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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준표의 생애 [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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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홍준표의 생애에 대해 서술한 문서.2. 초년 시절
▲ 어린 시절 누나와 함께 찍은 사진 |
어려운 집안 사정 때문에 창녕군, 합천군, 대구시 등지로[6] 자주 이사를 다녔다. 그나마 학창 시절에 가장 오랫동안 산 곳이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졸업한 대구라서 스스로 '대구 사람'이라는 이미지를 생각한다고 하지만 어린 시절에 워낙 이곳저곳을 옮겨 산 것 때문에 고향에 대한 개념은 딱히 없다고 한다.
국민학교 시절에 6군데나 전학을 다녔는데 1학년 때부터 4학년 때까지는 매년 전학을 다녔기에 학년마다 재학했던 학교가 다 다르다. 그러다 보니 친구를 사귈 수 없어 공부에만 전념했다고. 누구보다도 열심히 공부했고 항상 1등을 차지하였다. 하지만 영양 부실로 인해 국민학교 졸업 당시 키가 겨우 124cm에 불과할 정도로 왜소했다.
가정 형편이 어려웠지만 도시에서 공부해 보겠다고 부모님을 설득해서 합천군을 벗어나 대구시 영남중학교에 진학했다. 숙식은 대구 직물 공장에 취직한 누나 방에 얹혀 살며 해결하기로 했다. 억수 같은 장대비가 쏟아지던 날 부친과 8km를 걸어 대구행 버스를 탔는데, 무거운 지게를 진 부친 뒤에서 "앞으로 공부를 열심히 하여 절대 가난을 대물림하지 않겠다"는 각오를 다졌다고 한다. 대구 대명동 사글세방에서 누나들이 싸주는 꽁보리밥 도시락을 먹고 공부했다. 그나마 도시락도 없이 혼자 운동장에서 수돗물로 배를 채울 때도 많았다.
그러다 결국 홍준표 하나 때문에 결국 온 가족이 대구로 이사 왔다. 비가 오면 물이 새는 셋방 단칸에 온 가족이 함께 살았다. 어머니는 사과 행상을, 아버지는 막노동을 하며 자식들을 키웠다. 가족들이 모두 잠든 밤에도 하루 4~5시간만 자고 공부해 영남중학교에서도 1등은 그의 차지였고 학교도 전액 장학생으로 다녀 수업료도 면제였으나, 대경권의 명문고인 경북고등학교가 아닌 영남고등학교로 진학했다. 경북고는 장학금을 주지 않아서 영남고로 갈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영남고가 이른바 똥통학교는 아니고 그 지역에서는 나름 괜찮은 학교였다.[7] 하지만 경북의 일류 명문고이며 전국에서도 알아주는 경북고등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것이 두고두고 본인에게 콤플렉스였고, 향후의 출세에도 핸디캡이 됐다.
심지어는 대학교 1학년 첫 미팅 자리에 경북여고[8] 출신 이화여자대학교 학생이 나왔는데 그녀에게 자신도 대구 출신이라고 밝히니 "집이 대구면 경북고 몇 회 졸업생이냐"고 물어봤고 경북고가 아니라고 하자 (경북대)사대부고 출신이냐고 묻고 사대부고 출신도 아니라 하자 그럼 어느 학교냐고 묻자 "영남고등학교다" 그랬더니 답변이 끝나자마자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고.[9] 이때 상처를 받은 이후로 미팅 같은 활동을 다시는 하지 않았다고 한다.[10]
그의 출신 고등학교에 대한 콤플렉스는 검찰 생활까지 이어졌는데, 명문 고등학교 출신들이 즐비한 검찰 조직 내에서도 멸시를 받았다고 한다. 중학교-고등학교 동문들끼리 끌어주고 밀어주는 문화가 만연하여 비주류의 설움을 느껴야만 했고, 법학과 졸업생도 아니었으며[11][12] 빽 없고 가난한 흙수저 출신인 것까지 더해져서 검찰 내에서도 그야말로 개무시당했다고 한다. 그는 커리어 내내 아웃사이더 또는 비주류를 자처[13]했는데, 그 원인으로 출신 고등학교에 대한 열등감, 자신의 가난했던 집안 배경 콤플렉스를 꼽는 사람이 있다.
원래는 경북대학교 의과대학에 진학하고자 했다. 그래서 그는 고등학교 때 원래 이과생이었다. 경북대가 국립대라서 학비가 저렴한 편임에도 불구하고 그마저도 진학할 형편이 못 되어,[14] 아버지가 학비와 생활비가 일절 들지 않으면서 학사 학위도 함께 나오는 육군사관학교에 진학하라고 해서 육사 시험을 보고 최종 합격 통지까지 받았다.#[15] 육사를 특차로 이미 10월에 합격을 해놨으니 학교에 더 나갈 필요가 없어서 다시 집으로 돌아와 있었다.[16] 그러나 대구시 토박이가 아닌 아버지가 시장통에서 무시당하는 것도 모자라 그해 12월에 억울한 누명을 쓰고[17] 말도 못 하는 모습을 보고 힘없는 이들을 돕는 검사[18]가 되기로 결심했다.
당시 육사를 합격한 자연계생 홍판표가 갑자기 선생에게 고려대학교 법과대학에 진학하겠다고 입학 원서를 써달라고 하자, 선생이 "우리 학교에서 고대 법대를 보낸 적이 없는데, 1년에 한두 명 붙는 육사 붙었으면 그냥 거기 가지 그러냐, 내가 너 합격하면 장을 지진다."라고 했다고 한다. 아버지 역시 걱정이 많았다. 아버지는 처음에 아들이 그냥 군대 가기 싫어서 그런 건가싶어 "정 육사 가기 싫으면 면서기 시험(9급 공개경쟁채용시험의 그 당시 별칭) 봐라. 그것만으로도 된 거다."라며 말렸다.
그래서 선생 앞에서 4시간이나 무릎 꿇고 앉아 원서를 받아내고 뒤늦게 문과 공부를 시작했다. 이 당시의 대입 시험은 문과용 국어 시험에 고문(古文)과 한문 해독이 나오는 등 문이과에 따른 시험 범위의 분별이 극명했는데, 이과에서는 고문 같은 문과용 공부는 안 가르쳐줬기에 교차지원을 하려면 문과 공부를 따로 독학해야 했다. 이과→문과 교차 지원이 수월한 지금과는 달리 이 시절에는 교차 지원 자체가 아주 어려웠다. 그런데 홍판표가 갑자기 마음을 바꾼 게 12월이었고 시험이 1~2월경이었으니 정말 촉박한 시간이었으며, 본인 역시 시험을 치고 나와서도 별로 기대를 안 했는데 진짜로 덜컥 고대에 합격을 해버린 것이었다.[19] 꿈에 그리던 고대에 붙었지만 부모님은 당장 낼 등록금(5만 6천 원)이 없다보니 걱정부터 앞섰고, 아버지는 이웃집의 일을 해주는 대가로 7만 원을 빌려와 등록금을 내주고 남은 1만 4천 원은 한 달 하숙비 1만 2천 원, 한 달 생활비 2천 원으로 쓰도록 주었다. 그렇게 1972년 영남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고려대학교 법과대학 행정학과에 진학했다.[20]
3. 고시 공부
대학생 시절에는 사법시험 공부와 과외 아르바이트를 병행했다. 등록금 5만 6천 원에 한 달 하숙비 1만 2천 원을 내고 나니 수중에 남은 생활비는 2천 원밖에 남지 않아 앞으로 쓸 돈은 모두 홍준표가 알아서 벌어야 했기 때문이다. 5층 여관집에서 과외를 하면서 1살 많은 제자의 유혹을 받은 적도 있었다고 한다.[21] 대학 생활 4년 중 고연전조차 딱 한 번밖에 참여하지 못했을 정도로 바빴다. 당시 고려대학교 동기로는 강희락 전 경찰청장, 주상용 전 서울지방경찰청장, 이승재 전 해양경찰청장, 김성곤 전 국회사무총장, 박계동 전 국회사무총장, 송하진 전 전라북도지사 등이 있다.그가 대학생 시절 기거하던 종암동의 하숙집 동기들도 유명하다.[22] 당시는 서울대학교 상과대학이 고려대학교 안암캠퍼스 지척인 현재 서울대학교사범대학부설고등학교 자리에 있던 때여서, 하숙집 동기들이 그를 제외하고는 모두 서울상대생들이었다고 한다. 이때 같이 친하게 지낸 이들이 박재완 전 기재부장관(서울대학교 경제학과 73학번), 장충기 전 삼성그룹 미래전략실 사장(서울대학교 무역학과 72학번), 서충일 전 STX 팬오션 부사장, 정해문 전 주태대사 등이었다.[23]
그의 진학 후 더 이상 대구를 고집할 필요가 없어진 데다, 뒷집에 불이 났는데 가족들 집까지 다 타서 가족들은 때마침 부친이 현대조선소의 경비원 일자리를 얻게 되면서 울산시로 이사 갔다. 경상남도 울산시 중구 복산동(현재 울산광역시 중구 복산동)으로 울산이 당시 막 공업 지역이 되어 사람들이 몰려들 때라 홍판표의 가족들 역시 일자리를 찾아 울산으로 이주한 것이다. 오랜만에 집에 내려온 어느 겨울밤, 일당 800원짜리 경비원 아버지[24]가 목욕탕에나 봄직한 플라스틱 샤워 의자에 앉아 칼바람 부는 바닷가 모래밭에 불을 쬐고 있던 모습을 봤는데[25], 그때 "세상이 왜 이러냐. 왜 우리 집은 항상 가난해야 하나."라고 한탄을 했다고 한다. 부친이 추운 모래밭에서 근무하니 회사에서 술이라도 먹고 버티라고 막소주를 준 건데, 마침 부친도 애주가라 술을 기꺼이 마시면서 노동을 했다. 그래서 과로와 과음으로 몸이 상해 부친은 10개월 만에 간암으로 사망했고, 이에 대한 트라우마 때문에 홍준표는 지금도 술을 즐기지 않는다.
