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03-15 23:28:33

리처드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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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처드 1세
Richard I
파일:Richard_Leon.jpg
1255년의 상상화
<colbgcolor=#cf091f><colcolor=black> 왕호 리처드 1세
(Richard I)
출생 1157년 9월 8일
잉글랜드 왕국 옥스퍼드 보몬트 궁
사망 1199년 4월 6일 (향년 41세)
프랑스 왕국 아키텐 리무쟁 샬뤼
재위기간 아키텐 · 가스코뉴 공작
1168년 ~ 1199년 4월 6일
푸아티에 백작
1172년 6월 ~ 1199년 4월 6일
노르망디 공작, 앙주 · 멘 백작
1189년 7월 ~ 1199년 4월 6일
잉글랜드의 왕
1189년 7월 6일 ~ 1199년 4월 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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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f091f><colcolor=#fff> 이름 리샤르 (프랑스어) / 리처드 (영어)
(Richard)
별칭 사자심왕
(Le Cœur de Lion / The Lionheart)
신장 196cm[1], O형(Rh-)
배우자 파일:512px-Armoiries_Bérangère_Navarre.svg.png 나바라의 베렝겔라 (1191년 5월 결혼)
자녀 코냑의 필리프 (사생아)
아버지 파일:800px-Royal_Arms_of_England_(1154-1189).svg.png 헨리 2세
어머니 파일:아키텐 공국 국장.svg 엘레오노르 다키텐
형제 기욤 9세, 청년왕 헨리, 마틸다, 조프루아 2세, 엘레노어, 조앤, 존 왕
종교 가톨릭
문장 파일:800px-Royal_Arms_of_England_(1189-1198).svg.png
1189-1198
파일:잉글랜드 국장(-1340).svg.png
1198-1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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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평가
2.1. 근현대2.2. 중세 동시대
3. 남프랑스인에 가까웠던 정체성4. 생애
4.1. 유년기4.2. 대반란, 1173 ~ 74년4.3. 아키텐 반란 진압4.4. 골육상쟁4.5. 즉위, 숙청4.6. 제 3차 십자군 원정4.7. 포로 생활, 의 반란4.8. 필리프 2세와 전쟁4.9. 사망
5. 사적인 면
5.1. 외모 · 육체적 능력5.2. 성품5.3. 섹슈얼리티5.4. 결혼 생활
6. 이야깃거리7. 대중문화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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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파일:Richard I the Lionheart.jpg
19세기 상상화.[2][3]
<colbgcolor=#cf091f><colcolor=#fff> 영어 Richard I (리처드 1세)
Richard Lionheart (리처드 라이언하트)
중세 프랑스어 Richard I (리차르트 1세)
프랑스어 Richard I (리샤르 1세)
라틴어 Ricardus I (리카르두스 1세)
독일어 Richart I (리하르트 1세)
Richard Löwenherz (리하르트 뢰벤헤르츠)
무슬림에 대한 전대미문의 재앙.
아리비아의 역사가 이븐 알아티르(Ibn al-Athir)

앙주 제국(Angevin Empire)의 군주. 사자심왕이라는 별명으로 유명하지만 생전 별명은 오크 에 노(Oc E No)였다. 칭호로는 잉글랜드 국왕, 노르망디 공작, 아키텐 공작, 가스코뉴 공작, 푸아티에 백작, 앙주 백작, 멘 백작, 낭트 백작, 브르타뉴 공국 상위 주군[4], 아일랜드 영주, 키프로스 영주 등이 있다. 대표작위인 잉글랜드 국왕으로 기억되지만 실제로 그는 유아기를 제외하면 생애 대부분을 남프랑스 아키텐에서 살았으며, 성인이 된 후 잉글랜드에서 머물렀던 시간은 모두 합쳐도 6개월 정도에 불과했다. 노르만 왕조 이후 여느 잉글랜드 왕과 마찬가지로 평생 프랑스어로 의사소통했다.

학살을 포함한 무자비한 잔혹 행위들을 전혀 서슴지 않았으며 병적일 정도로 도덕적으로 무감각했기에 악마의 후손으로 악명을 널리 떨쳤다. 제3차 십자군 원정 당시 다국적 십자군 부대를 통솔하여 살라흐 앗 딘 유수프를 상대로 전승 무패라는 전설적인 전과를 거두고, 이슬람인들에게 공포의 존재로 군림하였다. 역사상 최초로 신과 나의 권리(Dieu et mon droit)를 선언하였다.

2. 평가

2.1. 근현대

1900년대에 대중문화에서 리처드가 군사적인 재능에 비하여 정치력이 전무한 암군이자 당시 심리학에서 사멸되어 가던 정신분석학적 해석을 끌어와 오이디푸스적 승리를 한, 그리고 동성애자라는 잘못된 신화가 생산되었다. 한국 웹의 내용 역시 이러한 흐름에서 출간되고 한국으로 번역된 Reston, James. (이슬람의 영웅 살라딘과)신의 전사들. 서울: 민음사, 2003 책에서 가져온 것이 많다. 80,90년대에 한국에 출판된 영국사 개론서도 이같은 잘못된 신화를 흡수하고 재생산해왔다.

한편 해외 학계에서는 앙주 제국사의 권위자자 앵글로 노르만계의 지역사의 권위자인 런던정치경제대학교 존 길링엄 교수가 Gillingham, John. Richard I. 영국: Yale University Press, 1999 책을 출간하여 잘못된 신화를 바로잡고 리처드의 정치적, 전략적, 군사적 업적에 새로운 해석을 확립한지 오래이며 최근에도 리처드 1세의 가장 권위있는 평전으로 인용되고 있다.

중세 역사학 교수 Ralph V Turner는 리처드가 헨리 2세와 달리 대놓고 교회와 충돌하지 않으며 실속을 챙긴 교회 정책의 전문가임을 조명했다. 헨리 2세는 주교직을 공석으로 두고 수익을 챙긴 것과 반대로 리처드는 장기적인 안목으로 왕실 행정가(royal clerks) 출신을 주교로 임명하는 데 주력했으며 이를 통해 교회가 왕권에 협조하도록 만들었다. 정책 말기에는 교회에 대하여 강력한 통제력을 행사하여 왕권을 강화하는 동시에 주교 선출권을 완전히 거머쥘 수 있었다. 캔터베리 대주교 토머스 베켓 암살 사건으로 교회와 대립한 헨리 2세와 인노첸시오 3세에게 파문을 당한 존 왕과 대조적이다. 리처드의 대표적인 성공은 인재를 보는 눈으로 캔터베리의 저베이스에 따르면 '수줍음이 많고 말더듬이'인 휴버트 월터를 간파하여 대주교로 임명하고 잉글랜드 섭정을 맡긴 것이다.
리처드의 위대함을 나타내는 두드러진 특징 중의 하나는 잉글랜드에서 관리를 선택하는 능력, 특히 휴버트 월터(Hubert Walter)의 선택이었다. 재판관으로서, 캔터베리의 대주교로서 그리고 교황의 사절로서, 휴버트 월터는 왕과 교회 사이의 균형을 유지시킨 전형적인 인물이었다. 앙주 제국의 다른 지역에서처럼 잉글랜드에서도 리처드의 오랜 부재 기간 중 윌터의 감독하에 중앙 정부의 효율적인 통치 기구가 발달하였다. 신민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는 더 많은 세금을 의미하였지만, 전쟁의 재정적 부담 때문에 앙주 제국이 경제적으로 붕괴 직전에 놓여 있었다는 증거는 하나도 없다.
『옥스퍼드 영국사(The Oxford History of Britain)』 中

다음을 참고.
-Bridge, Antony. Richard the Lionheart. 영국: Grafton, 1989.
-Asbridge, Thomas. 2013. “Talking to the Enemy: The Role and Purpose of Negotiations between Saladin and Richard the Lionheart during the Third Crusade.” Journal of Medieval History 39 (3): 275–96. doi:10.1080/03044181.2013.787542. 리처드 1세의 뛰어난 협상력
-Gillingham, John. Richard I. 영국: Yale University Press, 1999.
-Turner, Ralph V., Heiser, Richard. The Reign of Richard Lionheart: Ruler of The Angevin Empire, 1189-1199. 영국: Taylor & Francis, 2014.
-Turner, Ralph V. “Richard Lionheart and English Episcopal Elections.” Albion: A Quarterly Journal Concerned with British Studies 29, no. 1 (1997): 1–13. https://doi.org/10.2307/4051592.
-Heiser, Richard R. “Richard I and His Appointments to English Shrievalties.” The English Historical Review 112, no. 445 (1997): 1–19. http://www.jstor.org/stable/578506.
-Heiser, Richard R. 2017. “The Court of the Lionheart on Crusade, 1190–2.” Journal of Medieval History 43 (5): 505–22. doi:10.1080/03044181.2017.1378707.

2.2. 중세 동시대

앙주 제국의 연구 프로젝트 명예 회원인 Colette Bowie의 표현을 빌리자면 리처드는 중세의 폭정의 새로운 지평선을 열었다. 하우든의 로저에 따르면 리처드가 반란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봉신들의 아내를 강간한 혐의를 받았다. 웨일스의 제럴드는 리처드는 잔학무도함과 가혹성으로 지독하게 미움받았으며 형제들과 대조적으로 인기가 없기까지 하여 아키텐의 귀족들은 공작 자리에 청년왕 헨리가 앉기를 소원했다고 술회한다. 캔터베리의 저베이스는 "형 헨리는 모두에게 친절하고 얼굴이 잘생기고 겸손하고 상냥했다. 그에 비해 동생 리처드는 영 딴판이라 거의 모두가 몹시 미워했다."라고 적었다. 동시에 이들은 리처드가 분노한 후 신속히 냉정을 되찾고 관용을 베풀 줄 아는 위인이었다고 전한다.

중세 서유럽은 전통적인 기독교 가치관을 따라 엄격한 가부장제 사회 구조를 갖고 있었고 가족 내에서 아버지의 권위가 절대적이었다. 아들이 아버지를 거역하고 반란을 일으킨 것은 일곱 개의 대죄에 비견되고 자연을 거스른 행동으로 수긍되었기에 동시대 역사가들에게 리처드가 부왕을 배신하고 반란을 일으킨 것은 따라서 단순한 윤리적 문제가 아니라 당시 질서 자체를 위협하는 금기를 범한 것으로 인식되었다. 중세 일류 역사가인 하우든의 로저(Roger of Howden)가 헨리 2세의 주검 앞에서 리처드가 눈물을 흘리며 무릎 꿇고 참회한 장면을 묘사한 것을 리처드의 실제 행위보다 앙주 제국의 후원을 받은 사가로서 리처드의 계승의 정당화하고 면죄부를 부여하는 작업으로 읽어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웨일스의 제럴드가 헨리 2세에게 품은 반감과 별개로 리처드가 아버지를 배신하고 프랑스 국왕 필리프 2세와 단합한 것을 비난한 이유도 이와 관련이 깊다. 필리프 2세의 찬양가인 필리피드를 쓴 기욤 드 브르통도 리처드의 뜻인 부왕 발 밑의 매장을 참회로 해석하였다.

리처드의 잉글랜드 국왕의 재임 초기에 하우든의 로저와 뉴버그의 윌리엄과 달리 시토회 출신인 역사가 카기샬의 랄프만이 Chronicon Anglicanum에서 리처드에게 호의적이었던 덕분에 리처드는 미덕과 관용을 풀 줄 아는 이상적인 기독교 군주로 탈바꿈하였다.

