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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고생 콘크리트 살인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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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171B1C,#000><colcolor=#eeeeee,#dddddd> 여고생 콘크리트 살인사건
女子高生コンクリート詰め殺人事件
사건번호 헤이세이 21058
(平成[ruby(二一零五八,ruby=にいちゼロごはち)])
발생일 1988년 11월 25일 ~ 1989년 1월 5일
사건 발각 1989년 3월 29일
발생 위치
[[일본|]][[틀:국기|]][[틀:국기|]] 사이타마현 미사토시(납치), 도쿄도 아다치구 아야세(감금), 도쿄도 고토구 와카스(시체유기)
범죄 항목 약취유인(납치, 유괴), 감금, 강간(윤간), 폭행, 살인, 사체유기
가해자 미야노 히로시(주범, 당시 18세)
오구라 유즈루(당시 17세)
미나토 신지(당시 15세 → 16세)[1]
와타나베 야스시(당시 16세 → 17세)[2]
나카무라 테츠오(당시 17세)
이하라 코이치(당시 15세)
그 외 최소 18명의 비행 청소년[3]
볼드체: 핵심 인물
피해자 후루타 준코(당시 17세)

1. 개요2. 경과
2.1. 11월 25일2.2. 11월 27일2.3. 11월 30일2.4. 12월 5일2.5. 12월 6일2.6. 12월 7일2.7. 1월 4일2.8. 1월 5일
3. 세상에 알려지다4. 피해자가 당한 일5. 부검 결과와 사인6. 피해자 부모의 반응7. 가해자 부모의 반응8. 세간의 만행
8.1. 사건의 충격
9. 환경적 요인10. 범인들의 인적 사항
10.1. 소년 A10.2. 소년 B10.3. 소년 C10.4. 소년 D10.5. 소년 E10.6. 소년 F10.7. 기타 공범들
11. 판결12. 관련 매체
12.1. 다큐멘터리12.2. 영화12.3. 만화, 소설12.4. 영화12.5. 노래
13. 유사 사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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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88년 11월 25일부터 1989년 1월 5일까지 일본 도쿄도 아다치구에서 15~18세의 남성 비행 청소년들이 주 2회의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귀가하던 17세 여고생 후루타 준코를 납치한 뒤 감금하며 온갖 가혹행위고문, 폭행, 성폭행을 저지르고 방치하여 살해한 뒤 시신을 콘크리트와 함께 드럼통에 넣고 유기하여 은폐한 사건.

都足立区女子高生監禁リンチ殺人事件(도쿄도 아다치구 여고생 감금 린치 살인사건), Murder of Junko Furuta(후루타 준코 살인사건)이라고도 불린다.

피해자 후루타 준코(古田順子, 1971년 1월 18일 ~ 1989년 1월 4일)는 당시 17세의 고등학교 3학년 학생이었으며, 오빠와 남동생이 있었다. 1989년 3월에 고등학교를 졸업할 예정이었고, 취직도 결정되어 있었다. 이렇듯 그녀는 창창한 미래를 앞두고 있었으나, 후술할 잔인무도한 범죄의 타깃이 되어 가해자들의 잔혹한 고문과 폭행, 성폭행 끝에 18세 생일을 불과 2주 앞두고 사망했다. 피해자가 세상을 떠난 지 벌써 [age(1989-01-04)]년이나 지났지만 그 엄청난 잔혹함과 끔찍함, 비인간성 그리고 가해자에 대한 솜방망이 처벌 때문에 일본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끊임없이 거론되고 있다.

사건 당시 청소년이었던 4명의 소년들은 사건 이후에도 계속해서 언급될 만큼 극악무도한 범죄를 저질렀음에도 불구하고, 미성년자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소년법에 의해 겨우 징역 5~20년[4]을 선고받고 출소했다. 이러한 범죄 사실에도 불구하고 저 정도의 솜방망이 처벌이 나온 이유는, 일본은 살인범에 대한 처벌이 원칙적이고 꽤 엄한 것으로 유명하지만 18세 미만 소년범에게는 사형을 선고하지 않는데다 피해 정도보다도 '피해자의 수'를 핵심 기준으로 처벌하기 때문이다.[5]

2. 경과

2.1. 11월 25일

1988년 11월 25일 오후 8시 30분경 사이타마현 미사토시에서 주범 미야노 히로시(소년 A, 18세)는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던 후루타 준코(17세)를 발견했다. A는 공범 미나토 신지(湊 伸治, 소년 C, 15세)에게 "내가 잘 해 볼 테니 저 여자를 발로 차."라고 지시했다. 무언가에 타격을 받은 준코는 무릎이 까지고 도로 옆의 도랑에 자전거와 함께 넘어졌다. C는 준코를 발로 찬 뒤 도주했고 A가 나타나 "저 녀석은 유명한 변태다. 나도 저 녀석에게 칼로 협박당했다. 여긴 위험하니 데려다 주겠다."고 말을 걸어 대화를 하면서 천천히 준코의 집 쪽으로 걸어갔다.

히로시는 준코의 집에서 10분 거리에 위치한 어두운 창고 앞에서 갑자기 태도를 바꿔 "난 야쿠자의 간부다.[6] 야쿠자가 너를 사고로 위장해 차로 치어 죽이기로 되어 있다. 얼마 뒤 차도 이리로 오겠지만, 내게 몸을 바치면 용서해 준다."며 준코를 키타아야세역에서 가까운 WINGS 호텔(사건 이후에도 그대로 영업 중)로 데려가 강간했다.[7] 이후 "원래는 야쿠자가 너를 죽이기로 되어 있었지만, 넌 내 여자친구와 닮았으니 살려 주고 싶다. 너를 죽이지 말아 달라고 윗선과 잘 얘기해 볼 테니 그때까지 여기에 있어라."고 말하며 준코를 안심시켰다.

직후 히로시는 납치 당일 자판기 앞에서 행인을 대상으로 퍽치기를 하 던 동료 오구라 유즈루(소년 B, 당시 17세)와 와타나베 야스시(소년 D, 당시 16세)에게 전화를 걸어 "여자를 하나 잡아 두고 있다. 너희들 같이 먹어 버리지 않겠냐?"고 불러내 히로시-유즈루-야스시 순서로 4~5차례씩 돌아가면서 윤간한 뒤 준코를 끌고 근처 밤거리를 돌아다녔다. 이때 준코는 낯선 사람들에 둘러싸여 생전 처음으로 술을 마시게 되었다.

도중 차 안에서 히로시가 준코에게 "신지가 너를 좋아한다. 사귀어라."고 명령했지만 준코는 "고등학교 졸업 전까지는 남자를 사귀기 곤란합니다."라고 대답했고 이에 히로시는 "굴욕을 교육시켜 준다."고 했다.[8] 이후 히로시와 유즈루가 술을 마시러 자리를 뜨고 신지의 집 근처 공원에서 대기하던 나머지 일행들은 실내로 들어가려고 생각했는데 이것이 신지의 집이 사건 현장이 된 이유다.

2.2. 11월 27일

길에서 행인을 폭행하고 있던 히로시는 함께 어울리던 나카무라 데쓰오(소년 E, 당시 16~17세)와 이하라 고이치(소년 F, 당시 15~16세)에게 "좋은 것을 보여주겠다"며 불러내 23시경 신지의 집에 자고있던 피해자 앞에 나타난다.

히로시는 준코에게 겁을 주려고 감기약을 각성제인척 복용하고 약에 취한듯 행동하며 피해자를 넘어뜨렸다. 코이치가 쿠션으로 피해자의 얼굴을 누르자 피해자는 소리치며 저항했다.

이 과정에서 신지의 부모가 2차례 찾아온다.

먼저 신지의 어머니가 2층에서 나온 소음에 방문을 열어 확인하려 했으나 조명이 꺼져 스탠드만 있던 상태였기에 상황을 인지하지 못했다.

이 후, 준코가 비명을 지르자 신지의 아버지가 올라와 문 앞까지 와서 ''너희들 지금 뭐하는 거지?"라며 무슨 상황인지 물었으나 신지가 "상관하지 마"라고 소리지르자 돌아갔다.

일련의 과정으로 화가 난 가해자들은 2시간동안 준코의 허벅지와 다리를 폭행하고 음부에 불을 붙인 뒤 비명을 지르지 못하게 입을 막고 윤간했다.

2.3. 11월 30일

파일:o0448026814250420564.jpg
사건이 일어난 신지의 자택 2층. 관련 매체 문단에 링크된 첫 번째 다큐멘터리 영상에 나오는 장면의 캡처 사진이다.
납치 후 5일이 지난 11월 30일에 준코 부모가 경찰에 신고할까 봐 걱정한 히로시가 제안하여 가해자들은 준코에게 집에 "가출했으니 찾지 마. 친구 집에 있으니 실종 신고는 취소해 줘."란 전화를 먼 지역의 공중전화로 걸도록 강요했다. 5일에 걸쳐 3번 걸게 시키면서 "경찰서도 멀고, 저 차는 야쿠자의 차다. 도주하려고 하면 내가 너를 죽일 것이다."라고 협박했고 전화를 할 때도 옆에서 감시했다. 그리고 그날 신지 어머니와 인사한 준코는 자신을 "사이타마현의 고교생"이라고 소개했고 신지 어머니는 준코에게 "늦었으니 어서 집으로 돌아가라"고 말했다. 하지만 준코는 소년들과 2층으로 올라갔고 신지는 "오늘 밤은 여기서 지낸다."고 말하면서 따라 올라갔다.

2.4. 12월 5일

5일 뒤인 12월 5일, 신지 방을 청소하다가 쓰레기통에서 생리대를 발견한 어머니는 2층으로 찾아가 감시 담당인 야스시와 함께 있던 준코에게 "왜 집에 돌아가지 않았냐"고 물었지만 감시를 당하고 있던 준코는 대답하지 못했다. 어머니는 준코를 가출소녀라고 생각하고 이름을 물었지만 준코는 "사이타마현에 사는 고교 3학년 학생이고, 취직이 결정됐다"는 대답밖에 하지 못했다. 어머니는 "부모님께서 걱정하실 테니 어서 돌아가라"고 말했다. 감시를 하고 있던 야스시도 "그래, 돌아가는 게 좋겠다"라고 말해 식사를 시킨 뒤 준코를 집으로 돌려보내는 분위기가 됐다.

식사 도중 신지와 아버지가 돌아와 신지에게 "여자친구인가? 나에게도 소개해 주렴."이라고 말을 걸었으나 묵살당하고 준코는 다시 소년들에게 이끌려 2층으로 올라가게 됐다.

2.5. 12월 6일

신지의 가족들은 낯선 소녀가 들락날락하는 걸 보고 신경이 곤두서 다음 날에 다시 찾아와 "이 집엔 남자가 2명(미나토 신지와 그의 형)이나 있어. 어떻게 될지 알고 있는 거지?", "여긴 그 야쿠자 같은 것들(미야노 히로시와 오구라 유즈루)도 있으니 얼른 돌아가렴."이라고 말을 걸었으나 준코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얼른 돌아가자"며 준코의 가방과 소지품을 들고 내려왔지만 준코는 가해자들이 두려워 2층에서 꼼짝하지 못했다. 어머니는 준코 가방에서 나온 집 전화번호를 확인한 뒤 아들에게 구타당할 것을 염려해 시부모의 집으로 찾아가 준코 집에 전화를 걸었다.

신지 어머니가 "댁에 후루타 준코라는 딸이 있습니까?"라고 묻자 준코 어머니는 "지금은 준코가 집에 없습니다. 누구십니까?"라고 되물었다. 그러나 신지 어머니는 주저하다가 가짜 이름을 대고 끊어 버렸다. 가짜 이름을 토대로 수사했기에 준코 부모는 실마리를 찾지 못했다.

신지의 집에서는 신지의 아버지가 준코를 귀가시킬 채비를 시켰고 신지의 형과 오구라 유즈루가 밖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그럼 돌아가기로 한 거지? 어머니가 걱정하시니 얼른 집에 돌아간다고 전화하거라."
"괜찮아요. 전에도 전화했으니까."
"그럼 그쪽까지 데려다 줄게."
"혼자서 돌아갈 수 있어요..."
"택시비 가지고 있니? 내 줄까?"
"있어요. 괜찮아요."
"그럼 곧장 돌아가렴."
"알겠습니다."

집 근처 공원에서 코우지는 준코를 귀가시키자는 쪽으로 유즈루를 설득했고 준코 또한 "경찰에 신고하지 않을 테니, 제발 집에 가게 해달라"고 애원했으나 결국 신지의 부모가 자고있을때 다시 감금당하게 된다.

이 후, 어머니가 준코의 집에 전화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미나토 신지는 수 시간동안 어머니를 폭행한다.

이 시점에서 신지의 부모는 피해자가 귀가한 것으로 인지했고 가해자 무리는 피해자를 풀어줄 생각을 버리게 된다.

소년들은 이때까지 준코가 가지고 있던 3000엔으로 옷을 사서 갈아입히거나 음식을 먹이고 생필품을 사 주는 등 나름 대우를 해주었지만 감금이 지속되고 하루 18시간 이상 지속되는 폭행 및 성적 고문 등으로 인해 상처가 심해지면서 그런 것마저도 사라졌다. 납치 약 한 달째인 12월 하순까진 컵라면, , 우유, 계란 등을 신지의 형이 먹였지만 이후부터 쇠약해져 고작 하루에 우유 1잔만을 겨우 먹을 수 있었다. 옆방에 있던 신지의 형은 이후에도 소년들이 없을 때 한 번씩 준코를 도와주긴 했지만 상술한 것처럼 동생 일행의 폭력에 잡혀 살았기 때문에 사건이 드러날 때까지 두려움이 있었는지 경찰에 신고는 하지 않았다.

2.6. 12월 7일

12월 7일, 준코는 가해자 소년들이 낮잠을 자고 있을 때 몰래 1층으로 내려와 신고했지만 인기척을 느낀 히로시에게 들켰다.[9] 강제로 전화가 끊기자 경찰은 역추적으로 다시 전화를 걸었으나 히로시는 "여동생이 장난전화를 건 모양이다, 죄송하다"라고 말하며 무마시킨 뒤 전화를 끊었다. 히로시는 고함을 지르면서 자고 있던 다른 소년들을 깨워 "왜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냐"고 물컵을 집어 던지는 등 광분하며 호통쳤다. 신고한 것도 화나는데 히로시에게 혼나기까지 해서 유즈루, 신지, 야스시도 격분했다. 준코는 소년들에게 "한 번만 용서해 달라"고 빌었지만 소용이 없었고 이것이 준코가 방 밖에서 한 마지막 행동이 됐다. 이때부터 준코는 죽을 때까지 방 밖으로 나갈 수 없었으며 지금껏 당한 것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강도 높고 끔찍한 고문들을 당하게 된다.

특히 그녀를 짝사랑했던 오구라 유즈루는 이때부터 가장 집요하게 준코를 괴롭혔다. 밖으로 나가기 전 준코에게 매우 굴욕적인 자세를 취하게 한 뒤 돌아와서 자세가 조금이라도 흐트러져 있으면 무자비하게 폭행했고, 준코를 나체로 매달아 놓고 복부를 구타하거나 턱과 팔, 무릎을 탈구시킨 후 관절을 부러뜨리고 가위로 아킬레스건을 절단하는 등의 만행을 저질렀다. 그리고 유즈루의 이 만행은 신지의 집에 있는 비디오 테이프에 녹화되어 남아 있었다.

