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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왼쪽부터 존 로드, 이안 길런, 리치 블랙모어, 이안 페이스, 로저 글로버 | ||||
국적 | 영국 | |||
결성 | ||||
1968년 | ||||
잉글랜드 런던 | ||||
데뷔 | 1968년 6월 21일 (Hush) | |||
데뷔 앨범 | ||||
해체 | 1976년 | |||
재결성 | 1984년~현재 | |||
멤버 |
| |||
장르 | 헤비 메탈, 하드 록, 프로그레시브 록, 사이키델릭 록 | |||
레이블 | Tetragrammaton · · Polydor · BMG · · Edel · earMUSIC | |||
링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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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 시대를 풍미한 전설적인 하드 록 밴드 중 하나로, 여러 장르에 걸치는 다양한 음악을 해왔지만 특히 하드 록과 헤비 메탈 계열의 록 음악에 큰 영향을 끼친 밴드이다. 딥 퍼플은 유럽과 아시아에서 큰 인기를 끌었고, 이에 따라 전 세계적으로 1억 장 이상의 음반 판매고를 기록했다.
동 시대의 레드 제플린이나 퀸 등의 밴드들과는 달리 딥 퍼플은 끊임없이 밴드 멤버들이 교체되었는데[4], 그렇기에 멤버 교체에 따라 Mark 1(I), Mark 2(II) 같은 식으로 4개의 기수로 구분해서 설명된다. 멤버 교체가 훨씬 심했던 수많은 다른 밴드들에 비해 유독 딥 퍼플에만 이런 식의 구분법이 적용되는데, 이러한 방식은 처음에 딥 퍼플의 미국 배급사였던 워너 브라더스사에서 먼저 만들어져서 해체 이후에 발매했던 편집 앨범들에 쓰였고, 이후 평론가들과 팬들도 그대로 이러한 방식을 사용하게 되었다. 이 구분법을 쓴 이유는 새로운 멤버의 영입마다 기존 밴드가 추구하는 장르에 새로운 멤버가 추구하는 장르가 융합되어 밴드 고유의 독창적인 사운드를 계속해서 창조했기 때문이다. 덕분에 각 기수마다 완전히 다른 밴드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사운드 변화가 확연하다.[5]
이러한 방식은 참여한 멤버들의 음악적 역량과 합주를 중시했던 밴드의 운영 방식으로 밴드의 음악을 더 다채롭게 만드는 긍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이후 헤비 메탈 밴드 멤버들의 자유로운 이합집산도 이에 영향받았다고 얘기하기도 한다.[6]
한국 한정으로는 동시대에 활동했던 레드 제플린과 자주 비교되며, 레드 제플린과 더불어서 또 다른 하드 록 밴드인 블랙 사바스와 함께 70년대를 대표하는 하드 록 밴드로 꼽히기도 한다. 실제로 이 세 밴드들이 이후의 하드 록, 헤비 메탈을 포함한 록 음악계에 끼친 영향은 매우 크다. 70년대 내내 오리지널 멤버로 활동한 앞의 두 밴드에 비해, 유달리 멤버 교체가 심했지만 덕분에 장르적 스펙트럼이 굉장히 넓다.
80년대 한동안 유행했던 Rock family tree에서 다른 밴드에도 이 표기법이 많이 활용되면서 현재는 단순 멤버교체에 이런 식의 구분법을 쓰고 있지만, 그 출발은 딥퍼플에서 시작했다.
2. 이름의 유래
The Ritchie Blackmore Story 다큐멘터리 영화에서 리치의 인터뷰에 의하면 밴드 결성 당시 여러 이름들이 후보에 올랐었는데, 딥 퍼플이란 이름은 리치가 제안했다고 한다. 그 이유는 어릴 때 할머니가 불러주던 노래 제목이 딥 퍼플이었고 그 당시에는 2가지의 단어를 조합한 밴드명이 유행이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예를 들면 핑크 플로이드, 레드 제플린이나 블랙 사바스처럼 말이다.[7]3. 역사
3.1. 밴드의 시작: 싸이키델릭 & 프로그레시브 아트 록
딥 퍼플의 역사는 196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당시 영국에서 큰 인기를 끌었던 팝밴드 서처스[8] 출신의 드러머였던 크리스 커티스가 런던의 사업가 토니 에드워즈를 만나 새로운 그룹을 탄생시키기로 결정하고 이름을 Roundabout
첫번째 합류한 멤버는 당시 세션계의 베테랑인 클래식을 전공한 해몬드 오르간 주자인 존 로드 였고, 두번째 멤버로는 함부르크로 건너가서 활동하던 떠오르는 스튜디오 세션 기타리스트 이자 아웃로즈, 닐 크리스천 밴드[9] 그리고 스크리밍 로드서치의 기타리스트를 거친 리치 블랙모어를 합류시킨다.
보컬은 리더 역할을 자처한 크리스 커티스가 맡기로 하고 이제 리듬 파트를 찾아나설 차례였지만, 크리스 커티스는 심한 LSD 중독자였기에 툭하면 기행을 일삼았고 잠수도 여러번 탄다. 이에 매니지먼트 회사인 HEC은 그를 즉시 해고시켜 버린다.
하지만 HEC 는 존 로드와 리치 블랙모어의 가능성은 매우 높이 사고 있었고, 이 두 사람 또한 모처럼 찾아온 이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또 한편으로는 자신들에 비해 인기는 훨씬 많았지만 음악적으로 비틀즈의 아류 밴드의 드러머였던 크리스 커티스가 보컬을 맡는 것에 의구심을 가지고 있던 참에 이것은 전화위복의 기회라고 판단한다. 아닌 게 아니라 서처스는 비틀즈와 같은 리버풀 출신의, 음악적 성격도 거의 비슷한 밴드였고(이른바 '머시 비트') 위에서 말한 Love Potion No.9도 비틀즈가 부르는 걸로 착각하는 사람들도 간혹 있다.
HEC의 사장인 토니 에드워즈는 본격적으로 매니저까지 맡고, 라운드어바웃의 멤버 두명은 자신들과 함께 할 새로운 멤버를 물색한다. 세번째 멤버로 존 로드의 추천에 의해 그와 함께 플라워 포트 멘의 백밴드를 같이했고 자니키드 앤 파이어릿의 베이시스트 출신인 닉 심퍼가 가입하는데, 닉은 이미 리치와도 안면이 있는 사이였다.
드러머로는 존 로드 못지 않은 베테랑 세션맨인 바비 우드맨[10]을 합류시켰다. 하지만 마지막 멤버를 뽑는 보컬 오디션에서 로드 에반스가 자신의 밴드 Maze의 팀 동료인 드러머 이안 페이스를 대동하고 나타나면서 또 한번 역사가 달라진다.
리치 블랙모어는 1966년 독일에서 Maze의 콘서트를 본 적이 있었고 그 당시 18살짜리 드러머의 연주에 깊은 감흥을 받은 터였다. 이를 기억하는 리치가 바비 우드맨이 담배를 사러간 사이에 급하게 이안 페이스에게 오디션을 시켜봤고, 결국 로드 에반스가 보컬에, 이안 페이스가 드러머로 정식 가입한다. 이 얘기가 와전 돼서 크리스 커티스가 담배를 사러간 사이에 이안 페이스를 가입시켰다고 알려졌으나, 같은 드러머 출신이기에 잘못 전해진 얘기이다. 크리스 커티스는 위에 서술한대로 초반에 제명되었다.
이렇게 해서 라운드어바웃은 키보드 주자 존 로드와 기타리스트 리치 블랙모어에 닉 심퍼(베이스), 로드 에반스(보컬), 이안 페이스(드럼) 3인을 더해 5인조로 밴드를 구성을 완료한 후, 곧 리치 블랙모어의 할머니가 좋아했다는 곡의 이름을 따서 밴드의 이름을 '라운드어바웃' 에서 '딥 퍼플'로 개명하고 이때의 멤버를 딥 퍼플 1기라고 한다. 당시 존 로드는 밴드의 이름으로 '오르페우스(Orpheus)'를, 리치가 '딥 퍼플'을, 그리고 이안 페이스가 '더 힐(The Hill)'을 내놓았지만, 결국 리치가 내놓은 딥 퍼플을 채택했다.
이듬해인 68년에 나온 1집부터 이듬해 69년 3집까지가 이 시기에 해당하는데, 이때는 키보디스트인 존 로드가 음악적인 키를 잡고, 주로 당시의 주류였던 사이키델릭 록과 블루스 록, 그리고 클래식을 도입한 프로그레시브적인 실험성이 담긴 복잡한 구성의 음악을 해서 현재 우리가 알고있는 딥 퍼플의 음악과는 많은 차이가 있다.
딥 퍼플 제 1기, 뒷줄 왼쪽부터 리치 블랙모어(기타), 존 로드(키보드), 닉 심퍼(베이스). 아랫줄 왼쪽부터 이안 페이스(드럼), 로드 에반스(보컬).
특히 다른 뮤지션들의 곡들을 리메이크 하면서(이 때 딥 퍼플이 리메이크한 곡들 중에는 비틀즈의 곡 Help!도 있다.) 그 원곡을 연주지향적으로 더 디테일하게 다듬은 곡들을 발표했는데, 이건 당시 비틀즈의 곡들을 헤비 사이키델릭 록으로 변주해 길게 연주하면서 큰 성공을 거둔 밴드 바닐라 퍼지의 영향을 받았으며, 전반적인 연주기법 부분에서도 이들과 비슷하였다.
존 로드는 영적이고 날카로운 소리를 들려주는 해먼드 오르간을 연주하며 오르간 속주를 구사했고, 지미 헨드릭스 에게 영향을 받은 리치 블랙모어는 블루지한 에릭 클랩튼, 지미 페이지와 달리 면도날같이 짧고 공격적인 리프와 속주 솔로를 주로 연주했다.
여기에 디테일한 연주법에서는 존 본햄을 능가한다고 하는 이안 페이스의 기교넘치는 드럼 연주까지 곁들여져 이미 이 시기에 최고의 연주 앙상블을 들려주었다. 거기에 로드 에반스의 블루스 필링이 강한 끈적끈적한 보컬은 이 시기에 추구하던 딥 퍼플의 음악과 잘 어우러져 프로그레시브나 사이키델릭 팬들은 이때의 딥 퍼플을 최고였다고 얘기하며 아쉬워한다. 적어도 이 시기가 지나가면 딥 퍼플은 이때만큼 음악적인 실험은 하지않는다.
데뷔앨범 Shades of Deep Purple
이후의 딥 퍼플의 특징인 멤버들간의 불꽃튀는 연주 경쟁은 이때 이미 나타났으며 그런 대표적인 곡이 1기 이후에도 라이브에서 자주 연주하는 "Wring That Neck"이다. 이 곡외에 당시의 명곡들을 보면 클래식 요소를 결합한 복잡한 구성의 곡들인 "Anthem"과 "April", 빌보드 싱글 차트 4위에 올라 밴드에게 상업적인 성공을 안겨줬던 조 사우스 원작의 경쾌한 하드록곡 "Hush", 도노반의 곡을 리메이크한 "Lalena", 그리고 1집 연주곡 "And The Address"[11] 원시적인 드럼과 공격적인 기타리프의 "Chasing Shadows" 등이 있다.
보컬리스트 로드 에반스와 베이시스트 닉 심퍼는 초기 3장의 앨범에 참여하고, 곧 이안 길런과 로저 글로버로 교체된다.이로써 존 로드 주도의 클래시컬하고 사이키델릭한 음악성을 선보인 위대한 아트록 밴드 제 1기 딥 퍼플은 막을 내린다.
로드 에반스는 이후 아이안 버터플라이의 멤버들과 함께 사이키델릭 블루스 밴드 캡틴 비욘드를 결성한다. 그 이후의 로드 에반스는 1980년에 딥 퍼플이라는 동명이름으로 재결성했다가 당연히 고소를 먹었고 자신의 밴드 제적 당시의 음반 수익료를 포기한다. 그리고 법정소송이 끝나고 로드 에반스는 음악산업에서 완전히 하차했다. 위에 언급한 캡틴 비욘드라는 밴드의 재결성때 로드 에반스도 음악활동에 참여할 의사가 있었으나 2012년 캡틴 비욘드 리더의 사망으로 더이상의 로드 에반스의 음악적인 활동은 볼 수 없다.
