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19-05-19 09:49:29

태진아

파일:나무위키+유도.png   동명의 前 개그 콘서트 코너에 대한 내용은 태진아(개그 콘서트)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태진아의 주요 수상 이력
{{{#!folding [ 펼치기 · 접기 ] 파일:mbc.png 가요대상 대상
조성모, 송대관
For Your Soul
네 박자
(1999)
조성모, 태진아
아시나요
사랑은 아무나 하나
(2000)
god, 태진아

잘났어 정말
(2001)
조성모, 태진아
아시나요
사랑은 아무나 하나
(2000)
god, 태진아

잘났어 정말
(2001)
장나라
Sweet Dream
(2002)

파일:seoulmusicawards2.png
서울가요대상 대상
변진섭
어떤 이별
(1990년)
태진아
거울도 안 보는 여자
(1991년)
서태지와 아이들
난 알아요
(1992년)
}}}||
파일:external/down.humoruniv.org/pds_632454_1475997773.63776.jpg
이름 태진아 (太珍兒)
본명 조방헌 (曺芳憲)
출생 1953년 5월 17일[1] ([age(1953-05-17)]세)
충청북도 보은군 탄부면 하장리[2]
신체 175cm, 68kg, B형
데뷔 1972년 '내 마음 급행열차'
가족 배우자: 이옥형
장남: 조유명(의붓아들)
차남: 조성현
소속 진아엔터테인먼트
종교 무종교개신교[3]
SNS 인스타그램

1. 개요2. 생애
2.1. 태진아와 이명박의 나비효과의 진실
3. 여담
3.1. 광고3.2. 히트곡

1. 개요

대한민국의 대표 트로트 가수. 예명인 '태진아'는 배우 태현실'태', 가수 남진'진', 가수 나훈아'아'를 따와 지었다고 한다. 무명시절 지방공연 갔다가 그의 본명을 들은 작곡가가 조방헌은 평범하니 예명을 지으라고 해서 지었다고. 이런저런 일이 있은 후 옥경이, 거울도 안보는 여자, 미안미안해가 연달아 히트를 치면서 한국에서 가장 인기있는 트로트 가수 중 한 명이 되었다.

대표곡으로는 '옥경이', '노란 손수건', '미안 미안해', '거울도 안 보는 여자', '사모곡', '사랑은 아무나 하나', '사랑은 장난이 아니야', '동반자', '진진자라' 등이 있다.

2. 생애

충북 보은군에서 4남 3녀 중 넷째로 출생했으며, 본명은 조방헌이다. 어릴적 가난한 집안 때문에 수많은 직업을 전전하며 살다가 작곡가 서승일에게 발탁되어 가수 활동을 시작했다. 1973년 노래 '추억의 푸른언덕'이 흥하면서 신인상을 휩쓸었다.

이후 1975년에 간통 사건으로 구속된 흑역사가 발생했다.기사. 이 사건으로 인해 한동안 연예협회 가수분과에서 제명되어 낙향한 뒤 '이쁜이들'이라는 여성 듀엣의 음반에 기획자로 나섰다.

1980년, 다시 가수 복귀를 꿈꿨지만 과거 일 때문에 방송 출연 금지를 먹어, 미국으로 가서 교포 사회의 밤무대 활동을 하며 가정을 꾸렸다. 1984년 1월, 방송 출연 금지가 해제되자 한국에서 음반을 내고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고를 반복하던 중, 89년 '옥경이'가 히트를 친 다음 90년도'거울도 안보는 여자'가 가요톱텐에서 골든컵을 수상한 다음 후속곡인 91년 '미안 미안해' 역시 여러 번 1위를 할 정도로 히트하면서 송대관, 설운도, 현철과 함께 트로트 4대 천왕으로 등극했다.

2010년에는 송대관 후임으로 제3대 대한가수협회 회장으로 취임했고, 카라 전속계약해지 통보 사건을 적극적으로 나서 중재를 해서 사태를 안정시켰다. '진아기획'이라는 음반기획사를 운영하고 있으며 양자 조유명이 설립한 자회사 'YMC엔터테인먼트'라는 매니지먼트 회사가 존재하며, 양쪽 소속 가수가 동일하다.

