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18 03:48:51

김형욱

날으는 돈까스에서 넘어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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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제4대 중앙정보부장
김형욱
金炯旭 | Kim Hyung-uk
파일:1000051197.jpg
<colbgcolor=#06377a><colcolor=#FFFFFF> 출생 1925년 1월 16일[1]
황해도 신천군[2]
실종 1979년 10월 7일 ~ 8일 (당시 54세)
프랑스 일드프랑스추정
사망 선고
(법적)
1984년 10월 8일[3] (향년 59세)
프랑스 일드프랑스추정
본관 김해 김씨
봉산(鳳山) · 산남(山南)
재임기간 제4대 중앙정보부장
1963년 7월 12일 ~ 1969년 10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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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6377a><colcolor=#ffffff> 배우자 신영순(1933년생)
자녀 장남 김정한(1953 ~ 2001)
차남 김정우
딸 김신혜
학력 육군보병학교 (수료)
육군공병학교 (수료)
육군포병학교 (졸업)
육군대학 (졸업)
경희대학교 정경대학 (정치외교학 / 학사)
경희대학교 대학원 (정치학[4] / 석사[5])
고려대학교 대학원 (법학 / 명예박사)
종교 불교
의원 선수 1
의원 대수 8
약력 군사혁명위원회 내무분과 위원장
군사혁명위원회 운영기획 위원장
제4대 중앙정보부장
제6대 대한사격연맹 회장
제8대 국회의원 (전국구 / 민주공화당)
군사 경력
임관 육군사관학교 (8기)
복무 대한민국 육군
1949년 ~ 1963년 10월 13일
최종 계급 준장 (대한민국 육군)
최종 보직 제6군관구사령부 정보참모
참전 6.25 전쟁 }}}}}}}}}

1. 개요2. 생애
2.1. 5.16 이전2.2. 5.16 이후2.3. 중앙정보부장 재임 시절2.4. 중앙정보부장 경질2.5. 제8대 국회의원2.6. 해외 도피2.7. 프레이저 청문회 참석2.8. 실종
3. 여담4. 대중매체에서5. 선거 이력6. 소속 정당7.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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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파일:external/img.hoop8.com/pmLGrsCG.jpg
코리아게이트 미 하원 청문회에서의 김형욱

대한민국군인, 정치인.

대한민국 정보기관 역사에서 가장 오랫동안[6] 재임한 기관장으로 뚝심의/날으는 돈까스, 남산 멧돼지[7], 공포의 삼겹살 등의 우스꽝스러우면서도 그 무서움을 암시하는 독특한 별명으로도 유명하다.[8]

박정희장기 집권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정치 공작을 벌였지만 후에 버림받고, 미국으로 망명하는 신세가 된다. 이후 미국에서 박정희의 어두운 면을 까발리는 회고록을 집필하고 미 의회 청문회에 나가서 박정희에게 불리한 증언을 하는 등 반() 정부 활동에 앞장서기도 했다. 이후 1979년 프랑스 파리에 갔다가 갑자기 실종되었는데, 이것이 이른바 김형욱 실종 사건이다.

이후 생사불명으로 처리되었다가 1984년 법원의 실종 선고를 받아 법적으로 사망 처리되었다. 만에 하나 생존 중이라면 [age(1925-01-16)]세로 생존 가능성이 1% 미만이다.

2. 생애

2.1. 5.16 이전

1925년 황해도 신천군에서 매우 가난한 집안의 아들로 태어났다. 국민학교 졸업이었으나 이후 자신이 신천농고를 졸업했다고 학력을 위조했는데 이후 동아일보 강성재 기자가 김형욱의 동향 사람들을 조사한 끝에 위조임을 밝혀냈다. 8.15 광복 이후 국군에 입대하여 육군 상사까지 진급했으며, 혼란기인 1948년 12월, 육군사관학교 8기로 입교하여 1949년에 최하위로 졸업하였다. 사실 이 기수는 6.25 전쟁 당시 초급 장교였기 때문에[9] 대다수가 전사했지만 김형욱은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았다. 뚜렷한 전공보다는 1951년 이후 동부전선(= 강원도)에서 활약했다는 데 주목할 정도였다. 이러한 경험 때문에 회고록에서 "나는 박정희보다 애국자이다."를 강조했다.[10] 전후 1954년에 대대장으로 진급하여 5년간 대대장으로 복무했는데 생계가 매우 어려워 자녀들의 학비를 벌기 위해 사병들을 동원하여 각종 장사를 하다가 걸려서 1958년 12월, 1군사령관 송요찬이 그를 구속하려 했으나 육사 8기 동창인 육군 범죄수사대장 방자명의 도움으로 무마되었다. 김형욱은 군 상층부는 부정부패에 찌들어 있으면서 자기가 자식들 공부시키려고 숯 좀 구워서 판 것으로 못살게 군다고 이를 갈았다고 전해진다. 이후 1959년 진해의 육군대학에 들어갔는데 군단전술 강의에 출석하더니 당시 교관이었던 강창성에게 "나는 대대장을 5년을 했는데 당신은 몇 년을 했냐."면서 그따위 전술을 이해할 수 없다고 바락바락 덤벼들었다고 한다. 이에 어이가 없어진 강창성이 "전술은 경험이 아닌 학술이요 전사다."라고 그의 태클을 일축하였다. 육군대학 졸업 후 1960년 육군본부 작전참모부 전투개발과 부과장에 배치되었다.

