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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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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에트 민정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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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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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기 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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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10월 3일 ~ 1946년 2월 15일
(135일)
성립 이전 해체 이후
조선인민공화국 북조선인민위원회
<colbgcolor=#CC0000><colcolor=#f3c700> 위치 조선반도 38도선 이북과 부속 도서[1]
정치 체제 군정
언어 조선어, 러시아어
종교 국가무신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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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國歌)
소련 국가
민정청
민정장관
이반 치스차코프(1945년 10월 3일 ~ 194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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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역사
2.1. 종결
3. 관련 인물4.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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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파일:스탈린김일성초상화행진.jpg
스탈린과 김일성의 초상화, 그리고 태극기를 들고 행진하는 북한 주민들[3]
소비에트 민정청(Soviet ) 또는 소련군정()은 8.15 광복 이후, 한반도삼팔선 이북을 점령한 소련 육군이 실시한 군정이다. 사실상 이 기간에 북한 정권이 수립되었다.

이반 치스차코프는 처음 포고문을 1945년 8월 24일 함흥에서 발표했다. 이는 함흥이 소련군이 가장 먼저 해방시킨 함경도 지역 중심 도시였을 뿐 아니라 일제강점기 말기 육성된 대표적인 공업도시여서 일본 열도를 제외하고 동아시아에서 가장 산업화율이 높은 도시였기 때문이다. 일각에서는 소련군이 한반도 북부 중심지가 평양이라는 사실도 몰랐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학계에서 보편적으로 인정받는 주장은 아니다. 치스차코프도 2일 만인 26일 평양으로 이동해서 소련군 열병식과 소련군 환영 주민 대회를 열고 연설했다.

소련군이 조선으로 진격한 이유는 동아시아 패권 확립에 있었다.[4] 만주 전략 공세 작전 당시 만주국을 비롯, 만주 지역 내 일본군 세력 괴멸이 소련군의 목표였다. 여기서 일본군 세력은 당연히 만주국 실질적 통치 주체나 다름없는 관동군이었다. 1945년 전쟁이 막바지로 치달으면서, 일본은 한반도 북위 38도선 이북을 관동군 위수지역으로 설정했고, 그 이남을 육군 17방면군 위수지역으로 변경했다. 소련군의 주력은 소련-만주 국경을 돌파하며 만주의 종심을 찔렀으나, 다른 한편으로 관동군의 위수지역인 조선 북부를 찔렀다. 이 과정에서 웅기, 나남소련 육군이 점령했다. 나남을 점령한 것은 소련 해군해군 육전대였다.

당장 김무정을 비롯한 중국공산당 내 조선인 연안파가 이제는 조선을 해방시키라는 린뱌오의 지시에 따라 조선의용군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려 했으나 소련군에 의해 저지당하기도 했다.[5] 이들은 결국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마찬가지로 개인 자격으로 귀국한다.[6]

보통 미군정과 더불어 소군정이라고 부르지만, 당시 소련 입장에선 공식적으로는 민정, 즉 민간 정부로 칭했다. 소련은 종전 후 독일 같은 추축국 본토에만 '군정'이란 말을 썼고, 추축국에 점령됐다 해방시킨 지역(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한반도 38선 이북 등)에서는 '민정'이란 말을 썼다. 단 명칭만 다르게 한 것이고 소련군의 한반도 북부 통치는 실질적으로는 군정이나 마찬가지 체제였다.

