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30 18:26:36

기타노 다케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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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333333><colcolor=#fff> 기타노 다케시
[ruby(北, ruby=きた)][ruby(野, ruby=の)] [ruby(武, ruby=たけし)] | Takeshi Kitano
파일:기타노 다케시.jpg
예명 ビートたけし (비트 다케시, Beat Takeshi)[1]
출생 1947년 1월 18일 ([age(1947-01-18)]세)
연합군 점령하 일본 도쿄도 아다치구
국적
[[일본|]][[틀:국기|]][[틀:국기|]]
신체 168㎝, 74㎏, O형
학력 메이지대학 공학부 (기계공학 / 명예 학사[2])
직업 게닌, 사회자, 배우, 영화감독, 교수[3]
소속사 오오타 프로덕션 → 오피스 기타노 → TN 곤[4]
데뷔 1972년
배우자 마츠다 미키코(이혼; 1979년~2019년)[5]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우리들은 익살족에 다케시와 같이 출연한 것]]을 제외하면 외부에 언급이 일절 없었다. 미키코와의 결혼 생활에 대해 다케시는 공개적으로 "아내와는 일종의 '중매결혼'으로 결혼했기 때문에 결혼 생활에 대한 애정이 별로 없다."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다케시의 말에 따르면 미키코와 동거하다가 다른 여자와 사귀기 시작해서 미키코와의 동거생활을 청산하려고 하였으나 두 사람 사이에 이미 기타노 아쓰시, 기타노 쇼코라는 자녀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양가 부모님이 미키코를 책임지라고 강요했고 결국, 1983년에 억지로 마츠다 미키코와 혼인 신고를 했다고 한다. 그렇게 쇼윈도 부부 생활을 유지하다가 결국 2019년 5월 협의 이혼했다.# 전 부인에게 위자료로 200억 엔(약 2185억 원)을 넘게 줬는데 이는 일본 연예인이 위자료로 지불한 금액 중 역대 최고 금액이라고 한다. 두 사람의 이혼 이후 기자들의 취재에 의해 밝혀진 바에 의하면 기타노 다케시의 전처 마츠다 미키코는 다케시의 무명 시절에 동네 분식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부부의 생계를 책임졌고 기타노 다케시가 오오타 프로덕션에서 독립하여 오피스 기타노를 만든 후에는 오피스 기타노의 사무를 담당했었다고 한다.]
현 배우자(2020년~현재)[6]
자녀 아들 기타노 아쓰시[7], 딸 기타노 쇼코[8], 딸[9]
수훈 프랑스 문예공로훈장 1등급 코망되르 (2010년)
레지옹 도뇌르 훈장 4등급 오피시에 (2016년)
욱일소수장 (2018년)
동기 쇼후쿠테이 츠루베, 시무라 켄[10]
별명 세계의 기타노, 타케짱
링크 파일:홈페이지 아이콘.svg

1. 개요2. 일생
2.1. 학창 시절2.2. 프랑스좌 시절2.3. 투비트 시절2.4. 단독 활동과 전성기2.5. 프라이데이 습격 사건2.6. 영화감독으로서 재기
2.6.1. 연출 작품2.6.2. 다케시 영화의 특성
3. 취미 및 기호4. 혐한, 혐중 사상
4.1. 정치・역사 관련 혐한 행보4.2. 사회・문화 관련 혐한 행보4.3. 옹호론
4.3.1. 반박
5. 훈훈한 에피소드6. 어록7. 기타8.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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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기타노 다케시는 일본을 대표하는 코미디언 중 한 명이자, 영화감독, 배우[11], 작가, 화가로 활동하는 만능 엔터테이너 겸 전방위 예술가다.

수십 년 동안 아카시야 산마, 타모리와 함께 일본 코미디언 BIG 3로 일컬어질 정도로 일본에서 엄청난 인기를 누리는 코미디언인 동시에 소나티네, 하나비, 자토이치 등 자기만의 색깔을 가진 영화를 꾸준히 만들어서 세계적인 영화제에서 찬사를 받으며 90년대 일본을 대표하는 영화감독 중 한 사람으로 평가받은 일본 연예계의 최대 거물 중 한 사람이다.[12]

오랜 연예계 활동으로 일본 내에서 인지도가 무척 높아 2020년 7월 22일에 방송된 '수요일의 다운타운'의 '일본 연예인 인지도 랭킹 제2탄"에서 5위(94.2%)에 오르기도 했다. 다만, 코미디언으로서의 비트 다케시는 기본적으로 모두까기 독설가 성향이 강한지라 유명세에 비해 본국인 일본에서도 비난하거나 싫어하는 사람들이 제법 많을 정도로 호불호가 꽤 갈리는 연예인이다.

2. 일생

2.1. 학창 시절

1947년 도쿄도 아다치구에서 4남매 중 막내로 태어나 페인트 가게를 운영하는 아버지[13] 밑에서 자랐다. 어린 시절에 살던 동네는 야쿠자가 눈앞에서 사망하는 모습도 목격할 정도로 심히 막장이었는데[14] 이때의 경험이 오히려 영화를 만들 때 도움이 됐다고 한다.[15]

기타노 다케시는 어린 시절부터 수학에 조예가 깊은 우등생이었고 중고교 시절 야구부원으로 활동했을 만큼 스포츠에도 재능을 보이고 있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미성년자 시절부터 음주를 시작한 불량 학생이기도 했다.[16] 더욱이 고등학교에 진학한 후 복싱까지 배우기 시작해서 싸우는 실력이 날마다 일취월장했다고 한다.[17]

그런 다케시를 보다 못한 어머니의 설득과 격려로 다케시는 마음을 다잡고 수험 공부에 매진하여 1966년 메이지 대학[18] 기계공학과에 입학했지만 졸업 이수 학점인 140학점 중 106학점까지 수료한 상태에서 전공투[19]에 연루되어 대학에서 제적당하게 된다.[20] 사실 다케시는 본인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어머니의 권유로 대학에 진학한 것이었기에 딱히 학업에 큰 관심이 없었다고 한다. 신입생 때는 낮선 환경에 적응이 안되어 수업을 째고 카페에 죽치고 앉아서 당시 유행하던 재즈를 감상하곤 했다고. 카페 주인의 눈에 띄어서 웨이터를 하기도 했다고 한다. 학생 운동에 처음 가담한 계기도 같이 대학을 다니는 동창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다 전공투에 빠지는 것을 보고 '전공투에 적을 두면 대학 문화에 조금 적응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에서 였으며 학생 운동에 열정적으로 몰두한 것도 아니었다고 한다. 그래서 전공투 출신치고는 좌익 사상에 그다지 관심 없는 면을 보인다.

2.2. 프랑스좌 시절

학생 운동 이력 때문에 대학교에서 제적당한 후, 건물 철거공, 택시 기사, 주유소 직원 같은 고된 일을 전전하며 생활고에 시달리던 다케시는 1972년, 스트립쇼 극장 ‘프랑스좌[21]’의 엘리베이터 보이가 되었고, 프랑스좌를 운영하는 사장이자 개그 스승 후카미 센자부로를 만나게 된다. 훗날 다케시는 "예전부터 연예인이 되고 싶었지만 부모님의 반대도 있었고 자신은 이공계라서 예술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몰랐기에 단념했었다. 그런데 사람들을 웃기는 것에는 예술가로서의 자질이 딱히 필요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개그맨 데뷔를 준비하기 위해서 아사쿠사에 갔다."라고 회고했다.

다케시는 후카미 센자부로의 눈에 띄어 그의 마지막 제자가 되는데 센자부로가 사망하기 직전에 한 인터뷰에 의하면 "비록 첫인상은 내성적인 모습이었지만 손님으로 들어온 야쿠자가 행패를 부릴 때도 프랑스좌의 사장인 자신에게 혼날 때도 겁 없이 덤비는 그 배짱이 마음에 들었다"고 한다. 기타노 다케시는 그렇게 스트립쇼의 막간 무대에서 콩트를 하는 개그맨으로 데뷔했다.

아사쿠사의 전설적인 개그맨이었던 후카미 센자부로는 TV 매체에 반감을 가져 말년까지 대중에게 알려지지는 않았으나 아사쿠사에서는 알아주는 인물이자 많은 개그맨들의 스승이었고, 다케시는 프랑스좌에 재적했던 2년 동안 제자로서 큰 영향을 받게 된다. 비트 다케시 특유의 애드립을 기반으로 한 공격적이고 빠른 말투, 바카야로를 연발하는 거친 언행, 탭댄스[22] 등은 모두 후카미 센자부로의 개그 스타일이었고 그의 마지막 제자였던 다케시는 그것을 그대로 물려받는다.

2.3. 투비트 시절

후카미 센자부로의 마지막 수제자가 된 기타노 다케시는 프랑스좌에서 가장 인기 있는 개그맨이 되었지만 프랑스좌의 관객들은 어디까지나 스트립쇼를 보러 오는 것이었고 그마저도 관객이 점차 줄어들어 프랑스좌의 경영이 악화된 끝에 월급까지 받을 수 없게 되었다. 이에 다케시는 미래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고 때 마침 프랑스좌에서 같이 일했던 선배 가네코 지로(비트 기요시)가 다케시의 웃기는 재능을 높이 사서 그에게 자신과 같이 당시 막 간사이에서 전국으로 전파되어 인기를 얻고 있던 만자이를 하자고 제의했다. 처음에 다케시는 그 제안을 거절했지만 당시 콩트 파트너가 지병으로 개그맨을 그만두자 고민 끝에 지로의 제안을 승낙, 그와 함께 만자이 콤비를 결성하며 프랑스좌에서 나오게 된다.

만자이와 TV 출연에 반감을 갖고 있던 스승 후카미 센자부로는, 자신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만자이 콤비 결성 제안을 수락하고 프랑스좌를 그만둔 기타노 다케시에게 화가 나서 다케시를 파문시켰다. 이렇게 해서 연예인으로서의 사제 관계는 두절되었지만 두 사람 사이의 개인적인 만남은 1983년 후카미 센자부로가 사망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기타노 다케시가 후카미 센자부로를 찾아갈 때면 센자부로는 "바보야, 뭣 하러 왔어! 라멘이라도 먹으러 갈까?"라고 말하는 등 다케시를 대우해 줬다고 한다. 그리고 1988년, 다케시는 스승 센자부로와 보낸 청춘 시절을 그린 자서전 격 소설 '아사쿠사 키드'를 출판했다. 이 소설은 2021년 넷플릭스에서 영화화되었다. (기타노 다케시도 카메오로 등장한다.)

다케시와 지로 두 사람은 1974년부터 만자이 콤비로 활동을 시작하려 했으나 당시에는 무대에서 만자이를 하려면 특정 문파에 제자로 들어가서 정식으로 만자이 교단에 입회해야만 했다. 이에 다케시와 지로는 나고야의 오스 연예장까지 가서, 전부터 주목하고 있던 오사카의 만자이 콤비, 나카타 다이마루·라켓의 분장실로 다짜고짜 찾아가 자신들을 그들의 문파에 가입시켜 달라고 부탁한다. 두 사람의 열의를 인정한 나카타 다이마루·라켓의 멤버 쇼카쿠야 지토세는 요청을 수락했고 둘을 정식으로 '쇼카쿠야' 문파에 가입시킨다. 이렇게 해서 두 사람은 정식으로 만자이 교단에 입회하여 본격적으로 만자이를 배우게 된다.

이후 두 사람은 쇼카쿠야 문파에 속한 신인 만자이시로서 약 1년간 전국을 떠돌며 경험을 쌓는다. 그러나 둘은 관객이 한 명밖에 없는 무대에서 공연을 하거나 연예장 개런티가 너무 낮아서 돈을 벌기 위해 지방 카바레를 도는 등 어려운 시절을 겪는다. 이때까지만 해도 지로가 보케 역할이었고 다케시는 츳코미 역할을 맡았으며 개그 소재도 주로 지로가 짰다고 한다. 당시 무명 만자이시로서의 삶에 회의감을 느낀 다케시는 술에 취한 채로 무대에 올라가는가 하면 자신의 개그에 집중하지 않는 관객에게 욕설을 하면서 싸우기도 했다.

