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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회창/일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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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5f5f5,#2d2f34><colcolor=#0000A8,#ddd> 일생 <colbgcolor=#ffffff,#1f2023>일생
가족 아버지 이홍규 · 남동생 이회성
역대 선거 제15대 대통령 선거 · 제16대 대통령 선거 · 제17대 대통령 선거
사건사고 및 논란 논란
총풍 사건 · 병풍 사건 · 차떼기 사건
관련 정당 신한국당 · 한나라당 · 자유선진당 · 새누리당 · 바른정당 · 바른미래당
기타 흙오이 · 이회창계 · YS키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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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초년2. 법조인3. 중앙선거관리위원장4. 감사원장5. 국무총리6. 연이은 대선 도전과 낙선
6.1. 제15대 대선 (1997)6.2. 한나라당 총재 (1998~2002)6.3. 제16대 대선 (2002)6.4. 제17대 대선 (2007)
7. 마지막 도전8. 여생

1. 초년

파일:이회창 졸업.jpg
파일:이회창 리즈.jpg
서울대학교 졸업 사진 리즈 시절

황해도 서흥군에서 아버지 이홍규와 어머니 김사순 사이에서 4남 2녀 중 차남으로 출생하였다. 북한 땅에서 태어나서 실향민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 수 있겠지만, 사실 황해도 서흥군은 아버지의 임지였을 뿐이었다. 유년기의 상당기간을 외가의 연고지인 전라남도(오늘날의 광주광역시 포함)에서 보냈으며, 학창시절은 아버지의 임지에 따라 광주시, 청주시, 서울시 등에서 지냈다. 굳이 따지자면 선대의 선영이 있는 충청남도 예산군이 연고지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잘 보면 경상도가 없다! 그래서 경상도 연고가 전혀 없었던 점과 두 번째 대선의 상대였던 노무현의 고향이 PK라는 점이 어우러져 보수의 홈그라운드인 영남지역에서 표를 이전과 이후의 영남 기반 제1보수당[1]의 후보보다 덜 받았고 그게 대선 패배에 꽤나 영향이 있었다는 분석이 존재한다.

경기고등학교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하고 1957년 제8회 고등고시 사법과에 합격한 후, 공군 군법무관으로 병역을 마치고 판사로 임용되었다.

2. 법조인

법관으로 재직하면서, 군사정권 시기임에도 불구하고 누구보다도 중립적이고 청렴한 자세를 갖췄으며, 이로 인해 정부에서 기피인물로 찍혔으나 마땅히 해를 가할 명분이 없어 아무 일도 당하지 않았다는 후문도 전해진다. 서울지방법원 부장판사, 서울고등법원 부장판사를 거쳐 1981년 만 46세로 역대 4번째로 어린[2] 대법관에 임용되는 등 엘리트 집단인 법조계 내에서도 전설적인 기록을 남겼으며, 대법관으로 주심을 맡은 16건의 전체합의 판결 중 10건에 소수의견을 내는 등 서슬퍼런 독재정권의 상황에서도 사회적 약자의 편에서 소신있는 판결을 내림으로써 법원의 양심이 아직 완전히 말라버린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이를 계기로 대쪽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며 신망 있는 법조인으로 알려졌고, 전두환 정부의 눈밖에 나면서 1986년 대법관 재임용에서 탈락하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주요 사건으로는 다음과 같은 사건들을 맡았다.

3. 중앙선거관리위원장

1988년 노태우 정부가 출범하면서 대법관으로 재임용되었다. 이때 대법관 중 한 명이 겸임하는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위원장을 맡으면서 민주화된 지 얼마 안 된 상황에서 개표 관리에만 치중되었던 선관위의 역할을 선거운동 감시로까지 확대하였다. 이회창은 당선되면 그만이라는 당시의 선거풍토에 고발로 맞서며 1989년 강원도 동해시[4]와 서울 영등포구 을[5] 재보궐선거 당시 후보 전원을 선거법 위반 혐의로 고발했다. 그는 동해시 선거구에서 신민주공화당 후보를 매수해서 사퇴시킨 김영삼 통일민주당 총재에게 친필 경고 서한을 보내고 영등포구 을 선거구에서 노태우 대통령의 민주정의당 총재 명의로서의 서한을 대통령의 선거개입으로 문제삼는가 했다. 노 대통령의 서한이 여권 내에서 문제가 되자 1년 3개월 만에 사표를 던지고 스스로 자리를 물러났다. 선관위원장에서 물러난 뒤에도 대법관으로 활동하면서 많은 판결을 남겼다.[6][7]

4. 감사원장

파일:이회창 감사원장 시절.jpg
1993년 2월 문민정부가 출범하면서 이회창은 차기 대법원장 후보로 물망에 오르기도 했으나 결국 감사원장에 임명됐다[8]. 이회창은 "청와대, 국군기무사령부 등 어느 기관이든 법규정에 따라 감사하겠다", "현정권에 관련된 정치적 비리라 하더라도 성역을 인정치 않고 엄정한 감사활동을 하겠다"고 선언하면서 청와대비서실, 국방부, 국군기무사령부 등 권부의 핵심부서가 모두 감사원의 감사 도마 위에 올랐다.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대통령도 예외일 수 없었다. 평화의 댐, 율곡사업 감사를 하면서 두 전직 대통령을 서면조사했고, 수많은 전현직 장성들과 고위관료들이 구속되었다. 중앙정보부 창설 이래 처음으로 무소불위의 권력기관 국가안전기획부에 대한 감사까지 진행했는데, 안기부에서는 이회창을 비롯한 감사원 간부들의 뒤를 캐거나 협박을 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직원들에게 안기부 출입을 지시하였다.

당시 그의 강직함이 회자되어, 이른바 대쪽이라는 그의 별명이 널리 알려지기도 했다. 감사원장 시절 인천국제공항 건설 사전 예방감사를 했던 것이 유명하다.

5. 국무총리

파일:이회창 국무총리 임명.jpg
1993년 12월 국무총리로 임명되었다. 이회창은 헌법으로 위임된 총리의 권한을 행사하는 새로운 총리상을 만들어내려고 노력했다. 국무총리 시절에도 어김없이 청렴한 모습을 보여주고 대통령의 방탄 역할에 지나지 않았던 국무총리의 이미지에서 탈피하여 소신있는 모습을 보여주며 국민의 인기를 얻는 데 성공하였다. 김영삼의 최측근이자 막강한 권력을 가졌던 최형우[9] 당시 내무부(現 행정안전부) 장관을 면전에서 호통친 건 당시 유명했던 일화.

그러나 김영삼은 이런 국무총리상을 허락하지 않아 두 사람은 수시로 충돌하는 모습을 보였고, 국가안전보장회의에서 총리가 제외되자 통일부 장관 등 회의 구성원들이 총리의 직할이라는 법적 근거를 들며 총리의 승인을 받지 않은 회의는 무효라고 주장하면서 김영삼 대통령과 마찰을 빚어 결국 이회창이 자진 사퇴하는 형식으로 사실상 경질되었다. 사퇴하면서 "법적 권한도 행사하지 못하는 허수아비 총리는 안 한다" 라는 말을 남기며 국민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총리직을 사퇴한 이후에는 신한국당에 입당하여[10] 15대 전국구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새로 떠오르는 정치인으로서 대통령까지 순탄대로일 줄 알았으나...