2. 역사

파일:조만식 치스차코프.jpg
1945년 8월 26일 평양에 도착한 소련 제25군 사령관 치스차코프 대장이 일본군 평양사관 사령관 다케시타 요시하루 중장을 숙소인 철도호텔로 불러 항복을 받는 장면[7]
1945년 8월, 만주 작전으로 일본군을 무찌르고 청진 등의 북한 지역에 진입한 소련군은 8월 말경에는 북한 전역을 장악하였다. 1945년 8월 26일, 소련 연해주군관구 제25군 사령관 치스차코프 대장은 "조선인민들이여, 그대들은 독립과 자유를 회복했다. 이제 그대들의 행복은 바로 당신들 손에 달려 있다"고 언명했다. 또한 소련군정은 미군정처럼 직접 통치가 아닌 간접 통치를 표방하며 각지에 세워진 조선건국준비위원회 지부와 인민위원회를 인정하였다. 이 점을 들어 "소군정이 미군정보다 나았다!"는 주장도 있으나[8] 소련의 목표는 자생적인 반일 성향 단체들의 연합을 기초로 한 민주주의 정권을 확립한 뒤, 최종적으로 친소련 성향의 공산주의 정권을 수립하는 데에 목적이 있었다. 마침 건준이 한반도 전역에 뿌리를 가지기도 하였고 좌익 성향을 띄고 있었으므로 건준을 인정한 것. 실제로 이러한 방식으로 2차 대전 후 동유럽에 소련군이 공산주의 정권을 세웠다. 소련군은 군정 초기에는 38선 이북 지역의 중심지였던 평양에서 가장 명망 있는 민족주의자였던 조만식을 주요 협력대상으로 여기고 그와 협력하는 모습을 보였다. 조만식은 평남건국준비위원회를 개편한 평남인민정치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다. 부위원장은 평안도 지역의 토착 공산주의자 현준혁이 맡았으나 그는 1945년 9월 3일 암살당한다.

소련 군정 내내 북한 지역에서는 소련군에 의한 강간, 폭행, 약탈이 끊이지 않았다. 소련군 중령 페트로프는 소련군이 1945년 8월부터 이후 5개월간 북한지역에서 벌인 행태를 기록했는데, 12월 29일 작성된 해당 문서에는 "우리 군인(소련군)의 비도덕적인 작태는 실로 끔찍한 수준이다. 사병 장교 할 것 없이 매일 곳곳에서 약탈과 폭력을 일삼고 비행(非行)을 자행하는 것은 (그렇게 해도) 별다른 처벌을 받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전제하면서 "우리 부대가 배치된 시나 군 어디서나 밤에 총소리가 끊이지 않고 있다", "특히 술에 취해 행패를 부리고 부녀자를 겁탈하는 범죄도 만연해 있다"고 지적했다.#[9]

치스차코프는 이에 대항하는 조선인들이 폭동을 일으킨다면 "조선인의 절반을 교수형에 처하겠다"는 극언을 서슴치 않았다. 뿐만 아니라 소련군 사단장인 드미트리예프 대령은 "조선인은 이미 35년간 노예생활을 했다. 좀 더 노예생활을 지속해도 괜찮지 않은가?"라는 폭언을 하기도 했다. 6.25 전쟁 당시 유엔군이 노획한 문서 가운데는 이른바 '체포인 명부'도 존재한다. 소련군에 대항하다 체포된 이들의 명단인데, '쏘군 감옥 이송'으로 표기된 이들의 행방에 대해선 지금까지도 알 길이 없다. 그런데 '쏘군 감옥 이송'으로 표기된 사람들이 한 둘이 아니라는 것...

소련군의 만행은 조선인뿐 아니라 식민지 일본인에게도 공포의 대상이었다. 특히 일본인에게 가해진 폭력의 수위는 일제의 탄압을 받았던 식민지 조선인조차 경악할 지경이라, 일부 북한 지역에서는 조선인 치안대가 소련군을 말리다 되레 구타를 당하기도 했다. 하지만 북한 지역에서 살다가 일제가 패망하자 일본 본토로 돌아간 일본인들의 증언을 담은 책 <조선을 떠나며>에서는 오히려 현지 조선인들이 소련군에 협조해서 일본인들을 대상으로 한 폭력과 약탈에 적극 가담했다고 언급된다. 특히 조선 독립운동을 탄압했던 일본인 경찰이나 판사들은 조선인들에게 붙잡혀 소련군이 주도한 재판에 넘겨져서 징역 10년 형을 받고 시베리아로 끌려갔다. 그러나 당시 북한 지역의 정치상황은 단일한 것이 아니어서, 소련군이 자신을 해치는 것에는 심하게 저항하고#, 특히 공산당원이 아닌 경우 불만을 드러내는 경우가 많았다. 공산당원이 소련의 환심을 사려고 한다는 것이다. 소작농은 차라리 일본이 덜 가져갔다는 식의 불만이 있었다고 페토로프가 기록을 하는 일도 있었다. # 박완서의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에는 미군이 잠시 자신의 마을에 주둔하다가 소련군이 주둔하였을 때 내놓으라는 뜻의 러시아어 '다와이'라는 말이 회자될 정도로 흉흉하였다고 묘사하기도 하였다.