이처럼 무명 만자이시로서 힘든 나날을 보내고 있던 두 사람은 마침내 예풍을 바꾸기로 결단을 내려 서로 역할을 바꿔서 보케인 다케시가 마냥 맹렬한 기세로 야쿠자, 추녀, 노인 등을 까는 독설을 지껄이면 츳코미인 지로가 상식적인 말로 딴지를 거는 특유의 스타일을 완성해 냈다. 그리고 이때부터 콤비명을 "투비트"라 확정지었으며 두 사람의 예명도 비트 다케시, 비트 기요시가 된다. 1975년, 투비트는 간사이의 쇼치쿠 계열 극장에서 그들의 독설 만자이를 관객들에게 처음 선보였고 좋은 평가를 받는다.

그 결과 1975년, 투비트는 오오타 프로덕션과 계약에 성공, 본격적으로 TV에 데뷔하였으나 극장 무대와 달리 방송에서는 투비트의 독설가 컨셉이 전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방송 데뷔 후 투비트는 "잔인한 개그로 언어 폭력을 행사하는 연예인"이라는 시청자들의 항의를 받았으며 당시 대중들에게 워낙 비호감인 개그맨으로 찍히다 보니 몇 번의 방송 출연 후에는 70년대 내내 방송 출연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을 서슴없이 까는 그들의 개그 스타일이 너무 자극적이라며 투비트를 만자이 협회에서 재명하라는 목소리도 나왔다. 다만 극장 무대에서는 나름 인기 있는 만자이 콤비로 활약했으며 "투비트가 공연을 할 때면 모두 그들의 만자이를 보러 가서 대기실이 조용했다."라는 관계자의 말이 나올 정도로 그들의 만자이는 개그맨 동료들 사이에서 극찬을 받았다.


The Manzai에 출연한 투비트. 가나가와 부모 살인사건을 풍자하고 있다.

이후 투비트는 1980년부터 1982년까지 요시모토 흥업 소속의 젊은 만자이시들과 함께 <The Manzai>[23]에 츨연, 가나가와 부모 살인사건, 후카가와 칼부림 사건 등 당대 벌어진 사건 사고들을 재빨리 자신들의 독설 개그에 도입하는 등 절치부심한 끝에 대학생들과 성인층의 주목을 받아 '대학물을 먹은 엘리트 개그맨'이라 불리면서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투비트는 The Manzai의 모든 회차에 출연하였지만 계약상의 문제로 훗날 발매된 The Manzai DVD에는 수록되지 못했다.

2.4. 단독 활동과 전성기

1981년부터 비트 다케시는 <비트 다케시의 올 나이트 닛폰(ビートたけしのオールナイトニッポン)>이라는 라디오 방송과 <우리들은 익살족 (オレたちひょうきん族)>이라는 콩트 프로그램에 출연하면서 단독 활동을 시작했다. 1982년, <The Manzai>가 종영된 이후 비트 기요시가 만자이는 이제 그만두고 싶다고 하여 투비트로서의 활동은 거의 없어졌다.[24]

1981년 1월 1일부터 송출을 시작하여 1990년 12월 27일에 종영된 <비트 다케시의 올 나이트 닛폰>은 비트 다케시가 처음으로 투비트로서가 아닌 단독으로 진행한 프로그램으로 초대된 연예인 게스트에게 시사 문제나 연예계 뒷이야기 등을 질문하는 거침없는 토크[25]와 라디오 방송임에도 체육 대회를 개최하는 등의 혁신적인 기획들을 시도, 일본의 일반인들은 물론 연예계 종사자들에게도 큰 인기와 관심을 끌어서 '전설의 올 나이트 닛폰'으로 불렸다. <비트 다케시의 올 나이트 닛폰>은 비트 다케시가 프라이데이 습격 사건을 일으킨 후에도 유일하게 중도하차하지 않고 꾸준히 진행한 프로그램이기도 했다. 1991년 2월 14일부터 1996년 3월 23일까지 후지 테레비에서 <비트 다케시의 올 나이트 닛폰>을 TV 프로그램으로 만든다는 기획하에 <기타노 팬클럽>이라는 TV 프로그램이 만들어지기도 하였다.

파일:external/blogs.c.yimg.jp/img_1?1376830885?.jpg

우리들은 익살족은 '만자이를 주로 했던 2세대 게닌(개그맨)들이 소속사에 얽매이지 않고 연합해서 출연하는 콩트 코미디 프로그램'이라는 포맷으로 방영된 프로그램이었다.[26] 1981년부터 1989년까지 토요일 저녁 8시에 방영된 익살족은 비트 다케시와 아카시야 산마의 코미디 드라마 <다케짱 맨>[27], 당시 TBS 테레비에서 인기리에 방영 중이던 음악 프로그램 더 베스트 텐의 포멧을 패러디한 <웃긴 베스트 텐>[28], 개그맨들이 프로레슬링에 도전하는 <웃긴 프로레슬링 시간>,[29] 프로그램 말미에 NG 장면을 보여주고 NG를 낸 개그맨에게 물벼락 벌칙을 주는 모습을 방영하는 <웃긴 참회실>[30] 등 참신한 코너들로 당시 일본에서 제일 잘나가던 코미디언인 더 드리프터즈의 대표 방송 8시라구! 전원 집합을 종영시켜 버린 프로그램이다. 더 드리프터즈와 익살족 게닌들의 시청률 경쟁은 토요일 8시의 전쟁이라는 명칭으로 지금도 회자되고 있다.

<비트 다케시의 올 나이트 닛폰>과 <우리들은 익살족>에 출연하여 스타덤에 오른 비트 다케시는 이러한 인기를 발판으로 1983년 1월부터 후배 코미디언 집단 다케시 군단[31]을 결성하여 당시 막 부흥하기 시작하던 예능 프로그램의 MC로서 활발하게 활동하기 시작한다. 비트 다케시는 본인이 메인 MC를 맡은 방송 <슈퍼 자키>에 같이 출연한 다케시 군단이 육체적-정신적 고통을 수반하는 다양한 벌칙에 도전할 때 몸을 사리는 모습을 보이면 군단 멤버들의 머리를 때리면서 호통을 치거나 여러 방송에서 메인 MC 역할을 맡아 방송을 진행할 때 게스트로 출연한 연예인들에게 거침없이 독설을 날리는 등 정말 과격한 예풍을 선보임으로써 시청자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안겨주며 엄청난 인기를 누린다. 그 결과 비트 다케시는 80년대 중반에 이르러서 다수의 예능 프로그램에 메인으로 출연하는 국민 개그맨의 위치에 오르게 된다.[32] 이 당시 다케시의 유행어 코마네치는 지금도 일본 예능에서 간간이 쓰인다. 당시 비트 다케시의 인기는 그의 칸무리 방송[33]이 해당 시간대의 최고 시청률을 갱신할 정도로 대단했으며 이 인기를 등에 업고 다케시가 부른 노래[34], 출연한 광고[35] 등도 높은 판매고를 달성했다.

1985년 한 해 동안 비트 다케시가 메인으로 출연한 방송들. 모든 방송의 시청률이 20%가 넘었으며 다케시는 연말 세금만 2억 엔을 냈다고 한다. 그의 인기가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보여주는 예. 특히 <천재! 다케시의 기운이 솟는 TV>, <비트 다케시의 스포츠 장군>은 비트 다케시가 직접 기획에도 참여한 프로그램이었다.

1986년 5월 2일부터는 일반인 도전자들이 각종 장애물을 돌파하여 마지막까지 생존하면 거액의 상금을 주는 게임 쇼 풍운! 다케시성 (TBS 테레비)[41]의 악당 성주 역을 맡아 절정의 인기를 누렸다. 이 프로그램 역시 비트 다케시가 직접 기획에 참여한 프로그램이었다. 심지어 1986년 12월에는 비트 다케시가 직접 아이디어를 낸 게임까지 나오게 됐는데 이것이 바로 막장 게임으로 유명한 비트 다케시의 도전장.

훗날 비트 다케시는 "한창 전성기 시절, 너무 통장에 돈이 많아 '내가 이 돈의 반이라도 쓰고 죽을 수 있을까?' 하고 겁이 나서 일부러 값비싼 술과 음식 등을 먹으러 다니거나 수시로 유흥업소에 드나들었는데 생각해 보면 그때가 내 인생에서 그나마 가장 즐거운 시절이었다."고 회고했다. 참고로 자동차광으로 유명한 다케시는 포르쉐를 뽑는 것을 성공의 척도로 생각하고 있었고 인기를 얻은 뒤 실제로 포르쉐를 구입했는데 운전석에 앉아서 직접 운전을 해봐도 자신이 포르쉐의 오너라는 실감이 나지 않아서 후배 개그맨에게 포르쉐를 몰게 하고 자신은 다른 차를 타고 포르쉐가 주행하는 모습을 지켜봤다고 한다. 이때 비로소 자신이 성공했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2.5. 프라이데이 습격 사건

그렇게 일본의 국민 개그맨으로 활약하던 비트 다케시는 1986년 12월 9일, 프라이데이 습격 사건을 일으켜서 큰 위기를 겪는다. 사건의 발단은 비트 다케시와 트러블을 일으키고 있던 누군가가 익명으로 '유부남인 비트 다케시가 불륜을 저지르고 있다.'라는 제보를 언론사에 내보낸 것으로 시작된다. 그러자 황색 언론으로 유명한 잡지 프라이데이는 내연녀로 제보된 여성[42]을 폭행하거나[43] 비트 다케시의 가족을 스토킹[44]하는 등 막무가내로 취재를 벌였고 결국, 1986년 9월 5일에 발간된 프라이데이 지에 다케시의 내연녀를 찍은 파파라치 사진이 실리자 화가 머리 끝까지 난 비트 다케시는 다케시 군단이라 불리는 후배 개그맨들 11명과 함께 1986년 12월 9일 오후 3시, 잡지사를 습격하여 무단 점거 후 잡지사의 기물을 파손하고 편집부원들과 편집장을 폭행한다.# 사건 발생 직후 기자 회견. (한글 자막)

이후 비트 다케시는 기물 파손과 주거 침입을 이유로 경찰에 체포되어 1987년 6월 10일 징역 6개월에 집행 유예 2년의 판결을 받는다. 판결 후 기자 회견. 재판 이후 비트 다케시는 1987년 8월부터 방송에 컴백할 수 있었다. 이는 비트 다케시의 인기가 높기도 했거니와 프라이데이 자체가 워낙 악명 높은 주간지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 사건의 여파로 주간지의 보도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커졌다. 전반적으로 남자 개그맨의 바람기 자체를 개그의 일부로서 보는 일본의 시청자 문화[45]가 생긴 것도 비트 다케시가 프라이데이 습격 사건을 일으키고 얼마간의 자숙 시간을 거친 후 방송에 복귀하면서 본인이 직접 방송에서 이 사건을 개그 소재로 삼았던 영향이 크다. 고토다 마사하루 당시 관방장관 역시 "비트 군의 마음은 잘 이해하지만, 직접 행동은 안 된다."라고 발언했는데 여기에 대해서 비트 다케시는 "비트 군이 아니라 다케시 군이지"라고 했다고(…). 공교롭게도 프라이데이의 발행사인 코단샤의 사장이 이 시기 갑자기 사망했는데 이 사건의 충격이라는 추측도 있었다.

2011년 시마다 신스케야쿠자와의 커넥션이 폭로되어 연예계 은퇴 성명을 발표하자, 비트 다케시가 "나는 프라이데이 습격 사건 이후 시마다 신스케처럼 우익 단체로부터 협박을 받았었다.[46] 우익 단체는 일반적으로 야쿠자를 등에 업고 있기에 이러한 압력을 쉽게 떨치기 어려웠다. 소속사나 경찰도 내게 힘이 되어주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친구를 통해 우익 단체와 연관되어 있는 야쿠자 스미요시 연합회를 소개받고 혼자 그들의 소속사에 직접 찾아가서 두목인 호리 마사오에게 이를 해결해 달라고 무릎을 꿇은 채 사과했다. 폭력단과의 관계가 있었던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라고 발언하여 논란이 일었다.# 이와 관련해 비트 다케시의 소속사 '오피스 기타노'는 "폭력단 앞에 가서 무릎을 꿇은 것은 문제가 맞지만, 그런 상황까지 몰렸었다는 점도 알아주셨으면 한다. 그때도 변호사를 선임한 상태였지만,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문제를 간단하게 해결할 수 있었다면 벌써 그렇게 했을 것"라며 양해를 구했다.

