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14 04:15:14

티베트 불교

라마교에서 넘어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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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베트 불교 བོད་ཀྱི་ནང་ཆོས།
파일:17-Nalanda-Pandits_HHDL-Office-1-e1338579760327.jpg
불|སངས་རྒྱས།
석가모니불과 날란다 17 논사(論師)[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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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ཆོས།
티베트식 불교 경전 뻬차(dpe cha)[2]
파일:tibetanlama-1.jpg
승|དགེ་འདུན།
묀람(smon lam)[3]에 참가한 티베트 불교 승려들
규모 <colbgcolor=#fff> 약 1800만 ~ 2000만 명[4]
분류 대승 불교 (Mahayana Buddhism)
금강승 불교 (Vajrayana Buddhism)
성립 C.E. 7세기 송첸감포 왕 재위 시
분포 티베트, 몽골, 부탄
인접한 인도, 네팔, 중국, 러시아 일대
주요 사상 반야, 중관, 인명, 아비달마, 계율, 밀교
종파 닝마, 까규, 사캬, 겔룩 등
명칭 한국어 티베트 불교
티베트어 བོད་ཀྱི་ནང་ཆོས།
영어 Tibetan Buddhism
중국어 藏传佛教(간체), 藏傳佛教(번체)

1. 개요2. 명칭3. 역사4. 사상ㆍ교리
4.1. 바라밀승(현교)
4.1.1. 총론
4.1.1.1. 바라밀승의 정의4.1.1.2. 문(聞), 사(思), 수(修)4.1.1.3. 분석적ㆍ논리적 탐구4.1.1.4. 근(根), 도(道), 과(果)4.1.1.5. 견해, 명상, 행위4.1.1.6. 불교 4대 학파의 종의(宗義)
4.1.2. 각론
4.1.2.1. 5부 대론(五部大論)
4.1.2.1.1. 인명학4.1.2.1.2. 반야학4.1.2.1.3. 중관학4.1.2.1.4. 아비달마학4.1.2.1.5. 계율학
4.1.2.2. 보리도차제(람림)4.1.2.3. 보리심 수행(로종)
4.2. 금강승(밀교)
4.2.1. 금강승의 정의4.2.2. 금강승의 기원
4.2.2.1. 전통적 관점4.2.2.2. 현대적 관점
4.2.3. 금강승의 목적과 특징4.2.4. 금강승의 수행 요건4.2.5. 금강승의 분류4.2.6. 금강승의 계율4.2.7. 금강승의 수행
5. 종파
5.1. 사캬5.2. 겔룩5.3. 까규5.4. 닝마5.5. 조낭
6. 환생자 제도7. 한국과의 교류
7.1. 인적ㆍ사상적 교류7.2. 문화ㆍ예술 교류
8. 지역별 보급
8.1. 대한민국8.2. 티베트ㆍ중화권8.3. 몽골ㆍ러시아권
8.3.1. 몽골8.3.2. 러시아
8.4. 히말라야권
8.4.1. 인도8.4.2. 네팔8.4.3. 부탄
8.5. 서구ㆍ기타 전세계
9. 사회 참여10. 오해
10.1. 밀교와 성(性)에 관한 오해
10.1.1. 논란
10.2. 승려의 독신에 관한 오해10.3. 육식에 관한 오해10.4. 기타 오해

[clearfi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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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베트 라싸(Lhasa)에 위치한 포탈라궁(Potala Palace)
허공계가 남아 있는 한, 중생이 머무는 한,
저 또한 여기 머물러 중생의 고통을 소멸하게 하소서.
《입보살행론》〈회향품〉
[여래는] 오온(五蘊)이 아니고
오온과 다른 것이 아니며
그분[여래] 속에 오온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것들[오온] 속에 그분이 있는 것도 아니며
여래가 오온을 갖는 것도 아닌데
이런 가운데 어느 것이 여래이겠는가?
《중론》〈관여래품〉[5]
《중론 개정본 - 산스끄리뜨 게송의 문법 해설을 겸한》(김성철 譯)

1. 개요

티베트를 중심으로 발달한 불교의 한 종파. 주된 분포 지역은 중국(중국령 티베트 자치구 포함)[6], 부탄, 몽골(중국령 내몽골 자치구 포함), 러시아의 몇몇 공화국(칼미크 공화국, 부랴트 공화국, 투바 공화국) 등이며, 믿는 지역이 가장 넓은 편인 불교 종파이다. 티베트 불교를 밀교라고 분류하기도 하지만, 엄밀히 말해 티베트 불교는 대승을 중심으로 소승, 바라밀승(대승 현교), 금강승(대승 밀교)를 모두 포괄하므로 대승 불교로 분류함이 적절하다. 그러나 동아시아의 대승 불교와는 별개로 보는 시각이 많은 편이다.

2. 명칭

실로 스승(guru)이란, 다름 아닌 붓다이며, 법이며, 상가이다(gurur buddho bhave[d] dharma[h] samnghaś căpi sa eva hi).
《Subhāsitasamgraha》, 《Jñānasiddhi》, 《Abhisamayamañjarī》, 《Gunabharani》등 (방정란 譯)

티베트어 '라마(bla ma)'는 '라나 메빠(bla na med pa)'의 축약어로 '위없는 존재, 가장 높으신 존재, 뛰어난 존재'란 뜻을 담고 있으며 '스승'을 뜻하는 산스크리트어 '구루(guru)'의 의역어다. 불법승 삼보와 함께 스승을 특별히 존숭하는 티베트 불교의 특성 때문에 과거 서구에서는 티베트 불교를 '라마교(lamaism)'라고 칭하였으나 이는 부적절한 표현이다. 현재 학계에서는 라마교 혹은 라마 불교라는 용어 대신 티베트 불교라는 용어를 쓰고 있다. Encyclopædia Britannica, 《Lama》

스승을 붓다 혹은 본존 그 자체로 보는 밀교보다 믿음과 공경의 정도는 덜하지만, 대승 현교(顯敎)에서도 스승을 붓다의 화신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화엄경》에서는 ‘모든 공덕이 선지식에 의해 생긴다’’라고 하였으며 《대고경(大鼓經, Mahabheriharaka-sutra)》[7]에서는 석가모니가 열반에 가까워졌을 때 아난이 매우 슬퍼하자 석가모니가 그를 위로하며 이렇게 말하였다. "아난아 슬퍼하지 말라. 아난아 울지 말라. 나(석가모니)는 미래에 선지식이 되어 너희 중생을 이롭게 할 것이다."[8]

따라서 현교의 견해에서도 스승은 불보(佛寶), 스승의 가르침은 법보(法寶), 스승의 권속과 제자, 도반들은 승보(僧寶)로 해석 가능하다. 더 나아가 밀교(密敎)에서 스승의 몸(身)은 승(僧), 스승의 말씀(口)은 법(法), 스승의 마음(意)은 불(佛)로서 스승은 곧 삼보의 총합이다. 즉 일반적인 통념과 달리 티베트 불교에서 스승을 중시하는 경향은 현밀(顯密)이 발달한 인도 대승 불교에서 유래한 것이며, 스승과 삼보께 귀의하는 인도 날란다 사원의 전통을 보전하고 있는 것이지 티베트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티베트 불교"란 용어는 외부에서 명명한 학술적 명칭이며 고유 용어로는 쵀(chos) 또는 낭쵀(nang chos)라고 일컫는다. '쵀'는 '법(法), 다르마, 진리'란 뜻이고 '낭쵀'는 '내부자의 법(法), 다르마, 진리'란 뜻이다. '내부자'란 뜻의 낭빠(nang pa)는 티베트에서 '불교도'를 가리키는 말로, 소걀 린뽀체의 설명에 따르면 '진리를 외부에서 찾지 않고 자신의 내면, 마음의 본성에서 찾는 사람'을 의미한다. 또한 진리를 외부에서 찾는 '외부자'인 "치빠(phyi pa)", 즉 불교 외의 타 종교, 신앙과 대비하여 '티베트의 내부자의 법(bod kyi nang chos)'이란 표현처럼 배타적인 의미로 쓰일 때도 있다.[9] John Powers, David Templeman, 《Historical Dictionary of Tibet》 리그파, 《티베트의 지혜(삶과 죽음을 바라보는)》(오진탁 譯)

3. 역사

파일:samye-monastery-religious-fresco-740.webp
티베트 불교를 정착시킨 (左) 샨타락시타, 구루 빠드마삼바와, 티송 데첸 왕 (쌈예 사원 내 벽화)

티베트에 불교가 처음 소개된 것은 5세기경 28대 하토토리넨첸 왕(lha tho tho ri gnyan btsan) 때이다. 토착 전설에 따르면 왕은 도대시마똑 육자진언과 금으로 된 탑을 선물 받고 이를 신기하게 여겨 비밀스럽게 왕궁에 모셔 공양 올렸다고 한다. 불교에 관한 기록은 7세기 송첸 감포 왕(Srong btsan sgam po, 605-650) 때부터 본격적으로 전해진다. 이후 8세기 티송 데첸 왕(Khri srong lde btsan, 755–794)이 인도 날란다 사원의 승원장 샨타락쉬타(Śāntarakṣita)와 티베트에서 '제2의 부처'라 여겨지는 밀교의 대성취자(mahasiddha) 빠드마삼바와(Padmasambhava)를 인도로부터 초빙하고 불교를 국교로 정하면서 티벳에 불교가 완전히 정착했다. 대승 불교가 번성하였던 북인도, 중앙아시아와 가까운 지리적 이점으로 인해 티벳에서는 인도로부터 유입된 대승불교가 흥성할 수 있었다.
파일:A_grand_view_of_Samye.jpg
티베트 최초의 불교 사원인 쌈예(bsam yas) 사원

불교가 티벳에 도입되던 초기에는 당나라의 영향으로 티벳에 인도 불교와 중국 불교가 공존하던 시기도 있었다. 당시 티벳에는 인도 불교와 중국 불교 양자의 수용 여부를 두고 왕과 왕비, 귀족 등 권력 집단 간에 이견이 있었다. 이윽고 티송데첸 왕의 중재로 중국 북종선(北宗禪) 계열[10]의 승려인 화상[11] 마하연(摩訶衍)과 인도불교를 대표하는 논사 까말라쉴라(Kamalaśīla, 740-795)가 티벳 최초의 불교 사원인 쌈예(bSam yas)사원에서 논쟁을 벌인 끝에 까말라쉴라가 승리하면서 인도불교가 티벳에서 주류로 확고히 자리잡았다. 티벳 측 문헌인 《바세(sBa bshed)》와 달리 20세기 초 돈황에서 출토된 중국 측 문헌인 《돈오대승정리결(頓悟大乘正理決)》에서는 쌈예 논쟁의 결과를 마하연의 승리로 기록하였다. 양측의 기록이 상반되기는 하지만, 분명한 것은 티송데첸 왕을 비롯한 당시 티베트의 권력층이 인도 불교의 손을 들어줬다는 점이다.
폴 드미에빌, 《라싸 종교회의》(배재형, 김성철, 차상엽 譯)
중암, 《까말라씰라의 수습차제 연구》
조병활, 《바세 연구》
《돈오대승정리결》(김치온 譯)
박건주, 《티베트 돈점 논쟁 연구》

쌈예논쟁 이후 인도 불교는 티벳 지역에서 주도권을 쥐게 되고 불사불관(不思不觀)의 돈법(頓法)을 주장하는 마하연 화상(和尙)의 선종은 '하샹(ha shang)'의 가르침이라 불리우며 배척의 대상이 된다. 선종과 유사한 점이 있는 닝마의 족첸도 사캬 빤디타(Sa skya paṇḍita) 등에 의해 '하샹'에게서 유래하였다는 의심을 받으며 '중국식 족첸'으로 비판받았고, 까규의 마하무드라 역시 인도 전승의 마하무드라가 아닌 '중국식 족첸'에서 유래한 '오늘날의 마하무드라'로 비판받기도 하였다. 차상엽, 《싸꺄빤디따(Sa skya paṇḍita)의 마하무드라(Mahāmudrā) 비판》 Roger R. Jackson, 《Sa skya paṇḍita's Account of the bSam yas Debate: History as Polemic》 David Jackson, 《Enlightenment by a single means : Tibetan controversies on the "self-sufficient white remedy"(dkar Po Chig Thub)》
안성두 서울대 교수, 한국불교연구원 서울구도회 강의
《티벳 불교의 이해:삼예사의 논쟁과 그 의미》

티베트는 다른 불교권 국가에 비해 비교적 늦게 불교를 받아들였지만, 티베트에 처음 불교가 전해진 7세기부터 16세기까지 약 900년 간 지속적으로 역경작업이 이루어져 현재 티베트역 경전에는 산스크리트어 원전이나 한역본에는 남아 있지 않은 후기 불교 경전들이 존재한다. 또한 티벳 문자는 산스크리트어 경전을 역경할 목적으로 인도 데바나가리 문자를 본따 창제되었고, 티베트어역 경전은 충실한 직역이라 산스크리트어 원전을 복원하는 중요한 자료로 쓰인다.

왕가의 후원 하에 대대적으로 역경을 한 덕분에 티베트 불교는 설일체유부의 계율, 아비달마, 《현관장엄론》계열의 바라밀 전통, 중관과 유식의 제 논서, 불교논리학(인명학), 밀교 등 인도 불교의 거의 모든 전통들을 받아들여 초기불교, 부파불교, 대승현교, 대승밀교를 포괄하는 종합적인 교학체계를 갖출 수 있었다.
파일:57077.jpg
티베트 불교의 중흥조, 아티샤[12]

또한 히말라야를 사이에 두고 티베트와 인도를 오가는 인적 교류가 활발했다. 예컨대 린첸상포(Rin chen bzang po, 958-1055)와 마르빠(Mar pa chos kyi blo gros, 1012-1097)와 같이 구법을 위해 티벳에서 인도로 넘어와 불교 문헌을 수집하고 인도인 스승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은 인물들이 있었다. 또한 반대로 인도에서 힌두교의 부흥과 이슬람의 확장을 피해 히말라야를 넘어 티벳으로 넘어온 아티샤(Atiśa Dīpaṃkara Śrījñāna, 982-1054) 같은 인도인 스승들도 있었다.

836년부터 842년까지 집권한 랑다르마 왕의 폐불 정책으로 인해 티베트 불교는 극심한 후퇴를 겪었다. 폐불 이후 2세기 간의 불교 암흑기를 거쳐 11세기 초에 이르러 예세 겐 부자의 불교 부흥 운동이 일어난다. 부흥 운동의 일환으로 1042년 아리 왕의 아들 예쎼외가 인도에서 아띠샤를 초대한다. 아띠샤는 티베트에서 《보리도등론》 등을 저술하며 17년 간 티베트에서의 설법으로 까담빠 형성의 기초를 마련하였다.

13세기에 무슬림 세력이 인도로 진출하자 인도 불교는 큰 위기를 맞았다. 무슬림은 이교도인 불교와 힌두교를 박해하였는데, 힌두교와 달리 출가 승단과 재가 신도의 구분이 명확했던 불교는 승원이 파괴되자 구심점을 상실하고 인도에서 쇠멸했다.[13] 인도 각지에 있던 불교 승가 공동체는 티베트, 네팔, 남인도로 흩어졌다. 이 때 승려 상당수가 경전을 가지고 티베트로 피신하면서 위끄라마쉴라 사원에 있던 교학, 조직, 전적(典籍)이 그대로 티베트로 옮겨졌고, 당시 승려들이 갖고 온 전적들은《티베트 대장경》의 기원이 된다. 때문에 티베트 불교는 인도 불교의 마지막 계승자로 평가받는다. 티베트 불교도들 스스로도 인도 최대 불교대학인 날란다(Nālandā) 사원과 위끄라마쉴라(Vikramaśilā) 사원의 학통(學統)과 법맥(法脈)을 계승하였다고 자부한다.
다큐 《Indian Roots of Tibetan Buddhism》
차상엽 경북대 동서사상연구소 전임연구원,
대한불교진흥원 헬로붓다 아카데미 "뿌리는 같아도 다른 꽃이 핀다"
《티베트 불교의 역사와 사상》 1, 2부
헬로붓다TV《자홍 스님의 티벳불교사 이야기(1)》
: 티베트 불교의 성립부터 아티샤의 불교 복원까지의 티베트 불교사 개괄 및 4대 종파 소개

4. 사상ㆍ교리

4.1. 바라밀승(현교)

4.1.1. 총론

4.1.1.1. 바라밀승의 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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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불보살의 지혜의 총체(總體)인 문수보살[14]

붓다의 가르침은 목적에 따라(혹은 방편인 보리심의 유무에 따라) 개인의 해탈을 추구하는 소승(小乘, hīnayāna)과 일체 중생의 성불을 추구하는 대승(大乘, mahāyāna)으로 구분할 수 있다.

혹은 수행자의 종성(種姓)에 따라 성문승(聲聞乘, śrāvakayāna), 연각승(緣覺乘, pratyekabuddhayāna), 보살승(菩薩乘, bodhisattvayāna)으로도 구분 가능하다. 성문은 불법(佛法)을 듣고 자신의 해탈을 위해 출가한 수행자이다. 연각은 벽지불(辟支佛) 또는 독각(獨覺)이라고도 하며, 성문ㆍ보살과 달리 타인이 설한 가르침을 듣지 않고 스스로 연기(緣起)를 관찰하여 깨달은 수행자이다. 보살은 일체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최상의 깨달음을 추구하는 수행자이다. 이 중 성문승, 연각승은 소승에 해당하며 보살승은 대승에 해당한다.

또한 근거가 되는 경전의 종류에 따라 경승(經乘, sūtrayāna)속승(續乘, tantrayāna)으로 구분하기도 한다. 경(經, sutra)은 공개적으로 설해진 일반적인 가르침이 담긴 경전이며 소승의 37조도품과 대승의 6바라밀 등을 다룬다. 속(續, tantra)은 소수에게 비밀리에 전해진 가르침이 담긴 경전으로 금강승의 가르침을 다룬다.

(반야)바라밀승((般若)波羅密乘, (prajñā)pāramitāyāna)은 대승의 공통적인 가르침으로 바라밀행을 통해 점차적으로 불과(佛果)를 성취하는 가르침을 의미한다. 바라밀승은 경승과 혼용되어 쓰일 때가 많다. 또한 금강승과 함께 대승의 두 갈래 가르침 중 하나로 언급된다.

속승은 금강승(金剛乘, vajrayāna)/(비밀)진언승((秘密)眞言乘, (guhya)mantrayana)이라고도 한다. 특히 티베트 불교에서는 금강승이란 용어를 가장 흔하게 쓰는 편이다. 금강승은 대승의 비공통적인 가르침으로 바라밀승과 달리 금강승만의 다양한 방편을 통해 신속하게 불과를 성취하는 가르침이다.

경승과 속승을 대체할 수 있는 동아시아의 불교 용어로는 현교와 밀교가 있다. 현교(顯敎)는 '겉으로 드러난 가르침'이란 뜻으로 언어 문자상으로 설시(說示)된 가르침이며 일반적인 소승과 대승 가르침을 뜻한다. 밀교(密敎)는 '은밀히 전수한 가르침'이란 뜻이다.

상술하였듯 금강승 혹은 밀교는 소승과 대승 중에 대승에 해당한다. 금강승 역시 일체 중생을 위해 성불을 추구하는 마음 동기인 보리심과 보리심의 실천행인 육바라밀, 그리고 공성의 견해에 기반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티베트 불교에서 '소승-대승'과 '소승 학파-대승 학파'는 별개의 분류이다. 상술하였듯 소승-대승은 방편의 측면에서 보리심의 유무에 따라 구분되며, 소승 학파-대승 학파는 견해의 측면에서 법무아(法無我)의 인정 여부에 따라 구분된다. 소승 학파는 인무아(人無我)만을 인정하는 반면 대승 학파는 인무아와 법무아를 모두 인정한다. 소승 학파로는 설일체유부, 경량부가 있으며 대승 학파로는 유식학파, 중관학파가 있다. 이들 학파를 '불교 4대 학파'라고 총칭하며, 전통적으로 티베트 불교에서는 4대 학파 외에 다른 불교 학파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여긴다.

현대에 이르러 1950년 세계불교도우의회(World Fellowship of Buddhists)에서 '소승'이란 명칭을 동남아 국가들의 불교에 사용해서는 안된다는 결의가 있었으나, 티베트 불교에서 소승 학파로 분류되는 설일체유부, 경량부는 북방 상좌부 계열이며 현존하지 않고 단지 사상만 전해지는 종파이므로 결의에 어긋나는 용례라고 볼 수 없다. 또한 불교학자 하카마야 노리아키(袴谷憲昭)는 티베트 불교에서의 소승 학파와 대승 학파 분류에서 알 수 있듯, 티베트에서는 소승과 대승을 감정적인 대립적 호칭이 아니라 냉정한 학문적 교의(敎義)의 구분으로 수용하는 것이 가능했다고 평했다.

한편 제14대 달라이 라마는 소승ㆍ대승을 '팔리 전승(Pali tradition)'과 '산스크리트 전승(Sanskrit tradition)'이란 용어로 대체할 것을 제안했다. 팔리 전승은 프라크리트(prakrit)ㆍ고대 싱할라어ㆍ팔리어로 기록된 경전과 주석서에 기반한 불교 전승을 의미하며 산스크리트 전승은 프라크리트ㆍ산스크리트ㆍ중앙아시아어로 기록된 경전과 주석서에 기반한 불교 전승을 의미한다.[15] 달라이 라마의 제안은 소승ㆍ대승 용어 사용으로 인해 촉발될 수 있는 갈등과 대립을 방지하고 각 전승들을 동등하게 존중할 수 있는 대안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제14대 달라이 라마의 용어 제안은 티베트 불교 내부에서도 보편화되지 않았고, 소승이란 용어에 내포된 역사적ㆍ사상적 함의를 온전히 표현할 대체 용어를 찾기 어려워 본 문서에서는 소승 용어를 그대로 사용하였다. 다만 현존하는 남방 상좌부 불교의 경우에는 '테라와다 불교', '남방 상좌부 불교' 등의 명칭을 최대한 사용하였다.
4.1.1.2. 문(聞), 사(思), 수(修)
온갖 유정으로서 발심하여 장차 진리를 관찰하는 도로 나아가려는 자는 마땅히 먼저 청정한 시라(尸羅, 즉 계율)에 안주하고, 그런 연후에 문소성혜(聞所成慧) 등을 부지런히 닦아야 한다. 이를테면 먼저 진리의 관찰에 수순하는 청문(聽聞)을 섭수하고, 듣고 나서는 들은 법의 뜻[法義]을 부지런히 추구하며, 법의 뜻을 듣고 나서 전도됨이 없이 사유해야 하니, 사유하고 나서야 비로소 능히 선정에 의지하여 수습(修習)할 수 있는 것이다. 즉 수행자는 이와 같이 계(戒)에 머물면서 부지런히 닦아 문소성혜(聞所成慧)에 의해 사소성혜(思所成慧)를 일으키고, 사소성혜에 의해 수소성혜(修所成慧)를 일으키게 되는 것이다.
《아비달마구사론》(권오민 譯)

서양의 철학(philiosophy)은 주로 논리적, 사변적, 분석적 방법을 통해 지혜(sophia)를 얻지만 인도의 철학(darśana)은 다음의 세 가지 방법을 통해 지혜(jñāna, prajñā)를 얻는다.

1. 듣고 배워서 얻어진 지혜(śruta-prajñā): 오랜 시간의 테스트를 거쳐 검증되고 실험되어 온 옛 성현(ṛṣi)들의 경험과 탐구 결과를 듣고 배우는 방법(聞, śruta, śramaṇa) 이다. 이것은 다만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것 만이 아니라 그 의미를 이해하고 해석하는 능동적 노력이 포함되는 활동이다. 이런 과정에서 얻어지는 지혜를 문혜(聞慧, śruta-prajñā)라고 한다. 이 지혜를 얻는 방법은 경전이나 논서들의 텍스트를 이해, 해석하고 현대언어로 번역하고 설명해주는 해석학적 방법인 정언량(正言量, śabda-pramāṇa)이 있다. 단, 디그나가(Dignaga)는 정언량 혹은 성언량(聖言量) 또한 비량(比量)의 한 종류인 신허비량(信許比量, āpta-anumāna)으로 보고, 인식의 근원은 비량과 현량(現量) 뿐이라는 이량설(二量說)을 주장하였으며 티베트 불교에서도 이를 따른다.

2. 논리적 사고를 통해 얻어진 지혜(anumāna-prajñā): 바깥으로부터 배우고 받아들인 것과 스스로의 경험을 자료로 하여 그것을 논리적, 합리적 기준(yukti, anumāna)에 맞추어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다른 견해와 주장과 견주어 토론하고 논쟁하며, 더 나아가 그런 자료들이 누구에게나 보편적인 지적 공유물이 될 수 있도록 합리적으로 재구성하고 체계화시키는 활동이다. 이러한 논리적 사고를 통해 얻어진 지혜를 사혜(思慧, anumāna-prajñā 또는 cintā-prajñā)라고 한다. 이 지혜를 얻는 방법은 문혜와 수혜 그리고 스스로의 지적 경험을 자료로 하여 의심하고 비판하고 토론하고 논증하고 논리적으로 체계화하는 논리적 방법인 비량(比量, anumāna-pramāṇa)이다.

3. 요가적 방법에서 얻어진 지혜(bhāvana-prajñā, samādhi-prajñā): 마지막으로 문혜와 사혜로부터 얻어진 언어적, 개념적 관념적 지혜를 체험적이고 직접적이며 직관적 지혜로 변환시키는 요가적 방법에서 얻어진 지혜를 수혜(修慧, bhāvana-prajñā) 또는 삼매의 지혜(三昧慧, samādhi-prajñā)라고 한다. 이 지혜를 얻는 방법은 문혜와 사혜에 기초하여 요가행법을 실천하는 것(現量, yogī praktiasa, sākṣātkāra)이 있다. 이러한 인식방법은 직접적 지각(知覺)인 현량(現量) 중에서도 유가사의 선정(禪定)상태에서 대상을 지각하는 유가현량(瑜伽現量)에 해당한다.
문을식,《요가 상캬 철학의 이해》

경전의 가르침을 배우고(聞) 사유(思)하는 교학과 수행(修)의 불가분성에 관하여 티베트 불교의 대학장(大學匠) 쫑카빠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쫑카빠의 대표적 저서 중 하나인 《보리도차제광론》에서는 직접적 가르침과 경전적 가르침을 상호불가결한 것으로 간주하면서, 보다 우선적인 과정은 경전의 가르침을 듣는 데 있다고 말한다. 불교에 있어서 경전의 가르침은 문혜(聞慧)와 사혜(思慧)로 표현되는 것으로서 "문혜(聞慧)와 사혜(思慧)에 의해 증득된 바로 그것이 수혜(修慧)에 의해 수습되어져야 하는 것이지 다른 것은 아니다."라는 것이다. 

쫑카빠는 경마의 비유를 들어 청문(聽聞)과 이에 대한 깊은 사유를 수반하는 직접적 수행은 "경주할 장소를 먼저 보여준 후에 경주하는 것과 같다." 라고 설명한다. 만일 경주할 장소가 어디인지도 알지 못하고 경주한다면 실제 노력에 비해 소득도 크지 않을 뿐 아니라 잘못된 길로 빠질 위험이 크다. 

또한 쫑카빠는 "위대한 경전의 가르침을 수행의 요체를 결여한 단순한 설명으로만 간주하고, 수행의 요체는 오직 핵심적 의미를 설하는 스승과 제자 간의 은밀한 직접적 가르침에 있다고 이해하는 것은 가르침의 단절이라는 업장을 쌓는 일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따라서 해탈을 구하는 자들에게 있어 최고의 교설은 위대한 경전일 뿐이라고 쫑카빠는 강조한다.
금강대 불교문화연구소,《불교의 이해》
일부의 원인으로 일부의 결과만을 이루고
일체의 원인으로 일체의 결과를 모두 성취한다.[16]
《대비백련화경(大悲白連華經)》

티베트 불교 강원에서 배우는 반야, 중관, 구사, 인명, 계율 등 오부 대론은 인도 나란다 대학의 교육과정에서 유래한 구성으로, 팔만사천법문 중에서 수행을 위해 필수적으로 배워야 할 경율론을 선정하여 구성한 교과 체계이다. 겔룩에서는 20여 년, 겔룩 외 종파에서는 10여 년 간의 강원 기간 동안 자신의 해탈 뿐 아니라 일체중생을 위한 성불을 목표로 삼승(三乘)[17]과 사부(四部) 딴뜨라[18]를 모두 아울러 배운다.[19]

티베트 불교에서는 교학과 수행을 일치시켜 배움 그 자체를 수행으로 생각하고 문사수(聞思修)를 통해 경전을 학습한다. 문(聞), 즉 배움으로써 경전의 뜻을 타력(他力)으로 대략적으로 이해하고, 사(思), 즉 깊게 사유함으로써 경전의 뜻에 대해 자력(自力)으로 확신하게 하고 수(修), 즉 닦음으로써 경전의 뜻을 깊게 마음에 익히게 만든다.

문(聞)이 부족하면 문혜(聞慧)가 부족할 수밖에 없고, 문혜(聞慧)가 부족하면 사(思)가 부족할 수밖에 없으며, 사(思)가 부족하면 사혜(思慧)가 부족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문(聞), 문혜(聞慧), 사(思), 사혜(思慧)의 바탕이 없으면 수(修), 즉 도(道) 닦는 것이 부족할 수 밖에 없기에, 무엇보다 제일 먼저 경전을 잘 배우는 것이 중요하다고 티베트 강원에서는 강조한다.
게시 소남 걀첸, 《티베트의 큰 강원에서 5대경을 체계적으로 배우는 방법》

티베트 불교는 경전을 학습함에 있어 논서를 중시하는 논장(論藏) 위주 불교라는 특징을 갖고 있다. 동아시아 불교가 특정 경전을 소의경전으로 삼는 종파불교인데 비해, 티베트 불교는 여러 경전의 내용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주석을 단 논장을 주로 학습한다. 경전이 형성된 지 이미 수백 년 이상 시간이 흘렀기 때문에 경장 만으로는 본래 뜻을 알 수 없으며, 보살 선지식들이 경장을 해설한 논장에 의지하여야 경장의 뜻을 바르게 알 수 있다는 것이 논장을 주로 학습하는 이유이다. 따라서 경전의 해석에 있어 인도와 티베트 논사들의 검증된 논서들을 주된 전거로 삼으며, 검증되지 않은 사적(私的) 가르침에만 의존하는 것을 매우 경계한다. 또한 '쌉쩨(sa bcad, 科目)'라고 하는 목차를 세세하게 달아 경론의 내용을 체계적으로 정리하는 방식을 선호한다.

단, 모든 티베트 불교 승려가 강원 과정 전반을 이수하는 것은 아니다. 각자의 수준과 여건에 맞는 공부와 수행을 하며 기도, 의식, 행정, 예술 등의 직무를 담당하는 승려들도 많다. 겔룩의 경우 17~18여 년 간의 기본 과정을 거쳐 불교 박사 학위 격인 '게셰' 학위를 취득하는 승려는 극히 일부이며, 그 중에서도 교육자가 되기 위한 6년 간의 추가 과정을 거쳐 최고등급 학위인 '게셰 하람빠'를 취득한 승려는 더욱 드물다. '게셰 하람빠'와 밀교박사학위 격인 '게셰 응악람빠'를 취득해야 장차 사원장이 될 수 있고 최종적으로 겔룩의 종정인 '간덴 티빠'도 될 수 있다. 한국에 머무는 겔룩빠 승려들의 수는 많지 않지만 그에 비해 '게셰' 학위를 받은 승려 비율은 상당히 높은데, 그 이유는 과거에 비해 '게셰' 수가 늘어난 덕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해외로 승려를 파견할 때 되도록 정예 인재를 선발하여 파견하려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승려 같은 전문 수행자가 아닌, 복잡다단한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재가 불자들을 위해 《람림》, 《로종》 위주로 축약된 교학과정을 제공하는 경우도 있다.《람림》은 강원에서 배우는 5부 대론을 비롯한 불교 전반의 핵심을 일관되게 정리한 단계별 교학ㆍ수행 체계이다. 그리고 《로종》은 자비와 보리심 계발에 특화된 전승으로 자애, 연민, 공감에 관한 효과적이고 구체적인 훈련법으로 잘 알려져 있다. 두 전승은 초심자를 위한 가르침이라고 보긴 어렵지만,[20] 방대한 불교 가르침을 체계적이고 조직적으로 조망할 수 있는 관점을 제시하고[21] 마음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강력한 수단들로서 실천하기에 용이하다는 점에서 일반인에게 우선적으로 선호되는 가르침들이다.[22]
4.1.1.3. 분석적ㆍ논리적 탐구
비구들과 지혜로운 이들이여, 연금술사가 금을 태우고 자르고 문지르듯이 나의 말을 신중하게 검토해야 한다. 단순히 존경한다고 그대로 받아들이면 안 된다.
석가모니불[23]

티베트 불교는 비판적 분석과 판단을 중시한다. 불교의 믿음(信, śradha, 또는 勝解, adhimukti)확신이며, 이는 우선적으로 비판적 분석/판단에 의한 것이다. 문사수 중 사유의 과정에 해당하는 비판적 분석 혹은 탐구 고찰을 사택(tarka, 혹은 覺觀), 간택(pravicaya, 혹은 思惟觀察)이라고 한다. 부처의 말이라고 해서 맹목적으로 믿는 것이 아니라, 금(金)을 감정하듯이 분석적으로 의심을 갖고 경전을 배우고 사유하고 수행하면서 불법의 진리를 수행자 본인이 직접 확인해가는 것이다.

달라이 라마는 비판적 분석을 강조하면서 "불교의 가르침은 맹신이 아닌 비판적 분석이기에 단순히 경전을 외우기보다 이치를 따지며 불교의 가르침을 받아들일 때 긴 생명력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또한 상술한 '연금술사와 금의 비유'를 든 경전의 어구를 즐겨 인용하며 경전을 분석하고 깊게 사유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꼰촉 직메 왕뽀,《티베트에서의 불교 철학 입문》(권오민, 유리, 김대수 譯)

스승의 견해를 비판하는 것이 스승에 대한 존경을 저버리는 것은 아니다. 이에 관해 제14대 달라이 라마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날란다 대학 같은 고대 인도의 사원 대학에서는 학승(學僧)이 스승의 저술을 비판적으로 분석하는 전통을 발전시켰다. 스승의 저술을 비판적으로 분석하는 것이 스승을 존경하거나 공경하지 않는 행위로 간주되지 않았다. 예를 들어 바수반두(Vasubandhu, 世親)의 제자 아리야 위묵티세나(Arya Vimuktisena, 聖解脫軍)[24] 는 스승의 유식론적인 해석에 이의를 제기하고 중관학파의 견해로 경전을 이해하였다. 티베트에서는 19세기 닝마의 학자인 주 미팜(Ju Mipham)의 제자 알락 담최 창(Alak Damchö Tsang)이 스승이 쓴 논전의 일부 내용에 반론을 제기한 사례가 있다. 알락 담최 창은 "스승이 훌륭하다고 해도 가르치는 내용이 정확하지 않다면 지적할 수 있어야 한다"라고 말했다. 또한 티베트 속담 중에 "사람은 공경하고 존경하되 그가 쓴 논서는 철저하게 분석하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스승에 대한 건전한 마음가짐과 수행할 때 의지해야 할 사의법(四依法)의 의미를 잘 보여주고 있다.
제14대 달라이 라마,《달라이 라마 반야심경》(주민황 譯)

2021년 8월 한국인을 위한 비대면 법회에서 "공부하는 과정에서 스승과 다른 관점을 갖는 것이 스승에게 실례가 되거나 스승을 거스르는 악업이 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달라이 라마는 "경전에서 언급하였듯이 아무 이유도 없이 스승의 의견을 부정하는 것은 죄악이 될 수 있다"는 전제 조건을 말했다. 상술한 석가모니의 연금술사 비유나 바수반두(세친), 아상가(무착), 디그나가(진나)와 이들의 후학(後學) 격인 짠드라끼르띠(월칭)의 사례[25]에서 알 수 있듯, 스승의 가르침을 아무 이유 없이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충분히 숙고하고 실천하고 수행한 뒤 그 가르침의 오류를 지적하고 비판해야 한다고 달라이 라마는 설명했다.

또한 스승의 가르침에 의지하여 수행하는 맹악빠(man ngag pa), 방대한 문헌에 의지하여 수행하는 슝빠와(gzhung pa wa), 요약된 람림 문헌에 의지하여 수행하는 람림빠(lam rim pa) 등 까담빠(bka' gdams pa)의 분화(分化)에서 알 수 있듯이 스승의 가르침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경우도 있지만, 스승의 말씀조차도 관찰하고 분석해야 오류가 생기지 않는다고 달라이 라마는 말했다. 그리고 이와 관련하여 "스승이 어떤 가르침을 제공하든 제자는 그 가르침을 항상 탐구하고 관찰하고 분석해야 하며, 만약 가르침에 오류가 있다면 제자는 스승에게 해명을 요구할 수 있고 오히려 그 가르침을 거부할 수도 있다"는 겔룩의 창시자 쫑카빠의 해석도 소개했다. #
에 의지하고 사람에 의지하지 말라.
진의(眞意)에 의지하고 문자에 의지하지 말라.
지혜에 의지하고 의식(意識)에 의지하지 말라.
요의경(了義經)에 의지하고 미료의경(未了義經)에 의지하지 말라.
《대승열반경》 제6권 사의법(四依法)

사물의 실상을 분석할 때 분석하는 사람이 갖춰야 하는 최소의 조건은 사의(四依)이다. '의지한다[依]'는 것은 '믿는다'는 뜻으로 이해해야 하며, 의지해야 하는 네 가지는 진의(眞意), 지혜, 법, 요의경이며, 의지하지 말아야 하는 네 가지는 문자, 의식, 사람, 미료의경이다. 의지하고 의지하지 않는 방식은 다음과 같다.

'법에 의지하고, 사람에 의지하지 말라'는 말은, 그 사람의 명성이 높고 낮음 등을 보지 말고 그 사람이 설하는 가르침을 보아야 한다는 뜻이다. 즉, 사람과 그의 가르침 둘 중에서 가르침을 믿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단, 이 구절은 법을 전하는 스승이나 승가가 필요없다는 뜻이 아니다. 이 구절을 잘못 해석하면 사람을 멀리하고 홀로 경전에만 의지하는 것이 진정한 수행이라고 착각할 수 있다. 이와는 달리 티베트 불교 스승들은 "정법(正法)인지 아닌지 여부로 법을 판단해야 하며, 법을 전하는 사람의 외모, 화술, 학력, 명성, 지위 등 부차적인 요소를 법의 판단 기준으로 삼으면 안된다"는 뜻으로 가르치고 있다.

'진의에 의지하고, 문자에 의지하지 말라'는 말은, 그러한 가르침도 문장의 운율이 아름다운지 등을 보지 말고, 진의를 보아야 한다는 뜻이다. 진의를 명확하게 설한 것은 받아들이고, 오류가 있는 것은 설령 문장이 매우 훌륭하다 하더라도 받아들이지 말아야 한다. 즉, 문자와 진의 둘 중에서 문자를 믿지 말고 진의를 믿어야 한다.
'요의경에 의지하고, 미료의경에 의지하지 말라'는 말은 특정 목적에 의해 단지 방편으로써 설하신 언설[미료의]만을 보지 말고, 그것의 진실된 실상[요의]을 보아야 한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 부처님의 진의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목적에 의해 [어떤 사물이] '진실로 존재한다'고 설한 경은, 언설 그대로 받아들이면 논리적 오류가 있으므로 다른 의도로 해석해야 함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부처님의 궁극적 의도대로 '진실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설한 경은, 언설 그대로 받아들이더라도 논리적 오류가 없으므로 요의로 마땅히 믿어야 한다.

'지혜에 의지하고, 의식에 의지하지 말라'는 말은, 그 요의도 안식(眼識) 등의 근식(根識)이나 분별식(分別識)에 나타난 것만을 믿지 말고, 대상의 실상을 현량(現量)으로 보는 지혜를 믿어야 한다는 뜻이다.
불교 과학 철학 총서 편집위원회, 《물질세계(불교 과학 철학 총서 1)》(게쎼 텐진 남카 譯)
삼소량분(三所量分)
현전(現前) = 현전분(現前分)
비현전(非現前) =  불현전분(不現前分) = 은폐분(隱蔽分)
극비현전(極非現前) = 최극은폐분(最極隱蔽分)

앎의 대상에는 크게 현전(現前), 비현전(非現前), 극비현전(極非現前) 세 가지가 있다. 현전'지각 가능한 명백한 현상'으로 논리를 통해 증명할 필요가 없다. 그 현상들은 직접적인 감각적 지각인 현량(現量)을 통해 직접 경험하며 터득할 수 있고, 그 존재를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삶과 죽음, 계절의 변화 같은 거친 무상(無常)은 현전에 해당한다.