2.1. 태진아와 이명박의 나비효과의 진실

개인의 명예에 관한 내용이라 자세한 분석과 자료가 필요하나, 너무 오래된 사건이라 자료조차도 거의 남지 않아서 검증이 힘들다.

혹여나 내용 수정하더라도 올라온 자료들은 삭제하지 않길 바란다.

이명박이 대통령에 당선된 이후, 인터넷에서 태진아 이명박 나비효과라는 루머가 퍼져나갔다.

1975년 모 신문기사가 근거이다.

인터넷 상에선 "태진아와 특정 관계인 상대의 딸은 파혼을 당해 자살했고, 그 통에 남편인 현대건설 조아무개 사장 또한 사표를 냈으며, 당시 부사장이었던 이명박이 사장으로 승진했다"고 퍼져나갔다. 즉, 원래 사장이 될 위치가 아니었던 젊은 이명박이 조아무개사장의 생각외의 낙마덕에 사장이 되었다는 것이다.

세상을 놀라게한 간*사건들(한겨레 신문기사)[4][5]에는 당시 인터넷의 이런 루머들에 대해서 가감없이 기사로 내보냈다. 정작 딸이 자살했다는 내용은 없다

사실 자세한 내용을 보면 태진아가 없었으면, 이명박이 현대건설 사장이 되지 않았을 거라는 추측은 좀 신빙성이 떨어져 보인다.
  • 일단 1975년 현대건설 사장을 하던 조아무개씨의 경력을 살펴보자.
1. 조아무개는 일본육군사관학교 시절 박정희와 동기였고, 1961년 5.16쿠데타 당시 박정희측 핵심인물중의 하나였다.
2. 1961년 5.16군사 쿠데타 직후 현역 소장이었던 조아무개는 국토건설청장(1961~1962), 건설부 장관(1963년)을 역임하는등 정부요직에 기용된다. 즉, 군부내의 박정희의 측근이었다는 이야기.
국토건설부
건설부
장관으로써 활동에 대한 언론 기록이 간간히 남아있다.
1. 제주도 5.16도로 개통관련 제주도 개발 서막 연 길의 혁명 '5.16도로' [6]
2. ( 울산공단개발관련기사) 공업센터 책임자 군부 엘리트로 구성 국내최대 공업도시 기반 만들어 경남은 물론 포항제철 건설도 담당
초기 울산공업센터 개발의 책임자는 현역군인들이었다. 황인권 울산특별건설국장을 비롯해서 정래혁 상공부상관, 조성근 국토건설청장 등이 모두 육사를 나온 장성들이었다. (중략) 조**씨는 앞의 글에서 다룬 안경모씨가 차장으로 있던 국토건설청 청장으로 역시 현역 육군 소장이었다. 조 청장은 박정희대통령과 육사 동기로 나중에 건설부 장관대한통운 사장, 현대건설 사장 등을 지낸 인물이다. 이런 군부 엘리트가 초창기 울산공업센터 개발을 진두지휘했다
울산공단 개발

3. 조아무개씨의 민간기업 활동
- 1964년 대한통운 사장 (이후 대한통운 경남기업 합작 회사 사장)
- 1972년 현대건설사장
- 1977년 대아건설 사장
박정희 정권의 실세답게 정부에서 사직한 이후에도 각 기업의 사장으로 계속 잘나갔다.
전형적인 낙하산 사장인것이 한 회사에 너무 오래 해먹지 않고 돌아가면서 적당히 월급받아먹고 노후연금식으로 취임한것으로 보이지만, 의외로 실세였다는 이야기도있다.
(베트남 파병 선발부대의 부사령관의 회고, 부사령관인 본인의 차와 한국인 노동자30여명이 테러당하기도 하던 상황)
부사령관 승용차에 수류탄 투척. 1966년 4월27일
나는 사실 그날 저녁, 육사 선배인 조** 대한통운 · 경남기업 합작회사 사장이 현장시찰을 위해 사이공에 왔다가 사령부를 방문하였기에 일과를 마치고 국회의사당 건너편에 있는 '카라벨' 호텔에서 저녁을 함께 하고 있었다.
조 사장과 함께 호텔에 도착한 것이 저녁 일곱시쯤이었다.
한참만에 돌아온 강중령의 얼굴색이 좋지 않아 보였다. 그는 도착하자마자 「부사령관님 놀라지 마십시오」하면서 자초지종을 이야기 했다. 테러분자들이 나의 숙소에 수류탄을 투척하여 내 승용차를 못쓰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李勳燮 월남파병 선발대장의 회고와 대한통운사장 사장 조씨

