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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관참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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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효과3. 사례
3.1. 한국사3.2. 서양3.3. 인물 목록
4. 비유적 표현
4.1. 사례4.2. 관련 문서

1. 개요



직역하면 관을 쪼개고, 시체를 벤다.

이 말은 이미 죽은 사람이 생전에 저질렀던 죄상이 뒤늦게 드러난 경우 시체를 무덤에서 꺼내 그 시체에 극형을 내리는 걸 말한다.

죽은 후에 정치적인 이유 혹은 살아 있을 당시 그 위세에 눌려 죄목을 따지지 못했을 경우에 시행한다. 전자의 대표적인 예는 조선 시대 사화에서 벌어졌고 후자의 대표적인 예는 영국청교도 혁명 때 권세를 잡고 독재정치를 펼쳤던 올리버 크롬웰이다.

시체의 목을 베기 때문에 부관참두() 혹은 육시효수()라고도 불린다. 살아 있는 사람을 산 채로 살을 발라내 사형시키는 형벌인 능지처참과 혼동하지 않도록 주의하자.[1]

2. 효과

사실 의학적으로 이미 죽은 사람의 몸에 무슨 짓을 한다고 해서 당사자는 이미 죽은 몸이니 당연히 육체적으로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므로 이성적으로 보자면 정말 쓸데없는 행위다. 인간 사회에서 시체 훼손은 당사자보다는 이 행위로 인해 어떤 형태로든 정신적 영향을 받을 사람에게 보여주기 위한[2] 일종의 과시라고 볼 수 있다. 즉 부관참시는 실질적인 형벌이 아닌 정치적인 행위로 볼 수 있다.

전근대 사회에서도 시체 훼손은 금기였지만 현대 사회에서도 되도록 금기시하는 편이며 시체 훼손 행위를 해당 시체의 주인인 고인의 명예를 훼손한다고 해서 법으로도 금지하고 있다. 대한민국에도 시체등손괴·유기·은닉·영득죄 조항이 있다. 이런 상황에서 부관참시는 정치적 리스크가 상당히 큰 행위로 부관참시를 하는 사람이 절대적인 권력을 손에 쥘 수가 있을만큼 강하거나 시체 주인이 알고 보니 굉장히 사악한 사람이 아니었다면 오히려 역풍을 맞을 수 있다. 때문에 보통은 그런 역풍을 걱정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압도적인 권위가 새로이 들어섰을 때 행해지는 편이다.

3. 사례

3.1. 한국사

신라의 반란자 김헌창김헌창의 난을 일으켰으나 웅진성이 포위되고 패색이 짙자 자결하고 부하들이 그의 명예를 지켜주기 위해 머리와 몸을 베어 따로 묻었지만 웅진성을 함락한 신라군은 김헌창의 시체를 수색해 모아서 다시 베었다고 한다.

고려 시대에도 삼국사기의 편찬자이자 저명한 유학자였던 김부식이 1170년 일어난 무신정변 이후 묘가 파헤쳐진 뒤 부관참시당했는데 일전에 인종 때 그와 그의 아들인 김돈중이 무장 정중부의 수염을 태워먹는 사건이 있었고 이 사건에 앙심을 품고 있던 정중부를 위시한 무신들이 김돈중을 처참히 죽인 뒤 그의 아버지인 김부식의 시신마저 묘에서 꺼내 무참히 시신을 토막내 버렸다고 한다.[3]

부관참시로 가장 유명한 사례가 바로 무오사화의 원인이 된 김종직의 〈조의제문〉인데 이것은 패왕 항우에게 결국 왕좌를 넘겨준 초나라 의제를 빗대어 세조왕위 찬탈을 은유적으로 비난한 것으로, 연산군 4년에 유자광이 이를 연산군에게 고하는 바람에 일이 터졌다. 결국 김일손, 권오복 같은 김종직의 제자들이 거열형을 당했으며 김종직 자신은 이미 이세상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에 묘가 파헤쳐져 시체는 토막나고 효수되었다.[4] 오늘날이면 몰라도 전근대 시절 김종직의 세조에 대한 공격은 비단 연산군뿐만 아니라 그 어느 왕이라도 묵과할 수 없는 왕실 능멸이었다.[5]