6. 연이은 대선 도전과 낙선

파일:external/s14.postimg.org/0eaf4bfd58b481812efe2041ac1f9fedea286d6cb5506726.png 파일:external/pbs.twimg.com/CHy49W9UsAAMbC5.jpg 파일:external/ojsfile.ohmynews.com/IE000838741_STD.jpg
역대 이회창 대선후보 포스터 15대 - 16대 - 17대

결과부터 말하자면 대선에 3번을 도전하여 3번을 모두 낙선했다.

15대, 16대 대선서는 출마하고 초반까지만 해도 2017년의 어대문 급으로 대세를 형성했으나 예상치 못한 복병을 만나 석패했다.

6.1. 제15대 대선 (1997)

깨끗한 정치, 튼튼한 경제
제15대 대통령 선거 슬로건

국무총리 사퇴 후 잠시 변호사로 활동하다가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한국당 선대위원장을 맡아 선거를 지휘했고[11], 자신도 전국구 1번으로 당선되어 국회에 입성했다. 1997년 3월, 노동법 날치기에 대한 책임을 진 이홍구 대표가 사퇴하고 신한국당 대표로 지명되었는데,[12] 이미 유력 대권 주자로 거론되던 상태라 곧이어 신한국당 대선 경선에 뛰어들었다.
파일:LEE.H.CH_New_korea_party.jpg
신한국당 대표 시절

다른 경선 후보들은 당 대표가 경선에 참가하면 불공정한 경선이 되므로 당 대표직에서 사퇴하라고 촉구했으나, 이회창은 거부했다. 이 때의 불공정 논란은 이인제가 경선 결과에 불복하고 대선에 독자 출마하는 한 구실이 되었다.[13]

경선 구도는 민정계와 민주계의 대리전 양상으로 흘렀는데, 킹메이커 김윤환을 중심으로 이회창 대세론을 일으키며 단단히 뭉쳤던 민정계와는 달리 민주계는 이인제, 이한동, 이수성, 김덕룡 등의 주자들이 뭉치지 못하면서[14][15] 경선은 이회창의 완승으로 끝났다.

그러나 본선에서는 이회창 본인에게 전혀 결격사유가 없었음에도 억울하게(?!) 정치공세에 휘말렸다. 아들 두 명이 모두 체중미달로 병역면제를 받았다는 병풍 논란이 터지면서 지지율이 폭락한 것. 이를 본 신한국당 내에서는 후보를 바꿔야 한다는 분위기가 조성되었고, 경선 2위였던 이인제에게 지지가 몰리면서 결국 이인제가 경선 결과를 불복하고 신한국당을 탈당하여 출마하게 되었다.

이인제는 당시 경제위기로 이회창에게 공격받던 김영삼 대통령의 암묵적인 지지를 받으면서 김영삼의 정치기반인 부울경을 중심으로 이회창의 보수표를 잠식해갔다. 이로 인해 이회창은 한때 3위까지 떨어지기도 했지만 이인제를 찍으면, 김대중이 된다는 공세를 통해 이인제의 지지층을 어느 정도 가져오면서[16] 2위를 회복하였다. 그 후 1위를 탈환하려 했으나, 하필 대선 직전에 터진 IMF 사태로 보수 정권의 이미지는 완전히 몰락하고 말았다.

이에 이회창은 김영삼을 탈당시키고 김영삼 이미지인 신한국당의 간판을 내리기 위해 통합민주당과 합당하여 한나라당을 창당하는 등 이미지를 개선하려 했으나[17] 김대중을 추월하지 못하고 불과 1.6%인 39만 표의 차이로 2위로 낙선하고 말았다. 무려 500만 표를 잠식한 이인제병풍, DJP연합, IMF 사태 등 이 중 하나만 없었어도 여유롭게 당선됐을 거란 점에서 이회창과 보수층에게는 더없이 아쉬운 결과. 자세한 과정은 제15대 대통령 선거 문서 참고.

사실 대선 국면에서 이러한 청와대와의 관계 설정은 결과적으로는 악수가 되었다는 평이 많다. 물론 임기말 레임덕이 온 대통령과 여당 후보의 사이가 껄끄러운 건 일반적인 현상이지만, 그의 경우에는 단순히 선을 긋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YS와 척을 지는 수준이었다.[18] 하지만 '(현직) 대통령이 여당 후보 당선은 시켜주지 못해도 낙선은 시킬 수 있다'는 정계 격언에서 보듯이 이러한 행보는 YS의 지지층, 특히 전통적인 지지 기반이었던 PK에서 적지않은 반감을 불러일으켰다.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15대 대선의 부울경 지역 개표 결과로, 이 지역에서 이회창은 고작 50% 초반대의 득표율에 그치고 말았으며[19] 특히 YS의 고향이었던 거제에서는 아예 이인제에게 1위를 내주는 결과가 나왔다.

또한 이회창 캠프는 네거티브 선거 광고를 또 활용했는데, 퀴즈쇼의 형식을 빌려[20] 김대중, 이인제 후보를 디스하는 광고를 만들었다. 물론 광고 초반과 말미에 이회창을 어필하는 내용을 넣기는 했으나, 이는 YS 인형 화형식과 더불어 유권자들에게 이회창은 편협하고 극단주의적이라는 이미지만 덧씌운다. 이는 젊은 이들에게 어필을 시도하면서[21] 포용과 화합[22]이라는 이미지를 내세운 김대중 후보에 비해 훨씬 떨어지는 수준이었다.

15대 대선에서 그는 전두환, 노태우의 사면을 공약으로 내세웠다.[23][24] 그런데 사실 제15대 대통령 선거에서 이회창, 김대중, 이인제 3후보 모두 전두환, 노태우의 사면 복권을 공약으로 내세웠다.[25]

이렇게 이회창이 전두환 사면을 공약으로 내세우자 감옥에 있는 전두환이 이회창에게 "고맙다"며 "우리 때문에 정치적 어려움을 겪는 것은 아니냐"며 화답할 만큼 매우 기뻐했던 것으로 밝혀졌다.옥중 전 씨 사면 건의 이회창 대표에 고맙다, 구두 메세지 그에 대해 이회창 후보도 전두환의 화답에 "고생 많으시다. 추석 때 나오시기를 바랐는데 그렇게 되지 않아 아쉽다"고 전두환 측에게 화답한 것으로 밝혀졌다. 李(이) 대표-全(전) 씨 비밀메시지 오갔다 사면파동 후 변호사 통해 동아일보 1997.9.24 당시 한겨레에서는 이회창 신한국당 대표가 "추석전 전두환 노태우 두분의 석방을 바랐는데 그렇게 되지 않아 아쉽게 됐다"전두환 측근들에게 화답하였다고 보도했다.사면 노력해줘 고맙다” 전 씨, 이회창 대표에 인사말 1997.9.24 한겨레

6.2. 한나라당 총재 (1998~2002)

낙선 이후 한동안 휴식기를 취했으나, 연이은 재보궐 선거 패배, 15대 국회 후반기 의장을 자유민주연합이 배출한 것을 계기로 조순 총재와 지도부가 사퇴했다. 2선으로 물러나있던 이회창은 한나라당의 총재로 복귀하여 의원들의 집단 탈당, 김대중 정부의 여소야대 타개를 위한 의원 빼가기 등 처음으로 야당이 되어버린 한나라당의 어수선한 분위기를 수습하였다.