비현전'일부분만 지각할 수 있는 현상'이다. 비현전은 요가수행자[26]가 아닌 일반인이 직접적인 경험을 통해 확인할 수 없으므로 논리적 추론인 비량(比量)을 적용하여 확립해야 한다. 이때의 분석 대상은 경험에 근거한 추론적 인식에 의해서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예를 들어 찰나생멸하는 미세한 무상이나 무아, 공성 등이 비현전에 해당한다.

극비현전'전혀 지각할 수 없는 현상'이다. 극비현전은 일반인의 현량으로도 인식할 수 없고, 이해의 초기 단계에 있는 사람은 비량을 이용해 검증하는 것도 힘들다. 이러한 경우에는 타당한 경전적 권위, 즉 성교량(聖敎量) 내지 교증(敎証)에 의존해야한다. 교증에 의존하더라도 경전의 타당성, 신뢰 가능성에 대한 입증이 필요하다. 가령 티베트 불교는 인도 불교를 수용하는 과정에서 텍스트 비평을 통해 번역된 경전의 진위 여부를 검증하고자 노력했다. 또한 경전을 가르치는 스승의 타당성, 신뢰 가능성도 검증해야 한다.

교증을 거친 후에는 경전 내용 자체가 삼지작법(삼단논법) 등의 논리에 위배되지는 않는지 검증하는 이증(理証)을 거친다. 예를 들면 '보시를 행하면 재물을 얻는다. 경에서 이와 같이 설하기 때문이다'라고 할 때, 경설 자체를 논증인(論證因)으로 세워서 해당 내용을 신뢰하는 것이 아니라, 그 경론의 언설이 현량(現量)과 논리로써 오류가 없고, 경설의 구절에 직간접적인 모순이나 전후의 모순이 없으며, 설법자에게 다른 특별한 의도가 없는 등의 많은 조건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받아들이는 것이다.

일상생활에서 부모의 말에 의지해서 자신의 생일이 언제인지 알 수 있고, 역사적 기록에 의지해서 과거에 일어났던 다양한 사건들을 알 수 있는 것 등이 극비현전에 해당한다. 또한 경전에서는 극비현전의 예로 중생의 업력(業力), 부처의 사업(事業), 진언(眞言)ㆍ약(藥)ㆍ물질의 힘, 유가사(瑜伽師)의 유가(선정禪定)의 경계 등 네 가지 불가사의한 대상을 언급한다. 여기서 업력, 다시 말해 업의 인과(因果) 작용은 오직 일체지(一切智)를 얻은 부처만이 완벽히 알 수 있으며, 아라한도 인과를 파악하는데 한계가 있다고 한다. 다만 개별적인 사태들에 적용되는 구체적인 업의 경과가 아닌, 업이 작용하는 일반적인 원리인 업설(業說)에 대해서는 《구사론》 등 여러 논서에서 상세히 밝혀놓았다.

날란다 학자들의 전통에서는 제법의 체계를 확립할 때, 경설이나 타당한 말에 의지하는 신허비량(信許比量)보다 사세비량(事勢比量)을 중시하고, 논리에 의지하는 사세비량보다 직접적으로 경험하는 현량을 더 중시하는 우선순위를 따랐다.
불교 과학 철학 총서 편집위원회, 《물질세계(불교 과학 철학 총서 1)》(게쎼 텐진 남카 譯)
제14대 달라이 라마, 《달라이라마, 수행을 말하다》(이종복 譯)
사종도리(四種道理)
① 법이도리(法爾道理)
② 작용도리(作用道理)
③ 관대도리(觀待道理)
④ 증성도리(證成道理)

분석하는 방식과 관련하여 《해심밀경》, 《대승아비달마집론》, 《유가사지론》 등의 보살경론에서는 사종도리를 설하고 있다.

법이도리는 사물의 실상 그대로를 토대로 한, 각각의 법의 특성이나 자성 또는 법성을 의미한다. 작용도리는 그러한 법이도리를 토대로 하는, 각각의 법성의 본질과 부합하는 여러 가지 작용을 의미한다. 관대도리는 작용도리를 토대로 하는 상호 의존하는 관계, 즉 인과관계, 부분과 유분(有分)의 관계, 행위와 행위자와 행위 대상 셋의 관계 등 의존하는 실상을 의미한다. 증성도리는 앞의 세 가지 도리를 토대로 분석할 때, '이것이기 때문에 저것이어야 한다', '이것이 있기 때문에 저것이 있어야 한다', '이것이 아니기 때문에 저것이 아니어야 한다', '이것이 없기 때문에 저것도 없어야 한다'와 같은 논리를 세워서 소립(所立)을 논증할 수 있는데, 이러한 방식을 증성도리라고 한다.

사종도리 중 작용도리와 관대도리 이 둘의 핵심 내용인 인과와 연기의 법칙은 불교 전통에서 매우 중요하게 여기는 이치이다. 크게는 기세간과 유정세간의 생성에서부터 작게는 특정 시간에 특정 장소에서 비가 내리는 것과 같은 개별적 상황의 발생에 이르기까지 오직 인과연기의 법칙으로 설명할 수 있다. 이처럼 불교의 교의체계에서는 중생이 업과 번뇌의 힘에 의해 윤회를 떠도는 방식에서부터 윤회의 원인과 조건들을 차례로 제거하여 해탈에 이르는 것까지 오직 인과의 법칙으로 성립된다. 역사적 기록이나 현실적 상황 그 어느 관점에서 보더라도 인과의 법칙은 불교 철학의 매우 중요한 특징이다.
불교 과학 철학 총서 편집위원회, 《물질세계(불교 과학 철학 총서 1)》(게쎼 텐진 남카 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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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스탠포드대 "자비와 이타주의의 과학적 탐구"
(“Scientific explorations of compassion and altruism.”)
회의에서 과학자들[27]과 손잡은 달라이 라마.

티베트 불교의 분석적이고 지성적인 성향은 과학자들과의 적극적 교류에서도 드러난다. 카를 프리드리히 폰 바이츠제커(Carl Friedrich von Weizsäcker)#, 데이비드 봄(David Bohm)#, 리차드 데이비슨(Richard J. Davidson)#, 프란시스코 바렐라(Francisco Varela)#, 카를로 로벨리(Carlo Rovelli)# # 등 세계적인 뇌과학자, 신경생물학자, 인지과학자, 정신의학자, 물리학자들이 티베트 불교와 지속적으로 교류하고 있다

달라이 라마는 법문에서 양자역학, 심리학, 신경생물학 등을 예시로 자주 언급한다. 예를 들어 달라이 라마는 양자역학과 불교의 중관 사상 모두 '사물이 실제로는 관찰자에게 인식되는 것처럼 고정불변하는 실체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는 점에서 일치한다고 보았다. 그는 더 나아가 과학적 사실에 기초하여 불교 경전에서 언급된 수미산 중심의 세계관을 부정하기도 하였다. #

달라이 라마는 "중국 불자든, 한국 불자든, 티베트 불자든 상좌부 전통을 따르는 불자든 우리 불자들이 21세기의 불자가 되어야 한다"면서 "그것은 (21세기 불자들이) 현대 과학을 포함하여 현대와 현대 세계에 대한 더 폭넓고 깊은 이해의 기반을 갖춰야 하고 그에 덧보태어 부처님의 메시지와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한 더 온전한 이해를 가져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며 불자들에게 현대 과학 탐구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 또한 달라이 라마는 분석과 탐구를 강조하는 티베트 불교의 특성과 불교 논리학에 기반하여 불교와 과학 간의 교류가 가능하며 서로에게 유익한 영향을 줄 수 있다고 주장했다.

불교와 과학 간의 교류와 협력을 도모하는 달라이 라마의 노력에 대해 불교계나 과학계 양측 모두에서 우려의 시선을 보내는 이들도 있었으나 지금까지는 비교적 성공적인 교류가 이루어지고 있다. 단적인 예로 달라이 라마가 2005년 신경과학 분야의 대표적인 학회인 신경과학회(Society for Neuroscience, SfN)의 연례 학술회의에 초대되었을 때, 처음에는 그의 참석에 관한 논란이 벌어져 (달라이 라마의 정치적 입장에 반대하는 중국 출신이 다수 포함된) 500여 명의 과학자들이 초대에 반대하는 탄원서를 제출하기도 하였다. 반대 측은 "달라이 라마의 명상에 대한 견해는 주관적이며, 명상에 대한 과학적 근거가 부족한 현 시점에 신경과학이 무모하게 정신적 문제에 접근할 경우 학문의 신뢰성을 상실할 수 있다."는 반대 이유를 들었다. 그러나 이후 '명상을 통한 의식의 연구'를 주제로 한 달라이 라마의 연설을 듣고 신경과학자들은 그의 참석이 매우 적절하였음을 알게 되었고, 학회의 여론은 그의 방문을 전적으로 환영하는 방향으로 전환되었다. # # #

2005년 당시 반대 측 과학자들이 내세운 '과학적 근거 부족'이란 명분은 이후 명상에 대한 과학적 연구의 활성화로 인해 그 정당성을 상실하였다. 가령 불교 명상에서 파생된 마음챙김(mindfulness)의 경우 Web of Science에서 1966년부터 2021년까지 마음챙김에 관한 16,581건의 출판 논문이 확인되었다. 특히 2006년 이후 출판물의 기하급수적인 성장이 있었다. 출판물의 거의 절반(47%)이 심리학, 약 5분의 1(20.8%)이 정신 의학 출판물이었다. 대부분의 출판물은 서양에서 비롯되었지만 아시아 국가들의 대표성도 증가하고 있다.
Anuradha Baminiwatta & Indrajith Solangaarachchi, 《Trends and Developments in Mindfulness Research over 55 Years: A Bibliometric Analysis of Publications Indexed in Web of Science》
《불교 과학 철학 총서-1.물질세계》한국어판 봉정 법회 관련 VOA Tibetan 영상
《His Holiness the Dalai Lama launched the Korean Translation of Buddhist science and philosophy》

세계 최고(最古)의 대학인 날란다 대학(사원)에서는 불교학뿐 아니라 철학, 문학은 물론이고 천문학이나 의학, 약학 등 자연과학에 대한 연구와 수업이 강조되었다. 불교의 근본적 동기와 주된 목적은 고통에서 완전히 벗어난 구경(究竟)의 안락(安樂)이며, 이를 위해 세상의 본질을 있는 그대로 아는 지혜가 필요했다. 고통으로부터의 해방을 위해 세상의 본질, 사물의 이치를 제대로 알아야 했고 따라서 부파불교 시대 아비달마가 융성하기 시작하면서 불교 논서들에도 자연과학적 지식이 자주 등장하게 되었다.

날란다 대학의 전통을 이어받은 티베트 불교의 지도자 달라이 라마 역시 과학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다는 점은 주지의 사실이다. 달라이 라마는 불교 경론의 가르침을 크게 ‘제법(諸法)의 실상(實相) 혹은 과학’, ‘그와 관련된 철학’, ‘수행의 차례’로 분류하였다. 이 중 과학과 철학 두 분야는 종교와 무관하게 모든 사람들이 배울 수 있는 지식의 영역이며 시대적 요구와도 잘 맞는 학문이라고 여긴 달라이 라마는 2011년 《불교 과학 철학 총서》의 편찬을 기획한다. 이에 티베트 최고의 학승인 게셰 70여 명으로 구성된 편집위원회가 만들어진다. 편집위원들은 날란다 17 논사들의 저작, 그리고 여타 아비달마 논사들의 저작을 모두 검토하고 그 중에 과학, 철학과 관련된 내용을 발췌, 선별, 분류한 후 주석과 해설을 달았다.

총서는 다시 4권의 축약본으로 재편집되었는데, 그 중 1권에서 다루고 있는 물질세계는 극미(極微)의 세계에서 천체(天體)까지, 즉 마음을 제외한 외부 세계 전부를 가리킨다. 특히 세상을 이루고 있는 물질, 시간과 공간, 뇌를 비롯한 인간의 신체가 주 대상이다. 또한 서문에서는 불교와 과학의 관계를 다룬다. 영어, 중국어(번체)에 이어 전세계에서 3번째로 《불교 과학 철학 총서》 1권 '물질세계'가 한국어로 번역되었다. 근간으로 2권 '수행(가제)', 3권 '철학(가제)'이 있다. 불교 과학 철학 총서 편집위원회, 《물질세계(불교 과학 철학 총서 1)》(게쎼 텐진 남카 譯) # 영어로는 1권 'The Physical World', 2권 'The Mind', 3권 'Philosophical Schools', 4권 'Philosophical Topics'라는 부제로 4권 전부 번역 및 출간되었다. 《Science and Philosophy in the Indian Buddhist Classics》

그 밖에 티베트 불교와 과학 간의 교류를 담은 국내 서적으로 《한 원자 속의 우주》(이해심, 삼묵 譯), 《달라이 라마 과학과 만나다》(남영호 譯) 등이 있다.
티베트 불교 강원의 과학 교육에 대한 다큐
《100 Year Project:A Film》

달라이 라마와 과학자들이 참여하는 마음과 생명 연구재단(Mind & Life institute)의 강연, 대담, 저서 그리고 달라이라마와 과학자들의 교류를 담은 다큐 영화 《The Dalai Lama: Scientist》등에서 티베트 불교와 과학자들 간의 교류를 확인할 수 있다. Science for Monks & Nuns 프로젝트는 티베트 불교 승려들에게 과학 교육을 제공하는 교육사업이다. 스미스소니언 재단 등에서 파견된 교육자와 과학자들의 지도 하에 현재 7개 과학 센터에서 300명 이상의 승려들이 3년 과정의 과학 리더쉽 프로그램을 수료하였다. # 또한 에모리대와 협력하여 Emory-Tibet Science Initiative(ETSI)를 설립하고, 이를 통해 티베트 불교 강원에 과학 과목을 정규 교과과정으로 편성하여 승려들에게 지속적으로 과학 교육을 제공하고 있다.
2013년 제26회 마인드 앤 라이프 컨퍼런스: 마음, 뇌, 물질 (한글 자막 영상)[28]
Day1 am 실재의 본질에 대한 탐구: 불교적 관점과 과학적 관점 파일:유튜브 아이콘.svg
Day1 pm 과학의 범위: 지식과 실재의 본질 파일:유튜브 아이콘.svg
Day2 am 양자물리학, 상대성, 우주론 파일:유튜브 아이콘.svg
Day2 pm 실재의 본질 파일:유튜브 아이콘.svg
Day3 am 뇌 변화하기 파일:유튜브 아이콘.svg
■ 《깔라마 경》에 대한 오해

"깔라마들이여, 그대들은 소문으로 들었다고 해서, 대대로 전승되어 온다고 해서, ‘그렇다 하더라.’고 해서, [우리의] 성전에 써 있다고 해서, 추측이 그렇다고 해서, 논리적이라고 해서, 추론에 의해서, 이유가 적절하다고 해서, 우리가 사색하여 얻은 견해와 일치한다고 해서, 유력한 사람이 한 말이라고 해서, 혹은 ‘이 사문은 우리의 스승이시다.’라는 생각 때문에 [진실이라고 받아들이지 말라.]"

"깔라마들이여, 그대는 참으로 스스로가 ‘이러한 법들은 유익한 것이고, 이러한 법들은 비난 받지 않을 것이며, 이런 법들은 지자(智者)들의 비난을 받지 않을 것이고, 이러한 법들을 전적으로 받들어 행하면 이익과 행복이 있게 된다.’고 알게 되면, 그것들을 구족하여 머물러라."

"깔라마들이여, 이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사람의 내면에서 탐욕 없음이 일어나면 그것은 그에게 이익이 되겠는가, 손해가 되겠는가?" [...] "깔라마들이여, 이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사람의 내면에서 성냄 없음이 일어나면 그것은 그에게 이익이 되겠는가, 손해가 되겠는가?" [...] "깔라마들이여, 이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사람의 내면에서 어리석음 없음이 일어나면 그것은 그에게 이익이 되겠는가, 손해가 되겠는가?"

"경이롭습니다, 세존이시여. 경이롭습니다, 세존이시여. 마치 넘어진 자를 일으켜 세우시듯, 덮여있는 것을 걷어내 보이시듯, [방향을] 잃어버린 자에게 길을 가리켜주시듯, 눈 있는 자 형상을 보라고 어둠 속에서 등불을 비춰주시듯, 세존께서는 여러 가지 방편으로 법을 설해주셨습니다. 저희들은 이제 세존께 귀의하옵고 법과 비구승가에 귀의합니다. 세존께서는 저희들을 재가신자로 받아주소서. 오늘부터 목숨이 붙어 있는 그날까지 귀의하옵니다."
《깔라마 경(A3:65)》
《앙굿따라 니까야 1(하나의 모음 둘의 모음 셋의 모음)》(대림 譯)

상좌부 경전인 《앙굿따라 니까야》에 속한 《깔라마 경》은 이른바 '부처의 자유 탐구 헌장(the Buddha's Charter of Free Inquiry)'으로 잘 알려진 경전이다. 모든 교조주의, 전통, 편협함으로부터의 자유를 논하는 본 경전은, 그러나 유명세만큼이나 잘못 해석되는 경우도 많다. 맥락을 고려하지 않은 부분적인 인용을 바탕으로 종종 《깔라마 경》은 급진적인 회의주의나 비이성적이고 주관적인 진리 창조를 옹호하는데 악용되곤 한다.# 이에 관하여 현대 테라와다 불교의 스승 빅쿠 보디(Bhikkhu Bodhi)는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문맥에서 벗어난 단 한 구절의 인용을 근거로, 붓다는 '모든 교리와 신앙을 일축하는 실용적인 경험주의자'가 되어버렸고, 그의 법은 단순히 자유사상가의 진리에 대한 도구가 되어 각자 자기 멋대로 수용하고 거부하는 상황을 초래하였다.
Bhikkhu Bodhi, 《A Look at the Kalama Sutta》

《깔라마 경》은 진리에 대한 판단 기준이 정립되지 않은 깔라마 사람들을 위해 즉각적이고 도덕적이며, 유익하고 본질적인 가치인 '탐진치(貪瞋痴)의 소멸'을 우선 기준으로 제시한 경전이다. 《깔라마 경》에서 석가모니는 논리와 추론, 사유만으로 판단하는 것을 경계하였지만, 그러한 지적 작용들 자체를 배제해야 한다는 내용은 해당 경전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깔라마 경》을 독해하는 과정에서부터 이미 논리적 사고는 요구된다. 바른 법을 '이익과 행복의 획득 수단'으로 정의하고, 이익과 행복을 얻기 위해서는 탐진치를 소멸해야 하며 따라서 바른 법과 바르지 않은 법을 탐진치의 소멸 여부로 판단하는 《깔라마 경》의 전개 역시 일종의 연역적 추론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또한 깔라마 사람들의 삼보에 대한 귀의 부분에서 알 수 있듯, 건전한 사유에 기초한 믿음에 대해서도 《깔라마 경》은 부정한 바 없다.

차연성(此緣性)을 알고서 사견(邪見)의 그물인 분별(分別)을 벗어난 사람은, 탐욕, 미움, 우치를 벗어나 [번뇌에] 물들지 않은 열반으로 나아간다.
《공칠십론》(이지수 譯)
이지수, 《인도 불교철학의 원전적 연구》

석가모니는 자신의 탁월한 지성을 적극적으로 중생 교화에 활용하였는데, 단적인 예로 석가모니가 설한 연기법은 독립된 존재를 부정할 뿐만 아니라 의존적인 존재를 정립시켜 단견(斷見)과 상견(常見)을 동시에 제거하기 때문에 "왕(王)과 같은 논리(rigs pa'i rgyal po)"로까지 일컬어진다. 용수보살이 《공칠십론》에서 밝혔듯이 연기를 통해 다른 것에 의존한 것(차연성), 즉 공성을 알게 되어 사견(邪見)과 그로 인한 탐진치를 소멸할 수 있기 때문에 붓다의 교설인 연기는《깔라마 경》에서 말하는 유익한 법의 기준에 완벽히 부합한다.
4.1.1.4. 근(根), 도(道), 과(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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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보드가야 마하보디 사원의 보리수.
불법(佛法)을 나무에 비유하면 존재론은 뿌리,
수행론은 줄기, 결과론은 열매에 해당한다.

티베트 불교에서는 모든 불교의 가르침을 크게 근(根, 혹은 기基, gzhi), 도(道, Skt. mārga; Tib. lam), 과(果, 'bras bu) 세 부분으로 분류한다. 근은 존재론, 도는 수행론, 과는 결과론에 해당한다. 존재론에 기반하여 수행론이 성립하며, 존재론과 수행론을 기반으로 결과론이 성립한다.

수행론인 도(道)는 다시 견해, 명상(수습), 행위(lta sgom spyod gsum)로 구분한다. 여기에 결과론인 과(果)를 합하여 견수행과(見修行果)라고 지칭할 때도 있다. 견해, 명상, 행위에 대한 설명은 다음 항목에서 후술하였다.

불교 전반의 근ㆍ도ㆍ과에 대하여 티베트 불교에서는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 근(根) - 기본 바탕인 세속제(속제)와 승의제(진제)의 이성제(二聖諦)
  • 도(道) - 방편의 보리심과 반야의 지혜 두 가지 방법
  • 과(果) - 법신과 색신의 두 가지 과위(果位)

이에 관하여 제14대 달라이 라마는 초심자들을 위해 제14대 달라이 라마, 《로사르믹제(새로운 마음의 눈을 여는 말씀)》(게셰 소남 초펠 譯)라는 간략한 문헌을 지었다. 다음은 《로사르믹제》에서 키워드만을 뽑아 더욱 간략히 요약한 것이며 자세한 내용은 《로사르믹제》와 관련 경론을 참고해야 한다.

1. 근(根)이 되는 이제(二諦)
진제궁극적 진실이고 속제관습적 진실이다. 둘은 배타적이며 둘 중 하나가 없다면 모든 현상을 포함할 수 없다. 이 둘 외에 세번째 진실은 없으므로 다른 범주가 없는 열거이다.

또한 속제는 마음으로 인식하는대로 존재하지 않는 것이며 진제는 직접인식(현식顯識)이 인식하는대로 존재하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진제는 인무아, 법무아를 일컬으며 속제는 오온, 십이처, 십팔계를 일컫는다. 속제를 더 세분화하면 62계 등으로 나눌 수 있다.

2. 불경(佛經)인 삼장(三藏)의 내용과 삼장으로 분류한 이유
붓다가 번뇌를 다스리기 위해 설한 팔만사천 가르침은 모두 십이분교(十二分敎)에 포함되며 또한 이는 다시 삼장(三藏), 즉 경(經)ㆍ율(律)ㆍ론(論)에 모두 포함된다.《대승장엄경론》에서는 삼장으로 분류하는 이유를 1) 3가지 번뇌, 2) 삼학(계정혜), 3) 3가지 알아야 할 대상과 관련하여 설명하였다.

3. 삼장의 내용인 삼학(三學)
3-1. 계율
삼장의 내용삼학(三學)계율(戒律)모든 공덕의 근원이며 십악업(十惡業)을 없애는 윤리 등 여러가지가 있고 이들은 모두 별해탈계, 보살계, 금강계에 포함된다. 별해탈계는 소승ㆍ대승 공통으로 지키는 계율이고 보살계, 금강계는 대승에서 지키는 계이다.

별해탈계는 실천하는 본인을 윤회의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기 때문에 '본인 해탈(별해탈別解脫)'이라고 한다. 윤회 전체에서 벗어나고 싶어하는 마음인 출리심으로 받는 계율이며, 남을 해치는 것과 그러한 바탕부터 없애는 마음 및 마음 작용을 말한다. 구체적으로는 팔관재계, 우바새계, 우바이계, 사미계, 사미니계, 식차마나니계, 비구계, 비구니계 등 여덟 가지가 있다. 별해탈계는 소승ㆍ대승 공통으로 지켜야 할 계율이다.

대승의 계율로는 보살계와 밀교계(금강계)가 있다. 보살계에는 18가지 근본타죄(根本墮罪)가 있고 밀교계는 14가지 근본타죄가 있으며 그 밖에 보살계와 밀교계에는 광대한 세부 계율들이 있다.

3-2. 선정
삼학 중 삼매(三昧), 즉 사마디(samadhi)마음이 산만하지 않고 어떤 선(善)한 대상에 머무는 것을 가리킨다. 사마디의 정의를 수습(修習)해서 익숙해지면서 색계 선정, 무색계 선정을 얻게 된다. 그리고 명상을 통해 완전히 익숙해지면 선정바라밀(완전한 선정)이 된다.

사마디에는 세간(世間) 사마디와 출세간(出世間) 사마디 2가지 있다. 처음에는 샤마타, 다음에는 위빠샤나, 마지막으로 둘을 결합한 사마디를 일으켜야 한다. 샤마타를 먼저 수습하는 이유는 삼승(三乘)의 공덕이 모두 진정한 샤마타와 위빠샤나의 결과이거나, 샤마타와 위빠샤나에 가까운 분석명상과 집중명상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샤마타를 성취해야 분석명상 시에도 대상을 산만하게 인식하지 않기 때문에 수행이 강해진다.

3-3. 지혜
삼학 중 지혜조사와 분석으로 현상을 완전하게 분별하는 지혜를 뜻한다. 이것을 실천하며 완전하게 익숙해지면 지혜바라밀이 된다.

지혜는 3가지로 분류한다.
1) 궁극적 현상을 깨닫는 지혜: 공성을 분별심을 통해서 관념적(의공상義共相)[29]으로 인식하거나 직접적으로 인식하는 지혜.
2) 관습적 진실을 깨닫는 지혜: 다섯 가지 지식(오명五明)을 잘 아는 지혜.
3) 중생의 복지를 인식하는 지혜: 중생의 현재와 미래의 복지를 성취하는 방식을 아는 지혜.
그 중에서 중심인 무아를 깨닫는 지혜를 성취해야 한다. '무아'라는 개념의 의미에도 불교 4대 학파의 여러 주장이 있는데, 그러한 여러 해설도 귀류논증 중관학파의 견해를 잘 깨닫기 위해 설해진 것이다.

세간의 모든 허물의 뿌리는 실집(實執, 실제로 존재한다고 인식하는 집착)과 그러한 습기(習氣, 습관적 성향)들이다. 이걸 없애는 방법은 무아를 깨닫는 지혜 밖에 없다. 그러므로 무아의 개념을 깨닫는 위빠샤나를 성취하기 위해 애써야 한다. 인무아(人無我)와 마찬가지로 분석하고 나서, 그런 의식으로 파악한 대상이 공성으로 사라지고 의존적인 현상(연기緣起)의 모임일 뿐인, 명칭으로 세워졌던 것(유언가유唯言假有)일 뿐임이 마음에 나타날 때 법무아(法無我)를 깨닫는 것이다.

4. 삼학을 통해 성문승ㆍ연각승에 들어가는 방식
삼학을 통해 소승성문, 연각의 길에 들어서는 이도 있고, 어떤 이는 대승의 길에 들어서는 이도 있다. 성문의 길에는 자량도(資糧道), 가행도(加行道), 견도(見道), 수도(修道), 무학도(無學道)오도(五道)가 있다. 윤회에서 세 가지 고통이 생기는 것을 안 뒤 벗어나려는 마음과 찾는 목적인 해탈을 원하는 마음(출리심出離心)이 진정으로 생길 때 성문의 자량도에 들어간 것이다. 연각의 길은 성문과 비교하였을 때 찾는 깨달음이 같지 않고, 복덕을 수많은 겁 동안 쌓았는지 여부 외에는 오도 등이 거의 성문과 같다.

5. 대승의 바라밀승
대승에는 바라밀승(현교)금강승(밀교)이 있다. 바라밀승도 소승과 같이 자량도 등 오도가 있다. 고통스럽고 행복이 부족한 모든 중생을 내가 유익하게 하겠다는 책임감을 가지는 자애심과 연민심을 마음 동기로 삼아 붓다의 경지를 구하는 진정한 마음(보리심菩提心)이 생길 때 천신과 인간 등 모든 세간이 존경하는 보살이 되는 것이고 대승의 자량도를 얻는 것이다.

■ 대승의 오도십지(五道十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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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대승의 금강승
바라밀승과 금강승은 목적인 붓다의 경지에 있어서는 차이가 없다. 이 두 가지 수레의 차이점은 붓다의 경지를 얻기 위한 원인에 있다. 결과인 붓다의 몸은 법신(法身)과 색신(色身) 두 가지가 있고 따라서 둘의 개별적 원인도 두 가지가 있어야 한다. 보리심과 결합된 '공성을 인식하는 지혜'가 법신의 개별적 원인이면서 색신의 협력적 원인임은 바라밀승과 금강승 둘 다 동일하다.

색신의 개별적 원인이 되는 광대한 방편을 인정하는 것이 금강승이고, 단지 보리심과 육바라밀 등의 방편만 갖고 있는 것이 바라밀승이다. 따라서 바라밀승에 의지하면 많은 생이 지난 다음 붓다의 경지를 얻을 수 있지만, 금강승에 의지하는 지혜로운 이는 한 생 또는 몇 년의 수행만으로 붓다가 될 수 있어 금강승의 길이 더 빠르다.

바라밀승과 구별되는 금강승의 특징인 색신의 특별한 원인으로는 본존 요가가 있다. 결과인 색신의 진정한 거주지 및 몸 등과 비슷한 본존 요가를 관상하는 최고의 방편이 바라밀승에는 없는 광대한 방편이다.

7. 붓다의 사신(四身), 공덕, 행위
지혜가 원인이 되어 법신을 이루고, 방편이 원인이 되어 색신을 이뤄 최종적으로 붓다의 과위를 얻게 된다. 《현관장엄론》에 따르면 법신과 색신은 다시 자성법신(自性法身), 지법신(知法身),[30] 보신(報身), 화신(化身)사신(四身)으로 나눌 수 있다. 이 중 자성법신은 진제에 해당하고, 나머지 지법신, 보신, 화신은 속제에 해당한다.

자성법신은 진제로서 '무자성(無自性)', 즉 '공성'을 의미한다. 자성법신을 다시 둘로 구분하면 '오염이 없는 본래청정'으로 '부처의 마음의 흐름(心相續), 즉 모든 현상을 깨닫는 지혜인 일체상지(一切相智)'의 본질인 공성을 가리키는 자성청정법신(自性淸淨法身)과, '객진번뇌[31]를 제거한 청정'으로 '번뇌장과 소지장이 없는 부처의 멸제(滅諦)'인 객진청정법신(客塵淸淨法身)으로 나눌 수 있다.

속제에 해당하는 지법신, 보신, 화신 중 지법신은 진제와 속제에 포함된 모든 대상을 자신의 앞에 존재하듯이 직접인식으로 인식하는 일체상지, 보신은 정토(淨土)에 머물며 보살들에게 대승법만을 설하는 등 '다섯 가지 결정된 법(五決定)'을 갖춘 색신, 화신은 '다섯 가지 결정된 법'을 갖추지 않고 삼계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나투는 색신을 의미한다.

붓다의 공덕에는 신(身), 구(口), 의(意), 사업(事業)의 공덕이 있다. 그 중 붓다만이 갖고 있는 특별한 공덕으로 사무외(四無畏), 사무애지(四無礙智), 십력(十力), 십팔불공법(十八不共法) 등이 있다. 붓다의 행위는 자발적이고 지속적이다.
■ 자성의 복합적 의미

중관학파는 법에 실체가 있다고 보는 소승 아비달마 교학의 실재론적 해석을 비판하며 독립적이고 불변하는 실체인 자성(自性, svabhāva)을 부정의 대상으로 삼았다. 동아시아 불교에 익숙한 이들은 이러한 중관학파의 정의에 혼란을 느끼기 쉽다. 인도 대승의 여래장(如來藏)ㆍ불성(佛性) 사상과 유가(儒家), 도가(道家) 등 전통적인 중국 사상의 본체론적 사유에 강한 영향을 받은 동아시아 불교에서 자성이란 곧 진여(眞如), 불성(佛性),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 등과 동의어로서 진리의 당체(當體), 법의 진실한 본성이란 의미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중관을 요의로 삼은 티베트 불교는 일체법의 무자성(無自性, niḥsvabhāva)을 논하면서 자성을 주로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한다. 그러나 한편으로 동아시아 불교와 마찬가지로 자성신(svabhavakaya), 자성청정(rang bzhin gyis rnam par dag pa) 등 자성을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하는 경우도 있어 초학자가 혼동을 느끼기 쉽다. 쫑카빠의 《보리도차제광론》<관품>에서도 일체법이 무자성임을 논하면서 승의제(勝義諦), 법성(法性)으로서의 승의자성(勝義自性)은 긍정하는 일견 모순된 듯한 서술을 찾을 수 있다. 그렇다면 티베트 불교에서 자성의 정확한 의미는 도대체 무엇인가?

대승 불교에서 자성은 부정적인 의미의 자성과 긍정적인 의미의 자성으로 나뉜다. 부정적인 의미로 쓰일 경우 자성(세간자성)은 '독립적이고 불변하는 실체'로서 공성의 부정대상인 인아(人我)와 법아(法我)를 의미한다. 긍정적인 의미로 쓰이는 경우 자성(승의자성)은 일체법의 궁극적 특성/본성을 가리키며 특히 중관학파에서는 공성을 가리킨다. 이를테면 공성을 '자성이 없다(무자성)', '자성이 공하다', '자성이 있는 존재가 아니다' 식으로 전도(顚倒)된 관념을 척파하기 위해 부정 형식으로 표현할 수도 있고, 수행의 근거, 목표, 결과로 삼기 위해 '(승의)자성', '법성', 진여', '자성법신', '불성', '여래장', '멸제', '열반' 등의 긍정 형식으로 표현할 수도 있는 것이다. 물론 긍정 형식으로 표현되더라도 독립적이고 불변하는 실체가 아닌, 언설로만 성립할 뿐이다.

이처럼 자성은 대승 불교 전반에 걸쳐 복합적인 의미로 사용된다. 이는 '(다른 대상과 구별되는 고유한) 본질', '본성'이란 뜻의 자성이 중관에서는 주로 '독립적이고 불변하는 실체'로서 부정의 의미로 쓰였고, 이후 유식과 여래장에서는 주로 '궁극적인 진실의 경계', '본질'이라는 긍정의 의미로 쓰이는 변천과정을 겪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의미의 변화가 개념적인 혼동을 유발하기 쉽기 때문에 맥락에 따른 자성의 정확한 의미를 파악할 필요가 있다.
이태승, 《『보리도차제대론』에 나타나는 승의자성의 의미》
이태승,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자성(自性))》
윤희조, 《자성(自性)의 의미변화에 관한 일고찰 - 『구사론』, 『중론』, 『단경』 을 중심으로》
4.1.1.5. 견해, 명상, 행위
견해, 명상, 행위를 하나로 묶고 실천하는 것은 꼭 필요한 일이다. 왜냐하면 이것들은 마치 창(槍) 하나하나가 모여 한 묶음을 이루듯이 서로 밀접하게 의존하기 때문이다.

견해 없이는 행위가 아무리 선하다 할지라도 실재가 있다고 믿게 되고 그래서 윤회가 계속된다. 행위 없는 견해로는 공덕 쌓는 일을 완벽하게 해낼 수 없다. 게다가 견해를 기르는 당사자를 허무주의의 심연까지 이끌어 갈 위험이 있다. 명상이 없는 견해와 행위는 땅 속에 묻힌 보물과 마찬가지로 무용하다. 오두막집 밑에 보물이 무진장 숨겨져 있어도 가난한 사람이 그것으로 배고픔을 면할 수 없듯이, 견해와 행위에 대한 가르침이 엄청나게 많아도 실제 명상 수행을 하지 않으면 수행자는 마음을 다르마(불법)에 계합시킬 수 없다. 즉 견해와 행위가 필요할 때 전혀 유용하지 못할 것이다.
제쭌 타라나타(rje btsun ta ra na tha)
마티외 리카르,《티베트 지혜의 서》(임희근 譯)

티베트 불교에서는 수행론인 도(道, Skt. mārga, Tib.lam)를 다시 세분화하여 견해, 명상(수습), 행위(lta sgom spyod gsum)로 구분한다. 여기에 결과론인 과(果, 'bras bu)를 합하여 견수행과(見修行果: 견해, 명상(수습), 행위, 결과)라고 지칭할 때도 있다. 현밀(顯密)을 막론하고 모든 불교 수행은 견해, 명상, 행위 세 가지로 구성되며, 이를 통해 목표한 결과를 얻는다.

대만 중화불학연구소(中華佛學研究所)의 란지푸(藍吉富) 교수가 작성한 《佛教信仰的見修行果》를 참조하여 견수행과(見修行果)를 다음과 같이 정의할 수 있다.

견해(Skt. dṛṣṭi, Tib.lta ba)란 법문이나 종파의 교리에 대한 기본적인 인식이나 믿음을 의미한다.
1) 법문의 기본 원리, 믿음의 근거, 이론 구조 등에 대한 기본적인 인식. 염불 법문을 예로 든다면 법문의 근거가 되는 경론과 왜 염불이 필요한지, 염불의 정의는 무엇이고 염불의 목적은 무엇인지 등등이 견해에 해당한다.

2) 어떤 전승이나 종파의 기본 교리 구조를 말함.

명상(혹은 수습)은 내재적(內在的)이고 개인적인 수행을 의미한다. 불교 수행(修行)은 내재적인 수행인 '명상'과 다른 대상 간의 관계 속에 이루어지는 외재적인 '행위'로 구분할 수 있다.

명상은 주로
  • 수습(修習), 수행계발(Skt.bhavana, Tib.sgom)
  • 삼매(Skt.samadhi, Tib.ting nge 'dzin)
  • 선정(Skt.dhyana, Tib.bsam gtan)

을 포괄하는 개념이다. 다시 말해 명상은 경전 학습을 통해 얻는 문혜(聞慧, śruta-prajñā)와 논리적 사유를 통해 얻는 사혜(思慧, anumāna-prajñā 또는 cintā-prajñā)를 요가행법을 통해 직접적, 체험적, 직관적인 수혜(修慧, bhāvana-prajñā)로 전환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행위(Tib.spyod pa)는 앞서 언급했듯이 외재적(外在的)이고 다른 대상과의 관계 속에 이루어지는 일상의 태도, 마음가짐이나 행동을 의미한다. 육바라밀을 예로 들자면 선정, 지혜바라밀은 명상에 해당하고 보시, 지계, 인욕 바라밀은 행위에 해당한다. 그리고 정진바라밀은 나머지 다섯 바라밀 모두에게 적용된다.

결과는 견해ㆍ명상ㆍ행위로 구성된 불교 수행을 배우고, 사유하고, 실천하여 얻는 성과를 의미한다.

1) 각 전승과 종파에서 추구하는 궁극적인 과위(果位). 예를 들어 성문승은 아라한, 대승의 현교는 삼아승지겁 동안의 수행을 통한 성불, 밀교는 즉신성불(卽身成佛), 선종은 견성성불(見性成佛) 등을 결과로 삼는다.

2) 궁극적인 과위 외에 단계별로 얻는 성과. 예를 들어 성문승은 아라한 외에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 등 사향사과(四向四果)가 있으며 보살승은 초지(初地)부터 십지(十地)까지의 보살지(菩薩地)가 있다.
4.1.1.6. 불교 4대 학파의 종의(宗義)

4.1.2. 각론

4.1.2.1. 5부 대론(五部大論)
4.1.2.1.1. 인명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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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론(對論)으로 외도(外道)들을 제압하는 디그나가
세상 사람들의 이익을 바라는 분(慈悲者)이며, 교사(敎師)이며, 선서(善逝)이며, 구제자(救濟者)인 규범자(프라마나pramana(바른 인식)가 되신 분=세존)에게 경례하여 나(디그나가)는 프라마나를 확립하기 위해 [《니야야뭇차》 등의 자신의 저술에서] 산발적으로 설해져 있는 자기의 말들을 하나로 정리하여 《프라마나삼웃차야》를 저술한다.
《프라마나삼웃차야(양집성/집량론)》
《다르마키르티의 인식론평석:종교론》(권서용 譯)

티베트 불교 교학은 중관학과 더불어 불교의 인식론과 논리학에 해당하는 인명학(因明學, Hetu-vidyā)을 중시한다. 인명학은 말 그대로 인(因), 즉 원인과 이유에 관한 학문을 지칭하는 전통적 용어로, 논증의 핵심인 논증인(論證因)을 규명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이태승,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인명(因明))》

인명학은 현대식 용어로 불교인식논리학이라고 한다. 인명학에서 지각에 해당하는 현량(現量, pratyakṣa)과 추리에 해당하는 비량(比量, anumāna)이라는 두 종류의 바른/타당한 인식(量, pramāṇa)을 다루며, 이 중 비량에 관한 이론은 논리학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인명학은 경론을 통해 견해와 수행 체계를 익히는 데 필요한 분석 도구일 뿐 아니라, 수행을 통해 공성에 대한 명료한 인식을 획득하는 데도 필수적으로 의지해야 할 수단이다.