3.2. 밴드의 전성기, 하드록의 제왕
2기의 딥 퍼플은 1기와 달리 철저히 헤비록, 하드록을 지향하며 활동하였고, 이때의 딥 퍼플이 가장 유명하다.1969년 리치 블랙모어는 레드 제플린의 로버트 플랜트의 노래를 듣고 딥 퍼플에서도 레드 제플린의 로버트 플랜트처럼 강렬하게 외쳐대는(screaming) 보컬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한다. 이렇게 해서 선택된 그 누군가가 바로 이안 길런 이었다.
앤드류 로이드 웨버의 락 뮤지컬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에서 초대 지저스 역을 맡았을 정도로[12] 기본적인 성량 및 음역대가 탁월한 보컬리스트였던 이안 길런은 지금까지도 하드록 헤비메탈 보컬의 교과서로 불리며, 그 특유의 미칠 듯한 고음의 샤우팅과 무지막지한 파워를 가진 스크리밍 창법은 이후 아이언 메이든의 브루스 디킨슨을 비롯한 여러 헤비메탈 보컬리스트들의 창법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이안 길런의 추천으로 밴드에 가입한 베이시스트인[13] 로저 글로버는 베이스 연주와 작곡 이외에도 프로듀서로서의 능력을 가지고 있었고 또한 파이어 볼 앨범에서는 음반 커버 디자인까지 주도한다. 이후에는 주다스 프리스트, 나자레스, 마이클 솅커 그룹 그리고 후기 레인보우 에 프로듀서로도 참여한다.
이 시기의 딥 퍼플을 흔히 황금의 2기 딥 퍼플이라고 하며, 이때 멤버들의 음악성과 연주력이 워낙 출중해 아직까지도 최고의 연주력을 가진 멤버들이 모인 밴드 설문조사 등등에 이 시기의 딥 퍼플이 최고의 밴드로 꼽히기도 한다. 딥 퍼플 멤버들은 단순히 독학이나 애매하게 실력을 가졌던 여타 밴드와 달리, 제대로 된 정규 음악 교육을 받은 인물이거나 당시 다양한 녹음실에서 세션 녹음 및 공연 경험으로 이미 잔뼈가 굵은 인물들이다. 이런 실력자만 모았으니 어마무시한 결과가 나온 것이다. 당시로는 정말 혁명적일 정도로 놀랍고 무시무시한 앙상블이었으며 이후의 헤비 메탈 밴드들은 다 이 2기의 딥 퍼플 음악을 카피하고 따라하였다.
왼쪽부터 존 로드(키보드), 로저 글로버(베이스), 이안 페이스(드럼), 이안 길런(보컬), 리치 블랙모어(기타)
이 정도로 이후 세대의 메탈 밴드 중 딥 퍼플의 영향을 받지 않은 밴드는 정말 하나도 없을 것이다. 만약 딥 퍼플의 영향을 하나도 받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메탈 밴드들이 있다면 이들이 평균 저하에 일조하는 것들이라고 봐도 좋다. 최소한, 딥퍼플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밴드들에게 영향을 준 밴드는 딥 퍼플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2기의 중요한 앨범으로는 "Concerto for Group and Orchestra", "Deep Purple In Rock", "Fireball", "Machine Head", "Made in Japan" 등등이 있다. 특히 "Deep Purple In Rock", "Machine Head"는 헤비락 역사상 가장 중요한 앨범들로 이 앨범들이 없었다면 지금의 하드록, 헤비메탈은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Concerto for Group and Orchestra"는 존 로드가 밴드 결성 때부터 지속적으로 관심을 표했던 클래식과 록의 결합의 실험의 결과물이다.[14]
초연은 1969년 9월 24일에 런던의 로열 앨버트 홀에서 진행했고, 1부에서는 말콤 아놀드 지휘의 로열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아놀드의 자작곡인 교향곡 제6번을 런던 초연했다. 2부는 딥 퍼플 단독 무대로 Hush와 Wring That Neck, Child in Time 세 곡이을 연주했고, 3부에서 존 로드의 이 협주곡을, 그 이후는 3악장의 후반부를 앵콜로 연주했다.
공연 직후 협주곡의 실황을 LP 앨범으로 발매했고, 이후 1990년에 CD로 재발매되면서 2부 연주곡 중 Hush를 제외한 두 곡이 같이 수록되었고, 2002년에는 1~3부 전체와 앵콜까지 모두 담은 한정판 라이브 앨범이 DVD-Audio와 SACD로 나왔다.
존 로드의 야심작이었던 협주곡은 연주는 좋았으나 구성이 너무 산만하는 평을 들었지만, 이안 페이스의 드럼 카덴차와 리치 블랙모어의 그 이전이나 이후에나 전혀 들을 수 없는 유일무이한 블루스 필링 가득한 끈적끈적한 기타 연주는 매우 인상적이다.
이후 1970년 8월 25일에 로스앤젤레스의 할리우드 보울에서 로렌스 포스터가 지휘한 로스앤젤레스 필하모닉과 재차 공연했지만, 공연 직후 악보를 분실하는 바람에 재공연은 거의 30년이 지난 1999년 9월 25~26일에 가서야 네덜란드 작곡가 Marco de Goeij의 협력으로 재작성된 악보로 행해졌다. 다만 원곡 그대로는 아니었고 어느 정도 개작된 형태였다. 초연 때와 마찬가지로 로열 앨버트 홀에서 폴 맨이 지휘한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가 협연했다.
리치 블랙모어는 이 시기의 존 로드가 주도한 클래식과 록의 조합을 그리 좋아하지는 않았다고 하지만 후기 레인보우 시절인 70년대 말부터는 적극적으로 클래식과 록의 조합을 시도한다. 이 시도가 상업적으로 크게 성공하지는 않았지만, 영광의 2기 딥 퍼플을 알리는 효과는 대단 했다.
이에 존 로드에게서 음악적 리더 역할을 넘겨 받은 리치 블랙모어의 기타리스트로서의 역량은 바로 다음 앨범에서 폭발한다. 1970년에 발표된 2기 딥 퍼플의 두 번째 앨범 "Deep Purple in Rock"은 흔히 하드록, 헤비메탈의 교과서로 불리는 명반 중의 명반 이다.
이 앨범은 헤비록 역사상 전무후무 공전절후한 앨범이고 나오자마자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당시의 일반적인 헤비록의 출력을 훨씬 넘어서는 엄청난 고출력의 시끄러운 사운드(그러한 특징들은 앨범 첫 번째 트랙 "Speed king"에서 잘 드러난다.)(그러나 리치는 스튜디오에서 계속 vox ac30을 사용했다. 리치가 썼다고 알려진 마샬 major 200와트 스택은 라이브에서 사용된 앰프이다. 시끄러워 보이는 사운드는 트레블부스터와 마샬 수파퍼즈와 퍼즈페이스에서 기인한 퍼즈사운드이다), 리치 블랙모어의 귀청을 찢는 듯한 헤비한 기타 사운드에 맞서 해먼드 오르간 만으로 그 기타에 결코 지지않는 강렬한 연주를 보여준 존 로드 이 두 사람의 대결, 그리고 "Speed King", "Bloodsucker"[15] 등에서 들려준 이안 길런의 악마적이라고 표현될 정도로 강렬한 보컬, 무시무시한 연주 스피드 등은 그 이전에는 결코 들어본 적이 없는 것이었다.
이 앨범 최고의 곡은 더 말할 것도 없이 악마적인 목소리 이외에도 프로그레시브적인 복잡한 구성과 톱니바퀴처럼 딱딱 맞아 연계되는 드라마틱한 연주가 압권인 약 10분에 달하는 대곡 "Child In Time"으로 이안 길런의 절규에 가까운 샤우팅과 리치 블랙모어의 휘몰아치는 기타솔로 그리고 존 로드의 오르간이 압도적이다. 냉전을 묘사하는 가사 때문에 우리나라에서는 금지곡으로 지정된 역사가 있다. 리치 블랙모어가 이 노래에 대해 말하기를, 이 노래는 보컬이 소화하기가 매우 힘든 노래였기에 이안 길런은 이 곡의 라이브를 굉장히 꺼렸고 공연에서 이 곡을 스킵할 것을 종종 요구했었다고 한다. 그럴 때마다 리치는 "이안, 모두가 이 노래를 듣고 싶어해." 라며 이안의 요구를 무시하였다고 하는데, 결국 이안은 리치를 더욱 싫어했으며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최근의 딥 퍼플의 공연에서 Child In Time 은 거의 포함 되지 않는다.[16][17]
이 외에도 "Into the Fire", "Flight of the Rat" 그리고 리치의 극한으로 몰아 붙이는 긴 기타솔로를 담은 "Hard lovin' Man" 등도 영원한 헤비록의 고전이다. 미국 러시모어 산의 대통령 큰바위 얼굴들을 패러디해 자기들 얼굴들을 집어넣은 커버도 화제가 되었다.
"Fireball"은 너무 달린 전작에 비해 조금은 절제된 사운드를 선보이고 있다. "Deep Purple In Rock", "Machine Head" 두 최고의 앨범 사이에 끼어 있어 약간 저 평가받는 앨범이라는 얘기가 있지만, 음악성은 두 앨범에 못지않다. 두 앨범보다 더 프로그레시브적이며 많은 실험을 시도한 앨범이다. 오프닝의 스트레이트한 "Fireball", 약간 부기우기한 템포의 여유로운 곡 "No No No", 프로그레시브 한 분위기의 "Fools" 그리고 라이브때 이안 페이스의 드럼 솔로연주로 유명한 "The Mule" 등이 실려있다.
다음 앨범 "Machine Head"는 더 말할 것도 없이 헤비록의 교과서이며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리프의 노래 "Smoke on the Water" 는 물론 "Highway Star", "Lazy", "Space Truckin'" 등등 우리가 알고있는 딥 퍼플의 유명한 곡은 다 이 앨범에 들어있다. 심지어 메탈헤드라는 말이 바로 이 앨범명에서 따왔다는 설 이 있을 정도니 말 다했다. "Deep Purple In Rock"보다는 거친 야수성은 줄어들고 좀 더 정리된 듯한 음악을 들려준다. 다만 너무 프로듀싱이 너무 정제되었는지 활력이 지나치게 줄어든 느낌이 든다. 이건 라이브 앨범 "Made In Japan" 등등에서 곡들이 훨씬 헤비하고 힘이 넘치게 들리는 걸 보면 알 수 있다. 두 앨범을 비교해보면 "Machine Head" 에 컴프레서가 과하게 걸린 게 아닐까 할 정도로 "Made In Japan" 앨범은 강렬하다
왼쪽부터 존 로드(키보드), 이안 길런(보컬), 로저 글로버(베이스), 이안 페이스(드럼), 리치 블랙모어(기타)
2기 처음부터 밴드 리더 존 로드에 대항해 점차 자기능력을 과시하던 리치 블랙모어의 의도로 이 앨범에서는 리치 블랙모어가 연주파트 내에서의 위상이 완전히 존 로드를 넘어선다. 하지만 리치 블랙모어의 이 요란한 기타 사운드에도, 전혀 밀리지 않는 존 로드의 하몬드 오르간이 또 대단하다.
"Made in Japan"은 이 시기 일본에서의 라이브 앨범으로 록 음악 역사상 최고의 라이브 앨범 중 하나 로 얘기된다. 앨범 명이 메이드 인 재팬인 이유는 70년대 초반 당시 80년대의 한국, 지금의 중국처럼 온 세계가 인건비가 저렴한 일본산 제품이 판을 치던 시기여서 그걸 풍자한 작명 센스라 한다. 이걸 주워듣고 빈정이 상한 일본에서는 앨범명을 Live in Japan 으로 바꾸고 자켓 사진도 바꾸고 다른 디자인으로 판매를 한다. 이 앨범은 90년대 후반 역시 Live in Japan 이란 이름으로 당시 오사카와 도쿄에서의 3일간의 공연을 담은 CD 3장짜리 버전으로도 나온다.
이 당시에 기네스북에 세계에서 가장 시끄러운 밴드로 이름을 올렸다. 이 앨범에서 들으면, 이들의 연주는 라이브에서도 기교에 거의 실수가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더 천재성이 넘쳐보이며 스튜디오 버전보다 소리의 박력도 훨씬 강하게 느껴진다.