또한 앵글로 노르만 문학에서 남성이 무용 기량으로 권력과 명예를 주장하는 내용이 여전히 인기를 누렸고 프랑스와 대조적으로 앙주 제국은 남성성의 박탈이 처벌의 기조이듯이 이상적인 기독교 군주상도 프랑스와 앙주 제국이 차이가 있었기에 리처드의 제 3차 십자군 원정에서의 무용담은 앙주 제국의 역사가들의 호의를 잠시나마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제 3차 십자군 원정을 마치고 1195년 이후로 앙주 제국의 역사가들은 리처드에게 등을 돌렸다. 카기샬의 랄프는 리처드가 사람의 인격 자체가 변하고 재임 초기에 보여준 모든 미덕이 검게 그을려졌으며 엄청난 범죄 패거리의 수장이였다고 묘사한다. 하우든의 로저는 리처드의 죽음을 신의 징벌로 보았다. 뉴버그의 윌리엄은 남긴 마지막 기록은 샤토 가야르를 건설할 때 핏빛 빗줄기를 맞으며 환호하며 천사에게 저주를 퍼붓고도 남을 리처드의 끔찍한 모습이었다.
은혜를 모르는 자들과 악의 행로를 밟은 자들이 얼마나 끊임없이 헨리 왕의 사악함에 대해 떠들었고, 그에 대해 좋은 소리가 나오는 것을 참지 못했던가. 그 이후로도 하루하루 힘든 나날을 보내야 했던 이들은 이해심이 넓어졌다. 사실 우리가 겪고 있는 불행들은 헨리 왕의 훌륭한 치적을 떠올리게 한다. 그는 비록 살아 있는 동안 많은 이들의 미움을 받았으나 지금은 온 사방에서 뛰어나고 유익한 통치자로 인정받고 있다.
뉴버그의 윌리엄

동시대의 역사가들과 리처드가 후원한 트루바두르들도 말년의 리처드를 기독교의 군주를 한참 벗어난 악랄하고 흉측하고 성적 변태인 군상으로 묘사했다. 뉴버그의 윌리엄은 1195년에 리처드 1세의 측근들 사이에서 공공연히 돌았던 소문을 거론했다. "악마가 리처드 왕과 동행하여 성지에서 귀환했다. 악마가 왕의 직속 수행원이 되었다. 그리고 악마가 종종 왕의 침실에 존재한다." 하우든의 로저도 리처드가 혼외정사에 중독되고 미사조차 듣지 않았다고 전한다. 카기샬의 랄프는 리처드가 잉글랜드를 수탈했으며 리처드의 최후의 고해성사 장면을 묘사하며 그가 파멸한 까닭은 필리프 2세에 대한 증오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다음을 참고.
-of Newburgh, William (1198). Halsall, Paul; McLetchie, Scott (eds.). The History of English Affairs (Books I to V). Internet History Sourcebooks Project. New York: Fordham University Center for Medieval Studies. Source: The Church Historians of England, volume IV, part II; translated by Joseph Stevenson (London: Seeley's, 1861). Spelling modernised 1999 by Scott McLetchie. https://sourcebooks.fordham.edu/basis/williamofnewburgh-intro.asp
-Ralph of Coggeshall, and D. A. Carpenter. “Abbot Ralph of Coggeshall’s Account of the Last Years of King Richard and the First Years of King John.” The English Historical Review 113, no. 454 (1998): 1210–30. http://www.jstor.org/stable/577404.
-Gillingham, John. “The Unromantic Death of Richard I.” Speculum 54, no. 1 (1979): 18–41. https://doi.org/10.2307/2852987.
-Gillingham, John. Richard I. 영국: Yale University Press, 1999.
-Bowie, Colette Marie (2011) The daughters of Henry II and Eleanor of Aquitaine: a comparative study of twel-fth-century royal women. PhD thesis, University of Glasgow.
-Strickland, Matthew. Henry the Young King, 1155-1183. 영국: Yale University Press, 2016.

3. 남프랑스인에 가까웠던 정체성

잉글랜드에서 태어난 후 8살까지 그곳에서 살긴 했으나, 왕으로 즉위한 후 10년의 재위 동안 실제 잉글랜드에 있었던 건 6개월 정도라고 하며, 아내인 나바라 공주 베렝겔라는 재위 동안 잉글랜드를 방문한 적이 없다. 그는 대부분의 일생을 오늘날의 프랑스 지역에서 보냈으며, 그 가운데 몇 년간은 제3차 십자군 원정 당시에 종군했던 중동 지역에 머물렀다. 그 때문에 당시 잉글랜드의 지배 계층인 앵글로-노르만 귀족들이 그랬듯이 영어[5]가 아닌 프랑스어를 모어로 구사했다.[6][7]

현재 가장 권위 있는 《리처드 평전》을 펴낸 존 길링엄이나 권위 있는 십자군사가인 토마스 오스브릿지, 중세 영문학을 전공하고 몬티 파이튼의 성배를 감독한 테리 존스[8], 영국 왕실 전문 대중 역사가 앨리슨 위어에 이르기까지 현대 영국 역사가들은 리처드를 "본질적으로 남프랑스인", "태생에서나 자란 환경에서나 확실히 잉글랜드인은 아니다."라고 하며, 리처드의 정체성 형성은 서남부 프랑스에서 이루어졌다는 데 동의하는 편이다.[9] 리처드는 자신을 부계인 앙주 가문의 사람으로 여겼으며 원한을 절대 잊지 않고 복수하는 본인의 성격을 검은 공작 풀크와 같은 앙주 가문의 조상들에게서 온 것이라고 자주 말했고 동시대인들도 그렇게 받아들였다. 문화적으로 리처드는 아키텐 공국의 영향을 많이 받았는데, 유년기의 대부분을 아키텐에서 보냈고 북부 프랑스어도 썼지만 아키텐 공국에서 쓰이는 오크어가 리처드의 모어였으며 잉글랜드의 왕자이기 이전에 일찍이 아키텐의 공작으로도 내정되어 있었다. 여러 차례에 걸친 아버지에 대한 반란도 헨리가 리처드의 삶과 정치적 기반이었던 아키텐을 리처드에게 분리하려고 했기 때문이라고 이해해야 한다.

리처드의 어머니 엘레오노르 다키텐이 후원하며 형성된 음유시인과 궁정식 연애 문화는 나중에 프랑스에서 아서 왕 전설이 기사도적인 연애 낭만담으로 재창조되는 배경이 되었는데, 리처드 역시 봉신의 아내와 궁정식 사랑의 모범을 따른 연애를 했고 베르트랑 드 보른 등 남프랑스의 음유시인들을 후원했으며 자신도 오크어로 시를 쓰고 노래를 지었다. 이런저런 이유로 리처드가 영어를 알았다거나 사용했을 가능성은 희박하기 때문에, 리처드가 등장하는 영미권 사극에서는 그가 강한 프랑스식 억양을 쓰는 연출로 타협하는 추세이다. 동시대인인 뉴버그의 윌리엄은 리처드가 "적당한 값만 지불한다면 런던도 팔 수 있다."라는 말을 농담 삼아 얘기하곤 했다고 기록했는데 잉글랜드에 대한 리처드의 다소 냉담한 태도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겠다.

또한 유언으로 머리는 샤루 수도원, 심장은 노르망디의 루앙, 유해는 퐁트브로 수도원으로 분할하여 매장하라고 명했으나 잉글랜드는 포함되지 않았다.

물론 명목상으로 앙주와 아키텐은 프랑스 왕의 봉토인 것에 비해 잉글랜드는 리처드를 프랑스 왕과 대등한 국왕으로 만들어주는 땅이었기 때문에, 잉글랜드에 대한 심리적 거리감과는 별개로 의전에서는 잉글랜드에 상당히 신경썼다. 먼 방계 후손[10]조지 1세가 단순히 잉글랜드에 대해 심리적 거리감이 있는 걸 넘어 신경쓰는 것 자체를 사실상 포기한 것과는 대조적이다.[11]

다만 리처드 1세가 스스로를 프랑스인으로 여겼던 것은 그가 유독 괴짜라서가 아니라 당시 잉글랜드를 지배하던 노르만인, 즉 바이킹계 프랑스인들 대부분이 그랬기 때문이다. 이때까지는 노르만족 자체가 잉글랜드인으로서의 정체성 동화가 일어나기 전이었고 피지배 계급인 앵글로색슨인들도 노르만계 왕족, 귀족들을 외부에서 온 지배자로만 보는 시선이 강했다. 인터넷에선 중세 유럽에서 민족적-국가적 정체성이 일절 없었으며 근대에 완전히 창작된 개념이라고 잘못 알려져 있는 경우가 많은데, 실제로 12세기 잉글랜드 역사학자인 맘스베리 윌리엄은 노르만 정복을 가리켜 "잉글랜드는 이방인들의 재산으로 전락했다."라고 서술했으며 수도사들은 노르만 정복을 잉글랜드인의 죄악에 대한 신의 징벌이라 표현했다. 또한 12세기 《국고에 대한 대화》라는 서적에는 "잉글랜드인과 노르만인들이 혼인을 거듭하여 오늘날에는 혈통을 구분할 수 없게 되어있다."라고 씌인 대목이 있는데, 이를 통해 노르만족앵글로색슨 사이에는 명백히 혈통에 의한 구분이 존재했고 시간이 흐를수록 동화가 진행되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또한 웨일즈인들은 잉글랜드인들을 "노르만족에게 정복당해 노예로 전락한 하늘 아래 가장 무가치한 종족"이라 부르면서 통쾌해했는데, 이를 통해 제 3자 역시 당시의 잉글랜드를 이민족에게 지배당한 시기로 봤다는 걸 알 수 있다. 아무튼 노르만족이 노르망디-프랑스와의 관계를 단절하고 잉글랜드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재수립하는 건 존 왕 때 대륙영토를 대거 잃은 후의 13세기 초중반부터 본격화된 일이고,[12] 리처드 1세의 시대에는 아직 외부에서 온 정복자라는 포지션에서 벗어나지 못한, 잉글랜드인이라는 정체성을 형성하기 이전의 시대인지라 리처드 1세가 스스로를 잉글랜드인이 아니라 노르만-프랑스인으로 여긴 건 그가 이상한 성격인 게 아니라 매우 당연한 것이었다.

즉, 리처드 1세는 잉글랜드인보다는 잉글랜드에서 태어났고 잉글랜드 왕위를 가진 프랑스인에 더 가까운 정체성을 가졌다. 잉글랜드에서 태어났고 잉글랜드의 왕위를 가졌으며 아버지 헨리 2세부터 앨프레드 대왕의 혈통이 흐르기 시작했으니 잉글랜드인이 아예 아니라고 볼 수는 없겠지만, 국적과는 별개로 그의 민족 정체성은 확고한 프랑스인이라는 것이다.

4. 생애

4.1. 유년기

1157년 9월 8일, 헨리 2세엘레오노르 다키텐의 삼남으로 영국의 옥스퍼드에서 출생했다.

리처드는 8세에 모친과 노르망디를 여행하고 아키텐으로 이주한 뒤에 다양한 학문을 두루 섭렵하기 위해 힘쓰고 라틴어를 읽고 쓰는 법을 배웠으며, 기사 작위를 위한 군사 훈련을 시작했다. 13세에 프랑스 왕 루이 7세와 카스티야 공주인 콩스탕스 왕비의 차녀 아델과 약혼한다. 부왕 헨리 2세가 여전히 아키텐에 권력을 행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1172년 6월에 16세의 나이로 보르도 대주교에 의해 푸아티에에서 아키텐 공작으로 정식 서임을 받았다.

4.2. 대반란, 1173 ~ 74년

헨리 2세는 일찍이 차남 청년왕 헨리를 잉글랜드 왕, 노르망디 공작 및 앙주 백작의 후계자로 지명하고, 리처드에게는 아키텐을 상속하며, 사남 제프리에게는 브르타뉴를, 막내 에게는 성직자의 길을 걷게 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아들들에게 통치권을 양도하는 것을 미루었고 청년왕 헨리의 상속지에 속했던 성 3개를 일언반구 상의도 없이 막내 아들인 존에게 물려주기로 한 결정 또한 청년왕 헨리의 불만을 키웠다. 게다가 정무로 바빴던 헨리 2세는 아들들에게 소홀했기에, 리처드와 형제들은 아버지에게 애정이 깊지 않았고 점점 업신여기는 태도를 드러냈다.

