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광역시의 행정구역 변천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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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대
대전 지역에 언제부터 사람이 살았는지는 분명치 않으나 가까운 충청남도 공주시의 구석기 시대 유적인 석장리 유적과 대전광역시 대덕구의 용호동 유적[1]이 있어 대략 이때부터 사람이 살았다고 추정되며, 청동기 시대부터는 본격적으로 사람이 살았다는 것을 입증하는 청동기 유물, 집터, 토기 등이 출토된다. 이 중 대표적인 유물은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중인 농경문 청동기.원삼국시대에는 삼한 중 마한에 속하는 곳이었으며, 마한을 이루던 소국 중 하나인 신흔국(臣釁國)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다만 신흔국은 충청남도 서산시 혹은 예산군 일대로 추정되기도 하여 확실한 것은 아니다. 대전으로 비정하는 설에서는 보통 '신흔'이 종국에 진잠동이라는 지명으로 이어지는 후술할 진현현[2]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측한다. # 한편 지금의 유성구 일대에는 마한의 내비리국(內卑離國)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는 하단에도 서술된 유성구의 삼국시대 지명 노사지가 내사지(內斯只)로도 기록되었으며 두 지명은 내(內)라는 요소를 공유하기 때문이다.[3][4]
삼국시대에는 백제의 강역에 들어가 대덕구 읍내동 일대를 중심지로 하며 회덕동 일대를 포함하는 우술군(雨述郡)으로 등장한다. 이는 순우리말 지명 비술 또는 비수리의 한자 표기로, '비'를 뜻하는 雨(비 우)의 뜻 '비'와 述의 음 '술'을 가져온 것이다.[5] 실제로 대덕구 장동에 위치한 계족산에서는 "가뭄이 심할 때 산이 울면 비가 온다"는 전설이 있어 '비가 오는 봉우리'라는 뜻의 '비수리'라는 지명이 전래되어 왔다고 한다.[6] 이 전설은 조선 전기에 편찬된 《세종실록지리지》와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기록되어 있다. # #
우술군의 산하에는 유성구 구성동 일대의 노사지현(奴斯只縣)[7], 덕진동 일대의 소비포현(所比浦縣)[8]이 있었고 서구 봉곡동 일대에는 진현현(眞峴縣)[9]이 있었는데, 진현현만 유일하게 우술군이 아닌 현 충청남도 논산시 연산면을 중심으로 한 황등야산군(黃等也山郡)의 산하였다. 성왕 대에 설치된 지방 구획인 5방 기준으로는 공주시 일대가 북방, 논산시 일대가 동방의 중심지였으므로 대략 이 둘 중 하나에 속했던 것으로 보인다. 대체로는 대전 일대가 이후로도 주로 공주와 묶여서 움직였던 것을 고려하여 북방에 속했던 것으로 추정하는 설이 지배적이다.[10]
이 시기는 고구려, 백제, 신라의 주요 전선 중 하나였기 때문에 대전에는 산성 유적이 많고, 산성이라기보다는 보루에 가까운 수준의 성곽 유적도 많다.[11] 특히 백제 개로왕이 고구려 장수왕에게 위례성을 함락당한 뒤 장수왕의 연이은 남하로 백제가 절체절명의 위기에 몰렸을 때는 고구려군이 대전 일대까지 진출해, 백제 웅진성이 동북쪽(세종)과 동남쪽(대전) 양면에서 압박당하는 초유의 사태가 일어나기도 했다. 당시 고구려군이 남긴 유적은 서구 월평동, 세종 부강면, 새롬동, 나성동 일대에 있다.
이후 동성왕 대에 이르러서야 백제는 신라와 합세하여 대전 일대에서 고구려군을 몰아내는 데 성공했다. 세종 전체와 청주 및 대전의 대부분은 백제가 되찾았으나, 본디 한성백제의 강역이었던 괴산 전체와 오늘날 대덕구 북부 절반 및 청주 서남부는 별 수 없이 신라의 점유를 묵인해야 했다. 괴산은 의자왕 대에 백제가 신라에게서 수복했으나 신탄진권과 청주 서남부 일대는 백제가 망할 때까지도 끝내 되찾지 못했다. 그러므로 대덕구 북부 지역은 백제뿐 아니라 신라와도 깊은 인연이 있다 할 수 있겠다.
