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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릉 인목왕후 능침 | |||
출생 | 1584년 12월 15일(음력 11월 14일) | ||
조선 한성부 반송방 사저 (現 서울특별시 중구 중림동 일대) | |||
사망 | 1632년 8월 13일(음력 6월 28일) (향년 47세) | ||
한성부 인경궁 흠명전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누하동 일대) | |||
능묘 | 혜릉(惠陵) → 목릉(穆陵) | ||
재위기간 | 조선 왕비 | ||
1602년 8월 29일 ~ 1608년 3월 16일 | |||
조선 왕대비 | |||
1608년 3월 17일 ~ 1618년 2월 24일 | |||
조선 왕대비 (복위) | |||
1623년 4월 12일 ~ 1624년 9월 30일 | |||
조선 대왕대비 | |||
1624년 10월 18일 ~ 1632년 8월 13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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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 | 부친 연흥부원군 김제남 (延興府院君 金悌男, 1562 ~ 1613) 모친 광산부부인 광주 노씨[1] (光山府夫人 光州 盧氏, 1557 ~ 1637) | ||
형제자매 |
| ||
배우자 | 선조 | ||
자녀 | |||
전호 | 효사전(孝思殿) | ||
종교 | 유교 (성리학) | ||
존호 | 소성정의명렬정숙 (昭聖貞懿明烈正肅) | ||
휘호 | 광숙장정(光淑莊定) | ||
시호 | 인목왕후(仁穆王后) | }}}}}}}}} |
보물 제1627호로 지정된 인목왕후 어필 칠언시[3][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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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 14대 국왕 선조의 계비이자 영창대군과 정명공주의 생모.흔히 '인목대비'라고 부르는데,[5] 실제 대비로서의 존호는 '소성대비(昭聖大妃)'였다. '인목대비'는 틀린 말이다.
그러므로 인목왕후라고 부르거나, 존재를 나타낸 시점이 대비 시절이었기 때문에 '소성대비'라고 부르는 게 가장 합당하다.
2. 생애
2.1. 계비 간택
연흥부원군 김제남[6]과 광산부부인 광주 노씨의 차녀이다.[7] 일단 법적 항렬상 광해군의 계모이긴 한데, 나이가 광해군보다 9살이나 어렸다.[8] 그녀가 왕비로 간택될 당시의 나이는 19세, 남편 선조는 51세, 친정아버지 김제남은 41세였다. 보통 왕비 간택의 대상이 되는 나이는 13세~16세[9]였으며, 일반적인 반가 규수도 17~18세에 미혼인 경우가 거의 없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무척 늦은 나이였다. 그러나 어차피 선조가 재혼이고 언제 죽을지 모르는 노인이었던지라, 인목왕후의 나이가 많은 건 별 문제가 되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당시 선조는 이미 50살이 넘은 나이였고, 첫 왕비 의인왕후 박씨는 선조의 후사를 낳지 못하고 병으로 죽었다. 그래서 적자(嫡子)를 보려면 한시가 급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일부러 바로 임신할 수 있는 나이의 처녀[10]를 왕비감으로 간택했다는 견해도 있다. 인목왕후는 혼인한 지 1년이 되기도 전에 임신하여 1603년(선조 36년) 6월 27일 정명공주(貞明公主), 1604년(선조 37년) 11월 24일 둘째 왕녀(사산), 1606년(선조 39년) 3월 6일 적통 아들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출산했으니, 기대에 부응한 셈이다.선조는 첫 왕비인 의인왕후가 불임이었던 터라 후사를 보기 위해 후궁을 여럿 들이며 후궁에게서만 13남 10녀를 두는 왕성한 정력을 자랑했으며, 임진왜란이라는 초유의 대 국난을 겪자 위급시에 대응하기 위해 스스로 체력을 단련하기도 했다. 선조가 나이 어린 인목왕후에게 새장가를 들고 1년 뒤의 선조실록 기사에 따르면, 그는 인목왕후와 재미를 보느라 정력에 좋은 탕약을 매일 지어다 먹고 경연도 대충 나갔다. 사관은 이를 비판하면서, "왕이 어린 왕비와 노느라 체력적으로 힘들어 병이 나고, 국모의 자리가 비었다면 후궁 중의 한 명을 왕비로 올리면 되는데, 왜 굳이 새로 왕비를 간택하느냐"면서 줄기차게 비판하고 있다.[11] '군신들을 협박하였다'느니 '위망의 조짐이 한둘이 아니다'라느니 등의 말을 하면서 꽤나 강도 높게 비판하고 있는데, 실제로 이 시기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이 끝난지 고작 2~3년 남짓한 시기에 지나지 않았다. 전후 피폐해진 국토를 복구하기 위해 해야 할 일이 산더미 같은데 왕은 "외롭다"고 징징댄 끝에 나이 어린 여자와 재혼이나 하고, 그러면서 "몸이 허하다"느니 "피곤하다"느니 하는 소리나 계속 늘어놓고 있으니, 사관이 이렇게 말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한편 선조와 인목왕후의 가례 당일 마른하늘에 폭우가 갑자기 쏟아져, 사람들이 새 왕비의 불행을 예측했다고도 한다. 그러나 가례를 딱 치르고 나니 날씨가 청명히 개어 그런 불안감은 단번에 사라졌다.
2.2. 왕비 시절
선조의 재혼은 당시에도 무리수라고 생각하는 의견이 많았던 것 같다. 왜냐하면 당시 기준으로는 왕비가 사망할 경우 새 왕비를 간택하기보다는 기존의 후궁들 중에서 한 명을 왕비로 승격시키는 게 일반적이었기 때문이다.군주가 재혼하는 게 특별한 게 없는 일이 된 것은 후궁을 왕비로 삼을 수 없게 된 숙종 이후의 일이고, 인목왕후 이전의 계비들[12]은 문정왕후만 빼고 모두 후궁 출신에서 승격한 케이스들이다. 장경왕후가 사망한 당시에는 후궁들이 모두 하나같이 원자보다 나이가 많은 아들을 두고 있던 터라 후궁을 왕비로 올릴 경우 원자가 더 이상 적장자가 아니게 되어 정통성에 문제가 발생하게 되므로 원자를 보호하기 위해 간택령을 내려 계비를 간택한 것이다.[13] 물론 후궁조차도 하나도 없었다면 왕비를 새로 간택해서 뽑아야 했겠지만, 당시 선조는 명문가 출신 간택 후궁만 이미 2명(정빈 홍씨, 정빈 민씨)이나 들여놓았다. 그런데도 굳이 새로 간택을 한 선조 본인의 사례가 오히려 이례적인 것이다[14]
인목왕후의 친정아버지 김제남은 유생들이 본인들끼리 무리짓는 것에 거부감을 느끼고 잘 어울리지 않았던 무(無) 당파적 인물인데다, 연안 김씨 가문 자체도 권신 김안로가 몰락하면서 완전히 기울어 있어 지나치게 세도를 부릴 위험이 적었다. 또한 김제남의 사돈 심엄[15]이 정원군의 동서[16]였고 광해군의 처남 류희발과 인척[17]이라, 기존 왕실 구성원들과도 큰 충돌 없이 잘 섞일 수 있으리라 판단했던 듯하다.
전체적으로 특별할 것도 없는 왕비였다. 다만 어린 나이에 나라에서 가장 높은 여인의 지위에 어쩌다 보니까 오른데다 친정이 쇠락한 집안이다 보니 제대로 된 처세나 정치력을 학습할 여건도 되지 못했다. 때문에 세상물정을 너무 몰라서 처세에 약했다는 점은 있었다.[18][19]
선조의 총애를 받던 후궁 인빈 김씨는 처세술에 능했다. 임진왜란 이전에는 인빈 김씨의 차남 신성군이 유력한 세자 후보였고,[20] 인빈은 신성군을 세자로 책봉시키기 위해 애썼다. 그녀는 신성군을 무반 명가인 평산 신씨의 일원이자 조선 최고의 맹장으로 이름 높았던 신립의 딸과 혼인시켰다. 또한 3남 정원군 역시 서인 명문가이자 평산 신씨와 쌍벽을 이룬 무반 명가인 능성 구씨 집안의 딸과 혼인시켜 배경을 든든히 했다. 이외에도 서인 정철을 쳐내려는 북인 이산해와 연합하는 등, 인빈은 자신의 아들들을 차기 왕으로 만들기 위해 발빠르게 움직였다.