회고록 내용처럼 민간회사 사장이라는 조아무개사장은 여전히 군부에 막강한 영향력을 보여주며, 대한통운의 사업 역시 군부와 밀접한 연관을 맺고 움직이고있다.

베트남에 한국군 파견은 상당히 경제적 목적이 많았고, 한국이 미국에 경제지원을 받는 조건과 한국 기업이 베트남에 진출해서 각종 사업을 펼치기도 하는 상황이었다.

조아무개 사장의 취임과 대한통운과 경남기업의 합작회사 결성은, 사실상 박정희정부의 의지에 의해서 월남사업을 위해 민간기업을 두개를 묶은것으로 볼수있다.

70년대 이후 현대건설과 대아건설등 건설회사 사장 역시도 70~80년대 중동건설 붐등 박정희 정부의 해외건설 관련 정부의 대변인 역할이었을것으로 추측된다. 참고로 현대건설은 1976년에는 사우디아라비아 주베일 산업항 공사를 따냈는데, 참고로 사우디 산업항 공사로 벌어들인 돈은 9억 3000만 미국달러로, 당시 대한민국 정부예산의 절반에 해당하는 어마어마한 액수였다고 전해진다.# 이런 대규모 건설 수주는 정부와 민간기업이 서로 협조해서 이루어지기때문에, 조아무개 사장은 이런 정치적인 문제에 중심에 서고, 당시 부사장이었던 이명박은 실제로 회사경영을 하는 형태였다고 전해진다.

즉, 외교를 중심으로 하는 대통령과 행정부수장인 총리의 이원집정부제와 같은 형태로 보면된다.

즉, 건설업계는 여러가지로 정치적일수밖에 없는데, 특히 해외진출의 경우 정부와 밀접한 연관을 가지므로, 조아무개는 건설회사와 정부와 중간의 다리 역할을 하는 사장으로 현대건설 대아건설 사장을 역임한것으로 보인다. 물론 그런 그룹전체의 대외로비업무는 회장인 정주영이 맡아서 하는것이고 조아무개는 정주영과 정부의 사이에 매끄럽게 해주는 역할을 했다고 보는게 맞다.

결국, 당시 현대건설의 실제 경영자는 부사장인 이명박이었다고 보는게 맞고, 조아무개가 떠나간후에 회사업무는 사장 이명박이 그룹전체 대외업무는 정주영이 맡아서했을것으로 보는게 맞다.
  • 태진아의 그 사건 (1975년)
조아무개씨가 현대건설의 사장으로 1972~1977년을 재임 한것을 보면, 태진아의 그 사건은 1975년으로 현대건설 사장 퇴직은 이후 2년 뒤의 일이므로 상당히 무관해 보인다.

게다가 조아무개씨는 현대건설에서 대아건설로 바로 이동한걸로 보면, 그 사건의 여파가 있었을까가 의문이다.

게다가 21세기 대기업과 정치인과의 관계와는 매우 다른것이, 그 당시 경제인의 지위는 상대적으로 낮았다. 전두환이 슬리퍼로 대기업회장 뺨을 때리던게 80년대인데, 70년대는 더 심했다.

특히 박정희육사 동기이자 혁명 동지인 조아무개의 지위는 오히려 정주영보다 높았다.

정주영이 해외건설 관련해서 정부요인[7]과 술자리를 한다고 한다면, 가장 상석에 조아무개가 앉고 박정희 육사동기이자 전직장관이다. 가장 상석에 앉는다 그 다음이 정부요인 그 아래에서 굽신거리는게 정주영이나 이명박이었을것이다.