김종직의 문인이었던 정여창과 생육신 중 한 사람이었던 남효온도 연산군 10년 갑자사화 때 부관참시를 당했다.[6] 세조의 일등 참모였던 한명회가 갑자사화에 연루되었다고 하여 무덤이 파헤쳐져 시체가 토막나고 한양 저잣거리에 목이 효수되었다.[7]

한편 연산군 때 공조판서로 있었고 《용재총화》의 저자이자 세조의 사람이기도 했던 성현도 세상을 떠난 지 수개월 후 일어난 갑자사화로 인해 시체의 목이 달아났다.[8] 정창손, 어세겸, 심회, 이파 등이 실록을 뒤져 어머니 윤씨를 폐위시키는 데 일조했다고 부관참시했다. 특히 연산군이 ‘갑자육간(甲子六奸)’이라고 지목한 권신 이극균(좌의정)·이세좌(예조판서)·윤필상·성준·한치형(이상 영의정)·어세겸(좌의정) 모두 끔찍한 화를 입었다. 이들이 당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실록을 보면 뼈를 갈아 바람에 날려버리는 쇄골표풍(碎骨瓢風)이나 집을 헐어 연못을 만드는 파가저택(破家瀦澤) 등의 형벌도 자행했다고 한다.

1894년 4월 14일 상하이에 있던 김옥균이 자객 홍종우에게 암살당했고 그의 시신이 조선으로 오자 곧바로 부관참시당했는데 이는 한국사의 마지막 부관참시가 되었다.

3.2. 서양

철기대를 이끌고 청교도 혁명에 승리하여 찰스 1세의 목을 치고 의회파의 영웅이 된 올리버 크롬웰도 혁명 후 독재 정치를 펼쳤는데 사후 아들인 리처드 크롬웰에게 권력을 이양하려고 하다가 장로파가 왕정복고를 실행해 찰스 2세를 옹립하면서 한 때 호국경이었던 크롬웰은 왕을 죽였다는 반역자란 죄목이 붙었고 1660년 12월 4일 의회 투표를 통해 크롬웰의 부관참시를 결정했다. 1661년 1월 30일, 그러니까 찰스 1세 처형 12주년 기념일인 바로 그날에 무덤에서 꺼내서 9시간 동안 런던의 교수대에 매달린 후 토막냈다. 시체는 매장 당시 잘 절였기 때문에 그냥은 잘 잘리지도 않아 도끼로 30번을 내리쳤다고 한다. 목은 장대에 꽂혀 웨스트민스터 성당 홀에 걸렸으며 살점들은 교수대 근처 들판에 뿌려젔다.

사족을 더 붙이자면 이 크롬웰의 "머리"는 기구한 사연을 가지고 있는데 마치 고대 유물처럼 한 번 도난당한 후 300년 동안 여러 사람의 손을 거쳐 떠돌아다니다가 결국 1960년에 이르러서야 크롬웰의 모교 케임브리지 시드니 서식스 대학에 매장되었다. 크롬웰의 머리가 도난당한 후 떠돌아다닐 때의 일설에 의하면 아이들의 축구공으로 쓰이기도 했다가 쪼개져 템스 강에 버려졌다는 소문도 있었다.

