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15 23:36:01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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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제바스티안 바흐
Johann Sebastian Ba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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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3년 11월 독일의 공영TV인 ZDF가 독일 국민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를 바탕으로 ‘가장 위대한 독일인 1백인’을 발표한 명단이다.
TOP 10
1위2위3위4위5위
콘라트 아데나워 마르틴 루터 카를 마르크스 한스, 죠피 숄 남매 빌리 브란트
6위7위8위9위10위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요하네스 구텐베르크 오토 폰 비스마르크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11위~100위
11위12위13위14위15위
아돌프 콜핑 루트비히 판 베토벤 헬무트 콜 로베르트 보쉬 다니엘 퀴블뵈크
16위17위18위19위20위
콘라트 추제 요제프 켄테니히 알베르트 슈바이처 카를하인츠 뵘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21위22위23위24위25위
헬무트 슈미트 레진 힐데브란트 알리체 슈바르처 토마스 고트샤크 허버트 그로네메이어
26위27위28위29위30위
미하엘 슈마허 루트비히 에르하르트 빌헬름 콘라트 뢴트겐 귄터 야우흐 디터 볼렌
31위32위33위34위35위
얀 울리히 슈테피 그라프 사무엘 하네만 디트리히 본회퍼 보리스 베커
36위37위38위39위40위
프란츠 베켄바워 오스카 쉰들러 네나 한스 디트리히 겐셔 하인츠 뤼만
41위42위43위44위45위
하랄트 슈미트 프리드리히 대왕 임마누엘 칸트 패트릭 린드너 하르트무트 엥겔
46위47위48위49위50위
힐데가르트 폰 빙엔 하이노 리하르트 폰 바이츠제커 클라우스 폰 슈타우펜베르크 마를레네 디트리히
51위52위53위54위55위
로베르트 코흐 요슈카 피셔 카를 마이 로리오 알베르투스 마그누스
56위57위58위59위60위
루디 푈러 하인츠 에르하르트 로이 블랙 하인츠 하랄트 프렌첸 볼프강 아펠
61위62위63위64위65위
알렉산더 폰 훔볼트 피터 크라우스 베르너 폰 브라운 디르크 노비츠키 캄피노
66위67위68위69위70위
프란츠 요제프 슈트라우스 세바스티안 크나이프 프리드리히 실러 리하르트 바그너 카타리나 비트
71위72위73위74위75위
프리츠 발터 니콜 프리드리히 폰 보델슈윙흐 오토 릴리엔탈 마리온 돈호프
76위77위78위79위80위
토마스 만 헤르만 헤세 로미 슈나이더 스벤 하나발트 바이에른의 엘리자베트 여공작
81위82위83위84위85위
빌리 밀로위치 게르하르트 슈뢰더 요제프 보이스 프리드리히 니체 루디 두치크
86위87위88위89위90위
카를 레만 베아테 우제 트뤼머프라우 카를 프리드리히 가우스 헬무트 란
91위92위93위94위95위
알브레히트 뒤러 막스 슈멜링 카를 벤츠 프리드리히 2세 라인하르트 메이
96위97위98위99위100위
하인리히 하이네 게오르크 엘저 콘라드 두덴 제임스 라스트 우베 젤러
출처
같이 보기 : 위대한 인물 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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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fff>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
Johann Sebastian Bach
파일:20200512143546!Johann_Sebastian_Bach.jpg
성명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
Johann Sebastian Bach
출생 1685년 3월 31일
신성 로마 제국 작센
아이제나흐 공국 아이제나흐
독일 튀링겐주 아이제나흐
사망 1750년 7월 28일 (향년 65세)
신성 로마 제국 작센
선제후국 라이프치히
독일 작센주 라이프치히
경력 오르가니스트, 하프시코디스트, 교회음악가, 작곡가
사조 바로크 음악
소띠[1]
별자리 양자리
신장 180cm
종교 루터회
직인 파일:teaserbox_70705715.png
서명 파일:요한 제바스티안 바흐 서명.svg
성인 정보
교단 성공회[2], 미국복음주의루터교회
축일 7월 28일 (성공회)

1. 개요2. 위상3. 생애4. 후대의 재발견5. 가족 관계
5.1. 자녀들
5.1.1. 전처 마리아 바르바라 바흐5.1.2. 후처 안나 막달레나 바흐
6. 특징7. 주요 작품8. 평가9. 이름에 대해10. 기타11. 관련 문서12. 외부 링크

[clearfix]

1. 개요

신성 로마 제국 태생의 바로크 시대 작곡가이다. 대위법음악을 완성했으며,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루트비히 판 베토벤과 함께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음악가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 성공회미국복음주의루터교회에서는 그 업적으로 성인으로 공경받는다. 축일은 성공회 기준 7월 28일.

2. 위상

2019년 전 세계 작곡가들이 선정한 역사상 가장 위대한 작곡가 1위
BBC Music Magazine[3]

모차르트, 베토벤과 함께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음악가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 대한민국, 미국, 영국, 일본, 중국, 베트남, 필리핀, 독일, 이탈리아, 프랑스, 그리스 등을 포함한 전 세계에서는 '음악의 아버지'라는 별명으로 잘 알려져있다.

그가 등장한 이후 이름을 남긴 수많은 후배 음악가들은 바흐의 영향력에서 벗어날 수 없었고, 그 중에서도 특히나 굉장한 업적을 남긴 모차르트와 베토벤조차 예외가 될 수 없었다. 오히려 모차르트와 베토벤은 그의 대위법 및 작품에 대한 진지한 연구와 음악적인 존중으로 바흐가 남긴 유산을 적극적으로 사숙하였다. 당대에 남긴 업적과 후세에 끼친 영향력까지 압도적이기 때문에 보통 역사상 최고의 음악가를 꼽으면 바흐가 1순위로 꼽히는 것이 일반적이다.

사실상 대중음악이라는 것이 본격적으로 정립된 이후 그 어떤 대중음악가라도 그 사람의 스타일의 근본을 찾아 올라가다보면 결국 보이는 것은 바흐의 얼굴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다.

특히나 서양 음악에 막대한 영향력을 끼쳤으며 오죽하면 베토벤은 바흐를 가리켜 "그는 Bach(실개천)가 아니라 Meer(바다)라고 불려야 한다(Nicht Bach, sondern Meer sollte er heißen)."라는 표현을 남기기도 하였다. 루트비히 반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 요하네스 브람스(Johannes 'B'rahms)와 함께 독일 음악의 3B라고도 불린다.

3. 생애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생애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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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BC의 바흐 다큐멘터리

4. 후대의 재발견

지금은 역사상 가장 위대한 작곡가라고 칭송받는 바흐이지만 막상 죽은 직후에는 점점 사람들에게서 잊혀 갔고 그의 음악은 당대에 인정받지 못하며 사장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것은 비음악인들에 한정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바흐 사후 그의 아들들(특히 요한 크리스티안 바흐)과 제자들을 중심으로 바흐 음악을 출판하고 보급하려는 노력이 있었고 이 노력들은 바흐 사후에 그의 음악이 알려지고 전수되는데 나름의 역할을 했다. 그래서 바흐는 바로 다음 세대인 고전파의 작곡가들에게도 음악적으로 큰 영향을 미쳤는데, 예를 들어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의 음악에 나타나는 대위법과 합창법 등의 작곡기법들은 상당 부분 바흐(와 헨델)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모차르트는 일찍이 십대 시절부터 잘츠부르크에서 종교음악 작곡가로 활동하면서 요한 에른스트 에벌린, 미하엘 하이든, 요한 아돌프 하세, 그리고 자신의 아버지 레오폴트 모차르트의 대위법과 합창법의 많은 영향을 받았지만[4], 20대 중반에 빈으로 이주하고 반 슈비텐 남작을 통해 바흐와 헨델의 작품을 접한 이후 아버지 레오폴드에게 에벌린의 대위법 수준을 바흐, 헨델과 비교하며 비평하는 내용의 편지를 쓴 일화가 있다. 내용은 아래와 같다.
"아버지께서 아직 에벌린의 기악곡들을 받아 적어놓지 않으셨다면, 그냥 안 하시는게 좋다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지금 그 악보들을 보니 바흐와 헨델에 비교하면 너무나도 하찮은 수준이거든요. 그의 4성부 작곡법을 아무리 좋게 본다 해도, 건반 푸가들은 그저 길게 질질 끌기만 하는 곡들이에요." (1782년 4월 20일)
출처

이처럼 바흐가 사망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에도 당대의 뛰어난 음악가들은 이미 그의 음악의 위대함과 가치를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다. 모차르트와 베토벤의 후기 작품에서는 공통적으로 대위법적인 경향이 두드러지는데, 이는 두 사람이 바흐(와 헨델)의 음악을 열심히 연구한 성과를 자신의 작품에 적극 반영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흐의 음악이 잊혔다는 인식이 생긴 것은 18세기 동안 대중적으로 그의 음악이 그다지 많이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18세기 중반 이후 고전파 양식이 대세가 된 시기에 바로크 음악은 시대에 뒤떨어진 음악으로 치부되고 있었으며 대중들은 유행이 지난 낡은 바로크 음악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그래서 바흐뿐만 아니라 모든 바로크 작곡가들이 한동안 비슷하게 홀대를 받았으며, 헨델의 메시아를 비롯한 극소수의 바로크 음악만이 시대 조류에 휩쓸리지 않고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다.

