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8d0000><colcolor=#fff> '''''' | |||
출생 | 1820년경 | ||
몰다비아 공국 이아시 | |||
사망 | 1863년 4월 23일 (향년 43세) | ||
몰다비아 왈라키아 연합공국 부쿠레슈티 | |||
재위 | 몰다비아 카이마캄 | ||
1857년 3월 7일 ~ 1858년 10월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8d0000><colcolor=#fff> 부모 | 아버지: 슈테판 보고리디 어머니: 랄루 스카이리티 | |
형제 | 알렉산드르 보고리디, 스마라그다 보고리디 | ||
배우자 | 에카테리나 코나키 | ||
자녀 | 엠마누엘 보고리디, 콘스탄틴 보고리디, 마리아 보고리디, 루시아 보고리디 | ||
가문 | 보고리디 가문 | ||
종교 | 기독교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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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몰다비아 공국 카이마캄(Caimacam: 임시 통치자).2. 생애
1820년경 몰다비아 공국의 중심지인 이아시에서 출생했다. 1821년부터 1822년까지 몰다비아 공국 카이마캄을 역임한 슈테판 보고리디와 랄루 스카이리티의 아들이다. 형제로 알렉산드르 보고리디[1], 스마라그다[2]가 있었다. 그는 아버지가 추방당한 이즈미트에서 공부했고, 나중에는 코스탄티니예 대학교에서 공부했으며, 그곳에서 동창생이었던 게오르기 스토이코프 라코프스키[3]와 친구가 되었다.1837~1839년 파리에 주재한 오스만 대사관의 드라고만(Dragoman: 유럽 등 타국 사절단의 통역자, 번역가, 공식 가이드를 맡은 궁정 직위)을 역임했고, 몰다비아로 돌아온 뒤 1856년 12월 18일부터 1857년 3월 7일까지 몰다비아 카이마캄 테오도르 발슈 치하에서 재무부 장관을 역임했으며, 노조 합법화를 거부한 카이마캄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1857년 3월 1일, 테오도르 발슈가 급사했다. 그 후 3월 7일에 몰다비아의 새 카이마캄을 맡았다. 왈라키아 보이보드 알렉산드루 2세 기카가 왈라키아와 몰다비아의 통합을 추구한 것과는 달리, 그는 오스트리아 제국과 오스만 제국의 노선을 따라 두 공국의 통합을 강하게 반대했다. 심지어 두 국가의 통일 문제를 다루기로 되어있던 임시 의원 선거 유권자 명단을 위조하기도 했다. 1857년 7월 7일 선거가 열렸을 때, 몰다비아에서는 공포 분위기와 연합당의 보이콧 아래 진행되었다. 연합주의자들은 오스트리아 법원과 보고리디의 비밀 서신을 입수했는데, 거기에는 선거 조작에 대한 확실한 증거가 있었다. 이에 유럽 각지에서 강력한 항의가 벌어졌고, 급기야 프랑스, 러시아, 프로이센, 사르데냐 대사들이 코스탄티니예에서 영사관을 철수하겠다고 위협하자, 오스만 제국은 별 수 없이 9월 22일에 선거를 다시 실시하기로 했다.
한편, 그는 1856년 파리 조약에 따라 몰다비아에 합병된 남부 베사라비아에 거주하는 불가리아인들을 지원했다. 그가 카이마캄으로 임명된 직후, 불가리아 이민자 대표단은 그에게 브랜디에 대한 독점권을 청산해 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자 그는 자신은 불가리아 사람이므로 어떤 요청이 들어와도 들어주겠다고 약속했다. 1858년 6월 28일 불가리아 대표단의 요청에 따라, 그는 성 베드로 고등학교가 발행한 크리소불(증명서)을 승인했다. 또한 친구인 게오르기 스토이코프 라코프스키의 요청에 따라 1857년 갈라트에 불가리아 지방자치단체와 인쇄소 설립을 허용했고, 오스만 제국 당국이 라코프스키를 체포한다는 정보를 입수하자 즉시 라코프스키에게 이 사실을 알려 러시아에 망명하도록 했다.
1857년 9월 22일 선거 결과, 연합주의자들이 압승을 거두었다. 그 후 그의 영향력은 갈수록 축소되었다. 심지어 아내 예카테리나 코나키는 남편에 맞서 몰다비아와 왈라키아의 연합을 이루기 위해 보석을 기증했고, 남편이 오스만 제국 고위 인사들에게 보낸 편지를 훔쳐서 노조 운동을 벌이는 인사들에게 넘기는 등 노골적으로 남편에 대적했다. 결국 위상이 실추된 그는 1858년 10월 직위에서 물러나야 했다.
1859년 10월 25일 아버지 슈테판 보고리디가 기증한 부지에 훗날 '철 교회'로 일컬어질 성 슈테판 교회의 건설을 시작하도록 했다. 1862년 빈에서 머물렀을 때 친구 라코프스키의 연락을 받고 루마니아의 작은 항구인 그루이아에서 비밀리에 회의를 열었다. 오스만 제국 정보국의 보고에 따르면, 라코프스키는 불가리아 제1군단 창설을 위해 그로부터 5,000 파운드를 지원받았다고 한다. 정보국은 그가 빈에 있는 불가리아 비밀 위원회의 위원장이며, 이 위원회는 러시아 대사관과 연락을 취하면서 루마니아와 오데사의 불가리아 혁명 위원회와 연락을 취한다고 덧붙였다.
1863년 4월 23일에 부쿠레슈티에서 사망했다. 사후 브라일라에 안장되었다.
3. 가족
- 예카테리나 코나키: 루마니아 보야르이자 저명한 시인인 코스타케 코나키의 딸. 니콜라에 보고리디가 사망한 지 1년 후인 1864년 포조 수아자의 초대 공 에마누엘레 프란체스코 루스폴리와 재혼해 다섯 자녀를 낳았다.
- 엠마누엘 보고리디(1847 ~ 1935): 1887년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독립한 불가리아의 군주 후보로 거론되었고, 1887년에 또다시 불가리아 왕위 후보로 거론되었지만 끝내 오르지 못하고 파리에서 평생을 보냈다.
- 콘스탄틴 보고리디(1849 ~ 1894)
- 마리아(1851 ~ 1931)
- 루시아(1855 ~ 19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