다만 경제정책과 행정능력에 있어서는 소군정이 미군정보다 훨씬 유능했다. 이유인 즉슨, 미군정이 인민위원회와 건준을 해산시키며 기존 총독부 하에 일하던 경찰을 등용하였고 무리한 미곡 가격자유화로 물가를 폭등시키는 한편 토지개혁 또한 지지부진하기 그지 없었던데다가 인민위원회 해산을 무리하게 단행하고 각종 사건사고 수습에도 무능함을 드러내며 정국혼란을 스스로 자초한 반면에 소군정의 경우에는 인민위원회를 활용하면서 행정을 안정화시켰고, 강력한 물가통제 정책으로 경제도 안정화시키는데 성공을 거두었기 때문이었다. 즉, 미군정이나 소군정이나 반대파를 탄압한 것은 똑같았지만 그럼에도 행정능력에 있어서 현격한 차이가 있었다는 얘기이다.

사실 미군정과 소군정 사이에 행정력의 현격한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 미군정장관 존 하지는 순수 군인이었다. 하지만 소군정장관 치스차코프는 직접 정치문제에 개입하지 않고 실질적으로 연해주군관구 군사위원 테렌티 시티코프 상장이 군정행위를 했다. 시티코프는 레닌그라드 포위전 당시 식인범죄단속 기동타격대를 지휘한 적이 있었다. 시티코프는 정치인 출신으로 공산당에서 장병들에게 공산주의 교육을 하고 당의 방침을 잘 따르는지 감찰하러 군대로 파견나온 사람에 가까웠다. 실질적으로 정치인이 정치를 하는 거니 군인이 정치하는 것과 큰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

그런데 둘 다 자신을 따르는 독립운동가를 원한 것은 공통점이었지만, 김일성은 조직력, 정치적 반대파 제거에 있어서는 매우 감각이 뛰어났다. 훗날 1956년 헝가리 혁명, 프라하의 봄 등으로 반소 움직임을 힘겹게 제어하던 동유럽 국가의 지도자와 달리, 그는 북한 내 친공 분위기를 조성하거나 우익 인사들을 비밀리에 매수나 협박, 감금으로 북한 내에서의 반소련 감정을 통제하는 것을 수월하게 해냈으며, 심지어 소련의 반대에도 공산당원으로써의 정체성을 드러내지 않는 등 치밀함을 가지던 인물이었다. 토지개혁도 무상몰수와 무상분배라는 잔인성, 땅을 빈농에게 가지게 하는 면이 공산주의 이론에 배치되는 면이 있어서 지주에게 딱히 불만이 없던 농민은 물론 일부 공산주의자조차 동독식의 유상몰수를 주장하는 경우마저 있었으나 김일성은 무상분배를 그대로 진행시켰다.

김일성은 자신을 따를 사람을 요직 곳곳에 배치시키고, 충성의 대가는 확실히 보장하는 조직력, 비밀리에 움직이는 능력이 있었다. 확실히 소군정 치하의 토지개혁은 신속하게 완료된 것이 사실이어서 이후 북한 정권에서는 '독창성'이 있는 개혁이라고 극찬하며 계급투쟁을 제시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물론 그런 급격한 토지개혁이 농민이 먼저 원한 것이라기보다는 김일성이 '농민운동 고양'을 통해 그렇게 지지기반을 만든 것은 사실이다.

다만 이하의 문서에서 보듯 소련군정은 공산당원, 북조선노동당원들이 전혀 준비가 되어있지 않으며 인민들의 유상몰수 개념에 전염이 되고 있다고 판단했다. #
파일:김일성환영.jpg
1945년 10월 14일 일명 김일성 장군 환영대회[10]에서의 김일성의 모습
이렇게 소련이 조선 북부를 점령하고 군정을 실시한 1945년 9월경 김일성원산으로 귀국하였다. 김일성은 평남 인민위원회에 가입하였고, 1945년 10월 북조선 5도 인민위원회가 세워졌다. 이를 즈음하여 조만식은 조선민주당을, 김일성은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을 만들어 정치 활동에 나섰다. 한편 1945년 10월 소련은 포고령을 발표하여 여러 조선인 무장단체를 해산하였고, 군대격인 조선보안대를 창설했다.