3.3. 인물 목록


  • 권전 (1371 ~ 1441 / 1456) - 현덕왕후의 부친이자 단종의 외할아버지.
  • 가이우스 그라쿠스 - 자결한 그의 시신은 머리가 베어져 효수되었다.
  • 기자 - 기자가 조선에 와 기자조선을 세웠다는 기자 동래설에 따라 평양 기림리(현재의 평양 중구역) 일대에 기자릉(箕子陵)이 조성되었고 이것이 김동인의 《배따라기》에도 묘사되어 있으나 1959년 "봉건 지배계급이 벌인 사대주의의 산물이며 조선 민족에 대한 모욕"이라는 김일성의 지시로 묘가 파해쳐지고 일대에는 공원이 조성되었다. 기자의 실존성은 현대 한국사학계에서 부정되고 있지만 실존했던 인물이었다면 완벽한 부관참시다.
  • 김만금 (1911 ~ 1984 / 1997)[9] - 사망한 뒤 1990년대에 용성 사건[10]의 주범이라는 이유로 김정일의 명령에 의해 무덤이 파헤쳐졌는데 김만금의 유골을 끌어내서 공개재판을 해서 논죄하고 유골에 기관총으로 사격을 가해 가루를 내 버렸다. 김만금의 가족들은 정치범수용소로 보내졌는데 억울하다고 한탄하던 가족들은 즉결처형되었다. 2000년이가 넘어서야 서관히와 함께 복권되었고 가족들은 풀려났다.
  • 김부식 (1075 ~ 1151 / 1170) - 해당 문서로.
  • 김제남 - 1613년에 사사당한 후 부관참시되었다.
  • 김종직 - 무오사화 문서로.
  • 김처선(1421 ~ 1505)의 부모 (1505년 부관참시) - 김처선의 충언을 받아들이지 못한 연산군은 김처선을 죽이고 그 가문도 멸족시킨 걸로 모자라 김처선의 부모의 무덤까지 없애 버렸다.
  • 김헌창
  • 남효온
  • 니콜라에 차우셰스쿠 (1918 ~ 1989 / 1989) - 총살형 당시 집행관들의 증오심으로 인해 사살 후 몇 시간 뒤 또 다시 총격을 가했다고 한다.
  • 도요토미 히데요시 (1536 or 1537 ~ 1598 / 1603) - 도쿠가와 이에야스쇼군에 취임하자마자 곧바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무덤 자체를 폭파시켜 없앴으며 그걸로도 모자라 아들애첩 및 손자 도요토미 쿠니마츠는 물론 충성스런 가신들도 보내주었다.
  • 루이 15세의 자녀들
  • 린썬 - 문화대혁명 당시 홍위병들에 의해 묘지가 폭파당했고 시체는 소각되었다. 다행히 마오쩌둥 사후 복권되어 묘지를 다시 만들었다.
  • 만력제 - 명나라 역사상 최악의 암군으로, 명 13릉 중 유일하게 지하 무덤을 발굴하던 중 문화대혁명이 일어나서 홍위병들에 의해 시체가 불태워졌으며 비가 내려 잿가루도 어디론가 사라졌으니 나라를 말아먹은 것에 대한 천벌을 받았다는 말이 나올 만 하다. 다만 평가는 평가고 이 때문에 만력제의 체격이나 건강 상태 등에 대해 정확히 알 수 있었던 증거가 영원히 사라졌다.
  • 바르톨로메노 페레티 - 바르바로사에게 부관참시당했다.
  • 박남기 (1928 ~ 2010 / 2010) - 박근혜 정부 시절에 탈북한 고위급 탈북자가 2021년 월간조선에 전한 바에 따르면 총살형된 후 김정은의 지시에 따라 북한 최고위층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남포시의 제철소 용광로에 시신이 던져졌다고 한다. #