삼국통일전쟁이 한창이던 660년 7월 9일 발발한 황산벌 전투 당시 신라군이 노수리산(怒受利山)에 주둔했다는 기록이 있는데[12], 유성구 일대에 위치한 노사지현과 음운이 유사하여 같은 장소로 여겨진다. 아무래도 대전 지역이 격전지인 황등야산군(논산)과 인접한 국경 지대이다 보니 신라군이 진을 치기 적합했을 것이다.
백제 멸망 이후 벌어진 백제부흥운동의 배경이 되기도 했다. 부흥군이 661년 8월 전후로 신라군의 길을 막으며 항전했던 지역인 옹산성(甕山城)이 현 대덕구 장동 계족산에 있는 계족산성으로 추정된다. 이후 옹산성이 사흘 간의 포위 끝에 9월 27일에 함락되고[13] 상주총관 김품일에 의해 우술군마저 공격당해 1,000여 명의 목이 베이자, 백제의 마지막 우술군 군장(郡將)인 2등 달솔 조복(助服)이 부장으로 보이는 3등 은솔 파가(波伽) 및 무리를 거느리고 신라에 항복했다는 기사가 전해지고 있다.[14] 이후 662년 8월에는 부흥군의 잔당이 내사지성(內斯只城)[15]에 모여 진을 치고 저항하자 김흠순 등 장군 19명이 파견되어 이를 격파했다.
남북국시대에는 통일신라 9주 5소경 기준으로 웅천주(熊川州)에 속했으나 이후 757년 경덕왕의 한화 정책에 의해 우술군은 비풍군(比豊郡)[16], 노사지현은 유성현(儒城縣)[17][18], 소비포현은 적조현(赤鳥縣), 진현현은 진령현(鎭嶺縣)으로 개칭되게 된다. 진령현은 여전히 황등야산군이 개칭된 황산군(黃山郡)에 따로 속하고 있었다. 웅천주는 웅주(熊州)로 개칭되었다.
후삼국시대에는 900년대 초반 무렵 후백제의 강역에 들어갔다. 후백제의 판도는 백제와 비교하면 대전 동쪽으로 훨씬 멀리 뻗어 경상도로 깊이 침투해 있었으며, 종전에 신라가 차지했던 대덕구 북부 역시 수복한 상태였다. 때문에 당시 대전광역시 일대는 936년에 후백제가 멸망할 때까지 후백제에 속해 있었다.
2. 고려
고려시대에 들어서 비풍군은 회덕현(懷德縣)으로, 적조현은 덕진현(德津縣)으로, 진령현은 진잠현(鎭岑縣)으로 개칭되었고 유성현은 그대로 존치되었다. 대전 일대는 성종대 설치된 10도 기준으로 하남도에 속했으며, 네 현 모두 12목 중 하나로 격상된 공주목(公州牧)의 속현이었다. 이후 현종 대에 설치된 5도 양계에서는 4현이 양광도에 속하게 되었고, 공주목은 다시 그냥 공주로 격하되었으나 4현은 여전히 공주의 속현이었다.그러다 회덕현과 진잠현은 명종 대에 주현으로 승격되어 감무(監務)[19]가 파견되면서 독립적인 행정을 시작했으며, 조선시대에도 별도의 고을로 이어졌으나 유성현과 덕진현은 독립하지 못하고 공주의 속현으로 이어진다. 한편 특수행정구역인 향, 부곡, 소도 있었는데, 이 중 가장 유명한 곳은 망이·망소이의 난이 일어난 명학소(鳴鶴所)이며 현재의 서구 탄방동 일대에 위치했었다고 알려져 있다.