2.2. 5.16 이후

1961년 중령으로 5.16 군사정변에 참가하였으며 36세의 나이로 국가재건최고회의의 최고위원이 된다.[11] 당시에도 김형욱은 단순 무식한 이미지로 정평이 나있었다고 하는데, 5.16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육군사관학교 8기와 9기가 서로 명단을 교환할 때 9기 쪽에서 김형욱의 이름이 올라와 있는 것을 보고 "저런 쓸모없는 돌대가리를 왜 포함시켰느냐?"고 불만을 토로했다는 유명한 일화도 있다.

2.3. 중앙정보부장 재임 시절

1963년 7월 김재춘의 뒤를 이어 제4대 중앙정보부장에 취임했다. 애초 김재춘이 중앙정보부장 자리를 내놓자 박정희는 장경순을 후임으로 고려했지만 김형욱의 육군사관학교 8기 동기이자 초대 중앙정보부장인 김종필이 김형욱을 추천하여 생각을 바꿨다고 한다.

그러나 김형욱은 중앙정보부장 자리에 오르자 박정희의 마음에 들기 위해 김종필을 온갖 음해와 모략으로 괴롭혔다. 은혜를 원수로 갚은 셈이었다. 거기다 김형욱의 중앙정보부장 취임을 못마땅하게 생각한 전임 부장 김재춘에게도 정치적인 박해를 가했다.[12]

1963년 대한민국 육군 준장으로 진급과 동시에 예편하였다. 사실 김형욱 이전의 중앙정보부장이었던 김종필, 김용순, 김재춘은 재임 기간이 짧았기 때문에 조직에 그다지 영향력을 끼치지 못했다.

사실상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독재정권 시절의 악명높은 정보기관의 모습을 만든 것은 바로 김형욱이다. 대기업과의 정경유착을 통해서 어마어마한 액수의 불법적인 통치자금을 조달[13]했으며, 이런 자금과 공권력을 동원해서 부정선거를 저질렀고, 조폭을 동원해서 야당을 분열시키는 정치 공작을 진행했으며, 국내 • 외를 막론하고 불법적인 도청, 감시, 납치, 고문민주화 세력에 대한 야만적인 탄압을 자행하였다. 김종필이 중앙정보부를 창설했을 때부터 이런 일들이 있었지만, 이 모든 행위들을 체계화시켜서 정보부를 명실상부한 최고의 권력기관으로 만든 것은 김형욱이다.

당시 김형욱이 민족주의비교연구회 사건의 조사 과정에서 관련자 김중태와 나눈 이야기가 참으로 가관이었다.
김형욱: “자네가 그 악명 높은 김중태야? 경상도 사람이 왜 경상도 대통령반대하는 게냐?"
김중태: "김 부장, 당신도 이북 출신이면 얌전히 김일성이나 지지할 것이지, 뭐하러 남쪽으로 내려왔소?"

이 말에 김형욱은 이내 안색이 붉어지더니 물건을 집어던지고 김중태를 흠씬 두들겨 패고는 휙 나가버렸다. 옆에 있던 중정 요원들이 뜯어말릴 정도로 분노했다고 한다.[14]

훗날 박정희한테 토사구팽 당했다는 것 때문에 동정표를 사기도 하지만 김형욱은 결코 선량한 인물은 아니다. 그가 재임하던 시절에 인민혁명당 사건, 민족주의비교연구회 사건, 유럽 간첩단 조작 사건, 국제적으로 큰 물의를 빚은 동백림 사건과 박정희가 3선 개헌 반대파들을 숙청할 목적으로 일으킨 국민복지회[15] 사건도 그의 작품이다.# 동백림 사건 당시에는 박종규의 비서 김옥희까지 박종규에게 알리지 않고 연행하여 노발대발한 박종규가 김형욱에게 쳐들어가서 항의했는데, 김형욱 회고록에 따르면 박종규가 김형욱의 머리에 권총을 겨누며 위협했다고 하지만, 김충식 기자의 취재에 따르면 삿대질 정도였다고 한다. 두 사람의 악연은 이후에도 계속되어 1968년 8대 총선 직전, 김형욱은 박정희에게 경호실과 비서실 간부들이 총선 입후보에 정신이 팔려 태업한다는 허위보고를 올렸고, 격노한 박종규는 박정희와 김형욱 3자대면에서 김형욱에게 "각하에게 허위 보고를 올렸으니 사표를 쓰라. 당신이 억울하게 생각하면 나도 쓰겠다."라고 정면으로 덤벼들었고, 당황한 박정희가 자리를 피하자 김형욱을 구타했다고 한다.

