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01 21:58:03

블라드 2세

블라드 드라쿨에서 넘어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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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사라브 1세 니콜라에 알렉산드루 블라디슬라프 1세 라두 1세
단 1세 미르체아 1세 블라드 1세 미르체아 1세
미하이 1세 라두 2세 단 2세 라두 2세
단 2세 알렉산드루 1세 알데아 블라드 2세 미르체아 2세
바사라브 2세 블라드 2세 블라디슬라프 2세 블라드 3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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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두 7세 미르체아 5세 라두 8세 미르체아 5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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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스탄틴 셰르반 게오르게 기카 그리고레 1세 기카 라두 1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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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스탄틴 브랑코비아누 슈테판 칸타쿠지노 니콜라에 마브로코르다트 이오안 마브로코르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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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레 2세 기카 콘스탄틴 마브로코르다트 미하이 라코비차 콘스탄틴 마브로코르다트
그리고레 2세 기카 마테이 기카 콘스탄틴 라코비차 콘스탄틴 마브로코르다트
스카를라트 기카 콘스탄틴 마브로코르다트 콘스탄틴 라코비차 슈테판 라코비차
스카를라트 기카 알렉산드루 스카를라트 기카 그리고레 3세 기카 마놀레 기아니 루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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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하이 수추 알렉산드루 모루지 알렉산드루 입실란티 콘스탄틴 한제를리
알렉산드루 모루지 미하이 수추 알렉산드루 수추 콘스탄틴 입실란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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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오르게 비베스쿠 콘스탄틴 칸타쿠지노 바르부 슈티르베이 알렉산드루 2세 기카
알렉산드루 이오안 쿠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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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tumblr_inline_pbukpdgjvo1uo0os9_640.jpg
출생 1395년 이전
사망 1447년 12월 7일 (향년 ?세)
왈라키아 공국 발테니
재위기간 왈라키아 보이보드
1436년 ~ 1442년
왈라키아 보이보드
1443년 ~ 1447년 12월 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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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fff> 부모 아버지: 미르체아 1세
어머니: 미상
배우자 Cneajna 유프락시아[1]
자녀 4남 1녀
가문 드라쿨레슈티 가문
종교 기독교 }}}}}}}}}

1. 개요2. 생애3. 가족4.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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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왈라키아 공국 제12대 보이보드[2].

2. 생애

왈라키아 공국 제6대 보이보드 미르체아 1세사생아다. 형제로 미하이 1세, 알렉산드루 1세 알데아, 라두 2세, 안나[3], 아리나[4]가 있었다. 1395년 오스만 제국군의 공세를 피해 헝가리 왕국으로 망명한 아버지 미르체아 1세는 헝가리 왕국의 국왕 지기스문트의 지원을 받아내는 대가로 그를 인질로 보내기로 했다. 헝가리 궁정에서 우수한 교육을 받은 블라드 2세는 1422년경 지기스문트의 허락을 받지 않고 폴란드로 가려 했지만 국경을 넘기 전에 잡혀서 도로 궁정으로 이송되었다.

이후 모종의 시기에 오스만 술탄국의 술탄 무라트 2세의 인질이 되었으며, 아테네 출신의 동로마 제국 역사가 라오니코스 칼코콘딜로스(Λαόνικος Χαλκοκονδύλης Metς)에 따르면, 블라드 2세는 무라트 2세의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에 참여했다고 한다. 1430년 다시 지기스문트의 궁정으로 돌아와서 오스만 약탈부대의 습격으로부터 트란실바니아 남부 국경을 방어하는 임무를 맡았다. 1431년 초, 지기스문트로부터 라슬로 기사단과 드래곤 기사단의 기사 작위를 수여받았다. 당시 드래곤 기사단에는 아라곤 국왕 알리폰소 5세, 리투아니아 대공 비타우타스도 있었다.

한편, 왈라키아에서는 단 2세가 오스만 술탄국의 침략에 맞서 싸우다가 전사한 뒤 블라드 2세의 형제인 알렉산드루 1세 알데아가 오스만 술탄 무라트 2세애 의해 보이보드로 선임되었다. 지기스문트는 오스만 제국이 이대로 왈라키아를 복속하면 자국에 불리해질 거라고 여기고, 블라드 2세를 트란실바니아의 시기쇼아라 시에 정착해 알렉산드루 1세와 대적하도록 했다. 블라드 2세는 "신의 은총으로, 왈라키아의 군주, 암라스와 파가라스의 공작"이라는 호칭을 사용했으며, 프란치스코회가 왈라키아에서 가톨릭을 자유롭게 전도할 특권을 승인했다.

