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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순왕/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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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가계3. 신라의 마지막 임금4. 신라의 항복 과정5. 고려에 항복6. 항복 이후

1. 개요

신라 경순왕의 생애를 다루는 문서.

2. 가계

비록 정확한 출생일은 정사의 기록상 알 수 없지만 860년대생인 헌강왕(제49대)의 외손자라는 점, 부친 김효종과 모친 계아태후 김씨의 혼인시점이 897년인 것과 족보에서 그의 생년이 897년인 점[1]과 그가 936년 항복 시점에 자기 뜻을 주장할 수 있을만큼 장성한 아들 마의태자가 있었다는 점, 항복 이후로도 40여 년 이상 지난 고려 5대 임금 경종 재위기 978년까지 살아있었음을 고려할 때 대략 실제 생년은 898년~900년생 정도로 추정된다. 참고로 경순왕을 897년생[2]이라고 가정하고 나이를 역산하면 경순왕은 30세에 즉위해서 38세 때 고려에 항복한 뒤 81세까지 천수를 누린 것이 된다. 즉, 장수했지만 재위기간이 길지는 못했다.

부계로만 따지면 제46대 문성왕의 후손[3]이며, 아버지는 이찬 효종(孝宗)[4]이다. 어머니는 헌강왕의 딸 계아태후라서 경문왕(제48대)의 외증손자, 헌강왕(제49대)의 외손자, 효공왕(제52대)의 외조카, 경명왕(제54대)과 경애왕(제55대)의 이종사촌 형제가 된다.[5]

그는 김씨 왕조의 왕족이었지만, 후삼국시대 중기 박씨가 집권하여 아달라 이사금(제8대) 이후 728년만에 중흥하여 신덕왕, 경명왕, 경애왕으로 신라의 왕위를 차지했다. 박씨 왕조가 지속되었으면 그는 그저 신라 몰락기의 난세에 평범한 신라 옛 김씨 왕가의 후예 김부로써 진골 귀족의 생애를 살게 되었을 것이었다.

3. 신라의 마지막 임금

후삼국고려호족과 군벌세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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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훤신라를 침략하여 경애왕을 자결시키고 그를 임금으로 세웠다. 이미 박씨 왕위 세습이 3대나 진행되었던 만큼 서라벌 함락이란 급변 상황이 아니었으면 방계 출신의 경순왕은 임금의 자리에 오르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았다는 점에서 훗날 방계로써 즉위한 망국의 군주 고려 제34대 공양왕, 조선의 제26대 고종과도 약간 비슷한 케이스이다. 수백년간의 김씨 왕위 계승을 끊고 박씨가 왕위를 차지한 후삼국시대 신라 상황에서, 아마도 밀려난 김씨 세력과 견훤의 모종의 거래가 있지 않았을까 추정하는 주장도 있다. 실제로 견훤이 서라벌에서 그 짧고 정신 없는 시기에 했던 조치들을 보면, 신라란 나라를 어떻게 해야 완전히 무력화할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데다 유독 탄압과 박해가 경애왕 세력에 집중되어 있었다. 서라벌 내부에 내통자가 없었다면 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실제로 상당한 군사적 식견과 외교적 역량을 보인 경애왕 밑에서 어떻게든 신라는 마지막 희망을 보이고 있었기에, 경애왕에게 반대하는 신라 내부 세력이라면 신덕왕경명왕 때 연이어 반란을 일으킨 바 있었던 김씨 세력 외엔 별다른 혐의자가 없다.

물론 그렇다고 경순왕을 그 혐의자로 낙인 찍긴 어렵긴 하다. 단순히 박씨 왕실을 축출하자고 견훤을 끌어들인 사람이라고 보기엔, 경순왕의 대응이 다소 위험할 정도로 가능한한 최대한 반견훤 정책으로 치중되어 있었고, 왕건한테도 무작정 고개 숙이진 않았었다. 사실 같은 집안, 같은 국적이라고 해도 사는 방식과 판단의 방향이 다른 동서고금의 상황을 보면, 반 경애왕 일변도인 김씨 세력이 견훤과 결탁해서 경순왕 즉위에 동의하긴 했어도, 경순왕 자신은 반쿠데타 적어도 친후백제 방향에 동의한 바 없었거나 설령 동의했어도 견훤의 엄청난 폭거로 후백제에 대한 반감으로 돌아섰을 가능성이 크다.

견훤 또한 서라벌을 본인 힘으로만 접수한 건 아닐진대, 아직 한반도에서 정통성의 의미가 큰 신라 왕실을 완전히 폐지하는 리스크를 안긴 어려웠던 것으로 보인다. 경순왕을 즉위시키는 건, 박씨가 가져간 왕위를 김씨에게 돌려준다는 식으로 포장하면 신라의 역적이 아니라고 빠져나갈 여지를 만들 수 있기 때문이며, 이후 왕건과 견훤이 주고받은 국서에서도 견훤은 여전히 신라의 충신 코스프레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상의 얘기들은 어디까지나 가설에 불과하지만, 경애왕 치하에서 희망을 살려가는 신라의 상황에서도 견훤이 생각보다 서라벌 돌아가는 상황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게 어쩐지 이상한 정황은 부정하기 어렵다.

