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19 14:44:10

한덕수/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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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5f5f5,#2d2f34><colcolor=#808080,#fff> 생애 <colbgcolor=#fff,#1f2023>생애 및 정치 경력
가족 아버지 한병호
논란 비판 및 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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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유년기2. 공무원 시절
2.1. 문민정부2.2. 국민의 정부2.3. 참여정부
2.3.1. 제38대 국무총리
2.4. 이명박 정부2.5. 윤석열 정부
2.5.1. 제48대 국무총리
2.5.1.1. 국무총리 해임건의안 가결

1. 유년기

1949년 6월 18일, 전라북도 전주부(현 전북특별자치도 전주시)에서 아버지 한병호(韓炳鎬, 1907 ~ 1982. 4. 28)[1]와 어머니 전주 최씨(1913. 12. 27 ~ 1994. 8. 14) 사이의 6남 3녀 중 다섯째 아들로 태어났다. 조부 한규철(韓圭哲, 1867 ~ 1922. 8. 28)은 1898년(광무 2년) 3월 15일 중추원 3등 의관에 임용되어 그해 5월 15일 사직했는데, 3월 19일에 고종이 건원릉·수릉·홍릉을 행차할 때 시중을 드는 데에 참여해 망아지 한 필을 하사받기도 했다. 아버지 한병호는 전주부 진북동에서 호남잠종제조소(湖南蠶種製造所)를 경영했다.

전주시에서 국민학교를 다니다가 9살 때 어머니를 따라 서울특별시상경했고, 서울재동국민학교에 전학해 1961년 졸업했다. 1964년전주북중학교를 졸업했고, 같은 해 경기고등학교[2]에 입학해 1967년 1월 졸업했다. 1967년 서울대학교 상과대학 경제학과(67학번)에 진학해 1971년 2월 졸업했다. 이때 상과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하고 전체 학생 중 3등으로 졸업하면서 민복기 당시 대법원장으로부터 대법원장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이 당시엔 서울대 수석 졸업생에게 대통령상을, 차석 졸업생에게 국회의장상을, 3등 졸업생에게 대법원장상을, 4등 졸업생에게 문교부장관상을 수상했다. 참고로 이 때 국회의장상 수상자가 법과대학을 졸업한 이영애 전 의원이다.

2. 공무원 시절

서울대학교 상과대학 경제학과 재학 중이던 1970년 제8회 행정고등고시[3][4]에 합격하여 경제공무원으로 근무했다. 첫 발령지는 관세청이었다.

서울대학교 졸업 직후인 1971년 5월 27일 육군에 입대하여 육군본부에서 행정병(일반행정 특기)으로 복무했고, 1974년 3월 28일 병장으로 만기전역하였다. 참여정부 시절이던 2005년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장관 취임 직전 인사청문회에서 육군 병장 출신이라고 목소리에 힘을 주어 말했다. 불과 4명 뿐인 현역병 출신의 총리 중 한 명이다.[5]

이후 복직했고, 1976년남덕우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장관 비서관 자격으로 구미경협사절로 파견되었다.[6]

1977년미국으로 유학, 1979년 6월에 하버드 대학교 대학원에서 경제학 석사 학위(MA)를 취득하였으며 귀국 후 1980년 서기관으로 승진했다. 상공부로 자리를 옮겨 미주통상과장을 맡던 1982년에 한 번 더 미국으로 유학, 1984년 6월에 하버드 대학교 대학원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Ph.D.)를 취득했다. 귀국 후 다시 상공부에서 과장으로 근무하다가 1989년부이사관으로 승진해 현재 중소벤처기업부의 전신이라고 할 수 있는 상공부 중소기업국의 국장을 맡았다.

1992년엔 산업정책국장을 맡았으며, 재임 기간 동안 노태우 정부북방정책 중 산업 관련 정책의 실무를 맡았다. 1992년에 이사관으로 승진했다. 1993년 1월엔 전자정보공업국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2.1. 문민정부

1993년 4월, 김영삼 대통령이 취임하자 대통령비서실로 파견되어 경제수석 밑의 통상산업비서관을 맡게 되었다. 1994년 5월 청와대를 나와 상공부로 복귀, 관리관으로 승진해 기획관리실장을 맡다가 동년 12월 통상산업부 통상무역실장을 맡았다. 통상무역실장을 역임하는 동안 OECD 가입 추진 실무와 대일(對日) 무역 규제 해제 실무 등을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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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삼 대통령과 한덕수 통상산업부 차관
1996년 12월에 48세의 나이로 차관으로 승진해 1997년 3월까지 3개월간[7] 특허청장을 지냈다. 1997년 3월부터 1998년 3월까지 통상산업부 차관으로 근무하였다. 차관 재임 중에 IMF 사태라는 최악의 경제위기가 닥쳐서 이를 수습하는 업무를 맡았다.

