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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로우안 (튀니지) | ||
유네스코 세계유산 | ||
이름 | 카이로우안 고대도시 | |
Kairouan | ||
국가·위치 | 튀니지 카이로완 주 | |
등재유형 | 문화유산 | |
등재연도 | 1988년 | |
등재기준 | (i)[1], (ii)[2], (iii)[3], (v)[4], (vi)[5] |
아랍어 القيروان[6]
영어 Kairouan / Cairoan
1. 카이로우안 시
튀니지 동부에 위치한 중세 도시. 케루안, 카이로완, 카이라완 등으로도 불린다. 우마이야 왕조의 초대 칼리파 무아위야 1세의 원정대가 670년에 동로마 제국으로부터 이프리키야[7]를 정복하고 세운 군단 기지에서 비롯되었다. 지명은 페르시아어로 군사 기지를 뜻하는 카라반에서 유래되었다. 베르베르어로는 티키르완으로 불린다.
9세기에 아글라브 왕조의 수도로 번영했아나, 이후 시아파인 파티마 왕조 치하에서 이프리키야의 중심지가 알 마흐디야로 이전되며 홀대받던 카이로완은 파티마 조의 속국이던 지리 왕조의 수도가 되며 재차 번영하였다. 하지만 지리 왕조가 수니파로 개종하며 독립을 선언하자 파티마 조는 힐랄, 술라임 부족을 보내어 키이로완을 파괴하였다. 도시는 다시 그 영광을 되찾지 못하였다. 카이로완의 현재 인구는 19만명으로 추산되며, 튀니지에서 5번째로 큰 도시이다.
우크바의 대모스크(카이로우안 대모스크)가 성지이자 관광지로 유명하며, 도시의 랜드마크이다. 대모스크는 마그레브에 지어진 첫 마스지드로서, 이슬람의 여러 성지들 중에서도 메카, 메디나, 예루살렘 다음가는 위치를 가지고 있다. 무슬림들에게는 카이로완을 7번 순례하면 핫지 (메카 순례)와 같다는 믿음이 있을 정도이다. 사원의 자이투나 대학은 지금도 카이로의 알 아즈하르 대학에 버금가는 명성을 지니고 있다.
1.1. 역사
1.1.1. 이프리키야 총독부
670년 우마이야 왕조의 장군 우크바 빈 나피가 마그레브의 전진 기지로써 야생의 숲 한가운데에 있던 옛 동로마 성채에 건설했다. 다만 이후로도 쿠사일라 등 현지 베르베르 부족들의 저항이 이어져 685년 우크바는 비스크라 부근에서 전사했고, 702년에애 카히나 여왕의 죽음으로 카이로우안이 이프리키야의 치소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1.1.1.1. 베르베르 대항거
반세기 가까운 안정기 후, 741년 말의 베르베르 대항거 시기 카이로완은 반군의 주요 공격 목표가 되며 혼란을 겪는다. 바그도우라 전투에서 카이로완 총독 쿨숨 빈 이야드 알 카이시를 전사시키는 등 시리아 군대를 격파한 베르베르 반군은 이프리키야를 휨쓸었다. 쿨숨의 조카이자 후계자 발즈 이븐 비슈르 알 쿠샤이리는 잔여 병력과 안달루스에 있었지만 바다를 건너 도전하지 못했고, 이에 칼리파 히샴은 한달리 빈 사프완을 새 총독 겸 마그렙 & 안달루스 등 제국 서부의 부왕으로 봉하여 병력을 끌어모아 어떠한 수단이든 반란을 진압하라는 명과 함께 파견했다.742년 초, 한달라는 이집트를 하프사 이븐 알 왈리드 알 하드라미에 맡기고는 바르카 및 트리폴리 등에서 병력을 증원했다. 그동안 이프리키야의 카디 (법관) 압둘라흐만 이븐 우크바 알 가파리가 카이로완의 수비대를 이끌며 튀니지 남부에 기반한 수프리 카와리지 지도자 아카샤 이븐 아이유브 알 페자리의 공격을 막아냈다. 그해 4월, 다른 베르베르 군벌 압둘와히드 이븐 야지드 알 하와리와 연합한 아카샤의 2차 공격이 임박한 카이라완에 당도한 한달라는 두 군대가 부근에서 합류하기 위해 접근하던 무렵 기병대를 보내어 서쪽에서 오던 압둘와히드를 타격해 지연시켰다. 그리고 나머지 군대로 남쪽에서 오던 아카샤와 엘카른에서 접전을 벌인 끝에 격파하고 그를 사로잡았다.
쉴 틈도 없이 한달라는 이제 과장 섞어 30만이라 하는 유례 없는 수준의 베르베르 대군을 이끌고 온 압둘와히드를 대적하기 위해 카이라완 주민 전부를 무장시켜 군세를 부풀린 후 재차 출정했다. 742년 5월, 중세 이프리키야 역사상 최대의 군사 충돌인 카이라완 외곽의 엘아스님 전투에서 한달라는 격전 끝에 승리를 거두었다. 압둘와히드는 일대일 전투 중 전사했고, 12 ~ 18만에 달하는 베르베르인이 죽었다고 전해진다. 그후 이프리키야 총독을 지내던 한달라는 745년, 우크바의 증손인 압둘 라흐만에게 축출되었다. 후자는 3차 피트나로 우마이야 조가 혼란에 빠지니 아미르를 칭하며 피흐리 왕조를 세웠다.