2.7. 1월 4일

약 한달 뒤인 1989년 1월 4일, 미야노 히로시는 마작에 크게 실패해 10만 엔(2024년 환율 기준 약 96만 원)에 달하는 빚을 지고 야스시의 집에서 일행과 합류했다. 사실 12월 20일경부터 준코의 상태가 극히 심각해져서 그들은 준코를 처리하기 귀찮은 물건으로 여겨 한동안 찾지 않고 C의 집에 방치해 두고 있었다.

히로시는 "마작에서 진 것도 다 준코 때문이야"라며 "오랜만에 준코를 괴롭히러 가자"고 제안했다. 이에 다같이 신지의 집으로 가 준코를 폭행했다.

오전 8시 경, 그들은 탈진한 준코를 세우고 얼굴에 촛농을 떨어뜨리거나 소변을 먹였고 양 옆에서 1명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다른 1명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머리, 어깨 등을 번갈아 가며 구타했다. 이때 야스시는 "딱히 관심 있지는 않았으나, 히로시와 유즈루가 두려워 폭행에 가담했다"고 증언했다. 준코가 자력으로 일어서려다가 넘어져 카세트 플레이어에 머리를 부딪혀 경련을 일으키는 걸 보고 히로시는 준코의 죽음을 예감했지만 꾀병이랍시고 폭행의 강도를 높혔고 유즈루 역시 1.74kg짜리 아령을 준코의 복부에 떨어뜨렸다. 그러나 준코의 반응이 없자 억지로라도 깨우려고 불로 피부를 지져 봤다. 준코는 처음엔 움찔했지만 미동도 없어졌고 소년들은 "죽은 것 아닌가?"란 두려움에 휩싸였으나 곧 "원래 이렇다"는 신지의 말을 듣고 안심한 뒤 테이프로 준코의 발목을 묶어 방에 방치해두었고 오전 10시가 되자 막 개장한 사우나로 향하였다. 준코가 스스로 움직일 수 없으니 감시할 필요 없다고 생각해 전원 외출한 것.

2.8. 1월 5일

파일:4905A17B-759A-4F2B-8FA6-8E6B614D3C60.jpg
시신이 있는 드럼통이 발견된 당시 현장, 사진으로 추정하건대 도쿄도 고토구 와카스 2-3-2(東京都江東区若洲2丁目3−2) 주변으로 보인다. 사건 이후에 창고가 세워졌다.

하루 외박을 한 소년들은 미나토 신지의 형에게 준코의 상태가 이상하다는 연락을 받고 신지의 집으로 향한다.

준코가 감금 당한 방은 안에서만 열 수 있었기 때문에 바로 옆이었던 미나토 신지 형의 방 베란다에서 준코의 상태를 지켜보니 준코가 이불 위에 쓰러져 있었다. 소년들은 "준코가 죽은 것 같다"며 들어가길 꺼렸다. 그들이 들어갔을 때 준코는 이미 사망하여 몸이 차가운 상태였다.

이에 소년들은 준코의 시신을 바로 앞에 두고 미친듯이 웃어댔다.

안타깝게도 그녀의 기일(1월 4일)은 그녀의 생일(1월 18일) 의 2주 전이었다. 또 준코가 납치(11월 25일)된 지 3일 후(11월 28일)가 그녀의 어머니의 생일이었기 때문에 전부터 그녀는 어머니가 좋아하는 딸기 케이크를 만들고 있었다.

히로시는 준코의 시신을 이불로 싸맨 뒤 여행 가방에 넣어 테이프로 말아 자신이 일했던 타일 공장 근처에서 가져온 드럼통에 넣어 콘크리트를 넣고 벽돌 등으로 고정했다. 굳이 콘크리트를 넣은 까닭은 공구리 괴담[10]을 믿은 걸로 추정된다. 다큐에 따르면 만화에서 힌트를 얻었다고도 한다. 이때 백주대낮에 당당히 준코를 콘크리트에 매장한 장소는 놀랍게도 아다치구의 주택가가 밀집한 히로시의 집 앞 주차장이었고 들키지 않기 위해서인지 빌린 차에 드럼통을 실어 옮겼다고 한다.

드럼통을 숨기기 위해 이를 검은 쓰레기 봉투에 넣은 뒤 테이프로 밀봉했다. 이후 히로시가 빌려온 왜건 차량을 운전해 드럼통을 아야세 강 근처에 버리려 했으나 유즈루가 "집 근처라 귀신이 되어 나올 거 같다"며 무서워했다. 그래서 바다 한가운데인 도쿄만에 버리려 했으나 무슨 이유에선지 도쿄도 고토구 와카스 14호지 해변 공원 정비 현장의 공터에 버렸다. 만약 바다에 버렸다면 미제사건이 됐을지도 모른다.[11]

히로시는 드라마 <톤보>[12]의 마지막 회를 녹화한 비디오를 찾았다. 준코가 납치된 날 준코는 그것의 마지막 회를 보기 위해 아르바이트가 끝나자마자 서둘러 귀가하던 중이었기 때문이다. 드라마에 대해서 준코가 말한 적이 있기 때문에 이를 같이 넣으려고 했던 것이다. 그는 비디오를 꽃다발과 함께 넣으려고 했지만 "범인을 특정하는 단서가 될 수도 있다"는 B의 만류로 그만뒀다. 자기들이 살해해 놓고 추모하는 것이 무슨 헛짓거리인가 싶지만 히로시는 준코가 불쌍하다기보다는 저주받기 싫어서 넣으려고 했다.라고 밝혔다.

3. 세상에 알려지다

이 천인공노할 사건은 가해자들의 시체 유기로 영영 묻히는 듯했으나 시체 유기로부터 약 3개월 뒤인 1989년 3월 29일 뜻밖의 일로 사건의 전모가 밝혀졌다.

히로시는 1988년 11월 8일에 있었던 또 다른 19세 여성을 대상으로 한 강간치상절도 등의 혐의로 네리마 소년 감별소에서 아야세 경찰서 수사관의 조사를 받고 있었는데 이 과정에서 담당 형사가 실수로 "너 사람을 죽이면 안 되잖아?"[13] 라는 질문을 했다. 이때 히로시는 부하들이 이미 사건에 대해 자백했다고 착각한 나머지 사건의 전모를 몽땅 불어 버렸는데[14] 만약 담당형사의 말실수가 없었거나 시신을 바다에 버렸거나 시신을 심하게 훼손해서 부검조차 할 수 없게 만들었다면 이 사건은 실마리조차도 풀지 못 하고 영원히 드러나지 않은 채 실종 사건으로 묻힐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로 인해 히로시는 담당 형사에게 사건의 전말을 불기 시작했고 이런 터무니 없는 소리에 경찰은 반신반의하면서도[15] 현장에 다급히 출동해 범인들이 자백한 공터에서 콘크리트 범벅이 된 드럼통 하나를 발견했다. 드럼통의 틈새에서 썩는 냄새가 진동해서 즉시 크레인을 동원해 경찰서로 이동시켰다. 원래 드럼통 하나의 무게만 해도 굉장히 무거운데 여기에 40kg에 달하는 준코의 시신, 이불, 가방, 그리고 엄청난 양의 콘크리트까지 더해져서 전체 무게는 305kg에 달했다.

다음날 오후 경찰서에서 해체 작업이 시작됐고 곧 보스턴백에 담겨져 두 이불에 싸인 여성의 시신이 발견됐다. 이미 사망한 지 수 개월이 지난 데다 당시 온전한 상태로 유기된 것도 아니라 부패가 매우 심각하게 진행된 상태였다.[16] 당연히 경찰들은 히로시가 밝힌 사건의 전모가 사실임을 알고 경악을 금치 못하였다.[17]

공판 당시 재판소는 찬물을 끼얹은 듯한 분위기였으며 배심원단이 실신하는 등의 소동이 있었다.

4. 피해자가 당한 일

주범 4명과 폭행에 가담한 수십 명의 사람들의 증언에 근거했다. 심지어 아래에 서술된 내용마저도 전부가 아닌 일부다. 이들이 감췄거나 너무 많은 범죄를 저질러서 망각한 것도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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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지가 "여자 하나를 잡아 두고 있으니 헌팅할 필요 없다"고 지인에게 공언하였고 소문이 퍼져 최종적으로 신지의 지인 수백 명 가량이 준코의 감금을 알고 있었다. 이들 지인은 40일 사이 최소 500~800여 회에 달하는 폭행과 강간에 관여했다. 공판 기록에 의하면 이 사이 가해자들 때문에 준코는 기절하고 깨어나고를 약 1,000회 이상 반복했다. 재판 과정에서 어느 목격자(방관자)의 증언에 따르면 나체로 묶인 준코의 주위에 술, 담배가 널려 있어 참혹한 분위기였다고. 그리고 준코가 움직이기도 힘들어진 이후에는 방치하고 자기들끼리 놀러 나갔다.
  • 1989년 새해 무렵 소년들이 놀러 나가 집을 비웠을 때 미나토 고지가 준코를 찾아왔다. 준코가 "제발 물을 마시고 싶다"고 말하자 그는 물을 가져다 주었고 그녀는 물을 마시며 도움을 요청했으나 신지에게 들킬 시 어떠한 일이 일어날지 몰라 겁에 질린 고지는 그녀의 부탁을 무시하고 방을 나섰다.
  • 범행 초반에는 준코의 돈을 빼앗아 배달 음식을 시켜 준코에게 먹이고 세면도구와 칫솔을 사 주면서 배려 아닌 배려를 했었지만 범행이 길어지면서 이러한 행위는 일절 없이 폭행만 하였다.
  • 신고를 들킨 후 준코의 앞에서 "자살로 위장해 목을 매달자", "분쇄기로 갈자", "고기는 다지는 게 좋다", "바다에 공구리를 치자"는 식의 말을 주고받았다. 안그래도 강제 감금되어 겁에 질려있을 준코는 자기 앞에서 이런 말들을 주고 받았으니 준코는 큰 공포를 느꼈을 것이다.
  • 준코는 500~800여 회의 윤간으로 인해 부검 결과 임신 상태였고 음부와 항문의 구멍이 하나로 보일 정도로 하체가 원형을 유지하지 못했다. 더욱이 성기와 음핵 쪽은 너무나 끔찍한 짓들을 많이 해서[18] 새까맣게 변해 제기능을 수행할 수 없는 지경이 되어 버렸다.
  • 12월 5일, 열차 추돌사고[19]가 발생했는데 이와 관련한 뉴스를 본 히로시는 준코에게 "저 사고에서 너의 아버지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알고 있냐?"고 물었다. 이에 준코가 불안한 모습을 보이자 "기분이 어떠냐"고 물었고 준코가 "슬프다"고 대답하자 "거짓말이었다"고 말을 바꾸었다. 이후에도 대답을 계속 번복했다.
  • 준코는 매일같이 "풀려나면 아무것도 말하지 않을 것이고, 믿어 줄 때까지 무엇이든 하겠다"고 가해자들에게 애원했다. 이에 소년들은 나체로 춤추고 노래하기, 자위행위 등 온갖 미친 짓들을 시켰다. 당시에 준코는 스스로 일어서지도 못하는 상태였지만 소년들은 준코를 일으켜 세워 억지로 시켰다. 이로 인해 준코는 극도의 스트레스를 받아 머리카락이 모조리 빠졌다. 이래놓고 결국 죽을때까지 준코를 풀어주지 않았다. 그저 자신들의 재미를 위해 괴로워하는 준코에게 억지로 말도 안 되는 행위들을 시킨 것이다.
  • 준코에게 강제로 시너를 흡입시켰다.[20]
  • 하루는 준코가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하자 히로시는 "돌아가면 엄마한테 뭐라고 이를 거냐"고 물었다. 준코는 "이르지 않겠다. 지금까지 신주쿠에서 놀다 왔다고 하겠다."고 답했다. 그러자 소년들은 "신주쿠에서 교복 차림으로 지금까지 그렇게 놀 수 있을 것 같냐"고 하면서 더 심하게 준코를 폭행했다. 당시 준코는 여벌옷이 없어서 신지가 어린 시절에 입던 옷을 입었다고 한다.
  • 12시간 이상 유즈루가 밖에서 끌고 온 대형견의 성기와 준코의 입을 교접시켰다. 그리고 동물의 정액도 먹였다.
  • 준코를 강제로 냉장고의 냉장실에 무려 약 2~4시간 동안이나 가두는 고문을 했다. 물론 2~4시간 동안 문을 한 번도 열지 않고 계속 가둬 뒀으면 준코는 당연히 사망했을 테니 중간중간에 문만 열어주면서 그런 짓을 이어간 걸로 보인다.
  • 소년들이 어디선가 갈취한 차량용 배터리에 전선을 연결하여 준코에게 전기고문을 가하기도 하였다.
  • 준코의 입과 귀, 질과 항문에 불꽃놀이용 대형 폭죽을 몸 속에 꽂아 놓고 동시에 터뜨렸으며 비명을 넘어 까무러치는 고통에 인간의 소리 같지 않은 울음소리를 내며 고통스러워하는 준코를 그 와중에 억지로 웃도록 강요하고, 웃지 못하면 웃을 때까지 구타하고, 맞아서 내부장기가 파열되면서 온몸에서 터져나오고 쏟아지는 피고름을 모조리 먹였다.
  • 준코가 도망가지 못하도록 신지의 집에 있던 운동기구를 모아 만든 220kg~280kg의 금속 바벨로 손발과 얼굴의 뼈를 으스러뜨렸다.
  • 준코에게 치과 치료를 시켜 준다면서 펜치로 준코의 멀쩡한 생니 여러 개를 잡아뽑는 만행을 저질렀다.
  • 감금 초기 유즈루와 이름이 같은 과자를 가져와 준코에게 "이것이 뭐냐"고 물었는데 준코가 존칭을 안 쓰면 "유즈루의 이름을 함부로 부른다"고, 준코가 존칭을 쓰면 "사물존칭을 쓴다"고 구타하고 몸에 불을 질렀다.
  • 히로시는 준코의 죽음을 예상했지만 꾀병이라고 욕하며 바닥에 눕히고 1m 이상의 높이에서 20~30kg의 아령을 얼굴에 던졌다. 유즈루는 1.74kg짜리 무언가를 준코의 사타구니에 풀스윙으로 집어던졌다.
  • 준코의 눈과 얼굴이 너무나 부어올라 코의 높이를 넘어 부을 때까지 구타하면서 "그 얼굴이 더 좋다"며 웃어댔다. 준코의 얼굴은 부었다가 가라앉기를 반복했는데, 막바지에는 눈이 심하게 부어서 앞도 제대로 보지 못하는 상태였다.
  • 히로시는 코이즈미 쿄코의 노래 <누가 뭐래도 아이돌(なんてったってアイドル)>을 틀어 놓고 가사의 "예- 이!"에 맞추어 준코의 옆구리를 구타했다. (신음하면 더 맞기 때문에) 준코가 억지로 고통을 참느라 얼굴이 일그러지면 가해자들은 재미있어했다.[21]
  • 곪은 상처에서 쉴 틈 없이 쏟아지는 피와 고름을 본 가해자들은 자신의 손과 발을 비닐봉지로 감싼 뒤 더 구타했다. 이때 준코에게 웃으라고 강요했고 웃지 않으면 더 무자비하게 폭행했다.[22]이렇듯 약간이라도 저항하면 더 심하게 폭행해 준코는 저항하지 못하게 됐다. 급기야 준코는 어떠한 언어적, 물리적 폭력에도 아무런 반응을 하지 못하게 되었다.
  • 준코의 입을 강제로 벌리고 자신들의 소변과 대변을 배설해 먹이고 몸에도 배설하는 등 준코를 인간변기로 활용하는 스카톨로지 행위를 저질렀다.
  • 바퀴벌레와 지네를 강제로 먹게 했다.
  • 음주와 흡연 경험이 없는 준코에게 자신들이 피우다 만 담배를 피우게 하거나 50~100개비의 궐련을 한 번에 피우게 했고 신지의 집에 있는 70도[23]가 넘는 독한 술을 다량 먹였다. 준코가 토를 하면 그 모습을 즐기면서 토사물을 다시 먹였다.[24]
  • 준코의 새끼손가락의 손톱을 벗기고 왼쪽 유두플라이어로 뜯었다. 준코의 가슴에 바늘을 빼곡하게 꽂거나 준코의 몸에 담배꽁초를 비벼 끄면서 재떨이로 사용하기도 했다.
  • 볼과 눈에 촛농으로 양초를 고정하고 성기와 항문에 달군 백열전구, 쇠꼬챙이, 목검, 쌍절곤, 공업용 가위, 철봉, 담배, 유리병, 페트병, 불꽃놀이 도구, 벌레 등을 넣고 그 부위를 수차례 폭행하여 내부의 이물질들을 산산조각냈다. 이는 요실금, 변실금, 심각한 출혈을 야기해 정상적인 배설을 할 수 없게 되었다. 괄약근이 늘어난 건 덤. 게다가 B가 공사장에서 갈취한 전동드릴을 성기에 넣어 자궁을 갈아 버리는 소년범죄 역사상 전례없는 극악무도한 행동도 저질렀다.
  • 아이돌을 동경했던 준코를 비웃으며 강제로 발치한 치아의 빈 자리에 전동 드릴을 쑤셔넣으며 노래를 부르라고 강요하고, 전동 드릴 삽입으로 인한 자궁 파열로 흘러내리는 피를 쏟지 말고 춤을 추라는 등 엽기적인 행위도 강요했다.
  • 성냥이나 라이터를 이용해 성기, 손, 발, 정강이, 무릎 등에 불을 질렀고 이 고통에 준코가 비명을 지르면 입과 코를 때리고 다시 불을 질렀다. 상처가 아물 틈 없이 화상을 입으면서 상처는 곪고 썩어 악취가 났다. 곪은 상처가 터져 쏟아져 나온 진물, 고름, 피가 온 방안에 분수처럼 튀었고 준코는 스스로 일어서지 못하게 됐으며 12월 말에는 움직이는 것조차도 힘들어졌다. 준코는 침대에 간신히 앉아 소년들에게 "먹을 것을 달라"고 간청했지만 소년들은 준코를 침대 아래로 밀쳐 버렸다. 그리고 그런 준코를 강제로 일으켜 세워서 온갖 학대를 일삼았다. 이때 탈출을 막으려고 손보다 다리에 더 큰 부상을 입혔다. "만약 구출되어 치료받았어도 몇 년은 걷지 못했을 것"이란 소견이 있었다. 그나마 손의 화상은 비교적 덜해서 음식을 먹거나 물건을 집고 드는 것은 어느 정도 가능했다.
  • 준코를 눕히고 끓는 물을 부어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즐겼다. 소년들은 이를 '열탕 샤워'나 '열탕 코마샬'[25]이라고 불렀다. 목욕을 시켜 준다면서 물고문도 했다.
  • 각종 가혹행위에 준코의 상태가 악화되고 몸에서 악취가 풍기자 히로시는 C의 부모가 눈치챌까 두려워 준코에게 종이팩에 배설을 하도록 했다. 종이팩의 소변을 마시라고 강요했고 대변도 억지로 먹였다. 이것들은 나중에 준코의 위장에서 발견되었다.
  • 크리스마스에 소년들은 준코를 앉히고 크리스마스 캐럴을 부르면서 폭행했다. 준코는 폭행이 끝나고 바닥에 있던 "Merry Christmas"라고 적힌 종이를 보고 한참을 울었다.[26]
  • 사망 1주일 전, 영양실조스트레스로 준코가 배를 감싸며 쓰러져 히로시에게 "물을 마시게 해 달라"고 애원했다. 히로시는 상처에 영양을 준다며 마지못해 우유를 먹였지만 준코는 전부 토하고 말았다.[27] 그걸 본 소년들은 다같이 준코를 폭행했으며 사과하는 준코의 하복부를 수십 회 구타하고 혹한 속에 상의를 모두 벗긴 뒤 베란다에서 여러 개의 담배를 피우게 했다. 이에 견디지 못한 준코가 구토하자 히로시는 "따뜻하게 해 주겠다"며 준코의 다리에 라이터 기름을 뿌리고 점화했다. 12월 하순부터는 준코는 힘이 다 빠져 발버둥도 치지 못했다.
  • 인간이 감당하기 불가능한 수준의 고통에 괴로워하는 준코에게 웃으라고 강요하고, 웃지 못하면 웃을 때까지 고문을 행하다보니 사망 몇 주 전에는 울다가 웃기를 반복하거나, 갑자기 기괴한 환호성을 지르는 등 정신질환적 증세도 보였다고 한다. 조금만 생각해봐도 온전한 제정신을 유지하기가 사실상 불가능한 상황이니 오히려 정신에 문제가 생기지 않았다는 것이 더 믿기 어려운 수준이다.
  • 준코는 처음엔 "살려 달라"고 했지만 감금 말기부터는 매일같이 "죽여 달라"고 애원했다. 사망 직전엔 뇌가 거의 활동을 멈춘 상태였다. 시신 발견 당시 가 쪼그라들고[28] 녹아 있었다고 한다.

