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8da9c5><colcolor=#191919>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 제6·8대 일반참모장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 육군 제국원수 프란츠 콘라트 폰 회첸도르프 Franz Conrad von Hötzendorf | |||
이름 | Franz Xaver Josef Graf Conrad von Hötzendorf 프란츠 크사버 요제프 콘라트 폰 회첸도르프 백작[1] ↓ Franz Conrad-Hötzendorf 프란츠 콘라트회첸도르프[2] | ||
출생 | 1852년 11월 11일 | ||
오스트리아 제국 빈 펜칭 (Penzing) | |||
사망 | 1925년 8월 25일 (향년 72세) | ||
독일국 뷔르템베르크 자유 인민공화국 바트메르겐트하임(Bad Mergentheim)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8da9c5><colcolor=#191919> 부모 | 아버지 프란츠 크사버 콘라트 폰 회첸도르프[3] 어머니 바바라 퀴블러[4] | |
형제 | 여동생 바바라 "베티" 콘라트 폰 회첸도르프[5] | ||
배우자 | 빌헬미네 레 베아우[6] | ||
자녀 | 장남 쿠르트 콘라트 폰 회첸도르프 백작[7] 차남 에르빈 콘라트 폰 회첸도르프 백작[8] 삼남 헤르베르트 콘라트 폰 회첸도르프 백작[9] 사남 에곤 프란츠 아우구스트 율리우스 카를 콘라트 폰 회첸도르프 백작[10] | ||
학력 | 테레지아 육군사관학교(Theresianische Militärakademie) (졸업) 황립 및 왕립 전쟁대학(k.u.k. Kriegsschule) (졸업) | ||
군사 경력 | |||
복무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 | ||
1871년 ~ 1918년 | |||
최종 계급 | 제국 육군 제국원수 (k.u.k. Feldmarschall)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합동 육군, 1916년) | ||
주요 참전 | 제1차 세계 대전 | ||
주요 직위 | 제1보병연대장 제11보병사단참모장 제93보병여단장 제1보병연대장 제55보병여단장 제8보병사단장 제6·8대 육군 총참모장 남티롤집단군사령관 | ||
주요 서훈 | 백엽 푸르 르 메리트(Pour le Mérite) 마리아 테레지아 군사훈장 지휘관십자(Kommandeurkreuz des Militär-Maria Theresien-Ordens)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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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군인이자 제국원수[11]. 제1차 세계 대전에서 핵심적인 인물 중 한 명이다. 그는 전투 교리에 대한 교보를 저술하여 대외적으로 명성을 쌓았고,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의 눈에 띄어 육군 일반참모장에 올라 군의 최정점에 올랐다. 그는 타국에 배타적인 입장이었으며 제국의 안녕을 위해서는 발칸반도를 복속시켜야 한다는 생각을 하였고, 내각과 함께 세르비아 침공을 주도하고, 동부전선과 이탈리아 전선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을 총괄 지휘하였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의 군인 중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로 전체적인 대전략을 그리는 능력이 뛰어난 걸로 알려져 있다. 다만 후술할 이유로 평가는 극과 극이다.2. 생애
2.1. 가계도
콘라트의 집안은 대대로 모라비아의 브륀에서 군인과 공무원을 업으로 삼았었다. 콘라트의 증조부 프란츠 안톤 콘라트(Franz Anton Conrad, 1738 ~ 1827)는 모라비아와 슐레지엔의 지방 회계검사원이었다. 프란츠 안톤 콘라트는 50년동안 합스부르크에 헌신한 공로를 인정받아 1815년에 오스트리아 제국의 초대 황제인 프란츠 1세로부터 세습기사 작위를 부여받았고, 세습 귀족이 되면서 바이에른 선제후국 출신이었던 아내 요제파 폰 회첸도르프(Josefa von Hötzendorf, 1739 ~ 1798)[12]의 성을 합쳐서 “콘라트 폰 회첸도르프”로 성씨를 정하였다. 콘라트의 조부 요제프 오이겐 콘라트 폰 회첸도르프(Josef Eugen Conrad von Hötzendorf, 1768 ~ 1837)는 모라비아 잘름(Salm) 가문의 재산 관리자였다. 오이겐의 아내 바바라 포스타베크(Barbara Postavek)는 콘라트의 조상 중에서 유일한 비(非) 독일인이었다. 프란츠 안톤 콘라트의 손자이자 콘라트 폰 회첸도르프 백작의 아버지인 프란츠 크사버 콘라트 폰 회첸도르프는(Franz Xaver Conrad von Hötzendorf, 1793 ~ 1878)는 20세의 나이에 장교로 임관하여 오스트리아 제국군 황립 용기병연대 소속 중위로 라이프치히 전투에 참전하였다. 이후 1817년부터 헝가리와 갈리치아 일대에서 후사르로 복무하였는데, 30년동안 복무를 했지만 중령에서 더이상 진급을 못하였다. 그런 와중에 빈에서 헝가리인들이 봉기를 일으켰다. 이 때 크사버가 폭동을 진압하던 중 낙마를 하여 골반이 부러지는 중상을 입고 말았으며, 결국 최종 계급 후사르 대령으로 퇴역하였다. 퇴역 장교가 된 크사버는 제국의 수도 빈에 정착하였고 환갑을 바라보는 나이에 크사버보다 32살이나 어렸던 바바라 퀴블러(Barbara Kübler, 1825 ~ 1915)를 만나 결혼을 한다. 그 후 크사버 부부는 1년이 지나서 첫 자식을 보게 되는데, 그가 바로 콘라트 폰 회첸도르프 백작이었다.2.2. 어린시절
콘라트는 소싯적 화가였던 외할아버지 요하네스 퀴블러(Johannes Kübler)[13]에게 2년 동안 교육을 받았는데, 손자도 그림에 소질이 있었던지 콘라트의 어머니인 바바라는 아들이 화가로서의 길을 걷길 원했다. 그래서 이러한 환경에서 자란 콘라트는 어릴 적부터 예술에 흥미를 가지고 있었고, 자연을 관찰하는 게 좋았던 콘라트의 취미는 나비 수집이었다고 한다. 반면에 종교, 즉 가톨릭에 대해서는 무심했으며, 그보다 자연 과학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14]다만 콘라트의 아버지인 크사버는 사냥을 즐겨 하였었는데, 이런 아버지와 다르게 콘라트는 사냥을 싫어하였다.[15]
2.3. 군인의 길
크사버는 자기 집안이 대대로 그래왔던 것처럼 아들 역시 군대에 가야 한다고 주장하였다.[16][17] 그리하여 콘라트는 빈에 있는 장크트안나 초등학교를 다니던중에 11살의 나이에 유년학교 입학시험에 응시하였는데, 바로 합격하여 아주 어린 나이에 사관 후보생이 되었다.[18] 그가 가장 좋아하는 교사는 아버지의 오랜 친구인 과학선생 카를 무를레(Carl Murle)이었다. 그의 학교 생활은 순탄치만은 않았는데, 워낙 혹독한 스타르타식 교육이 온실 속 화초처럼 자라왔던 콘라트랑은 맞지 않았다.[19] 15살이 되던 해인 1867년, 콘라트는 어려운 환경에서 생활했지만 그래도 어찌어찌 유년학교에서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여 테레지아 육군사관학교[20]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콘라트는 이곳에서 사회진화론을 처음으로 접하고 배우게 되었다. 콘라트는 사회진화론에 점차 깊은 관심을 보였고, 얼마 안가 사회진화론의 열렬한 신봉자가 되었다. 이후 학문적으로 두각을 나타낸 콘라트는 동기들에게 인기가 있었다. 4년 후, 콘라트는 우수한 성적으로 사관학교를 졸업하여 19살의 나이에 오스만 제국과 인접한 국경에 주둔 중인 오스트리아 제국군 황립 야전 경보병 연대 제 11 보병대대 소속 소위로 임관하였다. 1874년이 되면서 젊은 참모장교를 양성하는 황립 및 왕립 전쟁대학 입학 시험에 합격하여 2년 동안 뛰어난 성적을 거두어 졸업한 후, 커셔에 있는 오스트리아 제국군 황립 후사르 연대 제6기병여단 소속 중위로 진급, 참모장교로 임명된다.1878년, 콘라트의 아버지가 사망하고 콘라트가 세습기사 직위를 이어받는다. 1879년, 제4보병사단 소속 일반참모로 배치되어 보스니아 전선에도 참여하였고, 1년후 대위로 진급하였다. 제47보병사단으로 소속을 옮기고 달마티아 전역에 참여했다. 1883년 렘베르크의 제11보병사단 참모장으로 승진되었고 거기서 야전훈련 개혁에 탁월한 능력을 보였다. 1886년 공병차감인 제국군 대령 아우구스트 폰 레 베아우(August von Le Beau)의 딸 빌헬미네 레 베아우(Wilhelmine le Beau, 1860 ~ 1905)와 결혼하여 다시 빈으로 돌아온다. 빌헬미네와의 사이에서 쿠르트(Kurt, 1887 ~ 1918)[21], 에르빈(Erwin, 1888 ~ 1965)[22], 헤르베르트(Herbert, 1891 ~ 1915)[23], 에곤(Egon, 1896 ~ 1974) 네 명의 아들을 두었다. 모두 아버지를 따라 나중에 장교가 되었다.
2.4.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 시절
2.4.1. 일반참모장이 되기까지
1887년 소령으로 승진한 콘라트는 빈으로 간다. 거기서 황립 및 왕립 전쟁대학 교수로 임용되어 전술에 관련하여 장교들을 교육하였다. 그는 독일, 이탈리아, 러시아, 프랑스 및 발칸반도를 여행하면서 얻은 전술적 경험들을 가르쳤다. 또한 전술에 관한 교과서 ("Zum Studium der Taktik")를 저술했다. 콘라트는 전쟁대학의 장교들 사이에서도 꽤나 인기있는 편이었다. 교수로서도 훌륭했는지 실제로도 그의 가르침을 받은 제자들 대다수가 후에 고위 장교가 되었다. 콘라트는 교수로 재직하는 동안 중령으로 진급했다. 복귀를 요청받은 콘라트는 1892년 제93보병여단의 대대장이 되었다. 1년 후 대령으로 진급한다. 1894년부터 1895년까지 콘라트는 참모장교 지망생 평가위원회의 위원으로 유망한 장교들을 선별하였다. 이후 제국 및 왕립 "카이저" 제1보병연대를 4년간 지휘, 1899년 봄, 콘라트는 트로파우에서 트리에스트로 전보되어 제55보병여단의 지휘를 맡게 되었다. 5월, 그는 여단장에 걸맞은 소장으로 진급하여 마침내 별을 달게 되었다. 당시 그의 나이가 47세였던걸 생각하면 상당한 고속 승진인 셈.트리에스트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최대의 상업 도시였고, 콘라트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해군 고위 인사들과 상류층 인사들과 교류하게 되었다. 콘라트는 휘하 부대를 위한 훈련장 확보에 주력했고, 바소비차 인근에 부지를 마련했다. 1900년 1월, 그의 저서 "보병의 전투훈련(Die Gefechtsausbildung der Infanterie)"의 초고가 완성되어 빈의 출판사를 통해 출간되었다. 그해 여름, 크로아티아에서 열린 제28보병사단 훈련에서 콘라트가 이끄는 제55여단은 사단 내 다른 부대들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고, 이를 참관한 페르디난트 대공로부터 찬사를 받았다.
이후 1901년, 트리에스트에서 발생한 이탈리아계 항만 노동자들이 봉기하자 콘라트는 군을 동원해 무력으로 진압하였는데, 이 사건으로 콘라트는 이탈리아 민족주의 세력을 경계하게 되었고, 점차 이탈리아 왕국과의 동맹 관계에도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 특히 이탈리아 왕국의 트렌티노와 트리에스트의 영유권 주장은 무력 없이는 해결할 수 없을 것이라는 확고한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1903년 9월, 콘라트는 티롤의 인스브루크에 주둔한 제8보병사단장에 임명되었고 같은 해 11월, 중장으로 진급하였다. 콘라트는 티롤 지역을 시찰하며 이탈리아 민족주의 운동의 확산을 목격하게 되었다. 동맹이지만 언제든지 적으로 이탈할 수 있는 이탈리아에 대항하여 전략적 요충지인 티롤 방어를 위해서 콘라트는 국경을 보안하기 위한 작전으로 산악 요새를 건설하고, 병력 증강을 건의, 황립 오스트리아 및 왕립 보헤미아 산악부대(K.k Gebirgstruppe)[24]를 창설하였다.
1904년, 콘라트는 레오폴트 훈장 기사작위를 받았다. 같은 해 9월, 상오스트리아에서 열린 황제 기동훈련에 콘라트의 제8보병사단이 참가해 그의 능력을 다시 한 번 입증했다. 치체리치와 그의 추종자들의 등장이 콘라트의 군 내 위상 강화를 결코 위협하지는 않았다. 1905년 이후 장교단 내에서 부상한 소수의 젊은 장교들에게 콘라트는 늙어보이고 더 이상 첨단에 있지 않은 것처럼 보였을지 모르지만, 그는 여전히 많은 수의 헌신적인 추종자들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는 군 내에서 가장 "현대적인" 장군으로 남아있었고, 이런 점에서 그를 능가하는 고위 장교들, 특히 1905년 75세가 된 일반참모장 벡 포병대장과는 크게 대조를 이뤘다.
콘라트가 이 시점에서 자신을 벡의 후계자로 생각했다는 증거는 없지만, 1905년 황제 기동훈련에서 보여준 제8보병사단의 활약은 콘라트를 그 역할로 밀어올리는 데 크게 기여했다. 1904년 상오스트리아 훈련에 이어, 1905년 훈련은 남티롤에서 실시될 예정이었다. 이 특이한 상황 전개는 콘라트의 제8보병사단이 2년 연속 훈련에 참여하게 됨을 의미했다. 1905년 초, 콘라트의 부인 빌마가 위암 판정을 받아 수술을 받았고, 4월 29일 세상을 떠났다. 빌마의 죽음은 콘라트에게 큰 충격으로 다가왔으며, 사별 후 몇 달 동안 콘라트는 일에 몰두하고자 했고, 기동훈련 준비가 다소간의 치유 효과가 있는 것으로 입증되었다. 같은 해 9월, 논탈 계곡(Nontal)에서 열린 이 모의훈련은 남쪽에서 "적군"인 이탈리아군이 티롤로 공격해오는 상황을 가정했다. 황제 기동훈련은 관례적으로 3일간 지속되었지만, "전투 상황"이 이어지지는 않았다. 하루가 끝날 때 양측이 어디에 위치해 있든 간에, 그들은 몇 주 전 미리 짜여진 새로운 위치에서 다음 날 다시 "전투"를 시작했다.
이런 제약 속에서도 콘라트와 그의 여단장 헤르만 쾨베시 폰 쾨베슈하저와 빅토어 단클은 두각을 나타냈다. 그들의 사단은 처음 이틀 동안 이탈리아 침략군을, 셋째 날엔 오스트리아-헝가리 방어군을 연출했다. 공격과 방어 양측 모두에서 콘라트는 공격했고 탁월한 모습으로 승리를 거뒀다. 콘라트는 후에 훈련이 끝날 무렵 "특히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 전하와 독일, 러시아를 포함한 외국 무관들로부터 상당한 관심이 자신에게 쏠리는 것을 알아챘다"고 회상했다. 당시 콘라트는 이 인정에 "더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 어쨌든 페르디난트 대공은 전년도 상오스트리아 황제 기동훈련 등 이전에도 콘라트를 칭찬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같은 해였던 1905년, 러시아 제국은 일본 제국과 전쟁을 벌였다. 이 전쟁에서 러시아 제국은 장기전을 유도하였으나, 일본의 속전속결에 무너지고 말았다. 당시 이 전쟁을 참관했던 젊은 장교인 막시밀리안 치체리치 폰 버차니 중령은 이 경험을 통해 앞으로 펼쳐질 현대전에 대한 자신의 관점을 1908년에 책으로 출판하였고, 기존의 전술 철학에 반하는 입장으로 콘라트를 비판하였다. 20여전 콘라트가 그랬던 것 처럼, 치체리치 또한 젊은 장교들한테 인기를 끌었다. 하지만 콘라트는 자신의 직권으로 출판을 막을 수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자신과 다른 견해라도 군 내 토론을 위축시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치체리치의 전술 실험을 용인하고 심지어 지지까지 하였다. 다만 치체리치의 주장에 개인적으로 동의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콘라트는 치체리치가 만주에서 관찰한 바가 자신의 지론을 오히려 입증해준다고 생각했다. 가령 일본군의 대규모 정면공격과 돌격 과정에서의 백병전 활용 등은 콘라트가 그간 역설해온 정신력과 공세 정신의 중요성을 방증한다고 본 것이다. 기본 골자는 방어적인 전쟁아닌 공격적인 전쟁이라는 관점에서 콘라트와 일치했기 때문이었다. 어차피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을 기반으로 펼친 콘라트의 견해와 교리는 이미 35년이라는 시간이 지났고, 러일전쟁을 기반으로 펼친 치체리치의 견해와 신식 교리는 기관총의 등장이라는 차이점에서 치체리치의 교리가 더욱 현대전에 적합했기 때문.
이처럼 콘라트는 19세기 말 20세기 초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 내 대표적인 혁신주의자로서의 위상을 공고히 했다. 러일전쟁 후 치체리치 같은 도전자가 등장했지만, 콘라트의 인기와 영향력은 여전히 압도적이었다. 1905년 황제 기동훈련에서의 활약은 콘라트가 곧 제국의 군사 수장이 될 수 있음을 예고하는 듯했다. 또한 여기에는 콘라트 휘하에서 그를 능력 있게 보좌한 쾨베시, 단클 이 둘의 지휘도 한 몫을 했다. 콘라트는 쾨베시와 단클과 훌륭한 관계를 유지했고, 이는 제8보병사단의 전투력 향상 기여의 원인이 되었다. 훗날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중요한 지휘관 역할을 맡게 되는 발판이 되었다.
1906년, 육군 원수 콘라트 |
장차 제국을 이어 나라를 다스리게 될 황태자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은 자신의 핵심 계층을 만들기 위해 열중이었다. 그랬던 그에게 콘라트는 제격 인사였다. 콘라트는 곧바로 프란츠 페르디난트가 만든 그림자 내각의 일원이 되었다. 현대적인 전투 훈련 방식으로 제국군을 개혁하려는 콘라트를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이 눈여겨보았고, 그를 총참모장으로 만들기 위해 프리드리히 폰 벡 장군의 해임을 위해서 황제에게 4년 동안 총참모장 교체를 요구했다. 마침내 벡은 해임되었고 그해 10월 말, 콘라트는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의 제안으로 일반참모장 후보로 물망에 오르게 되었다. 콘라트는 자신의 경험 부족을 이유로 사양했지만,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의 강력한 추천으로 결국 1906년 11월 18일,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의 승인을 받아 일반참모장에 임명되었다.
이제 콘라트에게 육군, 해군 및 예비군의 전시 배치에 대한 작전상의 권한이 생긴 것이다. 군부에서 그의 명목상 상관은 1914년까지는 프란츠 페르디난트였고 그의 사후에는 총사령관 프리드리히 폰 외스터라이히테셴 대공이었으며 그들의 휘하에 있었지만 실질적인 군부의 지도자는 콘라트였다. 1907년에는 추밀원 고문으로 임명되었다. 1908년 11월 15일에 마침내 콘라트는 보병대장으로 진급했고, 1910년에는 남작 작위를 수여받았다.
2.4.2. 특징
콘라트는 정치적인 면에서는 매우 보수적이었지만 군인으로서의 그의 신념은 매우 호전적이며 혁신적이었다. 직접적인 전투를 경험해 본 적은 없었지만 이론과 전술에 대해 광범위하게 연구하였으며, 보병 전술들을 저술한 군사 출판물들이 책으로 출판되어 국내 및 국제적으로 이름을 알렸다. 그는 군의 현대화를 위한, 헌신하면서도 지칠 줄 모르는 운동가였다. 특히 사회진화론 사상에 푹 빠진 콘라트는 그 사상에 입각하여 삶은 "끊임없는 생존 투쟁"으로 구성되어있다고 굳게 믿었으며, 공격만이 유일하게 효과적인 방어 형태라 보았다. 따라서 이 때 갖추게 된 군사적 가치관을 정리하자면, 공격적인 결단력과 목적 있는 추진력, 불굴의 의지를 이해하는 "행동주의"가 되어 "공격은 최선의 방어"로 직결되는 것이 콘라트의 제국주의적 정치 강령이었다. 때문에 콘라트는 그의 보수적인 정치관과는 별개로 장교를 등용할 때에는 나이, 직위, 계급을 가리지 않는 혁신적이고 평등한 모습도 보였다.다만 그의 성향상 군사 계획을 내각과 황실에 상세히 공유하는 일은 별로 없었다. 내각을 구성했던 제국의회에서는 콘라트를 위시한 군부에 대한 간섭이 일체 존재하지 않았고, 황제인 프란츠 요제프 1세조차도 콘라트가 하는 일에는 일절 관여하지 않았다. 물론 가끔씩 황제가 콘라트에게 몇 가지 지시를 내리기는 했었지만, 모든 군사적인 결정은 결국 일반참모장인 콘라트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래서 콘라트는 소위 황제의 매(Falken des Kaisers)라고 일컬어졌다. 뿐만 아니라, 그의 고립적인 성향은 내각과 황실에 그치지않고, 일반참모부 작전실에서도 발휘되었다. 콘라트의 부관들이 매일 그에게 보고를 해야 할 만큼 부하들과는 업무 면에서 함께 부지런했지만, 정작 작전을 구상 할 때는 부관들과 함께 구상하기보다 스스로 연구하는 것을 선호했다. 때문에 콘라트의 수많은 연구와 제안이 그의 손에서 외부의 검토없이 쏟아져 나왔다.[25]
모든 중요한 업무들이 한 사람에게 쏠리게 된 배경으로는 콘라트가 군부에서 작전술의 지식인으로 명성을 날렸던 점을 손꼽을 수 있다. 당시 고전 군사학의 전술 및 역사에 대한 책을 저술했던 콘라트는 당대 유럽 전역의 동향을 연구하여 이상적이라 생각하는 전술들의 본질을 파악해서 자기만의 것으로 완전히 흡수하였다. 그 결과, 콘라트는 장교들 사이에서 비현실적이고 웅대한 계획을 가진 대전략의 귀재로 유명해지게 되었다. 그의 전투 교리는 기동력이 잘 훈련된 보병의 중요성과 모험적이며 항상 공격적인 작전 개념을 강조하였는데, 단 한번의 대규모 전술 기동을 통하여 신속하고 전면적인 측면 공격으로 적을 패배시켜 몇 주만에 평화협상을 이끌어 낼수 있는 대규모 포위전에 대한 환상을 품고 있었다. 간단히 말하자면 모든 작전은 공세 작전이었다. 어떤 상황에서도 신속하고 기동적인 전투가 우선이었다.
콘라트의 강점은 독창성, 결단력, 사명감과 더불어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침착함을 유지하는 능력이었다. 콘라트는 자신이 가진 강점들을 발휘하여 일반참모부를 지휘하였는데, 연병장에서의 사열이나 제식훈련과 같은 전술적으로 의미없는 방법보다는 군인으로서의 기질과 도덕을 기르고 실용적이고 자유롭게 훈련하여 병력을 양성하는 것에 중점을 두었다.