이후 주간문춘에서는 비트 다케시가 야쿠자 간부에게 연말 선물을 주거나 상을 당한 이에게 헌화한 사실을 내보내면서 비트 다케시와 야쿠자 사이의 관계가 단지 '타인에 의해 계획된 1회성 만남'으로 끝난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기사를 실었다. 이에 다케시는 "내가 그러한 행동을 했던 것은 일단 그들에게 신세를 진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걸 능숙하게 하고 빠져나오는 것도 본인의 능력이다. 시마다 신스케가 나쁜 것은 야쿠자와 사적인 관계로 얽혔다는 것이다. 신스케와 나는 케이스가 다르다. 나는 사적으로 야쿠자에게 무언가를 부탁한 적도 없고, 돈을 지불한 적도 없다. 무엇보다 나는 《우리들은 익살족》에 시마다 신스케와 같이 출연했을 당시부터 그와 사적으로는 친하지 않았고 익살족 종영 이후부터는 연락을 끊은 상태였다."라고 해명했다.

비트 다케시의 발언에 대한 당시 일본 내 여론은 "야쿠자에게 무릎 꿇고 조아리긴 했지만, 부탁은 안 했다?", "그런 경험이 있었기에 다케시 감독이 야쿠자 영화를 사실적으로 찍을 수 있던 거였군", "왜 하필이면 다케시는 '폭력단 배제 조례'[47]가 시행되기 직전인 시점에서 이런 이야기들을 갑작스레 풀어놓았냐"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사정에 밝은 한 연예계 관계자는 이 같이 밝혔다.
"(이 고백은) 어떤 의미로 기타노 다케시 측과 주간문춘 측이 내세운 캠페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경찰도 여기에 꼈을 것이다. 다케시가 고백함으로서, 이 선까지는 세이프라고 하는 가이드라인을 잡아준 것으로 보인다. 다케시의 경우가 커트라인이 되는 것이다. 역시 다케시는 누구보다 처신 방법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다."

실제로 자신의 발언이 대중매체에 발표된 후 논란이 일어 한동안 대중들에게 비난을 받은 것에 대해 다케시는 "시마다 신스케가 연예계에서 은퇴한 이유를 이해했다"라며 가볍게 답하고 넘어갔다.

2.6. 영화감독으로서 재기

프라이데이 습격 사건의 여파로 소속사인 오오타 프로덕션에서 해고당할 위기에 처하자 기타노 다케시는 1988년 소속사를 나와서 아예 직접 자신의 소속사 오피스 기타노를 설립한다. 소속사 설립 후 다케시는 프라이데이 습격 사건으로 인해 좁아진 방송계에서의 입지를 타개하기 위한 고민을 시작했다.

이즈음 다케시는 그 남자 흉폭하다라는 영화에 주연으로 출연하게 되었는데[48] 본래 감독을 맡을 예정이었던 후카사쿠 킨지 감독이 제작사와의 마찰로 감독직을 하차하여 영화 제작이 엎어질 상황에 처하고 만다. 그러자 해당 영화로 재기의 기틀을 마련하고자 했던 다케시는, 자신이 개인전도 성공적으로 개최한 바 있는 화가라는 점을 어필하며 제작사에게 자신이 영화를 직접 감독해서 완성시키겠다는 제안을 한다. 후카사쿠 킨지 감독의 추천으로 제작사가 제안을 승낙하자, 기타노 다케시는 1989년 그 남자 흉폭하다를 통해 영화감독으로 데뷔하게 된다. 다케시는 자신이 영화의 감독으로 확정되고 감독으로서 처음으로 촬영 현장에 출근했을 때 각목을 들고 나타나 영화 스탭들 전부를 집결시킨 뒤 그들 앞에서 각목을 휘두르며 "나는 앞으로 이 영화의 감독이다. 그러니 나를 개그맨이라고 만만하게 여기다가는 큰코다칠 거다."라고 큰 소리로 엄포를 놓았다고 한다.#

그 남자 흉폭하다는 흥행에 성공했고 다케시는 이를 발판으로 3-4×10월(月) (1990), 그 여름, 가장 조용한 바다(あの夏、いちばん静かな海) (1991) 등을 연이어 감독하면서 영화감독으로 제2의 전성기를 맞이한다. 소나티네 (1993)는 칸 영화제에 출품되어 유럽 등 해외에서까지 인정받았다.

그러나 이런 성공이 쉽게 찾아오지는 않았다. 한창 개그맨으로 활발하게 활동했던 시절에는 "골 때리게 웃기는 천재 개그맨"이라는 찬사를 받았지만, 프라이데이 습격 사건 이후 갑자기 영화감독으로 데뷔한다는 소식을 발표하자 수년 동안 대중들의 분노 어린 평가와 숱한 조롱을 받은 것. 후일 다케시는 SBS와의 인터뷰에서 "대중들에게 각인된 부정적인 이미지를 없애기 위해서 수년의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고 회상했다.

또한 이 시기 다케시는 사이비 종교옴진리교의 교주 아사하라 쇼코와 사적으로 친한 관계였으며 1991년 12월에는 기타노 다케시의 소개로 아사하라 쇼코가 방송에 나와 다케시와 대담을 나누는 특집 방송을 진행하기까지 했다. 옴진리교가 도쿄 지하철 사린 사건을 일으킨 이후 그런 과거가 논란이 되자 다케시는 "나는 옴진리교의 출가 신도[49]가 아니다. 그저 옴진리교의 교주 아사하라 쇼코가 운영하는 요가 교습소에서 어머니의 병과 자신의 고질병인 신경통[50]을 치료받은 것이 고마워서 그와 연락을 종종 했던 것에 불과했다. 개인적으로는 아사하라 쇼코를 그냥 좀 재밌는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옴진리교가 전파를 타게 도와달라는 아사하라 쇼코의 간곡한 부탁에 넘어간 것과 옴진리교가 그렇게 위험한 종교였는지 몰랐던 것은 반성하지만 따지고 보면 나도 옴진리교에 속은 피해자 중 한 사람이다."라며 결백을 호소하기도 했다.

1994년 8월 2일, 비트 다케시는 다케시 군단과의 연회가 끝난 후 술에 만취한 채로 오토바이를 타고 내연녀 집으로 가다가 교통사고를 일으켜서 중상을 입는다. 사고 당시 다케시는 살아있다는 게 기적일 정도로 상태가 처참했으며 도로 가로등 한가운데 피투성이로 쓰러진 그를 맞은편 차선에 달려오던 택시 기사가 발견한 덕에 구사일생했다.[51] 당시 사고로 함몰된 그의 얼굴뼈 전체를 복구하기 위해 긴급 프로젝트와 의료진이 투입되었다. 다행히 수술은 잘 끝났지만 후유증으로 그는 얼굴 일부가 마비되어 표정을 제대로 짓지 못하게 된 것을 물론, 후각 신경이 마비되고 안구의 초점이 흐려졌으며 극심한 두통에까지 시달린다고 한다.[52] 당시 병원에서 이루어진 기자 회견 영상(한글 자막) 또한 다시 불륜을 저지른 것도 모자라서 음주운전까지 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대중들에게 큰 지탄을 받았다. 아내와도 이혼 직전까지 갔다고 한다. 이 일 이후로 영화감독으로서의 성향이 크게 바뀐다. 사고 전에는 죽음이나 자살을 미화하는 장면이 영화에 많이 나오곤 했는데 이 이후로는 그런 묘사가 많이 사라지게 된다. 다케시 본인 말로는 이 사건 전에는 죽음에 대해서 동경이나 환상이 있었는데 사고 이후 그게 아닌 걸 깨달았다고.

1995년 여름, 비트 다케시는 제9회 'FNS의 날 1억 2500만 명의 슈퍼 꿈의 열도'에 출연한 것을 계기로 다시 대중들의 주목을 받았고 1996년, 《키즈 리턴》을 발표하며 영화감독으로 재기하였다. 1997년에는 《하나비》로 베니스 영화제 그랑프리를 수상하였다. 참고로 하나비는 일본 문화가 개방된 한국에서 공식적으로 개봉한 첫 번째 일본 영화였다.[53] 하나비 개봉 후 한 인터뷰에서 '가족이란 남들이 안 본다면 내다 버리고 싶은 존재'라는 충공깽스러운 발언을 했던 것이 은근히 유명하다. 1999년에는 《기쿠지로의 여름(菊次郎の夏)》으로 칸 영화제 본선에 진출하였다.

이러한 비평적 성공으로 기타노 다케시는 1990년대의 일본 영화를 대표하는 영화감독 중 한 명으로 꼽히고 있다. 90년대에 다케시가 연출한 대부분의 작품들은 뛰어난 작품성을 자랑한다. 영화감독 구로사와 아키라, 장뤽 고다르[54], 쿠엔틴 타란티노[55], 평론가 하스미 시게히코[56], 요도가와 나가하루 등이 그의 작품에 극찬을 보냈으며, 프랑스를 대표하는 영화 평론지 카예 뒤 시네마는 하나비와 소나티네를 올해의 영화로 꼽기도 했다. 2019년 키네마 준보가 선정한 '90년대 최고의 일본 영화 순위'에서도 다케시의 영화가 7편 중 5편이나 들어갔다. #

2003년 개봉된 장님 검객을 주연으로 한 《자토이치》 또한 해외에서 호평을 받으며 다케시는 일본의 거장 감독으로 완전히 자리 잡게 된다. 2010년에는 오랜만에 야쿠자 영화 《아웃레이지》를 감독했다. 이 영화는 부산국제영화제에도 소개되었다.

그러나 영화감독으로서의 성공과는 반대로 개그맨으로서의 커리어는 오토바이 음주 운전 사고 이후부터 점점 하락세를 타고 있었다. 1995년 아카시야 산마와 함께 제 9회 'FNS의 날 1억 2500만명의 슈퍼 꿈의 열도' 중 '어떻게든 ... 23시간'에 출연하여 개그맨으로서 다시 대중들의 주목을 받는데는 성공했지만 1996년에 자신의 칸무리 방송 여러 개가 종영되는 아품을 겪었다. 이후 비트 다케시는 작품성이 높은 평가를 받는 영화감독이라는 타이틀과 1989년부터 방영을 시작한 시사 정치 쇼 '비트 다케시의 TV 태클'(테레비 아사히)이 인기를 얻고 있는 것을 발판 삼아서 1997년부터 후지 테레비에서 방영하고 있는 프로그램인 기적 체험! 언빌리버블(奇跡体験!アンビリバボー)의 스토리텔러를 맡은 것을 시작으로 개그맨 활동뿐만 아니라 종합 방송인의 커리어도 밟아 나가기 시작했다.

2015년 나홍진 감독의 영화 곡성에 외지인 역으로 출연해 달라는 제의를 받았지만 거절했다. 당시 다케시는 나홍진 감독에게 "미안하지만 못 할 것 같습니다. 나에게는 해야 할 또 다른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라고 편지를 통해 정중히 거절 의사를 밝혔다고 한다. 대신 일본의 중견 배우 쿠니무라 준이 캐스팅되었다. 재미있게도 쿠니무라 준은 기타노 다케시가 출연한 피와 뼈, 연출도 한 아웃레이지에 출연한 바 있다.

마지막으로 감독하는 영화라는 각오로 기획했다고 말한 혼노지의 변을 주제로 한 사극 영화 2023년에 개봉하였다. 전반적으로 호불호가 갈리는 영화라는 평이며 공통적으로 나오는 평론은 사무라이 복장의 고증이 뛰어나며, 매우 고어하다는 것이다. 영화가 시종일관 피범벅이 되어있다는 평론도 있으니 말 다한 셈. 또한 퀴어 사무라이가 등장하는 데도 불구하고, 이를 작품 속에 잘 녹여내어 매력적인 캐릭터로 만들었다는 평가가 있다.