한편 견훤이 옹립한 임금이었다는 점에서 정통성 논쟁이 벌어질 법도 했는데[6] 서출인 효공왕(제52대)의 죽음으로 예전 김씨 경문왕계는 계보가 완전히 끊긴 상태였고, 아버지 김효종헌강왕(제49대)의 사위였던 점을 비롯해 김부가 남아있는 김씨 중에서 그나마 가장 왕위에 가까운 혈통의 소유자였기 때문에 별 태클은 받지 않았다. 이전 박씨 왕실을 비롯해 반대파라고 할 만한 세력이 거의 제거됐기에 경순왕에게 태클 걸 세력이 남아있지 않았기도 했지만, 그것만이 이유라면 왕건이 적극적으로 개입할 수 있는 시기에 어떻게든 저항이 없을 수는 없었다.

게다가, 애초에 신덕왕(제53대) 박경휘의 즉위 자체가 김씨 족단 입장에서는 일종의 편법적 찬탈로 비추어질 여지가 있었음을 고려해야 한다. 물론 신덕왕은 아달라 이사금의 원손이 아닌 헌강왕의 맏사위 자격으로 즉위했기에 그 자체로는 신라의 왕위 계승 원리를 위반한 바가 없으나, 어쨌든 그는 박씨였다. 게다가 그때까지 신라사에서는 차라리 시해당했으면 당했지, 나이가 어리지도 않은데 실권을 완전히 박탈당한 허수아비 임금은 없었으나, 신덕왕이 서출인 효공왕 김요를 허수아비 임금으로 만들며, 처음으로 그 전통을 깨고 왕위를 넘겨받았던 행위도 나름 심각한 일이었다. 물론 당대 신라 왕실은 김씨든 박씨든 국난의 위기라는 점을 인식하여 나름 뛰어난 통치력과 책임감을 보인 신덕왕-경명왕-경애왕의 집권을 지혜롭게 용인하며 나라를 구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였으나, 이런 사정 탓에 김씨 족단의 구성원이 박씨 왕실의 존속에 계속 찬성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자세히 따져보자면, 경순왕의 아버지 김효종은 신라의 마지막 화랑이라고 불린 충신이었고, 백부인 김억렴도 '지대야군사'의 벼슬을 지내면서 끝까지 신라를 지킨 충신이었다. 거기다가 어머니는 헌강왕의 딸인 계아태후 김씨로 신덕왕의 왕비인 의성왕후 김씨는 그녀의 친언니였으며, 경명왕과 경애왕은 경순왕에게 외사촌들이었다. 경애왕은 경주까지 온 견훤에게 부부가 모두 시해당했고, 경애왕의 동생과 경명왕 및 경애왕 소생들을 비롯한 유력한 박씨 왕족들은 죄다 후백제의 수도 완산주로 끌려갔을 개연성이 높다.
그러나 견훤은 정작 자신이 올린 경순왕 즉위 후에도 계속해서 신라에 연거푸 쳐들어왔다. 이것은 견훤이 서라벌 기습으로 신라를 무력화한 뒤에도, 아직 고려와의 미묘한 힘의 균형 및 920년대까지 고려와 후백제 중 하나를 아직 선택하지 않은 여러 경상도 지역 호족들 때문에 서라벌을 장기적으로 점령할 능력이 부족했고, 신라 조정을 허수아비로 만들어 마음대로 조종하기는 힘들었기 때문이다. 팽팽한 고려와 후백제의 대결 상황이라는 국제 정세 덕분에 아직 왕조의 명맥은 근근이 유지되고 있는 형편이었지만 경순왕 휘하의 신라는 실로 처참했다. 전왕 경애왕 때까지는 신라군이 고려군과 합동작전을 펼치며 후백제군과 싸우기도 했지만 경애왕 피살 이후, 경순왕이 즉위한 신라는 경주 주변에만 겨우 통치력이 미치던 상태였다. 경애왕 때 그나마 세력을 보전하던 경북 동부 및 경남 일대 호족들은 거진 다 견훤에게 물리력을 거세당하여 고려에게 넘어갔거나 후백제에게 병탄당한 상황이었다. 그러니 견훤에게 반대한다면, 왕건에게 적극적으로 협조하지 않고서는 존속이 불가능한 상태로까지 내몰렸다.

경순왕은 즉위 이후 전임 경애왕의 시신을 서당(西堂)에 안치하고, 여러 신하들과 통곡한 후 장사지냈다. 경순왕과 그 아버지 김효종 일가가 신덕왕 박경휘의 양아버지인 박예겸 시절부터 박씨 세력과 한때 경쟁관계였다는 설도 존재하지만, 신라 입장에서 역적인 견훤[7]에 의해 비참하게 시해된 상황에서는 그를 애도해야 했다.

고창 전투에서 고려가 대승을 거두고 힘의 균형조차 깨어진 930년(경순왕 4년) 9월에는 아직까지 간을 보던, 지금의 강릉시에서 울산광역시까지에 이르는 동해안 지역의 고을들이 모조리 고려에게 항복했는데, 경주가 기본적으로 경주 분지 내륙 도시지만 동해 바다에도 상당히 인접한 것을 고려할 때, 이 당시의 신라는 수도 서라벌 주변 지역만 겨우 통치하는 소국으로 완전히 떨어져버린 수준이었다.[8] 왕건은 직접 일어진(昵於鎭)으로 행차해 성을 쌓았는데 여기가 지금의 포항시 북구 신광면, 즉 경주시 코앞이었다. 이에 훤달, 박윤웅처럼 이 때까지 버티고 있던 경주 주변 도시의 호족까지 모두 항복하게 된다. 이 정도면 '직접 때리기는 뭐하니 알아서 GG 쳐라'는 사인이나 다름없다.