그 역시도 "세상이 디비졌으면..." 하는 생각을 지닌 인물이었다. 3학년 때인 1974년 동아일보 광고 사태 때 대자보를 써서 선후배들과 함께 성금을 모아 처음으로 동아일보 격려 광고를 낼 만큼 정의감이 강했고, 박정희 유신 정권 반대 학생 운동을 하며 총학생회 지하 유인물을 작성하다가 글씨체로 추적당해, 1974년 10월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8시간 동안 엄청난 구타를 당해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문제적 인간, 홍준표 그러나 그때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남긴 "공부 열심히 해라"라는 마지막 유언을 따라 대학은 어떻게든 졸업해야 한다는 생각에 더 이상 시국 활동은 하지 못했다. 그렇게 경찰서에서 풀려난 후 고시 공부를 하러 절에 들어가게 된다.사법시험 도전은 번번이 실패했다. 72학번인 그가 병역도 미루고 졸업도 미뤄가면서 고시 공부를 이어가던 도중(중간에 휴학을 하는 바람에 4년 칼졸업을 못 하고 78년에 졸업했다.) 고려대학교 앞 국민은행 안암동지점에서 일하던 군산여상 출신의 20세(55년생) 여자 은행원 이순삼에게 반했다. '전전반측 잠을 못 이룰 정도였다'고 당시를 회상한 바 있다. 숫기는 물론 땡전 한푼 역시 없었지만, 같은 은행에 다니는 선배의 도움으로 겨우 데이트를 하고선 "나는 아가씨가 마음에 든다. 나와 앞으로 같은 집에서 살 생각이 있으면, 다음 주 수요일까지 도서관 4층으로 찾아와라"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26] 그런데 월요일 저녁에 이순삼은 정말로 도서관으로 찾아왔고[27] 홍판표는 첫 만남의 자리에서 불문곡직하고 "형편이 되는 대로 같이 살자"는 말로 프로포즈를 했다.
전라북도 부안군에 살고 있는 장인 장모 될 분들을 만나러 둘이 내려가서는 인사를 드리러 갔다. 대화를 나눈 후 홍준표는 다방으로 자리를 피하고 이순삼이 아버지 어머니와 셋이서 따로 더 이야기를 했다. 대화가 마무리된 후 다방으로 합류한 이순삼에게 "어떠셨대?"라고 묻자 이순삼은 솔직히 털어놨다. 홍준표가 마음에 안 들었던 아버지는 딸에게 "그거 구름 잡는 놈이다. 택도 아닌 놈이다. 그런 놈이 고시 되면 내 손에 장을 지진다"라고 한 반면, 어머니는 "사람 착해 보이니 잘 해봐라"라고 했다고. 때문에 용돈은 장모에게만 드리고, 장인은 용돈은커녕 26년간 집에 발도 못 붙이게 했을 정도로[28] 장서 갈등이 심했다고 한다. 장모에게는 '장인 영감이랑 용돈 나눠 쓰면 다음부턴 장모도 안 드린다.' 라고 말했다. 물론 장모 앞에서 농담식으로 웃자고 한 말이겠지만 그만큼 응어리가 많이 졌다는 뜻이기도 할 것이다.
그래서 어쩌다 가끔 장인이 딸을 만나러 집에 온다고 해도 홍준표는 장인이 집에 돌아갈 때까지 일부러 자리를 피했고, 그 사이에 끼어서 이순삼 여사가 가슴앓이를 가장 많이 했다고 한다. 하지만 병세가 위독해진 장인이 서울대 병원에 입원했을 때 홍준표가 처남 셋을 제치고 6개월간 병 수발과 함께 임종까지 지켰다고 한다. 돌아가시기 사흘 전에 장인이 "옛날에 잘못했다. 내가 사람을 잘못 봤다" 라고 사과하자, 이에 홍준표는 "잘못한 줄 이제 알았습니까. 편하게 가십시오."라고 하면서 응어리를 풀었다.
사실, 홍준표가 장인과 갈등이 심했던 것은 비단 이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홍준표의 어머니 역시 자신의 귀한 아들을 사시 못 붙은 한량이라고 괄시한 바깥사돈에 매우 분노했고, 홍준표가 어머니에게 장인어른을 용서해 달라고 빌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머니는 별세하기 직전까지도 바깥사돈을 끝내 용서하지를 않았다. 어머니가 용서하지 않은 장인을 아들 홍준표로서도 용서하기 쉽지 않았던 모양이다. 동서도 "20년이다. 살인죄도 15년이면 공소시효 끝나는데[29] 아직도 그러나..."라고 유감을 표했으나 홍준표는 "어머니께서도 용서하시지 못한 장인을 아들로서 용서하기가 어렵다."라고 했다고 한다.