또한 당시에는 녹음기술이 없었기 때문에 과거의 훌륭한 음악들이 계속 유행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베토벤이나 모차르트같은 전문 음악가들조차 본인이 직접 연주할 수 있는 곡을 제외하면 자신의 음악을 몇 번 듣지 못하는 시대였다. 오늘날처럼 몇십 년 혹은 몇백 년 전의 곡이 연주회 프로그램으로 다루어지는 현상은 19세기 낭만주의 시대에 와서야 시작된 것이며, 그 전에는, 특히 기악에서는 마을 악단 수준이 아닌 바에야 대중을 위한 기악 연주회 자체도 찾기 어려웠고, 기악 악단은 왕실 행사나 귀족들의 여흥을 위해 왕실이나 귀족이 직접 거느린 악단이 대부분으로 이런 악단은 보통 전속 작곡가(요제프 하이든이 대표적)가 있어 필요할 때 곡을 작곡해서 한두 번 연주하고, 좋은 평가를 받았다 하더라도 낭만주의 시대에 오기 전까지는 다시 연주되는 일이 적었다. 왕후와 귀족들은 다른 이에게 부탁해 전대의 명곡을 빌려오기보다 필요할 때 자기만의 음악을 주문했고 그것으로 그 시대의 작곡가도 생계를 유지했다. 그리고 유행이라는 것도 있다. 지금 뮤지션들은 60–80년대의 명곡을 연주하며 먹고 살기보다 자기만의 음악을 내놓는다. 21세기 시점에서 서양고전음악은 그 자체가 통째로 박제되어 100년 숙성된 위스키처럼 대접받고 있지만, 서양에서도 반 세기 전 팝을 지금 라디오에서 리메이크, 리바이벌로 듣는 일은 드물다.

그래서 한동안 바흐의 음악은 작곡가나 악보 수집가, 출판업자 등 주로 음악 종사자들에게만 알려져 있었다. 바흐가 다시 대중적으로 알려지게 된 계기는 1802년 독일의 음악사학자인 요한 포르켈(Johann Nikolaus Forkel)이 바흐에 대한 최초의 연구서인 『바흐의 생애와 예술, 그리고 작품(Über Johann Sebastian Bachs Leben, Kunst und Kunstwerke, 1802)』을 발표하면서부터이다. 이 책 덕분에 그의 사후 50여년 만에 전 유럽에 바흐 광풍이 몰아닥쳤으며 대중들의 바흐에 대한 재인식에 결정적인 계기를 제공하였다. 1827년 베토벤 사망 시 프란츠 그릴파르처가 작성한 추도문을 보면 베토벤 이전의 위대한 음악가로 헨델, 바흐, 하이든, 모차르트가 언급된다.[5] 당시 이미 바흐가 음악 사상 최고의 음악가 중 한 사람으로 인식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후 여기저기 흩어졌던 바흐의 악보가 다시 수집되고 앞다퉈 출판되었으며 바흐 사후 약 80년의 시간이 흐른 1829년, 열렬한 바흐 팬이자 바흐 음악의 복원자였던 펠릭스 멘델스존이 마태 수난곡을 복원하면서 다시 한번 바흐 열풍을 일으켰다.
파일:80859953.1.jpg
성 토마스 교회에서는 바흐의 스테인드글라스 옆쪽에 멘델스존의 스테인드글라스를 설치하여 그 공로를 인정하고 있다.

그래도 바흐는 동시대에 살았던 비발디, 텔레만, 라모, 알레산드로와 도메니코 스카를라티 부자 등 바로크 시기의 다른 간판급 작곡가에 비하면 일찍 재발굴이 된 편이다. 20세기가 될 때까지 바흐와 헨델을 제외한 대부분의 바로크 작곡가들은 대중들에게 거의 잊히는 수모를 당해야 했다.

이렇게 바흐가 역사상 가장 위대한 작곡가라는 평가를 듣는 위치에 올라섰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도 바흐가 작곡한 많은 음악들이 분실되었거나 불완전하게 복원되어 있으며 종종 그간 알려지지 않았던 바흐의 악보가 발견되어 화제가 되기도 한다. 예를 들어 무반주 첼로 모음곡은 1889년 첼로의 거장인 파블로 카잘스가 발굴한 것이며[6] BWV 1090-1120 번호가 붙은 31곡의 뉴마이스터 오르간 코랄(Neumeister Chorales)은 1985년 예일대학교 고서적 장서관에서 악보가 발견되었다. 이처럼 바흐를 비롯한 바로크 작곡가들의 음악 발굴작업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며 또 계속되어야 할 것이다.

오늘날에도 바흐 연구는 계속되고 있으며 알베르트 슈바이처, 앙드레 피로(André Pirro, 1869-1943) 등이 20세기 초엽의 바흐 연구에 크나큰 영향을 남겼으며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바흐 연구는 새로운 시대를 맞게 된다. 1954년경에는 '신 바흐 전집'의 간행이 시작되었고, 그와 아울러 기본적인 자료의 재검토가 시행된 결과 현재까지도 바흐에 대한 새로운 사실들이 많이 발견되고 있다.

5. 가족 관계

제바스티안 이전에도 바흐 집안은 17세기 초엽 이래 많은 유명한 작곡가를 배출했고, 일족의 중심지이었던 중부독일의 튀링겐 지방에서는 '바흐'가 '거리의 악사'를 가리키는 대명사로 쓰였을 정도였다. 그 중에서도 제바스티안의 큰할아버지 하인리히 바흐(1615–1692), 그 아들 요한 크리스토프 바흐(1642–1703)와 요한 미하엘 바흐(1648–1694)는 음악사에도 이름을 남긴 뛰어난 작곡가들이었다.

바흐 집안의 음악가들은 대대로 루터교회 정통파의 경건한 신자들이었고, 또 자기의 일에 강한 장인적인 긍지를 품고 있었다. 이 '신앙'과 '장인기질'은 요한 제바스티안에게도 계승되어서, 마치 2개의 정선율(定旋律)과 같이 그의 일생을 관통하게 된다. 또한 바흐 자신도 이에 긍지를 가지고 있었는지 1735년에 직접 <바흐 가문의 계보>라는 글을 쓰기도 하였다. 원본이 남아있지는 않고, 차남 엠마누엘의 딸이 가지고 있던 사본이 남아있다. 바흐가 직접 남긴 몇 안 되는 글 중 하나일 뿐더러 바흐 가문의 사람들을 자세히 알 수 있기에 귀중한 자료이다.

바흐 집안이 음악가 집안이라,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 외에도 음악으로 유명한 사람들이 많이 있다. 큰할아버지인 하인리히 바흐, 삼촌인 요한 크리스토프 바흐와 요한 미하엘 바흐의 작품도 J. S. 바흐만큼은 아니지만 종종 연주되고 있는 편.

J. S. 바흐의 아들 중에서는 아버지의 명성에 필적할 만한 사람은 없지만 차남 카를 필리프 에마누엘 바흐가 그나마 유명한 편이다. 장남 빌헬름 프리드만 바흐와 요한 크리스토프 프리드리히 바흐, 런던의 바흐라고 불린 막내 아들 요한 크리스티안 바흐도 고전파 초기에 이름을 떨친 음악가들이다. 다만 앞 시대에는 아버지 J. S. 바흐와 헨델이 버티고 있고, 뒤에는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이 대기하고 있어서 묻혀버린 감이 있다. 그래도 최근에 이 아들들의 업적이 재평가되고 있기는 하다.