931년 초에는 아예 고려에 사신을 보내 순(順)하기로 했다. 허울이나마 종주국이던 신라가 이제 고려의 신하국이 되었다는 뜻이었는데, 이때 신라의 위치는 거의 500여 년 전 내물 마립간(제17대), 실성 마립간(제18대), 눌지 마립간(제19대) 등의 신라가 광개토대왕, 장수왕의 그 고(구)려에 대해 가졌던 바로 그것이었다.[9] 2월에는 고려 왕 왕건이 경순왕의 초청을 받아 신라를 방문하게 된다. 임해전 호수 앞에서 연회를 열었는데 술기운이 오르자 927년 견훤의 침략 얘기를 하면서 원통함에 왕을 포함해 모두가 눈물을 흘렸다고 전해진다.

이에 왕건은 경순왕과 신라의 뭇 신료들을 위로하기 위해 말, 비단, 보화 등을 선물로 보내주었다. 왕건 입장에서는 신라 조정을 언제든지 무력으로 병탄할 능력이 있었지만, 한반도에 수백년 간 군림해왔던 신라의 처지를 안타까워하던 민심을 살펴야 했기에 경순왕이 제 발로 품에 들어올 수밖에 없도록 판을 짠 것이다. 또한 이때의 왕건은 서라벌 방문 때 얼마든지 상위 군주로서의 위상을 과시할 수 있었는데 그렇게 하지 않고 형식적으로는 어디까지나 대등한 군주들끼리의 예식을 고수한 게 눈에 띄는 부분이다.[10]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경순왕은 이렇듯 정치적 감각과 능력을 최대한 발휘해 견훤의 서라벌 침공 이후 완전히 와해되어버린 신라 중앙군을 어느정도 긁어모아 될수 있는 대로 재건하는 한편, 후백제와 고려 간 힘의 균형이 갑자기 무너지지 않고 그대로 고착화될 경우를 상정해서 신라의 사직과 주권을 보존할 수 있으리라 생각해 국가 재건과 고려와 후백제 사이에서 완충국으로서의 생존을 도모하기 위해[11] 시간을 들이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후백제와 고려의 세력 균형을 수 년 간 지켜보던 중에 후백제 안에서 일어난 반란으로 견훤이 935년 음력 3월 실각[12]하고, 후백제의 상황이 혼란스러워지자, 경순왕도 더 이상 어렵다고 직감했는지[13] 사직을 포기하기로 결심한다.

4. 신라의 항복 과정

삼국사기》의 기록을 보면 935년(경순왕 9년) 10월 고려로 귀순하는 것에 대해 경순왕이 신하들과 논의하자, 신라 신료들의 태도는 "누군가는 옳다 하고, 누군가는 옳지 않다 하였다"고 나와 있다. 신라는 이미 다 저문 해고, 고려의 왕건이 새로운 패자에 오르기 직전이라는 것은 누구나 다 알고 있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신라 정부 내에서는 항복을 반대하는 의견도 꽤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가 바로 아래의 대화.
왕자(王子): 제발 다시 생각해 주십시오! 나라를 이대로 내 주어선 안됩니다! 나라의 존망은 반드시 천명에 달려있는 것입니다. 다만 충신·의사와 함께 민심을 수습해 스스로 수비하다가 힘이 다하면 그만 두어야지, 어찌 1,000년 사직을 하루 아침에 가벼이 에게 주는 것이 옳은 일이겠습니까!
경순왕: 물론 네 심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다. 허나, 상황을 보고도 믿기지 않느냐? 이미 우리는 쇠퇴를 거듭한 나머지, 오늘날엔 작고 위태로움이 이와 같아 형세가 나라를 보전할 수 없다. 이미 강해질 수 없고약해질 수도 없으니, 차마 죄 없는 백성들의 간과 뇌장(腦漿)이 땅에 쏟아지게 하는 일을 할 수는 없다. 더 이상은 무리할 수 없는 상황이니... 이만 그만두거라.
《삼국사기》 935년 10월
거의 오열에 가깝게 울부짖으면서 양국(讓國)의 불가함을 극력 간(諫)하였으나,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한 태자(太子)는 이후 개골산(皆骨山)에 들어가 바위 아래에 집을 짓고 마(麻)로 된 옷을 입고 일생을 마쳤다고 한다. 또한 《삼국유사》에 의하면, 경순왕의 막내아들은 화엄종(華嚴宗)에 귀의하여 법수사(法水寺)와 해인사(海印寺)에 드나들며, 도(道)를 닦고, 망국(亡國)의 한(恨)을 달랬는데 승명이 '범공'(梵空)이었다고 전한다.