1.1.2. 피흐르 왕조
압둘라흐만이 추진한 우마이야 조로부터의 자립 및 중앙집권화[8] 시도는 베르베르 뿐만 아니라 아랍 부족들의 반란을 야기했다. 카이라완에 도읍한 압둘라흐만은 전투 끝에 튀니스에서 봉기한 아르와 이븐 앗 주바이르 앗 사데피, 타비나스의 이븐 아타프 알 아즈디, 베자의 베르베르 군벌 사비트 앗 산하지 등을 모두 격파했다. 또한 압둘라흐만은 745년 이래호 내분을 겪던 안달루스[9]에 파병해 질서를 회복했고, 중재를 통해 그의 아들 유수프가 총독으로 선출되었다. 다만 서부 마그레브는 여전히 독자적인 베르베르 부족들의 수중에 있었고, 동족들이 거둔 성과에 고무된 이프키리야의 베르베르 인들은 그들 역시 독립국을 세우려 하였다. 그중 제르바 섬과 오에아의 베르베르 인들은 이바디 카와리지 이맘 하리스의 지도 하에 봉기하여 압둘라흐만의 동생 일야스를 격파하고 가베스 ~ 트리폴리 ~ 시르테 해안을 장악하였다.이에 752년, 압둘라흐만은 토벌군을 보내 그들을 남쪽의 나푸사 산지로 몰아냈다. 같은해 그는 시칠리아 정복을 시도했으나 방어가 삼엄한 것을 보고 약탈전으로 국한시켰다. 한편, 궁지에 몰린 마르완 2세로부터 이프리키야 지배권을 인정받은 압둘라흐만은 신생 압바스 왕조에 자신의 지위 인정을 요구했으나 복속을 요구받자 반기를 들었다. 쿠트바 (금요 예배문)에서 앗 사파흐 언급을 중단하고, 그가 보낸 예복을 공개적으로 불사른 그는 (히샴의 손자 아브드 알 라흐만 1세 등) 피난해 온 우마이야 왕족들을 수용하여 카이라완의 카디 등 고위직에 임명했다. 압둘라흐만의 동생 일야스는 우마이야 공주와 결혼해 인척을 맺었다. 다만 점차 우마이야 왕족들이 반대파와 결탁해 자신의 약한 정통성을 위협할까 염려된 압둘라흐만은 서서히 적대감을 표출했다.
그러자 압둘라흐만 1세 등은 나푸사 산지로 피신했고, 755년 안달루스에 당도한 후 이듬해 유수프 알 피흐리를 폐하며 후우마이야 왕조를 세운다. 한편 755년, 압둘라흐만은 우마이야 가문원 카디가 주모자로 지목된 역모 사건을 계기로 우마이야 가문 및 그 세력을 대거 처형했다. 다만 인척을 맺은 제수는 벌하지 않았는데, 그녀는 남편 일야스에게 복수를 계기로 찬탈할 것을 설득했다. 이에 동의한 일야스는 관저에서 자녀들과 놀아주던 형의 등에 칼을 꽂아 죽였고,
그러나 일야스의 동생 압둘와레스 등 그 잔당이 남쪽의 수프리 카와리즈파를 믿는 와르파주마 베르베르인들에게 망명하여 도움을 청하였다. 한달라에게 패한 후 약 10여년간 산지에 웅거했던 와르파주마 부족장 아심 이븐 자밀 알 와르파주미는 압둘와레스의 설득에 출정했고, 알 만수르에 복속을 표했다. 이에 하빕은 카디 아부 쿠라입에게 카이라완을 맡기고 출정했으나 대패하여 가베스로 피신했다. 그후 하빕은 아부 쿠라입에게 원군을 요청했으나, 파견된 원군은 반군과 마주하고는 그들이 압바스 조에 복속했음을 밝히자 오히려 귀순해버렸다. 757년 초엽, 아심은 압바스 조의 검은 깃발을 앞세워 카이라완에 무혈 입성했다. 이에 하빕은 아우레스 산지에서 군대를 모아 카이라완으로 진격했으나, 그 근교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패하고 전사했다. (757년 6월) 자신들 외에 전부 죽어 마땅한 불신자로 여기던 수프리 카와리지 교리에 따라 아심은 주민들을 학살하고 도시를 약탈했다.
1.1.3. 이바디 이맘국 & 무할라브 家
752년 나푸사 산지로 피신했던 이바디 카와리지 세력은 757년, 이맘 아불 카탑의 지휘 하에 피흐르 조의 혼란을 틈타 오에아를 점령하였다. (이바디 이맘국) 수프리 세력의 학살 소식에 경악한 아불 카탑은 758년, 와르파주마 군대를 몰아내고 카이라완을 차지하며 이프리키야의 주요부를 장악했다. 이에 칼리파 알 만수르는 개국공신인 무함마드 이븐 알 아샤트 알 쿠자이를 이집트 및 이프리키야 총독에 봉하여 토벌을 맡겼다. 그는 2차례 원정군을 보냈으나 모두 이바디 측에 격퇴되자 761년, 직접 출정하여 미스라타 부근에서 벌어진 타와르가 전투에서 아불 카탑을 전사시켰다. 카이라완을 지키던 아불 카탑의 페르시아계 부관 압둘라흐만 빈 루스탐은 서쪽의 타헤르트로 도망쳐 후일 루스탐 왕조를 세운다.이맘국의 멸망 후에도 무함마드 알 쿠자이 이후 765-68년간 총독이 5번이나 바뀔 정도로 이프리키야의 불안은 계속되었다. 특히 765년에 부임한 후라사니 아랍인 압바스 개국공신 알 아글라브 이븐 살림 앗 타미미는 이듬해 알 하산 이븐 하르브 알 킨디에 의해 피살되었다. 그러던 768년, 총독으로 부임한 우마르 이븐 하프스 알 무할라비가 서쪽 투브나의 방어를 강화하는 틈에 베르베르 인들이 봉기하였다. 이에 카이라완 성주 하빕 알 무할라비가 반격에 나섰으나 전사했다. 그후 이바디 이맘 아부 하팀 야쿱의 지휘 하에 베르베르 반군은 트리폴리 부근에 집결하였다. 현지 태수의 요청에 따라 우마르는 원군을 보내었지만 격파되어 가베스로 후퇴했다. 이후 수프리파의 아부 쿠라 알 이프라니, 이바디파의 압둘라흐만 빈 루스탐, 아부 하팀, 아심 앗 시드라티 등이 이끄는 카와리지 연합군이 투브나를 포위했다.