공성을 현량(現量)을 통해 직접적으로 지각하는 견도(見道)는 공성을 지각하기 이전 가행도(加行道)의 세제일법(世第一法)까지 유지되는 분별지(分別智) 없이는 불가능하며, 이 분별지는 올바른 논리를 통해 생기기 때문에 결국 인명학의 논리방식을 익혀야 된다. 논리학을 공부하는 것을 외적 대상을 이해하기 위한 것이지 내적 수행과는 관계가 없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바른 논리를 심을 수 없으며 수행 체계 역시 완성할 수 없다. 따라서 사견(邪見)을 모두 제거하여 진정한 수행자가 되려면 논리학을 학습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며 특히 지관(止觀)을 수습(修習)하는 이들이 논리 체계를 이해하게 되면 그 가치가 더욱 높아진다.
《논리에 이르는 신비로운 열쇠: 뒤다체계의 논리방식》(게셰 텐진 남카 譯)

이처럼 인명학은 교학 뿐 아니라 수행에도 필수적인 토대가 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아시아 불교권에서 인명학은 적극적으로 수용되지 못한 채 천 년 이상 잊혀져 온 것이 사실이다. 때문에 제14대 달라이 라마도 "한국인에게 《람림》같은 수행 체계보다 우선 《뒤다》와 같은 논리학을 먼저 가르치라"고 당부한 바 있다. 비단 연구자나 수행자 뿐 아니라 티베트 불교에 관심있는 일반인들도 인명학에 대한 기초적인 지식을 갖고 있으면 도움이 많이 된다. 논리적 사고를 증진시킬 뿐 아니라 티베트 불교를 보다 정확하고 심도있게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기 때문이다. 티베트 불교 관련 법문, 강의, 문헌 등에서 인명학의 개념과 논리 전개를 활용한 부분이 종종 등장하는데, 인명학에 무지하면 번역과 이해에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다.

인명학은 구(舊)인명과 신(新)인명으로 나뉘는데, 이 중 신인명은 디그나가(Dignāga, 480~540)와 다르마끼르띠(Dharmakīrti, 7세기)가 확립했다. 불교의 진리를 논리적으로 탐구하는 모든 과정은 인명의 범주에 포함된다. 디그나가와 다르마끼르띠는 불교의 인명논리학을 집대성하여 종(宗), 인(因), 유(喩)로 이루는 삼지작법(三支作法)을 확립했고, 이후 오지작법의 논쟁 방식이 점차 정립되었다.

《인명칠론(因明七論)⟫ 혹은 《칠부량론(七部量論, Pramanavartikadisapta-grantha-samgraha)⟫은 다르마키르티가 디그나가의 《집량론(集量論, Pramāṇa-samuccaya)⟫를 주석한 (1) ⟪양평석(量評釋, Pramāṇavārttika)⟫, (2) ⟪정량론(定量論, Pramāṇaviniścaya)⟫, (3) ⟪이적론(理滴論, Nyāyabindu)⟫ (4) ⟪인적론(因滴論, Hetubindu)⟫, (5) ⟪관계론(關系論, Saṃbandhaparīkṣā)⟫, (6) ⟪쟁리론(諍理論,  Vādanyāya)⟫, (7) ⟪오타론(悟他論, Saṃtānāntarasiddhi)⟫ 등 일곱 가지 주석서를 총칭하는 말이다.
정성준, 《티베트대장경의 번역과 영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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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명칠론》의 저자 다르마끼르띠
사람의 모든 목적 성취에는 선행하는 바른 인식이 있기에 그것이 논구(論究, vyutpadyate)된다.[32]
《니야야빈두(정리일적)》
《니야야빈두, 니야야빈두띠까》(박인성 譯)

동아시아 불교권에서는 디그나가의 《인명정리문론(因明正理門論)》과 디그나가의 제자로 추정되는 상카라스와민(Śaṇkarasvāmin)의 《인명입정리론(因明入正理論)》등이 한역되어 전래되었다. 반면 티베트 불교에서는 다르마끼르띠의 《석량론(양평석)》을 중시하였는데, 《석량론》과 같은《인명칠론》은 과거에 한역이 된 바 없다. 현대에 이르러 학술서와 논문 등에서 《인명칠론》일부가 현대어로 번역되었지만 아직《석량론》의 현대어 완역본은 나오지 않았다. 근현대 티베트의 문제적 인물인 학승(學僧) 겐뒨 최펠(dge 'dun chos 'phel)이 《석량론》을 영어로 완역하였으나 실전(失傳)되었다고 전해진다.

티베트 불교의 인식논리학과 언어철학에 대한 개괄적인 소개는 스위스 로잔 대학의 파스칼 위공(Pascale Hugon)이 작성한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Tibetan Epistemology and Philosophy of Language> 항목에 나와 있다.

티베트 불교 강원에서는 기초 과정에서 인식논리학과 관련된 《뒤다(섭류학攝類學)》, 《로릭(심류학心類學)》, 《딱릭(인류학因類學)》을 배운 뒤 5부 대론 과정에서 다르마끼르띠의 《석량론(釋量論)》을 배운다. 또한 논리학을 중시하는 겔룩의 경우, "잠양군최('jam dbyangs dgun chos)"라 하여 매년 겨울철 한 달씩 간덴, 세라, 데뿡 삼대(三大) 사원의 학승들이 한 사원에 모여 집중적으로 논리학을 배우고 토론하는 행사를 개최한다.

참조할만한 국내 서적은 다음과 같다. 티베트 불교의 인식논리학과 직접적으로 연관 있는 국내 서적은 매우 드물다.[33]

대신 티베트 불교 인식논리학의 토대가 되는 인도 후기 유식학파(경량부유가행파)의 인식논리학 및 언어철학과 관련한 국내 서적을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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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베트 승려들이 대론하는 모습
두 마리 사자가 서로 등을 맞대면 어떤 짐승도 그들을 대적할 수 없듯이, 중관과 인명을 익히면 어떤 반박과 논리도 물리칠 수 있다.
티베트 격언

불교논리학에 기초한 대론(對論, རྩོད་པ ; 쬐빠rtsod pa)은 인도의 날란다 사원에서부터 계승된 티베트 불교의 중요한 수행 방법 중 하나이다. 티베트 불교에서 대론은 설법('chad), 저술(rtsom)과 더불어 타인을 이롭게 하기 위해 갖춰야 할 학자(paṇḍita)의 3가지 주요 활동(mkhas pa'i bya ba gsum)으로 알려져 있다. 일찍이 불교는 내도(內道)의 다른 학파 및 외도(外道) 간의 대론을 통해 바른 견해를 확립해왔다. 오늘날과 같은 티베트 불교의 대론 방식은 12세기 차빠 최끼 셍게(ཆ་པ་ཆོས་ཀྱི་སེང་གེ་, phywa pa chos kyi seng ge)에 의해 정립되었다.

티베트 불교의 대론 방법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대론은 인명자(因明者; 딱셀와; rtags gsal ba)와 발서자(發誓者; 담짜와; dam bca'ba) 간의 문답으로 진행된다. 인명자는 일어선 채로 질문하고, 발서자는 앉은 채로 대답한다.

2) 발서자는 자신의 주장을 방어하고, 인명자는 발서자의 주장을 무너뜨리기 위해 여러 가지 질문들을 통해 발서자를 모순으로 유도해간다.

3) 발서자가 자신이 전에 했던 주장을 뒤에 번복하면 인명자는 왼손 손바닥에 오른 손등을 내리치며 '차!'라고 외쳐 오류가 발견됐음을 확인시킨다. 그러나 이것이 인명자의 착각일 경우 발서자는 '찰록' 또는 '차똥'이라고 말해 오류가 없음을 주장한다.

4) 궁극적으로 인명자는 발서자의 근본주장(짜외담짜; rtsa ba'i dam bca'), 즉 논쟁의 시초가 된 주장을 무너뜨리기 위해 나아가며, 근본 주장이 번복될 경우 발서자의 근본적 패배로 간주된다.
범천,《불교논리학의 향연》

함께 수업을 받는 동료에게 학습한 내용에 대해 질문을 하고, 질문에 답하는 동료의 논리에서 발견되는 모순을 지적하는 과정을 통해 자신의 견해를 완벽하게 구축하는 것이 티베트 불교 강원에서 이루어지는 대론의 목적이자 의의이다. 대론은 질문을 하는 쪽, 답을 하는 쪽 모두에게 도움이 되는 공부 방식이다.

​즉 대론은 자신의 이해력(nges shes)을 향상시키기 위해 대론을 하는 것이다. 만일 어떤 반론에도 자신이 제시한 관점으로 방어할 수 있고, 논리적으로도 모순이 없다면 그 주제에 대해 확고한 이해력을 지녔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그 주제에 대해 더는 의심하지 않고 집중할 수 있다. 이런 상태의 마음을 확신(mos pa)이라고 한다. 무상, 자타평등(自他平等), 자타상환(自他相換), 보리심, 공성 같은 주제로 집중 명상을 할 때 바로 확고한 이해와 확신이 필요하다. 많은 이들과 대론을 하면 혼자 분석 명상을 하고 법을 사유하면서 이해를 향상시키는 것보다 훨씬 더 광범위하게 질문을 제기할 수 있고, 더 많은 논리적 모순과 오류를 더욱 쉽게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대론을 하는 목적이다.

대론은 경우에 따라서 초보자들이 집중력을 계발하는데 명상보다 더 효과적인 것으로 여겨진다. 대론을 하기 위해서는 상대의 의견을 경청해야 하기 때문에 집중력 향상에 도움이 된다. 아울러 혼자 명상을 할 때와 달리 수많은 사람들이 큰 소리로 대론을 하는 대론장에서 대론을 해야 하므로 상대가 자신에게 하는 말을 더 집중해서 들을 수 밖에 없다. 또한 대론 상대에게 거들먹거리거나 화를 내는 일 없이 마음의 균형을 유지하는 훈련이기도 하다.

대론 상대의 주장이 논리적이지 않다고 입증하는 것이 자신이 더 똑똑하고 상대가 더 어리석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결코 아니라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대론의 승패에 따라 나와 상대 간의 우열을 가릴 때 자기중심적인 ‘나’라는 관념이 작용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어야 한다. 논쟁에서 이겼다고 좋아하거나 졌다고 분노하는 것은 ‘나’가 실재한다는 착각에서 비롯되는 현상이며, 그러한 관념은 궁극적으로 해체해야 할 대상이다. 대론을 하는 목적은 지적 우열을 가리는데 있지 않고, 자신과 상대 모두 대론의 주제를 명확하게 이해하고 그 결과로 확신을 갖는 데 있다.
제2대 첸샵 쎌콩 린포체, 《대론의 목적과 장점》
티베트 불교 대론법 소개 영상

대론이나 분석 명상은 마음챙김 등 다른 명상에 비해 과학적으로 거의 연구된 바 없다. 마리에케 반 부흐트(Marieke K. van Vugt) 흐로닝언대 교수, 조슈아 폴록(Joshua Pollock) 켄트 주립대 교수, 데이비드 프레스코(David M. Fresco) 켄트 주립대 교수 등은 2020년 대론과 분석명상에 관한 첫 과학적 연구를 발표했다.

대론(monastic debate)은 양자(兩者) 간의 상호작용으로 이루어지는 분석 명상(analystic meditation)에 해당한다(역으로 개인의 분석 명상은 스스로 묻고 답을 찾는 '자가 대론(self-debate)'에 가깝다.). 때문에 본 연구에서는 대론 역시 '분석 명상'으로 지칭하였다. 측정 수단으로는 사회적 상호작용을 분석하는데 알맞은 뇌파의 하이퍼스캔(Hyperscan)을 활용하였다. 실험 대상은 겔룩에 속한 세라 제(Sera Jey) 강원의 승려들로 선정되었다.

측정 결과 대론 중에 집중과 밀접한 연관이 있는 중전두 세타 진동(mid-frontal theta oscillations)이 유의미하게 증가하여, 분석 명상이 집중력을 훈련시킨다는 가설과 일치함을 보였다. 세타 진동의 증가 정도는 초보자 승려군(群)보다 숙련된 승려군에서 더욱 강하게 나타났다. 또한 짝지어진 토론자들 간의 전두 알파 진동(frontal alpha oscillations) 동시성(synchrony)이 전제에 대한 의견이 서로 불일치할 때보다 동의할 때 더욱 증가한다는 증거를 찾을 수 있었다.
Marieke K. van Vugt et al.,, 《Inter-brain Synchronization in the Practice of Tibetan Monastic Debate》

세라 제 강원의 교수사들과 상급생 승려들을 대상으로 이루어진 토의 및 인터뷰와 예비실험들을 바탕으로, 반 부흐트 등은 성공적인 토론에 추론과 비판적 사고, 주의 집중, 작업 기억(working memory), 감정 조절, 추론 기술에 대한 자신감, 사회적 유대감 등이 필요하다는 초기 이론을 설정하였다. 또한 향후 대론과 분석 명상이 심리학적 웰빙과 교육적 성취에 심리학, 신경과학적으로 어떻게 영향을 주는지 추가로 연구해나갈 것을 제안하였다.
Marieke K van Vugt et al., 《Tibetan Buddhist monastic debate: psychological and neuroscientific analysis of a reasoning-based analytical meditation practice》
4.1.2.1.2. 반야학
4.1.2.1.3. 중관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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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2.1.4. 아비달마학
4.1.2.1.5. 계율학
4.1.2.2. 보리도차제(람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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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2.3. 보리심 수행(로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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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금강승(밀교)

4.2.1. 금강승의 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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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불보살의 위력(威力)의 총체이자
밀승의 가르침을 결집한 금강수보살(Vajrapani)[35]
게셰 소남 걜첸, 《 인도에서 티베트로 전해온 밀교의 체계》1강

인도 불교의 최종단계라고 할 수 있는 밀교는 티베트 뿐 아니라 중앙아시아, 동남아, 동북아의 다른 국가들로 전래되었지만 과거부터 지금까지 법맥이 끊기지 않고 독자적인 밀교 종단이 유지되고 있는 곳은 티베트(몽골, 부탄, 네팔, 시킴, 라다크 등 티베트 불교권 지역 포함)와 일본뿐이다. 일본에는 중기 밀교까지 전해진 반면 티베트에는 후기 밀교까지 전래되었다. 티베트 대장경에는 밀교부에 해당하는 방대한 경전들이 존재하며 또한 티베트 불교 종파별로도 각자의 독자적인 밀교 전승과 문헌을 갖고 있다.

인도-티베트에서 전래되는 후기 밀교의 형태를 다른 말로 금강승(金剛乘, vajrayana)이라고 한다. '금강'이라는 것은 매우 견고하고 단단한 것을 뜻한다. 방편과 지혜를 분리시키지 않고 합일시켜 단단하게 하기 때문에 금강승이라고 한다. 금강승은 '방편승(方便乘, upayayana)'이라고도 한다. 바라밀다승보다 많은 선교(善巧) 방편들을 구족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금강승을 '과승(果乘, phalayana)'이라고도 한다. 수행자가 과(果)로써 도(道)를 삼기 때문이다. 즉 수행의 결과인 불과(佛果)를 수행 방편으로 이용하여 수행자 자신을 밀교의 본존으로 관상하는 청정 인식을 갖게 한다. 금강승은 '밀승(密乘, guhyayana)'이라 칭하기도 한다. 반드시 엄격하게 비밀을 지키면서 수행해야 하기 때문이다. 밀교의 가르침과 수행은 비밀로 남아있어야 하며 밀교 수행자들은 자신들이 받은 관정이나 금강승 수행에 대해서 남에게 알리거나 자랑해서는 안된다. 자칫 자기중심주의, 오만에 빠질 수 있는 것을 경계하는 것이다. 제14대 달라이 라마,《달라이라마의 밀교란 무엇인가》(설오 譯)

바라밀승(현교)의 정의 부분에서 언급했듯이 '현교', '밀교'는 동아시아에서 유래한 용어이며 인도-티베트 불교에서는 주로 현교를 '바라밀승(혹은 경승)' 밀교를 '금강승(혹은 진언승, 속승)'라고 일컫는다. 따라서 본 문서에서도 '밀교' 대신 '금강승'이란 용어로 표기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나 한국인에게 금강승보다 밀교가 훨씬 친숙한 용어이며 학계에서도 금강승과 밀교를 혼용하므로, '현교/(반야)바라밀승/경승'과 '밀교/금강승/(비밀)진언승/속승' 등을 경우에 따라 혼용하였다.

딴뜨라(Tantra, rGyud)라는 용어는 밀교 경전들에 근거한 수행 전통을 말한다. 딴뜨라(Tantra)라는 말의 본뜻 역시 연속(連續), 계속(繼續), 본속(本續), 밀주본속(密呪本續), 비밀본속(秘密本續) 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티벳어로는 ‘규(rGyud, 續)'라고 하는데, 이 역시 같은 의미이다. 딴뜨라의 내용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주로 관상(觀想)의 과정들, 의례절차, 상징들의 구체적인 묘사를 통한 깊은 철학적 의미들로 구성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이들을 활용한 수행을 통하여 의식을 전환할 수 있는 다양한 방법들이 체계화되어 있다. 즉 ‘딴뜨라’는 모든 수행 양식과 관념들 그리고 다양한 상징물들과 함께 구전 전승되고 있는 의례 의식과 광범위한 경론들을 포괄하는 말이다.
최로덴,《티벳 불교의 향기》

금강승은 바라밀승에서 미처 밝히지 못한 더욱 심오한 견해를 상세히 밝히고 있다. 금강승은 바라밀승의 번뇌 개념보다 더욱 미세한 수준의 번뇌들을 다루고 있으며, 부처의 사신(四身)[36]의 공덕에 대해서도 바라밀승에서 다루지 않는 사항을 설명한다. 가령 귀류논증 중관학파에서는 의식에 대해 설명할 때 전5식과 제6식의 존재에 대해서만 언급하지만, 밀교에서는 현교에서 언급하지 않는 미세한 소지장(所知障)들과 그것들을 소멸하는 도(道)인 미세한 의식들을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단, 티베트 불교에서는 귀류논증 중관학파의 견해에 입각하여 금강승에서 언급하는 미세의식들이 제6식에 모두 포함된다고 보며, 유식학파처럼 제6식 외에 제7식, 제8식 등을 상정하지 않는다). 이러한 특징들 때문에 불교 수행에 있어 바라밀승 뿐 아니라 금강승 역시 필수불가결한 가르침이며, 바라밀승으로 십지보살까지의 과위를 얻는 것은 가능하지만 성불을 위해서는 반드시 금강승의 무상요가 딴뜨라를 성취해야 한다고 티베트 불교에서는 말한다.
  • 수행의 3가지 체계
    이승 삼승 소의 경전 수행

    소승 성문승·독각승 별해탈계 아함경 등 초기 경전 주로 자신의 번뇌를 없애는 수행

    대승 바라밀승(보살승) 보살계 반야경, 화엄경, 법화경 등 일체중생을 위해 보리심과 육바라밀 수행

    금강승(밀승) 금강승계 구햐싸마자(밀집금강), 차크라삼바라(승락금강), 야만따까(대위덕금강) 등 번뇌의 독을 약으로 삼는 수행

4.2.2. 금강승의 기원

4.2.2.1. 전통적 관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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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강불(Vajradhara)과
84명의 마하싯다(mahasiddha)[37]
"귀담아 잘 들으십시오! 티베트의 선근자들이여!
비밀진언의 금강승이 출현하는 것은 희유한 일이니,
과거의 8억 4천만의 제불여래도 설하지 않았으며,
연등불께서 법륜을 굴리실 때도 설하지 않았으며,
미래에 오시는 제불여래들도 역시 설하지 않으니,
그 유정들이 밀교의 법 그릇이 못 되기 때문입니다.


과거 겁초에 겁명(劫名)을 일체장엄이라 부르는 때,
현전왕불의 가르침에 밀법이 출현하였으며,
현재불인 석가세존의 교법에 밀교가 출현하였습니다.
다시 천만 겁을 지나 겁명을 꽃 장엄이라 부르는 때,
문수사리불이 출현하여 현재와 같은 시절이 도래할 때,
그 부처님께서 지금처럼 진언밀교를 선양하게 됩니다.
이 세 겁의 유정들이 밀교의 법기가 되기 때문이며,
이 세 겁이 아닌 시절에는 금강승이 출현하지 않습니다."
《뻬마 까탕》
《밀교의 성불 원리》(중암 譯)

전통적으로 금강승은 석가모니불의 보신불(報身佛)[38]인 지금강불(持金剛佛, Vajradhara)에 의해 설하여졌다고 알려져 있다. 지금강불은 오종성불(五種性佛)의 덕성을 하나로 모은 대보신불(大報身佛)로 밀교에서 추구하는 이상적인 부처이다. 금강승의 가르침은 무상유가의 법기(法器)로 알려진 업과지(業果地)[39]의 남섬부주 유정들을 위해서 단지 한 생애에서 성불할 수 있도록 최상의 근기를 대상으로 설한 비밀의 방편도(方便道)로 설시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무상요가부 딴뜨라의 가르침은 대승 가운데 대승이며 최상승법으로 일컬어진다.

특히 이 비밀 금강승의 가르침이 남섬부주에 출현한 것은 오로지 석가모니불의 시대이며, 과거의 연등불이나 미래의 미륵불 때는 금강승의 가르침이 설해지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 이유는 인간 수명이 100세에 불과한 오탁악세에 출현한 석가모니불의 교화 대상인 현세의 남섬부주 중생들이 금강승의 큰 연분(緣分)을 갖고 태어났기 때문이라고 알려졌다. 오직 과거의 현전왕불(現前王佛), 현세의 석가모니불, 미래의 문수사리불[40]이란 세 분의 부처가 출현한 세 겁 때의 중생들만이 금강승의 가르침을 접할 수 있다. 그만큼 금강승과의 인연은 매우 희유한 인연이며 숙세의 매우 큰 선근 공덕 없이는 접할 수 없다고 한다.[41]
《밀교의 성불 원리》(중암 譯)

불교학자 최로덴은 최로덴,《티벳 불교의 향기》에서 딴뜨라의 유래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딴뜨라의 수행자들은 딴뜨라 수행의 전통이 대부분 석가모니(Sakyamuni) 부처가 직접 설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물론 개중에는 가끔씩 다른 세상(타방他方)의 부처가 설한 것도 있으며, 말이 아닌 의식 속에서 전해진 것(意傳)이나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해진 것(心傳) 등 다양한 형태로 전해진 딴뜨라들이 있다. 티벳 불교 학자들 대부분은 이러한 주장을 인정하고 받아들이지만, 일반적으로 역사학과 관련한 현대의 분과학문에 종사하는 학자들은 이러한 내용을 다른 식으로 받아들인다. 그들은 석가모니의 입멸 이후, 최소한 천 년 동안, 불교 딴뜨라들이 출현한 역사적 증거가 부족하기 때문에 실질적인 것으로 받아들이기 힘들다고 본다. 

이렇게 석가모니 재세시와 인도에서 딴뜨라가 꽃 핀 시기가 일치하지 않는 것에 대해 티벳 역사가들 중 17세기의 유명한 역사가인 따라나타(Taranatha) 같은 이들은, 석가모니가 재세시에 직접 딴뜨라의 가르침들을 전수한 것은 사실이지만, 당시에 사람들의 근기가 그것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었기 때문에 단지 소수의 제자들에게만 전승되고 나머지는 때가 되어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을 때까지 감추어져 있었다고 설명한다. 하지만 딴뜨라의 기원에 관한 이런 식의 설명은 현대의 학자들에게 큰 설득력이 없을 수도 있다. 어떤 식으로든 이렇게 수많은 딴뜨라의 경전들이 언제 어디서 누가 편찬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들이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딴뜨라를 직접 수행하는 사람들의 전통에서 보면, 딴뜨라는 한번도 끊이지 않고 이어진 확실한 법맥을 가지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수많은 수행자들이 그 전통을 따라 성취를 이루었고, 지금도 그 법맥을 따라 수행을 하고 있기 때문이며, 많은 딴뜨라의 경전에는 법맥의 전수자들이 한 생에서 다음 생으로 딴뜨라의 법을 전해준 증거들이 고스란히 남아있기 때문이다.
4.2.2.2. 현대적 관점
딴뜨리즘의 기원에 대한 여러 가설이 제기되었지만 여전히 딴뜨리즘의 기원은 분명치 않다. 과연 현 시점에서 딴뜨리즘의 기원을 명확히 규명할 수 있을지 회의를 표시하는 이들도 적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원을 통해 딴뜨리즘의 성격을 규정하고자 하는 시도는 계속되었다.

불교 딴뜨라와 힌두 딴뜨라의 기원에 대한 주장들은 대개 한 쪽이 다른 쪽에 의존하였다는 ‘빌린 모델(borrowing model)’과 두 딴뜨라 이면에 공통적인 근원이 존재한다는 ‘기층 모델(substratum model)’의 두 양상으로 분류할 수 있다. 불교 딴뜨라와 힌두 딴뜨라, 특히 요기니 딴뜨라들과 샤이바 딴뜨라들의 공통적인 토대로 일종의 ‘종교적 기층’이 존재한다는 가설은 20세기의 많은 저명한 학자들에 의해 주장되어 왔다.

'종교적 기층'이란 아리안족의 인도 아(亞)대륙 진출 이전부터 존재하던("pre-Aryan") 토착 부족의 종교와 문화를 의미한다. 비(非) 아리안계 토착 부족들은 아리안 족의 진출 이후에도 주변부에서 자신들의 공동체를 형성하며 존속하였다. 이들 부족들의 문화에 담긴 여신(女神) 숭배와 주술적 요소가 점차 아리안 족의 베다 전통(Vedic tradition)에 유입되었고 그 결과 힌두, 불교, 자이나교 등에 딴뜨리즘이 형성되었다고 추정된다.

그러나 이 가설은 1980년대 후반부터 옥스퍼드대의 알렉시스 샌더슨(Alexis Sanderson)에 의해 도전받았다. 샌더슨은 ‘종교적 기층’이라는 것이 결코 지각되어진 것이 아니라 단지 추론되어진 것에 불과하다는 데에 의문을 품었다. 샌더슨은 우리가 딴뜨라로서 지각하는 것은 항상 샤이바 딴뜨라, 바이슈나바 딴뜨라, 불교 딴뜨라 등 구체적인 전통에 속하는 딴뜨라일 뿐이라고 지적했다. 따라서 ‘종교적 기층’ 가설은 불교 딴뜨라와 힌두 딴뜨라, 특히 요기니 딴뜨라들과 샤이바 딴뜨라들의 많은 공통점들을 설명하는 데 있어서 전혀 설득력을 결여하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샌더슨은 비록 요기니 딴뜨라들이 다양한 의례 등 그 기원에 있어서 샤이바 딴뜨라들을 상당히 모방했지만, 요기니 딴뜨라들은 불교의 딴뜨라로서 샤이바 딴뜨라들을 배척하며 훌륭하게 기능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한편 샌더슨의 이론은 루에그, 스페라, 데이비드슨 등에 의해 비판받았다. 
이용현, 《요기니 딴뜨라들의 기원에 대한 논쟁》

불교 딴뜨리즘의 기원에 대한 여러 가지 설들은 불교 역사의 서술과도 밀접한 연관을 가진다. 19세기 근대 서구 학자들은 인도 불교의 쇠퇴와 불교 딴뜨리즘의 등장을 결부시켜 해석했다. 그들은 불교 딴뜨리즘이 힌두 샥티즘과 샤이비즘 등에서 유래하였다고 규정하고, 힌두이즘적 요소의 도입이 불교 내부의 도덕적 타락과 정체성 상실을 초래하여 인도 불교가 쇠멸하였다는 서사 구조를 고안하였다.

그러나 이들의 주장은 근본적인 결함을 내포한다. 서구 학자들은 그들에게 익숙한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 등 아브라함 계통의 종교(Abrahamic religions)의 개념으로 인도 종교를 해석하였다. 그 과정에서 샤이비즘, 샥티즘, 바이슈나비즘 등 다양하고 복잡한 인도 내 종교와 사상, 관습들이 '힌두교'라는 단일 종교처럼 취급되었고, 종교 간의 관계도 대립적이고 배타적인 관계로 묘사되었으며 여성의 가치는 평가 절하되었다.

또한 '생성-발전-번성-소멸'로 이어지는 유기체적 역사관에 익숙했던 서구 학자들에게 딴뜨리즘의 성(性)적 요소는 서양 고전(古典)에서 쉽게 찾을 수 있는 문명의 쇠락 징조로 해석되었다. 딴뜨리즘은 일종의 성적 타락으로 치부되어 서구인들이 쉽게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인도 불교 소멸의 원인으로 채택되었다.

불교 딴뜨리즘으로 인도 불교의 쇠락을 설명하는 서술 모델은 제국주의 시대에 처음 등장하여 20세기 초중반까지 서구 학계에 만연하였다. 그리고 서구의 영향을 받은 일본은 물론이고, 초기에 서구와 일본의 연구 성과를 받아들이는데 급급했던 한국 학계에도 무비판적으로 수용되었다.

반면 인도 학자들, 특히 벵갈 출신 학자들은 딴뜨리즘을 불교의 등장 이전부터 존재하던 원시적인 문화적 저류(undercurrent)와 연관시키는 모델을 제시하였다. 이들의 주장에 따르면 선사시대부터 존재했던 토착 부족 문화는 아리안족의 진출 이후에도 '종교적 기층', 혹은 '저류'를 형성하여 유지되면서 주류 종교에 유입되었다. 그 결과 기존 종교의 성격과 달리 민중 지향적, 모계 지향적, 신체 지향적인 딴뜨리즘이 등장했다. 서구의 낭만적인 성향을 가진 학자들도 이러한 인도 학자들의 주장에 동조하였다.
Christian K. Wedemeyer,《Making Sense of Tantric Buddhism: History, Semiology, and Transgression in the Indian Traditions》
미란다 쇼,《열정적 깨달음: 딴뜨릭 불교의 여성들》(조승미 譯)

4.2.3. 금강승의 목적과 특징

게셰 텐진 남카,《밀교 개론 (1): 밀교란 무엇인가? 왜 밀교를 공부하고 수행하는가? 밀교의 뛰어난 점은?》
대비(大悲)하신 스승께 예경하고 귀의합니다. 늘 지켜주소서.

1. 밀교란 어떤 것인가? 성불(成佛)함에 매우 신속하다. 최상이다(최고의 방편도方便道이다). [현교와 달리] 구족(具足)하지 못함이 없는 방편도(완전한 방편도)이다.

2. 왜 밀교를 배워야 하는가? 성불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밀교에 의지하지 않으면 다른 방편으로는 불가하기 때문이다.

3. 밀교에는 다른 것에는 없는 특장점이 무엇이 있는가? 불제자(佛弟子)의 궁극적인 성취목표는 원만성불圓滿成佛(=구경각究竟覺)이다. 성불에는 색신(色身)과 법신(法身) 두 가지가 있다. 이러한 점은 현밀(顯密)이 같다.

3-1. 그러나 [밀교 외에는] 법신의 단편적인 원인은 존재하나 궁극적인 법신의 원인이 없다. 법신을 성취함에는 소지장(所知障)을 없애야 한다. [소지장을 없애기 위해서는] 공성을 인식함으로써 소멸시켜야 함에는 현밀이 같다. [차이점은] 최종적인 소지장과 그것의 대치법(對治法)[42]의 궁극은 현교에 없기 때문이다. 명(明)ㆍ증(增)ㆍ득(得) 3가지의 이현(二顯)의 착란[43]의 측면과 명ㆍ증ㆍ득 3가지에 존재하는 무명(無明) 등의 번뇌의 습기(習氣)이니 그러한 소지장은 설명하지 않기 때문이다. [현교에는] 승의광명(勝義光明)[44]이 없기 때문이다. 원심(gnyug sems, 原心)으로써 공성을 직접적으로 인식하는 것을 설명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현교에서는 방편과 지혜의 쌍수(雙修)를 설명하지만 지혜와 방편의 합일(合一)은 설명하지 않는다.[45]그러므로 현교에서 설명하는 그 대치법은 밀교에서 설명하는 대치법에 비해서 훨씬 위력이 작다.

명ㆍ증ㆍ득 3가지의 미세한 소지장을 제거함에 명ㆍ증ㆍ득 3가지의 인식보다도 훨씬 미세한 원심을 현현해야만 한다. 그에 관해서 밀교의 경우에는 승의광명을 설명하지만 원심을 현현하기 위해서는 명ㆍ증ㆍ득 3가지를 강력하게(인위적으로) 막아야만 한다. 명ㆍ증ㆍ득 3가지를 막아서 원심을 현현하는 방편은 현교는 차치하더라도 하부 밀교 3종[46]에도 없다. 그러므로 성문ㆍ독각승과 반야승(=반야바라밀승/바라밀승)만으로는 성불할 수가 없을 뿐 아니라 하부 밀교의 도(道)만을 통해서는 성불의 경지로 갈 수가 없다. 그러므로 성불하려면 반드시 무상(無上)밀교에 들어가야 한다.

3-2. 색신의 원인의 부분적인 것은 있지만, 색신의 직접적인 원인은 [현교에] 없다. 요익중생(饒益衆生)을 완성하게 하는 주체는 색신이다. 그것의 동류(同類)의 원인으로서 환신(sgyu lus, 幻身)이 필요하다. 환신은 원심이 구유연(俱有緣)[47]의 역할을 하고 원풍(gnyug rlung, 原風)이 근취인(近取因)[48]으로서 [작용하여] 발생해야만 하는데, 그것이 없기 때문이다.

[현교는] 환신이 없으므로 무수한 여러 대겁(大劫)의 공덕을 짧은 기간에 고행(苦行)하지 않고 쌓을 수가 없다. 현교에는 환신이 없기 때문이다.

3-3. 닦음의 토대(기基 혹은 근根)는 생(生), 사(死), 중음(中陰) 3가지이고 닦는 도(道)는 3신(三身)을 도(道)로 가져오는 3가지 유가행(yogācāra, 瑜伽行)으로써 유사한 모습으로 수습(修習)한다. 닦음의 결과는 법신(法身), 보신(報身), 화신(化身)의 3신이다. 이러한 닦음의 토대, 과(果)를 현교에서도 설명은 하지만 그 방법을 아예 설명하지 않는다. 토대의 양상과 도의 양상과 과의 양상 3가지 모두가 온전하고 구족하게 설명하지 않기 때문이다.

현교의 공성, 밀교의 공성에는 차이가 없다. 현밀 2가지 모두 목표인 공성에는 차이가 없다. 그러나 공성을 인식하는 주체인 식(識)에는 차이가 있다. 현교와 밀교는 소지장에 관해서도 차이점이 있다. 현교에서는 염오(染汚)의 주된 것으로 소지장을 설명하지만 매우 미세한 소지장은 설명하지 않는다. [현교도] 주된 대상은 설명하지만 [밀교는] 인식주체의 최고를 설하기 때문이다. 현교는 주요 장애를 설명하지만 밀교는 최상의 대치법을 설명하기 때문이다. 가장 미세한 소지장은 밀교로써 소멸할 수 있을 뿐, 현교로는 불가하다.

그렇다면 현밀의 차이점은 무엇인가라고 하면 청정한 4가지 과위(果位)를 현재부터 수습할 수 있는가 없는가의 여부로써 현밀을 구분한다(청정4과淸淨四果를 현재시점부터 수습할 수 있다면 밀교이고 수습할 수 없다면 현교이다).

4. 그렇다면 청정4과는 무엇인가? 부처의 (1) 청정한 처소(處所), (2) 청정한 몸, (3) 청정한 소유물/향유물 (4) 청정한 행(行)이다. […]

5. 그렇다면 3사(三士)의 도차제(道次第)[49]를 잘 배워서 이 3가지를 배워야 한다.

6. 그렇다면 밀교를 수습하는 사람은 어떠해야만 하는가? 현생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윤회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이기심에 대한 집착을 버려야 하니 3사의 도의 차제에 마음을 잘 익혀서 토대로 삼아야 한다. "중생을 위해서 구경각불(究竟覺佛)의 경지를 속히 얻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 밀법을 배워야 한다"라는 밀교를 추구하는 마음으로 진심으로 노력하고자 해야 한다. 밀교의 보살은 현교의 보살보다도 백배, 천배로 근기가 예리하고, 공덕이 더욱 커야 하고, 윤회에 대한 집착을 버림이 커야 하고, 중생에 대한 대비심(大悲心) 등이 커야 하는 등의 자격이 필요하다.

어째서 밀교 수행자는 몸을 본존(本尊)으로 관(觀)하고, 마음을 법신으로 관하고, 부처의 몸의 다양한 모습으로 여실(如實)하게 수습하며 보궁(寶宮)을 수습하는 등 부처의 처소와 소유물, 권속(眷屬)의 원만함을 수습하는가?

밀교의 유가행자는 부처의 행을 지금부터 실로 행하는 것 등에는 필요성이 있다. 부처의 행에 익숙해진다. 그 행위의 습기를 만든다. 이를 통하여 부처의 원만한 원인을 성취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방편은 성문ㆍ독각에는 말할 것도 없고 반야승에도 없다.
게셰 텐진 남카, 《밀교란 무엇인가》[50](자홍 譯)

겔룩의 창시자인 쫑카빠는 "공성에 대한 견해, 모든 유정(有情)들을 위해 최상의 깨달음을 얻고자 발심(發心)하는 의도(보리심), 육바라밀의 수행에 있어 바라밀승과 금강승 양자는 차이가 없다." 하고 말하였다.

바라밀승과 금강승은 공성(空性)이라는 견해를 지향하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다. 금강승에서 말하는 공성이라는 것도 결국 바라밀승에서 말하는 공성을 말하는 것이지 더 심오한 공성을 말한다거나 다른 것을 말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바라밀승과 금강승의 공통된 수행도는 곧 보리심이다. 진정한 보리심이 마음 속에 자리 잡을 때 비로소 금강승에 입문할 수 있다. 보리심을 갖춰야 금강승에 박학다식하고 금강승의 수행을 겸비한 자격을 갖춘 훌륭한 스승의 가르침에 의지하여 금강승을 수행할 수 있다.

바라밀승과 금강승 사이에 의도/동기인 보리심과 행위인 육바라밀에 있어서는 차이가 전혀 없다. 또한 바라밀승에서 말하는 부처의 과위와 금강승에서 말하는 부처의 과위는 차이가 없다.

그러나 부처의 과위에 이르기 위한 도(道)에 있어서는 바라밀승과 금강승의 차이가 있다. 부처의 과위, 즉 불과(佛果)라는 것은 법신(法身)과 색신(色身)이라는 두 가지 양상으로 구성된다. 바라밀승과 금강승 모두 법신과 색신 개념을 소개하지만 법신과 색신을 이루는 궁극적이고 미세한 차원의 방법들은 금강승의 무상요가 탄트라에만 소개되어 있다. 그러므로 성불을 위해서는 바라밀승 뿐 아니라 반드시 금강승의 무상요가 탄트라를 수습해야 한다는 결론을 얻을 수 있다.[51]

법신을 이루기 위해 소지장을 제거해야 하는 것 정도는 바라밀승에서도 언급하지만 미세한 소지장들과 그것들의 대치법인 원심 혹은 승의광명같은 미세한 의식을 활용하여 공성을 인식하는 법에 대해서는 오직 금강승의 무상요가 탄트라에서만 언급된다. 중생들을 이롭게 하기 위한 색신을 이루기 위해[52] 무량한 공덕을 신속히 쌓을 수 있는 환신을 성취하는 방법도 무상요가 탄트라에서만 언급된다. 지혜와 방편을 동시에 수습하는 합일(合一)도 바라밀승이 아닌 금강승에서만 가능하다.

또한 바라밀승과 달리 금강승은 수행의 결과인 (1) 청정한 처소(處所), (2) 청정한 몸, (3) 청정한 소유물/향유물 (4) 청정한 행(行) 같은 청정한 부처의 4가지 과위를 수행 과정의 방편으로 삼는 것이 가능하다. 수행자 스스로를 본존으로 인식하고 주위 환경을 만달라의 보궁으로 인식하는 등 부처의 행(行)을 (아직 부처가 아닌) 수행자일 때의 현재 시점에서부터 실천하여 습기로 남게 하여 부처의 원만한 원인을 성취하는 것이 금강승만의 특징이다.

보리도차제의 삼사도를 마음에 잘 익혀 토대로 삼고, 바라밀승 수행자에 비해 지혜, 자비, 공덕, 근기의 예리함 등이 훨씬 뛰어나며, 마음 동기인 출리심(出離心), 대비심, 보리심도 더욱 크고 강렬한 수행자가 금강승에 입문할 수 있는 자격을 얻게 된다. 바라밀승의 보살과 금강승의 보살 모두 보리심을 일으켰지만, 금강승 보살의 보리심이 더욱 강력하기 때문에 자연히 중생을 신속히 구제하고자 더욱 빠르게 불과를 얻을 수 있는 밀법을 추구하고 노력하게 된다.
■ 죽음의 과정에서 나타나는 마음의 4단계(4공심)

죽음의 과정에서 나타나는 마음의 4단계(4공심)는 분별의 작동이 완전히 사라지고 거두어질 때까지 점차적으로 발생한다. 마음의 4단계 각각은 다음과 같다.