  • 박춘금
  • 블라디미르 1세 - 몽골 제국의 침공으로 무덤이 파괴되었다. 블라디미르 1세가 동슬라브 역사상 최고의 명군들 중 1명으로 평가받는지라 현재까지도 러시아인, 우크라이나인, 벨라루스인이 몽골 제국을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원인이 되었다.
  • 사사정
  • 상앙 - 자신이 개발한 거열형으로 부관참시당했다.
  • 송병준 - 후손이 선산을 매각할 때 묘를 이전하지 않아서 선산의 소재지인 용인시에서 무연고 분묘로 간주하고 행정처분해 버렸다.[11]
  • 심회 - 심온의 아들. 폐비 윤씨 사사에 반대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연산군에 의해 부관참시되었다.
  • 쑹자수 - 역시 문화대혁명 때 홍위병들에게 무덤이 파괴되고 유골이 부서졌다.게다가 이건 장칭그의 딸을 너무 미워해서 직접 지시를 내린 것이었다.
  • 아미나 - 무함마드의 어머니. 사우디아라비아 정부가 아미나가 지옥에 있다는 전승 때문에 그녀의 무덤을 파괴해 버렸는데 이것 때문에 온건한 무슬림들이 사우디아라비아 정부를 비판하기도 했다.
  • 아이신기오로 도르곤
  • 아흐마드 알리파이 - 1183년에 사망한 시아파 성인. 이라크 레반트 이슬람 국가가 그의 무덤을 불도저로 밀어 없애 버렸다.
  • 악비 - 역시 문화대혁명 때 홍위병들에게 무덤이 파헤쳐져 유골이 불에 타 가루가 되었다.
  • 안창남 - 역시 홍위병들에게 무덤이 파헤쳐지고 유골마저 사라졌다.
  • 아유브 칸 - 2024년 5월 13일 카와자 아시프(Khawaja Asif) 파키스탄 국방부장관이 파키스탄 국회에서 그를 독재자이자 '모든 혼란과 혼돈의 원인'이라고 비난하며 그의 시체를 파내 파키스탄 헌법 제6조에 따라 반역죄로 교수형에 처하라고 요구했다. 실제로 부관참시가 된 것은 아니므로 취소선 처리. #
  • 악바르 대제 - 아우랑제브 시기 군사원정을 이유로 계속된 수탈에 폭발한 힌두교도들이 폭동을 일으켜 무덤을 약탈하고 유해를 불태워 버렸다.
  • 앙리 4세 (1553 ~ 1610 / 1793년 부관참시) - 프랑스의 명군으로 왕실 묘지 역할을 하던 생 드니 대성당에 안장되어 있었으나 프랑스 혁명 당시 분노한 군중들에 의해 역대 왕실 인사들의 묘역이 파괴될 때 시신이 함께 능욕을 당했고 시신의 머리는 잘려나가 민간에 넘겨졌는데 200여년 동안 떠돌다가 2010년에야 신원이 밝혀져 생 드니 대성당에 안장되었다.
  • 양소
  • 양후청 - 명색이 시안 사건으로 공산당의 목숨을 이어 준 사람인데도 가차없이 홍위병들에게 부관참시당했다.
  • 올리버 크롬웰 (1599 ~ 1658 / 1661년 부관참시) - 이 분야의 끝판왕. 부관참시 후 머리만 프랑스 전국 유람을 다니면서 효수조리돌림을 당했다.
  • 왕기
  • 왕징웨이 - 사망하기 전부터 이미 매국노로 찍혀 있었기 때문에 무덤을 콘크리트로 만들어 달라고 유언을 남겼지만 종전 후 장제스다이너마이트로 폭파시켜 버렸다.
  • 왕차이위 - 장제스의 어머니. 문화대혁명 중에 당연히 홍위병들이 개떼처럼 몰려와서 무덤을 박살내고 시신을 소각했다.