5.1. 자녀들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는 첫 번째 아내 마리아 바르바라(m. 1684–1720), 두 번째 아내 안나 막달레나(m. 1721–1750)[7]와 함께 평생 동안 20명의 자녀를 낳았다. 그의 첫 번째 아이는 바흐가 23세였던 1708년에 태어났으며, 57세였던 1742년에 마지막으로 딸이 세상에 나왔다. 그렇지만 개중에 성인이 되어서도 살아남은 아이는 10명. 바흐 가문은 항상 악기로 가득 찬 집을 가진 음악가 집안이었고, 요한 제바스티안은 항상 아내와 아이들, 그리고 그들이 살고 있는 공동체를 위해 곡을 작곡하는 데 열심이었다. 바흐는 아들바보, 딸바보였으며 교육열도 대단해서, 친구에게 “아무래도 쾨텐 궁정악장 자리를 그만두고 라이프치히로 가야겠어. 라이프치히 대학을 목표로 아들 녀석 공부를 시켜야겠으니” 하고 말할 정도였다.[8] 실제로 바흐의 첫째와 둘째아들은 당시 명문 대학인 라이프치히 대학에 진학하기도 했다. 바흐는 자신의 아들들에게 "음악가로서 귀족, 왕족들에게 하인 취급받지 않으려면 학력을 갖추어야 한다"고 충고하였다.

바흐는 자식들의 음악 교육에도 관심이 많았다. 정기적으로 가정 음악회를 열어 음악을 공유하는 시간을 가졌으며 그의 장남이 10살이 되던 1720년에 ‘빌헬름 프리데만 바흐를 위한 소품집’을 작곡하여 그의 아들에게 선사하기도 한다. 이 작품은 교육을 위해 작곡된 것이었다. 그의 가문이 200년간 약 60여 명의 작곡자를 배출한 뛰어난 음악 가문이기도 하였지만 그의 자식들 중에는 걸출한 인물이 3명이나 있다.

장남 빌헬름 프리데만 바흐와 특히 둘째 카를 필리프 에마누엘 바흐는 전고전주의 양식을 이끈 감정과다양식의 대가였으며 가장 유명했던 막내 요한 크리스티안 바흐는 런던 바흐라고도 불리며 그의 부친인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가 재조명되기 전에는 당시 ‘바흐’라고 하면 차남 엠마누엘과 동시에 이 인물이 지칭될 만큼 아버지 보다 더 유명한 작곡가였으며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와의 우정이 매우 깊었다고 전해진다. 실제로 8살 모차르트는 크리스티안에게서 작곡법을 배웠으며, 건반 앞에서 크리스티안의 무릎 위에 앉아 그와 함께 연탄곡을 연주한 적도 있다. 크리스티안은 모차르트처럼 돈은 그럭저럭 벌었지만 관리엔 능하지 못했던 듯 하다. 비서가 돈을 몽땅 횡령하고 튀는 바람에 말년에 가난과 빚더미에 시달리다가 47살이라는 아까운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모차르트는 그의 사망 소식을 듣고 "음악계의 커다란 손실"이라고 탄식하였다고 한다.[9]
  • 장녀 카타리나 도로테아 바흐 (1708–1774)
바흐의 첫 아이. 작곡은 그 당시 여성들에게는 선택사항이 아니었지만, 카타리나는 가수로서 뛰어난 재능을 보였고 종종 아버지의 일을 도왔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작곡가 되었다. 문서 참조.
  • 차녀 마리아 조피아 바흐 (1713), 차남 요한 크리스토프 바흐 (1713)
바흐의 셋째와 넷째 자녀인 쌍둥이는 바흐가 28세였던 1713년 2월 23일에 태어났다. 요한 크리스토프는 태어난 지 몇 시간이 지나지 않아 죽었고, 마리아는 몇 주 후인 1713년 3월 13일 경에 죽었다.
바흐의 자식 중 가장 음악적 재능이 뛰어난 작곡가였다. 모차르트는 C.P.E. 바흐에 대해 "그는 아버지고 우리는 아이들"이라고 말했다. 문서 참고.
  • 4남 요한 고트프리트 베른하르트 바흐 (1715–1739)
1715년 5월 11일에 태어났으며, 형제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전문 음악가가 되었다. 그러나 그들과는 달리 대학에 갈 기회가 없었고, 법학을 공부하기 위해 비밀리에 음악 활동을 포기했다. 그는 24세의 어린 나이에 죽었다.
  • 5남 레오폴트 아우구스투스 바흐 (1718–1719)
11월 15일에 태어난 바흐의 7번째 아이는 짧은 10개월 동안 살았고, 1719년 9월 29일에 묻혔다. 그의 대부인 왕자가 레오폴트라고 이름지었고, 1717년에서 1723년 사이에 바흐를 카펠마이스터로 고용했다.
  • 3녀 크리스티아나 조피아 바흐 (1723–1726)
바흐의 아내 마리아 바르바라가 죽은 후, 그는 안나 막달레나 빌케와 결혼했다. 그들의 첫째 딸은 1723년에 태어났고, 같은 해 바흐는 라이프치히에서 토마스칸토르가 되기 위한 계약을 맺었다. 크리스티아나는 3년 후에 죽었다.
  • 6남 고트프리트 하인리히 바흐 (1724–1763)
고트프리트는 어떤 면에서는 약간 정신적으로 장애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 징후는 어릴 때부터 포착됐다. 다행히 그에게는 많은 형제자매가 있었고 그를 보살펴줬다. 그의 형 C.P.E. 바흐는 그의 동생이 '발달하지 못한 위대한 천재'를 보여줬다고 말했다.
  • 7남 크리스티안 고틀리프 바흐 (1725–1728)
비극적으로 단명했던 크리스티안 고틀리프는 겨우 3년 밖에 살아남지 못했다. 그는 1728년 9월 21일에 죽었다.
  • 4녀 엘리자베트 율리아나 프리데리카 바흐 (1726–1781)
1726년은 바흐 가문의 기쁨과 비극의 해로, 엘리자베트가 태어난 지 2달 만에 언니 크리스티아나가 3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엘리자베트는 성인이 될 때까지 살아남았고, 아버지의 제자 중 한 명인 독일의 오르가니스트 요한 크리스토프 알트니콜과 결혼했다.
  • 8남 에르네스투스 안드레아스 바흐 (1727)
  • 5녀 레기나 요한 바흐 (1728–1733)
  • 6녀 크리스티아나 베네딕타 루이스 바흐 (1729–1730)
  • 7녀 크리스티아나 도로테아 바흐 (1731–1732)

어린 시절에 죽은 이 4명의 자녀들에 대해 알려진 것은 거의 없다.
  • 9남 요한 크리스토프 프리드리히 바흐 (1732–1795)
그는 6월 21일 태어났다. 바흐의 삼촌과 바흐의 큰형도 모두 요한 크리스토프라고 불렀다. 덜 혼란스러운 것은, 그가 전문적으로 하프시코드를 연주했던 로어 작센의 한 마을의 이름을 따서 '뷔케부르크 바흐'라고 부르는 경우도 종종 있다. 그 이전의 많은 바흐 형제들처럼, 그는 이탈리아 음악의 유행에 영향을 많이 받은 작품을 쓴 고전 작곡가였다. 그는 런던을 방문하여 몇 편의 작품을 출판하기도 했지만 오늘날 그의 음악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그의 장남 빌헬름 프리드리히 에른스트 바흐(1759년–1845년)는 J.S. 바흐의 외손자로 작곡가로서 명성을 얻었다. 그는 프로이센의 프레데릭 윌리엄 2세의 음악 감독이었다.