3. 조선
조선시대에 들어 회덕현과 진잠현이 각각 회덕군, 진잠군으로 격상되었으며, 현 대전 중심부는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는 충혜왕 대에 다시 공주목으로 승격된 공주에 속한 작은 농촌이었다. 우암 송시열을 비롯한 은진 송씨가 이 근처에 다수 살고 있었으며, 이와 관련된 지명인 송촌동이 현재 대전의 지명 중 하나로서 남아있다. 또한 회덕 황씨가 회덕현 일대를 근거지로 삼기도 했다. 한편 지명 '한밭'을 한자로 옮긴 '대전(大田)'이라는 지명도 조선 초에 등장했고, 지금까지 쓰이고 있다. 한때 '태전(太田)'으로도 불렸다는 속설이 있으나, 실제로 태전은 1904년에 처음 등장한 명칭으로, 근대에 잠깐 ‘대전’과 병용되다 사라진 지명이며, ‘태전’보다 오히려 ‘대전’이 전통있는 한자 지명이다. ‘태전’이라는 지명을 1905년 또는 1909년에 이토 히로부미의 명으로 ‘대전’으로 개칭하였다는 이야기도 한때 돌았으나, 근거가 부족한 야사에 불과함이 확실시 된다.[20]대한제국 시기 대전 일대의 행정구역 상황. 현 대전 중심부는 1906년까지 회덕도, 진잠도 아닌 공주 땅이었다가 회덕군으로 넘어왔다. 물론 저 길쭉한 공주 땅이 좁은 의미에서 공주 땅이었던 건 아니고, 속현 유성현, 덕진현이 속현 개념이 사라지며 공주 자체에 흡수되면서부터 저렇게 된 것이다. 상단의 이미지에는 1895년이라고 표기되어 있으나, 군현들의 비입지나 두입지가 일괄적으로 정리된 것은 1906년이다.[21] 또한 청주의 월경지였던 주안면이 1906년 월경지 정리 때 회덕군에 편입되었는데, 상단의 지도에는 누락되어 있다.
단, 현재의 유성 지역은 계속 공주에 남아 있다가 1914년 대전군 출범 때 넘어왔다. 그리고 유성까지 대전군에 합류하게 되면서, 우술군-비풍군 시절의 중심 지역과 영현들까지 합친 영역을 대략적으로 회복한 것이 되었다.
4. 일제강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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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의 역사를 바꾸어놓은 것은 1900년에 확정된 경부선 철도 노선이었다. 1904년 공주군 산내면 대전리[22]에 대전역이 설치[23]된 이후 인구가 유입되고 도시화가 시작되었다. 1906년 산내면이 회덕군에 편입됨과 동시에 회덕군청 역시 기존 회덕읍내에서 대전시가지로 이전하였다.
1914년 회덕군과 진잠군, 공주군 현내면(유성면)을 통합하여 출범한 대전군의 행정구역 상황.
1914년 조선총독부의 조선 행정구역 대개편 당시 기존의 회덕군과 진잠군, 공주군 유성면을 통합하여 대전군(大田郡)[24]이라 명명하였다. 만약 회덕군을 그대로 사용했으면 오늘날 '회덕광역시'라 불렸을 것이다. 단순히 기차역이 있던 동네 이름인 '대전'이 기존 고을 이름인 '회덕'을 대신해 새로운 고을 이름으로 채택된 것이다. 이때 대전역 일대의 시가지(중구 은행동, 동구 정동, 중동, 원동, 인동)를 '대전면'으로, 그 외곽지역을 '외남면'으로 대전면을 둘러싸는 도넛 모양으로 편제했다.[25] 1917년 내남면이 회덕면으로 개칭되었다. 대전은 계속 성장하여 충청권의 중심 도시가 되었고, 1931년 대전군 대전면이 대전읍으로 승격되었다. 1932년에는 공주에 있던 충청남도청이 대전으로 이전되었다.
1935년 대전군 대전읍이 대전부(大田府)로 승격되며 본격적인 도시로서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이 때 대전군의 잔여 지역은 대덕군(大德郡)으로 개칭되었다. '대'전과 회'덕'에서 한 글자씩 따서 지은 것. 1940년 대덕군의 외남면[26]과 유천면 일부[27]를 대전부에 편입하였다.
대전역 서편에 남북 방향으로 뻗어있는 도로[28]는 혼마치라고 불렀다. 또한 대전역부터 구 충청남도청까지의 동서 방향의 중앙로를 춘일정통(春日町通, 가스가초 거리)라고 불렸으며 대전역에서 목척교 일대가 춘일정일정목(春日町一丁目), 은행동이 춘일정이정목(春日町二丁目), 선화동이 춘일정삼정목(春日町三丁目)이라고 불렸다. 구 충청남도청이 완성되자, 이정목과 삼정목의 땅값이 급격히 오르며 고급주택가가 형성되었다고 한다. 당시 춘일정의 사진
또한 대전천의 지류인 대동천 유역이 정비되며, 당시 대전역 동측에 있었던 호수인 소제호는 매립되었다[29]. 당시 시대가 시대인지라 대흥동에는 대전신사가 자리하고 있었으며, 이 시기 즈음부터 '대전부사'(오타후지)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다. 유성온천을 거쳐 공주에 이르는 공주가도[30]와 대전천, 유등천, 갑천을 넘는 교량인 목척교(대전교), 수침교, 만년교가 이때 닦인다.