1969년에는 3선 개헌에 반대하는 여당 국회의원 김용태 등을 강압적으로 끌어들여서 3선 개헌에도 일조했으며 이때 박정희의 정적김영삼암살하기 위한 일명 김영삼 질산 테러 사건도 김형욱이 지시한 일이라는 견해가 유력하고 3선 개헌에 찬성하되 선행 조건으로 자신과 이후락의 경질을 요구한 이만섭테러하려 들었다. 중앙정보부가 무서운 조직으로 찍힐 때는 이 사람이 한몫 했는데 오죽했으면 나중에 김계원이 중앙정보부장을 맡을 때 박정희가 "김형욱이처럼 팰 필요는 없다."고 말할 정도였다.

한편 3선 개헌에 반대하는 국회의원들에 대한 회유 공작을 벌일 때 개헌에 강경하게 반대하던 여당 소속 양순직, 예춘호 등의 인물들은 설득해도 안 될 것 같자 김형욱은 "개인적으로 반대하는 것은 암말 않을 테니 사람 모아서 반대 운동하는 것만 삼가주시오"라며 고분고분히 넘긴 반면[16] 어정쩡한 태도를 보이던 국회의원들은 금전이나 여자 문제 등 치부를 무기로 개헌 반대하면 사회적으로 묻어버리겠다며 강하게 협박하여 굴복시켰다고 하는데 이때 오른손을 위아래로 뒤집으면서 손바닥이 바닥을 향하면 찬성, 위를 향하면 반대인데 어느 쪽을 택할 거냐며 위압적으로 물어봤다는 얘기는 유명하다.

또한 당시 전두환 소령을 제거하기 위해 박정희에게 전두환 단점을 고발하기도 했다. 대표적으로 삼성 이병철의 장남 이맹희에게 전두환이 돈을 받았다고 박정희에게 고자질했다.
'전두환 소령이 삼성의 이맹희 부사장으로부터 몇백 만원의 뇌물을 받았습니다' 라고 김형욱 부장은 박대통령에게 그 메모지를 내민 것이다. 물론 김형욱 부장이 나(이맹희)와 내 주변 사람들을 고생시키려고 저지른 짓이었다. 다행히도 그 문제는 전소령이 대답해서 무사넘어갔다. 권력의 핵심부는 전반적으로 음모와 서로 고자질하는 일로 지새웠다.

2.4. 중앙정보부장 경질

그렇게 충성을 바쳤지만, 1969년 3선 개헌이 성공하자 김형욱은 박정희로부터 버림을 받게 되었다. 그 시기는 김종필이후락[17]도 박정희로부터 토사구팽을 당한 신세는 마찬가지였다. 알다시피 김형욱은 이후락, 박종규처럼 중정부장 재직 시 부정부패로 엄청난 재산을 모았는데, 이는 나중에 해외 망명 생활에 도움이 되었다. 3선 개헌 성공 이후 박정희로부터 버림받은 대목이나 이전에 막대한 재산을 축적했다는 대목은 영화 《남산의 부장들》에서도 언급된다.

2.5. 제8대 국회의원

이후 1971년 쥐약 격인 민주공화당 전국구 국회의원을 거치기도 했으나 1972년 10월 유신 선포로 국회가 해산되는 동시에 국회의원직마저 잃어버렸으며 중정부장 경질 후 박정희의 정적인 김대중과 비밀리에 접촉해 협력한 전적 때문에 유신정우회 소속 국회의원 명단에도 들지 못하고 공천도 받지 못했다. 그는 이미 권력에서 밀린지 오래였고 중앙정보부장일 때 전횡이 워낙 심했던지라 많은 사람들에게 수많은 분노와 미움을 샀으며 민주공화당의 실세인 김성곤, 길재호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을 적으로 뒀다. 그야말로 공공의 적. 생전에 김형욱은 보복을 많이 두려워했는데 당시 일기장에 "대통령이 난데없이 날더러 쉬라고 했다. 지난 6년간 악역을 다 도맡아 했는데 미칠 것만 같다."고 적었다. 실제로 경질 직후부터 김형욱에 대한 온갖 협박과 저주의 전화가 들끓기 시작한 걸 보면 이런 걱정이 괜한 걱정이 아니었다.

2.6. 해외 도피

1973년 4월 먼저 대만으로 출국했고 대만에서 귀국하지 않고 바로 미국으로 갔다. 김형욱의 존재가 부각된 것은 1976년 10월 24일 워싱턴 포스트가 대한민국 정부가 로비스트 박동선을 통해 미국 관리들에게 수백만 달러를 뇌물로 제공했다고 폭로하면서부터였다. 이것이 이른바 코리아게이트 사건인데, 사건이 시작된 직후인 1976년 11월 말 대외적으로는 주미한국대사관의 참사관이었지만 실질적으로는 중앙정보부의 미국 활동 조직 부책임자였던 김상근이라는 사람이 미국으로 망명하는 일이 벌어졌다. 김상근은 과거 김형욱의 비서였으며 망명 과정에서도 김형욱의 도움을 받았다. 박정희 밑에서 가장 좋은 관운을 자랑했다던 중앙정보부장 신직수는 김상근의 망명으로 1976년 12월 4일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다.