2.2. 국민의 정부

김대중 대통령이 취임해 국민의 정부가 들어선 1998년 3월부터 2001년 2월까지 외교통상부 통상교섭본부장을 역임했다. 통상교섭본부장 역임 기간 동안 한미자유무역협정을 최초로 추진했고, 칠레자유무역협정을 체결했으며, APEC 정상회의 관련 실무를 수행했다. 여러 차례 산업자원부장관으로 거론되었으나 무마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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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대통령과 한덕수 주OECD대사
2001년 2월부터 같은 해 11월까지 주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대한민국 대표부 특명전권대사를 지냈다.[8] 2001년 11월부터 2002년 1월까지 대통령비서실 정책기획수석비서관, 2002년 1월에 청와대 대통령비서실 경제수석비서관에 임명되었으나 같은 해 7월 한-중 마늘 협상 파문으로 인해 경질되었다.

경질 이후 김앤장 법률사무소 고문으로 활동하였다.

2.3. 참여정부

파일:한덕수.jpg
참여정부 시절의 한덕수 전 경제부총리 이후 제 38대 국무총리[9]
2003년 7월 산업연구원 원장으로 취임하여 2004년 2월까지 근무하였다. 2004년 2월부터 2005년 3월까지 국무조정실장을 지냈다.[10] 실장 재임 기간 중에 노무현 대통령 탄핵 사태제17대 국회의원 선거가 있었는데, 당시 한덕수 국무조정실장은 열린우리당의 총선 압승 이후 "정부 정책이 왼쪽으로 급선회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뿐만 아니라 이라크 파병, 행정수도 이전 관련 업무도 지원하는 등 국무조정실장을 역임하며 정무·안보 관련 경험도 쌓았다.

2005년 3월부터 2006년 7월까지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장관을 역임하였다.[11] 재임 기간 동안 참여정부의 부동산 정책과 '금산법'으로 불린 금융-산업자본 분리 관련 정책을 손봤다. 쌀 개방으로 인해 농민들에게 쌀 세례를 받기도 했다.

2006년 3월, 이해찬 국무총리가 삼일절 골프 사건으로 사퇴하자 같은 해 4월 한명숙 국무총리가 임명될 때까지 국무총리 권한대행을 겸임하였다. 부총리 퇴임 직후인 2006년 8월엔 한미 FTA 체결지원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한미 FTA가 체결되도록 했다.

2.3.1. 제38대 국무총리

파일:노무현, 한덕수.jpg
노무현 대통령과 한덕수 국무총리
2007년 4월부터 2008년 2월까지 한명숙을 대체하며 참여정부의 마지막 국무총리(제38대)를 지냈다. 열린우리당의 붕괴로 사실상 여소야대 형국에 봉착했음에도 무난히 인사청문회를 통과해 인준을 받았고, 총리 재임 동안 제2차 남북정상회담이 열렸다.

38대 총리 한덕수는 당시 북한의 내각 총리였던 김영일과 남북총리회담을 하기도 했다. 특히 참여정부의 초대 총리였던 고건국무총리와 마찬가지로 총리직 재직 중에도, 행정의 달인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여담으로 레임덕이 심해서 국민들이 한나라당으로의 정권교체를 열망하던 시기의 참여정부의 마지막 국무총리였다는 점, 그리고 경제정책이 노무현과는 사뭇 달랐다는 점에서[12] 노무현과 사이가 불편했을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으며, 또한 서로 맞지않는 부분들로 인해서 격해질 때까지 서로 충돌하며 불협화음을 일으켰을 거라고 생각을 하겠지만, 한덕수와 노무현의 사이는 노무현이 퇴임하는 그날까지도 좋았으며, 한덕수도 노무현이 훌륭하시고, 좋으셨던 대통령이자 지도자라고 호평을 하기도 했으며, 그로 인해 노무현 정권 관련자들 및 노사모, 노무현재단 등 지지자들 사이에서도 한덕수는 그렇게까지 죽일듯이 싫어하지 않으며, 노무현이 아무탈없이 임기를 마무리할 수 있게끔 하게한 조력가들 중 하나라고 평하는 등 노무현과 한덕수는 한명숙-노무현, 문재인-노무현, 유시민-노무현, 이해찬-노무현의 관계들처럼 친노정치인들만큼 관계가 이들보다 진한 것은 아니지만, 서로 잘 보듬어주고, 마지막까지 하나되어서 정부운영을 잘해왔을 정도로 험학하거나 악연은 아니었다.