이안 페이스는 이안 길런과 리치, 존이 무대 위에서 죽도록 자기 실력을 뽐내며 서로 경쟁하는 꼴을 뒤에서 드럼치면서 즐겼다고 인터뷰 했었는데, 앨범을 유심히 들어보면 연주자들 모두가 서로에게 영향받은 임프로바이제이션을 구사하는 것을 알 수 있다. Strange Kind Of Woman에서 이안 길런과 리치 블랙모어가 나누는 문답(?)이 가장 좋은 예다. 존 로드의 경우 70년대 하드록 밴드의 해몬드 올겐 사운드에 익숙지 않은 사람은 기타와 사운드를 헷갈릴 만큼 무지막지한 헤비 사운드를 들려 주는데, 클래식에 영향받은 프레이즈들을 제외하면 굉장히 많은 부분에서 기타 연주와 아주 비슷한 어프로치가 있다.
Made In Japan 앨범이 발표된 직후, 밴드의 간판이 된 리치 블랙모어는 밴드의 또 다른 간판인 불세출의 보컬리스트 이안 길런과 완전히 사이가 틀어져 버린다. 또한 이안 길런과 리치 블랙모어의 앙숙관계는 딥 퍼플 재결합 이후로도 이어진다.
그리고 이듬해인 1973년 1월 딥 퍼플 7집인 히트곡 'Woman from tokyo'를 수록한 범작 "Who Do We Think We Are"를 발표했지만 전작인 "Machine Head"에 비해 평이 너무나 안 좋았고, 위에서 언급 되었듯이 멤버들 사이도 좋지 못했다. 결국 73년 6월 두 번째 일본 공연을 마지막으로 밴드 내 알력싸움에서 밀린 이안 길런의 탈퇴로 이어지고, 곧이어 이안의 친구였던 로저 글로버마저 나가게 된다.
그리고 데이비드 커버데일(보컬)과 글렌 휴즈(베이스, 보컬)가 들어온다. 이때부터 3기의 딥 퍼플이 시작된다. 한편, 존 로드는 딥 퍼플 3기 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에 솔로활동을 펼치기 시작하며 딥 퍼플 시기 못지 않은 음악적 성과를 거둔다. 실제로 존 로드 본인은 자신의 모든 작업물 중 1976년에 나온 솔로 앨범 Sarabande를 최고로 평가했다.
3.3. 캘리포니아 잼, 소울 & 블루스
3기 딥 퍼플, 왼쪽부터 글렌 휴즈 (베이스, 보컬), 리치 블랙모어 (기타), 이안 페이스 (드럼), 존 로드 (키보드), 데이비드 커버데일 (보컬)
황금의 2기 딥 퍼플과 비견되는 딥 퍼플 3기는 1기와 2기가 그랬듯이 보컬과 베이스가 바뀌었고 트윈 보컬체제를 도입하면서 별도의 밴드로 보아도 좋을 만큼 사운드 변화가 크게 일어난다.
먼저 발견 된 인물은 베이스와 세컨드 보컬을 맡은 22살 밖에 안된 글렌 휴즈였다. 그는 3인조 록밴드 트래피즈의 리더였고 작사 작곡 베이스 실력 뿐만 아니라 22살 밖에 안된 새파란 젊은애가 넘사벽급 선배들에게 인정을 받을만큼의 실력을 지닌 것이었다. 특히 리치 블랙모어는 글렌 휴즈의 펑키한 리듬감을 높게 평가했다. 로저 글로버가 안정적인 리듬을 탄다면, 글렌 휴즈는 공격적인 리듬이라는 것. 게다가 보컬 실력도 뛰어났으며 데이비드 커버데일을 발견하기 전에는 그냥 글렌에게 리드 보컬까지 맡길 계획도 있었다고 한다. (트래피즈 시절에는 베이스 와 보컬 외에도 피아노, 트롬본을 연주하기도 했다.) 거기에 더해 당시의 커버데일이 못내는 고음을 대신 불렀다. 사실 충분히 혼자 커버데일 못지않게 록 보컬을 할 능력이 있어서 이후 블랙 사바스 등에서 리드 보컬을 맡기도 한다. 그의 보컬은 무엇보다 커버데일보다 음역대가 높고 소울풀하다. 완벽한 두성 발성으로 4옥타브대의 음역까지 쉽게 소화했으며, 현재에도 애드리브로 3옥타브 시 정도는 그냥 찍어주는 고음 마스터. 하드 록 뿐만 아니라 소울도 맛깔나게 소화한다. 다만 커버데일에 비해 중저음이 많이 부족하고 중저음에서 음정이 늘 #이 된다는 단점이 있다. 서로가 서로의 단점을 보완해줬던 셈.
자신을 베이시스트보다는 보컬리스트로 인식하고 있던 글렌 휴즈는 처음 로저 글로버의 후임이라는 제의가 달갑지가 않았다. 하지만 존 로드와 리치 블랙모어는 베이스 연주가 아닌 보컬도 겸할수 있으며, 얼마전 해산한 밴드 '프리'의 보컬리스트인 폴 로저스가 프론트맨으로 가입할것이며 즉 트윈 보컬 체제로 갈것이라고 그를 설득 시킨다. 폴 로저스와 보컬 파트를 양분한다는 말에 감동한 글렌은 가입을 수락하였다. 하지만 폴 로저스는 이미 새로운 밴드 '배드 컴퍼니'를 결성해서 이 계획은 무산되고, 대신 멜로디 메이커 지에 광고를 내서 오디션을 실시한다.
3기의 리드 보컬을 맡게된 무명의 데이비드 커버데일의 목소리는 중저음을 바탕으로 헤비록적인 면과 블루지한 면이 동시에 있는 목소리였다. 그는 무명 밴드 생활을 하며 낮에는 양품점 직원 일을 하다가 오디션에서 뽑혔는데, 옷이나 모습이 너무 촌스러워서 딥 퍼플 멤버들이 꾸며주느라 고생했다고 한다. 다른 멤버들이 처음엔 약간 걱정도 했지만 처음 시작하는 "Burn" 앨범에서 충분히 만족할만한 실력을 발휘해 안도했다고 한다.
특히 글렌 휴즈는 폴로저스의 대타로 그것도 완전 무명의 보컬리스트였던 데이비드 커버데일의 실력을 매우 높게 평가해서 현재까지도 그와 트윈 보컬을 했다는것을 매우 영광스럽게 생각한다고 얘기한다.
데이비드와 글렌은 선배들의 지도하에 일취월장 실력이 늘어갔고, 특히 리치 블랙모어에게서 많은 것을 배워나간다. 74년 2월에 발매된 앨범 "Burn"은 2기 데이비드와 글렌의 트윈 보컬을 내세운 새로운 사운드로, 과거 딥 퍼플의 명성에 버금가는 음악적으로나 상업적으로나 크게 성공한 명반으로 인정 받는다.
앨범 발매 직후 딥 퍼플은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열린 대규모 락페스티벌인 California Jam 1974 의 무대에 선다. 에머슨 레이크 앤 파머와 공동 헤드라이너로 참가 한 이 공연은 총 25만명의 관객이 관람하였으며, 이 두 밴드 외에 이글스, 블랙 사바스, 어스 윈드 앤 파이어등 영국, 미국의 슈퍼밴드들이 대거 참여하였다. 이 공연에서 제 3기 딥 퍼플의 조합 또한 2기에 못지 않다는 것을 충분히 보여주었다.
3기의 딥 퍼플, 왼쪽 위 존 로드 (키보드), 왼쪽 아래 데이비드 커버데일 (보컬), 중앙 리치 블랙모어 (기타), 오른쪽 위 글렌 휴즈 (베이스, 보컬), 오른쪽 아래 이안 페이스 (드럼)
보다 젊어지고 잘 생겨진 이 3기 딥 퍼플은 두번째 앨범이자 문제작인 "Stormbringer"를 내놓는데... 언제나 그렇듯이 리치 블랙모어가 많은 곡에 작곡가로 참여하고 있음에도, 글렌 휴즈의 소울풀함과 펑키(funky)한 사운드가 앨범 전반에 흐르고 있는 묘한 형태의 앨범이 만들어졌다. 글렌의 베이스 기타 사운드 또한 전작 보다 훨씬 그루브 감이 돋보였고, 세컨드 보컬로만 여겨졌던 전작 앨범에 비해, 데이비드 커버데일과 비교해도 누가 리드보컬인지 구분이 안갈 정도로 거의 절반에 가까운 보컬 파트를 가져간다.
"Stormbringer"는 스트레이트한 딥 퍼플 2기를 선호하는 팬들에게는 굉장한 배신으로 느껴질만한 사운드였지만, 소울 과 펑키, 그리고 블루스가 충만한 딥 퍼플의 또 다른 걸작으로 평가 받는다.
여담이지만 글렌 휴즈가 직접 밝힌 바에 따르면 그는 1970년대 중반 데이비드 보위와 1년 동안 같이 산적이 있었는데, 이 때 두 사람은 음악, 패션, 약 등 공통 관심사가 많아 서로 굉장히 친해졌다고 한다. 데이비드 보위는 이 당시 자신이 작업하던 <Young Americans> 앨범에서 글렌 휴즈가 노래를 해주길 바랬었지만, 글렌 휴즈가 딥 퍼플에 집중을 해주길 바랬던 리치 블랙모어의 반대로 글렌 휴즈는 <Young Americans> 앨범에서 노래를 하지 못했다고 한다.
블루스와의 결합은 리치 자신도 지향하던 바였고 펑키한 사운드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그에 적합한 멤버들을 선택한것도 바로 그였다. 리치는 블루스는 좋아했지만, 글렌 휴즈가 좋아하는 모타운 소울 사운드에는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두번째 앨범의 결과는 존 로드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던 베이시스트 겸 보컬리스트 글렌 휴즈의 주도하에 "Hold On", "Love don't mean a thing" 등 펑키한 소울로 넘실대는 사운드였고.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리치 블랙모어는 음악적 주도권을 놓치 않으려 했으나, 새파란 후배들은 그 짧은 사이에 이미 너무나 큰 스타가 되어있었다.
전용기를 타고 다니던 좋았던 시절의 딥 퍼플
더군다나 언제나 자기 편인 줄 알았던 존 로드가 이 굴러온 돌들의 손을 들어주자 리치는 딥 퍼플에 점점 흥미를 잃는다. 투어가 시작되기 전 멤버들에게 탈퇴를 예고했는데, 너희들(커버데일, 휴즈)의 "Shoe Shine Music" 따위는 더 이상 연주하고 싶지 않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당시 리치는 딥 퍼플의 공연 전에 게스트 공연을 하던 밴드 ELF[18]의 멤버들과 자주 어울리면서 솔로 프로젝트를 제작중이었는데, 결국 이 프로젝트가 레인보우로 발전하면서 자연스럽게 딥 퍼플 탈퇴로 이어진다..
3기에 유명한 곡으로는 "Burn", "Mistreated", "Stormbringer", "Gypsy", "Love don't mean a thing" 그 외 데이비드 커버데일이 혼자서 부른 국내에서 너무나 사랑받는 발라드 "Soldier of Fortune", 그리고 글렌 휴즈 혼자서 부른 아름다운 기타 인트로의 소울 넘버 "Holy Man"도 있다.
딥 퍼플 3기에 대한 향수를 가진 팬덤도 그 규모가 굉장히 크다.[19] 실제로 2010년이 넘어서 존 로드와 데이비드 커버데일의 주도로 딥 퍼플 3기의 재결합이 추진 되었다. 만약 이 프로젝트가 그대로 추진 됐다면, 오리지널 멤버 존 로드와 리치 블랙모어 그리고 데이비드 커버데일과 글렌 휴즈가 참여한 3기 딥 퍼플, 그리고 황금의 2기의 이안 길런과 로저 글로버 그리고 오리지널 멤버 이안 페이스가 참여한 딥 퍼플, 이렇게 두 밴드가 정통성을 놓고 경쟁하는 상황이 생길수도 있었다.
하지만 결국 이안 페이스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존 로드의 의견에 따라 무산되었다. 그 당시에도 그렇고 지금도 마찬가지로 이안 페이스는 이안 길런, 로저 글로버 주도의 딥 퍼플에서 활동 하고 있기 때문에, 두 밴드를 동시에 하기엔 난감한 상황이었다.
한번의 공연이라도 보고 싶다는 팬덤의 요구에, 재고의 여지가 있었지만 2012년 존 로드의 타계로 영광의 3기 딥 퍼플도 역사속으로 사라진다.