* 10남 요한 아우구스트 아브라함 바흐 (1733)
어린 요한 아우구스트는 11월 5일 세례 후 하루 후에 사망했다.
'영국 바흐'로 알려진 J.C. 바흐는 이탈리아를 여행하여 가톨릭으로 개종한 뒤 샬롯 여왕의 봉사로 런던에 정착하여 별명이 '런던 바흐'이다. 그는 유명한 클래식 작곡가가 되었고, 모차르트의 협주곡에 영향을 주었다. 문서 참고.
  • 8녀 요하나 카롤리나 바흐 (1737–1781)
  • 9녀 레기나 주자나 바흐 (1742–1809)
바흐의 19번째와 20번째 아이들, 두 딸 모두 결혼하지는 않았다. 요하나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지만, 레지나는 루트비히 판 베토벤과 친분이 있었다. 그는 심지어 베토벤에게 기부할 교향곡 3번의 시사회 수익금까지 요구했다. 그녀의 유명한 아버지를 기리기 위해 수집품이 만들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가난하게 죽었다.

5.1.1. 전처 마리아 바르바라 바흐

마리아 바르바라 바흐(Maria Barbara Bach, 1684–1720)는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와 6촌 관계이며 바흐보다 1살 위이다. 게렌(Gehren)이라는 작은 동네에서 태어났으나 일찍 조실부모하고 아른스타트의 친척 집에서 성장하였다.

마리아가 바흐를 만난 것은 19살때인 1703년으로 당시 바흐는 이 해 8월에 막 아른스타트 교회에 오르가니스트로 취직한 상태였다. 두 사람은 금세 가까워졌으며, 마리아는 바흐의 오르간 반주에 맞춰서 노래를 부르곤 했다. 앞서 생애편에서 아른스타트 교회에 취직한 바흐가 금녀의 구역이었던 성가대석에 여성을 데려가서 욕을 먹은 적이 있다고 했는데, 그 문제의 여성이 바로 이 마리아 바르바라이다.

아른스타트에서 사사건건 교회측과 싸우면서 직업에 적응을 못했던 바흐는 4년 뒤인 1707년에 근무 조건이 훨씬 좋은 뮐하우젠으로 이직하면서 마리아를 같이 데려갔으며 뮐하우젠에 정착한 직후에 두 사람은 결혼했다. 두 사람의 결혼생활은 상당히 행복했으며 쌍둥이를 포함 7명의 자녀를 낳았는데 4명만 유년기를 넘겨 생존하였다.

마리아는 전형적인 현모양처 스타일의 여성으로, 결혼생활 내내 그 다혈질의 바흐와도 별로 부딪치지 않았을 정도로 유순하고 생활을 잘 꾸려나갔던 진정한 내조의 여왕이었다. 바이마르를 거쳐 1718년 쾨텐으로 옮긴 바흐 부부는 이제 행복을 즐길 일만 남은 상황이었다.

그런데 이 행복한 결혼생활은 쾨텐에 온지 2년만인 1720년에 갑작스럽게 끝나고 말았다. 1720년 5월 바흐는 자신의 고용주인 레오폴트공이 칼스바드(Karlsbad)에 있는 온천에 휴가차 여행을 갈 때 동행했으며 2달 후에 쾨텐으로 복귀하였는데, 바흐는 집에 도착할 때쯤 아내 마리아가 급사했다는 청천벽력같은 소식을 듣게 되었으며 황급하게 도착했을 때에는 이미 장례식까지 치른 상황이었다.

그녀가 36살의 젊은 나이에 갑작스럽게 사망한 이유는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다. 마리아는 평소에 지병이 있는 사람도 아니었으며 남편이 업무차 여행을 떠날 때까지도 특별히 이상한 징후가 없었기 때문에 그녀의 죽음에 대해서는 아직까지도 의문부호가 붙어 있다. 대체로 바흐 연구자들은 마리아가 전염병이나 식중독과 같은 급성 질환으로 사망했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보고 있다.

그간 아내와 행복하게 지냈으며 아내 덕분에 집안의 대소사를 잊고 음악 업무에만 신경썼던 바흐로서는 정말 하늘이 무너지는 심정이었을 것이다. 마리아의 사후 엉망이 되어 버린 집안일을 정리하고 아직 한참 어렸던 아이들의 양육을 위해 바흐는 17개월 후에 새로운 아내를 얻는다. 이에 대해서는 후술되는 내용 참조.

한편으로 몇몇 바흐 연구가는 그 유명한 무반주 바이올린을 위한 파르티타 d단조의 5악장 샤콘느가 바로 이 마리아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 작곡된 것이라고 주장했는데, 아직 이에 대한 확실한 근거는 없다.

5.1.2. 후처 안나 막달레나 바흐

안나 막달레나 바흐(Anna Magdalena Bach, 1701–1760)의 본명은 안나 막달레나 빌케(Anna Magdalena Wilcke)로 아버지는 금관악기 연주자였고 어머니는 오르가니스트의 딸이었다. 어렸을 때의 삶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은데 언젠가부터 성악교육을 받고 가수가 되었으며, 1721년 초에 쾨텐 궁정에 취직하면서 바흐와 인연을 맺었다. 그 전에도 바이젠펠스(Weißenfels)라는 곳에서 바흐와 만난 적이 있었다고 한다. 당시 아내를 잃고 상심하고 있던 바흐는 막달레나와 금세 가까와졌으며 16살차이의 두 사람은 1721년 12월 3일에 결혼식을 올렸다.

막달레나 바흐는 바흐의 첫째 아내 마리아 바르바라 바흐 못지 않게 내조에 충실하였으며 결혼 후에도 어느 시기까지는 가수로 계속 활동하였다. 외적으로는 이런저런 풍파에 시달렸던 바흐지만 가정생활만큼은 행복했던 덕분에 바흐와 막달레나 바흐는 왕성한 생산력을 자랑하여 무려 13명의 자녀를 두었다. 다만 이 중 6명(3남 3녀)만 성인이 될 때까지 살아남았으며 6명의 자녀 중에 요한 크리스토프 바흐와 요한 크리스찬 바흐가 중요한 음악가로 성장하였다.

생활 뿐만 아니라 음악적인 측면에서도 안나 막달레나 바흐는 남편에게 중요한 인물이었는데 그녀는 남편의 창작력의 원천이자 충실한 필사가였다. 바흐는 그녀를 위해 여러 작품, 특히 성악작품을 많이 썼는데 대표적인 것이 바로 안나 막달레나 바흐를 위한 음악노트(Notenbüchlein für Anna Magdalena Bach) 1, 2권이다.[10] 또한 막달레나 바흐가 남편의 악보를 부지런히 필사해둔 덕분에 그의 많은 음악들이 현재까지도 실전되지 않고 보존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행복했던 그녀의 삶은 1750년 남편이 죽은 후부터 급전직하했다. 그녀의 의붓자식들과 친자식들 사이에서는 유산상속을 비롯한 이런저런 이유로 분쟁이 일어나 각자 뿔뿔이 흩어졌다. 장성한 의붓자식들은 그녀를 일절 도우려 하지 않았으며 친자식들은 아직 어려서 홀로서기도 급급한 상황이었다. 이렇게 생계대책이 없는 상황에서 그녀는 홀로 어린 두 딸 캐롤리나(Johanna Carolina)와 수잔나(Regina Susanna)를 맡아 키워야 했기 때문에 생활은 점점 어려워졌으며, 죽기 얼마전에는 라이프치히 시 당국의 자선행정에 의존해서 생활해야 했을 정도로 비참한 지경에 이르렀다. 그녀가 환갑도 넘기지 못하고 죽은 데에는 이런 생활고가 큰 원인이 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한편 마틴 야비스(Martin Jarvis)라는 음악학자가 6곡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를 비롯한 몇몇 작품의 실제 작곡가가 바흐가 아니라 안나 막달레나 바흐라고 주장한 적이 있다. 이 주장은 해당 작품들이 바흐의 자필악보나 작곡기록이 없이 그녀가 필사한 사본만 남아 있는 점에 근거하고 있는데, 이와 같은 야비스의 주장에 동의하는 전문가는 거의 없다. 현재 무반주 첼로 모음곡은 바흐가 막달레나 바흐와 결혼하기 전부터 씌어졌다는 것이 정설인데다, 애초에 막달레나 바흐는 전문적인 작곡 교육을 받은 적이 없으며 작곡과 관련해서는 남편의 작곡을 곁눈질로 지켜본 것이 전부다.