이리하여 경순왕은 재위 8년차이자 고려 태조 재위 17년인 935년 10월 30일, 결국 고려에 나라를 양도하기로 결정했다. 이는 화백회의의 결정 가운데, 역사서에 기록된 바로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만장일치가 아닌 과반수 다수결에 의한 결정이었다. 원래 화백회의는 만장일치 회의체였으므로, 당장 경순왕의 아들인 마의태자부터 반대에 가세했던 고려 항복 안건은 당연히 부결되었어야 옳다. 그러나 경순왕은 본인의 결정으로 화백회의의 부결 자체를 뒤집어버린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경순왕은 항복을 결정하는 시점까지 신라가 망국 직전의 상황이었다 할 지라도 경순왕 본인의 입지 및 권력 자체는 확고한 상태였으며, 심지어 귀족과 태자의 반대를 경순왕 본인의 권력으로 찍어 누를 수 있을 정도로 실권을 확실하게 장악하고 있었다는 뜻이 된다. 화백회의와 관련해서 한국사 시험이나 수능 한국사 과목[14]에 나올 수 있으니 참고. 한 가지 의의를 더 찾자면, 화백회의는 망국의 순간까지도 남아서 1,000년 사직의 존망을 결정하는 엄청난 영향력을 내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 뒤 경순왕은 시랑(侍郞) 김봉휴(金封休)를 보내 개경의 고려 조정에 입조(入朝)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4년 전의 칭신은 '나라만은 보존하게 해 달라'는 뜻이었지만, 이제는 '나라까지 바치겠다'고 선언한 것이니 그 의미가 컸다.

5. 고려에 항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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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670000> 상보 상보 낙랑군왕 실직군왕 문원대왕
견훤 김부 김위옹 왕정
<rowcolor=#670000> ▨▨대왕 필영대왕 정간왕 양헌왕
(미상) (미상) 왕기 왕도
<rowcolor=#670000> 탐라국왕 우산국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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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위 낙랑왕(樂浪王)[15]
공신호 관광순화위국공신(觀光順化衛國功臣)
추충순의숭덕수절공신(推忠順義崇德守節功臣)
훈위 상주국(上柱國)
직위 정승공(政丞公)·사심관(事審官)
존호 상보(尙父)·도성령(都省令)
봉토 경주(慶州)
궁궐 유화궁(柳花宮), 신란궁(神鸞宮)
후비 낙랑공주 왕씨
부인 왕씨
헌숙왕후[16]
국적 파일:Military_Banner_of_Silla.svg 신라파일:고려 의장기.svg 고려
고구려와 백제 멸망 이후 200년 넘게 한반도를 지배한 신라의 항복은 고려가 옛 삼한일통의 정통성을 넘겨받는다는 상징적 의미[17]가 있었기 때문에 경순왕의 항복 과정은 《고려사》에 비교적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935년 12월 1일, 백관을 거느리고 경순왕 일행이 수도 금성에서 출발했다. 화려하게 장식한 수레와 보물을 실은 말(寶馬)이 30여 리에 걸쳐 이어져 도로가 꽉 메워졌으며 지나가는 길에 구경하러 나온 이들이 담을 두른 듯하였다. 가는 길에 자리한, 이미 고려에 편입된 상태였던 고을에서는 매우 융숭하게 접대했다고 한다.

12월 10일, 경순왕이 개경에 도착하자 왕건은 의장(儀仗)을 갖추고 교외에 나가 맞이하며, 위로했고, 고려 태자 왕무와 여러 재신(宰臣)에게 명하여 호위하여 들어오게 하고, 유화궁(柳花宮)에 묵도록 하였다. 12월 20일에 왕건의 장녀 낙랑공주(樂浪公主)와 혼인하여 왕건의 사위가 되었다.

12월 26일에 경순왕이 신라국을 양도하고, 왕건에게 신하의 예로 알현하기를 요청했다.
본국(本國)은 오래 위란(危亂)을 겪었습니다. 역수(曆數)가 이미 다해 기업(基業)을 보호할 수 없게 되었으니, 신례(臣禮)로써 뵙기를 바랍니다.
《고려사》 <태조 세가> 중
본국(本國)은 오래 화란(禍亂)을 겪어, 역수(曆數)가 이미 다했습니다. 다행히 천자의 빛(天子之光)을 보게 되었으니 부디 정신의 예(庭臣之禮)를 차리고자 합니다.
《보한집》 권상 기록. 《고려사》 기록과 미세하게 다르다.
왕건은 일단 거부했다. 선양 문서에서 나오듯, 나라를 양도받을 때에는 주변의 호응을 관찰하기 위해 일단 겸양을 표하는 것이 동아시아 사회의 관습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12월 28일, 여러 신하들이 경순왕의 귀순 요청을 받아달라고 왕건에게 아뢰었다.
하늘엔 두 해가 없고, 땅엔 두 왕이 없습니다. 한 나라에 두 임금이 있다면 민(民)은 누구를 믿어야 하겠습니까? 부디 나왕(羅王, 신라 왕)의 청을 받으시옵소서.
드디어 936년 1월 13일(음력 935년 12월 12일), 왕건은 본궐의 정전 천덕전(天德殿)에 거둥하여 백관을 모아놓고 말하기를,
짐이 신라(新羅)와 피를 입술에 바르며 동맹을 맺은 것은 두 나라가 길이 우호(友好)를 유지하고 각자의 사직(社稷)을 보전하기 위해서였다. 지금 나왕이 굳이 신하로 있겠다고 요청하고 그대들도 그것이 옳다고 하니, 짐의 마음이 매우 부끄러우나 여러 사람의 뜻을 거스르기가 어렵다.
《고려사》 〈태조세가〉 중.
이로써 천 년을 이어오던 신라는 조용히 멸망했다. 경순왕은 천덕전 뜰에서 알현(謁見)하는 예를 올리니 여러 신하가 하례하여 함성이 궁궐에 진동했다. 그로부터 약 8개월 후 후백제견훤을 앞세운 고려군에 의해 일리천 전투에서 멸망하여 후삼국시대의 난세가 종결된다.