이후 1999년 6월 열린 재보궐선거에서는 홍준표의 의원직 사퇴로 공석이 된 송파구 갑 지역구에 출마해 압도적인 득표율(61%)로 당선되어 국회에 재입성한다.[26][27]

이후 제1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보수의 장자방이라고 불리던 윤여준환경부 장관을 선거대책위원회 상임부본부장으로 발탁하였다. 이회창은 윤여준의 진언에 따라서 김윤환, 이기택, 황낙주, 신상우 등 거물급 정치인들을 낙천시킨다. 특히 김윤환이기택한나라당의 양대 계파 수장이라 그 파장이 매우 컸다. 당시 윤여준이 공천 구상을 이회창 총재에게 꺼내자, 버럭 소리를 지르며 ‘당신 미쳤구만.. 제 정신이냐’고 했다고 한다. 이회창의 주변에서도 반대가 많았지만, 윤여준이 ‘한 시대를 정리해야 한다'며 한 달 가까이 설득한 끝에 승인되었다고 한다. 출처. 이 일로 1997년 대선을 앞두고 신한국당 9룡[28]이 난립하던 상황에서 민정계, TK의 맹주로 이회창을 지원해서 대통령 후보로 밀었던 킹메이커 김윤환과는 영영 결별하게 된다. 이회창 역시도 허주(김윤환의 호)와의 결별이 정치를 하면서 가장 괴로웠던 순간 가운데 하나였다고 회고했다.[29][30]

6.3. 제16대 대선 (2002)

나라다운 나라[31]
제16대 대통령 선거 슬로건

선거 당시 불었던 낙선운동으로 총선 패배로 점쳐졌지만 영남권을 석권하고 수도권과 충청권에서 선전하며 133석을 획득, 원내 제1당을 차지한다. 총선 승리 덕에 이회창의 당권은 더욱 튼튼해졌고, 제16대 대통령 선거 당내 경선에서 압도적인 지지로 한나라당 제16대 대통령 선거 후보로 선출되어 2번째 대권 도전을 시작하였다. 이 대선의 주자인 이회창과 노무현은 비록 보수/진보로 갈라졌다지만 둘 다 독재정권에 맞서서 약한 사람을 돕던 법조인 출신이라는 점에서 박빙매치가 예상되었다. 그 외에도 둘 다 김영삼이 정치인으로 입문시킨 사람이라는 공통점도 있었다.[32] 그리고 김대중과 김영삼, 김종필이 휘둘러 온 당내 권위주의[33] 때문에 이회창은 YS에게 반기를 들고, 노무현도 김대중 세력에게 반항하면서 이회창-노무현은 삼김 청산을 외치며 혁신적인 당 운영을 외치며 국민들에게 호응을 얻는다.

하지만 정치인으로 활동하게 되면서 그 동안 참신한 대쪽 판사라는 좋은 이미지를 가지고 있던 이회창은 가회동 호화빌라 논란, 아들의 원정출산 논란, 97년 대선당시 전두환 사면추진과 박근혜 의원의 당권-대권 분리 요구 등을 겪으면서 엘리트 주의[34], 제왕적 총재[35]라는 기득권의 대표로 변질되어 갔고, 새천년민주당 설훈 의원이 이회창에 대한 최규선 20만 달러 수수설, 기양건설 10억 원 수수설 등의 허위사실이 유포되면서[36] 구태정치인 소리와 함께 구태 정치인의 전형이라는 비아냥을 듣게 된다.

이런 이회창에게 진보민주화세력에게 강한 공격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는 사건이 터졌는데 한나라당이 야당이 된 이후인 2002년 1월 8일, 한나라당 이회창 총재는 전두환 전 대통령의 연희동 자택을 방문해서 새해 인사를 나눴다. 이 자리에서 당시 전두환 전 대통령은 경제가 나아져 다행이지만 정치가 잘 풀리는 것이 중요하며 특히 정치 보복은 근절돼야 한다고 강조했고[37], 이회창 총재는 공감을 표시하면서 국민 대통합과 화해의 정치를 실현하는 데 노력하겠다고 말했다.[38] 이 전두환 대통령-이회창 총재 면담을 계기로 진보 민주화세력들은 반드시 2002년 대선에서 이회창을 낙마시키자는 다짐을 하고 만 것이다.

그리고 1997년 이회창이 여당 후보이던 시절에는 병역비리 의혹 보도가 지상파 방송에서 19건에 그쳤지만, 야당 후보였던 2002년에는 101건으로 보도가 늘어났고, 리포트 제목이 ‘병역 은폐 개입’ 등과 같이 김대업 씨의 발언을 그대로 인용하거나, 의혹이 사실인 것처럼 보도한 내용이 12%가량 됐다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다. 또한 김대업의 발언을 육성으로 내보낸 것이 37건이나 되었을 정도로 대대적인 보도가 이루어졌다. 중앙일보. 특히 공영방송사들이 이러한 경향이 강했다는 후문. 하지만, 이회창은 조중동을 필두로 하는 보수 언론(신문사들)을 우군으로 두고 있었고, 노무현 측이 언론 환경에서 유리한 위치에 있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조중동 측도 이회창에 유리한 보도를 일삼았다는 반박도 있다.

그리고 병풍과는 별개로 "아무리 그래도 대통령 후보의 아들이라면 당연히 장애인이 아닌 이상 군대를 가야하는 게 맞는 거 아냐? 나는 삽질하면서 군대 갔는데?"라면서 젊은 남성들의 병역 콤플렉스를 자극하는 바람에 "이회창은 꼴보기 싫다"라는 반응도 많았다. 더군다나 2002년은 이 해 벽두부터 터져나온 유승준 병역기피 사건과 이 해 여름 LG 트윈스의 야구선수 서용빈의 병역 이슈[39]로 인해 청년층 남성들에 의해 병역 이슈가 매우 뜨거웠을 때였다.

당시 위와 같은 정부와 새천년민주당, 그리고 김대업 측의 폭로전도 있었지만[40], 참조. 이회창 자신도 2000년의 총선 승리 후 지나치게 오만한 행보를 보인 점도 있다. 총선 패배와 각종 게이트 정국으로 레임덕에 빠진 김대중 대통령을 대신해 여의도 대통령이라는 말이 돌았을 정도로 거의 대통령 당선자처럼 거만하게 행동한다는 비판도 있었다.

