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000><colcolor=#fff> '''''' | ||||
출생 | 1726년 | |||
오스만 제국 코스탄티니예 | ||||
사망 | 1807년 1월 13일 (향년 81세) | |||
오스만 제국 코스탄티니예 | ||||
재위기간 | 왈라키아 공국의 보이보드 | |||
<colbgcolor=#f5f5f5,#2d2f34> 1차 | 1774년 9월 15일 ~ 1782년 2월 | |||
2차 | 1796년 8월 ~ 1797년 11월 | |||
몰다비아 공국의 보이보드 | ||||
1차 | 1786년 12월 ~ 1788년 4월 19일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000><colcolor=#fff> 부모 | 아버지: 요안니스 입실란티스 어머니: 스마라그다 마모나 | ||
자녀 | 콘스탄틴 입실란티 | |||
가문 | 입실란티 가문 | |||
종교 | 기독교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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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왈라키아 공국 제81대 보이보드, 몰다비아 공국 제82대 보이보드.2. 생애
오스만 제국 궁정에서 대 드라고만(Dragoman: 유럽 등 타국 사절단의 통역자, 번역가, 공식 가이드를 맡은 궁정 직위)으로 활약하던 요안니스 입실란티스와 그리스 귀족 여식인 스마라그다 마모나의 아들이다. 그가 속한 입실란티 가문은 본래 흑해 남안 출신으로, 오스만 제국이 흑해를 지배한 이래 코스탄티니예로 이주한 뒤 대표적인 파나리오테스로서 오스만 제국의 통치에 적극적으로 혐력했다. 알렉산드루는 매우 박식했고,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오스만어, 그리스어, 아랍어, 페르시아어를 통달했고, 1774년 아버지의 뒤를 이어 대 드라고만에 선임되었다.1770년, 그리스에서 제7차 러시아-튀르크 전쟁이 한창인 틈을 타 독립을 꾀한 무리가 일으킨 오를로피카 반란이 발발했지만 얼마 안 가 진압되었다. 이후 그리스 각지에서 반란에 가담했던 인사들을 대대적인 처형이 진행되었다. 1774년 대 드라고만에 선임된 알렉산드루는 파디샤 압뒬하미트 1세를 설득해 그리스인들을 더 이상 처벌하지 말라고 설득하는 데 성공했다. 이후 제7차 러시아-튀르크 전쟁의 종결을 이끈 퀴췩 카이나르자 조약의 체결에 일조했다.
1774년 11월 3일 왈라키아 공국의 보이보드로 선임되었다. 일부 기록에 따르면, 왈라키아 보야르들은 슈테판 프라스코베아누를 새 보이보드로 옹립하길 원했지만, 오스만 궁정은 이를 묵살하고 알렉산드루를 세웠다고 한다. 알렉산드루는 토지 귀족들로 구성된 새로운 보야르 의회를 구성했으며, 수도원의 여러 세금을 학교 지원을 위한 세금을 제외하고 모두 면제했다. 또한 <프라빌니시아스카 콘디카>(Pravilniceasca condică)로 명명된 법안을 1780년에 반포해, 왈라키아의 재정적, 행정적, 사법적, 정치적 결함을 수정하려 노력했으며, 각 왈라키아 주에 민사 법원을 세웠다. 이 법률에서는 공공직에 급여를 부과했는데, 이는 세금이 부과되는 사회 계층의 재정적 부담을 줄이고 보다 전문적인 행정 구조를 보장하기 위한 조치였다. 또한 세르비아인과 불가리아인, 그리고 나머지 그리스인으로 구성된 2개 중대를 포함한 60개 중대로 구성된 군대를 창설했다.
1782년 2월 니콜라에 카라제아가 새 왈라키아 보이보드로 부임하면서 물러난 그는 4년 후인 1786년 12월 알렉산드루 마브로코르다트 피라리스의 뒤를 이어 몰다비아 보이보드에 선임되었다. 1787년 제8차 러시아-튀르크 전쟁이 발발하자 오스만 제국 편에서 러시아군에 대적했고, 오스만 궁정으로부터 몰다비아에 주둔한 오스만군의 지휘권을 수여받았다. 그러나 전세는 러시아 쪽으로 점점 기울였고, 급기야 합스부르크 제국이 러시아 제국과 연합해 몰다비아를 침략하면서 입지가 급격히 위태로워졌다. 결국 1788년 4월 19일 오스트리아군이 몰다비아 공국의 중심지인 이아시를 공략했을 때 생포되었고, 브르노에 끌려가 연금 생활을 하다가 1791년 가을 스비슈토프에서 오스만 제국과 합스부르크 제국간의 평화 협약이 체결되면서 풀려났다.
1796년 8월 알렉산드루 모루지의 뒤를 이어 왈라키아 보이보드로 복위했다. 그러나 사법 개혁을 단행하는 등 왈라키아의 발전과 백성의 삶 개선에 힘을 기울였던 이전 통치와는 달리 재산을 축적하기 위해 백성들을 쥐어짜는 모습을 보이다 1797년 11월 콘스탄틴 한제를리로 교체되었다. 이후 코스탄티니예에서 여생을 보냈지만, 1806년 아들 콘스탄틴 입실란티가 제9차 러시아-튀르크 전쟁이 발발했을 때 러시아로 망명하자 파디샤 셀림 3세의 명령으로 체포되어 감옥에 갇힌 뒤 며칠간 고문받다가 1807년 1월 13일에 참수형에 처해졌다. 사후 500만 그로시가 넘는 것으로 추정되는 그의 재산은 몰수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