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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필/일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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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1b5b40,#ddd> 일생 <colbgcolor=#fff,#1f2023>일생 · 평가
가족 아내 박영옥 · 형 김종락 · 형 김종익
역대 선거 제13대 대통령 선거
사건사고 사건사고 및 논란 · 5.16 군사정변 · 4대 의혹 사건
기타 중앙정보부 · 3당 합당 · DJP연합 · 삼김시대 · 신민주공화당 · 자유민주연합 · 청구동계 · 몽니 }}}}}}}}}

1. 유년 시절2. 군인 시절3. 정치인 시절4. 삼김시대의 종식

1. 유년 시절

1926년 1월 7일 충청남도 부여군 규암면의 면장이던 부친 김상배[1][2]와 어머니 이정훈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김상배와 이정훈은 생전에 아들만 7명을 낳았는데 김종필이 5번째 아들이다. 부여보통학교 6학년 때 키쿠치 칸(菊池寛)의 연애소설 <두 번째 키스>를 읽다 하루종일 두들겨 맞기도 했고[3] 공주중학교에 진학했을 때는 동맹 휴학을 주도했다가 공주경찰서 사상계에까지 넘겨졌는데 면장이던 아버지가 손이 발이 되도록 빌어 겨우 빠져나올 수 있었다.

공주중학교 졸업 후 일본 도쿄유학을 떠나 1944년 주오대학 예과[4] 독법학과에 들어갔다. 그러나 "조선인은 왜 전역(戰役, 병역 의무)에 참여하지 않나"[5]라는 소리를 하던 일본인 선배를 때려눕히고 후환이 무서워 자퇴 원서를 내고 도망치듯 귀국했다. 귀국한 뒤 대전사범학교 강습과를 졸업했는데 교생 실습 중 일본인 교감과 말다툼[6] 끝에 때려눕혀 일본 제국 육군 헌병대 영창까지 구경했다. 역시 면장이던 부친이 손이 발이 되도록 빌어 퇴교는 간신히 면했지만 산간 오지 학교로 발령이 나버렸으며 결국 버티지 못하고 3달 만에 사표를 내버렸을 때 8.15 광복을 맞았다.

1946년 경성사범학교 사회교육과[7]에 진학했다가 그만두고 군대에 일반병으로 입대하는데, 김종필 본인의 회고는 다음과 같다. 좌익 단체인 충청남도교육연맹위원장이던 둘째형을 잡으려고 서북청년단이 그의 친가를 습격해 연로한 김종필의 부친을 폭행했다. 충격을 받은 부친은 뇌졸중으로 세상을 떠났으며 고향의 재산은 모리배들의 손에 넘어가버렸다. 집안이 풍비박산난 후, 스스로 벌어먹고 살기 위해 집안 소유의 서울 시내 건물을 판 돈으로 서울에서 택시 몇 대를 구입해 운수업을 하다가 교통사고를 내버려 막막하던 차에, 정신을 차려볼 셈으로 군대에 자원입대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5.16 쿠데타 당시 주한미국대사관 서기관으로 근무하던 미국 외교관 그레고리 헨더슨(Gregory Henderson)이[8] 미국 국무부5.16 쿠데타 세력에 대해 분석하여 보고한 비밀 전문에는 전혀 다른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9] 김종필은 해방 직후 이른바 '국대안 파동' 과정에서 좌익 편에서 활동하다가 퇴학 처분을 받았고, 고향으로 돌아가서도 지속적으로 남로당 관련 활동을 했으며, 도중에 경찰의 추적을 피하기 위하여 군에 자원 입대했다는 것이다. 일단 김종필이 입대한 1946년 당시는 징병제가 있던 시대도 아니었고,[10] 심지어 대학생 신분이면 군대에 입대하지 않는 것이 보통이던 시절인데, 대학생 자체도 상당히 드물던 시절에, 그것도 서울대학교의 학생이 장교도 아니라 일반 병사로 군대에 자원 입대한 것부터가 매우 이상한 일이다. 또한 택시 영업을 하다가 교통사고를 내고 절망하여 자원 입대하였다는 주장도 의구심을 자아낸다. 특히 당시는 행정 정보에 대한 전산화도 되어 있지 않던 때라서, 좌익 경력의 인물들이 경찰 추적을 피하기 위한 도피의 목적으로 군대에 입대하는 일이 많았다는 점도 있다. 하여튼, 그레고리 헨더슨의 비밀 보고서에 기록된 김종필의 좌익 경력에 대한 핵심 내용은 다음과 같다.
"1946년에 미군정은 서울대 사범 대학을 비롯해 몇 개의 대학을 통합하려고 했다. 그 결과 일부 대학, 특히 좌익 교수단과 학생들 사이에서 격렬한 반대 운동이 일어났다. 이들은 미군정의 명령에 반대할 뿐만 아니라 독립 지위를 상실하면 미국의 감시가 강화될 것을 우려했다. 사범 대학은 적극적으로 투쟁했다. 이 싸움에서 좌익의 입장을 견지한 사람들 가운데에는 김종필과 중앙정보부에 있는 그의 측근 김용태, Korean Republic의 발행인인 김동성, 동양 통신(Orient Press)의 김규환, 전 공보부 장관 이원우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여기에 개입된 사람들을 철저히 조사해 보면, 분명히 공화당 총무인 김동환을 비롯해 더 많은 사람들이 드러날 것이다. 박정희가 사관학교에서 조직을 형성했던 것과 거의 같은 때에 그의 조직과 비슷한 또 다른 조직이 있었다는 사실도 밝혀질 수 있다. 일부 소식통에 따르면, 김종필과 김용태는 불온한 사건에 참가했다는 이유로 사범 대학에서 퇴학 처분을 받고 대전 근처에 있는 고향으로 돌아가 남로당으로 지역 청년들을 전향시키는 일을 했다고 한다.

김용태는 1948년에서 1950년까지 장항여자중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했다. 김종필과 김용태는 그 지역의 좌익분자들과 유대관계를 맺고 있었으며, 이 지역에서 강한 세력을 누리고 있던 이범석의 우익단체와 충돌을 일으켰다. 이 사실은 쿠데타의 지도부들이 처음부터 이범석 장군과 그를 따르는 청년단에 강한 적개심을 보였던 이유를 설명해준다. 좌익분자들에 대한 단속이 진행되자, 일부 좌익분자들은 체포되는 것이 두려워 당시 조직 확대를 위해 청년들을 필요로 하던 장교 양성소와 군방첩대(CIC)에 들어가는 길을 모색했다.

김종필은 여수·순천 10.19 사건을 계기로 장교 후보 선발에 보다 엄격한 안보 규정을 적용하기 직전인 1948년 8월에 장교 양성소의 예비학교인 지도자 양성소에 입학했다. 그는 동기생들에게 지도력을 발휘해 자신의 조직을 만들기 시작하면서 그곳을 졸업하였고, 곧 G-2에 들어가서 박정희를 만나고 알게 되었다. 그는 절친한 친구인 김용태를 G-2의 문관으로 데리고 오기도 했다.

김종필의 6형제 가운데 전부는 아니지만 몇 명은 1950년에 북한이 남침했을 때 공산주의자들에게 협력한 것으로 보인다. 6형제 가운데 김종식은 그의 걸출한 형제 김종락이 인정하듯이 살아 있다면(그럴 가능성이 있다) 북한에 있을 것이다. 김종필의 또 한 형제는 충청남도에서 공산주의자들에게 협력한 죄로 동네 사람들에게 몰매를 맞고 현재 고향 마을에서 조용히 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또 한 형제는 남로당원으로 한국 전쟁에 참여했지만 그 후 김종필이 그의 체포를 막았다고 한다. 김종필 형제가 남로당에 협력했다는 사실은 그들이 살던 동네에서는 매우 잘 알려져 있으며, 그것은 모든 가족이 서울로 이사를 온 원인중 하나였다."

