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8d0000><colcolor=#fff> '''''' | |||
출생 | 미상 | ||
사망 | 1564년 5월 5일 (향년 미상) | ||
폴란드 왕국 루테니아주 르비우 | |||
재위 | 몰다비아 보이보드 | ||
1563년 8월 ~ 1564년 3월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8d0000><colcolor=#fff> 부모 | 아버지: 미상 어머니: 미상 | |
자녀 | 슈테판 9세 톰샤, 레온 톰샤 | ||
가문 | 톰샤 가문 | ||
종교 | 기독교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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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몰다비아 공국 제30대 보이보드.2. 생애
몰다비아 공국의 헤트만(hetman: 군사령관)으로, 1563년 8월 이오안 2세 야콥 헤라클리드의 급격한 서구화 개혁과 개신교 친화 정책, 보야르 숙청 정책, 새로운 세금 부과에 반감을 품은 보야르들의 추대로 몰다비아 보이보드에 올랐다. 이후 폴란드 귀족이자 몰다비아 공국 정계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올브라흐트 라스키와 동맹을 맺고 이오안을 수체아바에 가두고 3개월간 공성전을 벌였으며, 반개신교 포그롬을 조장해 여러 개신교 가문을 몰살했다.이오안은 수체아바 내부에서 수비대가 성문을 열고 항복하려 한다고 여기고, 그들의 지휘관인 데르비치 대위를 처형했다. 그러나 이 조치는 수비대의 반감을 샀고, 결국 수체아바 내부의 헝가리 용병대가 반기를 들고 다른 부대들은 그를 위해 싸우지 않겠다고 통보했다. 결국 이오안은 항복하기로 하고, 1563년 11월 5일에 정식 예복을 입고 수체아바 성벽 바깥의 아레나 평원에서 슈테판 7세 톰샤와 대면했다.
이후의 전개 과정은 기록마다 상이하다. 일부 기록에 따르면, 슈테판 7세 톰샤가 신하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철퇴를 휘둘러서 이오안의 머리를 가격해 죽였다고 한다. 다른 기록에 따르면, 이오안이 한 명 또는 여러 명의 사형 집행자에게 살해되었다고 한다. 그의 유해가 어떻게 처리되었는지도 분명하지 않다. 18세기 연대기는 그의 유해가 푸트나 수도원에 매장되었다고 밝혔고, 크리스티안 셰사이우스는 "광적인 군중"에 의해 조각조각 났다고 주장했으며, 요하네스 좀머는 그의 수급이 방부 처리된 뒤 코스탄티니예에 선물로 보내졌다고 밝혔다.
이렇게 해서 몰다비아 보이보드로서의 입지를 굳혔지만, 오스만 제국은 그를 인정해줄 생각이 없었다. 지난날 이오안 2세에게 밀려났던 알렉산드루 4세 라푸슈네아누는 오스만 궁정에 200,000 굴덴을 바치고 몰다비아 보이보드로 복위하는 걸 허락받았다. 이후 몰다비아로 돌아와 슈테판 7세 톰샤와 내전을 벌였고, 오스만 제국군과 크림 칸국의 타타르족은 알렉산드루 4세를 옹립한다는 명분을 내걸고 몰다비아로 진군해 약탈을 자행했다. 결국 1564년 3월 슈테판 7세 톰샤가 밀려나 귀족 이온 모조크, 포체드닉, 베베리타, 스팬치오그와 함께 폴란드 왕국으로 망명했다.
그러나 폴란드 국왕 지그문트 2세는 그를 보호하기 위해 오스만 제국과 대결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오스만 제국 측이 그를 죽이라고 요구하자, 지그문트 2세는 이를 받아들여 5월 5일에 슈테판 7세 톰샤와 보야르들을 르비우에서 참수했고, 그의 유해는 르비우에 안장되었다.
그에게는 두 아들 슈테판 9세 톰샤와 레온 톰샤가 있었다. 슈테판 9세 톰샤는 훗날 몰다비아 공국의 보이보드가 되었고, 레온 톰샤는 왈라키아 공국의 보이보드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