즉, 정주영이 조아무개의 사생활을 근거로 해임하고 말고할 위치가 아니었다.

게다가 현대건설 대아건설등이 현재의 대기업 현대도 아니다. 현대가 삼성 못지 않은 대기업이 된 것은 70년대 건설붐과 현대차 이후라서 거의 80년대는 되어야 그 정도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딸이 자살했다는 소문과는 다르게 조아무개 사장이 사망이후에 상주가 딸이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인터넷 팟캐스트 이이제와 관련 내용이 나온다는 썰이 있는데 팩트 확인 바람.

3. 여담

  • 송대관과 방송에서 라이벌 겸 앙숙 캐릭터로 자주 등장하지만, 실제로는 절친한 사이다. 티격태격하는 것은 기믹이고, 실제로는 서로 자가용도 빌려줄 정도로 깊은 우정을 자랑하고 있다. 인터넷에서는 송대관과 태진아처럼 겉으로는 서로 티격태격 하지만 실제로는 친한 사이인 사람들에게 'X진아-X대관'이라는 별명을 붙여주기도 한다.
  • 부인의 이름이 '이옥형'인데 왜 태진아 노래의 제목은 '옥경이'인지 의아해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사실 태진아도 실제로 아내의 이름을 '이옥경'으로 잘못 알고 있었으며, 혼인신고를 하면서 제대로 된 이름을 알았다고 한다. 그런데 이것 때문에 부부 사이가 틀어지진 않았는데, 그 이유는 부인인 이옥형 씨도 마찬가지로 태진아에게 '조방헌'이란 본명이 따로 있다는 것을 혼인신고를 하면서야 알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둘 다 서로의 본명도 모르고 연애를 했다는 얘기(...)
  • 신혼 초 미국에 살 때 장모의 집에서 처가살이를 했는데, 당시 장모의 집은 원룸이었다고 한다. 태진아는 방 한쪽에 커텐을 쳐놓고 살았는데, 이때 이루가 생겼다고...
  • 아들 이루도 가수로 데뷔했으며, 이후 인도네시아에서 대박을 쳤다. 대신 장르는 다르다.
  • 카라 팬클럽인 카밀리아에서는 신으로 숭배받고 있는데, 전속 계약 문제로 난리가 난 카라 해체를 막는 데에 결정적인 공로를 세웠기 때문이다.
  • 1996년 말에는 김자옥을 위해서 <공주는 외로워>라는 곡을 제작한 적이 있다.
  • 1997년 본인의 소속사에서 발굴한 보이그룹 에이알티를 데뷔시켰으며, 데뷔곡 '슬픈얼굴'이 차트에서 10위권에 들면서 선전했고 그 뒤로도 많은 곡들을 남겼다.[8]
  • 의 'La song'과 태진아 본인의 동반자를 매시업 한 영상이 인기를 끌면서 두 명이 한 무대에 같이 선 적이 있다.
  • 2010년 가을, 무명 작사가였던 최희진이 허위글을 올려 태진아 본인과 아들 이루 모두 한동안 마음고생을 한 적도 있다. 기사. 이후 최희진은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기사. 하지만 이 사태 때문에 태진아도 이루도 이후로 모두 이미지들이 조금 안 좋아졌다.
  • 2015년에는 억대의 도박을 했다는 잘못된 설로 또 한동안 곤욕을 치렀고, 이에 대해 본인이 결정적 증거를 보이면서 직접 해명했다. 본의 아니게 억울함을 하소연하는 이 사진들이 주로 인터넷에서 짤방으로 사용되고 있다. 기사.
  • 무대 의상은 항상 두 벌을 제작한다고 한다. 장지기장 활동 당시 강남과 옷 사이즈는 물론 신발 사이즈까지 맞아서 활동 내내 강남은 태진아의 옷을 입고 무대에 섰다고...
  • 미운 우리 새끼에 출연해 우유 콜라 라면이라는 괴악한 라면 조리법을 소개해 큰 이슈가 되었다. 방송에서 먹어본 이들과 일부 따라해 본 시청자들은 얼큰하면서 달달하다며 호평했지만, 그 외의 대부분 시청자들은 경악했다. 이를 직접 따라해본 사람들 혹은 스트리머들은 토할 것 같다는 후기. 방송만으로 정확한 레시피를 알 수 없어서 그랬을 수도 있다.