그러나 결국 아들 신성군은 임진왜란 도중 피난길에 병으로 어린 나이에 요절했고, 광해군이 세자로 임시 책봉된 후로 인빈 김씨는 재빨리 광해군의 연줄로 갈아탔다. 임진왜란 이후 인빈은 자신의 외조카를 광해군의 후궁으로 보냈고, 선조와의 사이에서 광해군 편을 많이 들어주는 등 광해군과의 관계 개선에 힘썼다. 그래서 그 의심 많은 광해군조차 "내가 지금 자리에 있게 된 데는 서모(庶母)의 공이 컸다."라고 공개적으로 인빈에 대해 호의적으로 말할 정도로 사이가 원만해졌다. 그 덕분인지 인빈은 광해군 즉위 후 괜찮은 대접을 받았고, 그녀의 자손들도 정원군의 아들 능창군을 제외하고는 옥사에 휘말리지 않았다.[21]
반면 인목왕후는 처세술이 모자랐다. 때문에 영창대군을 낳자마자 남편 선조에게 "왕자를 세자(世子)로 불러야 합니까 아니면 대군(大君)으로 불러야 합니까?"라고 물어보는 경솔하고 생각없는 짓을 했다. 이후 선조에게 부탁해서 무려 400여 명에 이르는 궁녀들을 자신의 처소에서 시중을 드는 궁녀로 만들었는데, 이 궁녀들 중에는 원래 광해군 처소에 있던 궁녀가 어언 100명이나 포함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녀는 영창대군을 마치 세자처럼 차려입히는 실책도 저질렀다. '그깟 옷 하나 때문에 유난을 떤다'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전근대 신분제 사회, 특히 동아시아에서 의복은 당사자의 신분과 지위를 나타내는 매우 중요한 수단이다.[22] 즉, 영창대군을 세자처럼 입힌 건 '세자를 교체시키려 한다'는 의도로 보여 처벌받아도 할 말이 없는 인목왕후의 명백한 실책이었다. 게다가 친정아버지 김제남과 함께 치부에 힘을 써서 재물을 모으는 데 열중하여 눈총을 사기도 했다.
이를 두고 "세자 교체에 욕심을 두고 한 짓"이라는 주장도 있지만, 후술할 대비 시절에 보여준 행태를 봐도 그냥 눈치가 없고 처세술이 없었을 가능성이 높았다. 실제로 인조반정 이후 정명공주와 결혼하게 된 부마 홍주원에게 오로지 왕만이 탈 수 있는 어구마를 타게 하여 논란이 되었으나, 인조는 조용히 눈감아 줬다. 그런데 이때 소성대비의 나이는 불혹이었다. 갓 열아홉의 철없고 멋모르는 나이도 아닌 세상 물정 다 알 불혹의 나이에도 그런 오버스러운 행동을 한 것을 보면 타고난 천성이 그런 것으로 보인다.[23]
또한 중궁전 소속 나인들이 광해군의 동궁전 소속 나인들을 핍박하거나 광해군 앞에서 방자하게 구는데도 그들의 행동을 제어하지 못하며 내명부 수장으로서 최소한의 측근 관리마저 못하는 무능한 모습을 보였다. 특히 인목왕후의 나인들은 입궁한 지 얼마 안 된 인목왕후가 궁 내부 사정을 잘 모른다는 것을 악용하여 온갖 행패를 부렸다. 정작 이 나인들은 광해군이 즉위한 뒤 영창대군이 역모에 휩싸이자 너도 나도 있지도 않은 거짓 고변을 하면서 광해군의 불편한 심기와 편집증적인 성격을 건드려 의심병을 폭발시키면서 인목왕후를 더욱 궁지에 몰아넣었다.
2.3. 대비 시절
선조 승하 시점에서도 나이가 너무 어렸는 탓에(20대 중반) 영향력과 위상은 크지 않았다. 1608년(선조 41년) 10월에 남편 선조가 쓰러졌을 때 숨이 가빠지자 세자에게 전위(傳位)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에 조정 내에서 유일하게 영창대군을 지지하던 탁소북 영수 류영경이 천부당만부당하다며 반대하자 당황한 인목왕후는 류영경과는 다른 처신을 하였다.성상(聖上)께서 병중에 계신 지 1년이 다 되어가는데 심기 불편하심이 전보다 배나 더하오. 지금 성상의 전교(傳敎)를 따르지 않으면 환후(患後)가 더욱 위중(危重)해질까 염려되니, 대신들은 전섭(傳攝)의 명을 따르도록 하오.
인목왕후는 바로 위에 서술된 내용의 교지를 언문으로 적어내면서까지 광해군의 지위를 확실히 인정했고, 끝내 선조가 승하하자 광해군의 즉위를 바로 다음날로 서두르기까지 했다. 애초에 이미 선조까지 별세한 상황 속에서 아무리 왕대비라지만 지지 세력도 없고, 나이도 어린 인목왕후가 모든 당파의 지지를 얻는 광해군을 이길 방도는 없었다. 때문에 인목왕후 입장에서는 당장 불가능한 일에 억지로 열을 올리다가 완전히 작살나느니 한발 물러나서 인정할 건 과감하게 인정하고 후일을 도모하자는 생각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더군다나 당시 영창대군은 고작 3살의 젖먹이 아기에 불과했고, 인목왕후 본인도 이걸 잘 알고 있었다.
대비가 된 이후에도 광해군과는 껄끄러운 동행이 계속되었다. 1611년(광해군 3년) 때 왕자 이의가 마침내 영창대군으로 봉해졌다.[24] 하지만 광해군은 영창대군이라는 봉호에 대해 "'영창'은 전국옥새에 들어간 글자이니 고치자"고 주장했으나, 당시 대비였던 인목왕후는 "선왕의 뜻"이라고 결사반대하면서 영창대군이라는 봉호를 고집했다. 그 외에도 앞서 상술했듯 영창대군을 대군의 법도보다 과하게 (마치 세자처럼) 입히고 행동시켰으며, "인목왕후가 모은 재산이 국고에 모인 것보다 더 많았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재산에 대한 부정축재에 열을 올렸다.
김제남을 비롯한 인목왕후의 친정 식구들의 재산축재에 심하게 열 올리기가 더 심해진 것은 임해군이 살해당한 이후부터였다. 광해군이 즉위하자마자 류영경을 비롯한 탁소북이 즉각 숙청되면서 인목왕후를 지지해 줄 세력이 전무해졌고, 인목왕후의 친정아버지 김제남도 무당파인데다 정치적 능력도 좋지 않았기 때문에 치부에 더 열을 올리게 된 것으로 추정된다. "친형 임해군도 죽인 광해군이 정비의 자식인 이복동생마저 죽일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후일을 대비하고자 한 행위였지만, 당연히 계축옥사가 터지면서 역적으로 몰린 인목왕후의 친정은 풍비박산나고 재산도 전부 몰수당했다.
2.3.1. 계축옥사
위에서도 언급했다시피 20대 중반의 나이로 왕실의 당대 큰어른인 왕대비가 됐지만[25] 나이가 어리고 친정의 세도 약해서 영향력은 크지 않았다. 그러나 문제는 조선 국왕 중에서 최다 친국(고문) 기록을 가진 광해군의 편집증적인 의심병. 결국 광해군이 즉위한지 5년 째인 1613년에 광해군의 지지세력인 대북이 영창대군을 제거하기 위해 계축옥사를 일으키면서 인목왕후의 삶은 완전히 나락으로 떨어진다.
조작된 옥사에 크게 휘말려 친정아버지 김제남은 이유도 따지지도 못한 채로 사사당하고 형제들도 처형당해 친정도 멸문당했으며, 자신의 아들 영창대군마저 역적의 수괴로 몰려 폐서인이 되어 유배에 처해지는 것을 눈뜨고 피눈물을 흘리며 그냥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26] 끝내 영창대군이 유배를 떠난 지 단 1년만에 증살[27]로 죽었다는 사실은 뒤늦게 전해 듣는다.
또한 자기 자신도 폐모론에 말려들었다. 이 과정에서 폐모 교지는 내려지지 않았지만 인목왕후는 대비 자리에서 쫓겨나 딸 정명공주와 함께 서궁에 5년 동안 강제로 유폐(幽閉)되었다.[28]
2.3.2. 폐모론
인목왕후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아들과 친정 일가를 죽인 광해군을 좋아할 수가 없었다.[29] 비록 인목왕후가 처신에 실수는 했지만 광해군을 밀어내려는 망상을 품진 않았고,[30] 대놓고 부화뇌동하며 영창대군을 지지하던 류영경과 달리 광해군의 왕위 계승을 지원해 다른 뜻이 없음을 밝혔다. 그런데 광해군은 본인의 정통성이 탄탄해[31] 별 위험도 되지 못하는 영창대군을 경계해 인목왕후의 아버지 김제남과 오빠, 남동생들,[32] 아들 영창대군을 모두 죽였으며, 겉으로는 대북의 폐모론에 반대하는 척하면서 대비를 폐할 생각이 없는 척 하면서 반대하는 이들은 귀양 보냈고, 강경책을 편 이들은 벌하지 않았고 폐모론을 주장하는 대북에 계속 힘을 실어주었다.예를 들어 광해군이 인목왕후 폐비에 대해 여론조사를 실시한 적이 있다. 참가한 인원이 전현직 관리 970명, 종실 170명과 도성에 사는 많은 백성들이었는데, 실록에조차 이이첨이 자파 세력을 동원해 여론 조작을 했다는 것이 명백히 기술되어 있다. 또 폐모론에 반대한 서인, 남인 원로 대신을 광해군이 다 쫓아내 대북 세력만 남은 상황에서 여론조사를 했으니 당연히 찬성이 높게 나올 수밖에 없었다.