5. 부검 결과와 사인

상세한 조사 결과 매우 충격적인 사실이 드러났다. 사인은 구타에 의한 외상성 쇼크와 위의 토사물에 의한 질식사로 추정됐다. 사망 당일 2시간에 걸친 폭행이 끝난 후 준코는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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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준코의 시신은 손발이 묶인 상태였고 얼굴은 눈의 위치를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로 심하게 손상됐으며 하반신은 얼굴보다 훨씬 더 참담한 상태였다. 온몸의 근육은 폭행과 화상 등으로 흐물흐물하게 녹아 있었고 고름과 진물이 흘러 범벅이 되어 있었다.[29]
  • 준코의 장기는 모조리 터지고 박살난 데다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짓이겨진 부분도 있었다.
  • 얼굴의 뼈 상당부분이 으스러져 있었고 가슴에 빈틈이 없이 바늘이 빼곡하게 박혀 있었으며[30] 극심한 스트레스로 인해 머리카락도 거의 남아 있지 않은 상태였다고 한다.
  • 새끼손가락의 손톱이 벗겨져 있었고 왼쪽 유두는 공구로 집혀 심하게 손상됐으며 잇몸에 제대로 배열된 치아는 하나도 없었고 강제로 발치된 흔적도 있었으며 또한 축소되어 녹아 있는 상태였다. 는 피와 고름으로 꽉 막혀 입으로 호흡했을 것으로 추정되며 고막도 심하게 파열됐기에 마지막엔 거의 소리가 들리지 않았을 것이라고 한다.[31] 너무나 가공할 고통 속에서 입술을 깨물어 윗입술과 아랫입술이 모두 절단되어 있었다.
  • 피하 지방의 두께는 평균치의 100분의 6이 채 되지 않아 극도의 영양실조 상태였다. 53kg에서 36kg으로 줄어들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준코의 키가 165cm였다는 것을 감안하면 상당한 저체중이다.
  • 준코의 위장에선 지네바퀴벌레, 다량의 먼지와 쓰레기, 본인뿐만 아니라 여러 사람의 소변과 대변, 그리고 식도를 가득 채운 데다가 기도까지 막아 버릴 정도로 어마어마한 양의 정액 등 차마 말로 꺼내기도 힘든 것들이 발견됐다. 정액은 도대체 몇 명의 것인지 확인할 수조차 없을 정도로 양이 많았으며 동물의 정액도 검출되었다. 성기에는 비타민 음료 병 2개가 꽂혀 있었다. 준코의 몸 아래쪽에 있는 장기들의 상태는 두 배로 심각했다. 대장에 큰 화상을 입었고 그 외의 기관들의 상태도 전부 정상이 아니었다.||

사망 당시부터 심각하게 손상돼 안면이 심하게 함몰 및 변형되어 있었고 이후 시간이 흐르면서 부패되었던 터라 외관만으로는 사인을 비롯한 신원 확인조차 쉽지 않았지만 손상된 시신에 남아 있던 지문과 치열을 조합하고 머리카락의 DNA 등을 검사한 결과 1988년 11월 25일 밤에 아르바이트 후 귀가 도중에 행방불명된 사이타마현 미사토시 타카스 1번지에 거주했으며 현립 야시오 미나미 고등학교 3학년에 재학 중이었던 후루타 준코(17세)임이 확인됐다.

시신 발견 당시 베테랑 형사들조차 구토하며 기절하거나 오열할 정도로 이 세상에서 본 적이 없을 만큼 잔인해 이 세상의 생물이 한 짓이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참혹한 상태였다고 한다.

준코가 목숨을 잃은 방에선 벗겨진 그녀의 속옷 하의가 남아 있었다.

6. 피해자 부모의 반응

준코의 부모님은 당시 준코가 야시오시 시내에 아르바이트를 하러 간 뒤 귀가하지 않아 경찰서에 실종 신고를 냈다. 준코가 무사히 돌아오길 손꼽아 기다렸으며 일을 쉬어 가면서까지 준코의 행방을 찾고 있었다. 그러나 준코가 납치되어 각종 고문에 시달리다 고통스럽게 죽은것도 모자라 준코의 부모님은 세간의 시선에 시달려야했다. 재판 당시 준코의 아버지 후루타 아키라(古田晃)는 "가는 곳마다, 지인들이나 모르는 사람들이 죽은 딸의 이야기를 집요하게 물으면서 물고 늘어지며 괴롭힌다"고 통탄했다. 특히 "지인들은 질문하고 나서 위로라도 해줬지만, 기자들과 다른 모르는 사람들은 그런 것도 없었다"면서 한탄했다.
준코의 장례식은 학교 친구들, 가족, 친척들이 모인 가운데 4월 2일에 준코의 집에서 엄숙하게 치러졌다. 이 장례식에는 기자들도 많이 참석했다.[32]

준코의 묘지는 유즈루의 부모에게 훼손된 후 다른 곳으로 이장했고 외부에 공개되지 않고 있다고 한다.
장례식에서 준코의 친구인 미야시타 카나(宮下佳奈) 학생이 읽은 추도사는 다음과 같다.
준 짱, 어서 오세요. 이런 식으로 재회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아팠죠? 괴로웠죠? 아무것도 모르고 생활했던 자신에게 화가 납니다. 언제나 온화하고 밝았던 준 짱. 문화제 때 모두와 만든 핫피(일본 전통 축제 의상)는 정말 잘 어울렸었죠. 평생 잊지 않을 거예요. 저희는 준 짱의 죽음을 절대 헛되이 하지 않겠습니다. 끔찍한 범죄가 없어진 평화로운 날을 보낼 수 있도록, 사회인이 된 저희들도 노력하겠습니다. 또 괴로운 일이 있어도 좌절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 살아갔던 준 짱을 생각하며 힘내겠습니다. 교장선생님이 특별히 졸업장을 들고 와주셨다고 하네요. 이로써 3학년 8반 47명은 전원 졸업을 할 수 있게 됐습니다. 준 짱… 이제 고통도 괴로움도 없어요. 편히 잠드세요. 잘 가, 준 짱. 야시오미나미고교 3학년 8반 일동.

그리고 4월 초에 야시오 미나미 고등학교에선 준코가 돌아오리라 믿고 보관해 두고 있었던 졸업장을 그녀가 살던 집으로 보내줬다.

사건의 전모가 밝혀진 후 나온 관련인들의 진술도 통탄스럽다. "준코가 감금 도중 가장 많이 한 말이 무엇인가"란 질문에 가해자들의 대답은 마치 짜고 친 것처럼 똑같았다. 바로 "나 집에 돌아갈 수 있는 거예요?"였다고.

사건의 전모, 자신의 딸이 얼마나 처참하고 끔찍하게 죽어갔는지를 알게 된 준코의 어머니는 충격을 받고 쓰러져 오래 정신과 치료를 받아야만 했다. 준코의 아버지는 사건의 전모를 알게 된 후에도 최대한 침착함을 유지하면서 웬만해선 눈물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기자들이 준코의 신상정보를 전 세계에 알리기 시작하자 결국 언론사에 직접 찾아가서 "딸의 신상정보를 유출하는 것을 자제해 달라"고 눈물로 호소하기까지 했다.

7. 가해자 부모의 반응

자식이 저지른 범죄를 알게 된 히로시의 부모는 엄청난 충격을 받고 자산을 정리해 5천만 엔(단순 환율로 따지면 한화로 5억 가량[33])을 준코의 부모에게 건넸지만 거절했다고 한다.[34] 당시로서는 큰 돈이었지만 이미 딸을 잃은 피해자 부모 입장에서는 전혀 위로가 되지않았으나 히로시의 부모는 사죄를 할 방법이 그뿐이어서 그런 방식이라도 취하고 싶었을테고 어쨌든 다른 가해자 가족들보다는 나은 경우였다.

그리고 이 사건 이후 히로시의 부모도 유즈루의 부모처럼 이혼한 것으로 보이는데 가해자들의 가족과 관련된 몇몇 영상의 처음 장면에서 수많은 짐가방들을 잔뜩 든 상태로 기자들의 인터뷰도 거절하고 어딘가로 떠나는 사람이 히로시의 어머니 미야노 시즈에인데[35] A의 부모도 구제불능인 아들의 행동을 감당하지 못한 것으로 보이며 히로시의 아버지의 혼외정사와 동거 이외에도 자식의 범죄 행각이 이혼 사유일 것이 사실상 확정이다.

유즈루의 부모는 참으로 그 자식에 그 부모란 면모를 대놓고 드러냈다. 생모 오구라 에츠코는 자식이 전과자가 된 것에 분노해 "이게 다 준코 때문이다"라고 말하며 준코의 묘를 부숴버리는 충격적인 만행을 저질렀다. B의 부모는 이 사건 이전부터 B의 아버지의 혼외정사로 인해 별거 중이었으나 이 사건을 계기로 이혼했다. 유즈루의 아버지는 사과가 아니라 "노코멘트하겠다"는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한편 유즈루의 생모는 준코가 죽고 [age(1989-01-04)]년이 지난 후에도 조롱이라도 하듯 버젓이 사건 발생지 인근에 음식점을 차리는 등의 행태를 일삼으며 준코를 모욕하고 있다고 한다.

