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22 16:04:18

트란실바니아

에르데이에서 넘어옴
{{{#!wiki style="margin:-0px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5px -1px -11px; letter-spacing: -0.5px; word-break: keep-all"
<colbgcolor=#ffce00>트란실바니아왈라키아 몰다비아(베사라비아)
고대 다키아
로마 제국 | 다키아 속주
로마 제국 고트족
훈 족의 침공
고트족 사르마티아 알란족
다키아인 알란족
게피드 왕국 슬라브족
중세 아바르 칸국 블라흐족 블라흐족
헝가리 대공국 불가리아 제1제국 페체네그
쿠만
헝가리 왕국 불가리아 제2제국
몽골 침략기 헝가리 왕국 몽골의 침입
헝가리 왕국 왈라키아 공국 몰다비아 공국
동헝가리 왕국
트란실바니아 공국
합스부르크 제국 트란실바니아 대공국 부코비나 공국
오스만 제국
몰다비아 공국 왈라키아 공국
근대 오스트리아 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몰다비아-왈라키아 연합공국
루마니아 왕국
루마니아 왕국
몰도바 자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 베사라비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 오데사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 국민군단국가
현대 루마니아 사회주의 공화국 소련
소비에트 몰도바
루마니아 몰도바 공화국
트란스니스트리아
}}}}}}}}}

{{{#!folding [ 펼치기 · 접기 ]<colbgcolor=#FFF,#191919> 고대 판노니아
로마 제국
서로마 제국
훈족
게피드 왕국 동고트 왕국
랑고바르드
아바르 칸국
중세~근세 마자르족
헝가리 대공국
중세 왕국
,몽골의 침입,
동헝가리 합스부르크 제국
,합스부르크 헝가리,
오스만 헝가리
트란실바니아 공국
근대 <colbgcolor=#426f4c> 오스트리아 제국
,합스부르크 헝가리,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트란스라이타니아,
제1공화국
평의회 공화국
근대 왕국
,국민단결정부,
현대 헝가리 제2공화국
헝가리 인민공화국
헝가리 제3공화국
}}} ||
파일:루마니아_트란실바니아.jpg
협의의 트란실바니아: 트란실바니아 영역
광의의 트란실바니아: 바나트, 크리슈나, 마라무레슈(구 헝가리 왕국령)
루마니아의 나머지 영토

파일:트란실바니아 공국 국장.svg
트란실바니아의 문장. 역사적으로 트란실바니아의 세 민족을 상징하며, 독수리는 헝가리인 귀족계층, 해와 달은 세케이인[1], 7개의 붉은 성은 독일인들이 정착한 일곱 도시를 상징한다.

1. 개요2. 언어별 표기3. 상징4. 역사
4.1. 마자르인 도래 이전4.2. 중세 헝가리 왕국4.3. 에르데이 공국의 성립4.4. 합스부르크 왕조 치하4.5. 이중제국 치하4.6. 전간기~2차 세계대전 시기4.7. 냉전기와 그 이후
5. 종교6. 지리
6.1. 지역 구분6.2. 트란실바니아 고원 영역
6.2.1. 주요 도시6.2.2. 트란실바니아 평원6.2.3. 세케이푈드(Székelyföld)
6.2.3.1. 주요 도시
6.3. 바나트(Banat)
6.3.1. 도시
6.4. 크리샤나(Crișana)
6.4.1. 도시
6.5. 마라무레슈(Maramureș)
6.5.1. 도시
6.6. 독일인들이 정착한 일곱도시
7. 매체

[clearfix]

1. 개요

Terra ultra Silvam(숲 너머 땅)

루마니아 북서부, 중부 지방을 통틀어 일컫는 역사적 지명. 위의 지도의 오렌지색 + 반 오렌지색 부분이다.

오렌지색 부분은 작은 의미의 트란실바니아의 영역[2], 반오렌지색은 작은 영역의 트란실바니아 외에 트리아농 조약으로 루마니아 왕국헝가리 왕국으로부터 빼앗은 영토다. 이때 헝가리로부터 획득한 지역 전체를 큰 의미에서 그냥 트란실바니아라고 퉁쳐서 부르기도 한다.[3]

현재 루마니아는 트란실바니아, 왈라키아, 몰다비아의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있는데 이 중 트란실바니아는 현재 루마니아의 중서부를 이루는 영역이다. 남부의 왈라키아와는 카르파티아 산맥을 경계로 남북으로 마주하고 있는 평원 지대이다. 서쪽으로는 헝가리와 접하고 있으며 범위를 넓게 포함하면 북동쪽으로는 북부코비나인 우크라이나체르니우치주와 옛 헝가리 영토였던 자카르파탸주와 접하고 있다.

이곳은 900년 가까이 헝가리 왕국의 영토였던 곳으로 헝가리 역사에서는 헝가리의 민족 정체성을 보존하게 해준 매우 중요한 지역이다. 12세기부터 헝가리 왕국에서는 동방식민운동의 일환으로 트란실바니아 남동쪽 카르파티아 산맥 일대에 독일인을 정착시켰는데, 독일인들은 루마니아어로 '작센인'이라는 뜻에서 사시(Sași)라고 불렸다. 이들이 바로 트란실바니아 독일인으로 이후 수백년 동안 트란실바니아의 지배 계급으로 존재했다. 제2차 세계 대전 말기에는 소련군이 트란실바니아에 진입하자 절반 가량이 독일 국방군을 따라 피난을 떠났다. 남아있던 사람들도 민주화 이후 대부분 독일로 이민을 떠났고[4] 현재 극소수만이 트란실바니아에 남아 살아가고 있다.[5]

참고로 루마니아 6대 대통령 클라우스 요하니스가 트린실바니아 독일인이다. 독일의 로켓 공학자인 헤르만 오베르트 역시 트란실바니아 독일인이다.

2. 언어별 표기

루마니아어Transilvania(트란실바니아)[6], Ardeal(아르데알)[7]
헝가리어Erdély(에르데이)[8]
독일어Siebenbürgen(지벤뷔르겐[9])[10]
튀르키예어Erdel(에르델)

3. 상징

트란실바니아 지역은 중세시대 이후부터 여러 반독립적 군주의 지배를 받았고, 다양한 문장과 깃발이 사용 되었다.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가문마리아 테레지아가 위 문장을 트란실바니아의 군주로써 자신의 문장으로 채택하면서, 오늘날까지 사실상 공식적인 트란실바니아의 상징으로 사용되고 있다. 헝가리 왕국과 루마니아 왕국 그리고 오늘날 루마니아 공화국의 국가 문장의 일부로 삽입되어 사용 중이다.

문장을 이루는 세 가지 상징물은 중세 시대 '세 민족의 연합'[11]을 이룬 헝가리인 귀족(독수리)[12] , 세케이인(해와 달), 독일계(7개의 성)를 상징한다.

트란실바니아 인구의 다수를 차지했지만 농노에 불과했던 루마니아인은 철저히 배제되었다. 이를 반박하여 상단의 독수리는 왈라키아의 독수리 문장을 차용한 것으로 루마니아계를 의미한다는 의견도 존재한다. 이 문장을 정식으로 도입하고 사용한 마리아 테레지아 외에도 합스부르크 가문의 군주들이 지속적으로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부코비나, 왈라키아루마니아인 거주지를 탈취하여 확장하려 노력했었다는 점, 그리고 지벤뷔르겐 대공국의 방위를 위해 세케이인 외에도 함께 루마니아인 연대도 창설됐다는 점 등을 들어 문장 상단의 독수리가 당시 합스부르크 제국 통치 하에 있던 루마니아계 주민을 상징했다고 본다. 현재 트란실바니아를 점유하고 있는 루마니아에서는 이 견해를 적극적으로 밀고 있지만, 과거 농노 신분에 불과했던 루마니아인을 헝가리 입장에서 신경써줄 이유가 전혀 없는 데다가 트란실바니아의 문장의 원형은 이미 16세기인 바토리 이슈트반 시대에 등장했기 때문에 독수리가 루마니아계를 상징한다는 루마니아측의 주장은 트란실바니아 점유를 정당화하기 위한 선전에 불과하다. 참고로 루마니아에서는 트란실바니아 탈취 이후 검은 독수리는 로마 제국다키아 정복과 라틴적인 특성을, 태양과 초승달은 루마니아의 르네상스 문화를, 7개의 성은 트란실바니아 국경 지대(Siebenbürgische Militärgrenze)[13]에 근무하던 루마니아인 연대를 나타낸다고 주장한다.