참고로 장 마리 스트로브·다니엘 위예 공동 연출의 영화 〈안나 막달레나 바흐의 연대기〉는 안나 막달레나 바흐의 내레이션 (픽션이다) 을 기반으로 바흐의 음악적 세계와 철학을 탐구하고 있는 실험적인 영화다. 스트로브와 위에는 그 난해한 영화작법 때문에 대중적으로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이 영화는 그나마 이해하기 쉬운 편이라 클래식 팬들 사이에서 꽤 자주 언급된다. 참고로 당시 40대였던 쳄발리스트 구스타프 레온하르트가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로 출연한다.

6. 특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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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주요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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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lassic FM 선정 10대 바흐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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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5px"
브란덴부르크 협주곡골트베르크 변주곡두 대의 바이올린을 위한 협주곡 d단조평균율 클라비어 곡집마태수난곡
토카타와 푸가(BWV 565)무반주 첼로 모음곡미사 B단조파르티타 2번 D단조 BWV 1004Flute Sonata in B minor, BWV 1030
※ 2021년 영국의 라디오 방송국 Classic FM이 '10 of Bach’s all-time best pieces of music'를 선정.}}}}}}}}}

바흐 입문자용 추천 음악

7.1. 작품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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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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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이름에 대해

<colbgcolor=#000> 언어별 명칭
<colcolor=#fff> 한국어 <colbgcolor=#fff,#191919>요한 제바스티안 바흐
독일어 Johann Sebastian Bach
일본어 ヨハン・セバスチャン・バッハ
중국어 约翰·塞巴斯蒂安·巴赫
라틴어 Ioannes Sebastianus Bachius
프랑스어 Jean-Sébastien Bach
러시아어 Иоганн Себастьян Бах
아랍어 یوهان سباستیان باخ
힌디어 जोहान सेबेस्टियन बाच
세르비아어 Јоханн Себастиан Бацх
조지아어 იოჰან სებასტიან ბახი
페르시아어 یوهان سباستین باخ
아르메니아어 Յոհան Սեբաստյան Բախ
히브리어 יוהאן סבסטיאן באך

독일어의 'ch'는 'a, o, u' 뒤에서는 무성 연구개 마찰음 [x]로[11], 'e, i' 뒤에서는 무성 경구개 마찰음 [ç]로[12] 난다. 'Bach'의 경우 전자에 해당하므로 '바흐'가 옳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ch' 앞에 'a'가 오는 경우엔 'ch' 뒤에까지 해당 모음을 적용한 '하'로 쓰는 관행이 존재하고 있어서 '바하'[13]표기하는 경우가 상당히 많았다.[14] 1989년 2월 개정 맞춤법을 시행하면서 '바흐'로 바뀌었다. 같은 원리로 'o'가 오는 경우엔 '호', 'u'가 오는 경우엔 '후'로 표기했다. 그래서 'Bach'는 '바하', 'Huch'(예컨대 독일 여류 시인인 Ricarda Huch)는 '후후'로 썼다. 실제로 일본에서는 Bach를 バッハ로 표기하는데, 하(ハ)표기는 물론 촉음(ッ)까지 함께 적용한다는 점이 특징이다. 토벤(ベートーベン, Beethoven), 괴팅(ゲッティンゲン, Göttingen), 머클라비어(ハンマークラヴィーア, Hammerklavier)처럼 일본의 독일어 표기가 이식되며 저런 관행이 정착했던 것이다.

미들네임인 Sebastian은 한국에서 세바스찬, 세바스티안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리는데 독일식으로 읽으면 제바스티안이다. 단모음 앞에 s자가 있으면 [z]로 읽기 때문에 제바스티안으로 표기해야 옳다.

10. 기타

  • 2020년 12월 존 엘리엇 가디너가 쓴 바흐의 전기 바흐 : 천상의 음악이 한국에 번역됐다. 가디너는 이 책에서 작곡 행위가 바흐에게 실제로 무슨 의미였는지, 그의 특별한 작품들이 왜, 그리고 어떻게 진화했는지, 가사와 음악은 어떤 방식으로 하나로 엮였는지, 그리고 그 작품들이 바흐에 대해 무엇을 얘기하는지에 주목한다. 바흐의 복잡다단한 인간성, 청중과 자신의 세계관을 교류하고 공유하고 싶어 했던 열정, 무한한 창의력과 지성, 재치와 인간성을 작곡 과정에 쏟아 넣으며 자신만의 독특한 능력을 생생하게 반영했던 한 남자의 이야기가 이 책에 담겨 있다.
  • 바흐는 상당히 건장한 체격을 지녔다고 전해지며, 그의 유골을 분석해본 결과 키는 180cm로 당시 유럽인의 평균 신장인 약 160cm를 넘는 엄청난 장신이었다. 또한 바흐는 춤과 노래에도 꽤나 솜씨가 좋아 종종 자신이 즉흥적으로 작곡한 곡을 연주하면서 지인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바흐 자신과 여러 동시대 음악가들의 작품을 기록해 둔 안나 막달레나 바흐를 위한 공책(Notenbüchlein für Anna Magdalena Bachin) 같은 작품집은 이런 용도로 사용된 것으로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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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학자들이 그의 유골을 분석해 실제 얼굴을 복원했다. #