우마르는 아부 쿠라를 매수, 압둘라흐만을 격파했고 이에 아부 하팀은 투브나 대신 카이라완 공격에 나섰다. 투브나를 계속 요새화하던 우마르는 8개월간 포위된 카이라완이 위급하다는 소식에 일부 병력을 남긴 채로 구원에 나섰다. 진격하던 우마르는 베르베르 군의 반격에 튀니스로 철수하기도 했으나, 결국 보급품과 함께 카이라완에 입성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아부 하팀이 봉쇄를 강화하며 도시의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고, 주민들은 가축을 잡아먹으며 버텼다. 이에 우마르는 성을 나가 포위망 돌파를 시도했으나 패하고 전사하였다. (771년) 이후 잔존 수비대는 아부 하팀과 협상하여 투브나로 철수했고, 이바디 베르베르 군이 카이라완을 함락했다. 다만 트리폴리는 함락되지 않았고, 8년간의 이집트 총독을 지낸 후 신규 이프리키야 총독으로 부임한 야지드 이븐 하팀 알 무할라비는 그곳을 거점으로 출정해 772년 초엽 아부 하팀 야쿱을 전사시키고 몇달 간의 잔당 소탕 끝에 반란을 진압하였다. 이는 이프리키야의 마지막 이바디 이맘국이었다.
야지드는 773년 카와리지, 781년 자브의 와르파주마 부족 등의 난을 진압하며 질서를 회복했다. 이어진 평화 속에서 그는 파괴된 카이라완 대사원을 복원했고, 16년간 재임하다 787년 사망하여 성문 근처에 묻혔다. 사후 아들 다우드가 계승했으나 통치력 결여로 지방을 통제하지 못했고, 이에 칼리파 하룬 알 라시드는 야지드의 동생 라우흐 빈 하팀을 총독으로 봉했다.[11] 다만 라우흐 역시 평판이 나빴고, 이를 우편국장이 보도하자 칼리파는 평판이 좋은 나스르 빈 하빕을 비밀리에 총독으로 지명했다. (791년) 마침 그해 초, 라우흐가 죽자 아들 카비사흐가 계승했으나 우편국장이 칼리파의 칙서를 보이자 나스르가 집권하였다. 다만 라우흐의 다른 아들 알 파들이 바그다드로 가서 칼리파를 설득하는데 성공, 793년에 총독으로 봉해졌다. 나스르는 즉시 해임되었고, 알 파들의 당도 전까지 알 무할라브 빈 야지드가 임시 총독으로 재임했다. 하지만 알 파들은 나스르 선호를 보인 준드 (현지 주둔군)를 박대하여 긴장감이 조성되었다.
특히 튀니스에서는 준드가 태수이자 알 파들의 조카 알 무기라 빈 비슈르와 적대, 새 태수의 임명을 청했으나 알 파들은 거부했다. 이에 튀니스의 준드가 압둘라 이븐 알 자루드 하에 봉기하여 알 무기라를 축출했다. 그후 압둘라는 알 파들에게 반역의 뜻은 없고, 단지 적합한 이를 새로 임명해주기를 바란다는 서신을 보냈다. 따라서 알 파들은 사촌 압둘라 빈 야지드 빈 하팀을 튀니스 태수로 봉해 파견했으나, 압둘라가 협상차 보낸 수하들이 명령을 어기고 그를 공격해 죽여버리는 사태가 터졌다. 이에 더이상 타협이 불가능하다 여긴 압둘라는 공개적으로 반란을 일으켰고, 이프리키야 각 도시들의 준드게 알 파들의 박대를 일깨우며 동참을 청했다. 이에 여럿이 호응하자 알 파들은 토벌에 나섰으나 패하여 카이라완으로 철수했다. 하지만 곧 압둘라가 도시를 포위했고, 주민들이 협상 끝에 성문을 열었다. (794년 10월) 이후 알 파들 및 그의 일행은 약속대로 가베스로 향했으나, 압둘라는 후환을 없애기 위해 알 파들을 처형하고 나스르 등 무할라브 가문 전원을 이프리키야에서 축출했다.
1.1.4. 아글라브 왕조
아글라브 시기에 건설된 저수조
준드 반란 후 795년, 압바스 조정은 발흐 출신의 하르마타 빈 아얀을 총독으로 파견했다. 상황이 좀 안정된 797년에는 하룬 알 라시드의 의붓 형제인 후라사니 아랍인 무함마드 이븐 무카틸 알 악키가 총독으로 부임했다. 그해 말엽, 카이라완에 당도한 무함마드는 빠르게 준드와 대립 관계가 되었다. 결국 마클리드 이븐 무라흐 알 아즈디의 반란이 터졌고, 무함마드는 군대를 보내 그를 죽이며 난을 진압했다. 그러나 799년 10월, 탐맘 이븐 타밈 앗 타미미가 재차 준드와 함께 튀니스에서 봉기하여 호응을 얻었다. 반군이 카이라완으로 남하하자 무함마드는 출정했으나 패하여 도시로 퇴각했다. 카이라완을 무혈 점령한 탐맘은 무함마드에게 이프리키야 퇴거를 대가로 안전을 보장했고, 후자는 수용하여 트리폴리로 향했다. 다만 트리폴리에 있는 동안 전 총독의 아들이자 795년부터 자브 태수를 맡고 있는 이브라힘 이븐 알 아글라브가 탐맘에게서 카이라완을 수복, 서신으로 이를 알렸다. 따라서 799년 말엽, 무함마드는 총독으로 복귀했다.