《사공심(སྟོང་པ་བཞིའི་སེམས།, 四空心)》: 4가지 공한 마음

(1) 비추는 흰 빛의 마음(སྣང་བ་དཀཪ་ལམ་པའི་སེམས།, 明心)
: 맑은 가을 하늘에 달빛이 빛나는 것과 같다. 텅 빈 상태에서 희뿌연 빛이 드리운다. 이러한 현현 외에는 어떠한 이원적 현현(གཉིས་སྣང་།, 二現)이 없다.

(2) 증가하는 붉은 빛의 마음(མཆེད་པ་དམར་ལམ་པའི་སེམས།, 增心)
: 맑은 가을 하늘에 햇빛이 빛나는 것과 같다. 텅 빈 상태에서 불그스름한 빛이 드리운다. 역시 이러한 현현 외에는 어떠한 이원적 현현이 없다.

(3) 근접한 어두운 마음(ཉེར་ཐོབ་ནག་ལམ་པའི་སེམས།, 得心)
: 맑은 가을 하늘에 완전히 어두컴컴한 상태이다. 이 외에는 어떠한 이원적 현현도 나타나지 않는다.

(4) 일체가 공한 마음(ཐམས་ཅད་སྟོང་པའི་སེམས།)
: 근접한 어두운 마음도 거두어지고, 어떠한 거친 이원적 현현도 없으며, 텅 빈 가을 하늘에 하늘을 장애하는 3가지 조건인 달빛, 햇빛, 어둠이 모두 사라지고, 마치 새벽의 하늘과 같이 있는 그대로 맑은 공으로 나타난다. 이는 견도(見道)에서 공(空)이 나타나는 것과 동일하다. 죽음의 광명(치와외쎌 འཆི་བ་འོད་གསལ།), 일체공(一切空, ཐམས་ཅད་སྟོང་པ།), 근본법신(གཞིའི་ཆོས་སྐུ)이라고도 한다. 이때 현현하는 공함, 공성이 곧 근본자성신(根本自性身, གཞིའི་ངོ་བོ་ཉིད་སྐུ།)이다.#

4.2.4. 금강승의 수행 요건

현교, 다시 말해 바라밀승은 부처의 과위를 이루는데 삼아승지겁이 걸리는 반면 밀승을 수행하면 단기간 내에 자량(資糧)[53]을 쌓아 짧게는 한 생에도 불과(佛果)를 얻을 수 있다고 알려져 있다. 티벳망명정부 총리를 역임한 삼동(zam gdong) 린뽀체는 2018년 방한법회에서 현교와 밀교를 도보와 고속철도에 비유했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갈 때 도보보다 고속철도가 훨씬 빠르지만 둘 중 어떤 수단을 이용하더라도 거쳐가는 경로는 같다. 마찬가지로 밀교도 현교보다 짧은 기간에 성불할 수 있지만 중간 과정을 생략함 없이 거쳐 가는 과정은 동일하다.

밀교는 단기간에 성불할 수 있는 수승한 가르침이지만 아무나 밀교를 수행할 수는 없다. 밀교에 입문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자격을 갖춰야 한다. 이미 현교의 수행차제를 두루 섭렵하여 근기가 성숙된 자여야 한다. 또한 중생을 이롭게 하기 위함이 아닌 오직 불과(佛果)라는 결과물만을 탐하거나 자신을 다른 사람보다 수승하다고 자만하여 밀교 수행에 접근하여서는 안 된다. 더불어 윤회에서 벗어나기 위해 해탈을 염원하는 출리심, 다른 중생을 위하는 자비심과 보리심이 투철하고 공성을 바르게 이해한 사람이어야 한다. 달라이 라마는 "오늘날 사람들이 금강승(밀교)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지만 차제(次弟)에 따른 수행과 보리심의 획득, 공성에 대한 이해 없이 금강승 수행을 하는 것은 외도(外道)의 수행을 하는 것과 다를 바 없으며 수행의 결과도 얻을 수 없다." 라고 강조하였다.

출팀 껠상(Tsultrim Kelsang) 오오타니대 교수와 마사키 아키라(正木 晃)는 출팀 깰상, 마사키 아키라,《티벳밀교》(차상엽 譯)에서 밀교 수행 이전에 현교 수행을 마치는 것의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겔룩의 경우 20여년 간의 현교 수행을 제대로 마친 사람만이 아무리 젊어도 30대에서 40대 정도에 밀교에 입문한다. 현교가 결여된 밀교만으로는 자칫 체험지상주의에 빠져 자신의 체험만을 절대화하는 위험성을 내포한다. 석가모니가 수행을 시작하였을 때도 각지의 스승을 찾아다녔지만 모든 스승들이 저차원의 경지에 있었음에도 그것을 고차원의 경지라고 굳게 믿어 석가모니를 낙담시켰다고 불전은 전하고 있다.

또한 밀교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자격을 갖춘 법맥스승으로부터 관정(灌頂, Skt. abhiṣeka, Wyl. dbang)구전(口傳, Skt. āgama, Wyl. lung), 구결(口訣, Skt. upadeśa, Wyl. khrid)을 받아야 한다. 관정은 왕이 즉위할 때 왕의 머리에 사해(四海)의 물을 부어주는 의식에서 유래하였으며, 이 의식을 통하여 밀교에 입문하려는 사람은 스승으로부터 밀교를 수행할 수 있는 자격을 부여받는다. 또한 스승의 구전(口傳)을 통해 수행법을 전수받고, 수행법에 대한 구체적인 가르침인 구결 역시 함께 전수받는다. 밀교 수행을 성취하려면 현교에서 요구하는 수준보다 더욱 큰 스승에 대한 신심(信心)이 필요하다. 관정을 주는 스승을 본존의 현현으로 믿어야 하고, 만일 믿지 못하고 의심한다면 관정이 성립되지 않는다.

관정(Abhiṣeka)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허가관정(許可灌頂, jenang)이고 다른 하나는 관정(灌頂, dbang)이다. 허가관정은 말 그대로 본존에 대한 간략한 성취법이나 명상을 허가받는 관정이다. 일반적인 관정이 궁극적으로 본존의 과위를 성취하는 것이 목적이라면 허가관정은 본존의 공덕을 이어받아 단기간에 가피를 얻는 목적이 크다. 허가관정은 2~3일 간 열리는 관정에 비해 의식이 훨씬 간소하며 관정을 받고 지켜야 할 삼매야계와 수행 의무[54]의 부담도 상대적으로 덜한 편이다. 따라서 허가관정은 대중적으로 많이 전수되고, 한국에서 열리는 티베트 불교의 관정법회 대부분도 허가관정에 해당한다. 허가관정을 통해 밀법과 본존에 인연을 맺으며 보리심의 종자를 심고 단시간에 많은 죄업과 장애를 소멸할 수 있다. 또한 관정을 주는 아사리(阿闍梨, ācārya)[55]와 스승과 제자의 인연을 맺는다. #

4.2.5. 금강승의 분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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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 겔룩 계통의 칼라차크라 만다라
2007년 제14대 달라이 라마의 코넬대 방문 기념으로 제작된 3D 칼라차크라 만다라 영상[56][57]

티베트의 신역(新譯, gsar ma) 전통에서는 딴뜨라 문헌을 소작부 혹은 사부(所作部 혹은 事部, kriya tantra), 행부(行部, charya tantra), 유가부(瑜伽部, yoga tantra), 무상유가부(無上瑜伽部, anuttarayoga tantra)4부 딴뜨라로 분류하였다. 4부는 수행의례나 방법 면에서 차이가 있다. 소작부는 외적인 의례를 수행의 중심으로 삼고, 행부는 외적인 의례와 내적인 수행을 함께 중시하며, 유가부는 오직 내적인 수행만을 중시한다. 무상유가부의 가르침은 인도 후기 밀교에 해당하며 비교하여 설명할 것이 없다. 네 탄트라의 수행은 상응하는 근기를 가진 수행자에 근거하여 나눈 것이지, 사람들의 기호에 따라 나눈 것이 아니다.

소작부, 행부, 요가부 같은 하위 3부 딴뜨라와 무상요가부 같은 상위 딴뜨라 모두 성불(成佛)하는 법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다르지 않다. 또한 하위 딴뜨라의 본존들과 상위 딴뜨라의 본존들 모두 붓다의 법신(法身), 공덕, 행위 면에서 서로 차이가 없고 동일하다. 다만 수행법의 심오한 정도에 따라서 4부 딴뜨라가 구분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하위 3부 딴뜨라에는 무상요가 딴뜨라의 생기차제, 원만차제가 포함되어 있지 않다.

무상요가 딴뜨라는 방편 부(父) 딴뜨라, 반야 모(母) 딴뜨라, 부ㆍ모 양 딴뜨라의 쌍입(雙入)을 설한 불이(不二) 딴뜨라로 나뉜다. 부계 딴뜨라는 붓다의 색신(色身)의 원인이 되는 환신(幻身, Skt. māyādeha, Tib. sgyu lus)을 강조하며, 모계 딴뜨라는 붓다의 법신(法身)의 원인이 되는 정광명(淨光明, Skt. prabhāsvaratā, Tib. 'od gsal)을 강조한다. 불이 딴뜨라는 부계 딴뜨라와 모계 딴뜨라의 특징을 모두 갖고 있다. 방편 부 딴뜨라에 속하는 경전은 《비밀집회 딴뜨라(Guhyasamaja tantra)》와 《야만따까 딴뜨라(Yamantaka tantra)》[58]가 대표적이며, 반야 모 딴뜨라는 《헤바즈라 딴뜨라(Hevajra tantra)》[59], 《챠크라삼바라 딴뜨라(Chakrasamvara tantra)》 등이 해당된다. 마지막으로 불이 딴뜨라에 속하는 경전은 《깔라챠크라 딴뜨라(Kalachakra tantra)》가 대표적이다.

참고로 4부 딴뜨라 분류는 불교 4대 학파 분류와 무관하다. 4부의 분류 기준은 이미 상술하였고, 인도와 티베트에서 딴뜨라는 소승 학파가 아닌 대승의 유식학파 혹은 중관학파의 관점에서 해석되었다.[60] 특히 티베트 불교에서는 주로 불교 4대 학파 중 최상위 견해라 여겨지는 귀류논증 중관학파의 관점에 의거하여 딴뜨라를 해석하고 수행한다. 본격적으로 금강승을 배우기 전 강원에서 4대 학파의 견해를 학습하며, 이 때 하위 학파의 견해를 바탕으로 상위 학파의 견해를 이해하는 방식으로 교학적 위계에 따른 학습을 통해 최종적으로 귀류논증 중관학파에 대한 견해가 확립된다. 이러한 강원의 학습과정은 딴뜨라를 수행하기 위해 필요한 사상적 토대를 마련하는 예비적 성격도 있다. 즉, 4대 학파에 대한 교학적 이해와 그에 따른 수행이 어느 정도 완성된 후 비로소 4부 딴뜨라를 배우는 것이 정석적인 수행 과정이다. 금강승에서 공성에 대해 바라밀승만큼 자세히 논하지 않는다고 해서 금강승을 교학과 무관한 상징, 의례, 주술, 명상 정도로 이해하는 것은 소승-(대승의) 바라밀승-(대승의) 금강승 순으로 심화ㆍ완성되어가는 인도-티베트 불교의 층차적 구조를 파악하지 못해 발생한 몰이해이다.

정화(淨化), 장애 제거, 복덕 축적 등을 목적으로 외적 제례를 강조하는 끄리야, 짜르야 딴뜨라 같은 하위 딴뜨라에서도 상위 딴뜨라와 마찬가지로 공성의 인식을 수행의 핵심 요소로 삼으며, 이 때 소승 학파처럼 오직 인무아(人無我)만 인정하는 방식으로 공성을 인식하는 경우는-가정이야 해볼 수 있겠지만-실질적으로 인도-티베트 불교 전통에서 찾아보기 어렵다.[61] 애초에 소승 학파는 딴뜨라를 포함한 대승 경전들을 불설(佛說)로 인정하지 않는다. 대승 경전을 불설로 인정하는 순간 자종(自宗)의 견해와 수행 체계가 불완전한 것으로 치부되기 때문이다.

딴뜨라에서의 공성이 인무아뿐만 아니라 법무아(法無我)까지 포괄하는 대승 학파에서의 공성임은 공성 만뜨라(mantra)[62]-"옴 스와바와 슛다 사르와 다르마 스와바와 슛도 항(oṃ svabhāva-śuddhāḥ sarva-dharmāḥ svabhāva-śuddho 'ham)"-에서도 단적으로 드러난다. 하위 딴뜨라나 상위 딴뜨라 공히 본존을 생기(生起)하기 전 공성을 인식할 때 공성 만뜨라를 염송하곤 하는데, 만뜨라 앞부분의 '스와바와 슛다 사르와 다르마'는 '일체법의 자성청정(自性淸淨)함, 공(空)함', 즉 법무아를 의미하며 '스와바와 슛도 항'은 '나의 자성청정함, 공함', 즉 인무아를 의미한다.

공성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면 본존으로 생기할 수 없다. 범부중생으로서의 신(身)ㆍ구(口)ㆍ의(意) 삼문(三門)이 실재한다는 분별을 여의고 본래 자성청정함/공함을 지각하는 바탕에서 본존으로 생기해야 한다. 공성의 인식을 통해 범부의 현현과 취착을 제거하였으므로 수행자 자신을 본존으로 생기하는 것이 가능하며, 따라서 이는 범부와 부처를 혼동하는 전도(顚倒)된 인식이 아니다. 물론 공성을 인식하는 수준에 따라 수행의 성취가 달라질 수는 있다. 공성을 인식하지 못한 상태에서 금강승 수행을 할 경우, 가피(加被)를 얻거나 신통(神通)이 생길 수는 있어도 본질적으로 비(非)불교도의 수행과 크게 다를 바 없어진다. 또한 귀류논증 중관학파의 관점에서 볼 때, 소승학파에서 자립논증 중관학파까지의 하위 학파들은 공성에 대한 견해가 불완전하므로 역시 이들 하위 학파들의 견해에 따라 금강승 수행을 할 경우 완벽한 성취를 이룰 수 없다(물론 공성에 대한 인식이 전무한 경우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성취의 차이가 크다. 따라서 금강승 수행자는 본인의 역량껏 최선을 다해 보리심과 공성에 대해 배우고 사유하고 명상할 필요가 있다).

구역(舊譯, rnying ma) 전통에서는 현교와 밀교를 9개 승으로 구분한 독자적인 9부승(九部乘) 체계를 갖추었다. 9부승은 크게 외(外), 내(內), 밀(密) 삼승으로 구분된다. 외승(外乘)은 곧 경승(經乘, sutrayana)(=현교)에 해당하고 내승과 밀승은 속승(續乘, tantrayana)(=밀교)에 해당한다.

구체적으로 외승(外乘)은 성문승, 연각승, 보살승을 가리킨다. 성문승, 연각승은 근본승이며 보살승은 대승에 해당한다. 그리고 내승(內乘)혹은 외전(外傳) 딴뜨라는 사부(所作部 혹은 事部, kriya tantra), 행부(行部, charya tantra), 유가부(瑜伽部, yoga tantra)로 구성된다. 내승의 가르침은 브라만의 베다(Veda) 전통처럼 의례와 외적 청정을 강조한다.

마지막으로 밀승(密乘) 혹은 내전(內傳) 딴뜨라는 마하 요가(maha yoga), 아누 요가(anu yoga), 아띠 요가(ati yoga, 혹은 maha ati yoga)로 구성된다. 마하, 아누, 아띠 요가는 신역(新譯)의 무상유가부에 해당한다. 마하 요가는 생기차제, 아누 요가는 기맥명점 수행, 아띠 요가는 원만차제를 중점적으로 다룬다. 9부승의 최상위에 위치한 아띠 요가는 바로 닝마 고유의 가장 심오한 가르침인 족첸(rdzogs chen)이다. 밀승의 가르침은 모든 현상을 청정하고 평등한 진여(眞如)로 전환시키는 강력한 방편들이다.

4.2.6. 금강승의 계율

금강승의 계율은 싸마야(samaya, 삼매야三昧耶)라고 부른다. 금강승의 수행에서 계율을 지키는 것이 지극히 중요하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관정은 먼저 계를 받고 이를 지킬 것을 맹세한 사람에게만 수여된다. 싸마야계와 관련하여 까담 전승의 창시자 아띠샤(Atisha)는 "(아띠샤 본인의 삶 중에서) 비구계는 조금도 어김이 없이 지켰고 보살계는 간혹 지키지 못했지만, 싸마야계를 어긴 것은 후드득 떨어지는 빗방울과 같이 많다."고 말하였다. 아띠샤의 말에서 알 수 있듯 금강승 수행자는 소승의 별해탈계, 대승의 보살계와 금강승의 싸마야계까지 모두 지켜야 할 의무가 있으며, 그 중 금강승의 싸마야계는 다른 계에 비해 매우 엄격하고 지키기 힘든 계율이라고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무상요가 딴뜨라의 싸마야계는 '14가지 근본 싸마야계'와 '18가지 부차 싸마야계'로 분류하는데, 이러한 싸마야계를 어기는 것은 금강지옥에 떨어지는 원인이 된다. 부차 싸마야계를 어기는 것조차 비구계를 지키지 못한 것보다 18배나 무거운 과보를 낳는다고 한다. 역으로 별다른 수행 없이 싸마야계만 잘 지켜도 18생 안에 지금강불의 과위를 성취할 수 있다는 가르침도 전해진다. 그만큼 싸마야계의 의의가 크기 때문에 싸마야계를 받은 후에는 이를 목숨보다 더 소중히 여겨야 한다고 강조된다. 싸마야계의 14 근본타죄(根本墮罪)에는 금강승의 스승을 모욕함, 금강승의 가르침을 경시함, 함께 금강승을 수행하는 도반과의 불화, 보리심과 공성의 포기 등이 있다.
1. 금강상사(金剛上師)의 말씀을 위배해서는 안 되며, 상사를 업신여겨서는 안 된다.
2. 붓다의 가르침을 위배해서는 안 된다.
3. 금강사형제(金剛師兄弟)나 사자매(師姉妹)를 비난해서는 안 된다.
4. 중생에 대한 사랑과 자비심을 가져야 한다.
5. 보살원행(원보리심, 행보리심)을 버려서는 안 된다.
6. 소승ㆍ대승ㆍ금강승을 비방하지 말며, 열심히 학습해야 한다.
7. 밀법을 의심하는 중생에게는 금강승 밀법을 드러내 보여서는 안 된다.
8. 자신의 몸을 해치지 말아야 하니, 몸의 어떤 부분이라도 모두 중생을 깨우치는데 사용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9. 밀법에 대해 의혹의 마음을 일으켜서는 안 된다.
10. 중생을 해쳐서는 안되며, 중생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
11. 밀법을 경시하여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
12. 밀법을 받아들이는 데 적합하지 않은 중생에게는 밀법을 가르쳐주어서는 안 된다.
13. 금강승 밀법을 수지하는 데 있어서 규정에 따라 법기(法器)를 사용하고 공양을 실행하여야 한다.
14. 여성 혹은 지능이 낮은 중생을 멸시하지 말아야 한다.
《14 근본 싸마야계》

금강승계의 항목들에 대해 설명하였지만, 금강승계는 별해탈계와 마찬가지로 우선 계를 받아 계를 지킬 자격을 얻은 다음 지켜야 할 계목(戒目)에 대해 학습하며 알아가는 계율이므로 수계(授戒) 전에 계목들을 미리 알 필요가 없다. 이와 달리 보살계는 지켜야 할 계목을 미리 알고 지킬 수 있다는 확신이 있을 때 비로소 보살계를 받게 된다.

4.2.7. 금강승의 수행

5. 종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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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년 전(全) 티베트 불교 전승 회의 당시 사진.[63]

티베트 불교는 크게 닝마(རྙིང་མ་, Wyl. rnying ma, "오래된"), 싸꺄(ས་སྐྱ་, Wylie: sa skya, "하얀 땅"), 까규(བཀའ་བརྒྱུད།, Wylie: bka' brgyud, "구전口傳의"), 겔룩(དགེ་ལུགས་, Wyl. dge lugs, "공덕功德을 갖춘") 등 4개 종파로 나뉜다.

티베트불교의 종파를 나누는 가장 큰 기준은 구파(舊派, nyingma)와 신파(新派, sarma)이다. 닝마(rNy-ing ma)는 일반적으로 한국에서는 구파(舊派) 또는 고파(古派)로 번역되는데, 티베트의 모든 불교 종파 가운데 가장 역사가 오래되었다. 이보다 후에 일어난 사캬, 까규, 겔룩, 조낭 등 모든 티베트의 종파들은 신파(新派)에 속한다.

구파와 신파를 나누는 기준은 경전의 번역이다. 티베트에 인도불교가 도입되던 7~8세기에 티베트의 법왕들이 후원하여 이루어진 번역을 구역(舊譯), 10~11세기 지방 귀족 세력이 지원하여 이루어진 번역을 신역(新譯)이라 한다. 특히 현교보다는 주로 밀교 전승의 번역과 전래에 따라 구파와 신파로 구분된다.
종파 주요 수장 경전의 번역
닝마(རྙིང་མ་, Wyl. rNying ma '오래된') 전통적으로 없음 구파(舊派, Nyingma)
싸꺄(ས་སྐྱ་, Wylie: Sa skya, '하얀 땅')
사캬 티진 신파(新派, Sarma)
까규(བཀའ་བརྒྱུད།, Wylie: bKa' brgyud '구전전승의') 까르마빠
겔룩(དགེ་ལུགས་, Wyl. dGe lugs '위대한') 달라이 라마
판첸 라마

전래 시기에 따른 분류 외에도 사캬, 디룽, 딱룽, 게덴 등 지역에 따른 분류, 까르마 까규, 불룩 등 스승에 따른 분류, 까담, 족첸, 착첸, 시제 등 수행 전승에 따른 분류 등으로도 종파를 구분할 수 있다.

종파 간에 정치적 대립이 빈번하였지만 각 종파의 고승들은 종파를 막론하고 존경의 대상이었고, 다른 종파의 학승이 자기 종파의 교리를 배우는 것을 막지도 않았다. 종파 간의 경쟁적 발전과 더불어 상호 이해와 존중이 이루어지고 활발한 교류가 있었다. 이종복, 《종파로 보는 티베트 불교》

아래 각 종파별 소개는 티베트 불교 4대 종파를 일컫는 축약어인 "싸게까닝(sa dge bka' rnying)"의 순서대로 편집했다.

5.1. 사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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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캬의 다섯 개조(開祖)들(sa skya gong ma rnam lnga)[64]

사캬는 까규와 마찬가지로 나로빠의 가르침에 그 기원을 두고 또한 독미 로짜와(Drokmi Lotsawa)라는 같은 스승으로부터 출발했지만, 까규와 다른 특징들이 있다. 사캬는 쾬(Khon) 일족 자체가 종파가 된 독특한 경우이다. 회색 땅을 뜻하는 사캬(Sa skya) 지방의 일족인 쾬 일족의 쾬 꾄촉겔뽀(Khon dkon mtshog rgyal po)를 종조로 하는 사캬 역시 밀교 전통에 근거한다. 사첸 꾄촉겔뽀는 인도에서 요기 나로빠와 밀교승원인 비끄라마쉴라(Vikramaśīla)에서 공부했다고 하는 독미 로짜와로부터 헤바즈라 딴뜨라에 근거한 람데(lam ’bras) 전통을 배운다. 수행의 길과 그 결과 사이의 관계에 대한 깊은 성찰을 밀교에 바탕을 두고 논하는 람데 전통은 사캬의 핵을 이루는 중심 교리이다.

람데 전승은 크게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경승(經乘, sutrayana)을 설명하는 부분은 삼현분(三現分, snang gsum)이라고 한다. 삼현분은 세 종류의 단계별 인식을 뜻한다. 첫 번째 단계의 인식은 청정하지 못한 인식으로 곧 세속 중생의 인식이다. 두 번째는 경험의 인식, 즉 실상(實相)을 통찰하는 수행자들이 경험하는 혼재된 인식이다. 마지막은 청정한 인식으로 일체지를 이룬 완전히 깨달은 스승이나 부처의 인식을 가리킨다.

다음으로 속승(續乘, tantrayana)을 설명하는 부분은 헤바즈라 딴뜨라를 구성하는 삼속분(三續分, rgyud gsum)이라고 한다. 삼속분은 존재론인 기속(基續), 수행론인 도속(道續), 결과론인 과속(果續)으로 이루어져 있다.

람데 전승은 후에 뮈첸 쾬촉 걀첸(mus chen dkon mchog rgyal mtshan)에 의해 두 가지 주요한 전승으로 나뉜다. 그는 소수의 제자들을 대상으로 더욱 심오하고 경험에 근거한 가르침을 전수하였고, 이를 람데 롭셰(lam 'bras slob bshad)라고 한다. 이와 대조적으로 대중들을 위한 보다 보편적인 가르침은 람데 촉셰(lam 'bras tshogs bshad)라고 한다.

사캬의 다른 특징으로는 불교 논리와 중관사상에 대한 깊은 이해이다. 후술할 겔룩과 함께 교학을 중시하는 종파로 알려져 있다. 사캬는 티베트 정치의 중심에 서기도 했고, 몽골의 불교 전통을 만드는 데도 큰 영향을 미쳤다. 사캬의 지도자였던 사캬 빤디따(sa skya pandita)는 티베트를 침공한 고단 칸(Godan Khan)과 회동을 갖고 시주(施主)-화주(化主) 관계인 최왼(mchod yon) 관계를 맺어 평화적으로 티베트의 자치를 보장받았다. 또한 사캬 빤디따의 조카인 도괸 최걀 팍빠(ʼgro mgon chos rgyal ʼphags pa) 역시 쿠빌라이 칸과 최왼 관계를 맺고 원나라 국사로서 원나라에 티베트 불교를 전파하며 파스파 문자를 만들기도 하였다.

5.2. 겔룩

파일:Lama-Tsong-Khapa-nice-art.jpg
겔룩의 개조(開祖) 쫑카빠[65]

겔룩의 종조 쫑카빠 롭상닥빠(Tshong kha pa bLo bzang grags pa)는 14세기 동북 티베트 암도의 쫑카 지방에서 태어나서 까르마 까규 및 여러 종파에서 공부했는데, 특히 사캬의 렌다와 쇤누로도(Red mda' ba gzhon nu blo gros)를 주 스승으로 삼았다. 이후 까담의 전통을 따라 엄격한 계율의 수행을 강조하면서, 불교 철학을 바탕으로 단계적인 수행을 통해 깨달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특히 아띠샤의 《보리도등론》의 주석서인 쫑카빠의 《보리도차제광론》을 비롯한 많은 주석서 및 저서들은 그 당시까지의 철학과 수행 전통을 새롭게 해석해 내면서 티베트불교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이후로 까담의 전통은 점차로 겔룩의 영향 아래 들어갔다.

쫑카빠의 개혁을 통해 겔룩은 여러 승려와 대중의 지지를 얻게 된다. 또한 달라이 라마가 화주(化主)가 되고 몽골, 오이라트, 청(淸) 왕조 등이 시주(施主)가 되는 최왼(mchod yon) 관계를 맺어 통치계급과도 폭넓은 유대 관계를 형성한다. 이를 바탕으로 제5대 달라이 라마가 오이라트 중 코슈트부의 군사를 빌려 티베트 내전에서 승리하면서 겔룩은 정교합일(政敎合一) 체제를 구축하고 티베트 불교 내의 최대 종파로 부상하여 현재까지 그 지위를 유지하고 있다.

초대 달라이 라마는 쫑카빠의 제자 겐둔 둡빠(dGe 'dun grub pa)이다. 그러나 겐둔 둡빠는 생전에 달라이 라마라고 불리운 적이 없다. 제3대 달라이 라마 때 이르러 몽골의 알탄 칸에게 '일체를 성스럽게 아시는 바즈라다라 달라이 라마'라는 존칭을 부여받고, 전전대 전생인 겐둔 둡빠까지 소급하여 달라이 라마란 칭호를 얻은 것이다. 제3대 달라이 라마가 사망한 후 알탄 칸의 증손자 중 한 명이 환생자로 지목되어 제4대 달라이 라마에 등극했다. 따라서 제4대 달라이 라마는 몽골인으로, 유일한 비(非)티베트인 출신 달라이 라마이다.

달라이 라마가 받은 존칭 중 '바즈라다라(Vajradhara)', 즉 집금강(執金剛)은 밀교의 이상적인 부처인 지금강불(持金剛佛)을 지칭하거나 혹은 가장 뛰어난 성취를 이룬 스승을 가리키는 존칭으로 쓰인다(밀교에서는 밀교의 가르침을 전하는 스승과 지금강불을 둘이 아닌 존재로 인식해야 한다). 그리고 '달라이(Dalai)'는 몽골어로 '큰 바다(大洋)', '라마(Lama)'는 티벳어로 '스승'이라는 뜻이다.

초대 달라이 라마를 제외하고 달라이 라마로 선정되면 모두 '바다'라는 뜻의 '갸초(rgya mtsho)'가 들어간 법명(法名)을 얻었다. 제14대 달라이 라마의 법명인 '뗀진 갸초(bstan ‘dzin rgya mtsho)'의 '뗀진'은 '가르침[佛法]의 소지자[持法]'란 뜻이다. 즉 '뗀진 갸초'란 법명은 '불법의 바다'를 뜻한다.

공식적인 겔룩의 종정은 달라이 라마가 아니라 겔룩의 본산인 간덴 (dGa' ldan)사원의 사원장 간덴 티빠(dGa' ldan khri pa)이다. 간덴 티빠는 간덴 사원 안의 싸르쩨(Shartse)와 장체(Jangtse) 두 강원의 방장(方丈)이 번갈아 가며 맡게 되는데 임기는 전통적으로 7년이다. 환생자 제도로 선정되지 않고 순수하게 개인의 능력과 학식, 덕망, 승가 내 경력 등으로 선정되는 직위이다. 때문에 티베트의 속담에 "만약 어머니의 자식에게 합당한 자격이 있다면, 간덴의 법좌는 그에게 열려 있다."는 말도 전해진다.

5.3. 까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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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빠 까규의 개조(開祖) 마르빠[66]
제17대 까르마빠 오겐 틴레 도제의 까규 법맥 소개
헬로붓다TV《자홍 스님의 티벳불교사 이야기(2)》
<티벳불교 까귀파>

까규란 '구전의 전통(口傳傳統)'이라는 뜻이다. 11세기 인도의 밀교 요기 띨로빠(Tilopa)를 시조로 삼는다. 띨로빠는 나로빠(Nāropā)를 가르쳤다. 티베트인 역경사 마르빠 로짜와[67](Marpa lotsawa)는 역경사 독미 로짜와 샤꺄예쉐(Drokmi Śākya Yeshé)에게 가르침을 받은 후 인도의 날란다 사원에서 나로빠로부터 직접 가르침을 전수받았다고 한다. 마르빠의 가르침인 마하무드라(mahāmudrā)는 이후 밀라레빠(Mi la ras pa)를 거쳐 까규로 성립되었다.

까규는 명상, 구루 요가, 나로 6법과 같은 금강승 수행을 강조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까규와 닝마는 모두 실수행을 중시하지만, 까규는 닝마와 달리 명상을 통해 점진적으로 견해를 익히고 체험해나가는 방식을 따른다.

마르빠에게서 유래한 마르빠 까규는 4대 8소 종파로 나뉘어진다. 마르빠 까규의 초기 4대 종파는 까르마 까규(Karma bka' brgyud), 바롬 까규('Ba' rom bka' brgyud), 찰빠 까규(Tsalpa Kagyü), 팍두 까규(Pagdru Kagyü)이다.

이 중 팍두 까규는 다시 8개의 분파로 갈라져 둑빠 까규(‘Brug pa bka' brgyud), 디꿍 까규('Bri gung bka' brgyud), 딱룽 까규(sTag lung bka' brgyud), 마르창 까규(Martsang Kagyü), 슝셉 까규(Shugseb Kagyü), 트로푸 까규(Trophu Kagyü), 얌장 까규(Yamzang Kagyü), 옐빠 까규(Yelpa Kagyü)를 이룬다.

4대8소 중 현재까지 남아 있는 종파는 까르마, 바롬, 둑빠, 디꿍, 딱룽 5개 종파들이다. 까루 린뽀체가 속한 상빠 까규(Shangs pa bka' brgyud)는 마르빠 까규에 속하지 않는 별도의 법맥이지만 밀접한 연관이 있다. 마르빠 까규의 창시자인 마르빠는 인도의 마이뜨리빠(mai tri pa)와 마이뜨리빠의 스승인 나로빠에게서 가르침을 받았다. 그리고 샹빠까규의 창시자인 케둡 큥뽀 낼죨(Kedrub Kyungpo Naljor)은 마이뜨리빠와 니구마(ni gu ma) 에게서 가르침을 받았다고 한다. 니구마는 나로빠의 여자 형제 또는 배우자라고 전해진다. 이렇듯 창시자들의 스승이 서로 겹치거나 연관이 있으며, 후대에 이르기까지 두 법맥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한다.

5.4. 닝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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닝마의 개조(開祖) 빠드마삼바와[68]

닝마(Nyingma)는 '오래된'이란 뜻으로 말 그대로 티베트 불교 중 가장 먼저 생긴 종파이다. 8세기 티송데쩬 왕은 당시 네팔에 머물고 있던 인도 날란다 사원의 승원장 샨따락쉬따(Śāntarakṣita)를 초청하면서 밀교 성취자인 빠드마삼바와(Padmasambhava)를 대동했다. 빠드마삼바와는 밀교행을 통해 티베트의 토속 종교인 뵌교의 신도뿐만 아니라 티베트의 토속신들을 제압하여 불교에 귀의하도록 이끌었다. 이에 샨따락쉬따는 왕실의 후원 하에 쌈예사(bSam yas dgon pa)를 건립하고 티베트의 첫 승단을 만들었다. 닝마는 이때 샨따락쉬따가 대동했던 밀교 성취자 빠드마삼바와와 그의 가르침을 그 중심으로 삼는다.

닝마는 까규와 마찬가지로 명상 등의 수행을 중시하는 종파로 알려져 있다. 수행을 중시하는 점은 두 종파 모두 동일하지만, 닝마는 까규와 달리 명상보다 견해를 좀 더 강조한다. 스승으로부터 가장 핵심적인 가르침인 구결(口訣, Skt. upadeśa; Tib. man ngag)을 먼저 전수받은 후, 그러한 가르침을 바탕으로 명상하는 방식이다.

닝마의 전승으로는 석가모니로부터 내려오는 전승인 까마(kama)와 빠드마삼바와와 그의 제자들이 비장(秘藏)하고 시절인연에 따라 발견되는 전승인 뗄마(terma)[69]가 있다. 이를 바탕으로 닝마는 현교와 밀교를 9개 승으로 구분한 독자적인 9부승(九部乘) 체계를 갖추었다.

9부승은 크게 외(外), 내(內), 밀(密) 삼승으로 구분된다. 외승(外乘)은 곧 경승(經乘, sutrayana)에 해당하고 내승과 밀승은 속승(續乘, tantrayana)에 해당한다.

구체적으로 외승(外乘)은 성문승, 연각승, 보살승을 가리킨다. 성문승, 연각승은 근본승이며 보살승은 대승에 해당한다. 그리고 내승(內乘)혹은 외전(外傳) 딴뜨라는 사부(所作部 혹은 事部, kriya tantra), 행부(行部, charya tantra), 유가부(瑜伽部, yoga tantra)로 구성된다. 내승의 가르침은 브라만의 베다(Veda) 전통처럼 의례와 외적 청정을 강조한다.

마지막으로 밀승(密乘) 혹은 내전(內傳) 딴뜨라는 마하 요가(maha yoga), 아누 요가(anu yoga), 아띠 요가(ati yoga, 혹은 maha ati yoga)로 구성된다. 마하, 아누, 아띠 요가는 신역(新譯)의 무상유가부(無上瑜伽部, anuttarayoga tantra)에 해당한다. 마하 요가는 생기차제, 아누 요가는 기맥명점 수행, 아띠 요가는 원만차제를 중점적으로 다룬다. 9부승의 최상위에 위치한 아띠 요가는 바로 닝마 고유의 가장 심오한 가르침인 족첸(rdzogs chen)이다. 밀승의 가르침은 모든 현상을 청정하고 평등한 진여(眞如)로 전환시키는 강력한 방편들이다.

5.5. 조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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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낭의 중흥조(重興祖) 될뽀빠

시가쩨 근처 조모낭 지역에서 번성한 조낭은 쿤팡 툭제 쇤두(Kunpang Thukje Tsondru)가 1294년 조낭 사원을 건립하면서 시작된다. 그 이전 11세기 깔라차끄라 딴뜨라 전문 수행가였던 유모 미꾜돌제(Yu mo mi bskyod rdo rje)는 조낭의 직접적인 창시자는 아니지만 조낭빠 형성에 큰 영향을 준 사상적 근원에 해당하는 인물이다. 유모 미꾜돌제는 카쉬미르의 빤디따 찬드라나타(Candranātha)에게서 사사했다. 후캄(Hookham)에 의하면 타공의 이해는 유모 미꾜돌제가 카일라쉬산에서 깔라짜끄라 딴뜨라를 수행하는 도중 터득한 것이라고 한다. 사캬에서 계를 받았던 될뽀빠 쉐랍겔첸(Dol po pa shes rab rgyal mtshan) 대에 이르러 조낭은 융성했다.

조낭은 쉔똥(gzhan stong), 즉 타공(他空) 사상을 내세웠다. 타공이란 모든 속제를 비롯해 다른 것에 의존해 일어난 현상들, 자아와 같은 허상은 그 자성이 공(空)하지만, 그 모든 속제의 근간이 되는 법성, 일체지, 천연의 의식, 불성, 또는 청명한 빛의 마음은 공하지 않다는 사상이다. 이후 조낭은 제5대 달라이 라마 대에 이르러 정치적ㆍ사상적 이유로 이단으로 몰려 중앙 티베트 지방에서 사라졌고 몽골과 암도 지방에서 명맥을 유지한다.[70]

될뽀빠는 삼전법륜(三轉法輪)에 해당하는 《보성론》의 여래장 사상을 요의(了義)로 보았다. 《보성론》에 따르면 속제의 현상들은 공(空)하지만 진제에서의 공성과 함께 나타나는 비이원적(非二元的)인 불지(佛智), 광명심(光明心), 부처의 공덕 등은 공하지 않다. 이러한 견해를 기존의 중관(Madhyamaka)에 대비하여 '대중관(大中觀, Mahamadhyamaka)'이라고 명명하였다.[71]

유식학파의 삼성설(三性說)에 영향을 받은 점 때문에 학계에서는 타공설의 등장을 티베트 불교에서의 유식학파의 흐름으로 해석하였다. 그러나 '대중관'이란 명칭에서 알 수 있듯 될뽀빠를 비롯한 타공론자(gzhan stong pa)들은 그들 스스로를 진정한 중관 논사라고 생각했고,[72] 타공설과 유식은 다르다고 주장했다.

한편 겔룩 위주의 종파주의를 극복하기 위해 19세기 리메(Rimé, 無山, 무종파) 운동에 참여했던 사캬, 닝마, 까규 등 비주류 종파의 스승들도 타공설의 영향을 받아 타공, 혹은 타공과 자공(自空, rang stong) 사이의 절충적인 견해를 취하였다. 각 파의 독자적인 밀교 전승은 현교의 교학적 견해가 분화되는 주요 원인으로 작용했다.
안성두, 《티베트 불교에서의 여래장 해석 -자공설(自空說)과 타공설(他空說)의 차이를 중심으로-》
차상엽, 《연기와 공성 그리고 여래장에 대한 티벳 사상가들의 이해》
조석효, 《이미지, 광명, 시간 -돌뽀빠 쉐랍겔첸(Dol po pa Shes rab rgyal mtshan)의『가르침에 대한 일반 주석이라고 하는 기원(祈願)』(Bstan pa spyi 'grel zhes bya ba'i gsol 'debs)에서의 실재 이해를 중심으로》

티베트의 중관 사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겔룩의 자공과 조낭의 타공을 양 축으로 삼은 사상적 스펙트럼 안에 다양한 견해들이 존재한다는 점, 그리고 현교의 자공, 타공 사상과 밀교의 족첸, 마하무드라, 칼라차크라 등은 (일치하는 부분도 있지만) 별개의 전승들이므로 각각을 연계하여 해석하는 방식은 해석 주체마다 달라질 수 있다는 점을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기실 티베트 불교는 "라마 한 분 한 분이 각각의 종파이다."라는 격언이 있을 정도로 사상적 다양성이 두드러지며 전해지는 문헌의 양 역시 방대하여 학계에서도 아직 그 전모를 온전히 파악하지 못한 실정이다.