  • 요나 - 2014년 7월에 이라크 레반트 이슬람 국가에 의해 무덤이 폭파당했다.기사
  • 윌리엄 1세 - 그의 무덤은 16세기 종교전쟁 때와 18세기 프랑스 혁명 때 약탈되어 관 속에 넓적다리뼈 하나만 남아 있다.
  • 유관순 - 이장을 앞두고 아무 통보도 없이 무덤이 파헤쳐지면서 그녀의 유해가 분실되었는데 조선인들이 그녀의 유해를 받들어 독립운동의 구심점으로 삼을 가능성을 두려워한 일제에 의해 무덤이 훼손되고 유골이 파괴되었다는 설이 있다.
  • 유성원 - 사육신의 일원이지만 다른 이들과 달리 체포되기 전에 먼저 자살했는데 다른 사육신들이 사형당할 때 그의 시신도 함께 부관참시당했다.
  • 류영경
  • 유자광 - 야사에는 자기가 세상을 떠난 뒤 부관참시당할 것을 예지해 가짜 무덤을 만들어 피했다고 전해지나 실제로는 중종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 유정 - 중일전쟁일본군에 의해 사당과 묘지가 폭파되었다.
  • 응오딘지엠 - 베트남이 통일되자 이미 사망한 남베트남의 장관, 군인 등과 함께 무덤이 파헤쳤고 시체는 소각당했다.
  • 이두황 - 훈련대 제1대대장으로서 을미사변에 가담하고 친일내각 하에서 전라북도 관찰사를 역임하며 남한 대토벌 작전에도 관여하는 등 적극적으로 친일의 길을 걸은 매국노이며 1951년 전북경찰국 서남지구 전투경찰대 제2연대장으로 빨치산 토벌차 활악 중이었던 차일혁 경무관이 장지에 출동해 무덤을 파헤치고 유골항아리를 깨부숴 버렸다.[12]
  • 이세적(이적)
  • 이오시프 스탈린 - 본래 블라디미르 레닌 옆에 방부처리되어 안치되었으나 생전에 자신과 내내 다퉜던 니키타 흐루쇼프가 집권하면서 그의 명령에 의해 강제로 화장되었다.
  • 이완용 - 같은 친일파들 사이에서도 외면당했을 정도의 악질 매국노. 관뚜껑을 덮은 명정은 그의 일가라고 오해받던[13] 사학자 이병도[14]가 태웠고 이완용의 시신은 후손들이 화장했다는 야사가 있는데 사실이라면 이 문서에 들어갈 것이다. 그의 무덤은 테러도 많이 당했다.
  • 임사홍
  • 임숭재 - 반정군에 의해 무덤파서 목을 베어 도성거리에 효수해 버렸다.
  • 자로
  • 장각 - 황보숭에게 당했다.
  • 장거정 - 역시 홍위병들에게 무덤이 파괴되고 유골이 불태워졌다.
  • 정여립
  • 정여창
  • 정인지
  • 정창손
  • 조조 - 연암 박지원의 저서 열하일기 "구외이문(口外異聞)"에 나오는 얘기로 건륭제가 조조의 무덤을 발견해서 시신을 참하여 한소열의 영전에 올렸다고 한다. 사실이라면 여기에 속하겠지만 이는 당대에 떠돌던 야사일 것이다. 조조 무덤 문서로.
  • 조헌제2차 금산성 전투에서 전사한 조선 의병 - 이들이 묻힌 칠백의총은 일제강점기 말이었던 1940년에 일본인들에 의해 철거되었으며 1952년에 복원되었다.
  • 존 위클리프
  • 좌종당 - 문화대혁명 때 홍위병에 의해 무덤이 파괴되었고 유해도 부관참시되었다.
  • 주전충