파일:1280px-Flag_Transylvania_History.svg.png
트란실바니아 지방의 삼색기

한편 트란실바니아 지역 문장의 배경색인 파란색-빨간색-노란색(황금색)을 활용하여 청-적-황의 삼색기가 지역 축제나 집회등에서 사용되었다. 문장은 없이 삼색기만 사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트란실바니아의 삼색기는 배색이 루마니아의 삼색기와 유사했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시기 헝가리 왕국의 루마니아인이 속임수로 독립운동에서 사용하기도 했다.

4. 역사

1075년 트란실바니아란 지명이 역사책에 처음 등장하였다. 10세기 이후로는 헝가리 왕국의 영토였으나 오스만 제국의 침공과 오스트리아 대공국합스부르크 가문으로 인하여 헝가리인의 독립된 세력을 갖기도 하였다.

4.1. 마자르인 도래 이전

처음으로 이 지역에 나타난 정착세력은 기원전 1세기부터 기원후, 2세기까지 300여년간 존속했던 '다키아 왕국'이다. 이들은 매우 강력하고 규율이 잡힌 군대를 이용해 지속적으로 로마 제국에 위협이 되었다. 급기야 로마 황제들은 다키아 왕국에 대한 대규모 원정을 기획하였다.

다키아인들은 로마 제국과 도나우강 하류 북부의 패권을 둘러싸고 도미티아누스 시절과 트라야누스 시절에 두 번 전쟁을 치렀고 로마 역사상 최대규모 원정이었던 트라야누스와의 다키아 전쟁에서 패해 멸망했다.

최후의 왕은 데체발[14]로 알려져있다. 다키아 왕국은 완전히 멸망한 이후 로마 제국은 이 지역에 다키아 속주를 설치하였고 트라야누스는 초대 총독으로 카이우스 디오를 임명했다.

트라야누스가 다키아 전쟁을 통해 다키아를 멸망시킨 것은 일종의 순망치한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나마 게르만족을 견제해주던 다키아를 완전히 멸망시켜서 로마 동부의 핵심지역인 발칸 반도 쪽이 게르만족에게 직접 노출되었다. 결과론적으로는 견제세력이 없어지며 게르만족만 성장시켜줘서 로마의 쇠퇴를 가속화시켰다고도 볼 수 있다. 금은광이 있다는 것이 장점이긴 했지만 위치가 교두보 수준이고 경계선도 그냥 산맥 아니면 평지인지라 적의 침략을 막는 게 힘들어 비용이 더 들었다.

183년 콤모두스 황제 시절에 다시 이 지역에서 전쟁이 발발하는데, 다키아족의 독립운동인지, 아니면 게르만족같은 이민족의 침략인지 자세한 정황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한편 다키아 주변의 게르만족인 고트족은 계속 다키아 속주를 파상적으로 공격했고, 로마는 이에 견딜 수가 없어서 275년 아우렐리아누스 황제는 결국 다키아 속주를 포기하고 이 지역에 주둔하던 군단의 기지를 도나우강 남쪽으로 옮겼다.

이후 336년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이 지역을 일시적으로 수복하지만 얼마안가 다시 상실했다. 이후 이 지역은 중세로 넘어가며 게피드족, 롬바르드족, 불가르인 등 여러민족이 거쳐갔다.

한 가지 특기할만한 점은 로마 제국이 도나우강 이남으로 철수한 이후에도 옛 다키아 속주 지역과 로마 제국(동로마 제국) 간에는 상당한 교류가 계속 이어졌다는 것이 확실시된다. 대표적으로 로마가 철수한 이후에도 로마 제국의 주화가 트란실바니아에서 발굴이 되기도 한다. 또한 교회터나 십자가와 같은 유물이 발굴되기도 한다. 제국 내에서처럼 교회 조직이 확고하게 자리잡았는지는 않았겠지만 적어도 로마 제국 쪽에서 도나우 강을 넘어 선교 활동이 이루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4.2. 중세 헝가리 왕국

10세기 초반에는 우랄 산맥 너머에서 도래한 마자르인판노니아 분지정복하여 정착했다. 마자르인이 판노니아 분지 동쪽의 카르파티아 산악 지역을 '숲 너머의 땅'이라 일컬으면서 오늘날 트란실바니아라는 지명의 직접적인 기원이 됐다. 마자르인의 역사에 관한 최초의 사료인 '헝가리인의 사적'[15]에서는 마자르인의 트란실바니아 정복과정이 묘사되어있다. 사료에 따르면 마자르인 도래 이전의 트란실바니아는 슬라브족이 거주했고 이 때에도 금광과 소금 광산이 존재했다고 한다. 블라흐족도 트란실바니아에 거주했는지는 논쟁의 대상인데, 루마니아 민족주의 진영을 비롯해 다키아-로마-루마니아의 연속성을 강조하는 측에서는 이를 긍정하나 이 이론에 반대하는 진영과 헝가리 민족주의 측에선 이를 부정한다. 일단 고고학적으로는 슬라브족의 흔적만이 발견된 상태이다. 마자르 일곱 부족장 중 하나인 테테니(Tétény 또는 Tuhutum)는 이를 노리고 트란실바니아를 침공했다. 지역의 루마니아인 호족인 젤루(Gelu )가 마자르인에 맞섰지만 패배한 것으로 전해진다.

레히펠트 전투에서의 패배 이후 마자르인은 약탈 원정과 유목 생활을 포기하고 완전히 카르파티아 분지에 정착했다. 하지만 사회체제에서 부족 연맹체라는 전통이 계속 유지되어 지방은 유력 호족들이 통제했다. 서기 1000년에는 헝가리 대공국이슈트반 1세헝가리 왕국의 국왕으로 즉위했다. 이슈트반은 왕국 전역에서 왕권 확립을 추구했고 다른 호족들이 이에 반발하면서 무력충돌까지도 벌어졌다. 당시 트란실바니아 지역은 트란실바니아를 정복한 테테니의 손자이자 이슈트반 1세의 외삼촌이기도 한 줄러 3세(Gyula III )가 통치하고 있었다. 이슈트반이 군대를 이끌고 오자 줄러는 국왕에게 투항하여 사로잡혔다. 이후로도 산악 지역인 트란실바니아 정복 과정은 동쪽을 향해 점진적으로 진행되었다. 확장은 13세기 경에 카르파티아 산맥에 도달하면서 완료된 것으로 추정된다.

트란실바니아가 접경지역의 군사 요충지이다 보니 1111년부터 헝가리 국왕이 임명한 총독(Vajda)이 다스렸다. 그 관할지역이 트란실바니아라는 지명으로 확립되었다. 트란실바니아 정복이 대충 완료되는 12세기 경부터 트란실바니아 동부 산악 접경지역에는 헝가리계 일파인 세케이인(Szekely)이 정착했다. 남부와 북동부에는 독일 각지에서 온 이주민들이 정착하여 트란실바니아 작센인이라 불리게 되었다. 이 두 민족 집단은 트란실바니아 내에서도 봉건적 특혜와 자치권을 인정받았다. 여기에 트란실바니아의 헝가리인 귀족 계층까지 더하여 이들 민족이 정치권한을 독점하기 위해 1438년에 세 민족의 연합을 결성하였다.

헝가리 왕국은 트란실바니아 너머에도 영향력을 끼쳤다. 하지만 바로 아래의 왈라키아 지역은 바사라브 1세에 의해 1317년 헝가리 왕국에서 독립해 왈라키아 공국으로 분리되었다.