5. 대한민국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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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8.15 해방 당시 대전부와 대덕군의 행정구역 상황.
1946년에 정(町), 정목(丁目)을 동(洞)으로 개정하였다.[31]
대전 정(町)명 개정# | |
개편 전 | 개편 후 |
본정1정목(本町1丁目) | 원동 |
본정2정목(本町2丁目) | 인동 |
본정3정목(本町2丁目) | 효동 |
춘일정1정목(春日町1丁目) | 중동 |
춘일정2정목(春日町2丁目) | 은행동 |
춘일정3정목(春日町2丁目) | 선화동 |
영정1정목(榮町1丁目) | 정동 |
영정2정목(榮町2丁目) | 삼성동 |
영정3정목(榮町3丁目) | 성남동 |
동정1정목(東町1丁目) | 신안동 |
동정2정목(東町2丁目) | 소제동 |
서정(西町) | 문창동 |
대흥정(大興町) | 대흥동 |
천정(泉町) | 천동 |
대동정(大東町) | 대동 |
욱정(旭町) | 신흥동 |
용두정(龍頭町) | 용두동 |
대사정(大寺町) | 대사동 |
북정(北町) | 목동 |
중촌정(中村町) | 중촌동 |
연병정(練兵町) | 문화동 |
보문정(寶文町) | 보문동 |
유정(柳町) | 오류동 |
가양정(佳陽町) | 가양동 |
선암정(仙岩町) | 용운동 |
동광정(東光町) | 자양동 |
청수정(淸水町) | 판암동 |
홍도정(弘道町) | 홍도동 |
유천정(柳川町) | 유천동 |
산수정(山手町) | 산성동 |
석교정(石橋町) | 석교동 |
대평정(大平町) | 태평동 |
1949년에 대전부를 대전시로 개칭하였다. 1950년 북한군이 서울을 점령하자 매우 짧은 기간 동안[32] 임시 수도가 되었으며, 그때 현대사의 비극인 대전형무소 학살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다. 7월 14일부터 20일까지 미 24사단이 지연전을 수행하다 심각한 피해를 입은 대전 전투의 와중에 시가지가 심하게 파괴되었기 때문에 현재의 대전시는 6.25 전쟁 이전의 모습을 찾기 쉽지 않다. 결국 북한군은 7월 20일 대전을 점령한다.
1963년 대덕군 유천면 전역, 산내[33]·회덕면[34]의 각 일부를 편입하여 대전시의 영역이 확장되었다. 대덕군 산내면은 이때부터 실질월경지가 되었다.
1973년 대덕군 북면과 유성면이 각각 신탄진읍과 유성읍으로 승격되었다. 1977년에는 대전시에 구제(區制)가 실시되어 중구와 동구의 2개 구가 설치되었다.
1983년 대덕군 유성읍과 회덕면 전역, 탄동[35]·구즉[36]·진잠[37]·기성면[38] 각 일부를 편입하여 대전시의 영역이 확장되었다. 이때 대덕군은 2쪽으로 나뉘어졌다. 이 상태로 1989년 대덕군 폐지 및 대전직할시 승격 때까지 이어졌다.[39] 직할시 승격 직전인 1988년에는 중구에서 서구가 분구되었다.[40]
충청남도 대전시~대전직할시 시절의 대전시 휘장 및 시기[41] |
1989년 대덕군을 폐지[42]하고 대전시에 병합[43]하여 통합된 충청남도 대전시[44]가 대전직할시로 승격되었다.[45] 동시에 서구에서 유성구가, 동구에서 대덕구가 분구되어 현재의 5구 체제가 완성되었다.
1993년에 1993 대전 엑스포를 개최해서 도시의 인지도가 상승했다. 꿈돌이라는 노란색 외계생명체(?) 마스코트는 봉제인형이나 애니메이션 등 다양한 상품으로 나왔고, 대전의 마스코트 중 하나이기도 하다. 엑스포 종료 후에는 그 시설과 부지를 활용해 엑스포과학공원을 열었지만 일부 전시관은 거의 문을 닫은 상태이다. 엑스포와 비슷한 시기에 내부에 놀이동산으로 마스코트인 꿈돌이에서 이름을 딴 꿈돌이랜드도 런칭했지만 이쪽도 현재 관리상태는 막장이다. 꿈돌이랜드는 그나마 놀이기구 몇 개를 새로 들여놨지만, 엑스포 유령의 집은 들어가면 웃음이 나올 정도라고 한다. 엑스포가 끝난 뒤 국제 전시관 등을 철거하고 재개발할 계획이었으나 1997년 외환 위기 크리로 인해 단지내 재개발 계획조차 지지부진한 상황. 2012년 6월 1일, 결국 적자를 못 버티고 꿈돌이랜드가 매각되었다. 그후 2018년 현재 부지는 기초과학연구원으로 사용되고 있다.