1173년, 부왕으로부터 하루빨리 독립적인 권한을 얻어내고 싶었던 17세의 리처드와 그의 형 헨리, 동생 제프리는 남편과 깊은 불화를 겪고 있던 모후 엘레오노르 다키텐의 주도로 그녀의 전남편인 프랑스 왕 루이 7세의 원조를 받기로 하여 파리에 집결하고 대반란을 모의했다. 이때 리처드는 프랑스 궁정에서 자연스레 형제들과 함께 9살이 된 프랑스의 왕세자 필리프를 만나게 되었고, 눈여겨볼 만한 점은 리처드가 루이 7세로부터 기사 서임을 받았다는 것이다.

리처드와 형제들은 루이 7세의 동의 없이는 부왕 헨리 2세와 평화를 이루지 않겠다 맹세하고, 헨리 2세는 우선 아들들과 협상을 벌여 두둑한 보상으로 달래보려 했으나 루이 7세는 그들이 거절하도록 부추겼다. 이러한 행위의 결과는 전쟁의 규모를 거대하게 확장시켰고 종국에 부자지간에 결코 회복할 수 없는 깊은 감정적 골을 남기게 했다.

1173년 여름, 동맹군은 노르망디를 침공하고 이것이 훗날 사자심왕으로 불리게 된 그의 첫 전투였다. 동맹군에는 스코틀랜드의 사자왕 윌리엄, 플랑드르 백작 필리프 1세, 불로뉴 백작 마티외를 비롯한 수많은 권력가들이 가세했다. 나중에 아들들과 합류하려던 엘레오노르는 도중에 헨리 2세의 계략에 걸려 체포되어 장장 10년이 넘는 연금 생활에 처하게 되었다. 리처드는 사랑하는 모후의 체포 소식을 듣자 당장 라로셀로 진군했지만 도시의 격렬한 반항에 부딪혀 승전보를 울리지 못한 반면, 헨리 2세는 동맹군을 완전히 압도하여 불로뉴 백작은 전사하고 루이 7세는 패배하여 도주하는 신세에 이르렀다.

1174년 봄, 동맹군의 수익이 지지부진해지고 패색이 짙어진 상황을 판단한 프랑스 왕 루이 7세는 청년왕 헨리와 제프리만 챙겨서 헨리 2세와 협상을 열었고, 리처드는 이러한 배신에 격분하여 마지막까지 분투했지만 철저한 고립에 처했다. 1174년 9월 23일, 궁지에 몰린 리처드는 결국 부왕에게 엎드려 눈물로 용서를 빌었고 형 헨리와 동생 제프리도 그를 뒤따라 눈물로 부왕에게 용서를 비는 것으로써 마침내 대반란은 종결되었다.

4.3. 아키텐 반란 진압

이처럼 사랑이 없는 내전은 남프랑스 군벌들 사이에 반심을 야기했고, 아키텐의 공작인 리처드는 그들의 반란을 진압하며 다음 3년간 활발히 활동했다. 이 전쟁은 리처드가 지휘관으로서 나선 이후 처음으로 성공한 것으로, 그의 전투 기술은 여기에서 완성됐다고 전해진다. 1177년, 리처드는 가스코뉴로 진격하여 아키텐 반군을 무자비하게 응징하고 이듬해 1178년, 헨리 2세가 아키텐에서 지내는 동안 리처드는 조언자의 역할에 머물렀지만 아버지가 잉글랜드로 건너간 뒤에 군 통솔권을 완전히 장악, 가스코뉴에 대한 군사 계획을 재개하여 1178년 4월, 타유부르 공성전을 벌인다.

이 성은 동시대에 난공불략으로 널리 믿어졌지만 리처드는 단 2주만에 파괴적이고 잔학무도한 공격으로 수비대를 굴복시키고, 그 여파로 나머지 아키텐 반군의 항복을 유도하였으며 그 자신은 군사 지휘관으로서의 위명을 크게 떨쳤다. 하지만 반란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전례 없는 포학한 패악을 부렸고 이 때문에 아키텐 귀족들의 식지 않는 공분을 샀다고 전해진다. 헨리 2세는 이 승리에 대해 큰 기쁨을 표출하며 엄청난 예우를 다해 아들을 맞이했다.

4.4. 골육상쟁

1179년 11월, 랭스에서 열린 13세인 프랑스 왕세자 필리프의 프랑스 왕 대관식에 참석하고 아키텐 공작의 권위에 걸맞은 선물을 하였다. 주목할 만한 점은, 이때 동생 브르타뉴 공작 제프리 2세와 함께 각각 아키텐 공작령과 브르타뉴 공작령에 대해 필리프 2세에게 개인적으로 충성 서약까지 했다는 것이다. 1181년, 리처드는 형인 청년왕 헨리, 동생 제프리와 힘을 합쳐 썽쎄흐와 플랑드르의 반란에서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한 필리프 2세를 구했으나....

이듬해인 1182년 형 헨리와 동생 제프리가 반리처드 아키텐 봉신들과 결탁하여 대규모의 병력을 이끌고 아키텐으로 진격하고, 필리프 2세는 뒤에서 몰래 그들에게 용병을 지원했다. 부왕의 아들간의 싸움 중재는 실패하고 전쟁이 재발하여 봄 동안 지속되었다. 아키텐 귀족들의 움직임이 우려할 수준을 넘어서게 되자 상황의 위급함을 판단한 부왕이 리처드에게 가세하여 리처드, 헨리 2세 VS 청년왕 헨리, 제프리, 필리프 2세 구도에서 1183년 6월에 청년왕 헨리가 이질로 급사했을 때 비로소 중단되었다.

그 뒤 헨리 2세는 슬하에서 양육했던 리처드의 약혼녀 프랑스 공주 아델과[13] 막내 의 결혼에 대해 상위 주군 프랑스 왕 필리프 2세에게서 동의를 받았고, 프랑스의 플랜태저넷령에 대해 충성 서약을 하는 것으로 아들들에게 상속지와 상속 권한을 꽉 쥐고는 상속에 대해 새로운 결정을 공포했다.
I. 리처드는 아키텐을 포기하고 청년왕 헨리의 몫이었던 노르망디, 앙주, 잉글랜드를 상속받을 것.

II. 아키텐막내 이 양도 받을 것.

분노한 리처드는 부왕에게 복종하는 것을 거부하고 아키텐으로 돌아가서 전쟁 준비를 한 반면 제프리 2세는 위선적인 정치 공작을 펼쳐 부왕의 호의를 사면서 야심을 실현시키려 했다. 또한 상위 주군 프랑스 왕 필리프 2세와의 우정 및 동맹을 두고 제프리와 경쟁을 벌였고 약혼녀인 프랑스 공주 아델에 대한 결혼을 선언하기도 하였으나 이는 묵살되었다. 삼형제 사이에 벌어진 맹렬한 신경전은 전쟁으로 변질되었고, 헨리 2세가 제프리를 노르망디 관리로 파견하게 되면서 리처드와 제프리의 불화는 삽시간에 극으로 치달았다.

제프리와 싸우겠다고 대규모 군사를 일으켰으나 브르타뉴 침공을 개시하기 직전 부왕의 개입으로 불발되었고, 모후 엘레오노르 다키텐을 정치적 볼모로 앞세운 부왕의 명령에 굴복하여 아키텐 전체를 반환해야 했던 정치적 위기에 처했다. 이와 반대로 동생 제프리는 승승장구를 거듭했으며 그의 절친이자 플랜태저넷 왕가의 분열을 꾀하던 상위 주군 필리프 2세는 제프리를 헨리 2세의 후계자로 대우하고 리처드의 상황을 외면하였다. 이같이 제프리에게 정치적 열세였던 리처드와 프랑스 공주 아델을 싫어하던 모후 엘레오노르 다키텐은 분노를 삭히며 헨리 2세의 명령을 따르면서도 뒤에서 은밀히 결혼 동맹을 맺을 새로운 신부를 물색했다. 전부터 헨리 2세에게 엘레오노르의 연금을 풀어주도록 청했을 정도로 모자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어왔던 나바라 왕 안초 6세 내외가 그들에게 동맹의 손을 내밀자 장녀인 베렝겔라 공주와 비밀리에 약혼 절차를 밟았다고 믿어진다.

1186년 8월 동생 제프리 2세가 파리에서 돌연 급사하자 리처드에게 국면을 뒤집을 기회가 찾아오고 거의 30세가 되어가는 리처드는 프랑스 왕 필리프 2세와 드디어 동맹을 맺게 되었다. 명운이 다하고 있던 헨리 2세는 가장 총애하는 아들인 막내 존을 위해 무리를 해서라도 아키텐 상속 계획에 박차를 가하며 프랑스 공주 아델과 결혼시키려 했고, 대륙의 플랜태저넷령을 산산조각 내어 정복할 야심을 숨긴 필리프 2세는 리처드와 아델의 결혼을 재촉하면서 부자를 이간질하는 가운데 상냥함으로 위장하여 리처드를 구워삶으려 했다. 아키텐의 지배권을 꽉 쥐고 헨리 2세의 후계자 자리에 서고자 한 리처드는 필리프의 술수에 넘어가면서도 나바라 공주 베렝겔라와의 약혼에 대해선 철저히 비밀로 부치고 안초 6세 내외에게 신뢰를 주며 제각기 동상이몽을 하고 있었다.

1188년 11월 18일, 교황의 노력으로 항구적 평화를 물색하려는 회담이 열렸지만 헨리 2세가 리처드와 아델의 결혼, 리처드를 공식 후계자로 인정하기를 주저하자 리처드는 그 자리에서 대륙의 모든 플랜태저넷령에 대해 필리프 2세에게 충성 서약을 했다. 이듬해인 1189년, 리처드는 필리프 2세와 협공하여 부왕과 전쟁을 재개하고 전세가 기울어지자 헨리 2세의 봉신들이 배반하여 그들에게 붙었으며 6월에 헨리 2세가 소수의 지지자인 서자 제프리, 윌리엄 마셜, 르노 다마르탱 등과 연합하여 맞서려 했으나 르망에서 대패하고 시농으로 퇴각하였다. 1189년 7월 3일, 리처드와 필리프는 서 있기조차 힘든 헨리 2세를 회담장에 소환하여 3차 십자군 원정을 마친 즉시 아델과의 결혼, 가장 굴욕적인 조건들을 받아냈다. 3일 후 부왕이 병사하자 리처드는 대륙의 플랜태저넷령을 모조리 독식하고 잉글랜드 왕으로 즉위하였다.

4.5. 즉위, 숙청

1189년 9월, 잉글랜드 왕위에 오른 리처드 1세는 헨리 2세에 맞서 자신의 편을 든 사람들을 비열한 아첨꾼에 기생충 같은 인간들이라며 모조리 처벌함으로써 토사구팽해버리는 등 대대적인 숙청을 가했다.

4.6. 제 3차 십자군 원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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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포로 생활, 의 반란

3차 십자군 원정 도중 메시나에서 체류했을 때 리처드의 동상이몽의 실체가 밝혀지고 정치적으로 수틀리자 즉시 배신한 프랑스 왕 필리프 2세의 음모 또한 드러나게 되자 둘의 우호 관계는 단절되었다. 아크레 함락 직후 귀국한 필리프 2세가 야심을 드러내기 시작하여 동생 을 사주해 음모를 획책하는 통에 리처드는 살라흐 앗 딘과 결국 결판을 내지 못하고 귀환하게 된다.

지중해에서 난항을 거듭하다 동로마 황제 이사키오스 2세의 제국령에 다다라 순례자로 위장하기도 했다. 아퀼레이아 부근에서 배가 난파하여 매형인 하인리히 사자공의 원조를 받기 위해 극소수의 부하들만 이끌고 비밀리에 유럽 대륙을 횡단했다. 허기와 병에 시달리던 도중, 과거 아크레에서 리처드가 부당하게 모욕을 주었던 오스트리아 공작 레오폴드 5세의 영지를 지나게 되었고, 빈에서 발각되어 생포되었다. 부하들은 고문을 받았고 리처드는 뒤른슈타인 성으로 이송되어 검을 든 병사들에게 밤낮으로 감시를 받는 신세에 처했다.

1192년 12월, 레오폴드 5세의 상위 주군인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하인리히 6세가 프랑스 왕 필리프 2세에게 리처드의 신변에 대한 서신을 보냈고 루앙 대주교 쿠탕스의 월터가 프랑스 왕궁에 심어놓은 첩자가 아키텐의 엘레오노르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교황은 오스트리아 공작 레오폴드 5세만을 파문하였다.