전형적인 관료이면서 정파색이 없긴 하지만, 노무현에 대한 호의적인 반응은 이후로도 계속되고 있으며, 심지어 한덕수가 주미대사에 재직하는 도중 노무현 대통령이 갑작스럽게 서거하시게 되자 애통애 하였으며, "강하신 분이라 잘 견디실 줄 알았는데... 이렇게 되어버려서 너무 안타깝다"라고 그를 추모하였으며, 비록 미국대사라서 직접적으로 한국에 가서 조문을 하지 못하였지만, 조문단 고문에 명단을 올렸으며, 미국의 전 대통령인 빌 클린턴의 아내이자 당시 미국 국무장관이었던 힐러리 클린턴이 한덕수의 도움을 받아 한국대사관에 차려진 분향소에 가서 노무현을 조문하기도 하는 등 참여정부 시절의 경제관련 문재로 행여나 노무현과의 불협화음이 있었을지라도 두 사람의 호의적인 관계를 덮을 만큼 강력하지는 않았다.[13]

2.4. 이명박 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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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 대통령과 한덕수 주미대사
정권교체로 출범한 이명박 정부 때인 2009년 2월부터 2012년 2월까지 이명박 정부의 초대 주미대사(장관급)를 역임하면서 보수·진보 정권 가리지 않고 실무형 인사로 중용되는 모습을 보여줬다. 특히 주미대사는 형식적으로는 장관급 의전을 받지만 초강대국 미국과의 관계의 중심에 있는만큼 그 중요성과 명망이 높은 자리이다.

더군다나 참여정부의 미국과의 관계 악화를 비판적으로 보며 미국과의 관계 개선을 추구하던 이명박 정부가 첫 주미대사로 한덕수를 배치한 것은 미국 유학파라는 개인적 배경이나 통상 관료로서의 커리어 뿐만 아닌 이명박 정부 차원의 신뢰도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대사직 퇴임 직후에 한국무역협회장으로 선임되었고, 2022년까지 다양한 사회기관에서 활동하였다.

2.5. 윤석열 정부

파일:한덕수 총리 임명장 수여식.jpg
윤석열 대통령과 한덕수 국무총리
2022년 3월, 제20대 대통령직인수위원회가 출범한 후 윤석열 정부의 초대 국무총리로 하마평에 올랐다. 당시 170석의 거대 야당인 더불어민주당의 협조를 얻어내지 않고서는 총리 임명 자체가 불가능했기에[14] 민주당의 동의를 얻어낼 만한 통합형 인사로 평가되었다.

실제로 한덕수 총리는 민주당의 정신적 지주 중 하나인 노무현 대통령의 참여정부 시절 이미 38대 총리를 지낸 바 있기 때문에 윤석열 정부 측에서도 야당인 더불어민주당이 한덕수의 총리 임명을 반대할 명분이 없을 것으로 계산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렇게 2022년 4월 3일, 국무총리 후보로 공식 지명되었고 당시 대통령 당선인 신분이었던 윤석열은 한덕수 총리의 지명 배경에 대해 "정파와 무관하게 오로지 실력과 전문성을 인정받아 국정의 핵심 보직을 두루 역임하신 분"이라며 "민관을 아우르는 풍부한 경험을 바탕으로 내각을 총괄하고 조정하면서 국정과제를 수행해나갈 적임자"라고 설명했다.

총리지명 기자회견에서 코로나19로 인한 중소 영세사업자의 경제피해, 인플레이션, 지정학적 외교문제, 북핵, 유가인상, 개방-시장-세계화 국가운영, 저출산 고령화, GDP대비 100%의 높은 가계부채를 서두에 언급하며 4가지를 강조하였다.
첫째, 국익외교와 강한국방의 자강력 확보
둘째, 국가의 대내외적 안정과 신뢰를 위한 재정건전성 확보
셋째, 달러를 중심으로 한 경화를 확보하는 국제수지의 흑자기조
넷째, 생산성이 높은 국가를 위한 총요소생산성 확대
위 4가지를 주요 과제로 언급하며 불평등한 사회, 협치가 이루어지지 않는 정치, 통합이 되지 않는 사회, 깨끗하지 않은 사회, 경제적 갈등은 총요소생산성을 낮추기에 국가가 더욱 신경쓰고 노력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마무리 발언으로 윤석열 대통령을 모시고 행정부가 중심이 되어 치열한 토론과 소통을 통해 정책을 만들겠다고 하였으며 이것을 위한 하나의 방법론으로 협치, 통합이 정책성공의 요소가 될 것이라 하였다.

더불어민주당에서는 호남 출신을 기용한 것만으로 국민통합이 이루어진다는 발상은 시대착오적 사고라고 한덕수의 총리 임명을 비판한 뒤, 한덕수가 38대 총리를 지낸 시절과는 세상이 달라졌다면서 견제했다. 다만 이미 민주당 정부에서 총리를 지낸 한덕수를 무리하게 낙마시킬 경우 역풍이 불 수도 있기 때문에 조심스러운 반응을 보였다.