6. 항복 이후

935년 12월, 태조 왕건경순왕을 정승공(政丞公)으로 봉했다. 그 지위는 태자왕무보다 더 높았으며, 왕건이 죽은 이후에도 국왕 다음으로 지위가 높은 존재로 인식되어 그 영향력이 상당했다. 선양 문서를 보면 알 수 있지만, 당시 동아시아 사회에서 참고할 사례로 중국(오대십국시대)에서는 전 왕조의 왕가는 모조리 척살하는 악순환이 일상화되어 있었던 만큼[18] 왕건의 경순왕 우대는 당시 동아시아 사회로서도 꽤나 유화적인 대우였다.[19] 여기서 한 가지 주지해야 할 게 경순왕의 경우 왕건에게 선양을 한 게 아니라는 것이다. 왕건은 신라 조정의 의향과 상관없이 고(구)려 계승을 내세우며 이미 고려 왕으로 즉위한 상황이었고, 신라는 고려를 국가로 인정해 외국 대 외국의 외교관계를 수립했던 한편[20], 입지가 축소되면서는 오히려 고려에 칭신까지 하여 신하국으로 전락하게 된다. 이후 경순왕이 고려에 투항한 건 어디까지나 외국 국왕의 입장에서 항복의 절차를 밟았던 것에 해당한다. 만약 선양의 절차를 밟았다면 왕건은 이 이전에는 신라에 속한 군왕급 같은 제후왕은 몰라도 결코 국왕이 될 수 없었을 것이고 경순왕의 선양을 받은 뒤에야 비로소 국왕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 이 차이는 고려 왕조에서 조선 왕조로 넘어갈 때 이성계가 일단 공양왕에게 고려왕위를 선양 받은 뒤에야 국왕이 될 수 있었던 것과 비교하면 쉽게 알 수 있다. 왕건이 경순왕과 신라 왕실에 대해 흔쾌히 유화적인 입장을 보일 수 있었던 건 이런 중대한 입장 차이가 실제로 큰몫을 했다.[21] 왕건은 경순왕이 왕으로서 통치하고, 신라의 수도이던 금성을 경주로 개명한 후 경순왕에게 아예 식읍으로 내주며 사심관[22]으로 임명해줘 계속 자신의 고향에서 대우를 받으며 지낼 수 있게 했다. 다만 《숭암산 성주사 사적(崇巖山聖住寺事蹟)》에 의하면 경순왕은 이후 경주에 가지 않고, 현 충남 보령군에 있는 성주사(聖住寺)에 은거하게 되었는데[23] 경순왕이 앉아서 시름을 달랬다는 왕대(王臺)라는 바위에 대한 전설도 내려오는 걸 보면 망국의 군주가 되었다는 압박감은 컸던 모양.[24]

937년 6월 12일에 진평왕(제26대)때부터 대대로 내려져온 신라의 보물이자 신라삼보천사옥대를 왕건에게 헌상했다.

975년 10월(제4대 광종 26년 혹은 제5대 경종 원년) 경순왕을 상보로 책봉하는 칙명인 〈책상보고(冊尙父誥)〉가 내려지고, 상보(尙父)로 책봉되었다. 이 상보 존호는 과거 견훤이 고려에 투항해 왔을 때 받은 적이 있는 것으로, 군주가 아버지처럼 여길 만한 사람 즉 명목상이지만 상왕처럼 추켜주는 것과 같았다. 이때쯤 되면 경순왕도 고령이었을 테니.

고려 조정은 신라 지배층에 대한 유화정책의 일환으로 태조 왕건의 첫째 딸인 '낙랑공주 왕씨' 뿐만 아니라 아홉째 딸인 '부인 왕씨'와도 혼인을 시켰다. 낙랑공주 왕씨신명순성왕후 소생의 딸이고, '부인 왕씨'는 호족 박지윤(朴智胤)의 딸인 성무부인 박씨 소생의 딸이다.[25] 둘은 이복자매가 된다.

슬하의 딸은 태조 왕건의 손자인 경종(제5대)과 혼인했는데, 그녀가 헌숙왕후(獻肅王后) 김씨이다. 이 일로 경종은 경순왕을 장인으로 특별히 배려하여 위계를 태자(太子)의 위인 상보(尙父)로 삼고 식읍과 녹봉을 더해 주었다.

한편 태조 왕건도 경순왕의 백부 김억렴의 딸, 즉 경순왕의 사촌을 아내로 맞이하여 슬하에 아들 왕욱(王郁)을 낳았는데, 그의 아들이 고려 제8대 국왕으로 고려 왕실의 중시조인 현종이다.[26] 그래서 고려 왕조는 마지막 왕인 공양왕(34대)까지 신라 하대를 주도한 무열왕 여계[27] 왕가의 피가 섞인 왕의 후손들이 대를 잇게 되었다.[28]

경순왕은 신라가 멸망한 지 43년이 지난 978년(경종 3년) 4월 4일 세상을 떠났다. 출생 시기가 명확하지 않지만 상당히 장수했으며, 정황상 최소한 약 80여 세까지 고려 초기 개판까지 다 보고 살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경순왕의 선택으로 그의 후손들은 이후 고려 500여 년 역사에서 중요한 문벌귀족 가문이 되었다. 또한 많은 자손들도 남겼는데, 이들은 갈라져서 많은 본관을 이루었다. 조선 시대에도 상당한 명문가로 이어져 내려왔으며, 현대까지도 최대 규모 성씨의 하나로 존재한다. 따라서 경순왕은 상당히 높은 대우를 받고 살았다고 하겠다.