당시 미국 뉴저지에 체류하고 있었는데, 대통령 특사 자격으로 아프리카 · 중남미 11개국 순방을 마치고 미국 캘리포니아 페블비치 골프장에 들렀던 김종필이 1977년 4월 5일 김형욱과 만났다. 당시 김종필은 그에게 브라질 대사 자리를 주겠다고 제안했다. 김형욱이 받아들이면서 일이 잘 풀리나 싶었지만, 워낙 김형욱 주변에서 뻐꾸기를 날리는 사람들이 많아 실패했다고 훗날 술회했다.

신직수의 후임이 바로 김재규였는데, 김재규의 첫 번째 임무는 김형욱을 귀국시키는 일이었으며 1977년 1월 17일자로 김재규는 김형욱에게 정중히 예를 갖춘 편지를 보내 귀국을 종용했다. 박정희 정권의 김형욱 귀국 공작은 1977년 6월 6일과 7일 이틀에 걸쳐 뉴욕 타임스가 김형욱과의 독점 인터뷰 내용을 대서 특필함으로써 물거품으로 돌아갔다. 기자회견에서 김형욱은 박동선을 활용한 공작에 대해 자세히 폭로하고 박정희는 하야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이것은 예고편에 불과했다.

그는 미국의 재미교포 언론인 문명자와 손잡고[18] 1977년 6월 22일 미국 하원프레이저 청문회[19]에 출석하여 유신정권의 비밀스러운 사건들을 거침없이 폭로하였다. 김형욱은 청문회에서 "박정희 씨 개인에게 설사 인간적인 배신자가 되는 것을 감수한다 하더라도 국민과 역사 앞에 배신자가 될 수는 없다고 믿기에 이르렀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다만 문명자 기자의 회고에 의하면 김형욱은 겉으로 유신에 반대해 망명한 민주 인사인냥 행세하면서 뒤로는 박정희 정권과 거래하며 권토중래를 꿈꾸고 있었다고 한다. 실제로 김형욱은 유엔 대표부 부대사로 와 있는 박정희의 사위 한병기와 함께 골프를 쳤고 횡설수설하는 중에서도 결코 박정희를 직접 겨냥해 비판하지 않았다고 한다.

김형욱의 증언은 국내외적으로 대서특필되었으나 박정희 정권을 무너뜨리기에는 무언가 부족했다. 그래서 김형욱은 증언을 마치고 나서인 1977년 6월 말부터 실종되기 직전인 1979년 9월 말까지 회고록의 작성에 몰두했는데 이것이 바로 훗날 알려진 이른바《김형욱 회고록: 혁명과 우상》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회고록에 더 주목했고 당시 청문회에서 프레이저 하원의원은 김형욱 자신이 아는 사실을 충분히 진술하지 않았다고 생각하여 그를 압박하기 위한 수단으로 김형욱이 미국으로 빼돌린 2천만 미국 달러 이상의 막대한 재산 문제를 치고 들어갔다.

2.7. 프레이저 청문회 참석

1977년 7월 11일 프레이저 청문회에서 2차 증언을 마친 김형욱은 7월 15일 "국민과 역사 앞에 참회합니다."라는 제목의 특별 성명서를 발표했다. 그는 자신이 "박정희 씨를 인간적으로 비하시키는 개인적인 부덕을 강력 자제해 왔다."면서 오랜 기간 정보 기관의 책임자였던 자신은 "박정희 씨에 대하여 여러분이 상상하시는 것 이상으로 많은 것을 알고 있다."고 강조했다. 김형욱은 "박정희씨가 유치한 방법으로 나를 계속 중상모략한다면 이를 천하에 폭로할 작정"이라고 으름장을 놓기도 했다.

그 즈음 김형욱은 당시 유학생이었던 김경재와 함께 김형욱 회고록을 펴내는 것에 몰두하고 있었으며 김형욱 회고록의 존재를 알게 된 박정희는 회고록의 원고를 넘기는 조건으로 김형욱과 흥정을 벌이기도 했다. 박정희는 중앙정보부 해외 담당 차장으로 있던 윤일균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미국에 가서 김형욱을 설득하라고 지시하는데 윤일균이 "준비되는 대로 가겠다."고 하자 박정희는 당장 가라며 서둘렀다고 한다.