2022년 4월 10일,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이 1차 내각 인선을 발표하는 자리에도 동석했는데 같은 날 인수위에서는 한 후보자가 이번 8명의 국무위원 후보자들에 대해 자필로 서명한 '국무위원 후보자 추천서'를 공개하기도 했다. 인수위 대변인실에서는 보도자료를 통해 "윤 당선인이 총리 후보자의 국무위원 서면 추천을 통해 후보자를 지명했다"며 "책임 총리제 실현의 첫걸음"이라고 소개했다.[15]

윤석열 대통령이 대통령 취임식 직후 처음으로 한 일은 한덕수 국무총리 후보자의 임명동의안에 재가하고 청문보고서가 채택된 7명의 장관 후보자를 임명한 일이었다. 당시 언론을 통해 알려지길 한덕수 후보자에게 직접 "윤석열 정부 첫 번째 총리는 한덕수여야 한다."라고 말하고 여당인 국민의힘 의원들과 측근에게도 "국무총리가 없는 상태가 오래 이어질 수 있으니 각오를 해두라."라고 말했다.

윤석열 대통령은 같은 해 5월 13일부터 인사청문회를 통과하지 못한 후보자들에 대한 임명을 강행하기 시작했고,[16] 5월 17일에는 야당인 민주당에서 반발이 가장 심했던 한동훈 법무부장관 임명을 강행하면서 정국이 급랭, 민주당에서는 대가로 인준 부결을 벼르며 강경발언을 쏟아내었다.

다만 이재명 전 총괄선대위원장이 한덕수를 임명시켜야 한다고 밝힌 이후[17] 분위기가 바뀌었고, 5월 20일에 민주당이 의원총회를 거쳐 인준안 가결을 당론으로 채택하였다. 그리고 208표의 찬성으로 인준안이 통과 되었다.

그렇게 국무총리 후보로 지명된지 47일만에 인준안이 통과되었고 2022년 5월 21일, 윤석열 대통령이 한덕수에 대한 임명안을 재가하면서 공식적으로 48대 총리로서의 임기를 시작했다.

2.5.1. 제48대 국무총리

2022년 5월 21일, 윤석열 대통령에게 임명장을 받는 것을 시작으로 공식 취임했다. 첫 일정으로 국립서울현충원에 참배했다. 참배 후 방명록에 "순국선열과 호국영령께 약속드립니다. 공정과 상식이 바로 서고 경제와 안보가 튼튼한 더불어 잘 사는 나라를 만들겠습니다."라고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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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덕수 국무총리와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이날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한미정상회담을 위해 방한했기에,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린 만찬에 참석해 바이든 대통령과 인사를 나눴다.

5월 25일, 문재인 정부에서 경제수석비서관을 지냈으며 한 총리와 인연이 있는 윤종원 중소기업은행장을 장관급인 국무조정실장에 내정했으나 권성동 원내대표를 비롯한 여당 국민의힘 내부에서는 보이콧을 거론하는 등 공개적인 반발이 있었다.

하지만 윤석열 대통령은 한 총리의 뜻을 존중한다며 책임총리제 실현을 위해 사실상 임명할 것임을 예고했다. 이로인해 당과 대통령실 간의 갈등이 표면화되었지만 5월 28일 윤종원의 자진사퇴로 사건은 일단락되었다. 다만 이로 인해 윤석열 정부가 내세운 책임총리제가 시작부터 타격을 입었다는 분석이 나온다.

6월 3일, 첫 비서실장으로 박성근광주지검 순천지청장이 임명되었다. 박 실장은 2007년, 한 총리가 제38대 국무총리이던 시절 국무조정실에서 파견근무를 한 이력이 있다. 6월 8일에는 기획재정부, 보건복지부 차관을 지낸 방문규 한국수출입은행장이 국무조정실장에 임명되어 총리실 구성이 마무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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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덕수 국무총리와 문재인 전 대통령
2022년 6월 16일, 양산 평산마을을 찾아 한덕수 본인이 과거 참여정부의 38대 총리였던 시절 대통령비서실장이었던 문재인 전 대통령을 예방했다. 한덕수 총리를 만나기 위해 사저에서 모습을 드러낸 문재인 전 대통령이 수염을 상당히 많이 기른 모습이라 관심을 모으기도 했다.

예방 후 한덕수 총리는 페이스북을 통해 ”평산마을에서의 소박한 일상 이야기와 함께 국내외 경제 상황의 어려움과 엄중함, 우크라이나 사태 등 최근 국제 정세 등에 대해 말씀을 나눴다“며 ”새 정부가 국정 운영을 잘해나갈 수 있도록 도와달라 부탁드렸고, 문 전 대통령도 화답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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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덕수 총리와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
2022년 9월 27일, 전 자위대 출신의 일본인에게 피격당해 사망한 아베 신조 전 총리의 국장에 대한민국을 대표하여 참석한 한덕수 총리는 기시다 후미오 일본 수상과 만남을 가져 조문 외교를 했다. 기시다 총리는 윤석열 정부에서 총리를 보내 조문한 것에 대해 깊은 감사의 뜻을 전했고 한덕수 국무총리도 기시다 총리의 리더십으로 어려운 상황을 잘 극복하길 바란다는 덕담을 했다.

