선거에서 딱 한 번을 제외하고 연승하며 내리 6선을 달성했다.
- 반기문
비록 19대 대선에 불출마를 선언했지만 외교통상부 장관을 거쳐 2007년 초부터 2016년 말까지 10년간 UN 사무총장으로 활동했고, 황교안도 법무부 장관을 거쳐 국무총리에 올랐으며 박근혜 탄핵안 가결 이후 문재인 정부 출범까지 5개월 간 대통령 권한 대행으로서 정부를 이끌었다.
역대 대선의 유력한 후보들이었던 김종필(13대), 정주영[29], 이종찬, 박찬종[30](이상 14대), 이회창(15, 16대)[31], 권영길(15, 16, 17대), 이인제(15, 17대), 정동영(17대) 등도 마찬가지이며, 이정희(18대)[32]조차도 내세울 커리어가 있고 자기 손으로 책도 쓴다. 재야 운동가 출신인 백기완(13, 14대)도 오랫동안 서슬퍼런 군사독재에 맞서 싸워온 만큼 민주투사로 인정받았다.
군소 후보들을 살펴봐도 마찬가지이다.
- 17대 대선에서의 찻잔 속의 태풍이었던 문국현도 기업인으로서 성공한 사람이고, 1인 정당이나 마찬가지였을 지언정 창조한국당의 당 대표도 지내고, 국회의원 선거에서 그 유명한 이재오를 누르고 당선된 경력도 있다. 정치를 그만둔 이후로도 꾸준히 기업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국방의 의무에서도 자유로운데 ROTC 장교 출신이다.
- 최저 득표를 다투던 전관과 금민을 예로 든다면, 전관은 이래뵈도 대한민국 국군에서 장군까지 올라간 사람이고, 금민도 독일 유학도 갔다 오고, 여러 가지 기관활동을 꾸준히 해왔다.
- 청소노동자 출신 후보인 김순자도 비록 많이 못배웠고 고소득 직업에 오르지 못했을 지언정 노동자들 사이에서의 리더십이 있었기에 일반인에 가까움에도 대통령 후보에 이름을 올릴 수 있는 것이다. 김순자의 그 후 행보를 봐도 어떤 단체 대표는 꾸준히 맡을 정도의 리더십이 있다.
4. 정당 관계자 및 관료
더 처참하게도 본인에게 충성을 다 바쳤던 서청원, 이정현이나 김진태, 최경환, 조원진도 박근혜보다 능력이 뛰어나다.* 서청원은 한 때 상도동계의 일원으로 김영삼과 동고동락을 했던 인물이고 박근혜보다 훨씬 전에 한나라당 대표직을 수행했었다.
* 이정현은 당의 지원을 거의 받지 못하면서도 순수 본인이 발로 뛰고 노력해서 호남에서 두 번이나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어 이것을 발판으로 한때 당 대표를 역임한것만큼은 사실이다. 특히 그는 대한민국 정당 역사상 최초의 당직자 출신 정당 대표라는 기록까지 세웠다.
* 김진태도
* 최경환도
* 심지어 골수 진박(골박:이 사람은 첫 국회의원 시기부터 친박연대로 정계에 입문한 인물이다.)으로 분류되고, 19대 대선 군소후보로 나온 조원진조차 그가 몸담아온 정치계활동이나 기간은 그리 길지 않았어도 대우그룹에서도 일을 했다. 무능하고 일을 못했다면 이런 곳에서조차 받아주지도 않았을 것이다. 물론 이러한 행적으로 해당 인물들이 긍정적 평가를 받기는 힘들지만 말이다.
그리고 청와대 최측근인 김기춘, 우병우, 조윤선,안종범과 김종보다도 무능력하다.
- 김기춘은 유신시대에 활약했던 인물이다. 인간성은 최악이였지만, 법률지식과 수사 능력, 정치 공작술이 좋았다. 그래서 검찰총장, 법무부 장관을 거쳤다. 박사 논문도 직접 독일어로 작성하고, 여러 한문고전도 해석할 만큼 머리가 좋다.