  • 지미 새빌 (1926 ~ 2011 / 2012) - 생전에 저지른 성범죄가 밝혀진 후 무덤이 철거되고 시신도 화장되어 유가족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이 모르는 곳에 뿌려졌다.
  • 진패선
  • 초나라(楚) 평왕 - 억울하게 참살당한 아버지와 형의 원한을 갚기 위해서 오자서가 무덤을 파헤쳤으며 채찍 수백대를 때려서 시체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개발살을 냈다. 어찌 보면 자업자득. 굴묘편시(掘墓鞭尸)라고 한다. 다만 당대에도 이것은 부당한 행위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에 이에 대한 주변의 분노로 오자서는 적을 많이 만들었고 결국 그가 오왕 부차에 의해 처형당할 때 외면받는 결과로 이어졌다.
  • 카다르 야노시 - 너지 임레 처형에 관여한 것 때문에 그를 증오하는 헝가리인들이 적지 않으며 그로 인해 그의 무덤이 파괴되고 유해마저 도난당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 캉유웨이 - 문화대혁명 때 홍위병들이 그의 무덤을 파헤쳐 시신을 거리에 끌고 다녔고 두개골을 조반유리 전시회에 전시해 놓았다. 나중에 산둥성 정부가 그의 유골을 찾으려고 했으나 찾지 못했다.
  • 쿵링이 - 문화대혁명 때 홍위병들에 의해 부관참시를 당했다. 공자의 후손이자 연성공이었던 쿵링이의 묘소가 털린 일은 그 아들인 쿵더청으로 하여금 공산당에 대한 극도의 반감을 자아내서 쿵더청은 국부천대 이후 단 한번도 본토를 방문하지 않았다.[15]
  • 토마스 베켓 - 본래 성인으로 캔터베리 성당에 모셔지던 교인이었으나 헨리 8세가 교회랑 연을 끊으면서 겸사겸사 교회 재산도 털어갈 목적으로 360년 전에 죽은 그를 역모 혐의로 기소하고 30일 이내로 법정에 출두하란 명령을 내렸다. 이미 죽었으니 당연히 그는 출석하지 않았고 헨리 8세는 궐석재판에서 그에게 유죄를 선고한 뒤 캔터베리 성당에 보관 중이던 유해를 불태우고 조문객들이 바친 헌금을 깡그리 털어갔다...
  • 포르모소
  • 포송령 - 요재지이 작가. 역시 홍위병들에게 무덤에서 꺼내어져 유골이 불탔다.
  • 프랑수아 뒤발리에 (1907 ~ 1971 / 1986년 부관참시)
  • 한명회
  • 한치형
  • 해릉양왕 - 본래 금나라의 왕이 묻히는 묘지에 묻혔으나 생전에 저지른 악행이 워낙 어마어마해서 황제는커녕 왕 취급도 받아서 안 된다는 신하들의 간언 때문에[16] 결국 중도 대흥부로부터 멀리 떨어진 모래밭에 다시 묻히고 새로운 무덤도 제대로 만들어지지 않았다.
  • 해서 - 문화대혁명의 서막을 연 해서파관 사건의 주인공. 역시 홍위병들에게 시신이 훼손됐다.
  • 현덕왕후 - 세조의 장남인 덕종의 꿈에서 나타나서 죽게 되자 화가 난 세조는 무덤파서 관을 꺼내 유해는 망치로 부수고 소각해서 강에 버렸다는 내용이 야사에 있지만 정사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 홍수전 - 태평천국의 난의 지도자. 증국번이홍장이 이끄는 청나라 관군과 서양인 용병으로 구성된 상승군의 연합 공세로 멸망한 뒤 그의 무덤은 파헤쳐지고 시신의 목이 잘렸다.