한일 양국은 직전 2022년 유엔총회에서 윤석열 대통령과 기시다 후미오 일본 수상이 약식 회담을 가졌던 것에 이어 다시 한번 문재인 정부와 아베 내각 시기에 심각하게 악화된 한일관계를 조속히 정상적으로 되돌려야 한다는 뜻을 확인했으며 이를 위해 한일 양국이 노력하자는 대화를 나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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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덕수 국무총리와 카멀라 해리스 미국 부통령
같은 날, 한덕수 국무총리는 아베 신조 국장 참석을 위해 도쿄를 방문했던 카멀라 해리스 미국 부통령을 별도로 만나 해리스 미국 부통령이 이틀 후인 9월 29일 서울을 방문하는 것에 대해 환영의 뜻을 전했다.

북한의 지속적인 미사일 도발과 더해 7차 핵실험 가능성이 높아지는 엄중한 국제정세 속에서 미국 부통령이 서울 방문기간 중 한국의 비무장지대(DMZ)를 찾는 것은 특히나 상징적인 일이라고 평가했다. 해리스 미국 부통령은 한덕수 총리와의 만남 이후 대한민국을 방문해 윤석열 대통령을 예방하여 한미동맹의 공고함을 대외적으로 과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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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0월 29일, 159명의 목숨을 앗아간 이태원 참사와 관련하여 윤석열 대통령, 김건희를 비롯한 정부 요인들과 함께 서울광장 합동분향소를 찾아 조문했고 고인과 유족들에게 애도를 표했다. 이후 사후처리를 위해 가진 회의에서는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자극적인 참사 장면을 SNS를 통해 확산시키는 행위를 자제해줄 것을 당부했다.

2022년 11월 1일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이태원 참사 관련 외신기자 브리핑에 참석하여 이태원 참사에 대한 질의응답 시간을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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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덕수 국무총리와 무함마드 빈 살만 사우디 왕세자
사우디아라비아의 무함마드 빈 살만 알사우드 왕세자가 사우디의 네옴 시티 건설 계획에 대한민국이 참여하는 일에 대해 논의하고자 직접 서울공항을 통하여 방한하였을 당시 한덕수 총리가 직접 마중을 나가 왕세자를 환대했다.

대한민국 국무총리가 외빈을 맞이하여 직접 영접을 나간 것은 대단히 이례적인 일인데 이는 사우디아라비아의 네옴 프로젝트가 그만큼 대한민국의 입장에서도 경제적으로 중요한 초대형 사업이었기 때문이다. 무함마드 왕세자는 한덕수 총리와의 환담 이후로도 윤석열 대통령과 김건희 여사를 만나 친목을 다졌고 이후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을 비롯한 한국 주요 대기업 총수들을 만나 네옴 사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2023 새만금 잼버리 개최와 관련하여 잼버리 부실 운영 논란이 발생하자, 한덕수 본인이 직접 개최지인 새만금 현장으로 가서 화장실 청소를 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면서 조직위 관계자들에게 "누구에게 시킬 생각만 하지 말고 직접 청소도 하라"라고 지시했다.# 부실 운영에 대한 불만이 고조되었음에도 잼버리 조직위원회 내부에서는 "별 거 아니다"라는 분위기가 있었는데, 한 총리가 직접 화장실을 청소하고 나서야 분위기가 달라졌다고 한다.

새만금 잼버리 폐영식 당시 도시락에 바나나가 들어간 것을 알자, 바나나 껍질이 바닥에 떨어지면 안전사고가 우려된다는 이유로 도시락 메뉴에서 바나나를 제외하라고 지시하기도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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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덕수 국무총리와 시진핑 중국 주석
2023년 9월 23일, 1년 연기된 2022 항저우 아시안 게임 개막식에 한국 정부를 대표하여 참석했다. 윤석열 정부 출범 이래 방중한 한국 인사 중 최고위급 인사로서 중국에서도 한덕수 총리가 아시안 게임 개막식에 참석하는 것에 대해 감사와 환영의 뜻을 표했다.[18]

한덕수 총리는 방중 일정 중 시진핑 중국 주석과 회담을 가져 한중관계의 중요성을 강조했고 시진핑 주석도 이에 화답해 방한에 대해 진지하게 검토하고 있다는 뜻을 전하며 한중관계 개선에 의욕이 있음을 내비쳤다. 회담 당시 국제 상황에 비추어 볼 때 대한민국으로서는 러시아와 강하게 밀착하는 북한에 대한 견제, 중국으로서는 미국의 대중국 봉쇄를 타개하기 위한 해결책 중 하나로 미국의 핵심 동맹인 한국과의 관계 개선 모색 등 양국의 이해관계가 맞아 서로 관계 개선의 물고를 튼 것으로 분석되는 편이다.