- 우병우도 성격이 오만방자하고, 권력욕으로 똘똘 뭉쳤지만, 대학교 3학년 때 사법고시에 붙었다. 또한 검사 시절에 뛰어난 활약을 하였다. 박영수 특검도 인터뷰에서 “...우병우 검사를 데리고 수사했는데 일은 참 잘해, 일은…”이라고 말했다. '검사 우병우'는 그만큼 뛰어난 인재였다.
- 조윤선도 블랙리스트에 허수아비 문체부 장관으로, 성격이 맹목적이고 나약하였다. 그래도 서울대 출신이며, 유학 가서 로스쿨 석사 학위를 받았다. 이 사람은 이래봬도 김앤장 출신이다.
- 안종범 또 한 자리를 유지하기 위해 박근혜의 비위를 맟추고 심기를 관리하여 자신의 능력과 소신을 발휘하지 못해 아첨꾼에 간신이 된 거지 박근혜와 그가 제대로 국정을 처리를 했다면 우수한 경제 참모가 되었을 것이다. 이사람도 경제학 박사 출신이다.
- 김종도 문화계 실세라고 할 정도로 문화체육관광학 박사에다가 능력이 있었다. 인격이 상당히 삐뚤고 최순실의 비위를 맟추고 눈치를 봐서 문제였지 제대로 하였다면 그래도 실력을 잘 발휘 할 수 있었을 것이다.
또한 그녀에게 직언하거나 소신 있게 충언한 관료, 쫓겨난 정치인들도 능력이 좋다. 박근혜와는 격이 다르다.
- 유진룡은 행정학 박사학위를 따고 문체부에 5급 공채에 합격하여 문화체육관광부의 관료통으로 이름이 나였다. 정권성향에 상관없이 강직하고 소신이 있었는데 노무현정권 때 낙하산 인사를 중용하라 하였더니 법과 원칙에 어긋난다하여 사임할 정도로 관료들중에서 성격이 대쪽같았다. 박근혜정권때 문체부 장관을 맡아 능력도 꼼꼼하고 소신있게 업무를 처리해 문화계와 야당에서도 그를 칭찬할 정도였다 그러나 세월호에서 박근혜와 김기춘에 블랙리스트 작성 강요와 낙하산 인사 문제로 인해 문화인을 탄압 할수 없고 법과 원칙에 거부한다 하여 항명하여 경질되었다 문체부 장관중에서 낙하산 인사인 김종덕과 허수아비 장관인 조윤선보다 능력과 인품이 훨씬 뛰어나다 할 정도이다.
- 채동욱도 검사시절 전두환을 철저하게 조사하여 그를 사형에 구형시킬 정도로 실력이 좋았다. 능력과 인품도 다른 검사에게 존경을 받을 정도로, 검찰총장으로서 개혁적이고 원칙적으로 지휘하였다. 특히 전두환의 추징금과 노태우 추징금의 미납부분을 전체 추징금의 5%에서 51%를 환수하고 노태우 추징금을 다 납부하도록 하는 검찰지휘능력이 탁월하였다. 국정원 사건을 조사하려다. 혼외자 문제로 6개월 만에 사임하였지만 이건 아무래도 보복인사로 보일 정도로 석연치 않은 점도 분명 있다.
- 진영도 원래는 친박이였다. 보건복지부 장관으로 발탁되었는데, 박근혜가 노인 연금 공약을 후퇴시키자, '이걸 어떻게 국민에게 설명하냐?'고 따진 뒤에, 자리를 박차고 나다 그 보복으로 공천에 탈락하자 민주당으로 자리를 옮겨, 자신의 지역구에서 당선되었다.