준코가 감금된 장소를 제공한 C의 부모는 "여학생이 2층에 있는 걸 내내 알고 있었으며 그녀를 돌려보내기 위해서 그나마 제일 회유하고 노력했지만 아들이 두려워[36] 어쩌지 못했고 이미 돌려보냈다고 의심치 않았기에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고 진술했다. 그런데 사건이 밝혀지고 증거 확보를 위해 경찰관들이 들이닥쳤을 때 방의 바닥과 커튼, 베란다 벽 등이 모두 새 것으로 바뀌어 있었고 어머니가 깨끗하게 청소해서 집안엔 어떠한 증거도 안 남은 상태였다. 진짜로 몰랐을까?[37]

당시 미야노 히로시와 약혼을 하고 동거를 하던 야스시의 누나는 "후루타 준코가 그 집에 감금되어 있다는 걸 내가 알았더라면, 난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녀를 구출했을 것이다. 나는 전혀 몰랐다."고 말했다고 한다.

8. 세간의 만행

일부 황색언론은 준코의 얼굴이나 교복, 수영복, 핫팬츠 차림의 사진 등을 그대로 노출하면서 행실이 불량한 아이였다느니, 불량배 패거리의 일원이었다느니 하는 등의 불분명한 사실들을 기사로 내놓는 추가적인 만행을 저질렀다. 설령 피해자가 행실이 불량했거나 불량했다고 해서 범죄를 저지른 게 정당화도, 참착 요소가 될 수 있는 것도 절대로 아니지만, 준코의 주변인들과 동급생의 증언에 따르면 준코는 최상위권의 성적에 결석도 1년에 두세 번 정도였으며 아르바이트도 아주 성실히 하는 등 불량학생과는 거리가 먼 아주 우수한 모범생이었다. 교우 관계도 원만했고 밝고 명랑하고 누구에게나 웃으며 인사하는 상냥한 성격에 미인이었기 때문에 인기가 많았다고 한다. 친구들에 따르면 준코가 아이돌을 동경했으며 고등학교 졸업 후엔 곧바로 근처의 가전 판매점에 취직하기로 결정되어 있었다고 한다. 케이크 만들기가 취미였던 준코는 크리스마스에 어머니와 함께 케이크 만드는 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부모를 공경하는 아이였으며 아르바이트도 졸업여행을 위한 것이었다고 한다. 준코가 아르바이트를 하는 곳에선 왜 준코가 출근을 안 하는지 몰랐다고 한다.

살아생전 우수한 모범생이었고 아무 죄 없이 죽은 피해자인 준코와 준코의 가족들은 각종 유언비어에 시달리기까지 했으니 단순히 억울한 수준이 아니었을것이다.

하지만 기자들은 자극성만을 노리며 본인들의 이득 앞에 사람 목숨이 어쨌든 신경조차 쓰지 않은 보도에 환장한 나머지 근거도 없는 비난이 준코와 그 가족들에게 쏟아졌고[38] 분노한 아버지는 딸의 실명 보도에 대한 문제점을 강하게 제기했으며 이후 준코의 가족들은 피해자의 유족들인데도 불구하고 아무 죄 없이 시선을 피하며 숨어 살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이 사건을 바탕으로 쓰인 《여고생 콘크리트 살인사건-그녀의 억울함을 알겠습니까?》란 책에선 "준코는 언론에게 다시 한 번 살해당했다"고 기술하기도 했다.

덧붙여 준코는 범행을 당하기 전 미성년자 성폭행범에게 교제를 전제로 한 스토킹을 집요하게 당하고 있었으며, 이 남자가 가해자 일행에게 정보를 주고 준코를 협박했고 가해자들은 계획적 범행인 것이 탄로날 수 있음이 두려워 이 사실을 누설하지 않았다는 설이 있다. 범행에 계획성이 있었다고 보이면 형량이 늘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설에 대한 근거로 범인들이 평소 강간에 쓰던 차[39]를 쓰지 않아 준코를 협박할 자신이 있어 보였다는 점, 또한 준코의 집 근처가 인적이 드문 창고 앞이었음을 미리 알고 있었던 듯한 점 등이 언급됐다.

8.1. 사건의 충격

4년 뒤에 일어난 이치카와 4인가족 살인사건의 범인 세키 테루히코는 이 사건의 범인들이 징역형을 선고받은 것을 근거로 "나의 범행은 별 거 아니다"라고 주장했으나 이치카와 사건은 많은 사람이 살해됐고 범행 당시 테루히코가 만 19세로 성인이었기 때문에 2017년 12월 19일 얄짤없이 사형 당하게 되었다. 일본은 2명 이상 살해할 시 어지간하면 사형 선고를 내리고 사형을 집행한다.

추가로 이 사건이 진행되던 사이에 도쿄, 사이타마 연쇄 유아납치 살해사건도 잇따라 발생했다.[40] 쇼와 시대에 극단적인 살인 사건이 총 2번 발생한 셈이며 이 때문에 무고한 유소녀 4명, 여고생 1명, 총 5명이 짧은 생을 마감한 것이다. 차이는 이 사건의 범인이 미성년자 소년들이었다면 옆동네는 20대 청년 남성이 감행했다는 점이 있다. 더군다나 이 사건의 범인들이나 미야자키나 재판 후에도 반성의 여지가 전혀 없다. 다만 차이는 미야자키는 2008년에 사형당한 반면 이 사건의 범인들은 당시 청소년이었다 보니 사형 판결이 내려지지 않았다.

너무 충격적이다 보니 한국에서도 사건 직후 심해지는 일본의 소년 범죄에 대한 기사에서 이 사건에 대해 언급했을 정도였다. 그리고 미국, 유럽 등의 언론에서도 이 사건을 보도했다.

사실 형사의 말실수로 인한 우연한 계기로 범인들이 자백해서 망정이지 그러지 않았다면 이 사건은 세상에 알려지지도 못한 채 진실을 뒷받침하기 위한 어떠한 단서도 찾지 못했을 것이다.[41] 범인들의 주변인은 모두 준코를 목격하거나 정보를 들었음에도 방관했고 심지어 동조하기까지 했다. 많은 사람이 상황을 알고 있었으나 누구도 경찰에 알리지 않았다. 단 한 사람만이라도 알렸어도 준코는 살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또 이 사건은 지극히 평범한 주택가의 한 집에서 일어난 일이다. 이렇듯 우리 주변에서도 이런 범죄가 일어날 수 있으며 그것에 더 관심을 기울이고 무시해선 안 된다. 우리 주변에서 이런 사건이 일어난 뒤 증거도 없이 묻힐 가능성은 배제할 수 없다. 단 한 사람이라도 용기 있게 대처했으면 피해자를 구할 수 있었을 것이다.

실제로 논픽션 라이터 후지이 세이지가 주범들과 공범, 그리고 목격자들을 만나 탐문한 걸 바탕으로 엮은 책 《소년의 거리》(개정판: 17세의 살인자)에 따르면 사건 관계자 대부분은 경찰에 신고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 "여학생을 납치한 것은 알았지만 귀찮은 일에 엮이기 싫었다", "나와는 상관 없는 일이다. 다른 사람이 신고하겠지.", "소년들의 보복이 두려웠다", "집에 돌려보냈다는 말이 미심쩍었지만 범인과는 친구였기에 믿었다"고 말했다. 주범들의 명령에 따라 준코를 강간하고 폭행한 소년들 중 일부도 자신의 죄가 밝혀질 게 두려워 신고하지 않았고 심지어 자신만 죄책감에 시달리는 게 두려워 친구를 범행에 끌어들인 소년까지 있었다고 한다. 이를 바탕으로 후지이 세이지는 "준코를 살해한 것은 주범들이지만 직접 범행에 가담하지 않은 그들 한 명 한 명의 무관심과 약한 마음 역시 확실하게 준코를 살해하는 일에 가담했다"고 결론 내렸다.

사람에 따라 '미성년자가 이런 잔악무도한 범죄를 저질렀다'는 점만으로 충격적일 수 있다.[42]

9. 환경적 요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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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경 촬영된 아다치구의 방치된 아파트 단지.[43]
사건이 벌어진 동네는 사건 이후에는 재개발되어 백화점 및 신도시가 들어선 주택가가 됐지만 사건 당시엔 좁고 어두운 골목에 막장 치안으로 유명했다. 70~90년대 도쿄도 아다치구는 깡패 소굴이었던 과거의 일본에서도 가장 악명이 높았고 21세기에도 죽은 고양이나 비둘기가 가끔 발견된다고 한다.

해만 지면 온갖 별의별 비행 청소년들이 어슬렁거리면서 싸움질을 하거나 오토바이로 밤새 엄청난 소음공해를 일으키면서 거리의 기물을 파손하며 공포 분위기를 조성했는데 주민들은 두려움에 떨며 필사적으로 이들을 못 본 척했고 비명 소리가 들리든 말든 눈을 돌리고 귀를 막았다. 주민들은 비행 청소년들 앞에선 절을 해야 했고 최소한 고개를 숙여야 했고 아다치구 공무원들도 눈치를 봐야 했을 정도였다. 그러니까 납치당한 준코가 비명을 질렀어도 주민들에겐 그냥 매일 들리는 소음 중 하나에 지나지 않았다.[44]

당연히 주민들은 "순찰 경관 좀 늘려 달라", "분서를 설치해 달라"는 민원을 아야세 경찰서에 넣었지만 "인원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묵살당했다. 사건을 주변에서 방관한 것이 바로 이 때문이다. 이런 동네에서 살기 위해서는 비행 청소년 패거리들의 비위를 맞춰야 하는 것이 현실이었다. 이 동네는 사건 이후에도 도쿄에서 가장 소득이 낮고 치안도 안 좋은 여자가 혼자 살기 가장 위험한 동네로 유명하다.[45] 뭐 아다치구가 예나 지금이나 청소년/청년 야쿠자 조직으로 유명하니 말 다했다.

결국 경찰의 방만한 대응은 참혹한 살인 사건을 불러왔고 이 사건 이후 인원 부족을 이유로 민원을 무시한 아야세 경찰서는 어디선가 갑작스럽게 나타난 인력과 예산으로 순찰 경관을 늘리고 보안등을 추가로 설치했다.

첨언하자면 사건이 발생한 동네에서 이 사건을 주민들 앞에서 언급하면 매우 불쾌하게 생각한다. 이미 [age(1989-01-05)]년 전 일이고 당시 주민들의 대부분은 사건 이후 재개발 등 여러가지 이유로 대부분 다른 곳으로 떠나 새로운 주민들이 자리를 채워서 당시 일은 자신과 상관도 없고 알지도 못하는 일인데 타지 사람들이 자꾸 그런 이야기를 하기 때문.

한편 준코가 살았던 미사토시는 사건 이후에도 당시와 크게 달라지지 않았으며 준코가 살던 집과 다녔던 고등학교도 그대로 남아 있다. 그렇지만 이 지역에 가서 이 사건에 대해 물어보지 않는 게 예의다. 이곳 사람들에게도 이 사건은 엄청난 충격과 공포 그 자체일 것이니.

10. 범인들의 인적 사항

파일:콘크리트 살인사건 소년 ABCD.jpg
주범들의 히가시아야세 중학교 졸업사진
이들은 일반적인 양아치들과는 차원이 다른 악질이었다.

아다치구를 근거지로 하여 극동회(極東会, 교쿠도카이)의 청년부 조직 극청회(極青会)를 결성한 이들은 남녀노소 상대를 가리지 않고 폭행절도, 강도, 유괴, 납치, 강간, 윤간 등 온갖 강력범죄들을 일삼았는데, 이 때문에 주민들은 해가 지면 밖에 돌아다니는 것을 극도로 자제했다고 한다.

네 명의 주범들 중 와타나베 야스시를 제외하고는 운동부 출신[46]이었기 때문에 일반인들에 비해 몸이 단련된 상태였다. 그 중에서도 미야노 히로시는 유도, 킥복싱, 각종 맨몸 운동 등으로 온몸이 상당히 단련된 상태였고[47] 소년 시절 카츠시카구와 하치오지 시내 일대의 불량배들의 씨를 말리고 다녔다고 한다.[48] 이런 괴물에게 준코가 붙잡혔던 것이다.

굳이 인터넷으로 검색할 필요 없이 잊을 만하면 이 사건을 다룬 다큐멘터리를 방영하기 때문에 웬만한 일본인이라면 이 사건을 잘 알고 있으며 가해자들이 사회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도 전부 알고 있다.

이들은 현재 중년 남성이다. 일본이 전 세계적으로 장수 국가인 것을 감안하면 이들은 이제서야 인생의 반환점을 맞이한 셈이다.

10.1. 소년 A

파일:미야노 히로시.jpg
본명: 미야노 히로시(宮野裕史) → 요코야마 히로시(横山裕史)
출생: 1970년 4월 30일 ([age(1970-04-30)]세), 카츠시카구
극청회의 두목이자 해당 사건을 주도한 인물.

이 사건의 가해자들 중에서도 최악으로 평가받는다.

이 사건 외에 그가 저지른 범죄들을 살펴보면 강간치상, 폭행, 살인미수, 강도강간 등 그에 의해 끔찍한 고통을 받은 피해자들은 100명이 넘으며 당시 대한민국에서도 이 정도의 수준의 죄질은 '가정파괴범'으로 지칭하여 살인에 버금가는 흉악범죄라고 판단해 사형을 선고 및 집행했었다. 1980년대의 미야노 히로시는 아다치구의 괴물 그 자체였다.

사건 이후 요코야마(横山)로 을 바꾸었는데 출소와 함께 다른 사람에게 입양되는 형식을 사용했다.[49]

기자가 그를 인터뷰한 내용을 보면 얼마나 악랄한지 알 수 있다.
기자: 왜 그녀를 납치했는가?
히로시: 충동적으로 그랬다.
기자: 그녀가 불쌍하진 않았나?
히로시: 불쌍했다.
기자: 그럼 왜 그녀를 폭행했는가?
히로시: 스트레스 풀이.
신체적 특징은 왼손잡이에 재판 당시 뇌검사에서 전두엽측 지주막하낭종이 발견됐다.[50]

재판 당시 "1년만 늦게 저질렀어도 너는 사형이었다"는 말에 "그랬다면 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 나라에서 이런 짓을 하려면 미성년 시절 말고는 기회가 없다", "준코는 운이 나빠서 붙잡힌 것 뿐이다. 하필이면 나 같은 놈의 먹이가 됐으니"라는 망언을 했다.

할아버지는 군인, 야쿠자 출신의 정치인이었고 고모부 또한 야쿠자 간부였다. 아버지 미야노 히로후미(1942년생, 현재 [age(1942-01-01)]세)는 금융업계 사장이었으며, 어머니 미야노 시즈에(宮野静江, 1942년생, 현재 [age(1942-01-01)]세)는 피아노 연주 강사였다고 한다. 그리고 그에겐 7살 터울의 여동생(1977년생, 현재 [age(1977-01-01)]세) 한 명이 있다고 한다. 꽤 유복한 집안에서 자랐음에도 아버지가 다른 여자의 집에 거주하면서 간통하는 바람에 이때부터 삐뚤어져 문제 행동을 시작한 것으로 알려졌다. 미야노 히로시는 자신의 어머니를 심하게 폭행했는데, 온몸에 타박상을 입힌다거나 갈비뼈를 골절시켜 중태에 빠트리기까지 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이미 80년대에서 2000년대 사이 일본 불량배들이 즐겨 하던 머리 모양인 펀치 파마를 했고, 친구들과 무리를 지어 다니며 목검쌍절곤 같은 무기를 소지했으며 인근 학교에 쳐들어가 기물을 파손하기도 했다고 한다. 아버지와 사이가 나빠 가출해서 거리에 주차된 트럭에 무단으로 올라가 자다가 신고를 받고 귀가 조치되는 일도 잦았다.