1432년, 알렉산드루 1세는 헝가리 왕국과 손잡고 반 오스만 정책을 추진하기로 했다. 이에 지기스문트는 블라드 2세가 그를 상대로 적대행위를 하는 걸 금지했다. 블라드 2세는 지기스문트의 지시에 따르면서도 시기쇼아라에 주조소를 설립하며 때를 기다렸다. 그러던 중 알렉산드루 1세가 술탄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 아드리아노폴리스로 향하자, 블라드 2세는 알렉산드루 1세에게 축출되었던 보야르들과 함께 왈라키아 공국에 침입했지만 알렉산드루 1세를 추종하는 보야르들에게 패퇴했다. 1434년, 지기스문트는 오스만 술탄국으로 기운 알렉산드루 1세를 견제하기 위해 블라드 2세가 무기를 대거 생산해 왈라키아를 공략하는 걸 용인했다. 1435년, 블라드 2세가 왈라키아를 재침했지만, 오스만 제국군이 알렉산드루 1세의 지원 요청을 받아들여 개입하는 바람에 격퇴되었다.

1436년 6월 25일, 알렉산드루 1세가 병사했다. 블라드 2세는 지기스문트의 지원을 토대로 1436년 9월 카르파티아 산맥을 건너 왈라키아에 성공적으로 진입한 뒤 보이보드에 선임되었다. 그는 초기엔 오스만 술탄국의 반발을 살 것을 우려해 술탄에게 경의를 표했지만, 1437년 1월 20일에 자신을 "하느님의 기름부은 자, 위대한 사령관이자 왈라키아 통치자, 암라스와 파가라스의 공작, 헝가리의 충실한 봉신"이라고 칭하는 헌장을 반포함으로써 친 헝가리 성향을 드러냈다. 그러나 1437년 12월 9일 지기스문트가 향년 69세로 병사한 뒤 왈라키아에 대한 헝가리의 영향력이 줄어들자, 그는 입장을 바꿔 오스만 술탄국의 봉신을 자처했다.

1438년 술탄 무라트 2세가 트란실바니아를 정복하기 위해 대규모 원정군을 일으켰을 때 진군로를 안내해주는 역할로서 원정에 참여했다. 오스만 제국군은 시비우와 브라쇼프 공략엔 실패했지만, 6주 동안 주변 지역을 철저히 약탈하고 수많은 주민을 생포해 끌고 가서 노예로 팔았다. 이때 블라드 2세는 오스만 제국군에 포위되었던 세비스 시 주민들에게 도시를 넘기고 왈라키아로 이주하도록 설득했다.

1442년 3월, 오스만 특사로부터 에디르네로 가서 무라트 2세에게 경의를 표하라는 지시를 받은 블라드 2세는 장남 미르체아 2세를 왈라키아 통치자로 세운 뒤 공물을 가지고 에디르네로 갔다. 그러나 그곳에서 무라트 2세의 명령으로 체포된 뒤 반역죄로 기소되어 감옥에 갇혔다. 1442년 6월, 트란실바니아 총독 후녀디 야노시가 오스만 제국군을 격파한 뒤 단 2세의 아들 중 한 명인 바사라브 2세를 왈라키아의 보이보드로 앉히기 위해 공세를 개시했다. 미르체아 2세는 후녀디 야노시에게 대적하지 못하고 산악지대로 피신한 뒤 오스만 술탄국에 구원을 요청했다.