소련군이 김일성을 간택한 이유는 김일성이 소련이 연해주에서 조직한 88여단에서 활동한 적이 있어서 면식이 있었고, 보천보 전투를 통해 알려져서 한반도 민중에게 지지를 받는 친소련 지도자였기 때문이다. 당시 여론조사에서 김일성보다 지지를 받는 정치인은 여운형, 이승만, 김구, 박헌영, 이관술이 있었다.
조선을 이끌어갈 양심적인 지도자
- 선구(先驅) 여론조사 제1호
후보 여운형 이승만 김구 박헌영 이관술
지지율 33% 21% 18% 16% 12%
후보 김일성 최현배 김규식 서재필 홍남표
지지율 9% 7% 6% 5% 5%
내각이 조직될 경우 적당한 인물
- 선구(先驅) 여론조사 제2호
대통령 내무부장 외무부장 재무부장 군무부장
이승만 김구 여운형 조만식 김일성
사법부장 문교부장 경제부장 교통부장 노동부장
허헌 안재홍 백남운 최용달 박헌영
* 위 표는 잡지 선구(先驅) 1945년 12월호 p.45~51에 실린 정치지도자에 대한 여론조사 자료(편집인 安峰守, 발행인 高麟燦)를 바탕으로 만들었다.
여론조사 제1호에서 백분율 합계가 100%를 넘는 이유는 복수 추천이 허용되었기 때문이다. 출처 및 참고자료

그러나 이승만과 김구 같은 우파 정치인은 당연히 반소 입장을 보였고, 중도좌파인 여운형은 친소련이라고 보긴 어려웠던 정치인이다. 다만, 여운형의 경우에는 확실히 미군정에 반대하는 입장을 보였다. 대표적으로 미군정 당시 남한의 좌익 세력을 통합한 남로당에 가담한게 그 예.[11] 그러나 여운형은 마르크스-레닌주의에 동조한 것은 분명히 아니었고, 거기에다 소련의 지원이 없다고 전혀 아쉬울 게 없는 수준의 정치적 거물이었기에 소련의 입맛대로 움직여줄리가 전무했다. 조만식은 한반도 북부에서 인지도가 높았지만 우파 성향에 친기독교 성향이라 소련과 갈등을 빚었다. 박헌영은 모스크바에 유학을 간 적도 있는 정통 공산주의자였으나 하필이면 기반이 남쪽에 있었다. 이관술은 함경도에서도 활동한 적 있으나 남쪽에 남는 것을 택했으며, 국내파인 이재유 그룹 출신이라 소련과 직접적 관련이 없는 국내파 공산주의자였다. 북쪽에 있으면서 이름은 알려진[12] 친소 거물급 정치인은 김일성밖에 없었다. 소련군정도 한반도 민중에게 지지를 받을 수 없는 조선계 소련인 정부로 한계가 있다는 것을 알기에 김일성을 민 것이다. 참고자료

광복 직후 남북통합 조선공산당 중앙위원회에서는 박헌영, 이관술이 김일성보다 서열이 높았다. 그렇더라도 김일성이 상당히 서열이 높은데, 소련이 처음부터 김일성을 밀어줬기 때문에 김일성이 높은 서열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이었다.
조선공산당 중앙위원회
박헌영이 김일성보다 높은 지위인 건 한눈에 보이고, 중앙검열위원 서열 1위 이관술의 지위도 중앙위원 서열 2위 김일성보다 높았다.
조공 중앙위의 구성은 시기별로 일부 차이를 보이고 있지만 김일성은 박헌영, 이관술에 이어 서열 3위로 올랐다.[13]
역사와 현실 issue 48, 253쪽
신탁통치안이 발표되면서(신탁통치 오보사건) 조만식 등이 반탁 운동에 나서자, 소련측은 조선민주당을 탄압하고 조만식을 가택연금해 사실상 정치 생명을 끊었다. 신의주 반공학생사건 등 반공 활동 또한 탄압하였으며, 조선의용군이 압록강 근처까지 진군해 들어오자 소련 포고령을 들어 이들을 무장 해제하는 사건도 있었다. 1945년 12월 김두봉김무정을 비롯한 조선독립동맹(연안파)가 일부 귀국하여 1946년 2월 조선신민당을 세웠으나, 이들은 국공내전에 참전하느라 일부 간부만 참여했으므로 큰 세력을 갖추지 못했다.