이밖에도 할아버지와 고모부의 빽을 이용해 초등학교 시절 이미 카츠시카구와 인근 하치오지시 일대의 30여 개 초등학교의 또래들과 교직원들 사이에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고 한다. 무력에 가치를 크게 두는 성격이었다고 하는데 초등학교 무렵부터 키가 작은 대신 몸집을 키워 싸울 때 날아가지 않도록 밥을 많이 먹어 체급을 키우고 멸치를 씹어먹으며 뼈를 강하게 했다. 뿐만 아니라 팔굽혀펴기와 복근 운동 등의 근력운동은 하루도 거르지 않고 수백 개씩 해 왔다. 그리고 도서관에서 카츠시카구의 지도를 빌려 펼쳐 보면서 구에 있는 모든 학교들을 일일이 찾아다녀 그 학교의 학생들과 맞붙고 다니기도 했다고 한다.

중학교에 갓 입학할 시점엔 키가 160cm 정도로 유도부에 들어가기에는 왜소[51]했지만 몸이 단단하고 다부졌기에 초등학교 시절부터 알고 지냈던 선배의 추천으로 중학교에 입학하자마자 유도부에 들어갔다. 초기에는 지역대회에서 체급 내 5위에 드는 정도였지만 실력이 나날이 발전해 출전하는 대회마다 우승과 준우승을 휩쓸 정도였다. 너무 강한 탓에 질투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도쿄의 온갖 유도대회를 석권했고 중학교 동창들은 "소년 시절부터 몸을 쓰는 일뿐만 아니라 이름을 날리는 쪽으론 이골이 날 정도로 강했는데 자타가 공인하는 카츠시카구의 남자들 가운데 무력 최강으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지경이었다"고 증언했다.

중학교 시절엔 고등학생 불량배들과 싸움을 하고 다녔을 뿐더러 학교장 추천으로 사립명문 토카이대학 부속 사립 타카나와다이고등학교에 체육특기생으로 입학했을 정도로 강했다고 하며 고교 1학년 때 도쿄 전체에서 2~3학년을 모두 제치고 우승했지만[52][53] 상위 체급의 유도부 선배들은 그런 미야노 히로시에게 질투심을 느껴 심한 집단괴롭힘을 가했고[54] 이로 인해 미야노 히로시의 부모에게 고소를 당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미야노 히로시는 분풀이의 대상을 찾기 위해 집에 들어와선 부모와 다른 사람들에게 폭력을 휘두르고 집이나 거리의 기물을 닥치는 대로 부수고 거리를 돌아다니면서 행인이나 불량배들을 눈에 보이는 대로 폭행해 금품을 갈취하고 여자를 강간하고 다니는 미치광이가 됐다고 한다. 18세가 되던 해에 이 사건으로 체포되기 전까지 무리를 지어 강간하고 다녔던 여성만 기억상으로 90명이 넘었다고 진술했으며[55] 심지어 준코를 감금했던 기간에도 다른 여성들을 몇 명씩이나 납치하거나 강간하고 다녔다. 다만 공갈협박을 했기 때문인지 신고한 여성은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고 한다. 그 수위가 너무나 심해서 심지어 경찰마저 골머리를 썩히면서도 손을 놓고 있었다.

고1 때 중퇴한 후 폭주족의 우두머리를 맡기 전엔 집안에서 미치광이처럼 집기를 모조리 때려부수고 다른 학교의 복도에 오토바이를 타고 쳐들어가 학생들과 교사를 마구잡이로 집어던지고 주먹 등으로 구타하는 등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폭력적인 문제아였다. 교사 6명이 몰려와도 떼어놓지 못해 경찰까지 출동해서야 겨우 떼어놓았다고 하는데 정말 경악스러운 건 경찰의 한심한 대응이었다. 소년원에 보내져야 할 짓을 하고도 소년원 송치 및 보호관찰 정도로 끝났다. 물론 할아버지와 고모부의 빽도 있었지만.

게다가 이 사건을 일으키기 전에도 폭주족을 탈퇴한 동료를 찾아가 12시간 가량 집단 폭행해서 불구로 만들어 놓는다든가 지나가던 남성 2명을 다리 밑으로 집어던져 살인미수로 체포되기도 했다고 하는데 이렇다 할 처벌을 받지 않은 것으로 추측된다.

폭주족의 우두머리로 몸을 담던 시절의 후배 및 동료들에 따르면 자신에게 한 번 표적이 된 대상은 남녀를 가리지 않고 부하들을 시켜 집요하게 집주소와 동선을 파악시켜 야밤에 폭행해 반죽음 상태로 만들거나 납치, 강간을 하곤 했다고. 그랬기에 누구나 "미야노의 적이 된다면 인생은 끝"이라고 생각했으며 피해자들 가운데 강간 피해자만 최소 90명이 넘었다고 한다. 심지어 그의 집안에 대해 비아냥거려도 뼈도 못 추렸다. 그야말로 좁게는 그 일대, 넓게는 일본 열도에서 무슨 일이 있어도 건들면 안 되는 위험 인물이었던 모양. 그래서인지 사건이 터졌을 때도 "그 녀석이라면 사람을 죽여서 훼손하는 것쯤 눈 감고도 할 수 있을 것"이란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놀랍게도 중학교 때부터 야스시의 친누나와 연인으로서 동거하며 성인이 되면 결혼하기로 약속한 사이였다. 18개월 정도 타일 제조 공장에서 일하다가 자동차 학교의 합숙장에서 친해진 폭력조직 불량배들과 어울리면서 그들의 소개로 긴자에서 생화를 팔았다. 하지만 적성에 안 맞았고 그로 인한 스트레스로 시너를 불게 되면서 더더욱 엄청난 폭력배로 변했다.

고교 중퇴 이후 자신을 동경하는 불량배들을 모아 아다치구를 근거지로 폭력 조직 극동회[56]의 청년부 조직 '극청회'를 결성했다.[57] 강간, 상해, 약취, 강도 등의 강력범죄 이외에도 부하들을 시켜 일본인뿐만 아니라 서양인 관광객들을 상대로 금품을 약탈하거나 생화를 말도 안 되는 고가에 강매하는 짓 따위도 꾸준히 해 온 것으로 추측된다.

2006년에 가석방됐고[58] 이후 7년에 걸쳐 사이타마현 카와구치시의 용역 업체 미야우치 해체 공업소(宮内解体工業所)에서 일했다. 거주지는 카와구치시 하스누마 298번지 사카에하이츠 201호(埼玉県川口市蓮沼298 栄ハイツ201). 2013년 보이스피싱 사기 혐의[59]로 체포됐지만 묵비권으로 일관한 탓에 1월 31일 증거 불충분으로 석방됐다.

같은 형무소 수감자의 증언에 따르면 아버지뻘인 자신에게도 적극적으로 말을 걸어 왔고 항상 밝고 평안했다고 하며 보통 강력범죄를 저지른 수감자는 다른 수감자들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경우가 잦았지만 그는 그런 것 없이 복역 기간 동안 잘 지냈다고 한다.[60] 또 출소 후 이름을 바꾼 뒤에도 킥복싱 체육관을 다니거나 친한 후배와 유흥을 즐기는 등 잔인한 살인사건을 저지른 가해자라곤 상상도 못 할 정도로 반성이나 죄책감 없이 일상생활을 했으며[61] 사기 혐의로 체포되기 전까지 외제차를 타고 고가의 시계를 차며 명품 옷을 입고 다니는 등 청소년 시절에는 강간, 폭행, 상해, 강도가 주특기였다면 어른이 된 후에는 사기를 쳐서 무위도식하며 상당히 호의호식하고 희희낙락하면서 살던 것으로 추측된다.[62] 그 최소한의 후회나 죄책감도 없음은 확실해 보인다.

10.2. 소년 B

파일:오구라 유즈루.jpg
본명: 오구라 유즈루(小倉 譲) → 카미사쿠 조(神作 譲)
출생: 1971년 5월 11일 (현재 [age(1971-05-11)]세)
극청회의 부두목이자 피해자를 가장 집요하게 괴롭힌 인물.

카미사쿠 조(神作 譲)로 개명.[63] 1남 1녀 중 둘째.

아버지는 지방 검찰 고위 간부인 1946년생 오구라 아키라, 어머니는 1945년생 오구라 에츠코다. 키 193cm의 상당한 장신이며, 건장한 체격과 흉측한 외모, 들끓는 듯한 굉음과 저음의 목소리가 특징이다. 가해자 일행들 중에서도 가장 체격이 컸다. 그 외 신체적 특징은 왼손의 손가락이 6개였다고 하며 매우 심한 액취증이 있었다고 한다.

중학교 시절 하키 선수로 활동했지만 부상으로 은퇴했다. 중학교 시절 지인은 그가 폭주족 선배인 고등학생 2명과 싸움이 붙었다고 했는데 "얻어맞으면서도 싸움을 멈출 줄 몰랐다"고 할 정도로 호전적이고 집요했으며 폭력적이어서 어디를 가나 싸움을 일으키고 다녔다고 한다.

그의 지인 및 동료들의 증언에 따르면 중학생 시절에 손가락으로 튀어나온 못을 박아넣거나 차량 앞유리나 두꺼운 나무판을 주먹으로 단 한 번에 파손시키거나 알루미늄 캔을 한 손으로 찌그러뜨릴 정도로 강골인 인간흉기였다고 한다.[64][65] 이러한 남다른 강체질 덕분에 그는 자신과 싸운 상대들이 아무리 운동을 많이 하고 몸이 단련된 상대들이라도 주먹이나 발길질 한번에 기절하거나 뼈가 부서졌다고 자랑하고 다녔다고 한다. 이들은 이 사건 당시에도 피해자를 1달 가량 하루 18시간 이상 겁탈할 정도로 체력이 비정상적으로 강했다.[66]

이 무렵에도 자전거를 타고 가는 여학생을 쫓아가 덮친다든가, 치마와 속옷을 벗기는 등의 성추행을 해서 보호관찰 대상이 된 적이 있다고 한다. 중학교 2학년 때는 여자친구를 집에 데려왔다가 어머니가 "걸레 같은 계집"이라고 발언한 것을 시작으로 가정폭력을 시작했다고 한다. 너무나 격렬한 폭력에 어머니가 가정 재판소에 몇 번이고 상담했을 정도라고 한다.[67] 다만 B의 어머니도 동정할 필요는 없는 게 사건의 진상이 밝혀지면서 아들이 자기가 저지른 범죄에 대한 대가를 받은 것에 분노해 "내 아들의 인생이 저 여자 때문에 망했다!"고 준코의 묘를 부숴 버리는 충격적인 만행을 저질렀다.

공판 당시에는 "그래도 놀아줬으면 된 거 아니야?" 라고 유족 앞에서 낄낄거리며 웃기까지 했다. 출소한 뒤 이름을 개명하고 중국인 여성과 결혼 후 일본에선 살아가기 힘들 거라는[68] 생각에 중국으로 건너가려 했으나 이혼하면서 실패했다.[69] 성인이 된 후에도 한낮에도 "캬", "우우우"하는 괴성을 지르고 어머니에겐 "맞기 싫으면 내 앞에 있지 말라"고 했다고 한다.

그러던 2004년 5월 또 다시 아다치구에서 자신의 여자를 가로챘다는 이유[70]로 이소노 타카토시라는 사람을 어머니의 스낵바에 감금해 납치, 폭행했다가 체포되었는데 이미 이 사건의 형은 만기됐기에 어떠한 가중 처벌 없이 징역 4년이 선고됐다. 감금 이후 몇 시간에 걸친 폭행을 가한 뒤 피해자를 그냥 풀어줬다고 한다. 그저 피곤하다는 이유로 피해자를 꺼지라는 듯이 돌려보낸 것.

피해자 이소노에 따르면 가해자는 딱 봐도 180cm 이상은 되어 보이는 신장에 체격이 건장했으며 첫눈에 그런 부류의 인간임을 알 수 있을 정도로 인상이 좋지 않았다고 한다. 피해자의 집에도 시도 때도 없이 들어오고 새벽에 다짜고짜 들어와서 냉장고를 뒤지고 술을 꺼내 그 자리에서 동료들과 밤새도록 술판을 벌인다거나 여자 이야기나 온갖 음담패설을 내내 늘어놓으면서 과거 이력을 자랑하고 "지갑이 사라졌다"면서 새벽에 찾아와 집안을 뒤집어엎은 적도 있다고 한다.

재판 당시 피해 남성이 그를 마주치는 게 두려워 재판 참석을 거부한 탓에 칸막이를 두고 재판을 진행했다. 이때도 그는 "이 정도는 감금치상이라고 하기도 뭐합니다만"이라고 하면서 너무나 여유로워 보였다고 한다. 피해자는 감금되어 있는 동안 너무나 무서웠기 때문에 그저 영문도 모른 채 용서를 빌어야 했고 살아 있는 게 아닐 만큼 지독하게 오싹했다고 한다. 피해자는 뺨에 손바닥만한 멍이 시커멓게 들었고 턱뼈와 앞니가 부서져 피가 철철 쏟아지는 동안에도 계속 맞았다고 한다.

사건 당시 그는 금고 앞에 서서 야쿠자와의 친분을 과시하며 금속 배트와 칼로 피해자를 위협하면서 "사람을 1명 죽이는 놈과 10명 죽이는 놈은 다를 게 없다. 나는 사람을 마음대로 구워삶는 여유를 배웠다. 검찰은 나의 노리개니 무슨 짓을 벌려도 풀려날 것이다. 내가 얼마나 무서운 사람인지 알게 해 줄까. 야쿠자를 우습게 알면 어떻게 되는가를 똑똑히 알려준다."고 협박했고 평소 이 사건에 대해 "그 때 후배들을 끌어들인 것도 나고, 내가 진짜 주범이다. 여자를 삭발시키고 떼거지로 패며 강간하면서 비디오를 찍고 했다. 소리지르지 못하도록 턱관절을 탈구시키고 팔을 분지르면 까무러쳤다. 그 땐 너무나 즐거웠다. 하루는 돌아왔는데 몸에 불을 질러도 미동도 없길래, 코에 담배 연기를 피우고 숨을 쉬지 않는 걸 알았다."고 말하면서 웃음을 섞어 가며 자랑했다고 한다.

정말 그가 주범이면 정작 진범에 대해 제대로 된 처벌이 내려지지 않았다는 거나 다름없다.[71][72] 사실 재판 당시에도 A는 "나는 준코의 온몸에서 고름과 진물이 쏟아져 나와 더러워진 이후에는 C의 집에 잘 오지 않았고 바깥에서 다른 여자를 납치하거나 강간했다.[73][74] 그러나 B와 C 등은 이 시기에도 준코를 지독하게 괴롭혔다."고 밝히긴 했다. 하지만 이들은 "우리는 A에게 대항할 수 없었기에 따른 것뿐, 우리도 피해자다."라는 망언을 지껄였고 심지어 이게 받아들여진 건지 지나치게 가벼운 형량을 받았다. 애초에 가해자들 중 자기 죄질에 상응하는 형량을 받은 놈은 없지만 말이다.