다만 콘라트의 약점은 몇가지 중요한 요소들을 간과했다는 것이었다. 비포장 도로에서의 기동성과, 지형과 기후를 무시했으며 보급과 수송에 대한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했다. 게다가 기관총과 야포의 잠재력을 과소평가하기도 하였다. 대국적인 전략을 짜놓는다고 해도 이를 구현할 전술과, 구체적인 계획 수립에서는 현실적인 부분을 고려하지 않았다. 총력전을 경험해본 적이 없던 콘라트로서는 공세 말고는 한단계 더 높은 전술을 생각치 못한 것이었다.
긍정적으로 볼 점이 있다면 콘라트가 지향하는 사상은 당시만 해도 현대적인 유럽 군사 사상과 일치하였다. 수세기에 걸친 황실 보존을 우선시하는 전시계획 즉, 근본적으로 보수적이며 방어적이었던 합스부르크 가문의 전략적 풍토에서 완전히 단절한다는 것을 상징한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당시 정세를 보면 이탈리아 왕국은 트렌티노 및 발칸반도의 영향력을 확대하고 싶어했고, 동시에 세르비아는 보스니아를, 루마니아는 트란실바니아를 호심탐탐 노리고 있었다. 러시아 제국은 범슬라브주의를 내세우면서 발칸반도를 먹으려는 야욕을 펼치고 있었던 상황에서 콘라트는 제국을 현대적인 국가로 만들고 싶어 했으며, 외교적으로 균형을 만들기보다는 군사적인 행동을 통해 오스만이 가지고 있는 발칸반도를 제국이 먼저 차지함으로써 내부 정치적 상황에 대한 어려움을 타개할 유일한 방법이라고 보았다. 러시아, 이탈리아와의 경쟁에서 슬라브 민족주의에 대항하여 남부 슬라브를 합스부르크 제국이 통합함으로써 군주제를 강화할 뿐만 아니라 이중제국이 삼중제국으로 대체되기를 원하였다. 더 많은 슬라브인들을 제국의 지배하에 두면서 헝가리를 견제할 심산이었던 것이다.
1909년부터 콘라트는 세르비아를 병합하려는 야심이 있었으며, 발칸 동맹이 그리스를 지배하고 있는 오스만 제국을 청산하고 나면 제국에 복속시킬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콘라트는 제국이 다른 열강들에 비해 낙후되어 있는 군대를 개선하기 위해 군비를 대거 증가시키고 현대적인 재무장을 주장했으며, 이탈리아, 세르비아와의 예방전쟁을 계속 요구하였다.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의 열렬한 지지가 있었음에도 외무대신 알로이스 렉사 폰 에렌탈 백작(Alois Leopold Johann Baptist Graf Lexa von Aehrenthal)과 헝가리 의회의 반대로 콘라트의 개혁 및 예방전쟁 시도는 좌절되었다. 폰 에렌탈도 반세르비아 성향인지라 콘라트와 마찬가지로 발칸반도에 제국의 영향력이 확대되길 원했지만, 당시 동맹이었던 이탈리아와의 관계에서는 부정적인 영향이 미치는 것을 우려하였다. 콘라트는 폰 에렌탈이 자기의 요구를 끝까지 들어주지 않자 프란츠 요제프 1세가 평화적인 정책을 원한다고 느꼈다. 따라서 온건파와의 정치적 갈등이 더욱 커져가는 와중에 폰 라이닝하우스 백작 부인과의 불륜 스캔들로 추문이 일어나기도 했다.[26] 이를 견디지 못한 콘라트는 1911년, 일반참모장을 사임하였다. 또한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과의 우호적인 관계도 급격히 악화되었다. 당초 콘라트가 일반참모장에 선임 될 수 있었던 것은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이 콘라트를 육군 개혁의 적임자로 생각해서 지지했기 때문이었지, 군대의 역할에 대한 근본적인 견해는 두 사람이 차이를 보였다.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이 군을 국내 질서 유지의 도구로 보았다면, 콘라트는 전쟁 수행 능력 강화에 방점을 뒀기 때문이었다. 즉, 평화에 대한 강력한 소신을 가진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에게 있어서 호전적인 콘라트는 애초에 서로 맞지 않지않는 셈이었다. 거기다 더해 종교적인 문제도 있었다.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는 엄격한 가톨릭 신자인 반면, 콘라트는 자유주의적이었다. 그리고 사냥을 매우 좋아하였던 황태자와 달리, 콘라트는 사냥을 매우 싫어하였다. 서로 상극이었던 두 사람은 처음부터 서로에게 맞는 사람이 아니었다.[27]
사임 후 1년간은 육군총감으로 임용되었는데, 그와 갈등을 빚었던 폰 에렌탈이 1912년, 평소 앓던 지병의 악화로 외무대신직을 사임하고 그의 뒤를 이어서 레오폴트 폰 베르히톨트 백작이 외무성 장관직에 앉는다. 레오폴트 폰 베르히톨트는 발칸 전쟁이 발발하자 반세르비아 인사였던 그를 다시 재기용하였다. 일반참모장 콘라트는 이탈리아와 세르비아의 팽창주의적인 행보를 목격하여 그들에 대한 불신감을 가지고 양국과의 예방전쟁 개시를 내각에 열심히 촉구하였다. 그의 재임기간 동안 잠재적인 적국인 러시아, 세르비아, 이탈리아에 대한 상세한 작전 계획을 개발했었다. 특히 1913년과 1914년 이 시기에 두 차례 걸쳐 전개된 발칸 전쟁의 결과로 세르비아 왕국의 영토와 군사력이 증가했다. 보스니아 병합에 격렬히 반발했던 세르비아가 정작 이제와선 보스니아에 눈독을 들이자 이 꼴을 보다못한 콘라트는 이를 방지하기 위해서 세르비아를 침공해야 한다고 25번이나 주장했다.
콘라트는 동부전선에서 전쟁이 일어날 경우에 대비하여 두 가지 전쟁 계획을 세웠다. 러시아가 중립을 유지하면 제국의 주력군을 세르비아에 집중시켜서 공격을 하겠지만, 러시아가 참전할 경우 그를 대비해 예비대를 미리 러시아 전선에 보내는 것이었다. 한편, 그의 의견을 지지하는 인사는 레오폴트 폰 베르히톨트 백작, 카를 폰 슈튀르크 제국수상, 재무대신 레온 데 빌린스키(Chevalier Leon de Biliński, 1846-1923), 전쟁대신 알렉산더 폰 크로바틴 남작이었다.
2.4.3. 사라예보 사건
제국의 후계자인 프란츠 페르디난트가 사라예보에서 세르비아 민족주의자에게 아내와 함께 암살당했다. 사건 당시 아그람역에 있던 콘라트는 레멘 보병대장으로부터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의 암살 소식을 전달받았다. 콘라트는 페르디난트 대공 부부의 장례식 다음날인 7월 5일, 쇤브룬 궁전에 방문하여 황실에 알현하였다. 콘라트는 프란츠 요제프 1세가 조카의 죽음에 대해 슬퍼하고 사라예보의 보안이 무너진 것에 대해서 오스카르 포티오레크에게 분노할 거라 예상했으나 정작 프란츠 요제프 1세는 전쟁이 일어날 경우 독일이 제국을 지원할 것인지에 대해 가장 우려하고 있었다.그래서 레오폴트 폰 베르히톨트는 독일의 의중과 지원 약속을 확인하기 위해 헝가리의 외무성 보좌관 알렉산더 폰 호요스 백작(Alexander Graf von Hoyos, 1876-1937)을 베를린에 보냈고, 베를린에서 돌아온 호요스는 7월 7일까지 빈으로 돌아와 제국의회에서 브리핑을 했다. 호요스를 비롯해 레오폴트 폰 베르히톨트 외무대신과 알렉산더 폰 크로바틴 전쟁대신, 레온 폰 빌린스키 재무대신, 카를 폰 슈튀르크 수상과 티서 이슈트반 수상이 제국의회에 참석했고 군부 쪽 인사로는 육군을 대표하는 콘라트, 해군 대표로는 전쟁성 해군부장 안톤 하우스 대장을 대신해 카를 카일러 폰 칼텐펠스(Karl Kailer von Kaltenfels, 1862-1917) 해군소장이 소집되었다. 콘라트와 카일러는 가능한 군사 작전에 대해 논의하기 위해 호출되었기에 그 외에는 토론에 참여하지 않았다.
콘라트의 전쟁 의지는 발칸 전쟁때부터 강경파의 일원이었던 슈튀르크 총리와 빌린스키에게 진즉부터 지지를 받고 있었기에 전쟁 여론은 시간 문제였다. 더불어 베르히톨트도 찬동하고 있었고 세르비아 왕국에 대해 강경한 입장을 보였다. 콘라트는 황위 계승자가 암살 된 것에 대한 대응으로 세르비아에 대한 즉각적인 전쟁을 원하였다. 무력을 써서라도 당장 세르비아를 제압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동료 장군이었던 크로바틴은 그의 의견을 전적으로 지지하였다. 오직 티서 수상만이 망설이고 있었다.
이것은 광신자 1인의 범죄가 아니다. 이 기회를 우리가 놓친다면 우리 제국은 남부 슬라브인, 체코인[28], 러시아인, 루마니아인, 이탈리아인들의 야망의 폭발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정치적인 이유 때문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전쟁을 해야만 한다.
사라예보 사건 발발 질후인 다음날, 콘라트는 제국의회에서 이것을 구실로 전쟁을 주장하였다. 콘라트는 세르비아 왕국의 몰락을 진정 바라고 있었으며, 세르비아를 몹시 싫어했다. 이는 세르비아가 발칸반도에 대한 오스트리아의 비공식적 통치권을 의당 존중하지 못했기 때문만이 아니라 합스부르크 제국 내의 반체제 세르비아인들을 유인하는 자석이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사라예보 사건 발발 질후인 다음날, 콘라트는 제국의회에서 이것을 구실로 전쟁을 주장하였다. 콘라트는 세르비아 왕국의 몰락을 진정 바라고 있었으며, 세르비아를 몹시 싫어했다. 이는 세르비아가 발칸반도에 대한 오스트리아의 비공식적 통치권을 의당 존중하지 못했기 때문만이 아니라 합스부르크 제국 내의 반체제 세르비아인들을 유인하는 자석이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동안 유화 노선을 채택해 온 페르디난트 대공마저 사라졌으니, 콘라트의 전쟁 불가피론은 제국의회를 휘어잡았다. 사라예보에서 페르디난트 대공을 제대로 보필하지 못한 보스니아 총독 오스카르 포티오레크 포병대장도 강경파에 합류했다. 전쟁론자들은 위기를 기회로 바꾸어, 안 그래도 빛이 바래가는 합스부르크의 영광을 되찾고 세르비아의 싹을 잘라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전쟁에 회의적이었던 프란츠 요제프 1세는 정확한 수사 후에 행동할 것을 요구하였고, 베르히톨트 또한 전쟁 불가피성을 인식하면서도 순서가 있다고 주장했으며, 일단 세르비아에 반오스트리아 조직을 해체하고 피격사건의 책임자를 축출하기를 먼저 요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선전포고는 그 다음이었다.
1914년 7월 당시 유럽의 다른 참모총장들과는 달리 콘라트는 내각 각료들에게 자신의 전쟁 계획을 매우 자세하게 설명했다. 콘라트는 제국과 세르비아와의 전쟁에 러시아 제국이 개입할 가능성을 인정했지만 각료들은 1913년 5월과 10월의 위기에서와 마찬가지로 놀라운 결의를 보였다. 슈튀르크와 빌린스키는 국내 사정상 압도적인 전력을 과감히 사용하는 것 이외의 사항은 불가하다고 주장했다. 조치를 장기적으로 애매하게 했다가는 제국 경제에 원치 않는 혼란을 가져올 것이며, 보스니아는 세르비아가 분쇄되지 않는 한 유지하기 힘들것이라고 봤다.
호요스가 베를린으로 떠났던 2주간의 기간 동안 당시 많은 부대들은 콘라트가 농촌 지역의 군대가 연례 기동 전에 수확에 참여할 수 있도록 특별 여름 휴가를 미리 승인해 준 상태였었는데, 다시 곧바로 복귀를 명령하면 수확에 영향을 미칠것이고 제국이 세르비아와 전쟁을 할 의도가 있다는 의혹도 불러 일으킬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 7월 22일, 23일은 빈에서 영국에게 최후통첩을 전달하기 위해 고려할 수 있는 가장 빠른 날짜였다. 아이러니하게도 황실의 단호한 결심은 전쟁의 촉구가 아닌 지연이 되어버렸다.
콘라트는 추수 휴가 보고서를 통해서 확인한 결과 16개 군단 중 7개 군단인 제3군단(그라츠, 제4군단(부다페스트), 제4군단(포조니), 제6군단(커셔), 제7군단(테메슈바르, 제13군단(아그람), 제14군단(인스브루크)은 즉각 동원 명령에 응할 수 없는 상태라는 걸 알게 되었다. 추수가 일찍 끝나지 않는 한 세르비아에 대한 최후 통첩은 본래 날짜보다 며칠 이상 앞서서 보낼 수가 없던 것이다.[29]
7월 7일, 회의에서 콘라트는 각료들을 위한 전쟁 계획을 검토했다. 다시, 그는 계획 B(세르비아에 대한 발칸 전쟁)에 집중했고 계획 R(러시아)을 단순한 우발 사태로 취급했다. 7월 8일 콘라트는 베르히톨트, 호요스 및 기타 주요 외무성 관리들을 만나 베르히톨트로부터 7월 22일 이전 "추수 후에만 최후통첩을 전달할 것"이라는 통보를 받았다. 그러면서 베르히톨트는 콘라트에게 주변국에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거라는 인상을 주기 위해 크로바틴과 함께 휴가를 떠날 것을 제안했다.
휴가에서 돌아온 콘라트는 7월 19일, 베르히톨트의 집에서 극비리에 모임을 가졌다. 카일러 해군소장과 함께 그는 유명한 10개 조항의 초안을 작성할 때 제국의회 구성원에 합류했다. 7월 23일, 최후 통첩이 발송되기 몇 시간 전, 콘라트는 베르히톨트를 만나 일단 동원하면 돌이킬 수 없다며 그들의 이전 이야기를 상기시켰다. 베르히톨트는 콘라트에게 동원 중 만약 세르비아가 항복한다면 어떻게 되냐고 물어보자 콘라트는 세르비아한테 제국이 동원을 일으키게 만든 책임을 비용으로 물게 할 것이라고 대답하였다. 그리고 이탈리아가 만약 동맹을 배신하면 어떻게 할 거냐는 의견이 나왔을 때 콘라트는 이탈리아를 두려워해서는 세르비아를 상대로 전쟁을 할 수 없을 것이라고 하였다. 당시 이탈리아 왕국군 참모총장은 알베르토 폴리오 중장(Alberto Pollio, 1852-1914)으로 그는 평소 헬무트 요하네스 루트비히 폰 몰트케 일반참모장과 콘라트와 돈독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특히 폴리오는 콘라트가 개인적으로 신뢰하는 유일한 이탈리아 장군이었다. 그랬기에 콘라트는 이탈리아를 동맹으로 생각했으나 폴리오가 사라예보 사건 3일후에 심장마비로 사망하여 이탈리아의 동맹은 점차 흔들리게 되었다. 이미 낙관론자들을 제외하면 제국 내부의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는 이탈리아가 삼국 동맹에 충실하지 않을 거라고 예상하고 있었다.
7월 25일, 세르비아가 제국의 최후 통첩을 거부한 날, 콘라트는 세르비아 왕국군의 참모총장 라도미르 푸트니크 원수(Радомир Путник / Radomir Putnik)[30]의 운명에 대해 논란이 되는 결정을 내렸다. 푸트니크는 당일 오스트리아의 바트 글리헨베르크에 휴가를 와 있었는데, 자신의 나라가 곧 그가 휴가를 보내고 있는 나라와 전쟁을 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잊고 있는 것 같았다. 제국의회가 베오그라드에 최후 통첩을 보낸 후 푸트니크는 휴가를 끝내고 서둘러 집으로 돌아가려다가 부다페스트에서 기차를 갈아타던 중 경찰에 체포됐다. 다음날 베르히톨트는 그의 처분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 의견을 구하기 위해서 호요스를 콘라트에게 보냈는데 콘라트는 푸트니크를 곧바로 풀어주기 결정한 것이었다. 베르히톨트는 푸트니크에게 베오그라드행 특별 열차를 제공해주었다. 당시 콘라트의 친구 요제프 레들리히(Josef Redlich, 1869-1936)조차도 이러한 콘라트의 행보를 "거짓된 기사도"라고 비판했다. 그러나 콘라트의 결정은 당시 사람들의 가치관과 일치했다.
콘라트는 개인적인 요인에 따라 몰트케와 폴리오를 다루는 데 있어 중요한 결정을 내렸지만, 그렇다고 전쟁을 군사 지도자들 사이의 경쟁으로 보지 않았고, 1차 세계 대전 중에 적 지도자의 자질이나 능력을 자신의 전략 요소로 고려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가 가진 사회진화론적 사고방식을 통해 풀어보자면 콘라트에게 전쟁은 보다 더 광범위한 세력들의 충돌로 이루어지는 것 뿐, 그 세력에 속한 개인(심지어 전시 일반참모장으로서 자신도 포함)은 다소 미미한 역할을 수행 한다는 걸로 보았기 때문이었다.
콘라트는 전쟁을 빨리 시작하고 싶어 안달복달했었다. 7월 25일 저녁, 마침내 프란츠 요제프 1세는 발칸 전쟁을 위한 계획 B의 실행을 승인했다. 그러나 황제의 서명을 얻어낸 것이 무색하게도, 막상 전쟁이 터지려고 하는 시점에서는 오헝제국군이 전쟁을 치를 준비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을 콘라트는 뒤늦게 깨닫게 되었다. 베르히톨트가 콘라트에게 선전포고를 언제 해야 될지 질문했을 때, 콘라트는 동원이 완료되고, 군사 작전이 준비가 되는 8월 12일에 선전포고해야 한다고 말했다. 제국군은 2주 정도 지나야 작전할 준비가 끝난다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서 베르히톨트는 외교 상황의 급박함 때문에 그럴 수 없다고 반대했다.
제국군은 전면전을 대비한 동원령이 발령될 경우 16만이었던 병력을 최대 330만까지 증강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20세기 들어 국력의 쇠퇴에 따른 재정 부담으로 인해 국방비를 지속적으로 절감해 왔기에 단지 병력만 늘린다고 전력이 대폭 증가되기는 어려운 상태였다. 장비 수준도 높지 않았다. 그나마 당시 열강들의 제국의 제식 소총 열풍에 덩달아 만든 만리허 소총만이 자랑할 만한 무기였다. 전쟁 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국방비는 독일이나 러시아의 25퍼센트 수준 밖에 되지 않아 당연히 질적 수준이 뒤질 수밖에 없었다. 불과 10년 전 러일전쟁에서 망신을 당하고 덩치만 큰 약체라고 조롱받던 러시아조차 오스트리아를 만만하게 볼 정도였다. 오스트리아도 이런 약점을 잘 알고 있어서 러시아가 세르비아에 대한 적극적인 지원을 천명했을 때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국경을 직접 맞대고 있었으므로 까딱하다간 러시아와의 전면전으로까지 번질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최강을 자부하는 독일이 도움을 주기로 했다는 점이었다.
오스트리아는 전쟁 개시 직전에 16개 군단중에 일단 애초에 계획했던 병력의 60퍼센트 수준인 200만을 7개 군단으로 서둘러 편성할 수 있었다. 콘라트는 세르비아 침공에 50만, 북동쪽에서 러시아를 견제하는 데 100만, 그리고 중앙에 예비대로 50만을 할당했다. 우선 목표인 세르비아에 집중하지 못한 모양새 같았지만, 50만 정도면 충분히 제압할 수 있고 오히려 작전의 성패는 러시아의 움직임을 얼마나 막을 수 있냐에 달려 있다고 낙관했다. 하지만 문제는 12개 언어[31]로 공표된 포고문에서 알 수 있듯이 병력의 60퍼센트 정도가 슬라브인을 포함한 소수민족이라는 점이었다. 이들이 세르비아나 러시아와 싸울 때 얼마나 충성심을 발휘할 것인지는 미지수였다. 결국 실제로 믿을 수 있는 것은 오스트리아와 헝가리 출신의 병력인데, 이들도 평소에 제국의 지휘를 받은 것이 아니라 각각 오스트리아와 헝가리 정부의 통제 하에 있어서 전투력이 미지수였다.[32][33]
팔켄하인의 속셈은 일단 서부전선을 정리한 후 80개 사단을 모두 동부전선에 투입해서 러시아 제국에게 뜨거운 맛을 보여줌으로써 평화를 애걸하게 만든다는 것이었다. 반면 콘라트는 러시아의 병력 동원 속도가 느리다는 점을 감안할 때 8월 말까지는 제국군이 러시아 제국군에 대해서 수적 우위를 점할 수 있다고 판단하고 그 사이에 러시아령 폴란드(바르샤바 돌출부)의 남쪽 측면을 최우선으로 공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34][35][36]
콘라트는 가능한 한 빨리 전쟁을 끝내기 위해 세르비아에 가장 강력한 타격을 가하기를 원했다. 북동쪽 국경에서에 러시아군 마주하기 전에 신속히 세르비아를 침공해서 항복을 받아내야 했다. 여기서 독일이 러시아를 압박만 해준다면 러시아는 세르비아에 개입하기 어려울것이고 제국이 손쉽게 세르비아를 손아귀에 넣을 수 있을 것이라는 심산이었다. 그러나 7월 30일, 러시아 제국은 총동원령을 내렸다. 이는 독일 제국의 슐리펜 계획의 속행을 의미하였다. 제국의회는 세르비아 침공이 러시아와의 전쟁과 유럽에서의 전면전을 의미할지라도 지지하겠다고 입장을 밝혔다.
1914년 7월 28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세르비아 왕국에 공식적으로 선전포고했다. 러시아와의 전쟁이 확실해지자 콘라트는 지난 며칠간. 자신의 잘못을 바로잡기 위해 애썼다. 플랜 B는 취소되어야 했고 플랜 R이 실시되면서 세르비아에 대한 공세는 제한적이 되었다. 문제는 콘라트가 절반의 병력만 가지고 있다는 것이었다.[37]
7월 31일, 러시아와 세르비아에 대한 양면 전쟁을 예상하여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는 나머지 8개 군단(AStaffel)을 활성화하는 총동원령을 내렸고, 황제의 명령으로 황립 및 왕립 군사령부와 최고사령부(Armeeoberkommando, 이하 A.O.K.)가 개설되었다. AOK의 총사령관에는 콘라트와 프리드리히 대공의 사이가 좋은 점을 고려하여 프리드리히 대공이 임명되었다. 본부는 프리드리히 대공의 영지인 테셴에 자리를 잡았다. 다만 프리드리히 대공은 명목상의 지휘관이었고 실질적인 지휘관은 총참모장인 콘라트였다.[38] 제국의회는 해산되었고, 전시동안 오스트리아 정치인들은 군법에 따라야 했고, 육군총사령부의 권한은 막강해졌다. 콘라트는 사실상 오스트리아 제국의 통치자가 되었다. 티서가 가능한 한 많은 평시 특권을 유지하면서 정부 기능을 유지했던 헝가리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보스니아에는 총독인 포티오레크가 있었기 때문에 콘라트의 권한이 적게 닿았지만 명목상 AOK의 통제 하에 있을 뿐, 나머지 전시 자원동원은 콘라트의 지시에 따라 진행되었다.
2.4.4. 제1차 세계 대전
2.4.4.1. 동부전선
1914년, 콘라트 | 브리핑하던 모습[39] |
육군총사령부의 총괄 지휘관인 콘라트는 6개의 군을 편성하였는데, 다음과 같다.