또한, 바깥사돈이 홍준표를 반대한 것처럼 홍준표의 어머니도 역시 명문대 법대생 아들과 달리 예비 며느리 이순삼이 상고밖에 못 나온 것이 눈에 차지 않아 결혼 과정이 순탄치가 못했다고 한다. 사실 당시는 대학 진학률이 지금보다 더 낮아서 여자는 고졸에 은행원만 돼도 충분히 능력 있다는 소리를 듣는 시절이었지만 찢어지게 가난한 집에서 마흔둥이 귀한 아들을 힘들게 고생하고 빚까지 지면서 법대, 그것도 그냥 법대가 아니라 명문대 법대까지 보낸 어머니인지라 아들에 대한 강한 자부심, 그리고 당신은 그런 아들을 둔 어머니라는 자부심이 정말 강했던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이순삼이 전라도 출신 여자인 데다 영호남 간의 지역감정이 지금보다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심하면 심했고 덜하지는 않았던 시절이었으니, 영호남 양가가 서로 결혼을 반대하는 경우가 심심찮게 있었다.어쨌든 정말 얼마 안 가서 홍준표는 그녀와 같이 살기 시작했다. 신접 살림은 서울특별시 관악구 봉천7동 지하 단칸 셋방이었다. 신혼여행은 아산 도고온천으로 갔는데, 고급 호텔에 처음 들어간 신혼부부는 새벽 1시가 되도록 이불도 없이 히터도 되지 않는 방에서 덜덜 떨었다고 한다. 화가 나서 프런트에 항의하자, "경대 앞 버튼을 누르세요"라는 답이 돌아왔다. 장난 삼아 눌렀던 버튼이 히터 차단 버튼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 뒤에도 사법시험에는 계속 떨어졌고, 결국 1980년 4월 28일 육군 방위병으로 입대하여 군 복무를 시작했다. 당시 몸무게가 48kg으로 워낙 말랐기 때문에 보충역 판정을 받고 방위병으로 복무하게 됐는데, 사법 시험에 붙지 못해 고향에 가기 부끄러웠던 그는 처가가 있는 전라북도 부안군의 해안 초소에서 소총수로 복무하였다.[30]
1981년 6월 27일 이병으로 소집해제되어 군 복무를 마친 후 가장으로서 생계를 위해 철강 회사에 취직했다. 하지만 사법 시험에 대한 미련이 남아 퇴사를 하고 다시 도전했는데, 결국 아내의 5년에 걸친 헌신적인 뒷바라지 끝에 29세, 호적상으로는 28세인 1982년, 드디어 제24회 사법 시험에 합격하였다. 오랜 낙방으로 마음을 내려놓고 기대하지 않았던 마지막 시험에서 합격했는데 마지막 시험도 당연히 불합격인 줄 알고 시험이 끝나자마자 취직을 알아보고 있었고 그게 잘 여의치 않았었는데, 시험 합격 발표일에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확인했던 거라고 한다. 같이 합격한 사법연수원 동기(14기)생으로는 추미애 의원, 주호영 국회부의장, 신기남 전 의원, 정종섭 전 행정자치부장관, 권순일 전 대법관, 이기택 전 대법관, 이석태 전 헌법재판관, 채동욱 전 검찰총장, 김진태 전 검찰총장 등이 있다.
4. 검사 경력
4.1. 검사 임관
▲ 초임 검사 시절 홍준표의 모습 |
이때부터 홍판표는 홍준표라는 이름을 본명으로 검사 생활을 하게 되었다.
이 시기에는 공무원 비리, 가짜 녹즙기 사건 수사, 경찰관 뇌물 수수, 물 먹인 소고기 납품업자 등의 수사를 진행했다.
당시 청주에서 김석휘 법무부장관의 사돈이 행패를 부리자 검찰 간부들이 없는 토요일 밤에 변호사법 위반으로 구속 기소 할 정도로 초임 검사 시절부터 소신이 있는 검사였다고 한다.
1987년 부산지방검찰청 울산지청[33]으로 부임했다. 울산에 어머니 집이 있었기 때문에 울산 근무를 자청했다. 울산에 내려가서 예전에 아버지가 일한 현대조선소 간부들을 만나 예전에 홍씨 성을 가진 경비원이 있었으니 그 기록을 찾아봐 달라고 했지만 홍준표의 아버지는 정식으로 고용되지도 않은 무명의 임시직이라서 끝내 찾아내지를 못했다고 한다.
이때 경상남도 진주시 남강 골재 채취와 관련된 동업 사기 사건을 수사하면서 이것이 단순한 사기 사건이 아니라 전두환 대통령의 누나인 전명렬에게 뇌물을 주고 진주시장에게 압력을 넣어 골재 채취권을 따내려 했는데 진척이 더디면서 고소된 권력형 비리임을 확인했다. 내사 과정에서 서울 상계동 일대의 그린벨트를 해제해 주거나 서울 서초동 외교안보연구원 부지를 불하해 주겠다고 하는 등의 혐의까지 드러났다.
홍준표는 전명렬을 조사하기 위해 소환하려 했으나 안기부 간부들이 압력을 가하는데 이어 담당 지청장마저 제지해 포기했다. 이때를 회고하는 홍준표는 부당한 간섭을 배제하는 방법을 먼저 연구하자고 결심했다고 한다.
4.2. 남부지청 특수부 시절
1988년 노태우 정부 출범 후 서울지방검찰청 남부지청(현 서울남부지방검찰청) 특수부 검사로 부임하면서 본격적으로 군부 정권에 대한 비리를 수사하기 시작했다.전두환의 매부가 투자한 회사가 부도가 나려 하자 당시 청와대 대통령 친인척관리팀장인 서정희 치안본부 정보분실장이 해당 회사의 부동산을 가치보다 더 높은 값으로 강매하게 하고 받을 수익금보다 더 많이 지급하도록 압력을 행사한 사실을 적발해 구속 기소했다. 전두환의 외조카인 김영도가 사기죄로 구속된 피의자의 사건을 무마해 달라는 청탁을 받고 돈을 받은 사실을 적발해 구속 기소했다.
4.2.1. 노량진수산시장 사건 수사
전두환의 형 전기환이 전두환 대통령 재임 시절 이학봉 민정수석을 통해 당시 노량진수산시장의 사건 사고를 빌미로 서울시, 치안 본부, 국세청, 감사원 등을 움직여 원경영주에게 협박, 세무 조사, 보고서 조작 등의 수법으로 노량진수산시장의 경영권을 강탈한 사실을 적발하고 구속 기소했다.
당시 노태우는 5공 청산이라는 시대적인 상황과 상왕 노릇[34]을 하려는 전두환에 대한 거부감으로 전두환의 권력형 비리를 어느 정도 척결할 필요가 있었다. 홍준표는 이러한 시대의 흐름을 타고 크게 활약했지만, 노량진 사건에 관여한 사람들 중에 전두환 정권 인사인 이학봉뿐만 아니라 노태우 정권의 실세들도 포함됐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자칫 현 정권까지 위험하게 된다고 우려한 청와대와 검찰 수뇌부는 사건을 적당히 덮으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홍준표는 이러한 권부의 요구를 무시하고 수사를 강행했다. 통제가 되지 않자 수뇌부에서는 홍준표를 남부지청 특수부에 부임한 지 4개월 만에 형사부로 좌천시켰다.[35] 사건도 대검찰청 중앙수사부로 이첩되어 이학봉 전 민정수석과 전기환이 구속 기소 되는 선에서 마무리됐다. 홍준표는 검사 동일체 원칙을 어긴 이른바 통제 불능 검사로 찍혀 출세길에서 멀어졌다. 원래 명문고 출신도 아니었고, 고려대 안에서도 주류인 법학과가 아니라 비주류인 행정학과 출신이라 특수부나 공안부 발령은 힘들었지만 그 한계를 뚫고 남부지청 특수부에 발령받았고 깨끗한 검사 이미지로 이름을 알리면서 출세의 희망이 보였던 홍준표로서는 뼈아픈 결과였다. 하지만 검찰 엘리트 코스 가운데 하나였던 공안 검사를 하지 않게 되어 당시의 민주화 운동과 관련된 사건에 관여하지 않은 것은[36] 정치인으로서는 오히려 전화위복이 되었다고 볼 수 있겠다.