3.1. 광고

연도 광고
2005년 고창서해안복분자 (전주MBC TV 방영)
2006년 참이슬
2017년 트라이
2003년 ~ 2015년 청원생명쌀
2008년 ~ 2010년 보은대추

3.2. 히트곡

곡명 발매일
옥경이 1989년
거울도 안 보는 여자 1990년 7월
미안 미안해 1990년 7월
사랑은 토요일 밤에 1992년 5월
사모곡 1993년 6월
노란 손수건 1993년 9월
가버린사랑[9], 그대곁에 1994년 12월
사랑은 아무나 하나[10] 2000년 4월
사랑은 장난이 아니야 2002년 5월
바보, 이유가뭘까 2003년 4월
잘살거야 2005년 2월
동반자 2004년 4월
아줌마 2006년 2월
일나겠네, 사랑했나요 2011년 2월 18일
사랑은 눈물이라 말하지 2012년 2월 27일
LA SONG 2014년 2월 10일
진진자라 2015년 7월 16일
최고의 사랑 2017년 3월 12일
사랑엔 답이 없네요 2018년 7월 28일
그게 답이야 2018년 8월 10일


[1] 음력 1953년 4월 5일.[2] #[3] 동반자를 '주님은 나의 동반자'라고 개사를 해서 복음을 전파하기까지 할 정도로 매우 독실한 크리스천이다. 신앙 생활은 1983년부터 시작하였다고 한다. 또한 2000년 가요대상에서 "먼저 하늘에 계신 하나님과 주님께 감사드리고요."라고 하였다.[4] (한겨레 기사내용) 1975년에는 가수 태진아(본명 조방헌)씨가 현대건설 사장 조아무개씨의 부인인 김아무개씨와 간통한 혐의로 구속됐다. 두 사람의 신분과 나이 차이(태씨 21살, 김씨 47살)는 대중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또 태씨는 김씨와 만날 때마다 50만원씩 받았다고 진술해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당시는 쌀 한가마(80㎏)가 5000원 남짓하던 시대였다. 태씨는 조 사장과 김씨가 협의이혼을 하고 고소가 취소된 뒤 풀려날 수 있었다. 이 사건 뒤 조씨는 현대건설 사장 자리에서 물러나고, 이명박 부사장이 사장으로 승진했다. 이런 이유로 2010년께 인터넷에는 태진아씨 간통 사건 덕분에 이 대통령이 청와대를 차지했다는, '태진아 나비효과'라는 글이 누리꾼들 사이에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5] 해당 기사에 인용된 옛 신문기사에는 태진아의 본명이 '이방헌'으로 오자가 나 있다.[6] 공사를 시작한 지 1년 8개월이 지난 1963년 10월 11일 일부는 비포장 도로인 상태서 5·16도로 개통식이 열렸다. 제주시와 서귀포시에서 각각 기념식을 마치고 동시에 마이크로버스와 트럭 등에 시승해 양쪽에서 출발한 인사들은 수악교에서 합류해 기쁨을 나눴다. 김영관 지사는 서귀포에서, 조성근 건설부장관은 제주시에서 출발해 수악교에서 만났다. 출처 : 제주新보(http://www.jejunews.com)[7] 70년대는 장관이 매번 대기업회장 만나주는것도 아니다. 요즘과 다르다[8] 하지만 에이알티는 얼마 뒤 멤버 박성준이 여자친구를 폭행하는 바람에 팀이 와해된다.[9] 원곡자는 남미웅이며 그 뒤 조경수와 임주리가 리메이크했다. 참고로 1995년 12월부터 1996년 7월까지 가요톱텐 순위권에 있었다.[10] 트로트임에도 엄청난 인기를 끌면서 뮤직뱅크 기준으로 26위까지 올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