- 김영한도 검사 출신으로 김기춘 우병우 못지않게 공안통이었다. 민정수석 때 자신을 두 사람이 허수아비로 만들어 울분에 차 그만두고 폭음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그가 작성한 비망록은 박근혜 최순실 게이트의 진상을 파악하는 역활을 하였다.
- 남재준 또한 육군참모총장으로 있을 정도로 군인으로서 능력이 좋았고 성향이 대북 강경파였다. 비록 국정원 사건에 문제가 있었지만 이석기 내란음모를 전모를 밝힐 정도로 실력은 있었으나 정윤회 문건 사건으로 해임되었다.
- 조응천도 청와대 사정 비서관으로 있을 때 문건 유출 전모를 원칙대로 처리할 정도로 소신이 있었고 우병우를 등용해선 안 된다는 원칙적인 인물이었다. 무죄 판명 후 문재인에게 적극 발탁되어 그를 도와 대통령을 만든 창업공신이 되었다.
- 김용환은 7인회의 원로중 하나인데 박근혜를 대통령으로 만들어준 창업공신이다. 박근혜에게 최순실을 멀리하라 조언하였더니 박근혜 눈밖에 나서 관계가 소원해졌다. 김용환은 아버지 박정희 시절부터 활약한 유능한 경제관료였고 고리대금업 단속"이란 업적과 외환위기를 김대중 시절부터 비상경제대책위원장을 맡아 외환위기 극복을 위해서 노력하였다. 타계하기전에 나는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으니 더 이상 나에게 미련을 갖지 말고 살길을 찾으라”고 하면서 “박근혜 대통령이 임기(任期)를 제대로 마칠지 걱정이 된다."라는 유언을 남겼다. 7인회의 다른 멤버인 김기춘을 제외하고 다른 멤버들도 각자 정치 행정 분야에서 뛰어난데 박근혜는 아버지의 측근들이자 자신의 정치적 스승들을 의견이 직언했다는 이유로 쫓아내는 비정함으로 인해 자기 스스로 무덤을 판 꼴이 되었다. 인사배정 능력이 전두환과는 대조적으로 전두환은 자신이 모르는 부분은 전문가에게 적극적으로 일임하는 능력을 보여준 것과 크게 대비된다.
5. 외국 정상들
그 밖에 박근혜 집권 시기에 한반도 주변 4대 강국들을 이끌었던 버락 후세인 오바마, 시진핑, 블라디미르 푸틴, 아베 신조도 욕먹을 점이 있을지언정 적어도 박근혜만큼 무능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대만의 총통인 마잉주와 차이잉원도 경력과 행정능력이 검증되었고 대만의 외교력와 국방력도 박근혜와 대한민국보다 불리한 핸디캡을 지녔는데도 박근혜처럼 무능하지는 않았다. 둘 다 엘리트에다 법학박사학위를 갗춘 인물들이다. 동시기의 여성 정상인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 및 2016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로 나섰던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과는 비교하는 것 자체가 미안할 지경이며, 그 대선에서 힐러리에게 승리한 도널드 트럼프는 비록 자신의 회사를 4번이나 파산시키긴 했지만 뛰어난 쇼맨쉽으로 천재적인 방송 진행능력을 보여준 바가 있고, 일이 꼬이기 전까지는 사업감각도 뛰어났다. 하다못해 박근혜에 앞서 탄핵된 지우마 호세프 브라질 대통령도 룰라 정부에서 장관으로서 성공적인 커리어를 쌓은 바 있다.[33]6. 그렇다면 박근혜는?
