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8d0000><colcolor=#fff> '''''' | |||
출생 | 1761년 | ||
몰다비아 공국 이아시 | |||
사망 | 1842년 2월 2일 (향년 81세) | ||
프랑스 왕국 파리 | |||
재위 | 몰다비아 보이보드 | ||
1822년 6월 22일 ~ 1828년 5월 7일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8d0000><colcolor=#fff> 부모 | 아버지: 알렉산드로스 스투르자 어머니: 마리아 보그다누 | |
배우자 | 예카테리니 로세티 | ||
자녀 | 엘레니, 니콜라오스 | ||
가문 | 스투르자 가문 | ||
종교 | 기독교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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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몰다비아 공국 제92대 보이보드.2. 생애
1761년경 몰다비아 공국의 중심지인 이아시에서 출생했다. 아버지는 몰다비아의 대 보야르 알렉산드로스 스투르자였고, 어머니는 마리아 보그다누였다. 1821년 6월 오스만 제국군이 왈라키아와 몰다비아에서 알렉산드로스 입실란티스가 이끄는 필리키 에테리아(Φιλική Εταιρεια: 친구 협회)의 봉기를 진압한 뒤, 몰다비아와 왈라키아는 1년간 군정 통치를 받았다.1822년 봄, 이오안 스투르자는 그리고레 4세 기카, 이오르다케 라슈카누, 게오르게 쿠자 및 기타 9명의 몰다비아 및 왈라키아 보야르와 함께 콘스탄티니예로 찾아가서 오스만 제국의 주권을 인정하고 공물을 납부하며, 오스만군의 주둔을 받아들일 테니 전통 영주의 통치를 복원해달라고 요청했다. 오스만 파디샤 마흐무트 2세는 이를 받아들이고, 앞으로는 오스만 당국이 파나리오테스에 속한 인사를 임의로 왈라키아나 몰다비아 보이보드로 선임하지 않고 보야르들이 선출하고 오스만 당국이 승인하는 구조로 회귀하기로 했다. 이후 6월 21일, 보이보드 직위를 맡을 루마니아인 후보자 5명 명단이 오스만 궁정에 전해졌다. 그 결과 6월 22일에 그가 몰다비아 보이보드로 선임되었고, 그리고레 4세 기카가 왈라키아 보이보드로 선임되었다.
이오안 스투르자는 통치 초기에 예산을 정상화하고 공무원을 임명하는 것뿐만 아니라 외무부와 법무부를 개편하고 종교 자유와 관련된 여러 제한을 폐지하는 등 여러 행정 조치를 취했고, 농노제 폐지를 공식화했다. 1826년 10월 오스만 제국과 러시아 제국 간에 아케르만 협약이 체결되어 몰다비아와 왈라키아가 자치권을 얻었고, 그들의 통치자느 현지 보야르들로부터 임명되었고 러시아 정부의 지지를 받았다. 그러나 러시아로 망명했던 보야르들이 오스만 제국의 사면을 받고 몰다비아로 돌아온 뒤, 그는 정치적 위기에 직면했다.
1827년, 오스만 제국 파디샤 마흐무트 2세는 아케르만 협약 무효를 선언했다. 이로 인해 제10차 러시아-튀르크 전쟁이 발발했다. 1828년 4 월에 러시아 군대가 몰도바에 입성했고, 그 해 5월 7일에 그를 폐위했다. 마흐무트 2세는 이를 보상해주기 위해 사모스 섬에 가신 공국을 세우고 이오안을 사모스 공으로 선임했다. 1833년 사모스 공국을 슈테판 보고리디에게 넘겨준 뒤 파리로 망명했고, 1842년 2월 2일에 병사했다.
3. 배우자
- 예카테리니 로세티(1764 ~ 1847): 몰다비아 보야르 니콜라에 로세트의 딸.
- 엘레니: 몰다비아 보이보드 그리고레 알렉산드루 기카의 부인.
- 니콜라오스: 마리아 기카의 남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