5개 직할시[46] 중 가장 인구가 적었지만 1995년에 광주광역시의 인구를 앞질렀다. 그리고 같은 해에 지금의 대전광역시로 명칭이 바뀌었다.
[1] 용호동 유적은 10만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기 때문에 중기 구석기 시대에 해당되며 그 유적에서 간석기가 발굴된 바가 있다.[2] 진현현 → 진령현 → 진잠현으로 이어져 오늘날 진잠동이라는 지명의 기원이 되었다.[3] 내비리(內卑離)의 비리(卑離, *pɛrɛ)는 삼한 소국명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므로 백제 지명의 부리(夫里), 신라 지명의 벌(伐/火, *pɔr)과 같은 지명 접미사로 추정된다. 한자 지(只)의 당시 음가 '게(*kɛ)'는 백제어로 성을 뜻했으며, 질(叱)로도 기록된 사(斯)는 중세 한국어의 속격조사 'ㅅ'과 연관되므로 내사지(內斯只)는 '내(內)+속격조사+성'으로 분석할 수 있다. 따라서 두 지명 모두 핵심적인 부분은 '내(內)'인 셈이다. 당시 음가는 '누' 또는 '노'에 가까웠다.[4] 비리(卑離)와 지(只)가 비록 같은 지명 접미사일지라도 의미가 달랐기 때문에 서로 통용되기 힘들다는 반론도 제기된 바 있다. 그러나 똑같이 '비리'가 붙은 마한 벽비리국이 삼국시대에는 '지(只)'와 마찬가지로 성을 뜻하는 '골'이 붙은 벽골(辟骨)로 개칭되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내비리국과 내사지를 연관짓는 것도 그리 무리한 추측은 아니다. 내(內)의 상고 중국어 발음이 /*s/로 끝났기 때문에 원삼국시대 당시에는 *sɛ의 음가를 생략하여 적었을 가능성 역시 감안해야 한다.[5] 다행히 음가가 단순해 쉽게 유추할 수 있는 단어이긴 하나, 술이었는지 수리였는지에 대해서는 고대 한국어의 개음절적 경향에 관한 정설이 없어 확인하기 힘들다. 다만 화자의 방언에 따라 양쪽 모두 쓰였을 가능성은 있다.[6] 대전광역시 공원관리사업소[7] 노질지(奴叱只)라고도 불렀다. 《향문천의 한국어 비사》에 따르면 실제 발음은 *nɔsɛkɛ '노세게' 정도로 추정된다. 현 유성구 온천1, 2동 및 서구 둔산신도시 일대를 포함한다.[8] 유성구 신성동 일대를 포함한다.[9] 유성구 진잠동 일대를 포함한다.[10] 반면 진현현의 경우 따로 황등야산군의 관할이었기 때문에 이 현 하나만 동방에 속했을 개연성이 높다.[11] 이 때문에 식장산의 이름이 백제군이 산에 식량을 저장해놨던 것에서 유래했다는 구전이 있다.[12] "금년 7월 10일에 당의 소정방이 수군을 거느리고 미자진(尾資津)에 진을 쳤다. 신라왕 춘추지가 병마를 거느리고 노수리산(怒受利山)에서 주둔해 백제를 협공하여 싸운 지 3일 만에 우리 왕성을 함락하였다. 같은 달 13일에 처음으로 왕성을 깨뜨렸다. 노수리산은 백제의 동쪽 경계이다." — 《일본서기》 사이메이 덴노 6년(660년) 9월 5일 기사, 백제 승려 각종(覺從)의 보고 中[13] 항복 권유가 있었으나 이름 모를 성주는 차라리 싸우다 죽겠다며 거절하였다. 백제 함락 후 소정방이 이끌던 당군의 약탈이 극심했기 때문에 백제 유민들의 원한과 적개심이 극에 달했던 상태라 당연했을 것이다. 함락 후 성주는 처형되고 병사들은 모두 풀려났다고 한다.