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01-28 21:45:40

이명박/다른 정치인들과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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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보수정당계 정치인3. 민주당계 정치인

1. 개요

정치인 이명박과 다른 정치인들과의 관계에 대해 설명한 문서.

2. 보수정당계 정치인

2.1. 친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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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이재오 이상득.jpg
대표적인 친이계 인사 이재오, 이상득 전 의원
이명박을 따르는 인사들의 계파를 일컫는 말. 1990년대 3당 합당 이후 김영삼 전 대통령이 이끌던 신한국당은 YS가 힘을 잃게 되면서, 90년대 후반 이회창 전 총리에게 당권이 넘어가게 된다. 그러나 이회창 후보도 이후 2번이나 대선에서 낙선하면서 2002년 12월 정계은퇴를 하게 되고, 이러한 상황에서 새롭게 떠오른 인물이 김영삼 대통령이 영입한 이명박이였다.[1]

주도권을 먼저 잡은 건 박근혜였다.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대표를 맡은 박근혜는 탄핵 역풍의 위기 상황 속에서도 121석을 확보하며 개헌저지선을 확보했다. 이로 인해 기존 민정계는 와해되어 친박으로 흡수되었고 박근혜는 재보궐선거와 2006년 지방선거를 모두 승리로 이끌며 한나라당의 당권을 장악했다. 당권이 친박의 중심인 민정계, 공화계로 넘어가자 구심점을 잃은 민주계는 이명박을 중심으로 뭉치게 되었다. 이것이 친이 계파의 탄생이었다.

2.2. 김영삼

파일:external/www.iusm.co.kr/628534_229600_3210.jpg
후보시절 김영삼 전 대통령 서울 자택에 방문한 이명박 후보
파일:이명박 당시 대통령과 김영삼 전 대통령.jpg
2010년 10월 당시 이명박 대통령이 경남 거제시 장목면 거제휴게소에서 열린 거가대로 개통식에 참석, 김영삼 전 대통령과 환담하는 모습
이명박을 정계에 발탁한 인물도 바로 김영삼이다. 김영삼은 운동권 출신에다 현대건설에 입사해 사장까지 오른 이명박을 90년대 영입하여, 총선대선에서 자신과 경합했던 현대그룹 명예회장 정주영을 물먹이기도 했다. 김영삼은 2000년대 17대 대선 정국에서도 박근혜와 당내 경선을 벌이던 이명박을 지지했고, 이명박 또한 대통령이 되고 나서도 김영삼을 깍듯하게 예우했다.

상도동계의 몇몇을 제외한 거의 전부가[2] 한나라당 대통령후보 경선 때부터 친이계로 편입돼서 이명박을 지지하기도 했다.[3] 또한, 이명박은 김무성, 박종웅, 김문수, 안경률, 김덕룡, 정의화, 정병국, 김태호, 심재철, 이재오, 이병석, 이방호, 박형준, 안상수, 이상득, 김형오, 박희태[4] 등 김영삼계 출신인 다른 친이계 정치인들과 함께 김영삼과 정치적으로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인간적으로도 가깝게 지냈다. 특히 이 중 김덕룡은 상도동계 직계인데, 이재오, 이상득, 박희태와 더불어 친이 6인회에 들어가기도 했다.[5]

다만, 이명박 및 친이계가 2008년 한나라당 공천권을 쥐고 한나라당 공천에서 상도동계 직계 인물 박종웅을 공천에서 탈락시키고, 친이계가 아니었던 김무성을 공천에서 떨어뜨리자 이땐 김영삼이 이명박을 비난하면서 김무성의 선거운동을 도와주기도 했다. 그만큼 김영삼이 김무성을 아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2010년대 들어 당대표가 된 김무성이 당시 박근혜 정부에 너무 노골적으로 굽신거리는 행보를 보이자 아들 SNS를 빌려 병문안도 안오냐고 불쾌한 심정을 드러내기도 했다. 그래서 김무성이 급하게 병문안을 갔다.

이명박의 고향인 포항과 본관인 경주는 비록 행정상으로는 경상북도에 소속되어 있지만, 부산과도 지리적으로 멀지는 않기 때문에 실 생활권상으로 PK과도 가까운 지역인데다가[6][7] 이명박의 고향이기도 해서, 압도적인 이명박 지지와 반대로 반박근혜 성향을 보여 정치상으로 PK 계열로 분류되기도 했다.

또한 이명박은 김영삼에게 본인과 친한 저명 인사들을 소개하기도 했고,[8] 재임 중에도 김영삼뿐만 아니라 기타 상도동계 주요 인사들도 대우하였다. 또 문민정부의 핵심 인사들 중에서는 이명박 정부에서도 중책을 맡은 사람들이 많은데, 대표적으로 문민정부에서 경제기획원 장관을 지내고 이명박 정부에서 국무총리를 맡은 한승수와 문민정부에서 경제기획원 차관을 지내고 이명박 정부에서 기획재정부 장관을 지낸 강만수[9], 그리고 문민정부에서 청와대 제2부속실장을 지내고 이명박 정부에서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을 지낸 정병국이 있다.

어찌됐든 친이계는 보수정당내 민주계에서 상도동계를 잇는 계파로 인정받고 있기에[10] 2015년 김영삼이 사망했을 당시 이명박도 굉장히 비통해하는 모습을 보였다.

2.3. 이회창

파일:이명박과 이회창.jpg
환담하는 이명박 대통령, 이회창 총재
이회창과 이명박의 관계는 제3회 전국동시지방선거때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서울시장 선거에서 이회창이 이명박 서울시장 후보에 유세를 도와주는 등 두 사람의 관계는 나쁘지 않게 흘러갔다. 그러나 서울시장 재임 중 두 사람 간에 갈등이 빈번히 일어났다.

2005년 한 시사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솔직히 노무현, 이회창을 놓고 인간적으로 누가 더 맘에 드냐하면 노무현”이라며 자신을 깎아내리는 발언을 했다. 또 “이회창씨는 당에서 만든 공약을 갖고 두번 다 써 먹었다. 별 내용도 없이”라면서 “나는 서울시장 선거때 당에서 만든 공약 하나도 없었다”고 말했다. 이회창 총재의 핵심 측근인 이종구 전 언론특보는 “이전총재가 이시장 발언에 대해 매우 불쾌하게 생각하고 있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이에 대해 이회창은 이명박 발언에 대해 극도로 불쾌감을 나타내며 이종구 언론특보 명의의 반박 논평을 통해 “이명박 시장이 서울시장 선거 때 한나라당에 대한 국민적 지지에 힘입어 당선된 것은 천하가 다 안다. 지나치게 대권병에 든 것은 아닌지 씁쓸하다”고 했다.

특히 이명박은 노무현 대통령에게 인간적 호감을 나타내며 이회창을 비하한 것을 두고는 ‘비례의 극치’ ‘몰염치’라고 노골적인 불쾌감을 표시하면서 “이긴 자에게 아부하고 진 자를 짓밟으려는 태도가 아니냐”고 흥분했다.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가 이명박 대선후보의 선거대책위원회 상임고문직을 고사한 배경을 놓고 갈등이 불거졌는데 2007년 10월 10일 이회창 총재가 “대통령이 될 사람이 거짓말을 하면 되겠느냐”라며 자신에게 상임고문직을 제안한 적이 없다는 이명박 후보에 대해 직격탄을 날렸다. 서로 시비가 엇갈리면서 갈등이 불거졌다.