여기까지만 봐도 알겠지만 경순왕과 궁예, 견훤, 견신검이 받은 대우는 하늘과 땅 차이나 다름없었다. 경순왕은 왕건에게 항복한 이후에 어떻게 살았고 어떤 대접을 받았는지 자세히 기록되고, 사후에 왕릉도 지어지고 시호까지 받으며 죽어서도 왕으로 대접받았으나 궁예는 사망 후에 왕릉이 건설되기는커녕 시체가 어디 묻혔는지도 모르고 시호도 받지 못했으며 견훤은 생전에는 왕건에게 상보로 불리며 대접받는 듯 했으나 사망한 뒤에는 슬그머니 묻혀버렸고 견신검은 왕건에게 항복하여 관직을 받았다는 기록 이후에는 어떻게 살았는지 언제, 어떻게 죽었는지 기록 한 줄도 없고 왕릉은 고사하고 시호도 받지 못하고 아예 왕 취급도 받지 못하는 쓸쓸한 최후를 맞이했다. 왕건에게 나라를 빼앗기거나 나라를 바친 군주 중에서 경순왕만이 유일하게 왕릉도 지어지고 시호까지 받으며 제대로 된 왕 취급을 받았고 나머지 3명은 사후에 시호조차 지어지지 않으며 아예 왕 취급조차 받지 못했다.

단, 왕건 생전부터 후백제 국왕을 국왕으로 대우했기 때문에 진짜 왕이 아니었다고 보았기 때문은 아니고, 견신검이 고려측 논리로는 아버지의 자리를 찬탈한 패륜아이고 실질적으로도 경순왕과 달리 순순히 숙여주지 않은 위험인물이었기 때문일 가능성도 높다. 견훤도 궁지에 몰린 이후에야 귀순했지 그 이전에는 왕건의 목숨조차 위험하게 만든 숙적이고.

다만 그렇다고 경순왕에게 굴곡이 없었던 건 아니었다. 귀부 이후 경순왕의 두 아들(마의태자, 범공)은 아버지 곁을 떠나 각각 개골산으로 들어가거나 승려가 되었다. 그리고 죽을 때까지 경주를 가지 못했는데, 경주를 못 간 것은 단순히 본인의 자책감 때문으로 생각되긴 하지만 신라부흥운동을 경계한 고려 정부의 개입이 있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경순왕이 경주를 방문하면 경주의 민심이 요동칠 것은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다 알 수 있는 일이고, 그 여파가 어떻게 작용할 지는 도무지 알 수 없는 일이었으니까.