2024년 현재 비트 다케시로서의 칸무리 방송은 <비트 다케시의 TV 태클> 하나만 남은 상태이다.

2.6.1. 연출 작품

<rowcolor=#fff> 연도 제목 각본 제작 편집 주연 비고
1989 그 남자 흉폭하다[57]
その男、凶暴につき
키네마 준보 선정 1989년 일본 영화 6위
키네마 준보 선정 1980년대 일본 영화 5위
요코하마 영화제 감독상
1990 3-4×10월
3-4X10月
키네마 준보 선정 1990년 일본 영화 7위
키네마 준보 선정 1990년대 일본 영화 공동 10위
토리노 국제영화제 특별상
1991 그 여름, 가장 조용한 바다
あの夏、いちばん静かな海。
키네마 준보 선정 1991년 일본 영화 6위
제16회 호치영화상 감독상
제34회 블루리본상 작품상·감독상
1993 소나티네
ソナチネ
카예 뒤 시네마 선정 1995년 최고의 영화 7위
키네마 준보 선정 1993년 일본 영화 4위
키네마 준보 선정 1990년대 일본 영화 2위
1995 모두 하고 있습니까[58]
みんな〜やってるか!
1996 키즈 리턴
キッズ・リターン
제49회 칸 영화제 감독 주간 부문 정식 출품
키네마 준보 선정 1996년 일본 영화 2위
제39회 블루리본상 감독상
제18회 요코하마 영화제 작품상
제7회 문화청 우수 영화 작품상 장편 영화 부문
1998 하나비[59]
HANA-BI
제54회 베니스 국제 영화제 황금사자상
카예 뒤 시네마 선정 1997년 최고의 영화 1위
키네마 준보 선정 1998년 일본 영화 1위
키네마 준보 선정 1990년대 일본 영화 공동 7위
1999 기쿠지로의 여름
菊次郎の夏
제52회 칸 영화제 경쟁 부문 정식 출품
키네마 준보 선정 1999년 일본 영화 7위
2000 BROTHER
ブラザー
일본·영국 공동제작 영화
2002 Dolls
ドールズ
제4회 문화청 우수 영화상 장편 영화 부문
2003 자토이치
座頭市
제60회 베니스 국제 영화제 은사자상
제36회 시체스 영화제 그랑프리
키네마 준보 선정 2003년 일본 영화 7위
2005 TAKESHIS[60]
タケシズ
제62회 베니스 국제 영화제 경쟁 부문 정식 출품
2007 감독 만세![61]
監督・ばんざい!
제64회 베니스 국제 영화제 특별 초대 작품
제1회 베니스 국제 영화제 감독 만세!상
2008 아킬레스와 거북이[62]
アキレスと亀
제65회 베니스 국제 영화제 경쟁 부문 정식 출품
2010 아웃레이지
アウトレイジ
제63회 칸 영화제 경쟁 부문 정식 출품
2012 아웃레이지 비욘드
アウトレイジ ビヨンド
제69회 베니스 국제 영화제 경쟁 부문 정식 출품
키네마 준보 선정 2012년 일본 영화 3위
2015 류조와 일곱 앞잡이들[63]
龍三と七人の子分たち
2017 아웃레이지 파이널
アウトレイジ 最終章
제74회 베니스 국제 영화제 폐막작
2023 [64]
제76회 칸 영화제 칸 프리미어 부문 출품
2024 브로큰 레이지
Broken Rage
제81회 베니스 국제 영화제 비경쟁 부문

2.6.2. 다케시 영화의 특성

저는 비트 씨 작품 전부 좋아해요. 매우 재밌어요. 왜냐고 하면... 쓸데없는 설명이 없잖아요. 그게 좋아요. 아무래도 설명이 많거든요, 일본의 영화는. 연기도 그렇고. 뭐랄까 설명이 굉장히 많은데 그런 부분이 전혀 없는 게 굉장히 재밌죠.
구로사와 아키라, 1993년#

영화감독으로서 그의 작풍은, 어떤 사조도 따르지 않는 독특한 연출 기법으로 이뤄져 있으며, 강렬한 폭력과 무뚝뚝한 유머의 결합이 돋보인다. 다케시 감독은 "나는 시네필이 아니다. 오히려 나는 영화를 너무 사랑하고 영화 자체가 목적인 감독들은 자기 객관화에 실패하고 영화를 그저 표현 수단으로 여기는 감독이 수작을 찍는다고 생각한다."라고 발언한 적이 있다. 또한 같은 일본 영화감독 중에서는 오즈 야스지로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며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의 작품 속 폭력을 다루는 방식을 싫어한다고 밝힌 바 있다.

어쩄든 기타노 다케시 감독이 유머와 진지함을 동시에 가진 일본의 몇 안 되는 감독 중 하나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물론 가차 없는 딴지와 독설을 날리는 개그맨으로도 일본 내에서 열심히 활약 중. 자토이치가 흥행한 이후로는 개그맨으로서 방송에 출연할 때는 머리를 노랗게 염색하고 출연한다. 배우로서도 비트라는 예명을 사용하기 때문에 다케시가 연출과 주연을 겸한 작품에서는 이름이 두 가지로 나온다.(감독으로서는 물론 기타노 다케시 명의) 2004년작인 다케시즈는 이런 개그맨인 비트 다케시와 감독인 기타노 다케시에 대한 이야기…이지만, 영화가 난해하고 그의 다양한 모습을 전부 자세히 알고 있지 않으면 좀처럼 이해하기 힘들다. 감독 만세는 감독으로서 자기 자신을 성찰한 영화. 좀 더 코미디에 가깝다.

1994년 전후로 기타노 다케시의 작품을 구분짓는 경우가 많다. 이는 1994년 이전 작품들은 죽음이나 자살을 동경하는 정서가 깊이 깔려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1994년 기타노 다케시가 사고로 임사 체험까지 하면서 죽음에 대한 공포가 생겨나 그 이후로는 삶을 강조하는 작품이 많다. 그 후로도 자살이나 죽음으로 끝나는 작품이 종종 있는데 안타깝게 그리지 미화하는 연출은 별로 하지 않는다.

영화 촬영장이 하드하기로 유명하다. 기타노 다케시는 영화를 만들 때 일단 기-승-전-결의 의미를 가진 4개의 그림을 그린 후[65] 그 그림들을 바탕으로 크랭크인에 들어가서 촬영 시 즉흥적으로 구체적인 영화 대본을 만드는데 카세 료가 밝히길 리허설 한 번, 슛 한 번에 촬영이 완료되며 이때 실수하면 그 장면이 그대로 날아가 버린다고.... 《Dolls》, 《아킬레스와 거북이》, 《아웃레이지 파이널》 등에 출연했던 배우 오오모리 나오는 "다케시 감독은 배우에게 '무슨무슨 장면을 찍을 것'이라는 설명을 하지 않고 촬영을 시작하는 경우가 많다. 아웃레이지 파이널 촬영을 할 때는 어느 날 촬영장에 가보니 듣도 보도 못한 기관총과 우산이 놓여있어서 직감으로 '아 이런 장면을 촬영하나 보다' 하고 다케시 감독이 없는 사이에 우산 너머로 총을 쏘는 장면을 연습했다."고 말했다. 오오스기 렌은 "이처럼 긴장감 넘치는 기타노 다케시 감독의 촬영 현장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다가 빈혈로 쓰러진 적도 있었다."고 고백했다. 이에 기타노 다케시는 "내가 개그맨 출신이라서 그렇다. 나는 연기에 돌입하기 전에 거듭 리허설과 테스트를 하고 감독에게 계속해서 리테이크 요청을 하는 배우들의 행동을 도저히 이해하지 못하겠다. 내가 연기 생활을 시작한 코미디 쪽에서는 신선한 연기를 NG 없이 한 큐로 쭉 하는 게 중요하다. 배우가 계속 같은 연기를 하면 이미 어떤 개그가 나올지 아는 관객들이 웃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답했다.

다케시 영화의 교집합적 특징이라면, 1) 기타노 블루라고 불리는 특유의 미장센 2) 롱테이크 3)급격한 편집 4) 서정성과 폭력성이라는 부조화의 앙상블 5) 희극성 6) 심리적 상징성 7) 자기 반영 8) 히사이시 조의 OST 9) 비슷한 배우등이 있다.

1) 화면 전체의 톤, 소품의 색 등에 푸른색이 자주 사용된다. 특히 『소나티네』 등 중반까지의 작품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며 『Dolls』부터는 이러한 기조가 옅어지기 시작했다. 이러한 기타노 다케시 특유의 미장센은 그의 영화가 유럽에서 높은 평가를 받게 되는 계기 중 하나가 되었다.

2) 롱테이크 장면이 많다. 대사 없이, 카메라 시점 변화 없이 하나의 테이크를 그대로 쭈욱 보여주는 것이다. 때때로는 몇 분 이상 가기도 한다. 처음 보면 감정적으로 매우 메말라 있고 관조적으로 바라보는 것 같지만, 단순한 관조와 다른 그 시선을 느끼는 게 다케시 영화의 매력.

3) 편집이 매우 극단적이라 한 장면이 넘어가면 이전의 장면과 이어지지 않는 큰 변화가 있는 장면이 나올 때가 많다. 지루할 때 쯤 분위기 전환이 되는 효과가 있으며 시청자가 간혹 "내가 순간 뭘 놓치고 안 봤나?" 라고 착각하는 경우도 있다. 기타노식 편집이라 불리며 기타노 다케시를 존경한다는 영화 감독, 애니메이션 감독들은 대개 그의 이런 특징을 따라한다.

4) 폭력성이 상당하다. 몇몇 작품에선 고어적인 연출도 꽤 보인다.[66] 맥락 없이 갑자기 등장하는 공격적 연출로 인해 영화가 매우 폭력적으로 느껴지는 경우가 많다. 그러니까 하하하 웃거나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있어서 아무 일 없을 것 같은 장면에서 갑자기 등장인물이 분노를 표출하며 구타를 하거나 총을 쏜다. 특히 야쿠자 소재의 영화들일 경우 대부분 폭력성을 전반에 깔고 있으며 여과 없는 강렬한 공격성 자체가 영화의 소재가 되기도 한다.

5) 폭력성과 대비되는 코미디, 개그, 웃음이 많다. 코미디 소재의 영화가 아니라 야쿠자 영화들에서 특히 더 그렇다. 정말 심각한 분위기에서 냉혈한 야쿠자들의 격렬한 폭력성으로 이야기를 진행시키면서 동시에 동일 인물들의 아이 같은, 유치한 행동들을 통해 실소를 유발시키는데. 이러한 아이러니가 그의 영화의 매력 중 하나[67].

6) 인물들의 심리를 반영하는 상징적인 단서나 아이템들을 영화 내에서 반복해서 늘어놓기도 하며, 주요 소재들은 영화를 뛰어넘어서 반복해서 사용되기도 한다. 자주 사용되는 것이 그가 직접 그린 그림. 실제로 다케시는 화가로서도 실력이 출중하다고 하며, 개인전도 몇 번 열었다. 2008년 영화 아킬레스와 거북이는 화가로서의 자신을 다루고 있다고 한다.

7) 그의 영화에는 자기 투영적인 모습이 많다. 개그맨, 야쿠자(캐릭터), 감독, 배우 등 정체성이 다양하지만 연기하는 캐릭터의 성격은 어느 영화나 대부분 비슷. 심지어는 자신이 감독이 아니고 출연만 한 영화에서도 캐릭터는 비슷하다. 실제 성격까지는 몰라도 기타노 다케시의 모습은 대체로 비슷하고 어느 정도 일관성이 있다고 생각된다. 낯선 모습까지 전부 통합하기 위함인지 언젠가부터는 영화를 통해서 자기 성찰을 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다케시즈, 감독 만세, 아킬레스와 거북이가 이에 해당.