2004년에 4년형을 선고받았으니 출소한지 20년이 되갈텐데도 근황에 대해 전혀 알려진 게 없다. 두 번이나 감옥에 다녀왔으니 웬만해선 밖에 나오지 않고 조용히 살고 있겠지만 다른 가해자들처럼 죽을 때까지 평생 욕을 바가지로 먹을 것은 변함없을 것이다.

그의 현재 사진으로 알려진 창문을 닦고 있는 사진은 본인이 아니며 단지 개명 전의 이름인 '오구라 유즈루'의 동명이인이다. 앞서 말했듯 진범은 카미사쿠 조로 개명했으며 해당 사진을 보면 왼손의 손가락이 정상적으로 5개이기 때문에 그의 사진이 마치 범인인 것처럼 와전되는 바람에 동명이인인 당사자는 곤혹을 치렀다고 한다.

10.3. 소년 C

파일:미나토 신지.jpg
본명: 미나토 신지(湊 伸治)
출생: 1972년 12월 16일 ([age(1972-12-16)]세)
피해자의 감금 장소를 제공한 인물.

범인들 중 최연소이며 피해자 보다도 1살 연하이다.[75] 그의 큰아버지는 야쿠자 고위 간부였고 부모는 일본공산당 소속의 진료소 간호사로 근무했으며 공산당 기관지 아카하타(적기)에서 표창을 받기도 하는 등 열성적인 일본공산당 당원이었다는 것이 밝혀졌다. 해당 사건이 전국적으로 알려지고 부모의 배경 등 사건의 전모가 드러나기 시작하자 일본공산당 및 아카하타는 미나토 신지의 부모를 제명한 뒤 "이 사건과 공산당은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란 문장을 기관지에 실었는데 정치 공세로 사용하려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76]

약 160cm정도의 왜소한 체격으로 중학생 때 농구 선수였지만 고교 진학과 동시에 중퇴했다. 준코를 감금했던 곳이 미나토 신지의 자택 2층 방이었다. 해당 방에서 사건 이후에도 거주하는 것으로 확인된다. 네 명의 주범들 중 유일하게 준코와 아는 사이였으며 전부터 끊임없이 준코를 향해 "내가 가질 것이다"라고 얘기해 왔다고 한다. 또 초기에는 함께 게임을 하거나 타인이 보면 친해 보인다고 할 정도로 아주 나쁜 취급은 안 했던 것으로 보이며[77] 준코 또한 유즈루에게 "미나토 군은?"이라고 물었다가 폭행당하기도 했다.

본인도 폭행에 가담했으면서 준코가 고통스러워하는 걸 불쌍하다고 여겼지만 점점 그 모습이 재밌어서 더 심한 학대를 했다는 점에서 그도 위의 2명만큼은 아니지만 심각한 가학성 변태로 보인다. 감금에 가담했다고 볼 수 있는 형인 미나토 코우지[78]는 동생과 감금 등의 혐의로 위 사건의 공범으로 기소됐지만 직접적인 가담이 없었다는 이유로 어떠한 불이익 없이 구속되지도 않고 소년보호 처분을 받는 것으로 끝났고 근황은 알려지지 않았다. 준코가 붙잡힌 걸 알면서도 적극적으로 구출하지 않았던 부모 역시 무죄 판결이란 말도 안 되는 결과가 나왔다.

2006년 루마니아인 여성과 결혼해 오사카로 이사했다고 한다. 일설에 따르면 결혼한 상대가 리히텐슈타인 국적이라고 한다. 1995~1996년경 아야세의 태국 요리점에서 무에타이 파이터로 데뷔한 것을 시작으로 프로 선수로 뛰었으며[79] 하루 10시간 넘게 훈련하는 등 프로 무에타이 파이터로서도 결코 약한 편이 아니었다.[80] 그의 본성이나 행적이 숨겨지는 것도 아니라 등장할 때부터 야유당하기 일쑤였다고 한다. 2001~2002년경 은퇴했다.

2007년엔 간병인 자격을 취득했고 네야가와의 한 파칭코 가게에서 일하고 있었음이 확인됐다. 이후의 근황은 알려지지 않았다가 2018년 8월 19일 사이타마현에서 주차 문제로 같은 날 32세의 한 남성을 삼단봉으로 내리치고 또 다른 1명을 흉기로 수 차례 찔러 살인미수로 긴급 체포됐다는 기사가 나왔다.

2019년 3월 5일 사이타마현 지방재판소에서 이루어진 재판에 따르면 미나토 신지는 살이 붙은 중년 남성의 모습이었고 "패거나 찌르긴 했어도 죽일 생각은 없었다"고 항변했다. 처음에는 '칼로 찔렀다는 건 인정하나 삼단봉으로 내리친 사실은 인정할 수 없다'면서 매우 불손한 태도로 재판에 임했고 이윽고는 '칼로 찌른 적도 없다'는 편지를 사전에 재판관에게 보내는 등 범행을 완전히 부정했다. 해당 사건은 야후 재팬 키워드 실시간 1위를 기록해 다시 그의 이름을 세간에 오르내리게 했다.

사건을 목격한 주민들에 따르면 결코 주차 문제 같은 게 아니었다고 한다. 미나토 신지는 전부터 사람을 기분 나쁘게 노려보면서 고함을 지른다든가 아침이나 새벽 3시에 아래층의 천장 전등이 흔들릴 정도로 쿵쿵 뛰어 잠을 깨웠고 올라가 보면 문을 열어주지 않고 대답도 없어 다시 내려가면 또 다시 괴성을 지르면서 쿵쿵 뛴다든가 하는 짓을 끝도 없이 반복해 문 앞에서 만나 따지려고 했지만 "들려?"라고 말하며 지나간다든가 처음 보는 사람에게 도널드 트럼프 이야기를 꺼내며 말을 걸어 오거나 차 안의 짐을 빼고 있는 사람에게 차 문을 쾅 닫아 버리는 등 이웃들을 온갖 방식을 동원해 집요하게 괴롭혔다고 한다. 피해자는 격렬하게 덤벼대는 미나토의 목을 감아 제압하려고 했지만 이때 미나토가 소지하고 있던 칼을 꺼내 난도질한 것. 주민들이 몰려들자 달아났으나 곧 현행범으로 체포됐다. 해당 사건의 공판을 보러 간 사람은 그가 징역 1년 6개월,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고 한다. #

10.4. 소년 D

파일:와타나베 야스시.jpg
본명: 와타나베 야스시(渡邊恭史)
출생: 1971년 12월 18일 ([age(1971-12-18)]세)
중학교 1학년 때 집단괴롭힘을 당했지만 친누나가 히로시와 교제를 시작하게 된 것을 계기로 히로시와 친해지면서 집단괴롭힘이 거짓말처럼 멈췄다고 한다.[81] 어린 시절부터 잭나이프쌍절곤을 소지하고 다니거나 수업 중에 돌멩이를 던져 창문을 부수거나 남의 오토바이를 절도하는 등의 문제 행동을 보였다고 한다. 실제 준코를 강간하는 일에는 적극 동참했지만 그 외에 폭행을 당하는 동안엔 고지 방에서 게임을 했다고 한다. 히키코모리로 살아가게 된 것으로 알려진 한편 용접공, 공조 장치 설치 등의 일을 전전하고 있다는 제보도 있는 것으로 보아 어떻게든 먹고 살려고 하는 걸로 보인다. 요코하마시 카나자와구에서 친누나의 집에 얹혀사는 듯. 정황상 야스시의 누나는 히로시의 범행으로 인해 히로시와 파혼하고 다른 남자와 결혼한 것으로 보인다.

야스시는 비교적 폭행 가담이 적었는데 강간할 때를 제외하면 준코를 불쌍한 눈으로 쳐다봤다고 한다. 하지만 준코를 도와주지는 못했는데 이유는 히로시, 유즈루, 신지에 비해 야스시의 힘이 많이 약해서 도와줬다가 보복당할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82] 형무소에서 이 사건에 가담한 일이 알려져 심한 폭행을 당해 눈과 다리에 장애가 생겼다고 한다.

그래도 가해자들 중 그나마 반성하는 모습[83]을 보여 4명 중 그나마 나은 취급을 받는다.[84]

히로시와 연인 관계였던 야스시의 친누나는 남동생을 대신해 유가족들을 찾아가서 정식으로 사과하고 준코의 묘소를 찾으려고 했지만 유가족들의 거절로 무산됐다고 한다. 유즈루의 어머니가 준코 무덤을 부순 적이 있어서 준코의 가족들은 무덤을 비공개로 하고 있다.

그렇지만 그도 악인이라는 건 변하지 않아서 2018년 8월 24일 살인미수를 저질러 또 체포됐다.[85]

10.5. 소년 E

  • 본명: 나카무라 데쓰오(中村 哲夫) → 이와이 데쓰오(岩井 哲夫)
  • 출생: 1971년 ([age(1971-12-31)] ~ [age(1971-01-01)]세)

히로시의 협박 때문에 강간에 가담한 공범. 가담에 거부하다가 주범들에게 폭행당했다. 중년이 된 후에는 고향의 술집에서 당시 사건을 별 생각없이 떠들고 다닌다고 한다. 여기서 알 수 있겠지만, 이쪽도 악인이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10.6. 소년 F

  • 본명: 이하라 고이치(伊原 孝一) → 가키히가시 고이치(垣東 孝一)
  • 출생: 1972년 ([age(1972-12-31)]~[age(1972-01-01)]세)

E와 함께 C의 방으로 불려와 강간에 가담했다.[86] 사건 이후 소년원에 송치됐다. 출소 후 성인이 돼서 결혼해 딸 둘을 낳아 사이타마현 우라와시(현 사이타마시)에 거주했으나 잦은 문제와 범죄 행각을 일으켜서 쫓겨나 사이타마현 이루마시 또는 도쿄도 히노시로 이사간 것으로 밝혀졌다.

10.7. 기타 공범들

확실하게 확인된 공범으로는 남성 17명, 여성 1명이 있다. 위의 6인 이외에 타케우치 쿠니, 아이다 코이치, 츠즈키 히로시, 카도 아키라, 하기와라 카츠히코, 무라카미 아키히로, 나무 류스케, 이시카와 아카네[87] 등 대부분 극청회 소속이었다. 이들은 살인과 학대에 적극 가담하지는 않았다는 이유로 공범임에도 불구하고 어떤 처벌도 받지 않았다. 그들은 준코를 강간하는 일에만 참여하는 줄 알고 불려왔다가 엮이게 됐다. 공범 중 망보기 역할이었던 소년의 인터뷰에 따르면 '탈출시킬 기회도 있었고 아주 간단한 일이었지만 그들이 무서워서 하지 못했다'[88]고 했다. 이들은 취재하러 온 기자들을 폭행하고 온갖 폭언을 퍼부었다고 한다.

그의 말에 따르면 히로시 패거리는 '사람을 샌드백처럼 장소 가리지 않고 어떻게 저 정도로 할 수 있을까' 할 정도로 어마어마하게 구타하고 상대가 울면서 용서를 빌거나 기절해도 폭행을 계속했다고 한다. 준코가 "나 이제 어떻게 돼요?"라고 묻자 공범 소년은 그들이 무서웠기 때문에 "명령 받아서 하는 일이니 어쩔 수 없다"고 답했다고 한다. 주범들은 부하들이 약간이라도 명령을 듣고 머뭇거리거나 준코를 적극적으로 폭행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면 신발을 집어던지거나 2층에서 베란다 밖으로 집어던지거나 준코가 보는 앞에서 집단폭행을 가하는 등 말 그대로 물리적으로 위협했다고. 때문에 도저히 대항은커녕 신고할 엄두조차 낼 수 없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들은 준코가 어떻게 당했는지 알게 되자 충격을 감추지 못했다고 한다.

11. 판결

이 사건의 심각성이나 기타 죄책을 감안해도 일본 사법부의 판단은 엔자이와 직접적으로 유사하진 않더라도 일종의 병폐고 소년범이라고 해도 과도한 선처를 한 점을 보아 솜방망이 처벌이라고 볼 수 있다.

설사 사형이나 이에 준한 극형이 나올 성질의 범행이 아니더라도 법원의 양형 이유 등을 살펴보면 일단 도쿄 지방검찰청은 미야노 히로시부터 와타나베 야스시까지 총 4인을 "상호 공모에 의한 미필적 고의에 따른 살인, 외설 목적의 유괴, 약취, 감금, 강간, 사체유기 등의 각 죄로 피고인들이 가정 형편에 있어서 불우하게 성장했음을 감안해도 일본 소년범죄 사상 보기 드문 중대하고 흉악한 범죄를 저질러, 인간의 탈을 쓰고 어찌 이런 행위를 할 수 있는지 의심이 갈 정도로 매우 잔악하고 무자비하게 피해자에게 고통을 안겨 사회적인 물의를 빚은 점을 참작해야 한다"면서 피고인 A를 주범으로 공소 사건의 발단을 만든 배후라며 무기징역을, 피고인 B를 "피고인 A의 최측근으로서, 피고인 A의 버금가는 지위로 하여금 공소 사건을 주동해, 종국에는 공소 사실에 기재된 범행을 자행하는 데까지 이르렀다고 볼 수 있다"며 징역 13년을, 피고인 C와 D는 준코에 대한 범행에는 가담했지만 피고인 A와 B의 주동 하에서 소극적으로 응한 점을 참작해 각 부정기형으로 징역 장기 10년, 단기 5년의 형을 법원에 구형했다.[89]

하지만 1심 재판부는 "피고인들이 피해자를 위 사건 공소 사실의 범죄로 인해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에 이르렀다는 검찰의 주장은 인정되고, 그 범죄의 심각성 또한 반인륜적이여서 형사 책임은 무겁지만 아직까지 미성숙한 미성년자들에 의한 집단 범죄의 특수성을 고려했을 때 극단적인 사태에 놓인 상황에서 정상적인 사리 판단을 하지 못해 불행한 측면에 빠졌음을 감안해야 하고, 수감 생활 도중 반성문을 제출한 것을 보아 교정의 필요성이 인정된다"며 소년 A는 무기징역에서 법원 선고가 가중 감경되어 1심에서는 징역 20년, 2심에서 최종적으로 징역 20년이 선고되었다. 심지어 돈을 받고 범인들을 변호해 주겠다고 자청하는 변호사들이 줄을 섰다고 한다.[90]

2심 도쿄고등법원에 이르러 "피고인들이 반성하고 이후의 소년범으로서 교정 등의 갱생 필요성을 감안해도 유족이 엄벌주의로 처벌하기를 탄원하고 있고 해당 사건의 죄책이 사회적 통념에 비춰보아 매우 흉악하고 중하다"면서 1심에서의 양형이 가중돼 소년 A에게 징역 20년, 소년 B에게 장기 10년, 단기 5년, 소년 C에게 장기 9년, 단기 5년, 소년 D에게 장기 7년 단기 5년이 확정됐지만 유일하게 상고해 1심으로 확정됐다.