4.3. 광주지검 강력부 시절
남부지청 특수부에서 형사부로 좌천된 데 이어 1991년에는 아예 광주지검 강력부로 좌천됐다.[37] 홍준표는 낙담하지 않고 곧바로 광주의 조폭 국제 PJ파 수사에 착수한다. 전년도 1990년 10월 13일 부로 노태우 정권이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한 즈음이었다.1991년 5월에는 강경대군 구타 치사 사건 이후 일어난 강경대의 광주 노제에서 전경들이 시민을 구타한 사건을 강력 처리했고, 7월에는 조직폭력배들이 지역 건설 업체들에게 개입해 공사 입찰을 담합하게 하고 낙찰가의 일부를 챙기는 사실을 적발해 관련자들을 전부 구속 기소 했다. 12월에는 국제 PJ파와 일본 야쿠자의 연대를 포착, 12월 4일 현장을 덮쳐 일망타진하고 32명을 구속시켰다. 홍준표의 광주지검에서의 활약으로 10년 동안 광주 전남 지역에서 성장해 오던 조직폭력배들이 말끔히 청소되었고 광주지검 강력부장은 법무부로 영전하기에 이른다.[38]
4.4. 서울지검 강력부 시절
광주지검 강력부에서의 성과를 바탕으로 1992년 서울지방검찰청 강력부 검사로 발령됐다. 홍준표는 파키스탄인 폭력조직 주비파 두목 임란 사자드 외 13명을 적발, 체포해 그해 9월 22일 임란 사자드 외 3명에게 사형, 나머지 10명에게는 징역 15년형을 구형했다. 이 사건은 '최초의 외국인 사형 구형 사례'로서 각 일간지 1면을 장식하기도 했다. 사건의 발단은 당시 이태원을 중심으로 '비키파'와 '주비파'라는 파키스탄 폭력 조직이 활동했는데 비키파 조직원이 위조지폐로 귀금속을 사려다 적발되자 주비파 이름을 팔았다. 일명 '주비' 임란은 문제가 커질까 봐 귀금속값을 대신 치르고 비키파를 벼르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주비파 조직원 일명 고고가 린치를 당해 살해되자 이를 빌미로 비키파 두목 비키(모크테르 아흐메드)와 나나(아흐산 주베르)를 납치해 성남 야산에서 살해한 사건이었다. 당시 현장에 있던 주비파 조직원 아미르와 무하마드는 사형, 임란은 15년 형을 최종 선고 받고 각각 광주교도소와 안동교도소에 수감됐다. 조직원 중 셋은 5년형, 나머지 일곱 명은 방면됐다.그러나 이 사건은 1996년 가을 문제가 된다. 사형수로 5년 째 복역 중이던 아미르와 무하마드는 김수환 추기경에게 탄원서를 썼다. 실은 자기들이 한국에 온 지 한 달밖에 안 됐고 조직원도 아니며, 범행 날짜로 알려진 날은 파키스탄 명절로 취업 브로커도 겸하던 임란을 찾아갔다가 얼떨결에 성남 야산에 같이 있었을 뿐인데 임란이 자기들에게 누명을 씌웠다라는 거였다. 그들의 주장으로는 수사 팀이 그나마 한국어가 통한다는 이유로 임란의 진술에만 의존해 수사했고, 통역은 엉터리였으며, 심지어 심문 과정에서 경찰이 각목에 젖은 천을 감아 구타하고, 성기에 전기 고문을 가하는 등 13일 간 모진 고문을 했다고 주장했다. 자신들은 고통에 못 이겨 자백을 강요당했고, 자신과 조직원을 보호하려는 임란의 거짓 진술에 의해 졸지에 사형수가 됐다는 내용이었다.
이에 97년 3월 유엔 인권위원회는 한국 검찰 수사에 문제를 제기하고 한국 정부 측에 자료 제출을 요청했다. 한국 당국은 위원회의 자료 요청에 대해 즉각 응하는 대신, 희생자 및 증인 보호 등을 위해 해당 종결 사건의 기록에 대한 숙독, 촬영, 무단 전제는 제한했다(인권위원회 보고서 10.5항).[39] 위원회는 보고서에서 비록 공판 당시 속기록이 제공되지 않아 사건에 대해 모든 것을 검토할 수 없었다는 유감을 표시하면서도 한국 사법 당국에서 보내온 구속 기간 중 신체 검사 내역서 및 통역인들의 증언을 비롯한 각종 자료, 또한 1심과 2심의 판결 모두 고려한 결과, 위원회는 한국의 법체계(jurisprudence)에 따른 1심과 2심의 판결을 받아들이며, 두 사람에 대한 처우 및 판결에 대해 임의적이거나 사법 정의가 부정됐다고 여기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렸다(인권위원회 보고서 14.2항).[40] 동년 5월, 5년 형을 마친 나머지 세 조직원은 강제 출국됐고 사형수 아미르와 무하마드는 98년 2월 자로 종신형으로 감형됐다가 김대중 정부 시절인 99년 2월 '주비' 임란 사자드와 삼일절 특사로 사면을 받아 강제 추방 됐다.
홍준표는 훗날 2017년 4월 27일 서산 유세 때 유력 대선 주자로서 사형제 부활을 강력히 주장한 바 있다. 흉악범은 반드시 사형시켜야 하며, 피해자와 그 가족들의 인권도 중요하다가 주요 논지인데, 폭력 집단과 지속적으로 씨름해 온 그의 법조계 이력이 사형제에 대해 긍정적인 인식을 불러온 것으로 여겨진다. 사형제는 세계적으로도 뜨거운 논란거리이므로 홍준표가 사형제 부활의 당위를 어떻게 주장해 나갈 것인지는 지켜보아야 할 듯.
한편 1992년 사건 당시 사형수 두 사람이 소명 기회도 제대로 갖지 못한 상태는 아니었나 하는 2017년 미디어투데이의 문제 제기도 있는 상태다. 김영삼 정부 마지막 3개월만을 남긴 97년 12월 30일 한꺼번에 사형수 23명이 형 집행 됐을 당시 두 사람은 죽을 수도 있었다. 다만 링크된 기사는 변호사 측 의견만을 기반으로 작성돼 가해자들이 '진범이 아니다'라거나, 유엔 인권위원회의 조사 결과와 모순된 그들의 진술을 진실처럼 소개하는 등, 단정적인 태도로 접근한다는 점은 감안하고 판단하길 권한다. 인권위원회의 보고서에는 그들이 주장한 엉터리 통역 가능성에 대해 한국 사법 당국이 통역뿐 아니라 파키스탄인을 따로 참고인으로 불러 진술 내용을 확인하는 등 충분한 노력을 기울인 것으로 인정하고 있고, 고문 주장에 대해서도 사건 종결 전 법정에서 피고와 그 변호인은 고문 등을 입증하지 못했으며 고문 때문에 다쳤다는 귀도 원래 중이염을 앓고 있었음을 밝혔다. 또한 한국 사법 체계는 고문자를 엄벌함은 물론 고문으로 인한 자백에 대해 증거력을 인정하지 않고 있음도 보고서에서 다루고 있다(인권위원회 보고서 10.3).[41]
1992년 10월 21일에는 보험금 7억 원을 노리고 자기 지하 나이트클럽에 방화한 목포파 부두목 유인호와 행동대장 홍동표 외 6명을 체포, 구속했다.
대검찰청으로 파견된 중, 1993년 4월에는 동화은행 비자금 사건을 조사했다. 이때 김종인으로부터 20분 만에 뇌물 수수 자백을 받아낸 적 있다고 주장한다.[42][43] 그러나 당시 주임검사는 함승희였고[44] 홍준표는 당시 슬롯머신 사건을 담당했기에 큰 연관성은 없어 보인다. 다만 홍준표가 이 시기에 함승희와 친분을 가지고 있던 점을 감안하면 아예 무관하지는 않은 듯하다.[45] #
4.4.1. 슬롯머신 사건 수사
깡패와 건달로 본 100년 2부1993년 문민정부가 들어섰다. 당시는 사정 한파라 해서 공직 기강을 세운다는 명분 아래 군부 정권 시절의 거악들을 발본색원하던 시절이었다. 서울지검 강력부 검사 홍준표는 슬롯머신 사건을 맡았다. 빠찡코로 더 잘 알려진 슬롯머신의 당시 업계 매출은 연 1조 2천억 원 정도로 1조 원 수준의 호텔 카지노는 물론 경마마저 능가하는 규모였다. 이 슬롯머신 업소 대부분은 정덕진 일파에게 장악되어 있었고, 이들은 김태촌의 서방파와 손을 잡고 정관계 유력 인사들마다 로비를 하는 등 거대한 사회악으로 자라 있었다.
이들은 코인 한 개에 10만 원을 넘기지 않도록 되어있는 당첨금을 600만 원까지 시상하게 하는가 하면 87%로 규정되어 있던 당첨률도 18% 이하로 조작하는 등 온갖 불법을 저지르고 있었다. 게다가 정관계와 유착해 전현직 고위 관료 출신들을 주주로 앉히면서 수사 기관들의 내사를 중지시키는가 하면, 노태우 정권의 실세에게 접근해 정덕진의 친형을 구속한 검사를 좌천시키고 혐의자를 빼내게 하는 등, 무소불위의 권력을 누리고 있었다.홍준표는 일단 탈세 혐의와 슬롯머신 업소 갈취를 위해 김태촌에게 자금을 지원한 혐의로 정덕진을 체포한 뒤 구속시키고, 이후 정관계 관계자들을 내사하는 쪽으로 수사 방향을 세웠다. 홍준표는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어렵게 자랐던 정덕진의 어린 시절에 대해 공감하면서 인간적인 유대감을 확보하여 수사를 진행했다고 한다. 정덕진이 수사를 받으면서 언론의 관심을 받자 자신의 주변인들이 관심을 받는 것이 부담스러웠던 정덕진은 수사에 협조하기로 했다.