8) 그의 영화들의 배경 음악은 대부분 히사이시 조가 도맡아서 작업하였다. 그 여름 가장 조용한 바다, 소나티네, 하나비, 키즈 리턴, 브라더, 돌스, 기쿠지로의 여름까지 총 7편의 영화에서 호흡을 맞췄다.[68]

9) 마치 주성치 사단처럼, 기타노 영화 속에서도 항상 비슷한 얼굴들이 출연한다. 원래 다케시 군단이라 불리는 제자 게닌들을 거느리고 있어서 이들이 영화에 자주 나오는 데다 정극 배우 중에서도 테라지마 스스무와 오오스기 렌 등 특정 배우들을 자신의 영화에 자주 기용한다. 사실 이들은 워낙 다작을 하는 배우이다 보니 다케시 영화에도 나오는 것일 뿐이다. 그래도 테라지마 스스무는 기타노 오피스(기타노 다케시의 소속사) 소속이라 그런지 다케시 영화 대부분에 나왔다.

영화가 끝난 뒤에 쿠키 영상을 종종 넣는 편이다. 몇몇 영화는 그것까지 보는 걸 꼭 추천할 정도로 영화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다.

3. 취미 및 기호

3.1. 스포츠

  • 야구를 무척 좋아한다. 어린 시절부터 프로 야구팀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팬이었고[69] 중, 고교 시절에는 야구부원이기도 했으며 연예인 야구팀을 결성하여 투수로 활약하기도 했다. 다케시 군단도 다케시가 쿠사야큐[70]를 위해 야구가 가능한 8명의 게닌 지망생들을 모아 결성한 것이다.
  • 축구도 좋아한다. 특히, 자국의 리그인 J리그 팬이라고 한다. 아카시야 산마, 모치즈키 미키야와 함께 연예인 축구팀 '더 미라'의 발기인이기도 했다.
  • 고등학교 시절부터 체육관에서 복싱을 배워온 복싱 마니아이다. 다케시가 감독한 영화 키즈 리턴은 본인의 이러한 취향을 살린 작품.
  • 스모에도 조예가 깊어 스모 경기 중계 방송에서 캐스터로 출연하기도 했다.
  • 1985년 4월 16일부터 1990년 2월 27일까지 매주 화요일 저녁 8시에 방영된 스포츠를 소재로 한 예능 프로그램 <비트 다케시의 스포츠 장군 ビートたけしのスポーツ大将> (테레비 아사히)을 진행하기도 했다. 일본 방송사상 최초로 스포츠를 예능 프로그램의 주요 소재로 삼은 프로그램이었으며 다케시 본인이 기획에 직접 참여한 프로그램이었다.

3.2. 수학

  • 어렸을 때부터 수학을 좋아했고 실제로 수학에 대한 조예가 깊다고 한다. "길을 잘못 가지 않았으면 수학자가 되고 싶었다."라는 말을 한 적도 있다.
  • 2006년 4월 13일부터 2010년 4월 8일 까지 매주 목요일 새벽 1시에 수학을 소재로 방영된 예능 프로그램 <다케시의 코마 대수학과(たけしのコマ大数学科)> (후지 테레비)를 진행하기도 했다.

3.3. 자동차

3.4. 그림

  • 화가로서의 실력이 출중하다고 하며, 개인전도 몇 번 열었다.
  • 기타노 다케시는 영화 제작자에게 자신이 직접 영화 그 남자 흉폭하다를 감독하겠다고 주장했을 때 자신이 개인전도 성공적으로 개최한 경력이 있는 화가라는 점을 강하게 어필했다고 한다.
  • 1997년 4월 18일부터 2009년 3월 20일까지 매주 금요일 밤 9시에 그림을 소재로 방영된 예능 프로그램 <다케시의 누구든지 피카소 (たけしの誰でもピカソ)>(테레비 도쿄)를 진행하기도 했다.

4. 혐한, 혐중 사상

비트 다케시는 예전부터 일본 내에서도 알아주는 혐한, 혐중 인사다. 방송과 저서 등을 통해 꾸준히 혐한 발언을 하고 있으며, 그 스펙트럼은 단순히 정치나 역사 문제를 넘어서 사회, 문화적 측면에서도 한국을 극도로 꺼리는 성향이다. 비록 다케시 본인은 좌파 성향에 가까우나, 이런 혐오 사상 때문에 일본내 좌파계열 쪽에서 싫어하는 인물이다.

4.1. 정치・역사 관련 혐한 행보

  • 1996년에 자신이 쓴 책 『다케시의 20세기 일본사』에서 과거사에 대해 사과하는 일본이 너무 한심하다고 평가하였다.
한국이나 동남아시아 나라에서 일본인을 싫어하는데, 일본만 언제까지나 머리를 숙이고 있다. 무라야마 총리는 동남아에 가서 사과했고 말레이시아의 마하티르 모하마드 총리로부터도 언제까지 사과할 거냐는 핀잔을 듣는다. 이것은 이상하고, 너무나도 한심하다 #원문
  • 2019년 1월, 한일 간 초계기 갈등이 흐지부지 마무리되면서 일본 내 한국에 대한 비난 여론이 최고조로 달할 때 테레비 아사히 프로그램인 TV 태클에서 "한국 드라마를 일본에서 더 이상 방영하면 안된다, 한류를 소외시켜야 한다"고 다시 주장했다.
한국은 대통령이 (지지율이) 나빠지면 일본을 탓한다. 대부분 (대통령직을) 그만두면 나중에 (체포되어) 잡히기도 한다. 이상한 나라구나. 하지만 다른 방송국[71]에 가면 무작정 한국 드라마 등이 가득 들어와서 (방영되어 있다). 보통이었다면 방영 금지해야 한다.영상
  • 천황 사죄 요구 발언을 한 문희상 국회의장을 두고 속을 긁어내 삶아 먹을 호박같이 생긴 악역 보스 얼굴이라는 인신공격을 했다.#
  • 2019년 8월 2일, 일본의 수출 규제 보복 조치를 두고 문재인 대통령이 국무 회의를 통해 일본을 비난한 것에 대해[72] "저 발언은 기타센주의 술집에서 자주 듣는 말"이라고 평가하였다. 한마디로 대한민국 대통령의 발언을 낙후된 동네의 선술집에서나 오갈법한 발언이라 비난한 것이다.# 실제로 기타센주역은 회사원들도 많이 이용하지만 근처에 리틀 마닐라라고 불리는 환락가가 있는 등 치안이 썩 좋지 않은 지역이다. 거기다 다케시 본인이 아다치구 출신인 것도 그의 이러한 발언에 한몫했다. 뉘앙스 자체가 '우리 동네 술집 아재들이나 할 말이다' 정도. 해당 망언은 국내에서도 보도되어 큰 분노를 샀으며, 부산 비프(BIFF)광장에 설치된 그의 핸드프린팅 동판을 없애야 한다며 부산시에 민원이 쏟아질 정도였다. #

4.2. 사회・문화 관련 혐한 행보

  • 2001년에 발표한 저서 『너의 불행에는 이유가 있다! (おまえの不幸には、訳がある!)』에서 기타노 다케시는 한국과 중국은 일본으로부터 돈을 받아낼 목적으로 역사 문제를 들먹이는 뻔뻔한 나라라고 한국을 노골적으로 비난했다. 이 책은 『다케시의 위험한 일본학』이라는 제목으로 국내에서도 번역 출판 되어 있다.
  • 일본에서 겨울연가 신드롬이 불던 2000년대 중반, 다케시 본인의 예명을 내건 시사 토크 쇼 방송 '비트 다케시의 TV 태클' 2004년 8월 9일 회차에서 "다케시마강탈한 나라의 드라마 따위를 보면 되느냐"고 비난한 적이 있다.
  • 한국 문화는 일본 문화를 모방한 것에 불과한데 한류 영화를 왜 보느냐"는 망언을 하기도 했다. 이 발언은 한국에도 알려져서, 양동근2004년 10월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마지막 늑대’ 상영 후 가진 관객과의 대화때 해당 발언이 나왔던 기타노 다케시의 인터뷰 기사를 저격하며 '기분이 좋지 않았다'고 언급했다. 양동근은 일본 기자로부터 일본 영화에 대한 관심을 묻는 질문에 "좋은 문화일수록 흐르기 마련인데 폐쇄적이고 배타적인 다케시 감독의 모습에 실망했다"며 언짢은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관련 기사
쇄국이야. 중국인이나 한국인은 (일본에) 들어오지 못해. 중국인들 뭐랄까. 호텔 뷔페에 갔더니, 먼저 타파[73]통에 밥을 넣고, 가지고 온 페트병에 주스를 가득 채운 다음에서야 '잘 먹겠습니다' 뭐냐고! #

4.3. 옹호론

일단, 기타노 다케시는 아베 신조 정권이 추진했던 평화헌법 개정 시도에 맹렬히 반대한 전적도 있고, 대학 시절에 전공투에 몸을 담았거나 좌파적인 메시지를 담은 영화에 자주 출연한다는 점으로 미루어 전형적인 극우와는 성향이 다를 수 있다. 2021년에는 대놓고 자민당의 정책을 디스하면서, "다음 총선 때는 차라리 자민당 대신, 공산당에게 투표하겠다."고 말했다가, 분노한 극우들에 의해 자신의 차가 부서지는 테러를 당하기도 했다. 저 말 자체가 단순한 트롤링인 것도 있지만, 평소의 기타노 다케시의 성향을 생각하면 정말로 그럴 수도 있을 것이라고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 실제로 일본에서는 기타노를 대표적인 좌파 인사로 간주하는 경우가 많다.

또한, 기타노 다케시는 기본적으로 모두까기 성향이 있어서 한국 뿐만이 아니라 자국인 일본도 자주 까는 등 자신을 제외한 모든 것을 까는 듯한 거친 발언을 자주 하기 때문에 혐한이라고 단정짓기에는 애매하다는 의견도 있다. # 이를 주장하는 이들은 그 근거로 2011년 후지 테레비가 (다른 일본 내 TV 대비) 압도적으로 한국 드라마를 많이 방송하면서 일본내에서 비판의 목소리가 거세지자, 비트 다케시가 도쿄 스포츠(2011년 8월 16일자) 기사를 통해 ‘후지 TV를 비판하는 것이 이상하다’며 “싫으면 채널을 바꾸면 된다. 자신이 보고싶은 프로그램을 보라”라고 후지 테레비를 응호했다, 도쿄 올림픽의 개회식이 형편없다며 깠다는 등의 사례를 제시한다.

다케시 사단에 재일 한국인도 일부 있는 데다가 본인이 만든 영화에 재일 한국인 배우를 기용한 적도 제법 있고[74], 심지어 기타노 다케시 본인이 한국인 역할로 나왔던 영화도 있다[75]는 것을 거론하면서 이런 사람이 혐한일리 없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4.3.1. 반박

그러나 이런 주장은 모두 반박이 가능하다. 일단, 일본에는 생각보다 좌파 성향인 혐한도 꽤 있는 편이다. 좌파 성향 혐한들의 대부분은 과거 전공투에 가담했거나, 그들의 영향을 짙게 받은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일본 내 극우들이 한국의 우파 정치인이나 정당들과 긴밀하게 연관된 것 때문에 한국 정치인들에 대해 혐오감을 느끼는 경우도 있고, 이들 대부분이 극좌 성향이라서 자국을 포함한 친서방 국가들에 대한 반감의 연장으로 혐한 성향이 된 경우도 있다.

또한, '모두까기' 스탠스를 가진다는 것이 혐한이 아니라는 근거가 될 수는 없다. 왜냐하면 '모두까기' 스탠스를 취한다고 혐한이 아닌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후지 테레비를 응호한 것이나 도쿄 올림픽 개회식을 깐 것은 어디까지나 자국의 비이성적인 군중심리와 무조건적인 일본 정부 찬양으로 나아가는 일본 내의 극단적인 흐름을 비판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즉, 혐한이 아니라서 해당 발언을 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실제로 일본의 과거사 문제에 둔감하면서 일본 정부가 과거 피해국들에게 사과하는 행동에 극히 부정적인 모습, 한국의 일본 비판을 단순히 인기에 영합한 행동으로 단정하는 다케시의 언사는 극우파, 넷 우익들의 색깔과 일치한다. 무엇보다 기타노 다케시가 하는 여러 혐한 발언은 그의 유명세에 힘입어 수많은 혐한 방송이나 뉴스에 이용되고 있으며 그럼에도 다케시는 자신의 혐한 발언을 단 한 번도 정정한 적이 없다.