튀니스로 철수했던 탐맘은 재차 카이라완을 공격했으나 이브라힘에게 격퇴되었고, 결국 복속하였다. 하지만 무함마드의 실정이 계속되자 이브라힘은 칼리파에게 이를 고발하며 4만 디나르 금화의 연공을 대가로 총독위를 요구, 수용되었다. 이로써 800년 7월, 이브라힘이 이프리키야 총독에 오르며 1세기 넘게 이어진 아글라브 조가 시작된다. 이브라힘은 802년 함디스 이븐 압둘라흐만 알 킨디, 809년 임란 빈 무칼라드 등 준드의 반란을 진압했다. 이후 준드에 대한 의존을 줄이고자 이브라힘은 흑인 노예 부대를 창설했다. 반란을 미연에 방지하고자 이브라힘은 카이라완의 성벽을 허물었고, 도시의 4km 남쪽에 새 궁정도시인 알 압바시야를 세워 거주하였다. 신 수도에는 벽돌 모스크, 루사파 궁전, 목욕탕, 시장, 여관 등이 있었고 거대한 저수조는 카이라완에도 물을 공급했다. 궁전 근처에는 군대 열병식이 열리는 큰 광장이 있었고, 여러 성문들에는 해방 노예로 구성된 수비대가 배치되었다. 그외에 시내에는 금화 및 은화 주조소, 궁정 예복 및 깃발 제조 공방 등이 있었다.
종교적으로 무타질라파에 속하던 이브라힘은 카이라완의 말리크파 울라마를 견제, 무타질리 이맘인 아부 무흐리즈를 카이라완 카디로 임명했다. (806년) 이프리키야에 안정을 회복한 이브라힘은 812년 7월에 사망했고, 아들 압둘라가 계승했다. 압둘라는 토지세를 현물이 아닌 현금으로 내게 했다가 여론의 반발에 직면했고, 817년에 요절했다.[12] 그를 계승한 동생 지야다탈라 1세는 824년, 대대적인 준드 반란을 겪었지만 베르베르 부족들과 연합하여 진압했다. 827년에는 시칠리아 정복에 나섰는데, 이는 시칠리아의 내분에 개입한 것도 있지만 지하드 (성전)를 통해 내부 반발을 방지하고 준드의 칼날을 외부로 돌리기 위함도 있었다. 지야다탈라는 838년까지 20년 넘게 재위하며 베르베르 및 준드 세력 모두를 복종시킴으로써 이프리키야를 안정시켰다. 사후 동생 아부 이칼 알 아글라브가 계승했다가, 841년에 사망한 후 아부 이칼의 아들 무함마드 1세가 즉위했다.
그의 치세에 아글라브 군은 메시나를 점령하고 부테라 전투에서 대승하는 등 시칠리아 정복의 주도권을 잡았다. 무함마드 1세 역시 846년과 849년 로마를 습격하는 등 서지중해를 호령했다. 대외 활동에 적극적이던 무함마드 1세는 856년 시칠리아에서 사망했고, 사후 아들 아부 이브라힘 아흐마드가 계승하여 부친과 달리 평화와 안정을 추구하다가 863년에 요절했다. 사후 동생 지야다탈라 2세가 계승했다가, 1년만에 역시 요절하여 아흐마드의 아들 무함마드 2세가 즉위했다. 그의 치세에 다시 대외 정복이 활발해져 870년 몰타가 정복되었고, 살레르노 포위가 있었다. 다만 메카 순례단에 의해 역병이 퍼져 기근과 인구 감소를 겪었고, 향락에 빠져 살던 무함마드 2세는 875년 사망했다. 이후 여론과 울라마는 그의 어린 아들 대신 카이라완 총독을 맡으며 선정을 펼쳐 존경과 기대를 받던 동생 이브라힘 2세를 아미르로 추대하였다. 그는 카이라완 대사원을 확장했으며, 현존하는 거대한 저수조를 세우는 등 여러 건축 사업에 나섰다.
이브라힘은 우선 차츰 자립을 꾀하던 시칠리아에 3차례 대군을 파견해 현지 군부를 진압하는 등 강력한 중앙 집권 정책에 나섰다. 876년에는 기존의 압바시야를 대체하기 위해 카이라완 남서쪽에 나른하다는 뜻인 새 궁정도시 라카다를 세우고 입주했다. 라카다는 10km 둘레의 성벽을 지녀 카이라완만큼 컸고, 아불 푸투흐란 거대한 탑이 있었다. 시내에는 우마이야 양식으로 세워진 여러 궁전과 병영 및 넓은 정원, 수용장, 유압 장치 등이 있었다. 왕권의 우월함을 드러내기 위해 시가지는 반으로 나뉘어 한편은 아미르 전용이었고, 나머지는 모스크 및 시장과 목욕탕 등이 있어 상류층이 거주했다. 매주 금요 예배 후 이브라힘은 라카다에서 공개 조정을 열어 서민들의 고충을 직접 들었고, 백성을 잘못 대한 귀족은 군주에 대한 모욕으로 간주해 엄중히 처벌했다. 그 대상에서는 왕족도 예외가 없었고, 그나마 존중하던 모후 (사이다)에게도 민사 패소 판결을 내렸다.[13] 878년에는 라카다에서의 취임식 중 아불 푸투흐 탑에서 선대의 근위대를 학살하고, 수단인 (흑인) 노예 병사로 대체했다.