제17대 대통령 선거 당시에도 여러 차례 충돌이 있었다. 당시 이회창은 이명박에 반대하며 한나라당을 탈당하고 무소속이 되었다. 이회창 후보는 "'범죄피의자'를 대통령으로 선출하는 나라는 동서고금 어디에도 없다. 만에 하나 이명박 후보가 대통령이 되면 특검정국이 되고 여야간 사생결단 충돌이 일어날 게 뻔하다"면서 "이렇게 되면 우리에게 더 이상 미래는 없습니다."라며 지지를 호소했다. 또한 공약도 이명박은 경제분야로 치우쳐저 있음을 노리고, 이회창은 안보분야에 강점을 두어 보수후보로서의 차별화를 두었다. 또 이명박의 BBK 논란 및 과거 선거법 위반 논란 등을 공격하며 자신의 대법관, 대쪽 총리 이력을 연관시키는 등의 대통령 선거 삼수생다운 노련함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끝내 이명박이 당선이 되고 이회창 무소속 후보가 이번 대선 결과에 깨끗이 승복하고 이명박 한나라당 후보의 승리를 인정했다.

이후 이회창은 자유선진당을 창당하고 18대 총선때 총 18석을 획득, 물론 20석이 기준인 원내교섭단체 지위 획득에 아슬아슬하게 실패했다. 18대 국회 들어선 이후에는 2008년 촛불집회에서 이명박 정부와 여당을 비판하는 등 입지를 세울려고 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당시에는 이회창 총재는 이명박 당시 대통령에게 우리 정치가 한단계 더 성숙되기 위해서 이명박 대통령이 대국민 담화문을 발표해 정치 보복수사 근절 의지를 밝혀야 한다고 요구했다. 이후에는 2012년 19대 총선에서 자유선진당이 참패를 하자 그 해 5월 20일 탈당했고 별다른 활동 없이 지내다가 제18대 대통령 선거에서 박근혜 후보를 지지하며 새누리당으로 복당하였다. 18대 대선 선거기간동안 박근혜의 지원유세를 다녔고, 박근혜가 대통령이 당선되고 이듬 해인 2013년 정계에서 완전히 은퇴하면서 두 사람의 관계는 끝난걸로 보인다.

3. 민주당계 정치인

3.1. 김대중

파일:이명박김대중.jpg
2007년 대선주자였던 당시 김대중 전 대통령을 예방했을때
물론 서로 다른 정치적 배경과 정책을 가진 인물들이었지만, 둘의 관계는 복잡한 관계였다.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김대중은 이명박에 대북정책에 비판했다. 자신의 집을 찾은 강기갑 민주노동당 대표 등과 만난 자리에서 “지금 흐름은 10년 전의 시대로 전체 흐름이 역전되는 과정에 있다”며 이렇게 말했는데 악화일로를 걷고 있는 남북관계와 관련해 “‘핵을 포기하면 도와주겠다’는 이명박 정부의 ‘비핵·개방 3000’은 결국 지난 6년간 실패하고 파탄의 길을 걸은 부시의 정책과 같은 것”이라며 “부시 대통령도 성공하지 못했다. 이명박 정부는 무슨 수로도 역행하지 못한다”고 대북 정책의 기조 변경을 강력히 촉구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서거 당시 이명박 전 대통령은 여의도 국회에 빈소를 찾아 헌화를 했다. 당시 한승수 국무총리는 “김 전 대통령은 마지막 순간까지도 우리 사회의 화해와 통합에 크나큰 역할을 하셨다”면서 “우리는 이러한 김 전 대통령의 유지를 받들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추도했다. 그러면서“정치적 입장이 다르다는 이유로 서로 반목해온 해묵은 앙금을 모두 털어내는 것이 우리 국민 모두의 참뜻일 것”이라며 “이제야말로 지역과 계층, 이념과 세대의 차이를 떠나 온 국민이 한 마음으로 새로운 통합의 시대를 열어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3.2. 노무현

파일:노무현 전 대통령과 이명박 전 대통령 종로.jpg
1996년 치러진 15대 총선에서 종로에서 맞붙을 이명박 전 대통령과 노무현 전 대통령이 3월 26일 후보자 등록을 마친뒤 악수하고 있는 모습
파일:노무현 전 대통령과 이명박 서울시장 도지사 회의 참석할때 악수.jpg
2003년 전국 시ㆍ도지사 회의 참석에 앞서 이명박 서울시장과 악수하는 노무현 대통령
파일:노무현_이명박.jpg
2008년 2월 25일 이명박 대통령 취임식에 참석한 노무현 전 대통령이 이명박 대통령과 대화를 나누는 모습
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종로에서 노무현과 이명박이 서로 맞붙은 것으로 시작된다. 이때 이명박과 노무현의 첫 만남이었다. 당시 이 종로구 선거에서 이명박이 이겼지만, 이후 이명박이 의원직을 사퇴하면서 여기에 열린 재보궐선거에서 노무현이 당선된다.

이때까지만 해도 노무현 전 대통령은 내가 대통령이 될거라고 또 이명박이 대통령이 될거라고 생각치 못했다고 한다.

제16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제3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이명박서울시장으로 당선되고 노무현은 그 이후로 대통령에 당선되게 된다. 참여정부시절 이명박 서울시장이 청계천 복원 등 훈훈한 시절도 있었지만 부동산 가격 폭등 문제, 행정수도 이전 문제[11]등 여러 문제등으로 제17대 대통령 선거때 MB가 당선되게 되고 10년만에 보수정권에 정권 교체가 이루어지게 된다. 당시 당선인 신분으로 노무현 전 대통령과 회담할 때 MB는 참여정부시절 잘 된 정책등을 잘 계승하겠다고 했다.

2008년 퇴임 후 KTX를 타고 봉하마을로 내려간 노 전 대통령은 한때 친환경 벼농사 농법 전도사를 자처했지만, 2009년 박연차 게이트로 직격탄을 맞았다.

노 전 대통령은 자서전 <운명이다>에서 “는 취임하자마자 임기가 남은 공공기관, 공기업 기관장들을 몰아냈다. 마침내 나를 겨냥한 공격을 시작했다”고 주장했다. 문 대통령도 자서전 <운명>에서 “정치보복의 시작은 참여정부 사람들에 대한 치졸한 뒷조사였다”며 “노 전 대통령은 나와 친분 있는 많은 기업이, 심지어 내가 자주 가던 식당도 세무조사를 당했다”고 말했다.

그 결과 실제로 수많은 측근과 가족들이 비리에 연루되어 있었으며, 검찰의 수사망이 좁혀오자 노무현은 결국 2009년 5월 23일너무 슬퍼하지 마라. 삶과 죽음이 모두 자연의 한 조각 아니겠는가. 미안해하지 마라. 누구도 원망하지 마라. 운명이다.”라는 말을 남기고 사망했다.