아내가 재일 교포에다 보아, 빅뱅 등 한국 연예인들과 함께 방송한 적이 많지만 혐한에 우익 성향을 띠고 있는 마츠모토 히토시의 사례가 있듯이 "재일 교포 혹은 한국인과 같이 일하니까 혐한이 아니다."라고 단정 짓는 것도 섣부른 일반화라고 볼 수 있다. 좀 더 극단적인 사례를 꼽자면, 그 자신이 한일 혼혈이고 재일 한국인의 권익 보호를 주장하는 인물인 데다, 자국의 우경화에 반대하는 강경 좌파 성향이면서도 동시에 친한은 아닌 마치야마 토모히로 같은 사례도 있다.

그리고 기본적으로 다케시가 묘사하는 재일이나 한국인은 혐한인이 주장하는 야쿠자나 빈민층 같은 스트레오타입에서 절대 벗어나지 않는다. 피와 뼈에서 기타노 다케시가 연기한 김준평이라는 캐릭터도 매우 흉폭한 인간이다.[76] 특히 일본 내 한국인 차별을 고발하는 인질극을 일으켜 경찰관들에게 사과를 받아 내어 파문을 일으켰던 재일교포 권희로[77]를 연기한 적도 있는데, 이런 역을 연기했음에도 혐한 망언을 숱하게 하는걸 보면 그냥 위선적인 인간이라고 할 수 있다.

이후 한국에서 본인의 혐한발언들이 논란이 되고, 일본내에서도 헤이트 스피치 법[78]이 제정되어 시행되는등 혐오 발언에 민감한 분위기가 생겨나 2020년대 부터는 노골적인 혐한 발언이나 한국 언급이 줄어들었다. 이런 부분만 봐도 다케시가 그동안 얼마나 혐한을 노골적으로 해왔는지 알 수 있는 부분.

5. 훈훈한 에피소드

다케시 군단에 속한 후배 게닌 및 친분이 있는 연예인에게는 대단히 통 크게 베푸는 것으로 유명하며, 방송에서도 주기적으로 언급되고는 한다. 아래는 대표적인 사례들이다.
  • 급료가 짜기로 유명한 요시모토 흥업이라 우리들은 익살족에서 자신과 버금가는 비중을 가진 아카시야 산마의 출연료가 터무니없을 정도로 낮은걸 알게된 비트 다케시는 산마의 출연료를 더 올리라고 제작진들에게 부탁했으나 이 마저도 요시모토가 가로챈다는 걸 알게 되었고 결국 산마를 '프로그램 아이디어 작가' 포지션으로도 인정받게 한 다음에 소속사를 거치지 않은 개인적인 급여를 더 챙기도록 했다. 그레서 아카시야 산마는 비트 다케시를 은인으로 생각한다고 한다.
  • 다케시 군단 소속의 게닌이 결혼하자 선물로 무엇을 받고 싶냐는 다케시의 질문에 게닌이 '세탁기'라고 답했다. 이후 다케시로부터 선물이 왔는데 그것은 다름아닌 빨래판. 받은 게닌은 '주군[79]이 장난을 치는구나' 라고 생각하며 쓴웃음을 지은 채 무심코 빨래판을 뒤집었다. 그러자 빨래판 뒤에 100만엔짜리 수표가 떡 하니 붙어 있었다고 한다.
  • 칸무리 방송을 오랫동안 함께한 아나운서의 부친이 사망하고 일주일 뒤에 상을 마치고 복귀했는데, 다케시가 갑자기 드라이브 하자며 그녀를 불러냈다. 그녀는 아무 생각없이 다케시를 따라 나섰는데 다케시는 드라이브 가는 루트 중간 중간에 있는 가게마다 미리 다케시 군단 멤버들을 코스프레 시켜서 그들을 맞이하게 했다. 이에 그녀는 오랜만에 크게 웃었는데 이것을 본 다케시는 아래와 같이 말했다고 한다.
    나야 웃기는 게 직업인 사람이라, 이런 식으로 밖에 위로할 방법을 모르겠네. 그래도 간만에 웃는 얼굴 봐서 좋은 걸.
  • 모노마네 게닌인 마츠무라 쿠니히로(松村邦洋)의 특기는 비트 다케시의 성대모사로 다른 모노마네 게닌들에게도 칭찬을 받을 정도로 비슷하다고 평가받았는데, 어느날 비트 다케시와 마주쳐버렸다. 마츠무라는 다케시가 자신을 보자마자 버럭 이름을 부르기에 혼을 내려는 줄 알았는데[80], 오히려 다케시는 이렇게 말했다.
    좌우가 반대잖아!

    오토바이 사고로 일그러진 얼굴과 반대쪽 얼굴을 일그린 채로 모노마네를 했다고 하려면 제대로 하라고 혼낸 거였다.두 사람이 동시에 출연한 코너.
  • 30년차 후배의 공연에 기요시와 함께 기습적으로 참가해서는 당황해하는 후배들을 뒤로 하고 마에세츠[81]를 해 주었다. 수년 만의 투비츠로서의 등장에 관객들은 난리가 났고, 후배들도 매우 감격했다고 한다. 이후 공연의 분위기가 너무 좋은 것에 감명 받은 투비츠는 공연이 끝나자 후배 게닌들은 물론 공연 스태프와 관객들까지 다 데리고 식당에서 한 턱 냈다고 한다.
  • 영화 감독으로서의 다케시를 동경해 제자가 되겠다고 찾아왔다가 2~3년이 지나면 돌아가는 외국인들이 꽤 있다고 한다. 그리고 다케시는 이렇게 귀국하는 외국인 제자들에게 일일이 롤렉스 시계를 선물한다고 하는데, 다케시 군단 멤버인 스이도바시 하카세는 "이게 소문나서, 다케시에게 가면 부자가 돼서 돌아온다는 이상한 소문이 외국에 퍼졌다"라는 농담을 하기도 했다. 지금도 꾸준히 제자가 되겠다고 찾아오는 외국인들이 있는 거 보면 완전히 농담만은 아닌 듯도 하다.

6. 어록

겨우 개그맨이 말하는 것을 듣고 화를 내다니 멍청한 놈.
사실 너희들처럼 리액션이 잘 터지는 관객은 딱 질색이야. 나는 단순히 출연료를 받기 때문에 너희를 웃겨주는 사람이 아니야!
<웃을 때입니다 (笑ってる場合ですよ)> 마지막회에서
긴장과 해방의 고삐를 쥐고 웃음이라는 자연현상을 인공적으로 일으키는 사람이 개그맨이다. 더욱이 그 고삐는, 극단적으로 말하면 객석에 앉아 있는 모든 관객들과 일대일로 연결되어 있다. 몇 천 가닥의 고삐를 잡고 있으면서도 그런 기미를 전혀 보이지 않고, 선천적으로 멍청한 인간인 듯한 얼굴로 웃음의 소용돌이 중심에 서 있는 것이 개그맨이다.
빨간불, 다 같이 건너면 무섭지 않다.
'지구를 아름답게'라는 말은 쓸모 없다. 정말로 지구를 위하는 방법이란 인간을 지구상에서 모조리 없애버리는 것이다.
죽음이 두려우면 죽고 싶어진다.
(영화 『소나티네』의 대사)
(2만명이 사망한 대지진 사건에 대해) 2만명이 죽은 하나의 사건이 아니라, 한 사람이 죽은 사건이 2만번 일어난 것이다.
미래에 희망이 있다고 충고하는 놈들의 공통점은 지금 잘 살고 있다는 것이다.
성공이 뭐냐. 내연녀는 도망갔고 마누라는 차갑다. 난 성공한 사람이 아니다.
(키노 인터뷰 중 성공했다는 인터뷰어의 말에)
소꿉놀이 같은 부부생활은 없다. 진짜 결혼생활은 서로 목을 조르면서 누가 앞에있는 음식을 먹을지 싸우는 것이다.
가족이란 남들이 안 본다면 내다 버리고 싶은 존재일 뿐이다.
(영화 「하나비」 인터뷰 중에)
나는 칼싸움 장면에서 칼끼리 부딪히는 걸 싫어한다. 그럴 시간이 어디있나? 단숨에 베어야지.
(영화 『자토이치』 인터뷰 중에)
(영화가 끼칠 영향에 대해) 생각해봤다. 그런데 아웃레이지 같은 경우는 대중적인 영화가 결코 아니다.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함께 웃고 울고 감동을 받을 수 있는 영화가 대중적인 영화다. 그런데 그런 대중적인 영화가 일년 내에 몇십편씩 나와도 세상에는 아직도 전쟁과 테러와 범죄가 존재한다. 그런 상황에서 꼴랑 어쩌다 한번 나오는 비대중적인 나의 폭력영화가 세상에 무슨 대단한 영향을 끼치겠는가.
(아웃 레이지 개봉 후 영화제에서의 인터뷰 중 영화의 폭력성이 세상에 끼칠 영향에 대한 기자의 질문에)[82]
영화를 너무 사랑하고 영화 자체가 목적인 감독은 자기객관화에 실패하고 영화를 그저 표현 수단으로 여기는 감독이 수작을 찍는다.
영화감독은 어떻게 해서든 영화를 만들고 그렇지 못한 놈들은 항상 영화를 만들지 못한 것에 대해 핑계만 댄다.
질 것이 뻔하니까 경쟁하기는 싫다. 하지만 최고가 되고 싶고, 그래서 남을 내려다보고 싶다. 그런 물러터진 미숙한 마음이 오타쿠의 본질이 아닐까?
노력이라는 것은 복권 같은 것이다. 구입한다고 해도 당첨될지는 모르지만, 구입하지 않으면 절대 당첨될 수 없다.
노력만 하면 일류가 된다고 말하지 마라. 진실은 재능이 있는 사람이 남보다 노력해야 일류가 될 수 있을까 말까다. 연습을 한다고 누구나 이치로 처럼 될 수 있나?
왜 젊음 그 자체에 그렇게 큰 의미를 두는지 모르겠다. 젊은 바보는 나이 들어봐야 늙은 바보가 될 뿐이다.
젊은이들이 예절을 배우지 않는 것은 귀감이 되는 어른이 없기 때문이다. 적어도 예절은 어떤 동경이나 '그때 그 사람은 멋졌어'라는 기억이다. 가까이에 그런 사람이 있으면 따라하고 싶어지기 마련이니 말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노년층들이 "지금의 젊은 것들은 예의가 없어"라는 것은 자기 얼굴에 침을 뱉는 것과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어제 개회식, 재밌었네요. 많~이 잤어요. 돈을 돌려줬으면 좋겠네요. (개회식에) 국민의 세금이 들어갔잖아요. 그거 돌려줘요. 큰일났네, 외국도 창피해서 못 가겠어
2020 도쿄 올림픽/개막식이 방영된 다음 날 자신이 진행하는 TBS의 방송 <신 정보 7 데이즈 뉴스 캐스터>에서
일본에서도 LGBTQ 문제나 성희롱에 대해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시대가 드디어 찾아왔다고 생각한다. 전후부터 일부 유력 연예기획사가 연예인을 노예처럼 취급하는 것이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으며, 이 사건을 통해 과거의 낡은 제도적 관행과 다른 문제들이 수면위로 드러나고 있다.
(쟈니 키타가와 연습생 성착취 파문에 대한 기타노 다케시의 생각을 질문했을 때)[83]

7. 기타

  • 도조 히데키 역할을 두 번이나 한적이 있다. 2009년 TBS 2부작 특집극 '그 전쟁은 무엇 이었는가 일미개전과 도조 히데키'에서 도조역을 맡아 일본 정부 수뇌부가 어떤 과정과 상황에서 개전하였는지를 보여주었고, 2019년 테레비 도쿄의 특집극 '두개의 조국'에서는 극동군사재판에 참석한 도조를 연기하였다.
  • 2005년부터 도쿄예술대학 대학원 영상연구과의 영화전공 부문 전공장을 맡게 됐다.#
  • 용과 같이 6에서 히로세 토오루 역할로 출연하며, 페이스 캡처와 더빙을 전부 담당했다.
  • 상술했듯 주 특기가 탭댄스이며, 본인이 합작한 오케스트라 공연 영상도 있다.#
  • 2021년 9월 5일 밤 11시 40분경 도쿄 미나토구 TBS 생방송을 마치고 나오는길에 둔기를 든 괴한으로부터 습격을 당해 차량 앞유리가 파손 당했다는 보도가 나왔다.[84] 이 괴한 남성은 곧바로 제압당했으며 다케시는 운전수와 차량안에 대피해 있어 다행히 큰 부상은 입지 않았다고 한다.# #
  • 어떤 사람이 천재라고 생각하냐는 질문에 "사잔 올 스타즈쿠와타 케이스케씨라든가. 대단한 천재."라고 말하기도 했다. # 쿠와타 케이스케도 비트 다케시를 천재 개그맨이라고 인정하고 있다.
  • 2017년부터 시바견을 기르고 있다.