- 에두아르트 폰 뵘에르몰리 기병대장을 제2군 사령관으로 임명하고 세르비아에 배치.
- 루돌프 폰 브루더만 기병대장을 제3군 사령관으로 임명하고 동부 갈리치아의 그닐라-리파강에 배치.
- 모리츠 폰 아우펜베르크 보병대장을 제4군 사령관으로 임명하고 갈리치아의 첼름에 배치.
- 리보리우스 폰 프랑크 보병대장을 제5군 사령관으로 임명하고 세르비아에 배치.
- 오스카르 포티오레크 포병대장을 제6군 사령관으로 임명하고 세르비아에 배치.
콘라트는 동부전선에 있는 프셰미실 요새로 출발하기 위한 준비를 하였다. 그전에 미리 가족들과 마지막 휴가를 떠났었다. 그 후, 폐질환으로 요양 중인 장남 쿠르트를 제외한 콘라트의 아들들은 장교로서 일찍이 전선으로 이동했다. 차남 에르빈은 제10기병연대로, 막내 에곤은 18살이었는데, 테레지아 육군사관학교로 돌아가기 보다 셋째 형인 헤르베르트가 복무 중인 제15기병연대에 지원하여 기초군사훈련을 받게 되었다.[40] 89세였던 노모 바바라의 집을 방문하여 출발 전 마지막 인사를 하였다. 8월 15일 아침, 콘라트는 전선으로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황제와의 접견을 하기 위해서 쇤브룬 궁전을 찾아갔다. 모임이 끝날 무렵 노쇠한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는 콘라트의 손을 잡고 감정이 가득 찬 목소리로 말했다.
"신의 뜻대로, 모든 것이 잘 될 것입니다만, 설령 잘못되더라도, 나는 끝까지 해낼 것입니다."
8월 15일, 콘라트는 프리드리히 대공과 카를 대공을 대동하여 나머지 육군 총사령부의 참모들과 함께 특별 열차를 타고 이틀 만에 프셰미실 요새에 도착하였다.
2.4.4.2. 세르비아 침공
7월 29일 다음 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 군함들이 도나우강을 타고 올라와 세르비아의 수도 베오그라드를 포격했고, 오스카르 포티오레크 포병대장이 지휘하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 제2군, 제4군, 제6군은 사바강과 드리나강을 도하할 준비를 했다. 당시 세르비아 왕국군은 45만 명의 병력과 엉성한 훈련을 받은 몬테네그로인 보조병들만을 갖추고 있었다. 세르비아 왕국군 총사령관 라도미르 푸트니크 원수는 압도적인 적을 맞아 세르비아 병사들의 목숨을 최대한 비싼 값에 팔 각오를 다졌다.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서 불가리아 왕국에 이르는 450마일에 달하는 국경선을 지켜야 했던 푸트니크는 휘하의 3개 군을 세르비아 중부 지역에 배치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나 불가리아 왕국 어느 쪽이 침공해와도 대처할 수 있도록 병력을 배치했다. 푸트니크는 소수의 병력으로 주요 하천 방어선을 지키고 있다가 오헝군의 주요 도하 지점을 포착한 후 자신이 선택한 장소에 전략을 집중해 제국군을 공격한다는 계획을 짰다. 푸트니크가 정확하게 오헝군의 주공 방향을 예측한 덕분에 오헝 제국군이 실제로 세르비아 왕국을 침공해왔을 때 세르비아군은 이를 맞아 싸울 만반의 준비를 갖춘 상태였다. 반면, 포티오레크의 전략은 미적지근하기 그지없었고, 제대로 훈련도 받지 못한 그의 병사들 중 상당수는 동포 슬라브인 세르비아군과 싸울 의욕도 없었다. 당시 군기가 해이해져 있던 제국군은 세르비아 민간인들을 상대로 끔찍한 전쟁범죄를 저질렀다.
콘라트는 이 지역에 제2군도 투입할 생각이었지만, 당시 제2군은 세르비아 공격을 위해 발칸으로 이동하던 중이었다. 러시아 제국군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은 시점에서 콘라트는 제2군이 세르비아 전선으로 빠짐으로써 갈리치아 일대가 취약해졌음을 뒤늦게 깨달았다. 7월 30일, 콘라트는 다시 제2군을 갈리치아로 되돌리라고 명령했지만, 철도 이용량의 폭주로 인해 제2군의 복귀는 늦어질 수밖에 없었다. 결국 제2군이 삼보르(Sambor) 동쪽의 방어선에 자리를 잡은 것은 8월 25일이 되어서였다.
8월 1일, 독일 제국은 러시아 제국에게 선전포고를 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도 8월 6일 러시아에 선전포고를 하고 마침내 양면전쟁을 공식화했는데, 전반적으로 전략적 상황은 콘라트가 예상했던 것보다 암울하지는 않았다. 적어도 이탈리아 왕국과 루마니아 왕국은 여전히 중립이었다. 레들리히는 8월 첫째 주에 콘라트가 확실히 절망하지 않았음을 확인했다. 8월 4일 레들리히는 이를 회상할 때 빈에서 콘라트을 만났을 당시 콘라트의 상태가 차분하게 좋았다고 말했다. 동원은 콘라트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잘 진행되고 있었다. 펼쳐진 철도 문제는 실망스러웠지만 수백 대의 기관차가 하루마다 평균적으로 7,000명의 병력과 보급품을 전선으로 수송하고 있었다. 독일계, 헝가리계, 슬라브계 가릴것없이 남성은 황제에 대한 충성과 애국심으로 앞다투어 입대를 하였고, 이는 진정으로 콘라트를 놀라게했다.
8월 12일, 세르비아에서 본격적인 전투가 시작되었다. 9일 간의 치열한 격전 끝에 세르비아군은 자다르 전투에서 오헝 제국군을 공격개시선으로 밀어내버리면서 퇴각하는 오헝군을 쫓아 보스니아까지 진격해 들어갔다. 오헝 제국군은 압도적인 전력을 갖추고도 결의에 찬 세르비아군의 반격에 무질서하게 패주했다.
9월 7일, 포티오레크는 다시 한 번 세르비아군을 공격하여 너무 멀리 진출해 나온 세르비아군을 보스니아에서 축출하려고 했다. 세르비아군은 용감하게 싸웠지만 압도적인 전력 차이를 극복할 수는 없었다.
세르비아군은 11월 29일, 어쩔 수 없이 수도 베오그라드까지 내주고 퇴각을 계속해야 했다. 그러나 12월 3일, 질서정연하게 남서부 방면으로의 철수작전을 끝마친 푸트니크는 콜루바라강에서 반격에 나섰다. 이때까지도 페타르 1세는 소총과 50발의 실탄을 지니고 최전선에 머물러 있었다. 독기 어린 세르비아군의 반격에 제국군은 다시 한 번 무질서하게 패주했다. 12월 15일 무렵, 세르비아군 정찰대가 다시 수도 베오그라드로 진입했다. 이렇게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의 세 번째 침공 역시 지리멸렬하게 끝나버리고 말았다. 콜루바라 전투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은 27만 명에 달하는 피해를 입고 133문의 야포까지 잃었으며 거듭된 졸전의 책임자였던 포티오레크는 결국 오이겐 대공으로 교체되었다.
이후 제국군은 전황이 급박해진 동부전선에 주의를 돌리면서 세르비아 전선은 소강상태를 맞게 되었다. 1915년 여름 동안 오스트리아와 세르비아 사이에는 국지적인 소규모 교전 이상의 전투는 벌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큰 문제가 동부전선에 도사리고 있었다.
2.4.4.3. 갈리치아 전투, 바르샤바 전투
1914년 8월 23일, 마침내 동부전선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러시아 제국 사이의 첫 번째 대규모 교전인 크라시니크 (Kraśnik) 전투가 발생했다. 콘라트 폰 회첸도르프의 계획에 따라, 빅토어 단클 기병대장을 위시한 제1군은 루블린 방향으로 적과의 접촉을 적극적으로 시도하고, 적을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쪽으로 밀어내며, 동시에 독일 제국군의 시들체 방향 작전과 연계하여 폴란드 왕국의 불리한 전선 돌출부를 바로잡아야 했다. 산강 선에 집중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1군은 8월 20일부터 갈리치아 북부 국경을 넘어 전진했다. 오헝군의 공세에서 좌익은 비스와강 동안으로 보호받았고, 서안의 산도미에시에서는 하인리히 쿠머 폰 팔켄펠드(Heinrich Kummer von Falkenfeld, 1852-1929) 기병대장의 오스트리아-헝가리 집단군이 동시에 전진하며 지원해야 했다. 동시에 동쪽 측면에서는 모리츠 아우펜베르크을 위시한 제4군이 단클의 진격에 동반했다.전투 시작 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은 러시아 제국군에 비해 수적 우위와 더 나은 전략적 출발점이라는 이점을 가지고 있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1군은 10.5개 보병사단과 2개 기병사단으로 구성되었던 반면, 러시아 제4군은 전투 첫날과 둘째 날에 6.5개 보병사단만을 보유했지만 3.5개 기병사단으로 강화되어 있었다. 콘라트 폰 회첸도르프의 지시에 따라, 쿠머 집단군을 비스와강 서안에서 신속히 이동시켜 공격 작전을 강화했는데, 이는 러시아 남서부 전선 참모총장 미하일 알렉세예프가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8월 22일, 단클 장군은 군대에 북쪽으로의 공세를 명령했고, 그의 목표는 루블린 방향으로의 돌파였다. 알렉세예프 장군은 더 뒤에 있던 파벨 아다모비치 플레베의 제5군에게 제4군과 합류하고 그 좌익을 보호할 수 있도록 더 빨리 전진하라는 명령을 늦게 내렸다. 이 명령이 러시아 제4군에 더 강한 출발 위치를 제공했을 수 있었지만, 이후의 전술적 패배를 막지는 못했다.
같은 시각, 오헝군 제1군 좌익에 배치된 카를 폰 키르히바흐 기병대장의 지휘 하에 그의 부하 아돌프 폰 브루더만이 이끄는 제1군단 제3기병사단이 제5사단 및 제46사단과 함께 안나폴 동쪽에서 적과 조우했다. 제1군 중앙에서는 파울 푸할로 폰 브를로크의 제5군단이 제14사단과 제33사단을 이끌고 야누프를 지나 비스트르지스타강 양안을 따라 북쪽으로 진격, 러시아의 제14군단과 제16군단은 정면 공격에 밀려 후퇴했다. 또한 단클의 우익에서는 제10군단이 8월 22일 제2사단, 제24사단, 제45사단을 이끌고 전투 없이 타네프강을 건너 북쪽의 비엘고라이로 향했고, 러시아 근위군단과의 전투에서 폴리흐나-투로빈 선에서 비에프시강까지 도달했다. 8월 24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5사단과 제46사단이 크라시니크에 진입했고, 비스와강 쪽으로의 서방 엄호는 이제 제12사단이 맡았다. 24일과 25일, 제1군은 공격을 성공적으로 계속하여 좌익을 포위를 위해 전진시켰고, 패배한 우익을 적시에 흐워델강 뒤로 철수시켰다.
이 전투는 서부전선을 지배하게 될 참호전과도 다르고, 대개 더 큰 규모의 병력이 투입되는 동부전선의 전투 양상과도 달랐다. 어느 군대도 장기 방어를 위한 진지를 구축할 시간이 없었기 때문에 참호를 파지 않았다. 대신 전투는 더 기동성 있게 진행되었고, 양측이 총 5.5개 기병사단을 투입할 수 있었기 때문에 대규모 기병 전투가 포함되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의 성공으로 북부 갈리치아로의 러시아 침공은 일단 저지되었고, 열세에 있던 러시아군 사령관 살차 남작은 전투 중에 에베르트 장군으로 교체되었다. 크라시니크 전투는 렘베르크 전투와 연관된 갈리치아 대전선을 따라 일련의 추가 충돌을 촉발했다. 8월 27일에 전투가 다시 격화되었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1군단과 제5군단은 심각한 손실을 입었다. 8월 30일까지 단클은 요제푸프에서 비스와강을 건넌 보이르시 지휘 하의 슐레지엔 향토방위군단으로 증강될 수 있었다.
이 전투 사흘 뒤에 벌어진 코마루프(Komarów) 전투도 크라시니크 전투와 같은 양상이었다. 모리스 아우펜베르크의 작전 목표는 헬름으로의 돌파였고, 1914년 8월 26일 코마루프에서 파벨 아다모비치 플레베 지휘 하의 러시아 제5군과 조우했다. 플레베의 우익은 이전 전투로 이미 약화되어 있었다. 따라서 공격자들은 1914년 9월 1일까지 지속된 전투에서 전술적 승리를 거두고 많은 포로를 잡는 것이 더 쉬웠다. 그러나 러시아군을 포위하려는 시도는 실패했다. 8월 25일부터 제4군은 세 개 군단(셰무아 보병대장의 제2군단, 보로예비치 보병대장의 제6군단, 프리델 중장의 제9군단, 8월 27일부터는 호르트슈타인 장군)으로 자모시치-토마쇼프 선으로 전진 중이었고, 제17군단이 제6군단 뒤를 따랐다. 우익에서는 요제프 페르디난트 대공의 제14군단이 라바-루스카 지역에서 북쪽으로 전진했다. 동쪽으로의 우익을 비트만 중장의 기병군단이 엄호했고, 이들은 렘베르크 지역을 동쪽으로 러시아 제3군의 전진에 대비해 방어하던 제3군 사령관인 루돌프 폰 브루더만과 연락을 유지했다. 전투 초기에 러시아 제국군 제5군은 7.5개 사단만을 보유하고 있었고, 추가 6개 사단은 다음 날에야 전투에 참여할 수 있었다. 8월 26일, 모리스 아우펜베르크의 좌익 공격이 시작되어 러시아군을 자모시치에서 격퇴했다. 크라시니크 전투와 코마루프 전투로 러시아 제5군에게 40%의 사상자를 내고 2만 명의 포로와 100문의 포를 노획하는 큰 승리를 거둔 것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의 첫 번째 주요 승리였다.
빅토어 단클과 모리츠 아우펜베르크는 이 공로로 훗날 작위를 받았고 각각 "크라시니크의 단클"과 "코마루프의 아우펜베르크"라는 칭호를 얻게 되었다. 단클은 콘라트의 오른팔이었고, 아우펜베르크는 콘라트의 오랜 친구였기 때문에 승리가 더욱 각별하게 다가왔다. 그러나 단클과 아우펜베르크가 국민 영웅으로 추앙받은 기간은 짧았다. 첫 승리가 무색하게도 그의 단클의 제1군은 이미 1914년 10월 이반고로드 전투에서 패배했고, 11월 말까지 심각한 손실을 입으며 니다강과 필리차강 뒤 크라쿠프 북부 전초 지대로 후퇴해야 했다.[41]
중앙의 제6군단은 타르나바트카에서 러시아 제19군단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혔다. 8월 27일, 새로운 러시아군의 개입이 시작되었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4군의 우익이 위협받았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6군단과 제17군단은 더 이상 전진할 수 없었다. 8월 28일, 좌익에서 제25사단이 자모시치를 점령했지만, 중앙에서 제15사단이 티쇼프체에서 러시아군의 공격에 패배했다. 8월 29일부터 31일까지 전투가 계속되었고, 양측 모두 포위를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9월 1일,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의 전술적 승리가 완성되었고 러시아군은 부크강으로 후퇴했다. 그러나 그닐라-리파 전투에서의 제3군 패배로 이 승리의 의미가 퇴색되었다. 결과적으로 러시아군은 26,000명의 손실(포로 10,000명 포함)과 156문의 포를 잃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군도 40,000명의 손실을 입었다. 이 전투는 오스트리아-헝가리군에게 승리였지만, 동시에 발생한 그니라 리파 전투에서의 패배로 인해 전체적인 전황은 러시아에 유리하게 변화했다.
이렇게 크라시니크 전투와 코마루프 전투 등, 오헝이 승리한 전투도 더러 있었고 패배한 전투도 많았지만 현대 군사 문헌은 1914년 당시의 오헝군의 동부전선을 갈리치아 전투라는 명칭으로 통합하고 있는 실정이다. 9월 5일, 에베르트 장군은 루블린 남부 전초 지대에서 강력한 반격을 시작했고, 이로 인해 단클은 9월 7일 후퇴 명령을 내려야 했다. 다른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의 일련의 추가 패배로 인해 9월 11일 렘베르크가 함락되었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1군의 전선도 다시 산강 뒤로 철수해야 했다.[42][43]
한편, 1914년 8월 26일에 제국군 제3군은 루돌프 폰 브루더만 기병대장의 지휘하에 러시아 제국군의 제5군을 공격했다. 다만 이후 이어진 코마루프(Komarów) 전투는 브루더만에게 있어서 재앙과도 같은 것이었다. 알렉세이 브루실로프의 선봉 부대가 제3군을 공격해올 때까지만 해도 브루더만은 이들 바로 뒤에 러시아군의 본대가 따라오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이날 브루더만은 군단 간의 작전 조율이나 포병 사격 계획도 없이 2개 보병 군단을 동원해 마구잡이로 반격에 나섰지만 격퇴당하고 말았다. 제3군은 제1군과 제4군이 북쪽에서 러시아의 주력을 맡을거라고 예상했고, 중앙에서 주로 방어적인 역할을 수행할 것으로 계획하였다. 하지만 러시아군은 예상과 달리 제3군 정면에 주력을 집중했다. 예상치 못한 러시아의 전략으로 제3군이 큰 압박을 받게 되었고, 포모르자니 주변에서 러시아군과 교전중이던 제12군단은 이 지역에서 세 방향에서 러시아군의 압도적인 병력에 위협을 받았다. 결국 8월 27일, 콘라트 폰 회첸도르프는 초기 공세 계획이 실패로 돌아가자 제3군에게 그닐라 리파(Gnila Lipa)에 새로운 방어선을 구축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사실상의 전략적 후퇴 명령이었다. 그러함과 동시에 러시아군은 추격 작전을 개시하였다. 상황이 안좋게 돌아가는 걸 본 회첸도르프는 제2군 휘하 제7군단 소속의 제34사단을 급히 그닐라 리파로 파견했지만 그들이 도착하기도 전에 러시아 군의 공세에 그닐라 리파 방어선마저 바로 무너지고 말았다. 쾨베시의 제12군단의 우익 지원 부대가 브제자니(Brzezany)에서 러시아 제8군에 의해 크게 패배했고, 간신히 알렉세이 브루실로프 장군의 포위 시도를 피할 수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제12군단은 러시아군의 수적 우세와 강력한 화력으로 인해 방어선을 유지하기 어려웠다. 쾨베스는 후퇴하는 부대들을 위해 스비르즈(Swirz)강 구간에 새로운 방어선을 구축하려 했으나, 전반적인 전황 악화로 이 시도는 성공하지 못했다. 중요한 방어 책임을 맡았던 제12군단이 무너지자 제3군은 렘베르크까지 후퇴하게 되었다. 이 사태로 루돌프 폰 브루더만은 경질되었고 그의 후임으로 스베토자르 보로예비치 보병대장이 제3군을 인계받았다. 다만 여전히 우려되는 점은 무너질 대로 무너진 전선으로 인해 모리츠 아우펜베르크의 제4군과 스베토자르 보로예비치의 제3군이 이제 북서쪽과 남동쪽에서 쏟아져나올 협공 작전의 위협에 직면했다는 것이었다 콘라트 폰 회첸도르프는 9월 1일, 렘베르크로 후퇴하는 군대를 보고 제3군을 베레시차 선의 방어 진지로 후퇴시켜 재편성과 반격을 위한 필요한 시간을 확보하기로 결정했다. 콘라트 폰 회첸도르프는 코마루프 전투에서의 전술적 승리 후 러시아군이 북부 전선에서 충분히 약화되었다고 잘못 판단하여, 토마쇼프(Tomášov) 근처의 북부 전선에서 제4군의 주력을 빼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 재편성된 군대로 렘베르크 서쪽으로 진격하는 적의 측면을 다시 공격하여 잃은 주도권을 되찾으려 했다. 그전에 독일 제국군에 요청한 추가 지원이 무위로 돌아가자, 콘라트 폰 회첸도르프는 지친 제3군을 베레시차 진지에서 다시 공격하게 하기로 결정했다. 기존 제3군의 병력에 세르비아에서 철도로 이동해 온 에두아르트 폰 뵘에르몰리의 제2군으로 보강한 후, 렘베르크 동쪽의 방어 전선을 150개 대대와 828문의 포를 갖춘 강도로 다시 구축했다. 또한 헤르만 쾨베시 보병대장 휘하의 제12군단을 제2군 예하로 편입하여 루비엔-코마르노-루드키(Lubień—Komárno—Rudki) 사이의 전선에 배치했다. 러시아군의 끈질긴 추격과 압박 속에서도 콘라트는 새로운 병력을 전선에 투입하며 재편성 시도에 노력했다.