홍길동전 저자 허균이 인목왕후를 무척 증오해서 폐모론에 적극 앞장섰으며, 심지어 암살 기도까지 획책했던 것도 유명한 일화. 더욱이 허균은 "영창대군은 선조와 인목왕후의 아들이 아니라, 민가의 아이를 주워다 왕자로 꾸며낸 것"이라는 과감한 허위 주장도 폈다. 이는 그의 교유 관계 때문이었는데, 계축옥사의 시작이 된 칠서의 옥의 주인공인 박응서, 서양갑 등 강변칠우 7명과 친밀한 사이였기에 살아남기 위해서는 인목왕후를 밟아야 했다.
2.3.3. 서궁 유폐
이와 함께 인목왕후는 본인의 친딸이자 선조의 유일한 적녀인 정명공주가 함께 유폐되었다. 다만 유폐와는 별개로 그녀가 옹주로 강등당했다는 기록은 없다. 정명공주 참조. 유폐되던 당시의 정명공주의 나이는 16세로써 이미 혼인 적령기였으나, 광해군이 혼인을 허가하지 않아 인조반정이 일어난 뒤에야 겨우 늦게나마 혼인할 수 있었다.인목왕후와 정명공주 모녀는 서궁에서의 유폐 생활을 묘사한 계축일기에 의하면 의식주도 제대로 영위하지 못할 정도로 비참하기 그지없게 살았다고 한다. 그렇지만 이런 일화는 광해군의 악정을 극대화하기 위해 과장했다는 의견이 주류이다. 다만 이게 사실상 사실이 아닌 것과는 별개로 인목왕후와 정명공주의 유폐 생활이 열악했다는 건 엄연히 사실로 보인다. 계축일기에 의하면 까마귀가 물어다 준 박씨를 먹거나 추운 겨울에 우연히 들어온 면화 씨로 옷을 지었다는데, 이런 게 실제로 가능했을 리는 만무하고 그만큼 생필품과 생활비조차도 제대로 공급받지 못하고 어렵게 살았다는 의미다. 인목왕후는 아들과 친정 가족까지 모두 몰살당한 이후 오로지 소복[33]만 입고 소식을 하였으며, 폐비 절목에 따라 식사를 위해 궁 안으로 보내지는 어육과 쌀, 물도 모두 거부했다.
인목왕후를 따르던 궁녀 연이가 외부와 몰래 연락을 취했다는 혐의로 모함을 받아 형벌을 받는 등 인목왕후의 지밀 궁녀나 상궁들을 향한 위협도 서슴치않게 일어났다. 아예 광해군이 직접 인목왕후를 감시할 궁인들을 선발해 서궁에 보낼 정도로 당시의 정국은 매우 살벌하기 짝이 없었다. 정작 그렇게 광해군의 사주로 선발된 궁인들은 박절[34]한 모습의 인목왕후를 보고 도리어 그녀를 성심껏 받들었다고 한다.급기야 앞에서 언급된 것처럼 허균이 광해군의 명이라며 자객을 동원해 서궁을 습격하면서 자칫하면 암살당할 뻔한 위협까지 겪었다. 다만 영의정 박승종이 식솔들까지 동원해서 서궁을 필사적으로 방어하고,[35] 서궁의 숙직을 돌던 사헌부에서도 인목왕후를 보호했기 때문에 간신히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아무리 폐위된 몸이라고 해도 일국의 대비가 하마터면 암살당할 뻔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인목왕후는 목숨조차 장담할 수 없는 절체절명의 상황에 처해 있었다. 또한 광해군이 과거시험에 합격한 진사들에게 서궁에 진배를 절대로 하지 말라고 엄명을 내렸음에도 진사들이 끝까지 진배를 한 걸 보면 비록 인목왕후는 공식적으로 폐비로 격하되어 서궁에 유폐된 상태였지만 세간에서는 여전히 대비로써의 예우를 받았던 것으로 사료된다.[36][37]
2.3.4. 인조반정
선조와 인빈 김씨의 5남 정원군의 아들인 능양군이 반정군 서인과 힘을 규합하고 함께 인조반정을 일으키며 폐쇄되었던 서궁의 문이 열렸다. 사실 처음에는 반정군을 의심하여 "공주[38]는 죽었다."며 반정군을 믿지 않았지만 능양군이 오자 그제야 믿었다. 폐모살제로 북인을 제외한 서인, 남인, 지방 사림의 지지를 상실한 광해군은 결국 1623년(광해군 15년), 인조반정으로 강제로 왕위에서 끌려나왔고 인목왕후가 유폐된 경운궁 석어당 앞에 무릎꿇리고 인목왕후의 폐위 교서를 받고 폐위되었다.왕대비의 교서
내 비록 부덕하나 천자의 고명(誥命)을 받아 선왕의 배우자가 된 사람으로
일국의 국모가 된 지 여러 해가 되었으니,
선묘(宣廟)의 아들이 된 자는 나를 어미로 삼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광해는 참소(讒訴)하는 간신의 말을 믿고 스스로 시기하여
나의 부모를 형살하고 나의 종족을 어육으로 만들고
품안의 어린 자식을 빼앗아 죽이고 나를 유폐하여 곤욕(困辱)을 주는 등
인륜의 도리라곤 다시 없었다.
이는 대개 선왕에게 품은 감정을 펴는 것이라 미망인에게야 그 무엇인들 하지 못하랴.
심지어는 형을 해치고 아우를 죽이며 여러 조카를 도륙하고 서모를 쳐 죽였고,
여러 차례 큰 옥사를 일으켜 무고한 사람들을 해쳤다.
그리고 민가 수천 채를 철거하고 2채의 궁궐을 건축하는 등
토목 공사를 10년 동안 그치지 않았으며,
선왕조의 구신들은 하나도 남김없이 다 내쫓고 오직 악행을 조장하며
아첨하는 인아(姻婭)와 부시(婦寺)들만을 높이고 신임하였다.
인사는 뇌물만으로 이루어져서 혼암한 자들이 조정에 차있고,
돈을 실어날라 벼슬을 사고 파는 것이 마치 장사꾼 같았다.
부역이 번다하고 가렴 주구는 한이 없어
백성들은 그 학정을 견디지 못하여 도탄에서 울부짖으므로
종묘 사직의 위태로움은 마치 가느다란 실끈과 같았다.
(중략)
광해는 천리를 거역하고 인륜을 무너뜨려
위로는 종묘 사직에 득죄하고 아래로는 만백성에게 원한을 맺었다.
죄악이 이에 이르렀으니 그 어떻게 나라를 통치하고 백성에게 군림하면서
조종조의 천위(天位)를 누리고 종묘 사직의 신령을 받들겠는가?
그러므로 이에 폐위하고 적당한 데 살게 한다.
광해군이 폐위되자 인목왕후는 서인의 추대로 대왕대비의 자리에 올랐는데 이 때 광해군의 처분에 대한 교지를 보면 광해군에 대한 인목왕후의 적개심이 얼마나 깊었는지 알 수 있다. <인조실록> 1623년(인조 즉위년) 4월 11일 경오 3번째 기사의 기록을 보면 "폐인은 천지 사이에서 대역부도(大逆不道)한 짓을 하여 하늘에 죄를 진 자이니 대신과 조정은 '폐주(廢主)'라고 부르지도 말라"고 명령했다. 광해군을 폐주로조차도 취급하고 싶지 않았던 모양이다. 인목왕후는 인조를 직접 만나보고는 "그 전에 이혼 부자의 머리를 가져오세요. 그 머리를 씹겠습니다. 그 살점을 씹어야 전교를 내리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서인은 쿠데타에 성공한 뒤 광해군을 한동안 궁궐에 가두고 남겼으나 인목왕후는 처음에는 "광해군을 사사시켜야 한다"고 윽박질렀고 이후 "2번 절하며 청한다"고 할 정도로 간절하게 먼 곳으로 광해군을 유배보낼 것을 요청했다. <인조실록> 1페이지와 이를 참고로 기록한 <승정원일기>에서는 인목왕후의 발언이 더 상세히 기록되어 있는데 "머리를 가져오라"고 하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내가 친히 그들 부자의 목을 베겠다"고 더욱 과격하게 쓰여 있다.내 비록 부덕하나 천자의 고명(誥命)을 받아 선왕의 배우자가 된 사람으로
일국의 국모가 된 지 여러 해가 되었으니,
선묘(宣廟)의 아들이 된 자는 나를 어미로 삼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광해는 참소(讒訴)하는 간신의 말을 믿고 스스로 시기하여
나의 부모를 형살하고 나의 종족을 어육으로 만들고
품안의 어린 자식을 빼앗아 죽이고 나를 유폐하여 곤욕(困辱)을 주는 등
인륜의 도리라곤 다시 없었다.