4. 비유적 표현

이미 당할 대로 당해 재기불능인 것(사망)을 다시 관광보내는 것(참시)을 말한다. 고의적이든 아니든 승자가 패자를 다시 한 번 짓밟는 사례다. 그 예시로 '패자를 두 번 죽었다'를 사용한다.

둘 사이의 대결에서(인기, 가격, 점유율 등등) 한 쪽이 우세한 상황으로 이긴 후 다시 한번 일을 터뜨려(추가인하, 신제품 개발 등) 진 쪽이 재기도 못할정도로 승리를 기정사실로 만드는 행위나.

부관참시는 그 말 자체로 산 사람인 상대를 '시체'로 비유한다는 뉘앙스가 있어서 사람에 따라 거북하게 받아들일 수도 있다.

재기불능이 아니라 실제로 이미 죽은 사람을 비난해서 명예를 훼손하는 것을 부관참시라고도 한다. 이쪽은 원래의 부관참시와 상황과 목적이 비슷하다.

너무 구린 캐릭터를 시체, 관짝, 고인에 비유하는데 여기서 또 너프를 당했다면 이 드립을 사용하곤 한다. 원래 뜻을 생각해 보면 좀 무거운 의미이므로 사용을 줄이는 것을 추천한다.

4.1. 사례

  • HIT 갤러리 아이언맨 사건
  • 오덕페이트와 액셀러레이터의 대결
  • 무한도전 특별기획전 2/웃음 사냥꾼이 간다
  • 웃음을 찾는 사람들
  • 조 패터노 前 NCAA FBS 펜실베이니아 주립대학교 미식축구 팀 헤드코치 - 2011년 11월 '미국판 도가니 사건'이라 불리는 수비코치 제리 샌더스키의 10여년에 걸친 미성년자 성폭행을 총장과 함께 묵인한 죄로 시즌 중 사임하고 3개월 뒤에 자살했다. 사망 6개월 후 교내에서 동상이 철거당했으며, NCAA 측에서 패터노 감독 재임기인 1998~2011년까지 대학의 우승전력을 무효화하였다. 위의 네 경우와는 다르게 죽고 난 뒤 당한 것이므로 진정한 의미의 부관참시. 단 WWE 스타였던 크리스 벤와나 야구, 축구, 농구의 승부조작범들처럼 범죄를 저지르고도 기록은 인정하고 넘어가는 경우가 미국에서도 대부분이기에 성범죄 은폐에 대한 진상규명과 명예 박탈은 당연하나 기록부정까지 한 건 지나쳤다는 비판도 있다.[17]
  • 스튜디오 딘 - 페스나 본편 애니메이션언리미티드 워크스 극장판의 퀄리티가 처참한지라, 유포터블페이트 제로, 언리미티드 워크스 애니메이션에 비교되며 두고두고 까였다. 다만 두 제작의 예산과 일정의 차이가 크다는 것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 그걸 감안하고 당시 스튜딘 페스나로 페이트 시리즈에 입문한 사람도 많았던걸 생각하면 나쁜 성적은 아니다.
  • BeatStream - 다른 BEMANI 시리즈가 서비스가 종료되도 오프라인으로 플레이 할 수 있었던 것과는 달리 이 작품은 오프라인 플레이도 막히면서 영원히 플레이 할 수 없는 작품이 되어버렸다.
  • 페이커& 제드 미러전 솔킬 - HOT6 Champions Summer 2013 결승 5세트에서 미드라인에서 혼자 스플릿 푸쉬를 하다 타워에 맞아 피가 얼마 남지 않은 페이커의 제드를 잡기위해 류의 제드가 선궁을 썼으나 페이커가 화려한 컨트롤로 류를 역관광시켰다. 이 장면은 당시 실시간으로 국내외에 큰 반응을 불러일으켰을 뿐만 아니라 지금도 잊을 만하면 기사, 칼럼, 롤 명장면 영상 모음 등에서 등장하여 그 때마다 '오늘도 류의 제드는 죽습니다.' '그만해 류의 라이프는 이미 제로라고!' '세상에서 가장 많이 죽은 제드' 와 같은 드립이 댓글로 달린다. 이러한 사정으로 유튜브에 올라와있는 이 장면은 꾸준히 조회수가 올라가 2021년 7월 기준 440만 조회수를 넘겼다. 해당 영상. 링크를 클릭하는 순간 류의 제드는 또 한번 죽는다.
  • 홍명보호 - 2002 팀 동료들에게 까이는 것도 모자라 본인이 쓰지도 않은 선수들로 승리한 맥콜라리에게 부관참시당했다. 거룩하신 효멘의 애정담긴 예언을 씹은 대가는 가혹했다.
  • 요구르팅
  • 국가모독죄(형법 제104조의2) - 1975년 제정 당시부터 비판받았던 조항이었고, 민주화 이듬해인 1988년 폐지되었다. 그러나 이로 인하여 처벌받은 사람들은 그대로 남아 있었으므로 이들은 훗날 위헌심판을 제기했고, 헌법재판소는 이 조항에 대해 위헌을 선고하였다.
  • 갤럭시 노트7 - 폭발 사고로 인한 단종 이후 고객지원 사이트에서 펫네임을 날려서 그 폰을 없던 폰으로 만들었다. 또한 주기적으로 킬 스위치를 가동하여 인터넷에 연결된 모든 노트7을 영원히 충전할 수 없게 만들었다.
  • 쇼미더머니 8 - 방영 당시 쇼미더머니 역사상 최악으로 평가받았고, 하락세를 밟고 있던 쇼미더머니 특성상 재평가가 이루어질 줄 알았으나, 쇼미더머니 9의 흥행으로 최악으로 남게 되었다.
  • 두 번 죽이는 거 - MBC 코미디 하우스의 개그 코너인 노브레인 서바이버에서 정준하가 읆는 명대사.
  • 칠천량해전공원 - 칠천량 해전이 일어난 거제시에 건립된 건축물인데, 패전 또한 하나의 역사로서 다시는 부끄러운 일을 당해서는 안된다는 교훈을 남기는 곳이다. 즉, 원균을 부관참시하기 위해 만들어진 곳.