박근혜는 대단한 부모의 후광을 활용한 선거의 여왕 이미지 이외에는 아무런 능력을 보여준 바가 없다. 그나마도 영남대학교 이사장, 정수장학회 재단 이사장 등의 커리어가 있긴 하지만, 모두 '박정희의 장녀' 라는 지위를 이용해 얻은 자리에 불과하다. 게다가 이마저도 실질적인 운영을 최태민이 했다는 의혹이 있으며 이로 인해 자기가 세운 재단에서 쫓겨나는 웃지 못할 일을 겪었다. 다른 대통령들은 그 이전까지 어떤 식으로든 성공적인 커리어를 쌓았다. 위에 열거된 인물 중에서도 안철수, 유승민, 남경필, 이회창 등은 나름대로 금수저로 분류될 수 있는 인물들이지만 박근혜와 달리 부모의 후광에만 의존하지 않고 자신만의 커리어를 쌓아 나간 반면에, 박근혜는 보여준 게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도 나름 명문인 서강대학교를 나오지 않았냐 하는 반론도 있겠지만, 알다시피 박근혜는 "독재자 부부의 큰딸 박근혜" 로서 서강대학교에 들어갔다. 박근령, 박지만도 사정은 비슷하다. 실제로 박근혜는 서류상의 이력서만 서강대학교일 뿐 실질적인 지적 수준은 중졸 이하이다. 정유라도 2010년대에 온갖 개수작질을 부려서 이화여대에 들어갔다. 그러니까 박근혜 삼남매에게는 이것보다 더한 특혜가 나온 셈이다. 게다가 서강대는 그때 새로 생긴 곳이라서, 지금보다 위상이 한참 낮았다.설상가상으로 박근혜는 인격마저 매우 불량하다. 세월호 참사가 터지자 박근혜가 어떻게 행동했는지를 보면 된다. 적어도 노무현처럼 눈물을 흘려가며 진심으로[34] 사안의 대처방안을 강구하는 스타일은 아닐지언정, 이명박처럼 차분하게 문제를 풀려고 어느 정도 노력이라도 했다면 이 문제로 욕을 듣지도 않았다. 하다 못해 김영삼처럼 최고 책임자로서 국민에게 머리를 숙이고 사과하는 제스처라도 취했다면 국민들도 그 무능을 비판할망정 적어도 인간성을 의심하는 지경에 이르지는 않았을 것이다.[35] 세월호 사고에 대한 박근혜의 대응은 그야말로 직무유기 그 자체였다. 과거 탄핵 당시 실실 비웃었던, 하늘에서 보고 계실 그 분께서 호통 치실 상황이다.
이에 대해 정홍원 전 국무총리는 "(실제로 옆에서 모셔 보니) 대통령이 오랫동안 공부를 많이 해서 너무 많이 알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자주 있었다. 그런 점에서 '외부의 조력이 없이는 판단도 제대로 못하는 대통령' 이라는 인식을 심어주고 있는 일부의 주장은 도저히 납득할 수 없다."라고 반박하기도 했다.
그나마 박근혜가 가진 정치적인 자질이라면, 자신이 가진 배경과 이미지나 후광을 이용하는 능력, 본능에 가까울 정도로 뛰어난 권력 획득 능력 정도다. 정말 박근혜가 정치가로서 자질이 전혀 없었다면, 국회의원부터 대통령 선거까지 사실상 무패행진을 한 것을 설명할 수가 없다. 이미지 정치라는 비판도 있지만, 국정 능력과는 별개로 이미지 정치 또한 정치가로서의 능력이 맞긴 하다. 좀 극단적인 예이긴 하지만, 아돌프 히틀러를 참고하면 이해하기 쉽다.
여기에 정쟁에서 판을 유리하게 가져가는 능력도 추가될 수 있겠다. 즉, 자신이 위기에 몰리면 똘마니들을 동원한 어거지나 낚시를 통해 다른 정쟁을 야기, "수렁"을 만들어 정치권 전체를 이전투구의 장으로 몰아가고, 자신은 절제된 언행(사실은 부족한 언변)으로 참모들 뒤에 숨어 "우아한 이미지" 를 유지하면서 위기를 유유히 빠져나가는 데 매우 능하다. 예를 들어, 참여정부 시절의 보안법 파동, 사학법 파동, 집권 후에는 NLL 파동, 국정화 교과서 파동,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를 덮기 위한) 이정현의 단식, (개헌 낚시를 던져 비박계를 분열시킨) 3차 대국민담화(2016년 11월 29일) 등등이 있다.