존 로드의 타계 이후에도 데이비드 커버데일은 딥 퍼플 3기의 재결합을 추진한다. 링크
보컬에 자신, 그리고 베이스에 자신의 소울메이트인 글렌 휴즈, 기타에 리치 블랙모어, 그리고 대체 불가능한 키보드 자리에 생전 존 로드의 강력한 라이벌이자 딥 퍼플의 열렬한 팬이었던 에머슨 레이크 앤 파머의 키스 에머슨까지 영입하는 계획으로 리치 블랙모어에게 여러번 제안했었다고 한다. 키스 에머슨이 동의를 했을지는 의문이지만 어쨌든 그도 2016년 3월 타계 한다.
하지만 존 로드의 타계 이후에 리치는 이 프로젝트에 흥미를 잃어 결국은 무산 됐고 그 후에도 커버데일/페이지 프로젝트 처럼 커버데일/블랙모어 프로젝트를 추진하는 안 도 내놓았으나, 리치는 거절했다. 리치의 말에 의하면 리치가 프로젝트에 흥미를 잃은 이유는 본인은 신곡을 작업하고 싶어했으나, 커버데일은 딥 퍼플 3기 시절의 대표곡들을 리메이크 하길 원했던 의견의 차이 때문이었다고 한다.
결국 자신의 20대 청춘을 보낸 빛나는 딥 퍼플 시절의 추억을 속에 담아놓기만 있기는 힘들었던 데이비드 커버데일은 딥 퍼플 3,4기 시절의 대표곡들을 모아 자신의 밴드 화이트 스네이크의 이름으로 2015년 The Purple Album 을 내놓는다.
3.4. 석양의 딥 퍼플
사실 존 로드는 리치 블랙모어의 탈퇴 선언에 충격을 받아 밴드를 해산시키려 했었다. 존 로드와 이안 페이스는 밴드의 상징이 되어버린 리치 블랙모어 없이는 딥 퍼플을 존속 시킬수 없다고 생각했으나, 이제 갓 명성을 얻기 시작한 글렌 휴즈와 데이비드 커버데일은 강력하게 밴드의 존속을 주장하며 원년 멤버 두명을 설득한다. 사실 글렌 휴즈 또한 리치 없는 딥 퍼플을 상상할수 없어, 트래피즈를 재결성할 생각을 하나 데이비드의 강력한 주장에 넘어간다.이제 대스타가 된 데이비드 커버데일은 이 명성을 조금이라도 지속 시키고 싶었고, 리치의 후임자로 제프 벡을 추천한다. 하지만 제프 벡은 모든 밴드가 탐을 내는 기타리스트 였기 때문에, 단지 그의 희망사항으로 끝난다.
두번째 초이스로 아일랜드의 블루스 기타리스트인 로리 갤러거를, 그외에도 데이비드 보위의 기타리스트 였던 믹 론슨, 콜로세움과 험블파이 출신의 데이브 크렘슨 등이 물망에 올랐지만, 결국 제퍼와 제임스 갱, 그리고 빌리 콥햄의 솔로앨범 스펙트럼 에서 면도날 같은 재즈 퓨전 기타를 선보인 젊은 미국인 기타리스트 토미 볼린을 영입하여 제 4기를 맞이한다.
토미 볼린의 영입에는 두가지 다른 얘기가 전해지는데 데이비드 커버데일 말로는 이 역시 자신의 추천이었다고 하고, 타미 볼린의 생전 인터뷰에 의하면 자신은 바로 딥 퍼플의 전임 기타리스트인 리치 블랙모어의 추천이었다고 전해진다.
새로 가입한 토미 볼린은 글렌 휴즈, 데이비드 커버데일과 같은 51년 생 동갑내기로 이미 블루스와 소울이 충만한 사운드로 변신한 딥 퍼플에게 아주 적합한 기타리스트였다. 딥 퍼플 제 4기는 이 젊은 3인방의 주도하에 1975년 Come taste the band이라는 앨범을 발표 후 순회공연에 나선다.
4기의 유일한 스튜디오 앨범인 Come taste the band는 하드록에 가까운, 그러면서도 크로스오버나 퓨전재즈적인 느낌이 강화된 앨범으로, 어느 것 하나 빠지지 않는 명반이었다. 이 중 커버데일과 휴즈가 같이 작곡한 You Keep on Moving은 원래 Burn 앨범에 수록될 예정이었지만, 당시 리치 블랙모어의 반대로 이제서야 빛을 본다. 그리고 글렌 휴즈가 혼자서 부른 발라드 "This Time Around"도 있으며 그리고 새로 가입한 타미 볼린은 앨범 수록곡 9곡중에서 6곡의 작곡에 참여하고, 한곡에선 리드보컬을 하는등 맹활약을 하였다.
토미 볼린은 리치 블랙모어와 같은 강렬한 연주를 하는 기타리스트 아니지만, 재즈를 기본으로 한 장르적 스펙트럼이 더 넓은 기타리스트였다. 앨범 전체적으도로 토미와 나머지 밴드 멤버들의 조화로운 연주가 돋 보이는 수작이었다. 당시의 평가는 앨범 자체는 결코 나쁘지 않지만, 딥 퍼플 같지않다는 여론이 대부분이었다.
그만큼 딥 퍼플에 있어서 지금까지의 리치 블랙모어의 영향력이 얼마나 컸는지를 반증하는 결과였다. 또한 동갑내기 데이비드 커버데일과 글렌 휴즈, 그리고 새로 가입한 토미 볼린까지 이 3인방은 인간적인 갈등은 없었지만, 보컬 파트 배분으로 인해 리드 보컬 데이비드 커버데일의 불만은
또 하나의 문제는 새로 가입한 토미 볼린이 심각한 마약 중독자 였기 때문에, 라이브에서 실력이 들쑥날쑥했다는 것이다.
왼쪽부터 글렌 휴즈, 데이비드 커버데일, 토미 볼린
해가 지나 1976년 3월경 이미 30대 후반을 향해 가는 존 로드는 자신보다 10살 아래인 까마득한 후배 데이비드, 글렌, 토미 삼인방이 설쳐대는 밴드에 지쳐 버린다. 또한 당시 토미 볼린과 글렌 휴즈의 약물 중독증세는 점점 심해져만 갔고, 그 광기는 스테이지에서 감출수 없이 표출 된다. 당시의 라이브 앨범 특히 Last concert in Japan을 들어보면 특히 글렌 휴즈의 연주 그리고 보컬에서 약을 하지 않고는 나올수 없는 사운드들이 표출된다.
1976년 3월 15일 리버풀 엠파이어 극장에서의 공연후 데이비드 커버데일이 존 로드의 대기실 문을 열고 "밴드를 그만두겠소!" 라고 외쳤으나, 존 로드는 "밴드? 무슨 밴드? 그만 두고 싶어도 이제 그만 둘 밴드가 없다." 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존 로드는 밴드가 더 이상 나아갈 방향성을 상실했다고 자각했고 얼마전 이미 이안 페이스와 해체를 결정하고, 이 날 마지막 공연이 끝나기 전까지 다른 멤버들에게 해체 사실을 함구 하고 있었다 한다.
결국 1976년 7월 공식적으로 밴드의 해체가 기사화 된다. 존 로드는 2년 후 데이비드 커버데일이 결성한 밴드 화이트스네이크에 참여한다.
토미 볼린은 밴드 해산 직후 두번째 솔로앨범 프라이빗 아이즈를 발표하고, 바닐라 퍼지의 마크 스테인을 건반주자로 영입한 "타미 볼린 밴드"를 결성하여 순회공연을 하며 잘나가는듯 하였으나 몇달 안가 1976년 12월 마약 중독으로 사망한다.
글렌 휴즈는 이듬 해인 77년 트래피즈의 멤버들의 백업하에 솔로음반을 내고 1982년 활동재개시기까지 기나긴 약물중독과의 싸움에 들어간다. 여기서 전설의 밴드 딥 퍼플은 잠시 끝난다.
3.5. 해체 이후
해체이후 멤버들 모두 각자 활발한 활동을 한다.리치 블랙모어의 레인보우는 로니 제임스 디오, 그레이엄 보넷등 명 보컬리스트를 배출하며 음악적으로 큰 업적을 남긴다.데이비드 커버데일은 화이트스네이크를 결성하며 갈수록 일취월장하는 가창력으로 딥 퍼플도 못한 빌보드 핫 100 1위[20]에 성공했으며, 90년대 초 레드 제플린의 지미 페이지와의 프로젝트인 커버데일 & 페이지로 활동 하기도 했다.
이안 길런은 재즈락 퓨전 밴드인 이안 길런 밴드, 그리고 하드록으로 다시 회귀한 밴드 '길런' 으로 꾸준히 활동하였고 후에 블랙 사바스에 잠시 몸담기도 했었다.
존 로드와 이안 페이스는 76년 'PAL' 이라는 밴드를 결성 활동하였고 그 후 차례로 데이비드 커버데일의 화이트스네이크 에 가담한다. 존 로드는 이와 별도로 'Sarabande' 등 여러장의 솔로음반을 발표하며 클래식과 재즈 팝을 접목한 음악을 선보인다. 존 로드의 팬들은 존 로드의 음악 업적을 딥 퍼플 때보단 이 솔로 시기 때를 더 높이 평가한다. 솔로 활동 때는 여러 권위있는 클래식 연주자들과도 많은 교류도 있었기 때문에 클래식과 메탈계 양쪽에서 환대 받곤 했다.
글렌 휴즈는 약물 중독을 이겨내고 80년대 초반 재기에 성공하면서 기타리스트 팻쓰롤과 함께 Hughes;Thrall 프로젝트, 페노메나 프로젝트, 그리고 블랙 사바스에도 몸을 담았으며,[21] 현재까지 솔로로서 맹활약을 한다. 2009년 부터는 한참 후배 들인 제이슨 본햄 데렉 쉬레니언 조 보나마사 와 블랙 컨트리 커뮤니온이라는 밴드 활동도 병행하고 있고, 특히 2017년 시작된 그의 'Classic Deep Purple tour' 에서 74년, 75년 그의 딥퍼플 시기에 비해 전혀 줄어들지 않은 가창력과 퍼포먼스를 보여주고 있다. 'Voice of Rock' 이라는 별칭으로 불리며 딥퍼플 멤버 중 전성기 시절의 기량을 70세가 넘은 지금까지 그대로 재현해 내고 있는 거의 유일한 인물이라고 할수 있다.
로저 글로버는 딥퍼플 탈퇴 후 74년 본인이 작사, 작곡, 피아노, 기타, 베이스 등을 담당하고 또한 자신의 후임인 글렌휴즈 데이비드 커버데일, 그리고 로니 제임스 디오, 에디 잡슨, 존 로튼 등등 유명 뮤지션을 대거 참여시켜 The butterfly ball and the Grasshoppers' Feast 라는 락 오페라 스타일의 컨셉 앨범을 발표한다. 이듬해에는 로열 알버트 홀에서 앨범에 참여한 게스트 들에 존 로드와 이언 길런 까지 참가해서 1회의 공연을 하며 자신의 음악적 잠재력을 과시하고, 현재까지 6장의 솔로 앨범을 발표하고 있다. 프로듀서로서의 활약도 대단하여 스펜서 데이비스 그룹, 주다스 프리스트, 나자레스, 로리 갤러거, 데이비드 커버데일, 마이클 쉥커의 데뷔앨범을 프로듀싱 하였고, 79년 레인보우의 앨범에 프로듀서로 참여했다가 베이스 주자로 아예 눌러 앉아서, 그대로 딥퍼플 재결성 까지 참여한다.
딥 퍼플과 그 파생밴드(레인보우, 화이트스네이크, 길런)에는 야닉 거스, 그래험 보넷, 스티브 바이, 존 사이크스, 닐 머레이, 타미 알드리지, 돈 에어리, 코지 파웰, 로니 제임스 디오, 등등 헤비록계의 주요한 인물들은 거의 다 거쳐갔다. 더군다나 딥 퍼플 멤버들이 다른 밴드에 참여해준 것도 생각하면 80년대 자주 등장하던 용어인 소위 ""딥 퍼플 패밀리"" 를 중심으로만 70-80년대의 하드락 - 헤비메탈 역사의 대부분을 쓸 수 있다.
그래서 흔히 딥 퍼플의 역사는 헤비메탈의 역사라고 하며, 딥 퍼플을 알면 헤비메탈 세계의 절반 이상은 아는거나 다름없다 라고 얘기하기도 한다.