티베트의 사조 계보는 우선 4대 종파 등으로 대별된 후 다시 시대별, 계파별, 인물별로 세분화되고 더 나아가 동일 인물의 경우에도 저작이나 생애 시기에 따라 구분이 가능하다. 사상적으로 가장 대비된다고 알려진 두 종파인 겔룩과 조낭 역시 예외는 아니어서 그들 종파 내부에서도 견해 차가 없지 않다. 또한 개중에는 특정 견해에 천착하지 않고 실용주의적인 노선을 취하는 경우도 있는데, 가령 타공을 주창한 될뽀빠는 명상 중에 자공의 견해를 취하는 것이 개념의 제거에 도움이 된다고 보았다. 이처럼 '자공'이나 '타공'같은 동일한 용어를 사용하더라도 전승과 인물마다 각기 해석을 달리하기 때문에 티베트 불교에서는 "'흰 타공'과 '검은 타공'이 있다"는 식으로 여러 타공견(他空見)들 중 정견(正見)과 사견(邪見)을 구분하곤 한다.[73]
빛나는 마음(prabhāsvaraṃ cittaṃ)은 조건지어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빛나는 마음에서는 아무 것도 원인과 조건이 합쳐져 이루어지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이는 다음 순간의 빛나는 마음의 발생은 마음의 같은 종류(sajāti)에 의해 발생한 이전 순간의 마음에 의존한다는 사실에 기초한다.
Sajjana,《Mahāyānottaratantraśāstropadeśa》
조낭의 타공과 달리 까르마 까규, 닝마 등 다른 종파의 타공은 자공에 가까운 '완화된 타공'에 해당한다. 예컨대 조낭은 여래장을 삼세(三世), 즉 시공간에 종속되지 않는 궁극적이고 불변하는 독립된 실체(rtag dngos)라고 주장하였지만, 까르마 까규는 유식에서의 의타기(依他起)의 청정분(淸淨分)과 여래장을 결합하여 부정(negation)의 토대인[74] '조건지어지지 않은 빛나는 마음'을 (외부의 원인과 조건에 영향을 받지 않고) 이전 순간의 동류(同類)의 마음에 의존하여 발생하는 순간들의 연속으로 규정함으로써 연기(緣起)와 분리하지 않았고 시공간에 종속된 것으로 간주했다. 다만 "물과 우유가 서로 섞이지 않는" 비유처럼,[75] 불성 혹은 정광명은 객진번뇌에 오염될 수 없다는 점에서는 조낭의 타공과 견해를 같이 하였다.
Klaus-Dieter Mathes, 《The Other Emptiness: Rethinking the Zhentong Buddhist Discourse in Tibet》〈Zhentong Views in the Karma Kagyu Order〉

절충적인 견해 중에는 자공설(自空說)로 분류되는 견해도 있다. 가령 미팜(Mipham)의 경우, 겔룩의 자공설처럼 일체법의 자성(自性)이 공(空)함을 인정하면서도, 동시에 '자기 인식'이나 '밝음' 등 진여(眞如)의 현상적인 측면을 긍정하였다. 그러나 현상의 실체화, 개념화를 거부한다는 점에서 미팜의 견해는 타공설과도 구분된다. 김성옥, 《『법법성분별론』에 대한 미팜(Mi Pham) 주석의 특징》

미팜의 학맥을 계승한 닝마의 학승 뵈뛸(Bötrül Dongak Tenpe Nyima)은 티베트의 중관사상을 크게 (1) 조낭의 타공, (2) 겔룩의 제실공(諦實空, bden stong), (3) 닝마의 자공으로 구분하였다. 각각의 주요한 차이는 '부정 대상(dgag bya)'에서 드러난다. 조낭의 타공은 (1) 속제(俗諦)에 해당하는 현상의 자성(自性), 겔룩의 제실공은 (2) 일체법이 진실로 존재함, 닝마의 자공은 (3) 일체의 개념적 언급을 부정해야 할 대상으로 삼는다.

이제(二諦)에 대한 설명도 조낭의 (1) '진제와 속제가 하나임을 부정함(gcig pa bkag pa)', 겔룩의 자립논증 중관의 관점[76]에서 (2) '진제와 속제가 본질적으로 하나이지만 의식의 분별(이름, 생각 등)로는 각기 다른 두 가립(假立)된 법(法)임(ngo bo gcig la ldog pa tha dad)', 닝마의 귀류논증 중관의 관점에서 (3) '진제와 속제가 하나도 아니고 다수도 아님(gcig du bral)'으로 달라진다.

요컨대 각 파의 견해는 중관으로 대변되는 이전법륜과 유식ㆍ여래장으로 대변되는 삼전법륜 중 어느 사상을 우위로 볼 것인가에 따라 달라진다. 겔룩은 이전법륜인 중관 사상, 조낭은 삼전법륜인 여래장 사상을 각각 요의(了義)로 보았고 닝마는 둘의 양립(兩立) 혹은 합일(合一)을 추구한다고 볼 수 있다. 미팜은 현상을 경시하고 공성만을 추구할 경우 자칫 단견(斷見)에 치우칠 수 있기 때문에 중관과 유식, 여래장의 결합을 통해 공성과 현상의 쌍입(雙入)을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77]
Bötrül, 《Distinguishing the Views and Philosophies:Illuminating Emptiness in a Twentieth-Century Tibetan Buddhist Classic》

초(超)종파적인 성향이 강한 제14대 달라이 라마 대에 이르러서야 조낭은 티베트 불교의 정식 종파 중 하나로 인정받게 된다. 그러나 여전히 티베트 내에서 조낭은 이단이라는 인식이 강하고 세력 또한 미약하므로, 조낭의 존재 자체를 무시하거나 그와 관련된 언급을 회피하는 경우가 많다. 조낭보다는 오히려 불교와 거의 차이가 없어진 뵌교를 추가하여 사캬, 겔룩, 까규, 닝마와 함께 뵌교를 '티베트의 5대 종파'에 배속하는 것이 보다 일반적인 분류이다. 뵌교의 경우 교학적 견해나 강원 제도는 겔룩과 유사하며, 그와 더불어 닝마의 족첸과 유사한 뵌교의 족첸 전승을 갖고 있다.[78]

비록 제14대 달라이 라마가 조낭을 정식 종파로 포용하였지만, 그와 별개로 달라이 라마 본인은 반야경을 요의경(了義經)으로 보는 겔룩의 전통적 견해에 따라 조낭의 타공을 부정하고, 일체법이 승의적(勝義的)인 차원에서 독립적 실체가 없다는 자공을 견지한다. 자공론자(rang stong pa)[79]들은 불성ㆍ여래장에 자성(自性)이 있다는 조낭의 주장이 힌두의 아뜨만과 다를 바 없다고 비판한다. 또한 붓다는 영혼이나 불변하는 자아가 실제로 존재한다고 결코 가르친 바 없으며, 불성, 여래장에 대한 붓다의 가르침은 미료의(未了義)에 해당함에도 불구하고 조낭은 미료의를 요의(了義)로 혼동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자공론자에게 있어 불성ㆍ여래장은 마음의 법성(法性)으로서 진제로는 공성(空性), 속제로는 가장 미세한 의식인 광명심(光明心)으로 장차 부처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의미한다.

겔룩 또한 다른 종파처럼 마음/의식의 법성이 명료함이며 인지 작용을 한다는 점에 동의한다. 한편 법성, 즉 존재의 고유한 성질에도 승의제와 세속제의 구분이 있다는 점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특성인 명료함과 작용인 인지는 마음/의식의 현상으로서 세속제에 해당한다. 승의로서는 마음/의식의 명료함과 인지 작용 또한 자성이 공하다. 마치 빛과 열(熱)이 불의 고유한 성질이지만 불의 빛과 열 역시 불변하고 독립적인 실체가 아닌 것과 같다. 이처럼 승의제인 마음의 공성과 세속제인 마음의 명료함, 인지 작용 등을 명확히 구분하는 것이 겔룩의 교학적 특징이다. 《반야경》에서 공성을 무자성(無自性)이라고 정의하듯이, 쫑카파는 공성이 단지 부정해야 할 대상의 부정일 뿐 그 외 어떠한 정립적 함의도 내포하지 않는다고 보았다.

18세기의 예수회 수사로 티베트에 와서, 5년 동안 보리도차제에 따라 티베트 불교를 공부했던 이폴리토 데시데리(Ippolito Desideri)는 겔룩빠와의 대론에서 바로크 스콜라 철학의 견해에 입각한 제1원인론을 주장했다. 겔룩빠 승려들은 데시데리의 주장을 될뽀빠의 견해와 다르지 않다고 보았다.
Ippolito Desideri, 《Mission to Tibet: The Extraordinary Eighteenth-Century Account of Father Ippolito Desideri S. J.》
Donald S. Lopez Jr., Thupten Jinpa, 《Dispelling the Darkness》

6. 환생자 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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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한국과의 교류

7.1. 인적ㆍ사상적 교류

허일범, 《한국 불교 속의 티베트불교》
한국 불교와 티베트 불교의 교류는 통일신라부터 현대에까지 이르고 있다. 특히 티베트 불교를 숭앙하던 몽골의 침략 이후 고려 불교에 일정 부분 영향을 준 바 있다.

1. 통일신라시대
  • 신라승 김무상(金無相, 684-762)과 당으로 가는 티베트 사신이 조우한 일화가 티베트의 역사서인 《바세》에 기록되어 있다. 《바세》는 티베트의 제37대 짼뽀 치데쭉땐(khri lde gtsug brtan, 약 680-754)과 제38대 짼뽀 치송데짼(khri srong lde bstan, 742-797) 부자 통치 시기의 역사를 주요하게 기록한 책으로, 8세기 당시 티베트에 불교가 확산되는 과정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문헌 중 하나이다. 현존하는《바세》의 필사본은 대략 6종류가 있는데 그 중 《dba' bzhed bzhugs so》의 모본(母本)이 비교적 원시본에 가까운 필사본으로 알려져 있다.
    《dba' bzhed bzhugs so》에 따르면 짼뽀 치송데짼 재위 당시 티베트의 사자 30여 명이 당나라에 가는 길에 '김 하샹[金和尙]'을 만나게 된다. '김 하샹'은 예지력으로 티베트의 사자가 올 것을 미리 알고 있었고, 사자들 중 바새낭[바샐낭]과 상씨는 보살의 화신이라고 예언한다. '김 하샹'이 상씨를 만났을 때 '김 하샹'은 짼뽀 치송데짼과 티베트 불교의 미래에 대해 예언하면서 티베트의 토착종교인 본교와의 논쟁에 대비할 것, 《불설업보차별경》ㆍ《불설도간경》ㆍ《금강경》 등을 순서대로 짼뽀에게 강설할 것, 인도에서 보디사따(샨타락시타) 스님을 초청할 것 등을 일러준다.[80]
    《바세》에 등장하는 '김 하샹', 즉 김무상은 신라 왕족 출신으로 알려져 있으며 속성은 김(金)이고 법명은 무상(無相)으로 주로 쓰촨(四川) 지방에서 활동했고 말년에 정중사(淨衆寺)에 주석(主席)하여 후대에 정중무상(淨衆無相)이라 일컬어졌다. 그는 오조(五祖) 홍인(弘忍)-지선(智詵)-처적(處寂, 당화상唐和尙)으로 이어지는 중국 선종의 법맥을 계승하였고, 동산법문(東山法門)의 분파인 정중종(淨衆宗)의 개조(開祖)로 알려져 있다.조병활, 《바세 연구》
  • 《금강삼매경》은 신라 찬술설이 제기되는 경전으로[81], 중국 초기 선종 성립에도 영향을 준 문헌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금강삼매경》은 티베트에 족첸 전승을 도입한 인도의 학승이자 요기(yogi)인 비말라미뜨라(Vimalamitra)의 저술로 알려진 《돈입수의(Cig car ’jug pa'i rnam par mi rtog pa’i bsgom don)》에도 인용되어 돈오를 정당화하는 전거로 활용되었다. 만약 신라 찬술설이 사실이라면, 김무상의 일화와 더불어 당시 한반도~중앙아시아 간 활발한 문물 교류를 짐작케하는 사례 중 하나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돈입수의》에서의 선정ㆍ지혜바라밀 및 수소성혜(修所成慧)의 강조는 삼예논쟁 당시 까말라쉴라의 논적이었던 마하연 화상의 돈오론을 연상케 하지만, 한편 비말라미뜨라의 또다른 저서인 《점입수의》에서는 대비심과 보시 등의 방편을 강조하였고 《돈입수의》와 《점입수의》의 본문 중《수습차제》와 동일한 부분이 존재하는 등 비말라미뜨라와 까말라쉴라 간의 사상적 유사성도 찾아볼 수 있다. 박운진, 《비말라미뜨라(Vimalamitra)와 삼예(bSam yas) 논쟁》
  • 혜과(惠果) 화상의 제자인 신라의 오진(悟眞)은 인도로 구법순례를 떠났다가 귀로에 티베트에서 입적하였다.
  • 통일신라시대 고승 원측(圓測)의 《해심밀경소》를 법성(法成, Chos grub)이 티벳어로 번역하여 티베트 대장경에 수록되었다. 이후 원측의 저서는 티베트 불교 내에서 경전 해석의 주요한 논거가 되는 대표적인 논장 중 하나로 자리잡았다.

2. 고려시대
  • 고려 충렬왕 20년(1294) 티베트 승려 절사팔(折思八)이 티베트 경전과 법구류를 가지고 고려에 들어왔다.
  • 충선왕 즉위년(1298)에는 충렬왕과 충선왕, 계국대장공주 등이 티베트 불교 승려에게 보살계를 받았다.
  • 고려인 출신으로 원나라에 들어가 출가하여 티베트 불교 승려가 되는 경우도 있었다. 이들은 황실의 각별한 존숭을 받았으므로 고려에 있는 가족에게는 특별한 우대 조치가 베풀어졌다.
  • 충숙왕 1년(1314)에는 홍약이 티베트 경전 1만 8천여 권을 고려에 전해주었다.

  • KBS HD 역사스페셜《고려 충선왕, 티베트로 유배된 까닭은》[82]

    고려사》에 따르면 충숙왕 7년(1320) 12월 무신일(戊申日) 원(元)의 새 황제 영종(英宗)이 불경(佛經)을 공부하라는 명목으로 충선왕을 토번의 살사결(撒思結)로 유배보냈다. 《고려사》는 충선왕의 유배 원인을 고려인 출신 환관 임바얀투그스(任伯顔禿古四, ?-1323)와의 갈등 때문으로 기록했다. 충선왕이 인종(仁宗)의 모친인 황태후에게 임바얀투그스의 전횡을 고하여 그가 벌을 받았고, 이에 대한 앙갚음으로 임바얀투그스가 원 대신 팔사길(八思吉)에게 많은 뇌물을 주어 충선왕을 무고하게끔 사주했다는 것이다. 또 다른 견해로는 영종과 태황태후 다기(答己)의 정치적 갈등 속에 영종이 충선왕을 태황태후측 인물로 의심하여 유배를 보냈다는 해석이 있다.
    영종은 처음에 충선왕을 고려로 환국시키려했으나, 충선왕이 이를 거부하자 대도(大都)에 있는 황실사원인 석불사(石佛寺)에서 강제로 삭발하여 출가시키고 학불(學佛)의 명목으로 토번의 살사결에 유배를 보냈다. 살사결은 지금의 티베트 자치구 시가체(gzhis ka rtse)로 쿠빌라이 칸의 제사(帝師) 파스파(1235-1280, 八思巴, ʼgro mgon chos rgyal ʼphags pa)가 중창한 황실의 최대 후원 사찰인 싸꺄 사원(sa skya dgon pa)이 있는 곳이며 당시 티베트 정치ㆍ종교의 중심지였다. 충선왕이 싸꺄 사원에 유배 온 시기는 남송(南宋)의 황제였던 공제(恭帝) 조현(趙顯)이 1288년 티베트 불교로 출가하여 싸꺄 사원에 머물며 역경(譯經)에 종사하던 시기와 겹친다.[83][84][85] 당시 원에서는 정치적인 이유로 중국과 고려의 왕족을 티베트로,[86] 티베트와 몽골의 왕족을 중국 남부로 유배보내곤 하였다.[87] 이들이 유배 간 지역 중 싸꺄나 항저우는 변경이지만 각각 티베트 불교와 중국 불교가 발달한 곳으로, 이들의 유배는 불교를 학습할 수 있는 일종의 포상으로 여겨졌다.[88]
    민지(閔漬), 허유전(許有全), 이제현(李齊賢) 등 고려의 신하들과 원의 승상 바이주(伯住)가 충선왕의 사면을 요청하여 1323년 2월 충선왕은 대도(大都)와 더 가까운 타스마(朵思麻)로 이배되었다. 타스마는 지금의 간쑤성 린샤(臨夏)로 원 내지와 티베트를 오가는 역로(驛路)에 위치하여 사신, 승려, 상인들이 빈번히 이용하는 실크로드의 대표도시였다. 파스파가 제자 온파(溫波)에게 향근선사(香根禪寺)를 창건하게 한 후 불사(佛事)가 융성하여 청대(淸代)에 이르기까지 타스마에는 여덟 곳의 싸꺄빠 사원이 존재하였다. 타스마에서 약 7~8개월을 머물고 1324년 다시 대도로 옮겨지면서 충선왕의 5년 간 유배생활도 끝이 났다.계미향, 《고려 충선왕의 생애와 불교》 Kaiqi Hua, 《Buddhist Encounters and Identities Across East Asia》<The Journey of Zhao Xian and the Exile of Royal Descendants in the Yuan Dynasty (1271–1368)>
  • 현재 우리나라 불교에 널리 퍼진 육자진언 옴마니반메훔도 티베트의 자사태마(刺思駄麻)와 사팔자(思八刺) 라마가 전한 것이다.[89] 육자진언 관련 수행법은 티베트에서 저술된 《마니 깐붐(Tib. མ་ཎི་བཀའ་འབུམ་, Wyl. ma Ni bka' 'bum)》의 가르침을 계승한 것으로 육자진언을 활용한 명상법이라는 특징이 있다. 《마니 깐붐》은 몽골을 통하여 고려에 전래된 닝마 계열의 밀교 경전으로 육자진언과 관련된 여러 가르침들을 총망라했다.[90]

이처럼 원 간섭기에 원나라 황실에서 신봉하던 티베트 불교가 고려에 유입되었으나, 티베트 불교의 신도층은 고려의 왕비가 된 원나라 공주의 수행원들과 고려에 거주하는 몽골 관인들 위주로 한정되었다. 고려에서의 티베트 불교 수용은 황실에 대한 존중과 공주에 대한 배려의 성격이 강했으며 전체 고려 불교계나 일반 백성들에게는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하였다. 다만 원나라 황실을 축원하는 법회의식 등을 통하여 티베트 불교의 의례와 불상, 불구(佛具) 등이 수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최연식, 《한국문화사 11. 신앙과 사상으로 본 불교 전통의 흐름》 이후 공민왕의 반원 정책으로 친원 세력이 축출되면서 티베트 불교 역시 자취를 감추게 된다.

3. 조선시대
안노생(安魯生)이 말하였다.
"황제가 불법(佛法)을 숭상(崇尙)하여 중[僧]이 서역(西域)에서 왔는데, 나이가 20여 세쯤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를 존경하고 떠받들어 ‘생불(生佛)’이라고 하는데, 그 언행(言行)을 들어 보면 보통 사람과 다를 것이 없고, 구운 양(羊)고기를 잘 먹습니다. 그러나 밤중에 등불과 같이 방광(放光)하는데, 이것이 이상하여 많은 사람들을 미혹시킵니다."
태종실록 13권, 태종 7년 3월 15일 기사 4번째 기사
예부(禮部)에서 이래(李來)·맹사성(孟思誠)·설칭(薛偁)·이회(李薈)로 하여금 영곡사(靈谷寺)에 나아가서 각각 황제가 지은 찬불시(讚佛詩)를 속운(續韻)하여 올리게 하였다. [...]

이때에 호승(胡僧) 갈니마(曷尼摩)가 있어 ‘생불(生佛)’이라고 하는데, 황제가 그를 맞아 경사(京師)에 데려다 영곡사에 거처케 하고, 매우 공경하고 믿으니, 조관(朝官)과 사인(士人)들이 모두 달려가서 마정수기(摩頂授記)를 받았다.
태종실록 15권, 태종 8년 4월 2일 경진 13번째 기사

태종실록》에는 영락제가 숭상했던 대보법왕(大寶法王) 제5대 까르마빠 데신 셱바(de bzhin gshegs pa)[91][92]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다. (明)에 사신으로 파견되었던 안노생(安魯生)은 태종에게 영락제의 초청을 받은 한 서역(西域)의 승려에 대해 언급하였다. 비록 제5대 까르마빠라고 명시하지는 않았지만, 연대(年代)와 승려의 나이, 출신지, 명성, 풍습 등의 묘사를 통해 제5대 까르마빠임을 유추할 수 있다.[93] 안노생은 까르마빠에 대해 "그 언행을 들어보면 보통 사람과 다를 바 없다"는 인색한 평가를 내리면서도, 한편으로 까르마빠가 보여준 방광(放光)의 이적(異跡)을 소개하였다. 《황명종신록(皇明從信錄)》등의 명대 사서(史書)들도 까르마빠가 보인 이적을 기록하였다.

또한 명나라에 파견된 이래(李來), 맹사성(孟思誠), 설칭(薛偁), 이회(李薈) 등 조선 사신들이 당시 제5대 까르마빠가 머물던 난징의 영곡사(靈谷寺)에 방문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조선 사신들은 예부(禮部)의 지시로 영곡사에 가서 황제가 직접 지은 찬불시(讚佛詩)를 속운(續韻)하여 올렸다. 찬불시에는 불가적(佛家的) 구도(求道)와 깨달음에 관한 내용과 함께 전법행(傳法行)을 펼치는 까르마빠를 찬탄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94] 또한 사신들은 영곡사에서 까르마빠를 친견하고 마정수기를 받았다.[95][96]
신대승(申大升)은 말하기를,
"건륭(乾隆) 때에는 두려워 한 것이 몽고(蒙古)였었으므로 반선(班禪)을 총애하여 대우한 것은 그가 몽고 사람이었기 때문에 후하게 대우한 것이지 참으로 총애해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정조실록 11권, 정조 5년 4월 8일 신해 1번째 기사
몽고의 48개 부락의 사람들은 모두 사나운데 근래에 와서 더욱 강성해지자 황제가 늘 견제하면서 만족·한족과 같이 벼슬을 시키고 몽고의 왕이 새로 즉위하면 공주(公主)를 시집보냅니다. 그곳의 풍속은 번승(番僧)을 가장 존경하여 마치 신명(神明)처럼 공경하기 때문에 몽고인으로서 라마승이 된 사람은 서울에 있는 사찰을 주관하도록 하였으며 몽고 사람들이 숭배하는 번승이 있으면 대뜸 존경의 예를 더합니다. 연전에 반선(班禪)이 입적(入寂)한 뒤에 몽고의 여러 부락들 가운데 칸왕(汗王)의 자제들로써 선종(禪宗)과 교종(敎宗)의 종파를 차지하려고 꾀하는 자가 있어서 황제가 유시를 내려 금지하였습니다. 이를 가지고 보면 반선을 파격적으로 존경하여 받드는 것도 오로지 그 불도를 독실히 믿는 것에서 나온 것이 아니며 열하(熱河)에 해마다 거동하는 것은 아마 숨은 뜻이 없지 않을 것이라고 합니다.
정조실록 39권, 정조 18년 3월 24일 신해 3번째 기사

1780년(정조 4년), 청나라 건륭제의 칠순 만수절(萬壽節)을 축하하기 위해 파견된 조선의 사절단과 반선액이덕니(班禪額爾德尼) 제6대 빤첸 라마 롭상 빨덴 예쉐(blo bzang gpal ldan ye shes)[97]와의 조우가 열하(熱河)에서 이루어진다. 건륭제와 그의 신하들은 조선의 사신들이 황제의 스승인 빤첸 라마에게 예를 표하기를 원했으나, 억불(抑佛) 정서가 지배적인 조선 후기의 통념상 명분에 어긋나는 굴욕적인 행위로 받아들여져 사절단 내부의 반발이 극심했다고 전해진다. 빤첸 라마는 사절단에게 목조 불상(佛像)을 하사하였으나 이후 불상의 행방은 묘연하다.

사절단의 정사(正使)인 8촌형 금성위(錦城尉) 박명원(朴明源)을 수행했던 연암 박지원(燕巖 朴趾源)의 《열하일기》에 관련 일화들이 자세히 기록되어 당시 청, 몽골, 티베트 간의 국제 관계를 알려주는 중요 사료로 취급된다. 또한 《정조실록》에도 빤첸 라마와 관련한 조선 사신들의 국제 정세 분석이 수록되어 있다. 빤첸 라마에 대한 청의 파격적인 존숭을 단순히 신앙심의 발로(發露)로만 볼 수 없으며, 티베트 불교를 신봉하는 몽골을 포섭하고 회유하려는 정치적 의도도 담겨있다는 점을 조선 사신들은 정확하게 간파하였다.

7.2. 문화ㆍ예술 교류

허일범, 《한국 불교 속의 티베트불교》
  • 고려시대 이후에 편찬된 의식집들에서 진언들을 실담문자나 티베트 문자로 표기하고, 관법차제(觀法次第)와 같은 수행법에서 범자로 된 종자자(種子字)를 명상에 채용한다.
  • 또한 사원의 건축물이나 법구류 등에서 범자나 티베트 문자로 된 진언종자들을 활용한다. 사원건축에 단청을 하고, 거기에 범자로 된 문양을 새겨 넣는 것은 티베트를 제외한 어떤 국가에도 없는 독특한 양식이다.
  • 인도나 티베트로부터 몽골 지역을 거쳐서 전파된 나가리·실담·란차·티베트·팍파문자 등은 우리 나라의 불교관련 의식집의 찬술 및 문자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 밀교경궤의 교설에 입각한 다면다방불(多面多方佛), 운주사에 조성된 대석합체불(大釋合體佛)과 쌍와불은 티베트 불상의 영향을 받은 듯하다.
  • 파일:img_623061_1-1.jpg 파일:11913895-907089732706899-8700741905112468050-n-2_1.jpg

    한국의 괘불과 티베트의 괴꾸.



    EBS 세계 견문록 아틀라스 《티베트 불교 최대 명절 '몬람'》
    라싸(Lhasa)의 여름 축제인 쇼뙨(zho ston) 때 산자락에 괴꾸를 펼쳐 전시하는 모습이 나온다.[98]

    티베트에는 비단으로 만든 대형 탕카(thang ka)[99]인 ‘괴꾸'(gos sku) 혹은 '괴꾸 첸모'(gos sku chen mo)가 있다. 괴꾸는 그 길이와 너비가 수 미터에서 수십 미터에 달하며, 특별한 종교적 행사 때 괴꾸 전용으로 지어진 사원의 거대한 벽이나 산, 언덕 자락에 전시된다.
    한국에도 괴꾸와 비슷한 형식의 불화(佛畵)인 괘불(掛佛)이 다수 존재하여 영산회(靈山會)같은 야외 의식에서 활용된다. 한국에서 괘불이 조성되기 시작한 시기는 분명치 않으나 임진왜란, 병자호란이 끝난 후 대규모 천도(薦度) 의식이 활발히 개최된 17세기부터 본격적으로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괘불도 1622년에 조성된 죽림사 세존괘불탱(보물 제1279호)이다.#
    한편 길이 419.5㎝, 너비 254.2㎝에 달하는 크기나 단독 좌상, 단독 입상 등의 형식으로 미루어 볼 때 고려 수월관음도가 괘불일 가능성이 있고, 따라서 고려시대부터 괘불이 조성되었을 것이라는 문명대 동국대 명예교수의 주장도 있다.#
    주수완 우석대 교수에 따르면 괘불이나 괴꾸같은 걸개그림 형식의 대형 불화는 특이하게 중국, 일본에는 존재하지 않고 한국과 티베트 불교권인 티베트, 몽골 등에서만 발견된다. 한국의 괘불이 티베트의 영향을 받았다는 직접적인 근거는 없지만, 완전히 무관하다고 단정짓기도 힘들며 티베트의 밀교 의식에 영향을 받아 제작되었을 가능성도 존재한다. #
  • 고려시대 때부터 제작된 금강저(金剛杵)와 금강령(金剛鈴)은 현대 한국불교에서는 자주 쓰이지 않지만, 밀교 경전에 의거한 의식이나 수행에서는 널리 쓰인다. 현재 한국에 전해지는 금강저는 티베트 계통과 당나라 계통 금강저를 응용한 한국의 독자적인 형태인 것이 대부분이다.
  • 파일:203346_207118_4313.jpg 파일:70436920.RjcLP5rL.jpg

티베트의 마니 꼴로(mani khor lo). ||
고려 명종 20년(1190)에 조성된 용문사 윤장대(輪藏臺)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현재 티베트인들의 신앙생활에서 널리 쓰이는 마니륜통(摩尼輪筒, mani khor lo)이다. 2000년대 넘어서 용문사의 윤장대와 그 형식은 다르지만, 전국의 여러 사찰에서 티베트의 것을 차용한 마니륜통을 제작하여 신앙심을 고취시키는 법구로 활용한다. 윤장대 내부에는 불경(佛經)이 들어있고, 마니륜통 내부에는 '옴 마니 밧메 훔' 등의 진언(眞言, mantra)이 적힌 두루마리가 들어있다. 글을 몰라 경전을 읽거나 진언을 외울 수 없어도 윤장대나 마니륜통을 돌리는 것만으로 똑같은 공덕을 얻을 수 있다고 알려져 있다. 붓다가 법륜(法輪)을 굴리는 행위에서 유래했다고 전해진다.

8. 지역별 보급

파일:Buddhist_sects.png
현대 불교 종파의 분포
티베트 불교
대승 불교
상좌부 불교

8.1. 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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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베트 풍으로 지은 한국의 첫 티베트 불교 사원
광성사 (부산 서구 아미동)

다음은 티베트인 승려가 상주하는 사찰 및 수행 단체 목록이다(단체명순).
단체명 링크 주소
광성사[100] 공식 사이트 | 파일:페이스북 아이콘.svg | 파일:다음 카페 아이콘.png | 파일:네이버 밴드 아이콘.svg | 파일:유튜브 아이콘.svg 부산 서구
삼학설행사(랍숨섀둡링)[101][102] 공식 사이트 | 파일:네이버 카페 아이콘.svg | 파일:페이스북 아이콘.svg | 파일:유튜브 아이콘.svg 서울 은평구
서울티벳불교문화센터(따시최링) 파일:네이버 카페 아이콘.svg | 파일:페이스북 아이콘.svg | 파일:유튜브 아이콘.svg 서울 강북구
캄따시링 파일:네이버 카페 아이콘.svg | 파일:네이버 블로그 아이콘.svg | 파일:페이스북 아이콘.svg | 파일:유튜브 아이콘.svg 서울 성북구
경기 양평군
팬대링(대구티벳불교센터) 파일:네이버 카페 아이콘.svg | 파일:네이버 밴드 아이콘.svg | 파일:유튜브 아이콘.svg 대구 달서구

이 외에 정기/비정기적인 법회와 수행모임을 개최하는 티베트 불교 관련 수행단체는 다음과 같다(단체명순).
단체명 링크
다르마타 코리아 파일:네이버 카페 아이콘.svg | 파일:페이스북 아이콘.svg | 파일:유튜브 아이콘.svg
딥까르 불교센터 코리아 공식 사이트 | 파일:네이버 카페 아이콘.svg | 파일:유튜브 아이콘.svg | 파일:페이스북 아이콘.svg | 파일:인스타그램 아이콘.svg
마이트리야 상가 공식 사이트 | 파일:네이버 카페 아이콘.svg | 파일:페이스북 아이콘.svg
세첸코리아 파일:네이버 카페 아이콘.svg | 파일:페이스북 아이콘.svg | 파일:유튜브 아이콘.svg | 파일:인스타그램 아이콘.svg
싯다르타즈 인텐트 코리아 파일:다음 카페 아이콘.png | 파일:페이스북 아이콘.svg
예셰 롱 코리아 파일:네이버 카페 아이콘.svg | 파일:페이스북 아이콘.svg | 파일:유튜브 아이콘.svg | 파일:인스타그램 아이콘.svg
텔가 코리아 파일:네이버 카페 아이콘.svg | 파일:페이스북 아이콘.svg | 파일:인스타그램 아이콘.svg | 파일:네이버 밴드 아이콘.svg
한국티벳명상원 파일:네이버 카페 아이콘.svg

다음은 티베트 불교 관련 국내 학술 단체들이다(단체명순).
단체명 링크
나란다불교학술원 공식 사이트 | 파일:네이버 카페 아이콘.svg | 파일:유튜브 아이콘.svg | 파일:네이버 밴드 아이콘.svg | 파일:카카오톡채널 아이콘.svg
인도티벳고전연구회 공식 사이트 | 파일:인스타그램 아이콘.svg | 파일:X Corp 아이콘(블랙).svg | 파일:카카오톡채널 아이콘.svg
티베트현밀교학연찬회[103] 파일:네이버 밴드 아이콘.svg | 파일:유튜브 아이콘.svg
티벳대장경역경원 공식 사이트
티벳불전번역원 관련 기사 # #
한국티베트문화학술연구원 관련 기사

티베트 불교 지도자들의 공식 한국어 소셜 미디어 채널은 다음과 같다.

불교 일반 및 티베트 불교를 배우고 싶은 이에게 불교학자 알렉산더 벌진(Alexander Berzin)의 《Study Buddhism》 한국어판 사이트는 유용한 창구가 될 수 있다. 세계적인 티베트 불교 전문가인 알렉산더 벌진 및 제14대 달라이 라마, 제7대 링 린뽀체, 제2대 첸샵 쎌콩 린뽀체 등 티베트 불교 주요 스승들의 저술과 녹취를 수록하여 전문성과 신뢰성을 갖추었고, 다양하고 방대한 기고문들이 주제별로 찾기 쉽게 분류되어 있으며, 또한 일반인을 대상으로 평이하게 서술되어 매우 추천할만한 사이트이다. 더불어 전세계 불교계의 승려, 수행자, 학자들을 인터뷰한 영상도 곳곳에 수록되어 있다(파일:유튜브 아이콘.svg Study Buddhism 유튜브 채널에서도 시청 가능하다). 다만 아직 홈페이지 전체가 한국어로 번역된 것은 아니며, 원본인 영어판 또한 계속 업데이트 중이라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티베트 불교를 믿는 재한 네팔인, 몽골계 한국인들을 위한 사찰도 있다. 이 중 서울네팔법당 텍첸사의 경우 한국인 불자들도 법회에 참여하고 있다.
  • 서울 네팔법당 텍첸사 (서울시 강남구 일원동)[106]
  • 동두천 네팔법당 용수사 (경기도 동두천시)[107]
  • 몽골 간단사 서울 포교당 (서울시 중구 광희동)

8.2. 티베트ㆍ중화권

과거 티베트 영토였던 티베트 자치구칭하이성, 쓰촨성, 간쑤성, 윈난성 일부 지역의 티베트인들, 내몽골 자치구몽골인들, 신장 위구르 자치구(주로 북부 중가리아 지역) 몽골 자치현의 오이라트인들, 그리고 동북 3성만주족들 위주로 티베트 불교를 믿는다. 이들 지역에 거주하는 한족들 중에도 티베트 불교도들이 다수 있다.

티베트는 이름대로 티베트 불교의 중심지였으나, 중국의 병합과 달라이 라마의 인도 망명, 이후 문화대혁명으로 큰 타격을 입었다. 현재까지 중국 내 티베트인들 650만 여명 대부분은 독실하게 티베트 불교를 믿는다. 사실상 티베트 지역의 국교. 그러나 티베트인들 중 10% 정도는 티베트의 고유 종교인 뵌교를 믿는다. 다만 현재의 뵌교는 불교를 신봉하는 지배층의 탄압을 피하고자 불교의 교리와 의식 등을 거의 그대로 습합하여 외부인은 구분하기 힘들 정도로 불교와 유사하게 변모하였다.

대만에는 티베트 불교도가 상당히 많다. 대만에 티베트 불교를 널리 포교한 스루스(釋如石) 스님은 대만 내 티베트 불교 전파 과정을 두 단계로 구분하였다. 1950년부터 1982년까지는 이른바 '전홍기(前弘期)'로, 이 기간 동안은 국민당 정부를 따라 대만으로 건너온 소수의 겔룩, 사캬 승려들 외에 대부분 한족 재가 불자들 위주로 티베트 불교를 신앙하였다. 밀법의 전수는 적었고, 전파 지역은 대만 북부에 한정되었다. 그 후 1982년부터 인도, 네팔에서 티베트 불교 승려들이 포교를 위해 대거 대만에 입국하고, 또한 미국에서 밀법을 수행했던 천젠민(陳健民)의 저작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면서 대만 전역에 티베트 불교 전(全) 종파의 가르침이 본격적으로 전래되었다. 鄭志明, 《藏傳佛教在台發展的現況與省思》 양정연, 《한 권으로 보는 세계불교사》<타이완 불교사>

현재 닝마, 까규, 사캬, 겔룩 등 티베트 불교 주요 4대 종파가 모두 대만에 진출한 상태이다. 사라 프레이저(Sarah E. Fraser) 하이델베르크대 교수가 2018년 연구에서 인용한 통계에 따르면 대만 내 티베트 불교 신자 수는 약 50만~60만여 명에 달한다. 이 중 정기적으로 활동하는 신자 수는 10만~20만여 명 정도이다. Sarah E. Fraser, 《Tibetan Buddhist Temples in Taiwan: An Exploration of Transnational Religious Architecture》 달라이 라마는 1997년, 2001년, 2009년 세 차례에 걸쳐 대만을 방문한 적이 있다.

8.3. 몽골ㆍ러시아권

8.3.1. 몽골

몽골 제국시절에 몽골의 종교였으나 제국이 쇠퇴하면서 몽골 내 티베트 불교도 쇠퇴하였다. 알탄 칸 대부터 다시 몽골인들의 종교가 되었다. 티베트어로 된 경전을 학습하고 티베트 승려와 거의 동일한 복식을 착용할 정도로 몽골과 티베트의 불교는 거의 차이가 없다. 몽골 승려들의 수준은 예전부터 우수하였는데, 제13대 달라이 라마가 몽골을 방문한 후 그 곳 학승들의 능숙한 논쟁 모습을 보고 큰 감명을 받은 일이 지금과 같은 길고 철저한 게쉬 학위 제도를 정립하게 된 계기가 될 정도였다. 안병남, 《티베트 불교의 사원 교육제도》

공산주의 시대에는 독재자 허를러깅 처이발상의 주도로 극심한 탄압을 받았지만[108] 탈공산화 후 완화되었다. 비록 공산 정권의 탄압을 받은 건 마찬가지지만 몽골 공산정권의 후원자인 소련은 문화대혁명의 광풍을 겪은 중국에 비하면 비교적 문화유산 파괴가 덜했기 때문에, 불교 관련 유산이 철저히 파괴되고 약탈 당한 티베트와는 달리 많은 경전과 유물이 따로 보관되어 상대적으로 피해가 적었다고 한다. 1990년대 몽골이 민주화되면서 탄압이 끝났고 오늘날 몽골에서 티베트 불교는 국민 다수가 믿는 국가적 종교가 되었다.

현재 몽골 인구의 약 60%가 불교도로 대부분 티베트 불교(주로 겔룩)를 믿으며, 간단 사원이 몽골 불교의 중심적인 사원이다. 소련이 붕괴된 1990년대 이후 몽골과 칼미키아 공화국, 부랴티아 공화국, 투바 공화국의 승려들이 남인도 카르나타카 주에 소재한 데뿡 사원의 고망 강원(Drepung Gomang Monastic University)[109]으로 유학을 오기 시작하여 현재는 2,000여 명의 몽골, 러시아 연방 출신 승려들이 고망 강원에서 정진 중이다. 개중에 게쉬 학위를 취득한 승려나 사원의 방장(方丈) 등 종단 고위직에 오른 승려도 상당 수 배출될 정도로 몽골 승려들의 자질은 우수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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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몽골 최대 규모 사원인 간등테크칠렌(Гандантэгчинлэн хийд) 외부전경
(아래) 사원 내부 26.5m 높이의 관세음보살상[110]

8.3.2. 러시아

몽골계 소수민족부랴트인, 투바인, 칼미크인 등이 주로 믿는다. 이들 중 티베트 불교 신도 인구는 약 70만~150만여 명 정도로 추산된다. # 2016년 기준으로 전체 인구 중 불교도의 비율은 투바 공화국 52.2%, 칼미키아 공화국 53.4%, 부랴티아 공화국 19.8%, 자바이칼 변경주 14.6%, 러시아 연방 0.6%이다. #

국가 무신론이 강요되던 소련 시절, 칼미크인 불교 지도자들은 티베트 불교가 무신론이라고 주장했으나, 소련 정부는 티베트 불교는 무신론이 아니라면서 이슬람이나 기독교보다 훨씬 더 심각한 수준의 박해를 가했다. 당시 소련 전국에 오직 2군데 사원[111]만이 허가 하에 존치되었을 정도였다.