또한, 각종 의혹이 터졌을 때 본질을 흐리는 것에도 도가 텄다. 정윤회 국정개입 의혹 사건 때는 문건 유출로 초점을 돌려서 여론을 교란했는데, 이 과정에서 사망자를 냈다. 물론 박근혜는 그 틈에 얼른 위기에서 벗어났다. 그리고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때는 최순실 태블릿 PC의 입수 경위를 문제삼아 증거 자체가 불법이라고 주장하며 해당 PC의 증거 능력을 부인한다. 사실 이는 김기춘의 작품일 가능성이 큰데, 이에 대해서는 그것이 알고 싶다 2017년 1월 14일자 방송을 참고.
이 자질들은 선거에서 이기는 데는 유용했지만, 불행히도 대통령으로서 나라를 운영하는 데는 거의 쓸모가 없었다. 거기에 정정당당한 방법으로 판을 유리하게 이끈다거나, 위기를 벗어나는 게 아니라 다른 세력들을 수렁에 빠뜨리고 자기만 살아남는 그야말로 일반인으로서 생각하기에 매우 비도덕적인 방법이며, 무엇보다도 사실상 국정과 관련된 자질은 전혀 갖추지 못했다 해도 과언이 아닌 무능한 사람이 대통령 자리에 앉았다는 것에서 대한민국 헌정사에 영원한 비극이 시작되었다.
채널A 외부자들에서는 박근혜의 정치적인 평가를 하면서 '동물적인 정치적 승부사 기질이 있다.' '선거유세지역 선정이 뛰어났다.' '권력에 대한 의지가 굉장히 강했다.' '최순실, 정윤회가 결정에 관여했을 가능성 커' '참으로 냉혹한 사람' 등 '선거의 여왕' 으로서의 능력은 인정했으나 인간적으로는 좋은 평가를 주지 않았다.
게다가, 철저하게 자기 혼자밖에 모르고 남의 의견을 듣기를 매우 꺼려하는 성격이다. 물론 반만 맞은 얘기다. 최서원(구 최순실)이 하는 얘기를 무조건 따랐기 때문이다. 외부자들에서 진중권 교수가 했던 표현을 빌리면 이렇다. ("박근혜에게 최순실은 행동의 기준") 실제로 문화계 블랙리스트에 올라간 사람들의 사유를 살펴보면 가관이다. 문재인, 박원순을 지지했다고 블랙리스트에 들어간 사람이 넘쳤기 때문이다. 그만큼 박근혜는 많은 사람에게, '민주주의가 뭔지도 모른다.'고 의심을 받고 있다. 그래서 많은 문화예술인들 중에는 되레 "내가 블랙리스트가 되는 훈장도 못 달아 자괴감이 느껴진다!" 는 의견까지 피력하는 사람도 있었다. 한국 역사상 블랙리스트가 존재한다는 것은 암암리에 사실이었으나, 이는 분단국가인 한국의 특성상 종북주의자나 주사파를 걸러내기 위한 반체제 인사 명단일 뿐이었다. 적어도 자신이 아닌 타 정치인을 지지한다는 이유만으로 블랙리스트 명단에 기록하는 것은 헌정사상 유례없는 일이었다.