3.6. 재결성
1984년 해체 8년만에, 최 전성기 2기 멤버대로 결성해 엄청난 화제를 불러 일으키며 "'Perfect Strangers"' 등의 히트곡을 낸다.자발적인 재결합이 아닌 폴리돌 레코드에서 한 사람당 200만 달러를 받고 재결합에 응했다는 루머도 있다.
어쨌든 84년 첫 재결성 음반 "Perfect Strangers" 가 나오고 곧 월드 투어에 들어간다. 전성기 시절 만큼은 아니지만 아직도 쌩쌩한 이안 길런의 보컬이 돋보이는 동명 타이틀곡인 Perfect Stranger 는 80년대 슬로우 록의 대표곡이라 할수 있을 정도로 중후한 명곡이다.
문제는 이 앨범의 대부분 수록곡이 미드템포의 곡들이고, 딥퍼플 음악의 핵심인 존로드의 공격적인 해몬드 오르간도 한두곡을 제외하곤 뒷배경으로만 존재한다는 것이었다.
이후 87년 "'House of Blue light"' 을 내고, 활동을 계속 이어나간다. 이때부터 사운드의 정체성에도 문제가 생겼는데, 재결성 첫 앨범에서 그나마 딥 퍼플 2기 사운드를 약간이나마 회상 할 수 있었지만, 두번재 앨범 이후부터는 노골적으로 리치 블랙모어의 레인보우를 연상케 하는 사운드가 더 짙어졌다. 그것도 디오나 보넷 재적시가 아닌 맥빠진 후기 레인보우 사운드에 가까워 져가고 있었다. 심하게 얘기하면 레인보우 사운드에 이언 길런의 보컬이 입혀진 언발란스한 느낌이 든다는 것이었다.
다시 모인 황금의 제 2기 딥 퍼플 왼쪽부터 이안 길런, 존 로드, 이안 페이스, 로저 글로버, 리치 블랙모어
그리고 얼마 안가
결국 갈등은 다시 터지고 이번에도 원년멤버 리치 블랙모어의 한판승으로 이안 길런은 또 다시 탈퇴한다. Perfect Strangers 뮤직 비디오에서 이 둘의 앙금이 안 풀렸단 걸 알 수 있다. 다들 테이블에 모인 상태에서 리치 블랙모어가 제일 마지막에 도착해서 옛 동료들과 악수를 하는데 다른 멤버들은 다 같이 일어나서 악수를 했지만 이안 길런만 앉은채로 악수하는 손을 내밀었다 뺐다하는 것을 볼 수 있다.
팀내 숙적을 제거한 리치 블랙모어는 아예 리드 보컬 자리에 후기 레인보우 출신의 조 린 터너[22]가 가입한 적도 있다.[23] 레인보우 시절부터 자신의 말에 절대 복종이었던 심복을 리드보컬을 시켰지만, 로저 글로버까지 치면 레인보우 출신 세사람이 참여한 이 앨범은 이게 대체 레인보우냐, 딥 퍼플이냐는 비아냥만 들으며 음악적으로나 상업적으로나 크게 실패한다.
결국 조 린 터너는 앨범 실패의 책임을 지고 리치를 제외한 나머지 멤버들에 의해 쫒겨난다. 조 린 터너는 리허설이나 회의 때면 엄청 불편했다고 한다. 심지어 존 로드는 인사만 하고 자신과 아무 말을 안하려고 하는 등 늘 가시방석이었다고 한다.
이제는 이안 길런이 아니면 도저히 안되겠다는 존 로드와 이에 동조하는 이안 페이스와 로저 글로버의 입김에 하는 수 없이 리치 블랙모어도 한수 접고, 결국 1992년에 이안 길런이 다시 가입한다.
여담이지만 리치 블랙모어는 2004년 번 매거진과의 인터뷰에서 조 린 터너는 매우 강한 보컬이었지만, 딥 퍼플에서 그 목소리를 잃었고, 자신은 모든 사람들이 그 변화를 인식했다고 생각했지만, 조 린 터너를 해고할 생각은 없었다는 말을 하였다. 그리고 이안 길런의 재영입에 대해서는 "모두가 이안 길런이 돌아오길 바랬지만, 그것은 음악이 아니라 돈 때문이었다. 에이전트와 프로모터는 조 린 터너가 아니라 이안 길런이 딥 퍼플과 함께하길 바랬다." 라는 말도 덧붙였다. 아울러 리치 블랙모어는 1984년의 딥 퍼플의 재결합에 대해 "돈 때문에 다시 모인 것이었다." 라는 회의적인 말을 여러 차례 한 적이 있다. 리치의 말로 미루어 볼때 앞의 각주에도 언급된 멤버 개인 당 폴리돌 레코드에서 200만 달러씩을 받고 재결합에 응했다는 루머가 거의 사실로 보일 수도 있지만, 반면 다른 멤버들은 돈 때문에 모인 것은 아니었다고 말하기도 한다. 이안 페이스는 그저 돈 때문에 모이는 것이 아닌, 여전히 우리가 같이 연주할 수 있고 그것이 즐거운지 아닌지를 알아내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여겼다고 인터뷰 한 바 있다.
아무튼 다시 한번 뭉친 황금의 2기 라인업으로 앨범 "'The Battle Rages On... '"을 발표하지만, 이번엔 반대로 리치 블랙모어가 다시 나갔다. 리치의 딥 퍼플에서의 마지막 공연은 1993년 11월 17일 핀란드 헬싱키 공연이다.
나머지 멤버들은 조 새트리아니를 급하게 영입하여 순회공연을 시작한다. 딥 퍼플 멤버들과 새트리아니는 이심전심으로 정식 멤버로 들어갈 생각이었으나 매니지먼트 관계로 이루어지진 않았다.
리치는 인터뷰에서 이안을 다시 불러올 때 데모 테잎을 보내서 보컬 부분만 녹음해서 다시 받아와 듣는데, 과거 딥 퍼플 때와 달리 목소리의 변화가 너무 심했고, 예전 같지 않았기 때문에 '이건 망했다... 같이 못한다...'라는 생각을 했었다고 한다. 설상가상 리치는 이안과 같이 무대에 선다면 예전처럼 무대 프론트에 나서지도 않을꺼고 BMG마냥 무대 구석에나 있을 것이라고 했는데, 에이전시 쪽에선 이안 길런과 같이 하기만한다면 문제없다고 선포했다고 한다. 최강의 패라고 생각했던 리치였지만 자신의 요구를 다 들어줄지몰랐던 에이전시 때문에 일단 계속 일을 하기로 했다고 한다. 하지만 공연내내 자신의 곡과 맞지 않는 이안의 목소리 때문에 내내 짜증이 났다고 한다.
이들의 갈등은 스파게티 사건으로 이어지면서 리치가 딥 퍼플을 다시 탈퇴하는 길로 이어진다. 직원 중 한명이 점심 때 리치가 먹을 스파게티를 가져왔는데, 토마토 소스 스파게티가 아닌 치즈와 허브로 된 스파게티였는데 리치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이안이 케첩으로 도배를 해버렸다. 리치가 돌아오자 이안더러 "너가 이랬냐?"라고 물어보자 존 로드와 다른 멤버들은 분위기가 심상치 않단 것을 느껴서 자리를 피하려고 했고, 리치는 스파게티를 이안의 얼굴에 던저버렸다고 한다. 이들의 관계는 앨범명 처럼 싸움의 분노가 되어버렸다.
대신 퓨전 재즈락 밴드인 딕시 드렉스 출신의 스티브 모스[24]가 기타를 맡았다.
스티브 모스는 82년부터 86년까지 5년 연속 기타플레이어 지에서 베스트 오버- 올 기타로 뽑혔던 워낙에 대단한 기타리스트라 밴드의 결정은 옳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96년 발표된 앨범 "Purpendicular"의 "Sometimes I feel like Screaming"의 기타 솔로를 들어보면 알수있다. 물론 리치와 모스의 연주 성향은 확연한 차이를 보여서 호불호가 갈린다. 세월이 흘러서 이제는 모스가 리치보다 딥 퍼플의 기타리스트로서 연주한 기간이 더 길어져버렸다! 하지만 딥 퍼플의 명성을 보여주는 대표곡들은 죄다 리치가 있었을 때 나온 곡들이기 때문에 딥 퍼플 기타리스트=리치 블랙모어라는 꼬리표는 떨어질래야 떨어질 수가 없었다.
리치 블랙모어 다큐멘터리에서 스티브 모스는 리치블랙모어 재직 시절의 곡들에 대해 이야기 했었는데, 리치의 곡들은 왼손의 화려함보다 오른손 피킹과 스트로킹의 박자감과 그루브가 생각보다 타이밍을 잡기가 상당히 어려웠다고 했다. 그 때문에 Smoke On the Water, Highway Star 등 리치 블랙모어의 연주 스타일에 본인의 재해석을 더 한 버전으로 연주하기로 했다고 한다.
스티브 모스가 들어온 후론 딥 퍼플의 곡들이 사이키델릭쪽 혹은 프로그레시브적인 면이 강해졌다. 그동안 가지고 있었던 딥 퍼플의 헤비메탈 감성은 리치 블랙모어의 감성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그리고 멤버들의 고령화 및 음악적 성향 변화+서로 유연한 음악적 견해를 받아들이는 태도로 예전 같은 전통 헤비메탈은 아니지만 딥 퍼플만의 독창성을 새로 구축하는 데 성공한다.
참고로 이안 길런은 2009년에 했었던 인터뷰에서 리치가 탈퇴하기 직전 자신이 밴드를 계속 하는 댓가로 자신의 은행 계좌에 25만 달러를 입금하라는 요구를 했었다고 주장했지만, 리치의 변호사는 개소리라며 이안의 주장을 일축하였다.
왼쪽부터 이안 페이스, 스티브 모스, 이안 길런, 존 로드, 로저 글로버
1995년 첫 내한 공연을 가졌고 기타리스트 스티브 모스의 딥퍼플 첫 데뷔공연이었다. 한국 팬들에 대한 감사의 의미로 존 로드가 연주한 아리랑 떼창은 이 공연의 백미로 꼽힌다. 이 공연은 TV로도 방송된다. 그 후 2003년 앨범 "Bananas"의 월드 투어 등으로 팬(빠)들의 마음에 다시금 불을 댕기고 돌아갔다.
특히 1999년 인천 송도 트라이포트 록 페스티벌 공연이 전설로 기억된다. 이 송도 트라이포트 록 페스티벌(펜타포트가 아니다!)은 국내 최초의 록 페스티벌로, 3일 동안 Dream Theater, Deep Purple 등 초 거물급 아티스트들이 참여한, 대단히 충격적인 라인업으로 락 매니아들의 지대한 관심을 끌었다. 하지만 공연 3일 내내 폭우가 쏟아져 그야말로 폭삭 망했다. 비로 취소된 공연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관객과 기획사는 멘붕. 파산. 이 후유증으로 3년 넘게 이런 록 페스티벌이 국내에서 열리지 못했다. 그때 당시의 영상이 있는데, KBS 일요스페셜(현 KBS스페셜)에서 태풍 루사에 대한 영상 초중반에 엠넷 녹화영상을 제공받아 보여주었다.
이때 송도에서 열린 트라이포트 록 페스티벌에서는 폭우가 쏟아지는데도 불구하고 화면을 보면 당시 무대 지붕이 있음에도 강한 바람으로 인해 비가 옆 기동 사이 수평으로 들이쳐 드러머 이안 페이스가 심벌을 치면 맥콜CF 처럼 물이 튀고, 기타리스트였던 스티브 모스는 아예 오른쪽 팔과 기타 사이에 걸레를 끼고서 솔로 중간 중간 찰라마다 번개처럼 걸레로 기타의 물기를 닦아내는 신공을 보이기도... "비가 오니 감전사고가 우려된다"고 스태프들이 공연을 말리는데 불구하고 "청중들이 기다리고 있다"며 스태프들을 뿌리치고 저 유명한 'Smoke on the Water' 등의 명곡을 공연했다. 오오 딥 퍼플 오오... 실제 밤11시 넘어 공연이 끝나고 밴드가 내려간 후 열화와 같은 앵콜이 이어지자 행사 관계자가 무대에 올라와 "앵콜 없어요 이제 그만 귀가하세요..." 하는데 관객의 애끓는 염원을 알아챈 이안 길런이 무대로 도로 뛰어 올라와서 "What the Fu**!" 하며 관계자를 내쫓고 앵콜로 2곡을 더 연주하여 감동케 했다. 한국 공연이 뜻깊은 이유는 전성기 시절인 70~80년대는 군사정권과 금지곡 양산으로 외국 밴드가 한국에 오기도 힘들었을 뿐더러, 딥 퍼플의 곡들은 유독 한국에서 인기가 많았기 때문이다. 일본 공연은 많지만 옆나라 한국은 못온 이유도 크다. 이날 공연은 SBS에서 녹화 방송했는데 현재 인터넷에 있는 영상은 엠넷에서 스모크 온 더 워터만 편집한 것이 유튜브에 올라가있다.