그러나 9월 2일 콜로메아(Kolomea) 전투에서 또 다시 패배를 당했고, 뒤이어 벌어진 9월 3일에는 라바-루스카(Rava-Ruska) 전투가 발발했다. 9월 5일, 콘라트는 재편성된 제4군으로 제3군의 공세를 끊어낼 준비를 하였다. 그러나 이미 약해질 대로 약해진 오헝군은 9월 7일, 러시아군은 격렬한 전투 끝에 그로데크(Gródek) 시를 점령했다. 9월 8일, 베레시차(Wereszyca)강을 따라 약 100km에 걸친 전선에서 전투가 확대되었다. 렘베르크 북쪽 약 50km 지점의 라바-루스카에서도 러시아군과의 전투가 벌어졌고, 역시 오헝군이 수세로 일관하였다. 이로 인해 갈리치아(Galizien)의 오스트리아 전선 전체가 붕괴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러시아의 지속적인 공세에 못이겨 오헝군이 밀려나자 이에 당황한 오헝 최고사령부와 콘라트 폰 회첸도르프는 9월 6일에 렘베르크 방어의 어려움을 인식하고 렘베르크 포기를 결정, 프셰미실 요새로의 후퇴를 명령하였다. 그런데 하필이면 9월 8일에 제2차 렘베르크 전투마저 발발하면서 오헝군은 마지막 방어를 시도하였다. 하지만 이 전투에서도 패하며 방어선이 무너지자 오헝군은 철수하였고, 그렇게 렘베르크는 결국 러시아군에게 맥없이 함락되었다. 패하면서 렘베르크라는 도시 하나를 잃었지만 이 도시가 갈리치아의 수도이자 중요 도시였다는 점에서 렘베르크의 포기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게 큰 타격이었다. 결과적으로 갈리치아 대부분을 잃고 만 것이었다. 또한 이는 동부전선에서의 전략적 후퇴의 시작을 의미했다. 그렇게 약 3주 동안 연전연패 끝에 32만명이라는 사상자를 낸 오헝군은 뼈아픈 손실과 함께 카르파티아 산맥까지 후퇴하고 말았다.[44]
러시아군이 지나치게 신중한 움직임을 보이면서 제국군은 전선의 붕괴라는 최악의 사태는 모면했지만, 총 35만 명에 이르는 제국군 병사들이 전사하거나 부상당하거나 포로가 되었으며, 이는 전체 제국군 전력의 반에 해당하는 규모였다. 이뿐만 아니라 15만 명의 제국군이 집결해 있던 프셰미실 요새까지 러시아군에게 포위당하게 되었고, 밀리던 제국군은 9월 16일 무렵 두나예츠(Dunajec)강 건너편으로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제국군 제1군과 제4의 측면을 보호하는 임무를 위해 배치된 제3군을 지원하는 부대는 제3군 남쪽과 서쪽에 배치된 무장이 가벼운 쾨베시 중장이 이끄는 제3군소속 제3군단과 제12군단뿐이었다. 이때 쾨베시 중장의 제12군단도 오헝군의 전반적인 재편성을 거치며 제2군으로 재배치되었다. 제3군은 적절한 방어 태세를 갖추지 못하고 대패를 당한 책임으로 루돌프 폰 브루더만 기병대장이 경질되고 보로예비치 보병대장이 제3군의 사령관에 임명되었다. 제4군의 경우 렘베르크-라바루스카 전투 과정에서 제4군의 늦은 참전이 문제가 되어 아우펜베르크도 해임 될 위기에 처해있었다. 콘라트는 아우펜베르크의 해임을 매우 꺼렸지만, 프리드리히 대공 압박으로 마지못해 해임을 승인하였다. 콘라트는 개인적으로는 아우펜베르크의 전투 지휘를 긍정적으로 평가으나, 어쨌든 전체적인 전역의 실패에 대한 책임을 물어야 하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오랜 친구를 해임할 수밖에 없었다.[45]
갈리치아 전투는 제국군의 결점을 극명하게 보여준 전투였다. 헬무트 요하네스 루트비히 폰 몰트케 장군은 독일 제국군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의 전선을 보강해야 한다는 의견을 냈다. 팔켄하인은 그의 의견을 지지했지만 가능하면 서부전선의 독일군 부대를 동원하지 않고 달성하기를 원했다. 9월 16일 독일 제국군은 파울 폰 힌덴부르크를 사령관으로 하는 제9군을 창설하였다.[46] 이틀 후, 제9군 참모장 에리히 루덴도르프는 향후 작전 방향을 논의하기 위해 콘라트와 회동했다. 그러나 콘라트는 제국군을 독일 제국군의 지휘하에 편입시킨다는 제안을 거부했고, 루덴도르프도 굳이 자신의 주장을 끝까지 관철시키려 하지 않았다. 제국군은 재정비를 하기 위한 여유가 필요하며 이러한 여유를 줄 수 있는 것은 독일 제9군뿐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던 루덴도르프는 어차피 콘라트와 만나러 가기 전에 이미 적절한 명령들을 내려놓은 상태였다. 9월 29일, 독일 제9군은 러시아군을 바르샤바와 이반고로드(Ivangorod)[47] 사이의 비스와강 상류로 밀어내기 위해 진격하기 시작했다. 루덴도르프의 의도는 독일 제국군의 공격을 통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에 대한 러시아군의 압력을 약화시킴으로써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이 공세를 재개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러시아군이 독일 제국군 전선으로 병력을 집중시키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은 10월 4일, 전면에 있는 러시아군이 단순한 견제 부대임을 파악하고 산(San)강으로 진격하여 10월 9일에는 고립된 프셰미실 요새의 포위를 푸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이후 러시아군의 저항이 격화되면서 제국군의 진격은 정지되고 말았다. 독일 제9군 좌익은 아우구스트 폰 마켄젠이 지휘하고 있었는데, 바르샤바 방면으로부터 러시아군에게 공격당할 위기에 처해있었는데다. 독일이 받는 압박을 줄이려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이 공세에 나서줘야만 했다. 그러나 콘라트는 공세에 나가는 것을 거부했고, 그렇다면 최소한 마켄젠을 도와주기 위해 병력을 북쪽으로 급파해달라는 루덴도르프의 대안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일이 이 지경에 이르자 독일 황제 빌헬름 2세가 프란츠 요제프 1세에게 요청하였지만 프란츠 요제프 1세는 콘라트의 방침을 옹호했다. 하지만 타협책으로 제국군이 독일의 근위예비군단이 맡은 이반고로드 전선을 인수하자, 그 병력을 북쪽으로 돌릴 수 있었다.
하지만 러시아군의 공격으로 인해 포위당하는 사태를 피하려던 루덴도르프는 마켄젠에게 퇴각을 명령했다. 독일은 동맹국을 돕기 보다는 전력을 보존하는 것이 우선이었기 때문에, 제국군은 러시아군의 공세에 혼자 힘으로 알아서 대처해야 했다. 결국 제국군 제1군도 포위당하지 않기 위해 서둘러 퇴각해야만 했다. 10월 말, 러시아군의 보급 물자가 다 떨어지면서 제1차 바르샤바 전투는 끝이 났다. 독일군은 초반에 얻은 이득을 모두 잃어버렸고, 제국군은 더 많은 영토를 상실했으며, 프셰미실은 다시 한 번 러시아군에게 포위당했다.
러시아군은 베를린 공세를 시도했지만 좌절되었고, 이에 대하 반동으로 러시아군 지휘부에서는 제국군을 쳐서 독일군의 '부드러운 아랫배'에 칼을 꽂자는 주장이 힘을 얻기 시작했다. 그러는 사이 마켄젠을 지원하기 위해 콘라트가 11월 18일부터 크라카우에서 북쪽으로 공격을 시작했다. 그러나 우치와 크라카우 전선에서 러시아군이 예상외로 강하게 저항하면서 제국군은 러시아군을 포위하거나 비스와강 선으로 쫓아낸다는 목표를 달성할 수 없었다. 한편 제국군이 공격을 위해 전력을 북방에 집중하자 상대적으로 크라카우 동쪽 전선에 대한 방비는 크게 약화되었다. 콘라트는 이 지역에 대한 수비를 보로예비치 보병대장의 제3군 소속 11개 사단과 크라카우 남쪽에서 급하게 편성된 몇 개 사단에게 맡겨놓은 상태였지만, 급편된 이들 부대들의 전력이 시원치 않다는 사실은 누가 봐도 분명했다.
러시아군 총사령부는 이러한 정황을 파악하자마자 병력을 동원해 공격에 나섰고, 브루실로프의 공격은 매우 성공적으로 진행되어 카르파티아 산맥을 넘어 헝가리의 대평원 지대 부근에까지 도달했다. 그러나 당시 러시아군은 광대한 전선에 배치된 대규모 부대들의 움직임을 조율하는 데 상당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그래서 또다른 공세에 나섰는데, 크라카우를 공격하는 동시에 카르파티아 산맥 일대에서 계속 압박을 가하여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이 크라카우 지원에 나서지 못하도록 하였다. 비스와강과 카르파티아 산맥 사이에 배치된 콘라트의 4개 군은 이미 전력이 상당히 저하된 상태였다. 또 브루실로프가 거의 헝가리까지 밀고 들어옴에 따라 이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심장부가 위협을 받게 되었다. 이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콘라트는 요제프 페르디난트 대공이 지휘하는 제4군의 일부 부대와 완편된 독일군 1개 사단을 크라카우로부터 남쪽으로 파견하여 제3군의 좌익을 보강했다.
제국군은 이런 움직임으로 러시아군을 공격하였고, 이를 지원하기 위해 브루실로프가 제국군을 포위하려 했지만,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12월 8일, 제국군 제3군이 공격을 개시하여 카르파티아 산맥의 핵심 통로들을 점령하자 브루실로프의 헝가리 진격은 다시 한 번 좌절되고 말았다. 러시아군은 큰 피해를 입고 퇴각했으며,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이 보기보다 만만한 상대가 아니라는 뼈아픈 교훈을 얻게 되었다. 결국 러시아군 내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을 먼저 때려눕히자는 주장을 힘을 잃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도 그 후 두 번 다시 그와 같은 선전을 보여주지 못했다.
1915년 1월 1일, 팔켄하인은 베를린에서 콘라트 및 루덴도르프와 회동했다. 1주일 후 빌헬름 2세와 베트만홀베크의 압력에 팔켄하인은 마지못해 동부전선의 독일군 사단 몇 개를 카르파티아 산맥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을 지원하기 위해 파견한다는 데 동의했다. 한편, 러시아군 지휘부에서는 전략적 우선순위를 놓고 갈등이 벌어지고 있었다. 독일을 상대로 승리하기 어려우니 오스트리아-헝가리를 먼저 공격하여 확실하게 패배시키고 이탈리아와 루마니아의 참전을 유도하자는 것과, 주적은 독일인데 오스트리아-헝가리 전선에 병력을 투입하는 것은 전력 낭비라며 의견이 갈리고 있었다. 결과는 독일 전선에 집중하기로 하면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은 한숨 돌리게 되었다.
프셰미실 공방전 당시 10만 명 이상의 제국군이 프셰미실 요새에 틀어박혀 있었다. 공성을 시작한 러시아 제국군은 반년 가까이 지나도록 요새를 함락하지 못하였다. 러시아군은 카르파티아 산맥을 넘어 헝가리를 공격한다는 계획을 고집하고 있었는데, 콘라트 역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이 카르파티아 산맥으로부터 러시아군에게 공세를 가할 경우 비스와강에서 러시아군을 몰아내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런 판단하에 양측 모두 카르파티아 산맥 동부지역에 대한 동계 공세를 준비했다. 그러나 산악 지형에서 동계 공세를 펼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카르파티아 산맥의 산들은 고도가 높지는 않았지만 매우 가파른 산비탈을 이루고 있었다. 이런 산들을 넘어갈 수 있는 유일한 통로인 고개들도 극소수에 불과했고, 쓸 만한 도로는 더더욱 없었다. 그리고 이런 고개들조차 겨울에는 대부분 눈으로 막혀 버리기 일쑤였고, 날씨가 풀릴 때는 진창을 이루면서 사람과 마차의 통행이 불가능한 경우가 다반사였다. 이런 조건하에서도 공격을 고집한 콘라트에 의해 그 해 겨울, 수천 명이나 되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이 카르파티아의 험한 산속에서 동장군의 무자비한 손길에 죽음을 당해야 했다.[48]
1월 23일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 제3군은 프셰미실 요새 구원을 위해 진격하였다. 하지만 브루실로프의 제8군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의 공격을 끈질기게 방어하자, 구원군은 제풀에 지쳐 1월 26일 공세를 중지할 수밖에 없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의 공격이 중지되자, 브루실로프는 바로 반격에 나서면서 보로예비치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 제3군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 혹독한 겨울 속에서 이어진 3주간의 전투에서 제3군은 전체 병력 10만여 명 가운데 6만 5000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2월 27일, 콘라트의 두 번째 공세 역시 제한된 성과만을 거둔 채 끝이 났지만, 러시아군을 드네스트르강 동쪽으로 밀어내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프셰미실 요새의 구출 시도를 지속하기에는 한계가 다가온 상황이었기에, 콘라트는 요새 사령관 헤르만 쿠스마네크에게 더 이상의 구원 시도는 불가능하다고 통보했다. 결국 3월 22일, 프셰미실 요새가 러시아군에게 함락되었고, 헤르만 쿠스마네크을 포함한 10만 여명의 제국군은 러시아군의 포로가 되었다. 이후 러시아군은 카르파티아 산맥을 넘어 다시 한 번 공세를 시작했다. 그러나 콘라트는 러시아군이 평야지대에 대규모로 쏟아져 나올 것에 대비해 빈과 부다페스트 사이의 도나우강 선의 방어진지를 강화했다. 게다가 러시아의 포탄이 고갈되어 버리면서 러시아군의 공격이 잠시 주춤해졌고, 독일의 증원 부대가 도착하면서 전선은 다시 안정되었다. 하지만 이때까지 누적된 피해로 인해 이제 제국군에는 제대로 훈련된 일반 장교들과 부사관들을 찾아보기가 힘들 지경이 되어버렸다.[49] 물론 러시아군도 별반 사정이 좋을 것은 없었지만, 그대로 만약 이런 추세가 지속된다면 러시아군 지휘관들의 야망이 마침내 실현될 수도 있을 것처럼 보였다.
2.4.4.4. 고를리체-타르누프 선의 돌파
팔켄하인도 이제 동부전선에 더 많은 신경을 쓰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에 부닥치게 되었다. 프셰미실의 상실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이 불리한 상황에 처하면서 이탈리아와 루마니아가 오스트리아-헝가리에게 영토를 양보하지 않으면 전쟁을 선포하겠다는 뜻을 전해왔기 때문이었다. 콘라트와 팔켄하인은 러시아군을 크게 격파하여 이 무례한 국가들이 제정신을 차리게 해주기로 결정하고 러시아 제3군에게 기습 공격을 가할 계획을 짰다.4월 9일, 콘라트는 팔켄하인과 협의한 후 4월 15일에 서부전선에서 독일군 8개 사단을 차출하여 비밀리에 동부전선으로 이동시켰다. 팔켄하인은 이 사단들로 마켄젠의 지휘 하에 새로이 제11군을 편성하여 고를리체 서쪽에 전개시켰다. 콘라트는 마켄젠에게 독일 제11군 북쪽의 타르누프 지구에 배치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 제4군과 독일 제11군 남쪽을 지키고 있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 제3군의 지휘권을 넘겨주었다. 이제 22개 보병사단과 1개 기병사단을 보유하게 된 마켄젠 집단군을 맞아 싸우게 된 러시아군은 고를리체를 돌파당하고 남쪽과 북쪽 측면에서 공격을 당하자 러시아군은 결국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이 후 러시아군은 한달 후에 다시 반격에 나섰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도 못하고 실패하고 말았다. 5월 25일, 이탈리아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게 선전포고를 했지만, 이것이 당장 러시아군의 상황을 개선시켜주지는 못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은 6월 3일이 되어서야 이탈리아 전선으로 병력을 이동시키기 시작했고, 그 빈자리는 독일군이 채웠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 제3군은 해산되었고, 예하 사단들은 갈리치아의 수도 렘베르크를 탈환한다는 새로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제2군과 제4군에 나뉘어 배치되거나 독일 제11군의 일부로도 편입되었다.
콘라트는 마켄젠과 함께 6월 12일 공세를 재개하였고, 브루실로프는 렘베르크를 버리고 퇴각했다. 고를리체-타르누프 전투와 렘베르크 전투 이후 바로 이어진 제3차 바르샤바 전투는 러시아에게 연속적인 패배와 함께 타넨베르크의 참패보다도 큰 타격을 안겨주었다. 15개 러시아군 사단은 문자 그대로 전멸당했고, 다른 20개 이상의 사단들도 전력이 바닥이 났다. 콘라트는 러시아가 점령한 갈리치아를 다시 되찾은 것이다.
1915년 5월과 7월 사이에 이어진 승리로 폴란드 돌출부가 제거되면서 전선의 길이는 약 800마일로 줄어들었다. 러시아군은 여전히 동부전선에서 동맹국보다 수적으로 우세했지만, 이 전투로 160만 명의 병력을 잃었다고 추정되었다. 이 공로로 콘라트는 1915년 6월 23일에 여러 훈장을 수여받는 것과 동시에 제국상급대장으로 진급하였다. 이는 한달 전, 오스트리아 역사상 최초로 제국상급대장에 진급한 오이겐 대공이후로 두 번째 제국상급대장의 탄생이었다.[50]
팔켄하인-콘라트 콤비가 러시아군을 영구히 무력화시키기 위해 짠 계획은 완전히 성공한 것처럼 보였다. 가을이 되면서 비가 내리기 시작하자, 일단 동부전선은 대충 정리가 되었다고 생각한 팔켄하인은 동부전선의 병력을 다시 서부전선으로 이동시키기 시작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상황은 러시아보다 나을 것이 별로 없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도 보급 물자의 부족과 엄청난 사상자 수로 인해 빈사 상태에 빠져 있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은 겨울 동안 카르파티아 지역에서 벌어진 전투로 80만 명이 넘는 사상자를 냈고, 1915년 여름 전투에서는 그 수가 125만 명으로 늘어났다.
이런 타격을 입고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의 전선이 무너지지 않았던 것은 독일군의 막대한 지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독일 제국군 육군 최고 사령부(Oberste Heeresleitung, 이하 OHL)가 사실상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 전체를 지휘하고 독일군의 목표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의 군사 행동에 중요한 결정 요소로 작용하게 되면서 이제 합스부르크 가문은 호엔촐레른 가문에게 조종당하는 신세가 되어버렸다. 또 전쟁 초반 제국의 곡창지대 중 하나인 갈리치아를 상당수 상실한데다 농업의 기계화가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대부분의 농촌 장정들이 징집되는 바람에 예년 농업 생산량을 유지하는 것도 힘겨워진 판에 협상국의 해상 봉쇄까지 겹치면서 오스트리아-헝가리도 독일의 순무의 겨울에 비견할 정도의 심각한 식량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다.[51] 동년 9월, 콘라트는 로브노(Rovno)에 대한 공세를 개시하면서 마지막으로 독자적인 작전을 시도해 보았지만, 이마저도 실패로 돌아갔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은 사실상 붕괴에 직면하게 된 상태가 되었다.
2.4.4.5. 이탈리아 전선으로 양면전쟁에 직면
부대를 시찰하는 회첸도르프 |
동부전선에 배치되어 있는 병력은 린징겐 집단군,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 제2군, 제4군, 카를 폰 플란처발틴 기병대장이 이끄는 제7군 외에 독일 남부군[52]이었다. 1916년 3월 이래 루덴도르프는 힌덴부르크를 총사령관으로 삼아 동부전선의 독일군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의 지휘체계를 일원화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자신들이 독일군에게 종속되는 듯한 모양새를 좋아하지 않은 콘라트는 이를 반대했다. 따라서 그 무렵까지는 독일-오헝 제국군 간에 단일 지휘체계는 존재하지 않았다.
오스트리아-이탈리아 국경은 1866년 오토 폰 비스마르크가 마련한 조약에 따라 인위적으로 그어진 것이었다. 이 조약으로 오스트리아는 국경지대의 산맥 일대를 자국 영토로 확보하여 이탈리아의 침공에 완충지대를 확보하는 동시에 또 마음만 먹으면 산꼭대기에서 북이탈리아의 롬바르디아 평원지대로 물밀듯이 쏟아져 들어갈 수 있었다. 반면, 이탈리아군은 오스트리아의 어디를 어떻게 공격하든 간에 공세를 벌이려면 험준한 산악지대를 기어 올라가야 했으며, 국경선의 형태 역시 이탈리아군이 직면한 어려움을 더욱 가중시켰다.
오스트리아와 이탈리아의 국경선은 거대한 S자 형태로, 트렌티노 지역에서 오스트리아의 거대한 돌출부가 이탈리아로 깊숙히 파고 들어오고, 이탈리아의 우디네 돌출부가 오스트리아 영토로 뻗쳐 있는 형상이었다. 두 돌출부 중 잠재적으로 이탈리아에 더 위협이 되는 것은 트렌티노 돌출부였다. 그러나 이곳은 도로와 철도 사정이 열악해서 제대로 된 군사 작전을 벌이기가 만만치 않았기 때문에, 제국군 지휘관들도 이 지역에서 어떻게 작전을 펼쳐야 할지를 놓고 머리를 싸매야 했다.
스위스 국경지대에서 아드리아해까지 400마일 길이로 형성된 아탈리아 전선은 3개 부분으로 나뉘어 있었다. 트렌티노와 알프스 산맥, 그리고 이손초강 전선이 바로 그것이었다. 강변을 따라 형성된 약 30마일 길이의 전선은 그래도 좀 덜 험한 언덕지대로 되어 있었지만, 이를 제외하면 거의 전 전선이 험한 산악지역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탈리아에게 빼앗긴 베네치아 지방을 되찾으려고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던 콘라트가 전선에 투입할 수 있던 병력은 당시 39개 보병사단, 10개 기병사단 약 50만여 명이었다. 국경지대에 항구적인 방어진지를 건설하면서 후방 지역의 교통망을 정비했다. 고정방어시설을 구축함에 따라 향후 이탈리아 전선은 주로 정적인 진지전이 될 것이라고 예상되었다. 오스트리아의 철도망은 국경 지대를 따라 평행으로 달리고 있었지만, 이탈리아와는 달리 별다른 지선이 건설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전선으로 물자를 수송하는 데 상당한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이로 인해 제국군이 트렌티노에서 공세를 나섰을 때 공격 기세를 오래 유지할 수 없었다.
이탈리아는 방어진지를 지키고 있는 20개 사단을 상대로 35개 사단을 동원하였다. 그러나 개전 당시 이탈리아군의 전쟁 준비 상태는 엉망이었다. 그럼에도 전 전선에서 공세에 나서면서 제국군을 놀라게 만들었다. 이탈리아군은 상당한 성과를 거두면서 이손초강 방면에서 오스트리아 영토 내의 여러 거점들을 점령했다. 이후 이 거점들을 중심으로 양측의 전선이 안정되면서 계속해서 벌어질 소모전의 무대가 마련되었다. 6월 23일, 여러 차례 벌어질 소모전 가운데 첫 번째 전투가 벌어졌다.[53]
1915년 말까지 이탈리아군은 이손초강 전선에서 4차례에 전투를 벌이며 전략 요충지인 고리치아를 점령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그러나 고리치아 마을은 강력한 제국군 교부도의 보호를 받고 있었고, 마을을 둘러싼 여러 고지를 확보하고 있던 제국군은 공격해오는 이탈리아군에게 무시무시한 화력을 쏟아 부었다. 하지만 이탈리아군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강력한 제국군 방어진지에 병력을 연거푸 투입하면서 공격을 퍼부었고, 그 과정에서 양측은 엄청난 사상자를 냈다. 전투의 규모 자체도 대단해서 제2차 이손초강 전투에서 이탈리아군은 제국군 129개 대대에 대항해 260개 대대를 동원하여 공격에 나섰다. 그러나 이런 압도적인 수적 우세에도 불구하고 이탈리아군은 난공불락의 방어진지에서 버티고 있던 제국군을 몰아낼 수가 없었다. 이탈리아군은 16만 1,000명을 제국군은 14만 7,000명의 인명 손실을 입었다. 겨울이 닥치면서 전투의 열기도 가라앉기 시작했다.
2.4.4.6. 세르비아 분할
1915년 12월 말, 세르비아 공세가 성공할 기미를 보이자 독일 제국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불가리아 왕국 이하 동맹국은 세르비아를 분할하기 위해 회의를 열었다. 불가리아는 세르비아 왕국이 점령한 마케도니아 전역을 탈환받을 것을 요구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독일제국 역시 베를린-바그다드 철도 완공을 위해 세르비아를 제거할 필요가 있을 뿐 세르비아 왕국의 영토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불가리아에게 세르비아 왕국령 마케도니아 지역을 모두 양도하고 남은 지역을 합병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불가리아는 모라바(Поморавље) 능선을 경계로 세르비아의 영토를 분할했다.1916년 1월 1일, 콘라트는 베오그라드에 세르비아 총독부를 설치하고 군정통치를 실시했다. 그로부터 5일 뒤, 콘라트는 크로아티아 출신 장교인 요한 폰 잘리스지비스(Johann von Salis-Seewis) 장군을 세르비아의 총독으로 임명하였다. 세르비아를 정복했지만 전후 처리 문제와 앞으로의 전쟁 목표를 명확히 하기 위해 콘라트의 요청으로 내각과 군부는 1916년 1월 7일에 합동 장관 회의를 연다. 가장 큰 쟁점은 세르비아 왕국을 제국에 포함시킬지가 화제가 되었다. 오스트리아와 함께 세르비아 침공에 참가하는 조건으로 세르비아를 이중군주국에 합병하지 않을 것을 내세웠던 헝가리 총리 티서 이슈트반 백작은 당초 제안대로 세르비아를 제국에 합병하지 않고 그대로 냅두길 원했다. 그러나 콘라트는 티서의 반대에 분노하여 티서를 편협하고 근시안적인 인물이라고 비난하였다. 오스트리아와 헝가리는 세르비아를 두고 의견이 충돌한 것이다. 결국 오스트리아는 콘라트의 의견에 따라 세르비아를 합병해 버림으로써 헝가리와의 약속을 무시해 버렸다.