미국으로 달려간 윤일균은 권총을 탁자에 꺼내놓는 김형욱을 상대로 사흘 밤낮을 설득하여 복사지 2천 장 분량의 방대한 회고록 원고를 건네받는데 성공했으며 대가로 50만 달러를 제공하고 김형욱의 여권 문제를 해결해 주기로 약속한다.[20]

그러나 이때 김형욱은 이중 플레이를 하고 있었는데, 원고의 일부가 김형욱에 의해 일본으로 빼돌려졌고 이는 일본의 이라는 작은 출판사에서《축약 평론판》으로 1980년대에 출판되기도 했으며[21] 한국에서는 당연히 금서였다. 물론 지금은 정식으로 출판됐으니 봐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

2.8. 실종

박정희와 유신정권으로부터 각종 회유와 귀국 종용을 받은 김형욱은 중앙정보부 해외담당차장 윤일균으로부터 돈을 받고 회고록 원고를 주기로 하였고, 이후 프랑스 파리로 가라는 말을 들었다. 그리고 1979년 10월 1일 김형욱은 파리에 도착했는데, 10월 7일 그곳에서 영원히 행방불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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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여담

  • "김형욱의 실종에서 겨우 1달도 안 돼서 일어난 초대형 사건으로 인해 김형욱에 대한 관심이 하필 그 타임에 묻혀버려서 김형욱의 행적을 밝힐 수 없게 되었다."는 의견도 있다.
  • 그에게는 아들인 김정한이 있었는데, 그는 10대 초반에 아버지인 김형욱을 따라 사냥을 나갔다가 6.25 전쟁 당시에 숲속에 뿌려졌던 발목지뢰를 밟는 바람에 한쪽 다리에 큰 부상을 입고는 한동안 치료를 위해 미국에 머물러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유증으로 한쪽 다리를 잘 쓰지 못하게 되었고, 김형욱은 이 일을 평생토록 한스러워하며 후회했다고 한다. 김정한은 2001년 지병인 간경화로 향년 4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으며, 아버지의 가묘가 있는 공동묘지에 함께 묻혔다.
  • 김형욱의 장남 김정한의 사망 이후, 김형욱의 아내인 신영순[28]과 김형욱의 차남 김정우가 손잡고 김정한의 아내 김경옥[29]에게 김형욱이 살던 미국 집과 김정한이 살던 미국 집의 상속권을 목적으로 소송을 걸었었다. 이 때문에 김경옥은 2005년 국정원의 김형욱 실종 사건 결론 관련 인터뷰를 할 적에도 인터뷰에 협조하면서도 "왜 시아버지 김형욱의 실종에만 다들 관심이 있고 왜 우리들 재산 싸움에는 관심이 없냐?"고 울분을 토했다.
  • 김형욱과 함께 회고록을 쓴 김경재[30]DJ 밑에서 정치를 하다가 국회의원까지 되었으나 2012년 대선에서 박근혜 지지 선언을 하였다.
  • 개고기를 워낙에 좋아해서 "바께스(양동이)"에 가득 담아 먹는 것으로 유명했다.
  • 김형욱이 중앙정보부장 직에서 떨려나고 국회의원으로 재직하던 어느 날 국무총리 김종필신진자동차 회장 김창원과 같이 골프를 치러 갔는데, 김창원은 이전 김형욱이 중정부장으로 천하를 호령하던 시절 내기 골프를 칠 때 마다 일부러 지면서 돈을 내주곤 했다. 사실상 내기를 빙자하여 뇌물을 건넨 셈이었는데, 이를 두고 김종필은 이날 김창원에게 "여보 김 회장, 이제 이빨빠진 호랑이한테 굳이 져줄 필요가 뭐 있겠소?" 라며 농담을 건넸고 김창원은 김형욱의 눈치를 보면서 조심스럽게 "저도 알고 있습죠" 라고 답했다. 그러자 김형욱은 발끈 하면서 김창원을 향해 볼멘소리로 "이봐, 이빨은 빠졌어도 손톱 발톱 다 살아있어! 괄세하지 말어" 라며 쏘아붙였다고 한다. 이후 김형욱은 대만을 거쳐 미국으로 망명하여 남은 손톱 발톱으로 박정희 유신 정권의 약점을 할퀴다가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지고 말았다(...).
  • 당시 대한민국의 식량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중앙정보부 요원들을 투입하여 이집트 품종을 훔쳐서 반입했다. 당시 김형욱은 이를 두고 자신을 빗대어서 제2의 문익점이라고 거드름을 피웠다고 한다. 당시 볍씨는 박정희 대통령의 희(熙)에서 차용한 희농(熙農)1호라는 이름이 붙여졌고 정부의 적극적인 홍보와 보급에 힘입어 전국의 농가에 널리 보급되었다. 하지만 희농1호는 한국의 기후와 토양에 맞지 않아 흉작이 들었고, 반입한지 1년도 안 되어 재배를 중단하면서 완벽한 실패작으로 끝났다.
  • 2021년 10월 13일 김대중도서관에서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실종 2년 전에 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KCDU) 측에 서한을 보내 KCDU의 4차 총회 개회를 축하하면서 자신이 KCDU와 의견을 같이하고 있음을 밝혔다고 한다. #