3.3. 문재인

파일:c_20130730_5415_0.jpg
노무현 전 대통령 영결식에서 MB에 고개 숙인 문재인
문재인과 전전임 대통령인 이명박 전 대통령의 관계는 참으로 드라마틱하다. 실제 관계가 어떤지는 두 사람만이 알겠지만, 많은 사람들은 이 관계를 한마디로 불구대천이라고 말한다.

2009년 5월 29일에 있었던 노무현 전 대통령 영결식 중 백원우통합민주당 의원이 이명박 전 대통령에게 "어디서 분향을 해, 이명박!", "정치 보복으로 살인에 이른 정치 살인입니다. 이명박 대통령, 노무현 대통령에게 사죄하십시오!"라고 외치며 항의하다가 청와대 경호원들에게 저지를 당하는 일이 있었다. 이때 상주 역할을 맡고 있었던 문재인 전 변호사 등이 이명박 전 대통령에게 머리를 숙여 사과했는데 그때 찍힌 사진이다.#[12]

훗날 인터뷰에서 문재인 자신도 백원우 전 의원과 같은 심정이었으나, 이명박은 문상객이었으니 상주로서 그에 맞는 예의를 지킨 것이라고 말했다. 결국 이 당시부터 문재인과 이명박이 어떠한 관계가 될지는 보나마나였던 셈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 사망 사건박연차 게이트 책임 유무에 대해서는 논란과 의견이 엇갈리지만[13], 이명박 정부 당시 검찰노무현 전 대통령 측을 대상으로 했던 수사는 비정상적인 수준이었다는 것에는 의견이 일치하는 편이다. 털다 털다 못해 아예 노무현 전 대통령의 단골 삼계탕집에까지 세무조사가 들어갔을 정도였고, 심지어는 노무현과 악수한 편의점 점장까지 검찰조사를 받았다. 측근이던 강금원은 검찰에서 뇌졸중 치료를 사실상 막았으며, 노무현 사후에는 국정원을 동원해 심지어 간첩 잡을 돈인 대북공작금까지 횡령해 뒷조사를 하기까지 했다. 후폭풍이 심한 외교 기밀문서까지 동원한 게 바로 NLL 대화록 논란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 측에 대한 수사 당시, 오죽했으면 불안감을 느낀 당시 여당 한나라당에서조차 검찰 수사의 문제점을 지적하였을 정도였는데 검사 출신으로 대한민국 법무부장관까지 지냈던 박희태한나라당 대표조차 "이런 수사는 처음 본다."며 검찰에 강한 불만을 제기했다.[14] 심지어, 나중에 자유한국당의 대표가 되는 홍준표마저 "구속을 하려고 했다면 신속히 결정해야지, 전직 대통령 수사를 하면서 모욕만 줘서 전 대통령의 목숨만 잃게 만들었다."고 검찰을 질타했다. 또한 당시에는 친이계에 속했던 남경필경기도지사[15]도 "검찰이 노무현을 모욕준 것은 문제가 있었다."고 비판한 바 있다.

이러한 망신주기식 수사와 검찰의 압박이 노무현 전 대통령이 결국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만든 결정적인 원인으로 꼽힌다. 이 당시 노무현 전 대통령의 변호사로서 함께 대검찰청에 들어갔던 문재인은 자신의 저서인 '문재인의 운명'에 이명박 정부2008년 광우병 촛불집회의 배후에 노무현 전 대통령 측이 있을 거라 단정짓고 이에 대한 정치 보복에 나선 것 같다고 저술했다.

이명박 정부는 더 나아가서 친노 진영을 확인 사살하고자 했으나 오히려 참여정부와 비교되는 권위주의적 행보에 대한 반감으로 인하여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향수가 되살아났고, 이는 2010년 제5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안희정, 한명숙, 이광재, 김두관친노 진영이 부활하는 계기가 됐다.[16] 그리고 범친노계로 분류되는 박원순변호사2011년한나라당 나경원 후보를 누르고 서울특별시장에 당선되었으며, 2012년 19대 총선에서는 문재인과 이해찬국무총리가 각각 부산광역시 사상구, 세종특별자치시에 출마해 당선되면서 본격적으로 정계로 들어오게 되었다.

나중에 국회의장이 되는 정세균 전 의원 또한 이명박 정부 심판이란 구호를 내세우며 전라북도의 지역구에서 서울특별시 종로구로 지역구를 옮겨 당선되면서 정계의 중진으로 입지가 급상승했다. 그리고 문재인은 2012년 12월 19일에 있었던 제18대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통합당 제18대 대통령 후보 경선을 압도적으로 승리했고, 본선에서 48.02%의 득표율을 올리며 석패했지만 민주당의 유력한 차기 대선 주자 반열에 오르게 됐다.[17]

그래서 정치권의 호사가들은 2007년 한나라당 대선 후보 경선-2008년 한나라당친박계 공천 학살로 인하여 이명박 측과 원수지간이 되었던 박근혜가 2012년 새누리당공천 독재권을 거머쥔 당 비대위원장으로 추대됐을 때 친이계가 이렇다 할 반항을 하지 않았던 것, 그리고 박근혜제19대 국회의원 선거 시즌에 정적이었던 친이계를 공천 학살했으면서 대권을 잡은 뒤에는 친이계의 심장인 이명박에게 이렇다 할 정치 보복을 하지 않았던 점을 근거로 들어 이명박 전 대통령민주통합당이 다수당이 되느니 새누리당 내에서 친박이 주류가 되더라도 새누리당이 다수당이 되는 게 낫고, 문재인이 대통령이 되느니 박근혜가 대통령이 되는 게 낫다는 생각으로 국가정보원을 이용하여 여론조작을 실시한 거 아니냐는 추측을 내어놓았다.

그러나 박근혜언론통제, 청해진해운 세월호 침몰 사고, 정윤회 문건 파동, 2015년 대한민국 메르스 유행, 2015 개정 교육과정 역사 교과용도서 국정화 논란, 2015년 한일 위안부 문제 협상 합의, 공권력을 통한 살인, 2016년 개성공단 가동 중단, 2016년 테러방지법 반대 필리버스터 등 각종 논란으로 반발이 끊이지 않았고, 결국 제2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새누리당이 역대급으로 보수 정당 역사에 남는 참패를 기록, 20대 국회는 여소야대 정국으로 전환되었고 2016년 10월 24일 대한민국을 발칵 뒤집을 뉴스JTBC 뉴스룸을 통해 드러나면서 헌정 사상 최초로 대통령 파면이라는 결과를 불러왔다. 결국 이는 보수 진영 전체가 몰락에 가까운 치명타를 입혔고, 노무현 정부가 끝난 지 9년 만에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게 됐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최측근이 이젠 대통령이 되어 돌아온 것이다. 그래서일까, 2017년 제19대 대통령 선거 투표날 이명박 부부의 표정을 보면 그들의 심정이 어떠했는지를 어느 정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애초에 이명박 전 대통령은 일개 평사원으로 현대건설에 입사해 최고 경영자의 자리에까지 올랐다는 '신화'[18]와 기업인 출신 정치인으로서 서울시장 시절에 보여주었던 성과, 그리고 김영삼 전 대통령상도동계라는 지지세력과 反노무현 정서에 힘입어 제17대 대통령 선거에서 압승했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노무현 전 대통령이명박 정부 하의 검찰 수사로 인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는 최악의 사건이 일어났고 또 본인의 실정으로 인한 이미지 실추가 더해지면서 노무현에 대한 향수, 그리고 친노 진영의 부활이라는 역효과만 불러오고 말았다. 그리고 종국에는 자신이 간접적으로 살해한 것이나 다름 없는 전직 대통령의 후배이자 최측근이 대한민국 대통령이 되어 청와대에 들어가는 모습을 지켜봐야 하는 운명을 맞이하기에 이른다.