이는 대개 선왕에게 품은 감정을 펴는 것이라 미망인에게야 그 무엇인들 하지 못하랴.
심지어는 형을 해치고 아우를 죽이며 여러 조카를 도륙하고 서모를 쳐 죽였고,
여러 차례 큰 옥사를 일으켜 무고한 사람들을 해쳤다.
그리고 민가 수천 채를 철거하고 2채의 궁궐을 건축하는 등
토목 공사를 10년 동안 그치지 않았으며,
선왕조의 구신들은 하나도 남김없이 다 내쫓고 오직 악행을 조장하며
아첨하는 인아(姻婭)와 부시(婦寺)들만을 높이고 신임하였다.
인사는 뇌물만으로 이루어져서 혼암한 자들이 조정에 차있고,
돈을 실어날라 벼슬을 사고 파는 것이 마치 장사꾼 같았다.
부역이 번다하고 가렴 주구는 한이 없어
백성들은 그 학정을 견디지 못하여 도탄에서 울부짖으므로
종묘 사직의 위태로움은 마치 가느다란 실끈과 같았다.
(중략)
광해는 천리를 거역하고 인륜을 무너뜨려
위로는 종묘 사직에 득죄하고 아래로는 만백성에게 원한을 맺었다.
죄악이 이에 이르렀으니 그 어떻게 나라를 통치하고 백성에게 군림하면서
조종조의 천위(天位)를 누리고 종묘 사직의 신령을 받들겠는가?
그러므로 이에 폐위하고 적당한 데 살게 한다.
不共戴天之讎, 忍之已久, 願親斫渠父子之頭, 以祭亡靈。幽囚十餘年, 至今不死者, 蓋待今日耳, 願得甘心焉。
“한 하늘 아래 같이 살 수 없는 원수이오. 참을 만큼 오래 참았으니, 내가 친히 그들 부자의 목을 잘라 하늘에 계신 영령(英靈)께 제사하고 싶소. 10여 년을 유폐되어 살면서 지금까지 죽지 않은 것은 오직 오늘을 기다려서였소. 통쾌히 원수를 갚고 싶소.”
-<인조실록> 인조 즉위년(1623, 명 천계(天啓)), 3월 13일 계해 1번째기사
-<승정원일기> 인조 즉위년(1623, 명 천계(天啓)), 3월 13일 계묘 3번째기사
“한 하늘 아래 같이 살 수 없는 원수이오. 참을 만큼 오래 참았으니, 내가 친히 그들 부자의 목을 잘라 하늘에 계신 영령(英靈)께 제사하고 싶소. 10여 년을 유폐되어 살면서 지금까지 죽지 않은 것은 오직 오늘을 기다려서였소. 통쾌히 원수를 갚고 싶소.”
-<인조실록> 인조 즉위년(1623, 명 천계(天啓)), 3월 13일 계해 1번째기사
-<승정원일기> 인조 즉위년(1623, 명 천계(天啓)), 3월 13일 계묘 3번째기사
인조반정 직후 서궁 유폐 시절의 불안 때문인지 자주 하교를 내려 정치적으로 존재감을 드러내려 했다. 광해군의 죄목을 나열한 것 이외에도 도주하다 붙잡힌 광해군이 창덕궁에 감금되어 있을 때도 "죄인들을 속히 궁 밖으로 내보내라"는 독촉을 했으며 점술가나 저주에 관련있는 궁인들을 직접 지목해 속히 처벌을 요구했다. 영의정 이원익에게 직접 언지를 내려 정권 안정을 부탁하거나 폐세자 이지의 탈출 시도 사건의 처리에 관여하기도 했으며 사저에 머물던 인열왕후와 그녀의 장남 소현세자에게 대내로 이어할 것을 명하기도 했다.
2.3.5. 정명공주의 뒤늦은 혼인
딸 정명공주는 광해군 대에 혼사 이야기는 꺼내지도 못하고 서궁에 죽은 듯이 유폐되어 있다가 인조반정 당시 간신히 풀려났는데, 당시 그녀의 나이는 21살이었다. 보통 10대 중후반에 혼인을 하는 게 일상이던 그 당시에 아무리 왕의 딸인 공주일지라도 21살이면 그냥 그 사실만으로 거의 혼삿길이 막히는 수준의 결격 사유이자 노처녀였다.가뜩이나 늦은 혼인을 더 이상은 미룰 수 없었던 만큼 인조반정 사흘만에[39] 부마 간택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정명공주가 당시 기준으로는 혼기를 지나도 한참 지난 노처녀였다 보니 나이가 비슷한 부마감들은 죄다 이미 결혼을 했거나 최소한 약혼은 한 상태에서 집안 사정상 혼례만 치르지 못했던 수준이고, 약혼조차 안 되었을 정도면 남자에게 정말 심각한 하자가 있는 경우였다. 더군다나 이미 결혼한 사람더러 다짜고짜 무르라는 건 막 가자는 거고, 그렇다고 공주를 하자 있는 남자에게 시집보내는 것도 안 될 일이니, 약혼까지 한 사람들이라 해도 예외없이 부마 단자를 내도록 했고, 그 중 조모의 3년상으로 혼인을 미루고 있던 18살 홍주원의 약혼을 물려버린 다음 부마로 간택했다고 한다.
인조는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집권 정통성을 세워주는 대의명분인 인목왕후를 우대하여 정명공주의 혼례를 호화롭게 치러주었으며, 그 뒤에도 계속해서 홍주원의 품계를 높여주거나 정명공주에게 땅이나 재산을 하사하는 등 후대하였다. 일제강점기에 소작 분쟁이 이어진 암태도도 당시 그녀가 받은 땅의 일부로, 현대로 치자면 강남 호화 아파트와 명품 살림을 신분을 이용하여 낙하산에 공짜로 준 셈이라 당연히 말이 많았다. 당시 신하들은 "주상(主上)께서 백성을 사랑하신다면 이럴 수가 없습니다. 정명공주와 왕실에 내리는 개인적인 일에 집착할 수가 있습니까? 정히 주고 싶으시다면 내탕금(왕의 사유재산)에서 주십시오."라고 말할 정도로 크게 비판받았음에도 기어코 정명공주 모녀를 크게 대우했다.
인목왕후는 딸과 늦게야 결혼한 사위를 총애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사위에게 오직 임금만이 탈 수 있는 어구마까지 내려줬다가 비판받은 적도 있었다. 인조는 재위 초기 발생한 이괄의 난 때 나름대로 챙겨주던 흥안군이 냅다 이괄에게 달려가 합류한 이후 왕실의 방패가 되어야 할 종친들의 추가적인 이반을 막기 위해 신경을 많이 썼다. 정명공주에 대한 우대도 그 중 하나였으며, 정통성 문제로 인목왕후에게 납작 숙여야 하는 입장이기도 했다.
2.4. 죽음
인목왕후의 병세가 나날이 악화돼가자 인조는 인목왕후의 마음을 기쁘게 하기 위해 그녀의 사위 홍주원의 품계를 1~2단계 높이기도 했다. 그러나 인목왕후는 아이러니하게도 1632년(인조 10년), 그토록 증오하던 광해군보다도 더 빨리 세상을 떠났다. 승하 2년 전부터 더운 날씨면 병이 악화되었음과 병세를 종합하면 정황상 갑상선 기능 항진증이 악화되어 세상을 떠난 것으로 보인다. 그녀의 나이 불과 49세로, 당시 기준으론 나름 수명을 누린 편이나, 조선의 역대 왕대비 중에서는 단명한 쪽이다.[40]<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손자뻘인 인조와 증손자뻘인 소현세자가 번갈아가며 인목왕후의 간병(병 수발)을 한 것으로 보인다고 한다. 하지만 인목왕후 사후 무리하게 초상을 치르던 인조의 건강이 안 좋아졌는데, 인조는 이것을 '정명공주의 저주'라는 의심을 하게 된다. 이 일로 신변의 위험을 느낀 정명공주는 인조 재위 기간 중에는 쥐 죽은 듯이 엎드려 조용히 살게 된다.