예를 들어 대통령이 주재한 전국 광역단체장 회의에 자당 출신 단체장들을 불참시켜서 회의를 반쪽자리로 만들었다거나, 혹은 청와대 영수회담에서 70대 후반인 고령의 대통령 앞에서 보인 지나친 고자세 때문에 이회창=오만 혹은 정치 보복의 이미지가 굳어졌고, 지지자만큼이나 안티들을 양성했다. 여기에 부인 한인옥 여사도 "하늘이 무너져도 집권해야 한다"는 말을 주변에 하고 다니면서 오만한 이미지를 증폭시켰다. 게다가 대선 당시 우군이 될 수 있었던 김종필의 자민련에게 "꼬우면 너희가 숙이고 들어와라"식으로 대해 김종필은 이회창과의 협력을 거부하고 대선에서 중립을 지켰다. 이회창 입장으로서는 정계 입문시기부터 3김정치 반대의 기치를 강력하게 내걸었기 때문에 김종필과 연대하는 것은 곧 자기 부정일 수밖에 없었던 측면도 있지만... 결국 이는 수도 이전 공약을 내건 노무현 후보에게 충청표가 쏠리는 효과를 가져왔다. 이념만 놓고보면 당연히 김종필은 이회창을 도와야겠지만, 자민련 의원들 일부가 이탈하는 등의 상황에 놓이면서 사실상 중립을 지키고 만다.

어쨌든 특권층 이미지와 대통령이 다 된 듯한 오만한 행보는 이회창과는 정반대의 삶을 살아온 노무현이 주목받는 계기가 되었고, 정몽준과의 단일화 성공이라는 악재에다가 미군에 의한 여중생 압사 사건으로 인한 반미감정[41]이 고조되었다. 그 때문에 이회창은 다시 2위로 낙선하고 말았다.

김대중[42]과 달리 노무현은 운동권들과 민족주의에 강하게 경도된 70~80년대생들의 반 부시, 반 고이즈미 표를 적극적으로 끌어모으고 이를 적절하게 이용하였다.[43]

또한 이회창 캠프는 지난 대선에 이어 네거티브 선거 광고를 또 활용했는데, 노무현을 연상시키는 느낌의 버스 기사가 난폭운전을 하여 교통사고를 내버리는 것, 이회창을 연상시키는 느낌의 버스 기사가 안전하게 운행하는 것을 국정 운영에 빗대어 대비시켰다.[44] 이후 노무현 개인이나 참여정부의 행보를 떠나서[45], 이런 네거티브 + 극단적인 광고는 오히려 유권자들에게 반감을 사기에 충분했고, 결국 소탈한 느낌의 기타 + 애니메이션 광고를 세운 노무현에게 중도표를 빼앗기는 결과로 이어진다. 당시 궁예로 인기를 끌었던 김영철을 내세웠음에도!

16대 대선은 이회창으로서는 두고두고 천추의 한이 되었고, 절대로 패배할 수 없는 게임을 패배했다는 평이 많았다. 특히 문성근, 명계남, 신해철, 윤도현 등 도전적인 문화예술인들이 노무현 후보를 지지한 반면 이회창은 배우 김영철, 태진아, 설운도 등의 중, 장년층에게 어필할 수 있는 중견 연예인 뿐만 아니라 베이비복스, 핑클, 소유진, 심현섭, 김숙 등 당시 인기 가수들과 배우들의 지지까지 한 몸에 받았음에도 낙선한 것이다.[46]

사실 당시 선거 여론조사를 보면 이회창에게 여러 번 기회가 있었는데 노무현과 정몽준의 단일화로 날린 것이 여러모로 안타까울만했다. 우선 지방선거를 앞두고 노무현이 경선에서 돌풍을 일으키며 이회창을 월등히 앞서기는 했지만 오래가지 못하고 점차 격차가 축소된데다가 2002년 월드컵 때라 시의적절하게 투표율이 급속히 저하되면서 한나라당이 지방선거에서 광역단체장 11곳을 확보하고 대다수 시도의회와 기초단체장에서 승리를 거두는 대승을 거두면서 노무현의 지지율은 이회창을 따라잡을 수 있을 거 같지 않아보였고 8.8 재보선에서도 한나라당이 압승하면서 기회가 다시 찾아오는 듯했다. 그러나 정몽준이 노무현과 단일화에 성공하면서 노무현이 다시 앞서는 형국이 되었고 선거 막판에 (이회창에게) 정몽준이 노무현에 대한 지지철회를 하면서 다시 한 번 기회를 찾아오는 듯했지만 득표율을 좁히는 수준이었고 결국에는 역전에 실패했다.

게다가 낙선하고 난 뒤에도 차떼기 사건으로 다시 한 번 도덕성에 큰 타격을 받았으며[47], 차떼기 사건 하나 때문에 한나라당은 당사도 매각하는 등 온갖 고생을 다 겪게 된다.(...) 자세한 과정은 제16대 대통령 선거 항목 참조.

2번의 대선을 모두 2위로 마감[48]한 이후 2002년 12월 21일, 한나라당 당사에서 정계 은퇴 선언을 했고, 이후 한나라당에서 상임고문 직책만 받고, 일절 정치와 거리를 두며 어떤 선거도 출마를 하지 않았다.

하지만 대선 때까지 이회창은 한나라당을 완전 장악하고 있었으며, 이회창이 정말로 정권을 잡고 싶었다면 3수를 염두에 두고 정계 은퇴를 하지 말았어야 했다는 이야기도 종종 나왔었다. 물론 본인은 삶에서 전혀 실패를 겪어보지 못했기 때문에 더 이상 정계에 발을 담그는 것도 지긋지긋했을 것이다. 물론 대권주자로써 실패라고는 하지만 97 대선 직후에 치러진 제2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IMF 원죄론에도 최소한 기본빵은 했고 재보선에서도 잇따라 승리를 거두웠으며 2002년 대선 직전에 치러진 지방선거에서도 6공화국 최초로 전국단위 선거에서 과반 득표를 달성하는 등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 선거를 치르는 능력 자체는 상당히 뛰어난 편이라 할수있다, 더군다나 조선일보, 중앙일보, 동아일보 등 주요 신문사와도 사이가 원만했기 때문에 서포터를 적지 않게 받았기도 했다. 사실 따지고 보면 15대 대선 때는 노동법 파동이나 IMF 외환위기라는 쌍타가 터졌음에도 김대중과 불과 1.6%의 차이가 난 것에 그친 것도 대단히 선전했다고 호평할 부분도 있고[49], 16대 대선 때도 단일 후보를 끈질지게 추격했지만 결국 완전히 따라잡지 못하고 밀린 것에 가까웠다.

6.4. 제17대 대선 (2007)

반듯한 대한민국
제17대 대통령 선거 슬로건

16대 대선 패배 이후 정계은퇴를 선언한 뒤, 몇 년간은 미국에서 연수생활을 하며 공식 석상에 나오지 않았다.[50] 2005년 10월 유승민의 대구 동구 을 지역구 재보궐선거 유세에 참여하면서 다시 모습을 드러내긴 했지만, 간간히 출판 기념회나 정치 포럼에 나오는 거 외에는 별 다른 활동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정치 생명이 완전히 죽어버린 건 아니었는지, 다음 대선 시즌에 이르자 언론에서는 김대중의 정계 은퇴 번복 후 당선된 것을 전례로 들어 제17대 대통령 선거 복병으로 꾸준히 언급되어왔다.[51] 두드러진 활동이 없었음에도 언론 매체의 이런 꾸준한 관심은 그가 과거 2번 연속 원내 1당의 대선 후보였으며, 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한나라당에서 그가 가졌던 절대적인 정치적 위치 때문이었다. 하지만 정작 본인은 대선이 임박해오는 와중에도 큰 움직임이 없다가[52] 대선 약 1개월 전 기점 이었던 11월 7일 에 출마를 선언하였다. 한나라당에서는 이미 이명박이 경선을 통해 대선 후보로 확정된 시점 이어서 당을 탈당한 후 무소속으로 출마하였다.