11세기 초반 트란실바니아가 헝가리 왕국에 편입된 이후 트란실바니아 지역의 역사는 16세기에 헝가리 왕국이 모하치 전투에서 오스만 제국에 패망할 때까지 헝가리의 역사와 그 궤를 같이했다. 1301년, 1000년부터 300년간 헝가리를 통치한 아르파드 왕조의 대가 끊기고 이후 헝가리의 왕위는 카페앙주 가문[16]카로이 로베르트에게 넘어갔다. 카로이 로베르트(1308-1342)와 그의 아들 러요시 1세의 재위기(1342-1381)에 헝가리는 역사상 최고의 전성기를 맞이했다. 러요시는 계속된 정복전쟁으로 크고 아름다운 영토를 가졌을 뿐만 아니라 후반기엔 폴란드 왕국왕위까지 겸임하게 됨으로써 일시적으로 헝가리 왕국은 오늘날의 폴란드, 벨그라드를 포함한 세르비아 북부, 이탈리아 반도 남부에까지 영향력을 행사했다.

이후 후녀디 야노시(1407~1456)가 헝가리 국왕의 섭정으로 트란실바니아의 총독으로 오게되고, 왈라키아 공국용공 블라드 2세[17]을 견제하는 한편, 발칸 반도로 영역을 넓혀가던 오스만 투르크와 전쟁을 치렀다. 이 시기에 트란실바니아의 후녀디 야노시, 왈라키아 공국블라드 가시공, 몰다비아 공국슈테판 3세는 각각 오스만 제국의 침입에서 맞서 이를 격퇴한 공로로 오늘날 각국에서 구국 영웅 겸 민족영웅으로 평가받는다. 카페앙주 왕조 이후부터 후녀디 야노시의 아들로 헝가리 왕위에 오른 마차시 1세 때까지만 해도 헝가리 왕국이 동유럽의 강자이자 패권국으로 군림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사후 무능한 왕 울라슬로 2세가 집권하자 헝가리는 급격히 약해졌다.

4.3. 에르데이 공국의 성립

이 무렵 유럽을 향해 확장을 진행중이던 오스만 제국이 어느덧 발칸반도 대부분을 장악해 나가고 있었다. 발칸반도의 북부에 위치한 헝가리 역시 오스만 제국과의 전면 충돌이 불가피해졌다. 1526년 헝가리는 오스만 제국에 맞서 국운을 걸고 헝가리 남부 모하치에서 결전을 벌였다. 모하치 전투에서 헝가리군은 국왕 러요시 2세가 전사하고 주력부대가 괴멸당하는 대참패를 겪었다. 러요시 2세는 후사가 없었고 러요시의 처남이자 매부인 합스부르크 가문오스트리아 대공페르디난트 1세가 헝가리의 왕위 계승권을 주장했다.

하지만 헝가리 귀족들 사이에서는 견해가 나뉘었다. 페르디난트 1세의 승계에 반발한 동부 트란실바니아 일대의 귀족들은 서포여이 야노시(Szapolyai János 1487?~1540)를 국왕으로 추대했다. 헝가리 왕국이 합스부르크 가문에게 통째로 넘어가는 사태를 눈뜨고 보고만 있을 생각이 없던 오스만 제국의 파디샤 쉴레이만 1세는 칭신을 대가로 야노시를 후원했다. 이렇게 되면서 헝가리 왕국은 북서부의 합스부르크령과 트란실바니아를 중심으로 하는 동부로 분열됐다. 즉 하나의 국가에 서로가 적통임을 주장하는 두개의 왕국이 들어선 셈. 여기에 오스만 제국이 직접 점령한 부다 인근 지역이 오스만 제국의 직할령이 되면서 헝가리 왕국은 삼분할되었다. 이 중에서 서포여이 야노시가 통치한 헝가리 동부를 현대에는 동헝가리 왕국이라 부르고 있다. 트란실바니아 역시 동헝가리의 영역에 포함되었다.

하지만 1570년, 합스부르크 가문과 동헝가리의 두 궁정은 서포여이 야노시의 아들인 서포여이 야노시 지그몬드(Szapolyai János Zsigmond 1540~1571)가 헝가리 왕위를 포기하는 대가로 트란실바니아 공작의 지위를 인정받는 슈파이어 조약을 체결했다. 공식적인 명목상으로 트란실바니아는 여전히 헝가리 왕국의 일부이기는 했다. 당시 야노시는 트란실바니아 영역 너머 헝가리 동부지역도 통치하고 있었다. 이 지역은 트란실바니아 영역은 아니지만 '헝가리 왕국의 일부'(partium regni Hungariae dominus), 즉 파르티움(Partium)이라는 명칭으로 트란실바니아 공작의 통치를 인정하는 식으로 결정되었다. 정리하자면 합스부르크 가문은 헝가리 국왕 칭호를 확보하고 대신 동헝가리 측은 실효지배 중인 지역의 통치를 인정 받았음으로 양측이 명분과 실익을 서로 맞교환했다고 볼 수 있겠다.오스만 제국의 봉신국이자 헝가리 왕국의 일부인 트란실바니아 공작이 통치 중인 헝가리 왕국의 일부지역 혼란하다[18]

이런 연유로 오늘날 헝가리에서도 루마니아에 넘어간 지역 중 트란실바니아 이외 지역을 파르티움이라 부르고 있다. 다만 어원부터가 '헝가리(왕국)의 일부' 이기 때문에 루마니아 측은 역사적 트란실바니아 이외 지역을 다른 이름으로 부르고 있다. 아니면 그냥 전부다 트란실바니아로 퉁치던가.
파일:트란실바니아 공국.png
트란실바니아 공국, 1570년
트란실바니아 영역
파르티움

헝가리 왕국은 세 부분으로 쪼개졌고, 이후 동쪽 부분인 트란실바니아를 중심으로 헝가리 왕국 동부를 점유한 에르데이 공국은 1570년부터 1711년까지 200년 가까운 기간동안 자치를 누리며 운영되었다. 이 기간 동안 트란실바니아 공국은 30년 전쟁이나 대홍수에도 참여하는 등 중동부 유럽의 정세에 깊이 관여했다. 이 과정에서 헝가리 국왕인 합스부르크 가문에 대항한 것은 물론, 심지어 명목상 종주국인 오스만 제국과 분쟁을 벌이기도 하는 등 독자적인 행보를 이어나갔다. 특히 1606년부터 트란실바니아 공국을 다스렸던 보치커이 이슈트반부터 전성기를 누렸지만, 이는 라코치 죄르지 2세의 무리한 대외 확장 정책의 결과로 끝났다.

4.4. 합스부르크 왕조 치하

1683년, 합스부르크 왕조는 상헝가리의 귀족 퇴쾨이 임레의 반란과 지원 요청으로 발생한 제2차 빈 공방전에서 폴란드-리투아니아 국왕 얀 3세 소비에스키의 활약으로 오스만 제국군을 물리치는데 성공했다. 곧이어 합스부르크 왕조를 필두로한 신성동맹이 오스만 제국에 대한 대대적인 반격을 가하면서 대튀르크 전쟁이 시작되었다. 전쟁 결과 1699년 카를로비츠 조약이 체결되었고 합스부르크 왕조는 헝가리 왕국 대부분을 수복했다. 하지만 합스부르크 군대와 군주들이 점령군 노릇을 하면서 특히 농민들의 불만이 쌓여갔다.

트란실바니아 공국 역시 합스부르크 제국으로 종주권이 넘어갔다. 하지만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이 발발하면서 합스부르크군은 대거 헝가리를 떠났다. 1704년 헝가리인 유력 귀족라코치 페렌츠 2세프랑스 국왕 루이 14세의 후원을 얻고 트란실바니아 공작으로 추대받아 합스부르크에 대항한 독립전쟁을 일으켰다. 독립전쟁은 초기에 큰 성과를 거두어 한때 트란실바니아는 물론 헝가리 상당부분이 해방되었다. 하지만 블렌하임 전투에서 사부아 공자 외젠이 이끄는 제국군과 말버러 공작 존 처칠이 이끄는 동맹군이 프랑스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두면서 상황이 반전되었다. 프랑스는 더 이상 라코치에게 재정지원을 할 수 없게 되었고, 요제프 1세는 헝가리 방면으로 병력을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19] 결국 1711년에 라코치가 망명하고 자트마르[20] 조약이 체결되면서 독립전쟁은 실패로 끝나게 되었다. 자트마르 조약으로 합스부르크 가문은 독립전쟁에 가담한 헝가리 귀족들을 사면하고 기존의 특권을 보장하는 조건으로 헝가리 왕위와 더불어 지벤뷔르겐 공위까지 겸하게 되었다. 자트마르 조약으로 지벤뷔르겐 공국은 한동안 종주국인 헝가리 왕국과는 별개의 자체적인 의회를 유지되고 3민족 연합 역시 인정받았으나 합스부르크 가문이 헝가리 왕국과 지벤뷔르겐 공국을 통합하지 않은 것은 독립심이 강했던 헝가리인을 억제하려는 정치적인 의도가 다분했다. 1765년 마리아 테레지아는 공국을 지벤뷔르겐 대공국으로 승격시켰다.