2.4.4.7. 트렌티노 공세
독일은 콘라트가 제국군 주력을 동부전선에 돌려주기를 원했다. 동부전선을 제국군에게 맡기고 여기서 차출된 사단들을 서부전선으로 투입하여 결정적인 승리를 얻겠다는 속셈이었다. 그러나 콘라트는 콘라트대로 생각이 있었다. 그중 하나는 트렌티노에서 결정적인 공세를 가해 이탈리아의 평야지대를 빠르게 가로질러 이탈리아 북부의 중요도시를 점령한다는 것이었다. 콘라트는 결정적인 공세 장소로 아시아고 고원 지역 일대를 선정했다.콘라트는 3월 이손초 전투에서의 이탈리아 왕국군의 5번째 공세가 실패하자 아시아고 방면의 이탈리아 왕국군 전력이 약하다고 분석한 후 해당 지역으로 40만명의 대규모 병력을 동원하여 공격하기로 했다. 기본적인 목표는 이손초강 일대에 가해지는 이탈리아 왕국군의 압박을 줄이는 것이었는데, 만약 작전이 매우 잘 풀려서 베네치아와 베로나까지 점령에 성공한다면 아예 이손초 일대의 이탈리아 왕국군을 포위섬멸 하는 것까지 생각해두고 있었다. 그리하여 트렌티노에서의 공세를 위해 독일 제국군 일반참모장인 에리히 폰 팔켄하인에게 9개 사단가량의 지원병력을 요청했지만 팔켄하인도 서부전선에서 대규모 공격을 계획 중이었으므로 이 청을 거절하였다. 팔켄하인은 콘라트의 공세 작전을 듣고 크게 놀랐다. 당시 독일군은 1문의 중포라도 아쉬운 판이었다. 하지만 콘라트는 자신의 공세를 위해 상당주의 중포를 틀어쥐고 놓아주지 않았으며, 무리하게 발칸 전선과 동부전선의 정예부대를 차출하여 이탈리아 전선에 투입하였다. 그 병력의 공백은 강력한 방어선으로 만회할 수 있다는 판단에서였다.[54]
하지만 팔켄하인은 제국군이 포병대 면에서 압도적인 우위를 점하고 있다 하더라도[55] 겨우 18개 사단의 병력으로는 공세를 성공시킬 수 없다고 생각했다. 1916년 5월 15일, 제국군의 트렌티노 공세가 시작되었다. 제국군은 새로이 단시간에 집중포화를 퍼붓는 전술을 사용하여 이탈리아군 참호선을 말 그대로 박살을 내놓았다. 비좁은 계곡지대에서는 제국군의 중포대의 포격 효과가 극대화되어 눈사태와 산사태를 일으킴으로써 계곡을 지키던 이탈리아군을 생매장해버리기도 했다. 그러나 지형이 험해 제국군의 진격은 지지부진할 수밖에 없었고, 이탈리아군은 그 덕분에 전멸이라는 최악의 사태를 피할 수 있었다.
이탈리아의 정예 알피니 산악부대는 자신들의 앞마당과 같은 산악지대에서 필사적으로 지연전을 펼치며 이탈리아군 본대가 방어선을 구축할 수 있는 시간을 벌었다. 그러나 이탈리아군의 암호책을 노획한 제국군은 이탈리아군의 무선통신을 방수하여 이탈리아군의 움직임을 손바닥 보듯 알 수 있었다. 6월 4일 제국군은 비첸차와 이손초강 전선에 보급품을 운반하는 핵심 철도로부터 채 20마일도 떨어지지 않은 곳까지 진출했다. 그러나 목표지점을 코앞에 두고 제국군은 힘이 다하고 말았다. 이탈리아군이 반격에 나서 압박을 계속 가한 끝에 제국군을 공격개시선까지 밀어내는데 성공했다.
팔켄하인은 콘라트가 동부전선에서 병력과 중포를 빼돌려 이탈리아 전선에서 공세를 시작한 것도 모자라 공격에 실패한 데 대해 크게 분노했다. 콘라트의 공세로 동부전선의 제국군의 전력이 약화된 덕분에 브루실로프가 성공적인 공세를 펼칠 수 있게 기회를 마련한 것이었다. 이후 이손초강 부근에서 전투가 5차례 더 벌어지면서 사상자 수도 크게 증가했다. 결국 8월에는 고리치아를 이탈리아군이 점령했고, 제국군의 방어선도 곧 돌파할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탈리아군의 공격도 거기까지였다, 겨울이 닥치자 양측 모두 대규모 작전 활동을 중지할 수밖에 없었다. 겨울동안 이탈리아군과 제국군은 소규모 습격과 정찰 이상의 활동은 벌이지 않았다.
2.4.4.8. 브루실로프 공세
브루실로프는 빨리 공세에 나서고 싶었지만, 러시아군의 주공 실시 일자가 결정되기까지는 공세 개시일을 정할 수 없었다. 그런데 오헝 제국군이 이탈리아 전선에서의 공세(5월 트렌티노 공세)를 위해 10개가 넘는 사단을 빼며 전선에 공백이 생겼다는 것을 간파했다.초반 전투에서 제국군의 맹공에 대패한 이탈리아군이 황급히 러시아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브루실로프의 공격 준비는 다른 러시아군의 진척 상황을 압도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을 파악한 미하일 알렉세예프는 브루실로프에게 단독으로 공세에 나설 수 있는지 물었다. 브루실로프는 최대한 공세에 나서고 싶었기에 제안을 수락한다.
1916년 6월 4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의 모든 동부전선에 걸쳐 러시아 제국군의 일제 포격이 개시되는 것으로 브루실로프 공세의 막이 올랐다. 새벽 4시 30분에 시작된 러시아군의 공격 준비 사격은 남쪽 구역에서는 정오까지, 북쪽 구역에서는 12시 반까지 계속되었다. 포격이 멈추자 러시아군 보병들이 제국군의 참호를 향해 달려들어 저녁 무렵에 공격 지역의 모든 제국군 참호선을 점령했다. 러시아군은 꾸준한 항공정찰과 관측으로 이미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 참호선의 중요 시설과 취약점의 위치를 파악한 상태였고, 정확하기 그지없는 포격으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의 참호선은 곳곳에서 기능이 마비되었다. 이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 예비 병력이 제대로 전선에 투입되는 것을 막았고, 초기 러시아군의 공세를 막아내지 못하는 결정적 원인이 되었다.
6월 4일, 콘라트는 트렌티노 공세를 중지하고 팔켄하인에게 도움을 요청하였다. 팔켄하인은 3개 사단을 서부전선에서 차출하여 동부전선으로 병력을 보내면서 이탈리아 전선을 끝내고 동부전선으로 병력을 보내야만 독일의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힌덴부르크와 루덴도르프는 5개 사단을 급히 남쪽으로 내려보냈고, 제4군 사령관 요제프 페르디난트 대공을 해임하고 카를 테르스찬스키 폰 나더시 중장으로 교체할 것을 요구했다.
6월 8일, 콘라트의 지원 요청에 응하여 팔켄하인은 린징엔의 지휘 아래 5개의 사단을 조직하여 반격을 위해 코벨 근처에 집중시켰다. 브루실로프는 북쪽 측면을 보호하기 위해 이동했고 러시아군은 남서부 전선을 따라 계속해서 압박을 유지했다.
한편, 플란처발틴 제7군 사령관은 국지적으로 러시아에게 반격을 가하면서 그 틈을 타서 강 동쪽 제방에 구축한 교두보에서 철수할 준비를 했다. 6월 10일, 제국군은 프루트강을 향해 철수했다. 며칠간에 걸쳐 쏟아진 호우가 러시아군의 추격에 막대한 지장을 주면서 제국군은 전멸당하는 것만은 피할 수 있었다. 그러나 대다수의 제국군이 프루트강 건너편으로 쫓겨나자, 이제 제국군이 강 동안에 확보하고 있는 거점은 부코비나의 수도인 체르노비츠 바로 북쪽에 위치한 교두보밖에 남지 않게 되었다. 제국군은 이 교두보를 5일간 지켰지만, 6월 19일이 되자 이 교두보도 러시아군에게 점령당했고 그로부터 이틀 후 플란처발틴은 세레트강을 향해 퇴각을 개시했다.
독일군은 브루실로프 공세에서의 패배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에게는 거의 사형선고나 다름없는 위협이 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병력을 지원한다. 제국군은 6월 23일까지 20만 4000명이 포로로 잡히면서 큰 병력 손실을 입었다.
브루실로프는 공세의 성공적인 마무리를 위해 철도교통의 요충지인 코벨의 탈환에 전력을 기울였다. 러시아는 동원가능 병력은 많았지만 산업화의 미비로 철도 총연장거리나 노선 접근성이 안 좋았다보니 예비병력의 전선동원에 상당한 어려움이 있었고, 독일과 오스트리아가 철도로 병력을 대규모로 증원하면 승산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7월 24일, 그렇게 시작된 코벨 전투는 2주간의 공세 끝에 러시아군의 패배로 끝났다. 사실 병력 면에서는 러시아군이 2배나 많았지만 급히 차출된 독일-오스트리아 병력들이 성공적으로 지연방어전을 치렀으며, 브루실로프의 주특기였던 정밀포격과 충격부대의 기용도 제공권을 쥔 독일군에 의해 제대로 된 항공정찰을 하지 못하게 됨으로써 제대로 시도조차 하지 못했던 것이다.
물론 전장의 주도권은 여전히 러시아군이 쥐고 있었지만 초전의 기세를 더 이상 이어나가지 못하고 진격이 둔화된 것이 문제였다. 그리고 브루실로프의 우려대로 코벨을 탈환하는데 실패하자 독일 제국군은 서부전선에서 계속해서 병력을 차출했다. 특히 문제의 베르됭 전투가 7월에 종료되면서 독일 제국군도 서부전선에서 방어전으로 전환하고 남는 전력을 동부전선에 집중할 수 있었다.
이는 결정적이었다. 여전히 러시아군은 6월 4일과 비교해서 훨씬 서쪽인 약 100km 깊숙히 진격한 상태였지만 코벨에서의 패배 이후 공세능력을 상실해 버렸고 전선이 돌출부를 형성하게 되어 역으로 조금씩 후퇴해야 하는 지경이었다. 그러나 페트로그라드의 지휘부는 공세를 지속하길 원하며 북부전선의 예비전력과 자원을 쏟아 부었는데, 러시아의 낙후된 철도환경은 이러한 예비전력의 효율적 재배치를 가로막는 장애물이었고, 무의미한 공세만 지속시킬 뿐이었다.
7월 26일, 팔켄하인은 테셴에 있는 프리드리히 대공의 사령부에 나타나 동맹군에게 동부전선에서 통일된 최고 사령부를 구축할 것을 촉구했다. 7월 27일, 베트만홀베크, 힌덴부르크, 루덴도르프는 상황을 논의하기 위해 콘라트를 만났다. 코벨이 러시아군에 의해 위험에 처했기에 이를 대비하기 위해서 오랫동안 작전회의를 했다. 그 결과 지휘 구역이 개편되어 7월 28일부로 힌덴부르크가 거의 모든 동부전선에 대한 최고 지휘권을 부여받았는데, 이에 콘라트는 반발하였으나 독일의 도움없이는 오헝 제국군으로는 전쟁을 할 수 없다는 사실이 자명한 했기에 명분도 실리도 잃어버린 콘라트로서는 지휘권을 양도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서 힌덴부르크에게 협조하면서도 독일 남부군과 제7군은 카를 대공과 AOK의 통제하에 남아 있어야 한다고 딴지를 걸었다.
8월 7일, 코벨을 점령하기 위해 공세를 재개했으나, 독일 제국군과 오헝 제국군의 격렬한 방어끝에 양측의 피해만 커지며 진전은 더디기만 하였다. 브루실로프는 더 이상의 공세가 무의미하다는 것을 진작 깨닫게 되었고, 이틀 만에 코벨을 점령하려는 시도를 중단한다. 이후, 계속 상부를 설득하여 9월 20일부로 공세를 종료했다.
동부전선으로만 보면 러시아 입장에서 브루실로프 공세는 대성공이었다. 성과를 보면 카르파티아 산맥까지 전선을 움직여 안전한 방어선을 구축했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을 무력화시켜 이후 동부전선에서 사실상 손떼게 만들었고, 루마니아 왕국이 협상국 편에 가담하도록 자극하는 대성과를 거두었다. 이로 인하여 8월 29일, 독일에서는 일반참모장이 에리히 폰 팔켄하인 파울 폰 힌덴부르크로 교체되기까지 한다. 힌덴부르크는 병참장군으로 에리히 루덴도르프를 임명한다.
기존의 관념을 타파한 브루실로프의 참신한 발상이 빛을 발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 대가로 러시아가 치른 희생은 매우 컸다. 러시아군의 사상자는 55만 명 이상에 달했고, 40만 명의 전선군 예비 병력 가운데 4분의 3이 소모되었다. 공세를 지휘한 브루실로프는 온갖 훈장을 수여받고 페트로그라드의 궁정으로부터 수많은 축하도 받았으나, 정작 본인은 막대한 병력 피해와 유의미한 전략 목표를 달성하지 못한 것에 아쉬워했다. 결국 이는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는 간접적인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8월 12일까지 지속된 브루실로프 공세로 8,255명의 장교와 37만 153명의 동맹군 병사들이 포로로 잡혔다. 전사자와 부상자까지 고려하면, 동맹군은 70만 명 이상의 병력과 1만 5,000제곱마일의 지역을 잃었다. 갈리치아 전투에서 패배하면서 10개 사단을 손실했으며, 결국 동부전선은 브루실로프 공세로 초토화되었다. 잇따른 패배로 인하여 콘라트는 독일 제국에 의해 동부전선에서 점차 소외되었다.
2.4.4.9. 루마니아 전선
평소에 루마니아 왕국이 눈독을 들이고 있던 것은 바로 트란실바니아였다. 루마니아는 브루실로프 공세가 성공적으로 진행되자 오스트리아-헝가리의 힘이 한계에 달했으니 트란실바니아를 탈취할 기회가 왔다고 보고 8월 27일에 선전포고를 하면서 동부전선에 참전한다. 모든 루마니아군 사단들이 트란실바니아로 진격해 들어갔다. 당시 트란실바니아에는 극소수의 제국군만이 배치되어 있었기 때문에 루마니아는 며칠 만에 트란실바니아를 점령한 후 도브루자의 방어를 강화할 심산이었다.루마니아군은 9월 6일까지 트란실바니아 지역을 완전히 점령했지만, 동맹군은 신속하게 반격에 나섰다. 베르됭 전투 패배의 책임을 지고 힌덴부르크에게 총사령관직을 넘겨준 팔켄하인이 제9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콘라트는 명목상 최고 지휘관이었지만, 독일의 제9군 사령부가 실질적으로 전선을 도맡았다. 그래도 콘라트가 짜놓은 전략을 독일이 따르면서 루마니아의 침공을 저지하고 역으로 루마니아를 점령하는데 성공한다.
루마니아의 식량과 목재, 그리고 가장 중요한 유전을 차지한다는 꿈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국내 전선의 사기를 북돋아 주었지만, 정작 승리는 사령부나 군대의 위신을 되살리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고, 독일이 큰 수혜를 입게 되었다. 콘라트에게 설상가상으로 이 전선에서 복부하던 맏아들 쿠르트의 신변에 이상이 생겼는데, 평소에도 몸이 좋지 않았던 쿠르트는 세 번째로 복귀해서 아버지를 따라 참전하였는데 동일한 폐 질환으로 병이 재발하는 바람에 쿠르트를 후방으로 이송해야했다. 처음에는 빈에 있는 군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으나, 전시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서 안전하게 치료하기에는 쿠르트의 상태가 너무 심각했기에, 콘라트는 중립국이자 휴양지로 유명한 스위스의 아로자(Arosa)로 쿠르를 보내고 거기서 요양을 하도록 조치를 했다.
루마니아와 전쟁을 하던 기간 동안에 프란츠 요제프 1세는 카를 대공에게 콘라트의 대안 후보를 제안해 달라고 요청했다. 카를 대공은 후보 목록들을 급히 추려본 결과, 제5군사령관 오이겐 대공, 제5군참모장 겸 제1군사령관 알프레트 크라우스, 제14보병사단장 막시밀리안 치체리치 폰 버차니및 제6군단장 아르투어 아르츠 폰 슈트라우센부르크가 언급되었다. 이들은 카를 대공이 전쟁중에 성과를 냈던 장성들 위주로 조사했기 때문에 유능한 인재들임은 틀림없었다.
하지만 문제는 이들 모두가 콘라트만한 위상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왜냐하면 독일 제국 내부에서도 콘라트를 분명히 높게 평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독일 제국군 일반참모장인 팔켄하인조차도 콘라트와 동맹이었고, 힌덴부르크, 루덴도르프와도 콘라트는 비교적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처럼 보였다. 당장 독일 장성들 외에도 독일 제국의 황제인 빌헬름 2세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군인이자 원수인 콘라트를 프로이센 보병 의례 연대장으로 임명했었다. 얼마 안가 독일 황제는 곧 콘라트에게 육군 야전원수(Generalfeldmarschall)의 지휘봉을 수여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카를 대공이 만약 콘라트를 내친다면 독일과의 연계에서도 분명 문제가 생길 수 있기에 이손초 전투와 브루실로프 공세로 실책을 거둔 콘라트에 대해서 무수히 많은 비판에도 불구하고 카를 대공은 황제에게 당장은 그를 해임하지 말라고 충고했다. 물론 그렇다고 콘라트가 계속 남아 있는 한 카를 대공은 콘라트의 견제를 계속 받아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결국 AOK에서 자신의 영향력이 넓히기 위해서는 총사령관을 프리드리히 대공에서 보다 의지가 더 강하고 자기 수족으로 부릴 수 있는 오이겐 대공으로 교체하여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는 믿음을 가지기 시작했다.
2.4.4.10. 일반참모장에서 야전사령관으로
루마니아가 참전을 선언한지 2달이 지난 11월 15일, 콘라트는 황제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쇤브룬 궁전을 방문하여 황제를 알현하러 갔다. 프란츠 요제프 1세에게 콘라트는 전쟁 상황을 브리핑하였으나 황제는 도중에 몇번 졸기도 하는 모습을 보였고, 노쇠함을 확실히 드러내고 있었다. 그럼에도 황제는 친절한 태도를 보이며 콘라트를 격려하였다. 그러나 나흘 후인 11월 21일 황제가 서거하였다. 콘라트는 황제의 죽음에 큰 충격을 받았고 슬픔을 느꼈다. 프란츠 요제프 1세의 죽음은 콘라트의 입장에서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게 종말이라는 사형 선고와 다름 없었다. 그로부터 또 나흘 뒤인 11월 25일, 프란츠 요제프 1세의 뒤를 이어 황제에 즉위한 카를 1세는 콘라트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 육군 야전원수(Generalfeldmarschall)로 진급시킨다. 이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탄생 이후로 비(非)합스부르크 가(家) 군인으로서는 47년만이며, 현역 군인으로 서는 57년만의 첫 승진이었다. 그리고 그 다음 날인 11월 26일, 독일 제국의 황제 빌헬름 2세도 콘라트를 독일 제국군 육군 야전원수(Generalfeldmarschall)의 지휘봉을 수여하였다.[56] 그러나 콘라트는 더이상 전쟁에 대한 의욕을 잃고 말았다. 며칠 지나지 않아, 카를 1세는 콘라트의 권위를 축소할 계획이 명확해졌다.12월 2일 프리드리히 대공을 총사령관 대리로 강등시키고 카를 1세 본인이 총사령관에 오른다. 카를 1세가 자신을 수하에 두고 군권을 가져가려한다는 속셈을 콘라트는 알아챘다. 군권을 확보한 카를 1세는 내각과 군부를 개혁하려 시도하였다. 첫 번째로 육군 최고 사령부(A.O.K.)의 본부를 테셴에서 바덴바이빈으로 옮기고자 하였다. 황제가 총사령관으로서 사령부를 통치하기에 편리한 위치였기 때문이었다. 이에 콘라트는 사령부가 차로 1시간 거리에 있는 플레스에 있는 OHL 지부와 멀어지지 않아야 한다는 이유로 카를 1세의 결정에 항의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의 독일 제국군에 대한 종속을 콘라트는 "필연"으로 받아 들였지만, 카를 1세는 오헝 제국군을 독일 제국군으로부터 자립하고자 하였다. 그래서 사령부가 테셴에서 바덴바이빈으로 옮겨졌을 때, 본부에서 여성의 존재를 금지했기 때문에 콘라트는 두 번째 아내인 지나와 생이별을 해야 했다.[57] 사생활에 잡음이 있었던 콘라트에게 참모장이 "자유사상가"라는 것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같은 보수적인 국가에서 고위직에 적합하지 않다는 분명한 신호였다.
1917년 1월 22일, 콘라트는 제국의회에서 독일 제국의 무제한 잠수함 작전에 오스트리아-헝가리인의 참여를 지지하는 장관들에게 합류했다. 그는 5개월 전부터 이 작전에 우호적이었다. 물론 그 결정이 미국의 중립을 종식시킬 것이라고 이해했지만, 장기적으로 이어지고 있는 세계대전에 대한 사회진화론 관점에서 그는 꽤 정확하게도 '앵글로색슨' 강대국인 미국이 전쟁에서 영국에게 적극적인 동맹국이 될 것라고 봤다. 콘라트는 미국을 삼국 협상에 조용히 침묵하는 파트너로 보았고 실제로도 이미 식량과 보급품의 공급자로서 협상국을 돕고 있었다. 미국이 단기적으로 서부전선에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에 콘라트는 무제한 잠수함 작전을 시도해 볼 가치가 있는 도박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콘라트의 의견과 안톤 하우스 대제독의 의견이 일치했지만 카를 1세와 부리안의 후계자이자 헝가리 외무성 장관 오토카어 체르닌 백작, 이 둘만이 작전에 대해 심각한 불안감을 느꼈다.
전쟁이 발발하기 1년 전에 콘라트는 카를 대공이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보다 훨씬 더 마음이 맞을 것이라고 추측했었다. 그렇기에 카를 대공이 황제가 되었을 때 콘라트는 기쁜 마음으로 그를 섬기고자 하였다. 그러나 첫 몇 주 동안 콘라트는 콘라트는 자신의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2년 반 동안 그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일반참모장을 담당했고, 그의 판단에 제동을 걸 수 있는 건 오직 프란츠 요제프 1세와 프리드리히 대공뿐이었다. 콘라트는 OHL에게 조차도 머리를 숙이지 않았었다. 그랬던 그에게 이 젊은 황제의 지휘는 도저히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다. 매일 카를 대공과 마찰을 일으켰었다. 설상가상으로 그녀의 서른여덟번째 생일과 맞물려 2월 말에 두 번째 방문[58]을 했었던 당일에 몇시간 후 프리드리히 대공이 콘라트에 대한 소식을 가지고 방문하였다. 프리드리히 대공은 카를 1세가 트렌티노 공세의 실패에 대한 책임을 씌워서 콘라트를 해임하고 새로운 일반참모장을 임명하기로 결정했음을 콘라트에게 알렸을 뿐만 아니라 황제가 콘라트에게 제10군과 제11군으로 구성된 쥐트티롤 집단군(Heeresgruppe Südtirol)[59]의 야전사령관이 되어 계속 현역으로 복무하기를 원한다는 소식을 전했다. 지나는 모든 전선에서 전쟁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으며 남편이 지금 현역에서 은퇴한다면 이후에 일어날 일로 남편의 명성이 더럽혀지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고 콘라트는 그런 그녀의 추리에 납득했다. 그리하여 황제 제안을 거절하고 현역에서 그대로 퇴역하길 원했다. 2월 28일 그날 저녁에 AOK 본부에서 열린 비공개 브리핑에서 카를 1세는 자신의 제복에서 마리아 테레지아 대십자 훈장을 떼서 콘라트에게 달아주며 설득하였고, 결국 콘라트는 이를 받아들였다. 지나는 남편이 결정을 재고하도록 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그의 현역 복무 연장 소식에 크게 실망하였다.