4. 대중매체에서

  • 북한 영화에도 나오는데 <민족과 운명> 3편 홍영자 편에서 박정희의 애첩이자 중앙정보부의 1급 요원 홍영자의 유일한 사랑으로 나온다. 홧김에 미국 망명을 했으나 미국에 망명 중인 차홍기의 설득으로 반박정희 운동에 뛰어든다는 것. 홍영자의 활약으로 서울로 이송해서 박정희의 총에 맞아 죽는다. 이 충격으로 회의를 느낀 홍영자는 북한으로 망명한다는 스토리.
  • 1994년 개봉한 영화 <증발>[31]에서는 배우 김희라[32]가 연기했다. 조지 타케이가 맡은 박정희[33]색마 그 자체이고 일본에 몰래 요원을 보내서 야당 인사를 바다에 처넣는 일을 서슴치 않고 있다. 한국어를 못하는 조지 타케이의 목소리는 이강식이 맡았다. 이 영화에서 조지 타케이의 쿠데타 부분은 선글라스를 끼고 나오지만 국정과 밤일에 전념하는 부분에서는 맨얼굴이 그대로 나온다. 원래는 M1 카빈 소총으로 개발살이 난다는 설을 극화하려 했으나 과거의 잘못을 뉘우치고 민주화 운동에 힘쓰다가 김영철[34]에게 살해되고 컨테이너에 수장되는 것으로 바뀌었다. 사실 영화가 마이너한지라 해외에서도 나왔는지 모르는 사람이 많다.
  • 1995년 SBS 드라마《코리아게이트》, 1998년 SBS 드라마《삼김시대》에서는 배우 조경환이 연기했다.《코리아게이트》에서는 나름대로 카리스마가 있게 나오는데, 최후는 중앙정보부 요원들이 미행하는 걸로 마무리되며 여운을 남겼다.《삼김시대》에서는 어마어마한 풍채에 강한 이북식 사투리로 존재감을 드러낸다. 조인트 까는 장면, 삼선개헌에 반대하는 의원들에게 총을 겨두는 장면도 등장.[35]
  • 1995년 MBC 드라마《제4공화국》에서는 배우 백일섭이 연기했다. 1회에 파리에서 끌려와 고문을 당하고 차지철에 의해 청와대 사격장에서 개발살나는 장면이 김재규의 꿈으로 나온다. 23회, 24회 <김형욱 실종 사건 상, 하편>에서는 드라마 특성상 딱딱할 수밖에 없는데 감초같이 우스꽝스러운 연기를 하여 웃음을 자아낸다. 23회에서 국회의원 암살 지시를 내릴 때 감칠맛 나는 욕설과 구수한 이북 사투리를 구사한다.
  • 2014년 SBS 드라마《끝없는 사랑》에서는 '미국으로 망명한 전 중앙정보부장'이라는 빅 베어가 등장하는데, 김형욱을 모티브로 한 것으로 보인다. 드라마상의 배경은 박정희 치하가 아닌 전두환 치하이다. 배우는 성우로 더 유명한 민응식.
  • 2020년 개봉한 영화《남산의 부장들》에서는 배우 곽도원이 연기했다. 극중 이름은 박용각인데, 실제 김형욱과도 풍채와 이목구비가 비슷하고 소품으로 사용된 안경과 복장도 고증에 신경을 써서 이질감이 없는 편이다. 극중 김형욱을 오마주한 인물인 박용각 전 중앙정보부장에게 로비스트 데보라 심이 "박부장 이미지도 바꿔야돼! 미 의원들이 박 부장 너무 싫어해!"라며 박용각을 까는 장면이 있다.
  • 2022년 개봉한 영화《킹메이커》에서는 배우 윤경호가 연기했다. 극중 이름은 김 부장. 역사대로 월남한 실향민이며 아무데나 총겨누는 막가파다. 3선 개헌골프 치다가 일방적으로 토사구팽당하며 반항도 못 하고 질질 짜면서 퇴장한다.