이회창이 출마했을 당시 한나라당의 반응은 그야말로 당혹 그 자체였다. 이명박은 출마 선언 당일까지 이회창의 집을 찾아가 마지막까지 만류했지만, 결국 이회창이 출마를 해버리자 "역사의 순리에 반하는 것" 이라며 비난했고 당시 강재섭 대표를 비롯한 지도부를 이회창을 맹비난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심지어 이회창 캠프와 내통 하는 사람은 해당 행위자로 출당 시키겠다는 경고까지 했었고, 한나라당 의원들이 국회 앞에서 규탄 회견을 열기도 했었다.

무소속 이회창 후보는 "'범죄 피의자'를 대통령으로 선출하는 나라는 동서고금 어디에도 없다. 만에 하나 이명박 후보가 대통령이 되면 특검 정국이 되고 여야간 사생결단 충돌이 일어날 게 뻔하다"면서 "이렇게 되면 우리에게 더 이상 미래는 없습니다."라며 지지를 호소했다.#

자신의 출신지였던 충청도를 중심으로 본진을 다지고[53] 대전, 충남을 기반으로 하는 국민중심당 심대평 후보가 지지를 선언함으로써 대선의 다크호스로 떠오르기 시작했고, 대쪽 이미지를 부각시키며 한나라당 내부에서도 박사모를 비롯한 일부 세력을 흡수시키는 포스를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뒤늦은 출마의 한계인지 지지율 거품은 빠지기 시작하여 3위로 밀려나는 지경까지 이르렀는데, 이를 뒤집을 열쇠는 다름아닌 박근혜였다.[54] 정치 판은 전략 동맹이라고 인연과 악연을 거친 박근혜였지만, 일단 아쉬운 것은 이회창이었기에 박근혜에게 연대의 손을 내밀었으나, 결국 박근혜의 선택은 이명박이었다. 대선직전 이회창은 박근혜의 자택 앞에서 밤늦게까지 그녀와의 만남을 고대하며 기다리고 있었으나 끝끝내 자택의 문은 열리지 않았고 이회창은 아무런 소득없이 발길을 돌려야 했다.[55][56]박근혜는 이 후 이명박의 지원 유세에 참여해 지지를 호소함으로써 이회창의 방문에 대한 답을 대신했다.

이후로도 별다른 반전을 이루어내지 못한 채 이명박정동영에 밀려 3위로 대선을 마감하고 말았다. 그래도 이회창이라는 네임밸류가 죽지는 않았는지 15.07%를 득표하면서 0.07% 차이로 선거비용 전액 보전에 성공했고, 직선제 개헌 이후 무소속 후보 최고 득표율 기록을 세웠다.[57] 이명박, 정동영의 지지세가 접전이었다면 보수성향의 유권자들은 이명박에게 몰표를 주었겠지만, 당시 참여정부 심판론을 등에 업은 이명박 후보가 지지율에 있어 정동영 후보를 완전히 압도하고 있던 상황인지라 이명박에게 거부감을 가진 보수 성향의 유권자가 이회창에게 투표할 여유가 있었던 호재도 작용했다.

시도 단위에서는 1위를 한 곳이 없었으나 시군구 단위에서는 충청남도 지역에서 1위를 차지한 곳이 몇몇 있었다. 전국 최다 득표율을 기록했던 예산군[58]을 비롯해 홍성군, 보령시, 서천군, 공주시, 청양군, 부여군, 연기군 등 충청남도 일부 지역에서 1위를 차지했다. 그리고 영남과 충남 권역(부산, 울산, 대구, 대전, 경남, 경북, 충남) 7곳에서 정동영 후보를 누르고 2위를 기록했다.

한편, 특이점으로는 SBS-TNS 출구조사 결과 20대에서 15.7%로 전 세대 중 가장 높은 지지율을 얻었다는 점이다. 엘리트주의자, 강경 보수의 이미지였던 15, 16대 대통령 선거때와는 달리, 비리의혹을 받고 있던 이명박 후보와 대비되는 대쪽 이미지로 거대양당 모두 불신하는 20대들에게서 상당한 지지를 받았다는 논리로 설명된다. 다만, 전통적으로 20대의 투표 성향은 다른 세대에 비해 군소 후보에게 많은 표를 주는 편인데, 이러한 경향도 영향을 분명 끼쳤을 것이다.

보다 자세한 과정은 제17대 대통령 선거 항목 참조.

이 세 번의 대통령 선거로 얻은 총득표 수는 무려 24,938,978표나 되며 이는 김대중의 29,876,834표에 이은 총득표 수 2위 기록이다. 하지만 김대중은 4수 끝에 당선이라도 되었지만, 이회창은... 이후 문재인이 총득표 28,116,432표를 기록하면서 3위로 밀려났다. 그러나 여전히 '대통령이 되지 못한 후보 중 총 득표수 1위' 기록은 가지고 있다.

7. 마지막 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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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당시 선거 포스터
2007년 제17대 대통령 선거 때 이회창을 지지한 국민중심당 심대평 대표와 2008년 충청도 지역을 기반으로 자유선진당을 창당하여 정치생활을 이어갔다. 18대 총선충청남도 홍성군·예산군에 나와 당선되었다. 자유선진당충청도, 특히 충청남도대전광역시에서 민심을 사로 잡으며 14개 지역구 후보를 당선시키고[59] 비례대표 포함 총 18석의 의석을 획득하였다.

하지만 교섭단체에 2석 부족한 의석수가 내내 발목을 잡았고, 이념만 놓고보면 민주당계 정당에 가까웠던 창조한국당과 원내 교섭단체를 구성하기도 했으나[60] 2009년 8월 30일 심대평 대표와 이회창 총재와의 갈등[61]으로 심대평의 탈당과 창조한국당 문국현 대표의 의원직 상실로 교섭단체는 취소되고 세력도 약화되어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하였다. 결국 2010년 지방선거에서 대전광역시장 하나와 기초자치단체 13석이라는 초라한 성적을 거두면서 이회창 대표[62]는 선거 패배의 책임으로 사퇴 입장을 밝혔다. 그러나 번복 후 복귀했지만, 2010년 재보궐선거에서 패하자 대표직에서 사임했다. 이후 심대평이 돌아오고, 여전히 갈등 관계가 회복되지 않던 상황 속에서 2012년 총선에는 불출마 입장을 내비쳤다.