사실 전후 관계를 따져보면 저주는 핑계에 불과한데, 인조는 인조반정이라는 쿠데타로 강제 집권한 몸이라 정통성과 명분을 얻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대왕대비로 추봉된 인목왕후 앞에서는 알아서 기어야 했다. 그래서 인목왕후의 비위를 맞춰주기 위해 그녀의 하나밖에 없는 자식인 정명공주에게도 온갖 특혜를 부여했던 것. 그런데 인목왕후가 사망하자 이용 가치가 떨어진 정명공주를 압박하기 위해 누명을 씌울 기미를 보이면서 우호관계를 결렬시킨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41]
3. 가계
- 친정(연안 김씨)
- 배우자 / 자녀
4. 평가
개인적으로는 크게 특별한 능력없이 평범한 왕비에 지나지 않았으나 '정국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처신을 잘못했다'는 평가는 사실이다. 이미 광해군이 버젓이 세자로 있는 상황에서 선조가 광해군을 멀리한다는 이유만으로 동궁을 업신여기는 중궁전 소속 나인들을 제어하지 못해 측근관리조차 못하는 허술한 모습을 보였다. 이외에도 아버지 김제남을 비롯한 가족들과 함께 노골적으로 치부에 힘을 쓰며 친정 일가의 전횡을 막기는 커녕 적극적으로 동조한 전적도 많이 비판받는다.심지어 계축옥사에서 인목왕후와 그녀의 아버지 김제남이 의인왕후의 무덤에서 저주 행위를 했다는 진술이 나오는데 사관은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영창대군의 노비들이 (의인왕후의 무덤에서 저주를 한 건 아니지만) "선조가 병에 걸린 이유는 공빈 때문"이라는 무당의 망언을 듣고 공빈 김씨(광해군의 생모)의 무덤에서 저주를 할 음모를 꾸몄는데 누설되어, 임해군이 노비들을 보내 공빈의 무덤을 지키게 하여 아무 일도 없게 되었다.
즉, 영창대군의 노비들이 광해군의 생모 공빈 김씨의 무덤에 저주를 한 건 사실이라는 건데 조선시대에 저주는 매우 끔찍한 범죄였으며, 특히 왕실 일원에 대한 저주는 미수에 그치더라도 들키는 즉시 주범부터 공범까지 죄다 멸족으로 대응할 만큼 극형으로 처벌했다. 이런 어마무시한 짓을 주변인들이 시도하려던 것을 방관 내지 말리지 못했다는 것은 인목왕후가 주변 관리에 상상초월할 정도로 무능했다는 것이다. 사실 저주를 시도한 이들이 일개 노비라는 사실을 생각하면 처세술과 정치적 능력 모두 떨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기는 했다.그나마 무능해서 이러한 만행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면 좀 나은데 의인왕후나 공빈 김씨에 대한 저주 시도를 일부러 방관했다면 광해군이 계축옥사에서 인목왕후의 친정을 거의 멸문으로 몰아넣을 정도로 편집증적인 태도를 보인 것도 일견 이해가 된다. 인목왕후의 행적상 정말 무능해서 측근들의 저주 행위를 몰랐을 가능성도 크지만 그래도 명색에 왕실의 큰어른인 왕대비와 그 친정가문이 아랫사람의 전횡도 제대로 통제 못하는 모습은 좋은 모양새가 아니며 더 나아가 방관한 것으로 오해를 살 위험이 크다.
다만 사관의 평에 의하면 "미련하게 미혹된 노비들에 의해 꾀해진 지극히 사소한 일이며 궁가의 노복들이 서로 투기하고 미워한 나머지 나온 이런 말들은 대개 의거할 가치가 없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옥사가 처음 일어났을 때 척리(戚里)의 집에서 많이들 빗대어 말한 것을 박동량이 마침내 헛소문을 가지고 부연해 말한 것이며 인목왕후와는 상관 없는 일이었다"며[47] 실드쳐 주기는 했다. 실록 참조
게다가 전임인 문정왕후 윤씨나 후임인 정순왕후 김씨 같은 정치력이 없었고, 처세술도 썩 좋은 편이 아니어서 실록을 보면 일부러 광해군과 인조를 도발하는 게 아닌가 의심을 들 정도의 행동을 서슴치않고 벌였다. 이런 면모는 반정 전후로도 고쳐지지 않았다. 당장 광해군이 폐위되자마자 "광해군과 폐세자 이지의 머리를 갖고 오라. 그들의 살을 씹어먹기 전에는 책명을 내리지 않겠다."거나 "이이첨과 유희분을 친국한 뒤에 책명을 내리겠다"고 하는 등, 자신은 한 일이 전혀 없는데도 자신의 한이 먼저 풀려야 인조를 왕위에 올려주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결국 반정 주역들이 말린 뒤에야 자신이 감정적이었음을 인정한다. 이후에도 상기한 사위 홍주원의 예시에서 보듯 조정의 큰어른이라기엔 지나치게 감정적이고 생각이 짧으며 현실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는 면모를 너무 많이 비춘다. 이것 때문에 인목왕후의 평가는 "'조선 최악의 눈새"'로 귀결되는 편이다.
특히 이런 눈새 기질은 친딸 정명공주를 보면 바로 답이 나온다. 광해군 시절 자신과 휘하 궁녀들부터 친정 일가의 한심한 처신 때문에 아들 영창대군과 아버지 김제남과 형제들이 계축옥사에서 얼마나 처참하게 죽었는지 죄다 목도했음에도, 배운 게 없었는지 아무리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폐위되고 자신과 딸도 무사히 복권되었다지만 자신이 죽으면 안전장치 하나 없게 될 정명공주에 대해 그 어떤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심지어 폐위 및 서궁 유폐 시절에는 언제 어떻게 죽을지 모르는 살얼음판 속에서 곁에 유일하게 살아남은 정명공주만이라도 살려보려고 광해군측이 정명공주에 대해 물어볼 때마다 매번 공주는 죽었다고 거짓말까지 할 정도로, 높은 지위에 비해 불안정한 지지기반과 권력이 얼마나 사람 잡는지를 잘 알면서도 대왕대비로 복권되면서 전부 잊어버렸는지 왕비 시절 때만큼이나 자기 멋대로 행동하며 매우 안일하게 굴었다. 오히려 인조반정 직후 폐주가 된 광해군의 처분보다 반정의 뒷수습이 절실한 시점에서도, 광해군 일가를 죽이려고 수단방법 가리지 않고 집중하는 감정적인 모습을 보인다. 하지만 이런 복수귀같은 모습은 인조에게 부담만 안기는 트롤짓에 불과했고 안그래도 정통성으로 예민한 인조는 인목왕후의 패악 때문에 광해군처럼 의심병이 터져, 계승권이 없는 여자 왕족으로 경계할 이유 자체가 없는 정명공주와 그녀의 남편인 홍주원부터 그녀의 시가까지 견제하고 핍박을 가하기 시작한다. 결국 인목왕후의 사후 자신을 보호해 줄 왕실 어른을 모두 잃은 정명공주는 인조부터 효종과 현종 때까지 3대에 걸쳐 집요한 견제와 비방을 당하기 시작하고, 어떻게든 의심을 피하기 위해 자신의 재능을 스스로 봉인하고 자식들에게도 함부로 정치나 권력다툼에 관여하지 말라는 신신당부를 하며 유령같은 인생을 살기 시작한다. 인목왕후는 안일하고 감정적인 행태로 하나 남은 딸의 말년을 망친 어리석은 부모인 셈.[48][49]
물론 그나마 류영경을 무시하고 광해군의 즉위를 인정하긴 했고 친정 집안의 세가 약하고 나이도 어렸던 탓에 대비가 된 이후에도 권위가 크지는 않았다. 그러나 절대왕조국가 조선에서 왕위 계승에 휩쓸린 것 자체가 목숨을 걸어야 했던 중대사항이었는데, 인목왕후의 부족한 처세술이 선조 말기 왕실 내부의 권력 투쟁과 결합해서 엄청난 비극을 초래하게 된다. 선조가 인목왕후 소생의 아들인 영창대군을 광해군 핍박의 수단으로 쓰지 않았거나 광해군이 편집증적인 의심병에 의해서 조성한 살벌한 공안 정국이 아니었거나, 본인이 욕심 or 한심한 처세를 하지 않았다면 그냥 왕실의 어른으로 대접 받으며 평범하게 살았을 것이다. 어찌보면 남편을 잘못 만나서 불행한 인생을 산 여성이라고 볼 수 있다.
임진왜란 이래 선조와 광해군은 왕위를 둘러싸고 정적이 되었는데 그 사이에서 아들 영창대군이 선조에게 철저하게 이용당한 게 1번째 불행이었고, 조정과 재야의 지지를 두루 받으며 권위가 막강했음에도 끝없이 옥사를 일으킨 광해군의 의심병이 2번째 불행이었다. 10년 넘게 세자위에 머무르며 전란 때 훌륭하게 분조를 이끌었다는 훈장달고 부왕이 위협을 느껴 따져 보면 말도 안 되는 명나라의 승인까지 거론하며 견제했던 세자가 권위가 약할 리가 있겠는가? 그러나 그 막강한 권위에도 불구하고 광해군은 스스로 자기 살 까먹고 조정의 균형을 무너뜨리는 행동을 재위 기간 내내 저질렀다. 엄밀히 말해 정략에서는 다음 왕 인조보다 못했는데 인조는 이괄의 난과 삼전도의 굴욕을 겪고도 재위 후반기 정국을 자기 뜻대로 이끌어가는 데는 성공했다.