합스부르크령이 되면서 트란실바니아 인구의 다수를 점하는 루마니아인의 지위에도 상당한 변동이 생겼다. 기존 사회질서인 3민족 연합 체제에서 루마니아인은 완전히 배제되었다. 심지어 세케이인이나 작센인 농민들도 의회에 대표를 파견할 수 있었으나 루마니아인 농노들은 당연히 그런 기회조차 없었다. 사회적으로도 루마니아어루마니아 정교회는 공인 받지 못했다. 특히 루마니아인의 민족 정체성의 중심이 되는 종교생활의 수준은 심각할만큼 빈약했다. 정교회가 공인 받지 못한 상황이다 보니 가톨릭이나 다른 신교 교회들과 달리 교회 운영에 아무런 지원도 없었다. 재정적 지원도 전무하다 보니 정교회 신부들 역시 다른 농민들만큼이나 궁핍했다. 교육체계 또한 부재하여 신부 양성에 큰 어려움을 겪었다. 정교회 신부 대부분은 아버지에서 아들에게 전수되는 수준에 불과했다. 트란실바니아의 정교회는 이웃한 왈라키아 공국이나 몰다비아 공국에서 파견되는 신부나 기부금을 통해 명맥만을 근근히 유지하고 있는 형편이었다. 트란실바니아에서 루마니아인의 지위는 사회를 구성하는 일원이 아니라 그저 살아있기에 그 존재가 겨우 용인되는 수준에 불과했다.

합스부르크 왕조는 트란실바니아 공국을 획득한 이후 관료를 파견해 통치하면서도 지방 귀족 세력의 권한을 상당 부분 인정해 주었다. 하지만 동시에 절대왕정을 확립하기 위해서는 봉건질서를 타파할 필요가 있었다. 합스부르크 제국은 루마니아인의 처우를 개선하여 헝가리 귀족과 신교 세력을 견제하고자 했다. 1698년, 레오폴트 1세는 트란실바니아의 루마니아 정교회에 교황의 수위권을 인정하는 기존 전례를 유지하는 동방 가톨릭 교회 설립을 제시했다. 트란실바니아에 동방 가톨릭 교회가 설립되면서 신부들은 종교인으로서 권리를 인정받고 교육의 기회를 얻게되었다. 트란실바니아에서 동방 가톨릭 교회는 빠르게 성장했다. 하지만 여전히 많은 루마니아인들이 기존의 정교회 신앙을 고수하기도 했다. 또한 트란실바니아 공국 이외 루마니아인 거주 지역에서 동방 가톨릭 교회는 거의 확산되지 못했다.

이후 계몽주의의 영향으로 18세기 중반에 걸쳐 동방 가톨릭 교회와 신학기관, 그리고 교단에서 운영하는 학교가 집중적으로 설립되었다. 동방 가톨릭 교회의 신학기관 뿐 아니라 로마 가톨릭의 신학기관에서도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심지어 빈 대학교에서도 루마니아인을 위한 신부 양성 수업이 제공되었다. 동방 가톨릭 교회의 설립은 루마니아인이 새로운 문물과 사상, 그리고 기술을 접할 수 있는 창구역할을 수행했다. 결과적으로는 성직자를 주축으로하는 근대적인 지식인 계층이 형성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를 아르데알 학파(Şcoala Ardeleană)라 부른다. 아르데알 학파는 성직자가 중심이 되다 보니 초기에는 주로 종교적인 차별 문제에 관심을 가졌다. 트란실바니아 의회와 지배층 역시 동방 가톨릭 교회 설립이 정치적 목적이 깊다는 것을 알고 있다보니 견제 대상으로 보아 완전히 동등한 권리를 보장해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점차 종교 차별에 대한 인식은 자연스레 민족 차별과 사회적 차별에 대한 인식과 논의로 이어졌다.

프랑스 혁명나폴레옹 전쟁 이후에는 오스트리아 제국 내 다른 민족과 마찬가지로 헝가리에서 민족주의가 각성하여 근대적 국민국가 수립 움직임이 시작되었다. 헝가리 민족주의자와 독립운동가들은 트란실바니아를 헝가리에 편입시킬 것을 요구하였고, 1848년 유럽 각지에서 일어난 혁명에 힘입어 독립 운동을 일으켰다. 트란실바니아는 명실상부한 헝가리 독립 운동의 중심지였으나 러시아 제국의 개입으로 헝가리 독립군이 진압되면서 13인의 독립 운동가들이 반역자로 몰려 어러드에서 처형당했고, 헝가리 왕국 전역이 정부의 군정 통치하에 놓이는 상황까지 몰렸다. 트란실바니아 역시 신절대주의가 도입되면서 정부와 의회가 폐지되었다.

1848년 헝가리 혁명 당시 트란실바니아의 헝가리인은 독립 운동의 중추 역할을 했지만, 반대로 트란실바니아의 루마니아인은 독립을 시도하는 헝가리인에 맞서 합스부르크 왕조에 협력하고 충성했다. 오스트리아 제국 역시 루마니아인을 비롯한 헝가리 내 소수민족을 통해 헝가리인을 견제하고자했다. 상황이 이렇게 맞물리면서 트란실바니아의 루마니아인의 처우 개선으로 이어졌다. 혁명의 여파가 대강 수습된 1850~1860년대에는 프란츠 요제프 1세 중심의 신절대주의 체제가 들어서면서 봉건제의 잔재가 타파되었다. 이로인해 봉건질서에 예속되어있던 루마니아인의 경제상황이 향상되어 시민계층과 중산층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1863년에는 트란실바니아 의회에 루마니아 의원이 참여하여 이 시기를 전후로 루마니아인의 정치 권리가 개선되었다. 사회적으로도 루마니아어가 공용어로 인정받고 정교회의 대주교구 설립이 승인되었다. 하지만 오스트리아 제국의 쇠퇴와 국내외 정세 변화로 인해 이 같은 변화는 오래 가지 못했다.

1860년대 이탈리아 통일 전쟁과 1867년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에서 오스트리아 제국이 연패하면서 합스부르크 왕조는 이탈리아 반도독일 연방에서 영향력을 완전히 상실했다. 결국 국가운영이 한계에 달했다고 판단한 프란츠 요제프 1세는 오스트리아 제국 내 제2의 민족인 헝가리인에게 기존의 오스트리아 제국을 오스트리아 제국과 헝가리 왕국이 양분하여 공동으로 통치하는 대타협을 제안했다. 대타협을 통해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이중제국이 성립되었다. 이중제국이 성립되면서 트란실바니아는 헝가리인의 요구대로 헝가리 왕국에 완전히 편입되었다.

4.5. 이중제국 치하

1867년 이중 제국 성립 이후 트란실바니아는 오스트리아 제국 산하의 공국의 지위를 상실하여 헝가리 왕국의 영토로 재합병되었다. 헝가리인은 왕국 내 비마자르 소수민족을 대상으로 강경한 동화정책을 시행하였고 특히나 헝가리 독립 중심지 그 자체였던 트란실바니아에서는 그 강도가 더했다. 당시의 헝가리는 배타적 민족주의 성향이 고조되어 있었기 때문에, 헝가리 내 다른 소수 민족들은 자신들의 안전과 민족의 정체성 유지를 걱정할 정도였다.[21]

트란실바니아의 루마니아인은 제국 내 루마니아인들이 다수 거주하는 다른 지역들인 바나트, 부코비나 공국과 연대하여 루마니아인의 권리신장을 위해 노력했다. 이중제국 내 루마니아 거주 지역 중에서도 트란실바니아는 가장 규모가 크고 발전되어 있었다. 따라서 19세기 동안 트란실바니아는 자연스레 이중제국 내 루마니아인 민족운동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하지만 헝가리의 완강한 반대로 인해 이 같은 노력의 성과는 지지부진했고, 트란실바니아를 비롯한 이중 제국내 루마니아인들의 불만이 누적되어갔다.