사우디아라비아의 리아드에 밀려 유치는 불발됐으나 2030 부산 엑스포 유치전을 위해 총회가 열리는 프랑스 파리에 방문하여 마지막까지 총력전을 펼쳤다. 이 자리에는 한덕수 총리 외에 박형준 부산시장과 한국 재계 인사들도 함께 했다.

아시아 최초의 청소년동계올림픽인 2024 강원 동계청소년올림픽에서는 과거 2023 새만금 잼버리의 파행 사태가 재발되지 않도록 직접 현장을 방문하여 전반적인 시설 점검에 나서기도 했다.

2024년 4월 11일 오전, 22대 총선에서 여당이 참패한 직후 사의를 표명했다. 다만 후임인사를 결정하는데 상당한 난항을 겪고있어 사표가 수리되지 않고 있다.
2.5.1.1. 국무총리 해임건의안 가결
[2124528] 국무총리(한덕수) 해임건의안(박광온의원 외 168인)
국무총리(한덕수) 해임건의안
(의안번호: 2124528) (발의일: 2023년 9월 18일) (의결일: 2023년 9월 21일)
재적 재석 기권무효
29829517511640
결과재적의 과반수 이상이 찬성하여
가결
후속 절차대통령 : 해임건의안의결서 수령(헌법 제63조)
국무총리(한덕수) 해임건의안

주문
대한민국헌법」제63조에 따라 국무총리(한덕수)의 해임을 건의한다.

해임건의의 사유
헌법 제86조제2항 “국무총리는 대통령을 보좌하며, 행정에 관하여 대통령의 명을 받아 행정 각부를 통할한다”고 규정하고 있음. 한덕수 국무총리는 후보자 시절 “국무총리가 되면 책임총리로서 확고한 권한을 행사하겠다”고 밝힌 바 있으나, 윤석열 정부 출범 이후 벌어진 각종 참사와 현안 대응 과정에서 한덕수 총리의 이 같은 발언이 국민을 기망했다는 사실이 명백히 드러났음.

한덕수 총리가 이끄는 내각의 국정 운영 또한 별반 다르지 않았음. 민생과 민주주의, 한반도 평화의 위기를 초래했을 뿐만 아니라, 그 책임을 前 정권 탓, 야당 탓, 심지어 국민 탓으로 돌리는 등 무능과 무대책, 무책임으로 일관하는 총체적 망국 내각으로 전락하고 말았음.

159명의 무고한 생명을 앗아간 10.29 이태원 참사의 정치적ㆍ법적 책임자인 이상민 행정안전부장관이 최근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행정안전부로 복귀했음. 한덕수 국무총리가 후보자 시절 인사청문회에서 “해임건의가 필요한 중대한 일이 발생한다면 대통령께 말씀드리겠다, 장관에게 권한을 확실히 위임함과 동시에 결과에 대한 책임을 묻겠다”고 한 발언은 거짓말이 되어 버렸음. 심지어 10.29 참사 당시 한덕수 총리가 주재한 대책회의에서는 참사의 명칭을 ‘이태원 사고’로 통일하고, ‘희생자’나 ‘피해자’ 대신 ‘사망자’, ‘사상자’ 등의 용어를 쓰도록 결정했는데, 이는 희생자 유가족의 슬픔과 국민적 분노를 보듬기는커녕 축소 은폐하려는 데 급급했던 것으로 무책임한 내각의 단면을 그대로 보여주었음.

잼버리 사태에서도 한덕수 국무총리는 국정 운영 컨트롤 타워로서의 역할을 전혀 찾아볼 수 없었음. 한덕수 국무총리는 잼버리대회 정부지원위원장으로서 지난 5월 17일 새만금 현장에서 “잼버리대회는 한국의 저력과 위상을 보여줄 좋은 기회”라고 자신 있게 말하더니, 잼버리대회가 파행으로 치닫고 국내외 비판 여론이 거세지자 “지금부터 대한민국 중앙정부가 전면에 나서서 대회 진행을 책임지겠다”며 유체이탈식 화법으로 그 책임을 지방정부에 떠넘겼음. 더 나아가 現 정부와 前 정부를 가르고, 새만금 SOC 예산 77.6%를 보복 삭감하는 등 정략적이고 편파적인 국정 운영 기조를 지속해 나가고 있음.