그러나 반론도 많은데 다른 사람도 아닌 국왕인 선조가 직접 명나라까지 들먹이며 광해군의 권위를 흔들었고 그 결과 정인홍이 목숨 걸고 선조에게 양위하라는 상소문까지 올려 조정에 난리가 나는 와중에 선조의 승하 직후 류영경이 후임 국왕의 교체를 시도하며 선조의 유지를 빼돌려 감춰버리는 반역에 가까운 조선사 초유의 사태가 벌어질 정도로 선조 말기 광해군의 세자 지위는 심각하게 흔들렸다. 여기에 인목왕후의 고의였거나 관리 능력의 부족이었는지 아니면 단순히 철이 없었던 건지는 모르겠지 자신의 궁인들이 광해군을 공공연히 무시하는데도 제어하지 못한데다, 인목왕후 본인도 명백히 법도를 어기고 영창대군을 세자처럼 차려입혀 예우하는 행태를 부리고 부정축재를 일삼는 한심한 처세까지 벌여서 류영경과 선조 못지않게 평이 안 좋다. "광해군이 인목왕후에게 저지른 짓은 잘못이지만 영창대군만큼은 왕권 강화를 위해서라도 반드시 죽일 수 밖에 없었다"는 의견도 나올 정도.[50][51] 실제로 영창대군을 가지고 그토록 광해군을 핍박했던 선조조차 자신이 죽으면 광해군과 그의 지지세력들이 영창대군을 죽일 게 너무 자명했던지라, 어떻게든 후폭풍을 막아보고자 승하하기 직전 "누가 어떤 말을 하더라도 흔들리지 말고 이의를 네가 지켜야 된다"라는
조선 후기에는 <계축일기> 등을 통해 '어린 나이에 늙은 왕에게 시집가 당쟁에 휘말려 남편과 아들을 잃은 가련한 왕비'라는 이미지가 강했다. 그러나 현대에 들어와서는 조선왕조실록 연구를 통해 선조말기 선조와 광해군의 정치적 갈등과 그 과정에서 인목왕후의 실책이 드러나고[52] '광해군 긍정론'의 역풍을 받아 실 복수심에 매몰되어 인조 정권의 권위 확립에 이용당했다느니 하는 부정적인 평가를 받기도 했다. 2010년대 들어 제도사와 정치사 중심으로 광해군의 거품이 조금씩 가라앉으면서 반대로 인목왕후에 대해 지나치게 옹호하는 말들도 나오는 편.[53]
결론적으로 권력에 가까이 가서도 안 되었고 권력을 쥐어서도 안 되었던 소시민적 깜냥과 짧은 지혜를 갖춘 평범한 인간이 조선사에서도 역대급으로 살벌했던 정쟁의 칼바람 중심속에 있으면서도, 스스로도 감당 못할 욕심을 품고 훗날의 결과를 생각치 않고 안일하게 처신했다가 비극을 경험했다고 볼 수 있다. 차라리 전임자인 의인왕후가 광해군이 즉위 때까지 살아서 본인이 애초에 왕비가 되지 않았거나, 아들을 낳지 않았거나, 선조가 더 오래 살아서 자기 생각대로 영창대군을 왕위에 올리거나, 광해군이 세월이 아닌 스스로의 힘으로 선조를 이겨내고 도그마에서 벗어났다면 차라리 좀 더 행복했을 수도 있었을 인물.
비록 정치적으로 식견이 부족했고 처신이 안일했지만, 대비라는 존재로서 당시와 조선 후기에 끼친 영향은 상당했다. 당장 북인을 제외한 서인과 남인을 비롯한 대부분의 당파들이 광해군에게 등을 돌려 일어난 인조반정의 원인도 이항복, 이덕형, 이원익 같은 명재상들이 대비인 인목왕후의 폐모에 반대하다가 실각하고 대부분 유배를 당해 그곳에서 죽은 것에 대한 반발 때문이다.
한편 인목왕후와 비슷한 인물 유형으로 늙은 왕에게 재혼한 왕비는 이후에 장렬왕후와 정순왕후가 있으며 굳이 더 넣자면 인원왕후도 있다. 하지만 장렬왕후는 워낙 힘도 없고 본인도 별다른 개입을 하지 않아 인목대비보다도 더한 정쟁 속에서 살면서도 비교적 무탈한 인생을 보냈다. 정순왕후의 경우 인목왕후와는 정반대 케이스로 기본적인 눈치도 부족했던 인목왕후에 비해 정치적 감각이 대단했다. 때문에 영조 재위 말기~순조 재위 초까지 궁궐 내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유지했다.[54] 그리고 인원왕후의 경우 세 사람의 중간 정도의 케이스인데 정순왕후처럼 정치력이 대단한 것은 아니었고 장렬왕후처럼 대놓고 힘이 없는 것도 아니었고 인목왕후처럼 눈치가 없는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정순왕후처럼 강한 존재감을 드러내지도 않았지만 장렬왕후처럼 존재감이 너무 미약한 것도 아니었고 인목왕후처럼 굴국을 겪지는 않았다.
5. 대중매체에서
5.1. 소설
- 인목왕후 또는 그 밑의 나인 혹은 딸 정명공주가 작성했다고 추정되는 고전소설 <계축일기>에서는 완벽하게 선량한 피해자로 등장해 악당 광해군과 교활한 김개시의 온갖 핍박을 이겨내고 마침내 인조반정으로 대비의 자리를 되찾는 인생 드라마를 찍는 듯이 묘사된다. <계축일기>는 소설이라 궁중문학으로서의 가치는 높으나 혜경궁 홍씨의 <한중록>처럼 당대 정치사를 연구하는 사료로서의 가치가 낮다.
- 네이버 웹소설 <광해의 연인>에도 등장하는데 극중 이름은 김인아. 8살 때 임진왜란을 맞아 가족과 함께 함경북도 회령군으로 피난을 갔다가 아버지 김제남의 손을 놓쳤는데 혼자 헤매다가 왜군에게 살해당할 뻔했던 인아를 광해군과 김영찬이 구출해준다. 인아는 다시 아버지 품으로 돌아갔고 무사히 성장하여 이후 선조의 계비이자 광해군의 새어머니가 된다. 광해군에 의해 구출된 이후로 인아는 항상 그에게 감사한 마음을 잊지 않았고 그를 연모해왔다. 그러나 왕비가 된 후로는 자신이 적통 대군을 낳으면 광해군을 해치게 될 수도 있다는 현실에 늘 노심초사하며 불편해한다. 그래서 첫 임신을 했을 때도 태중의 아이가 공주이기를 간절히 바랐으며 소원대로 첫째 아이는 딸 정명공주였으나 이후 아들 영창대군도 낳게 된다. 인아를 왜군에게서 구해주었던 김영찬은 21세기 대한민국의 역사학자로 그의 집안은 대대로 시간여행을 할 수 있어서 영찬 또한 시간여행을 즐기곤 했다. 그러다가 임진왜란 시기의 조선으로 왔고 인아를 구해주고 죽게 된 것. 영찬의 딸 김경민은 돌아오지 않는 아버지를 기다리다가 아버지를 찾으러 조선으로 왔고 궁녀가 되어 인목왕후의 곁에 있게 된다. 인목왕후는 경민을 처음 보았을 때부터 호감을 느껴 경민에게 잘 대해주고 종종 중궁전으로 경민을 불러 다과를 함께하며 담소를 나누곤 한다. 경민이 정원군과 함께 제주도로 귀양갔다가 한양으로 돌아와 보니 선조가 죽고 광해군이 새로운 국왕으로 즉위해 있었으며 인목왕후는 대비가 되어 있었다. 인목왕후는 경민을 자신의 외가 어른인 노수눌(盧守訥)의 양녀로 입적시킨 후 노경민이 광해군의 후궁으로 입궁할 수 있도록 도와주지만 자신의 친정이 역모 사건에 휘말려 멸문당하고 어린 아들은 유배가며 그녀는 유폐를 당한다.
5.2. 드라마
- 1974년 TBC 드라마 <이조여인 500년사(인목대비)>에서는 배우 윤정희가 연기했다.
- 2013년 MBC 드라마 <구암 허준>에서는 배우 서이안이 연기했다. 적통대군을 생산해야 한다는 압박감에 위태를 하였고 이를 허준이 정확히 파악했다. 이에 인목왕후는 "내가 강건하니 언제든 회임을 할 수 있다는 말이 큰 위로가 되었소"라며 씁쓸한 미소를 보였고 선조 또한 안타까워한다. 이로부터 4년 후에 영창대군을 낳게 된다.
- 2015년 MBC 드라마 <화정>에서는 배우 신은정이 연기했다. 시종일관 자신의 자식들인 정명공주와 영창대군을 걱정한다. 다만 광해군에 의해 친정 가문과 아들을 전부 잃은 뒤 복수심에 불타 올라 딸인 정명공주와 달리 인조반정을 찬성하는 모습도 보인다.
- 2019년 tvN 드라마 <왕이 된 남자>에서는 배우 장영남이 연기했다. 실제 인목왕후가 아닌 인목왕후를 모티브로 삼은 인물로, 광해군의 대역을 맡은 주인공 하선을 괴롭히는 악역으로 등장한다. 물론 그렇다고 위의 드라마들처럼 광해군을 미화한 것은 아니다. 애초에 본 드라마에서 등장하는 왕실 인물들 대부분이 사악하게 등장하며, 딱 중전과 영창대군 정도가 좋게 그려진다.