재판 기록에 의하면 실제론 이들 이외에도 가담한 100여 명의 가해자가 더 있지만 그들은 직접적으로 사건에 가담하지 않은 점을 고려해 대부분 약식절차로 처분돼 가볍게 처벌받는 것으로 끝났다. 그리고 동생의 범행을 방관, 방치했다고 볼 수 있는 C의 형도 피고인 4인의 공범으로 살인 및 사체유기와 강간 혐의로 불구속 기소됐지만 소년보호처분을 받는 것으로 끝. 이들은 일본에 소년법이 없었다면 사형이 선고되었을 자들이다.[91]

당시 기록에 따르면 법정에서도 그들은 "준코를 인간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고 심지어 그녀가 죽는다는 생각조차 할 여지가 없었다."고 말한 것으로 적혀 있었다. A는 "준코는 단지 운이 없어서 바보 같이 잡혔던 것뿐이다."라고 말하고 반성조차 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나가면서 자신을 취재하러 온 기자들에게 적반하장으로 "억울한 사람을 이렇게 끌어들이고 부끄럽지도 않냐"고 하고 욕설까지 퍼부었다. 게다가 그는 눈물을 흘리긴 했으나 그것은 피해자에게 저지른 짓에 대한 반성의 눈물이 아니라 "병신 같이 잡혀 버린 내 자신이 불쌍해서" 흘린 눈물이었다고 한다.

분노한 준코의 부모는 피고인 측의 면회 신청 및 성묘를 금지했고 그 비통한 심정을 재판소에 토로했다. 준코의 아버지는 재판 증언 당시 "피고인에 대한 원 판결의 과형은 너무 가볍다"고 했다. 그나마 형량을 제일 많이 받은 A도 준코의 부모 입장에선 죽일 놈인데 나머지도 미성년자라고 해도 가벼운 형벌을 받았다.

다만 소년법의 적용뿐만 아니라 사형 판결을 내리는 일본 사법부의 관행에 비춰 봤을 때 판사들이 사형 판결까지 나올 성질이 아니라고 판단했다는 말도 있긴 하다. 다수를 살해하거나 유괴살인 혹은 살인 전과가 있는 상황에서의 추가적인 살인은 사형 선고가 원칙이지만 그 외의 살인에 대해선 가급적이면 사형 선고를 회피하거나 주범만 사형을 선고하는 것이 일본 사법부의 관행이었기에 20년 이상 선고가 불가능한 소년법의 적용과 더불어 A에게만 엄한 판결이 나온 것이란 분석이다. 현재도 별 차이는 없어서 간혹 나오는 사형 집행 기사를 보면 사형수 대부분이 사람을 두 명 이상 죽이거나 살인 재범, 유괴살인 등을 저지른 범죄자다.

A를 포함한 가해자 4명은 출소했지만 대부분 사회에 적응을 못 하고 있으며 정신병에 시달리고 있다고도 한다. 게다가 [age(1989-01-05)]년이 지난 후에도 인간 말종급 강력 범죄를 저질러 교도소로 재수감되기도 했다.

12. 관련 매체

12.1. 다큐멘터리

1989년 방송된 다큐멘터리.
초반에 소년 A의 어머니가 기자의 질문에 당황하며 도망치는 모습이 보인다.
1995년에 발매된 다큐멘터리 비디오.
피해자 준코의 입장에서 사건을 바라본다.
범행을 재연하는 영상이 있기 때문에 일본어를 모르더라도 보면 사건의 이해에 도움이 된다.
현재 연령제한이 걸려있지만 아래의 링크에서 볼 수 있다.
(1시간 8분 분량의 원본 영상이 약 10분씩 나눠져 올라와있다.)
1, 2, 3, 4, 5, 6, 7

12.2. 영화

  • 나카무라 히로무 감독의 영화 콘크리트
    2003년 출판된 논픽션 《17세, 악의 이력서》를 바탕으로 2004년에 제작된 영화. 제작사에 수많은 협박 전화 등이 와서 개봉이 미뤄졌으며 당사는 '희망이 없는 청소년들의 미래를 그린 의도가 잘 받아들여지지 않았기에 유감'이라고 말했다.
    이 영화는 이 사건을 범인 소년들의 입장에서 바라보고 있다. 자세한 건 영화 참조.

12.3. 만화, 소설

  • 진 현대엽기전
    상업지 작가인 우지가 와이타가 그린 만화이다. 영화보다도 더한 막장. 작가가 서문에 "이런 사건이 있었음에도 묻히고 있는 데다, 이런 일을 세상에 알려서 다시는 같은 사건이 벌어지지 않도록 경각심을 주기 위해 본 작품을 그렸다"고 적어 놓기는 했으나, 피해자가 납치당한 뒤 강간, 폭행, 고문, 살해당하는 모습을 그림으로 그려놓은 것이 내용의 전부다. 피해자가 강간당하는 모습을 노골적으로 성적으로 묘사하고 있으며 폭행과 고문을 적나라하게 전시하고 있다. 경각심을 주기 위해 그렸다는 말은 핑계일 뿐 작가료나물 소비자들의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그린 작품이다.
  • 천사의 나이프
  • IWGP 시리즈 2권 <소년 계수기> 中 '물 속의 눈동자' 편
    치하야 여고생 감금 사건이라는 이 사건에서 모티브를 따 온 사건이 등장한다. 성폭행 후 성기에 불을 붙여서 화상을 입히거나 하는 등 비슷한 부분이 많다.
  • 소년탐정 김전일 시즌 2의 에피소드 중 하나인 켄모치 경부의 살인의 중심 소재인 3년 전의 사건의 모티브이다. 그 때문에 여기 나온 가해자들도 실제 사건의 가해자들 못지 않은 말종 흉악범들이다. 다만 이 만화가 청소년들도 보는 만화이다 보니 해당 작품 내에서의 3년 전 사건의 수위는 실제 사건과 비교하면 많이 순화된 편이다. 물론 그 피해자인 토가미 마리나도 몹쓸 악행들을 당하다가 억울하게 세상을 떠난 건 변함없는 사실이다.
  • 17세.(17歳。)
    후지이 세이지가 글을 쓰고 카마타 요지가 그림을 그린 합작. 부제는 '여고생 감금 살인 사건'.
    모티브는 여고생 콘크리트 살인 사건이지만 후지이 세이지가 여러 청소년 범죄에 대해 취재한 것을 바탕으로 재해석됐다. 청소년 범죄는 어째서 일어나는가, 왜 아무도 피해자를 구하지 못했는가, 법과 사회의 문제점, 어떻게 하면 같은 범죄가 다시는 일어나지 않을까 등에 대해서 깊이 있게 다루고 있다.
  • Crónica de una muerte anunciada(예고된 죽음의 연대기)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가 쓴 실화를 바탕으로 한 소설인데 여기선 주인공이 살해당할 것을 알고도 그대로 방관한 마을 사람들이 나온다. 어찌 보면 여고생 콘크리트 살인 사건과 비슷하다. 방관한 이유도, '농담인 줄 알았다.' 등의 변명으로 일관한 것도 비슷하다. 주인공이 죽기 직전에 주인공에게 경고하기 위해 주인공을 찾아다닌 의대생이 있기는 했지만 말이다.
  • 휴먼버그대학교
    이쥬인 시게오 에피소드에서 일부 각색되어 묘사되었다. 주범은 20년 동안 복역하고 피해자의 아버지를 폭행해 돈을 빼앗았다 피해자의 아버지가 의뢰를 걸어 능지형 고문을 43일 동안 받고 죽는 것으로 표현된다.