2002년 존 로드가 자신의 해먼드 오르간을 밴드에 넘겨주고 솔로로 탈퇴한다. 1941년생인 존 로드는 이 때 벌써 60이 넘은 나이였기에 더 이상 정력적인 순회공연을 할 체력이 없었다. 대신 여러모로 존 로드의 후계자라고 할만한 레인보우, MSG 등 여러 밴드를 거친 돈 에어리가 들어왔다.[25] 돈 에어리는 리치 블랙모어와 좋은 인연이 있었는지 딥 퍼플 가입후에도 리치 블랙모어의 포크 밴드인 블랙모어스 나이트에 게스트로 나와서 공연도 하였다.
존 로드의 건강 문제 때문에 멤버가 교체된 것을 제외하면 그동안 멤버 교체가 없었다. 현재 딥 퍼플의 기타리스트인 스티브 모스가
인수인계의 날!
3.7.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헌액
2015년에서야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올랐다. 하드 록→헤비메탈 역사상 가장 중요한 밴드 중 하나인데도 동시대의 라이벌 격인 레드 제플린, 블랙 사바스와 달리 23년동안 물먹다 이제서야 헌액이돼서 제임스 헷필드, 슬래쉬 등 많은 후배 뮤지션들이 이를 비판했다.동시대의 레드 제플린은 68년 결성때부터 존 본햄이 사망하고 해체를 했던 80년까지 멤버교체 없이 지속되었고, 동시대의 또 다른 밴드인 퀸 역시 70년 결성때부터 프레디 머큐리가 사망한 91년까지 멤버교체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고 블랙 사바스[26] 또한 70년부터 78년까지는 오리지널 멤버로 버텨냈기 때문에 사운드의 변화도 크지 않았고, 오리지널 멤버 그대로 수상해도 아무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딥 퍼플은 68년부터 76년까지 10년도 안되는 기간 동안 세번의 멤버교체를 겪으면서 각 기수마다 다른 밴드로 인식 될만큼 사운드의 차이를 보였고, 밴드의 황금기라 불리는 2,3기 시절은 비교적 짧았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수상자는 존 로드, 리치 블랙모어, 이안 페이스, 로드 에반스, 이안 길런, 로저 글로버, 데이비드 커버데일 그리고 글렌 휴즈 이다. 즉 밴드 멤버 전원이 아닌 2기 와 3기 딥 퍼플의 멤버들과 1기의 보컬인 로드 에반스에게만 수상 한다고 한것이다. 타계한 타미 볼린, 1기 베이스 닉 심퍼, 재결성 이후 아주 잠시만 활동했던 조 린 터너 그리고 현재의 멤버인 돈 에어리와 스티브 모스는 제외되었다.
딥 퍼플의 팬들은 리치 블랙모어가 로큰롤 명예의 전당 행사에 공연하길 기대하였지만, 결국 불발 되고 말았는데, 딥 퍼플의 매니저인 브루스 페인이 밴드를 대신하여 리치의 행사 자체의 참가를 거부하였고, 그러므로 리치는 행사에 참가할 수 없다고 로큰롤 명예의 전당측에서 리치에게 통보를 했다고 한다. 이에 대해 논란이 생기고 로큰롤 명예의 전당의 회장이자 CEO인 조엘 페레스맨이 "브루스 페인에겐 헌액자를 불참 시킬 권한이 없으며, 리치 블랙모어와 딥 퍼플이 몇십년 만에 함께 공연을 하는 역사적인 무대를 볼 수도 있다." 라고 밝혔지만,
이안 길런은 인터뷰에서 리치에게 불참을 종용했다는 이야기는 제외한채 현 라인업의 밴드만이 기념공연을 할 것이고 과거의 멤버들이 시상식에서 공연을 하라고 하는 것은 지금의 멤버들에 대한 예의가 아니며, 데이비드 커버데일과 글렌 휴즈에게도 이 같은 이야기를 통보하였다고 말을 하였다. 즉 리치 블랙모어의 참석은 자유지만 공연은 예의상 현재의 멤버와 하겠다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딥 퍼플의 팬덤은 또 다시 헬게이트가 열렸으며 이안 길런에게도 비난의 화살이 쏟아졌다.
리치 블랙모어는 독일 매체와의 인터뷰 도중 이번 명예의 전당 불참으로 상처를 받았냐는 인터뷰어의 질문에 아무렇지도 않다는 반응을 보였다. 애당초 리치는 재결합 때 탈퇴한 후로 딥 퍼플이라는 밴드에 더 이상의 미련을 가지고 있지않았기 때문이다.
다음해인 2017년 헌액받은 예스는 생존한 모든 멤버가 참여해 헌액 자축 공연을 해서 더 비교당하게 되었다. 크리스 스콰이어 사후 밴드를 이끄는 스티브 하우와 02년에 하우, 스콰이어에 의해 쫓겨난 존 앤더슨이 20여년만에 만나 정겹게 공연하는 모습은 엄청난 리스펙을 받았다.
한 자리에 모인 2,3기 황금기 멤버들. 좌로부터 데이비드 커버데일, 글렌 휴즈, 로저 글로버, 이안 길런, 이안 페이스. 이렇게 모이는건 정말 드물다.
결국 2016년 로큰롤 명예의 전당 행사에서 딥 퍼플은 현재의 멤버로 2곡의 퍼포먼스를 선보였고, 음악계를 떠난 로드 에반스와 타계한 존 로드, 그리고 리치를 제외한 나머지 5명이 한자리에 모였다. 유감스럽게도 원년 멤버인 닉 심퍼는 이 행사에 초대 받지 못했다.
메탈리카의 드러머인 라스 울리히의 소개로 멤버들이 차례로 호명되었고,[27] 수상은 이 5명과 존 로드의 아내 비키 로드(이안 페이스의 아내와 자매)가 같이 했다.
이어진 수상소감에서 앙숙으로 알려졌던 리치 블랙모어와 초대받지 못한 원년멤버 닉 심퍼의 이름을 언급하는 이안 길런의 모습, 그리고 데이비드 커버데일과 글렌 휴즈의 리치 블랙모어에 대한 존경심의 표현,[28] 그리고 전 멤버가 이미 타계한 존 로드와 타미 볼린에 대한 멤버들의 그리움을 표현하는 장면등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3.8. 2010년대
2014년도에는 존 로드 추모 공연이 열려서 존 로드 솔로활동 때 같이 일했던 뮤지션들과 글렌 휴즈와 아이언 메이든의 브루스 디킨슨과 같이 공연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밴드 창립 및 황금기를 같이 보냈던 리치 블랙모어는 참석하지 않았지만 훗날 라이브에서 그를 추모하며 MK 2, MK 3 시절 곡들과 'Carry On...Jon'[29] 등을 연주한다.2017년 현 딥 퍼플 멤버들., 왼쪽부터 이안 페이스(드럼), 로저 글로버 (베이스), 이안 길런(보컬), 스티브 모스 (기타), 돈 에어리 (키보드)
2017년 5월 부터 'The Long Goodbye Tour' 라는 뭔가 의미 심장한 제목의 전세계 투어를 돌고 있는데, 이안 길런의 기력도 예전 같지 않고, 이안 페이스도 2016년 6월 경미한 뇌졸중을 겪었다. 투어의 일정이 발표될 당시 이안 페이스와 이안 길런은 이 투어가 딥 퍼플의 마지막 투어가 될지도 모른다는 발언을 하였다. 다행히 건강을 회복했는지 멤버들 모두 새 앨범 녹음 작업을 마쳤다고 한다.
3.9. 2020년대
21번째 앨범 제목은 'Whoosh!'로, 2020년 8월 7일에 발매되었다.[30] 또한 2020년 3월 20일 해당 앨범에서의 첫 번째 싱글컷 곡인 'Throw My Bones'를 발매했다.2021년 11월 26일 스튜디오 앨범 'Turning to crime'을 발표하였다.
2022년 딥 퍼플의 기타리스트 스티브 모스가 아내의 암 투병 사실을 밝혔으며, 같은 해 7월 23일 탈퇴를 발표하였다.
후임은 현재 스티브 모스가 없는동안 투어를 같이 동행하고 있는 사이먼 맥브라이드[31]가 정식멤버로 합류했다.
2024년 새로 가입한 기타리스트 사이먼 맥브라이드가 딥 퍼플 맴버로서 처음으로 선보인 앨범 '=1'가 2024년 7월 19일에 발표가 되었다.
4. 평가와 영향력
They made up the ‘unholy trinity’ of British hard rock and heavy metal during the genre's 1970s golden age.
그들은[32] 1970년대 록의 황금기에 영국 하드 록과 헤비 메탈의 불온한 삼위일체를 이룩했다.
BBC
그들은[32] 1970년대 록의 황금기에 영국 하드 록과 헤비 메탈의 불온한 삼위일체를 이룩했다.
BBC
In 1971, there were only three bands that mattered, Led Zeppelin, Black Sabbath, and Deep Purple.
1971년, 오직 세 밴드만이 중요했었다. 레드 제플린, 블랙 사바스, 딥 퍼플.
데프 레파드 보컬 조 엘리엇
1971년, 오직 세 밴드만이 중요했었다. 레드 제플린, 블랙 사바스, 딥 퍼플.
데프 레파드 보컬 조 엘리엇
When I was nine years old it was all about Deep Purple. My all time favourite [album] is still Made in Japan.
내가 아홉 살이었을 때, 난 딥 퍼플에 빠져 살았었다. 내 최애 음반은 아직도 메이드 인 재팬이다.
메탈리카의 드러머 라스 울리히
내가 아홉 살이었을 때, 난 딥 퍼플에 빠져 살았었다. 내 최애 음반은 아직도 메이드 인 재팬이다.
메탈리카의 드러머 라스 울리히
딥 퍼플의 음악이 레드 제플린 및 블랙 사바스의 음악과 결정적으로 차별화되는 요소는 치밀한 계산 하에 이루어지는 합주 및 연주다. 밴드의 중핵이었던 리치 블랙모어와 존 로드는 모두 정규 음악 교육을 거친 사람들이었고, 악보를 읽지 못하고 대충 감으로 작곡을 하던 당시 영국 록 씬의 아티스트들과는 달리[33] 악보를 제대로 읽을 줄 알았던 건 물론이요 화성학에 기반한 체계적인 작곡 역시도 가능했다. 레드 제플린이 날것 그대로의 사운드를 들려주었고 블랙 사바스가 헤비 메탈 특유의 음울한 톤을 도입했다면, 딥 퍼플은 체계적으로 움직이는 밴드라는 개념을 제시한 것이다. 또한 보컬 이안 길런의 경우, 로버트 플랜트나 로저 달트리, 프레디 머큐리같은 당대의 하드 록 보컬들이 블루스 기반의 창법을 사용하던 것에서 탈피해 클래식과 성악 기반의 발성을 본격적으로 도입했다.[34] 비브라토를 강하게 건 활화산 같은 초고음 샤우팅은 아무도 흉내낼 수 없었던 그의 전매특허.이러한 딥 퍼플의 음악적 특성은 리치 블랙모어가 딥 퍼플 탈퇴 후 결성한 레인보우, 이언 길런의 영향력을 강하게 받은 보컬 브루스 디킨슨이 몸담았던 아이언 메이든, 리치 블랙모어가 LP를 빨리 돌린줄 알았다는 일화로 유명한 잉베이 말름스틴 등으로 계승되고, 결과적으로 파워 메탈 및 프로그레시브 메탈, 네오 클래시컬 메탈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이 장르들에서 딥 퍼플의 영향력은 동시대의 수많은 레전드급 록 밴드들을 능가하는 수준이며, 드림 시어터 같은 경우 아직도 라이브에서 딥 퍼플의 곡을 심심찮게 커버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렇듯 딥 퍼플은 메탈의 영역으로 깊숙히 들어가면 마니아들에게 레드 제플린, 블랙 사바스 이상의 찬사를 받음에도 불구하고, 평론가들의 평은 그렇게 높지 않은 밴드다. 실제로 어클레임드 뮤직에 따르면 딥 퍼플의 전체 아티스트 순위는 152위로, 상당히 고순위이긴 하지만 전체 아티스트 7위인 레드 제플린과 전체 아티스트 90위인 블랙 사바스에 비해 확연하게 떨어진다. 또한 인기와 인지도에 비해 다소 평가가 낮은 아티스트들인 퀸[35], AC/DC[36]보다도 순위가 확연하게 낮다.[37]
딥 퍼플의 평가가 낮아지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이들이 영향력을 행사한 음악의 계보가 ‘대중음악(Popular Music)’으로서의 생명력을 완전히 잃어버린 장르들이라는 점 때문이다.