그러던 차에 트란실바니아에 이웃한 왈라키아 공국몰다비아 공국이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독립하면서 루마니아 왕국이 신설되었다. 바로 이웃한 지역에서 동포들이 운영하는 독립국가인 루마니아 왕국이 성립된 사건은 트란실바니아 및 다른 지역에 거주하는 루마니아인들의 민족의식을 자극했다. 그 결과 트란실바니아 내 루마니아인들 사이에서는 바나트와 부코비나 등 다른 지역과 함께 오스트리아-헝가리에서 이탈하여 루마니아 왕국에 합류해야한다는 견해가 확산되어갔다.

결국 얼마지나지 않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서 민족 간 갈등이 심화되는 상황 속에서 사라예보 사건으로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했다. 루마니아 왕국은 처음에는 중립을 지켰으나 1916년에 트란실바니아와 그 주변 지역을 할양해주겠다는 조건을 제시한 협상국측으로 전쟁에 참전하였다. 동맹국에 선전포고를 한 루마니아가 가장 먼저 한일은 당연히(...) 트란실바니아를 공격한다! 였다.

하지만 루마니아 왕국군은 독일의 명장 마켄젠 원수가 지휘하는 동맹국군에게 개발살이 난 채 트란실바니아에서 쫓겨 났다. 이후에는 오히려 반격을 받아 수도인 부쿠레슈티가 함락당하고 국토의 반 이상이 동맹국에게 점령당하는 등 고전을 면치 못했다. 하지만 미국의 1차 대전 참전으로 인해 전쟁은 동맹국의 최종적인 패전으로 종결되었으며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패전의 여파로 제국을 구성하던 소수민족들이 일제히 독립을 선언하면서 붕괴되었다.

4.6. 전간기~2차 세계대전 시기

전쟁이 끝난지 얼마 지나지 않은 1918년 12월 1일, 트란실바니아의 루마니아인들 대표들이 줄러페헤르바르(Gyulafehérvár)[22]에 모여 만장일치로 루마니아 왕국과의 통합을 선언했으며 이에 호응해 루마니아군이 트란실바니아로 진입해 점령하기 시작했다. 루마니아의 어그로에 끌린 헝가리는 루마니아와 전쟁을 벌였으나 협상국을 등에 업은 루마니아가 1919년 8월에 부다페스트를 함락시키면서 루마니아의 승리로 끝났다. 루마니아는 트리아농 조약으로 그토록 갈망하던 트란실바니아를 비롯한 루마니아인 거주 지역 대부분을 확보함으로써 영토를 크게 확장했으나 트란실바니아 거주 헝가리인과 세케이인은 졸지에 소수민족으로 전락했고(...), 이는 오늘날 헝가리와 루마니아의 영 불편한 외교관계로 이어지고 있다.

제2차 세계 대전에서 한때 헝가리의 호르티 미클로시 정부가 나치 독일추축국에 접근하여 1940년 8월 제2차 빈 협정을 맺으면서 트란실바니아 북부가 다시 헝가리에 반환되었다. 하지만 제2차 세계 대전 말기에 추축국에서 이탈하여 소련과 연합군 측으로 전향한 루마니아 왕국이 소련군과 함께 트란실바니아 전역을 다시 탈환했다. 최종적으로는 제2차 세계 대전이 나치 독일과 추축국의 패배로 종결되며 빈 협정을 통한 국경 조정도 역시 무효화되었다.

미국은 각 민족의 영역을 각국의 영토로 재분배하려는 민족 자결주의의 방침에 따라 트란실바니아를 헝가리에 돌려주거나 트란실바니아를 독립국가로 만드는 것도 검토했다. 하지만 역시 루마니아와 영토분쟁이 있던 소련은 루마니아로부터 베사라비아(오늘날의 몰도바 공화국)와 북부코비나를 뺏는 대신 루마니아에 트란실바니아를 넘기려 했다. 땅은 소련이 먹고 계산은 헝가리가 대신하고 소련이 동유럽 대부분을 점령하여 실제적으로 통제하고 있었기 때문에 결국 이 소련의 의도가 관철되었다. 최종적으로 트란실바니아 전체가 제2차 세계 대전 이전의 국경선으로 복원되어 루마니아령으로 다시 귀속되었다.

다만 1천년 넘게 헝가리의 지배를 받던 지역이었기에 오늘날에도 여전히 헝가리계 루마니아인은 트란실바니아 지방을 중심으로 루마니아 내에서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공산화 이후 시행된 헝가리인 추방과 루마니아인 이주 정책 이후 지금까지도 헝가리인은 루마니아 전체 인구중 약 6.5 퍼센트를 차지하여 루마니아의 최대 소수 인종 그룹을 차지하고 있다.

한편 제2차 세계 대전 후 자국 내 독일인을 추방한 폴란드체코슬로바키아, 유고슬라비아와는 달리, 루마니아 공산정권은 트란실바니아에 거주하던 독일인들을 추방하지는 않았다.[23] 때문에 공산 정권 시절만 해도 30만 명 가량의 독일인이 이 지역에 계속 살았지만[24] 민주화 후에 경제적인 풍요와 더 나은 삶을 위해 대부분 독일로 이민을 떠나[25] 지금은 3만 명 남짓만이 남아 있다.

4.7. 냉전기와 그 이후

동유럽 혁명 당시 루마니아의 혁명을 촉발시킨 '티미쇼아라 사건'이 바로 이곳 트란실바니아 지방의[26] 헝가리인 개신교 성직자 퇴케시 라슬로(Tőkés László) 목사가 니콜라에 차우셰스쿠 정권에 의해 해임당하면서 벌어졌다.

5. 종교

파일:트란실바니아 종교_1850.png
1850년 트란실바니아 대공국의 종교분포[27]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left: 0px; margin-top: -22px"
{{{#!folding
동방 정교
그리스 가톨릭
로마 가톨릭
개혁 교회(칼뱅파)
복음주의 교회(루터파)
유니테리언
}}}}}}

트란실바니아에 이주한 헝가리인, 세케이인, 작센인은 주로 가톨릭 신도였다. 트란실바니아 지역 인구의 과반을 구성하는 루마니아계는 대부분 동방정교회 신도였다. 16세기 중반, 모하치 전투로 헝가리 왕국이 오스만 제국에게 패망하면서 기존 가톨릭 교회 조직 역시 큰 타격을 입었다. 합스부르크 왕조에서 점유한 헝가리 서부와 북부는 가톨릭 교회가 건재했다. 반면 트란실바니아를 비롯한 동부에서는 비슷한 시기에 시작된 종교개혁의 여파로 개신교 교세가 가톨릭 교회의 공백을 메우며 빠르게 성장했다.

헝가리인과 세케이인은 여전히 가톨릭 신앙을 고수하기도 했지만 상당수가 칼뱅파나 유니테리언으로 개종했다. 트란실바니아 작센인의 경우에는 거의 대부분이 복음주의 루터파 교회로 개종했다.[28] 복음주의 교회는 루마니아계 정교회 신도를 대상으로 전도를 시도하기도 했으나 결과가 별로 신통치는 않았다. 다만 이 과정에서 루마니아어 번역과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었다. 이는 나중에 근대 루마니아어의 정립 과정과 민족정신 형성에 상당한 기여가 되었다. 트란실바니아 공국 시절에는 비교적 신앙의 자유가 존중 되었고, 세 개신교 교파에 기존의 로마 가톨릭 교회를 더해 네 종교가 공식적인 지위를 인정 받았다. 트란실바니아 공국은 30년 전쟁 당시에 베틀렌 가보르가 신교도 측으로 잠시나마 참전하기도 했다.