888년 ~ 889년의 동전 개편 후 카이라완에서 폭동이 벌어졌으나 진압되었고 동방의 보석 유입이 활성화되었다. 이와 함께 관개 수로 개선으로 농경을 진흥시킨 이브라힘은 국가 재정 증대 및 여론의 지지를 바탕으로 중앙집권화 및 왕권 확립을 위해 아랍 귀족 계층의 기반인 준드 (아랍 군부)를 억압했고, 수단 군대를 중앙군의 중추로 삼았다. 여기에 일부 시칠리아 등 슬라브인 노예도 더하여 1만 상당의 노예 군대를 편성했다. 소외된 준드는 새 군대 유지를 위한 세금 인상까지 가해지자 분노했고, 바트나 인근 벨레즈마의 영주들이 각종 징발에 반발해 봉기하자 이브라힘은 직접 불만을 듣겠다며 협상을 빙자해 그들을 라카다로 초대했다. 그들이 응하자, 이브라힘은 화려한 연회를 베풀어 준 후 밤을 틈타 근위대를 보내 1천에 달하는 준드 일행을 숙소에서 모두 학살했다. (893년) 참상이 전해지자 전통이 강한 튀니스를 중심으로 전국의 준드에서 반란이 일어났고, 한때 라카다 외의 통제권을 상실하는 등 궁지에 몰렸던 이브라힘은 수단 노예 군단의 무자비한 진압으로 이듬해 반란을 평정했다.
901년, 아들 압둘라가 시칠리아의 내전을 잠재울 무렵 세력을 압바스 칼리파 알 무타디드가 이프리키야 주민들의 원성을 듣고는 사절을 보내 이브라힘의 폐위를 선포했다. 이브라힘은 놀랍게도 명목상이기만 한[14] 칙령대로 아들에게 양위했고, 후자가 압둘라 2세로 즉위했다. (902년) 이브라힘은 또한 개과천선을 외치며 연공을 바치고, 불법 세금을 폐하고, 대사면을 향하고, 노예를 해방시켰으며, 재물을 카이라완 울라마에 필요한 자에 배분하도록 내주었다. 다만 칼리파의 바그다드 소환 명령은 육로로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경유해서 이행할 것이라 아뢰며, 스스로 죄를 씻기 위해 무자히드 (성전사)임을 선포한 후 자원자들을 모아 시칠리아로 향했다. 타오르미나[15]를 함락한 그는, 바다 건너 칼라브리아 원정 중 병사했다. 한편 압둘라 2세는 말리키를 하나피 학파로 바꾸려다 1년만에 아들 지야다탈라 3세에게 시해되었다. 패륜으로 즉위한 지야다탈라는 음주와 장난을 좋아해 인기가 없었다. 904년부터 아부 압둘라 앗 쉬이의 베르베르인 이스마일파 반군에 조금씩 패배를 이어갔고, 905년의 1차 토벌이 실패한 후 906년 3월에는 2차 토벌군이 카이라완에서 반란을 일으켜 감옥의 모든 죄수들을 풀어주기도 하였다.
그간 튀니스에 있던 지야다탈라는 907년, 라카다로 향하여 판축 흙과 말린 진흙 벽돌 등으로 성벽을 보강하고 아우레스 산지로 3차 토벌군을 보냈으나 역시 패하며 바가야를 상실했다. 그 충격으로 재상 이븐 앗 사이그가 이집트 도피를 권하는 등 라카다 궁정은 혼란에 빠졌고, 지야다탈라는 낙타 5백 마리를 구매해 탈출하려다 마지막 한번 더 저항하기로 하여 반쉬아 연설과 함께 금을 뿌리며 자원병을 모았다. 지야다탈라는 모인 군대를 카이라완 서쪽의 알 아리부스 (라리부스)에 배치하고 동생 이브라힘에게 맡겼다. 이브라힘은 예상 외로 선전하며 1년 이상 파티마 군대를 저지했지만, 909년 3월에 패배했다. 이브라힘은 패잔병과 카이라완으로 철수했고, 다음날 라리부스가 항복하자 학살이 벌어졌다. 이러한 소식이 도달하자 지야다탈라는 옷감, 보물, 무기, 가구, 돈 등을 낙타에 실었고 1천의 슬라브 호위대 각자의 허리띠에 1천 디나르 씩을 숨기게 했다.[16] 마지막으로 수감자들의 집단 처형 및 재무부 문서 소각 후 지야다탈라는 밤중에 횃불을 들고 동남쪽 이집트 방면으로 도주했다.[17]
1.1.4.1. 경제적 & 문화적 번영
아글라브 왕조 시절 카이라완은 이슬람권 서부에서 가장 부유한 도시로 알려졌고, 그 명성은 이라크의 쿠파나 바스라에 버금 갔다. 9세기에 걸쳐 수 차례의 확장으로 현재와 같은 거대한 규모를 지니게 된 카이라완 대사원 (우크바 모스크)에는 부속 대학 역시 설립되었고, 이슬람 사상 및 세속 과학이 연구되었다. 이로써 카이라완은 아랍-이슬람 문명에 있어 이슬람권 각지에서 학자들이 몰려드는 지식의 전당이자 이슬람 사상의 보급처가 되었다. 당대의 유명한 학자로는 하나피파와 말리키파를 절충해 아사디야를 창안한 아사드 이븐 알 푸라트, 무타질라파와 이바디파를 배격한 말리크파 하디스 학자 이맘 사흐눈 등이 있었다. 전자의 경우 카이라완 법관을 지내던 중 지야다탈라 1세의 미움을 사 시칠리아 원정 사령관으로 보내져 시라쿠사 포위 중 사망하기도 하였다.한편 아글라브 시기에 세워진 여러 모스크, 궁전, 성벽, 정원 등의 건축물 중에서는 대사원과 저수조 등만이 남아있다. 9세기 무렵 카이라완을 방문한 프랑크 왕국의 사절들은 화려한 궁전과 도서관, 정원에 감탄하면서도 집권층의 음주가무 및 잡다한 사치를 충당하기 위한 높은 세금을 비판했다. 그럼에도 아글라브 왕조 시기는 튀니지 중세 역사에 있어 가장 평화롭고 풍요로운 기간이었다. 909년, 아글라브 조를 정복한 압둘라 알 마흐디는 라카다의 궁전들과 튀니스의 급수 시설[18]이 마슈리크가 견줄 수 없는 마그레브의 진기함이라 평하였다. 하지만 카이라완은 파티마 조를 거치며 쇠퇴했다.