1946년 2월 북조선림시인민위원회가 설립된 후 조선계 소련인(고려인)들이 요직에 들어와 소련의 의도대로 차츰 조직을 장악해나갔다. 북한 정권 수립 이후 명단을 살피면, 각 부처의 은 조선인이나, 부상은 거의 예외없이 조선계 소련인으로 채워져 있음을 어렵지 않게 파악할 수 있다. 대표적 인물로 소련군 사단 참모였던 남일, 그리고 중앙아시아 고려인 출신인 허가이, 초대 중앙은행 총재 김찬, 선전선동부장, 당부위원장, 부수상 겸 국가계획위원장 박창옥, 문화성 부상 김열, 기석복, 김승화 등이 있다.

이후 김일성 등은 빠른 속도의 개혁을 진행해 나갔다. 처음에는 그 개혁을 두고 단지 '반제반봉건민주주의혁명'일 뿐이라며 아예 반발을 우려하여 공산주의를 전면으로 내세운 것도 아니고 아예 자신들의 개혁과 사회주의와의 연관성도 부인하고 이 당시부터 이미 사회주의적이지 않은 개혁도 시행되고 있었다.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14]가 세워진 1946년 2월부터 토지 개혁법[15], 8시간 노동제, 주요 산업의 국유화령 등이 제정되었으며, 이에 반발하여 월남한 사람들은 남한 내 반공 세력으로 자리잡았다. 한편 1946년 4월 북조선공산당이 세워졌는데 이는 남한 내 조선공산당의 정통성을 축소시킨 것이며 단독 정부 수립에 대한 의도도 보인다. 이후 김두봉 등의 조선신민당을 통합하여 1946년 8월 북조선로동당으로 세력을 재편하였다.[16]

이후 1947년 2월 북조선인민위원회가 세워지고, 단독 정부 수립 작업이 진행되어 1948월 2월경에는 조선인민군이 창설되었다. 1948년 4월경에는 남북연석회의가 열렸으나 형식상의 합의만이 이루어졌고, 김구김규식 등이 돌아간 이후로는 북한에 남은 인사들을 끌어모아 6~7월에는 북한이 남한 지역에 대한 통치권을 가지고 있다는 선전용으로 2차 남북연석회의를 열었다. 이후 남한에서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고, 북한에서도 최고 인민 회의를 개최하여 인민민주주의[17] 헌법을 만들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는 이름으로 북한 정권을 수립하였다. 이때 북한의 헌법에서는 수도를 서울특별시로 정하고 평양은 임시수도로 칭했는데, 이는 당시 남한 지역을 북한 정권의 미수복지로 보는 선언으로 볼 수 있다.

한편, 이 시기부터 김일성에 대한 개인숭배가 시작되었다는 점도 중요한데 북한의 모든 행사에는 김일성과 스탈린의 초상화가 함께 등장했으며 "우리 민족의 영명한 지도자 김일성 장군 만세" 등의 표어가 곳곳에 붙여졌다. 그리고 북한 최초의 종합대학의 이름이 김일성종합대학으로 지어졌으며, 김일성 장군의 노래도 이미 1946년 작곡되었다. 물론 1960년대 후번 이후[18]보다는 개인숭배의 정도가 훨씬 덜해서 아직 '수령'이라는 호칭은 조심스럽게 사용되었고 대신 주로 '장군'이라는 호칭으로 불렸지만 김일성의 생일이 국경일로 지정되거나 김일성의 가족까지 우상화될 정도는 아니었다.[19]