국민 절대다수가 반대한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방류 과정에서도 한덕수 국무총리와 그 내각은 이를 강행함으로써 국민의 자존심을 무너뜨리고, 국가의 주권과 국민의 안전마저 중대한 위협에 빠뜨리고 말았음. 지난 6월 12일 국회 대정부질문에서 원전 오염수에 대해 “기준이 맞는다면 마시겠다”며 비상식적 답변을 하더니, 8월 4일 대국민 담화에서는 “국민을 가장 크게 위협하는 것은 가짜뉴스와 허위선동”이라며 국민 불안과 비판을 괴담으로 몰아감. 또한 8월 30일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에서는 “오염수가 아니라 과학적으로 처리된 오염수”라고 하더니, 결국 9월 5일 국회 대정부질문에서는 “과학적으로 처리된 방류는 반대하지 않는다”고 하는 등 도저히 대한민국의 국무총리라고 하기에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시종일관 일본의 입장만 대변하고 있음.

해병대 채모 상병 사망을 둘러싼 권력의 외압 의혹과 조직적 은폐 시도에서도 정권의 불법적이고 폭압적인 단면이 재차 드러났음. 군사법원법 상 ‘군인 사망 사건과 관련된 범죄는 인지한 경우 민간 수사기관으로 이첩’하도록 규정돼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덕수 국무총리는 지난 9월 5일 국회 대정부질문에서 국방부장관이 수사단장에게 ‘혐의를 특정하지 말라’고 한 불법 지시를 두고 “수정 지시한 게 잘못된 것인가. 장관의 적법한 권한 행사였다”며 엄중한 국기문란 상황을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일방적으로 책임자를 옹호함으로써 젊은 병사의 억울한 죽음에 대한 진실을 축소 은폐하려 들었음.

최근 단행된 국무위원 등 내각 구성원의 면면을 보더라도 국무총리의 내각 추천 권한과 기능은 사실상 형해화 됐음. 아들의 학교 폭력 의혹을 축소하고, 편향된 언론관으로 언론인마저 반대하는 이동관 방송통신위원장, 국민에게 총을 쏜 전두환을 애국자라며 12.12 군사 쿠데타를 ‘나라를 구한 것’이라고 말하고 5.16 군사 쿠데타를 ‘혁명’이라고 했던 신원식 국방부장관 후보자, 과거 막말과 문화예술계 인사 탄압을 일삼았다는 의혹을 받는 유인촌 문화체육부장관 후보자, 여가부를 이끌 전문성도 부족하고, 김건희 여사와의 친분을 덮기 위해 거짓말만 일삼는 김행 여성가족부장관 등 국민 눈높이에 맞는 인사 추천이 전혀 이뤄지지 않고 있음.

더욱이 최근 대정부질문 과정에서 보여준 총리의 태도는 함량미달 그 자체였음. 윤석열 대통령의 “싸우라”는 한 마디에 국민의 대의기관을 상대로 전쟁하듯 도발하고, 고압적 태도와 비아냥으로 일관하면서 국회와 국민을 조롱하고 멸시하였음. 삼권분립의 경계를 총리가 앞장서 훼손시키는 것은 민주주의에 대한 심대한 도전으로 더는 묵과할 수 없음.

이처럼 한덕수 국무총리는 내각을 통할하는 최고 책임자로서 그 자질과 역량에 심각한 문제가 있음. 윤석열 정부가 국민의 생명과 안전, 외교와 국방, 민생과 경제, 민주주의 등 모든 분야에서의 퇴행과 총체적 국정난맥에서 벗어나 당면한 국가 위기를 돌파하고 미래로 나아가기 위해서라도 한덕수 국무총리를 필두로 내각의 전면적 개편이 시급함.

이에 박광온 등 국회의원 168인은 헌법 제63조의 규정에 따라 국무총리(한덕수)의 해임건의안을 제출하는 바임.
2023년 9월 21일 민주당은 윤석열 대통령의 국정 운영 난맥과 장관 임명 강행 등에 대한 책임을 물어 헌법 86조 2항상 대통령을 보좌하며, 행정에 관하여 대통령의 명을 받아 행정 각부를 통할하고 있는 총리에 대한 국무총리에 대해 해임 건의안을 가결시켰는데, 이는 국무총리에 대한 해임 건의안으로써는 헌정사상 최초로 국회에서 통과된 것이다.[19]
역대 국무총리·국무위원 해임건의안 가결 사례
<rowcolor=#ffffff> 연도 정부 해임대상 해임여부
1955년 이승만 정부 임철호
농림부장관
사퇴
1969년 박정희 정부 권오병
문교부장관
1971년 오치성
내무부장관
2001년 국민의 정부 임동원
통일부장관
2003년 참여정부 김두관
행정자치부장관
2016년 박근혜 정부 김재수
농림축산식품부장관
대통령
거부
2022년 윤석열 정부 박진
외교부장관
이상민
행정안전부장관
2023년 한덕수
국무총리
<rowcolor=#ffffff>


해임건의안에 대해서 잘한 일이라고 본다 43%, 잘못한 일이라고 본다 41.9%라는 여론조사 결과가 나왔다.