1.1.5. 파티마 왕조 : 10세기
893년부터 쉬아 반란을 일으켜 마침내 성공시킨 아부 압둘라 앗 쉬이는 909년 6월, 쿠타마 베르베르의 아부 자키와 자신의 동생 아불 압바스를 카이라완에 남겨두고 모로코의 시질마사에 있던 이맘을 데려오기 위해 서쪽의 시질마사로 향하였다. 11월, 카이로완 대사원에서는 훗자툴라 (신의 증거)인 이맘이 모습을 드러냈다는 앗 쉬이의 서신이 낭송되었다. 910년 1월, 카이라완에 입성한 압둘라는 자신을 선지자의 딸 파티마의 후손인 알 마흐디 (메시아, 구원자)로 칭하며 파티마 왕조의 개창을 알렸다. 다만 바로 이듬해, 알 마흐디는 개국공신 앗 쉬이를 숙청했다.이에 카빌리 지역에서 쿠타마 베르베르인들의 반란이 벌어졌고, 라카다에서도 베르베르인끼리의 무력 충돌이 벌어졌다. 912년에는 카이라완 시민들이 봉기하여 쿠타마 베르베르 수비대를 학살하였다. 이러한 혼란을 겪은 후 마흐디는 기존 라카다를 대신할 새로운 수도로서 913년부터 알 마흐디야를 건설하였다. 916년에 대사원이 지어졌고 921년에 천도하였다. 이후 카이라완은 중요성을 잃고 쇠퇴했다. 그러던 943년, 카와리지파 마흐디라 칭한 아부 야지드 마크라드가 하와라 베르베르 부족과 함께 반란을 일으켜 카이라완을 목표로 진격했다. 무서운 기세로 나아간 반란군은 라리부스에 이어 944년 10월, 카이라완을 점령했다.
마크라드는 파티마조의 박해를 받던 말리키 학파의 환영을 받았고, 파티마 칼리파에게 임명된 카이라완의 카디와 사령관은 처형되었다. 다만 하와라 반군의 악행과 마크라드의 사치로 여론은 금방 돌아섰다. 그해 11월, 카이라완 수복을 위해 슬라브 출신 장군 마이수르 알 파타의 지휘 하에 파견된 파티마 군대는 마크라드에 의해 격파되었고 알 파타 역시 전사하였다. 뒤이어 마크라드는 스승 아부 암마르에게 카이라완을 맡기고 파티마 조를 끝장내기 위해 알 마디야 공세에 나섰으나 격전 끝에 패하여 카이라완으로 철수했다. (945년 여름) 초심대로 금욕을 보이며 민심을 추스른 마크라드는 946년 초엽, 다시 파티마 조에 복속한 수스를 공격했으나 역시 긴 공성전 끝에 패배했다. 그가 카이라완으로 돌아가던 시기, 주민들이 봉기하여 아부 암마르를 축출하고 마크라드의 입성을 막았다.
이에 마크라드는 카이라완 외곽에 주둔하며 파티마 군대와의 결전을 준비했고, 신임 파티마 칼리파 이스마일 알 만수르는 며칠 후 카이라완에 입성했다. 946년 6월, 이스마일은 카이라완 외곽에서 '신의 대리자'를 상징하는 장막 아래에서 '알리의 검'으로 알려진 줄피카르를 차고 마크라드와의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이후 마크라드는 2개월간 카이라완을 공격했으나 결국 실패하고 아우레스 산지로 철수하였다. 뒤이어 카이라완에 마크라드의 후방을 괴롭히던 음실라 총독 알리가 당도하자, 이스마일은 그와 연합해 친정에 나섰다. 1년여간 치열히 싸운 끝에 반란은 진압되었다. 마흐디가 오기 전에 세상을 어지럽히는 닷잘, 즉 적그리스도 역할의 마크라드가 제거되자 이스마일은 자신이 진정한 마흐디라며 왕권을 다졌다. 또한 그는 말리키 법학파에게도 유화적인 자세를 취하여 포용하는 지도자로 보이려 했다.