[1] ##[2] 드라마 <태조 왕건>에서 어린 이미지로 나온 최응이 898년생이며, 877년생인 태조 왕건의 아들뻘이다.[3] 문성왕의 5세손으로 알려져 있지만 이것의 근거가 조선 후기에 세워진 신라경순왕전비뿐이어서 신빙성은 의문이다. 문성왕의 후손들이 모두 20세가 되기 전에 아들을 얻었다고 가정하면 성립이 불가능한 상황은 아니다. 한편 세대 수로는 증조-증손 정도로 비교적 가까움에도 정확한 세대 수가 누락되어 있다는 점에서 경순왕이 문성왕의 직계 손자는 아닌 것으로 해석하는 견해도 있다.[4] 경순왕의 아버지 김효종은 화랑으로서 진성여왕(제51대) 시절 <효녀 지은 일화> 등으로 명성을 얻어 진성여왕의 큰오빠 헌강왕의 딸과 혼인하게 되었다.[5] 경순왕의 어머니 계아태후와 경명왕, 경애왕의 어머니 의성왕후는 모두 헌강왕의 딸로서 서로 자매 지간이다.[6]삼국지》의 비슷한 예를 들면 원소동탁 따위가 옹립한 놈은 황제로 인정할 수 없다며 헌제 대신 유우를 황제로 옹립하려고 시도했다. 참고로 유우는 후한을 세운 세조 광무제의 장남 동해왕 유강의 후손이다. 유강은 모후의 폐위 이후, 황위 계승을 거듭 사양하였다. 유우는 종법제하에서 어떤 의미에서는 후한 황실 못지 않은 정통성을 지닌 셈. 더군다나 통일신라 말기처럼 후한의 황위 계승 또한 그다지 매끄럽지 못했다.[7] 고려의 왕건과는 920년 경명왕이 국교를 맺었지만 신라는 후백제를 첫 반란부터 멸망할 때까지 단 한 번도 국가 대 국가로서 대하지 않았고, 견훤은 신라 군인 출신임에도 존왕의 의를 저버린 역적으로서 후한의 동탁에 비유당했다.[8] 하지만 후삼국시대 후기 당시 신라가 해안 영토를 모조리 잃고 해안선이 없는 내륙국으로까지 전락했는지는 논란이 있다. 고창 전투, 운주성 전투 이후 대부분의 경상도 일대 영토들이 고려 영토가 되고, 수도 서라벌만 겨우 지배하는 소국으로 완전히 붕괴된 상황에서 약장현이나 문무대왕릉 등 서라벌 외곽의 동해 해안 일부 지역이나 지금의 울산시 일부 등 동해안 지역 조금이나마 경순왕이 고려에게 항복하여 신라가 멸망하기 이전에도 신라가 지배하고 있었을 가능성은 적지 않다. 원래 사로국 및 서라벌은 오늘날 울산 및 포항 영일만 약간을 포함한 동해안 일대를 국토로 두고 있었다.[9] 수백년 만에 박씨 왕실이 복귀한 것만큼 더욱 충격적인 이벤트가 바로 이것인데, 이는 당연히 후백제의 견훤에게도 그가 알았다면 《삼국지》의 조조유비한중왕 자칭을 두고 당했던 충격보다 못하진 않았을, 충격과 공포의 큰 일이었다. 경순왕의 정치적 상상력이 의외로 대단했음이 눈여겨볼 부분이다. 이는 삼한일통을 처음 이룩한 신라 왕의 권위가 높았을망정, 삼한일통은 신라 왕만 할 수 있는 게 아니고, 이론적으로는 백제 왕이나 고려 왕도 할 수 있는 것이며, 신라 왕은 전에 엄연히 고려 왕의 신하였던 한반도 특유의 사정에 이유가 있었다.[10] 500여 년 전 충주 고구려비를 세울 당시 장수왕고려는 형제 관계를 맺었다곤 해도 고(구)려 왕이 '형'임을 강조하면서 '동생'인 신라의 자존심을 크게 자극했지만, 그보다 훨씬 유리했던 왕건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왕건이 상당히 정치적 감각이 뛰어났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라 할 수 있다.[11] 제국주의 시대 당시 영국과 네덜란드, 프랑스, 미국 등 당대 동남아시아 각국들을 식민화한 서방 강대국 사이에서 완충국가로 살아남은 태국이 그 대표적인 사례이다.[12] 아들 견신검에 의해 폐위되어 금산사에 감금당했다가 탈출해 고려에 귀부한다.[13] 실제로 혼란이 생겼다고밖에 볼 수 없는게, 왕건과 후백제 사이의 균형은 오직 견훤의 능력으로 유지된 것이었다. 그런데 아들 견신검이 자신의 아버지 견훤를 폐위하고선 자기가 대신 고려를 상대하겠다고 나섰으니 경순왕 입장에선 어찌하지도 못 한 상황이 되어 버렸다고 볼 수 밖에 없다.[14] 실제로 수능 국사가 있던 7차 교육과정 시절에 한 차례 화백회의가 "'모든 회의'에서 만장일치제를 시행하였다"라고 함정을 판 지문으로 등장한 바 있다.[15] 《삼국유사》: 낙랑군왕. 어느 쪽이든 군왕(郡王)급의 왕작에 해당하며, 낙랑은 신라의 별칭이기도 했기에 신라국은 고려가 가져갔지만 신라왕위는 여전히 경순왕에게 남겨준 것이나 다름없는 특급 대우에도 해당한다.[16] 고려 제5대 경종 왕주(王伷)에게 출가.[17] 이 '귀부' 전에 이미 신라 왕은 '순(順)'하기로 결정하고, 931년 사신을 보내면서 고려의 신하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천 년을 이어온, 그리고 구 삼국의 왕실 중 유일하게 생존하고 있었던 신라 왕실의 권위 자체는 완전히 사라질 순 없었고, 그래서 의미가 컸다. 신라의 항복을 받아 신라 자체를 흡수한 고려는 고구려의 정통성에 이어 삼한일통을 이룩했던 신라의 권위까지 넘겨받은 존재가 되기에, 적어도 한반도 내에서는 후백제를 압도하는 권위를 갖게 되는 이벤트였기 때문이다. 물론 부활한 백제인 후백제가 버젓이 있는 이상, 후백제를 병합해야 삼한일통이 완결되는 것이기에 이걸로 다 끝난 건 아니지만…후백제가 백제가 아닌 신라 내 반란집단이란 주장은 적어도 그 당대 국제사회에선 신라 혼자만의 일방적인 주장이었다(일본도 이렇게 주장하며 후백제와의 국교 수립을 거부하긴 했지만 이는 일본의 복잡한 국내 사정에 따라 핑계를 댄 것에 가까운 것이라 상황에 따라 언제든지 뒤집힐 수 있었다). 당장 고려부터가 국가 대 국가로써 국교를 수립하여 시종일관 후백제 군주를 백제 국왕으로 대우했고, 후백제 또한 고려 군주를 고려 국왕으로 대우했다. 