[14] 보통 군장으로는 4등 덕솔이 보임되었는데, 우술군에는 관위가 2등이나 되는 달솔이 부임해 있었던 것으로 보아 백제에서 우술군을 요충지로써 굉장히 중요시하고 있었다는 점을 유추할 수 있다.[15] 상술한 노사지현(奴斯只縣), 즉 현재의 유성구 지역에 위치한 성으로 추정된다.[16] 앞서 언급한 '비술/비수리'를 백제의 우술과는 다른 방식으로 표기한 것이다. '비'를 뜻 '비(雨)', '술/수리'를 음 '술(述)'로 표기한 우술(雨述)과는 정반대로 '비'를 음 '비(比)', '술/수리'를 뜻 '술/수리(豊)'로 표기하여 비풍(比豊)이 되었음을 추측해볼 수 있다.[17] 잘 알려져 있는 대로 이것이 오늘날 유성구의 기원이다. 현 대전 일대에서 제일 오래된 지명 중 하나이다. 그 다음으로 오래된 지명이 고려시대에 지어진 회덕이다. 참고로 앞서 언급한 노사지(奴斯只)의 추정 재구음인 '*nɔsɛkɛ'는 '*nɔ-sɛ-kɛ'로 분석될 수 있는데, 여기서 '*kɛ'는 백제어로 성을 뜻했으므로 유성의 '성(城)'과 대응한다. 또한 儒(선비 유)의 경우 상고한어 재구음이 '노'에 가까우므로 '노사지'의 '노(奴)'와 대응된다. 즉 유성(儒城)이라는 지명은 기존 고유어 명칭인 노사지(奴斯只)를 적절하게 음차, 훈차하여 탄생한 결과인 것이다.[18] 혹은 '*nɔsɛ' 자체를 한 단어로 보기도 한다. 언어학자 윤희수는 삼국시대 지명인 노사화현(奴斯火縣)이 경덕왕 대에 자인현(慈仁縣)으로 개칭된 사실을 통해 고대 한국어로 너그러움, 자비로움을 뜻했던 단어 *nɔsɛ '노세'를 재구했는데, 노사지현의 노사(奴斯)가 같은 뜻이라면 너그럽다는 의미도 있는 유성현의 유(儒) 자는 기존 고유어 지명의 발음뿐만 아니라 뜻도 고려한 글자에 해당한다고 보았다.[19] 후에 현감(縣監)으로 개칭되는데, 똑같이 현에 파견되었던 현령(縣令)보다 급이 낮았다.[20] 대전지명 관련 참조 링크, 실록의 태전 지명 첫 등장 기사 첫 번째 링크 내용에서 한국지명요람을 인용한 부분을 보면, 태전이 근대에 일시적으로 존재했다 사라진 지명임을 알 수 있다.[21] 1895년 23부제 실시 당시에는 도의 폐지만을 골자로 개편이 이루어졌기에 산하 군현들의 구역 변경은 한성부의 추가 확장 말고는 없었다. #[22] 지금의 동구 정동[23] 흔히 '공주에 지으려 했으나 지역 유지의 반대로 대전에 지었다'라고 하지만, 전국에 퍼져있는 지역 유지 반대설이 그렇듯이 사실이 아니다. 일본은 양반들도 강제 노역에 동참시킬 정도로 양반들을 그렇게 대단하게 보지 않았다. 공주의 몰락은 일제의 모략이 아닌 그냥 땅이 좁아서이다. 또한 공주로 지나가게 하려면 차령을 넘어야 한다. 참고로 현재 논산천안고속도로가 차령을 넘고 있는데 현대의 기술로 지어졌음에도 심한 오르막으로 인해 평소에도 정체가 될 정도로 굉장히 험준한 곳이다. 거기에 공주시 일대가 전부 산지라 도시 확장에도 적절하지 않았다.[24] 일본어 훈독으로는 오타(Ōta)가 된다. 다만 강점기의 조선 지명은 대부분 음독하였으므로 보통은 다이덴이라고 하였다. 강점기에 발행된 조선 명소 사진들의 영문 병기만 봐도 알 수 있는 사실이다. 식민지 지명들을 훈음했다가는 내지의 기존 지명과 구분하기 어렵기에 저들 나름의 방안이었다. 대전의 경우에도 현 도쿄도 오타구와 겹치게 된다.[25] 조선총독부는 군청이나 도청 소재지, 개항장, 철도역 주변 등 시가지가 형성된 곳은 기존 면에서 따로 분리시키고, 그 시가지가 확장되면 분리되었던 주변 지역을 흡수한 후 (읍을 거쳐) 부로 승격시키는 방식을 사용했다. 