그렇지만 무엇보다도 이명박의 최대 실책은 대통령 선거 당선 및 집권 당시의 지지율을 각종 논란거리로[19] 다 깎아먹어서[20] 결국 당내 정적이자 보수 진영의 또 다른 유력한 대선 주자였던 박근혜에게 당권을 빼앗겨 친이계의 집권 연장을 불가능에 가깝게 만든 것이 아닐까.[21]

이명박 정부의 임기가 흘러가면 흘러갈 수록 더더욱 들끓었던 反이명박 정서, 제5회 전국동시지방선거 패배, 그리고 2011년 하반기 재보궐선거 패배, 한나라당 선관위 디도스 공격 사건, 그리고 홍준표 전 대표 체제를 만들어낸 2008년 한나라당 전당대회 돈봉투 사건으로 인하여 친이계 쪽에선 다음 대통령 선거에서 먹힐 만한 대통령 선거 주자가 없는 상황이라 친노 쪽에 정권을 넘기지 않으려면 싫든 좋든 당시 보수 진영 최고의 차기 대통령 선거 주자였던 박근혜에게 대권을 넘길 수밖에 없었지만[22]박근혜그런 결말을 맞이할 거라고 누가 예상이나 했겠는가.

만약 박근혜 대통령이 나라를 그런 대로 잘 이끌었다면 계속해서 보수 정부를 유지시켜 이명박 대통령 측도 안전하게 살아남을 수 있었을 지도 모른다. 설령 정권교체까지는 못 막았더라도 최소한 조기 대통령 선거까지는 막았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2016년 8월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드러나기 전 이명박 대통령은 차기 정권을 반드시 내 손으로 창출하겠다는 발언을 해 화제가 되었다. 자신이 힘을 써서 친이계 주축인 보수 정부가 재집권할 경우 박근혜도 쳐내면서 자신을 둘러싼 각종 의혹까지 조용히 은폐하고 넘어갈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는지도 모른다. # 조선일보에서도 이미 최순실과의 관계를 공격하고 있었기 때문에 친이계 입장에서도 그 틈을 타 박근혜와 친박을 무너뜨리고 친이계 재집권을 노리려 했다는 평가도 있다. 조선일보와 박근혜 정부의 불화 참조. 조선일보가 공격하는 것을 당시 이명박 측에서 몰랐을 리 없으며 실제로도 친이계의 좌장 이재오를 중심으로 늘푸른한국당이 창당된 바 있다.

그러나 박근혜이명박보다 못한, 아버지어머니의 후광에만 전적으로 의지하게 되었고, 언론통제, 청해진해운 세월호 침몰 사고, 정윤회 문건 파동, 2015년 대한민국 메르스 유행, 2015 역사 교과용도서 국정화 논란, 2015년 한일 위안부 문제 협상 합의, 공권력을 통한 살인, 2016년 개성공단 가동 중단, 2016년 테러방지법 반대 필리버스터 등등 온갖 잡음에 시달렸다. 설상가상으로 국정농단 스캔들까지 드러나면서 개운치 못하게 퇴장했다.

그리고 휘하 그룹에 친이계 정치인들이 여럿 포함돼 있어 '이명박의 아바타가 아니냐'는 소리까지 들었던 국민의당안철수 측도 각종 논란거리를 만들며 보수 표심을 흡수하지 못했고, 당시 보수 진영 대선 후보 여론조사 1위였고 역시 친이계 인사들이 포함되어 있었던 반기문 측에서도 여론조사 결과와는 달리 각종 논란거리를 만들다가 결국 반기문 전 총장 본인이 대통령 선거 불출마 선언을 하며 대통령 선거 레이스를 그만두었다.

거기다가 친이계가 포함된 비박계가 만든 바른정당과 친이계가 주축이 되어 창당한 늘푸른한국당은 결국 성공하지 못했다. 이렇게 친이계가 포함된 비박계가 문재인과 1:1 구도를 만드는 데 실패한 반면, 더불어민주당과 문재인 후보 측에서는 촛불 민심의 적통이라는 아이콘을 흡수해 대권으로 정석적으로 나아가면서, 마침내 제19대 대통령 선거에서 압승해 정권을 되찾아왔다.

특히, 반기문은 각종 논란거리만 키워서 공격받다 대통령 선거 불출마 선언을 했고, 안철수 역시 처음에는 촛불 민심을 흡수할 수 있었으나, 나중에 촛불시위에 나가지 않고 역시 각종 논란거리를 불러 일으키면서 지지율을 크게 깎아먹었다. 친이계가 주축인 늘푸른자유한국당의 경우도 촛불 시위에 참여했으나 보수 정당계에 반감이 강한 사람들도 많다 보니 별 호응을 불러 일으키지 못했다.사실, 더불어민주당과 정의당은 박근혜 대통령 탄핵 소추 가결 직후에도 타 정당들에 비해 촛불시위의 동력을 계속 유지하는 데 힘을 계속 기울였고, 그 결과, 득표율과 지지율에서 말해 주듯이 촛불 민심을 가장 많이 흡수한 정당은 더불어민주당과 정의당이 되었다.

문재인 전 대통령이 대권을 잡은 뒤 박근혜 정부가 제대로 밝혀내지 않았던 이명박 정부 시절의 적폐들은 하나하나 드러나고 있다. 문재인 정부적폐청산을 위해 이명박의 4대강 사업에 대한 감사를 지시하는 등 이명박 측을 전방위적으로 조금씩 압박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최측근이었던 원세훈국가정보원·국방부·국군사이버사령부·국군기무사령부·경찰청 여론조작 사건, 이명박 정부의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국정원 특수활동비 상납 사건, 국가정보원 대북공작금 유용 사건 등 굵직굵직한 사건으로 검찰 수사를 받게 되었다.

그리고 박근혜 정부가 사실상 덮고 넘어갔던 것으로 추측되는 이명박 정부의 방송장악 블랙리스트, 국가정보원·국방부·국군사이버사령부·국군기무사령부·경찰청 여론조작 사건, 국가정보원 대북공작금 유용 사건, 국정원 특수활동비 청와대 상납 사건, 이명박 정부의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양승태 대법원 사법농단 의혹 사건 등이 하나 둘 세상 빛을 보기 시작했다. 국가정보원·국방부·국군사이버사령부·국군기무사령부·경찰청 여론조작 사건은 더욱 규모가 커져 군까지 개입됨이 밝혀졌고 당시 국방부 장관김관진까지 소환조사를 받아 결국 구속되었다. 또한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도 예상과는 달리 이명박 정부에서 처음 시작되었다는 사실이 드러났고 국정원을 동원해 은밀하고 치밀하게 방송 장악을 한 사실이 밝혀졌다. 게다가 다스 실소유주 논란이나 BBK 주가조작 사건 등의 개인비리까지 재조명되면서 갈수록 궁지에 몰렸고 결국 구속됐다. 게다가 30조, 50조, 70조에 달할 것으로 추산되는 초대형 비리는 건드리지도 않은 상태이다.