레드 제플린과 블랙 사바스는 딥 퍼플과 비교하면 엘리트적인 연주를 필요로 하지 않았고, 정서의 측면에서도 60년대 하드 록을 그대로 계승하고 있어 대중들에게 접근하기 용이했다. 여기에 두 밴드의 넓은 음악적 스펙트럼이 더해지면서,[38] 하드 록과 헤비 메탈은 엄청난 전성기를 맞게 되었다.
1991년 너바나의 Nevermind가 등장한 이후 하드 록과 메탈 음악의 인기가 그 전보다 훨씬 저조해지긴 했지만, 그럼에도 레이지 어게인스트 더 머신, 판테라, 사운드가든과 같은 밴드들은 기존과 다른 형식의 메탈을 선보임으로써 대중음악으로서의 생명력을 지속시켰다. 레드 제플린과 블랙 사바스는 이 밴드들에 사운드와 형식의 측면에서 거대한 영향력을 행사했고, 이는 오늘날까지도 지속되고 있다.
그러나 딥 퍼플은 프로그레시브 메탈이라는 협소한 영역에만 깊은 영향력을 행사했고, 이 장르들은 전혀 대중적이지 않은 장르들이며 차트에 발을 들이기조차 쉽지 않은 장르들이다. 대중음악과 록의 시대정신을 매우 강조해온 롤링 스톤[39]은 이러한 이유로 그들은 예나 지금이나 푸대접해오고 있다. 대표적인 음악 평론 잡지인 롤링 스톤이 이렇게 평가하고, 다른 수많은 평론가들도 후대에 미친 영향력으로 위상을 평가하다보니 자연스럽게 딥 퍼플의 위상은 다소 낮아지게 되었다. 딥 퍼플은 심지어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도 2016년이 되어서야 헌액되었다.[40]
종합해보면 메탈 장르에서의 영향력은 레드 제플린과 블랙 사바스에 전혀 뒤지지 않는 헤비 메탈의 3대 선구자 중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지만, 영향을 끼친 장르가 현대 음악 시장에서는 명맥을 잃는 바람에 평가가 낮아져버린 아티스트라고 할 수 있다.
4.1. 레드 제플린과의 라이벌리?
한국에서는 같은 하드 록 밴드인 레드 제플린이 딥 퍼플과 동시대에 활동했기에, 딥 퍼플이 레드 제플린과 현역 시절 라이벌이었다고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사실 이러한 시각은 두 밴드가 현역이던 1970년대부터 이어졌는데, 당시부터 팬이었던 사람들이 현재까지 인터넷 커뮤니티 등지에서 육두문자까지 사용하면서 누가 더 나은지에 대한 토론을 하는 일도 많다.다만 상술했듯이 딥 퍼플과 레드 제플린이 라이벌이었고, 현재까지 라이벌이라는 사실은 한국에서만 알려진 명백히 잘못된 사실이다.
먼저 헤비 록 속에서도 파워 메탈 및 프로그레시브 메탈, 네오 클래시컬 메탈 부문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딥 퍼플과는 달리, 레드 제플린의 경우에는 헤비 록 부문만이 아닌 대중음악 전체에도 영향력을 짙게 행사했다. 대표적으로 위에서 언급된 커트 코베인 류의 얼터너티브 록 및 그런지 아티스트들뿐만 아니라 R&B 및 펑크(Funk)에서 절대적인 입지를 가지고 있는 프린스, 팝 아티스트인 마돈나와 레이디 가가, 힙합 아티스트인 에미넴, 심지어 한국에서 발라드 음악을 주로 추구하는 이적조차[41] 레드 제플린의 영향력을 언급하였다. 즉 전혀 연관이 없을 것 같은 아티스트들 또한 레드 제플린의 영향력을 언급하면서 그들에 대한 존경을 표시한 것이다.
연주 부문에서도 두 밴드의 평가는 차이가 있다. 딥 퍼플같은 경우에는 실수가 없는 칼같이 완벽한 라이브를 지향했다면, 레드 제플린은 약이나 술을 거하게 빨고 무대에 서는 등 자유분방한 라이브를 선보였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얼터너티브 록시대를 거치며 록 음악의 연주 기법이 칼같은 정확함과 완벽주의적 라이브보다는[42] 보다 원초적이고 블루지한 연주를 선호하게 되면서 록 기타리스트들의 원류이자 다양한 프로그레시브적 시도를 했던 지미 페이지의 레드 제플린은 리치 블랙모어의 딥 퍼플을 완전히 압도하고 신세대부터 올드 플레이어에 이르기까지 전방위를 아우르는 명장으로 군림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레드 제플린의 자유분방한 라이브는 딥 퍼플의 칼같은 정확함을 자랑하는 라이브보다 평가가 더 높아지게 되었다.
레드 제플린의 경우 이렇게 영향을 안 미친 곳을 찾기가 어려운 수준이기에, 전체 아티스트로 범위를 넓혀도 7위라는 고순위를 차지한 것이며, 이러한 이유로 딥 퍼플과 라이벌이라는 것은 잘못된 사실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영미권에서는 현재까지도 두 밴드를 라이벌로 보지 않는다. 구글에 검색을 해 봐도 두 밴드의 리프나 보컬적인 난이도를 비교하는 글들은 많아도, 두 밴드의 위상을 비교하면서 라이벌이라고 하는 글은 존재하지 않는다.
반면 두 밴드의 사이는 현역 시절부터 지금까지 매우 좋다. 지미 페이지와 리치 블랙모어는 같은 동네에서 자란 죽마고우이며, 서로에 대한 극찬도 많이 남겼다. 또한 블랙모어는 레드 제플린의 드러머인 존 본햄과도 절친이기도 하다.[43]
다만 두 밴드의 영향력 차이를 배제하고 음악만 놓고 보자면 두 밴드의 음악성은 서로 우열을 가리기 힘든 것도 사실이다. 서로 스타일 차이가 확연한 것도 있고, 레드 제플린이 수많은 장르를 시도한 것 못지 않게 딥 퍼플도 상당한 장르적 실험을 한 바 있으며 앨범 자체의 완성도도 레드 제플린에 뒤지지 않는다. 이 두 밴드 중 어느 밴드를 선호하는 것은 순전히 취향 문제라고 봐도 될 정도로, 록의 역사의 맥락에 따라 밴드들을 접한 것이 아니라 두 밴드가 전성기가 지난 이후 두 밴드의 음악이 일괄적으로 보급된 것에 가까웠던 1980년대 당시 국내의 환경에서 리스너들은 두 밴드를 음악 자체만 놓고 평가할 수밖에 없었고 그렇기에 두 밴드 사이의 라이벌리가 타국에 비해 심하게 대립각을 세울 수밖에 없었다. 일종의 갈라파고스 현상이라고 볼 수 있을 듯.
5. 여담
- 레드 제플린만큼은 아니지만 딥 퍼플 역시 여러 차례 표절 의혹에 휩싸인 적이 있는 밴드이다. 여러 곡이 논란이 있었지만 그 중 공식적으로 밴드 멤버가 표절임을 인정한 곡은 두 곡으로, 각각 Child in Time과 Black Night이다. 'Child in Time'은 사이키델릭 록 밴드 잇츠 어 뷰티풀 데이의 'Bombay Calling'을 베꼈으며[44], 'Black Night'는 리키 넬슨의 'Summertime'을 베껴왔다.[45] 이 외에도 표절이 의심되는 곡들이 여럿 있는데, 대표적으로 Smoke on the Water의 유명한 메인 리프는 아스트루드 지우베르투의 'Maria Quite'의 일부를 베꼈다는 의심을 받았으며 Burn 또한 조지 거쉰의 'Fascinating Rhythm'과의 유사성이 지적되었다. 또한 러시아 밴드 Чёрный кофе라는 그룹의 노래의 편곡을 빌린 음악을 제작한 적도 있었는데 이는 1989년 모스크바에 방문하였을때 말름스틴과 터너가 루즈니키 스타디움에서 Чёрный кофе의 리더인 드미트리 바르샤프스키를 만나 вольному - воля 앨범을 듣고 "훌륭한 사운드 솔루션이네요, 제가 뭐좀 사용해도 될까요?" 라고 말하며 바르샤프스키의 허락을 받았다. 바르샤프스키는 기뻐하며 카세트를 건냈다고 하였다. 1990년 Slave of masters 앨범의 King of dreams 에서 Светлый образ의 편곡을 적용하였다. 또한 바르샤프스키도 말름스틴의 Rising force와 Hold on 과 매우 비슷한 Ветер 와 Где-то слезах 을 작곡하였다. 이들 말고도 여러 기성곡들의 표절 의심을 받는 곡들이 있으며, 바흐와 헨델, 베토벤 등의 클래식 음악의 곡조 일부를 인용한 곡은 수도 없이 많다. 그럴 만도 한 것이, 리더이자 최연장자인 존 로드와 중심인 리치 블랙모어는 클래식으로 음악을 시작한 사람이다. 오래 되어 저작권이 소멸된 거니까 갖다 써도 문제가 없고.
- 당시 영국 록 밴드답지 않게 바른 생활 사나이들이었다.
영향력에서 압승한 레드 제플린이 이쪽 면에선 완패다이는 자의 반 타의 반의 결과였는데, 우선 리치 블랙모어가 사생활의 통제를 강하게 했었다. 리치는 완벽주의의 성향이 강해서 완벽한 무대를 보이는 것이 딥 퍼플의 의무라고 믿었고, 그렇기 때문에 무대에서의 집중력을 흐리는 술이나 마약류 등을 강력히 규제했던 것.[46] 그리고 애초에 딥 퍼플의 멤버들은 금욕적인 성향이 있었다. 딥 퍼플은 다른 동세대 밴드들과는 달리 문란한 사생활에 대한 가십거리가 전무하며, 여자 관련 문제도 큰 잡음이 없어서 이안 길런은 1984년 결혼한 후 현재까지 결혼 생활을 큰 문제없이 지속하고 있다.
- 대한민국에서도 인기 있는 록 밴드였지만, 국내에 라이센스 수입된 몇몇 딥 퍼플 앨범들도 당시 군사정권의 검열을 피할 수 없었다. Shades of Deep Purple(초반 한정), Deep Purple, Machine Head, Fireball, Who Do We Think We Are, Burn 등의 앨범은 금지곡 없이 쭉 라이센스 발매되었지만, 1집 Shades of Deep Purple의 Hey Joe[47], 4집 Deep Purple In Rock의 Child In Time, Stormbringer의 Stormbringer[48]이 검열에 의해 금지곡으로 지정되었다. 물론 이후에 민주정권이 들어서면서 다시 발매된 앨범에는 제대로 수록되었다.
6. 멤버
탈퇴와 복귀가 매우 빈번한 편이다. 까칠한 성격의 리치 블랙모어는 멤버들과 갈등이 생기면 냅다 갈아치웠고, 멤버들도 떠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아예 본인이 딥 퍼플을 때려치우고 레인보우를 만들어서 구 딥 퍼플 멤버를 데려오기도 했고, 워낙 많은 쟁쟁한 멤버가 밴드를 거쳐 갔기에 딥 퍼플 멤버 변천사와 그와 연결된 밴드를 알면 당시 하드록 신의 변화를 거의 알게 될 정도다.[49] 재미난 것은 당시 국내에서 딥 퍼플의 가장 센 대항마로 꼽던 레드 제플린과는 같은 영국 밴드임에도 접점이 없다. 레드 제플린이 멤버 교체가 없었고, 해체와 재결성을 반복해온 딥 퍼플과 달리 존 본햄의 사망과 함께 밴드를 해산해 버려 활동 시기가 짧은 탓.멤버 연혁을 정리한 그래프. 출처는 영어 위키백과.