그 후 블라드 2세는 어린 아들 블라드 3세, 라두 3세가 인질로 넘겨지고, 매년 공물을 바치고, 매년 왈라키아의 소년들을 보내 오스만 군대에서 복무하도록 훈련하는 조건을 수락한 뒤에야 겨우 풀려났다.영상[5] 1443년 오스만 제국군의 지원을 토대로 왈라키아 보이보드로 복위했다. 1443년 10월 ~ 1444년 1월까지 지속된 후녀디 야노시와 폴란드 국왕 및 헝가리 국왕 브와디스와프 3세의 오스만 술탄국에 대한 원정이 벌어졌을 때, 블라드 2세는 중립을 고수했다. 오스만 술탄 무라트 2세는 후녀디 야노시와의 전쟁이 갈수록 불리해지자 1444년 6월 12일 에디르네 평화 협약을 맺기로 했다. 이 조약에는 블라드 2세가 술탄 무라트 2세의 가신으로 남지만 인질을 돌려받으며, 공물을 바칠 의무를 면제받는 내용이 포함되었다.

그러나 추기경 줄리아노 체자레니는 전쟁이 이 정도로 끝나기를 원하지 않고 대오스만 동맹 결성을 촉구하였고 여기에 호응한 교황령, 헝가리 왕국, 폴란드 왕국, 부르고뉴 공국, 베네치아 공화국, 제노바 공화국의 연합군이 결성되었다. 블라드 2세는 자식들이 오스만 술탄국에 인질로 잡혀있는터라 십자군 지도부에 원정을 취소해달라고 설득하려 했지만 실패하자, 십자군을 직접 돕기를 거부하고 왈라키아로 돌아갔다. 그 대신 장남 미르체아 2세가 4,000 ~ 7,000명의 기병을 맡겨 십자군에 가담했다. 1444년 11월 10일 십자군이 바르나 전투에서 완패하고 브와디스와프 3세가 전사한 후, 후녀디 야노시는 다뉴브 강변 너머로 피신했다가 블라드 2세에게 생포되었다. 블라드 2세가 후녀디 야노시를 생포한 이유는 불분명한데, 일전에 야노시가 그를 몰아내고 바사라브 2세를 세운 걸 마음에 담아뒀을 수도 있고, 십자군이 바르나로 진군할 때 왈라키아 영토를 약탈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어쨌든 후녀디 야노시는 막대한 몸값을 지불하고 난 뒤 풀려났다.

1445년, 블라드 2세는 후녀디 야노시의 지원을 받아 오스만 술탄국으로부터 지우르지우를 탈환했고, 1446년 봄에는 우즈베이 다부드가 이끄는 오스만군을 격퇴했다. 그러나 왈라키아와 헝가리의 관계는 곧 악화되었다. 블라드 3세는 브라쇼브 시민들에게 보낸 편지들에서 왈라키아 상인들이 트란실바니아에서 체포되었다며 헝가리 왕국의 행태를 비난했다. 1446년 또는 1447년에 오스만 술탄국과 평화 협약을 맺고, 인질이 된 두 아들을 안전하게 지키기 위해 오스만 제국이 다시 지우르지우 요새를 통제하도록 허용했다. 여기에 불가리아 난민들을 오스만 술탄국으로 돌려보내는 걸 받아들였다. 1447년 7월 몰다비아 왕좌를 놓고 벌어진 내전에 개입해 로만 2세를 지지했다. 로만 2세의 상대인 표트르 2세는 후녀디 야노시의 지원을 받았기에, 이 일 역시 야노시와 블라드 2세의 관계가 악화되는 계기로 작용했다. 1447년 7월 20일, 후녀디 야노시는 브라쇼브 시민들에게 블라드 2세의 사촌이자 정적인 블라드슬라프 2세에게 피난처를 제공하라고 지시했다.

1447년 11월 말, 후녀디 야노시는 블라디슬라프 2세와 함께 왈라키아를 기습 침공했다. 이때 장남 미르체아 2세는 체포된 뒤 색슨 귀족들에 의해 빨갛게 달군 꼬챙이로 실명된 뒤 산채로 매장되었다. 블라드 2세는 페리슈로 피신했지만 곧 암살당했다. 블라드 2세의 매장 장소는 알려지지 않았는데, 일부 학자들은 루마니아 남부 일포브 주, 스나고프 호수 북쪽의 섬에 있는 스나고프 수도원에 매장되었다고 추정하며, 다른 학자들은 왈라키아의 수도 트르고비슈테 인근의 데알루 수도원에 안장되었을 거라고 추정한다. 그 후 블라디슬라프 2세가 후녀디 야노시의 추대로 보이보드에 선임되었다.