이를 두고 보수 진영에서는 문재인 정부이명박 비리 의혹 수사에 대해 정치 보복이라며 반발했다. 특히 국정원중앙정보부 시절부터 그 막강한 정보력과 대공 수사권을 애꿎은 곳에 휘둘러 온 적이 많아서 손을 봐야 한다는 주장이 오래전부터 제기되어 온 터였다. 국가정보원/사건 사고, 국가정보원/문제점, 국정원 게이트 참고.

무엇보다도 2012년에 행해졌던 국정원 대선 개입의 직접적 피해자대한민국최고 지도자가 되었고 그 당시 수사 최전선에 있다가 정부에게 찍혀서 좌천되었던 검사가 서울중앙지검장으로 화려하게 부활하며 수사를 이끌었다. 게다가 자신의 최측근인 원세훈이 쫓아낸 당시 국정원 3차장문재인 정부에서 초대 국정원장으로 임명되기까지 했는데.

당시 집권 여당이었던 자유한국당은 이를 정치 보복으로 규정했으며, 친이계가 상당수 포함돼 있는 바른미래당친이계의 좌장인 이재오도 반발했다. 보수 야권에서는 국정원의 폭주 or 과잉 충성으로 불미스러운 일이 벌어진 것이 어제 오늘 일이 아니라며 모든 정권의 행동을 재조사 해야 한다는 논리로 반발했다. 물론 문재인도 사람인 만큼 이들에 대한 복수심이 없을 리가 없다. 그러나 복수라고 하여도 명백하게 저질러진 범죄에 대해 처벌하는 일을 해서는 안 된다는 논리로 이어질 수는 없는 것이 아닐까.

물론 국가정보원으로 이름을 바꾼 국민의 정부 시절에도 국정원 불법 도청 사건 같이 민주화 운동의 대부가 민주 사회를 배신하는 불미스러운 일이 일어났으며 참여정부에도 개인의 일탈이라는 결론이 났지만 이명박 당시 후보 사찰로 직원이 징역을 선고받기도 했다. 썰전의 보수 패널로, 이명박 정부 시절 청와대 정무수석을 지냈던 박형준이 이를 지적하자 유시민도 썩어들어가는 표정으로 수긍했다.

하지만 유시민이 반박한 것처럼 당시에 이런 국정원의 이탈은 언론을 통해 드러났으며 이미 재판 과정을 걸쳐 처벌을 받았다. 현재 재판 진행 중인 원세훈 사건과 1:1 대응과 옳지 못하며 물증 없이 우리만 더럽지는 않았을 거라는 주장은 친이계의 희망에 가깝다. 그리고 (이 역시 물증은 없으나) 민주당 지지층은 지난 보수 정부 9년 동안 국정원이 광범위하게 여론을 조작해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죽이기에 나섰는데 이 둘을 훅 보낼 수 있는 내부적인 자료가 있었다면 진작에 사용하지 않았겠냐며 반박하고 있다.

또한 이런 식으로 위협한 지도 오래되었으나 김관진 전 장관이 구속되었어도 MB측으로부터 어떠한 폭로도 나온 게 없다. 내용을 떠나 문건 유출 자체가 논란이 됐을 게 뻔한 NLL 대화록 사건을 보면 문재인 지지층의 반박이 어느 정도 타당함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역시나 반격의 카드로 꺼낸 것이 박연차 게이트다. 권양숙이 돈을 받은 것은 명백하기에, 재수사 요청은 할 수 있으나, 이미 이 카드만 가지고 여론을 뒤집는 건 불가능하다. 게다가 수사 과정에서 당시 국정원이 광범위한 언론 플레이를 한 정황이 드러나면서 반격은커녕 도리어 역풍만 맞았다. 국가정보원 개혁발전위원회가 국정원 직원 4명이 ‘논두렁 보도’ 직전인 2009년 4월, 하금열SBS 사장과 접촉해 노무현 전 대통령 수사 보도를 적극 요청하고 주장했다고 발표했고, 그 결과물이 2009년 5월 13일, 단독으로 내보낸 논두렁에 버렸다는 보도한 것.

허나 사자방원세훈의 예에서 보듯이 이명박 정부가 집권하는 동안 부정한 방법으로 국정을 이끌었고, 후일을 도모했다는 의심을 가능케 하는 정황이 곳곳에서 드러나고 있는 데다, 이명박 정부 아래에서 국정원과 군이 정계를 어지럽히고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범죄를 저질렀다는 정황이 계속 걸려들고 있는 만큼 이명박 정부에 대한 사정을 단순히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식의 정치 보복이라고 평가절하하는 건 설득력이 부족한 주장으로 들리지 않겠는가.

너무나도 많은 정황 및 증거가 드러났으며 판이 커졌기에 더 이상 멈추고 싶어도 멈출 수 없는 상황이 됐다. 수사를 중단 혹은 어영부영 마무리 지었다가는 정권 성립의 명분과 지지자의 기대도 사라질 판이다.[23] 여론조사 등을 살펴보면 이명박도 수사해야 한다는 반응이 기본 60~70%를 넘길 만큼 수사에 대한 여론의 호응도 좋은 편이다. # [24]

그리고 이명박 정부에 대한 수사는 어느 날 갑자기 시작된 게 아니다. 국정원 댓글 사건은 지난 2012년 제18대 대통령 선거 시즌 때부터 불이 붙은 문제였고, BBK 주가조작 사건2007년 한나라당 대통령 선거 후보 경선 때 박근혜 캠프 측도 꺼내들었던 무기였다. 그리고 국정원 특수활동비 청와대 상납 사건박근혜-최순실 게이트와 관련하여 이헌수국정원 기획조정실장이 박근혜한테 돈을 상납했다는 진술로부터 시작한 사건이다. 처음에는 박근혜의 측근인 문고리 3인방최경환을 중심으로 특활비 수사가 진행됐지만, 검찰이 수사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이명박에게도 그 칼날이 닿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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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삼 전 대통령의 빈소에서 만난 문재인이명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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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어떤 때에는 만나면 웃으면서 인사를 나누기도 했던 모양

이명박 정부 시절에 자행된 국정원과 군의 정치 개입 등에 대한 대한민국 검찰청의 수사는 계속 성과를 내어 (위의 각주에서도 이미 설명되어 있듯) 이명박 정부 시절 국방장관을 지냈고, 박근혜 정부에서도 유임돼 국방장관과 국가안보실장을 지냈던 김관진이 11월 8일 검찰에 소환돼 "이명박의 지시를 받았다"고 결국 시인한 뒤 구속되기에 이르렀으나 구속부적심 심사로 불구속으로 석방된 상태로 조사를 받게 되었다.