그 일환으로 카이로완 남쪽 2km 외곽에 앗 사브르 알 만수리야 (지속적인 승리), 즉 만수리야라는 궁전 도시를 세워 천도하였다. 건설에는 반란 당시 파괴된 옛 수도 라카다의 자재를 활용되었고, 이렇게 세워진 라카다는 100 헥타르의 원형도시로써 원형도시 바그다드를 수도로 한 압바스 칼리파와의 체제 경쟁을 상징하였다. 한편 카이라완에는 40여년만에 말리키 학파 출신의 카디가 선출되었고 '이맘의 도시' 만수리야에는 파티마측 카디가 선임되어 두 축의 공존을 상징하였다. 반란을 겪으며 내륙의 중요성을 절감한 이스마일은 최대한 카이라완의 순니 민중을 존중하며 보편 제국으로 나아가려 추진했다. 다음 칼리파인 알 무이즈는 카이라완의 카디 앗 누만에게 자신의 통치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교리서인 '다아임 알 이슬람'을 저술하게 했고, 그 대가로 앗 누만 가문이 세습적으로 파티마 조의 카디를 역임하게 했다.
이후 만수리야는 25년간 제국의 수도로 기능했고, 카이라완은 그 배후 도시로써 다시 중시되었다. 969년 2월 공신 자우하르가 이집트 원정에 나서자 알 무이즈는 성대한 예복을 차려입고 가족 및 문무백관과 함께 배웅했다. 그해 여름, 이집트 정복 후 자우하르는 기존의 푸스타트 북쪽에 또다른 만수리야를 세웠다가 알 카히라로 개칭한다. 이후 새 정복지가 어느정도 안정되자 972년 말엽, 알 무이즈는 카히라로 천도하였다. 이렇게 제국의 중심지가 아예 이프리키야를 떠나 이집트로 이전된 후 카이라완은 그저 지방 도시 중 하나로 남았다. 한편, 알 무이즈는 후우마이야 조에게 피살된 지리 빈 마나드의 아들 불루긴을 이프리키야 총독으로 삼아 제국의 서부를 부왕으로써 통치하게 하였다.
1.1.6. 지리 왕조의 수도 : 11세기
파티마 조가 이집트로 옮겨간 후, 그 제후국으로써 이프리키야를 통치하게 된 베르베르계 지리 왕조는 재차 만수리야를 수도로 삼았다. 980년 페스와 1014년 서부 알제리를 상실한 후 지리 왕조는 이프리키야 국가로 변모했고, 카이라완은 다시 만수리야와 연계하여 중시되었다. 도시는 상업적, 예술적, 농경적으로 발전했고 교육의 장이라는 명성을 회복했다. 11세기 초엽, 카이라완은 높은 농산물 생산과 해외 교역을 바탕으로 지중해권의 식품 가공업 중심지로써 번영했다.1040년경에는 현 세네갈 북부의 베르베르 부족장인 야히야 이븐 이브라힘이 메카 순례 후 돌아오는 길에 카이라완에 들렸다. 그곳에서 페스 출신의 말리키 법학자 겸 아부 임란 알 파시를 만난 야히야는 당시 시아파 교리를 버리고록 지리 왕조의 아미르를 설득하는 시내의 분위기 상에서 깊은 신앙적 대화를 나눴다. 이로써 야흐야는 마그레브 서부의 이슬람이 정통에 이르지 못하다 여겨 고향으로 돌아간 후 새로운 신앙 운동에 나섰고, 이는 곧 무라비트 왕조로 발전했다.
1.1.6.1. 1057년 : 폐허로 변하다
그러던 1045년, 지리 왕조의 알 무이즈가 카이로완의 말리키 울라마 및 순니 여론의 지지와 함께 수니파 개종 및 독립을 선포했다. 이에 1051년, 파티마 칼리파가 응징차 보낸 베두인 힐랄 부족이 이프리키야를 대거 약탈하며 혼란기가 도래했다. 1052년 하이다란 산 전투에서 지리 군대는 마킨 앗 다울라가 이끄는 친파티마 계열의 힐랄 부족에게 대패하였고 이내 알 무이즈는 카이로완에서 포위되었다. 1054년까지 이프리키야의 내륙 지방은 베두인들에게 유린되었고 이로써 반달 족의 침공과 아랍 정복을 견뎌낸 관개 시설이 크게 파괴되었다. 이는 추후 천년간 완전히 복구되지 못하였다.1057년에는 마침내 수도 카이라완이 함락되었고, 알 무이즈는 겨우 해안의 알 마디야로 피신하였다. 지리 왕조는 해안에서 한세기 가량 더 이어졌다. 하지만 크게 파괴된 카이라완은 다시 옛 영광을 회복하지 못했고, 관개 시설 및 농경지가 제대로 관리되지 못하여 농경 문명이 유목 문화로 바뀌었다.[19] 대대적인 파괴로 폐허가 된 일대는 2세기 가량 방치되었고, 카이라완은 이름만 남긴 채 암흑기를 보냈다. 한편 튀니지의 새 중심지로 튀니스가 카이라완을 대체하게 된다.