자세한 사항은 다음 링크의 기사 참조.
한편 재미 언론인 문명자 기자의 회고에 따르면, 훗날 중앙정보부장을 지낸 김형욱도 문명자와의 인터뷰에서 김종필의 좌익 전력에 대해 인정하면서 "김종필은 과거에 좌익 운동을 했으며, 경찰이 잡으러 다니니까 군대로 도망을 갔다"고 설명하였고, 김종필의 성격에 대해 "소련의 크레믈린처럼 무엇을 생각하는지 모르겠는 자"라고 묘사했다고 한다. 참고로 문명자 기자의 이 회고록은 상단에 인용된 그레고리 헨더슨의 비밀 보고서가 최초로 발굴되어 공개되기 몇 년 전에 출판된 책이었으며, 문명자와 김형욱의 인터뷰 또한 김형욱이 미국에 망명하기 한참 전인 1971년 제8대 국회의원 선거 직후에 있었던 일이다. 즉, 5.16 쿠데타 핵심 세력 내부에서는 김종필의 남로당 관련 좌익 이력이 이미 알려진 사실이었다는 것. 문명자가 본인의 저서에 수록한 해당 내용은 다음과 같다.[11]
당시, 김형욱은 중앙정보부장에서 밀려나 공화당 전국구 의원으로 있으면서 중앙정보부장 이후락의 위협과 견제로 전전긍긍하던 처지였다. 그는 멕시코를 방문하고 오다가 뉴욕에 들렀는데 역시 유엔 취재를 위해 뉴욕에 있던 나와 '우리하우스'라는 한국 음식점에서 식사를 같이 하게 되었다. 이 자리에는 동아일보 기자로서 당시 컬럼비아 대학에서 1년 연수 과정을 밟고 있던 이웅희도 함께 있었다.

김형욱은 이런저런 얘기를 늘어놓았는데 '멧돼지'라는 별명과는 달리 상당히 두뇌회전이 빠르고 교활한 인간이란 느낌을 받았다. 그의 주장의 골자는 "박 정권 최고의 충신은 나이며 이후락김종필은 썩었고 나는 깨끗하다"라는 것이었다. 그가 "JP 가지고는 안 된다고 내가 각하에게 이야기해서 그를 두 번이나 쫓아냈다"고 열을 내기에 나는 물었다.[12]

"JP하고는 왜 그렇게 원수가 됐습니까?"

- "우리는 철저한 반공이지만 그는 과거에 좌익 운동을 했기 때문이오."

"그렇게 치면 박 대통령여순 사건남로당 군책 아닙니까?"

- "각하야 모든 걸 다 불고 전향했지만 JP는 다릅니다. 그는 한 번도 잡혀들어 가지 않았고 경찰이 잡으러 다니니까 군대로 도망갔소. 그는 크레믈린처럼 무엇을 생각하는지 모를 놈이오."

출처: <문명자, '내가 본 박정희와 김대중: 워싱턴에서 벌어진 일들', 월간 말, 1999>

2. 군인 시절

파일:external/pds.joins.com/htm_201502212332520102011.jpg
대위 시절 김종필의 가족 사진.[13]

김종필은 충청남도 온양(지금의 아산시)의 대한민국 육군 제13연대사병으로 배속되었다. 그러나 해방 정국의 혼란 때문에 당시 군대는 악폐습, 똥군기라는 설명으로는 가히 표현이 부족할 만큼 개판이었고 결국 가혹 행위를 못 이겨 불침번을 서던 와중에 탈영해버렸다.[14] 그렇게 서울로 올라와 서울대학교 동기생인 김용태의 자취방에 얹혀 살게 됐다. 한심한 처지의 울분을 억누르며 지내던 중 해방 이후 국도극장(國都劇場)[15]으로 이름을 바꾼 옛 황금좌 극장으로 바람을 쐬러 갔다가 육군사관학교 교도대와 마주쳤다. 김종필은 무슨 용기가 났는지 극장 매점에 있던 교도대 중대장을 찾아가 사정을 털어놓고 재입대하겠다고 하자 탈영이 흔하던 전쟁 이전 시절이라 중대장은 흔쾌히 김종필을 받아들였다. 결국 육군사관학교 교도대에서 다시 사병으로 복무하던 중 김종필을 눈여겨 보던 중대장이 그에게 육군사관학교 입학을 권유했고 그렇게 육군사관학교 8기로 입교하게 된다. 이후 8기생 졸업식에서 우등상장을 받을 정도로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해 보병 소위로 임관하게 된다. 이때 1,300여명의 8기 졸업생들 중 32명만이 대한민국 육군본부로 배속됐는데 김종필 역시 그 중 1명이었다. 김종필은 정보 장교로 배정[16]되어 육군본부 정보국에서 북한반장으로 근무하게 되는데 당시 육군본부 정보국 상황실장 박정희인연을 맺게 된다. 당시 박정희는 육군사관학교 2기로 임관하여 현역 소령으로 육군본부 정보국 전투정보과 과장으로 재직 중 남조선로동당 입당 전력이 들통나서 김창룡이 주도한 숙군 작업으로 파면당한 후 장도영과 전임 정보국장 백선엽의 도움을 받아 문관 신분으로 직제에도 없던 정보국 상황실장 직을 맡고 있었다.[17] 정보국으로 배치된 육군사관학교 8기생들에게 전투정보과장 이후락이 상황실장에게도 인사를 하라고 했는데 박정희는 현역 장교가 아니라는 자괴감이 들었는지 "나한테는 인사할 필요없다"라며 자리를 피해버렸지만 이후 박정희와 육군사관학교 8기생들은 죽이 맞아서 어울려 다녔고[18] 결국 이들은 5.16 군사정변의 주역으로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게 된다.

이것이 인연이 되어 박정희의 중매로 박정희의 셋째형인 박상희의 큰딸 박영옥결혼하게 되었다. 김종필 본인의 회고에 따르면 6.25 전쟁 전 서울에서 국민학교 교사로 근무하던 박영옥은 서울에 있는 유일한 친척이자 작은아버지인 박정희를 자주 찾아오며 의지했는데 전쟁 중 대구로 피난왔다가 말라리아에 감염되어 앓던 중 김종필이 와서 의사를 부르고 간호하면서 서로 눈이 맞게 되었다. 박영옥의 작은아버지 박정희는 처음에는 김종필이 박영옥과 사귀는 것을 싫어했지만 김종필의 동료인 이영근, 석정선 등이 김종필과 박영옥은 어울린다고 박정희를 설득하면서 마음이 바뀌었고 결국 어느 날 "자네, 내 조카딸 어떤가?"하고 박정희가 말을 던지게 되었다. 당시로서도 미인이던 박영옥을 김종필이 싫다고 거부할 이유가 없었다. 그렇게 김종필은 박정희와 처삼촌-조카사위라는 인척 관계로 묶이게 되었고 이후 박정희는 김종필을 조카사위 입장에서 이름을 부르기보다는 거의 '임자'라고 불러댔다.[19]