1193년 2월, 리처드는 하인리히 6세에게 호송되어 트리펠스 성에 수감되었다. 호송되는 도중에 리처드는 로버츠브리지의 대수도원장들을 잠시 만날 수 있었고, 주교들은 리처드의 표정이 밝았으며 황제에게 앙갚음을 하기 위해 단단히 벼르고 있었다고 전했다. 리처드는 처음에 하인리히 6세에게 왕의 권위에 걸맞은 예우를 받았지만 프랑스 왕 필리프 2세의 사주를 받은 보베 주교의 선동에 의해 얼마 동안 형편없는 대우를 받게 되었으며 말이나 망아지도 옴짝달싹 못 할 무거운 쇳덩이를 몸에 달았다.

3월 23일, 리처드는 슈파이어에서 열린 신성 로마 제국 법정에 기소되었다. 죄목은 시칠리아를 점거하려 한 무력 행위, 키프로스 정복, 코라도 암살 배후였다. 리처드는 "나는 신 바로 아래의 계급에서 태어났다"라고 말하며 하인리히 6세에게 경의를 거부했다. 그리고 스스로를 열렬히 변호하여 법정을 감동시켰고 결투 재판을 제의하였으나 모두가 몸을 사렸다. 그러나 이후 법정에서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고 황제 앞에 무릎을 꿇어 여론이 자신에게 유리하게 전개되도록 유도하였다. 하인리히 6세는 이탈리아 남부의 권위를 주장하기 위한 군자금으로 사용할 목적으로 리처드의 보석금으로 십 오만 마르크를 선고하였고, 이는 잉글랜드 연간 소득의 2-3배에 달하는 금액이었다. 이 자리에는 리처드의 오랜 충복이자 십자군 군대를 인도하여 복귀시키는 임무를 맡았던 솔즈베리 주교 허버트 월터가 참석했는데, 리처드는 그의 어눌한 화술에 가려진 유능함과 충성심을 꿰뚫어보고 그가 잉글랜드로 귀환한 즉각 모후의 권한으로 캔터베리 대주교로 임명되게 하였다.

존은 용병 부대를 이끌고 런던으로 진격하여 섭정 위원회에게 복종을 요구하였고 여태 퍼뜨렸던 형에 대한 온갖 흉측한 소문들을 다시 일일이 열거하며 설득했다. 심지어 형이 이미 죽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반응이 미온하자 무력 행사를 결정하여 잉글랜드 내전을 벌였다. 그 사이 필리프 2세가[14] 직접 출군하여 노르망디를 침공하고 리처드의 아키텐 봉신들의 충성심을 휩쓸고 있었다.

잉글랜드 대법관 윌리엄 롱챔프가 신성 로마 제국으로 달려가 하인리히 6세와의 협정을 도왔던 덕에 리처드는 독방 감금에서 해방될 수 있었고 트리펠스 성에서 하게나우로 이송되어 이때부터 귀빈에 가까운 대접을 받게 되었다. 이 동안 신성 로마 제국의 많은 수뇌부와 친분을 쌓으며 동맹을 다졌고 하인리히 6세의 진짜 목적이 필리프 2세를 복종시키고 동맹을 맺는 것임을 간파하였다. 또 내내 밝은 모습을 보였다.[15] 하지만 보석금을 모으는 시간은 길었고 1193년 겨울에 샹파뉴 백작 부인 마리[16]에게 심정을 표현하는 시를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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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포로도 진심을 말하지 않소
능숙히, 슬픔에 빠져 있지 않으면.
하지만 위로를 위해 그는 노래하오.
나는 많은 친우가 있으나 그들의 선물은 적소.
그들에게 불명예가 있으리, 나의 보석금 때문에
두 번의 겨울이 지나도록 포로로 남아 있다면.

나의 부하들과 봉신들은 잘 알고 있소,
잉글랜드, 노르망디, 푸아투와 가스코뉴인들이여,
나는 그리 가난한 동료가 없다는 것을
그들을 나는 돈을 탐내어 감옥에 저버리지 않음을.
질책하려 말하는 것이 아니오만
여전히 나는 포로라네.

확실히 보고 나는 비로소 깨달았소.
망자와 포로는 친우도 가족도 없음을.
그들이 금과 은을 탐내어 나를 저버렸기 때문이오.
내가 오래도록 포로로 남아 죽으면
나의 사람들이 질책받을 것이니,
나를 향한 질책이 많으나 그들을 향한 질책은 더 많으리.

나의 심장이 슬픈 것은 더 이상 놀랍지 않소.
나의 주군이 내 영지를 가혹함에 빠뜨렸기 때문이오.
그가 우리의 맹세를 기억한다면
우리 둘이 함께하였던,
나는 실로 잘 알고 있네 오래도록
포로로 남아 있지 않을 것을.

앙주인들과 투렌인들은 잘 알고 있소,
부유하고 무사한 이 젊은이들이여,
그들로부터 멀리 떨어져 나는 다른 이의 손에서 포로라는 것을.
그들은 나를 많이 사랑했으나, 더는 나를 사랑하지 않소.
훌륭한 군대는 더 이상 평야에 존재하지 않소
내가 포로이기 때문이오.

나의 동료들이여, 그들을 나는 사랑했고 사랑하오,
캉의 동료들이여 페르슈의 동료들이여,
나에게 말하게, 노래하게 그들이 믿지 않음을,
그들을 향한 나의 심장이 거짓과 헛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내가 포로로 남아 있을 동안, 그들이 나와 대적한다면,
그들은 몹시 극악무도하오.

백작 부인인 누이여, 그대의 고귀한 영지는
그로부터 보살핌을 받고 보호받을 것이오.
나는 그에게 호소하오.
그리고 그 때문에 나는 포로로 남아 있네.

나는 샤르트르 백작 부인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오.
루이의 모친 말이오.[17]
《어떤 포로도 진심을 말하지 않소Youtube

결국 리처드는 모후에게 신성 로마 제국으로 와주기를 청했다. 모후가 오스트리아 공작 레오폴드 5세의 아들과 약혼이 결정된 제프리 2세 딸 엘레오노르와 키프로스 군주 이사키오스의 딸을 데리고, 잉글랜드를 쥐어짜 모은 십만 마르크를 가져왔다. 모자는 석방일에 교섭을 하였지만 필리프 2세와 존의 뒷공작 때문에 날짜는 뒤로 미루어졌다. 이에 사자공 하인리히를 비롯해 그간 리처드가 동맹을 다졌던 독일 공작들의 항의가 빗발쳤고 하인리히 6세는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마침내 2월 4일, 리처드는 자유를 되찾았다.

필리프 2세는 급히 존에게 서신을 보냈다.
자신의 몸을 돌보도록 하시오. 사탄이 풀려났소.

서신을 받은 즉각 존은 파리로 도주했다.

리처드는 런던으로 입성하여 존의 지지자들을 숙청하고 두 번째 대관식을 치렀다. 그리고 또다시 군자금을 모아 대규모 함대를 이끌고 노르망디에 상륙했다.

그 틈에 존이 투항했다. 모후가 나서서 달래자 리처드는 "두려워하지 말라. 너는 사악한 동료들의 꼬임에 넘어간 어린아이일 뿐이다. 너의 조언자는 응당 대가를 치를 것이다."라고 말하며 동생을 공개적으로 용서했다.[18] 존이 에브뢰로 달려가 프랑스 수비대를 죽이고 에브뢰를 형에게 바치자 필리프 2세는 에브뢰를 불바다로 만들어 보복했다.

4.8. 필리프 2세와 전쟁

리처드는 맨앳암즈석궁병으로 구성된 분견대로 포위망을 돌파해 수비군을 강화시키고 나머지 군대를 이끌고 필리프의 보급선을 끊어버려 그를 패퇴시킨다. 그리고 여유롭게 베르뇌이에 입성했다.

뒤이어 프레티발에서 필리프 2세의 프랑스 군을 일각에 격파, 필리프 2세가 이끌던 남프랑스 봉신들의 대반란을 압도적으로 제압했다.

4.9. 사망

리모주는 아키텐의 북동쪽에 위치한 잉글랜드령과 프랑스간의 중요한 국경 지대로 리처드의 형인 청년왕 헨리 시절부터 툭하면 반란을 일으킨 곳이었다. 당시 리모주 자작이 필리프 2세와 동맹을 맺고 리처드에게 반기를 들었는데 전략적 요충지기에 리처드가 직접 출군했다.
리모주 자작은 필리프와 동맹을 맺고 반기를 들었는데, 리처드는 사순절 기간 필리프와 평화 조약을 맺은 기회를 이용해 군대를 이끌고 가서 공격했다. 게다가 몇몇 사람이 말하기를 막대한 양의 보물이 리모주 자작의 땅에서 발견되어, 이 보물을 넘기라고 했는데 자작이 거절해 더욱 화가 났다는 말도 있다. 마치 사순절 기간에는 무기를 놓아야 한다는 것을 몰랐던 것인 양 리처드는 자작의 땅을 불과 칼로 황폐화시켰다.
존 길링엄(런던 정치 경제 대학 역사학 명예 교수), Richard I, 323

리모주 자작이 농성한 샬루-샤브롤 성을 공격한 리처드는 1199년 3월 25일 평상복 차림으로 성벽 가까이 거닐며 전선을 살피다가 성에서 날아온 석궁 화살에 목에서 가까운 왼쪽 어깨 부위를 맞았다.

리처드의 병사들은 성을 점령하는 데 성공하고 모든 수비병들을 교수형에 처하라고 명령했다. 수비병 중 왕을 쏜 소년병 구르동(Gourdon)이 리처드의 앞에 끌려가고 용서를 받았지만 용병대장 메르카디에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어깨에 화살을 맞은 부위가 악화되어 1199년 4월 6일에 4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Church_of_Fontevraud_Abbey_Richard_I_effigy.jpg
퐁트브로 수도원 무덤 조상

사망 후에 그의 유해는 유언에 따라 분리되어 각기 다른 곳에 묻혔다. 머리는 샤루 수도원, 심장은 노르망디의 루앙, 유해는 퐁트브로 수도원.

5. 사적인 면

5.1. 외모 · 육체적 능력

파일:Richard_Coeur_de_lion_Gisant_Rouen.jpg
루앙 대성당 무덤 조상

잉글랜드 왕으로 즉위했을 무렵인 1189년에 32세의 리처드에 대하여 리처드 왕의 편력기의 작가와 뉴버그의 윌리엄의 기록이 판이한데 존 길링엄 교수는 뉴버그의 윌리엄과 카기샬의 랄프에 신뢰한다. (1) 리처드 왕의 편력기는 리처드 1세가 사망하고 18년이 지난 1217-18년에 전설화를 거쳐서 쓰였기에 당시 기사의 이상적인 외모를 구현한 것 뿐이며 (2) 잉글랜드의 성직자로서 뉴버그의 윌리엄의 기록은 리처드의 생전에 쓰였으며 카기샬의 랄프의 기록과 교차 검증이 된다는 점이 근거가 된다. J. Gillingham, Richard the Lionheart (London, 1999), p. 266
  • 뉴버그의 윌리엄에 의하면 리처드는 고도 비만에 외모가 추했다. "확실히 보기 흉한 증상이(unbecoming symptom) 있고 안색이 창백하고(pale complexion) 너무 뚱뚱했다(overweight). 그리고 몸에 백 개가 넘는 궤양들이(over a hundred ulcers) 잔뜩 자라있었다."
  • 카기의 랄프는 이렇게 적었다. "(그의 말년에) 평소에는 충분히 인심이 후하고, (성품이) 매력적이고(attractive) 농담과 놀이를 즐겼다. 그런데 어전 회의를 할 때에는 안광에 살기가 도사렸고 목소리는 표독스러웠으며 행동거지는 흉포한 사자 같았다. … 의사가 하는 일을 애먹였을 정도로 지나치게 뚱뚱했다(too much fat)."
  • 리처드 왕의 편력기의 저자는 이렇게 각색했다. "키가 크고 몸의 균형이 좋다. 그의 머리색은 붉은색과 금색의 중간이었다. 그의 팔다리는 유연하고 곧다. 팔이 꽤 길어 검술에 특히 걸맞았고 그의 긴 다리는 체격과 어울렸다."