2.1. 종결

미군정이 끝나면서 미군과 소련군은 동시철수를 개시했다. 하지만 미군이 한국군에게 애초 약속했던 수준보다도 못한 소화기와 약간의 물자만 넘겨주고 고문관도 500명 미만으로 남긴데 반해, 소련군의 경우 T-34 전차Yak-3 전투기, 어뢰정을 비롯한 중화기 일체와 관련 군수물자를 통째로 넘겨주었을 뿐만 아니라[20] 고문관도 3,000명 이상 남겨놓았다. 이들 소련의 고문관들은 조선인민군의 훈련은 물론 6.25 전쟁 당시 북한의 남침 계획을 구체적으로 만드는 데 큰 공헌을 했다. 조선인민군 육군 6사단 출신으로 대한민국 육군에 투항해 대한민국에 정착한 조선인민군 육군 군관은 개전 직전에 소련군 군사고문단이 기존의 '훈련전담' 고문에서 '작전지휘' 고문으로 전부 교체됐음을 증언한 바 있다. 6.25전쟁 개전 직후 소련 군사고문단장 블라디미르 라주바예프 장군이 본국에 타전한 전문에 따르면, 개전 당시 조선인민군 각 부대마다 배치된 소련 고문관의 작전지휘는 훌륭했으나, 38도선을 넘어선 뒤부터 소련 고문관이 동행하지 않으면서, 일부 부대의 경우 사령부와 48시간 이상 교신이 두절될 정도로 조선인민군의 작전은 매우 형편없어졌다고 한다. 물론 소련이라고 해서 좋아서 이랬던 것은 아니고 제2차 세계대전으로 큰 피해를 입고 전쟁기 미국의 막강한 국력을 목격한 스탈린 입장에서 6.25 전쟁 개입을 대놓고 선언했다간 3차 세계대전으로 이어져 또 다시 엄청난 피해를 입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일부러 전쟁 개입을 소극적으로 했던 것이었다. 물론 미국도 마찬가지로 만주에 원자폭탄 투하를 운운하며 확전을 주장한 맥아더가 해임된것도 마찬가지의 이유이기도 했다.

소련의 위성국이 되어버린 이런 행태는 2차 대전 종전 후 소련의 위성국가가 된 여러 공산국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이었으며, 이것을 피한 공산국가는 티토가 장악한 유고슬라비아밖에 없었다. 역사의 아이러니지만 북한에서 소련의 영향력이 상실된 것은 바로 소련이 북한의 지도자로 올려놓은 김일성이 8월 종파사건 같은 일을 벌이며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면서 부수적으로 발생한 현상이다.[21]