6.25 전쟁 무렵 당시 육군본부 정보국 전투정보과장 유양수북한의 남침 가능성을 강하게 주장하다 이를 부정적으로 생각하던 정보국장 장도영에게 찍히는 바람에 6사단 정보참모로 밀려났고[20] 전투정보과 북한반장 백 모 대위는 북한과의 무역 거래 과정에서 부당 이득을 취한 것이 들통나면서 처벌받기 직전 권총으로 자살하는 등 전쟁을 앞두고 김종필이 소속된 전투정보과는 분위기가 어수선하기 그지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북한반의 선임 장교가 된 김종필은 이미 전선의 동태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깨닫고 북으로 정찰요원을 급파했지만 전원 연락이 두절되고 말았다.[21] 1950년 6월 25일 새벽 육군본부의 당직 장교로 근무하던 김종필은 북한군이 삼팔선을 침범했다는 소식에 전면전임을 직감하고 육군본부의 각 국장[22]들을 호출했으며 채병덕 총참모장 및 신성모 국방장관에게 상황을 전파하는 등 당직 장교의 임무를 수행하려 했지만 여의치 않았다. 당시 상황은 일개 중위였던 김종필이 어떻게 할 수 없는 총체적 난국이었다. 이후 1951년 대위로 진급했으며 미국 유학 장교단에 뽑혀 조지아 주포트 베닝(미 육군 보병학교)에서 연수를 수료했다. 이때 딸 예리를 얻는다. 부인 및 가족들은 한국에 그대로 있었다. 6.25 전쟁 후반부인 1952년 8월부터 1953년 5월까지 6사단 19연대의 수색중대장으로 참전한 것을 제외하면 계속 정보 장교로 복무했다.

3. 정치인 시절

3.1. 제3공화국

이승만 정권이 무너지고 들어선 제2공화국 장면 내각 시절 부패한 장성들의 퇴진을 요구하는 이른바 '정군 운동'을 벌이다 '항명 파동'으로 강제 전역되었다. 그리고 예비역 중령의 신분으로 5.16 군사정변의 핵심적 역할을 맡았다. 훗날 인터뷰에 따르면 쿠데타 실행을 자신이 먼저 박정희한테 주장했다고 한다. 쿠데타 성공 이후 현역으로 복귀하여 육군 준장으로 진급한 후 다시 예편했다.

박정희의 오른팔이자 실세로 군림했으며 강력한 정보기관의 설립을 주장하여 중앙정보부를 창설하고 35세의 나이에 초대 중앙정보부장을 지냈다. 당시 김종필은 중앙정보부를 대외 정보 수집을 주임무로 하는 CIA를 본떠서 만들었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국내 방첩 위주였던 FBI 모델에 가까웠고 현실은 철저한 정권 호위 조직이었다.[23] 표어인 "우리는 음지에서 일하고 양지를 지향한다" 또한 김종필의 작품. 이 시기에 북에서 파견한 밀사 혹은 간첩 황태성을 직접 만난 적이 있다는 의혹이 있다. 일명 '황태성 간첩 사건'인데 김종필 본인은 중앙정보부장으로 황태성 간첩 사건 수사를 지휘했지만 황태성을 직접 만난 적은 없다고 해명했다.
파일:김종필 젊은 시절.jpg
1962년 3월 중앙정보부장 시절 김종필(본인이 고안한 재건복을 입고 있다.)

초대 중앙정보부장 시절 모든 민간 정치인들을 정치 규제로 묶어놓은 상태에서 비밀리에 민주공화당을 사전 조직했다. 그 과정에서 창당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불법 행위를 저질렀다는 4대 의혹 사건이 세상에 드러나게 되면서 중앙정보부장 직에서 물러난다. 그 후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의 특명전권순회대사'라는 직명으로 외교관 여권을 발급받고 1963년 2월 25일부터 1963년 10월 23일까지 약 8개월 동안 이른바 '1차 외유'를 떠났다. 잠시 일본으로 외유를 떠났다가 일본 도쿄에서 민주공화당이 무사히 창당되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대선을 지켜봤다. 민정 이양이 결정되자 귀국해 제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공화당 후보로 충남 5선거구에 출마, 처음으로 당선된다.

민주공화당 내에서 JP계라 불리는 독자적인 세력(양순직, 예춘호, 박종태, 이진용, 오학진 등)을 형성하여 암암리에 박정희의 후계자로 여겨지기도 했다. 그러나 박정희 친위 세력의 견제로 여러 차례 장기간 외유[24]를 떠나기도 했으며 1963년 이른바 '1차 외유'를 떠날 때 '자의 반 타의 반'이라고 한 발언이 유명하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공항으로 출발하기 전 중앙청 기자실에서 기자들이 "왜 외유를 떠나느냐"고 질문하자 "이번 여행은 나의 희망 반, 외부의 권유 반으로 떠나게 되는 것이오."라고 웃으면서 대답했는데 동아일보 이만섭[25] 기자가 '자의 반 타의 반'이라고 기사로 옮긴 것이라고 한다.
파일:1963jp1353995606.jpg
1963년 4대 의혹 사건으로 이른바 '1차 외유'를 떠나는 김종필.
오른쪽은 김재춘이다.

1962년 11월 12일 일본 오히라 마사요시 외상과의 막후 교섭으로 한일협정 성립에 큰 역할을 하였으며, 당시 작성한 일명 '김종필-오히라 메모'[26]는 한일협정의 초안이 된다.

다만 일본 입장에서는 "지나간 일이니 사과할 필요가 없으며 배상금까지 치렀다"고 주장하는 단초가 되며 일본 측의 명확한 사과를 받아내지 못한 점은 지금도 비판받고 있다.

이 시기 서울대학교(김종필의 모교), 고려대학교, 연세대학교, 이화여자대학교, 숙명여자대학교(그의 아내 박영옥의 모교) 등을 찾아다니며 '혁명과 한일회담'에 대해 대학생들과 토론했다.

학생들의 반대 시위, 공화당 내분 등에 정치적 책임을 지고 민주공화당 의장직을 사임한 뒤 또 다시 외유길에 나섰다. 소위 '2차 외유'다. 1964년 6월 18일 출국해 6개월 동안 세상을 돌아다녔다.
파일:external/image.chosun.com/2015012303306_1.jpg파일:김종필 바둑.jpg
1966년 6월 8일 대전 유성만년장호텔에서 청와대 출입기자단과 조찬 기자회견을 하는 박정희와 김종필. 바둑을 두고 있는 김종필. 1968년 6월 2일.

이후 1965년 12월 민주공화당 의장으로 다시 선출되고 1967년 제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재선된다. 같은 해 박정희 대통령도 재선되었고, 제3공화국 헌법은 대통령의 3선을 금지하고 있었으므로, 차기 대통령으로 가장 유력한 사람은 바로 김종필이었다. 그러나 박정희 대통령이 3선 개헌을 추진하면서 박정희와의 사이에 알력이 생기기 시작한 가운데 1968년 5월 '국민복지연구회 사건'이 일어나자, 청구동 자택이 중앙정보부의 감시를 받는다. 1968년 5월 30일 당 의장직과 국회의원직을 비롯한 모든 공직에서 물러나겠다고 선언했다.

1968년 6월 3일 참다 못해 박정희에게 직접 "제가 나세르[27]입니까? 제가 각하의 조카딸과 혼인을 했으니 한 식구 아닙니까? 왜 자꾸 저를 의심하십니까?"라고 들이받으니 박정희가 '그럴 수도 있지 뭐'[28]라고 머쓱해 했다고 한다.

그 후 1969년 7월 박정희의 설득으로 3선 개헌 지지로 입장을 선회했다.

1971년 3월 민주공화당 부총재로 취임하고 1971년 5월 제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공화당 전국구 의원 1번으로 출마, 당선된 데 이어 1971년 6월에는 45세의 나이에 국무총리로 지명된다.