[1] 아버지가 43세일 때 태어난 늦둥이인 셈이다. 윤석열 정부의 국무총리의 아버지가 조선시대(정확히는 대한제국 고종~순종대)에 태어났다고 생각하면 된다.[2] 유인태, 이철 전 의원, 현재현동양그룹 회장 등과 동문이다. 빠른년생이 아닌 49년생인데 67년에 졸업한 것을 보아 조기입학한 것으로 보인다.[3] 허태열대통령비서실장, 강만수기획재정부장관 등이 이 시험에 합격했다.[4] 현재 추경호 부총리가 행시 25회, 장관급이 행시 29~34회, 차관급이 34~37회에 포진되어 있으니 이들에게는 대선배인 셈.[5] 나머지 셋은 정홍원, 이낙연, 정세균. 이 중 이낙연은 카투사에서 복무했다.[6] 당시 기사[7] 77년 이래 역대 최단명 특허청장이다.[8] 주OECD 대사는 주로 경제부처 관료들이 임명되는 장관급 특명전권대사지만, 사실상 차관급 취급을 받는다.[9] 과거에 쓰인 프로필사진이기도 하며 한덕수하면 떠오르는 프로필사진들 중 하나이다.[10] 당시 국무총리는 고건, 이해찬.[11] 사실 이는 특이한 케이스로 볼 수 있는데, 한덕수 전 총리는 재무관료가 아닌 정통 통상산업관료 출신이기 때문. 대부분 재무관료 출신이 경제부총리로 임명되며 외부인사라 해도 경제학자인 것이 보통인데, 쭉 상공부에서 근무한 정통 통상산업관료가 경제부총리로 영전한 것은 유례를 찾기 어렵다. 그럼에도 무난히 경제부총리직을 수행하고 국무총리로 영전했으니, 이는 그만큼 한덕수 전 총리가 뛰어한 능력을 가진 인사임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12] 이는 한덕수가 우파하고 비슷한 경제정책을 지향해온 점, 또한 퇴임한 이후에도 조순 전 한나라당 대표및 제1대 민선 서울특별시장과 함께 보수계 쪽에서 선망하며 존경하는 경제계 원로로써 활동하는 이력이 있었으며, 참여정부의 경제우클릭시도를 하게 만든 주요요인들 중 하나로 거론된다. 실제로 한덕수는 경제정책이 한나라당하고 비슷한 부분도 매우 많았으며, 경제 관련 활동들이 전부 우파하고 비슷한 면모를 많이 보여왔다. 이로 인해 한나라당 등 보수계열에서도 노무현을 비판했을 망정, 한덕수의 비판수위는 노무현의 비판수위보다 훨씬 약했다. 또한 한덕수를 비판하는 것은 참여정부 관련문제였지, 개인에 대해서는 고건과 같이 보수계열에서도 호평을 받는 부분이 있기 때문에 어찌보면 노무현하고는 맞지않는 부분들이 많았을 것으로 추정된다.[13] 정확하게 알고싶다면 링크를 참조하자.[14] 장관은 인사청문경과보고서의 채택 없이도 임명 강행이 가능하지만, 그와 반대로 국무총리는 국회의 인준을 받지 못하면 임명 자체가 불가능하다.[15] 다만 이때문에 정호영 보건복지부장관 후보자 등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이 지명한 후보자들이 심각한 결격사유로 논란이 되자 인사청문회에서 본인이 추천한 것이라면 책임을 져야되지 않냐는 민주당 청문위원들의 맹공을 받아야 했다.[16] 가장 논란이 큰 정호영 후보자에 대한 임명 강행만 보류하고 있다. 결국 한 총리가 인준 표결을 통과한 이후 정 후보자는 그에 대한 대가로 자진사퇴했다.[17] 이후 8회 지선에서 광역자치단체장 선거 및 국회의원 보궐선거에 출마한 민주당 후보들(= 표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는 사람들)이 줄줄이 인준 찬성 의견을 표명했다.[18] 대한민국의 경우, 보통 아시안 게임, 올림픽 등의 국제 문화, 스포츠 행사에 문체부 장관을 파견하지만 항저우 아시안 게임에서는 기존보다 격을 크게 높여 국무총리를 파견했다. 중국에서도 이를 두고 한국이 한중관계를 중시한다는 시그널로 받아들였고 이에 화답하는 모습을 보였다.[19] 국무위원 해임건의안 자체는 여러 번 통과된 이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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