결국 수사를 통해 통일민주당 창당방해 사건, 슬롯머신 업소 인허가를 해주고 불법 영업을 단속하지 않는 대가로 2천만 원을 받은 이인섭 경찰청장[46]과 1억 원을 받은 천기호 경찰청 형사국장, 슬롯머신 업계 독점 실태와 탈세 혐의 내사를 무마시키고 2억 2천만 원을 받은 엄삼탁 안기부 기조실장 등을 모두 구속 기소했다.[47] 이 과정에서 박종철 검찰총장이 경질되었으며 파면된 공무원만 삼십여 명에 이르렀다. 검찰 관계자들을 수사하면서 협박과 압력을 많이 받았으나 이를 모두 무시하고 그대로 처리하였다.
슬롯머신 수사의 절정은 6공의 황태자로 불렸던 노태우 전 대통령의 부인 김옥숙 여사의 고종사촌 동생 박철언을 구속 기소한 것이었다. 정덕진에 대한 청와대의 내사를 무마시키고 5억 원을 받은 혐의를 포착한 것이다. 박철언은 평소 정치적으로 불편한 관계였던[48] YS의 정치 보복이라며 억울함을 강하게 호소했지만[49] 법원은 박철언의 결백하다는 주장을 받아들이지는 않았다.[50] 결국 박철언은 국회의원직을 상실하고 1년 6개월 동안 감옥에서 살아야 했다.[51][52]
이러한 일화가 드라마 모래시계를 통해 알려지면서 홍준표는 모래시계 검사라는 별명을 갖게 되었다. 하지만 2017년 5월 2일, 대선을 앞두고 모래시계의 각본가인 송지나 작가는 모래시계 검사는 여러 사람이 들려준 이야기와 여러 명의 캐릭터를 조합해서 만든 가공의 인물일 뿐 모래시계 검사가 홍준표 그 자체는 아니라고 주장했다.#
"요즘 '모래시계의 모델이 되었던 검사'라고 주장하시는 분이 계시는데 사실 관계를 바로잡고자 합니다. 그분은 제가 <모래시계>를 집필할 때 취재차 만났던 여러 검사 중에 한 분일 뿐입니다. 당시 제가 만났던 검사님들이 대충 기억에도 열댓 분. 그분들이 들려준 이야기와 각 검사님의 캐릭터를 조금씩 취합해서 만든 것이 드라마상의 강우석 검사였고요." -송지나 작가- #
그러나 송지나 작가가 쓴 글에 대해 홍준표는 페이스북을 통해 비하인드 스토리까지 꺼내며 정면으로 반박했다. 결국 홍준표는 같은 검찰 조직을 수사하고 선배 검사들을 구속 기소까지 했다는 이유로 검찰 내에서 완전히 찍히게 되었다. 어쩔 수 없이 안기부 1차장이었던 공안검사 출신인 정형근의 권유를 받아들여 1994년 10월 국가안전기획부에 파견되었다. 당시 보직은 국제범죄수사지도관. 이 시기 안기부 러시아 지부에 주재하면서 러시아 마피아에 대한 대책을 세웠고 지금도 그 프로그램 그대로 가동되고 있다고 한다.
이후 홍준표는 안기부 파견 해제를 요청하고 수사검사로 복귀를 노렸으나 1995년 9월 법무부 특수법령과[53]로 좌천되었다. 신승남 법무실장의 만류에도 홍준표는 곧바로 사직서를 제출하였고, 1995년 10월 7일부로 검찰을 나왔다. 이후 1996년 15대 총선 전까지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하고 방송 출연 등에 섭외되었다.
4.5. 총평
"판사는 이회창처럼, 검사는 홍준표처럼, 변호사는 노무현처럼 해라."
- 1990년대 중반 당시 대학가의 운동권에서 유행했던 문장이었다. 그가 얼마나 정의로운 인물인지 잘 보여준다.[54]
- 1990년대 중반 당시 대학가의 운동권에서 유행했던 문장이었다. 그가 얼마나 정의로운 인물인지 잘 보여준다.[54]
법조계에서 부적절한 왕따가 무엇인지 보여주는 가장 대표적인 사례다. 검찰청에서는 부당하게 홍준표를 왕따시키고 기수 열외를 했다. 이처럼 홍준표 검사는 매우 올곧고 맡은 바에 충실하고 시대정신이 투철한 정의로운 검사였다. 그만큼 예전의 검찰이 얼마나 부패해서 썩어있었고, 권력에 기생하여 살아왔는지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결국, 권력에 유착하려는 기회주의자들이 그를 왕따시킨 것이다. 1990년대만 해도 그 유명한 검사동일체가 법으로 명시되어 있던 시절이다. 검찰사무에 있어 무조건 상사(검찰총장)의 명령에 복종해야 하는 게 검찰 내 규율이었고, 이로 인해 기수 열외와 왕따가 자주 일어났다. 한창 다른 검사들로부터 시기를 받던 시절에는 대검찰청 정문 앞에 서 있는 수위도 그의 인사를 무시했다고 한다.
홍준표가 자신의 검사 시절을 회고한 저서인 <<홍검사 당신 지금 실수하는 거요>> 수기 등을 읽어보면, 동서남북을 가리지 않고 사방팔방으로 온갖 협박에 시달렸다. 권력형 비리 범죄를 파고들다가 사건에 연루된 정부 고위 관료, 선배 법조인들, 안기부(현 국정원)를 비롯한 고위 인사에게 압력을 받았으며, 지역 토착 조폭 집단을 소탕하다가 조폭들, 유지들, 또 그들이 로비한 정치인까지 소위 말하는 다구리를 치면서 홍준표를 협박했다. '당신과 당신 가족들을 모두 죽이겠다', '석궁으로 쥐도 새도 모르게 보내버릴 수도 있다' 라는 식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홍준표는 부당한 강압에 전혀 굴복하지 않고 권력형 비리와 조폭들의 범죄를 성역 없이 수사했다. 자신의 상관이라 할지라도 혐의점이 발견되면 어김없이 구속 수사를 해서 죄를 물었고 이런 검사로서의 소명을 끝내 버리지 않았기에 미움을 샀다. 전두환의 친인척들을 수사하여 진작부터 밉보였던 홍준표는 서울지검 남부지청 특수부 발령 4개월 만에 전보되어 이후 강력부와 형사부를 전전[55]했다. 결국, 슬롯머신 비리 사건 수사로 노태우 정권의 실세 박철언을 구속하며 그 화룡점정을 찍고 법복을 벗었다.
이 때문에 홍준표는 본인과 가족들의 안전과 생존을 위해서 김영삼의 제의를 받아 정계에 입문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정계에 입문했어도 언제나 스스로 비주류를 자처했던 것은 그의 정치 성향과 맞지 않게 보수 정당에서는 시대를 대표하는 부패한 인물들이 항상 주변에 있었기 때문에, 신념에 따라서 거물급 인사들에게 줄서기도 하지 않고 어느 정도 거리를 두는 모습도 보여준다. 그래서 홍준표의 정치 인생을 되돌아보면 보수 정당과의 정체성과는 결이 다르고 맞지 않는 옷을 입고 있는 부분도 보여준다. 또한 홍준표는 같은 검찰 출신 정치인인 황교안, 안상수, 박희태 등과도 그리 가까운 사이가 아니었다. 특히 황교안과는 하루가 멀다 하고 정치적으로 대립하기도 했었다.