8. 관련 문서


[1] 개그맨 활동은 비트 다케시 명의로 나오고, 영화감독 활동은 "기타노 다케시" 명의로 나온다.[2] 전공투 활동으로 제적당했으나 나중에 학교 측에서 특별 졸업으로 인정해 주었다.[3] 도쿄예술대학 영상연구과 특별교수(2005-2008)[4] 본래 자신이 중심이 되어 만든 오피스 기타노 소속이었다가 그간 오피스 기타노의 사장 모리 마사유키가 기타노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무단으로 자금을 유용해 최대 주주가 되고 임원 보수를 지나치게 인상하는 행위를 저질렀다는 것을 알게되면서 2018년 3월 말 오피스 기타노를 퇴사했다. 이후 기타노 다케시는 18살 연하의 내연녀이자 비즈니스 파트너(다케시는 2019년 부인과 이혼하고 2020년에 이 여성과 재혼했다.)인 여성과 함께 새 소속사 TN곤을 설립했다. 참고로 데뷔 당시부터 프라이데이 습격 사건 무렵까지의 소속사는 오오타 프로덕션이었다. 오오타 프로덕션하고는 사이가 원만한 편.[5] 1979년에 자신보다 연하이지만(1951년생) 오와라이계에서는 1년 선배인(1971년 데뷔) 여성 게닌 마츠다 미키코와 결혼했었다.(다만, 혼인 신고는 1983년에 했다.) 전 부인은 다케시와 결혼 뒤에 연예계를 은퇴했고 1981년 [[https://www.youtube.com/watch?v=WBepss0kRp[6] 2020년에 18세 연하의 비즈니스 파트너와 재혼했다. 8년간 만난 사이였다고 한다.#[7] 1981년 3월생.[8] 1982년 10월 5일생. 가수로 연예계에 데뷔하였다.[9] 1990년생. 이름 불명. 전 내연녀 사이에서 태어났다.[10] 2020년 3월 29일에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로 세상을 떠났다.[11] 자기 영화 말고도 코미디, 정극, 시대물을 막론하고 여러 영화에 출연한 베테랑 배우다.[12] 한국으로 치면 "이경규가 영화도 김기덕만큼 만든다"라고 비유할 수 있다.[13] 다케시가 감독, 출연한 영화 기쿠지로의 여름의 기쿠지로가 다케시 아버지의 실제 이름이라고 한다.[14] 지금은 개선되었지만 아다치구는 한때 도쿄에서 치안이 가장 안 좋은 지역이었다.[15] 덕분에 야쿠자 영화를 너무 사실적으로 찍어서 기타노 다케시의 영화를 보고 감명을 받은 현역 야쿠자가 나름대로 옥의 티를 지적한답시고 다케시에게 전화를 걸어서 "바다에 시체를 버릴 때는 배를 가른 뒤에 버려야지"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영화를 본 야쿠자들이 우리 구역을 홍보해 달라며 기타노 다케시에게 화환과 캐딜락 외제차를 선물한 적도 있었다고. 공교롭게도 용과 같이 6에서는 진짜 야쿠자로 나온다.[16] 다케시는 훗날 인터뷰에서 자신의 고교 시절 친구들 중 여러 명이 야쿠자가 되는 길을 택했고, 어머니가 말리지 않았다면 본인 역시 야쿠자로서의 삶을 살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만약 자신이 야쿠자가 되었다면 젊었을 때 이미 생을 마쳤을 것 같다고.#[17] 실제로 교통사고를 당하기 전 비트 다케시는 일본 연예계에서 한 주먹 하던 사람으로 유명했다.[18] MARCH에 속하는 명문대학교이다. 아키쿠사가쿠엔단기대학 학장인 형 기타노 마사루(北野大)도 메이지대학 공학부 출신이다.[19] 60년대 일본 학생 운동의 대명사. 당시 전공투는 어느 정파에도 속하지 않고 자유로운 반정부 학생 운동 집단의 집결체로 알려져 인기가 좋았다.[20] 2004년 메이지 대학 측에서 특별 졸업을 인정하였다.[21] 현재는 아사쿠사 동양관이라는 이름으로 라쿠고, 만자이 등의 공연을 올리며 운영 중.[22] 다케시의 스승 후카미 센자부로의 주특기가 탭댄스였다. 그래서 자토이치와 같은 다케시의 영화에는 다케시 본인이나 주연 배우들이 탭댄스를 추는 장면이 종종 나온다.[23] 일본에서 만자이 열풍을 일으킨 코미디 프로그램. 1980년에서 1982년까지 방영되었다. 만자이 열풍을 우리나라의 사례와 비유해서 설명하자면 개그 콘서트의 등장으로 기존의 스튜디오 콩트 중심의 코미디가 공개 코미디로 완전히 바뀌었을 때와 비슷한 파급력이었다.[24] 다만 콤비가 해체한 것은 아니다. 기요시도 다른 프로그램의 패널이나 영화 등에 꾸준히 출연하고 있다.[25] 훗날 비트 다케시가 밝히기로는 올 나이트 닛폰에 출연한 연예인들은 자신들이 갖고 있던 이미지와 상반되는 모습을 보여줘서 인기를 끌었지만 사실 방송 전에 이미 대본이 다 준비되어 있었다고 한다.[26] 사실 여러 코너들 중 만자이 코너도 있었는데, 재미도 없고 인기도 없다고 잘렸다.[27] 익살족을 대표하는 인기 코너였다. 비트 다케시가 슈퍼맨을 패러디한 다케짱 맨을 연기하여 아카시야 산마가 연기한 악당 캐릭터를 응징하는 내용의 콩트이다. 이 코너에서 비트 다케시의 다케짱 맨은 그대로지만 산마는 시즌별로 블랙 데빌, 빠텐맨 등 여러 악당 캐릭터들을 연기했다. 치밀한 각본보다는 기본적인 의상 컨셉과 줄거리만 유지한 채로 사실상 비트 다케시와 아카시야 산마가 애드립과 개그 대결을 펼치는 만담 콩트에 가까웠다.[28] 이후 인기 사회자로 활약하게 되는 시마다 신스케가 처음으로 MC를 맡은 역사적인 코너였다. 익살족의 오프닝을 담당한 코너로 개그맨들이 각종 인기 가수들을 패러디하여 시청자들을 웃겼는데 해당 코너에서 비트 다케시는 무려 조용필을 패러디하였다.[29] 초반 애피스드는 무적을 자랑하는 주인공 안토니오 신스케 X 스트롱 류스케 팀과 악역인 샤프 형제(한신•쿄진)가 태그 팀 매치를 벌이는 내용이었으며 결승전은 오사카 부립 체육 회관에서 전일본 여자 프로레슬링 경기가 열리는 날 이벤트 매치로 치러졌다. 결과는 당연히 선역인 신스케 X 류스케 팀의 승리. 이후에는 전 일본 여자 프로레슬링 대신 신일본 프로레슬링과 제휴하여 본격적으로 가공의 단체 HWA에 소속된 레슬러들이라는 컨셉으로 개그맨들이 유명 프로레슬러들을 패러디한 기믹으로 나와서 실제로 레슬링 시합을 펼쳤다.[30] 익살족에 출연한 게닌들은 본래 만자이시로 활동하던 사람들이라 프로그램 초기까지만 해도 콩트에 적응하지 못해서 NG를 너무 많이 냈다고 한다. 그래서 프로듀서인 요코자와 다케시가 게닌들에게 긴장감을 주기 위해 1983년에 해당 코너를 만들었다고.[31] 다케시 군단을 결성하게 된 계기는 다케시가 친선 도모를 목적으로 개그맨 지망생들 중 야구를 할 줄 아는 8명을 모아서 야구팀을 만든 것이었다고 한다. 참고로 비트 다케시는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팬이며 학창 시절에 야구부원으로 활동했을 만큼 상당한 야구광이다. 지금도 다케시 군단의 멤버들은 1군, 2군, 3군 식으로 나뉘어 있다.[32] 당시 비트 다케시의 일본내 인기를 굳이 대한민국의 사례와 비교하자면 90년대 중후반에 김국진이 가졌던 위상과 비슷했다고 보면 된다.[33]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코미디언의 이름이 제목에 들어가는 방송으로 일본에서는 칸무리 방송의 갯수를 코미디언의 인기를 측정하는 중요한 척도로 본다.[34] 비트 다케시는 개그맨으로서의 활동뿐만 아니라 가수, 연기자로서의 활동도 겸임한 일본의 원조 멀티 엔터테이너 중 한 사람이다. 2001년에는 후카사쿠 킨지 감독의 배틀로얄 1편에 담임 교사로 출연. 꽤나 포스 있는 연기를 보여주었다.[35] 일본 대도시를 가면, 대형 광고판에 비트 다케시가 광고 모델로 출연한 광고가 상당히 많다.[36] 1983년 1월 9일부터 1999년 3월 28일까지 매주 일요일 오후 1시에 방영된 예능 프로그램. 다케시 군단이 육체적-정신적 고통을 수반하는 다양한 벌칙에 도전하는 리액션 개그를 선보인 최초의 프로그램이다. 이 외에도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가학적이라고 시청자들에게 항의를 받을만한 개그를 자주 선보인 프로그램으로 특히, 연예인이 60도나 되는 뜨거운 열탕에 들어가 버틴 시간만큼 그들의 신작을 홍보할 시간을 주는 코너 열탕 커머셜(熱湯コマーシャル)이 유명했다. 실제로 비트 다케시가 사회를 맡은 TBS의 프로그램인 ‘신정보 7 데이즈 뉴스 캐스터" 2018년 11월 24일자 방영분에서 다케시는 슈퍼 자키에 대해 회고하면서 "지금이라면 나 같은 연예인은 인권 침해로 고소당했겠군. 사실 열탕이 실제로는 별로 뜨겁지 않았기에 그 코너로 인해서 화상을 입은 사람을 방송하면서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어”라고 말하기도 했다.#[37] 1983년 4월 7일부터 1990년 4월 5일까지 매주 수요일 밤 10시에 방영된 예능 프로그램. 세계의 다양한 진귀한 물건, 명품, 사치품 등의 가격을 패널들이 맞추는 퀴즈 프로그램이다. 비트 다케시는 메인 MC가 아니라 패널로 출연하였으며 패널들 중 가장 많은 정답을 맞추면서 자신의 지적인 면모를 대중들에게 확고히 심어주는 데 성공했다.[38] 1985년 4월 13일부터 1986년 9월 27일까지 매주 토요일 밤 10시 30분부터 30분간 방영된 예능 프로그램. 이름 그대로 비트 다케시를 주축으로 한 콩트 코미디 프로그램으로 매회 주제가 바뀌고, 그 주제에 맞는 짧은 콩트들이 방영되었다.[39] 1985년 4월 14일부터 1996년 10월 6일까지 매주 일요일 저녁 8시에 방영된 예능 프로그램. 기존까지의 예능 프로그램이 기본적으로 방송에 출연하는 연예인들에 의해서만 진행되었다면 이 프로그램은 평범하게 생활하는 일반인들을 예능의 주인공으로 내세움으로써 방송 내용에 리얼리티를 부여했다. 1988년경 부터는 코미디 색채가 강한 코너뿐만 아니라 일반인 출연자들이 큰 목표를 향해 다 함께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감동 노선의 기획들도 많아지기 시작했다. 