12.4. 영화

12.5. 노래

13. 유사 사례



[1] 범행 중에 생일이 지났다.[2] 범행 중에 생일이 지났다.[3] 남성 17명, 여성 1명[4] 미야노 히로시: 징역 20년 (2006년 가석방), 오구라 유즈루: 징역 5~10년 부정기형 (1994~1999년 사이 출소), 미나토 신지: 징역 5~9년 부정기형 (1994~1998년 사이 출소), 와타나베 야스시: 징역 5~7년 부정기형 (1994~1996년 사이 출소)[5] 나가야마 기준에 따르면, 일반적으로 1명이 살해당하면 사형을 선고하지 않는다.[6] 실제로 미야노 히로시는 야쿠자 조직인 극동회 청년부 산하 조직인 극청회의 두목이었다. 그러나 현재는 극청회에 관하여 아무 소식이 없는데 히로시가 수감된 후 히로시 본인이 조직에서 파문이나 절연을 당했을 확률이 높아 히로시가 두목인 극청회도 아예 상부에서 파문 또는 절연되어 와해됐거나 다른 조직원이 새롭게 조직을 이끌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리고 피해자 준코가 이 사건으로부터 며칠 전 미야노 일가의 만행에 대해 "지 할아버지와 고모부를 잘 팔아먹는다'"고 비아냥거려서 이를 극청회 조직원이 엿듣고 두목이었던 히로시에게 말했다고 하는데 이것이 사실이라면 아마 준코를 납치한 이유가 이 때문일 가능성도 있다.[7] 다큐멘터리에서는 히로시가 준코 머리에 을 뱉어 붙이는데 실제론 껌을 씹고 있지 않았다.[8] 사실 당시 준코는 6세 연상인 카와무라(川村)라는 이름의 23세 남성과 연애 중이었다. 이 남성은 기자와의 인터뷰에 응하기도 했는데 준코의 친구와 자신의 친구가 연애 중이었고 이들 커플과 동행하여 1987년 여고생들의 여름 방학에 함께 별장으로 여행을 가면서 알게 되어 연애를 시작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이러한 사실을 굳이 극청회 패거리에게 밝힐 이유도 없고 남자친구까지 납치나 해코지를 당할 수 있으니 거짓말로 둘러댄 듯하다.[9] 바로 집 밖으로 탈출하면 됐지만 "도망치면 야쿠자에게 살해당할 것"이란 히로시의 협박이 떠올라 전화기로 향한 모양. 실제로 히로시는 "이때 준코가 짐을 싸 놓고 옷도 교복으로 갈아입은 상태였다"고 증언했다.[10] 사람이나 시체 등을 콘크리트 안에 넣어 굳히는 행위.[11] 도쿄만에 버리기 위해 소년들이 살던 아다치구에서 멀리 떨어진 도쿄만 한가운데 있는 매립지인 고토구 와카스까지 왔으면서도 구태여 코앞의 바다를 두고 공터에 유기한 이유는 밝혀지지 않았다. 바다에 유기하면 시신이 떠오를 수도 있기 때문에 자신들만 알고 있는 매립지를 선택한 것일 수도 있다.[12] TBS 테레비에서 방영했던 야쿠자 드라마. 일본판 야인시대라고 생각하면 된다.[13] 담당형사가 이 질문을 하지 않았더라면, 이 사건이 영영 묻혔을 것이다. 몇몇 사람들은 죽은 준코의 영혼이 담당형사에게 마법을 건 것 같다는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14] 이전에 유즈루와 신지 등 부하들이 여성을 납치강간치상을 저질러 소년원에 들어가 있었는데 히로시는 이들이 진상을 불었다고 착각했다.[15] 아무리 막나가는 불량 청소년이라도 부하들이 진짜로 당시 이미 자백한 것도 아니고 애초에 잡혀온 이유도 이 사건과 무관한데 이렇게까지 잔악무도한 짓을 하는 녀석은 드물기 때문에 형사가 의심하는 게 이상하지 않았다.[16] 대부분의 시신 유기 사건은 사망한 지 몇 년이 지나서 시신이 백골로 발견돼 신원 확인에 며칠씩 걸리거나 불가능한 경우가 많은데 준코의 시신은 그나마 일찍 발견돼서 바로 다음날 신원이 확인됐다.[17] 준코의 부모는 딸의 시신이라도 찾게 해 줘 고맙다면서 히로시의 담당 형사에게 감사를 표했다고 한다.[18] 불 붙인 담배로 음핵을 지졌다.[19] 츄오-소부 완행선 히가시나카노역 열차 추돌사고. 사망자는 기관사+승객 1명.[20] 아무래도 고문을 위한 것이니 비정상적으로 많은 양을 흡입하게 했을 가능성이 크다.[21] 1985년 크리스마스 라이브 영상을 보면서 분석한 결과 준코는 노래가 끝날 때까지 약 18~20번을 구타당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 구간마다 "예- 이!"가 4~5번 반복되기 때문에 준코는 반복되는 고통을 견뎌야 했을 것이다. 물론 최고 볼륨으로 올려 놓고 폭행했으니 비정상적인 소음에 고통받던 이웃 주민들은 덤. 하지만 아무도 그 집을 신고하지 않았다.[22] 억지로 웃어도 폭행은 멈추지 않는 경우가 다반사였다.[23] 넘는다고 했으니 100도 가까이로 추정. 이 정도로 독한 술을 희석시키지 않고 들이키면 식도와 위장이 화상을 입는다. 보통 소독용 알코올이 70~80%를 왔다 갔다 한다.[24] 말 그대로 소독용 알코올을 희석 없이 그냥 생으로 들이부은 것이었다.[25] 熱湯コマーシャル. 당시 기타노 다케시가 사회를 맡은 유명 예능 프로그램 SUPER JOCKEY의 대표 코너인 열탕에 들어간 시간만큼 홍보할 시간을 주는 코너를 말한다.[26] 하술되어 있듯이 준코는 납치된 날에도 크리스마스에 어머니와 함께 케이크를 만드는 것을 기다리고 있었다.[27] 영양실조가 심한 사람들은 처음에는 주로 호스나 링거를 통해 영양분을 공급받고 어느 정도 회복되면 부터 먹으면서 건강을 되찾아간다. 영양실조가 심한 상태에서 이나 우유를 먹게 되면 몸에서 거부 반응으로 토사곽란을 일으키며, 심하면 즉사하게 된다. 홀로코스트 당시 해방된 유대인들이 극도로 굶주리고 허약해진 상태에서 음식을 함부로 먹었다가 사망한 사례도 있다.[28] 테니스공보다 더 작은 크기 수준이었다고 하니 이러한 고문과 폭행이 얼마나 그녀에게 큰 고통을 주었을지 짐작조차 하기 힘들 따름이다.[29] 육안으로도 뼈가 보이는 부분이 일부 있었을 것이다.[30] 200여개 정도가 그녀의 가슴에 박혀 있었다고 한다.[31] 다큐에서도 마지막에는 준코가 소년들의 말을 잘 듣지 못한다.[32] 오열하는 여학생들 앞에 전통 의상을 입은 남자가 보이는데 일본신토식 장례에서 망자의 명복을 비는 사람이다. 그리고 준코의 친구가 추도사를 읽을 때 집 안에서 침통한 표정으로 조용히 추도사를 듣고 있는 사람이 아버지고 그 옆에서 망연자실한 채 손수건으로 얼굴을 가리고 울고 있는 사람이 어머니다.[33] 1989년의 물가를 감안하면 엄청난 액수였다. 당시 일본의 버블경제 등을 고려하면 충분히 최소 수십억 정도로 볼 수 있다. 미야노 히로후미가 금융업을 해 재산이 대단했다고 한다. 다만 버블경제 시절이어서 이 정도는 쉽게 버는 사람들도 많긴 했다.[34] 돈을 받으면 자칫 법적으로 '합의에 암묵적으로 동의했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일종의 합의금 성격이라 정말로 법적인 처벌을 원한다면 안 받아야 한다. 실제로 이런 상황에서 아무것도 모르고 가해자 측으로부터 돈을 받았다가 가해자가 재판 과정에서 참작되어 처벌을 피하거나 약한 처벌을 받는 경우가 많다.[35] 후술하겠지만 아들이 2006년에 가석방될 때까지는 그 자리에서 이불 판매업을 하면서 다른 곳으로 옮기지 않은 것으로 봐서는 이혼 후 남편과 아들과 별거했어도 도쿄에서 그대로 살아 왔던 것으로 보인다.[36] 상술했듯 C는 자신의 어머니가 준코의 집에 전화한 사실을 알게 되자 어머니를 4시간 동안 구타한 패륜아다.[37] 다만 C가 워낙 막장인지라 부모를 협박해 증거인멸을 지시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38] 당시 준코의 아버지는 범행 내용이 너무 끔찍해 아내에게 딸이 어떻게 죽었는지 자세히 알리지 않으려고 했으나, 기자들이 쉴 새 없이 찾아와 사건에 대한 내용이 담긴 칼럼 등을 보내면서 의견을 물었다. 결국 사건의 내용을 준코의 어머니가 전부 알게 됐고 누가 옆에 있어주지 않으면 자살할 것 같을 정도로 상태가 심각해졌다고 한다.[39] 소년들은 사건을 일으키기 전에도 지나가는 여성을 강제로 차에 태워 강간하거나 절도하는 등의 범죄를 90건 넘게 저질러 왔다고 한다.[40] 정황상 날짜별로 따지면 유아납치 살해사건 쪽이 먼저 발생한 사건이다.[41] 다만 공구리 문서에 나와 있듯이 콘크리트로 시체를 매장해도 악취가 나서 시신 자체는 언젠가 발견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흘러갔다면 너무 늦게 발견돼서 신원 확인조차 못 했을 것이다. 상술했듯 발견 당시 시신도 모습만으론 신원을 몰라서 A의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잔악무도한 자백을 믿고 겨우 남아 있던 지문 몇 개로 알아낼 정도였으니.[42] 하지만 오히려 미성년자들이기 때문에 더 흉악해질 수 있다. 미성년이라는 것은 제대로 된 가치관 형성이 아직 덜 형성된 시기인 만큼 어떻게 살고 어떤 환경을 겪느냐에 따라 정말 양극단으로 치달을 수도 있는 부류다. 촉법소년이랍시고 만행을 일삼는 청소년들이 많아지는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43] 1980년대 말에서 1990년대 초에 많은 낡은 아파트들이 재개발 지역으로 정해져 주민들을 다른 데로 이주시키는 건 그 당시 일본에서 흔했다.[44] 당시 일본의 가옥은 내진설계를 위해 법적으로 목조 가옥으로 지어야 해서 방음이 안 됐다. C의 집 역시 마찬가지였으며 수십 채의 주택이 따닥따닥 붙어 있는 주택가였다.[45] 2019년에도 500여 점에 달하는 인간과 동물의 백골이 민가에서 발견됐고 90년대 최악의 소년 범죄라고 불리는 사카키바라 사건의 범인이 거주하는 것으로 드러났다.[46] A는 유도부, B는 하키부, C는 농구부[47] 2017년 일본의 한 기자가 그녀의 여동생에게 그의 사진을 받아 신문에 게재했었는데 40대 후반의 중년임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도 온몸이 상당한 근육질인 것을 보아 아직도 운동을 즐겨하는듯 하다. https://images.app.goo.gl/R1kEx4kD2w1tYfB16[48] 그는 이때에 대해 "난폭함과 무력을 강조하고 싶었다"고 했다. 하지만 그도 심각한 불량배였고 이들보다 더 심각한 범행들을 끝도 없이 저지르고 다녔다.[49] 일본에서는 법원의 허가를 받으면 성씨를 변경할 수 있다. 다만 그러기 위해선 해당 집안의 명시적인 동의가 있어야 한다.[50] 뇌를 둘러싼 거미줄꼴 막인 지주막이 여러 이유로 인해 두 개로 나뉘어지고 그렇게 생긴 공간에 물혹이 차 낭종이 발생하는 것이다.[51] 2020년대 한국 중1 남학생 평균키가 160cm 안팎이므로 1980년대 일본인이 만 12~13세에 160cm 정도면 평균 이상의 키다. 체격이 어느정도 있어야 하는 운동하는 사람치고는 미야노 히로시가 왜소했다는 의미.[52] 도쿄 전체를 통틀어서 동체급에선 최강이었다는 의미.[53] 또한 미야노 히로시의 사진을 보면 만두귀가 아닌데, 그만큼 유도에 재능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54] 85kg의 바벨을 1분 동안 머리 위로 40회 들어 올리도록 하거나 살충제 스프레이 캔에 라이터를 대고 화염방사기처럼 흩뿌리는 등 도를 넘는 것이었다고 한다.[55] 넘었다고 하니 100명은 될 것이다. 그와 그 패거리는 미인들만 타겟으로 삼았다고 한다. 아마 준코가 희생양이 된 이유는 그녀가 미인이었던 점도 한몫 했을 가능성도 있다.[56] 신주쿠 카부키초를 근거지로 하는 야쿠자 조직. 현재 약 450명의 구성원이 존재한다.[57] 일하던 꽃가게가 극동회 간부의 가게다. 후일 이 가게의 주인인 43세 극동회 조직원은 아동복지법 위반으로 기소됐다. 이유는 히로시 패거리가 밤까지 가게에서 일했다고 진술했기 때문이다.[58] 어머니 미야노 시즈에는 이혼 후 남편과 아들과 별거에 들어갔음에도 2006년까지 다른 곳으로 이주하지 않고 주변에서 그대로 살다가 아들이 석방됐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찾아올 것이 무서웠는지 주소도 철저히 비밀로 부치고 이사를 갔다. 이후 신흥 사이비 종교에 열광하게 되었다고 한다.[59] 파칭코 필승법으로 사기를 쳤다고 한다.[60] 반면 일당들 중 가장 힘이 약한 와타나베 야스시는 형무소에서 폭행을 당해 장애가 생겼다.[61] 출소 후 그와 친해진 사람들 모두 히로시가 콘크리트 살인사건의 범인이란 걸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고 하며 그가 살인사건의 주범이라는 소문을 듣고 한 명이 떠 보자 창백해지면서 연락이 끊겼다고 한다.[62] 물론 사기로 먹고 산다는 것 자체가 삶이 심각하다는 뜻이고 끝은 파멸이니 호의호식이니 할 리는 없다. 경찰에선 그의 사회복귀를 위해 수감 전 거주지에서 떨어진 곳에 집이나 일자리를 알아봐 줬다고 한다. 물론 주민들의 반대는 덤.[63] 그도 입양되는 형식으로 성을 바꾼 것으로 보이는데 그를 입양한 카미사쿠는 청소년 범죄자들이 반성하고 사회 적응이 가능하도록 도와주는 사람이다. 의도는 좋았으나 이 극도로 변태적인 사이코패스에겐 소용이 없는 일이다.[64] 다만 인간의 손뼈는 매우 섬세하고 약해 평생 복싱으로 주먹을 단련해 온 마이크 타이슨도 맨손으로 사람을 패다가 주먹이 골절될 정도다. 고속 주행 중 노후 트럭에서 떨어지는 판스프링도 뚫지 못할 정도로 튼튼한 앞유리를 맨손으로 파손시킨다는 것은 과장일 확률이 높다. 아니면 손이 다치니까 시도를 안 할 뿐이거나.[65] 차량의 앞유리는 아치형인 데다 옆유리와 두께, 강도 측면에서 비교가 안 되게 두껍고 단단해서 망치로도 깨기 어렵고 중량급의 격투기 선수들조차 맨주먹으로는 깰 엄두조차 내지 못한다. 배우 조정석 역시 운동을 잘 하고 탄탄한 몸매를 가졌음에도 영화 뺑반 촬영 당시 차량 앞유리를 골프채로 손쉽게 깨는 것처럼 나오지만 실제로는 20대 가량 가격해야 균열이 생기면서 파손됐다고 한다. 반면 차량 옆유리는 창문 유리나 얇은 나무판, 기껏해야 타조알 정도라서 건장한 성인 남자라면 일격에 파손되며 중학생이나 여자라고 해도 몇 대 치면 부서진다. 다만 강도 자체는 약해도 날카로워진 유리에 의해 다칠 수는 있다.[66] 상술된 대로 그는 중학생 때 고등학생 폭주족 두 명과 시비가 붙어 일방적으로 맞고 있었는데도 절대 싸움을 멈추지 않을 정도로 깡과 맷집이 좋은 인물이었다. 그런데도 히로시를 잘 따랐다는 것에서 히로시가 얼마나 위험한 인물이었는지 알 수 있다.[67] 당시 일본의 비행 청소년 중에는 잔악한 가정폭력을 일삼는 경우가 부지기수였다고 한다.[68] 하지만 이미 1999년부터 2001~2002년까지 컴퓨터 관련 업체에 채용된 적이 있다. 2004년 재범 당시 이곳 직원들에 따르면 출소 후에도 깡패처럼 산 모양이고 실제 야쿠자 사무실에도 드나들었다고 한다.[69] 당시 그 중국인 여성의 부모가 그의 실체를 알고 결혼을 결사반대했는데 중국 공항까지 흉기를 들고 쫓아가서 그녀의 부모를 위협하는 난동을 일으켜 중국 경찰에 체포되기까지 했다. 이들의 범죄가 해외까지도 알려진 셈이다. 하지만 별다른 조치나 처벌은 취해지지 않은 모양.[70] 사실은 자신의 애인과는 어떠한 관계도 없었다.[71] 아버지가 검찰 고위 간부인 점을 생각하면 그 빽을 이용해서 중형을 피했을 가능성도 있다.[72] 하지만 그가 주범이라면 '어떻게 미야노가 주범격으로 기소됐다는 건가'라는 의문이 생긴다.[73] 사건이 진행 중이던 12월경 미야노 히로시가 "납치한 지 1달은 된 거 같은데, 온몸이 피투성이에 피고름 때문에 썩은 냄새가 나서 먹을 수도 없게 됐으니 그만 돌려보내자"고 말했다. 하지만 "신고할 수 있으니 위험하다"며 미야노 히로시를 말린 오구라 유즈루 때문에 준코는 집에 갈 수 없게 되었다.[74] 피해자가 납치되기 17일 전 11월 8일에 19세 여성을 히로시 패거리와 함께 납치했는데 이때 그가 "소년원에서 출소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오오아라이에 가자", "오오아라이의 파도가 높고 거칠다"고 말하면서 으름장을 놔 도망 의지를 상실케 한 뒤 패거리들이 매우 난폭하고 거칠게 집단 강간을 했고 금품을 빼앗은 뒤 나체가 된 여성을 버려두고 도망쳤다고 한다. 이때 피해 여성이 영구장애를 입었다는 말도 있다. 여러모로 그들이 얼마나 악질인지 알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고 준코가 죽고 난 뒤 히로시가 3월 29일 네리마 소년 감별소에서 조사받았던 사건이 이 사건이다.[75] 준코를 납치한 당시엔 15세였으나 범행 도중 생일이 지나 16세가 되었다.[76] 사실 일개 공산당원의 자식이 벌인 비정치적 범죄의 책임을 공산당과 연관시키는 건 무리수에 가깝다. 이미 타 가해자의 부모는 다른 정당의 정치인이기도 했고.[77] 초반에 신지와 준코가 밖에 나갔다가 집으로 들어올 때 신지의 아버지는 준코가 아들 여자친구인 줄 알았다고 한다.[78] C의 형이 준코를 도와주기 위해 준코가 있는 방을 찾아갈 때마다 준코는 도움을 요청했지만 그는 겁에 질린 채 그냥 가 버렸다.[79] 사건 당시에도 그의 방에는 각종 권투 훈련 기구와 아령, 덤벨 등이 있었다고 하며 이것들은 준코를 고문하는 데 쓰이기도 했다.[80] 한국에는 전적이 변변치 않았다고 알려지기도 했지만 일본 기사를 뒤져보면 45전 9패였다고 한다.[81] 당시 아다치구는 야쿠자, 청소년 야쿠자, 폭주족 등이 꽉 잡고 있는 지역이었다. 이곳에서 야쿠자 출신 정치인인 조부와 야쿠자 고위 간부 고모부를 빽으로 둔 히로시의 영향력은 고작 10대였음에도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그런 히로시의 약혼녀가 야스시의 누나였기 때문에 함부로 야스시를 건드릴 수 없었을 것이다 .[82] 그러나 힘이 강했다면 준코를 동정하는 여지는 있어도 가담한 폭행은 변하지 않았을 것이다.[83] 준코가 가혹행위를 당하고 난 뒤 자신에게 언제 집에 돌아갈 수 있냐고 질문했던 게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며 눈시울을 붉히기도 하였다.[84] 하지만 그도 살인 미수를 저질렀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역시 그 놈은 그 놈이다'라고 대차게 까였다.[85] A, B, C는 출소 후 저지른 범죄의 처벌 유무라도 공개됐지만 D는 주범들 중에서도 근황도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고 이 살인미수 사건으로 받은 처벌도 알려지지 않았으나 아마 C와 비슷한 처벌을 받았을 것으로 예상할 수 있을 것이다.[86] 이후 코이치가 집에 귀가해 형에게 모든 사실을 털어놓고 그의 형이 경찰에 신고해 2명의 경관이 C의 집에 방문했으나 A 패거리의 거짓말에 그냥 돌아갔고 사건이 밝혀진 후 해당 경찰들은…[87] 위에 나온 여성 1명이다. A와 함께 준코의 얼굴에 매직으로 수염을 그리며 놀렸다.[88] 소년들은 밤늦게까지 놀다가 늦잠을 자기 일쑤였는데 그 틈을 타서 몰래 준코를 밖으로 내보내고 망을 보는 것이었다.[89] 이 사건이 일본 사회에 알려지기 시작한 무렵에 검찰은 위 소년 4인을 소년부에 송치했다가 소년부 판사의 역송치 결정으로 일반 형사재판을 진행하게 된 것이라고 한다.[90] A는 구치소에 있는 동안 어떤 책을 읽곤 자신이 한 일이 얼마나 큰 중죄인지 깨달았다며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그러나 위에 서술했듯이 출소 후에도 범죄를 저지르는 등의 행보를 일으킨 것을 보아 거짓된 눈물일 수도 있다.[91] 다만 "이런 극단적인 일화 때문에 소년법을 폐지하는 건 UN 아동권리협약으로 무리"란 게 일단은 일반적인 주장이다.[92] 피해자가 가혹행위를 당한 기간도 대략 40일 정도고 가해자가 4명이라는 점, 그리고 온갖 극악무도한 육체적, 정신적, 성적 가혹행위가 자행된 것까지 굉장히 유사하다.[93] 이 사건은 가해자가 4명이라는 공통점이 있고 피해자가 1명이지만 고의적인 살인이라는 점과 가해자와 피해자가 모두 남성이라는 차이점이 있다. 이 사건의 주범격인 하기와라 카츠히코(19)와 우메자와 아키히로(19)에게는 무기징역을, 무라카미 히로키(19)에겐 징역 10년을 선고하고 비교적 혐의점이 작은 소년(16)은 소년원에 수감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