12세기 중반부터 차츰 이상적인 미의 기준은 남성도 높아졌다. 반드시 몸이 늘씬한 근육질이어야 했다. 큰 키에 팔다리가 길고 숱이 많고 긴 금발 곱슬머리에 면도를 하고 피부는 희고도 발그레하며 밝은 표정의 기사였다. 리처드가 즉위한 시절의 잉글랜드는 현실과 정반대로 문학에서 왕이 갖출 궁정인으로서의 미덕에서 외모에 대한 요구가 전례 없이 대중적으로 대폭 늘어난 때였다. Burnley, J. D., and David Burnley. Courtliness and Literature in Medieval England. Longman, 2001. 리처드의 후원을 받은 베르트랑 드 보른은 제프리 2세를 여인의 자태 비유하여 외모를 칭송했지만 리처드는 패싱했다. 당대의 이상적 남성상은 전통적인 남성상과 더불어 궁정 연애의 유행에 따라 새롭게 등장한 미덕이 강조되었고, 예법에 능숙하거나 외모가 잘생겨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리처드는 후자의 칭송의 수혜자는 되지 못 했다.

웨일스의 제럴드는 리처드가 "평균보다 키가 꽤 크다"라고 했는데 2m에 가까운 엄청난 장신으로 형인 청년왕 헨리와 키가 닮았으며 부왕 헨리 2세는 키가 중간이었던 반면 엘레오노르 다키텐은 키가 비범했기 때문에 형제는 모친의 유전자를 물려받았을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당시 증언을 종합해보면 '머리색이 아주 훌륭한 붉은색이었던' 부왕 헨리 2세가 '안색이 붉고 거무스름한 데에다 주근깨투성이었고 회색 눈'의 소유자였기에 리처드도 이런 요소를 물려받았을 것으로 여겨진다.[19]

대중역사서의 경우에는 리처드의 외모에 대해서 리처드 왕의 편력기의 저자, 뉴버그의 윌리엄, 카기샬의 랄프의 기록들과 보충적으로 부친인 헨리 2세의 외모에 대한 증언들이 짜깁기된다. 가령 이런 식이다. "Richard was said to be very attractive; his hair was between red and blond, and he was light-eyed with a pale complexion.(리처드는 아주 매력적이었다고 전해지는데, 머리색은 붉은색과 금색의 중간이었고 눈은 회색이고, 안색은 창백했다고 한다.)"

역사학자도 호불호가 갈리는 인물이나 가문이 있기 마련이지만 대중역사가들은 그런 경향이 두드러진다. 국내에서 리처드 1세와 관련하여 주로 인용되는 앨리슨 위어의 저서《아키텐의 엘레오노르》에서 앨리슨은 "존 왕이 유사시에는 부왕이나 리처드 형만큼 정력적이고 강인한 면모를 보이기도 했다. 전쟁도 싫어했고, 마상창시합에 나간 경험도 없었던 것에 비하면, 군 지휘관으로서도 제법 탁월한 재능이 있었다. 필리프 2세는 앙주 가문 사람들 같은 매력이 없고 지나칠 정도로 조심스럽고 소심했으며 위생 관념마저 엉망이고 작은 키에 평범한 사람이었고 군사 기술이 뛰어나지 못했다"라고 인물과 가문에 대한 주관적인 편파를 드러냈다. 이런 대중역사가들은 역사적 사실의 객관적 전달을 표방하여 이런 서술을 조작하고 믿으며 독자들에게 확산시키는 것을 원하는 것이다. 연구 중심의 사학자들이 개인적 면모야 둘째로 치고 군사적 평가에 대해 이렇게 쓰면 스스로 전문성을 훼손하는 것이라 인용률이 날아가고 적들의 먹잇감이 된다.

'힘으로 당해낼 자 없던 천하장사'였다고 한다. 그와 유사하게 모친의 외숙부 중에 안티오키아 공작 레몽은 괴력의 소유자로 생전 헤라클레스로 불렸고 맨손으로 철봉을 구부리고 타고 있는 전투마를 허벅지 힘만으로도 다스릴 수 있었다고 전해진다. 리처드 1세의 신체적 소질에 대해 중세 전문가라고 하는 제임스 브런디지의 평가는 이러하다.
리처드는 말년에 접어들어 신체 활동을 줄였던 것으로 보임에도 불구하고 혈기왕성한 힘과 근육계를 평생 유지했다. 결론적으로 그는 극도로 뚱뚱해졌다. 생의 대부분에 걸쳐 과격한 신체 활동으로 향상된 타고난 육체적 힘과 결합하여, 그는 일련의 잘 연마된 반사신경 또한 소유했다. 이 재능이 젊은 시절에 그가 굴지의 전사로 등극하고 목적을 달성하는 데에 바탕이 되었다.
J.A. Brundage, Richard Lion Heart (New York, 1974), p. 250

그 또한 전염병으로 머리카락을 잃기도 했지만 하우든의 로저는 "머리카락을 잃었으나 … 곧 회복되었다."(capillos suos deposuerunt … uterque regum convaluit.)라고 증언했다.

5.2. 성품

그의 생전 별칭은 라이언하트(The Lionheart)[20]가 아니라 남프랑스 음유시인인 베르트랑 드 보른이 지어준 오크 에 노(Oc e no), 곧 예, 아니오 였다. 이는 리처드의 성실함과 약속은 반드시 지키는 성품에서 나왔다.

반란을 제압할 때 유별나게 잔인한 면모가 돋보였다. 앙주 가문의 기질을 강하게 물려받아 무언가에 집착할 때에는 건강을 해칠 정도로 빠져들었으며 성미가 급하고 유전적인 사디스트에 표독하고 난폭한 성정으로 당시 악명을 떨쳤다고 한다.

사람에 대한 그의 호불호는 극명했고 "모욕을 당하면 절대 못 참고 기어이 달려가 명예를 회복하고 왔다"라고 한다. 성격적인 측면에서 어두운 부분을 다룰 때 동시대인인 하우든의 로저는 "모두에게 악질이었다. 친구에게는 더 악질이었고, 그 자신에게는 가장 악질이었다."라고 했으며, 하물며 카샬의 랄프는 "죄인들의 거대한 집단 중 하나"라고 적었다. 사제 뇌이의 풀크는 리처드가 오만, 탐욕, 욕정이라는 추잡한 세 딸을 세상에 내놓은 아비라며 손가락질을 한 적도 있었다. 이 말에 리처드는 냉소적으로 응수했다고 한다. "나의 딸 오만은 템플기사단에, 딸 탐욕은 시토회에, 딸 욕정은 수녀원에 보내겠다."

사냥을 즐겼고 형 헨리와는 달리 마상창시합보다 실제 전쟁에 나가 경험을 쌓는 편을 더 선호했다.[21] 디케토의 랄프는 리처드를 '전쟁의 신 마르스의 일에 헌신한 사람'이라고 불렀다. "왜 우리가 이처럼 위대한 사람을 칭송하기 위해 노력을 들일 필요가 있는가? 그는 군더더기 찬양이 필요없는 사람이다. 감히 누구도 넘보지 못 할 군계일학이다."

여러 방면의 재능의 소유자였다. 또한 부왕 헨리 2세처럼 능글맞고 유머 감각이 탁월했는데 '그는 모든 걸 농담거리로 삼았고 듣는 사람들이 걷잡을 수 없이 웃어댈 지경이었다.'
  • 리처드가 천문학적인 비용을 들여 축조한 샤토 가야르 앞에서 필리프 2세가 그에게 의기양양하게 말한 적이 있었다. "성벽을 강철로 만들어도 반드시 부수겠다." 리처드는 이렇게 응수했다. "버터로 만들어도 거뜬히 지킬 수 있소."
  • 키프로스 섬을 공격했을 때, 섬을 지배하던 영주인 이사키오스가 "나를 쇠사슬로 묶지 않는다면 항복하겠소."라고 말하고 항복했는데, 리처드는 그를 쇠사슬이 아니라 은사슬로 묶었다고 한다.

음악을 비롯한 예술에 관심이 깊었다. 남프랑스에서 트루바두르로서 명성을 누렸고 교회에서 노래를 부르고 성가대를 직접 지휘하고 많은 예술가들을 후원했다.

모후를 닮아 심미안이 매우 높았다. 사치품과 화려한 옷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고 항상 최고급으로 화려하게 치장하는 것으로 부를 과시하기를 즐겼다고 한다.

3차 십자군 원정 중에는 규율을 어기면서까지 순례자이기보다 기사와 세속 군주로서 옷가게에서 옷들을 쓸어담는 행동으로 취향에 걸맞은 사치품에 대한 욕망을 서슴없이 분출하였고 특히나 키프로스에서는 지나치게 꾸미고 다녔다고 한다.
왕이 위풍당당한 차림새로 나중에 나타났다. 신발 뒤축에 황금 박차가 달렸고 금실을 섞어서 짠 장밋빛 비단의 튜닉을 입고 그 위에 망토를 걸쳤다. 망토에는 작은 반달 모양이 늘어서 있고, 순은으로 하얗게 빛나고, 태양처럼 빛나는 구체가 빽빽하게 흩뿌려져 있었다. 이렇게 치장하고 왕이 앞으로 나아갔다. 그는 비단결 같은 크로스벨트에 금빛 칼자루의 용맹한 검을 차고 있었다. 그는 머리에 다양한 새와 짐승의 모양을 금실로 훌륭하게 수놓은 진홍색 모자를 쓰고 있었다. 손에는 지휘봉을 들고 그것을 사용하는 모든 행동들을 통해서 자신이 뛰어난 기사임을 보여주었다.
《리처드 왕의 편력기(Itinerary of King Richard)》

5.3. 섹슈얼리티

젊은 시절부터 색정광 명성으로 견줄 자가 없었다. 현대 사학자들은 리처드가 헤도니스트, 변덕스러운 색골, 성충동 괴물이라고 말한다.
  • 뉴버그의 윌리엄은 리처드 1세의 여성 편력을 증언하고 기스버러의 월터는 "단 하루도 여자 없이 못 살았다. 그는 임종 전에도 매춘부 네 명과 있었다"라고 적었다. 부르봉의 스테판에 따르면 "왕이 퐁트브로의 수녀에게 잠자리에 응하지 않으면 수도원을 불태우겠다고 협박하자 수녀가 제 눈을 뽑아 왕에게 보냈다"라고 하는데, 앨리슨 위어는 이 기록은 신빙성이 떨어지지만 그 시대 사람들에게 퍼진 리처드 1세의 이미지를 파악할 수 있다고 말한다.
  • 또한 앨리슨 위어는 리처드 1세가 3차 십자군 원정에서 포로로 잡은 키프로스 군주 이사키오스의 딸에게 음흉한 짓을 했다고 추정한다. 리처드 왕의 편력기의 작가는 딸이 아직 어린애에 불과했다고 회상한다.
  • 여기의 연장선인지 전투 후 사로잡은 여인들을 겁탈하고 휘하 기사들에게 넘겼다고 한다.