이후 2012년 19대 총선에서 자유선진당이 참패를 하자 그 해 5월 20일 탈당했고 별다른 활동 없이 지내다가 제18대 대통령 선거에서 박근혜 후보를 지지하며 새누리당으로 복당하였다. 이회창이 만든 자유선진당19대 총선 등 여러 선거에서 참패를 했고 선진통일당으로 당명도 바꾸면서 회생의 기회를 노렸으나, 결국은 새누리당과 합당을 선언했다. 2013년에 다시 상임고문으로 위촉되었고, 정계를 완전히 은퇴했다.

8. 여생

  • 팔순을 넘긴 고령으로 정계는 완전히 은퇴했고, 본인은 복귀할 일은 없을 거라고 못박았다. 다만 새누리당 평당원으로선 남아 있는 듯. 최근에 알려진 근황은 2014년 팔순을 맞아 박근혜 대통령으로부터 화환을 받은 것. 하지만 본인은 가족과 식사하는 선에서 조촐하게 진행했다고 한다. 이후 자서전을 내놓을 계획임을 밝히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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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순 당시 사진[63]
  • 2015년 11월 23일 김영삼 전 대통령의 장례식에 조문하면서 음수사원(飮水思源)[65]이라는 말을 남겼다. 팔순의 나이에도 전혀 흐트러지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여전한 정정함을 과시했다.
  • 2016년 12월 20일 새누리당이 비상대책위장 자리를 두고 친박 측이 외부인사영입을 주장하면서 이름이 언급되었다. 한편 팔순 회고록 집필 중이라는 소식이 들려왔다.
  • 2017년 8월 22일 본인의 회고록『이회창 회고록』(2017, 김영사)를 출간했다.
  • 2018년 7월 자유한국당의 비대위원장 내정설이 흘러 나오자 불쾌감을 표시했다. 현재 당적은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 2018년 11월 5일 신성일의 장례식에 조문하면서 “고인이 정치에 계실 때 한나라당에 있으며 같이 고생했다. 고인과 엄앵란 여사가 굉장히 애쓰셨고, 은혜를 잊지 못한다”며 고인과의 추억을 되새겼다. 그는 “고인을 보면 천의무봉(天衣無縫, 성격이나 언동이 매우 자연스러워 꾸민 데가 없다.)이라는 말이 생각난다”며 “정말 꾸밈과 거짓이 없고 좋은 분으로 생각했다”고 고인을 추억했다.
  • 2020년 1월, 제21대 국회의원 선거를 위해 충청당(가칭) 창당을 진행하고 있다는 소문이 있으나, 이회창은 실제로 창당된 충청의미래당에 관심이 없다고 하였다. 다만 당 대표인 박석우가 충청권 보수정당에서 당료로 오랫동안 활동했던 인물인지라 이런 소문이 나온 듯.
  • 2020년 2월, 조선일보와 인터뷰를 나눴다. 이 시기는 추미애와 윤석열의 갈등이 부각되던 시기였는데 이회창은 추미애에 대해 "추 장관은 문 대통령이 원치 않는 수사를 막기 위해 인사를 통해 윤 총장의 수족을 잘라내고 검찰의 수사와 기소마저 분리하려 한다"며 "심하게 말하면 법을 방편으로 자기들 목적을 이루려는 '법비(法匪)' 같은 짓을 하고 있다"고 했으며, 문재인에 대해서는 "윤석열 검찰총장을 임명할 땐 '살아있는 권력을 수사하라' 하더니 막상 자신의 최측근들을 수사하자 전면적으로 방해했다"며 "대통령과 정권이 내 편만을 위하고 내 편만을 살린다는 생각과 행동을 한다면 나라에 치명적"이라고 비판했다. #
  • 2022년 2월 윤석열 후보와 안철수 후보의 단일화가 결렬되자,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문재인 정부를 강력비판[66] [과거]하며 두 후보가 단일화를 해야 한다고 밝혔다. 결국 뒤늦게나마 윤석열로 단일화를 한 덕에 가까스로 정권탈환에 성공했다.