4.2. 관련 문서


[1] 실제로 능지처참은 오체분시라고 일컫기도 하는 거열형과 많이 혼동되는 편이다.[2] 피해자에게는 고인을 응징했다는 정의감, 고인과 연관 있는 사람들에게는 경각심과 위협감을 불러일으키는 등.[3] 정확히 말하자면 김돈중의 행위도 문제였지만 그에 따른 김부식의 처사가 더 문제였다. 저 때에 정중부는 김돈중에게 욕설을 하며 폭행했는데(그도 그럴게 김돈중이 실수로 태워먹은 것도 아니고 일부러 태워먹었다.) 이에 대해서 김부식은 자기 아들이 한 짓은 언급도 않고 정중부만 처벌할 것을 강하게 주장했기 때문이다.[4] 이때의 분위기가 매우 가관인데 대신들이야 계유정난으로 출세한 이들이 많았기 때문에 모두 극형을 주장하였다고 쳐도 대간도 평소대로라면 타성적으로 아니되옵니다를 외쳤겠지만 이 때만은 그 심각성에 모두 극형을 주장했고 이 중에는 표연말 같은 김종직의 제자도 있었다. 그나마 일부 대간들은 처벌을 낮춰 줄 것을 주장했는데 그들의 논지로 찢어죽여도 가당찮지만 죽은 사람이니 처벌을 낮춰주세요 정도였다. 물론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모두 연산군의 명령으로 끌려갔다.[5] 이런 대형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중종반정 후 사림들은 무오사화의 피해자들마저 억지로 쉴드를 쳐 버린다(...) 그러나 사안이 워낙에 심각해서 중종은 다른 요구는 몰라도 이 요구는 들어주면서도 매우 찝찝해했다.[6] 남효온은 생전에 소릉 복위를 줄기차게 주장한 탓에 연산의 눈에 찍혔다. 여기서 소릉은 단종의 친모 현덕왕후 권씨의 능으로 세조가 파헤쳤다.[7] 정창손도 부관참시 및 효수되었으며 정인지, 심회는 효수까지는 되지 않았지만 부관참시는 되었다.[8] 이 집안은 아들 성세창마저 불운에 휩싸였다. 성세창은 명종시기 윤임 일파로 몰려 윤원형의 미움을 사 유배 후 비참하게 죽었다. 정작 성세창은 윤임과 비슷한 김안로와 적이었다.[9] 북한의 농업상이었으며 일찍이 일본으로 유학 가서 메이지대학을 졸업하고 소련에도 유학을 다녀왔다. 1945년 로동당 평안남도 안주읍 위원장을 시작으로 북한 정권에 발을 들여놓았으며 1953년 로동당 중앙위원회 조직부장으로 활동하였다. 6.25 전쟁평양이 한미 연합군에 의해 점령되기 전에 만경대에 있던 김일성 선친들의 유해들을 옮기기 위해 직접 자원했다. 그는 김일성의 허가를 받아 해군 1개 대대를 이끌고 안전한 곳으로 옮겼으며 휴전 후 다시 만수대로 옮겼다. 1959년 최고인민위원회 제2, 3, 5기 대의원, 로동당 중앙위원회 위원, 농업위원회 위원장, 부수상, 로동당 중앙위원회 농업부장, 중앙인민위원회 위원 등 요직을 역임했고 1973년 9월 정무원 부총리 및 농업위원회 위원장직에서 해임되었다가 복귀했다. 1984년에 사망하고 평양 대성산 혁명열사릉에 안장되었다.[10] 6.25 전쟁 당시 대한민국 특수기지에서 훈련을 받은 최고사령부 타격대 요원들이 평양 용성에 거주하며 때를 기다리다가 잡혔다는 사건이다. 대표적인 날조극으로 이때 숙청된 사람들도 대부분 고령의 당 간부들이었는데 이미 죽었거나 나이가 들어 집에서 쉬던 노인들을 끌어내 공개처형했다. 비료를 개인 목적으로 빼돌렸다는 혐의로 처형된 중앙당 비서 서관히 이외에 2만 명이 대량 숙청된 심화조 사건도 있다.[11] 무연고 분묘와 무연고 사망자, 신원미상 변사자는 보통 관할 지자체에서 토지의 소유주나 경찰, 검찰 등 관련자로부터 이전받아 일괄적으로 화장(또는 무연고 묘지에 매장)처리 하며 일정 기간 동안 보존한 후 다시 일괄적으로 산골 처리한다.[12] 일본식으로 장례를 치러서 항아리에 납골해 놓은 상태였다고 한다.[13] 본관이 같은 우봉 이씨지만 이완용과는 촌수가 멀다.[14] 손자가 이장무서울대학교 총장, 이건무 전 문화재청장이다.[15] 공자의 후손이자 마지막 연성공이었다보니 중국공산당에서도 본토에 남아 있던 그의 가족들을 보내 만나게 해서 환심을 사려고 했으나 쿵더청은 만나긴 했지만 대만과 일본에서만 만났고 그나마도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16] 이 때문에 원나라에서 편찬한 금사에는 해릉양왕도 아닌 새릉서인이라고 기록되었다.[17] 물론 거꾸로 생각해서 저런 자들이 과하게 특혜를 본 것이 이상한 것이지 패터노의 기록이 부정당한 것이 잘못은 아니라는 의견 또한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