3.2. 제4공화국

박정희는 1972년 10월 유신으로 종신 집권을 기정사실화한다. 김종필은 박정희 정부의 현직 국무총리로서, 그리고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외교 정책 닉슨 독트린에 따른 (주한미군 감축과 철수 준비 등의) 당시의 긴박한 국제정세로 인해 유신을 지지했다고 훗날 밝혔다.

1975년 12월 건강상의 문제를 이유로 국무총리직을 사퇴한다. 사실 이때 김종필은 박정희와 불화가 있었다. 10월 유신 이후 김종필은 지병으로 건강이 안 좋았는데, 오히려 박정희가 김종필의 속내를 의심하면서 정신적으로 압박했다고 한다.

김종필 본인의 말에 의하면 저 당시 끝까지 박정희 곁에 있으면 어떤 식으로든[29] 죽을 것 같다고 호소하며 물러났다고 한다.

이후에는 해외로 돌다가 1978년 민주공화당으로 복귀하여 제1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다시 충남 5 지역구에 출마, 당선되었다. 그리고 1979년 10.26 사태를 맞게 된다.

대한민국 최장 재임(9년 2개월) 대통령비서실장김정렴은 통치 말년의 박정희 전 대통령이 '임기 종료 1년 이내 대통령 유고시 국무총리가 대통령 권한대행이 된다'는 점을 이용해 김종필을 다시 국무총리로 임명 후 물러나겠다는 의사와 헌법을 개정해 김종필을 대통령 후보 및 후계자로 내세워 제대로 된 간선제로 변경해 김영삼, 김대중과 붙여본다는 계획을 자신에게 밝혔다고 증언했다. 대통령 비서실장계의 ‘살아 있는 전설’ 金正濂 다만 김종필 증언록에 따르면 정작 김종필 본인에게는 그런 의사를 밝히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3.3. 제5공화국

이후 김종필은 최규하 대행으로부터 임시 대통령이 되어달라는 부탁을 받았으나 민주 헌법에 따라 직선 대통령이 되겠다는 이유로 통일주체국민회의에 의한 대통령 선거에 불출마했다. 이 시기 김영삼, 김대중과 함께 이른바 '3김'의 한 축으로서 서울의 봄을 구가했으나 12.12 군사반란5.17 내란으로 정권을 장악한 신군부에 의해서 정치 활동을 금지당했다.

신군부는 김종필을 권력형 부정 축재자라는 명목으로 체포한 뒤 보안사 서빙고 분실로 끌고 갔다. 김종필은 일생 동안 신군부에 대해 좋게 평가하지 않았는데, 강제로 일부 재산을 헌납하고 정계 은퇴를 강요당한 뒤 미국에서 은둔 생활을 하였으니 당연하다고도 할 수 있다.

당시 신군부에 의해 고문당했다는 설이 있는데, 김종필 본인은 이를 부인했고 국무총리와 당시 5선 국회의원 겸 집권여당의 총재까지 지낸 초거물이고 3김 시대의 한 축으로 국민적 지지도 상당했던 김종필에게 고문을 가했다간, 당시 군 내부와 기득권층을 겨우 장악한 신군부가 역으로 원성을 크게 살 가능성이 높았기에 실제로도 고문을 받지는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30] 조사 때에도 간부들이 총재님, 총리님, 선배님등의 호칭을 사용했다고.

여담으로 전두환을 나쁘게 평가한 것과는 별개로 노태우에게는 불만이 없었고 오히려 2인자로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 충고해주었다고 한다.[31] 김종필 본인이 박정희 정권의 2인자였으니 노태우와는 공통분모가 있었던 셈이다.
파일:SSI_20180623103459.jpg
삼김의 모습.
왼쪽부터 김종필, 김영삼, 김대중이다.

삼김 중 유일하게 제5공화국 시절에 은둔하면서 아무런 활동을 하지 않은 인물이다. 김영삼은 정계에서 강제 퇴출되자 가택 연금 속에서도 목숨을 건 단식 투쟁을 감행했으며 민주산악회, 민주화추진협의회, 신한민주당을 연달아 조직해서 반독재 민주화 투쟁의 선두에 섰다. 김대중은 신군부의 내란음모 조작으로 사형 선고를 받고 수감 생활을 하다가 미국의 개입으로 해외 망명을 떠나서 재외 동포들과 함께 민주화 투쟁에 앞장섰으며 1985년 2.12 총선 직전 미국 정치인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전격적으로 귀국한 뒤에는 김영삼과 함께 민주화 투쟁을 이끌었다.

반면 김종필은 이 시기에 미국에서 골프나 치면서 유유자적 살았는데 이 시기에 김영삼이 김종필한테 사람을 보내서 1984년 5월에 발족한 민주화추진협의회에 동참해 같이 전두환 정권과 싸우자고 손을 내밀었지만 김종필은 묵묵부답이었다고 한다. 1984년 7월 월터 먼데일 미국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부터 전당대회 참관을 초청받고 미국에 갔을 때 1982년에 석방된 후 역시 미국에서 체류하고 있었던 김대중이 회동을 제안했지만 이 제안 역시 거절했다고 한다.

이 때문에 1986년 2월 25일 김종필이 1년 7개월 만에 미국에서 전격 귀국해서 정계 복귀와 신민주공화당 창당을 선언하자 "남들이 피흘리며 싸울 때는 어디 있다가 이제 와서 무임승차하느냐"는 비판도 상당했다.

만일 김종필이 박정희가 암살될 때까지 국무총리를 계속했거나 박정희가 암살된 이후 통일주체국민회의를 통해 10대 대통령이 되어 12.12 군사반란 당시 최규하의 위치에 있었더라면 전두환의 제5공화국은 오지 않았을 것이라는 것이 중론이다. 김종필은 5.16 군사정변 설계자 및 주요 인물, 중앙정보부 창설 멤버 및 초대 중앙정보부장, 제4공화국 실세 국무총리, 박정희의 친인척 등 정계와 군부에서 모두 무시하지 못할 정치적 위상을 갖추었다. 신군부의 반역 시도에 취약했던 최규하와는 대조적이었다.

3.4. 제6공화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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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대선 포스터[32]
1987년 민주화 이후 현실 정치에 복귀하여 민주공화당의 계승을 표방한 신민주공화당을 창당하였다. 이후 제13대 대통령 선거에서 182만 표를 얻으면서 4위에 올랐다. 당시 구 한국국민당 지지층의 상당수가 대한항공 007편 격추 사건의 여파로 노태우로 쏠려서 손해를 봤다는 평가도 있는데, 이는 민주정의당과 신민주공화당의 노선 차이가 크지 않기 때문이었다. 결국 이것이 그가 대통령 선거에 직접 출마한 유일한 기회가 되었다.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민주공화당이 충청권을 중심으로 수도권에서도 상당한 선전을 보이며 35석을 획득하면서 제4당 총재가 되었다. 당시 여당인 민주정의당은 125석을 획득했고, 야당 스탠스였던 평화민주당과 민주당을 합쳐도 130석 안팎이었기 때문에 캐스팅보트를 쥐면서 중재하는 역할을 맡았다. 하지만 정치 노선의 선명성 부족이라는 한계로 지지율이 지지부진했고, 이에 김종필은 1989년 말 노태우, 김영삼과 비밀리에 의원내각제 개헌을 합의하고 3당 합당에 참여하였다. 김종필의 증언록에서는 의원내각제 개헌에 더해 노태우 정부북방외교를 추진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해서였다고 밝히고 있다.