다만 기득권 계층인 헝가리인, 세케이인, 트란실바니아 작센인의 종교인 4대 종교 외에 루마니아계의 종교인 동방정교회는 공인 되지 못 해 차별을 받았다. 다른 종파와 달리 정교회는 재정적 지원을 전혀 받지 못했다. 뿐만 아니라 신학 기관의 설립도 허가되지 않아서 사제 양성에 큰 어려움을 겪었다. 대부분의 경우 정교회 사제 계층은 궁핍한 환경 속에서 아버지에서 아들로 이어지는 방식의 빈약한 교육만으로 간신히 명맥만을 유지했다.

18세기 들어 트란실바니아 공국이 합스부르크 제국에 합병된 이후 동방 가톨릭 교회가 설립되었다. 동방 가톨릭 교회는 교황의 수위권을 인정하는 대신 기존 정교회 전례와 예식의 대부분을 보존하는 자치교회였다. 이는 트란실바니아의 지방 귀족과 신교도 세력을 견제하려는 정치적 의도가 컸다. 동방 가톨릭 교회는 트란실바니아 내에서 상당한 수준의 지원을 받았기 때문에 빠르게 교세가 확산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많은 정교회 신자들이 개종에 거부감을 느끼고 기존 신앙을 고수했다. 더욱이 동방 가톨릭 교회는 트란실바니아 공국 북쪽의 마라무레슈와 사투마레 지역 정도를 제외하면 트란실바니아 이외의 루마니아인 거주 지역[29]에서는 교세가 크게 확대되지 못했다.

루마니아 공산정권 시절에는 가톨릭, 개신교, 정교회 가릴 것 없이 모든 종교가 탄압을 받았다. 이제는 소수민족의 종교가 된 개신교의 경우는 민주화 운동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하기도 했다. 1990년대 이후 공산정권이 무너지고 민주화가 이뤄지면서 종교의 자유도 다시 허용되었다. 정교회는 거의 국교대우를 받아서 이전의 교세를 어느정도 회복했다. 반면 동방 가톨릭 교회는 정교회에 신도층 대부분을 흡수당하면서 공산정권 시절 동안 입은 타격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6. 지리

6.1. 지역 구분

파일:RomaniaHistRegions.jpg

헝가리 왕국
에르데이 공국
마라무레슈: 구 헝가리 왕국 마러머로시 주
* 남부: 헝가리 왕국 > 루마니아령
* 북부: 헝가리 왕국 > 체코슬로바키아령 카르파티아 루테니아 > 우크라이나령 자카르파탸주
크리슈나(쾨뢰시비데크): 크리슈 강( 쾨뢰시 강) 이동 지역.
* 동부: 헝가리 왕국 > 루마니아령
* 서부: 헝가리령
바나트
* 동부: 헝가리 왕국 > 루마니아령
* 북서부: 헝가리령
* 서부: 헝가리 왕국 > 세르비아 보이보디나 자치주

6.2. 트란실바니아 고원 영역

중앙의 평균해발 300 ~ 500m 정도가 지속되는 고원. 무레슈/머로시강(Mureș/Maros), 소메슈/서모시강(Someș/Szamos), 크리슈/쾨뢰시강(Criș/Körös), 올트강(Olt)이 흐른다. 역사적으로 루마니아인이 트란실바니아에서 헝가리인보다 수적으로 우위를 점하게 된 원인이 된 지형이기도 한데, 몽골과 오스만 제국의 침공으로 헝가리인이 죽어가는 동안 고지대에 살았던 루마니아 농노들은 별다른 타격을 받지 않았고 점점 헝가리인보다 수적으로 우위에 서 나중에 루마니아 왕국이 헝가리 왕국으로부터 트란실바니아를 빼앗아가는 주요한 근거가 되었다.

6.2.1. 주요 도시

6.2.2. 트란실바니아 평원

6.2.3. 세케이푈드(Székelyföld)

파일:Tört_Székelyföld.png
세케이푈드 지방은 트란실바니아 지역 중 헝가리 본토와 가장 멀리 떨어져 있으면서 헝가리계 세케이인이 다수인 언어섬 지역이다. 헝가리 본토와 떨어져 있으면서 헝가리계가 다수라는 문제 때문에 오늘날까지도 루마니아와 헝가리 간의 갈등의 중요한 원인이 되고 있다. 현재 하르기타 주, 코바스나 주, 무레슈 주 일부가 세케이푈드에 속한다.
6.2.3.1. 주요 도시

6.3. 바나트(Banat)

바나트 지방은 옛 헝가리 왕국의 남부에 위치한 지역으로 북부의 무레슈강과 서부의 티서강 남부는 도나우강으로 둘러쌓여있고 동부는 트란실바니아와 접하고 있는 정방형의 지역이다.

옛 헝가리 왕국의 영토 중 합스부르크 제국이 오스만으로부터 가장 마지막에 탈취한 지역이다.[36] 최후까지 전쟁터가 된 곳이기 때문에[37] 황폐화되어 버려진 인구 공백지가 많았다. 이곳을 수복한 오스트리아는 지역인구를 보충하기 위해 제국 곳곳에서 이주민을 정착시켰다.[38] 바나트 지방의 주요 구성민족은 루마니아인과 오스만 제국을 피해 도나우강을 건너 이주해온 세르비아인, 그리고 독일인과 헝가리인이 거주했었다.[39] 1차 대전 종전 직전에는 프랑스군[40]과 함께 세르비아군이 바나트 전역을 점령했다. 곧 이어서 누가 바나트를 차지할 지를 두고 루마니아와 세르비아[41]간의 갈등이 격화될 조짐을 보였다. 바나트를 선점한 유고슬라비아는 바나트 전역을 합병하려 했고, 바나트의 루마니아계가 세르비아계보다 훨씬 많았기 때문에 이에 반발한 루마니아 역시 바나트 전체를 요구했다. 이에 프랑스가 중재에 나서 루마니아와 유고슬라비아간에 바나트를 분할했다. 세르비아계가 주류인 서부는 유고슬라비아 왕국에 합류해 오늘날 보이보디나 자치주의 동부를 이루고 있고, 바나트의 중심 도시인 티미쇼아라를 포함한 동부는 루마니아 왕국에 합류했다.

바나트와 트란실바니아는 서로 별개의 지역사를 가지고 있기도 해서[42] 바나트라는 지방의 정체성과 존재감은 꽤 큰편이다.[43] 일례로 바나트의 상징은 사자인데 루마니아의 국가 문장에는 트란실바니아와 별도로 바나트의 문장이 포함되어있다.

6.3.1. 도시

6.4. 크리샤나(Crișana)

헝가리와 루마니아에 걸친 지방으로 헝가리어로는 쾨뢰시비데크(Körösvidék)로 읽는다. 루마니아령 크리샤나 지방에서도 헝가리 국경에 가까워질수록 헝가리인 비중이 점차 증가한다.

6.4.1. 도시

6.5. 마라무레슈(Maramureș)

트란실바니아 북부에 접해있던 헝가리 왕국의 마러머로시 주(Máramaros vármegye)를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체코슬로바키아루마니아 왕국이 인구구성에 따라 남북으로 분할하였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루테니아계 주민이 다수 거주하던 북부지역은 우크라이나의 자카르파탸 주의 일부가 되었고 루마니아계가 다수 거주하던 남부지역은 루마니아령 마라무레슈 주(Județul Maramureș)로 편입되었다. 조용한 산동네라 존재감은 크지 않다.

6.5.1. 도시

6.6. 독일인들이 정착한 일곱도시


트란실바니아 작센인은 트란실바니아의 변경을 수비하기 위해 12세기 무렵부터 헝가리 국왕으로부터 초청받아 이주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상단에 명기된 일곱 도시가 바로 트란실바니아의 문장에서도 일곱 개의 성에 해당된다.

이들은 프랑켄 방언을 구사했으며, 신성 로마 제국 전지역 심지어는 오늘날 프랑스 지역에서 온 이주민들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트란실바니아에 이주한 독일계는 주로 '작센 법전'을 따랐기 때문에 트란실바니아의 다른 민족들은 트란실바니아의 독일계를 퉁쳐서 트란실바니아 '작센'이라 불렀다. 중세시대부터 근현대에 이르기까지 거의 700년 가까이 독일 본국으로부터 고립된 지역에서 다른 민족들의 영향을 받으며 거주한 결과 트란실바니아 작센인들은 독특한 문화, 방언과 함께 작센인이라는 독자적인 정체성이 형성 되었다.