3월 1일에 콘라트는 일반참모장에서 해임되었다.[60] 3월 2일, 카를 1세는 콘라트를 콘라트 집단군의 사령관으로 임명하였고 공식적으로 마리아 테레지아 대십자 훈장을 수여하였다. 그렇게 콘라트는 이탈리아 전선만 지휘하게 되었다. 그러나 콘라트로서는 좌천이나 다름없는 인사이동이었다.
콘라트는 중간에 1년동안 육군 감찰관에 있었던 시절을 제외하고 1906년부터 1917년까지 총 10년이 조금 넘는 기간 동안 일반참모장에 재직했었다. 반강제로 그 자리에 앉게 된 콘라트는 일반참모장에 생각이 딱히 없었기에 감찰관 시절때도 마지못해 일반참모부에 돌아와야했다. 콘라트는 전략가가 아닌 전술가로 명성을 얻었고, 야전사령관으로서 전선에 있을 때 가장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본부에서 펜대나 굴려야 했던 참모 업무에 대해선 애정과 열정이 거의 없었다. 1914년 러시아 전선에서의 첫 패배와 그의 아들 헤르베르트의 죽음으로 그는 망가진 사람이 되었다. 그러나 같은 달에 패배한 후 신경쇠약을 겪고 직위를 잃은 그의 동맹 몰트케와는 달리 콘라트는 계속 복무했다.
콘라트가 일반참모장이 아니더라도 콘라트가 전쟁 학교에서 교수로 재직하던 때에 그에게 가르침을 받았던 생도들 중 49명이 1917년에 장성이 되어있었다. 그들은 콘라트의 사상을 따르며 군의 최상부 계급까지 도달하여 콘라트 밑에서 복무했다. 부대 사령관이나 참모부에서 콘라트의 다양한 임무를 수행했다. 이렇게 콘라트에게 깊이 빠져 있는 제자들이 이미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을 오래 지배하고 있었고, 완전히 콘라트의 군대가 되어있었기 때문이었다. 옛 군주가 살아있는 동안 콘라트는 사실상의 최고 사령관으로서 직위를 유지했다. 그가 더 이상 당면한 일에 대한 마음이나 정신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은 별 문제가 되지 않았다.[61]
콘라트의 후임으로는 아르투어 아르츠 폰 슈트라우센부르크로 결정되었다. 콘라트는 아르투어에 대해 부대 사령관으로서는 좋은 인물로 고려는 했었지만 일반참모장으로는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물론 아르투어도 콘라트가 누렸던 권한을 가질수 없을 것이었다. 콘라트와 그의 보좌관인 루돌프 쿤드만(Rudolf Kundmann, 1869-1934), 나머지 부관들을 포함하여 일반참모의 많은 부하들이 직위를 잃었다. 특히 여기에는 콘라트가 AOK의 부사령관이자 자신의 후계자로 간주했던 요제프 메츠거 소장[62]도 포함되어 있었다.
콘라트 집단군은 제10군과 제11군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제10군사령관으로는 전쟁장관이었던 알렉산더 폰 크로바틴 제국상급대장이, 제11군사령관으로는 빅토어 폰 쇼이헨슈투엘 보병대장이 맡았고 둘다 콘라트의 지휘를 받았다. 그의 오래된 심복인 메츠거의 제1보병사단이 제10군 소속으로 콘라트 집단군에 들어오게 되었다. 참모장 쿤드만도 제1군단사령관으로 콘라트 집단군에 합류하였다. 집단군 사령부는 보젠에 위치하였다.
그는 AOK에서 벗어나 "모의의 둥지, 개성, 아첨꾼들한테서 벗어나게 되어 기쁘다"고 털어놓았다. 콘라트 집단군의 사령부에 도착한 지 일주일 후, 그는 제4카이저 연대를 시찰하기 위해 폭설 속을 썰매를 타고 전선을 처음 방문했다. 그는 진짜 군인들과 함께 있는 것을 즐겼고, 전선을 자주 둘러보았다. 차남 에르빈이 티롤에 주둔하고 장남 쿠르트가 스위스 근처에서 요양하는 것은 콘라트의 심신에 어느 정도 도움이 되었지만, 티롤에서 동부전선으로 이동한 에곤과 연락이 끊긴것이 콘라트의 유일한 걱정이었다.
봄이 시작되면서 콘라트가 쥐트티롤 방면의 사령관으로 부임하였을 때 이탈리아군 또한 이탈리아에 대한 그의 증오와 공격적인 전투촉구는 이미 알고 있는 사항이었다. 그래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 공세의 주요 전선이 이손초강을 건너기보다는 알프스에서 내려오기를 기대했다. 콘라트는 공세에 대해 많은 아이디어를 가지고 있었지만, 카를 1세의 AOK가 대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병력을 이탈리아 전선에 재배치하기 시작했을 때. 조용히, 점차적으로, 콘라트 집단군의 3분의 1이나 되는 병력을 보로에비치 집단군을 보강하기 위해 다음 공격이 시작될 이손초강으로 파견하였고, 콘라트는 황제가 자신을 정교한 전략적 속임수의 볼모로 사용하기 위해 콘라트 집단군 사령부에 배치했다는 것을 알게 되어 크게 낙담하였다.
다행히 1917년 3월에 시작된 러시아 혁명 덕분에 러시아 전선에서 비교적 여유를 찾을 수 있게 된 콘라트는 동부전선의 부대들을 이손초와 트렌티노 전선으로 돌릴 수 있었다. 그러나 제국군의 사기는 저하되어 있었고, 비(非) 독일계 병사들은 전쟁을 지속할 의욕 자체를 잃은 상태였다. 팔켄하인의 뒤를 이어 독일군 일반참모장이 된 루덴도르프는 이탈리아군이 열두 번째 공세에 나설 경우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군사적, 정치적으로 붕괴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간파하고 콘라트에게 대규모 지원 부대를 파견했다. 이 때, 파견된 부대에는 에르빈 롬멜 소위도 배속되어 있었다.[63] 1917년 여름, 콘라트의 축소된 집단군이 벌인 가장 큰 전투는 방어전이었다. 6월 9일부터 6월 29일까지 20여일 동안 벌어진 몬테 오르티가라 전투에서 그의 43개 대대는 165개 대대로 구성된 이탈리아 제6군의 공격을 저지하고 23,000명의 사상자를 냈다. 그걸 제외하면 콘라트는 다른 전선에서 이손초의 10번째 전투(5월-6월)와 11번째 전투(8월-9월)가 일어나는 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7월에 러시아 임시정부가 동부 갈리치아에 이른바 "케렌스키 공세"를 개시했지만, 초기 침투는 전년도의 "브루실로프 공세"와 일치하지 않았고, 제국군의 역공은 러시아군을 완전히 무너뜨렸다.
동맹국의 군대는 동쪽으로 멀리 진격했고, 러시아와 루마니아는 모두 전쟁에서 패퇴하였다. 8월, 독일의 지원과 중포병이 제한된 상태에서 이손초강을 따라 자체적인 공격을 시작할 수 있게 해줄 심산으로 카를 1세는 빌헬름 2세에게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의 부대들을 동부전선에서 이탈리아 전선으로 이동시킬 수 있는 허가를 요청했다. 동부에서의 전투가 서서히 끝나감에 따라, 이탈리아 전선보다 거의 3배나 많은 동부전선의 합스부르크 사단을 계속해서 그곳에 주둔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OHL 또한 이탈리아군을 상대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의 체면을 구긴 승리 이후, 카를 1세에게 동부전선을 유지할 동기가 거의 없다는 것을 인정했다 작전 통제를 유지하기 위해 힌덴부르크와 루덴도르프는 이탈리아 전선에 포병대와 함께 7개 보병 사단을 보냈다.
전투를 위해 편성된 독일 제국군은 명칭에도 불구하고, 15개 사단 중 9개 사단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이었다. 새로 편성된 오스트리아-독일 혼성 제14군을 오토 폰 벨로 사령관이 이끌고 1917년 10월 24일, 이손초강 상류의 카포레토(오늘날의 슬로베니아 코바리드) 마을에서 전투를 시작했다.[64]
오토 폰 벨로 장군은 콘라트의 작전에 기반하여 전투를 지휘했다. 콘라트의 계획대로 진행되던 끝에 마침내 혼성 14군은 카포레토 전투에서 완벽한 승리를 거두었다. 동맹국은 총 7만 명의 사상자를 냈지만, 이탈리아군은 엄청난 손실을 입었다. 전사자 4만 명, 부상자수도 3만 명에 이르렀고 무려 29만 4,000명이 포로가 되었다. 그 밖에 탈영병의 수도 수천 명에 달했다. 장비 손실 역시 엄청났다. 3,000문 이상의 야포와 3,000정 이상의 기관총, 거의 2,000문에 달하는 박격포와 엄청난 양의 탄약 및 장비를 잃었다. 20마일 너비의 이탈리아 전선에 구멍을 뚫어 전선 전체를 붕괴시켰다. 이탈리아 전선을 완전히 종식시킬 수 있는 직전까지 가며 큰 성과를 거둔 것이었다. 공세는 2주 동안 계속되었고, 이탈리아군이 영국과 프랑스의 지원으로 새로운 전선을 구축하기 전인 11월 7일 피아베강에 도달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은 이제 독일 제국군의 도움을 거의 받지 않고 향후 11개월 동안 피아베 방어선을 유지할 예정이었고, 11월 30일 힌덴부르크와 루덴도르프는 서부전선에 병력을 보강을 하기 위해 벨로의 독일 제국군을 철수시키기 시작했다.
전투 이후 이탈리아의 혼란을 이용하기 위해, 콘라트는 11월 9일 티롤에서 공세를 시작했으나 그의 부대가 전진하기에는 아직 약했다. 루덴도르프는 콘라트 집단군을 강화하기 위해 보로예비치에게 피아베 전선에서 서쪽으로 병력을 이동시킬 것을 호소했지만,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2월 5일까지 콘라트의 군대는 바사노(Bassano)에서 12마일 이내로 진격하여 작년 티롤 공세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이 마지막으로 점령했던 멜레타 산을 재차 점령했다. 이후 카를 1세가 제국의회를 다시 소집한 후, 콘라트는 큰 관심을 가지고 양원의 절차를 따랐다. 그는 자신의 기록과 전 테셴 AOK의 기록에 비판적인 연설을 한 레온 폰 빌린스키[65] 전 재무장관의 상원 연설에 날카롭게 반응했다. 콘라트는 귀족의 일원으로서 자신의 권리를 발동하고 전선에 있어서 제국의회에 직접 참석하지 못하는 현 상황을 고려하여 구 AOK의 유산으로 러시아 군대의 붕괴와 "폴란드의 해방"을 주장했으며, 둘 다 "동맹국인 독일과 긴밀히 협력한 노력"에서 달성했다는 공식적인 반박을 전보로 보냈다.
얼마 후 개인적인 큰 비극이 콘라트의 우울함을 심화시켰다. 스위스의 아로자에서 요양중이던 콘라트의 장남 쿠르트의 수행원들은 쿠르트가 "강한 향수병"을 보여주었고 봄에 이탈리아 전선으로 복귀하기를 희망했다는 말을 보고했다. 쿠르트의 상태는 죽기 5일 전에 더 악화되었지만, 그의 의사들은 죽음이 임박했다고 생각하지 않았고 콘라트에게 알리지 않았다. 1918년 1월 10일에 그는 전쟁의 대부분 동안 그를 활동하지 못하게 했던 폐 질환에서 회복되지 못하고 사망하였다. 하필이면 그날이 그의 31번째 생일이었다. 그 소식은 3일 후 빈을 방문하고 보젠으로 돌아온 콘라트에게 전해졌다. 콘라트는 1월 18일 장례식을 위해 보젠에서 빈으로 가는 야간 열차를 탔고, 그 후 티롤로 돌아가는 야간 열차를 탔다. 콘라트는 지인에게 보낸 편지에서 "쿠르트의 상태가 심각하다는 것을 완전히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사망 소식이 무섭게 나를 놀라게 했다"고 인정했다. 그 소식은 갑작스러운 충격으로 다가왔고, 3년전 콘라트가 지휘하는 작전에서 전사했던 삼남 헤르베르트의 죽음만큼 더 심각했다. 헤르베르트는 콘라트가 가장 아끼는 아들이었고 둘은 좋은 부자관계였다. 그가 죽은 후 콘라트는 그를 끔찍하게 그리워했고, 아무에게도 인정하지 않았지만 그의 죽음에 대해 책임감과 고통을 느꼈다.
대조적으로, 콘라트와 쿠르트의 관계는 장남이 청소년기에 접어들고 아버지의 높은 기대에 무게를 느끼기 시작한 이후 계속 폭풍이 몰아쳤다. 물론 사이가 결코 소원해진 적은 없었지만, 전시 회복 기간 동안 쿠르트에 의해 쓰여진 개인적인 회고록은 아버지가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고 아끼는지 이해하거나 감사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그런 상황에서 쿠르트는 부자의 의견 차이를 진정으로 화해하기 전에 죽었다. 콘라트는 지나에게 이러한 감정들을 털어놓았지만 정작 그의 아들들과는 그런 개인적인 감정을 공유하지 않았다. 쿠르트의 죽음 이후, 콘라트의 사회진화론 미사어구는 더 종말론적이 되었고, 1916년의 패배 이후 그가 채택한 독일 민족주의 정서에 더 큰 징후를 보여주었다. 1918년 2월, 전직 참모 장교에게 보낸 편지에서 콘라트는 전쟁을 "독일의 존재를 위한 투쟁"이라고 묘사했다.
콘라트는 또한 오스트리아의 독일 국민 연합(Deutschnationalen Verein)과도 관계를 맺었다.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9명의 오스트리아-헝가리 야전 원수들 중 콘라트만이 그러한 감정을 표현했다. 그것은 다국적 이익 공동체("Interessenstaat")로서 이중 군주제의 실행 가능성에 대한 그의 믿음이 그의 정치적 세계관에서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했던 그의 전쟁 전 관점에서 엄청난 변화를 나타낸 것이었다. 실제로, 한 때 콘라트는 오스트리아의 위대한 독일 민족주의자들을 자기가 증오하는 이탈리아 민족 통일당원들처럼 동일하게 가혹한 용어로 비판했었다. 게다가 보젠에 있는 동안 그는 매우 흥미롭게 러시아의 소식을 관찰하며 유럽은 이제 아무도 예언할 수 없는 종말과 함께 거대한 변화의 과정에 접어들고 있다고 보았다. 1917년 2월 혁명 이후 콘라트는 "러시아 사회주의의 물결"에 매우 두려움을 느꼈고 유럽을 휩쓸지 않기를 희망했다.
2.4.4.11. 제국의 붕괴와 무력한 은퇴
1918년 4월 이른바 "식스투스 사건"으로 카를 1세의 비밀 평화 계획이 대중에게 알려졌을 때,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의 동맹은 지금까지 가장 큰 균열을 경험했다. 프랑스 총리 조르주 클레망소가 충격적인 폭로를 한 후, 합스부르크 황제는 그 소식을 부인했고 빌헬름 2세는 그의 말을 공식적으로 받아들이는 것 말고는 방법이 거의 없었다. 카를 1세는 콘라트를 급히 소환하였다. 콘라트는 황제의 부인에 대해 진실성을 언급하지는 않았다. 적어도 간접적으로는 그는 황제에게 공감하지는 않았지만, 분리된 평화를 추구하는 동기는 이해한다고 말했다. 그동안 독일과의 협조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었지만, 두 제국의 운명은 이제 연결되었고 모든 차이를 넘어서 "함께 진행할 필요성"을 관철했다.다음 달, 카를 1세가 빌헬름 2세를 만났을 때, 동맹국 간의 구속력 있는 군사 협정과 이탈리아에 대한 오스트리아-헝가리의 또 다른 공세를 요구함으로써 카를 1세의 충절을 시험하였다. 5월 12일 카를 1세는 모의 군사 협정에 서명했다. 또한 다소 꺼림칙하기는 하지만 공세를 취하기로 동의했다. 전선에서 충분한 숫자를 보장하기 위해, 그는 1900년에 태어난 젊은이들의 징병을 승인했다. 콘라트와 나머지 대부분의 장군들은 새로운 공세의 전망을 환영했지만 새로 징병되는 병사들의 대부분은 17세 소년들일 것이라는 사실을 간과했다. 러시아가 전쟁에서 빠지고 1918년 3월에 시작된 프랑스에 대한 독일의 공세가 분명히 성공함에 따라, 남부에 결정적인 타격을 줄 때가 무르익은 것처럼 보였다.
콘라트는 1916년 알프스 돌출부에서 아드리아해로 진출하려다 날씨와 혼란스러운 지휘 체계 때문에 실패한 티롤 공세의 기본 계획을 반복적으로 요구했고, 이번에는 콘라트가 직접 지휘하는 가운데 봄보다는 여름에 발동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카를 1세는 보로예비치의 말도 들었다. 보로예비치는 독일이 협정과 휴전에 동의할 날을 앞두고, 평화 회담에서 협상 카드로 사용하기 위해 군대를 보존할 것을 황제에게 조언했다. 만약 공세가 시작되어야 한다면, 피아베강을 건너 이탈리아 군의 본대와 마주해야 한다는 의견을 냈다. 콘라트와 보로예비치의 의견이 엇갈리자 카를 1세와 그의 참모들은 가지고 있는 병력들을 그들 양쪽에 나누기로 운명적인 결정을 내렸다. 작전은 첫 단추 부터 잘못끼었다. 콘라트는 25개의 보병 사단을 요청했지만, 3개의 기병 사단과 함께 17개의 보병 사단에 대해 만족해야 했다. 시작부터 병력 확보에 실패한데다 보로예비치 집단군이 가지고 있는 4,300문의 야포중에서 겨우 2,500문의 야포를 할당 받았다. 병력은 AOK가 메츠거의 제1보병사단에게 스위스 국경 근처 티롤 전선의 서쪽 끝에서 예비 공격을 지휘하도록 결정했을 때 더욱 줄어들게 되었다. 메츠거는 토날레 고개를 통해 롬바르디아로 가기로 되어 있었다.
6월 15일 콘라트 집단군과 보로예비치 집단군은 1차 공격을 시작했다. 그들의 군대는 보급과 물자가 형편없는 상황에 대부분의 부대는 적절한 포병 지원 없이 공세를 시작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군은 첫날 성공을 거두었다. 콘라트 집단군은 비첸차 (Vicenza) 지역에서 트렌티노 고원능선을 따라 양면공격을 시작했다. 반면 보로예비치 집단군은 피아베강 지역을 따라 총공격을 가했다. 보로예비치 집단군이 피아베강을 가로질러 돌진하여 15마일 너비의 적 전선에 구멍을 뚫는 처음 몇 시간 동안 콘라트는 알프스 산맥에 자리를 잡았고, 1만 명의 이탈리아 포로를 잡았다. 그러나 콘라트의 진격은 곧 이탈리아, 영국, 프랑스 부대를 상대로 좌절되어 콘라트 집단군의 3분의 2가 다시 그들의 초기 위치로 후퇴했다. 한편, 이탈리아의 증원군이 균열을 봉쇄하는 사이 동쪽의 보로예비치 집단군의 침투는 겨우 5마일의 깊이에 도달했다. 이탈리아군은 곧바로 선제포격과 촘촘한 방어선 대응하였다. 결국 보로예비치 집단군은 교두보를 유지하는데 실패했고, 다음 날 보로예비치의 두 번째 싸움에서 완전히 파괴되어 실패했으며, 강둑에 약간의 교두보를 만든 시점에서 오스트리아군은 2만명이라는 대량의 전사자를 내고 있었다. 결국, 6월 19일, 아르만도 디아즈는 이탈리아군에게 오스트리아에 대한 반격을 명령해 강둑의 교두보를 탈환, 6월 23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은 제국군은 피아베강을 건너 후퇴했고, 공세의 포기를 선언, 패주를 시작했다.
이렇게 전쟁의 마지막 큰 도박은 또 다른 재앙으로 끝났다. 콘라트와 보로예비치의 군대는 전사자, 부상자, 포로 모두 합쳐 150,000명의 손실을 입었다. 그중 죽거나 사로잡힌 사람들은 70,000명으로 전체 사상자의 거의 절반을 차지했다. 적군은 84,000명 이상의 전사자와 포로를 잃었지만, 공격의 실패로 인해 제국군은 더 이상의 공격적인 행동을 할 수 없게 되었다. 다행히 이탈리아군은 곧바로 진격하지 않아서 콘라트와 보로예비치는 원래의 방어선을 유지할 수 있었다. 물론 막대한 피해를 입은 사실을 고려할 때 이는 대단한 업적이 아니었다. 6월 25일, 카를 1세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 서부전선으로 이동시키는 힌덴부르크의 명령에 동의했다. 여기에는 메츠거의 제1보병사단이 포함되어 있었다. 콘라트의 아들 에르빈은 메츠거 사단의 참모 장교로 복무했고 서부전선에서 전쟁을 마쳤다. 적의 반격이 탄력을 잃고 전선이 다시 안정되자 카를 1세는 이 재앙의 책임자를 모색했다. 제국의회는 7월 16일에 다시 소집될 예정이었고, 실패한 공세에 대한 정부의 강한 비판을 예상했다. 4년전 콘라트가 거두었던 최악의 공세를 비교적 정상으로 보이게 만든 터무니없는 계획을 세운 카를 1세의 AOK가 비난을 받아야 마땅했지만, 카를 1세는 콘라트나 보로예비치 둘 중 한 명이 제국의회로 가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하지만 보로예비치를 소환하는 것은 정치인들을 만족시키지 못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제국을 보존하려는 카를 1세에게는 희망의 열쇠였던 남슬라브 의원들을 불쾌하게 해서 그들의 충성심을 허탈하게 흔들 수 있었다. 슬라브계 장군인 페르디난트 폰 마터러(Ferdinand von Marterer) 장군은 카를 1세에게 콘라트를 해임하라고 조언했다. 이 공세의 실패에 대한 책임은 그에게 없었지만 여론은 희생을 요구했다.
7월 11일 콘라트는 본인을 제국의 수도로 소환하라는 전보를 받았다. 그리고 끝내 그의 해고는 1918년 7월 15일 월요일에 효력이 발생했다. 해임 당일날 카를 1세는 콘라트를 직접 만나 공식적으로 해임소식을 편지로 건내주며, 카를 1세는 콘라트를 해임 승인하는 것이 본인에게 매우 어려운 결정이었다는 말도 전하였다. 콘라트는 황제에게 "더 이상 공격이 불가능하다"고 관찰하면서 암울한 군사 상황에 대한 평가를 말했다. 카를 1세는 콘라트의 전임 일반참모장이었던 프리드리히 폰 벡지코프스키가 1906년 사임 이후 곧바로 근위대 대장에 임명되었던것처럼 콘라트에게도 황립 및 왕립 선임 근위 궁사대 명예 대장 직위를 제안했다. 그 명예는 콘라트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었고 그것을 거절하려 했으나, 이를 수락하라는 지나의 재촉때문에 마지못해 수락한다. 그러나 추가적으로 온 편지에 카를 1세는 콘라트는 백작으로 승격시켰고, 이 조치에 대해 콘라트는 영광보다는 분노를 느꼈다.[66]
7월 중순에 아내와 함께 보젠을 떠나 빈에서 며칠을 보냈다. 그 후 콘라트가 휴가를 내기전까지 예전에 콘라트가 거주했던 필라흐에서 은둔하였다.[67] 콘라트를 방문하는 사람들은 그의 친인척, 가까운 지인들 뿐이었다.[68] 카를 1세가 주최한 무도회에서 모습을 드러낸적 있었는데, 카를 1세는 콘라트에게 마리아 테레지아 대십자 무공훈장, 2급 무공훈장, 제국의회 상원 종신회원권과 야전원수 지휘봉을 수여하였다. 그 후, 필라흐로 돌아온 콘라트는 나라가 망한 마당에 아무 의미 없이 받은 것들에 대해 "코미디"라며 일축했다.