[1]충청계 보수정당이나 군소 보수정당을 제외한, 민주공화당 - 민주정의당 - 민주자유당 - 신한국당 - 한나라당 - 새누리당 - 자유한국당 - 미래통합당 - 국민의힘으로 이어지는 라인. 이회창과 윤석열을 제외한 이 라인의 모든 후보는 영남 출신이었다.[2] 역대 최연소는 41세에 대법관이 된 고재호 전 대법관.[3] 흔히 김현희의 KAL기 폭파 사건으로 불리는 그 사건이다.[4] 선거 무효로 홍희표 국회의원직 상실[5] 선거 무효로 김명섭 국회의원직 상실[6] 그중, 거래 허가를 관청에서 받기 전까지는 계약이 무효지만 일단 허가를 받으면 계약일로 소급해 효력이 발생한다는 유동적 무효 의 개념을 확립한 판결문은 시대를 대표하는 판결로 지정되어 1994년 서울특별시 600주년 타임캡슐에 들어갔다.[7] 조형기 음주운전 뺑소니 시신유기 사건으로 유명한 원인에 있어서 자유로운 행위의 개념을 명시한 판결 또한 이 사람이 내렸다. 판결문(92도999)[8] 여담으로 이회창 대신 대법원장에 오른 사람은 윤관이었다. YS는 훗날 월간중앙 인터뷰에서 이회창의 대쪽같은 성격이 사람의 생사를 결정짓는 대법원장을 맡기기엔 위험해보였다고 회고했다.[9] 울산 출신의 6선 의원으로 '좌동영 - 우형우'라고 불릴 정도의 김영삼의 최측근 인사였다.[10] 총리직 사퇴 후인 1995년 10월 10일 서울대학교에서 열린 강연에서는 '강연에서 말씀하신 개혁을 추진하기 위해 정치 일선에 나설 생각은 없는가'라는 질문을 받고서 "그럴 생각은 없다"고 대답했는데, 그로부터 얼마 후인 1996년 1월 22일 신한국당 입당 선언을 하였다.[11] 그 과정에서 후배 판사황우여를 선대위원장 비서실장으로 임명하며 전국구 공천을 줄 것을 당부했고, 판사 황우여는 정치인으로서의 커리어를 시작하게 된다.[12] 원래는 최형우가 내정되어 있었으나, 뇌졸중으로 쓰러지면서 이회창이 지명되었다.[13] 결국 경선 일정 기간 동안만 이만섭이 임시 대표를 맡기는 했다. 경선 후에는 다시 대표직 복귀.[14] 경선 며칠 전에 4인 연대가 성사되어 결선 투표에서 이인제 밀어 주기가 이뤄지긴 했으나, 이미 대세가 기운 뒤였다.[15] 사실 이한동은 민정계 출신이다. 물론 민정계 중 상당수는 YS와 사이가 먼 이회창을 도왔지만.[16] 그래서 이인제는 "이인제를 찍으면 이인제가 된다!"라는 것을 밀어붙였다.[17] 당시 김영삼 인형 화형식을 하는 등 YS와 연을 끊으려고 그렇게나 애를 썼다.[18] 물론 IMF도 있고 무엇보다 당시 이회창 캠프의 선거 모토가 '3김 청산'이라 YS와도 거리를 일정 부분 두긴 해야 하는 상황이긴 했다.[19] 반면 이인제는 해당 지역에서 전국 득표율의 약 1.5배인 30% 정도를 득표했다. 특히 경남에서는 16개 시도를 통틀어 가장 높은 득표율이 나왔다.[20] 진행자는 앵커 출신의 이윤성 의원이었다.[21] DJ DOCDOC와 함께 춤을을 개사한 DJ와 함께 춤을 광고 사용 및 정한용, 최종원 등의 연예인들이 나오는 팩스 광고 사용.[22] DJ와 함께 춤을 광고에서는 김종필(공화계), 박태준(민정계), 노무현(통합민주당) 같이 대선 국면에서 협력하는 세력의 인사들이 등장했다.[23] 당시 이회창은 전두환, 노태우 사면에 대해 "대선 전에 사면해줘야 된다"고 10월 6일, 인터뷰에서 밝혔다. 이회창 후보 집권 땐 권력구조 개편, 전두환 노태우 대선전 사면[24] 이인제12월 16일, 자신이 당선되면 빠른 시일 내에 전두환 노태우를 사면하겠다고 공약으로 내세웠다.이인제 후보 전두환, 노태우 사면[25] 위키백과 15대 대통령선거, 대선후보들의 전두환 노태우 사면공약 대결 논란[26] 원래는 고승덕이 출마할 예정이었으나, 장인이자 당시 연립여당이던 자유민주연합 총재인 박태준의 압력에 눌려서 포기했다.[27] 한 회기에 2번 당선된 셈인데, 당시 여의도연구소장이던 유승민이 똑같은 루트를 타게 된다.[28] 이홍구, 이회창, 박찬종, 이수성, 최형우, 김덕룡, 이인제, 김윤환, 이한동을 일컫는다.[29] 김윤환은 이 일을 계기로 이회창에 대한 분노가 상당했는지, 최병렬 등의 지인을 만나면 식사는 안 하고 이회창에 대한 분노를 쏟아내기에 바빴고 결국 암 발병으로 이어지고 만다. 또한 김윤환은 훗날 영남후보론을 구상해 16대 대선에서 이회창을 떨어뜨리는 데 일조했다.[30] 다만 김윤환은 영남후보론을 만들었음에도, 노무현과는 더 성향이 안 맞았던 민정계 중진인터라 결국 대선 국면에서는 민주국민당과 한나라당의 합당 및 이회창 지지를 추진했으나, 흐지부지 되었다. 이후 김윤환이 암 투병을 하던 당시 이회창이 직접 병문안을 가서 무릎을 꿇고 사과의 뜻을 표했지만, 김윤환은 끝내 사과를 받아주지 않았다고 한다.[31] 이는 이회창뿐만 아니라 훗날 문재인도 즐겨쓰는 문구이기도 하다.[32] 하지만 둘 다 김영삼과 결별하는 바람에 김영삼은 이 둘을 배신자라고 생각하면서 그닥 좋아하진 않았다. 이회창은 제왕적 대통령제이던 시대에서 대통령인 김영삼과 대립한 이력이 있었고, 15대 대선 당시에는 여당 후보였음에도 대통령인 김영삼을 대놓고 박대하는 바람에 괘씸죄로 찍힌 상황이었고, 노무현은 김대중 밑에서 성장했다는 점 때문에 이회창보다 더 싫어했다.[33] 말 그대로 한나라당, 민주당, 자유민주연합을 삼김이 자기 마음대로 휘두르고 공천도 자기 지역 출신 우대 등으로 마음대로 하는 식으로, 신한국당=김영삼당, 민주당=김대중당, 자민련=김종필당의 수준이었다.[34] 이회창은 소위 말하는 KS(경기고-서울대) 라인이었으며, 이와 관련된 실언도 있었다.[35] 당장 16대 총선 당시에 세대교체를 명분으로 중진들을 싹 쳐내면서 한나라당에서 그에게 대항하는 사람도 거의 없었다.[36] 이후 2005년 모두 허위사실로 밝혀지면서 설훈은 실형을 선고받고 피선거권이 10년간 제한되었으나, 2007년 2월 노무현 대통령 취임 4주년 434명 특별사면 복권 명단 포함 되어 복권 후 현재는 더불어민주당 경기도 부천시 을 의원으로 활동 중이다. 설훈 의원 항목 참조.[37] 사실상 김영삼 돌려까기에 가깝다. 김영삼 재임기에 전두환은 사형/무기징역을 선고받고 교도소에 들어가는 굴욕을 겪었다. 반면 김대중은 전두환을 용서하고 잘 챙겨주었다.[38] 이회창 총재, 전두환 전 대통령 방문 kbs 20020108[39] 시즌 이후로 소집을 연기해 달라는 LG 트윈스의 요구 또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당시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의 열기가 매우 뜨거웠을 때였고 이에 반비례해 한국프로야구의 열기가 매우 차가웠기 때문에 서용빈과 LG 구단의 처사가 크게 이슈화되지 않았을 뿐이었다.[40] 1년 10월의 징역형이 선고된 판결문을 보면 그의 죄는 이렇다. 수사에 참여할 당시 사복을 입고 수사관 행세를 하며 피의자를 조사하는 등 권한을 넘어서는 행동을 했다는 것(공무원자격사칭). 김씨의 제보에 의해 '전 의무사령관 전태준 씨가 국군춘천병원의 담당자로 하여금 이회창 후보이 아들 이정연에 관한 신검부표를 파기하게 했다'는 보도가 나왔지만, (신검부표 파기에 관한) 김씨의 주장은 허위임이 합리적 의심이 들지 않을 정도로 증명됐다는 것(출판물에 의한 명예훼손), 수사관 행세를 하면서 인터넷 동호회 게시판에 글을 쓴 적이 있다는 중앙일보의 보도에 대해 그런 사실이 있음에도 명예훼손으로 해당기자 등을 고소했다는 것(무고).