양성애자 의혹이 있었다. 상위 주군이자 절세 미남이었던 프랑스 왕 필리프 2세와 동성 연인이었다는 의혹이 제기되었지만 이 의혹은 학계에서 결코 다수의 지지를 받지 않는다.
  • 하우든의 로저는 1187년 리처드가 잉글랜드의 왕자였을 때 필리프 2세와 같은 침대에서 잤다고 기록했다. 잉글랜드와 프랑스의 긴장 상태에서 리처드가 부왕과의 정치적 불화로 인해 필리프 2세로의 동맹 정책으로 변경했던 시점이었다. 이 기록은 두 권력자의 관계[22]을 긍정적으로 판단한 어조로 서술되었다. 존 길링엄은 '당시 침대를 나누는 행위는 정치적 동맹의 표명'이고 둘의 행위는 '정치적 이해를 위한 동맹의 과시'라고 분석하여 리처드의 성적 성향에 관한 근거가 될 수 없다고 지적했다. 헨리 2세와 형인 젊은 왕도 '서로에 대한 의심을 지우기 위해' 같은 침대에서 잔 적이 있었다.
  • 하우든의 로저는 리처드가 십자군에서 시칠리아에서 체류했을 때 1190년 크리스마스 직전에 모든 성직자들을 불러 놓고 '자연을 거스른 죄'를 다시는 범하지 않겠다고 참회했던 것을 칭찬했다. 이 죄는 동성 성관계만이 아니라 총체적인 성적인 죄로 이해된다.
  • 하우든의 로저는 1195년 리처드가 "소돔의 멸망을 기억하여 불법적인 성교를 삼가라"라는 경계를 들었다고 기록했다. 당시 소돔은 '임신을 만들지 않는 성행위'를 의미했다. 동성 성관계만이 아니라 동성 성관계를 포함하는 성적인 죄였다. C. 재거는 이 기록을 (1)의 기록과 대조시켜 하우든이 기록한 1187년 잉글랜드의 왕자 시절의 리처드와 필리프의 관계는 소돔이 아니었음을 밝혀냈다. 만약 두 권력자의 관계가 소돔이었다면 하든의 어조는 부정적으로 판단한 어조로 서술되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존 볼드윈 교수도 이에 동의한다. 다시 말하여 1187년 리처드와 필리프의 관계는 소돔∋동성 성관계가 아니었다.

리처드 1세에 대해 가장 권위 있는 평전을 집필한 존 길링엄은 상단의 근거로 리처드와 필리프 2세가 동성 연인이었을 것이란 주장에 회의적이며 리처드를 이성애자로 본다. 중세사 교수 진 플로리는 리처드를 양성애자로 판단하지만 필리프 2세와 동성 연인까진 아니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반면 필리프 2세에 대해 가장 권위 있는 평전을 집필한 존 볼드윈은 필리프 2세의 생애 동안 성관계 상대가 최소 몇 명인지에 주목하여 두 번째 상대를 1189~90년 리처드 1세로 제시했다.[23]

그렇다고 형제들 중에서 처음부터 필리프 2세와 가장 절친한 것도 아니었는데, 그들이 본격적으로 우정을 형성한 건 청년왕 헨리와 제프리 2세가 죽고 나서야 리처드만이 아니라 필리프 2세 입장에서도 정치적 이해가 다분히 발생할 때였다. 다만 리처드가 메시나에서 체류했을 때 그 성정에 재력과 권위에도 불구하고 필리프 2세의 무리한 요구를 따르고 상위 주군 대접을 꼬박꼬박 해준 걸 생각하면 리처드는 우정을 진심으로 여기는 걸 넘어 심취했을 가능성이 크지만 상대가 신의를 지키는 건 그 자신에게 이로울 때뿐이었다.

하지만 십자군에서 사이가 나빠진 뒤에 리처드는 신임하던 여론 관리자인 베르트랑 드 보른을 이용하여 필리프 2세를 추악한 언사로 공격했다. 심지어 trop mols(very soft)라고 짓궂게 놀리기도 했다.[24]

미소년을 탐하느라 궁정을 동성애 소굴로 만들었단 지탄을 받았던 윌리엄 롱챔프와 오랜 절친이었으며 잉글랜드 내 나쁜 평판에도 굴하지 않고 대법관으로 임명하여 섭정위원회의 중추를 맡겼다.[25]

슬하에 서자 한 명뿐이다. 1180년대 초에 미상의 여인에게 얻게 되어 이름을 필리프로 지었다.[26] 누나 마틸다와 하인리히 사자공의 차남인 조카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오토 4세가 리처드를 빼닮았기에 친아들처럼 대하고 아키텐 공작으로 서임하기도 했다.

5.4. 결혼 생활

1192년 5월 12일, 리처드는 3차 십자군 원정길에 키프로스에서 나바라 왕 안초 6세의 장녀인 나바라의 베렝겔라와 정략 결혼했다. 이는 원정 기간 남프랑스를 비울 동안 전쟁이 다발할 가능성이 농후한 툴루즈 백작령과 근접한 국경에서 안정을 유지하기 위해 나바라 왕국의 역할이 필연적일 수 밖에 없다는 견지에서 기존의 우호를 발전시켜 전략적인 책임 분담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또한 원정 도중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상황에서 정치적 문제로 인해 34살이 되도록 결혼이 지연된 탓에 없었던 적자의 생산은 프랑스 왕 필리프 2세와 체결했던 1191년 3월 메시나 협약의 조항 '리처드가 아내에게서 적자를 얻으면 분쟁 지역인 지조르와 벡쌍도 얻는 것'과 결부된 중대 사안이었다. 하지만 1190년 10월에 필리프 2세, 탕크레드와의 협상 결과로서 자신의 후계자를 동생 제프리 2세 아들 아르튀르 1세로 지명했던 것과 분명 어긋난 것이었다.

베렝겔라는 무척 아름답고 용감하고 교양 있고 학식이 뛰어난 여인으로 모든 면에서 리처드와 어울렸으며 남편을 진심으로 사랑했다고 여겨진다. 반면 리처드는 아내에게 일절 무관심하였고 1192년 9월에 팔레스타인에서 헤어지고 포로에서 풀려나 귀국한 뒤에도 아내를 찾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리처드 1세가 포로에서 풀려나는 대가로 하인리히 6세는 리처드의 조카 오토 등을 비롯한 많은 볼모를 요구했고 베렝겔라의 형제도 포함되었다. 리처드는 풀려난 모든 볼모들에게 보답했지만 베렝겔라의 형제에게는 어떠한 사례도 하지 않았다.

1195년 4월에 재회하여 화해하고 르망 근처에서 동거할 집도 짓기 시작했지만 1195년 크리스마스 연회를 마지막으로 남프랑스에서 지내던 아내와 결코 만나지 않았다. 더군다나 리처드는 이미 1180년 초에 사생아 필리프를 얻었기에 현대에 베렝겔라의 불임설이 제기되었으나 그럼에도 리처드가 이혼 시도를 했다는 정황이 밝혀지지 않아 연유가 뭐든 적자 생산에는 관심이 없었다고 믿어진다.

대외적으로는 처남인 나바라 왕 안초 7세의 앙주 제국에 대한 적대 정책 전환으로 말미암아, 안초 6세의 정책이었던 군사적 협력의 기대는 불발된 지 오래였다. 1196년 봄에 안초 7세는 리처드 1세와 전쟁을 벌이게 될 시 지원을 받기로 남프랑스 자작들에게 서약을 받아내기도 했다.

참고로 리처드와 안초가 왕자 신분으로 1177년에 팜플로나에서 마상창시합에 참여하여 친분을 맺었다는 이야기의 출처는《History of the Counts of Poitier》이며 실제 기록에 근거한 것이 아닌 당시 유행한 낭만주의적 역사 서술 방식에서 비롯된 것이다.[27] 무엇보다도 리처드가 안초 7세와 친분을 맺었다는 기록은 존재하지 않는다.

나바라 왕국과 근접한 국경 지대에서 군사적 긴장을 완화할 조치로 리처드는 조카인 샹파뉴 백작 티보 3세와 베렝겔라의 여동생 블랑카의 혼담을 적극 추진했고 동시에 티보 3세가 프랑스 왕국을 대항하는 동맹에 동참하는 것을 압박하는 효과를 끌어냈다.

리처드는 여전히 아내에게 무관심했지만 아내의 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았다. 콘월의 수익을 베렝겔라에게 주었다는 게 불확실했던 것도 모자라 외교적 고립에 처한 안초 7세에게 외교적 압력을 가하여 아내의 유일한 수입원인 지참금의 수익마저 통째로 빼앗았다. 남편 생애 내내 아내는 시어머니 아키텐의 엘레오노르에게 반강제로 배우자로서의 모든 수입을 양보하며 지냈고 남편의 임종에도 소환되지 않았으며 장례식에도 초대를 받지 못했다.

목격자는 베렝겔라가 남편의 사망 소식을 들었을 때 크게 애도한 뒤 "놀라운 방법으로 슬픔을 털어냈다"라고 회고한다. 아내는 남편 생전에 남편에게 배우자로서 어떤 수입도 요구하지 못했으나 사후에 즉각 존 왕을 찾아가 과부산을 요구하였다. 존 왕은 지급을 미루었고 헨리 3세에 이르어 지급되었다.

과부가 된 베렝겔라는 여동생인 샹파뉴 백작 부인 블랑카에게 의탁했다. 그러나 샹파뉴 백작 티보 3세가 요절하여 블랑카도 과부가 되었다. 필리프 2세의 지지 없이는 블랑카가 샹파뉴 섭정 자리를 유지할 수 없었던 정세에서 필리프 2세는 두 과부를 보호하고 이들에게 가해지는 위협을 엄중히 응징했다고 한다.

한편 이후 흥미롭게도 '아름답고 매우 지적인' 나바라의 블랑카가 필리프 2세와 사랑에 빠졌다는 소문이 돌았다.[28] 안초 7세와 필리프 2세가 친분을 맺었다는 기록은 없었으나 블랑카는 가족 구성원을 묘사할 때 프랑스 왕국과 나바라 왕국의 지리적 거리에도 불구하고 두 왕을 함께 옆에 두어 묘사하길 좋아했으며, 정치적 문제 외에서도 카페 가문과의 연결을 자랑했다고 한다.

다음을 참고.
Storey, Gabrielle. Berengaria of Navarre: Queen of England, Lord of Le Mans. 영국: Taylor & Francis, (n.d.).

6. 이야깃거리

  • 13세기 중엽에 등장한 음유시인 블롱델의 전설은 리처드 1세가 3차 십자군을 끝내고 귀국길에서 오스트리아에서 포로로 수감되었을 때를 다룬다. 사방으로 리처드를 찾아다니던 블롱델이 오스트리아의 뒤른슈타인 성 주변에서 노래를 부르고, 리처드가 다음 구절을 노래해 자신이 있는 위치를 알리고 구출되었다는 내용이다. 이 전설은 역사적 근거가 없고 로빈 후드처럼 완전한 허구로 동의되며 리처드 1세가 뒤른슈타인에 수감되었다는 사실도 비밀로 유지되지 않았다.[29]
  • 블롱델은 당시 실존했던 북프랑스의 트루베르의 별명이었다. 블롱델은 네슬레의 영주 장 1세[30] 혹은 그의 아들인 장 2세[31]로 추정된다.[32]
리처드 왕은 노새에서 내려 주위를 둘러보며 로빈에게 말했다. "정말, 그대는 주위에 훌륭한 젊은이들을 많이 두었군, 로빈. 내 생각에는 리처드 왕조차도 이런 근위대는 몹시 마음에 들어할 것이네." 그러자 로빈이 자랑스럽게 대답했다. "이 사람들이 내 부하들 전부는 아니오. 지금 50여 명 정도는 내 오른팔 리틀 존과 함께 다른 볼일을 보러 나가 있고. 하지만, 리처드 왕에 대해서는, 내 말해 두는데, 그분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피를 마치 물처럼 하나도 아깝지 않게 쏟아 붓지 않을 사람이 우리 중에는 단 한 사람도 없소. 당신들 성직자들은 우리의 왕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소. 하지만 우리 용사들은 우리의 행동과 꼭 닮은 그분의 용감한 위업 때문에 그분을 충심으로 좋아한다오."
『로빈 후드의 모험』
* 현재의 영국에서는 여러 가지 무훈담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며, 대단히 인기 있는 인물이기도 하다. 특히 로빈 후드 민담에서는 로빈 후드의 든든한 조력자로 항상 등장한다. 나라의 국정을 잘 돌보지 않았던 군주임에도 불구하고 후대에까지 이렇게 사랑받는 인물도 많지 않다. 무엇보다 영국인들 사이에서는 리처드의 무용담은 아직도 자국민들의 자랑거리라고 한다.
  • 잉글랜드의, 아니 영국과 더 나아가 유럽 최고의 기사, 기사도의 꽃으로도 불린 윌리엄 마셜에 의해 패배한 적이 있다는 자료가 국내에 굴러다니고 있는데,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지만 실제로 알려져 있는 자료를 자의적으로 호도한 감이 있다. 자세한 내용은 윌리엄 마셜 문서를 참조. 10살의 차이가 나는 둘이지만 각각 유럽 최고의 무력을 가졌다고 평가받는 왕, 기사이기에 둘이 충돌했다는 썰 자체가 흥미 있었을 법하다. 반쯤 농이지만 안 그래도 잉글랜드가 이런 인물들을 동세대에 보유했으니 당시 프랑스 입장에선 앙주 제국을 견제 안 할 수가 없었을 듯하다.
  • "사자심왕"이라는 별명으로 유명하지만 사심왕(獅心王)으로 적기도 한다. 그런데 한국에는 '사자왕 리처드'라고 알려져 있다. 아마 사자심왕이나 사심왕이라는 말이 익숙하지 않아서 그런 듯하다. 사실 의미를 따져보면 결국 사자왕이나 라이온하트나 똑같이 사자와 같은 용맹을 지녔다는 뜻이라 오역까지는 아니고 적당한 의역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파일:잉글랜드 왕실기.svg
  • 오늘날 잉글랜드의 상징들은 리처드 1세 시절에 정립된 것이다. 국기인 성 조지 십자기와 왕실 배너인 세 마리 사자 깃발, 표어 '신과 나의 권리'가 리처드 1세 시절부터 사용되었다.