1992년의 14대 대선에서는 김영삼이 민주자유당 대통령 후보가 되는 것을 지지했고, 문민정부 초기에 민주자유당 대표[33]를 지냈다. 그러나 이후 민주계와의 갈등 끝에 1995년 민주자유당을 탈당[34]하여 자유민주연합을 창당하였다. 자유민주연합은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대전광역시, 충청남도, 충청북도, 강원도 4곳의 광역지방자치단체장을 당선시키며 선전하고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50석의 역대 최다 의석 3당으로 올라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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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12월 제31대 국무총리 시절[35]
제15대 대통령 선거에서 2년 후 내각제 개헌을 조건으로 김대중과 연합했으며, 이를 두 사람의 약칭인 DJ와 JP에서 따와 DJP연합이라 부른다.[36] DJP연합의 성공으로 김대중은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김종필은 국민의 정부국무총리직에 오르며 공동 정부의 한 축을 맡았다. 국무총리직을 수행하면서 경제비상대책회의를 주재하고 초기 국민의 정부의 재무부장관을 비롯해서 경제팀을 김종필이 꾸려서[37] 1997년 외환 위기 조기 극복에 기여했으며, 당시 DJP연합에 따라서 경제 부처를 포함해 내각의 절반은 자민련의 몫이었다. 그러나 집권 후 2년 이내 내각제 개헌을 약속하며 시작했던 DJP연합은 1999년부터 흔들리기 시작한다. 내각제 개헌 이행 유무와 햇볕정책에 대한 의견 차이로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 선거새천년민주당과 자민련의 후보 연합 공천이 무산되고 전국 대부분의 지역구에 두 정당이 동시에 후보를 내보낸다.

결국 자민련은 비충청권 지역에서 보수표를 모조리 한나라당에게 뺏기면서 사실상 군소 정당으로 전락했고, 충청권에서도 민주당, 한나라당과 박빙의 승부를 보이면서 기존 50석에서 1/3 수준으로 줄어든 17석 확보에 그쳐 원내교섭단체 구성에 실패하였다. 그나마 제16대 국회의원 선거 직후 DJP연합의 복원을 희망하는 김대중 대통령이 자당 의원을 자민련으로 보내는 '의원 꿔주기'로 원내교섭단체를 구성할 수 있게 되었으며, 자민련 소속 이한동 의원[38]을 국무총리로 임명해서 연립 정부는 간신히 이어졌다. 하지만 민주당과 자민련을 합쳐도 원내 과반수에 미달하자 2석을 차지한 민주국민당에까지 손을 내밀어 민주국민당 한승수 의원[39]외교부장관으로 임명하면서 3당 연합으로 간신히 원내 과반수를 채웠다. 그러나 한나라당의 133석 획득으로 인해 연립 정부의 내각제 개헌은 무산되었고, 햇볕정책으로 대변되는 대북 유화책과 관련해 시각차를 보이면서 자민련이 2001년 임동원 통일부장관 해임안에 가담해 DJP연합은 최종적으로 무너졌다. 따라서 자민련에 임대되었던 의원들은 민주당으로 당연히 복당했으며 자민련 소속 장관들은 사퇴해야 했다.[40]

제16대 국회의원 선거 3개월 뒤인 2000년 7월 22일, 김종필은 경기도 용인의 은화삼 컨트리 클럽에서 이회창 한나라당 총재를 만났다. 김종필은 이날 폭우로 골프가 취소된 뒤 회동에서 이회창에게 원내교섭단체 정족수를 20명에서 17명으로 완화해줄 것을 요청했지만, 이회창은 대변인을 통해 단둘이 앉은 시간은 30초에 불과하며 그런 이야기는 없었다고 부인해 논란이 됐다. 매번 대선 때마다 킹메이커로 영향력을 과시하던 김종필이었지만 2002년 제16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는 이미 고령의 나이에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 선거 참패 등 세력이 크게 위축된 상태였기 때문에 출마는커녕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하고[41] 자신의 지지 기반이던 충청권이 행정수도 이전 공약을 내세운 노무현 후보와 선영이 충청남도 예산에 있다는 지역 연고를 내세운 이회창 후보로 양분되는 상황을 구경만 해야 했다. 선거를 앞두고 같은 보수 성향의 이회창을 지지할 것이라는 이야기가 흘러나오기도 했지만, 결국 어느 쪽도 지지하지 않은 채 사실상 중립을 선언해 버렸다.[42]

이 때문에 김종필은 이회창에 대한 감정이 안 좋았으며, 이회창은 정계 입문 후부터 줄곧 '3김 정치'의 청산을 외쳐왔기 때문에 그런 이회창이 김종필과 손을 잡는다는 것은 모순일 수밖에 없었다. 물론 이회창의 이러한 경직된 정치적 행보는 그의 발목을 잡기도 했으며, 이래저래 김종필이 공개적으로 이회창을 지지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43]

참여정부 탄생 이후 노무현계는 열린우리당이라는 신당을 창당해 독립해 나온 상태였고 노무현 대통령도 민주당을 탈당한 상태였다. 그 와중에 한나라당, 민주당, 자민련이 힘을 합쳐 2004년 노무현 대통령 탄핵소추 및 심판을 일으키는 최악의 선택을 저지르게 된다. 그러나 '니들이 뭔데 우리가 뽑은 대통령을 니들 맘대로 자르려고 하냐?'는 심리가 국민들에게 들불처럼 번져나갔고 탄핵에 앞장섰던 3개 정당은 엄청난 역풍을 맞고 말았다. 사실 김종필은 탄핵에 반대했는데, 처음부터 탄핵 반대를 자민련의 당론으로 내걸었지만 한나라당과 민주당의 강력한 주장에 밀려서 결국 자민련 의원들의 탄핵 찬성 투표를 막지는 않았으며 김종필 본인은 탄핵안 표결에 불참하였다. 이후 총선에서 탄핵 역풍이 불자 김종필은 탄핵의 책임은 대통령과 여야 모두에게 있다며 자신은 탄핵안 투표에 참여하지 않았다며 책임론을 비켜갔다.

그러나 이미 2000년 총선으로 비충청권 지역에서는 모든 지지 기반을 상실한 상태였고, 제16대 대통령 선거를 거치면서 인물이나 정책 그 무엇도 새로 내보일 힘을 잃은 김종필은 이제 믿을 건 충청권 지역 감정뿐이라는 판단이었는지 연일 대전과 충남권을 순회하면서 지지를 호소하였고 본인은 비례대표 1번으로 출마하였다.[44] 하지만 탄핵 역풍 속에서 치러진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열린우리당은 국회 전체 의석 299석 중 152석을 얻어 원내 제1당으로 껑충 뛰어올랐고, 한나라당은 천막 당사를 치고 지지를 호소하면서 간신히 121석을 얻어 나름 선방했지만 자민련의 선거 결과는 비참했다. 지역구는 충청남도에서만 간신히 4명 당선, 정당 득표 2.8%에 지역구 4석으로 정당 득표 3% 혹은 지역구 5석이라는 비례대표 의석 배분 기준에 불과 0.2%p 차로 아슬아슬하게 미달해서 비례대표 전원이 낙선하면서[45] 사상 첫 10선을 노리던 김종필의 꿈도 물거품이 되었다. 이에 김종필은 정계 은퇴를 선언하고[46] 40년이 넘는 현실 정치 인생에 종지부를 찍는다.