정치인 홍준표에 대해서는 유권자마다 판단이 다르며 호불호가 꽤 심하게 갈리지만, 검사 시절의 홍준표는 비리 앞에 머리를 숙이지 않고, 정의와 법치를 지키려고 노력한 법조인으로 평가받는다. 이러한 그의 행적은 후배 법조인에게 귀감으로 남았으며 이 부분은 홍준표의 정치 활동과는 별개로 높게 평가해야 할 공적으로 남는다. 권력에 머리를 숙이지 않는 젊은 검사 홍준표는 온갖 살해 협박과 갖은 권력의 압박을 받았고 검찰을 비롯한 힘이 있는 조직에게 부당한 기수 열외까지 당했지만, 정치인 홍준표에게는 훗날 검사 시절 자신의 올곧은 행적으로 대권후보까지 거론될 정도로 거대한 재산이 되었다. 전직 고위 검사였던 홍만표가 연루된 정운호 게이트, 현직 검사장이었던 진경준이 연루된 넥슨 게이트,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와 돈봉투 만찬 사건같은 법조계 인사들과 고위 정치인들의 비리가 하나하나 발각되고, 이것들을 청산하려고 백방으로 뛰어다니는 시점이기 때문에, '검사 홍준표'로서 보여준 업적은 더욱 대단하다.
이 당시 검찰에 쫓겨나다시피 했던지라 훗날 19대 대선 당시 강력한 검찰 조직 개혁 공약을 내걸었었다. 검찰 조직의 썩어빠진 면모를 지긋지긋하게 겪으면서 잘 알고 있기 때문인 것 같다.
일부는 홍준표가 권력을 잡으면 검사 출신이었기 때문에 법조계를 감쌀 거라고 생각하는데 절대 그럴 수가 없는 것이, 홍준표는 검사 시절 대단히 정력적으로 일했음에도 부당하게 주변의 견제를 받아서 물러난 케이스다. 홍준표가 권력을 잡았으면 정치 검사나 줄서기 검사는 타작 날 것이 불 보듯 뻔했었다. 따라서 홍준표가 대통령이 된다면 검찰 조직을 문재인 정부처럼 장관을 통해서 개혁하는 것이 아니라 본인이 권력자로서 직접 개혁할 가능성이 크다. 애초에 이명박 정부 시절 법무부 장관을 약속받았음에도 하지 못한 이유가 바로 홍준표의 지나친 개혁 의지 때문이었다.[56][57]
최근에 와서 홍준표의 과거사와 올곧은 인생의 행적이 다시 발굴되었고, 유튜브 등지에서 화제가 되자 2030 지지층의 유입을 이끄는 데에 더욱 도움을 주고 있다.
5. 정치 경력
자세한 내용은 홍준표/정치 경력 문서 참고하십시오.1996년 정계 진출 이래로 제15·16·17·18·21대 국회의원, 한나라당 제10대 당대표 및 제15대 원내대표, 제35·36대 경상남도지사, 제19대 대통령 선거 자유한국당 후보, 자유한국당 초대 당대표, 제35대 대구광역시장 등 다양한 경력을 거쳐온 거물 정치인이다.
[1] 바이오그래피에 오류가 있다.맨 아랫쪽에 제9회 전국동시지방선거가 아니라 제8회 전국동시지방선거가 맞다[2] 호적상 1954년 12월 5일[3] 1974년 사망[4] 심지어 강제 징용 피해자였다.[5] 1996년 4월 사망[6] 다만 창녕-합천-대구는 서로 인접해 있기 때문에 거리가 그다지 멀지는 않다. 창녕의 바로 위가 대구이고 창녕 옆에는 합천이 있기 때문에 서로 가깝다. 합천에서 태어나서 대구에서 학창 시절을 보낸 전두환처럼 창녕과 합천에서 대구로 진학한 사례가 꽤 많다.[7] 영남고가 경북고에 뒤처진 이유는 경북고보다 역사가 짧아서 학맥 등이 부족하고 공립인 경북고와 달리 사립이기 때문이다.[8] 경북여고 역시 비평준화 시절 대구여고, 신명여고(현 신명고)와 함께 대구경북의 대표 명문 여고였다.[9] 홍준표의 10대 시절에는 중학교 입시도 존재했었고 경북고와 영남고는 고등학교로 개편된 시점 기준으로 35년 차가 나서 명문 출신을 심하게 따지던 20세기에는 학맥의 양과 질이 비교할 수 없었다.[10] 하지만 그의 대학 시절 사진만 보더라도, 그의 지인들은 당시 홍판표 하면 그가 늘 신던 검정 고무신을 떠올리곤 한다. 소개팅녀의 행동이 영남고 때문이 아니라 그의 패션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지만, 어쨌든 그는 출신고를 묻는 그녀에게 순간적으로 상당한 부담을 느꼈던 것만은 사실인 것 같다.[11] 고등학교 동문 모임을 살펴보면 총동문회 이외에 고등학교-특정학과 졸업생 동문회가 구성된 경우가 일반적이다.[12] 홍준표는 법과대학 내에 있던 행정학과 출신이다. 물론 법과대학 내에서는 법대 동문으로 인정하기는 하지만, 법학과 출신의 카르텔을 극복하기는 어려웠으리라 생각된다.[13] 물론, 결과적으로는 그는 비주류에서 주류로 상승하는 데 성공했다고 볼 수 있다. 5선 국회의원, 한나라당 원내대표, 당대표를 맡았고 재선 경남지사를 거쳐 대선 후보까지 올라, 보수 진영의 중심적인 인물로 성장했기 때문이다. 물론 이른바 '비주류' 출신이어서 그 과정이 순탄하지 않기도 했고, 특정 계파에 소속되어 활동하지 않았기 때문에 불이익이 따른 것은 사실이었다.[14] 카데바 실습 등 실습에 필요한 비용이 만만치 않은 게 문제였다. 집에서도 그걸 지원해 줄 형편이 되지 않았던 것. 지금도 의대 학비는 국립대 의대조차 웬만한 사립대 문사철보다도 훨씬 비싸다.[15] 훗날 냄비받침에서 본인 입으로 만약 저때 육사를 갔으면 오히려 감옥에 갔을 것이라고 회상했다. 홍준표가 장교로 임관(육사 32기)했다고 가정하면 당시 전두환이 12.12 군사반란으로 정권을 잡아 동향 서부경남과 TK 연고(전두환은 서부경남인 합천에서 태어나 TK인 대구에서 학창 시절을 보냈다. 홍준표 역시 서부경남 태생에 대구에서 학교를 다녔고, 전두환의 고향 합천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하여 전두환과 동향 사람이었다.)의 사람들을 싹 다 불러모을 때라, 가난에 시달려온 본인 입장에서는 뒤도 안 돌아보고 하나회로 갔을 것이기 때문.[16] 지금은 학사 관리가 엄격해져서 수능 끝난 고3들도 학교에서 오라고 하는 기간 동안에는 와야 하고 안 오면 무단결석 처리되지만, 이 당시는 지금보다 학사 관리가 느슨해서 홍준표처럼 대학 입시 끝난 고 3들은 학교에 나오지 않고 집에 돌아가 생계를 돕는 경우가 많았다.[17] 마을 곳간의 훔친 비료를 샀다는 장물 취득 혐의로 경찰에 연행되었는데, 2년 뒤에 밝혀진 사실에 따르면 조합장이 비료를 빼돌린 뒤 경찰과 짜고 아버지에게 덮어씌웠다고 한다.[18] 너무 억울해서 친구들에게 경찰을 잡으려면 뭘 해야 되냐, 경찰보다 높은 직업이 뭐냐고 물었더니 친구들이 검사를 추천해 줬다고 한다.[19] 서울대학교는 지원 자격 자체가 없었다고 한다. 서울대는 제2외국어가 필수여서 독일어나 프랑스어를 공부해야 했는데 당시 영남중고 재단 이사장이 "영어도 잘 못하는 것들이 무슨 독어 불어냐. 그 시간에 자습이나 더 해라."라고 제2외국어를 편성하지 않았다고 한다. 인강 제도가 잘되어 있고 학원도 보편화된 지금과 달리 그 당시에는 영어나 제2외국어를 제대로 공부하려면 학교 수업 외에 고액 과외를 받아야 했는데 영남고등학교는 가난하지만 공부 좀 하는 학생들을 장학금으로 유치하는 학교라서 이런 과외를 받을 형편이 못 되는 학생들이 많았다. 이사장이 말한 "영어 못한다"라는 말도 학생들이 공부를 못한다기보다는 영어를 제대로 배우지 못했음을 뜻한다고 보면 된다.[20] 현재 고대 행정은 정경대학 소속이지만, 당시는 법과대학 소속이었다. 서울대학교도 마찬가지로 아주 옛날에 법과대학 안에 법학과와 행정학과가 있었던 적이 있다. 입결은 법학과가 우선이었고 법학과는 사법시험, 행정학과는 주로 행정고시를 쳤다. 홍준표가 청년의꿈에서 밝히기로는, 법대 행정학과는 6법에 행정법, 행정학, 경제학 등 다양한 분야를 다뤄서 공부량이 아주 많았었다고 회고했다.[21] 하숙 문화가 있던 이 당시에는 상경한 가난한 고학생들이 부잣집 자녀들의 과외를 하면서 생활비를 충당하다가 눈 맞는 일이 많았다고 한다. 다만 결혼까지 가는 경우는 극소수였고, 그 소수조차도 상대가 여학생이라 임신 등의 피치 못할 사정이 많았었다. 그 반대인 경우는 꽃뱀 소리 들으며 바로 쫓겨났듯이, 잘못되면 모든 누명을 뒤집어쓰고 그 동네 과외는 꿈도 못꾸는 최악의 상황이 일어난다.