3. 가족

정설에 따르면, 블라드 2세의 아내는 몰다비아 공국[6][7] 알렉산드루 1세의 딸인 'Cneajna'라고 한다. Cneajna는 '공작부인'을 의미하는 경칭이다. 루마니아 역사가 라두 플로레스쿠(Radu Florescu, 1925 ~ 2014)에 따르면, 이 여인의 본명은 유프락시아(Eupraxia)라고 한다. 반면 또 다른 루마니아 역사가 마테이 카자쿠(Matei Cazacu, 1946~)는 블라드 2세의 두 번째 부인 아나스타시야의 이름만 인정하며, 첫 번째 부인의 유프락시아란 이름은 정확한 게 아니므로 Cneajna라고만 명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블라드 2세의 후손들은 그의 별명인 드라쿨(Dracul)을 부계명으로 채택했기 때문에 이후 드라큘레슈티(Drăculești)로 일컬어졌다.

4. 여담

  • 흔히 알려진 별칭인 '드라쿨(Dracul)'[9]은 블라드 2세가 드래곤 기사단에 들어갔을 때 얻은 것으로 용을 뜻한다. 이를 바탕으로 블라드 2세의 이름은 영어로는 Vlad the Dragon, 프랑스어로는 Vlad II le Dragon, 중국어 및 일본어로는 용공(龍公/竜公)으로 번역한다. 일부 문헌에서는 용의 사악함에 빗대어서 악마공(惡魔公)이라고 번역하기도 한다고 명시되어 있으나, 이는 명백한 오역이자 설득력이 떨어지는 주장이다.[10]


[1] Cneajna는 '공작부인'을 의미하는 경칭이다. 번역하면 '유프락시아 공작부인'이다.[2] 왈라키아 공국왕국이 아니므로 이란 명칭을 쓸 수 없다. 다만 여기서 말하는 Voivode 또는 프린스는 (Sovereign) Prince로 '고귀한 군주' 즉, 제후를 의미하지 반드시 왕의 혈통, 왕의 혈육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 물론 중세 유럽에선 이런 제후들이 정략결혼으로 나중에 왕가와 실제로 혈연으로 묶이게 되는 경우가 매우 많았다. 참고로 '고귀한 왕족'을 의미하는 왕의 아들인 왕자는 (Royal) Prince로 구분 지어 표기한다.[3] 대관세관 라디치의 부인이 된다.[4] 오스만 제국 술탄 무사 첼레비의 첩이 되었다.[5] 넷플릭스 오리지널 다큐드라마 〈오스만 제국의 꿈〉의 시즌 2 1화의 한 장면이다. 중간중간 교수, 역사학자 등의 전문가들이 당시 상황에 대해 이해하기 쉽게 설명해 주므로 해당 역사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라면 한 번쯤 보는 게 좋다.[6] 오늘날 몰다비아.[7] 공작과 사실상 같은 계급이다. 실제로 많은 중세 시대 문서에도 투항해서 작위를 유지하거나, 데릴사위처럼 특별히 둘의 관계를 강조해야만 하는 등의 아주 특별한 경우가 아닌 담엔 대공과 공작 이 둘을 혼용한 기록들이 많다.[8] 공국, 후국, 백국처럼 물려줄 영지가 있는 세습 가능한 작위의 귀족들을 통칭하는 명칭이다.[9] 혹은 드라큘이라고도 한다.[10] 이는 현대 루마니아어에서 '악마'를 의미하는 '드러쿨(Drăcul)'을 바탕으로 해석한 것에서 비롯되었다. 애초에 '드라쿨(Dracul)'이라는 단어는 을 뜻하는 라틴어 '드라코(Draco)'를 중세 루마니아어식으로 바꾼 것이며 시간이 흐르면서 그 의미가 악마로 변질된 것이다. 더군다나 블라드 2세 자신은 딱히 사악하다고 볼 수 있는 행적을 남기지 않았을 뿐더러, 드래곤 기사단에 가입하면서 지기스문트로부터 드라쿨이라는 별명을 하사받은 것인데 만약 악마공이라고 번역하는 것이었다면, 지기스문트는 자신의 신하이자 한 기사단을 맡는 기사단장이자 공국의 군주에게 모두가 보는 앞에서 대놓고 욕을 한 셈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