또한 후백제는 엄연히 중국 대륙의 각국들과도 국교를 수립하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이것으로 구 고구려, 신라의 주민들까지는 정신적으로 포섭할 수는 있었겠지만 여전히 자신들의 정부와 왕실이 건재했던 구 백제의 주민들은 적어도 백제의 정통성만은 아직 자신들에게 있었다고 여겼을 것이고 실질적으로도 어떻게든 전쟁에서 잘 승리하기만 하면 예전의 근초고왕대의 전성기처럼 각종 명분과 한반도의 패권을 다시 뺏어올 수 있을 것이라 여겼을 터이다.[18] 이 악순환이 끝나는 게 왕건 바로 뒤인 송태조 조광윤 시대였다. 사실 중국에서도 선양했다고 전 황제를 무조건 죽이지는 않았다. 후한의 헌제, 촉한 회제 유선, 위나라 원제 조환 모두 천수를 누렸다. 남북조시대남조 유송에서 찬탈을 하면서 죽이기 시작했다.[19]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왕건은 신라 김씨 왕족 뿐만 아니라 옛 후백제 견씨 왕족 역시 어느 정도 우대해 주었는데, 제3대 정종의 왕후들인 문공왕후문성왕후견훤의 외손녀였다. 견씨를 박대했다면 굳이 통혼하여 왕가와 피를 섞으려 하지 않았을 것이다. 다만 그 사이에 순천의 대호족이자 후백제 신하 출신 인물 중 고려에 투항하여 후백제 멸망에 공을 세워 유일하게 고려의 개국공신이 된 박영규가 끼어있기는 하다(두 왕후가 박영규의 딸들). 전남 동부 최대의 호족 세력이었던 박영규를 포섭하기 위한 혼인 정책인 셈이었다. 물론 태조가 견훤을 '상보'로 모시고, 양주 일대의 넓은 식읍을 주었으며, 견훤 가문이 《이제가기》 등의 족보를 남긴 것을 보면 고려가 견훤의 후손을 무작정 박대하진 않은 것으로 보이며. 궁예의 후손을 자처하는 광산 이씨, 순천 김씨의 족보가 사실이라고 가정하면 궁예의 후손도 박대하지 않고 그럭저럭 고려의 귀족으로 살아간 걸로 보인다. 견훤의 아들들 중 후백제에서 권력 투쟁을 벌였던 신검·양검·용검 형제는 분명히 제거된 것으로 보이지만 다른 자식들은 그냥 별 일 없이 생존한 것으로 보이는데, 사서에 '견훤의 자식들은 (이 셋 외에도) 매우 많았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고려에서 이들에게 뭔가를 했다더라는 그 어떤 구전도 내려오지 않고 있다.[20] 후백제의 경우 현대의 남북관계처럼 국가가 아닌 그냥 반란세력이라 보아 국교를 끝내 수립하지 않았다.[21] 오히려 선양이란 형식은 어디까지나 백제 왕이었는데도 신라의 권신 역할에 보다 충실했던 견훤이 염두에 두었을 가능성이 크다. 게다가 하필이면 견훤 또한 이성계가 고려의 장군이었듯 어디까지나 본디는 신라의 장군이었고 초기 견훤 집단의 핵심을 이룬 간부진은 죄다 견훤처럼 신라 왕실 근위대 인원을 배출하는 지역에서 파견된 이들로 이뤄진 신라 방수군 출신들이었음이 드러난다. 이후에도 후백제 정권의 핵심인 전주 지역에는 고고학적으로 경북 서부 출신 원신라인들이 계속 유입되었던 걸로 드러날 정도인데 견훤이 서라벌 왕경인들까지 강제로 전주에 대량 이주시킨 후에는 이런 경향이 더 심화되는 걸로 나타난다. 장보고와 청해진에게 상당한 트라우마가 걸렸던 신라 왕실이 서남해 방수군의 핵심부만은 원 신라 지역 출신들로 채웠는데 이것이 뜻하지 않게 후삼국 시대에 견훤을 통해 신라 중앙군의 참모진이 되었을 인재풀이 백제군으로 빠져나가버리는 더 큰 참사로 돌아오고 만 것이다. 이런 견훤이 만약 예상대로 고려를 끝내 경상도 일대에서 완전히 축출하고 옛 나제동맹군의 소백산맥 우주 방어막을 완성한 다음 서라벌 포위에 성공했을 때 신라 왕실에 무슨 일이 벌어졌을지는 가히 상상이 어렵지 않다. 견훤이 겉으로는 보호자 행세를 하였으나, 경순왕이 제정신이면 경애왕 다음 차례는 바로 본인임을 결코 모를 수가 없었다.[22] 고려시대에 향직을 통괄하는 지방관을 칭한다. 왕건은 경주의 민심을 확실히 고려에 흡수하려고 경순왕에게 고향의 자치를 맡겼다고 할 수 있다. 이는 당나라에서 고구려와 백제의 정복 후, 안동도호부의 도호로 보장왕을 앉힌 것과 웅진도독부의 도독으로 태자 부여융을 임명했던 것과 비슷한 조치에 해당하기도 한다.[23] 그래서 신라와 별 관련이 없을 것 같은 보령에 경순왕과 관련된 전설이나 설화, 지명이 많이 생겼다.[24] 이후 더 나이가 들어서는 개경으로 가게 되었는데 그래서 왕릉도 신라 왕릉 중 유일하게 경주가 아닌 경기도 연천군에 있다. 아마 이후로도 경주에는 자의로 가지 않았거나 고려 정부에서 가지 못하게 조치를 취한 듯하다.[25] '부인 왕씨'는 잘 알려 있지 않은 탓인지, 경순왕 아내들을 언급할 때 자주 등장하지 않는 편이나 《삼국사기》에 분명히 아내로 맞이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참고로 경순왕 왕비 관련 설화에 등장하는 별빈 안씨(別嬪 安氏)에 대해서는 역사학계는 오역으로 보고 있으며, 추정컨데 낙랑공주 왕씨를 가리키는 것이라는 게 정설에 가깝다고 한다.[26] 그래서 왕욱(王郁)은 '안종'(安宗)으로 추존된다.[27] 무열왕의 딸의 후손들.[28] 중대를 주도한 태종 무열왕의 직계는 혜공왕(제36대)을 끝으로 더 이상 왕을 배출하지 못했다. 물론 고려 후기까지 가면 고려 왕실에는 이민족인 몽골 제국 보르지긴 황실의 피가 공민왕 대까지 대대적으로 섞이게 되기 때문에 크게 주목받는 부분은 아니다. 다만 공민왕과 우왕을 끝으로 몽골 황실의 피가 섞인 고려 국왕들의 재위도 끝나게 되며, 훗날 모조리 학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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