5.3. 영화
- 1962년 영화 <인목대비>에서는 배우 조미령이 연기했다.
6. 참고 문서
[1] 모주의 유래와 관련된 일화가 있다.[2] 사산(死産).[3] 인목왕후는 서예에 조예가 깊었으며, 딸 정명공주도 상당한 명필이었다고 전한다.[4] 경기도 안성시 칠장사 소장.[5] 1974년에 TBC TV에서 방영된 인기 사극 제목이 '인목대비'(신봉승 극본, 김재형 연출)여서 사람들의 뇌리에 인목대비로 각인된 것 같음. 당시 인목대비역에 윤정희씨가 출연.[6] 중종 대 영의정을 지낸 김전의 증손자이며, 권신 김안로의 종손이다.[7] 인목왕후의 언니는 심정세에게 시집가는데, 심정세는 명종비 인순왕후 심씨의 아버지인 심강(청릉부원군)의 친손자이다. 인순왕후와 인목왕후는 서로를 본 적이 없지만, 법적으로는 (조카)며느리이며 친가로도 연결이 된다.(친가 쪽으로는 직접적인 호칭은 없겠지만 굳이 따진다면 사돈? 어차피 직접 만난 적이 없었기에 호칭 문제는 별개다. 인척 관계라는 것에 의의가 있다.)[8] 심지어 선조의 서장녀 정신옹주보다 1살 어리고 서차녀 정혜옹주와 동갑이다. 여담으로 인목왕후의 첫째 남동생이 의붓딸 정신옹주의 장녀 서미생과 혼인하였다.[9] 당시의 세는나이 기준[10] 당시에는 소녀들의 발육이 그리 빠르지 않아, 일반적인 왕비 간택 나이에 간택된 왕비들은 아직 초경도 시작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았다.[11] 이 당시에는 왕비가 죽거나 폐위되면 후궁 중 한 명을 왕비로 간택하는 게 가능했다. 이게 불가능하게 된 건 숙종이 희빈 장씨를 사사시킨 후부터다.[12] 현덕왕후 권씨, 안순왕후 한씨, 폐비 윤씨, 정현왕후 윤씨, 장경왕후 윤씨, 문정왕후 윤씨[13] 원래 중종도 새로운 왕비를 간택하기보다는 단경왕후 신씨를 복위시키거나 아니면 경빈 박씨를 왕비로 올리기를 원했다고 한다.[14] 다만 굳이 이유를 따지자면 세자 광해군의 생모 공빈 김씨가 후궁인 상태로 죽었는데, 정빈 홍씨나 정빈 민씨에게도 아들이 있어 이 후궁들을 왕비로 간택하면 역시 장경왕후 때와 비슷한 일이 일어날 우려가 있었다. 하지만 광해군은 차남이었고(장남 임해군은 알다시피 개망나니로 악명높아서 이미 임진왜란 전부터 왕세자 후보에서 제외된 상태였다) 간택후궁의 아들들이자 이복동생들과는 대체로 광해군이 10살 이상이나 더 연상이었고, 인빈 김씨를 제외하고는 다른 후궁들은 명문가 출신이어도 티를 안 내고 조용하고 평범하게 살던 편이라 대신들도 후궁에서 왕비를 뽑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15] 심인겸(인순왕후의 친동생이자 동서분당의 시초인 심의겸의 형)의 아들, 심엄의 아들 심정세의 부인이 김제남의 장녀다.[16] 정원군의 부인인 연주부부인 구씨와 심엄의 부인이 자매다.[17] 류희발의 부인이 심엄의 고모다. 이렇게 되면 광해군과 인조 역시 실제로는 숙질간이었으며, 광해군의 처가와 인조의 외가 쪽이 서로 엮여있었단 의미다.[18] 다만 정치를 직간접적으로 배우고 익혔을 왕비 - 왕대비 시절의 굴곡진 시절을 거치면서도 대왕대비로 격상된 인조대까지 철없는 행동을 계속 반복한 걸 보면 처세술과 깊게 연관된 사회성 지능이 부족하다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인목왕후는 조선시대의 나름 부유한 명문가에서 자란 여성이라서 안 그래도 교육의 기회도 없었던 편이었는데다 부친 김제남부터가 딸의 교육에 큰 관심을 안 가졌던 와중에 18~19세에 왕비가 된 케이스라서 경험으로 부딪히는 거 이외에 특별한 사회성 내지 사회 학습을 할 기회는 없었을 것이다.[19] 인목왕후의 전체적인 지능 자체가 낮은 쪽이거나 사회성 이외에 문제까지 있었다면 유영경의 의견을 기각하고 광해군의 계승을 순순히 인정하는 교서까지도 안 내리거나 못 내렸을 것이고, 그 전에 선조조차 혀를 내두르고 간택을 포기했을 것이다. 선조 본인도 마냥 고분고분한 성격의 소유자는 아니었고, 오히려 똑똑해서 광해군을 보호하기 위해 자신과 암묵적으로 대립까지 했던 반남 박씨라는 명문가 가문의 정비 의인왕후보다는 오히려 왕비로서는 여러모로 부적합하지만 정치적인 영향력이 없는 명문가 출신에다 기본적인 일상생활에는 지장이 없는 인목왕후가 본인에게는 다루기도 좋고 위협도 하지 않는 여러가지로 알맞은 신붓감이었는 셈.[20] 인빈 김씨의 장남 의안군은 어려서 요절했다.[21] 다만 정원군은 그 일로 상심해 화병(울화증)이 나서 41세라는 한창 나이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22] 조선 왕실도 과거 태종이 양위할 때 삼남 세종에게 옥새와 같이 곤룡포를 입혀서 보내자 (사전협의가 추측되기는 하지만) 기를 쓰고 반대하던 신하들이 세종의 즉위에 즉시 군소리 없이 따랐다. 또한 훗날 삼전도의 굴욕 때 항복 과정에서 홍타이지가 처음으로 한 일이 명나라가 준 의복을 즉각 폐기하고 인조에게 청나라 의복을 입게 한 것이다. 나중에 인조 본인도 며느리 민회빈 강씨가 왕비의 의복을 미리 지어 입었으니 반역을 꾀한 것으로 모함을 해서 죽였다. 그리고 옷차림의 문제는 아니나 현종 대의 2번의 예송도 실제로 효종의 왕위의 정통성과 직결되는 문제였고, 이것이 상복 입는 기간 문제로 나타난 것이었다. 이래저래 옷은 생각보다 상당히 중요한 문제였던 것.[23] 서예에 조예가 있고 재능도 있는 걸 보면 지적장애가 있다기보다는 고지능 자폐나 ADHD 같은 증상이 의심된다. 다만 고지능 자폐 정도만 되어도 일단 오버스러운 행동은 자제하는 경향이 있으므로 ADHD나 사회적 의사소통 장애에 조금 더 가깝다. 물론 인목왕후에 대한 정신과적으로 공식적인 분석을 한 건 없지만, 인목왕후의 행적은 지능과 인격 두 면모 중 하나만 결함되어있던 거라면 발생된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다시 풀어 말하면 인목왕후는 멍청한 악인이라고 하기에는 광해군의 즉위를 인정함으로써 인간적인 최소 이상의 선은 분명 지킨 사람이었고 서궁에 유폐되었을 때는 진심으로 궁인들을 대하고 자신을 지켜준 신하 박승종을 반정 당시 일부러 고변하지 않았을 만큼 도덕적인 편이었고, 서예를 잘 하고, 유폐 시절에는 처세를 어느 정도 잘 해내기도 한만큼 멍청하지도 않았다. 따라서 역설적으로 인목왕후는 멍청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악인이지도 않은 왕비였기에 더욱 큰 비극을 당한 셈이기도 하다.[24] 비록 '대군'이 되었지만 정작 선조 살아생전에 대군으로 책봉받지 못했다. 조선 왕실에서 왕자들은 보통 10살 전후로 대군/군으로 책봉받지만, 영창대군은 고작 3살 때 아버지 선조가 승하하면서 아버지에게 직접 책봉받지 못했기 때문이다.[25] 이때 받은 대비로서의 존호는 소성대비(昭聖大妃). 대중이나 미디어에서는 '인목대비'라는 칭호가 보편적이지만, 그 인목(仁穆)은 사후에 왕비로서 받은 시호다.[26] 김제남이 치부를 일삼은 부패한 사람인 것은 사실인데, 이 정도로 죽어야 한다면 조선왕조 500년 간 능지처참 당해야 할 왕실 구성원이 3자리 수는 가볍게 넘어갔을 것이다. 