소련이 붕괴한 후 러시아 정부에서는 과거의 종교 탄압을 사실상 중단했다. 러시아 정부에서 공인한 '전통 종교' 4개 중 하나로 지정되어[112] 정부 인사들과 불교 대표가 자주 만나는 등 사정이 많이 나아져 교세를 회복하고 있으며, 소수민족만의 종교가 아니라 영미권에서 티베트 불교 신자가 늘어나는 것처럼 소수민족 외 슬라브계 러시아인 신자도 조금씩 늘어나는 중이다. 예를 들어 연해주동슬라브인 인구가 95%가 넘는 지역이지만 이곳 블라디보스토크에도 까규 종파 계열의 티베트 불교 센터를 열었고 2020년에는 관광지인 독수리 전망대 근처에 10톤 규모의 불상을 신도들의 후원으로 설치하는 등# 교세를 각 지역으로 확장하고 있다.

달라이 라마1976년1991년 두 차례 러시아를 방문했다. 2004년에도 칼미키야 공화국 대통령 키르산 일륨지노프의 초청으로 방러하고자 하였으나 이 때는 중국 측의 반발로 무산되었다.
Dr. Andrey Terentyev, 《Tibet's Connection with Buddhism in Russia》(한글 자막 있음)
뗄로 린뽀체(Telo rinpoche), 《The Revival of Buddhism in Russia and Mongolia》
《The Revival of Buddhism in Kalmykia》

8.4. 히말라야권

8.4.1. 인도

인도 북부의 라다크, 시킴, 아루나찰프라데시 등 "소(小)티베트"라 일컬어지는 티베트계 지역 주민들과 중국의 탄압을 피해 망명한 10만 여명의 티베트 난민들이 주로 믿는다. 망명 이후 티베트인들은 티베트 현지의 주요 사원들을 본따 인도 각지에 새롭게 불교 사원들을 건립하여 티베트 불교의 명맥을 보전하는 한편, 인도 불교의 부흥에도 기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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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카르나타카의 데뿡 로셀 링(Drepung Losel Ling) 강원

8.4.2. 네팔

석가모니의 탄생지 룸비니(Lumbini)가 네팔에 있지만, 힌두교 인구가 전체 인구의 약 80%로 우위를 차지하며 불교 인구는 9~10% 정도에 불과하다. 네팔의 불교는 크게 티베트 불교, 네와르 불교, 테라와다(상좌부) 불교로 구성된다.

네팔은 티베트와 지리적으로 인접해있고 한 때 티베트의 지배를 받았던 적도 있다. 그 영향으로 셰르파(Sherpa)족 등 카트만두 계곡 근처 북부 고지대의 소수 민족들은 티베트 불교를 주로 믿는다. 중앙의 네와르(Newar)족은 힌두교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네와르 불교를 믿는다. 힌두교의 영향으로 네와르족에게는 그들만의 독특한 카스트 제도가 있다. 테라와다 불교도 소수지만 존재한다. 석가모니의 탄생지인 룸비니 인근은 성역화되어 전세계 불교 종파들이 세운 사원들이 밀집해있다.
네팔의 보다나트 대탑(Boudhanath stupa) 소개 영상

8.4.3. 부탄

사실상 부탄국교이다. 16세기에 샵둥 응아왕 남걜(zhabs drung ngag dbang rnam rgyal)이 이끄는 티베트 남부의 둑빠 까규 지파(支派)가 겔룩이 이끄는 티베트 중앙 정권과의 분쟁을 피해 부탄에 자리잡아 국교가 되었다. 현재도 부탄 불교의 주요 종파는 까규와 닝마이며, 두 종파를 하나처럼 생각하는 "까닝숭델(bka' rnying zung 'brel)" 개념이 널리 퍼져있다.

부탄 헌법에 따르면 5명의 고승인 롭뾘(slob dpon)들의 추천을 받아 부탄 국왕이 임명한 "제 켄뽀(Je Khenpo)"가 국사(國師)로서 부탄의 전체 불교 사원들을 이끌게 된다.

2022년 6월 21일 부탄 불교 최고 지도자인 제 켄뽀의 수계로 144명의 비구니가 탄생했다. 비록 부탄 불교 한정이지만, 이로써 티베트 불교권에서도 자체적인 비구니 계맥을 갖추게 되었다. 제 켄뽀 주석(主席) 사원인 슝 다창 사원은 공식 SNS를 통해 '부탄 수도인 파로 교외의 람탕카 사원에서 제 켄뽀인 툴쿠 직메 최다 스님이 계사(戒師)가 되어 직접 구족계를 수계했다'고 전했다. 이번 수계를 받은 비구니 스님들은 대부분 부탄 출신이지만, 일부는 인도나 영국 등 세계 각지에서 참가한 스님들도 있다. 이들은 비구스님들과 마찬가지로 동등한 교육과정을 거쳐 아사리나 승원장 같은 직위에 오를 수 있는 자격을 가지게 된다. 이번 수계는 부탄 왕실의 지원 하에 이루어졌으며, 특히 현 부탄 국왕의 어머니인 체링 양된 대비(大妃)가 2009년 설립한 '부탄 비구니 재단(Bhutan Nuns Foundation)'에서 여성 출가자의 지위 향상과 권리 보호를 위해 노력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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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0년대 부탄을 통일한 샵둥 응아왕 남걜

8.5. 서구ㆍ기타 전세계

테라와다 불교, 선불교와 더불어 세계적으로 가장 많이 알려진 불교 종파로, 전세계 불교 종파 가운데 가장 많은 해외 수행센터를 갖고 있다. 특히 서구에서 빠른 성장세를 보이고 있다.

북미, 유럽[113], 일본[114], 중남미[115], 동남아[116], 오세아니아 등지에 상당한 신자들이 있다. 심지어 아프리카에도 절이 있다.[117] 아프리카 불교도들의 따라보살 기도 영상[118]

제14대 달라이 라마(The 14th Dalai Lama), 제16대 까르마빠(The 16th Karmapa), 까루 린포체(Kalu Rinpoche), 딜고 켄체 린포체(Dilgo Kyentse Rinpoche), 소걀 린포체(Sogyal Rinpoche), 꺕제 송 린포체(Kyabje Zong Rinpoche), 라마 쇠빠(Lama Zopa) 린뽀체 등이 활발하게 포교활동을 벌이며 티베트 불교를 서방에 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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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프랑스 몽펠리에(Montpellier)에 위치한
티베트 불교 사원 레랍 링(Lerab Ling)

헐리우드 배우들 가운데 리처드 기어, 우마 서먼, 스티븐 시걸 등이 티베트 불교와 관련이 있다. 리처드 기어는 달라이 라마의 제자이고 한 때 출가를 결심했을 정도로 독실한 티베트 불교 신자이다. 인도 다람살라 등지에서 열리는 달라이 라마의 법회에서 리처드 기어의 모습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우마 서먼은 부친이 미국의 대표적인 티베트 불교학자인 컬럼비아대 교수 로버트 서먼(Robert Thurman)이다. 우마 서먼의 이름 중에 '우마(Uma)'란 퍼스트네임은 대승불교 사상인 '중관'을 뜻하는 티베트어이고 미들네임인 까루나(Karuna)는 '대비심'을 뜻하는 산스크리트어이다. 또한 서먼은 티벳하우스 US(티베트 망명정부의 연락사무소이자 문화원 격인 비영리단체) 이사로도 활동했다.

미니멀리즘 음악의 대가 필립 글래스도 티베트 불교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 자신을 티베트 불교도라고 규정하진 않았지만, 젊었을 적부터 티베트 불교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티벳하우스 US의 창설을 돕기도 했다. 또한 달라이 라마의 방미(訪美)를 기념하여 《Mad Rush》를 헌정하였고, 달라이 라마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 《Compassion in Exile》, 《쿤둔》의 OST를 제작하였다.

키아누 리브스는 티베트 스님의 환생을 다룬 영화 《리틀 부다》출연을 계기로 불교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네팔의 티베트 불교 사원에서 수개월 간 머물며 수행을 하기도 했다. 그는 "자신이 불교도는 아니지만 불교를 통해 행복할 수 있었다"고 말했고, 2022년 티벳하우스 US를 위한 자선 콘서트에도 출연하여 중국인들의 공분을 사기도 했다.

스티븐 시걸은 열렬한 티베트 불교도일 뿐만 아니라 심지어 1997년 닝마의 주요 지도자인 뻬놀(Penor) 린뽀체로부터 17세기 닝마의 뗄된이었던 충닥 도르제(Chungdrag Dorje)의 환생으로 인정받은 바 있다. 그러나 그의 환생자 신분에 대해서는 미국 불교계 내에 논란이 있다. 미국의 주요 불교 잡지 '트라이시클'(Tricycle)의 창립자 겸 편집자 헬렌 트워코프(Helen Tworkov)는 스티븐 시걸이 기부금으로 환생자 신분을 매수했다는 의혹을 제기하였다.

9. 사회 참여

9.1. 기후 위기 대응

지구 온난화 방지를 위한 달라이 라마의 메세지
《하나 밖에 없는, 유일한 우리들의 집》
《제14대 달라이 라마의 제26회 유엔 기후 변화 협약 당사국 총회(COP26) 메세지 - "미래는 우리 손에 달려 있습니다." 》
《2021년 제14대 달라이 라마와 기후 운동가들의 대담》

지난 수 년간 제14대 달라이 라마는 지구 온난화로 인한 환경 위기에 관심을 갖고 전인류적 대응과 노력을 호소해왔다. 그는 그레타 툰베리 등 전세계 기후 운동가, 학자, 언론인, 종교인, 정치인들과 함께 기후 위기에 관하여 대담을 갖고 해결책과 대안을 모색하였다.
제14대 달라이 라마, 프란츠 알트, 《단 하나뿐인 우리의 집》(민정희, 우석영 譯)
수잔 바우어-우, 툽텐 진파, 《그레타 툰베리와 달라이 라마의 대화》(고영아 譯)
제14대 달라이 라마, 패트릭 맥도넬,《친애하는 지구에게》(정윤희 譯)
Michael Buckley, ‎The Xivth Dalai Lama Tenzin Gyatso, 《This Fragile Planet: His Holiness the Dalai Lama on Environment》
John D. Dunne, Daniel Goleman, 《Ecology, Ethics, and Interdependence: The Dalai Lama in Conversation with Leading Thinkers on Climate Change》

달라이 라마는 2020년 글래스고에서 열린 COP26 유엔 기후 회의 메세지에서 전세계 정상들에게 매우 높은 기대를 갖고 있으며, 그들이 파리 기후 협정을 실천으로 옮기길 원한다고 말했다. 그는 "유엔은 이 (기후) 분야에 있어 더욱 활동적인 역할을 맡아야 한다"고 말했다. 또한 세계 정상들이 기대에 미치지 못하고 있냐는 질문에, "그들 거대 국가들은 생태에 더욱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나는 무기나 전쟁에 막대한 돈을 소비하는 거대 국가들이 그들의 자원을 기후 보전으로 돌리는 모습을 보았으면 좋겠다"고 답했다. 달라이 라마는 만약 현재 정당을 가입해야 한다면 "나는 녹색당에 가입하고 싶다. 그들의 사상은 매우 좋다"고도 말했다. #
저는 현재 직면한 기후 위기를 다룰 UN 기후변화 회의(COP26)가 스코틀랜드 글래스고에서 개최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기쁩니다.

지구 온난화는 긴급한 현실입니다. 우리 중 누구도 과거를 바꿀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 모두는 더 나은 미래를 위해 기여할 수 있는 위치에 있습니다. 참으로 우리는 우리 자신과 70억이 넘는 현생 인류를 위하여 모두의 평화롭고 안전한 삶의 영위를 보장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희망과 결단을 갖고 우리 자신의 삶과 이웃들의 삶을 돌봐야 합니다.

조상들은 지구를 비옥하고 풍족한 곳으로 보았고, 실로 그러하지만 무엇보다도 지구는 우리의 유일한 집입니다. 우리 자신 뿐 아니라 미래 세대, 그리고 이 행성을 공유하는 수많은 종(種)들을 위해 반드시 지구를 보호해야 합니다.

티베트 고원은 북극과 남극을 제외하고 가장 많은 눈과 얼음의 보유지로서 종종 "제3의 극(極)"이라 일컬어집니다. 티베트는 브라마푸트라, 갠지스, 인더스, 메콩, 살윈, 황하, 양쯔강 같은 세계 주요 강들의 수원지(水源地)입니다. 이 강들은 20억에 가까운 아시아인들에게 식수, 농업 용수, 수력 발전 등을 제공하는 삶의 원천입니다. 티베트에 있는 수많은 빙하들의 해빙, 강들의 댐 건설과 유역(流域) 변경, 광범위한 삼림 파괴는 한 지역의 생태적 방치가 어떻게 거의 모든 곳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전형적인 사례입니다.

이제 우리는 두려움으로 인해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과학적 이해에 기반하여 현실적으로 미래를 대처해야 합니다. 우리 행성의 거주자들은 한번도 상호의존적이 아니었던 적이 없습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행위는 동료 인간들 뿐 아니라 수많은 동식물 종들에게 영향을 줍니다.

인류는 지구를 파괴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유일한 생명체이지만, 지구를 보호할 수 있는 가장 큰 잠재력 또한 갖고 있습니다. 모두의 이익을 위해 전세계가 상호협력하는 차원에서 기후 변화 사태들을 대처해야 합니다. 하지만 또한 개인적인 차원에서 할 수 있는 일들도 해야 합니다. 비록 일상의 소소한 행위일지라도, 예를 들어 물을 사용하는 방식이나 더 이상 필요 없는 것들을 버리는 방식일지라도 그로 인한 결과를 초래합니다. 자연 환경을 돌보는 것을 일상의 한 부분으로 여기고 과학에서 알아야 할 것들을 배워야 합니다.

저는 기후 변화에 관하여 구체적으로 행동할 것을 요구하는 젊은 세대들의 모습을 보고 고무되었습니다. 이는 미래에 대한 희망을 줍니다. 과학에 귀를 기울이고, 그에 따라 행동해야 한다는 인식을 제고하는 그레타 툰베리 등 젊은 활동가들의 노력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들의 입장이 현실적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들을 지지해야 합니다.

저는 인류의 하나됨, 곧 모든 인간이 우리의 일부라는 생각을 염두에 두는 것이 중요하다고 곧잘 강조합니다. 지구 온난화와 기후 변화의 위험은 국경의 제약을 받지 않습니다. 그것은 우리 모두에게 영향을 줍니다.

우리 모두는 함께 이 위기를 직면하게 되었고, 따라서 위기의 결과를 억제하기 위해 연대와 협력의 정신으로 함께 행동하는 것이 절실합니다. 저는 우리 지도자들이 힘을 모아 협동하여 이 위기를 해결하고 변화의 시간표를 짤 것을 바라고 기도합니다. 우리는 더 안전하고, 더 푸르고, 더 행복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 행동해야 합니다.

저의 기도와 선한 발원을 담아

달라이 라마

2021년 10월 31일
《His Holiness the Dalai Lama’s Message to COP26》#

극심한 자연재해가 전 세계적으로 보고되는 빈도가 늘어남에 따라 달라이라마는 기후위기 영향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자는 공개 성명을 발표했다. 2023년 8월 11일 국제불교뉴스 전문매체인 '부디스트 도어 글로벌'은 달라이 라마 공식 사무국의 성명을 인용해 달라이 라마의 메시지를 전했다. # # # #
올해 우리는 세계 여러 곳에서 충격적인 일련의 자연재해를 목격했습니다. 홍수, 산불, 허리케인이 발생하여 재산과 자연 환경이 파괴되고 비극적인 인명 피해가 발생했습니다. 분명히 지구 온난화의 결과는 우리 모두에게 영향을 미칩니다.

오늘 아침 제가 만난 교육자 대표단에게도 말했듯이, 세계 각지에서 그러한 재난이 발생할 때마다 저는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들과, 그들을 돕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에게 위로를 표명하고 지원을 제공하려고 노력합니다.

최근 중국 북부와 일부 티베트 지역에서 발생한 홍수로 인명 피해가 발생하고 재산과 지역 생태계가 광범위하게 피해를 입었습니다. 목숨을 잃은 이들을 위해 기도하고 이 재난으로 피해를 입은 모든 이들에게 애도와 걱정을 표합니다. 우리 모두는 행복하기를 원하고 비극을 피하기를 원하는 동일한 인간입니다. 이 인류가 하나라는 맥락에서 우리 모두는 서로 돕고 지원할 책임이 있습니다. 이번 기회에도 저는 중국 국민과의 연대의 표시로 구호활동에 기부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저는 전 세계의 형제자매들에게 자연재해의 영향을 받는 모든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고 기후위기와 그 영향을 해결하기 위해 우리 각자가 할 수 있는 모든 조치를 취할 것을 간곡히 호소합니다.

저의 기도와 선한 발원을 담아.

달라이라마

2023년 8월 10일
《His Holiness’s Statement Regarding Recent Natural Disasters》(박영빈 譯) #

10. 오해

10.1. 밀교와 성(性)에 관한 오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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얍윰(yab yum)[119] 형상을 한 지금강불. 존재 내면의 남성적 에너지와 여성적 에너지의 통합을 상징한다.
대락(大樂)을 상징하는 남성 에너지와 불이(不二)의 지혜를 상징하는 여성 에너지의 결합을 통해 참된 본성을 자각할 수 있다.

후기 밀교 수행법 중에는 성에너지를 이용한 수행도 있으나 이를 '저급하다', '좌도(左道, left-handed) 밀교'라고 표현하는 것은 딴뜨리즘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과거 서구의 기독교적 편견(혹은 동양의 유교적 편견)에 해당한다. 밀교에 대한 이해가 축적된 현대에는 이미 불교의 철학적 개념에 대한 상징적, 은유적 표현으로 해석된다. 예를 들어 밀교의 부모불(혹은 쌍신불, 얍윰Yab-yum)은 지혜와 방편, 혹은 현상과 공성의 합일을 상징한다. 수행에 있어서도 실제 딴뜨릭 수행자 간의 직접적인 육체적 결합 대신 관상(觀想)[120]으로 대체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인도 후기밀교의 경우 전법스승인 아사리(阿梨)와 수행을 전수받기 위한 제자의 자격은 오계를 비롯해 보살계 뿐만 아니라 삼매야계와 같이 행위가 아닌 내면적 의식을 문제삼는 등 엄격한 계율에 의해 자격을 심사받으며, 밀교수행의 자격도 현교(顯敎)의 경론에 대해 해박한 지식과 시험을 거쳐야만 비로소 관정(灌頂)의식을 통해 밀교수행에 참여할 수 있다. 실제 인도의 밀교수행의 전통을 계승한 티벳사원의 현실도 기본적으로 이러한 원칙에 의해 수행이 이루어지며, 밀교의 관정의식과 입문의식에 동원되는 성과 관련된 도구들도 남존(男尊)의 보리심을 상징하기 위한 술이나, 여존(女尊)을 상징하는 염색된 물을 이용하는 등 인간의 실상(實相)을 불성(佛性)으로 관조하고 자각하기 위한 상징적 도구들이 사용되고 있다.
정성준, 《밀교와 성에 대한 이해》
사리자가 말했다.
“탐냄ㆍ성냄ㆍ어리석음을 벗어나는 것이 해탈을 이루는 것 아닙니까?”

천녀가 말했다.
“부처님께서 자만하는 사람들을 위해 ‘일체의 탐냄ㆍ성냄ㆍ어리석음을 벗어나는 것이 해탈’이라고 설한 것입니다. 자만을 완전히 벗어난 자들에게는 ‘일체의 탐냄ㆍ성냄ㆍ어리석음의 본성이 그대로 해탈’이라고 설합니다.”
《설무구칭경(유마힐경)》(장순용 譯)
통상적으로 우리를 한 가지 불만상태에서 또다른 불만상태로 몰아대는 것과 동일한 욕망 에너지가 딴뜨라의 연금술을 통해서 초월적인 희열과 지혜를 체험하는 것으로 변화된다. [...]

욕망의 에너지가 우리의 불만을 증가시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불만의 원인, 즉 실제의 본성에 대한 우리의 근본적인 무지를 없애는 방식으로 이용된다.

티베트의 딴뜨라불교에서는 이렇게 욕망의 에너지를 변화시키는 것을 다음과 같은 비유로 설명한다. 나무에서  생겨난다는 어떤 벌레들이 있다. 그들의 생애는 나무줄기 속 깊은 곳에서  부화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그 다음에는 자신들이 태어난 바로 그 나무를 먹으면서 자란다. 그와 마찬가지로 딴뜨라의 변화 수행을 통해서 욕망은 통찰적 지혜를 낳고 그  다음에 그 지혜는 그 자신을 태어나게 한 욕망을 포함해 우리 마음을 가리고 있는 부정적인 것들을 모두 없애버린다.

따라서 우리는 통상적인 욕망의 작용과 깨달은 이의 작용은 정반대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딴뜨라에서는 욕망에서 일어나는 희열의 체험이 마음을 확장시켜서 우리가 모든 제한을 극복할 수 있지만, 통상적으로 욕망의 대상과 접촉하는데서 오는 쾌락은 우리의 주의를 제한하고 더 강하고 더 좋은 쾌락에 사로잡히게 만든다.
라마 툽텐 예셰, 《딴뜨라 입문》(주민황 譯)

성문승에서는 대체로 번뇌를 억제하는 점진적인 방법을 통해 적정(寂靜)을 유지하고 번뇌의 소멸을 추구한다. 반면 대승의 바라밀승에 이르게 되면 《유마경》등에서 확인할 수 있듯 보살은 번뇌의 본성과 보리(菩提)의 본성이 모두 청정하고 공(空)하다는 불이(不二)의 견지(見地)에서 번뇌를 회피하지 않고 번뇌를 방편으로 활용하기 시작한다. 번뇌를 방편으로 활용하는 과정에서 번뇌는 자연히 소멸된다. 성문과 달리 보살에게는 번뇌로 인해 남겨진 습기(習氣) 혹은 소지장(所知障)의 제거가 주된 관건이며, 소지장을 제거하는 과정에서 번뇌장 역시 함께 제거된다.

더 나아가 대승의 금강승에 이르러서는 독초(毒草)를 이용해 효능 좋은 약을 만들듯이 더욱 적극적으로 번뇌를 활용하여 빠르고 효과적으로 수행의 결과를 얻는 특별한 방식을 따른다. 번뇌를 방편으로 활용하는 점은 바라밀승과 금강승이 비슷하지만, 번뇌 자체가 곧 그대로 방편이 되는 것은 금강승만의 특징이다.[121] 이러한 금강승의 급진적ㆍ전복적 발상은 고통받는 일체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최대한 신속히 성불(成佛)하기를 바라는 절실한 보리심의 발로에 다름 아니다. 보리심이 없다면 금강승을 수행할 이유도 없고 수행해서도 안되며, 도리어 타락하여 막중한 악업을 지을 수도 있다.

여전히 바라밀승과 마찬가지로 금강승에서도 번뇌는 고통의 원인이기에 극복의 대상이며, 최종적으로 "나무에서 생겨난 벌레가 나무를 갉아먹듯" 번뇌에서 얻는 에너지는 수행을 통해 번뇌 그 자체를 제거하는데 이용된다. 성적 요가 수행시 가장 미세한 의식을 활용해 공성을 깨닫게 되면 번뇌와 지혜라는 두 상반된 마음은 함께 공존할 수 없어 공성을 깨닫는 즉시 성욕을 비롯한 모든 번뇌는 사라지게 된다. 반대로 통상적인 성적 행위는 끝없는 갈망과 불만, 흐릿하고 둔한 의식 상태를 초래하기 마련이다. 이처럼 금강승에서는 단순한 성적 희열만을 깨달음과 동일시하지 않는다.

금강승의 성적 요가는 범속한 성행위와는 다르다. 성적 요가를 수행하려면 바라밀승과 금강승의 공통된 도(道)인 보리심과 공성을 인식하는 지혜를 기반으로 대부분의 거친 번뇌를 제거하고 미세한 에너지를 자유자재로 운용할 수 있는 수준에 이르러야 한다.
  • 보리심의 동기와 공성 인식, 금강승의 스승에 대한 믿음을 기반으로
  • 스승의 지도와 별해탈계ㆍ보살계ㆍ싸마야계의 통제 하에
  • 딴뜨라의 상징과 비유, 철학, 기법, 내적 논리에 관한 이론적 지식과 고도의 집중력을 갖추고
  • 정교한 의식과 명상, 신체 에너지 운용을 거쳐 이루어지는

금강승의 번뇌 활용은 대승 유가행(瑜伽行)의 정점으로서 마치 독성 있는 원재료로부터 유효 성분만을 추출하여 정제하는 정밀한 제약(製藥) 공정과도 같다. 번뇌는 중생의 가장 강력한 적이지만, 동시에 번뇌로 작용하는 의식 또한 의식의 일종이므로 명료함이라는 특성과 인지라는 작용을 갖고 있다. 따라서 금강승 수행을 통해 번뇌로 작용하는 오염된 의식으로부터 오염만 제거할 수 있다면, 이는 즉시 공성을 인식하는 강력한 의식으로 전환되어 공성을 인식하는 힘은 더욱 배가(倍加)될 수 있다. 단, 주의할 점은 금강승의 번뇌론이 결코 도덕윤리의 전적인 폐기나 아노미(anomie), 막행막식(莫行莫食)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보리심을 바탕으로 성문승의 별해탈계ㆍ바라밀승의 보살계ㆍ금강승의 싸마야계 모두를 "목숨을 바치는 한이 있어도" 준수할 것을 요구하는 금강승의 윤리ㆍ계율관은 오히려 다른 승(乘)에 비해 더욱 확장ㆍ심화된 다층적 규범 윤리를 제시하고 있다.

금강승의 입문은 매우 제한되어 있지만, 그 중에서도 무상 요가 딴뜨라의 성적 요가는 극소수의 자격을 갖춘 최상근기의 수행자-"생각 만으로 땅에 떨어진 열매를 다시 가지에 붙게 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비유할 정도로 초월적인 능력을 갖춘-에게만 허용된다. 따라서 출재가를 막론하고 실제로 성적 요가가 행해지는 경우는 지극히 드물며 절대 다수는 관상(觀想)으로 대체된다.

출가한 사미, 사미니나 비구, 비구니는 자격을 갖춘 사람일지라도 직접적인 수행을 하지 않는다. 일체 음행(淫行)을 금하는 출가계를 수지(受持)하였기 때문이다. 아티샤가 《보리도등론》에서 밝혔듯 무상요가를 통해 얻는 공덕보다 출가의 공덕이 더욱 크고, 또한 만일 구족계를 수지한 승려가 성적 요가를 수행할 경우 바라이죄[122]를 범하여 매우 엄중한 과보를 받게 되므로 수행을 성취할 수 없음은 물론이고 지옥에 떨어지는 원인을 얻게 된다. 대신 비구, 비구니 같은 범행자(梵行者)는 직접적인 육체적 결합 대신 관상으로 대체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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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의 다끼니(dakini, 空行母) 본존인
바즈라요기니(Vajrayogini)
여성은 하늘이며, 여성은 법(dharma)이다.
여성은 실로 가장 수승한 고행(tapas)이다.
여성은 붓다이며, 여성은 승가이고, 여성은 반야바라밀이다.
《찬다마하로샤나 탄트라, ⅷ: 29-30》
폴 윌리엄스, 앤서니 트라이브, 알렉산더 윈, 《인도불교사상(개정증보판)》(안성두, 방정란 譯)

금강승에서 여성을 단순히 성력의 심볼로만 취급한다는 주장도 온당치 못하다. 비록 금강승 전통에서 여성이 갖는 실질적인 지위와 역할에 관해 논쟁의 여지가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라밀승과 뚜렷이 대비되는 여성성의 긍정과 여성 수행자의 진취적 면모를 금강승에서 발견할 수 있다는 점은 부정하기 어려운 사실이다. 금강승에서는 성별에 따른 차별 없이 남녀 모두 동등한 수행자로 취급되며, 때로는 여성이 스승이 되어 남성 수행자를 지도하는 등 금강승 수행자로서의 여성은 능동적이고 주체적인 위상을 차지하고 있다. 또한 금강승의 계율인 사마야(samaya)에서는 여성을 비하하거나 무시하는 행위를 엄격히 금하고 있다.

미란다 쇼(Miranda Shaw) 리치몬드대 교수는 미란다 쇼,《열정적 깨달음: 딴뜨릭 불교의 여성들》(조승미 譯)에서 딴뜨릭 불교는 대승 불교의 윤리적, 철학적 원칙을 함께하지만, 상징과 의식 분야에서 친밀감과 성(性), 젠더와 체현을 해탈의 길에 포함시키는 특징을 보인다고 말하였다. 남녀가 나란히 등장하는 패턴은 남성과 여성이 착취하거나 강제하지 않고 서로 일깨워주는 관계를 창조할 수 있다는 믿음과 숭고한 이상을 나타낸다.

여성과 여성의 가르침이 등장하고 여성의 에너지와 영적 능력을 인정하는 것이 딴뜨릭 종교성의 특징이다. 딴뜨릭 불교의 여성들은 격렬한 지혜의 화염 속에서 즐겁게 춤추며 태연히 번뇌의 시체를 밟는 거침없고 대담한 모습을 보인다. 그녀들은 가부장적인 제약을 받지 않는 열정적이고 자유로우며 깨달은 여성들이었다.

리타 그로스(Rita Gross) 위스콘신대 교수 또한 그녀의 저서 리타 그로스,《불교 페미니즘: 가부장제 이후의 불교》(옥복연 譯)에서 금강승 불교만큼 여성의 정신적 발달과 성숙에 유리한 종교를 찾기 힘들다고 강조하였다. 그로스는 불교 전반에 걸친 남성 중심적 관행과 가부장성, 그리고 비구니 승단 없이 사미니 승단만 존재하는 티베트 불교 교단 내의 열악한 여성수행자의 지위에 대해 구체적이고 세밀하게 비판하였다.[123]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타 그로스는 티베트의 금강승 불교가 다른 어떤 불교 분파보다 여성성을 중시하고, 뛰어난 여성 스승들이 많이 존재하며, 수행에 필수적인 여성 상징들이 발달해 있기 때문에 불교의 가부장성을 극복하고 불교를 성평등적으로 재구축하는데 매우 유용한 자원이 될 수 있다고 평가했다. 참고로 현대 티베트 불교 여성 수행자들의 면모는 미카엘라 하스, 《다키니 파워》(김영란, 장윤정 譯), 비키 메켄지, 《나는 여성의 몸으로 붓다가 되리라》(세등 譯) 등에서 확인할 수 있다.

10.1.1. 논란

티베트의 금강승 불교가 여성성을 중시하고 다수의 뛰어난 여성 수행자들을 배출하였지만, 1990년대 중반부터 페미니스트 여성 학자들 사이에서는 금강승의 성적 요가가 여성에게 능력을 부여하는지 반대로 여성을 착취하는지 여부를 두고 서로 다른 의견이 있었다. 특히 티베트 불교가 현대에 이르러 북미, 유럽 등 서구 사회에 널리 전파되면서 문화적 차이와 금강승의 폐쇄성으로 인해 많은 오해와 논란이 야기되었다.

성적 요가의 효용을 인정하면서도 성적 요가의 실천을 엄격히 제한했던 겔룩과는 달리 닝마, 까규 등 금강승 수행을 적극적으로 실천하는 종파들은 성적 요가 수행에 있어서도 상대적으로 관대한 편이었다. 티베트 불교가 서구에 도입되던 초창기에 히피(Hippie) 문화와 68운동의 열풍에 힘입어 서구 사회에 널리 알려진 티베트 불교 종파도 주로 금강승 수행을 강조하는 닝마, 까규였다.

서구 사회 포교에 나섰던 재가수행자 스승들 중에는 자신의 서양인 제자에게 성적 요가를 함께 수행할 '영적 배우자' 혹은 '비밀 배우자'인 쌍윰(gsang yum)이 되어줄 것을 제안하는 경우가 있었다. 개중에는 스승과 원만한 동반자 관계를 맺는 제자도 있었지만, 성적 착취의 대상이 되었다며 후회하고 스승을 비난하거나, 수행 공동체 내에서 배척당하고 가쉽의 대상으로 전락하는 제자들도 종종 있었다.

홀리 게일리(Holly Gayley) 콜로라도대 교수는 이러한 문제의 배경에 서구인들의 티베트 불교에 대한 환상과 문화적 차이, 금강승의 폐쇄성으로 인한 정보 부족이 있다고 보았다. 오늘날 금강승 관련 유물이 박물관에 전시되고 금강승 서적이 서점의 베스트셀러 항목에 오르는 등 금강승은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대중에게 널리 공개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딴뜨라 문헌 일부는 번역이나 열람이 금지될 정도로 금강승 교의(敎義)의 공개에는 많은 제약이 따른다. 금강승의 계율인 싸마야에서 금강승을 수행할 자격을 갖추지 못한 사람들에게 금강승의 가르침을 공개하는 것을 엄격히 금하고 있기 때문이다. 밀교 경전에서는 만약 자격을 갖추지 못한 자에게 금강승의 가르침을 함부로 전할 경우 스승과 제자 모두 심각한 해를 입을 수 있다고 경고한다.
Holly Gayley, 《Revisiting the Secret Consort (gsang yum) in Tibetan Buddhism》

2000년대 미투 운동의 발흥과 북미, 유럽, 인도 등에서 발생한 티베트 불교 지도자들의 잇단 성추문으로 인해 금강승의 교리도 다시 조명받기 시작했다. 일련의 성 스캔들은 종파를 불문하고 발생하였으며, 성적 요가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경우는 드물었다.[124] 그러나 구루 요가, 싸마야(Samaya)계, 청정 인식같은 여타의 금강승 교리가 왜곡되고 변질되어 사태가 악화된 측면이 있다.

금강승에는 스승을 비롯한 일체 대상을 청정하고 원만한 본성으로 인식하는 청정 인식(dag snang)이란 가르침이 있다. 진정한 청정 인식은 참된 진리의 세계, 진여실상(眞如實相)을 인식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청정 인식이 맹목적인 도그마로 변질되면서 스승의 부적절한 언행까지도 일종의 "방편(Skt: upaya)" 혹은 파격적인 방식으로 깨달음을 얻게 하는 “미친 지혜(Tib: ye shes ’chol ba)"로 정당화되었고, 계율, 자비와 같은 불교의 다른 주요한 가치들이 실종되면서 파괴적인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다.[125]

이와 관련하여 독일 루트비히 막시밀리안스 대학의 안네 이리스 미리암 안더스(Anne Iris Miriam Anders)는 불교 단체의 피해자들을 대상으로 청정 인식이나 업의 정화(karma purification)와 같은 금강승의 개념이 신체적, 심리적, 경제적 착취를 정당화하는데 이용되었고, 스승의 가피를 구하는 금강승의 구루 요가(Guru Yoga)는 자기 책임을 방기(放棄)하고 스승에게 의존하는 성향을 강화시켰다고 분석하였다.
Anne Iris Miriam Anders, 《Silencing and Oblivion of Psychological Trauma, Its Unconscious Aspects, and Their Impact on the Inflation of Vajrayāna. An Analysis of Cross-Group Dynamics and Recent Developments in Buddhist Groups Based on Qualitative Data》
당신은 이 상황을 외부에 공개해야 합니다. 신문에 출판하여 스승들의 이름을 언급함으로써 이들이 법을 가르치면서도 오히려 제멋대로 행동한다는 것을 알리십시오. 이런 상황을 널리 알려야 합니다. 이를 공개하는 것이 약간의 도움과 이익을 가져올 수 있지만, 그 밖에 우리의 설명은 이런 악행을 막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당신이 알아야 할 것은 이렇습니다. 위선적이고 거짓된 스승의 경우 그들의 이름을 공개하고, 마지막으로 필요하다면 경찰에 신고해 처리해야 합니다. 미국에서는 일부가 체포되었고 대만에서도 아마 체포될 사람이 몇몇 있을 것입니다. 그들은 반드시 법적 제재를 받아야 합니다.

이처럼 교리를 가르치는 소수의 ‘라마’라는 직함을 다는 사람들이 그 악행이 발각될 때, 이런 상황은 세간의 이목을 끌지만, 이것이 법(부처님의 가르침)에 해를 끼칠까 걱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지금 수치스럽게 여겨지는 교사는 소수에 불과합니다. 그들은 부처의 가르침을 손상시킬 수 없습니다. 악행이 드러난 이 스승들은 부처의 가르침을 해할 수 없습니다. 저는 자신 있게 말했습니다.
제14대 달라이 라마, 티베트인들과 대만인들을 위한 강연에서#

티베트 불교 교단 내 성적 남용이 이슈화되면서 티베트 불교계 지도자들도 이에 관한 입장을 표명하였다. 제14대 달라이 라마는 불교 교단 내부의 비윤리적인 행동을 지속적으로 비판해왔다. 그는 1993년 서방 불교 교사들을 위한 네트워크가 참석한 학회에서 서양의 일부 티베트 불교 라마들과 선불교 교사들에 의해 심한 학대가 자행되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학대하는 영적 교사들이 그들의 난폭한 행동을 멈추지 않는다면 제자들은 학대를 공론화하고, 필요한 경우에는 경찰에 신고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또한 몇 년 후 티베트인들과 대만인들이 참석한 강연에서도 다시 한 번 같은 조언을 언급했다.# 2018년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달라이 라마는 성학대 피해자들과 면담을 갖고 "불교 지도자들의 성학대를 25년 전부터 알고 있었다"면서 학대에 연루된 지도자들이 부처의 가르침에 대해 전혀 신경쓰지 않는다고 비판하였다. #

여성 환생자 스승인 칸드로 린뽀체는 상식과 계율에 의거하여 판단하고, 의문스런 사안에 대해 적극적으로 질문하고 조사할 것을 권장했다. # 밍규르 린뽀체는 신체적ㆍ성적ㆍ심리적 학대는 가르침의 수단이 될 수 없으며, 수행 공동체 내부의 심각한 윤리적 위반은 공개되어야 하고 만일 내부에서 해결할 수 없으면 외부에 알릴 것을 권고했다. #

일련의 사태로 인해 금강승의 가르침이 잘못 이해되는 것을 우려하는 스승들도 있었다. 종사르 켄체 린뽀체는 피해자들의 입장에 공감을 표하는 한편, SNS와 공개 대담을 통해 현대 서구인들의 금강승에 대한 오해를 불식시키고자 노력했다. 아래는 2018년 프랑스 몽펠리에 레랍 링(Lerab ling)에서 열린 대담의 요약문이다.
금강승이 비밀스럽게 전수되는 이유는 기괴하고 이상해서가 아닌, 반대로 너무나 심오하고 소중한 가르침이기 때문이다. 인도에서 금강승은 스승과 제자 간 일대일로 은밀히 전수되는 가르침이었지만 티벳으로 전해지며 공개적인 의례로 변형된 부분이 있다. 금강승의 상징, 의례, 기물 등으로 인해 컬트(cult)로 오해받기도 하고 사성제, 사법인, 공성, 보리심 같은 가르침이 안타깝게도 뒷전으로 밀려날 때도 있었다.

금강승은 불교의 팔만 사천 가르침 중 하나이며 굳이 금강승을 선택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만일 금강승에 입문한다면 먼저 금강승에서의 스승의 의미와 스승-제자 관계가 여타 가르침과 다름을 알아야 한다. 금강승의 스승을 선택할 때는 먼저 반드시 스승의 자격을 살피는 과정을 거친다. 스승이 될 인물을 관찰하는 기간은 정해진 기한이 없다. 스승의 자격을 검증할 때는 분석과 회의, 의구심을 총동원하여 매우 신중한 검증을 거쳐야 한다. 만일 다른 요인으로 인해 스승의 자격을 검증하는데 어려움이 있다면, 그것은 검증 대상인 인물과 자신 간에 스승과 제자의 인연이 없거나 아직 인연이 무르익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스승을 찾는 것은 매우 복잡한 문제다.

일단 금강승의 스승으로 모시기로 서약한 후에는 스승에게 헌신하고 그의 모든 행위를 깨달은 행위로 여겨야 한다. 이는 마치 위험한 절벽을 처음 오를 때 숙련된 가이드의 지시에 전적으로 의지하는 것과 같다. 만일 스승에 대한 헌신과 청정 인식이 없다면, 제자의 이분법적인 마음은 끊임없이 스승에게서 결점과 결점 아닌 것을 찾아내고 그것을 수정하려 할 것이다. 또한 스승에게 헌신하고 복종한다는 것은 자신의 에고(ego)를 제거하기 위함이다. 만일 에고를 제거하지 못하는 가르침이라면 그것은 또 하나의 영적 물질주의(spritual materialism)에 불과하다.