지정면 참고.[26] 이 지역은 대전이 부로 승격되기 전인 1926년과 1932년에 이미 일부가 편입된 상황이었으며, 이 시기 편입되지 않은 외남면의 잔여지역(삼정리, 가오리, 호동리, 옥계리, 대성리)은 산내면에 이관되었다. 1940년에 편입된 곳은 홍도리, 가양리, 소제리(소제동, 자양동), 연효리(삼성동, 성남동), 산소리(판암동), 용방리(용운동), 석교리, 중촌리.[27] 유천리, 과례리(문화동), 당대리(산성동), 평리(태평동), 용두리 일부(용두동).[28] 현재 옛신탄진로이다.[29] 백 여년이 지난 지금 소제동에는 소제중앙공원이 조성될 준비를 하고 있어서, 어쩌면 소제호가 부활할 지도 모른다.[30] 이 시기에는 서대전네거리가 아직 삼거리였다. 그리고 이 길은 현재 계룡로이다[31] 일반적으로 ~정목 단위의 경우에는 ~가로 치환하는데, 대전은 그런 것 없이 전부 동으로 뜯어고쳤다. 그래서 대전광역시에는 XX동1가, XX로1가 식의 법정동 단위가 없다.[32] 6.28 ∼ 7.14[33] 옥계리, 가오리, 삼정리, 호동리. 원래 외남면이었다가(대성리 포함) 1940년 대전부 편입대상지에서 제외돼 산내면으로 이관된 곳들로, 대성리만 산내면에 계속 남고 나머지는 모두 대전시에 편입됐다.[34] 대화리, 오정리, 용전리.[35] 신성리, 가정리, 도룡리, 장동리, 내동리(방현동), 화암리, 덕진리, 하기리.[36] 원촌리, 문지리, 전민리, 용산리 일부(현 전민동 대덕골프장 뒷산 일대).[37] 내동리(원내동), 교촌리, 대정리, 용계리, 학하리.[38] 관저리, 도안리, 가수원리.[39] 다만, 위의 지도에서 진잠면 동북쪽에 살짝 튀어나온 부분인 계산리는 1987년 대전시에 편입됐다. 1983년 편입대상지에 포함되지 않아, 한동안 진잠면의 실질월경지로 남아 있었다.[40] 분구 당시에는 안영동도 서구로 분리되었으나, 이듬해인 1989년 대전직할시가 승격되면서 중구로 환원되었다.[41] 1995년 3월 17일까지 사용되었다.[42] 이때 신탄진읍은 신설된 대덕구, 산내면은 중구와 동구에 분할 편입되었고, 동면은 동구, 기성면은 서구, 진잠면(남선리 제외), 탄동면, 구즉면은 역시 신설된 유성구에 분할 편입되었다.[43] 단, 진잠면 남선리는 논산군 두마면(현 계룡시 신도안면)에 편입되었다. 이러한 배경 때문인지 몰라도 지금의 계룡시 지역번호는 충청남도의 041이 아닌 대전의 042를 쓴다. (정확히는 계룡시 출범 이전인 1997년부터 042로 변경) 여담으로 오늘날 남선리는 계룡대가 대부분을 차지하는 신도안면(2006년 분리)에서 유일하게 거주지가 있는 리이기도 하다. 그래서인지 신도안면으로 변경하기 전 이름이 남선면이었다.[44] 2017년에도 충남 대전도 아니고 충북 대전이라고 쓴 기사가 나왔다. 경북 울산이라 잘못 부르는 것과 비슷한 사례..[45] 같은 날 서산군 서산읍도 서산시로 승격되었고 안면도 일대가 태안군으로 분리되었다.[46] 당시에는 광역시를 이 명칭으로 불렀으며, 울산은 아직 경상남도에 속한 일반 시였다.[47] 고속도로는 논산천안고속도로, 중부내륙고속도로, 서산영덕고속도로 등의 대체도로가 건설되어 영·호남 분기도시로서의 역할이 다소 줄어들었다.[48] 충남 전지역에서 2시간 안에 접근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