[1] 사실 황영시와 유학성 등 전두환의 선배들은 전두환이 하자고 하는대로 군말없이 다 들어준 수준일 정도(...)[2] 이 일화의 당사자인 김재익은 지금까지도 최고의 경제학 인재로 평가받고 있으며, 아웅산 묘소 테러로 인해 사망하자 '아까운 국가 인재를 잃어버렸다'는 평가가 주를 이루었다.[3] 물론 전두환 개인만의 업적인지에 대해서는 말이 많다. 이미 박정희가 산업화 시대를 열었고, 많은 변수 덕분에 3저호황이 지속되었기 때문이다.[4] 김영삼은 박근혜 이전까지만 해도 역대 최악의 대통령 1, 2위를 다툴 정도로 평가가 낮았으나, 박근혜정부 이후로는 김영삼의 비판자들조차 박근혜보다 차라리 김영삼이 훨씬 더 나았다는 데 100% 동의했을 정도로 재평가되었다. 원래 김영삼은 공적을 많이 세웠는데, IMF 하나 때문에 평가가 확 떨어졌을 뿐이다. 후문에서 보다시피 김영삼이 발굴한 인재들이 향후 정계를 휘어잡았다.[5] 많은 사람들이 모르는 부분이지만 김대중은 정계에 들어오기 전에는 기업을 경영했다.[6] 가택 연금, 투옥 수준이 아니었다. 납치, 내란음모 조작 사건까지 겪은 사람이다. 특히 신군부가 사형을 선고했을 때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 리하르트 폰 바이츠체커 서독 대통령을 비롯한 정상급 인사가 앞장선 덕분에, 김대중은 겨우 살았다. 달리 말하면 이런 사람들이 그를 살리려고 노력했을 정도로 이미 거물이 되어있었다는 것.[7] 결과적으로 김대중이 생존했기 때문에 납치사건이 되었다. 시신을 없애려고 바다에서 김대중을 죽이려 들었는데, 미국 정부에게 위치가 발각되어 계획을 바꾸고 결국 도쿄에서 실종된 지 닷새째 되던 날 밤에 서울 자택 앞에서 발견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8] 노벨평화상이라며 폄하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것조차도 받은 사람이 김대중 하나뿐이다. 거기다 노벨평화상이 비록 노벨상 중에서는 가장 논란이 많은 상이긴 하지만, 노벨상 자체의 권위는 이미 하늘을 찌른다.[9] 노무현 대통령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조차도, 탈권위주의를 최초로 시도했다는 점과 솔직하고 겸손했던 그의 개인적인 인격만큼은 인정한다.[10] 지역주의를 깨면서 민주당계 정당을 전국정당화를 만들기 위한 핵심적인 노력이다.[11] 당장 현 문재인 대통령의 지지기반은 친노세력으로 대표되는 노무현 대통령의 지지세력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이는, 헌정 사상 최초로 만들어진 대통령 팬클럽인 만큼 그 지지는 견고하다.[12] 박원순은 문재인 대통령과 사법연수원 동기로 실제로도 매우 친한 사이다. 그리고 노무현 대통령이 대우조선 노동자들을 변호하다가 집시법 위반으로 감옥살이를 했던 시절에 직접 변호인을 맡아서 도와줬던 인연도 있었다. # 또한 노무현 前 대통령 서거 당시, 박원순은 봉하마을로 찾아가서 노무현을 조문하기도 했다.[13] 이명박이 쓴 자서전인 '신화는 없다'를 보면, 아침부터 밤까지 장사하다가 늦은 밤에 참고서들을 놓고 공부했다는 내용이 나온다.[14] 지식이 본인의 전재산이던 대학생이 절대권력자 박정희에게 항거했다는 뜻이다. 여기서부터 공주처럼 자란 박근혜와 궤를 달리 한다.[15] 대중교통 환승, 청계천, G20 정상회의 개최, 평창올림픽 유치 등.[16] 이마저도 서울대에 응시했으나 떨어지고 장학금을 받기 위해 경희대학교에 들어갔다.