7. 대중문화에서

이 시대를 다룬 이야기들을 보면 리처드의 인생이 워낙 드라마틱하고 기사의 로망을 그대로 구현한 인물이라서인지 '간사한 국왕 필리프 2세[33]에 맞서는 고결한 기사 리처드 1세'의 이미지가 형성되었다. 물론 국왕으로서의 역량으로 둘을 비교하면 명군이라 할 수 있는 필리프에 비해 리처드가 많이 부족하다. 뭔가 현대물에서 각색된 삼총사에서의 리슐리외버킹엄 공작과 비슷한 구도라고 볼 수 있다. 공교롭게도 프랑스와 영국 인물의 관계라는 점도 비슷하다.
  • 로빈 후드와 자주 엮이며, 로빈 후드를 다룬 창작물에서는 거의 반드시라고 할 만큼 등장한다. 열에 아홉이면 찌질이인 동생 존 왕과는 다른 인물로 묘사된다. 일단 로빈 후드부터 존 왕보다 리처드 1세를 더 존경하기도 했고. 전설에 의하면 사제로 위장했다가 로빈에게 잡혀갔는데, 로빈 무리가 마침 활쏘기 내기를 해서 실패하면 벌로 처맞는 놀이를 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날따라 명궁 로빈이 실수를 해서 최초로 맞을 위기에 처했는데, 이에 로빈이 나는 두목이니 너희들에게 맞을 수는 없고 저 포로들 중에서 제일 훌륭한 사람에게 맞겠다고 주장하여[34] 정체를 숨긴 리처드 1세가 로빈을 때리는 역할을 맡게 되었다. 이때 로빈은 "나를 원 펀치로 쓰러뜨리면 돈 돌려주고 풀어주겠지만 시원찮았다간 알거지로 만들어놓겠다"라고 으름장을 놓는다. 그리고 리처드는 태연하게 '콜'을 부르고 원 펀치로 로빈을 날려버렸다고 한다. 로빈이 리처드 왕을 따라 십자군 전쟁에 나서는 전설은 이때의 인연에서 시작한다고.
  • 월터 스콧의 중세 로맨스 소설 아이반호에서는 신분을 숨기고 홀로 모험을 찾아 돌아다니며 활약하는 모습을 보인다. 작품의 중요한 주제가 약 1세기 전 침략을 당해 피지배층이 된 색슨족과 바이킹의 후예로서 침략 전쟁으로 잉글랜드를 차지한 노르만족 사이의 갈등인데, 리처드는 기득권층인 노르만 혈통의 왕이면서도 색슨과 노르만 사이의 화합을 위해 동분서주한다. 노르만 귀족이 색슨족에 대해 불의를 저지르자 로빈 후드와 힘을 합쳐 그 귀족의 요새에 공성전을 벌여 함락시킨다든가.
  • 그가 장수하여 영불제국을 건설했다는 랜달 개릿의 대체역사소설 다아시 경 시리즈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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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징기스칸 4 일러스트
  • 코에이푸른 늑대와 흰 사슴 시리즈에선 전통의 플레이 가능 캐릭터였다. 《원조비사》와《징기스칸 4》때 와서도 무시무시한 전투력을 자랑하지만 정치는... 원조비사에서는 정치력이 E라서 체력이 무려 칭기즈 칸과 동일한 15임에도 내정에 필요한 행동력을 너무 먹어 한 턴에 실행할 수 있는 명령 횟수가 적어서 내정에 애를 먹는다. 징기스칸 4에서는 전투만 무려 98이다. 칭기즈 칸이나 라이벌 살라흐 앗 딘보다 더 높은 수치. 전투 중 공격하면 전용 대사가 뜨기도 한다.[35] 여러 가지로 우대한 느낌. 또한 정치가 낮긴 하지만 부하 중에 그걸 커버할 '월터'[36]라는 재상이 있어서 내정은 월터에게 맡기고 폭주하듯이 친정하고 다녀도 상관없다. 하지만 게임 시스템의 한계상 중동으로 원정을 가기 전에 프랑스를 밟고 가야 한다. 지중해로 돌아가려 해도 스페인과 이탈리아가 걸리적거린다. 실제 역사와는 달리 이런 나라들은 외국 군대가 자기 영토에 들어오면 공격해버리니까. 일본의 징기스칸 시리즈 관련 웹에서는 로빈 후드를 얻자마자 프랑스를 쳐서 필리프 2세를 잡고, 신성 로마 제국이나 스페인을 무시하고 바로 지중해를 건너 북아프리카로 쳐들어가 십자군 원정을 재현했다는 플레이 경험담도 있었다. 요컨대, 실제 역사와는 달리 십자군이고 뭐고 자국령에 들어오면 무조건 공격해버리는 인공지능의 한계. 또한 실제 역사에서는 1시나리오 시작 후 10년 뒤에 사망했지만 자연사가 아니기 때문인지 게임상 수명은 실제 역사보다 비교적 긴 편이다.
  •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2: 에이지 오브 킹에서 바바로사 캠페인 6번째에 동맹군으로 등장한다. 체력 220의 패러딘으로 등장하는데 마지막 미션에서 사라센 공격 시작 후 바바로사는 이미 죽었고 지원군은 한 줌밖에 안된다는 걸 알고 성벽과 공성 무기에 닥돌하다가 죽어버린다. 닥돌해서 죽는 리처드를 살리는 방법이 있는데 동맹을 풀고 수도사로 개종을 시도하여 자기 유닛으로 만들어보자.[37] 관련 캠페인은 존재하지 않는다. 캠페인 내내 바바로사의 뒤통수를 호시탐탐 노리던 헨리(하인리히)의 별명이 '사자왕'이라서 제대로 스토리를 안 본 게이머들은 그를 리처드로 아는 사람이 있는데, 절대 그렇지 않다. 게다가 하인리히는 왕이 아니고 공작이었기 때문에 원래 별명은 사자이며 '사자왕'이라 한 것은 오역이다.[38] 이후 결정판에서 하인리히 사자공으로 제대로 번역되어서 나왔다.
    이후 추가된 확장팩인 포가튼에 추가된 잊혀진 전투 캠페인[39] 중 한 캠페인의 주역을 맡는다. 3차 십자군에 참전하기 위해 가던 중 키프로스에 표류했던 일을 다룬 내용으로 이후 바바로사 캠페인 6으로 이어지게 된다.
  • 어쌔신 크리드에선 초반에 아크레의 포교자들이나 예루살렘, 다마스쿠스의 포교자들 사이에서 이름을 들을 수 있고 후반에 가서야 제대로 등장한다.

    아크레에서 말을 타고 몬테페레스의 월리엄과 신경전을 벌었고 템플 기사단의 그랜드 마스터인 로베르 드 사브레가 마시아프의 암살단을 삭쓸이하기 위해 리처드가 있는 아르수프로가 그를 설득하려 했다. 허나 도중에 알테어가 도착해 그의 앞에서 로베르트의 실체를 폭로하자 이에 리처드는 두 사람에게 결투 재판을 제안했고 그 대결에서 승리한 알테어는 살라딘과 화친하라는 조언을 하면서 마시야프로 돌아간다.
  • 영화 <사자왕 리차드와 십자군들(King Richard and the Crusaders)>(1954)에서 조지 샌더스에 의해 묘사되었다. 불만을 품은 수하들이 사라센족의 화살에 독을 묻혀 자신의 암살을 시도하고 잉글랜드의 깃발도 몰래 꺾어버리는데, 오히려 이를 알려주는 충신(로런스 하비 분)을 불신하고 쫓아낸다. 렉스 해리슨살라흐 앗 딘 유수프로 나온다.
  • 리들리 스콧의 작품에서는 대우가 영 좋지 못한데, 전쟁 영화를 통해 반전주의를 부르짖는 리들리 스콧에서, 생애 내내 전쟁에서 영광을 찾아다녔던 리처드가 좋게 보일리 만무하다. 킹덤 오브 헤븐에서는 마지막에 주인공인 발리앙에게 자신의 군세에 합세하라는 권유를 던졌지만[41] 이미 전쟁의 참상을 보면서 열정을 잃은 그에게 자신은 그저 대장장이일 뿐이라며 거절당한다.[42]

    또 다른 작품인 로빈 후드(2010년 영화)에서는 정신 상태가 불안정한 상태로 나오면서도 화살 비가 내리는 전장에서 아무런 보호 장비 없이 맨몸으로 돌진하는 호쾌한 모습을 보이고 나중에는 로빈 후드에게 아크레 대학살에 대한 뼈아픈 직언을 들으면서 그를 가두는 모습을 보였지만 잠시 병사들이 식사하는 사이에 석궁을 들면서 대등했던 취사병에 의하여 목에 화살이 꿰뚫려 생을 마감한다. 다만 영화에서는 갑주를 입은 채로 저격을 당해 사망하지만 실제로는 상황 자체도 아예 달랐으며 갑주도 입지 않고 정찰하는 위험한 행위를 하다가 저격당하여 사망했다.

    참고로 킹덤 오브 헤븐 DVD에 수록된 감독 코멘터리에 따르면 킹덤 오브 헤븐의 후속작으로 리처드 1세 이야기를 다루고 싶었다고 밝혔다. 맨 마지막에 등장하는 것도 후속작 떡밥을 염두에 둔 등장이었다고.
  • 인기 있는 왕답게 Fate 시리즈에도 출연하였다. 세이버(Fate/strange Fake) 문서 참조.
  • 미디블2: 토탈 워 - 킹덤즈 크루세이더 캠페인에서도 당연히 등장. 예루살렘 왕국에 3차 십자군으로 파견 온다. 특수 기능으로 '사자의 심장'을 쓸 수 있는데 광범위 사기(morale) 회복 기술이라 전투 중에는 매우 쓸 만하다. 패주하겠다 싶은 부대도 이 버프를 받으면 거의 전멸할 때까지 싸운다. 보두앵이랑 같이 붙어 다니면 군대가 패주를 안 하는 포스를 선보일 수 있다. 이웃집 웬수 필리프 2세는 안티오키아 공국을 지원하는 걸로 나온다. 즉, 여기서도 적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예루살렘 왕국이 어지간히 털어먹지 않는 이상 안티오크는 바로 다시 휴전 후 동맹을 맺어주는 호구라서 필리프 2세의 잔머리가 빛이 바랜다.
  • 크루세이더 킹즈 2에도 등장하는데, 외교 7, 무력 19, 관리 8, 음모 9, 지식 2라는 지휘관으로서는 매우 뛰어난 능력에 좋은 트레잇을 가지고 등장하지만, 라이벌 필리프 2세(14 / 19 / 25 / 12 / 13)에게는 한참 밀리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래도 역사적 사실을 반영하여 영토를 기반으로 한 프랑스보다 우월하므로 무지왕 존에게 왕위가 넘어가지만 않는다면 프랑스를 밀어버릴 수 있는 상황이다.
  • 대체소설 십자군의 왕이 되었다 에선 주인공 덕분에 아키텐 지방의 소유권을 공고히 해냈다,비록 영국왕이 되진 못했지만 어차피 대륙 프랑스의 넓은 땅의 소유권을 지켜낸 것과 더불어 여러 제약에서 해방된 덕에 십자군 전쟁에선 원전이상의 더 파괴적인 전투력을 선보였지만,정말 혈기 넘치는 전사였기에 주인공이 옆에서 직접 컨트롤 해야했다.훗날 그는 영국과 프랑스를 전부 먹어치워버렸다.
  • 웹툰 사신소년에서는 수색조장코어로 등장한다. 수식어는 '사자심왕'. 사용자인 수색조장 리암 플랜태저넷은 그의 마지막 후손이라고 한다.