콘라트는 근위대 대장으로서 전쟁의 남은 기간 동안 실질적으로 현역으로 복무했다. 그러나 남티롤 사령부에서 해임되자, 그는 4년동안 휴일없이 복무했던 것[69]에 자신이 생각한 적절한 보상으로 4개월의 휴가를 요청했다. 카를 1세는 11월 15일까지 요청을 수락하고 콘라트에게 어떠한 의무도 면제해 주었다. 그 사이에, 그의 오랜 친구인 단클이 황실 근위대의 임시 대장으로 복무했다. 9월 20일, 콘라트 부부는 지나의 어머니가 있는 트리에스트를 방문하였다. 6주동안 콘라트는 아드리아해에서 수영을 하거나, 지나와 산책을 하거나, 그림을 그리는 등 휴가를 보냈다. 이곳에 다시 돌아올수 없을 거라는 직감을 한 콘라트는 아름다운 아드리아 해변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렸다.
10월 24일, 이탈리아 전선의 제국군이 끝내 패배하고 무너졌다. 북쪽으로 가는 도로와 철도는 무분별하게 후퇴하는 제국군, 집으로 향하는 탈영병 무리, 그리고 일부 난민들로 혼잡을 빚었다. 10월 29일, 콘라트는 트리에스트를 떠나 장모와 작별을 고하고, 아내와 짐을 챙겨 20시간의 기다림 끝에 10월 30일, 빈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70] 그리고 그 날에는 오스트리아 공화국의 임시 국민 의회는 사회민주당 지도자 카를 레너가 초안 헌법을 채택했다. 2주 동안 제국 정부는 점차 붕괴되어 새로운 공화국에 권력을 이양했다. 한편, 콘라트와 지나는 혼란 속에서도 완전히 은둔하며 살았다. 전쟁의 마지막 몇 주 동안 콘라트의 관심은 이제 그의 살아남은 두 아들들에게 돌아갔다. 1918년 10월 초, 프랑스 서부전선에서 메츠거 휘하에서 복무 중이던 차남 에르빈과 베네치아에서 이탈리아 전선에서 복무 중이던 막내 아들 에곤이었다. 다행히 두 아들들은 제국의 붕괴 이후 무사히 아버지에게로 돌아올 수 있었다.
1918년 여름까지 유럽의 오래된 질서와 콘라트에게 중요한 거의 모든 것들이 함께 무너졌다. 콘라트의 공격적인 현대적 군사 사상과 전통에 대한 경멸은 그가 권력을 잡을 수 있도록 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과한 공격성은 그가 일으켜 세우고자 한 군대와 제국을 파괴하는 전쟁을 촉발시켰다. 그동안 콘라트는 제국이 운명이 점점 끝이 다가오는 것을 목격해야 했다. 전쟁 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다른 주요 인물들의 경우, 궁극적인 붕괴 이전에 죽음을 맞기하기도 하였다. 헝가리가 오스트리아로부터 독립하기 며칠 전인 10월의 마지막 날에 헝가리의 총리였던 티서 이슈트반이 암살을 당했다. 제국의 붕괴를 바랐던 오스트리아 사회민주당의 창시자이자 콘라트와 동갑이었던 빅토어 아들러는 붕괴를 목격하고 콘라트의 생일날에 눈을 감았다. 그리고 그날에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도 해체되었다. 5개월전 사령관직에서 해임되었던 콘라트는 차라리 자신도 죽음을 맞길 바랐지만, 최후의 붕괴를 목격할 때까지 콘라트의 신변에는 변함이 없었다. 11월 12일 황제 카를 1세는 퇴임하였다. 황제는 떠났지만 콘라트는 근위대 대장으로서 임무를 맡기로 되어 있던 11월 중순까지 황제도, 군대도, 제국도 없이 복무해야 했다. 콘라트의 공식적인 은퇴 날짜는 카를 1세가 퇴임한지 3주가 지난 1918년 12월 1일이었다.
2.5. 죽음
그는 이후 합스부르크 출신 장교들을 지원하고 일자리를 주선하기 위해 설립된 자조 단체인 '전문 장교 협회(Berufsgagistenosenschaft)'의 창설을 지지했다. 또한 오스카어 자이스(Oskar Zeiss)[71] 대령이 이끄는 퇴역 군인 단체 "전면 전사 연합"(Frontkampfervereinigung)에도 가입했다. 그러나 독일에 있는 그의 동료들 중 일부가 정치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을 때, 콘라트는 정치 생활에 대한 열망을 거의 보이지 않았다. 1918년 11월 이탈리아 군대가 인스부르크를 점령했다. 콘라트 부부가 그곳으로 이사했을 때 군대는 여전히 도시에 주둔하고 있었고, 수비대의 장교들은 티롤러 호프에 살았다. 이탈리아 장교들은 콘라트를 존경하고 우대하였다. 콘라트는 이탈리아를 싫어한다는 평판을 분명히 하면서도 장교들에게 이탈리아 사람이 아닌 "이탈리아의 정책" 자체가 콘라트의 적이었다고 설명했다. 콘라트는 이탈리아의 문화, 이탈리아 사람들, 그리고 그들 나라의 자연미에 대해 가장 큰 감탄을 했다.[72]이후 콘라트는 빈과 인스브루크에 머물면서 노년을 보냈다. 말년에 콘라트는 유언장을 작성하였다. 에르빈은 콘라트의 쿠르트가 죽은 이후 사실상의 장남이었지만 37세의 그는 아직 자식이 없었다.[73] 그의 개인적인 서류들은 지나에게 상속될 것이고 그녀가 죽은 후에는 막내 에곤의 아들인 내 첫째 손자 프란츠에게 상속되기로 정하였다. 에곤은 손자 프란츠의 아버지로서 상속대리인을 맡았다. 콘라트의 사적 서신은 모두 에곤에게 갔고 이를 자유롭게 출판하거나 폐기하는 것의 권한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콘라트의 개인 소지품, 칼, 그리고 다른 군사 기념품들은 그의 손자 프란츠에게 남겨졌다. 콘라트는 친척들과 친구들에게 줄 작은 기념품들을 선택할 것을 제안했는데, 그들 중에는 보좌관 쿤드만과 소이터, 편집 보좌관 플래처(Platzer), 저널리스트 노박, 그리고 리처드 폰 스턴(Richard von Stern)이 포함되었다. 그는 장례식을 간략하고 바로 그저 간단한 묘비만을 요청했다. 그는 지나가 나중에 죽으면 자기 옆에 묻히기를 원했다.그는 회고록을 출판하였고,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려고 노력했다. 담낭 질환을 지병으로 앓았으며, 폐렴이 합병증으로 발생하여 5번째 회고록을 미완성으로 남긴 채 끝내 1925년 8월 25일 정오 독일의 바트 메르겐트하임의 병원에서 향년 72세의 나이로 사망한다. 이틀 후, 8월 27일 목요일 아침에 빈의 주요 신문사들은 그의 죽음을 호외로 냈고, 파울 폰 힌덴부르크는 그를 친애하는 동지였다며 애도하였다. 막내아들 에곤이 가족을 대표하여 아버지의 유해를 가지고 빈으로 가는 기차를 탔다. 기차가 파사우 국경에 도착했을 때, 독일군은 콘라트의 유해를 오스트리아 육군 의장대에게 넘겼다. 그곳에서 둘째형 에르빈이 에곤과 합류하여 아버지와 함께 빈으로 향했다. 기차는 린츠, 엔스(Enns), 멜크(Melk), 장크트푈텐에 한번씩 정차하여 지역 수비대의 장교와 병사들이 콘라트에게 마지막 경의를 표할 수 있었다. 8월 27일 오후, 기차는 마침내 종점 지역인 빈 베스트반호프 역(Wien Westbahnhof railway station)에 도착하였다. 역에는 공화국의 내각 장관들과 군 상층부 인사들, 그리고 크로바틴과 단클을 비롯한 콘라트의 옛 동료 장성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장례식은 9월 2일의 오스트리아 공화국의 주관 아래 국장(Staatsbegräbnis)[74]으로 치러졌고 100,000명 이상의 조문객이 참석했다. 콘라트의 유해는 그가 사랑했던 삼남 헤르베르트가 묻혀있는 히칭 묘지(Hietzinger Friedhof)에 안장되었다.
3. 평가
콘라트와 같이 복무했던 전 동료 장성들에게 있어서 콘라트는 천재였다. 과장을 보태서 말하면 그의 추종자들은 콘라트를 사부아 공자 외젠에 비견된다고 자부하였다. 그의 공격적인 전투 교리는 군부 내에서 압도적으로 지지를 받았다. 종전 후에도 세간에서는 그를 비판하기보다는 오히려 제국에 헌신하여 적과 맞선 훌륭한 영웅이라고 인식했을 정도였다. 다만 협조성이 부족했던지라 남들을 믿지 못했던 콘라트는 제국군의 모든 작전 계획들을 본인의 검토 및 승인하에 이루어지도록 하였다. 이때문에 독일 제국군과의 합동작전에서도 다소 마찰을 일으켰다.
제국주의적 사고방식의 결과로 복고적, 반자유주의적 인사였던 콘라트는 100년전 인물이었던 클레멘스 폰 메테르니히 수상이 이미 내세웠던 것과 같은 길을 걸었다. 콘라트의 관심은 오직 오스트리아-보헤미아, 헝가리, 남슬라브 이 세개의 세력이 황실에 충성하면서 서로 끊임없이 경쟁하며 제국을 번성시키고자 하는 것 뿐이었다. 일반참모장으로서 그는 제국을 부흥시키는 열쇠이자 내부 분열의 치유책으로서 공격적인 외교 정책을 옹호했다. 자유주의와 민족주의를 불필요한 방해물이라 판단하였고, 철저한 보수 정치에 의한 질서 유지를 지향하고 있었다. 다만 콘라트는 동 시대의 많은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민족주의에 영향을 받은 민족들의 의지에 반하여 다른 나라를 무력으로 병합하는 것이 제국을 오히려 약화시킨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그의 완전한 오스트리아 중심적인 사고로 인해, 콘라트는 민족의 독립을 위해 싸우는 급진적 민족주의자들에게 반감을 사고 말았다.
콘라트가 짜놓은 전쟁 계획은 종종 적의 힘을 과소평가하여 실패를 거둔 바가 있었는데, 예를 들어 세르비아군은 콘라트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효과적으로 전투에 나선 반면, 제국군은 무분별하게 패주할 뿐이었다. 추가로 이탈리아 전선에 대한 그의 공세는 좋은 결과를 내지 못했고, 막대한 병력 손실을 입었다. 이러한 실수의 결과는 전쟁 첫 해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치명적으로 약화시켰다. 그의 군대는 독일 제국군의 막대한 지원을 통한 전투에서만 성공을 달성할 수 있었으며, 이는 독일 제국군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을 점차 전쟁에서 소외시키는 결과로 낳았다.[75]
그가 육군 원수로 재임하는 동안,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은 대부분의 주요 전쟁에서 패배하였고[76],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은 연달은 패배로 궤멸되어 결국 제국의 멸망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그의 대국적인 식견 자체는 인정을 받았다. 무척 뛰어난 전략적 식견에 비해서 실제 공적은 매우 뒤떨어졌던 셈인데, 사실 이는 약체화되고 불안 요소가 산재했던 제국군 전체의 상황 때문이었다. 일선에서 물러난 이후에는 짜놓은 공세 계획 등을 독일에게 넘길 뿐이었다. 비아냥받는 콘라트의 대공세 계획은 무의미하지도 않았던 것이, 팔켄하인의 소모전략의 경우도 결국 나중가서야 팔켄하인이 스스로의 실패를 인정하고 뒤늦게 대공세에 나서게 되었을 정도였다.
그의 가장 큰 문제점은마르크스주의, 뛰어난 군사전략적 식견과는 별개로 대전략적 식견이 뒤떨어졌다는 점이었다. 1914년과 1918년 사이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의해 동원된 800만 명의 군인들은 종전했을 때 당시 150만 명 미만의 사망자와 190만 명 이상의 부상자와 120만 명의 전쟁 포로라는 피해를 입었으나 콘라트는 그러한 재앙에 대한 책임을 결코 지지 않았다. 1918년 11월의 혼란 속에서, 제국의 붕괴를 이원론과 민족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것의 탓으로 돌렸다. 프란츠 페르디난트와 함께 수년 전에 옹호했던 "삼중제국" 개념을 제국이 진작 충실했다면, 크로아티아가 지배하는 남슬라브를 만들기 위해 제국이 더 세분화되었다면 상황이 달라졌을 것이라고 느꼈다. 또한 콘라트는 개전 초반 신속한 공세가 좌절된 이유를 독일 제국의 군사적인 지원이 부족해서 실패한 것이라고 비난하였다. 콘라트는 수년간의 정치적 다툼으로 이중전선에 대해 준비하지 못하도록 군을 방치하고 지원을 부족하게 만든 것을 인정하기보다는 현실도피에만 급급했고, 종전 후에도 자신은 어떠한 정치적 결정도 내리지 않은 "그냥 군사 전문가"였을 뿐이라면서 제국 패망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려 들었다. 하지만 그의 염세적인 사회진화론적 사상에 중점을 두자면, 이러한 결과는 국가의 발전에 있어서 더 강한 국가가 싸움 끝에 투쟁에서 이긴것뿐이라며, 승패 여부는 상관없이 개인의 책임이 당연히 없는 결과로 여겼다. 그는 어떤 부모들 못지않게 고통을 겪었다. 콘라트의 장남과 삼남은 전쟁통에 전사하였고, 막내는 팔에 부상을 입었다. 그들의 운명에 관해서는 콘라트도 걱정하였지만, 4명의 자기 자식들은 모두 현역으로 복무할 의무가 있다고 언급하는 것으로 전쟁에 대한 열정을 몸소 보여줬다.
어쨌든 동시대 제국군 군부의 주요 장성들 중 콘라트만이 현대 총력전에 대한 이해도가 뛰어나 끝까지 중임되었다.[77] 콘라트는 전술에 대한 종합적인 분석과 상황을 읽을 수 있는 능력이 무척 뛰어났고, 이를 포함하여 군대의 기동성 및 수송 및 항공전의 기계화는 그를 군사 분야의 선구자로 만들었다. 이렇듯 콘라트의 명성은 국내외적으로 알려져 있었다. 가령 독일 제국군의 육군 일반참모장이자 바이마르 공화국의 2대 대통령인 파울 폰 힌덴부르크는 콘라트에 대해서 대담하고 뛰어난 능력을 가졌지만 제국군 자체가 약점이어서 제국군이라는 그림자에 가려진 슬픈 인물이라 평가하였다.
영국의 유명 군사 역사학자인 시릴 펄스(Cyril Falls)[78]에게도 칭찬을 받았다. 1959년에 출간한 The Great War에 따르면 콘라트는 분명 전쟁에 대해서는 최고의 전략가이며, 독일 제국군이 성공을 거둔 동부전선 공세 작전의 대부분은 콘라트의 작전에 근거했다면서 그의 계획은 훌륭하게 구상되었다고 주장했다.
소련의 원수이자 이론가인 보리스 샤포시니코프는 콘라트 사후 2년이 지나 1927년에 출간한 군사 교리 서적 모지아미(Мозг армии)를 통해 콘라트를 정통파 장군이며 참모 장교로서 이상적인 모델이라고 봤다. 예를 들어 군대에서 민족이나 출신에 대한 차별없이 인재를 평등하게 기용했던 그의 사상을 마르크스주의와 빗대면서 군인으로서의 정치가 유능했다는 평을 남겼다. 샤포시니코프가 동부전선에서 장교로 복무하였을 적, 적국의 지휘관이 콘라트였음에도 불구하고 공격전의 충실한 추종자였던 샤포시니코프는 콘라트의 전략적 전망과 전장 전술에 대해 무비판적이었다. 제1차 세계 대전 당시의 콘라트가 "집단적" 참모 활동의 가장 좋은 예라고 칭송했으며, 개인적인 자질을 평할 때도 콘라트를 그의 기질과 워커홀릭적인 모습에서 나폴레옹에 비견하여 독립적, 정력적이며 계획적, 대담하고 강인한 성격을 가졌다며 칭찬을 하였다.
영국의 군인이자 군사학자인 리델 하트 역시 콘라트에 대해서 "그 누구도 그의 열의를 능가하지 못할 정도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 총사령관 콘라트는 유럽에서 제일 전쟁에 열성적이었다."라는 평을 남겼다.
현대에 그를 연구한 인물로는 미국의 역사가 새뮤얼 R. 윌리엄슨(Samuel R. Williamson)[79]등이 있으며 콘라트를 아마도 제 1차 세계 대전 이전 모든 유럽의 군사 지도자들 중 가장 교활한 인물로 평가하였다.
반면, 오스트리아의 정치가이자 오스트로마르크시즘(Austromarxism)[80]의 창시자 오토 바우어(Otto Bauer)[81]는 콘라트를 단순한 전쟁광으로 규정하고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전쟁 발발의 주범으로 고려되는 유럽 전역의 5~6명을 꼽는다면 그 중 한 명은 확실히 콘라트 원수일 것이다."
1925년 8월 25일, 콘라트의 장례식에서
1925년 8월 25일, 콘라트의 장례식에서
하지만 이러한 바우어의 논평과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논란의 여지가 있었던 콘라트의 기록에도 불구하고 당시 많은 오스트리아인들은 그의 비판에 동의하지 않았다.
독일의 군사학자 군터 에리히 로텐베르크(Gunther Erich Rothenberg)[82]는 앞서 서술했듯 지형과 기후를 무시하고 보급에 대해 가치를 두지 않은 점, 기관총과 야포의 잠재력을 과소평가, 그리고 국가체급만으로 전력을 확인하는 오판으로 기껏 짜놓은 전략에 자국 역량이 따라가지 못하는 상황을 만들었다고 그를 비판하였다.
한스 폰 젝트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에 대한 맹렬한 평가를 발표했는데 젝트는 오스트리아-헝가리 군대의 붕괴에 대한 콘라트의 책임을 정확히 파악했다. 제국군의 군사와 장비는 일반적으로 좋은 수준이었지만, "비이성적인" 가차없는 공격은 전쟁 초기에 일찍 정예병력을 날려버렸고, 전투 훈련이 충분히 되지 않은 예비 병력을 전선에 급히 투입해야 했다. 그리고 예비역 장교들의 리더십이 쓸데없이 너무 "체계적"이었으며 하급 장교들에게는 너무 적은 주도권을 보여줬다는 점을 들어서 콘라트를 간접적으로 비난했다. 콘라트가 일찍이 제국군을 승리로 이끌지 못했고, 스스로 군대를 지휘할 계획을 세운 황제밑에서 복무하기에도 기질적으로 적합하지 못했다는 사실 외에도, 콘라트가 일반참모장에서 해임된 가장 큰 이유는 평화를 추구했던 카를 1세에게 전쟁이 좋든 나쁘든 계속 지속하려 했다는 점이었다.
당대 지식인들도 콘라트를 조롱하였는데, 카를 크라우스(Karl Kraus)같은 경우, 콘라트를 전형적인 장군 캐릭터로 표현하였다.
이런 면모 때문에 후대에는 이론상으로는 위대한 전략가였지만 실제 전장에선 완벽한 실패자였던 탁상위 명장의 전형으로 평가 받는다.
4. 기타
콘라트는 군인 집안 출신으로 1910년에 남작(Freiherr) 작위를 프란츠 요제프 1세에게 수여받았으며 1918년에 카를 1세에게 백작(Graf) 작위를 받았다. 그러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해체 이후 설립된 오스트리아 제1공화국은 신분제를 폐지하여 이름에서 폰(von)이나 추(zu) 등을 사용할 수 없게 만들었기 때문에 그의 이름은 이때부터 프란츠 콘라트회첸도르프(Franz Conrad-Hötzendorf)가 되었다. 사실상 콘라트의 성에 회첸도르프가 붙은 기간은 1년도 안된다.
콘라트 개인으로는 수줍음을 많이 타고 쉽게 우울해하는 사람이었다. 또한 감수성이 풍부하고 가족을 사랑하였다. 다만 자식들에게는 엄한 아버지였다고 한다.
콘라트는 맏아들인 쿠르트에게 많은 기대를 걸었었는데, 쿠르트는 그런 아버지를 어려워 했었다. 쿠르트가 15살이었을 때 아버지의 모교에 진학하고자 했지만 3과목에서 낙제를 받아 1년을 유급해야 한다는 소식을 가지고 집에 돌아왔을 때 쿠르트는 낙담했었다. 하지만 쿠르트는 아버지의 예술적 재능을 물려받았기 때문에 그림을 그리는 것에 위안을 얻었다고 한다. 그래서 아버지의 기대에 짓눌려 무너지지는 않았다고 한다.
그 외에 콘라트가 가장 아끼는 아들인 3남 헤르베르트는 어릴때부터 승마에 재능이 있었다. 기수로서 엄청난 잠재력을 가지고 있었던 헤르베르트는 아버지의 교육을 순조롭게 헤쳐나간 착한 소년이었다. 그래서 콘라트가 3남을 제일 좋아하였다.[83] 막내인 에곤은 어머니의 음악적 재능을 물려받아 어릴적부터 피아노를 잘 쳤었다고 한다.[84]
콘라트의 아버지가 본인에게 그랬던 것처럼 콘라트는 자식들도 군인으로서의 길을 걷기를 바랐다. 자식들은 학교, 숙제, 집안일 등 일상 생활에서 콘라트의 군인 규율에 묶여 있었다. 다만 일반적으로 그 시대의 아버지치고는 체벌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대신 화가 나면 자식들에게 무언의 압박감을 안겨주며 집안의 분위기를 어둡게 하였다. 그래서 자식들은 학교 성적이 떨어졌을 경우 아버지가 실망할 것을 두려워하였다. 콘라트의 아내인 빌헬미네도 자식들에게는 좋은 어머니긴 했지만 남편의 엄격한 교육 방식을 지지했다.
브루실로프 공세의 지휘관이자 콘라트를 완벽하게 나락으로 빠뜨린 알렉세이 브루실로프와는 1살 차이인데, 둘 다 향년 72세에 사망한 공통점이 있다.
후고 콘라트 폰 회첸도르프(Hugo Conrad von Hötzendorf)[85]라는 오시예크 출신의 크로아티아인 화가가 있었는데 그의 아버지는 그의 그림 스승이기도 했던 프라뇨 콘라트 폰 회첸도르프(Franjo Conrad von Hötzendorf)[86][87]로 브륀에서온 귀족 출신이었다고 한다. 프라뇨는 소싯적에 빈을 거쳐서 오시예크에 정착해 미술 사립 학교를 차렸다고 하는데, 콘라트의 조부인 오이겐과 성이 같고 둘 다 귀족이라는 점, 동향인 점, 비슷한 나이대임을 미루어볼 때 오이겐과 친척인게 확실하며 프라뇨의 손윗형제 내지는 사촌으로 추정된다. 만약 오이겐과 프라뇨가 친형제라면 후고는 콘라트의 당숙임이 틀림없다. 화가 친척을 둔 게 집안 내력인지 재밌게도 콘라트도 그림에 재능이 있었다고 한다.