[17] 그때의 사법시험은 뽑는 인원이 적어서 지금이랑은 비교도 할 수 없이 어려웠다.[18] 원래는 수석 졸업인데, 시위 전력 때문에 차석으로 강등되었다.[19] 이 때문에 심상정, 유승민 장관설 등 초대 내각과 관련하여 온갖 루머가 난무하였다. 그런데 루머에서 오르내리는 사람은 하나같이 적어도 어느 분야에서 두각을 드러냈다.[20] 개표 조작 의혹이 있다.[21] 국정원이 선거개입한것이 유죄 선고받았고 국정원장이 사과를 했다. 이 사건으로 선거의 정당성이 크게 훼손되었다[22] 최종계급 소장[23] 다만 이건 관련 업계 내에서의 일이지, 일반인 기준으로는 박원순 당시 변호사의 인지도는 상당히 낮았다. 아름다운재단과 아름다운가게는 알아도, 박원순이란 이름을 들어봤을 리가...[24] 항목에도 서술되어 있지만 제5공화국의 귀공자들을 거침없이 수사하고, 법정으로 넘겼다. 슬롯머신 사건에서 노태우 정권의 귀공자 박철언을 구속한 것이 압권이다. 실제로 검사 홍준표는 전설로 남은 존재다.[25] 그러나 능력과 인성에 대한 논란이 있다. 특히 19대 대선 출마 시 보궐선거를 막기 위한 꼼수 사퇴 건이 유명하다. 능력과 인품을 갖춘 도지사라면 자신이 근무하던 지역을 위해서 절대 취하지 않을 스탠스이기 때문. 게다가 유세 현장에서 보여준 막말들과, 친박과 거리를 두는 행보를 보이다가 지지율을 위해서 친박마저도 안고 가는 이중적인 행보 때문에 엄청난 비판을 듣고 있다.[26] 이 영향인지, 이명박은 노회찬, 심상정과도 인맥관계로 연결되어 있다.[27] 애당초 남경필이 정계에 입문하게 된 것도 이회창의 공천과 연관이 있다. 그럼에도 각을 세웠던 것.[28] 제주도 최초[29] 1992년에 대선에 나간 적이 있는 인물이다. 이 사람, 이병철과 함께 당시 한국 재벌의 양대산맥이었으며, 그의 5남도 대권주자로 계속 거론되었던 인물이다.[30] 독불장군적인 행보로 비판을 받지만, 본인은 사법, 행정, 공인회계사 시험을 모두 패스한 먼치킨이다. 이것만큼은 사실이다.[31] 만 46세로 최연소 대법원 대법관에 임명되는 전례가 없는 기록을 세웠고, 소신 있는 판결로 신망을 얻었으며, 그 후의 중앙선거관리위원장, 감사원장, 국무총리로서의 경력도 어마어마하다.[32] 서울대학교 법학과, 사법연수원 제29기를 나온 변호사 출신이다. 비록 통합진보당 관계자였지만 그의 행보로 인해 이석기와는 달리 종북 논란에서 제법 자유로웠다.[33] 브라질은 룰라가 취임하기 전 정치인들, 특히 보수 세력이 상당히 부패해 있었으며, 룰라가 취임한 후 브라질을 남미 강국으로 끌어올렸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이에 지우마 호세프의 탄핵을 희생양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34] 태안 기름 유출사고 때 어떻게 행동했는지 보면 된다.[35] 김영삼은 자존심이 매우 강하기로 유명했으며 심지어 현직 대통령인 노태우에 대해서도 "노태우 당신! 그러지 마!" 등 원색적인 표현을 쓸 정도로 거침이 없었다. 그런 인물조차도 국민에게 머리를 숙여야 할 때는 숙일 줄 알았다.[36] 박근혜를 수행했던 미용사의 말에 따르면, 해외 순방을 가서도 거의 말을 한 적이 없으며, '불 끄는 것 잊지 마세요.' '이제 좀 쉬셔도 됩니다.' 를 제외하고는 아예 대화를 나누어 본 적이 없다고 한다. 심지어 수행원들을 부를 때조차 벨을 눌러서 불렀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