트란실바니아는 여러 이민족이 거쳐갔는데 쿠만인, 몽골인, 불가리아인, 루마니아인, 튀르크인 등이 트란실바니아를 침공했다. 이주한 독일인 중에는 광부나 상공업 등 전문직 종사자가 많았고 자연히 독일인 이주지역은 도시화된 거주지를 형성했다. 하도 이민족의 침략에 시달리자 트란실바니아 독일인은 7개의 주요 도시를 비롯해서 정착지를 요새화하기 시작했다.

7개 주요 도시 중에 특이한 사례는 오늘날 루마니아 최대의 기계공업 도시인 브라쇼브인데, 브라쇼브를 건설한 이들이 다름아니라 그 유명한 튜튼 기사단이다.[58] 헌데 튜튼 기사단은 트란실바니아에 정착한지 얼마지나지 않아 교황청의 사주를 받고 쿠데타를 일으키려다가 사전 발각돼서 추방당했다. 추방당한 뒤 이주하여 개척한 곳이 폴란드 왕국의 동프로이센. 다만 기사단과 같이 따라왔던 농민 등 민간인들은 브라쇼브에 계속 남는 것을 허락 받았고 제2차 세계 대전 전까지는 브라쇼브에는 시민의 1/3 가량인 대략 2-3만이 독일계였다.

한편, 독일인들이 건설한 요새시설은 주로 정착지 중심에 위치한 교회를 요새화하는 경우가 많았다.정착지 전체를 벽으로 두를 만큼의 돈이 없어서.. 이러한 요새시설은 오늘날 트란실바니아에 300개가 존재하고 이중 150개는 보존상태가 양호하다.

1993년에는 7개의 요새시설이 "트란실바니아의 요새화된 교회와 마을"이라는 명칭으로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에 등재 되었다.

한편 2차 대전 후 자국 내 독일인을 추방한 폴란드나 체코슬로바키아와 달리, 루마니아 공산정권은 독일인들을 추방하지는 않았다. 때문에 공산 정권 시절만 해도 30만 명 가량의 독일인이 이 지역에 계속 살았지만[59] 민주화 후에 경제적인 풍요와 더 나은 삶을 위해 대부분 독일로 이민을 떠나 지금은 3만 명 남짓만이 남아 있다. 어차피 주민족인 루마니아인도 독일이나 프랑스, 영국, 이탈리아 등지로 떠나고 있기 때문에 독일인만이 마냥 특이한것은 아니었지만.

7. 매체

브램 스토커의 걸작 드라큘라의 배경으로 쓰여서 '흡혈귀의 고장'이란 이미지가 남아있다. 드라큘라의 인기 덕분인지 영화, 만화, 게임, 소설 등을 가리지 않고 온갖 창작물에서 드라큘라를 모티브로 한 캐릭터가 나오면 여지 없이 등장하거나 언급된다. 영화 제목이나 게임 브금으로도 쓰일 정도이니 이쯤되면 소속국가인 루마니아보다도 트란실바니아가 더 유명하다(...).

하지만 빅토리아 시대인 1897년 출간 당시, 이곳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영토였으며 작중 드라큘라 백작은 헝가리인 세케이족으로 나온다. 그러나 드라큘라 백작의 모티브가 되었던 블라드 체페슈루마니아인으로 트란실바니아가 아닌 루마니아 왕국의 전신 중 하나인 왈라키아 공국의 공작이었다.

컬트 영화의 걸작 록키 호러 픽쳐 쇼와 그 원작 뮤지컬 록키 호러 쇼에서는 주인공 프랭크 앤 퍼터 박사와 그 일행의 고향... 이라고 주장하는데 진상은 각주 참조.[60]

흡혈귀 얘기를 제외하고 현실적으로 다루는 작품으로는 크리스티안 문지우R.M.N.이 있다. 또한 루마니아 영화 중에는 1차 세계 대전 당시 국가와 영토가 갈려 민족 상잔을 벌어야 했던 루마니아인들의 애환을 다룬 영화들도 많다.

특촬물 가면라이더 키바를 구속하고 있는 봉인의 은(銀) 트라이실버니아의 어원이기도하다.

Steel Division 2의 투르다 캠페인이 1944년 9월에 트란실바니아를 두고 싸우는 헝가리와 루마니아의 전역을 다루었다. 루마니아가 소련측에 붙자마자 헝가리가 독일군과 함께 트란실바니아를 공격한다. 헝가리군은 현지 세케이인들도 대량 징집하여 투입한다. 실제 역사에서는 헝가리와 독일의 공격이 막힌 후 루마니아와 소련군의 공격도 투르다에서 막히고 소강상태가 된다. 이후 소련이 우회하여 헝가리 수도를 위협하자 추축군은 철수한다. 부다페스트 공방전 이후 루마니아와 헝가리 모두 공산화되고 소련이 트란실바니아의 지배권을 루마니아에게 돌려준다.