3김의 하나인 김종필의 이름값을 생각하면 그의 마지막은 비참했는데, 이미 모든 정당이 여성표를 노리고 비례대표 후보 1번에 여성을 배정하는 상황에서[47] 거물인 김종필이 여성의 몫인 1번으로 등록된 것 자체가 자신의 처지와 당의 불안정성, 개인의 의원직에 대한 노욕을 만천하에 공개하는 무리수나 다름없었다. 차라리 초심으로 돌아가겠다며 지역구 출마를 했으면 훨씬 나았을 것이다. 일단 김종필 자체가 이름값만으로도 막대한 집표력을 기대할 수 있는 정치적 거물인데다, 당시 자민련이 충남에서 4석의 지역구 당선자는 배출했음을 생각한다면 자민련의 세력이 강한 지역구 하나를 골라서 여차하면 그 지역구 후보를 뽑아내고 출마하기라도 했다면[48] 당선되었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었다는 것. 물론 모양새가 몹시 빠지는 모습이기는 하지만 다른 당들은 비례대표 상위 순번을 여성이나 장애인 등에게 배려 차원에서 배분하는 상황에서 비례대표 1번을 직접 타고 앉는 것에 비하면 별로 추할 것도 없다. 이 점에 대해서는 김종필 및 그 참모들에게 제17대 국회의원 선거부터 변화한 선거 제도에 대한 이해나 연구가 부족했던 것이 아니냐는 분석도 있으니 참고할 것.[49]

정계 은퇴를 선언한 이후로는 자민련을 탈당해 무소속이 되며 정계와는 거리를 두었는데, 여러 보수 정치인들이 김종필의 청구동 자택을 찾아왔고 김종필은 정치인들에게 조언을 해주었다. 2007년 제17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이명박 후보를 지지하면서 한나라당에 입당 후 명예 상임고문 자리에 올랐는데, 한나라당에 입당한 후 2008년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에 비례대표로 출마해 10선에 도전할 것이라는 소문도 있었으나 실제로 이뤄지지는 않았다. 2008년 연말 뇌출혈로 쓰러진 이후 와병하던 시절에는 잠시 정치인들의 방문을 받지 않았다가 건강을 회복한 이후에는 다시 방문객들을 맞았다. 이후에도 한나라당 명예 고문직을 유지하다가 박근혜가 당권을 잡은 뒤 새누리당으로 개명한 2012년 초 다시 탈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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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5월 '자랑스러운 육사인상 시상식'
시상자 대표로 연설하는 모습
2016년 들어서 대권을 준비 중인 반기문이 외교 행낭을 통해 편지를 보냈고, 김종필은 “내가 비록 힘은 없지만 마지막으로 혼신의 힘을 다해 돕겠다”라고 화답했다고 한다.

4. 삼김시대의 종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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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정
나이 90세에 생각해보니 89세까지가 헛된 인생이었구나.
김종필 본인이 직접 쓴 묘비명이다.
2018년 6월 23일 오전 8시 15분 서울특별시 용산구 한남동 순천향대학교 부속 서울병원 이송 중 향년 92세로 사망[50]했다. 이날 아침 신당동 자택에서 호흡 곤란으로 순천향대학교병원으로 이송 중 심정지했으며 응급실 도착 후에도 심폐소생술을 지속했으나 사망했다. 마지막 1개월 동안 소화를 못해 곡기를 못하고 링거로 연명하는 상태였다. 나폴레옹에 대한 존경이나 동경을 젊은 시절부터 종종 입에 올렸는데 죽기 1달 전 최후를 예감한 듯 나폴레옹의 유언[51]을 되뇌었다고 한다. 청와대는 한국 현대 정치사에 남긴 고인의 손때와 족적은 쉽게 지워지지 않을 것이라면서 애도를 표했다. 문재인 대통령의 명의로 조화를 보냈으며 이낙연 국무총리가 직접 조문왔는데 여야 모두 애도의 뜻을 표했다. 장례는 고인의 뜻대로 가족장으로 치러지며 유해는 2018년 6월 27일 발인해서 화장 절차를 거쳐[52] 김종필의 고향인 충남 부여에 있는 김해 김씨 선산에 안장되었다. 사실 국립현충원에 안장될 자격이 있었으나 아내와 함께 김해 김씨 선산에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겼기 때문이다.[53] 장례식에는 사회의 각계에서 참석했는데 구속 재판 중인 이명박 전 대통령은 자신의 명의로 조화를 보냈으나 정작 사촌처제인 박근혜 전 대통령은 보내지 않았고 박지만, 서향희 내외와 박근령은 직접 조문했으며 박근혜의 이복언니인 박재옥[54]은 참석하지 않았다.

이렇게 2009년 김대중, 2015년 김영삼에 이어서 2018년 가장 오래 생존하였던 김종필까지도 사망하면서 3김(金) 시대는 종언을 고하며 대한민국 현대사의 한 페이지로 남게 되었다. 3김 시대는 1961년 5.16 군사정변부터 2004년 노무현 대통령 탄핵 소추안까지 40년 넘게 직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했고, 김종필까지 사망한 2018년 시점에서도 기성 정치인들은 '3김'에게 어떤 형태로든 영향을 받았다.

2024년 현재 기준으로 YS 직계인 상도동계 중에서는 막내 그룹으로서 아직 현역으로 뛰고 있는 정치인이 일부 남아 있으며, DJ의 동교동계는 아예 박지원, 추미애, 정동영 등이 22대 현역 의원이나 JP 직계는 정진석 전 국회부의장조차 24년 총선에서 낙선하는 등 대부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55]