이명박 측 입장으로 보면 상당히 떨리는 상황이 이어졌던 셈이다. 그래서 그간 직접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주변인들을 통해서만 반발 입장을 내비쳤던 이명박이 11월 12일 두바이로 출국하면서[25] 직접 문재인 정부적폐청산 정책이 개혁인지, 정치 보복인지 의심된다면서 경제 위기와 안보 불안을 야기할 것이라고 비판했다. #

그런데 발언을 하면서 본인 스스로도 상당한 초조함을 느끼는 듯한 모습을 몇 번 내비쳤고 "김관진의 진술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은 기자에게 "상식에 벗어나는 질문하지 말라"며 발끈하는 등 과거의 다소 여유 있던 모습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을 보였다.

나중에는 국정원 특활비 사건 때문에 측근들이 구속당하고[26] 수사망이 조여오자, 본인이 직접 나서서 기자회견까지하는 초강수를 두었다.[27]
또한 상술하였듯이 "노무현 정부에 대한 5년치 자료를 꺼낼 수도 있다"는 식의 반격을 시사하기도 했다. 그러나 더불어민주당문재인 지지층은 별로 신경쓰지 않았다. 오히려 "몰릴 때까지 몰렸다는 반증"이라고 받아들였다. 마찬가지로 상술하였듯 문재인 정부에 대한 반격이 될 수 있을 정도로 위력 있는 자료를 손에 쥐고 있었다면 문재인집권하기 전에 터뜨렸어야 납득이 되기 때문이다.

문재인은 민주-진보 진영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자랑하는 친노계의 수장이었고, 정계에서 무시하기 힘든 거물이었다. 초선으로 국회 입성한 뒤 대통령 후보-제1야당 당 대표에 올랐을 정도로 당내에 탄탄한 지지 세력도 가지고 있었다. 그만큼 보수 정당에서는 반드시 쓰려뜨려야 할 상대였다. 국회 입성 후 언론에 노출되는 양도 많았으며, 충분히 정치 생명에 타격을 줄 시간은 많았을 것이다. 설사 지금 파급력이 높은 자료를 꺼낸다고 해도, 이제는 대통령기록물법 위반이라는 덫에 걸릴 가능성이 높다.[28]

자신들도 참여정부에 관한 비밀을 쥐고 있다는 말을 꺼낸 지도 몇 달이 지나는 동안 이명박 측은 카드 한 장 보여주지 않았고, 검찰의 수사는 점점 이명박을 향했으며 이제는 국정원 특활비 사건이라는 확실한 건수까지 확보하게 됐다. 이명박 정부의 개국공신이었지만 이상득과의 문제로 버림 받았던 정두언 전 의원은 이명박 전 대통령과 그 주변 사람들 간의 비사를 방송 등에 흘리며 이명박 측에게 "소총도 없으면서 미사일을 든 정부에게 맞설 수 있을 것 같냐"고 조롱하기도.

고로 언론에서도 이명박 전 대통령검찰의 포토라인에 서는 날이 머지 않았다고 예측하며[29] '초읽기'라는 단어를 기사에 넣기 시작했다. 시사평론가 이동형은 본인이 진행하는 시사 팟캐스트 방송 '청정구역'의 11월 14일자 방송에서 "(전직 대통령은 워낙 거물이므로) 검찰이 전직 대통령을 부를 수 있는 기회는 단 한 번뿐이다. 따라서 검찰이 이명박을 부른다면 모든 게 셋팅되었다는 뜻일 것"이라고 예상하기도 했다.

그리고 2018년 검찰 수사팀은 사실상 이명박의 턱밑에까지 다다랐다. 국정원 특활비 상납 사건과 관련하여 한 측근의 배신에 위기감을 느꼈는지 이명박도 직접 기자회견을 하면서까지 정치 보복을 멈추라는 메시지를 공개적으로 보냈고 이에 대해 청와대는 이례적으로 '분노'라는 표현까지 곁들여가며 이명박 측의 여론전에 강한 불쾌감을 드러내기도 했다. ## # #

검찰이명박 측의 여론전에 아랑곳하지 않고 며칠 후 이명박이 정계 입문 이전부터 저지른 것으로 추정되는 각종 경제 비리의 심장부라 할 수 있는 다스의 전현직 임직원들 자택에 대한 압수수색을 벌였으며, 이명박의 친형 이상득의 자택까지 압수수색을 하면서 더욱 더 이명박 전 대통령에게 칼을 가까이 들이대었다. 그 이후에도 이상득의 검찰 소환, 영포빌딩의 지하 2층 창고를 압수수색[30]하는 등 수사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그리고 이명박 전 대통령을 마침내 피의자 신분으로 전환하였으며 2018년 2월 5일에는 국정원 특활비 뇌물 사건의 주범으로 공개 지목했다.

그 와중에 평창 동계올림픽을 앞두고 청와대에서 이명박을 올림픽 개/폐막식에 공식 초청하였다. 그것도 한병도청와대 정무수석이 직접 방문해서 초청장을 전달하였다. 그리고 이명박도 이를 수락해서 개/폐막식에 공식 참석했다. 일단 표면적인 이유는 '전직 대통령에 대한 예우 차원의 초청'이라는 원론적인 사유이다. 현재 기준으로 생존해 있는 전직 대통령들 중 전두환, 노태우 등은 이미 전직 대통령으로서의 예우를 박탈당한 상태고, 박근혜구속 상태이다. 피의자 신분이기는 해도 활동이 자유로운 전직 대통령은 이명박만이 유일한 상태다. 인터넷 등지에서는 '감옥에 가기 전에 좋은 구경거리나 좀 보고 들어가라는 뜻이 아니겠냐?'라며 농담을 하기도 했다. 혹은 약간 더 진지한 주장으로 '최소한의 전직 대통령 대접은 해주겠다는 원칙주의적 행동을 통해 오히려 이명박 수사의 정당성을 확보하려 든 것.'이라는 해석도 있다.
그리고 2018년 3월 6일, 오후 3시에 검찰이명박 전 대통령을 110억 원대 뇌물 수수, 조세 포탈, 횡령, 직권남용 혐의를 적용하여 3월 14일 오전 9시 30분에 피의자 신분으로 서울중앙지검으로 소환하겠다고 밝히면서, 결국 이명박검찰 포토라인에 서게 되었다. # 자신이 노무현 전 대통령검찰 포토라인에 세운 지 정확히 8년 10개월 14일 만에 자기도 같은 운명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검찰에서 약 23시간에 걸친 조사를 받고 닷새 후인 2018년 3월 19일, 검찰은 결국 이명박에 대한 구속영장대한민국 법원에 청구했다. ## 그리고 사흘 후인 3월 22일, 담당을 맡은 서울중앙지법 박범석 부장판사가 "증거인멸의 우려가 상당하다"고 인정하여 구속영장을 발부하면서 이명박은 결국 구속, 수감되어 대한민국의 역대 대통령들 중 구치소에 수감된 네 번째 전직 대통령이라는 불명예를 안게 되었다. # 3월 23일 자정에 서울동부구치소에 도착했으니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세상을 떠난 지 정확히 8년 10개월 만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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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서울중앙지검 특수2부(부장검사 송경호)·첨단범죄수사1부(부장검사 신봉수)는 2018년 4월 9일 이명박 전 대통령에 대해 구속기소하며 이명박 전 대통령은 전두환 노태우 박근혜 전 대통령에 이어 4번째로 구속기소당한 전직 대통령이 되었다.

