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8d0000><colcolor=#fff> '''''' | |||
출생 | 1575년 또는 1580년 | ||
베네치아 공화국 크로아티아 해안 비하치 | |||
사망 | 1620년 9월 29일 (향년 40~45세) | ||
몰다비아 공국 튜쇼라 | |||
재위 | 몰다비아 보이보드 | ||
1619년 2월 4일 ~ 1620년 9월 10일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8d0000><colcolor=#fff> 부모 | 아버지: 미상 어머니: 미상 | |
종교 | 기독교 | }}}}}}}}} |
[clearfix]
1. 개요
몰다비아 공국 제49대 보이보드.2. 생애
1575년 또는 1580년 베네치아 공화국에 귀속된 크로아티아 해안가 도시인 비하치에서 출생했다. 그는 이탈리아어, 크로아티아어, 독일어, 영어, 오스만어를 익숙하게 사용할 수 있었으며, 이를 토대로 여러 유럽 열강 궁정에서 통역가로 활동했다. 그러던 중 잉글랜드 왕국과 스코틀랜드 왕국의 국왕 제임스 1세의 사절인 폴 핀다르 경과 함께 코스탄티니예로 가서 통역사로 활동하다가, 나중에는 오스만 제국 궁정의 대 드라고만(Dragoman: 유럽 등 타국 사절단의 통역자, 번역가, 공식 가이드를 맡은 궁정 직위)으로 발탁되었다.이후 여러 임무를 깔끔하게 수행해 오스만 궁정의 신임을 받았고, 1616년 파로스와 낙소스 공작의 칭호를 수여받았다. 하지만 그는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몰다비아 보이보드가 되기를 희망했다. 이를 위해 합스부르크 제국의 스파이를 자처하면서, 그들로부터 막대한 자금을 받아낸 후, 이 자금을 오스만 제국 관원들에게 뇌물로 바쳤다. 그 결과 1619년 2월 4일 몰다비아 보이보드로 선임될 수 있었다. 그는 관례에 따라 가톨릭에서 정교회로 개종했다. 이후 무장 경비대 500명을 조직하고 오르헤이아 농민들의 반란을 잔혹하게 진압해, 누구도 자기에게 맞설 엄두를 못 내게 하려 했다.
오스만 제국은 그가 드네스트르강 너머로 국경을 확장하려는 폴란드-리투아니아를 저지하기를 희망했지만, 그는 오히려 폴란드-리투아니아와 손잡고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독립한 뒤, 미하이 2세가 이뤄냈던 것처럼 왈라키아 공국과 트란실바니아 공국을 석권하여 루마니아의 통일을 이루려 했다. 그는 폴란드-리투아니아 헤트만 스타니스와프 주키에프스키와 동맹을 맺었고,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페르디난트 2세에게 사절을 보내 경의를 표했다.
오스만 제국 파디샤 오스만 2세는 가슈파르가 반 오스만 정책을 추진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카푸쿠(Kapucu: 오스만 제국 파디샤가 파견한 공식 사절)와 수행원 300명을 파견해 그를 폐위하려 했다. 가슈파르는 이들을 모조리 학살했다. 이에 격분한 오스만 2세는 1620년 이스칸데르 파샤가 이끄는 20,000명을 파견해 몰다비아를 공략하도록 했다. 가슈파르는 스타니스와프 주키에프스키에게 급히 구원을 요청했고, 스타니스와프는 폴란드 세임에 자금 지원을 요청했다. 그러나 세임은 오스만 제국과 전면전을 벌이고 싶지 않아 이를 거절했다. 다만 상원의 비밀 평의회가 일부 자금을 지원해줬다. 그는 얼마 안 되는 자금을 풀어서 8,000명 가량의 보병과 수백 명의 윙드 후사르를 이끌고, 1620년 9월 야전 원수 스타니스와프 코니에츠폴스키와 함께 몰다비아 공국으로 향했다.
1620년 9월 10일, 몰다비아-폴란드 연합군과 오스만 제국군이 이아시 근처의 체초롱에서 격돌했다. 주키에프스키와 코니에츠폴스키는 절망적인 수적 열세에다 훈련도 제대로 되지 않아 사기가 낮은 병사들을 이끌고 사력을 다해 싸웠으나, 끝내 수적 열세를 버티지 못하고 둘다 전사하고 말았다. 가슈파르는 한밤중에 전장에서 탈출한 뒤 트란실바니아로 망명하려 했지만, 9월 29일 튜쇼라에서 몰다비아 헤트만 바실레 셉틸리치와 두미트루 고이아에게 체포된 뒤 참수형에 처해졌다. 이후 오스만 제국은 알렉산드루 8세 일리아슈를 몰다비아 보이보드로 옹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