5. 선거 이력

<rowcolor=#fff> 연도 선거 종류 선거구 소속 정당 득표수(득표율) 당선여부 비고
1971 제8대 국회의원 선거 전국구

[[민주공화당|
파일:139.png
]]
5,460,581 (48.8%) 당선 (5번) 초선

6. 소속 정당

소속 기간 비고


[[민주공화당|
파일:139.png
]]
1969 - 1973 정계 입문


[[무소속(정치)|
무소속
]]
1973 - 1979 탈당
정계 은퇴

7. 둘러보기

파일:국회휘장(8대).svg 전국구 제8대 국회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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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공화당
29석
김종필 정일권 백두진 ~~~~ 길재호
김형욱 권오병 ~~~~ 황종률 이동원
이종우 유봉영 홍승만 모윤숙
최용수 이해랑 강병규 강성원
문창탁 권일 김성두 신광순
박태원 박철 전정구 장덕진
이도선 김현숙 편정희 김옥자
노진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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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의택 유청 정헌주 이종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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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필선 오세응 유성범 정규헌
이대우 오홍석 박종률 김윤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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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덕진 김임식 양찬우 류승원 김숙현
이병희 이윤학 차지철 오치성 서상린
최영희 박명근 김유탁 김재춘 오학진
김용호 최돈웅 이교선 장승태 김재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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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경순 김상영 김중태 고재필 문형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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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태회 최재구 이학만 최세경 엄기표
정우식 김영병 신동관 민병권 홍병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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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오병 이동원 이종우 유봉영 홍승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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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철 전정구 장덕진 이도선 김현숙
편정희 김옥자 노진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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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음력 1924년 12월 22일[2]황해남도 신천군[3] 서울가정법원에서 실종선고를 한 시점이며#, 마지막으로 생존이 확인된 것은 1979년 10월 7일이다.[4] 정치사 전공[5] 석사 학위 논문: 自由의 槪念에 關한 再檢討 : 社會的 自由의 意義定立을 爲한 식巧 (1967)[6] 자그마치 6년 3개월. 다음이 이명박 정부 ~ 박근혜 정부에 걸쳐 4년 1개월간 국가정보원장을 지낸 원세훈이다.[7] 어떤 상황에서도 쉽게 물러서지 않고 멧돼지처럼 돌진하는 타입이라 남산 멧돼지라는 별명이 붙었다고 한다.[8] 이중에서 돈까스 별명은 조선일보 정치부 기자 남재희가 지어준 것이다. 김형욱 본인도 이런 단순, 무식, 과격이미지의 별명에 대해 알고 있었던 듯하다. 김형욱은 1971년에 펴낸《대지의 가교》라는 책에서 스스로 "이 모든 나에 대한 닉네임이 무엇을 뜻하는지 나는 잘 알고 있다."라고 고백하기도 했다.[9] 김형욱은 회고록에서 "총알받이 소위"라고 표현했다. 육사 8기생들은 가장 많은 인원이 임관한 기수로 한국전에 약 3분 1이 전사하여 한국전쟁에 참전한 육사 1~10기 중 가장 많은 인원이 전사했다.[10] 제8대 중앙정보부장김재규한국 전쟁 당시 전방에서 치열하게 싸웠다. 대표적으로 황간 전투에서 3사단 22연대 2대대장으로 참전한 바 있다. 당시 박정희는 남조선로동당에 연루되어 숙군 과정에서 체포되어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지만 백선엽 등의 도움을 받아 형집행 정지로 풀려난 후 정보국 문관으로 일하게 되었다. 그 때 북한군의 동향 보고를 확인해 "늦어도 6월에 남침한다."는 보고서를 주도적으로 작성하고, 상부에 제출하여 북한의 침략을 예측했고, 6.25 전쟁이 터진 후에는 수원에서 합류하며 좌익 논란을 덮고 후에 장교로 복직했다.