이후 2018년 5월 23일에 서울중앙지방법원 417호 법정에서 첫 공판을 받게 되어 자신의 후임인 박근혜 전 대통령이 첫 재판을 받은 2017년 5월 23일 이후 정확히 1년 만에 본인도 똑같은 위치에 서게 되었고 더 이전으로 가 보면 2009년 5월 23일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9년 만에 상황이 완전히 역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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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0월 5일 이명박 전 대통령은 1심에서 징역 15년 형·벌금 130억 원·추징금 82억 7,070만 3,643원을 선고받았고, 2020년 2월 19일 2심에서는 뇌물 인정 액수가 늘어 형량이 올라가 징역 17년 형·벌금 130억 원·추징금 57억 8천여만원을 선고받았다. 2020년 10월 29일에는 대법원은 이명박과 검찰 양측의 상고를 모두 기각해 원심의 판결을 확정하였다. 그 순간 전직 대통령의 예우가 전면 박탈되었다. 나흘 뒤인 11월 2일에는 서울동부구치소로 수감되면서 17년 형기를 시작하게 되었다. 출소 예정일은 2036년 11월 13일로 만기출소한다면 96세에 출소하게 된다.

시간이 지나 2021년 말, 박근혜는 특별사면으로 석방되었음에도 이명박은 끝내 사면되지 않았다. 박근혜는 사면 이후 사면 결정이 잘한 것이라는 여론이 60%에 육박했지만 이명박은 사면 반대 여론이 60%에 달하는 상황이다.[31]