5. 저술
- 전술 교리 서적, 크라이젤 - 크뢰거 출판사(Kreisel u. Kröger)
- 1권: 보병 개론. 빈 1898.(Einleitung und Infanterie. Wien 1898.)
- 2권 2: 전쟁에서의 포병과 보병. 빈 1899.(Band 2: Artillerie, Cavallerie, vom Gefecht. Wien 1899.)
- 보병 전투 훈련. 6판. 빈 1917.(Die Gefechtsausbildung der Infanterie. 6. Auflage,.Wien 1917.)
- 1906년부터 1918년까지의 나의 복무 . 회고록. 비엔나 등 1921년에서 1925년까지.(Aus meiner Dienstzeit 1906–1918. Rikola-Verlag, Wien u. a. 1921 bis 1925):
- 1권: 1906년과 1909년 동안의 병합의 시간.(Die Zeit der Annexionskrise 1906–1909.)
- 2권: 1910년과에서1912년의 리비아와1912년 말의 발칸 전쟁.(1910–1912. Die Zeit des libyschen Krieges und des Balkankrieges bis Ende 1912.)
- 3권: 1913년 발칸 전쟁의 결과와 1914년에 사라예보에서 황태자가 암살당하기 전까지.(1913 und das erste Halbjahr 1914. Der Ausgang des Balkankrieges und die Zeit bis zum Fürstenmord in Sarajevo.)
- 4권: 1914년 6월 24일 사라예보에서 왕자 암살부터 1914년 9월 30일 세르비아와 러시아에 대한 1차 공세 종료 및 2차 공세 시작까지의 정치 및 군사적 사건.(24. Juni 1914 bis 30. September 1914. Die politischen und militärischen Vorgänge vom Fürstenmord in Sarajevo bis zum Abschluß der ersten und bis zum Beginn der zweiten Offensive gegen Serbien und Rußland.)
- 5권: 1914년 10월-11월-12월. 전쟁의 사건과 이 시기의 정치 과정.(Oktober-November-Dezember 1914. Die Kriegsereignisse und die politischen Vorgänge in dieser Zeit.)
- 1878년 나의 시작, 1882년 사령관이 그린 도면과 지도를 전보로 보냈던 청년 시절의 전쟁 기억 . 문화 정책 발행인, 베를린 1925.(Mein Anfang. Kriegserinnerungen aus der Jugendzeit 1878–1882. Mit Faksimiles nach Karten und Handzeichnungen des Feldmarschalls. Verlag für Kulturpolitik, Berlin 1925.)
6. 대중매체
[1] 국립국어원의 외래어 표기 용례대로는 '폰회첸도르프'로 표기한다. 게르만어권 인명의 전치사 및 관사는 뒤 요소와 붙여 적도록 하고 있다.[2] 오스트리아 제1공화국의 법령으로 신분제가 폐지되고 귀족 접두어가 철폐된 뒤 개명한 이름.[3] Franz Xaver Conrad von Hötzendorf[4] Barbara Kübler[5] Barbara "Betti" Conrad von Hötzendorf[6] Wilhelmine le Beau[7] Kurt Graf Conrad von Hötzendorf[8] Erwin Graf Conrad von Hötzendorf[9] Herbert Conrad von Hötzendorf[10] Egon Franz August Julius Karl, Graf Conrad von Hötzendorf[11] 일반적으로 알려진 제국원수와는 좀 다른 개념의 계급이다. 자세한 사항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제국원수 항목 참조.[12] 콘라트의 증조모[13] 또는 요제프(Josef)[14] 이는 콘라트가 나중에 사회진화론에 관심을 갖게 되는 토대가 된다. 어릴 적 콘라트가 겪은 경험들은 그의 가치관에 영향을 크게 끼쳤고, 후에 종교적 믿음보다는 자연 법칙에 순응하는 성격이 형성되고 말았다.[15] 당시 19세기 유럽에서의 사냥은 지금으로 치면 골프와 같은 취미로, 남자들의 인맥을 형성하고 우정을 결속시키는 활동이었다. 즉, 콘라트는 시대에 맞지 않는 부류인 셈. 사냥을 좋아하지 않던 콘라트는 이후 사회적 상호 작용에 제한을 두게 되고 이것이 발전하여 아싸 성향을 가지게 되었다.[16] 특히 크사버는 1848년 혁명 이후 헝가리를 혐오하게 되었다. 조국이 둘로 나뉘어진 것도 모자라 그 혁명으로 인해 부상을 입고 제대해야 했기 때문. 그런 아버지의 영향으로 콘라트 또한 반헝가리 사상을 가지게 되었다.[17] 바바라는 혁명 당시 심각한 부상을 당한 남편을 목격했고, 이것이 트라우마가 되어 아버지의 뒤를 이어 군에 입대한 아들도 걱정하였다. 특히 말을 탔다가 다칠까봐 불안하여 콘라트가 기병이 되는 것을 말렸다. 하지만 아들은 장성하고 나서 훌륭한 기수가 되었기에 어머니의 속을 썩였다. 수십 년 후 콘라트가 장군이 되었을 때, 바바라는 노모(老母)가 되어서도 콘라트가 새 말을 살 때마다 여전히 걱정했었다고 한다.[18] 입학하고 나서 아들을 그리워한 바바라는 남편 크사버를 설득해서 임시로 아들이 입학한 학교 근처로 이사하여 아들을 자주 보려고 했다. 하지만 사관 후보생들은 일요일에만 외출할 수 있었기에 아들을 보는 일은 녹록치 않았다.[19] 콘라트와 동기였던 모리츠 아우펜베르크 폰 코마루프는 콘라트의 부모가 그를 애지중지했다고 회상했다.[20] 세계 최초의 사관학교라 불리던 오스트리아 제국의 명문 사관학교였다.[21] 동부전선에서 과도한 업무로 인해 스위스에서 과로사[22] 동부전선에서 부상을 입었지만 다행히 죽지 않았다.[23] 동부전선에서 전사[24] 오스트리아 란트베어 산하에 편제된 티롤 후백국의 향토방위군. 1906년 제8보병사단의 사단장으로 재직중이던 프란츠 콘라트 폰 회첸도르프의 주도로 티롤을 방위하는 란데스슈첸 산악보병대대들과 각종 향토예비군 부대들을 통합하여 만든 산악전 전문 부대이다. 주적인 이탈리아 왕국군 산악전 부대인 알피니 산악연대들의 영향을 짙게 받았다.[25] 그 결과로 세르비아 침공 당시 콘라트의 결정에 대해서는 처음부터 의문이 제기되었다. 콘라트의 계획에는 분명, 제국군의 역량이 따라가는 게 전제 조건이었지만 막상 실전에 들어가면 현실성이 결핍되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콘라트는 황제의 신임을 받았으며, 군부에서 대단히 신뢰를 받던 존재였다. 따라서 제국군 내에서는 콘라트가 명령하는 대로 수행될 것이 분명했다. 이러니저러니해도 결국은 콘라트가 제국군에게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유능한 전술가로 여겨졌기 때문이었다. 독일군 일반참모장의 명령에도 자기 고집을 꺾지 않으려 했던 콘라트의 성격은 해당 전역에서 안정적인 방향을 제시해 주었다.[26] 당시 콘라트는 아내와 사별한 상태였다. 불륜 상대였던 폰 라이닝하우스 백작부인은 32세로 콘라트보다 27살이나 어렸었다.[27] 다만 헝가리의 입지를 약화시켜 오스트리아-보헤미아, 헝가리, 남슬라브라는 3개의 세력이 균형을 이뤄 제국을 지탱시킨다는 생각은 서로 공통되었다.[28] 다만 체코의 경우 처음에는 딱히 독립 여론이 크지 않았고, 오히려 제국 내에서 동등한 권리를 얻는 것을 더 원했다.(물론 에드바르트 베네시처럼 분리독립을 원하는 측이 없지는 않았지만.) 그러나 1차 대전에서 오헝 제국의 패색이 점점 짙어지자 체코는 결국 분리독립을 추구하게 되고 제국이 패망하자 슬로바키아와 연계한 체코슬로바키아 공화국으로 독립하였다.[29] 여기서 군의 상태를 확인했음에 불구하고, 전쟁을 강행하려 한 콘라트의 무모함이 드러난다.[30] 생몰년도: 1847년 ~ 1917년[31] 독일어, 헝가리어, 체코어, 이디시어, 슬로바키아어, 우크라이나어, 폴란드어, 세르보크로아트어(세르비아어, 크로아티아어, 보스니아어), 슬로베니아어, 이탈리아어, 루신어, 루마니아어.[32] 제1차 세계 대전이 벌어지기 전, 독일 제국은 일단 전쟁이 터질 경우 단기전으로 끝날 것이라고 예상했으며 동부전선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작전 협조를 할 필요성도 별로 느끼지 못했다. 따라서 1896년~1909년에 양국 참모부 간의 교류는 거의 완전히 정지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콘라트와 소 몰트케가 서로 간간히 서신을 보낼 뿐이었다. 그 후 콘라트의 주장으로 양국 참모부 간의 교류가 재개되기는 했지만, 1914년 당시 양국 간에는 대러시아전을 염두에 둔 어떠한 합동 작전계획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고 개전과 동시에 향후 전쟁의 전망에 대한 양국 간의 견해 차이가 발생하기 시작했다.[33] 독일 제국군 육군 일반참모장 에리히 폰 팔켄하인은 개전 당시 총 80개 사단 가운데 70개 사단을 서부전선에 투입할 계획이었다. 프랑스 공화국을 처리하는 데 36일~40일이 걸리는 동안, 동부전선에서는 나머지 10개 사단으로 방어에 전념한다는 전략을 세워두고 있었다.[34] 그러나 러시아도 독일보다 약체인 오스트리아-헝가리를 먼저 치려는 목적으로 바르샤바 돌출부를 통해 오스트리아-헝가리의 후방과 측면을 칠 계획이었다.[35] 전략적인 측면에서도 둘은 의견이 갈렸다. 콘라트는 항상 공세(der Offensive)로 일관하길 원했으나, 팔켄하인은 소모 전략(Ermattungsstrategie or Zermürbungsstrategie)으로서 전쟁을 이끌고자 하였다. 그러한 면에서 콘라트는 오히려 파울 폰 힌덴부르크의 섬멸 계획(Vernichtungsplän)에 열렬한 관심을 가졌다. 양면전쟁에서의 우선순위도 논쟁거리였다. 개전때부터 팔켄하인과 콘라트는 이와 같은 동부전선과 서부전선 사이의 우선순위 문제를 놓고 갈등을 일으켰음에도 전쟁이 끝날때까지 끝내 해결하지 못했다.[36] 게다가 콘라트는 러시아의 공격에 대비해 러시아 국경지대에도 8개 육군 군단을 배치해야만 했다. 세르비아쪽에 배치한 부대는 구경 120mm가 넘는 중포(重砲)를 오늘날 1개 포병연대 전력에도 미치지 못하는 불과 40여문만 동원할 수 있었는데, 이는 세르비아군보다 조금 많은 수준이었다. 한마디로 제국군은 허우대만 큰 약골이었다. 이는 콘라트가 야포를 과소평가했던 탓이 크다.[37] 수송 담당관인 에밀 라첸호퍼 소령(Emil Ratzenhofer)은 콘라트에게 세르비아 전선에서 전투를 중단하고 북쪽으로 향하는 기차에 병력을 실으면 8월 23일 이전에 갈리치아에 도착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불행히도 8월 23일에 러시아군이 도착했지만 제국군은 약속보다 16일 늦게 갈리치아에 병력이 도착했다. 심지어 나머지 부대들도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철도가 붕괴되었기 때문에 수송에 차질이 생긴 것이었다.[38] 둘은 지휘관에서 짤리기 전 2년 반 동안에도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다만 콘라트의 회고록에 따르면 "2년 반의 전쟁 기간 동안 함께 일했음에도 작은 기념품 하나 받은 적이 없고, 내가 중병을 앓았을 때도 안부를 물어본 적이 없다"며 서운함을 표현했다. 이는 프리드리히 대공이 공적인 관계에는 충실했으나 사적인 친분은 거의 없었음을 시사한다.[39] 옆에 있는 사람은 콘라트의 보좌관인 루돌프 쿤드만(Rudolf Kundmann)이다.[40] 헤르베르트는 이미 최전선에 배치되어 있었다.[41] 그래도 크라시니크 전투에서 거둔 승리 하나로 단클은 1917년에 제국상급대장으로 승진하였고, 남작 작위와 함께 마리아 테레지아 훈장 기사십자훈장을 받았다. 1918년 단클 남작은 명예로 백작 작위와 '폰 크라시니크' 칭호를 받게 되었다. 아우펜베르크도 마찬가지였다. 1915년 4월 25일,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의 칙령에 따라 모리츠는 남작의 지위로 올라갔고 코마루프(Komarów)라는 칭호를 받아 이름을 모리츠 아우펜베르크 폰 코마루프(Moritz Auffenberg von Komarów)로 바꾸었다.[42] 개인적 측면에서 이 전투는 당시 소장이었던 칼 구스타프 에밀 만네르헤임의 경력에서도 중요한 순간이었다. 그는 러시아 제4군에 배속된 친위 울란 여단을 이끌었다. 만네르헤임은 이 전투에서의 지휘로 성 게오르기 훈장을 받았고, 갈리치아 전투 과정에서 많은 추가 전투에 참여했다.[43] 모리스 아우펜베르크도 이때의 공으로 폰 코마루프라는 성을 황제로부터 하사받게 되었다.[44]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은 후퇴를 하는 한편, 마을들을 체계적으로 파괴하고 주민들을 추방하는 초토화 작전을 실시, 대규모 난민 발생했다.[45] 두사람은 끝까지 서로에 대한 신뢰와 존중을 유지했다. 이는 당시 군 고위층의 일반적인 모습과는 다른 것이었다. 보통 실각한 장성들은 서로를 비난하거나 책임을 전가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50년이 넘는 우정이 군과 정치적 격변 속에서도 변치 않았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점이었다.[46] 원래 제9군의 사령관은 리하르트 폰 슈베르트(Richard von Schubert) 포병대장이었으나, 오헝군의 지휘를 받기 싫었던 독일군은 오헝군의 장성 계급중에 제국상급대장이 없다는 걸 이용해서 파울 폰 힌덴부르크 상급대장을 제9군의 사령관으로 임명하는 꼼수를 썼다. 오헝군에는 없는 계급이지만 명목상 병과대장보다는 한단계 높은 직급이기 때문에 이를 구실로 동맹군의 지휘권 확보에 유리한 위치를 점할 수 있었다. 허나 오헝군도 얼마안가 제국상급대장 계급을 본격적으로 도입하기에 이르렀다.[47] 오늘날의 데블린(Deblin)[48] 물론 프셰미실 요새가 위험한 상황이라 구원군을 뒤로 물릴 수도 없었다.[49] 특히 프셰미실 요새 함락이 치명타였다.[50] 물론 앞서 말했듯이 콘라트의 제국상급대장 진급은 독일군에 대한 지휘권 확보라는 목적도 다분했다.[51] 독일의 순무의 겨울은 그나마 전쟁 발발 2년 후인 1916년부터 발생했지. 오스트리아-헝가리는 무려 대전쟁 발발 약 2개월 후인 1914년 10월부터 식량난을 겪기 시작했다.[52] 이름은 독일 남부군이고 지휘관도 독일인이지만, 부대 구성원의 대다수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이었다.[53] 이후 11차례에 걸쳐 지속적인 소모전이 벌어지면서 전력을 모두 소모한 이탈리아군은 빈사지경에 빠지게 되었다.[54] 후대에서야 콘라트의 대표적인 실책이라고 까이지만, 사실 이건 결과론에 입각한 비판이며 당시 콘라트의 판단은 합당하였다. 러시아 제국은 고를리체-타르누프 공세에서의 패배를 기점으로 폴란드를 잃었고, 무능한 니콜라이 2세에 대한 러시아 국민들의 민심이 크게 나빠졌다. 뿐만 아니라 러시아는 오스만 제국과도 전쟁 중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다시 병력을 긁어모아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에게 반격을 가한다는 것은 러시아 제국 스스로 자충수를 두는 것과 다름 없었다.[55] 제국군은 2,000문의 야포를 동원했고, 그 가운데 500문이 중포였던 데 반해 이탈리아군은 겨우 588문의 야포와 36문의 중포밖에 없었다.[56] 물론 이것은 명예직[57] 콘라트는 정작 이 규칙이 카를 1세의 아내 치타 황후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는 사실에 분개했다.[58] 사령본부가 바덴으로 옮겨진 후 콘라트의 아내 지나는 허락없이 그를 거의 보러 갈 수 없었다.[59] 콘라트의 이름을 따서 콘라트 집단군(Heeresgruppe Conrad) 혹은 요제프 대공 집단군(Heeresgruppe Erzherzog Joseph)이라고도 불린다.[60] 그로부터 35년이 지난 후, 콘라트의 열렬한 숭배자였던 오스카어 레겔레(Oskar Regele, 1890-1969)는 그의 해임을 해리 S. 트루먼이 더글라스 맥아더를 해임하기로 한 결정에 비유했다. 콘라트는 그의 총사령관과 잘 지낼 수 없었고 주요 정치인들의 신뢰도 잃었다.[61] 카를 1세의 일반참모장 해임은 다른 나라에 비하면 늦은 편이었다. 콘라트는 무려 31개월동안 조국의 군대를 지휘했으며, 이 기간 동안에 이미 이탈리아, 프랑스, 독일은 참모총장을 교체한 상태였다.[62] 그의 군사적 능력이 매우 유능한 것을 비롯해서 콘라트에 대한 충성심이 높았고 콘라트(AOK)와 팔켄하인(OHL) 간의 분쟁을 중간에서 자주 조정했기 때문에 합스부르크 가문 휘하의 장교로서는 이례적으로 독일 장성들이 그를 상당히 높이 평가했다. 후에 메츠거는 카포레토 전투에서 제1보병사단을 지휘한 공로로 마리아 테레지아 기사십자훈장을 받으며 대외적으로도 유능한 부대 사령관임을 입증했다.[63] 롬멜 소위는 뷔르템베르크 산악대대의 중대장으로 제12차 이손초 전투에서 눈부신 활약을 보여주었다.[64] 카포레토를 공격한다는 생각은 원래 독일 제국군의 생각이 아니었다. 몇 년 전, 1908년 일반참모부의 전적지답사에서 콘라트는 카포레토에서 북쪽으로 7마일 떨어진 플리츠(보비)와 하류로 8마일 떨어진 톨메인(톨민) 사이의 공격 계획을 스케치했었는데, 여기서 이손초강을 가로질러 돌파해서 카포레토를 공격하는 것에 이점이 있다는 것을 인식했다. 그래서 1917년 1월, 힌덴부르크와 루덴도르프와의 마지막 만남에서, 그것을 기억해낸 콘라트는 이 계획에 대해 자세히 설명했다, 하지만 카를 1세가 이탈리아에 대한 새로운 공세를 요청하기 전까지 이 계획을 보류하기로 하였었다. 그리고 이 콘라트의 작전 계획을 상정해뒀다.[65] 원래 콘라트의 "전쟁 정당"의 일원이었으나, 전쟁이 발발하자 시류에서 벗어났다.[66] 훗날 카를 프리드리히 노박(Karl Friedrich Nowak)이라는 언론인과의 인터뷰에서 콘라트는 "계급과 작위에 전혀 가치를 두지 않았다"고 말했다. 또한 노박에게 자신이 은퇴를 요청하지 않고 해임되었다는 소식을 퍼뜨리도록 허락해주었다.[67] 한편 콘라트는 전선에 나가 있는 동료들의 편지만 받았는데 그중 9월 초, 서쪽의 베르됭에서 복무중이던 메츠거는 독일에 대해 그들의 빈약한 무기와 지친 상태를 보고서는 1915년 당시의 "카르파티아의 겨울"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을 상기시켰다며 독일 제국의 붕괴를 예언하는 편지를 썼다.[68] 그중에는 사별한 아내의 동생 아우렐 폰 레 베아우(Aurel von Le Beau, 1866-1922) 제55보병사단장도 포함되었다.[69] 1918년 1월 18일, 쿠르트의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벗었던 하루를 제외하고[70] 11월 4일, 합스부르크의 통치가 무너진 트리에스트를 이탈리아군이 점령했다.[71] 콘라트가 제1보병연대장으로 트로파우에서 행복한 군생활을 보냈던 당시에 콘라트의 부관이었다.[72] 지나는 나중에 많은 인스브루크 사람들이 이탈리아 점령군과 교제하는 부부의 관행을 못마땅하게 여겼다고 밝혔지만, 다른 자료에서는 콘라트가 지역 주민들에게 사랑받는 인물이 되었다고 지적했다. 콘라트는 사령관에서 해임된 지 1주년이 되는 날, 인터뷰에서 이탈리아와의 외교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반복했다. 콘라트는 이탈리아가 우리에게 대항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확실히 전쟁에서 이겼을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이탈리아와의 전쟁은 세르비아와의 전쟁만큼이나 피할 수 없는 것이었다. 콘라트는 1907년에 그가 옹호했던 예방 전쟁이 이루어졌다면,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속전속결의 승리로 끝났을 것이고 세계 대전으로 이어지지 않았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왜냐하면 러일전쟁 패배의 여파로 러시아가 세르비아 사태에 개입할 여력이 있지 않았을 것라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1914년에도 그는 러시아의 개입을 확실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콘라트는 프란츠 요제프 1세가 정말 전쟁을 원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콘라트를 비롯한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지도자들은 보스니아 위기 때처럼 독일의 압력이 러시아를 저지할 것이라는 합리적인 기대를 가지고 있었다. 콘라트는 산책할 때 마을 사람들과 주변 시골의 농부들과 매일 접촉했다. 그는 그들의 인사에 겸손하고 태도로 맞인사하면서 종종 수다를 떨거나 팬들을 사로잡았다.[73] 에르빈은 자기와 동갑인 스웨덴 출신의 이혼녀 그레타 단(Greta Dahn)과 결혼했다.[74] 공화국 정부의 첫 국장이었다.[75] 사실 이것은 오스트리아가 전쟁을 수행할 능력을 상실함으로서 어쩔수 없는 상황이었다.[76] 특히 브루실로프 공세에서의 대패로 인해 제국은 전투 불능 상황에 빠지고 만다.[77] 프란츠 요제프 1세가 그를 대단히 신용하여 중임에 기여한 바가 큰 것도 있다.[78] 생몰년도: 1888년 ~ 1971년[79] 생몰년도: 1935년 ~[80] 혁명적 사회주의와 사회민주주의의 절충을 주장한 사상.[81] 생몰년도: 1881년 ~ 1938년[82] 생몰년도: 1923년 ~ 2004년[83] 그랬기에 훗날 헤르베르트가 동부전선에서 23세의 나이로 전사했을 당시엔 콘라트는 슬픔을 억누르지 못하였다.[84] 훗날 에곤은 결혼해서 한해 동안에만 자식을 2명 낳았는데, 1924년 1월 10일에 태어난 딸에겐 엘리자베스라는 이름을, 12월 25일에 태어난 아들에겐 프란츠라고 이름을 지어주며 아버지를 기쁘게 하였다. 자식들도 장성하여 에곤 또한 누군가의 할아버지가 되었다.[85] 생몰년도: 1806년 ~ 1869년[86] 생몰년도: 1770년 ~ 1841년[87] 프라뇨의 독일식 이름이 프란츠이기 때문에 콘라트와 동명이인이 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