그러나 스승의 모든 행위를 깨달은 행위로 본다고 하여 곧 스승이 아무 행위나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것은 아니다. 금강승에서는 스승에 대한 헌신 뿐 아니라 제자에 대한 헌신도 중요하다. 진정한 금강승의 스승에게 제자란 친자녀 이상의 존재이고, 제자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스승에게도 엄청난 위험과 부담을 감수하는 일이다. 또한 아무리 높은 깨달음을 얻은 스승이라도 그의 행위는 업과 인과의 법칙에서 벗어날 수 없다. 스승은 지혜로써 모든 행위를 방편으로 활용할 수 있고, 바로 그러한 다양한 방편이 금강승의 강점이기도 하다.

금강승의 방편 중 하나인 구루 요가는 세간의 오해와 달리 스스로를 의지하라는 석가모니의 가르침과 일치한다. 스승에는 외(外), 내(內), 밀(密)의 스승이 있는데 스승으로 섬기는 인물은 외적 스승에 해당한다. 구루 요가에서는 최종 단계에 외적 스승이 제자에게 흡수되어 스승과 제자가 불가분(不可分)으로 하나되는 관상(觀想)을 한다. 이는 내적, 밀적 스승이자 진정한 의미의 스승인 제자의 참된 본성을 깨닫는 과정이며 이 때 외적 스승은 본성을 깨닫는데 도움을 주는 역할을 한다.

"미친 지혜(ye shes ’chol ba)"는 남을 때리고 미친 짓을 할 수 있는 자격증 같은 것이 아니다. 미친 지혜 역시 에고에 반(反)하는 수행의 방식 중 하나이다. '미쳤다'라는 것은 정상에서 벗어남, 초월함을 의미한다. 마치 아늑한 러그(rug)에 익숙해져 있는 사람에게 의도적으로 러그를 치워버리는 것과 같다. 많은 사람들은 편안하고 안락한 삶을 누리며 마음챙김 명상을 하고 "불교"를 믿는 정상적인 영역에 머물지만, 그러나 불교적인 맥락에서 보면 그들이 진정으로 영적인 인물이라고는 볼 수 없다.

스승의 모든 행위를 깨달은 행위나 방편으로 보는 것은 맹목적일 수 있고, 만일 그렇게 보지 않으면 싸마야를 어기는 것이 되어 딜레마처럼 느껴질 수 있겠지만 사실 이는 일종의 축복이다. "미친 지혜"와 마찬가지로 정상에서 의도적으로 벗어나는 전위적인(avant-garde) 방식이다. 싸마야계는 다른 계에 비해 복구하기도 훨씬 쉽다. 우리 본성이 본래 청정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준비되지 않은 제자에게 스승이 비윤리적인 행위를 방편으로 쓰는 것은 매우 잘못된 것이다. 금강승의 싸마야계를 받으려고 너무 서둘러서는 안된다. 먼저 성문승(소승), 대승의 가르침부터 익힐 필요가 있다.

구루(Guru)를 투표와 같은 민주적인 방식으로 선출해야 된다는 둥 금강승의 전통을 자기 입맛대로 바꾸려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것은 자기중심적인 발상이지 자비로운 방식이 아니다. 프랑스 출신 작곡가 비제(Bizet)의 곡에 자기 취향대로 폭포 소리, 새 지저귀는 소리, 비 내리는 소리, 천둥 소리들을 추가하다보면 점점 원래 비제의 곡은 잊혀지고 나중에는 캘리포니아에서 폭포소리로 뒤덮힌 프랑스인 비제의 곡을 배우고 있을지도 모른다.
Dzongsar Jamyang Khyentse Rinpoche, 《Vajrayana Buddhism in the West: The Challenges and Misunderstandings of our Times》

2021년 종사르 켄체 린포체는 2010년대 금강승 구루 관련 스캔들로 야기된 금강승에 대한 오해를 불식시키기 위해 Dzongsar Jamyang Khyentse,《Poison is Medicine:Clarifying the Vajrayana》라는 책을 출간하였다. 이 책은 상기한 레랍 링에서의 대담을 포함하여 2018년 초 베를린, 파리, 런던, 레랍 링에 위치한 릭빠 센터에서의 대담들을 기반으로 저술되었다. 저자가 이끄는 수행 단체 '싯다르타즈 인텐트(Siddharta's Intent)' 홈페이지에서 무료로 ePUB, PDF 파일 양식의 전문을 다운로드 받을 수 있으며, 관련 질문을 보낼 수 있는 메일 주소도 함께 공개되어 있다.

10.2. 승려의 독신에 관한 오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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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가 승려 재가 수행자 응악빠

티베트 불교를 대처승을 허용하는 불교라고 오해하는 경우가 있으나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사실이 아니다. 티베트 불교의 최대 종파인 겔룩을 비롯하여 닝마, 까규, 사캬 등 모든 종파의 출가계를 받은 승려는 독신을 지키는 청정 비구이다. 또한 티베트 불교에는 재가 수행자인 응악빠/응악마보다 출가 수행자인 승려의 수가 훨씬 많다.

출가 수행자, 즉 사미/사미니인 게출빠(dge tshul pa, 남성)/게출마(dge tshul ma, 여성)나 비구/비구니인 겔롱빠(dge slong pa, 남성)/겔롱마(dge slong ma, 여성)는 일체 음행을 금하는 출가계에 의거하여 결혼을 할 수 없고 성관계도 당연히 가질 수 없다. 승려의 경우 무상요가 딴뜨라 수행 가운데 하나인 성적 요가도 직접적인 결합 대신 관상(觀想)으로 대체된다. 따라서 티베트 불교에는 출가계를 받았음에도 결혼한 이른바 '대처승'은 없다. 만일 승려가 결혼을 원한다면 다른 불교 교단과 마찬가지로 출가계를 환계(還戒)하고 환속하는 절차를 거쳐야 한다. 티베트 불교 비중의 60% 이상을 차지하는 최대 종파인 겔룩은 계율을 특히 강조하여 사원 구성원 절대 다수가 비구계나 사미(니)계를 받은 출가 수행자다.

티베트 불교에는 재가 수행자인 요기(yogi), 요기니(yogini)들이 일부 존재하지만, 티베트 불교의 기반은 다른 불교 종파와 마찬가지로 승원(僧院, monastery) 중심의 출가불교라고 할 수 있다. 쫑카빠는 《보리도차제광론》에서 경론에 의거하여 재가자의 허물과 출가자의 공덕에 대해 분명히 밝혔다. 쫑카빠는 세속에서 수행하기 어렵고 출가의 공덕이 크기 때문에 재가자는 출가자가 되기를 발원해야 한다고 말하였다. 바라밀승은 물론 금강승을 수행하여 일체종지(一切種智)를 이루는데도 출가자가 되는 것이 최상의 선택이다. 또한 쫑카빠는 별해탈계, 보살계, 금강승계 등 삼종율의(三種律儀)에 있어서 별해탈계가 부처의 가르침의 근본이므로 별해탈계를 존중해야 한다고 말했다.

계율 뿐 아니라 의식, 예법, 복식 등에 있어서도 출가 수행자와 재가 수행자의 구분이 있다. 일반적으로 인도 불교 전통에 따라 티베트 불교의 재가 수행자는 머리를 기르고 백색 의복을 입지만, 출가 수행자는 삭발하고 사프란(saffron)색 가사를 입는다.[126] 하지만 때로 복식을 명확히 구분하지 않아 혼동을 주는 경우도 있어 개선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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닝마에는 일찍이 출가 수행자 전승과 재가 수행자 전승이 공존했다.

출가 승려와는 별개로 닝마 등 일부 종파에는 대승불교의 재가 수행자 전통을 계승한 응악빠(sngags pa, 남성)/응악마(sngags ma, 여성)라는 재가 수행자들이 소수 존재한다. 대승 불교는 재가자 또한 출가자와 동등한 수준의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고 천명하였다. 대승 불교의 이상적 인간상인 보살은 대부분의 도상(iconography)에서 천신(天神)의 복식을 입은 재가자로 묘사되며, 대승 경전의 도입부에서도 성문 승가와 별도의 집단인 보살 승가 혹은 보살중(菩薩衆)으로 등장한다. 이들 보살 출가자 및 재가자들은 성문의 출가자들과 유기적인 관계 속에서 교단을 지탱하는 주요한 역할을 수행한다.

인도의 마하싯다(mahasiddha)와 빤디따(pandita) 중에는 출가자 뿐만 아니라 재가자도 존재하며[127] 티베트의 빠드마삼바와, 예세 초겔, 돔뙨빠, 밀라레빠 등도 불보살의 과위를 성취한 재가자 출신의 성현으로 여겨진다. 특히 불교 딴뜨리즘의 경우 요기니 딴뜨라(yogini tantra)의 등장 이후 승원 외부의 재가자 요기, 요기니들 중심으로 딴뜨릭 수행이 성행했으며, 출재가자 여부와 신분 계급의 차이에 상관없이 누구나 수행을 통해 밀교의 성취자인 싯다(siddha)가 될 수 있었다. 최경아, 《인도초기대승의 수행문화 -출가보살과 재가보살의 기원과 전개》 안성두, 《대승경전 찬술의 배경과 과정》

재가 수행자인 응악빠/응악마는 밀교 수행자로서 밀교계를 받고 그들의 사원에서 각종 의식을 집전하며 수행에 전념하므로 일반적인 세속의 재가 불자와는 구별된다. 이들은 결혼을 하고 가정을 가질 수 있다. 응악빠에는 혈통을 통해 대(代)를 거쳐 이어지는 전승과 법맥의 전수를 통해 이어지는 전승 두 종류가 있다. 사캬의 수장인 사캬 티진(sa skya khri 'dzin)의 직위도 쾬(Khon)족 혈통에 의해 계승되는 응악빠의 일종이다.

10.3. 육식에 관한 오해

티베트는 척박한 자연환경 때문에 농경보다는 목축이 주를 이루었다. 식생활도 보리같은 곡물과 육류, 유제품 위주이며 여기에 차(茶)를 더하여 부족한 비타민 등을 보충한다. 농작물을 구하기 힘든 티베트 민족에게 육식은 불가피한 생존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128] 이러한 티베트 민족의 식습관을 두고 육식을 기피하는 동아시아 불교권의 불자들은 혹 육식이 불교의 계율을 어기는 것은 아닌지 의문을 표할 때가 있다.

1. 계율의 관점에서 본 육식

동아시아 불교권의 통념과 달리 불교 율장(律藏)에서는 육식을 제한적으로 허용한다. 티베트 불교에서 따르는 근본설일체유부 계통의 《율경근본율(Vinayasūtra) 》이나 동아시아 불교에서 따르는 법장부 계통의 《사분율(四分律)》, 남방 상좌부 불교의 《위나야 삐따까(Vinaya Piṭaka)》 등은 모두 '삼종정육(三種淨肉)'과 같은 예외 사항을 두어 육식을 제한적으로 허용한다. 이 가운데 채식ㆍ재식(齋食) 문화의 영향을 받은 동아시아 불교에서는 율장의 별해탈계와는 별도로 중국에서 찬술된 경전인 《범망경(梵網經)》의 대승계를 통해 육식 금지를 계율로 확정지었다.[129] 그러나 티베트 불교는《범망경》의 대승계가 아닌 《입보살행론(Bodhisattvacaryāvatāra)》, 《대승집보살학론(Śikṣāsamuccaya)》의 대승계와 《유가사지론(Yogācārabhūmi-Śāstra)》 〈계품〉의 대승계를 따르는데, 여기에는 육식을 직접적으로 금하는 조항이 없다. 따라서 티베트 불교계의 주류적 해석에 따르면, 티베트 불교도가 삼정육을 섭취하는 것은 별해탈계나 대승계(보살계)를 어기는 것이 아니다.

2. 밀교적 관점에서 본 육식

무상요가 딴뜨라의 회공(會供, gaṇacakra)에서는 청정과 비청정의 집착을 벗어난 '이원성의 초월(不二性, advaya)'을 목적으로 고기와 술을 형식적인 수준에서 미량 섭취하는 것을 허용한다.[130] 또한 뚬모(Skt.caṇḍālī, Tib. gtum mo) 수행 같은 특수한 밀교 수행 중에도 고기와 술 섭취가 가능하다.

단, 외적인 청정을 중시하는 소작(所作) 딴뜨라, 행(行) 딴뜨라는 의궤를 행할 때 육류, 어패류, 계란, 오신채 등의 섭취를 엄격히 금한다. 또한 무상요가 딴뜨라에 속하는 칼라차크라 딴뜨라(Kālacakratantra)에서도 수행 중 육식을 금하는 항목이 있다.

3. 티베트 불교 내 채식주의

티베트 불교에도 채식을 실천하는 수행자들이 일부 존재한다. 티베트 불교를 단지 육식이 허용되는 불교로 알고 있는 일반적 인식과 달리, 티베트에는 과거부터 채식에 관한 다양한 의견들이 존재하였다. 계율과 경전 해석에 따라 육식의 허용 범위에도 차이가 있었다. 예를 들어 밀교 회공(會供, gaṇacakra) 때 형식상의 육류 섭취는 가능하다고 보는 측(18세기 닝마의 직메 링빠, 17세기 까르마 까규의 까르마 착메 등), 병들었을 때 약(藥)으로서의 육류 섭취는 가능하다고 보는 측(19세기 겔룩-닝마의 샵카르 등), 어떠한 맥락에서도 육류 섭취는 불가하다고 보는 측(15세기 싸꺄의 올첸 꿍가 상뽀, 16세기 까르마 까규의 제8대 까르마빠 미꾜 도제 등) 등으로 채식주의를 지향하는 수행자들 가운데에서도 의견이 분화되었다.Geoffrey Barstow, 《Food of Sinful Demons: Meat, Vegetarianism, and the Limits of Buddhism in Tibet》

현대에는 닝마의 차트랄 상게(Chatral Sangye) 린뽀체, 뻬마 왕걀(Pema Wangyal) 린뽀체나 까르마 까규의 제17대 까르마빠(Karmapa) 오걘 틴래 도제(Orgyen Trinley Dorje), 밍규르(Mingyur) 린뽀체, 그리고 겔룩의 삼동(Samdhong) 린뽀체, 라마 소빠(Lama Zopa) 린뽀체 등이 티베트 불교 내의 대표적인 채식주의자로 알려져 있다.

제14대 달라이 라마도 인도 망명 이후 1964년부터 스무 달 가량 완전 채식을 시도한 적이 있다. 그러나 급격한 식습관의 변화로 인해 심한 황달이 발생하고 담낭에 결석이 생겨[131] 담낭을 적출하는 수술 끝에 채식을 중단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이후 육류 섭취를 제한하며, 공장식 축산업을 지양하고 불살생과 채식을 권장하는 법문을 여러 차례 설한 바 있다.

달라이 라마는 2020년 세계 동물의 날(World Animal Day)을 맞아 "생명 존중과 환경 보호를 위해 육류 소비를 줄이고 채식을 권장할 필요가 있다. 동물 착취를 줄이고 채식을 하는 것이 보다 자비롭고 지속 가능한 생활 방식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채식주의자가 되는 것은 비현실적이다. 가령 티벳 북부나 몽골처럼 추운 기후 때문에 대대로 가축에 생계를 의지하던 사람들까지 채식주의자가 되는 것은 비현실적이다. 반면 인도는 농작물이 풍부하고 채식으로 잘 알려져 있는데, 세계의 다른 국가들도 이를 본받아야 한다."는 취지의 메세지를 전했다.
  • 2012년 세계 자비의 날(World Compassion Day) 제정 기념 제14대 달라이 라마의 동물복지 진흥 및 채식 장려 메세지 # #
  • 2020년 세계 동물의 날(World Animal Day) 기념 제14대 달라이 라마의 채식 장려 메세지 # #

4. 결론

'삼종정육'과 같은 티베트 불교도의 제한적 육류 섭취는 계율에 위배되는 행위라고 볼 수 없으며, 현재도 티베트 불교 주류는 계율이 허용하는 범위 안에서 육류를 섭취한다. 다만 특정 전승의 수행을 행하거나 중요한 불교 명절을 맞이했을 때 육식을 금하는 경우가 있다. 또한 개인의 신념이나 교리 해석에 따라 채식을 선택하는 티베트 불교도들도 일부 존재한다.

10.4. 기타 오해

티베트 불교의 영향을 받은 원대(元代) 몽골인들이 한족에게 초야권을 행사했다는 설이 있으나 사실상 루머 취급을 받으며 주류 학계에서는 언급조차 되지 않는다. 나무위키를 포함하여 인터넷에서 접할 수 있는 몽골 초야권설 대부분은 주장만 있을 뿐 명확한 학술적 근거가 없는 낭설에 불과하다

초야권 설은 야사(野史)에 해당하는 《신여록(燼餘錄)》이란 문헌에 처음 등장하였지만 근대 학자들에 의해 《신여록》은 위서(僞書)로 판명되었고, 몽골의 잔혹성을 입증하기 위해 원대 역사를 왜곡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132] # 정사(正史)인 《원사(元史)》, 《신원사(新元史)》 등에는 초야권에 대한 기록이 전무하다.

청말민초(淸末民初)에 출간된 민속학자 저우쭤런(周作人)의《담룡집(談龍集)》 등 초야권과 관련된 민담, 풍습을 다룬 산문집과 그 영향을 받은 일부 대중역사서들로 인해 실제 초야권이 실시되었다는 루머가 퍼진 적도 있지만, 현재는 중국 네티즌들 사이에서도 부정되고 # # 바이두 백과 초야권 항목 # 이나 중국어 위키백과 초야권 항목 # 에서도 관련 내용을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바이두 백과 초야권 항목에는 百科TA说로[133] 원대 초야권의 허구를 상세히 입증하는 글이 링크되어 있다.《“蒙元初夜权”,一个历史谣言的原型、变形与事实。 》

원대 초야권이 실시되었다고 주장하는 대표적인 인물로 현대 중국의 언론인 중 신리지엔(信力建)이란 인물이 있으나 신리지엔은 중산대학(中山大学) 중문과를 졸업하였을 뿐 역사학 관련 학위가 없는 비전문가이며# 그의 주장들 역시 앞서 언급한 《신여록(燼餘錄)》같은 위서나 《담룡집(談龍集)》 같은 민담에 근거하여 신뢰도가 매우 낮다.

초야권설이 유포된 배경에는 원(元)과 원을 계승하여 몽골의 대칸을 자처한 청(淸) 등 전대(前代) 이민족 왕조에 대한 한족 지식인들의 반감이 존재한다. 이들의 역사관은 이른바 "원청비중국론(元清非中國論)" 혹은 "만몽비중국론(滿蒙非中國論)"이라 일컬어진다. 그러나 하나의 중국이란 이데올로기를 따라 원, 청도 중국 왕조 중 하나로 인식하는 현대 중국의 중화주의적 역사관이 강화되면서 중국인들이 굳이 근거 없는 초야권 설로 원나라를 비하하고 한족 스스로를 치욕스럽게 만들 이유도 사라졌다.

또한 인터넷상에는 외몽골 같은 일부 티베트 불교권 지역에서 근대에 이르기까지 승려가 초야권을 행사하여 매독(syphilis) 감염의 주요 경로가 되었다는 출처 불분명한 주장이 있다. 근현대 몽골에서 매독이 창궐했던 것은 사실이나 매독이 유행하게 된 원인은 분명치 않다. 청이 몽골을 견제하기 위한 목적으로 매독, 임질 등 성병에 감염된 죄수를 일부러 몽골에 유배보냈다는 설, 마을의 우물에 매독균을 풀었다는 설, 초야권을 행사하는 승려들을 통해 매독을 전파했다는 설 등 다양한 주장이 있어 왔으나 모두 불확실한 추측성 루머에 해당한다.