비트 다케시는 이 프로그램을 자신이 진행한 예능 프로그램들 중 가장 애착이 갔던 프로그램으로 꼽은 바 있다.[40] 1985년 4월 16일부터 1990년 2월 27일까지 매주 화요일 저녁 8시에 방영된 예능 프로그램. 일본 방송 역사상 최초로 스포츠를 주요 소재로 삼은 예능 프로그램이다.[41] 1986년 5월 2일부터 1989년 4월 14일까지 매주 금요일 밤 8시에 방영한 예능 프로그램. 워낙 인기가 많았던 예능 프로그램이라 세계구 단위로 아류 프로그램이 범람했다. 한국 KBS에서 제작한 열전! 달리는 일요일도 이 프로그램을 표절했다며 TBS 측이 저작권료 배상 요청을 한 바 있고, 미국 ABC가 만든 <Wipeout>에 대해서도 TBS가 항의를 했다.[42] 20세의 전문학교 여성으로 사건 이후에도 비트 다케시와의 관계를 지속하여 1990년 다케시의 딸을 낳았다.[43] 실제로 어떤 기자는 취재라는 명목하에 다케시의 내연녀를 폭행한 혐의로 기소되어 벌금 10만 엔을 선고받았다.[44] 프라이데이는 다케시의 아내 미키코가 혼자 4살 된 딸을 데리고 유치원 입학 면접시험을 치르기 위해 유치원으로 가고 있는 모습을 몰래 촬영해서 사진과 기사를 게재했다.[45] 일본의 남자 개그맨들은 자신이 불륜을 저지른 것도 거리낌 없이 개그 소재로 쓴다.[46] 시마다 신스케가 우익 단체로부터 협박을 받은 사건의 전말은 이렇다. 1998년 간사이 계열 방송 신스케의 인간 만다라(紳助の人間マンダラ) 녹화 중 시마다 신스케는 "스케줄이 지연되는 바람에, 다음 방송 스케줄 장소인 이곳으로 급히 가야 해서 택시를 탔는데, 그 택시 앞을 구일본 제국군의 군가를 틀면서 느릿하게 서행하는 우익 차량이 막아버리고 말았어. 내가 거기에 짜증이 나서 "왜 느릿느릿 가냐고" 소리를 치자, 우익 차량에서 우익 청년과 아재들이 줄줄이 나타나면서 언쟁이 벌어졌고, 우익 쪽에서 "너 이 국화(일본/천황가의 꽃) 문양을 보고 아무 생각 없냐!"라는 말에 내가 "국화 문양(항문)은 내 엉덩이에도 있구만!"이라고 바로 대꾸하자, 우익들이 아연실색하면서 멍하게 있길래, 그 틈을 타서 택시 기사에게 "기사님, 지금이에요!"해서 우익들을 남기고 줄행랑해서 이 녹화장에 도착했지."라는 잡담을 했는데, 편집될 줄 알았던 이 잡담이 방송되어서, 그걸 본 야쿠자 이나가와회(稲川会) 계열의 우익 단체 다이코샤(大行社)가 방송국 앞에서 큰 소리로 군가를 부르거나 욕설을 하는 등의 횡포를 부리기 시작한 것.[47] 폭력단 관계자와의 친밀한 관계가 확인되면 경찰이나 지자체로부터 '밀접 교제자'로 개인의 이름이나 기업명 등이 공표된다. 공표된 '밀접 교제자'는 은행의 가맹 업계, 단체 등과의 거래가 금지될 수 있다.[48] 비트 다케시는 1982년부터 본격적으로 배우로서도 활동하기 시작했고 1983년에 개봉한 데이비드 보위, 사카모토 류이치가 주연으로 출연하고 오시마 나기사 감독이 연출을 맡은 전장의 크리스마스에 주조연급 인물로 출연하며 영화계에 데뷔했다.[49] 일본에서 한창 옴진리교가 유행할 때, 멀쩡히 학교생활 회사 생활 하던 이들이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옴진리교로 출가하는 문제가 있었다.[50] 비트 다케시는 무명 시절의 사고로 신경을 다쳐서 80년대까지 몸을 움찔대며 비트는 특유의 버릇으로 유명했는데 1992년 즈음부터 해당 증상이 완전히 사라졌다.[51] 훗날 다케시는 "만약 내가 그대로 방치되었다면 뒤차에 깔려 죽었을 것이다."라는 씁쓸한 농담을 했다.[52] 2020년 현재까지도 후유증이 남은 것으로 추정되며 '자고 일어나면 병원이 아닐까' 하는 걱정을 아침에 일어날 때마다 한다고 한다.[53] 일본 문화 개방 초기에는 극장에 개봉 가능한 일본 영화는 영화제 수상 경력이 있는 영화로 제한되어 있었다.[54] 일본 방문 당시 다케시를 훌륭하다고 평했고, 하나비를 좋아한다고 말했다. #[55] 타란티노의 소나티네 해설[56] 하스미 시게히코는 다케시 영화의 평론을 쓰기도 했다. 번역[57] 기타노 다케시라는 거장의 서막을 알린 작품. 사실 본래 기획은 주연만 맡기로 되어있었고, 영화감독 메가폰은 후카사쿠 킨지가 잡을 예정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후카사쿠 킨지가 제작사와의 불화로 인해 제작에서 하차하게 되었고, 결국 영화 제작이 무산될 위기에 처하게 되자 결국 다케시가 직접 영화감독 메가폰을 잡게 되어 각본 수정까지 했다고 한다.[58] 섹스를 하려고 조부의 장기를 팔아 차도 사고 은행도 털며 비행기도 훔치는 등 온갖 막장 수단을 동원하는 처절한 아재 코믹극. 유명한 개그맨이기도 한 기타노 다케시 감독의 첫 코미디 영화이다. 주연은 당칸버터. 본명 이이지마 미노루(飯塚 実). 다케시 군단 소속의 개그맨으로 총알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으며 비트 다케시가 아끼는 미남 개그맨이라고 한다. 예? * 그러나 업계에선 뒷소문이 그리 좋지 않은 인물이라고 한다. 심지어 2채널러들이 이 자를 보고 쓰레기라며 웹 페이지에 댓글로 디스하기도. 이 영화에서 다케시 감독은 후반부에 동료 조수와 투명인간 실험을 하는 미친 과학자로 등장한다.[59] 개봉은 1998년에 했지만 베네치아 영화제 출품은 1997년에 했다.[60] 사람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으며 남부럽지 않은 삶을 사는 유명 연예인 다케시와 편의점 알바생에 연극단 취직을 전전하는 삼류 배우 다케시, 서로 닮았지만 닮은 것 같지 않은 두 사람의 이야기로 감독 본인의 진지한 자아 성찰을 되돌아보려는 의도가 숨어있다.[61] 어떤 장르의 영화를 만들어도 호응이 좋지 않아 결국 실패하고 마는 감독 본인의 씁쓸한 이야기.[62] 다케시가 본인의 정체성 중 하나인 화가로서의 면모를 다룬 영화. 타케시즈와 감독 만세, 그리고 이 작품을 묶어 기타노의 자전적 3부작이라고 묶어 부르기도 한다. 이 영화를 기타노 다케시의 최고작으로 뽑는 이도 적지 않다.[63] 국내에서는 '8인의 수상한 신사들' 이라는 제목으로 개봉했다.[64] 실제 역사적 사건이었던 혼노지의 변을 소재로 한 사극 영화.[65] 일종의 스토리보드라고 생각하면 될 듯.[66] 대표적인 게 바로 자토이치, 아웃레이지. 특히 아웃레이지의 치과 신이 유명하다.[67] 다케시 감독은 자신의 영화를 통해 현실의 폭력 속에 내제되어 있는 웃음을 그려낸다. 개그맨으로서도 비트 다케시는 가혹한 벌칙을 받는 등의 폭력적인 상황에 마주한 연예인들이 취하는 리액션을 통해 원초적인 웃음을 이끌어내는 개그를 많이 선보이곤 했었다.[68] <아칼레스와 거북이>의 음악은 하사이시 조가 아니라 극장판 공의 경계로 오덕계에서 유명한 카지우라 유키가 맡았다.[69] 특히, 나가시마 시게오 선수를 존경했다고 한다.[70] 한국의 사회인 야구처럼 순수 아마추어들이 뛰는 야구 리그를 뜻한다.[71] CS, BS 같은 일본 케이블 채널[72] 문재인 대통령이 쓴 '적반하장'이라는 단어에 민감하게 반응하였다. 한국 내에서는 적반하장이 방귀 뀐 놈이 성낸다는 의미로 다소 평범한 어감이지만 한자를 상용하고 있는 일본에서는 도둑(賊)이 뻔뻔하게 군다라는 의미로, 도둑이란 단어에 초점이 맞춰져 있어서 뉘양스가 굉장히 세며, 교양 있는 사람이 쓰는 표현이 아니다.#[73] 한국에서 플라스틱 밀폐 용기를 락앤락이라고 부르는 상표의 보통명사화 사례가 있듯이, 일본도 플라스틱 용기를 제조하는 회사인 타파웨어(Tupperware)의 이름을 줄여 타파라고 부른다. 일본 국내 밀폐 용기 시장에서 가장 점유율이 높은 기업 중 하나다.[74] 재일 교포 배우 하쿠류는 굉장히 오랜 기간 동안 다케시의 작품에 출연해 왔고 다케시와도 친한 사이다.[75] 특히 이 영화는 감독도 재일 한국인최양일 감독이다.[76] 물론 이건 기타노 다케시 본인이 재일 한국인들이 많이 사는 슬럼 지대인 아다치구에서 태어나 자란 과거가 반영된 것도 있다. 문제는 그걸 감안해도 본인의 작품에서 묘사되는 한국인 캐릭터가 너무 이런 스테레오타입에 치우쳐져 있다는 것이다.[77] 이 사람에 대한 평가는 2000년 이후 엇갈리지만 아무튼 당시 일본내 재일교포 차별이 극심했던건 사실이다.[78] 본국(일본) 외 출신자에 대한 부당한 차별적 언동의 해소를 향한 대응 추진에 관한 법[79] "도노(殿)". 다케시 군단 멤버들은 비트 다케시를 이렇게 부른다고 한다.[80] 모노마네는 대상의 특징을 과장되게 묘사해서 웃기는 개그이기 때문에 모사되는 당사자들이 이들을 싫어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특히 대상의 희화화가 심한 중견 이상의 모노마네 게닌들은 멀리서 모사 대상자가 보이면 도망부터 치고 본다고.[81] 본 무대 시작전에 분위기를 띄우기 위해 개그를 하는 것. 보통은 본 무대 뛰는 게닌의 후배나 별로 유명하지 않은 게닌들이 맡는 경우가 많다.[82] 쇼후쿠테 츠루베 주관의 토크쇼 A-STUDIO에서 밝히길 유럽의 영화제에서도 이 질문을 받았다고 하며, 기타노는 본인의 대답을 생각하면 "나 말 참 잘했네"라고 스스로 뿌듯해 한다고 한다...[83] 2023년 5월, 미국의 엔터테인먼트 전문지 '헐리우드 리포터'가 칸 영화제에 맞춰 진행된 기타노 다케시와의 단독 인터뷰에서 발췌.[84] 10월~11월 사이 열리는 일본 중의원 선거를 앞두고 다케시가 "자민당 대신 공산당을 찍겠다."는 발언을 해서 앙심을 품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