[41] 사실 2002년은 미군 여중생 압사 사건뿐만 아니라 이 해 2월 2002 솔트레이크시티 동계올림픽에서의 아폴로 안톤 오노 사건으로 인해 대한민국 역사상 반미감정이 가장 뜨거웠던 해였다.[42] 일본에서 망명생활을 해서 일본의 정치인들과 교류가 두터웠으며, 일본이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적도 있어서 김대중은 노무현과는 다르게 자신의 임기 시절 일본과 우호적으로 지내려고 노력했다. 일본과 파트너쉽을 맺고 일본문화를 개방했다. 그리고 미국의 빌 클린턴 대통령하고도 우호적으로 지냈다.[43] 당시 반미&민족주의 과열은 세대를 가리지 않았고, 보수언론 및 보수정치인들의 태도에서 친미성향이 두드러졌을지언정 당시의 분위기에 어느 정도 타협을 안 할 수가 없었다.[44] 그런데 이회창은 정작 운전면허가 없었다(...) 그래서 이 광고를 본 노무현은 대선후보 토론회에서 "광고와 달리 이회창 후보는 운전면허가 없지만, 나는 군사정권도 트집을 잡지 못한 20년 모범 운전자다."라고 뼈있는 농담으로 응수했다.[45] 실제로 참여정부의 국정 운영에 대한 당시의 평가나, 여당이었던 열린우리당의 행보를 보면 딱 광고와 비슷한 상황이 되었다.[46] 이는 정확히 14년 후 치루어진 제45대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똑같이 재현된다. 힐러리 클린턴이 미 연예인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고도 낙선한 것과 같은 사례. 물론 미국 대선은 간선제고, 힐러리가 트럼프보다 더 많은 총득표수를 얻었음에도 선거인단에서 밀려서 패한 것이라 우리나라와는 확연한 차이를 보인다.[47] 사실 이건 한나라당 말고도 새천년민주당도 다를 바가 없었다. 안희정이 자가용 트렁크에 뇌물을 가득 실어서 운반한 것은 유명한 일. 하지만, 한나라당이 새천년민주당의 10배 가까운 불법 대선 자금을 조달했고, 자신들은 깨끗한 척 하면서 민주당을 비판하다가 정작 자신들의 비리가 더 크게 드러나는 사태 때문에 욕은 한나라당에서 다 먹었다.[48] 미국의 애들레이 E. 스티븐슨(민주당 소속)과 매우 비슷한데, 스티븐슨도 공화당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와 2번이나 맞붙었다 둘다 패했다. 게다가 해당 시기엔 민주당의 20년 장기집권도 있었으니...[49] 김대중이 호남 지방에서 95% 이상의 지지율을 받는 것과 그의 40년 된 이름값을 생각한다면 매우 대단하다고 볼 수 있다.[50] 다만 대선 이듬 해인 2003년 말 불법 대선자금 수사 당시에는 일시적으로 귀국해 한나라당 당사에서 기자회견을 하기도 했고, 이 후 미국으로 다시 출국해 2004년 초까지 머물렀다.[51] 출마를 결정 하지 않은 시점에서도 여론조사에선 정동영 보다도 지지율이 높게 나왔다.[52] 대선 2개월 전인 2007년 10월까지도 자신은 정치를 은퇴했고 대선 출마는 없다고 못 박았었다.[53] 말이 이회창의 본진이었지, 결과적으론 충청지방 전반적인 1위는 이명박의 차지였다. 지역을 세분화하면 이회창이 1위를 차지한 곳도 존재했으나, 어디까지나 시, 군 단위에 불과했다.[54] 이명박에 밀려 경선에서 한끗차이로 탈락한 거물로서 앙갚음(?)이라는 충분한 구실도 있었고, TK출신이라는 점을 들어 이회창의 빈약한 지역기반을 메울 수 있는 인물이었다.[55] 다만 박근혜 지지자들 중 일부가 이회창한테 이동하기는 했다. 이명박은 권위주의, 강경보수를 추구하는 측에서 다소 비토가 있었는데 일단 그런 쪽과 거리가 먼 김영삼의 발탁으로 정계에 입문했고 실용주의적, 중도적 색채가 생각보다 짙었기 때문이다. 또 사실상의 대선으로 취급된 한나라당 대선 후보 경선 과정에서도 박근혜와 다시 안 볼 사이처럼 싸웠기에 박근혜 지지자들에게 커다란 반감을 샀다. 사실 따지고 보면 이회창도 개혁우파 성향이기는 했으니 박근혜 지지자들의 이회창 지지에는 그만큼 이명박에 대한 비토가 크게 작용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실제로 당시 박사모 카페에서는 이회창을 지지하자고 주장하는 목소리들이 매우 많았다. 이회창을 '창님'이라고 존대하기까지 한 것은 덤이다.[56] 사실 박근혜 입장에서는 선택지가 별로 없기는 했다. 박근혜가 이회창을 돕는다면, 결과적으로 5년 전 대선에서 노무현에게 지자 자민련으로 당적을 옮긴 이인제와 같은 이미지로 프레임이 씌워질 것이 뻔했고, 박근혜 입장에서는 이명박이 아무리 싫어도, 대선 경선에 승복하는 이미지를 형성하면서 그 간에 내세웠던 원칙과 신뢰라는 이미지를 강화하는 것이 더 나았다. 비록 이명박이 마음에 안 든다고 해도, 친박계 인사들이 있는 만큼 내부에서 세력을 규합하는 것이 더 나았다. 결론적으로 박근혜는 이회창을 돕는 것이 아닌, 차라리 한나라당에 잔류하여 차기 대권을 노리는 것이 더 나은 선택지였다.[57] 역대 직선제 대선 무소속 후보 최고 득표율은 3대 대선에서 조봉암이 기록한 30.01%다.[58] 이회창의 선대의 선영이 있는 지역으로 이회창의 고향.[59] 충남에서 8석, 대전에서 5석, 충북에서 1석.[60] 이 원내 교섭단체 구성으로 인해 창조한국당은 이전부터 이어진 문국현 체제의 문제점들이 대폭발하면서 끝내 이회창 들러리라는 비아냥만 사고 말았다.[61] 당시 정부여당은 지역화합과 협치 등을 명분으로 삼고, 실제로는 세종특별자치시를 오늘날과 같은 행정중심복합도시가 아닌 국제과학비즈니스벨트로 전환하는 이른바 세종시 수정안을 통과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심대평 대표를 국무총리로 입각시키고자 했다. 의사를 타진하던 정부여당은 심대평 대표는 설득하는 데 성공했으나, 이회창 총재의 승낙을 받지못해 물거품이 되는데, 이로 인해 심대평 대표는 이회창 총재의 독선적인 행보에 실망하여 탈당한다. 그리고 국무총리는 역시 충청도 출신인 정운찬 당시 서울대 교수(전 총장)에게 돌아간다.[62] 심대평의 탈당 후 총재직을 폐지하고 자신이 직접 대표최고위원이 되었다.[63] 이회창의 부친 이홍규 변호사는 충남 예산 1905년생으로 2002년에 97세로 사망하였고, 모친 김사순 여사는 1911년생으로 2005년에 94세로 사망하였다. 따라서 아들인 이회창 역시 장수할 가능성이 높다. 큰아버지 이태규도 90세까지 살았다.[64] 유수호 전 의원도 법조인 출신으로 이회창과 마찬가지로 비슷한 시기에 이름날리던 판사였다. 필연적으로 만남을 몇 번 가졌을 듯. 유승민도 이회창이 한나라당 대표시절 발굴해낸 인물이기도 했다. 조문을 오며 유승민에게 "박근혜에겐 이런 인재가 필요하다"라는 덕담을 주었다고 전해진다.[65] 물을 마실 때 수원(水源)을 생각한다는 뜻으로, “목이 말라 물을 마시면 갈증을 해소한 것에 만족하지 않고, 근본인 우물을 누가 팠는지 그분에 대한 고마움을 알아야 한다”는 뜻이다.[66] 정권교체의 절실성을 묻는 질문에, "문정부는 갈등과 상호 배척으로 민주주의 기본 체제를 망가뜨려 놓은 데다 국가의 미래발전과 국가간 신용, 국가의 품격과 위신, 국민의 자존심까지도 땅에 떨어뜨렸기 때문에 반드시 심판돼야 한다."고 답하였다.[과거] 15대 대선 당시 보수표 분열로 인해 당선되지 못한 걸 생각하면 아이러니한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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