2022년 20대 대통령 선거에서 윤석열 후보가 당선이 되면서 사면문제가 또 다시 쟁점에 오르기 시작했다. 당시 28일 문재인 대통령과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과 만찬 회동에서 이명박 전 대통령에 특별사면문제에 대해 일절 거론되지 않았지만 회동 조율 초기인 지난 15일에는 당시 김은혜 대변인은 "윤 당선인은 이명박 전 대통령을 사면 요청하겠다는 생각을 오래전부터 견지해왔다"면서 "따라서 이번 만남을 계기로 국민통합과 화합의 계기가 마련되길 기대한다"며 사면 건의 방침을 공식화하기도 했다. 하지만 청와대 측에서는 "마치 사면이 의제로 정해져 있는 듯한 상황이 부담이 된다"는 언급이 공공연하게 나왔다고 했다. # 결국 문재인 정부때 이명박은 특별사면을 받지는 못했지만 나중에 윤석열 정부 들어선 후 2022년 말 윤석열 정부 특별사면을 통해 사면이 되었다.
[1] 이후에 한나라당에 합류한 박근혜도 영입하게 된다.[2] 예외로 강삼재는 이회창을 지지했고, 서청원은 박근혜를 지지했으며, 김무성도 당시에는 친박으로 분류됐다.[3] 당시 박근혜를 지지하던 친박계가 군부보수계를 대표하는 분위기가 있었기 때문에 어찌보면 당연한 행보였다.[4] 사실 이상득, 김형오, 박희태민정당에서 정치생활을 시작한 인물들이지만, 14대 대선의 민자당 경선에서 김영삼을 지지하면서 김영삼의 민주계로 사실상 편입되었다.[5] 본문에서 언급되지 않은 나머지 둘은 이명박 본인과 이명박 정부에서 방송통신위원장을 지낸 최시중이다.[6] 특히 울산, 포항, 경주가 매우 긴밀한 관계로 엮여있다. 예를 들면 현대제철 포항 제철소의 가장 중요한 고객은 울산의 현대자동차 공장이며, 현대자동차의 자동차 시트 공급처는 경주에 본사가 있는 다스(!)라는 회사였다.[7] 반대로 경상남도 창녕, 합천 지역의 경우 행정상으로는 경남이지만 대구와 워낙 가깝기 때문에 실 생활권상 TK에 속한다고 볼 수도 있다. 참고로 이런 모호성 때문에 이 지역에서 태어난 인물들은 각자 선택한 고등학교의 위치에 따라 TK 또는 PK로 서로 다르게 분류되는데, 예를 들면 대구에 있는 영남고를 다닌 홍준표대구공고를 다닌 전두환은 TK로, 부산에 있는 경남고를 다닌 강만수부산고를 다닌 안경률은 PK로 분류된다.[8] 대표적으로 정운찬 前 국무총리나 여의도순복음교회 조용기 목사가 있다.[9] 다만 이명박이 강만수를 기용한 것은 당시에도 그리고 지금에 와서도 많은 비난을 받고 있다. 특히 진보 좌파 진영에서는 이명박이 문민정부 시절에 외환위기를 일으킨 주범으로 꼽히는 강만수를 기용해 대기업과 부동산 부자에 유리한 경제 정책을 폈다고 주장했다.[10] 다만 이명박의 스탠스는 좀 애매하긴 하다. 친박 세력도 품어야 되기 때문에 김영삼이 싫어한 박정희도 은근히 띄워주는(17대 대선 경선때 이기고 난 이후에도 어릴 땐 나도 운동권에서 박정희 정부 반대 시위도 하고 했지만 지금은..이라면서 말을 흐리기도 했다) 행보를 보였다. 물론 2023년 박정희 추도식에도 안간다고 에둘러 표현한거 보면 이명박 속내는 본인만 알 것이다.[11] 노무현 전 대통령에 핵심 공약 중 하나였다.[12] 이 때문에 당시 백원우는 진보진영에서도 비판을 많이 받았다. 문재인이 이명박에게 고개를 조아리고 사과해야 하는 상황을 만들었다는 이유.[13] 일단 문재인 본인도 박연차 게이트와 관련해서 권양숙 여사와 노건평, 박연차에 대해서는 범법 행위를 인정했다.[14] 특히 이 부분은 노무현 전 대통령이 죽기 한 달 전인 4월의 상황이다. 물론 박희태 대표가 노무현 전 대통령을 편들었다기보다는 검찰이 하루가 멀다하고 노무현 수사 과정을 속속들이 언론에 뿌리고 이에 노무현 측에서 반박하는 것까지 공개되면서 정치권이 혼돈에 빠진 데 대한 불만을 제기한 것이었다. 게다가 일부 여권 인사들까지 수사 대상에 오르면서 한나라당 입장에서도 마냥 노무현에 대한 수사를 반길 처지가 아니었던 것.[15] 당시에는 수원시 소속 국회의원이었다.[16] 참고로 이 선거가 천안함 피격 사건 발생 2달 반 만에 이루어진 선거여서 진보 진영이 상당히 불리했던 선거이기도 했다.[17] 정세균국회의장도 이 후보 경선에 참여했으나, 4위로 탈락했다.[18] 다만 이명박은 현대건설을 도산 직전까지 위기에 몰아넣고는 도주했기 때문에 그 자리까지 오르게 된 과정을 평가한다면 모를까 경영인으로서의 자질을 보여줬던 것은 절대 아니다.[19] 노무현 전 대통령의 자살, 용산 참사 등등.[20] 실제로 그 당시 민주당계 정당의 주요 인사였던 정세균, 문재인, 박원순 등이 급속도로 성장하고 친노계가 노무현에 대한 표적 수사 논란으로 부활하게 되면서 민주당의 지지율이 올라간 상태였다. 그 상황에서 친이계가 당권을 계속 잡고 친박계와 분당이 된 상태에서 야권 단일 후보로 문재인이 나와서 보수계가 친이계, 박근혜로 갈리고 민주, 진보 정당 단일화 후보로 문재인이나 정세균이 나왔다면 한나라당에서 민주당계 정당으로 정권교체가 이뤄졌을 확률이 대단히 높다. 거기다가 당시에는 진보 정당 세력들도 이명박 정부 심판으로 대의를 모으면서 2010년 후로는 진보신당, 민주노동당의 세력과 민주당이 후보를 단일화해서 한나라당과 승부를 보는 경향이 강해졌으니, 친이:친박:민주/진보 단일화 후보 간의 대결이었다면 정권교체가 확실했던 상황이었던 것은 굳이 설명이 필요없을 것이다.[21] 박근혜최태민과의 관계와 박근혜의 수준을 어느 정도 파악했을 것이고,(1970년대 기업인이었던 당시 최태민에게 돈을 갖다주는 등으로 다 알고 있었다) 최태민의 아들에게 상당한 분량의 자료도 넘겨 받았다. 이 치부를 풀어서 박근혜를 공격하려고 했으나 경선이 이미 이명박 쪽으로 기울어서 굳이 그러지는 않았으며, 박근혜가 당의 콘크리트 지지율의 상당수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한나라당 국회의원 경선 당시 친박을 의도적으로 대거 경선학살하면서, 이후에도 구실을 대고 박근혜를 트집잡아 치명적인 타격을 입혀 정계에서 강제로 끌어내는 쪽으로도 생각을 기울인 바 있으나, 여러 가지 상황에 부딫혀 결국 실현에 옮기지는 못했다. 다만 이 최태민 공격을 아주 안 한 건 아니라서 제17대 대통령 선거에서 한나라당 경선 당시 실제로 이명박은 최태민 일가로 인한 국정농단을 언급했고 박근혜도 최태민에 대해서 어느 정도 실토하는 등 당시에는 국민들만 눈뜬장님이었을 뿐 나올 만큼 나왔었다. 당시 박근혜도 이명박에게 다스, BBK, 도곡동 땅 문제를 공격하는 등 주요 치부는 사실 이 때 다 나왔다.[22] 그래서 친이계의 좌장이었던 이재오는 국방 & 외교는 국민이 뽑는 대통령이, 그 이외의 국무는 국회에서 뽑는 총리가 전담하는 분권형 대통령제로 개헌해야 한다고 이명박 정부 중기부터 줄기차게 외쳐왔다. 이재오가 이렇게 개헌을 외치는 것에는 문재인이 정권을 잡든 박근혜가 정권을 잡든 둘 다 이명박과 사이가 무척 나빴기 때문에 정적들에게 '제왕적 권한'을 모두 몰아주면 안 된다는 생각 때문이 아니냐는 이야기가 돌았다. 그리고 박근혜 시절에는 잠잠하다가 2017년 제19대 대통령 선거 시즌에는 문재인의 정적, 국민의당 및 제3지대의 대권 주자(친이/비박계)들을 중심으로 이런 개헌 이야기가 심심찮게 흘러나왔다.[23] 문재인 정부는 대선 전에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로 정부의 각종 치부들이 들어나 이를 청산한다는 적폐청산을 주요 공약으로 삼았다.[24] 다만, 이명박 정부에 대한 본격적인 수사가 시작되면서 중도보수, 중도층 및 친 친재벌 성향의 유권자들의 반발이 있었는지 문재인 정부의 지지율이 약간 하락하면서 동시에 반감도가 올라갔다. 하지만 수사가 진행될수록 드러나는 이명박 정부 시절에 벌어진 악랄한 정치 공작이 드러나면서 친문 지지자들을 포함해 많은 시민들이 이명박에 반감을 가지기 시작해 문재인 정부의 적폐청산에 동참했다. 정치권에서도 기존에 친노계가 포함돼 있던(이때는 노회찬이 아직 사망하기 전이다.) 정의당까지 문재인 정부의 적폐청산 모토를 지원하면서 정치계와 시민사회를 통틀어 이명박 수사에 호응을 보냈다.[25] 전날 청와대 홈페이지에는 이명박의 출국을 금지해 달라는 청원이 상당한 호응을 얻기도 했다.[26] 하지만 정두언 전 의원의 주장에 따르면 실제로 이명박이 걱정했던 것은 구속 당한 측근들이 아니라 구속되지 않은 상태에서 검찰로 불려간 김희중 전 청와대 제1부속실장이라고 한다. 김희중 전 실장이야말로 진정한 MB의 집사로서 오랜 세월 MB를 모셨지만 사실상 토사구팽을 당했던 터라 검찰이 불게 없냐고 접근하면 술술 불게 너무나도 많았던 인물이기 때문이라고.[27] 누구처럼 질문은 받지 않았는데, 기자회견 내용은 검찰 수사를 사법 문제가 아니라 정치 문제로 이끌기 위함이라는 해석이 많다.[28] 외부자들의 진보 패널인 정봉주와 진중권은 이명박 전 대통령 측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 등의 기록 자료를 모두 봤고, 표적수사에 가까운 노무현 수사를 했는데 터뜨릴 거였으면 왜 지금까지 안 터트렸는지 의문이라는 반응을 보였고, 정봉주는 한 발 더 나가서 아예 '뻥카'일 거라고 예상하기도 했다.[29] '외부자들'에서는 친이계 출신이자 보수 패널 역할을 맡은 전여옥과 안형환 모두 MB가 포토라인에 설 확률이 높을 것 같다고 예측하기도 했다. 다만, 이때는 친노계가 이명박에 대한 원한을 가지고 있다는 전제를 가지고 예측한 거긴 했지만.[30] 영포빌딩은 이명박 전 대통령이 사실상 소유하고 있는 건물로, 지하 2층은 건물 약도에도 드러나 있지 않은 비밀 공간이라고 한다. 이곳을 덮친 검찰은 BBK, 다스 관련 문건 뿐만 아니라 청와대 문건으로 보이는 서류도 발견했다. 다른 언론들도 이 지하창고 압수수색을 비중있게 다뤘다. 이런 중요한 비밀 공간을 검찰이 갑자기 덮친 건 아마도 검찰에 의해 구속된 이명박 전 대통령의 측근들 중 누군가가 이곳의 존재에 대해 불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봐야하지 않을까.[31] 이러한 차이는 더불어민주당 지지층의 이명박에 대한 증오도 있겠지만 제일 큰 것은 박근혜와 달리 보수 진영에서 콘크리트 지지층이 없다는 점이다. 심지어 지지층들도 이명박을 좋아할지언정 그의 부패는 인정할 정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