* 바흐와 프리드리히 대왕의 만남을 담은 드라마. 1985년 "Johann Sebastian Bach"(동독/헝가리 공동작) 4부작으로 편성된 TV 시리즈다. 여기서 프리드리히 대왕은 바흐가 알아듣도록 독일어로 말하면서도 중간중간 자신의 모어나 다름없던 프랑스어를 섞어 말하고 있다. 영국 망명생활의 영향인지 영어도 한번 사용한다.
  • 중국, 한국, 베트남, 일본, 필리핀, 독일, 이탈리아, 프랑스, 그리스 등을 포함한 전 세계에 알려져 있는 별명은 '음악의 아버지'인데, 표제 붙이기 좋아하는 일본의 출판사에서 만든 말을 그대로 들여와 쓰는 것이다. 때문에 그의 고향격인 서양에서는 전혀 통하지 않는 말이다. 굳이 따지자면, 클래식 음악사에서 널리 알려진 작곡가들 중 가장 처음 등장하는 시조격 인물이라는 뜻 정도로 이해하면 될 것이다. 바흐와 동시대에 활동했으며 성별과 관련 없이 '음악의 어머니'라 불리는 헨델도 같은 사례다.
  • 경건한 신앙심과 작곡기법에서의 장인기질, 음악의 아버지라는 별칭 등등 여러가지 때문에 바흐를 어렵게 생각하는 이들이 많지만, 사실 바흐는 쾌활하며, 왕성한 대식가라 미식을 즐기며, 다혈질적인 면도 있었다. 한 번은 악단 소속의 바순주자의 바순을 욕해서 바순주자가 말하길 "나의 악기를 욕하는 것은 곧 나를 욕하는 것이다"라는 논리로 바흐에게 성질을 냈다고 한다. 이 일로 바순주자는 바흐와 싸움이 붙었고, 바흐는 도중에 칼을 바순주자에게 정당방위로 이용하게 된다. 이 일로 바흐의 일자리가 위태로워지는 일이 발생한다.
오케스트라에서 모든 악기들이 조화롭게 어울리도록 이끄는 데 아버지를 따라올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아버지는 연주자 하나하나가 최상의 음향효과를 낼 수 있도록 단원들을 완벽히 배치시킬 줄 아셨습니다...
무엇보다 아버지는 한눈에 연주회장의 특성을 간파하시고는 했습니다. 예를 하나 들겠습니다. 아버지가 베를린으로 저를 보러 오셨을 때 저는 새로운 오페라 공연을 보여드렸습니다. 아버지는 즉시 청중의 입장에서 오페라의 단점과 장점을 지적하셨습니다. 그 후 저는 아버지를 대식당으로 모시고 가면서 식당을 둘러싼 긴 회랑으로 올라섰습니다. 그때 아버지는 천장을 바라보시더니 자세한 걸 알아보려 하지도 않고 말씀하셨습니다. 건축가가 걸작을 구상했지만 그 자신은 물론 다른 누구도 그 사실을 알지 못한다는 겁니다. 내친김에 실험을 해봤습니다. 장방형으로 구조를 이룬 방 한 구석에서 벽에 대고 아주 나지막하게 말을 하니, 대각선 반대편에서 벽 쪽으로 얼굴을 돌리고 있는 사람이 말을 완벽히 알아듣는 것이 아닙니까! ... 아치형 천장은 이런 효과를 노린 것인데, 아버지는 대번에 그것을 알아보셨던 것입니다. 하긴 아버지는 아무리 복잡한 악보라 해도 음표 하나 틀린 것까지 정확히 집어 내시던 분이었으니 말입니다.
아버지는 화성에 자신이 있으셨기 때문에 여러 차례 3중주를 반주하셨는데, 기분이 좋고 또 작곡가가 괜찮다면, 즉흥적으로 4중주를 연주하여 작곡가를 놀라게 하셨습니다. 대편성의 악기들을 위해 작곡된 푸가를 듣다가 주제가 반복되는 즉시 아버지는 이 주제에 어울릴 대위법적 주제들은 어떤 것이며 작곡가가 어떻게 해야 할지를 곧바로 말씀하실 수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당신이 예견하신대로 연주가 이루어지면 무척 즐거워하시며 저를 팔꿈치로 쿡쿡 찌르곤 하셨는데, 그 일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 카를 필리프 엠마누엘 바흐, 요한 니콜라우스 포르켈에게 1774년 보낸 편지 中
또한 이런 이야기도 전해 내려오는데, 음악학자인 크리스티안 프리드리히 다니엘 슈바르트가 1772년에 요한 크리스티안 바흐한테 들었다는 이야기이다.
"사람들은 그의 위대한 아버지에 대해 이야기했고, 그는 아버지가 작곡한 것을 연주할 능력이 없다고 자인했다. 그는 클라비어로 무심히 즉흥 연주를 하다가 4. 6화음으로 마친적이 있었는데, 그때 침대에 누워 잠들어 있다고 생각했던 아버지가 갑자기 일어나 그의 따귀를 때리고 나서 그 화음을 해결해주었다는 말을..."
  • 사생활에서의 스캔들은 아예 존재하지도 않았을 만큼 평생을 음악에 매진했다.
  • 동시대 작곡가였던 헨델과 두차례 만나고자 했지만, 아쉽게도 모두 성사되지 못했다. 헨델이 영국에 정착한 지 얼마 되지 않은 1719년 고향 할레를 방문했는데, 그곳에서 불과 35킬로미터 떨어진 쾨텐(Köthen)에서 일하고 있던 바흐는 짬을 내어 헨델을 찾아갔지만, 그는 직전에 그곳을 떠나고 없었다. 이후 1730년에 헨델이 두 번째로 할레를 찾았는데, 당시 열병이 심했던 바흐는 대신 아들을 보내 헨델을 자신이 있던 라이프치히로 초대했다. 그러나 헨델은 초청에 응할 수 없어 유감이라는 답만을 보냈을 뿐이다.
  • 헨델과 달리 바흐와 친했던 작곡가는 게오르크 필리프 텔레만이다. 바흐나 헨델보다 네 살 많았던 텔레만도 현 독일 중부의 마크데부르크에서 태어났다. 두 후배보다 훨씬 오래 살았지만, 텔레만의 명성이 알려진 것은 그리 오래지 않다. 텔레만은 바로 바흐가 태어난 아이제나흐로 오게 된다. 1708년에 텔레만은 아이제나흐의 음악감독이 되었고, 아말리에 에벌린(Amalie Louise Juliane Eberlin)이라는 여인과 결혼했다. 둘 사이는 행복했지만 그만 아말리에는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이를 낳다가 세상을 떠났다. 낙심한 텔레만은 1712년 프랑크푸르트로 임지를 옮겼다. 2년 뒤에 그는 둘째 아내 마리아 카타리나 텍스토어(Maria Catharina Textor)와 재혼했다. 이 무렵 텔레만은 아이제나흐에서 알게 된 후배 바흐로부터 반가운 부탁을 받는다. 바로 1714년에 태어난 둘째 아들의 대부(代父)가 되어달라는 것이었다. 그 아이는 대부에게서 가운데 이름을 물려받아 카를 필리프 에마누엘(Carl Philipp Emanuel)이라 불렸다. 바흐와 육촌 마리아 바르바라(Maria Barbara Bach) 사이의 둘째 아들이 먼 뒷날 대부의 자리를 물려받을 줄은 아무도 예상치 못했을 것이다. 바흐와 텔레만의 인생이 겹친 두 번째 사건은 1723년에 일어났다. 앞서 텔레만을 고깝게 보았던 라이프치히의 쿠나우가 세상을 떠났고, 시 당국은 후임 인선 작업에 들어갔다. 그들은 라이프치히에서 대학을 나왔고, 젊은 시절에 콜레기움 무지쿰(Collegium Musicum)이라는 단체를 창단해 의욕적인 활동을 했던 텔레만이 후임으로 와주길 원했다. 그러나 텔레만은 이미 1721년부터 함부르크의 음악감독이 되어 있었다. 한자동맹의 중심 도시인 함부르크는 일찍부터 상업이 발달했고, 그만큼 문화적인 수준도 독일에서 가장 높았다. 함부르크를 따라갈 모델로 삼은 라이프치히는 텔레만을 더욱 데려오고 싶어 했다. 텔레만은 라이프치히에 가서 조건을 들어보고는 함부르크에 남는 편이 낫겠다고 판단했다. 그는 돌아가는 길에 쾨텐의 친구 바흐에게 들러 라이프치히의 자리에 도전해 보라고 조언했다. 마침 아내를 잃고 쾨텐 군주마저 음악에 대한 열정이 시들해가던 차에 바흐는 텔레만의 말에 솔깃했다. 바흐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자녀들이 좋은 교육을 받을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하는 일이었다. 아이들을 유학 보내는 것보다는 대도시에서 통학시키는 것이 훨씬 돈이 적게 들었다. 물론 라이프치히의 급여도 쾨텐보다는 훨씬 더 많았다. 문제는 급여가 많은 만큼 대도시의 물가도 비싸다는 것을 바흐가 미처 몰랐다는 것이다. 또한 그가 두 개의 교회와 학교를 위해 해야 하는 일은 엄청나게 많았다. 만일 안나 막달레나가 없었더라면 바흐의 모습은 지금과 달랐을지 모른다. 텔레만이 라이프치히에 창단하고 간 콜레기움 무지쿰 또한 바흐가 자작곡을 연주하는 수단이었다.
  • 지명도가 높은 작곡가인 탓에 그의 음악은 창작물 곳곳에 많이 등장하는 편이다. 심지어 공익광고협의회도 바흐의 작품을 일부 써먹었다. 지금까지 바흐의 선율을 삽입한 헐리우드와 유럽의 각종 TV, 영화가 무려 1,560편에 달한다.(IMDb 통계).바흐의 음악이 들어간 영상물들.
  •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다. 신앙심이 뛰어났으며 바흐는 신 앞에서 항상 겸손했다. 자신이 작곡하던 작품을 끝내고 난 뒤에는 오선지에 SDG란 약자를 적었는데 풀어쓰자면 'Soli Deo Gloria'로, '오직 하나님께 영광'이라는 뜻이다. 그는 자신의 재능을 신에게서 잠시 빌려온 것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그의 음악에는 구조적인 완벽함 속에 인간적인 따스함과 신 앞에 선 겸손함이 존재한다. 그가 사용한 성경은 칼로프 성경이라는 특별 제작된 독일어 주석 성경이었으며 없는 구절도 찾아내는 등의 성경공부도 열심히 하는 사람이었다.관련링크
  • 어마어마한 다작을 했는데 생전에 무려 1천 곡 이상의 작품을 작곡했다. 더 놀라운 건 그 음악 대부분이 훌륭하다는 점이다. 음악 잡지 Slate는 바흐는 안 좋은 음악을 작곡한 적이 한번도 없다고 설명했다.# 한 클래식 애호가는 '평생 바흐의 음악을 들을 수 있으며, 항상 새로운 바흐의 음악을 찾을 수 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 정도로 바흐의 음악 세계는 무궁무진하며 거대하고 그의 음악이 좋아지게 된 이상 질리지가 않는다.
  • 여러가지 사업을 하기도 했는데, 조그마한 서점을 하나 가지고 있었다. 여기서 동료인 마테존이나 하이니헨등의 이론 서적이나 제자들의 논문, 혹은 자신의 작품이나 친구들이나 아들들의 작품도 팔았다. 또한 쳄발로나 피아노[15]를 대여해주거나 장인들과 연계해 귀족들에게 팔기도 했다.
  • 초기 피아노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었는데, 건반이 너무 무겁고, 고음 소리가 약하다는 점을 들어서 지적했다. 하지만 이건 초기 피아노 얘기고, 오르간 제작자로 유명한 질버만이 피아노를 연주하기 좋게 개선해 가져오자 그제서야 인정해주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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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엘리아스 하우스만이 1746년 그린 61세의 바흐의 그림. 이 그림에 있는 악보를 자세히 보면, 6성부 3중으로 된 카논이다. 재미있는 점은 거울상으로 이 악보를 보면 또 다른 3성부가 보인다는 점이다. 이 악보에 대한 정체가 비교적 최근에 밝혀졌는데, 이 동영상을 보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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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초상화를 활용한 인터넷 밈들도 있다.