[11] 이때 5.16 군사정변에 참가하게 된 것도 육사 8기 동기이자 박정희의 브레인이었던 김종필의 영향이었다고 봐야 한다. 김형욱의 권력 편입 초반 경력은 철저히 김종필과의 인연 덕분이었다.[12] 그래놓고 중정부장 자리에서 잘린 뒤 자신이 괴롭혔던 사람들이 복수할 것이라는 피해망상에 사로잡힌 김형욱의 신세 한탄을 받아준 사람은 바로 김재춘이었다. 김재춘은 사람이 좋아 제6군관구사령부 참모장 시절 부하였던 김형욱이 "참모장님... 참모장님..."하며 하소연하자 "나도 당신한테 그렇게 당하고도 가만히 살고 있다. 그냥 조용히 참고 살라!"며 타일렀다고 한다. 사실 김재춘은 인간 관계가 넓고 원만해 5.16 당시 진압군을 설득하여 반란을 성공시키는 데 일조하기도 했다.[13] 물론 자금을 상납하는 대기업들에게는 그에 상응하는 막대한 특혜가 주어졌고, 이런 특혜를 바탕으로 굴지의 재벌로 성장하였다. 독재정권과 기업인들의 서로 상부상조하는 정경유착이지, 일방적인 강탈이라고는 볼 수 없다.[14] 남쪽으로 내려와 장교로 임관하여 6.25 전쟁참전했음을 자랑스럽게 여기던 김형욱에게 "김일성이나 지지하라."고 한 것은 그한테 상당한 모욕으로 여겨질만 했다.고 옹호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런 식으로 따지면 먼저 사리에 맞지 않는 논리로 억지 트집을 잡은 것은 김형욱이었고, 김중태는 같은 논리로 되받아친 것이니 김형욱이 모욕감을 느꼈다고 해도 자업자득이라고 할 수 있다.[15] 국민복지회 사건이란 1968년 한국국민복지회라는 기관에서 3선 개헌에 반대하는 김종필계 의원들이 김종필을 박정희에 이어 차기 대선 후보로 세우려하자 박정희는 김형욱에게 김종필계 의원들이 대통령에게 도전한다는 이유로 이들을 중앙정보부에서 심문을 받게 한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김종필은 민주공화당 의장직을 사퇴하고 탈당까지 하게 된다.[16] 이후 민주공화당 내 개헌 반대파 국회의원들은 1971년 8대 총선신민당으로 이적하여 출마하려 했지만 중앙정보부장 이후락의 요청으로 신민당 유진산 당수가 이들의 입당을 불허했고 이후락이 직접 "각하께서도 용서하셨고 이미 지나간 일입니다. 공화당 공천 줄 테니 딴데 가지말고 출마하시오"라며 국회의원들을 설득했다. 그러나 이들이 받은 공천은 사실상 실속없는 껍데기 공천으로 선거 기간 내내 중앙당의 지원을 전혀 받지 못하며 모조리 야당 후보에게 밀려 낙선 크리를 먹었다. 3선 개헌에 반대한 대가를 박정희와 이후락에게 철저히 받은 것이다.[17] 대통령비서실장에서 주일대사로 밀려났지만 김형욱과 달리 박정희에 대한 충성은 변함없음을 강조하며 박정희의 눈 밖에서 벗어나지 않았고, 결국 1년만에 중앙정보부장으로 복귀하게 된다. 주일대사 시절 도쿄 대사관 부근의 유명한 초밥 전문 식당에서 초밥을 먹고는 "이런 맛있는 초밥을 어떻게 나 혼자 먹을 수 있겠는가. 각하께도 맛보여드려야 한다"라며 초밥을 사서 간이 냉동 상태로 포장하여 외교행낭을 수송하는 비행기 편으로 청와대에 보내 박정희의 밥상에 올릴 정도였다.[18] 나중에는 갈라섰다.[19] 프레이저 하원의원이 주도했기에 프레이저 청문회[20] 문명자 기자는 박정희 정권에서 김형욱에게 당시 500만 달러를 제시했다고 주장한다.[21] 원래는 일본의 유명 출판사인 코단샤에서 출판하기로 되어 있었으나 한국 정부에서 코단샤에 이권을 주고 출판을 저지했다고 한다.[22] 사실상 김형욱 때문에 만든 법으로, 훗날 헌법재판소의 위헌결정으로 효력을 상실했으며(헌재 1996. 1. 25. 95헌가5 결정), 1999년에 공식적으로 폐지되었다.[23] 법률 제643호, 제4조 제1항 반국가단체나 그 구성원의 활동을 찬양, 고무 또는 이에 동조하거나 기타의 방법으로 반국가단체를 이롭게 하는 행위. 이후 1980년 12월 31일에 반공법은 폐지되고 그 내용은 국가보안법에 통합되었다.[24] 제7조 제2항 국외공산계열의 활동을 찬양·고무 또는 이에 동조하거나 기타의 방법으로 반국가단체를 이롭게 한 자[25] 제127조 공무상비밀누설죄, 제104조의2 제1항 국가모독죄[26] 형만 받은 것이 아니라 재산도 몰수되었다. 해당 법률이 "친족의 재산까지도 반국가행위자의 재산이라고 검사가 직시하기만 하면 증거조사 없이 몰수형이 선고되게 되어 있"는 구조였기에 (95헌가5) 이는 빼박 연좌제 위반이었고 이후 해당 법률이 위헌으로 판정되는데 한 몫 하게 된다. 당시 한성대학교 인근에 있던 수백평에 달하는 본인 저택 또한 고스란히 몰수되어 건설사에 불하된 뒤 1983년 신동아빌라로 건축, 분양되었으며 이후 2010년대 또다시 고밀도 빌라로 재건축되었다. (한성대입구역한성대학교 사이 통학로 부근에 있어 이 대학 학생들은 대부분 안다.) 아래 나온 항소 결과 무죄 선고를 받고 재산 몰수 또한 취소되었으나 이미 일반에게 불하, 매각된 상태로 되돌려 받으려는 소송은 기각되었다. 다른 방법으로 손해 배상을 받았는지는 불명이다.[27] 자세한 내용은 반국가특조법 문서로.[28] 미국명 김영순[29] 미국명 제니퍼 경옥 김, 1956년생[30] 회고록 필명 박사월[31] 신상옥 감독은 그의 출세와 몰락을 영화로 만들었고 칸 영화제에 출품했는데 이 영화 때문에 오랫동안 국내에 못 들어왔다는 이야기가 있다. 신상옥 감독은 김형욱과 친분이 있었으며 홍콩에서 납북되기 며칠 전에 미국에 있었을 때 김형욱의 집에서 김형욱과 같이 식사를 했다고 하는데 식사 자리에서 김형욱은 자신의 회고록의 원고를 보여주며 거액의 인세를 받게 되었다고 자랑했었다고 한다. 결국 신상옥 감독은 민주화가 되고 시간이 꽤나 지난 2000년 한국으로 귀국한다.[32] 극중 이름은 박진욱[33] 극중 한성태[34] 차지철을 모티브로 한 역으로 김동현이 연기했다[35] 류승원 민정수석이 JP의 사조직 결성에 대해 자신에게 귀뜸하지 않고 보고한 것에 대해서 "동향 좋은게 뭐이가?"라고 불만을 터트리는 장면도 있다. 두 사람이 같은 황해도 신천 출신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