불교학자 바차이칸 노로브(Batsaikhan Norov)에 따르면 몽골의 인구 밀집 지역에서 매독이 전파된 몇 가지 원인이 있는데 그 중 하나가 당시 몽골의 상당한 비혼(非婚)인구 비중이다. 비록 청 왕조가 불교 전파를 지원했지만 몽골의 각 구역 당 단지 40명의 남자만 출가할 수 있도록 제한하는 법령이 통과되었다. 그러나 제한은 점차 효력을 잃고 총 승려 수는 가파르게 증가하였다. 1918년까지 승려 수는 105,577명으로 칼카(Khalka) 몽골 남성 중 거의 절반(44.5%)에 이르렀다. 이 시기까지 내몽골에는 1600여 개에 달하는 사원과 10만 여명의 승려가 존재했다. 비구계를 받은 승려는 결혼을 할 수 없기에 상당한 수의 몽골 여성 또한 비혼으로 남아있었다. 이러한 환경은 가볍고 혼외(婚外)적인 성관계의 가능성을 열어두었다. 낮은 개인 위생 또한 감염 전파의 주요 원인 중 하나였다. 전염병에 대한 지식과 전염병 예방을 위한 의학적 치료 및 노력은 부족했다. 성병(性病)을 수치스럽게 여기는 몽골의 문화도 감염된 환자가 의학적 치료 받는 것을 꺼리게 만드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티베트 불교 학승(學僧)들은 17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에 이르기까지 몽골에서 대유행했던 천연두, 매독같은 감염병의 예방에 기여하였다. 이들은 사부의전(四部醫典, gso dpyad rgyud bzhi)에 기초한 티베트 불교 의학과 티베트, 몽골, 중국의 전통의학이 결합된 자신들의 의학지식을 활용하여, 청의 군인과 상인들을 통해 유입된 감염병들의 예방법과 치료법을 찾고자 노력했다. 이들은 질병 퇴치를 위한 종교적 의식을 행할 뿐 아니라 홍분(紅粉), 경분(輕粉), 주사(朱砂) 등 당시 매독의 유일한 치료법이었던 수은이 포함된 약재들을 치료에 활용하였다(이들은 신장 질환같은 수은으로 인한 부작용에 대해서도 인지하고 있었다). 또한 감염자 및 감염 매개물을 격리하는 한편 위생 증진을 위한 생활수칙과 마늘, 유황, 사향 등의 약재를 활용한 소독법 등을 연구하였다.
Batsaikhan Norov (2019), 《Mongolian Buddhist Scholars’ Works on Infectious Diseases (Late 17th Century to the Beginning of the 20th Century)》
[1] 1. 용수(150~250 / 龍樹 / དཔའ་མགོན་ཀླུ་སྒུབ་ / Nagarjuna)
2. 성천(170~270 / 聖天, 提婆, 聖提婆 / འཕགས་པ་ལྷ་ / Aryadeva)
3. 덕광(394-468 / 德光, 功徳賢 / ཡོན་ཏན་འོད་ / Gunaprabha)
4. 진나(480~540 / 陣那, 域龍, 大域龍 / ཕྱོགས་ཀྱི་གླང་པོ་ / Dinnaga)
5. 청변(490, 500~570 / 淸弁 / ལེགས་ལྡན་འབྱེད་ / Bhavaviveka)
6. 불호(470-540 / 佛護, / སངས་རྒྱས་སྐྱངས་ / Buddhapalita)
7. 월칭(600~650 / 月稱 / ཟླ་བ་གྲགས་ / Chandrakirti)
8. 적천(685~763 / 寂天 / རྒྱལ་སྲས་ཞི་བ་ལྷ་ / Shantideva)
9. 무착(395~470 / 無着 / ཐོགས་མེད་ / Asaga)
10. 세친(400-480 / 世親 / དབྱིག་གཉེན་ / Vasubandhu)
11. 석가광(8세기 초 / 釋迦光 / ཤཱ་ཀྱ་འོད་ / Shakyaprabha)
12. 법칭(6-7세기 / 法稱 / ཆོས་གྲགས་ / Dharmakirti)
13. 사자현(8세기 중엽 / 師子賢 / རྒྱལ་སྲས་སེང་གེ་བཟང་པོ་ / Haribhadra)
14. 성해탈군(6세기경? / འཕགས་པ་རྣམ་གྲེལ་སྡེ་ / Araya Vimuktisena)
15. 적호(725~790, 728~788/ 寂護 / ཁན་ཆེན་ཞི་བ་འཚོ་ / Shantarakshita)
16. 연화계(740~795 / 蓮華戒 / པད་མའི་ངང་ཚུལ་ / Kamalashila)
17. 아티샤(982-1054 / 燃燈吉祥智 / ཇོ་བོ་རྗེ་ / Atisha Dipankara Shrijnana)
[2] 가로로 긴 낱장 앞뒤에 경문이 기록된 패엽경(貝葉經) 형태를 취한다.[3] 각 종파 별로 열리는 대(大)기원 법회. 사부대중이 모여 수 일간 기도, 공양, 토론, 명상 등을 하며 세계 평화와 불법(佛法)의 지속 및 흥왕을 기원한다. #[4] 대승 불교(Mahayana buddhism), 테라와다 불교(Theravada buddhism)에 이어 불교 종파 중 규모 3위에 해당한다. Peter Harvey, 《An Introduction to Buddhism: Teachings, History and Practices》[5] 《입보살행론》과 《중론》의 게송은 각각 대승불교의 핵심인 보리심과 공성을 잘 드러내고 있다. 오온(五蘊)은 푸드갈라(pudgala, 個我)를 구성하는 색(色), 수(受), 상(想), 행(行), 식(識)이란 다섯 가지 물질적 요소와 정신적 요소를 가리킨다. 달라이 라마는 아침마다 《입보살행론》의 게송을 사유하며 모든 중생을 향한 자비와 보리심을 일으키고, 《중론》 게송의 '여래'를 '나'로 바꾸어 '나'란 존재는 과연 무엇인지 늘 사유한다고 한다.[6] 티베트인은 티베트 자치구 외에 병합 전 티베트 영토였던 쓰촨성, 윈난성, 칭하이성, 간쑤성 등지에도 많이 살고 있고, 혹은 티베트인이 아닌 중국의 다른 민족 중에도 티베트 불교를 믿는 인구가 어느 정도 있다.[7] 용수보살의 탄생을 예언한 경전으로 알려져 있으며, 불성(佛性)에 관한 10대 경전 중 하나이다.[8] 대승 불교 전통에서는 석가모니가 반열반 이후에도 용수보살을 비롯한 미래의 선지식들로 화현하여 계속 중생 제도를 이어갈 것임을 예언한 구절이라고 해석한다.[9] 이와 유사하게 한역 불전에서도 불교를 내도(內道)/내교(內敎), 불교 외의 종교, 신앙, 사상은 외도(外道)/외교(外敎)라고 지칭한다.[10] 기존에 마하연은 북종선 계열 선승으로 알려졌으나 남종선 계열 혹은 양자 모두와 연관이 있을 수 있다는 가능성도 제기되었다. 이수경(성제), 《티벳 불교의 쌈예 논쟁에 대한 재검토》[11] 화상(和尙)이란 승려를 높여 부르는 한자어이다.[12] 윗 열 : 티베트 불교의 장수삼존(長壽三尊)인 백색 따라(Tara), 무량수불(Amitayus), 불정존승모(Namgyalma). 아랫 열 : (左) 아티샤의 수제자인 돔뙨빠 걀웨 중네('brom ston pa rgyal ba'i 'byung gnas), 호법존 비사문천(Vaiśravaṇa), 돔뙨빠의 수제자 뽀또와 린첸 쌀(po to ba rin chen gsal)[13] 그 밖에 주로 신흥 상인계급과 왕족의 지지를 받아 민중계급에는 불교가 널리 퍼지지 못한 점, 불교의 힌두이즘화(Hinduism 化) 등 여러 가지 원인설(說)이 제기되었다.[14] 모든 번뇌를 자르는 반야이검(般若利劍)과 모든 경전 중에 가장 중요하다는 《반야경》을 지물(持物)로 갖고 있다. 지혜의 화염에 휩싸인 반야이검은 각각 무지(無知)의 어둠을 밝히는 불, 무지의 뿌리를 끊는 검으로 해석한다.[15] 전통적으로 티베트 불교에서는 '석가모니 재세시부터 프라크리트로 설해진 소승 전승 뿐 아니라 산스크리트로 설해진 대승 전승 역시 존재하였다. 그러나 소승 전승과 달리 대승 전승은 석가모니 사후 극소수 수행자들에게만 전해지며 단절의 위기를 겪었고, 이후 나가르주나와 아상가 등에 의해 다시 그 전승이 회복되었다.'라는 불교사적 기술을 통해 대승의 불설(佛說)로서의 정통성을 옹호하였다.[16] ཉི་ཚེ་བའི་ཐེག་པ་(니체와 텍빠):  일부승. 단편적인 부분의 승인 소승(小乘) མཐའ་དག་པའི་ཐེག་པ་(타닥빼 텍빠) = ཐེག་པ་ཐམས་ཅད་པ་(텍빠 탐쩨빠):  전체승. 대승(大乘)[17] 성문승, 연각승, 보살승[18] 행, 소작, 요가, 무상요가 딴뜨라[19] 일체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일체 번뇌를 제거하고 일체 가르침을 배워 최상의 불도(佛道)를 이루겠다는 목적의식은 비단 티베트 불교만의 이상이 아니라 "중생무변서원도(衆生無邊誓願度) 번뇌무진서원단(煩惱無盡誓願斷) 법문무량서원학(法門無量誓願學) 불도무상서원성(佛道無上誓願成)"이란 동아시아 불교의 대표적인 발원문(發願文)인 《사홍서원(四弘誓願)》에서도 알 수 있듯, 대승 불교 공통의 지향이기도 하다.[20] 《람림》은 가르침을 청하고 듣는 법부터 공성에 대한 심오한 견해까지 거의 모든 불교 교리의 핵심을 빠짐없이 다루기 때문에, 처음 불교에 귀의한 자부터 소승 수행자, 대승 수행자까지 모든 대상을 포괄할 수 있는 가르침이다. 그리고 《로종》은 체카와 예셰 도제(chad kha pa ye shes rdo rje) 이전까지 인도와 티베트에서 뛰어난 보살 수행자에게 비밀리에 전수되던 가르침이었으며, 《람림》기준으로는 상사도(上士道)에 해당한다.[21] 김성철 동국대 명예교수는 《람림》을 기독교의 조직신학/교의신학에 비견할만한 체계적 불교학의 전형(典型)으로 평가한 바 있다.김성철, 《체계불학:신념체계로서의 불교학》[22] 《람림》과 《로종》을 심리학, 신경과학 등 현대 학문과 연계하여 재해석한 현대 서양의 세속적/비종교적 명상법으로 에모리대에서 개발한 Cognitively-Based Compassion Training(CBCT)스탠퍼드대에서 개발한 Compassion Cultivation Training(CCT) 등이 있다. 이 중 CCT는 한국의 경우 공감과자비연구소에서 CCT 공인 자격을 갖춘 명상지도자에 의해 프로그램이 진행된다. 관련 서적으로는 CCT의 개발자인 툽텐 진파가 지은 툽텐 진파, 《두려움 없는 마음》(임혜정 譯)이 있다.[23] 샨타락시타(Shantarakshita)의 논서인 《진실강요(Tattvasaṃgraha)》에서 인용한 경전 어구이다. 현존하는 경전(經, sūtra)에서는 1차 출처를 찾을 수 없으나 《Śrīmahābālatantrarāja》라는 밀교 속전(續, tantra)에서는 거의 동일한 어구를 찾을 수 있다. 초기 경전 중《깔라마 경(A3:65)》 역시 어구나 표현은 다르지만 유사한 취지로 설해진 경전으로 볼 수 있다.[24] 전통적인 티베트 불교 역사서에서는 아리야 위묵티세나를 바수반두의 직계 제자로 서술하고 있으나 현대 불교학계에서는 실제 제자일 가능성이 매우 적다고 본다.[25] 바수반두, 아상가, 디그나가는 유식학파인데 비해《입중론》등에서 공성(空性)에 대한 유식의 견해를 비판한 짠드라끼르띠는 귀류논증 중관학파에 해당한다.[26] 요가(Yoga)는 신체적, 정신적, 영적 수행을 통칭하는 말로 궁극적인 요가의 목적은 마음, 의식의 변화에 있다. 요가는 비단 요가학파 뿐만 아니라 인도 종교와 사상 전반에 걸쳐 통용되는 용어이다.[27] 제임스 도티(James Doty), 폴 에크만(Paul Ekman), 에밀리아나 사이먼-토마스(Emiliana Simon-Thomas), 아서 자욘스(Arthur Zajonc) 등[28] 동영상 설명에는 개최연도가 2016년으로 기재되어있지만, 정확한 개최 일시는 2013년 1월 17-22일이다.[29] 티베트 불교의 인식론인《심류학(心類學, blo rig)》에 의하면 '의식의 종류 중 분별식(분별인식)으로 대상을 인식할 때 마음에 현현하는 이미지(image)'를 공상(共相, spyi'i mtshan nyid)이라고 정의한다.
공상의 종류에는 1) 의공상(義共相, don spyi), 2) 성공상(聲共相, sgra spyi), 3) 의공상과 성공상의 혼합체 3가지가 있다. 의공상은 대상의 의미(개념, 기의)를 알고 마음으로 떠올린 대상의 이미지이며, 성공상은 대상을 지칭하는 소리(음운, 기표)를 알게 된 후 마음으로 떠올린 대상의 이미지이다.
예를 들어 '염주'라는 대상을 분별식으로 인식할 때, '염주'라는 대상의 의미를 알고 마음으로 '염주'의 이미지를 떠올리는 것은 의공상이다. 그리고 '염주'라는 대상의 의미를 알지 못한 상태에서 누군가 '염주'를 가리키는 소리만을 알려주었을 때 마음에 떠올린 '염주'의 이미지는 성공상이다.
[30] 지혜법신(智慧法身)이라고 번역하는 경우가 많으나, '인지(認知, cognition)'의 의미를 가진 '알 지(知)'자를 써서 '지법신(知法身)'으로 번역하는 것이 산스크리트어 'jnana'나 티베트어 'ye shes'의 의미에 더욱 부합한다. 영역(英譯)에서도 'wisdom'보다는 'awareness', 'gnosis', 'knowing' 등으로 번역하는 경우가 많다.[31] 객진(客塵, གློ་བུར།) 번뇌는 모든 법의 체성(體性)에 대하여 본래의 존재가 아니므로 객(客)이라 하고, 미세하고 수가 많으므로 진(塵)이라 함.[32] "논구한다(vyutpadyate)"란 그릇된 이해(vipratipatti)를 물리침으로써 이해(pratipadyate)하는 것이다.《니야야빈두, 니야야빈두띠까》[33] 영어, 중국어, 일본어 등 주요 언어로는 비교적 다수의 번역서와 연구서들이 출간되었다. 예를 들어《뒤다(섭류학攝類學)》, 《로릭(심류학心類學)》, 《딱릭(인류학因類學)》등의 강원 교재는 중국어로 완역된 바 있고 관련 강의도 들을 수 있다. 또한 최근에는 다르마끼르띠의《인명칠론》에 관한 케둡제의 주석서 중 핵심 부분이 《Freedom through Correct Knowing》이란 제목으로 번역되었고, 영역자인 게셰 텐진 남닥(Geshe Tenzin Namdak)의 관련 강의도 Wisdom Publications 홈페이지에서 수강 가능하다.[34] 동아시아 불교의 경우 현장에 의해 디그나가의 《인명정리문론》, 상카라스와민의 《인명입정리론》이 한역(漢譯)되었고 이에 관한 주석서인 규기의 《인명대소》, 원효의 《인명입정리론기》, 《판비량론》, 문궤의 《인명입정리론소》, 젠주의 《인명론소등명초》 등이 저술되었다. 관련된 국내 서적은 다음과 같다.
*《인명정리문론》: 《한글대장경 250 논집부5 입세아비담론 외 (立世阿毘曇論 外)》
*《인명입정리론》: 《인도 불교철학의 원전적 연구》, 《니야야빈두 외》, 《인명입정리론의 분석》, 《인명입정리론 산스끄리뜨문 번역》( 《인명입정리론》에 관한 김성철 동국대 명예교수의 강의가 유튜브에 공개되어 일반인도 청강 가능하다. 김성철 동국대 명예교수 불교인식논리학 강의)
*《판비량론》: 《중변분별론소 제3권 외》, 《원효의 판비량론(괴델의 불완전성 정리로 풀어본)》, 《원효의 판비량론 비교 연구》, 《원효의 판비량론 기초 연구》, 《원효 판비량론의 신역주》, 《원효의 논리사상과 판비량론》
[35] 상부: (左) 붓다 (右) 금강살타보살.[36] 자성신(自性身), 법신, 보신, 화신[37] 지금강불의 짙은 푸른색은 허공같이 청정한 마음의 본성을 의미하고, 금강저와 금강령의 교차는 지혜와 방편의 합일을 의미한다. 84명의 마하싯다는 고대 인도의 대표적인 밀교 대성취자들이다.[38] 대승 불교의 불신론(佛身論)에 따르면 석가모니불은 교화 대상인 중생의 근기를 따라 화현한 화신불(化身佛)이다.[39] 업을 짓고 쌓는 힘이 왕성하고 쉽게 성숙해서, 생의 전반에 쌓은 업이 생의 후반에 익는 땅을 말한다.[40] 문수보살의 성불 후 불호(佛號)[41] 석가모니불 외에도 현겁의 부처 중 몇 분이 추가로 금강승을 가르칠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가령 겔룩에서는 현겁의 11번째 부처로 성불할 겔룩의 창시자 쫑카파와 현겁의 마지막 부처인 누지불(樓至佛) 또한 금강승을 가르칠 것으로 예상한다. 쫑카파의 경우 (쫑카파 자신이 부처로서 교화하는 시기가 아닌) 석가모니불의 교화 시기에 이미 금강승을 크게 선양하였으므로, 쫑카파 본인이 부처로서 교화할 시기에 금강승을 가르칠 것은 당연지사(當然之事)임을 유추할 수 있다. 또한 누지불은 현겁의 나머지 999명의 부처가 행한 불사(佛事)를 모두 실행할 부처이므로 누지불 또한 자연히 석가모니불처럼 금강승을 가르치게 된다.[42] 대치(pratipaksa, 對治)는 선법(善法)으로 번뇌를 끊는 것을 가리키며 대치법은 대치하는 방법 또는 수단을 가리킨다.[43] 부처와 달리 중생에게는 승의제와 세속제를 각각 별개의 현현으로 인식하는 착란이 있음을 의미한다.[44] 원심이 공성을 현량(現量)으로 직접 지각하면 그 때의 원심이 승의광명이 된다.[45] 현교에서는 지혜와 방편을 번갈아 수습하며 둘이 상호 영향을 주는 쌍수(雙修)만을 언급하지만 밀교에서는 지혜와 방편을 동시에 수습하는 합일(合一)이 가능하다.[46] 소작, 행, 요가 탄트라.[47] 부수적인 원인.[48] 주된 원인.[49] 《람림》의 삼사도를 가리킨다. 자세한 내용은 티베트 불교/보리도차제 참조.[50] 대중에게 공개 가능한 수준의 기초적인 밀교 교리를 바탕으로 밀교에 대한 이해를 돕고자 지어진 글이다.[51] 밀교에서 등장하는 미세한 소지장이나 그것의 대치법인 미세의식 등의 개념은 단순히 추가된 개념 정도가 아니라 만약 생략될 경우 논리적 결함을 일으킬 수 있는 개념들이다. 그러나 현교 경론에서는 간략히 언급만 되거나 생략되어 있다. 이에 관한 자세한 설명은 밀교 경론들을 참고해야 하며, 여기서는 밀교의 개념들이 '옥상옥(屋上屋)'이 아니라 수행 체계의 정합성을 위해서도 필요한 개념들이라는 점만을 언급한다.[52] 일부 학자들은 부처의 일체지(一切智)나 색신을 부처에 대한 신격화의 일환이라고 폄훼하기도 하지만, 경론에서는 (부처 자신을 위해) 더 위대해지거나 숭배받기 위함이 아닌 중생을 이롭게 하기 위한 대자대비(大慈大悲)의 수단이라고 그 존재 이유를 분명히 밝히고 있다.[53] 보리(菩提)와 열반에 이르기 위해 필요한 여러 가지 선근공덕 (善根功德)[54] 예를 들어 진언을 하루에 몇 번 외우거나 사다나(sadhana, 본존 성취 의궤)를 하루에 몇 번 수행해야 된다는 식으로 관정을 준 아사리가 제자에게 수행 의무를 줄 때가 있다. 만일 이때 수행을 하기로 발원하고 스승에게 약속했다면 이를 꼭 준수해야 한다.[55] 불교 교단의 스승의 총칭[56] 만다라(Skt. mandala, Tib. dkyil ‘khor)는 금강승에서 본존이 거처하는 궁전과 정토 등 성스러운 환경을 가리키며 본존의 성불(成佛)이 이루어지는 장소이기도 하다. 만다라를 구성하는 각각의 요소들은 본존이 갖고 있는 공덕, 지혜 등을 의미하는 심오한 상징들이다. 만다라는 본래 3차원적 공간 구조로 이루어져 있고 탕카나 모래 등으로 조성한 만다라는 그것을 2차원적 평면에 구현한 것이다.[57] 본 영상은 카비타 발라(Kavita Bala) 코넬대 컴퓨터과학과 교수와 당시 재학생이던 엘리자베스 포폴로(Elizabeth Popolo)가 제작하고, 남걀사원 불교학연구소(Namgyal Monastery Institute of Buddhist Studies) 구성원들이 감수했다. 남걀사원 불교학연구소는 달라이 라마의 주석(主席) 사원으로 칼라차크라 의식을 전문적으로 주관하는 남걀(Namgyal) 사원의 북미(北美) 분원이다.[58] 통상적으로 야만따까 딴뜨라는 부속(父續)에 속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겔룩에서는 부속과 모속(母續)의 핵심을 모두 갖추고 있는 것을 야만따까 딴뜨라의 특징 중 하나로 본다.[59] 헤바즈라 딴뜨라를 중시하는 싸꺄에서는 헤바즈라 딴뜨라를 부속과 모속의 핵심을 모두 갖춘 불이 딴뜨라로 본다.[60] 남방 상좌부 전승에도 호주(護呪)에 해당하는 빠릿따(paritta) 게송이나 소위 "상좌부 밀교(Esoteric/Tantric Theravada)"로 일컬어지는 보란 깜맛타나(Borān kammaṭṭhāna) 전승 등이 존재하지만 4부 딴뜨라 분류와 직접적인 관련성은 없다.[61] 귀류논증 중관학파의 관점에 따르면 반야바라밀은 성문ㆍ연각ㆍ보살의 공통된 원인으로 차이가 없으며, 대신 중생에 대한 자비심의 정도에 따라 각기 다른 삼승(三乘)으로 구분된다. 성문ㆍ연각은 개인의 해탈을 추구하는 출리심을 바탕으로 공성을 수습(修習)하며, 보살은 일체중생의 성불을 추구하는 보리심을 바탕으로 공성을 수습한다. 이 때 수습의 대상인 공성은 삼승에 따른 차이가 없으며 모두 동일한 공성이다.
귀류논증 중관학파에서는 소승의 설일체유부, 경량부나 대승의 유식학파, 자립논증 중관학파같은 하위 학파의 견해를 따를 경우, 공성에 대한 견해가 불완전하여(하위 학파에서는 부정해야 할 대상인 일체법의 자성(自性)을 일부만 부정하기 때문이다) 아집(我執)을 남김없이 제거할 수 없기에 성문승ㆍ연각승ㆍ보살승 가운데 어떤 승을 수행하더라도 최대 가행위(加行位)까지가 성취할 수 있는 과위(果位)의 한계라고 본다. 즉, 공성을 현량(現量)으로 인식하는 견도위(見道位) 이상의 성인(聖人)이 되기 위해서는 성문승ㆍ연각승ㆍ보살승을 막론하고 모두 귀류논증 중관학파의 견해를 따라야 한다.
[62] 동아시아 불교에서는 신구의(身口意)로 지은 삼업(三業)을 정화하는 '정삼업진언(淨三業眞言)'으로 알려져 있다. 한국식 발음으로는 '옴 사바바바 수다살바 달마 사바바바 수도함'이다. 동아시아 불교에서 공성 진언이 업을 정화하는 진언으로 개변된 이유는, 한역(漢譯) 밀교 의궤들에서 나타나듯 공성 진언이 참회와 밀접한 관련을 갖기 때문인 것으로 추측된다.
인도-티베트 불교에서도 공성의 인식을 통해 참회, 정화 등을 성취한다. 참회의 직접적 조건이 사대치력(四對治力)이라면, 참회의 보조적 조건은 참회의 세 가지 요소인 삼륜(三輪)-참회의 주체, 참회의 대상, 참회해야 할 업과 습기-이 공(空)함을 인식하는 것이다.
삼륜이 고정불변한 실체가 아니라 그 자성(自性)이 공하므로 죄업을 참회하는 것이 가능하다. 또한 진정으로 공성을 인식하게 되면 인과에 대한 확신 역시 강해지므로, 자신이 지은 악업이 반드시 과보를 맺는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진심으로 후회하고 뉘우치는 진정한 참회가 가능해진다. 공성을 인식하였다고 인과를 폐기하는 것은 공성을 잘못 인식하여 단변(斷邊)에 치우친 것이다. 공성과 인과ㆍ연기는 상호의존관계로서 인과ㆍ연기를 토대로 공성이 성립하므로, 공성을 제대로 인식했다면 동시에 공성의 토대인 인과에 대한 변함 없는 확신이 생겨야 한다.
[63] 앞줄 좌(左)부터 닝마의 뒤좀(Dudjom) 린뽀체, 까르마 까규의 제16대 까르마빠(Karmapa), 사캬의 제41대 사캬 티진(Sakya Trizin), 겔룩의 제14대 달라이 라마(Dalai lama), 제6대 링(Ling) 린뽀체, 제3대 티장(Trizang) 린뽀체, 제19대 바꿀라(Bakula) 린뽀체. 달라이 라마는 겔룩 소속이지만 종파를 초월하여 티베트와 티베트 불교 전체를 대표하고 수호하는 위치에 있는 인물이다. 그 밖에 사진 속 인물들 모두 티베트 불교 각 종파를 대표하는 주요 지도자이자 저명한 고승들이다.
맨 앞 줄의 겔룩 인사 중 링 린포체, 티장 린포체는 달라이 라마의 스승들이다. 링 린포체는 1965년 겔룩의 종정인 제97대 '간덴 티빠'로 임명된다. 바꿀라 린포체 역시 겔룩에 속한 승려로 라다크 지역 불교를 대표하는 지도자이자 몽골 주재 인도 대사를 역임한 주요 인사이다.
닝마는 전통적으로 종단의 대표 내지 종정이 따로 없는 6개 본산(本山)의 연합체였다. 그러나 인도 망명 이후 각 종파의 대표를 선임할 필요성이 생기면서 뒤좀 린포체가 처음으로 닝마 전체를 대표하는 종정으로 추대되었다. 이후 2018년 당시 닝마빠 종정이었던 까톡 게체 린포체가 입적하고, 그의 뒤를 이을 후보 2명이 모두 "닝마빠 전통에 해가 될 수 있다"는 이유로 종정 추대를 거절하면서 다시 닝마의 종정 자리는 공석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64] 사캬의 실질적인 성립은 꾄촉 겔뽀의 손자인 사첸 꿍가 닝뽀부터 시작된다. 본 탕카는 지금강불 아래에 꿍가 닝뽀를 위시한 다섯 명의 사캬 창시자가 좌정(座定)한 모습을 묘사하였다. 1. (가운데) 사첸 꿍가 닝뽀(Sachen Kunga Nyingpo) (1092–1158) 2. (왼쪽 위) 소남 체모(Sonam Tsemo) (1142–1182) 3. (오른쪽 위) 제쭌 닥빠 갤첸(Jetsun Dragpa Gyaltsen) (1147–1216) 4. (왼쪽 아래) 사캬 빤디따(Sakya Pandita) (1182–1251) 5. (오른쪽 아래) 도괸 최걀 팍빠(Drogön Chögyal Phagpa) (1235–1280)[65] 1열: 석가모니불. 2열: (左) 쫑카빠의 두 수제자인 제2대 간덴 티빠(dga’ ldan khri pa) 겔찹 제(rgyal tshab rje), 초대 판첸 라마(pan chen bla ma) 케둡 제(mkhas grub dge). 중앙: 쫑카빠(Tshong kha pa) 3열: (左) 문수보살, 호법존 깔라루빠, 백색 따라.[66] 좌(左)로부터 1열: 틸로빠(Tilopa), 지금강불(Vajradhara). 나로빠(Naropa). 2열: 성취자(siddha) 마이뜨리빠(Maitripa), 샹빠 까규(Shangpa Kagyu)의 창시자 케둡 큥뽀 낼죨(Kedrub Kyungpo Naljor). 중앙: 마르빠(Marpa). 3열: 밀라레빠(Milarepa), 감뽀빠(Gampopa). 4열: 까르마 까규(Karma Kagyu)의 창시자 두숨 켄빠(Dusum Kyenpa), 팍두 까규(Pagdru Kagyu)의 창시자 팍모 둡빠(Pagmo drupa).[67] 로짜와(lotsawa)는 '역경사(譯經師)'라는 뜻의 티벳어이다.[68] 좌(左)로 부터 1열: 보신불 금강살타(Vajrasattva), 법신불 보현왕여래(Samantabhadra, 8대보살 중 하나인 보현보살과 명칭은 같지만 여기서는 족첸 전승의 법신불에 해당하는 본초불(本初佛, Adi-Buddha)를 가리킨다), 화신불 가랍 도제(Garab dorje). 2열: 법신 아미타불, 보신 관세음보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빠드마삼바와는 법ㆍ보ㆍ화 삼신(三身)의 관계로 알려져 있다). 3열: 예세 초겔(Yeshe tsogyal), 빠드마삼바와의 적정존(寂靜尊) 구루 촉게 도제(Guru Tsokyé Dorje), 만다라와(Mandarava). 4열: 빠드마삼바와의 분노존 구루 닥뽀(Guru Dragpo), 여성격 호법존 싱하무카(Simhamukha) 5열: 샨타락시타(Shantarakshita), 티송 데첸(Trisong detsen)[69] 《티베트 사자의 서》로 알려진 《바르도 퇴돌 첸모》도 까마가 아닌 뗄마 전승에 속한다. '바르도 퇴돌 첸모'란 '중음(中陰, 죽음과 환생 사이의 시간)에서 듣는 것만으로 얻게 되는 해탈'이란 뜻이다.[70] 정치적 이유가 주(主)이고 사상적 문제는 부수적이다. 17세기 중반 제5대 달라이 라마와 그를 지원하는 몽골 세력이 중앙 티베트인 짱(Tsang) 지역 지배권을 두고 조낭과 충돌하면서 조낭은 겔룩 세력권인 짱 지역에서 축출된다.[71] '대중관'이란 표현은 타공론자(gzhan stong pa) 뿐만 아니라 자공론자(rang stong pa)들도 "위대한 중관(혹은 중도)"라는 의미로 중관 사상(특히 귀류논증 중관)을 예찬할 때 종종 사용하므로 티베트 불교에서 반드시 대중관이 타공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즉 도르지 왕축(Dorji Wangchuk)의 설명처럼, "대중관"은 겔룩(dGe-lugs)의 학자인 케둡제 (mKhas-grub-rje, 1385–1438)가 주장한 “자공(自空)이라는 대중관(大中道)”(rang stong dbu ma chen po)이나 될뽀빠(Dol-po-pa, 1292–1361)가 주장한 “타공(他空)이라는 대중관(大中道)”(gzhan stong dbu ma chen po)이라는 견지에서 이해해야 할 것이다.금강대 불교문화연구소, 《불성·여래장사상의 형성 수용과 변용》[72] 될뽀빠는 《보성론》 등 《미륵오론》과 《승만경》등 여래장 계열 경전 외에도 나가르주나의 《중론》, 《찬법계송》을 자신들의 논거로 삼았다. 그들은 《찬법계송》의 "화완포(火浣布:타지 않은 직물)가 불 속에 들어가면 더럽혀지지 않고 때를 제거하면 베는 본래같이 더욱 빛나는" 비유처럼 '지혜의 불이 객진번뇌를 태워도 광명심 혹은 법계는 불변하다'는 해석으로 타공설을 뒷받침하였다.[73] '타공'은 될뽀파 등에 의해 새로이 창안된 용어이며 이전 인도, 티베트 문헌에서는 그 용례(用例)를 찾을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공이란 용어는 겔룩의 종파주의에 대항하여 서로 다른 종파들 간의 사상적 유사성을 강조하는 일종의 태그라인(tagline)처럼 여러 종파에서 널리 통용되었다. 대체적으로 타공은 밀교에서 주로 논하는 미세한 수준의 의식 상태를 가리킨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러나 타공의 세부적인 의미는 이미 서술하였듯이 종파, 전승, 인물마다 차이가 있다.[74] '부정의 토대(dgag gzhi)'는 불교논리학 용어이다. 일반적으로 '부정(dgag pa)'이라고 하면 반박한다는 의미로 사용되지만, 여기에서는 '존재(실재)하지 않는 것'을 뜻한다. 만약 어떤 대상이 1) 법(法)이고, 2) 그 법이 존재하지 않는 장소가 있다면 그것은 '부정의 토대'를 가진 법에 해당한다. 예를 들어 나무가 있다고 한다면, 그 나무는 법이고, 분명 이 세상에는 나무가 존재하지 않는 장소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나무는 부정의 토대를 가진 법이 된다.《논리에 이르는 신비로운 열쇠: 뒤다체계의 논리방식》(게셰 텐진 남카 譯)[75] 물과 우유는 서로 화합하되 일치하지 않는다. 《섭대승론》에서도 청정한 법계(法界)의 흐름인 바른 문훈습(聞熏習)과 근본식인 아뢰야식이 서로 공존하는 양상을 물과 우유의 화합에 비유하였다. 인도 설화에 등장하는 거위 '함사'(haṃsa)가 물과 함께 섞인 우유 중 우유만을 골라마시는 것처럼, 《섭대승론》에서는 근본식은 멸하더라도 근본식이 아닌 문훈습과 같은 청정한 종자는 멸하지 않는다고 설명한다.[76] 물론 겔룩에서는 쫑카빠의 견해를 귀류논증 중관으로 본다. 그러나 미팜은 쫑카빠가 대상 그 자체가 아닌 대상이 진실로 성립하는 것만을 부정하였기 때문에 그의 견해는 자립논증 중관에 해당한다고 보았다.[77] 조낭빠 깔라차끄라 딴뜨라, 닝마빠 족첸의 체험적 공성과 시간의 개념을 비교하고 이를 들뢰즈의 시선에서 바라본 티베트학자 조석효의 논문도 이해에 도움을 줄 수 있다. 조낭의 될뽀파가 깔라짜끄라와 여래장을 결합하여 '항상한 실재'를 상정한 반면 닝마의 롱첸빠는 족첸과 귀류논증 중관을 결합하여 '궁극적인 것의 비결정성(불확정성)'을 주장한 점, 조낭은 동시적 수행을 부정하고 점진적 수행만을 인정한 반면 닝마는 동시적 수행을 강조하는 기조 속에 점진적 수행이 병존하여 둘의 경계가 불분명한 점 등이 두 교파의 주요한 차이점이다. 조석효, 《공성과 아이온의 시간: 티벳 불교 수행 해석의 한 가능성》[78] 족첸의 유래에 관해서는 뵌 기원설, 닝마 기원설, 뵌-닝마 공통기원설, 외부 기원설 등 다양한 이설이 존재한다. 족첸이 뵌교나 중국 선종에서 유래하였다는 타 종파의 비판에 대해 닝마에서는 그들과의 연관성을 강하게 부정하며 족첸의 정통성과 순수성을 강변하였다.[79] 자공론자들은 스스로를 '자공론자'라고 칭하지 않는다. 타공의 존재 자체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실유(實有)를 인정하지 않는 중관학파(dbu ma pa, 엄밀히 말해 귀류논증 중관학파)와 그 외 실유를 인정하는 학파들이 존재할 뿐 중관학파 내에서 자공과 타공의 구분은 무의미하며, 타공은 왜곡된 중관 내지 중관 외적(外的)인 견해에 해당된다고 말한다.[80] 《바세》의 필사본 종류에 따라 '김 하샹' 대신 '니마 하샹'이 등장하는 경우가 있고 서사 구조에도 약간씩 차이를 보인다.[81] 중국 삼계교(三階敎)에 의한 찬술설, 혹은 삼계교를 믿는 신라인 승려에 의한 찬술설도 제기되었다.[82] 썸네일에 나온 탕카 속 원(元)의 제후 복장을 한 인물이 충선왕일 것으로 추정된다.[83] 조현은 1288년 출가하여 1323년 하서(河西)에서 영종에게 자결을 명받을 때까지 티베트를 벗어나지 못했지만, 대도에는 여전히 그가 하사받은 토지와 재산이 남아있었다. 충선왕은 고려의 신하 권한공(權漢功)과 함께 대도에 남아있던 조현 소유의 가택에 방문한 적이 있다. 이 때 권한공은 《영국공제분매(瀛國公第盆梅)》라는 시를 남겼다. '영국공(瀛國公)'은 조현이 원에 투항한 후 받은 작위이다.[84] 조현은 티베트어역 경전과 한역 경전을 상호 번역ㆍ교정ㆍ비교하는 작업으로 명망을 얻었다. 티베트 기록에는 '하쭌(Lha btsun)', 혹은 '하쭌 최끼 린첸(Lha btsun chos kyi rin chen)'이라는 명칭으로 등장한다. '하쭌'은 출가한 왕족을 일컫는 티베트의 존칭이고, '최끼 린첸'은 '법보(法寶)'라는 뜻의 법명이다.[85] 《신홍사(deb ther dmar po gsar ma, 新紅史)》의 문장에 의거하여 조현이 싸꺄 사원의 총지(總持), 즉 티베트어로 '찌진(spyi ’dzin)'의 직위를 맡았다는 주장이 있으나, 이는 잘못된 해석이며 조현이 싸꺄 사원 내에서 거주하던 숙소인 '짚으로 만든 은둔 수행처(Tib. spyil po/spyil bu, Skt. tṛṇakuṭi)'를 가리킨다는 주장도 있다. 《신홍사》 외에 조현이 싸꺄 사원의 총책임자나 사원장 등의 직위를 맡았다는 티베트 기록은 발견되지 않았다.[86] 충혜왕처럼 중국 남부로 유배 간 경우도 있다.[87] 제주도대청도 같은 고려의 도서지역으로 유배 간 몽골 왕족도 있다.[88] 원의 황제들(특히 쿠빌라이 칸)은 반대자를 고문하거나 죽이는 대신 그에게 불교 교육을 시킴으로써 자연스럽게 그의 관심을 정치로부터 멀어지게 하고, 황제 자신의 "자비로운" 행위를 통해 좋은 "까르마"를 쌓고자 하였다.[89] 출처: 《성관자재구수육자선정》. 당대 원나라의 한자식 인명 표기를 고려하면, 여기서의 자()는 자형이 비슷한 랄()의 오기로 추정된다. 剌자는 '라(la)'를 음차하기 위해 자주 쓰인 글자였다.[90] 밀교 종단인 대한불교 진각종의 주관 하에 불교학자 최로덴이 《마니 깐붐》을 한국어로 완역한 바 있다.[91] 명(明)의 황제들은 까규, 사캬, 겔룩의 지도자들에게 각각 대보법왕(大寶法王), 대승법왕(大乘法王), 대자법왕(大慈法王) 등의 법왕 칭호를 하사하며 국사(國師)로 대우하였다. 이 중 까르마 까규의 수장 까르마빠에게 수여된 대보법왕의 서열이 가장 높았다. 명의 티베트 불교에 대한 존숭에는 원(元), 청(淸)이 그러했듯 종교적 이유 뿐 아니라 이민족인 티베트를 통제하려는 정치적인 의도도 포함되어 있었다. 영락제는 티베트 불교 내 다른 종파의 세력을 약화시키고 까르마빠가 속한 까르마 까규를 선양한다는 명목으로 티베트에 군대를 파견하고자 했으나, 제5대 까르마빠는 다양한 종파의 필요성을 설파하며 영락제의 제안을 거절한다. 덕분에 명대(明代) 300년 가량 티베트는 중원의 간섭에서 비교적 자유로울 수 있었다(원대(元代) 싸꺄의 지도자였던 도괸 최걀 팍빠 역시 서로 다른 근기와 성향을 가진 중생들을 위해 다양한 종파들이 필요함을 쿠빌라이 칸에게 역설한 바 있다).[92] 명대(明代) 이전에는 원(元) 세조(世祖) 쿠빌라이 칸이 사꺄의 지도자 도괸 최걀 팍빠(ʼgro mgon chos rgyal ʼphags pa)에게 '대보법왕'(大寶法王)이란 칭호를 봉한 바 있다. 이후 '대보법왕'은 티베트 불교 지도자를 지칭하는 중원의 칭호 중 가장 존숭받는 칭호가 되었다. 명대에 이르러서는 영락제가 원 세조의 선례를 따라 제5대 까르마빠 데신 셱빠에게 대보법왕 칭호를 수여했다. 청대(淸代)에는 겔룩의 지도자 달라이 라마나 빤첸 라마도 세간에서 '대보법왕'이란 칭호로 일컬어졌다. 각 종파의 지도자가 '대보법왕'으로 일컬어진 시기(사꺄-까르마 까규-겔룩 순)와 해당 종파가 종교적, 세속적 권력의 우위를 점했던 시기가 대략 일치한다. 현대 중화권에서 '대보법왕'은 주로 까르마 까규의 지도자인 까르마빠를 지칭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93] 제5대 까르마빠는 1403년 영락제의 초청으로 티베트에서 출발하여 1407년에 이르러서야 난징에 도착하는데 그 때 그의 나이 만 23세였다. 안노생은 1406년 명의 사신으로 파견되어 1407년 조선으로 돌아온다.[94] 영락제의 찬불시 전문(全文)이 태종실록 동일 기사에 수록되었다.#[95] 실록 원문의 '마정수기언'(摩頂授記焉)을 '이마를 땅에 대고 기(記)를 받았다'라고 옮긴 국사편찬위 조선왕조실록 DB의 번역은 명백한 오역으로 사료된다. '마정수기'(摩頂授記)란 부처가 제자의 정수리를 어루만지며 미래세에 성불(成佛)할 것을 예언하는 행위이다. 이처럼 고유 명사를 일반 단어들의 조합처럼 풀어 해석하는 오류는 실록 번역에서 흔히 찾아 볼 수 있는 문제점 중 하나이다. 조선왕조실록번역의 문제점 문단 참조.[96] 실제 까르마빠가 사신들에게 마정수기(摩頂授記)를 주었다고는 보기 힘들다. 마정수기는 부처가 보살의 정수리를 만지며 미래세(未來世) 성불(成佛)을 알려주는 예언적 행위를 가리킨다. 티베트 불교에는 마정수기를 주는 의례가 별도로 존재하지 않고, 설사 까르마빠가 활불(活佛)의 자격으로 마정수기를 준다 하더라도 일반 대중들에게 무분별하게 수기를 내릴 리 만무하다. 티베트 불교에서도 간혹 스승이 제자의 성취를 예언하는 일이 있지만 뛰어난 근기를 가진 몇몇 제자들에게 한정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는 라마(lama)들이 상대방의 이마에 자신의 손을 대어 가피를 주는 일상적인 행위로서 '손으로 주는 관정'이란 뜻의 '착왕(phyag dbang)'을 동아시아의 불교 상식에 의거하여 마정수기로 해석한 것이라고 짐작된다. 《열하일기》에도 빤첸 라마가 그를 친견한 자의 이마에 손을 대어준다는 대목이 등장하며, 현재까지도 린뽀체들은 머리를 조아려 예를 표하는 신도들에게 답례처럼 착왕을 주곤 한다(심지어 '발로 주는 관정'이란 뜻의 '샵왕(zhabs dbang)'도 있는데, 가령 대중이 너무 많이 운집한 경우 고승이 대중들 위를 걸어가며 발로 가피를 줄 때도 있다). 착왕에는 마정수기처럼 미래세에 결정코 성불한다는 예언의 의미는 없다. 티베트 불교 문화에 익숙치 않은 동아시아에서 관정이나 착왕을 마정수기로 착각하는 일은 현대에 이르러서도 종종 반복되고 있다.
[97] '반선액이더니'는 강희제가 제5대 빤첸 라마에게 수여한 칭호로, 역대 빤첸 라마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었다. '반선'은 빤첸 라마의 '빤첸'이라는 티베트어('학자'를 뜻하는 산스끄리뜨어 '빤디따'(paṇḍita)와 '위대한'을 뜻하는 티베트어 '첸모'(chen mo)의 합성어), '액이더니'는 몽골어 단어를 그대로 빌린 만주어로 '보배'(珍寶)를 뜻하는 '에르데니'(erdeni)를 각각 음차(音借)한 한자어이다.[98] 이를 '쇄불(晒佛)', 즉 '부처님께 바람과 햇볕을 쐬어드리는 것'이라 부른다.[99] 면(綿), 비단 아플리케(Appliqué) 등으로 만든 티베트 전통 불화(佛畵)를 가리킨다. 탱화의 어원이 탕카라는 설이 있다. 국내에는 화정박물관에 티베트 탕카 컬렉션이 있다.[100] 2004년부터 광성사 주지를 맡아 온 게셰 소남 걜첸 스님이 2022년 12월 30일 인도 보드가야에서 제14대 달라이 라마로부터 제7대 라뙤 사원(Rato Dratsang) 켄 린뽀체(Khen Rinpoche)로 임명되었다. '켄 린뽀체', 약칭 '켄뽀'는 본래 율장에서 '계(戒)를 주는 아사리'을 가리키는 용어이며, 그로부터 파생된 '(겔룩에서의) 사원장, 학장'과 '(겔룩 외 종파에서의) 강원 학위'란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소남스님의 직위는 전자에 해당한다. 동아시아 불교 용어로는 '방장(方丈)' 정도로 번안할 수 있다. 선종 사찰에서 본래 이판(理判)의 방장과 사판(事判)의 주지를 구분하지 않고 사찰의 최고 책임자를 방장이라고 통칭했듯이, 켄 린뽀체 또한 그와 비슷하게 사원 전체를 총괄하는 최고 책임자에 해당한다.
라뙤 사원은 아띠샤의 수제자인 돔뙨빠와 응옥 렉뻬 셰랍에 의해 창건된 까담빠 사원으로 천 년 가량의 역사를 지닌 고찰이며 14세기에 싸꺄빠의 사원과 신(新)까담빠, 즉 겔룩빠의 사원으로 분화되었다. 사원 위치는 라싸 근교이다. 또한 라뙤 사원은 '장 군 최('jang dgun chos)'라 하여 매년 겨울 한두 달 가량 티베트 전역의 승려들이 모여 혹독한 추위를 이겨내며 집중적으로 불교 논리학을 연찬하고 대론하는 행사가 열리는 곳으로 잘 알려져 있다.
1959년 달라이 라마의 인도 망명 전까지 라뙤 사원의 승려 수는 오백여 명에 달했으나, 망명 후 인도에서는 데뿡 사원에 소속된 소규모 승원으로 편제되어 그 명맥을 유지하였다. 이후 티베트 현지에 남아있던 라뙤 출신 승려들의 요청으로 1983년 인도 카르나타카주(州) 문곳에 본격적으로 사원이 재건되어 현재 백여 명의 승려가 상주하는 대가람으로 성장하였고, 달라이 라마가 직접 지원하는 몇 안되는 사원 중 하나로 선정되기도 하였다. 제7대 켄 린뽀체로 임명된 소남스님은 1983년 사원 재건 후 처음 배출된 라뙤 출신 게셰들 중 한 명으로, 그중에서도 최고 등급 학위인 게셰 하람빠를 수여받았다.# # # # #
[101] 티베트 망명정부의 주한 대표부 역할을 하는 티벳하우스 코리아(Tibet House Korea)도 함께 운영하고 있다. 티벳하우스는 티베트의 철학, 심리학, 문화, 예술 등의 전통을 소개하고 보존하기 위해 창설된 비영리 단체이다. 한국 외에도 인도, 일본, 미국, 독일, 영국, 스페인, 스위스, 이탈리아, 헝가리, 러시아, 멕시코, 브라질 등 세계 각지에 지부를 두고 있다.[102] '삼학설행사'의 티베트어 이름 '랍숨섀둡링'은 제14대 달라이 라마가 직접 지어준 이름으로 '계정혜(戒定慧) 삼학(三學)을 설명하고 실천하는 도량(道場)'이라는 뜻이다.[103] 영축총림 통도사 울산포교원인 람림학당 보리원에서 설립한 연구ㆍ번역 기관이다.《팔천송반야바라밀다경》, 《성묘길상진실명경》, 《성삼취경과 현겁천불경》 등을 역경한 바 있다.[104] 한국어 전용 채널은 아니지만, 2021년 '춘계 아니 찌최' 법문부터 한국어 동시 통역이 제공되기 시작했다.[105] 중국 내 최대 티베트 불교 사원인 닝마빠 오명불학원의 지도자 중 한 명으로 중화권과 서구에 잘 알려져 있다.[106] 텍첸사 주지 쿤상 도르제(Kunsang Dorje) 스님은 2022년 12월 9일 네팔인 최초로 서울시 명예시민으로 선정되었다. 쿤상스님은 한국 거주 네팔인들에 대한 의료통역봉사, 문화 교류 등을 지원한 공적을 인정받아 서울시로부터 명예시민증을 수여받았다.# # #[107] 용수사 주지 우르겐 스님은 2003년 한국을 첫 방문하고 2008년 용수사를 개원하여 15년 간 국내 네팔 이주민 지원 활동에 핵심적인 역할을 맡아왔다. 그러나 2020년 7월 갑작스런 뇌졸중으로 쓰러져 열흘 후 의식을 회복하였지만 반신마비 후유증을 겪게 된다. 용수사 운영위원회, 능인선원, 마하이주민단체협의회, 법보신문 공익법인 일일시호일, 국제포교사회, 한국다문화불교연합회 등 여러 단체에서 우르겐 스님을 후원하였으나 한국에서의 치료와 재활을 지속하기 힘들어져 결국 스님은 2021년 9월 네팔 귀국행을 결정하였다. 현재 파상 스님이 대신 용수사에 주석 중이고 서울 텍첸사의 쿤상 스님도 도움을 주고 있지만 우르겐 스님의 공백을 메꾸는 일은 쉽지 않다고 한다. # # 네팔 출신의 설래스님(타망 다와 치링 스님)이 우르겐 스님을 대신하여 용수사에서 네팔 이주민들을 지원한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설래스님은 카트만두 UDC monastery에서 출가 후 대한불교 조계종에서 다시 사미계와 비구계를 수지하였고 동국대와 동 대학원에서 수학했다. 국내 네팔불자모임을 통한 이주노동자 돌봄의 공로가 인정되어 2022년 '특별공로자' 자격으로 한국 국적을 취득하였다. # #[108] 아이러니하게도 처이발상도 어린 시절 티베트 불교의 승려였고, 그가 죽을 때까지 쓴 이름 '처이발상'도 승려 시절에 받은 법명이었다.[109] 데뿡 사원에는 로셀링(Loseling), 고망 두 강원이 있다. 로셀링에 2,500여 명, 고망에 2,000여 명의 승려가 소속되어 있다.[110] 간단 사원의 관세음보살상은 개안관음(開眼觀音, mig 'byed spyan ras gzigs)상이다. 개안관음은 이름 그대로 "눈을 뜨게 하는(mig 'byed)" 관세음보살을 의미한다. 개안관음 신앙은 12세기 닝마의 뗄마(보장) 문헌에서 유래하였고 싸꺄, 까규, 겔룩 등 타 종파에서도 이를 수용하였다. 개안관음의 가운데 두 손은 눈을 뜨게 하는 수인(手印)을 취하고 있으며 오른손은 눈을 씻어주는 감로(甘露)가 담긴 보병(寶甁), 왼손은 공성을 인식하는 지혜를 상징하는 거울을 지물(持物)로 갖고 있다. 개안관음은 요의(了義)로는 무지의 제거와 공성에 대한 직접적 인식 그 자체이고 미료의(未了義)로는 눈과 관련된 질병을 치유하는 본존이다. 간단 사원의 개안관음상은 복드 칸 혹은 복드 칸의 형제인 처이진 라마(Choijin lama)의 안질환이 치료된 인연으로 세워졌다고 알려져 있으며 이후 정치적으로 몽골 독립의 상징처럼 여겨지게 된다.Olaf Czaja, 《The Eye-healing Avalokiteśvara. A National Icon of Mongolia and Its Origin in Tibetan Medicine》[111] 울란우데 근처의 이볼긴스키 사원(Ivolginsky datsan)과 치타 근처의 아긴스코예 사원(Aginskoye datsan)[112] 정교회, 이슬람교, 유대교, 불교[113]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스페인, 스위스, 폴란드 등 다수의 유럽국가에 티베트 불교 사원과 수행센터가 있다.[114] 달라이 라마는 2018년까지 25차례에 걸쳐 일본을 방문하였으며(고령으로 인해 사실상 2018년 방문이 달라이 라마의 마지막 방일(訪日)이 되었다), 도쿄에 티베트 망명정부의 동아시아 대표사무소를 두고 있다. 미국, 인도와 마찬가지로 일본도 대중(對中) 견제 정책의 일환으로 티베트 망명정부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 중이다.[115] 멕시코, 브라질, 아르헨티나 등에 티베트 불교 센터가 있다.[116] 대승불교권 국가인 베트남인들과 동남아의 화교들 위주로 티베트 불교도들이 존재한다.[117] 케냐, 남아공, 짐바브웨[118] 잘 들어보면 티베트어임을 알 수 있다.[119] 티베트어로 아버지를 뜻하는 '얍'과 어머니를 뜻하는 '윰'이 합쳐진 단어로 남녀합신상(男女合身象)을 가리킴.[120] 본존, 만다라 등의 이미지를 심상화(心象化)하는 것[121] 이른바 "번뇌즉보리(煩惱卽菩提)"를 주창하는 선불교와 상통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공성(空性), 불이(不二)의 견지(見地)에서 이루어지는 인습적인 도덕율의 초월, 스승과 제자 간의 밀접한 사자상승(師資相承) 관계, 돈오(頓悟)의 가능성 등 선불교와 밀교의 유사성에 주목하는 학자들이 있다.[122] 비구나 비구니가 승단을 떠나야하는 무거운 죄. 살인, 음행, 절도, 대망어(아직 깨닫지 못한 자가 자신의 이익을 위해 깨달은 성자인 척 대중을 속이는 거짓말)가 이에 해당한다.[123] 인도에서 티베트로 불교가 전해질 때부터 비구니 계맥이 전해지지 않았기 때문에, 티베트 불교 승단에는 초기부터 비구니 없이 사미니만 존재하였다. 현대에 이르러 일부 티베트 불교 여승들(특히 외국인 출신의 여승들)이 한국, 대만, 홍콩 등에서 비구니계를 받았고, 티베트 불교 종단에서도 이들을 비구니로 인정하였지만 티베트 불교 종단 자체적으로 비구니계를 수계하는 것은 아직 불가능하다.
제14대 달라이 라마는 티베트 불교 여승들의 권리 확대에 관심을 갖고 티베트 불교 내부에 비구니계를 도입하려는 노력을 꾸준히 이어왔다. 달라이 라마는 여자 승려도 남자 승려와 동등한 승가교육을 받고 게쉬(dge bshes)에 상응하는 불교 박사 학위인 게쉬마(dge bshes ma)를 수여받을 수 있게 허용하였다. 또한 1987년부터 티베트 불교계에서는 달라이 라마의 주도 하에 붓다 재세 시에는 존재했던 비구니 승단이 왜 티베트에는 없는지, 티베트에서는 왜 비구니 구족계를 주지 않는지에 대한 연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그러나 만일 비구니 계맥을 유지하고 있는 동아시아 비구니 승단에게서 비구니계를 수계할 경우 첫째 티베트 불교가 자체적으로 원로 비구니 12명을 배출할 때까지 이부승(二部僧) 수계식은 외국인 비구니들이 집전할 것이라는 점, 둘째 동아시아 한문권 불교는 법장부의 《사분율》을 따르는 반면 티베트 불교는 근본설일체유부의 《율경근본율》을 따르므로 기준이 되는 계목이 다르다는 점 등의 이유로 티베트 불교 종단 내부의 반대 여론이 강하여 달라이 라마 역시 비구니계 도입을 독단적으로 결정할 수 없는 상황이다. 이향순, 《여성불교에 대한 달라이 라마의 생각》 2022년 6월 21일 부탄불교 최고 지도자인 제 켄뽀의 수계로 144명의 비구니가 탄생했다. 이로써 적어도 티베트 불교권인 부탄에서는 자체적인 비구니 계맥을 갖추게 되었다. # # # # #
[124] 직접적 관련은 없었지만, 피해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자신들이 이전부터 알고 있던 밀교의 성적 요가 교의로 인해 피해사실을 인지하는데 어려움을 겪었다고 한다.[125] 반야 사상의 절대 부정이 악취공으로 곡해되어 막행막식을 초래했듯이, 불성 사상의 절대 긍정 역시 변질될 경우 윤리적 문제를 초래할 수 있다. 더 나아가 '비판불교(批判佛敎)'의 이론가인 마츠모토 시로(松本史朗)는 불성ㆍ여래장 사상의 전(全) 긍정이 사회적 불평등, 부조리를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로 활용되었다고 지적하였다. 마츠모토의 비판적 관점은 '와(和)' 사상, 전체주의, 일본주의 등 주로 일본 사회에 한정적으로 적용되었지만, 동일한 관점을 티베트의 사원, 종단, 지역 사회나 전체 티베트 사회에 적용시켜 분석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불교에서 궁극적 진리의 차원은 절대 부정 혹은 절대 긍정의 영역으로 분별을 허용하지 않지만, 세속적 진리의 차원은 철저한 분별의 영역으로 인과와 그에 따른 선악의 구분이 엄존한다. 이제(二諦), 즉 승의제와 세속제란 두 층위의 진리를 서로 모순이 없는 것으로 조화롭게 파악하고 알맞게 적용해야 잘못된 견해에 함몰되는 폐해를 막을 수 있다. 때로 고착된 분별적 사고를 타파하기 위해 상식을 뛰어넘는 파격적인 언행으로 스승이 제자를 교화하는 경우도 있으나, 이는 매우 특수한 일부 사례에 해당하며 불교 전반은 물론이고 금강승에서도 일반적인 지도 방식은 아니다.
[126] 둑빠 까규의 무문관 수행자인 독덴(rtogs ldan, 남성) / 독덴마(rtogs ldan ma, 여성)는 응악빠처럼 머리를 기르고 흰색 의복을 입은 재가 수행자 복식을 취하지만 비구계를 받은 출가 수행자이다. 밀라레빠의 수행 전통을 이어받은 이들 독덴은 안으로는 비구계를 지키고 겉으로는 재가 수행자의 외형을 갖추었는데, 이는 비구로서의 의무를 다하되 비구의 특권은 포기함을 의미한다. 이들은 12년 간의 무문관 수행을 포함하여 일생을 수행에 헌신한다.[127] 예를 들어 7세기 날란다 사원에서 유식학파를 대표하여 귀류논증 중관학파의 짠드라끼르띠와 논쟁했다고 알려진 짠드라고민(Candragomin) 역시 재가자 출신의 학자이다. '고민(gomin)'은 '소의 소유자'란 뜻으로 재가자를 의미하며, 출가자는 아니지만 승복을 입고 범행(梵行)을 실천하는 비승비속(非僧非俗)의 존재였다. 안성두, 《안성두의 대승의 보살사상 11. 초기 대승경전의 제작과 유통자》 짠드라고민은 흰 옷을 입고 우바새계를 지키는 재가 수행자였다는 설명도 있으니 참조할 것. 제14대 달라이 라마, 《로사르믹제(새로운 마음의 눈을 여는 말씀)》(게셰 소남 초펠 譯)[128] 티베트인들은 육류보다 어류 섭취를 꺼리는 경향이 있다. 옛부터 티베트인들은 물고기를 강이나 호수 등에 거주하는 신령한 존재로 간주하여 함부로 포획하지 않았다. 티베트의 강이나 호수는 성산(聖山)인 카일라스(Kailash)산에 기원을 두고 있기 때문에, 카일라스산에서 유래한 강이나 호수에 사는 생물들 또한 카일라스산의 축복을 받았다고 여겨진다. 또한 물고기는 야크 같은 큰 동물에 비해 상대적으로 작은 크기의 동물이므로 수요를 충족하려면 더욱 많은 수를 살생해야 한다는 점, 물고기가 다수의 알을 품고 있을 경우 살생업이 더 무거워진다는 점, 물고기는 돼지고기ㆍ계란 등과 함께 부정(不淨)한 음식으로서 고혈압, 고지혈증 등 티베트인들이 흔히 겪는 성인병을 유발한다는 점 등의 여러 이유 때문에 티베트인들은 어류 섭취를 기피한다.#[129] 《범망경》, 《능엄경》등 중국에서 찬술된 것으로 추정되는 경전들 외에 인도에서 편찬된《능가경》, 《대승열반경》, 《앙굴리말라경》등 여래장 계통 대승 경전에서의 육식 금지도 채식주의에 영향을 주었다. 또한 음식에 대한 선택권이 없는 탁발과 달리 직접 농작물을 경작하고 조리하는 동아시아의 공양 문화도 적극적인 채식 실천에 영향을 주었다. 한편 대승불교에서도 청변(淸辯, Bhāviveka)처럼 전통적인 삼종정육(三種淨肉)의 육식을 옹호하고 채식주의를 비판하는 경우도 있었다. 안성두, 《대승불교에서의 육식의 거부와 그 근거》[130] 회공 때 술을 직접 섭취하지 않고 손가락에 찍어 입술에 바르기만 하는 경우도 있다.[131] 의료진은 당시 인도인 측근의 권유에 따른 지나친 견과류 섭취가 담낭 결석의 원인으로 작용한 것 같다고 추측하였다.[132] 李則芬《明人歪曲了元代歷史》,《文史雜考》,1979年.[133] 百科TA说는 보다 깊은 이해를 위해 바이두 백과 운영진이 전문가, 학자, 기관 등에게 작성 권한을 제공하는 항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