[1] 헝가리계 민족[2] 트란실바니아 공국의 영역과 일치한다.[3] 옛 헝가리 왕국이었다가 루마니아로 넘어간 영토는 거의 10만 ㎢에 달하는데, 남한 면적과 비슷하고 현재의 헝가리보다도 더 넓다. 아무래도 트리아농 조약으로 루마니아가 얻은 영토는 트란실바니아가 핵심이고 나머지는 1+1 같은 느낌이 강하다.[4] 오스트리아 본토에서 오스트리아 치하 트란실바니아로 이주한 오스트리아인(이들 또한 당연히 독일계)의 후손들도 있었는데 이들은 오스트리아로 이민을 떠났다.[5]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소련군이 루마니아와 트란실바니아로 진격해오자 이를 피해 상당수가 후퇴하는 독일군을 따라 피난을 했다. 다만 자국 내 독일인들을 추방한 폴란드체코슬로바키아와 달리 추방령은 내려지지 않아서 제2차 세계 대전 이후로도 꽤 많은 수의 독일계가 냉전 시기 루마니아 공산정권 치하에 남아서 거주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루마니아가 독자노선을 천명, 1967년도에 서독과 외교관계를 수립한 뒤로는 서독정부는 경제적 지원을 조건으로 동구권의 재외동포에 비자를 발급하여 송환시키는 정책을 추진했고, 이에 따라 트란실바니아 독일인은 차우셰스쿠를 피해 도망가면서점진적으로 줄어들었다. 1989년 동구권이 붕괴 된 이후로는 대부분이 경제적인 풍요를 찾아 독일로 되돌아왔다. 다만 최근 루마니아가 EUNATO에 가입한 이후로는 거꾸로 독일에서 돌아오는 트란실바니아 작센인들도 있다.[6] 중세 헝가리 왕국의 공용어였던 라틴어 'Terra ultra silvam'을 번안한 단어이다.[7] 헝가리어 표기에서 유래했다.[8] 헝가리어 'Erdő-elü'에서 유래했으며 문자 그대로 '숲(Erdő) 너머 땅(elü)'이라는 뜻이다.[9] 더 정확한 발음은 '지벤뷔어겐'이다.[10] '일곱 개의 도시' 라는 뜻, 독일인들이 정착한 일곱 개의 도시에서 유래한 명칭이다.[11] Unio Trium Nationum. 15세기 중반, 루마니아인 농민 운동에 대항하여 트란실바니아의 기득권 계층인 헝가리인 귀족, 세케이인, 트란실바니아 작센인 간의 정치 협약.[12] 독수리는 헝가리의 국조 투룰(Turul)을 상징한다.[13] 오스만 제국의 침공을 막기 위하여 합스부르크 제국에서 설치한 국경의 군정 지역. 대표적으로 크로아티아 왕국 대부분이 크로아티아 국경 지대(Hrvatska vojna krajina or Hrvatska vojna granica)로 관리되었다.[14] 라틴어식 이름이다. 다키아식 이름은 디우르파네우스(Diurpaneus).[15] Gesta Hungarorum, 13세기 초반에 쓰여졌다.[16] 프랑스 왕국 카페 왕조 출신이자 나폴리 왕국의 통치 가문.[17] 블라드 가시공의 아버지[18] 트란실바니아 공국의 지역은 아니지만, 트란실바니아 공작의 통치를 받는 지역 정도로 볼 수 있겠다.[19] 사실 병력 집중도 아니었고 헝가리인 귀족들이 끌고온 루마니아인, 세르비아인 민병대만으로 막아냈다.[20] 현 루마니아 사투마레(Satu Mare). 헝가리어로는 서트마르네메티(Szatmárnémeti).[21] 이중 제국 성립 이후 오스트리아에 편입된 민족들이 헝가리에서보다 더 자유로웠다.[22] 현 루마니아 알바이울리아(Alba Iulia). 과거 트란실바니아 공국의 수도였다. 헝가리 왕국이 실질적으로 몰락하고 헝가리인 문화를 유지하게 해준 트란실바니아 공국의 수도였던 곳에서 통합 선언을 하고 페르디난드 1세 부부의 대관식을 치렀다는것 자체가 헝가리를 상대로 한 광역 도발이었다.[23] 비교해보자면, 우선 루마니아는 폴란드나 체코와 달리 독일과 접경국이 아니고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었다. 따라서 앞선 두 국가와 달리 자국 내 독일계 소수민족 때문에 독일과 영토분쟁이 생길 일도 사실상 없었다. 루마니아 및 트란실바니아의 독일계 역시 딱히 분리주의에 적극적인 것도 아니었으니 루마니아의 입장에서 굳이 '강제로' 이들을 추방할 필요성도 없었던 셈이다. 반면 폴란드와 체코, 유고슬라비아의 입장에서는 자국내 독일계는 조국을 나치 독일에 팔아넘긴 부역자일 뿐이었고, 독일에 점령당하면서 그야말로 온갖 고초를 다 겪어 국민적 감정이 격앙된 직후였다.[24] 전쟁 전의 70만 명에 비해서는 줄어들었다. 2차 대전이 끝날 무렵에 많은 수가 루마니아와 발칸반도로 진격해오는 소련군을 피해 독일로 피난을 가서 아예 독일에 정착했기 때문.[25] 주 민족인 루마니아인들조차도 잘 사는 나라로 이민을 많이 가 루마니아의 인구가 감소할 지경이었으니 독일로 향하는 비자와 영주권을 받기 쉬운 독일계 주민은 빠져나가는 것이 어찌 보면 당연했다.[26] 정확히 말하자면 맨 위 그림에서 연하게 칠해진 바나트 지방에 속해있다.[27] 27년 뒤인 대타협 결과로 대공국이 폐지되고 헝가리 왕국에 합병되었다.[28] 소수의 헝가리계도 루터파 신앙으로 개종하기도 했다. 그래도 사실상 트란실바니아에서 루터파 교인은 작센인으로 보아도 무방할 정도였다.[29] 크리슈나, 바나트 등[30] 헝가리어: 콜로주바르(Kolozsvár), 독일어: Klausenburg(클라우젠부르크)[31] 헝가리어: 브러쇼(Brassó), 독일어: Kronstadt(크론슈타트)[32] 헝가리어: Nagyszeben(너지세벤), 독일어: Hermannstadt(헤르만슈타트)[33] 헝가리어: Csíkszereda(치크세르더), 독일어: Szeklerburg(제클러부르크)[34] 헝가리어: Sepsiszentgyörgy(세프시센트지외르지)[35] 헝가리어: Marosvásárhely(머로슈바사르헤이), 독일어: Neumarkt am Mieresch(노이마르크트 암 미레슈)[36] 1699년 카를로비츠 조약 체결 당시 합스부르크에게 넘어간 헝가리 영토 중 유일하게 오스만령으로 남아있다가 1718년 파사로비츠 조약으로 합스부르크 제국에게 넘어갔다.[37] 사부아 공자 외젠이 오스만군을 격파한 젠타 전투가 바나트에서 벌어졌다.[38] 전후 재건을 겸사하여 민족 구성을 복잡하게 하여 헝가리의 독립운동을 견제하려했다는 견해도 있다.내가 가지지 못한다면 헝가리놈들도 이 땅을 가질 수 없다![39] 그 외에도 바나트 불가리아인, 크로아티아인, 슬로바키아인, 체코인, 우크라이나인, 아르메니아인, 유대인 등 그야말로 합스부르크 제국 내에서 볼 수 있는 온갖 민족이 죄다 이주해서 뒤섞여 살고 있었고 합스부르크 제국 안의 작은 합스부르크라 불릴만큼 민족구성이 복잡했다.[40] 프랑스 동방군(Armée d'Orient). 발칸반도에 파병되어 동맹국을 상대로 그리스 왕국세르비아 왕국과 루마니아의 잔존병력과 함께 싸웠다.[41] 종전이 얼마 지나지 않아 유고슬라비아 왕국의 전신이 되는 세르비아-크로아티아-슬로베니아 왕국으로 개칭한 상태였다.[42] 전근대 이전에 트란실바니아 공국이 바나트 지방의 일부 또는 전체를 점유하기도 하고, 근현대 들어서는 트란실바니아 출신 루마니아계 인텔리가 바나트에서 민족운동을 이끌기도 하는 등 둘이 인접한 지역이다 보니 영향을 꽤 주고 받기는 했다.[43] 전간기에는 아예 바나트를 독립시켜서 헝가리, 세르비아, 루마니아 중 어디에도 포함 되지 않는 중립 완충국가화 시키자는 의견도 파리 강화 회의에서 제기 됐다. 바나트 주민 대부분이 독립국 보다는 루마니아나 세르비아에 합병되는 걸 선호해서 무산 됐지만 아예 독립시키자는 의견이 나올만큼 바나트의 고유의 지역 정체성이 어느정도 갖춰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44] 헝가리어: Temesvár(테메슈바르), 독일어: Temeschwar(테메슈바르)[45] 헝가리어: Nagybecskerek(너지베치케레크), 루마니아어: Becicherecul Mare(베치케레쿨 마레)[46] 헝가리어: Nagyszalonta(너지설론터), 독일어: Grosssalontha(그로스잘론타)[47] 헝가리어: Nagyvárad(너지바러드), 독일어: Großwardein(그로스바르다인)[48] 철자는 Arad로 동일하고 헝가리어로는 '어러드', 독일어로는 '아라트'로 발음한다.[49] 헝가리어: Nagybánya(너지바녀), 독일어: 프라우엔바흐(Frauenbach)[50] 헝가리어: Hust(후슈트), 독일어: Chust(후스트)[51] 독일어: Bistritz(비스트리츠), 헝가리어: Beszterce(베스테르체)[52] 독일어: Hermannstadt(헤르만슈타트), 헝가리어: Nagyszeben(너지세벤)[53] 독일어: Klausenburg(클라우젠부르크), 헝가리어: Kolozsvár(콜로주바르)[54] 독일어: Kronstadt(크론슈타트), 헝가리어: Brassó(브러쇼)[55] 독일어: Mediasch(메디아슈), 헝가리어: Medgyes(메드제시)[56] 독일어: Mühlbach(뮐바흐), 헝가리어: Szászsebes(사스셰베시)[57] 독일어: Schässburg(셰스부르크), 헝가리어: Segesvár(세게슈바르)[58] 쿠만인 등 비 기독교 민족에 대항한 선교활동 십자군 전쟁이 명분이었다.[59] 전쟁 전의 70만 명에 비해서는 줄어들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날 무렵에 많은 수가 서독으로 이주했기 때문[60] 사실 프랭크 박사 일행은 외계인이고 이들이 말하는 트란실바니아는 지구상의 국가 이름이 아니라 그들의 고향 은하계 이름이다. 수록 넘버 'Sweet Transvestite'의 가사를 보면 프랭크 박사 일행이 트란실바니아의 트랜스섹슈얼이라는 곳에서 왔다고 하는데, 작중 배경인 영국에서 대충 어마어마하게 멀리 떨어진 곳에서 왔으니 좀 희한하게 굴어도 이해하라는 의미를 담는 동시에 노래의 라임(Transvestite, Transsexual, Transylvania)을 맞추기 위해 이렇게 이름을 지은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