  • 문명 6에서는 위대한 음악가로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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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년 구글이 바흐의 탄생일을 맞아 메인화면에 인공지능(AI) 작곡 로고 ‘구글 두들’을 선보였다. 21일 하루 동안 구글은 바흐의 탄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하루 동안 구글 검색창의 메인 화면에 사용자가 바흐의 음악 스타일의 음악을 만들 수 있게 해주는 ‘구글 두들’을 선보인다. 구글 두들이란 구글이 특별한 날을 기리기 위해 구글이 일시적으로 바꿔 놓는 메인 페이지 로고다. 로고를 클릭한 이용자가 단 두 단락의 짧은 멜로디를 입력하면 음악의 키와 템포를 AI가 자동으로 바흐의 음악 데이터를 바탕으로 작곡, 이용자에게 들려준다. 이용자는 또한 자신이 작곡한 음악을 다운로드하거나, 바흐의 음악을 학습 중인 AI의 데이터세트에 추가할 수 있다. 이번에 구글이 선보인 구글 두들은 AI를 처음으로 접목한 것으로, 지난 2016년부터 창작 활동을 하는 인공지능을 개발한 구글의 마젠타(Magenta)가 개발한 머신러닝 모델 코코넷(Coconet)을 기반으로 구성됐다. 코코넷은 300가지가 넘는 바흐의 작품을 분석해 멜로디를 만들어낸다. 코코넷은 바흐의 음악들을 잘게 쪼갠 뒤 파편화해 무작위로 삭제한 후, 이를 다시 복원하는 연습을 통해 바흐의 스타일에 맞는 음을 추출하는 것을 훈련했다. 이를 통해 어느 위치에 어떤 음을 넣든 바흐의 음악 스타일로 변형해 낸다. 바흐의 음학은 여타 바로크 시대의 음악과 같이 일관된 규칙이 있으며 일정한 형식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AI 학습에 적합하다. 안나 후앙 구글 마젠타 AI 연구원은 “코코넷은 불완전한 악보에서 누락된 자료를 채워 나간다”며 “우리는 이를 훈련시키기 위해 바흐의 합창곡 데이터세트에서 무작위로 음표를 지우고, 이를 재구성하도록 했다”고 말했다. 다만 그는 작곡 AI가 완벽한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후앙 연구원은 “코코넷이 바흐의 음악과 같이 단순함과 표현력 사이의 균형을 갖추면서 긴 앙상블을 복제해 내는 것은 어렵다”고 말했다.
  • 바흐가 활약한 도시인 독일라이프치히에서 매년 약 10일간 바흐를 기리는 페스티벌이 개최된다. 라이프치히 바흐 축제는 1723년부터 1750년까지 라이프치히 주요 교회 4개 합창단의 합창장(Thomaskantor)을 역임한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를 기념해 개최되는 클래식 음악 페스티벌이다. 페스티벌 시작일은 부활절이 끝나고 7번째 맞이하는 일요일로, 보통 6월에 개최되지만 4월 말에서 5월에도 열리는 등 시작일은 조금씩 변동이 있다. 라이프치히 바흐 축제에선 바흐가 작곡한 음악을 중심으로 매년 다른 주제로 클래식 작곡가들의 작품을 선정해 연주한다. 예를 들면 2016년 축제의 표어는 '화음의 비밀'(Geheimnisse der Harmonie)이었다. 이 축제는 1904년에 처음 개최되어 지금까지 매년 이어지고 있으며, 세계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오랜 역사를 가진 바흐 음악 축제로 알려져 있다. 바흐가 합창장으로 활동한 교회들과 바흐의 기념비가 있는 광장을 중심으로 라이프치히 전역에서 축제 기간 동안 약 100여 회의 음악회와 행사가 벌어진다. 축제의 첫 날인 개막식 때에는 바흐가 합창장을 맡았던 성 토마스 교회(St. Thomas kirche) 소년 합창단의 공연으로 시작된다. 토마스 합창단은 800년의 역사를 가진 합창단으로, 성스러운 음악과 바흐 음악을 온전히 연주하는 데 많은 공을 들이고 있다. 이 공연은 공연장에 참석하지 못한 관객이나 시민들도 함께 즐길 수 있도록 도시 곳곳에 설치되어 있는 스크린으로 실시간 중계된다. 개막 공연을 시작으로 바흐의 음악을 현대음악이나 재즈로 변주하는 연주회, 바흐가 직접 사용했던 오르간을 직접 구경하고 연주하는 테마 연주회들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이어진다. 음악회 외에도 바흐에 대한 세미나, 강연회, 바흐 박물관 투어, 오르간 투어, 래퍼, 그래피티 아티스트, 시인 등 다양한 분야의 예술가들이 참여하는 바흐 경연대회(BachGames)의 최종 결승전도 펼쳐진다. 라이프치히 바흐 페스티벌의 폐막식은 항상 토마스교회에서 하게 되는데, 바흐의 <B단조 미사곡(Mass in B minor)> 연주로 마무리된다.
  • 나치 독일 시기 바흐는 "독일 사람 중 가장 독일인"으로 불리며 민족주의 열성을 자극하는 집회에서 가장 많이 연주된 작곡가다.[16] 바흐의 곡들은 히틀러 유겐트 멤버들에 의해 공연되었고 거의 매일 라디오에서 연주되며 정치적으로 이용됐다. 당시 바흐의 인기는 1935년 독일 전역의 여러 도시에서 괴벨스아돌프 히틀러가 직접 참석한 라이프치히의 "레이히 바흐 축제"에서 정점을 찍었다. 바흐의 250번째 생일을 기념하기 위해 축제가 조직되었다.출처 이때 나치는 루트비히 판 베토벤과 같은 다른 유명한 독일 출신 음악가들도 정치적으로 이용해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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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일 작곡가로는 최대 규모의 전집 음반이 도이치 그라모폰데카(Decca)를 통해 2018년 11월 9일 발매됐다. 총 222CD 규모의 이 전집 음반은 2년간의 연구와 선곡 과정을 거쳐 탄생한 결과물로 바흐 연구회(Leipzig Bach Archive)와 32개의 레이블의 협업으로 이루어졌다. 원전 음악의 지휘자로 잘 알려진 존 엘리엇 가디너(John Eliot Gardiner)의 서문이 수록되었고, 작품별 해설에는 니콜라스 케니언(Nicholas Kenyon, 의 저자)이 감수에 참여하였다. 이 앨범은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의 탄생 333주년을 기념하여 발매되었다. 333이라는 기록적인 숫자는 앨범의 방대한 규모를 나타내기도 하지만 바흐의 종교적인 신념을 담고 있기도 하다. 앨범의 3이라는 숫자는 바흐의 루터교에 대한 신앙심이 반영된 기독교의 삼위일체 교리를 상징한다. 총 5,533 트랙으로 이루어진 이 앨범은 재생 시간만 16,926분에 달한다.[17] 바흐333은 바흐 작품의 모든 곡들을 담아내어 그의 음악 세계를 소개하고, 음악, 시각자료, 온라인 매체 등을 통해 다양한 방식으로 그가 음악계에 끼친 영향에 대해 보여준다. 단일 작곡가로는 최대 규모로 2년 전 전 세계적인 성공을 거두었던 기획 앨범 ‘모차르트 225’를 뛰어넘는 압도적인 크기를 보여준다. 바흐의 작품 전집에는 750명의 엄선된 연주자와 앙상블의 연주가 수록되었고, 수록된 녹음 레이블은 소니(Sony), 워너(Warner), 데논(Denon), 아르모니아 문디(Harmonia Mundi) 등 32개의 레이블을 아우른다. 앨범에는 2권에 하드커버 책자가 수록되었다. ‘생애(LIFE)’이라는 제목의 1권에는 풍성한 삽화와 함께 저명한 바흐 연구가인 도로시 슈뢰더(Dorothea Schroder)가 쓴 전기가 수록되었고 바흐 연구회의 최신 연구가 담긴 13편이 에세이가 담겨있다. ‘음악(MUSIC)’이라는 제목의 2권에는 바흐 연구회의 회장인 크리스토프 울프(Christoph Wolff)의 에세이를 시작으로 니콜라스 케니언의 작품별 해설이 실려있다. 또한 전체 가사집과 영문 번역, 주요 작품의 악보 사본과 바흐 연구회의 혁신적인 디지털 자료를 포함한 온라인 가이드가 수록되었다. 특히, 이 전집에는 바흐 연구회의 가장 최근 연구와 함께 2019~2020년에 출판될 예정인 BWV3 카탈로그가 반영되었다. 바흐의 생애는 존 엘리엇 가디너의 90분 분량의 BBC 영상 DVD <바흐: 열정적인 삶 (Bach: A Passionate Life)>을 통해서 생생히 담아냈다. 앨범의 색상별 구분은 성악, 건반악, 관현악, 기악의 4가지 장르 구분과 함께 연대기로 구성되어 있다. 다양하고 풍성한 내용을 쉽게 접할 수 있는 구성이다. 또 전집에서는 그동안 한 번도 공개되지 않았던 6개의 합창곡 찬송가와 베토벤의 유일한 바흐 편곡 작품이 수록되어 눈길을 끈다. 또한,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클래식 음악 중 하나인 무반주 바이올린을 위한 소나타와 파르티타(the Sonatas & Partitas for solo violin)가 바로크 바이올린의 스타, 줄리아노 카르미뇰라(Giuliano Carmignola)의 연주로 수록되어 팬들의 기대를 받고 있다. <바흐 인터렉티브(Bach Interactive)>와 <바흐 애프터 바흐(Bach after Bach)>라는 제목의 16개의 CD는 바흐 음악의 경험을 풍성하게 하는 중요 자료들과, 모차르트와 베토벤에서부터 오늘날 아르보 패르트(Arvo Part)와 죄르지 쿠르탁(Gyorgy Kurtag)에 이르기까지 여러 작곡가와 그들의 작품에 끼친 바흐의 특별한 영향을 담았다. 또한 스테판 그라펠리(Stephane Grappelli), 스탄 게츠(Stan Getz), 자크 루시에(Jacques Loussier), 빌 에반스(Bill Evans) 등 재즈, 월드 뮤직의 연주가 담긴 [Bach a la Jazz]과 현대의 작곡가와 연주자들의 바흐 작품의 재해석이 담긴 [New Colours of Bach] 앨범이 함께 실려 흥미를 더한다.
  • 현재 일본 바이올리니스트 사토 슌스케(佐藤 俊介)가 이끄는 협회인 네덜란드바흐협회(Netherlands Bach Society)에서는 현재 ‘올 오브 바흐 (All of Bach)’라는 바흐 탄생 333주년[18] 프로젝트를 진행중이다. 오는 2021년까지 바흐의 전곡을 연주하고, 그 영상을 유튜브에 공개하는 대장정이다.유튜브 링크 또 완성을 목표로 한 2021년이 협회 창단 100주년이 되는 해이기 때문이다. 처음 시작은 단순하고도 원대했다. 바흐가 남긴 최고의 걸작인 ‘마태수난곡’을 연주하기 위한 것이었다. 창단 이듬해 4월 그리스도 수난일에 이들의 첫 ‘마태수난곡’이 봉헌되었다. 그것을 시작으로 역사상 첫 ‘마태 수난곡’ 녹음이 네덜란드 거장 빌럼 멩엘베르흐의 지휘로 이뤄졌다. 그러나 이때는 무려 450명의 합창단이 동원되어, 바흐 당대의 모습과는 거리가 있었다.
  • 수학적인 사고를 작곡에 적용했다고 평가되기도 한다.[19] 그의 푸가들 중 상당수는 수학적으로 치밀한 구조를 가지고 있어 학술적인 분석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수학/과학 교양서인 괴델, 에셔, 바흐는 바흐의 푸가에서 나타나는 재귀적 구조에서 큰 영감을 받았다.