[1] 역대 잉글랜드 왕국 국왕들 중 가장 최장신이다.[2] Merry-Joseph Blondel, <Richard the Lionheart, King of England>, 170*114cm, 1841[3] 미술사에 관심 있는 이들이라면 중세 당대의 그림체가 아니라 르네상스 이후의 그림체임을 알 수 있다. 중세 당대의 초상화는 이것, #2 생전에 그려진 초상화는 아니지만 중세 당대의 화풍이다.[4] 브르타뉴의 공작은 아니었으나 브르타뉴 공작의 주군이기는 했는데, 브르타뉴 여공작 콩스탕스가 아직 살아있었기 때문이다. 브르타뉴가 플랜태저넷 가문에게 완전히 들어온 것은 그가 죽은 이후이다. 근데 또 웃기게도 브르타뉴 공작령은 공식적으로 프랑스 왕국에 속했다(…)[5] 정확히는 앵글로색슨족이 사용하던 중세 영어이다.[6] 유년 시절 브리튼 섬노르망디에 머무르며 앵글로-노르만 프랑스어를 배웠을 것이고, 청년기에 아키텐으로 넘어가서 꽤 머물렀으니 오크어도 사용했을 것이다.[7] 게다가 당시 잉글랜드의 지배 계급의 언어 자체가 프랑스어였다. 이유는 말할 것도 없이 바이킹계 프랑스인인 노르만족이 잉글랜드를 정복하고 지배 계급을 차지했기 때문이다.[8] 역사가이기도 하다.[9] 중세 프랑스의 '프랑스'는 일드프랑스의 왕실 직할령만을 뜻하지 않았다.[10] 정확하게는 리처드의 동생인 의 후손이다.[11] 조지 1세의 경우 54세라는 늘그막에 국왕에 올랐기에 영국이라는 나라에 적응하고 신경쓰는 게 힘들기도 했다.[12] 흔히 백년전쟁을 계기로 잉글랜드인의 정체성이 깨어났다고 알려져 있는 경우가 있는데, 실제로는 그 이전부터 혈통이든 문화든 언어든 다방면에서 서서히 노르만족이 아닌 잉글랜드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수립해나가고 있었다. 물론 리처드 1세의 시대까진 노르만족의 정체성이 강했다. 노르망디 본토의 노르만족이 잉글랜드의 노르만족 지배층에 대해 동족 의식이 희석되고 본격적으로 프랑스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기 시작한 것도 비슷한 시기부터 시작된 일이다.[13] 필리프 2세의 이복누나. 프랑스 왕 루이 7세와 그의 두 번째 왕비인 카스티야 공주 콩스탕스 사이에서 태어난 차녀이다. 예비 시아버지인 헨리 2세와 간음을 하고 아들까지 낳았다는 의혹이 짙고 헨리 2세가 엘레오노르 다키텐과 이혼하려 했을 때 아델을 사랑하여 새살림을 차리려 했다는 소문까지 퍼졌다. 흥미롭게도 헨리 2세의 증손자인 잉글랜드 왕 에드워드 1세가 가장 사랑했던 왕비인 카스티야 공주 엘레오노르는 아델의 직계 후손이다.[14] 팔레스타인을 떠난 뒤부터 리처드에 대한 막연한 공포와 극심한 신경증에 시달려 1년 넘게 루브르 성에만 틀어박혀 이따금 유대인에게 죄를 물어 처형하는 것으로 스트레스를 해소하고 있었다.[15] 존의 반란 소식에 대해서 "내 아우는 손톱만큼의 저항이라도 있는 곳이라면 절대 정복하려 들지 않을 놈"이라고 얕보듯이 말하며 사냥을 즐기기도 했고 감시인들과 레슬링 시합을 하거나 저속한 농담을 주고받거나 함께 술을 마시며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16] 루이 7세엘레오노르 다키텐 사이의 장녀인 마리 드 프랑스. 리처드의 이부누나이자 필리프 2세의 이복누나로, 둘 모두와 매우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17] 마지막 연 8연. '샤르트르 백작 부인 = 루이의 모친'은 루이 7세엘레오노르 드 아키텐의 차녀 알릭스 드 프랑스로 샹파뉴 백작 부인 마리의 친여동생이다. 이복/이부 형제들과 매우 친밀했던 언니와 달리, 알릭스는 형제들과 서로 무관심하게 지냈다.[18] 존과 필리프 2세는 한 살 차이다.[19] 동생인 존 왕은 어두운 붉은 머리(dark red hair)라서 모후 엘레오노르가 어두운 계열의 머리색으로 추정되곤 한다.[20] 리처드 사후 10년간은 쓰이지 않았고, 트루바드르 연대기 작가 페이롤이 처음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21] 실제로도 마상창시합보다 실전 경험을 쌓는 것이 더 효율적이다.[22] 우정 및 동맹.[23] John Baldwin, ‘The Many Loves of Philip Augustus’, in The Medieval Marriage Scene: Prudence, Passion, Policy, eds Sherry Roush and Cristelle L. Baskins (2005), 68-72. 첫 상대는 1180년 첫 왕비 이사벨 드 에노, 두 번째 상대는 리처드 1세, 뒤이어 세 번째 상대는 1193년 아미앵에서 첫날밤을 나눈 잉에보어로 제시하고, 필리프 2세의 잉에보어와의 첫날밤 반응을 원인을 알 수 없는 급성 섹슈얼 트라우마 발현으로 해석했다.[24] mols를 라틴어로 옮기면 mollis이며 당대 서유럽에서 가장 열광적으로 읽혀진 아우렐리우스 프루덴티우스 클레멘스의 고서에서 헤라클레스가 동성 애인으로 삼은 힐라스의 별명이 mollis puer였다. "mollis puer에 대한 사랑으로 악명 높은 헤라클라스의 열정은 심지어 아르고 호가 바다에서 항해를 하고 있을 때에도 격렬하게 화를 냈고, 그가 사라졌을 때, 마치 아내를 잃어버린 것처럼, 얼굴이 시뻘개져서 네메아의 사자 가죽으로 사악함을 숨기지 않고 그를 찾아다녔다." 특히 헨리 2세의 치세 말과 리처드의 치세에 잉글랜드 암흑가에서 동성 성관계에서 수동적 역할, 즉 삽입당하는 역할을 맡는 미청년의 외모를 칭찬할 때도 쓰였다. Pietrini, Spettacolo e immaginario teatrale nel Medioevo(Roma: Bulzoni, 2001)[25] 여담으로 그의 동생 스티븐 롱챔프도 리처드의 절친이었는데 3차 십자군 군사 사령관으로 활약하였으며 그의 생전에는 의리를 지켰으나 죽은 뒤에 잉글랜드 상속지를 포기하고 부빈 전투 중 낙마하여 죽을 위기에 처한 필리프 2세를 지켜주다가 대신 전사했다. 또 다른 절친으로 모계 쪽 사촌 앤드류 쇼비니는 리처드의 용맹에 버금갔던 아르스푸 전투에서 대활약한 군사 사령관이었는데 그도 생전에는 의리를 지켰지만 죽고 몇 달 뒤 필리프 2세의 곁에서 목격되어 주변을 놀라게 했다고 한다.[26] 영국의 대중 역사가로서 중세 영국과 프랑스를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데스몬드 시워드는 리처드가 필리프 2세의 이름을 따서 서자의 이름을 지었다고 주장한다.(출처: Eleanor of Aquitaine, 저자 Desmond Seward) 이때 필리프 2세는 왕위에 막 오른 14-15세에 불과했고 리처드는 그보다 8살 연상이었다. 게다가 필리프 2세는 리처드와 그의 형제들의 도움으로 재위 초기의 절제절명의 위기를 타개했음에도 리처드만은 언짢아하고 멀리하던 때였다.[27] 1177년에 리처드가 나바라 국경과 인접한 아키텐 남부 지역에서 영주들의 반란을 제압했다는 하든의 로저의 기록과 1191년에 메시나에서 만나기 전에 리처드가 푸아투 백작 신분이었을 때부터 베렝겔라를 원했다는 리처드 왕의 편력기의 기록을 합쳐 로맨틱한 상상의 영역에서 다룬 서술이다. 이 로맨틱한 상상은 19세기에 영국의 역사 작가 아그네스 스트릭랜드(Agnes Strickland)의 서적에서도 인용되었다. 존 길링엄 교수는 리처드 왕의 편력기의 기록은 리처드의 군사에게 최소 둘이 오래 전부터 알던 사이로 보였음을 시사한다고 해석한다.[28] 그 이전에 필리프 2세가 나바라의 블랑카를 사랑하여 블랑카와 애인 관계였던 브리엔의 장을 질투하여 떼어놓을 요량으로 예루살렘 국왕으로 선출했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블랑카는 필리프 2세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어떤 위험이든 무릅썼다고 하며 둘의 사랑은 각자의 직계 후손인 필리프 4세호아나 1세에 부부로 이루어졌다고 여겨진다.[29] Dyggve, Trouvères et protecteurs de trouvères dans les cours seigneuriales de France (Helsinki:Société de Littérature Finnoise, 1942)[30] 생몰년도 : 1155 ~ 1202[31] 생몰년도 : ? ~ 1241[32] 필리프 2세 여기를 참고.[33] 실제로 중세를 배경으로 한 여러 무훈담에서 필리프 2세는 악역을 자주 맡는다. 본인부터가 정략과 권모술수의 대가였기 때문인데 이런 무훈담에서는 비열한 인물로 많이 묘사되는 편.[34] 로빈 후드가 자진해서 맞으려 하자 리처드 1세가 벌을 주겠다고 주장하는 판본도 있다.[35] "나야말로 리처드 더 라이온하트! 너의 불운을 원망해라!"원망할 만하다라거나, "싸움이야말로 내 삶의 보람! 피가 끓는다!"[36] 위에 언급된 행정관 휴버트 월터. 정치가 90이다.[37] 킹스에서만 가능하고 정복자 이후부터는 불가능하다. 영웅 유닛은 전향이 안 되기 때문.[38] 둘이 전혀 관련이 없지는 않아서 리처드의 누나인 마틸다가 하인리히의 두 번째 부인이라 하인리히와 리처드는 인척 관계다.[39] 이후 결정판에서 컨커러의 역사적 전투와 합쳐져 '역사적인 전투'라는 한 항목이 된다.[40] 이때에 어머니인 엘레오노르 앞에서만 보여준다는 애교 모드까지 발동시켰다.[41] 발리앙은 자신의 정체를 숨겼지만 리처드는 이미 그의 정체를 눈치챈듯 자신이 대장장이라고 주장하는 그에게 굳이 발리앙을 찾고 있다고 말하며 합세하라는 권유를 은근히 내비쳤다.[42] 당연히 실제 역사와는 조금 다른 부분이다. 발리앙은 이후 도시 국가였던 티레에 머물렀으며, 3차 십자군 전쟁에 합류하라는 리처드의 요청을 씹어버려서 십자군 사이에서 비난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처드의 요청에 훗날 살라딘과의 중재를 담당하기도 했다. 자신의 요청을 무시한 사람을 기용한 리처드나, 욕을 먹었지만 결국 양측의 의사를 전달하는 중간자 노릇을 한 발리앙이나 여러모로 비범한 인물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