[22] 이때 만났던 하숙집 주인의 아들이 바로 김태형 감독이다. 나이 차는 좀 났지만 홍준표가 순대도 사주는 등 친밀하게 지내 호형호제하는 친한 사이였다. 김태형이 선수였을 때 팬이기도 했고, 홍준표가 훗날 대구광역시장이 된 후 개인적인 바람으로 삼성 라이온즈 감독으로 김태형이 왔으면 좋겠다고 기대를 내비치기도 했다. 그러나 김태형 감독은 2024년 롯데 자이언츠로 부임해 실현되지는 못했다.[23] 홍준표는 이후 고시 준비와 검사 생활에 바빠 이후 30년 가까이 지난 2000년대 초가 되어서야 이들과 재회했다고 하는데, 동기들이 그를 처음에 잘 못 알아본 이유 중 하나가 재학 시절에는 개명하기 이전의 이름 홍판표로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24] 24,000원의 월급에도 못미치는 박봉. 현재 가치로 40만 원이 채 안 되는 금액이다. 당시 공장 노동자 월급이 8만 원(130만 원) 정도였다고.[25] 왜 경비원이 순찰은 안하고 바닷가에서 모닥불 쬐고 있냐고 생각할 수 있는데, 당시 현대 조선소에는 담이 없고 철조망만 대충 쳐놔서 잔뜩 쌓아둔 철근 등의 자재를 노리는 도둑들이 많았다고 한다. 홍판표 부친의 일은 밤새 칼바람이 부는 백사장에 앉아 자재들을 지키는 일이었던 것.[26] 저 선배의 도움을 얻기 전까지 4개월 동안 은행 입출금 창구에 오갔다고 한다. 자기를 보고 매번 웃는 모습에 자기를 좋아하는지 알았다고... 사실 행원 업무상 고객한테 웃으며 응대하는 게 당연한 건데 그걸 호감으로 착각한 것이다.[27] 월요일에 왔다고 말하면 부인이 자존심이 상해 수요일로 박박 우겼었다고 한다. 지금은 나이가 들고 마음에 여유가 생겨 그냥 쿨하게 인정하는 모습을 와카남에서 보여주었다. 문제는 직후 하는 얘기가 "(은행) 퇴근하면 딱히 할 것도 없고 심심해서..."였고, 홍준표는 "그러면 그냥 심심해서 왔다는 기가...?라고 당황한다.[28] 하지만 그러면서도 집에 찾아온 적이 없지는 않다고 하니 이 말은 유세 중에 다소 과장적으로 발언한 것으로 보이고, 실제로는 가끔 올 수 있도록 한 모양이다. 다만 장인이 와도 일부러 자리를 피해버리니 그 분위기는 정말로 집에 오지 마라고 하는 격이었을 것이다. 이를 넓은 의미에서 '발을 못 붙이게 하다'라고 한 듯하다.[29] 당시에는 살인죄 공소시효가 남아 있던 때였다.[30] 훗날 홍준표는 회고하기를, 현역으로 복무하고 싶었지만 여자친구(이순삼 여사)와 떨어지는 것도 싫고 고시 공부를 중단하기도 부담스러워 내심 다행이라 생각하고 현실과 타협해 출퇴근하면서 고시 공부를 병행했다고 한다.[31] 당시 홍준표는 14기, 황교안은 13기로 황교안이 1기수 선배였다. 나이는 황교안이 1957년생이라 홍준표가 4살 연상이다. 훗날 21대 총선에서 공천 배제 때문에 생긴 지독한 악연을 생각하면 실로 얄궃은 일이라 하겠다.[32] 홍판표의 '판'자가 ‘판단할 판(判)’인데 사람 이름에 '선칼도방(刂)'이 들어가는 게 좋지 않다며 개명을 권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날 청주에 있는 검찰청 소년선도위원인 역술가 류화수를 통해 기린 린(麟)과 평평한 준(準) 두 자를 받았는데, '린표'보다 '준표'가 더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다. 당시는 개명 허가를 받기가 까다롭고, 절차도 꽤 복잡한 시절이었지만 윤 원장이 바로 싸인하고 승인했다고 한다. 대부분의 법원에서 개명 허가는 법원장의 담당이다.#[33] 현 울산지방검찰청. 1997년에 경상남도 울산시가 울산광역시로 승격하면서 이에 따라 울산지검으로 승격.[34] 국가원로자문회의가 대표적이다.[35] 검찰 내에는 직접 수사하는 부서들이 있는데 특수부, 공안부가 검찰의 꽃이고 강력부까지 3부서가 된다. 경찰에 입건된 사건을 수사하는 형사부로 보낸 것은 독자적인 수사를 하지 못하게 막은 조치였다.[36] 노태우 정부 중후반, 김기춘이 법무부장관으로 재직하며 강기훈 유서대필 조작 사건을 지휘했다. 이때 공안검사를 지내다 후일 정치권에 입문해 이런 경력이 문제시된 곽상도란 사례가 있다.[37] 평검사가 서울 소재의 지검에서 인사 발령을 통해 계속해서 지방을 떠돌면 부장검사까지는 승진하더라도 그 이상의 승진은 불가능하다. 특히 서울에서 멀수록 좌천이라는 인식이 강한데, 홍준표 검사는 인사 보복의 일환으로 광주로 좌천된 셈이다.[38] 애초에 특수부에 있어야 할 검사를 강력부로 좌천시킨 셈이니 강력부에서의 실적이 좋을 수 밖에 없었다.[39] 10.5 With regard to the Committee's request for the trial transcripts and the judgements in the case, the State party maintains as a rule that it is not allowed to peruse, photocopy and transmit the records of closed cases in order to protect the safety of victims and witnesses and the repute of defendants. It moreover argues that translating about a thousand pages of investigation documents is physically impossible at this time.[40] 14.2 The Committee notes that the authors' claims that there was not enough evidence to convict them, that they had been tortured in order to force them to confess and that mistakes occurred in the translations of their statements were examined by both the court of first instance and the court of appeal, which rejected their claims. The Committee refers to its jurisprudence that it is not for the Committee, but for the courts of States parties, to evaluate the facts and evidence in a specific case, unless it can be ascertained that the evaluation was clearly arbitrary or amounted to a denial of justice. The Committee regrets that the State party did not provide a copy of the trial transcript which has prevented the Committee from examining fully the conduct of the trial. Nevertheless, the Committee has considered the judgements of the District Court and the High Court. Having regard to the content of these judgments and in particular their evaluation of the authors' claims subsequently made to the Committee, the Committee does not find that those evaluations were arbitrary or amounted to a denial of justice or that the authors have raised before the Committee any issues beyond those so evaluated.