11. 관련 문서

12. 외부 링크


[1] 헨델, 스카를라티와 같다.[2] Lesser Feasts and Fasts 2018. Church Publishing, Inc. 17 December 2019. ISBN 978-1-64065-235-4.[3] 출처 1, 출처 2[4] 대표적으로 저녁기도 곡들 Vesperae de dominica KV 321 , Vesperae solennes de confessore KV 339의 시편 113장 Laudate pueri dominum 구양식(stile antico) 악장들이나 호칭기도 곡들 Litaniae de venerabili altaris sacramento KV 125 , KV 243의 Pignus futurae gloria 악장들, 혹은 성 삼위일체 미사 Missa in honorem sanctissimae trinitatis KV 167, 롱가 미사 Missa longa KV 262 의 악장 종결 푸가들, 혹은 장엄미사 Missa solemnis KV 337의 베네딕투스 악장 참조.[5] "작고한 베토벤의 묘지 곁에 서서, 우리는 전 독일과 독일 민족을 대표하여, 이제는 사라져 버린 우리 민족 예술의 광휘이며, 우리 조국의 완전한 영적 만개로서 높이 추앙받던 그의 죽음을 애도하노라. 독일 운문의 영웅은 아직도 살아있고, 그의 삶은 영원하리라, 그러나 아름다운 노래의 최후의 거장이며, 영혼이 담긴 협화음의 오르간이며, 헨델과 바흐, 그리고 하이든과 모차르트의 불멸의 명성의 계승자이며 증폭자인 그는 이제 가고 없으니, 우리는 이제 여기 침묵하는 운명의 끊어진 현을 애도하노라..."[6] 카잘스가 열세 살 때 바르셀로나 중고악보점에 들렀을 때 바흐의 작품 번호에 포함되지 않은 첼로 모음곡을 발견하고, 60세가 되던 1936년에 이를 연주해서 알렸다고 한다. 하지만 이 일화에 대해 진위 논란이 있다.[7] (마리아와) 사별 이후 재혼한 여자다.[8] 바흐 생애 항목에 있는 에르트만에게 보낸 편지 참조.[9] 아버지에게 보낸 1782년 4월 10일자 편지.[10] 전 26곡중 바흐 자신이 작곡한 곡은 4곡 정도이고 나머지 곡들은 안나 막달레나가 좋아한 다른 작곡가의 곡들을 바흐가 자주 연주해주며 정리한 모음곡집이다. 이 곡들중 가장 유명한 미뉴에트 G장조(영화 접속의 OST인 사라 본의 A lover's concerto로 친숙한 곡)도 동시대 독일 작곡가 크리스티안 페촐트(Christian Petzold)의 작품이다.[11] 혀뿌리와 뒤쪽 입천장을 닿을락 말락 하게 한 후 공기를 내쉬면 된다. 한국어에서는 '흙' 등을 발음할 때 이 소리가 난다.[12] 혀 중간 부분과 앞쪽 입천장을 닿을락 말락 하게 한 후 공기를 내쉬면 된다. 한국어에서는 '히읗' 등을 발음할 때 이 소리가 난다.[13] 공교롭게도 아랍어로 بهاء는 '장엄, 웅장하다'는 뜻이다. 동명의 사우디아라비아의 도시도 있다.[14] 비슷한 사례로 속도 단위인 마하가 있다. 다만 이쪽은 바흐와 달리 워낙 대중적으로 굳어져버렸기 때문에 외래어 표기법에도 수정되지 않고 마하로 표기한다.[15] 당시의 피아노는 쳄발로보다 조금 더 비쌌다.[16] 참고로 그를 재발굴한 멘델스존의 음악은 그가 유대인 혈통이라며 나치 집권기에는 연주가 금지됐다.[17] 감이 오지 않는다면, 약 12일 동안 바흐만 주구장창 들어야 앨범을 다 끝낼 수 있다.[18] 일단 ‘333’이라는 숫자는 세계적인 음반사 유니버설 뮤직의 마케팅에서 나온 것이었다.[19] #[20] 유튜버가 2023년 사망하여 더 이상 영상이 올라오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