3. 관련 인물

4. 관련 문서


[1] 단 해주시의 경우 용당포 일대가 38선 이남에 위치하였으나 미소 군정의 합의로 소련군정 하에 놓임[2] 현재 38선 이북 지역으로서 대한민국이 실효지배하고 있는 수복지구는 경기도(연천군 중 삭녕면, 서남면 대부분을 제외한 부분, 파주시 적성면 어유지리 일부, 포천시 영북면, 관인면 전체와 이동면, 영중면 일부, 가평군 북면 적목리 일부) 및 강원도(철원군 중 철원읍, 동송읍, 갈말읍 전체와 묘장면, 내문면, 북면 일부, 춘천시 사북면과 북산면의 일부, 화천군, 양구군, 인제군, 양양군 양양읍, 강현면, 손양면 전체와 서면, 현북면 일부, 속초시, 고성군 중 현내면, 거진읍, 간성읍, 죽왕면, 토성면 전체 및 고성읍, 수동면 일부, 김화군 김화읍, 근남면, 서면 전체와 근동면, 근북면, 원남면, 원동면, 임남면 일부, 평강군 정연리). 다만 대한민국 헌법 제3조에 의하면 대한민국의 영토는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이므로 대한민국 헌법상 소련군정 전체 영토의 현재 국가는 대한민국이다.[3] 사진은 1946년 11월 평양음악학교 학생들이 북조선 도·시·군 인민위원회 선서 경축대행진을 하는 모습이다. 소련군정 시기 내내 북한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풍경으로 이와 같은 스탈린 개인숭배 분위기는 6.25 전쟁 시기까지 이어지다 스탈린이 사망 후 소련에서 격하되고 김일성주체사상을 내세운 1950년대 중반에야 사라진다. 태극기의 경우 인공기를 국기로 지정하게 된 1948년까지 사용했다.[4] 물론 소련은 일본과 달리 한반도를 직접 통치한다거나 그럴 구상은 없었다.[5] 소련의 입장에서 중국공산당과 연안파는 자신들의 영향권 밖에 있었으니 당연한 조치였다.[6] 그런데 대부분은 중국에 그대로 남아 국공내전에 참전하다가 후에 북한에서 조선인민군이 창설되자 정식 군인 자격으로 귀환하여 합류한다.[7] 이 자리에 조만식도 조선인 대표로 입회했다.[8] 7차 교육과정 당시 금성출판사 출간 고등학교 한국근현대사 교과서에서 이 언급을 미군정의 총독부 통치 체제 온존과 대비해놓아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9] 사실 소련군의 이러한 전쟁범죄 및 행패는 한반도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소련군은 연합국 소속국가들의 군대 중 가장 전쟁범죄 비중이 높은 군대였다. 이러한 원인은 추축국의 소련에 대한 어마어마한 전쟁범죄로 인한 소련군의 난폭화와 소련의 인명 경시 성향 때문에 일어난 일이었다. 물론, 소련군도 이게 비정상적인 모습인 것을 모르진 않았는지 이후로는 규율이 다시 엄격해진다.[10] 정식 명칭은 소련군 환영군중대회. 김일성이 적기훈장을 달고 있으며 뒤에 태극기가 걸려 있는 것이 인상적이다. 당연히 현재 북한에서 사용하는 버전에서는 태극기, 적기훈장, 소련 장군들을 모조리 삭제한 버전을 쓰고 있다.[11] 미군정은 남한에서 공산주의 세력이 유력 정치세력이 되는 것을 극도로 경계하였고,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등의 조작과 좌우합작 운동에서 공산주의 계열이 고립되기를 유도하는 등 당시 남한의 좌익세력이 통합하는 것을 저지하려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운형이 공산주의 계열과 통합한 이유가 바로 미군정에 저항하기 위한 연합전선의 성립이 그 목적이었다. 다만 흔히 알려진 것과 다르게 남로당은 창당 당시에는 대중적 사회주의를 표방하였다. 이후 남한만의 정부수립이 사실상 확정되어 가자 결국 여운형은 근로인민당으로 분당하여 결렬하고 난 뒤에는 결국 공산주의 정당이 되었지만.[12] 다만 알려진 것보다 너무 어리다는 등의 이유로 해방정국에는 그가 '김일성'임을 믿지 못하는 일마저 있었다. 정권을 잡을 수 있던 건 김일성의 조직력의 역할이 컸다. 소련의 주요 인물들과 활발한 접촉을 하고, 심지어 김일성과 친한 인물들을 소련군 관련 인사의 접대나 통역 자리까지 맡게 하려고 노력하며 자신의 입장을 적극적으로 관철시키며 소련을 설득한 것이다.[13] 역사와 현실은 한국역사연구회와 역사비평사에서 발행하는 학술지이고 이 내용은 구글 도서 검색에서 이관술 서열을 검색하면 나온다.[14] 연구자들은 이를 사실상의 북한 단독정부로 본다.[15] 땅을 강제로 빼앗아서 빈농 등에게 주었기에 사회주의의 취지와 어긋난 정치적 세력 확장을 위한 정책으로 평가받는다. 특히 충성을 하는 사람일수록 여기서 얻을 것이 많았다.[16] 남한의 조선공산당도 이에 맞춰 좌익계 정당들을 통합, 남조선로동당으로 개편되었다.[17] 사회주의라는 이름을 내세운 것은 사회주의 헌법을 제정한 1972년부터다.[18] 자세한 것은 우상화/북한 문서 참조.[19] 사실 60년대 중반까지의 김일성 정도의 우상화는 공산국가에서는 으레 일어나는 현상이었다. 사실 일반적인 민주주의 국가에서도 국가 차원이 아닌 개인이나 정당의 차원에서 특정 인물들을 공식적으로 존경의 표시를 취하거나 동상을 세우는 일은 꽤 흔하다.당장 한국에도 민주당계 정당의 경우 노무현, 김대중의 동상을 놓고 있으며, 보수정당의 경우 이승만, 박정희, 김영삼 등의 사진을 걸어놓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산주의 국가들에서는 이러한 우상화와 존경의식이 사회 전반에 놓여 있었는데, 그 이유는 각국의 공산당이 사실상 정부나 다름없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공산당이 존경하는 인물들이나 우상화가 곧바로 국가 전반에 적용되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엘리트주의 성격과 권위주의적 성격은 이러한 문제점을 극대화시켜 공산주의 국가에서 특정인물이 영웅시되는 정말 아이러니한 상황이 연출되었던 것.[20] 공짜는 아니고 구매비용으로 북한지역의 공업물자나 시설/농산물을 뜯어갔다.[21] 다만, 예외적으로 알바니아 같은 경우는 스탈린 사후 흐루쇼프의 스탈린 격하 운동엔베르 호자가 반발하면서 사실상 독자노선을 걷는 양상을 보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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