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000><colcolor=#fff> '''''' | |||
출생 | 미상 | ||
사망 | 1364년 11월 16일 (향년 ?세) | ||
왈라키아 공국 큼플룽 | |||
재위기간 | 왈라키아 보이보드 | ||
1352년 ~ 1364년 11월 16일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000><colcolor=#fff> 부모 | 아버지: 바사라브 1세 어머니: 마르기타 | |
형제 | 테오도라 | ||
배우자 | 락피 마리어, 도보카이 클라라 | ||
자녀 | 블라디슬라프 1세, 엘리자베타, 안카, 안나, 라두 1세 | ||
가문 | 바사라브 가문 | ||
종교 | 기독교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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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왈라키아 공국 제2대 보이보드.2. 생애
왈라키아 공국 초대 보이보드 바사라브 1세와 마르기타의 외아들이다. 누이로 불가리아 제2제국 초대 차르 이반 알렉산더르의 첫번째 황후인 테오도라가 있었다. 1344년 헝가리 왕국의 새 국왕 러요시 1세가 아버지의 패배를 복수하기 위해 왈라키아로 쳐들어가려 하자, 바사라브 1세는 위협을 느끼고 아들 니콜라에 알렉산드루를 그에게 보내 봉신을 자처했고, 그는 이에 만족하여 수도로 귀환했다. 1352년 아버지가 사망한 뒤 왈라키아 공국의 2대 보이보드로 선임되었다.알렉산드루는 아버지의 치세 말부터 건설되던 쿠르테아 데 아르게슈의 산 니코아라 교회를 완공했고, 콤플랑에 건설되던 네글루 보다 수도원 공사도 마무리했다. 한편, 집권 후 헝가리 왕국과의 갈등이 불거졌다. 1355년자 헝가리 왕실 문서에서, 왈라키아 보이보드가 헝가리 국왕에게 확실히 복종한다면 "헤택"을 준다는 내용이 기재되었다. 이 혜택이 뭔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일부 학자들은 전임 왈라키아 공 바사라브 1세와 헝가리 왕국의 분쟁 지역이었던 세베린 요새와 그 주변 지역에 대한 바사라브 가문의 통치를 인정한 것일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하지만 갈등은 계속 이어졌다. 1359년 8월 29일자 왈실 문서에서, 러요시 1세는 헝가리 사절이 1351년 이후 왈라키아에 여러 임무를 수행하고자 파견되었다가 모두 실패했다고 밝혔다.
이렇듯 헝가리 왕국과의 갈등이 심해지자, 그는 동로마 제국과 동맹을 맺기로 하면서, 정교회를 수용하기로 했다. 동로마 제국은 이에 응해,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의 지도 아래 비시나 대주교인 치르 자친트가 이끄는 웅그로 블라히아 대주교가 설립되었다. 이리하여 가톨릭과 정교회 세력이 혼재했던 왈라키아는 정교회 국가로 굳어졌다. 알렉산드루는 끝까지 러요시 1세와의 관계를 개선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러요시 1세는 알렉산드루가 죽고 아들 블라디슬라프 1세가 왈리키아 공에 오른 직후에 "바사라브 1세의 나쁜 습관을 따랐다"고 비판하며, 니콜라에와 블라디슬라프 1세 부자를 보이보드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칙령을 내렸기 때문이다.
큼플룽 교회에 세워진 알렉산드루의 비문에 따르면, 그는 우주력 6873년(서기 1364년) 11월 16일 큼플릉에서 사망했다고 한다. 사후 블라디슬라프 1세가 보이보드에 선임되었다.
3. 가족
- 락피 마리어: 트란실바니아에 거주하던 마자르 귀족 집안인 락피 가문의 일원.
- 블라디슬라프 1세(? ~ 1377): 왈라키아 공국 제3대 공.
- 엘리자베타(1340 ~ 1369): 오폴레 공작 블라디슬라프 2세의 부인.
- 도보카이 클라라(1330년 이전 ~ 1370년 이후): 트란실바니아에 영지를 둔 헝가리 귀족 도보카이 야노시의 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