무엇보다 이 시기 부패의 끝판왕은 바로 광해군과 그 대북파 측근들이었다. 광해군 및 측근세력은 방납(傍納) 커넥션과 연계되어 일선 관리들이 기준치의 최대 100배에 달하는 방납가를 매기는 것을 비호했다.[27] 방에서 뜨거운 열기에 쪄죽음[28] 정확히는 인목왕후를 경운궁(덕수궁)으로 보내 유폐시킨 것이 아니라, 재건된 창덕궁으로 왕실이 이어한 것이다. 이 때 함께 머물던 인목왕후만 경운궁에 남기고, 광해군 일가는 창덕궁으로 환궁해 돌아갔다. 이후 경운궁을 서궁으로 격하시키고 감시병 몇 명 정도만 둔 채 방치하였다.[29] 이 증오와 분노가 어느 정도였냐면,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쫓겨난 후 반정 수뇌부들에게 "이혼(광해군의 이름) 부자(父子)의 머리를 가져오라. 그들의 살점을 뜯은 뒤에야 비로소 전교(傳敎)를 내리겠다."고 일갈할 정도였다.[30] 광해군 저주 건은 계축옥사 당시 고명 대신으로 끌려온 박동량이 살기 위해 한 증언이다. 이후 대비전의 상궁 나인들을 고문해 목릉, 즉 선조의 능에 저주의 뜻을 담은 물건을 묻었다는 증언을 받아냈으나, 사실 확인을 위해 목릉을 파헤쳤을 때 아무런 증거를 찾지 못했다. 정황상 영창대군에 이어 인목왕후까지 끝장내려는 북인 이이첨세력의 모함일 가능성이 높다.[31] 세자로 16년, 게다가 그 사이에는 전시에 분조(分朝)를 성공적으로 이끈 경력이 나름 포함되어 있었다. 이건 문종의 대리 청정 못지않은 플러스 요소다.[32] 이에 대한 반론도 존재하는데, 가장 어린 남동생 하나가 살아남았다는 것이다.[33] 간혹 인목왕후가 나오는 사극이나 시대물에서 소복이 아닌 왕비의 적의를 그대로 입고 있는 장면이 그대로 나오는데, 고증오류다. 계축옥사 이후로 인목왕후는 자의적으로 소복만 입었고, 인조반정 당시에도 소복 차림으로 폐위 교서를 내렸다.[34] 마음이 답답하고 고생스러움.[35] 이 때문에 인목왕후는 인조반정 당시 삼창의 처벌을 주장할 때 박승종만큼은 언급하지 않았다. 그러나 박승종은 인조반정 이후 아들과 음독자살했다.[36] 명나라에서도 인목왕후의 폐위를 허락하지 않았다.[37] 출처: 조선시대 당쟁사 1권 이성무(저)[38] 인목왕후의 딸이자 영창대군의 친누이인 정명공주를 의미한다. 당시 21살이었으나 혼인하지 못하고 인목왕후와 같이 서궁에 유폐당해 있었다. 인목왕후는 광해군이 정명공주마저 죽일까봐 광해군에게 정명공주가 죽었다고 알렸다.[39] 공신 책봉은 물론 반정 자체의 뒷수습도 안 끝난 시점이다. 광해군이 유배조차 떠나지 않은 상황.[40] 조선 역사를 통틀어 지천명도 되기 전에 세상을 떠난 왕대비들은 대왕대비까지 모두 다 합쳐도 인순왕후, 인목왕후, 명성왕후, 선의왕후, 철인왕후로, 겨우 5명 뿐이다. 그리고 대왕대비 중에서도 인목왕후만큼 단명한 쪽은 안순왕후 밖에 없고, 게다가 그 안순왕후조차도 55세에 세상을 떠났기에 인목왕후는 공식적으로 조선의 역대 대왕대비들 중 가장 단명한 대왕대비이다.[41] 실제로도 인조가 친부모인 정원군과 계운궁을 추숭시킨 때도 인목왕후의 사후이다. 당연히 인목왕후 생전에는 꿈도 못 꿀 것을 본인도 알았기 때문에 못했던 것.[42] 심정세의 고모할머니가 명종의 왕비인 인순왕후이다. 또한 심정세의 이모는 정원군과 결혼해 연주군부인이 되어 능양군을 낳았다. 즉, 심정세와 인조는 이종사촌 관계이니 자기 형부의 이종사촌도 된다.[43] 대구 서씨로, 선조와 인빈 김씨의 딸 정신옹주의 장녀다. 즉 인목왕후 입장에서는 법적 외손녀가 올케가 된 셈이다.[44] 조선 장조(사도세자)의 비인 헌경왕후(혜경궁 홍씨)의 5대조 직계조상이다. 홍주원과 정명공주의 5대손인 혜경궁은 시아버지인 영조와는 12촌, 남편인 사도세자와는 13촌 고모-조카 관계가 된다. 순서는 정명공주+홍주원→홍만용→홍중기→홍현보→홍봉한→혜경궁 홍씨 순이다.[45] 1604년 선조 37년 11월 17일 인시 사산[46] 추후 계축옥사에 연루되어 강화 교동도에 유배되어 위리안치형을 당했고 끝내는 8~9살 되는 어린 나이에 초가집 안에서 증살(방바닥 온돌 아궁에 불을 계속 지펴 뜨거운 열기에 쪄 죽는 일) 된다.[47] 무당의 망언에 휘둘린 멍청한 노비들이 윗전의 허락도 받지않고 개인적으로 벌인 만행에 불과하며 심지어 저 영창대군의 노비들이 저주를 행했다는 증언도 신빈성 없는 헛소문인데 이를 박동량이 혼자 살아남기 위해 아무렇게나 내뱉는 바람에 옥사로까지 발전되었다는 의미다.[48] 인목왕후 입장에서 보자면 아마 계승권이 없는 '공주'이기 때문에 본인이 죽어도 정명공주의 목숨과 안위는 무사하다고 단편적으로 생각한것일수 있다. 실제로도 명백히 폭군이라 쫓겨난 연산군의 딸인 휘신공주도 폐위된 공주였지만 여자이기도 해서 목숨을 부지하는건 물론 결혼생활도 가능했다. 따라서 딸에게 많은 특혜를 내리게 한것과 원수인 광해군을 강하게 처벌 요청하는것 이외에는 딱히 인조를 건드린 적이 없던 인목왕후 입장에서는 설마 본인이 죽고 인조가 정명공주 일가를 증오하리라고 생각을 못했을 가능성이 높다. 물론 당대 상황이나 실록을 보면 인조가 그럴수 있다는 정황을 생각해야했고, 못하더라도 보험으로 유지를 남기는 식으로 간단한 보호 수단은 만들고 갈 수 있었을텐데도 그러지 못했다는건 타고난 눈치없는 천성이 죽는 날까지 따라 붙어서 본인 사후에도 딸을 보호할 수단의 필요성을 못 느꼈다는 것이다.[49] 현대 한국 같았으면 이런 인목왕후의 천성은 ADHD나, 고지능 자폐 같이 일상생활 자체는 가능하지만 선천적 정신질환을 타고나서 사회생활은 거의 불가능하여 교육을 철저히 받고 관리를 받아야하는 지경이다. 추가적으로 직업을 갖는 것도 거의 불가능하니 그나마 재능이 있는 글쓰기로 돈을 벌고 먹고 살아야할것이다.[50] 사실 당시 상황을 보면 진짜 광해군측이 영창대군을 안 죽이는 게 더 이상한 상황이었다. 영창대군이 살아남을 수 있을 거라고 안일하게 여긴 건 인목왕후측 뿐이었고 계축옥사 당시 조정의 중론은 이덕형과 곽재우같은 극소수를 제외하면 역적의 수괴인 영창대군을 죽여야된다는 걸로 귀결되었다.[51] 물론 이덕형과 곽재우 등이 영창대군의 처형을 만류한 건 그들이 워낙 강직한 성격이기 때문도 있었다. 계축옥사 당시 영창대군은 고작 8살로 도의적으로는 물론이고 조선 시대의 법적 기준으로 봐도 폐서인 및 유배가 최고형일 정도로 너무 어렸다. 이덕형과 곽재우같은 인물들의 행적과 성격상 아무리 위협적인 입지의 왕족인데다 모후와 외가의 전횡까지 겹쳤다고 하더라도, 막무가내로 역모에 끌어들여 법조차 무시하면서까지 어린 아이를 처형시키는 것에 도저히 찬동할 수 없었던 것이다.[52] 다른 부분은 차치하더라도 선조 말기에 보여준 행태는 누가 봐도 정말 명백한 실책이었다.[53] 인터넷발 '광해군 긍정론'은 '광해군 긍정론'을 집대성한 한명기 교수의 견해와도 차이가 심하게 난다. 한명기 교수는 공과를 엄연히 구분해서 외치를 제외한 내치 대부분을 과오로 평했다. 그의 저서 <광해군>은 '탁월한 외교를 펼친 군주'라는 부제와 달리 1/3 정도는 영건 사업, 옥사, 수탈을 들어 비판하는 내용이다.[54] 물론 말년에 판단 착오로 일개 신하에게 팩폭당하는 굴욕을 당하기는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