- 이안 페이스 (Ian Paice 드럼, 퍼커션) (1968~1976, 1984~)
- 이안 길런 (Ian Gillan 보컬, 하모니카, 퍼커션) (1969~1973, 1984~1989, 1992~)
- 로저 글로버 (Roger Glover 베이스) (1969~1973, 1984~)
- 돈 에어리 (Don Airey 오르간, 키보드) (2002~)
- 사이먼 맥브라이드 (Simon McBride 기타) (2022~)
6.1. 舊 멤버
- 존 로드[50] (Jon Lord 오르간, 키보드, 백보컬) (1968 ~1976, 1984~2002)
- 리치 블랙모어 (Ritchie Blackmore 기타) (1968~1975, 1984~1993)
- 로드 에반스 (Rod Evans 보컬) (1968~1969)
- 닉 심퍼 (Nick Simper 베이스, 백보컬) (1968~1969)
- 데이비드 커버데일 (David Coverdale 보컬) (1973~1976)
- 글렌 휴즈 (Glenn Hughes 베이스, 보컬) (1973~1976)
- 타미 볼린[51] (Tommy Bolin 기타, 보컬) (1975~1976)
- 조 린 터너 (Joe Lynn Turner 보컬) (1989~1992)
- 조 새트리아니 (Joe Satriani 기타) (1993~1994)
- 스티브 모스 (Steve Morse 기타) (1994~2022)
7. 음반 목록
- Shades of Deep Purple (1968)
- The Book of Taliesyn (1968)
- Deep Purple (1969)
- Deep Purple in Rock[52] (1970)
- Fireball (1971)
- Machine Head (1972)
- Who Do We Think We Are (1973)
- Burn (1974)
- Stormbringer (1974)
- Come Taste the Band (1975)
- Perfect Strangers (1984)
- The House of Blue Light (1987)
- Slaves and Masters (1990)
- The Battle Rages On... (1993)
- Purpendicular (1996)
- Abandon (1998)
- Bananas (2003)
- Rapture of the Deep (2005)
- Now What? (2013)
- Infinite (2017)
- Whoosh! (2020)
- Turning To Crime (2021)
- =1 (2024)
8. 둘러보기
Pioneers of Heavy Metal | ||
레드 제플린 | 블랙 사바스 | 딥 퍼플 |
[1] 밴드의 최전성기였던 제 2기 때의 딥 퍼플 멤버들.[2] 역대 딥 퍼플 라인업중 가장 오랜기간 유지된 라인업이다.[3] 1976년에 한 번 해체된 적이 있지만, 이후 1984년에 재결성되었다.[4] 그래도 1~4기동안 밴드를 지킨 이안 페이스나 존 로드같은 멤버들 덕분에, 아이언 버터플라이마냥 테세우스의 배가 되지는 않았다.[5] 이 덕분에 레코드사는 그들의 공백기에도 기수별로 편집음반을 신나게 찍어내서 4배의 상업적 이익을 챙길 수 있었다.[6] 이러한 성향은 나중에 리치 블랙모어의 밴드인 레인보우, 데이비드 커버데일의 화이트스네이크에서도 재현된다.[7] 밴드명에 컬러 이름이 들어가는것도 유행인가 싶겠지만, 레드 제플린의 레드는 'Red'가 아니라 'Led'이다. 금속 납의 영어인 'Lead'에서 유래.[8] 우리나라에서는 클로버스의 원곡을 리메이크한 Love Potion No.9로 유명하다.[9] 리치의 전임 기타리스트가 바로 지미 페이지다. 지미 페이지가 닐 크리스천 밴드에서 나오면서 자신의 후임으로 제프 벡을 추천했지만, 닐 크리스천은 리치를 선택했다.[10] 최연장자인 존 로드 보다도 한살이 더 많은 1940년생으로, 후에 Bobbie Clarke 이란 이름으로도 활동한 영국 록음악사의 명드러머[11] 이 곡은 훗날 2020년 앨범인 "Whoosh!"에서 다시 리메이크가 된다.[12] 사실은 고음이 탁월했기 때문에 지저스 역을 맡은 것이 아니라, 반대로 이언 길런이 초대 지저스 역을 하면서 고음을 내지른 결과 지저스 역은 고음으로 정의되어 버렸다.[13] 에피소드 식스 라는 밴드에서 이안 길런과 같이 활동하고 있었다.[14] 록 음악 최초로 오케스트라 도입을 시도한 건 1967년 발매된 무디 블루스의 Days of Future Passed로 London Festival Orchestra가 참여했지만, 녹음은 협연이 아니라 따로 했다.[15] 이 곡은 훗날 1998년 엘범 "Abandon"에서 "Bludsucker"이라는 제목으로 바꾸고 리메이크를 하였다[16] 아이러니하게도 훗날 이안 길런 개인밴드인 이안 길런 밴드가 1975년 발표를 하였던 1집 앨범 제목이 "Child In Time" 이었다.[17] 물론 이 앨범 대표곡도 딥 퍼플곡을 편곡으로 리메이크를 했던 Child In Time 이었다.[18] 해당 문서에도 언급했듯 엘프의 앨범은 로저 글로버와 이안 페이스가 프로듀서를 맡았었다.[19] 디오 시절의 블랙 사바스에 대한 향수 또한 오지 시절의 블랙 사바스에 못 지 않았듯이[20] 1987 앨범에 재녹음된 Here I go again 은 1987년 10월 10일 단 하루지만 빌보드 핫 100 차트의 1위에 올랐다.[21] 블랙 사바스 시절엔 베이스 겸 보컬이 아닌 단독 보컬로 참여했고, 그리고 글렌 휴즈는 블랙 사바스에서 이안 길런의 후임으로 들어간 것이다.[22] 후에 라이징 포스[23] 원래는 Eye of the Tiger 로 유명한 밴드인 서바이버의 보컬리스트 지미 제이미슨이 유력했다.[24] 자신의 밴드 딕시 드렉스에서 활동하며 유명해졌고, 86년~88년까지 3년간 캔자스에 있었다.[25] 존 로드가 탈퇴하기 1년전인 2001년 존 로드가 공연중 부상을 당해 돈 에어리가 임시로 합류한적이 있었고, 2002년 돈 에어리는 정식으로 합류하게 되었다.[26] 오지 오스본의 탈퇴 후 디오의 대 활약 또한 블랙 사바스의 위상에 크게 기여했다.[27] 라스 울리히가 드럼을 배운 계기가 어릴 적 아버지와 같이 딥 퍼플 공연을 본 직후이기 때문이다. 어릴적 자신의 우상들의 헌액장에서 이들을 맞이한다는 것은 라스 입장에서도 엄청난 영예다.[28] 데이비드 커버데일과 글렌 휴즈가 음악적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건 리치가 많이 가르쳐줬었기 때문이라고 인터뷰에서 많이 언급한 적이 있었다.[29] 블랙모어스 나이트의 2013년 앨범 'Dancer and the Moon' 의 마지막 트랙으로 존 로드를 기리는 연주곡이다.[30] 원래는 6월 12일에 발매될 예정이었지만, 코로나로 인하여 8월 7일로 연기되었다.[31] 사이먼은 현재 딥 퍼플의 키보디스트인 돈 에어리의 개인밴드에서 기타리스트로 활동 중이기도 하다.[32] 레드 제플린, 블랙 사바스, 딥 퍼플[33] 대표적으로 폴 매카트니, 지미 페이지는 1960~70년대 현역 당시 전부 악보를 볼 줄 몰랐다.[34] 실제로 그는 뮤지컬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에서 예수 역을 소화하기도 했다.[35] 전체 85위.[36] 전체 73위.[37] 물론 여기서 언급된 아티스트들의 ‘평가가 낮다’라는 것은 비틀즈나 롤링 스톤스, 라디오헤드, 레드 제플린 수준이 아니라는 것이지, 평가가 아예 낮다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상기된 아티스트들은 전부 100위권 내에 충분히 진입해 있다. 다만 딥 퍼플의 경우 ‘헤비 메탈의 선구자’ 중 하나로 꼽힘에도 불구하고 152위로 산정되었기에 순위가 높지 않은 건 맞긴 하다.[38] 딥 퍼플 또한 디스코그래피 전체를 놓고 볼 때 음악적 스펙트럼이 매우 넓었으나, 전성기가 불과 4년밖에 되지 않는다.[39] 록 정신(Rock Spirit)에 관한 담론 자체를 처음 생산한 매체가 롤링 스톤이다. 소위 ‘롤링 스톤 3인방’이라고 불리는 평론가들(로버트 크리스트가우, 데이브 마쉬, 존 랜도) 모두가 록 정신을 매우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들이다. 존 랜도는 브루스 스프링스틴의 매니저를 자처한 사람이고, 로버트 크리스트가우는 킹 크림슨의 데뷔 앨범에 혹평을 일삼지 않았다. 한국의 강헌과 임진모와 같은 평론가를 생각하면 쉬울 듯. 음악에 대한 이성적 사회학적 접근을 중시하는 영국의 사이먼 프리스나 한국의 신현준 같은 비평가는 그들을 비판하기도 했다.[40] 사실 이는 딥 퍼플의 위상이 다소 낮기 때문이 아니라, 상술했듯이 워낙 멤버가 자주 바뀌어서 누가 들어가고 누가 안 들어갈지를 정하는 등 헌액될 멤버들을 추리는데 시간이 걸려서라는 이유도 있다.[41] 대중적인 이미지는 발라드 아티스트이긴 하지만, 패닉 시절부터 긱스 시기의 이적은 록 음악을 추구했으며, 그중에서는 하드 록이나 사이키델릭 록, 프로그레시브 록 같은 국내에선 마이너한 여러 록 음악의 하위 장르들도 다루었다.[42] 거의 실수가 없는 라이브 실력을 자랑하는 뮤즈의 평가가 어째서 특정 리스너들에게 낮게 평가되는지 생각해보자.[43] 이와 관련된 일화로, 블랙모어와 보넘이 바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는데, 한 무명의 어린 기타리스트가 블랙모어를 알아보고 환희와 함께 사인 요청을 했다고 한다. 그러나 블랙모어는 보넘과의 술자리를 방해받기 싫었는지 이 소년 기타리스트를 향해 “넌 뭐야, 빨리 안 꺼져?!”라고 응수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 소년 기타리스트는 다름 아닌 에디 밴 헤일런이었다(…).[44] 이안 길런이 후일 인터뷰에서 공식적으로 인정했다. 곡 작업 당시에 라디오에서 틀어주던 곡을 그대로 베껴 썼다고. 잇츠 어 뷰티풀 데이 측은 딱히 반응하지는 않았으나, 이후 발표한 'Don and Dewey'라는 곡에서 딥 퍼플의 'Wiring that Neck'의 멜로디를 그대로 인용하며 나름의 복수를 했다. 역지사지[45] 리치 블랙모어가 후일 인터뷰에서 기타 리프를 그대로 가져왔음을 시인했다.[46] 담배는 술이나 마약과는 달리 환각 작용이 존재하지 않고 (부작용은 있지만) 오히려 집중력을 향상시키는 면이 있었기 때문인지 딱히 규제하지 않았다. 그래서 로니 제임스 디오나 이안 길런이 리치 블랙모어와 공연을 하는데 대놓고 리치 옆에서 담배를 피우는 모습도 꽤나 자주 보인다.[47] 1975년 초반에는 문제없이 수록됨. 이후 1978년에 다시 발매할때부터 금지곡으로 삭제[48] 이 앨범은 앨범명이 Stormbringer인데, 하필 타이틀 곡인 Stormbringer이 금지곡이 되는 바람에 해당 앨범 수록곡인 Soldier of Fortune으로 앨범명을 바뀌어야만 했다. 그래서인지 솔저 오브 포춘이 국내에 알려진 딥 퍼플 노래 중 정말 유명한 곡이 되어버렸다.[49] 심지어 당시 신인이던, Scorpions 출신의 걸출한 기타리스트 마이클 솅커마저 딥 퍼플에 들어오라는 얘기가 있었다고 주장한다.[50] 2012년 췌장암으로 향년 71세를 일기로 별세[51] 1976년 약물중독으로 별세[52] 그냥 'In Rock'으로도 부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