1.1.7. 하프스 왕조 : 13~15세기
무와히드 왕조가 안달루스에 치중하던 1195년, 무라비트 왕조의 복원을 꾀하던 야흐야가 일대를 점령해 1204년까지 유지했다. 뒤이어 13세기 하프스 왕조 하에서 카이라완은 폐허 상태에서 점차 회복했다. 8차 십자군이 침공해오던 1270년, 하프스 칼리파 무함마드 1세 알 무스탄시르는 카이라완이 이슬람의 성지임을 부각시키며 시내의 유대인 주민들을 추방했다.1.1.8. 근대 : 오스만 & 프랑스
18-19세기, 오스만 제국의 제후국인 후사인 왕조 하에서 카이라완은 이슬람권에 걸친 종교적 명성을 회복했고 사원의 보수가 이루어졌다. 한편, 하프스 왕조기부터 비무슬림의 왕래가 금지되던 도시는 1881년 프랑스 군의 점령 후 유대인 공동체가 회복되는 등 다양성을 지니게 되었다. 1882년에는 카이라완 ~ 수스간 철도가 놓여 경제가 활성화되었다.1.1.9. 현대
1956년 튀니지 독립 후 더욱 빠르게 발전하여 현재는 튀니지의 주요 도시 중 하나로 남아있다. 카이라완 구도심은 1988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2023년 12월, 보수 공사 중 가죽 문 근처 성벽이 30m 가량 무너져 3명의 기술자가 다치는 사고가 있었다.1.2. 기타
구도심 서부에는 대사원을 축소, 모방한 형태인 자이투나 모스크가 있다
튀니지의 역사를 도시로 표현해 보자면 카르타고 - 카이로완 - 마흐디야 - 튀니스의 순서이다.
2. 카이로우안 주
카이로우안 주 (튀니지) | ||
[1] 9세기에 재건한 대모스크는 이슬람의 주요 기념물 중 하나일 뿐만 아니라, 보편적인 건축학적 걸작이다. 작은 변화가 있었을지는 모르지만 이 기도하는 장소는 세로 135m, 가로 80m의 사변형 형태라는 기본 배치를 유지하고 있다. 대모스크의 남쪽 끝에는 다주식(多柱式) 기도실이 있는데 포르티코(portico)가 있는 대리석으로 된 ‘숲’을 이룬 원주들이 17개의 네이브(nave)를 떠받들고 있고, 이보다 더 작은 북쪽 끝의 한가운데에는 거대한 정사각형 형태의 3층짜리 미너렛이 가로막고 있다.[2] 대모스크는 특히 그 독특한 장식 모티프 때문에 여러 마그레브 모스크들의 본보기가 되었다. 게다가 삼문 모스크(866)는 건물 정면에 조각을 새긴 이슬람 모스크로는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3] 수많은 고고학 유적들을 언급하지 않더라도 대모스크, 삼문 모스크, 아글라브 분지를 보면 카이로우안이 이프리키야 헤지라의 초기문명을 훌륭하게 보여 주고 있음을 알 수 있다.[4] 성벽과 성문들(바브 에트 토우네스, 바브 엘 코우카, 바브 에흐 초우하다)로 보호된 카이로우안의 메디나에는 구불구불 얽힌 도로와 안뜰이 있는 집들이 보존되어 있다. 메디나의 스카이라인은 미너렛과 모스크와 자위야의 둥근 지붕이 두드러진다. 외부 벽에는 몇 개 안 되는 작은 창문이나 아치형 출입구가 있지만, 벽 안쪽에는 중정을 두고 있어 넓고 개방적이다. 사회 경제적 변화의 영향에 취약해진 이 전통 건축물은 전체적으로 보호해야 하는 소중한 유산이다.[5] 카이로우안은 성도이자 이슬람의 정신적 수도 중 하나이다. 무함마드가 죽은 지 겨우 38년 후에 건축되었으며 마그레브에 세워진 최초의 예배 장소인 대모스크 옆에는 시디 사하브 자위야가 있다. 이곳에는 마호메트의 동료 중 한 명인 아부 자마의 유해가 보존되어 있다. 과거 카이로우안의 일곱 군데 순례지가 모든 이슬람교도들이 반드시 방문하는 메카의 순례지 한 군데를 대신할 수 있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6] 발음: al-Qayrawan (표준 아랍어) / Qeirwān (튀니지 아랍어)[7] 로마 시대 카르타고 속주. 알제리 동부 ~ 튀니지 ~ 리비아 서부 (트리폴타니아)까지를 이른다.[8] 일리아스를 트리폴리타니아 총독으로 봉하는 등의 조치[9] 한달라의 축출과 함께 그의 부관 아불 카타르 이븐 디라르 알 칼비 역시 폐위된 후 시리아 / 안달루스 아랍 군대끼리 충돌했다[10] 이때 아므란은 튀니스에 동행했다가 변심한 일야스에 의해 안달라스로 추방되었고, 하빕 역시 그렇게 될 운명이었으나 배가 떠나기 직전 부친의 당파가 구출하여 라리부스 전투에 나서게 된 것. 일야스는 일대일 대결을 꺼렸으나 휘하 군대의 종용으로 나서게 되었다[11] 이후 다우드를 달래기 위해 1년 가량 이집트 총독에 봉해진다[12] 주민들은 신의 징벌이라 여겼다[13] 두 상인에게 600 디나르의 돈을 빌리고 안 갚은 건[14] 심지어 아직 이집트 수복도 안된 상태다[15] 사실상 마지막 동로마령 시칠리아 도시였다[16] 이는 유사시에 낙타 행렬이 공격받을 때를 대비한 것으로, 후일 현실이 되었다.[17] 한편 파티마 측과 내통한다 여긴 재상 이븐 앗 사이그는 행렬에서 제외되었고, 그는 해로를 통해 시칠리아로 향하려 수스로 갔다. 이에 혼란 중에 착각한 시종들이 낙타 30마리 분의 재물과 함께 그를 따라갔다가 아부 압둘라 앗 쉬이에게 따라잡혀 압수되었다. 한편 이집트로 도주한 지야다탈라는 이프리키야 수복을 위한 군대를 청하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몇년 후 사망하였다.[18] 수도교, 배관 등[19] 이프리키야 전반적으로도 1천 700년의 농경 중심 문화가 10여년 만에 유목 문화로 바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