[1] 의열단 단원 유석현 등 독립운동가들을 숨겨주기도 했다.[2] 참고로 김종필의 할아버지는 쌀 2000섬 지기의 부자에 철종선릉참봉을 지내기도 했다.[3] 21세기에 청소년기를 보내는 학생들의 관점에서는 연애소설을 본다고 두들겨 맞았다는 게 어이가 없겠지만, 알다시피 당시 한국은 보수적인 문화가 지배적이던 일제강점기였다. 여담으로 1970년대까지만 해도 학생이 극장에 가면 교사에게 크게 혼났었다. 저 시대엔 연애소설이 일종의 성인소설 대우를 받았다고 보면 된다. 일본 제국만 유별난게 아니라 조선시대에도 문체반정이 일어날 정도였다.[4] 일본은 식민지 조선과 일본 본토의 교육 과정에 차등을 두어 식민지 조선인이 엘리트 계층으로 진출하는 것을 근본적으로 틀어막았다. 일본에 있는 구제고등학교를 나오지 않으면 전문학교를 졸업해도 조선인은 본토 기준으로는 중졸이었다. 연희전문학교, 보성전문학교 역시 이름만 전문학교였지 '각급 학교'로 취급되었다. 따라서 조선인은 일반 대학에 설치된 예과 과정을 밟아야만 제대로 대학교에 들어갈 수 있었다. 유독 일제강점기 시절 유학생들의 출신이 ㅇㅇ대학교 전문부/예과가 많은 것이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5] 이유를 따지자면 일본 제국은 조선인이 완벽히 일본에 동화될 때까지는 징병할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 조선인에게는 일본인과 같은 병역 의무가 없었다가 일본이 본격적으로 총력전 체제에 돌입한 1938년 이후 인력 부족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제한적으로 지원병제가 실시되었고 본격적으로 징병제를 실시한건 1943년 중반 이후다. 일본 해군은 끝까지 조선인을 받지 않다가 패전 직전에 그나마도 함선 근무는 절대 시키지 않고 가미카제로 쓸 항공대와 육전대에서만 제한적으로 받았을 정도였다.[6] 증언록에 의하면 사탕 하나 구하기 힘든 일제강점기 말기였는데 어머니의 권유로 인해 곶감 한 박스를 들고 교감 집에 찾아갔더니 전혀 나오지 않던 교감의 부인이 김종필이 곶감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안 뒤 친절하게 나왔다고 한다. 김종필은 이에 발끈하여 곶감을 주지 않고 갔다고 하는데 교감이 이에 대해 염치없다고 조회 시간에 호출시켜 주먹을 날렸다.[7]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사회교육과. 당시에는 대학은 아니었고 중등학교에서 전문학교로 격상했을 때다.[8] 그레고리 헨더슨은 하버드 대학교를 졸업한 뒤, 미국 연방정부의 공무원으로 임용됐다. 미군정 시기에 한국에 부임하여 한국의 미군정청과 주한미국대사관에서 문정관(文政官)으로 근무했고, 한국 전쟁 이후에 한국에 다시 주한미국대사관에 부임하여 근무했을 정도로 미국 내의 손꼽히는 한국 전문가였다. 대사관 직원으로 근무하면서 SCC(Student Cultural Club)라는 영어 교육 단체를 조직하여 서울 시내의 명문 고등학생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며 공보 활동을 하기도 하였다. 60년대 초, 당시 <합동통신>의 리영희 기자가 "미국이 추가 원조를 박정희의 군정 연장과 연계해 보류하고 있다"는 특종을 보도한 적이 있었는데, 이 기사의 발설자가 바로 헨더슨이었다. 이후 박정희 정권이 강력하게 반발하자 미국 국무부는 헨더슨에게 '본국 송환 명령'을 전달했고, 그는 주한미국대사관 외교관직에서도 물러났다. 그는 이후 하버드 대학교 동아시아 연구 센터 연구원, 터프츠 대학교 플레처 스쿨 교수 등으로 근무하며 지속적으로 한국 정치 연구 활동을 하였다, 특히 그가 집필한 '소용돌이의 한국정치(Korea: The Politics of the Vortex, Harvard University Press, 1968)'라는 제목의 한국 정치 분석서는 이후 미국 정계 및 학계의 한국 관련 연구자들에게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이 책은 이후 국내에도 번역 출판되었는데, 국내판에는 생전에 그가 한국어판 발간에 대비하여 꾸준히 기록해 놓은 80년대 말 민주화 시기의 한국 정치상황 분석까지 포함하여 수록됐다.[9] '군사정부 내에서의 공산주의자 영향력에 관한 테제'라는 제목의 비밀 보고서인데, 1962년에 5.16 쿠데타 핵심세력과 관련되는 주변 인물들에 대한 비밀 인터뷰 작업을 통하여 1963년 초에 작성된 것으로 추측된다. 이 보고서는 서울대학교 국제대학원 박태균 교수가 미국 국립 문서 보관소에 가서 비밀해제된 문서 더미 속에서 찾아냈던 것인데, 2001년에 최초로 세상에 공개됐다. 당시 나름 정치적 이슈가 되었던지, 자민련 내에서 김종필의 좌익 전력 관련 내용에 대해 상당히 당황하여 항의 성명을 내기도 했었다.#, #[10] 1945년 해방 이후부터 1949년까지 대한민국은 모병제 체제였다. 징병제는 1949년에서야 도입되었다.[11] 문명자의 해당 회고는 월간 말의 1997년 10월호(통권 136호)에 먼저 실렸고, 이후 1999년에 '내가 본 박정희와 김대중: 워싱턴에서 벌어진 일들'이라는 제목의 단행본으로 엮여 출판되었다.[12] "그를 두 번이나 쫒아냈다"는 표현은 두번에 걸친 김종필의 외유를 의미하는 것이다. 김종필은 1963년에 4대 의혹 사건으로 인한 '1차 외유'를, 1964년에 6.3 항쟁으로 인한 '2차 외유'를 떠났다. 세간의 유행어가 된 '자의 반, 타의 반'이라는 표현은 1차 외유 때 김종필이 "이번 여행은 나의 희망 반, 외부의 권유 반으로 떠나게 되는 것이오"라고 했던 것이 신문 기사로 옮겨지면서 나온 말이었다.[13] 김종필에게 안긴 아기는 딸인 김예리이며 오른쪽 여성은 아내 박영옥이다.[14] 증언록에 의하면 총이 없어서 손으로만 훈련했다고 하며 독립한지 얼마 안 된 탓인지 일본식 훈련을 받았다고 한다.[15] 1913년부터 1999년까지 존재했던 극장. 현 을지로4가역 옆에 있는 베스트웨스턴 호텔국도 자리에 있었다.[16] 1980년대 초 정보 병과가 분리되기 전까지 육군 정보 병과는 별도의 병과가 아닌 보병 병과의 세부 특기였다.[17] 그곳에는 훗날 쿠데타와 관련되는 정보국장 장도영, 전투정보과장 이후락, 정보국 선임하사 박종규 등도 있었다.[18] 일명 '대한음주당'이라는 주당들 모임을 결성하여 틈만 나면 모여서 친목을 다질 정도였다. 박정희가 대통령이 된 직후 수도방위사령관은 육군사관학교 8기생들끼리 물려받았다고 한다. 대표적으로 윤필용, 진종채(전 2군사령관), 차규헌(전 2군사령관), 전성각(전 3군단장)[19] 사실 박정희는 측근들을 대부분 임자라고 불렀지만, 김종필만은 더욱 특별하게 생각했다. 자신의 가신 그룹 중 유일한 친인척 관계의 인물이었기 때문. 어쨌든 이러한 이러한 특수한 친인척 관계 때문에 5.16 쿠데타 이후 박정희 정권에 걸쳐 벌어진 4대 의혹 사건, 3선 개헌, 유신 독재 등의 무리한 일들을 비롯하여 박정희로부터 받은 무수한 정치적 의심 등에도 불구하고 김종필이 박정희를 거역하거나 곁을 떠날 수 없었다는 해석이 많다.[20] 이후 전투정보과장은 6.25 전쟁이 발발할 때까지 공석으로 남아 있었다. 전쟁이 터졌을 때 그렇지 않아도 부실하기 짝이 없던 한국군 전력에 가장 핵심 부서의 장마저 부재 중이니 한국군의 초기 전황은 잘 돌아갈 리가 없었다. 이후 육군본부가 경기도 수원으로 이동한 뒤 소령으로 복직한 박정희가 과장으로 임명되었다.[21] 이후 기적적으로 생환한 요원들도 있었지만 적에게 포로로 잡혔거나 최악의 경우 교전이 붙어 전사한 것인지 휴전 이후에도 나타나지 않은 요원들도 있었다.