[41] 10.3 In respect to the authors' claim of having been tortured, the State party notes that this allegation was brought before the court during the trial, but that the authors and their legal defence failed to present any tangible evidence, and their claims were dismissed. In this connection, the State party recalls that acts of torture are prohibited by law; if torture nevertheless occurs, the perpetrator is severely punished and any confession obtained through acts of torture loses its validity.[42] https://youtu.be/Fe72dZ7VXOY&t=90s[43] https://youtu.be/EbDT_PdOYqU&t=850s[44] http://news.jtbc.joins.com/article/article.aspx?news_id=NB10056398[45] 이 때문에 지금까지도 김종인과 사이가 좋지 않다. 2012년 19대 총선을 앞두고 새누리당 비대위원이었던 김종인이 당시 홍준표의 지역구인 서울 동대문구 을을 거론하면서 당 대표를 사퇴한 사람에게 공천을 주면 안 된다고 발언한 바 있다. 당시 홍준표는 자신이 조사했던 뇌물 사건 피의자에게 공천받지 않으려고 했으나, 출마할 사람이 없어서 당에서 공천을 시켰다. 이후 2020년 김종인이 미래통합당 비대위원장으로 거론되자, 홍준표는 뇌물 사건을 언급하면서 "이제 그만 공적 생활을 정리하시고 정계에 기웃거리지 말라. 그만하면 오래 했다"고 김종인을 비판했으며 2023년 7월에는 김종인이 윤석열 정부의 차관 인선을 비판하자 "그러면 건국 이래 뇌물 먹고 구속된 경제수석(똑같이 그가 맡았던 차관급 직책을 거론하여 맞비판한 것.)이 있었냐. 별 보고 점 치는 점성술사, 그리고리 라스푸틴이 아직도 정계 남아 있냐."라며 맞받아쳤다.[46] 홍준표의 영남고등학교 선배였다. 홍준표가 대학에 다니던 시절에는 영남고 아웃풋이 없다시피 했지만 이후 사회에서 생성된 영남고 아웃풋 중 하나가 황병태 前 한국외대 총장과 이인섭 前 경찰청장이다. 물론 황병태는 이들보다도 훨씬 전의 대선배.[47] 이 모든 수사를 홍준표 검사 혼자서 한 것은 아니고 서울지검 강력부 전체에서 했지만, 처음 정덕진을 추적해서 구속한 것은 홍준표고 정덕진을 통해 슬롯머신과 관련된 사람들을 밝혀낸 것도 홍준표다. 나머지 강력부 검사들은 홍준표에게 관련된 사람들의 사건을 받아서 수사하는 역할을 했다.[48] 3당 합당 이후 민정계와 민주계의 당내 차기 권력 다툼, 박철언과 김영삼이 함께 소련에 방문할 당시 YS가 노태우 대통령의 친서를 가지고 온 박철언을 호텔에 두고 혼자 고르바초프를 만나며 빚어진 갈등 등이 원인이다.[49] 정황 증거만 있고 물증이 없었기 때문에 박철언은 잘못된 재판과 수사였다고 주장하였다. 그런데 20여년 후 성완종 리스트 사건으로 홍준표가 똑같은 주장을 하게 된다. 다만 박철언과는 달리 홍준표는 최종적으로 무죄 판결을 받았다.[50] 다만, 물증이 없고 정황만 있었고 법정에서 증인이 증언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수사와 재판이 잘못되었다고 헌법재판소에 위헌 소송 청구를 했고 헌재에서 이것을 받아들였다.[51] 박철언의 의원직 상실로 치러진 1994년 재보궐선거에서는 박철언의 부인 신민당 현경자 후보가 당선되었다.[52] 21대 총선 수성구 을 무소속 출마 선언문에 의하면 검사복을 벗고 정치인의 길로 들어섰을 때 처음으로 출마를 검토했던 지역구가 수성구 갑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마침 이 지역구에 박철언이 사면 복권이 되어 자유민주연합 소속으로 출마를 하게 되었고 홍준표는 ‘이런 분이 정치권에 다시 들어와서는 안 되겠다’ 라는 생각으로 맞불 출마를 검토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일각에서 검사와 피의자 둘이 맞붙으면 당시 수사가 ‘정치 수사’로 오해받을 수 있다는 주장이 강하게 제기되어 출마를 포기했다고.... 이후 박철언은 YS에 대한 비토가 강했던 대구 지역 분위기를 등에 업고 과반 득표로 당선되며 재기에 성공하며, 박철언의 소속 정당인 자민련도 대구 의석 13석 중 8석을 휩쓸며 압승하였다. 만약 홍준표가 이때 대구에서 출마했다면 15대 국회에 입성하지 못했을 확률이 높다.[53] 남북통일에 대비한 법령을 연구하는 부서로 일선에서 수사하던 검사가 완전히 좌천된 셈이다. 여기서 연구하던 법령은 독일의 법이었다. 그러나 홍준표는 독일어를 할 줄 몰랐다. 홍준표에게 검사복을 벗고 나가라는 암묵적인 법무부의 인사 발령이었고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54] 공교롭게도 위에 언급된 이회창, 홍준표, 노무현은 전부 김영삼과 관계가 있다. 이회창은 문민정부 시절 김영삼에 의해 감사원장과 국무총리로 발탁되면서 승승장구한 끝에 대선 후보까지 올라갔고 홍준표와 노무현은 정치 입문 당시 후원자 역할을 해준 사람이 김영삼이다.[55] 특수부와 공안부는 검찰의 꽃이라 불릴 정도로 위상도 높고 권력도 막강한 보직이다. 자세한 내용은 검사(법조인) 항목 참조.[56] 정치합시다에서 유시민과 토론 중 홍준표 본인이 직접 밝히길 MB가 대선에 출마했을 당시 법무부장관을 3번이나 약속받았으나, 대통령 당선 뒤 그의 개혁 의지가 너무 강한 데다가 같은 편 친인척까지 원리 원칙대로 할 것이라는 MB 최측근들의 의견에 법무부장관을 하진 못했다. MB가 미안한 나머지 환경부장관 자리를 권했으나, 홍준표 성격에 한직을 수용할 리가.... 집에 귀가 후 아내한테 이 얘기를 했더니, 아내가 "그래도 장관 자리가 낫지 않아?" 라고 핀잔을 줬다고 한다.[57] 그러나 이후를 생각해 보면 홍준표가 환경부장관을 고사한 것이 그에게 오히려 더 큰 자산이 되었다. 그 어떤 임명직도 맡지 않고 선출직만 8번(5선 국회의원, 재선 경상남도지사, 초선 대구광역시장) 거침에 따라 "홍준표라는 정치인은 권력에 줄 서지 않는다"라는 이미지가 커졌기 때문이다. MB라는 인물이 (진위와와 상관없이) 현재 민주계, 진보 진영에서 "검찰이랑 야합해 노무현을 죽인 천하의 XXX"이라는 부정적 인식을 받고 있음을 고려하면, 그가 MB의 환경부장관을 수락했었으면 MB의 그늘에서 못 벗어나고 'MB의 하수인' 운운 소리를 들으며 외연 확장에도 불리했을 것이다. 거기다가 이후에 이주호 교육부장관, 유인촌 문화체육관광부장관 등 MB 정부의 내각을 사실상 재활용하는 특성을 가지는 윤석열 정부가 출범했기 때문에, 자칫 '윤석열의 딸랑이'으로까지 전락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MB의 최측근인 이재오는 19대 대선 당시 군소 후보들 중에 정치 커리어가 가장 화려하고 이름값도 높음에도 불구하고 탄핵 대선 특성상 친이의 좌장이라는 이미지가 오히려 독이 되어 유권자들의 반발을 샀고, 박형준, 오세훈, 임태희도 제8회 전국동시지방선거 때 민주당과 민주당 지지자들에게 'MB의 하수인'이라는 공격을 많이 받아야 했다. 박형준은 이명박 정부에서 정무수석을 맡았고, 오세훈은 이명박 서울시장의 지지에 힘입어 그에게서 서울시장을 물려받았으며, 임태희는 이명박 정부에서 노동부장관, 비서실장을 맡았던 친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