[22] 참모총장총참모장이란 명칭으로 소장, 중장이 보임되던 시절이라 육군본부의 참모부는 국으로 하위 편제되어 있었다.[23] 일단 중앙정보부 창설 당시 핵심 인력들이 경찰에서 차출한 대공 수사관 300여 명이었다. 과거 미군정제1공화국에서 좌익계 조직, 노조, 농민 단체를 때려잡던 사람들이었다.[24] 주로 대통령전권특사 직함을 달고 몇달씩 해외 미수교국들을 돌면서 수교협상을 전담했다. 마침 이때는 남북간에 국제외교전이 아주 치열할 때라서 최대한 많은 숫자의 수교국을 확보하는 게 중요하기도 했다.[25] 이후 민주공화당에 입당하여 정치가로 전직하고 국회의장까지 지냈다.[26] '무상 3억 달러, 유상(대외협력기금에서) 2억 달러, 수출입은행에서 1억 달러+알파를 제공한다.' 이 메모의 6억 달러+알파는 1965년 한일 양국 외무부 간 최종 타결 과정에서 8억 달러로 조정됐다.[27] 이집트의 대통령 나세르, 본인도 선임자인 무함마드 나기브와 같이 쿠테타를 일으킨 주역이었으나 훗날 자신의 상관인 나기브까지 쿠테타로 몰아내어 집권한다.[28] '네가 나세르처럼 그럴 수도 있는 것 아니냐' 그리고 '그러니 내가 너를 그렇게 대할 수 있는 것 아니냐'의 중의적 의미.[29] 기어이 박정희가 자신을 숙청하건, 아니면 자신이 지병으로 먼저 골로 가건.[30] 애초에 신군부는 김종필은 고사하고 김영삼이나 김대중도 함부로 건들지 못했다. 당장 4공화국 시절 있었던 김대중 납치 사건은 미국과 일본을 자극해 외교 문제로 번져 정권이 곤욕을 치렀고 김영삼 제명 사건은 PK 민심을 자극해 부마항쟁으로 번져 박정희 정권을 쓰러지게 한 도화선으로 평가받는다. 훗날 5공화국에서도 삼김 중 가장 많이 당한 김대중도 투옥 중 미국의 압력으로 2년여 만에 풀어줄 수밖에 없었으며 김영삼은 양김의 결집을 우려해 아예 감옥조차 보내지 못하고 가택연금이 최대였다.[31] 당시 노태우를 만난 자리에서 "보아하니 당신이 2인자 같은데 억울한 일이 있어도 참고 넘겨야 한다. 참는다는 것은 참을 수 있는 것을 참는게 아니라 참을 수 없는 것을 참는게 진정한 인내다."라는 조언을 했다고 한다.[32] 이 선거에는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 등이 출마했다. 이 선거에서는 노태우가 당선되었고 군소 후보를 제외한 유력 후보들 중에서는 김종필만 대통령이 되지 못했다.[33] 총재급 위상을 가진 대표로, 문민정부 초반에는 사실상 실세이자 어느 정도 정권 지분을 가졌다.[34] 당시 민주자유당 주류에서는 '세계화를 위해 김종필을 비롯한 구세대 정치인들이 나가야 한다.'라는 논리를 들어 탈당을 주장했다고 한다.[35] KBSTV는 사랑을 싣고》에 출연했을 때의 모습이다. 영상[36] 나중에 민주자유당 시절 민정계의 수장이었던 박태준이 가세하면서 'DJT 연합'으로도 불렸다. 박태준이 합류하면서 당시 혁의에 따라 박태준은 자민련 총재직에 오르게 된다.[37] 이회창 라인이던 이헌재를 데려온 인물이 김종필의 심복이었던 김용환이다.[38] 사실 이한동은 이회창과 갈등을 빚고 한나라당을 나간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자민련 총재 겸 총리로 영입되었다.[39] 문민정부 시절 부총리(재정경제원 장관)를 지냈었다.[40] 하지만 당시 총리였던 이한동은 내각 잔류를 택했고 결국 당에서 제명되었다.[41] 2002년 1월 출마 선언을 했으나 얼마 안 가 불출마 선언을 하며 흐지부지되었다.[42] 사실 정치적 스탠스만 놓고 보면 누구를 지지할 것인가가 명확했다.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 직후와 1997년 제15대 대통령 선거 직전까지 자민련의 여러 인사들이 신한국당으로 이적하기도 했고, 2002년 봄에 이원종 당시 충청북도지사가 자민련을 탈당한 뒤 한나라당에 입당하기도 했다.[43] 2005년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는 2000년 이회창에게 20석 이하의 자민련도 교섭단체 지위를 가질 수 있게 해주겠다는 약속을 받았으나 나중에는 그런 말을 한 적도 없다는 거짓말을 했고, 이 때문에 그를 믿을 수 없다는 이유로 지지하지 않았다고 밝혔다.[44] 9선 국회의원과 최장수 총리를 지낸 김종필씩이나 되는 거물이 여성 몫으로 가야 할 비례대표 1번을 셀프 공천한 것은 노욕이라는 비판이 많았다. 득표율 3%를 조금이라도 넘기면 어차피 최소 2명은 당선되니 2번으로 들어가도 됐는데 말이다.[45] 덕분에 당시 민주노동당에 비례대표 의석 1석이 돌아갔고 민주노동당 비례 8번이었던 노회찬이 국회에 입성할 수 있었다.[46] 기자회견 당시 기자들에게 '정치에서 완전히 물러나겠다고 확정된 것은 아니다'라고 번복의 여지를 두려는 비서를 제지하고 '은퇴한다'고 단언했다.[47] 한나라당 1번 - 김애실(여성경제학자), 새천년민주당 1번 - 손봉숙(여성운동가), 열린우리당 1번 - 장향숙(여성장애인), 민주노동당 1번 - 심상정(여성노동운동가). 그 외에도 3번, 5번, 7번, 9번 등 자민련을 제외한 모든 정당들이 홀수 번호에 예외없이 여성을 배정하였다.[48] 3김의 1명이었던 김종필의 정치적 위세를 생각하면 이 정도 수준의 당 장악력은 있었을 것이다.[49] 이전까지의 총선에서는 전국의 지역구 합계 득표율을 기준으로 비례대표 의석을 배분하던 것과는 달리 제17대 국회의원 선거부터는 지역구 투표와 별개로 정당 투표를 통해 비례대표 의석을 배분하게 되었다. 문제는 이전까지의 전국구 제도에서는 어쨌건 자민련 후보에게 투표한 지역구들의 표를 끌어모아서 비례대표 당선이 가능했으나, 이 선거부터는 자민련 자체에 지지 의사를 보이는 표가 없으면 비례대표로 당선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이는 김종필 개인의 정치적 지명도가 여전히 막대했던 것과는 달리 자민련의 정당 지지세가 거의 와해되어 가던 당시 상황에서는 몹시 어리석은 선택(3김 중 하나였던 김종필인 만큼 지역구에서 나오면 '아는 사람, 유명한 사람 뽑는다'는 기분으로 김종필을 찍을 사람이 있더라도 당시 몰락해가던 자유민주연합 자체에 표를 줄 사람은 기대하기 힘들었다는 것이다.)이었다고 보기도 한다.[50] 의료 용어로는 DOA(Death on arrival)라고 한다.[51] 떨어지는 별...조세핀...프랑스의 영광스러운 군대[52] 앞서 별세한 아내 또한 화장 절차를 거쳐 안장됐다.[53] 20년간 함께한 배우자는 합장할 수 있는 규정이 있어 본인이 원하면 현충원에 합장될 수 있었다. 현재도 유족의 요청만 있으면 언제든지 안장이 가능하지만 본인이 봐둔 곳에 들어가고 싶어했다고 한다.[54] 이쪽은 김종필이 사망한 지 2년 뒤인 2020년에 노환으로 사망했다.[55] 청구동계나 자민련 출신 정치인들은 여럿 남아있긴 하다. 대표적으로 정우택 국회부의장이 자민련 - 청구동계 출신이며 김태흠 충청남도지사도 JP의 청년 조직에 몸담으며 정치인 생활을 시작했다. 다만 JP 직계로서 아버지 대부터 대를 이어 JP와 함께한 정진석과는 다르게 정우택 부의장은 통일국민당에서 정치를 시작한 데다 지역기반도 충남이 아닌 충북이라서 직계라고 보기에는 조금 무리가 있고 김태흠 충남지사 역시 김용환 전 재무장관을 따라다닌 사람이라 JP와 김용환의 사이가 틀어진 후에는 김용환을 따라 한나라당 계열에 꾸준히 몸담아왔기에 오히려 구 자민련 계열과는 사이가 썩 좋지 못한 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