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8d0000><colcolor=#fff> '''''' | |||
출생 | 1560년 | ||
사망 | 1597년 5월 (향년 37세) | ||
트란실바니아 공국 빈슈 데 조스 마르티누치 성 | |||
재위 | 몰다비아 보이보드 | ||
1차: 1591년 9월 ~ 1592년 6월 | |||
2차: 1592년 10월 ~ 1595년 5월 3일 또는 5월 4일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8d0000><colcolor=#fff> 부모 | 아버지: 알렉산드루 4세 라푸슈네아누? 어머니: 미상 | |
배우자 | 술타나(스탄카) | ||
자녀 | 마르쿠 세르셀(양자) | ||
가문 | 무사티니 가문 | ||
종교 | 기독교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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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몰다비아 공국 제37대 보이보드. '트리아눌(Tiranul)'은 폭군을 의미한다.2. 생애
본인의 주장에 따르면, 그는 몰다비아 공국 제28대 보이보드 알렉산드루 4세 라푸슈네아누의 사생아라고 한다. 현대 루마니아 국무장관이자 아카데미 회장 알렉산드루 라페다투(Alexandru Lapedatu, 1876 ~ 1950)와 루마니아 역사가이자 총리 니콜라에 이오르가(Nicolae Iorga, 1871 ~ 1940) 등도 그가 알렉산드루 4세의 사생아가 맞으며, 몰다비아 공국 초기 역사를 이끌었던 무사티니 가문의 마지막 일원이라고 간주했다.반면, 몰다비아 고전 역사가 이온 네쿨스(Ion Neculce, 1672 ~ 1745)는 아론이 몰다비아 수도자 니카노르의 조카이자 하인으로, 아가피아 수도원에서 살다가 수녀를 유혹했다. 니카노르는 이 사실을 알게 되자 그를 공개적으로 구타하여 처벌한 뒤 나라 밖으로 쫓아냈다고 한다. 루마니아 법학자 이안쿠 세르게츠는 아론의 삼촌은 수도원 원로인 스타레츠의 실바노스로, 아론이 통금 시간을 지키지 않자 구타했고, 아론은 이에 부끄러움을 느껴 몰다비아를 떠났다고 기술했다. 일부 기록에 따르면, 아론은 몰다비아의 한 보이보드와 유대인 여성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였다고 하며, 또다른 기록은 그가 완전한 유대인이었다고 주장했다. 연대기 작가 라인홀트 하이덴슈타인은 아론을 몰다비아 보야르의 마구간지기였다가 보야르 칭호를 찬탈했다고 주장했다.
아론이 보이보드로 오르기 전의 생애는 불분명하다. 다만 1591년경에 코스탄티니예에 거주했으며,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예레미아스 2세 트라노스와 친분이 있었다고 한다. 예레미아스 2세는 코스탄티니예 주재 잉글랜드 대사 에드워드 바튼에게 아론을 소개했다. 예레미아스 2세는 정교회 국가인 몰다비아 공국에서 가톨릭이 부상하는 걸 매우 좋지 않게 여겼고, 현 몰다비아 보이보드 페트루 6세 슈체아풀이 이를 수수방관하는 것에 불만을 품었다. 잉글랜드 대사 에드워드 바튼 역시 가톨릭 세력의 약화를 희망해, 몰다비아 공국에서 가톨릭 신자들을 몰아내려는 예레미아스 2세의 계획에 협조하기로 했다.
아론은 예레미아스 2세와 잉글랜드 대사의 지원에 힘입어 몰다비아 보이보드가 되기 위한 계획을 추진했다. 그는 오스만 제국 궁정에서 유대인 의사로 활동하면서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던 솔로몬 벤 나탄 아슈케나지와 친분을 맺었고, 하렘에 있는 여러 여인에게 다이아몬드 반지와 에메랄드 목거링를 포함한 호화로운 선물을 제공해 그들의 호의를 얻어냈다. 여기에 오스만 제국의 이슬람 신학자이자 무라트 3세의 교사인 호카 사데딘 에펜디의 지지를 얻어냈으며, 상인과 채권자들로부터 20%의 이자로 1억 1천만 악체(약 917,000 두카트)를 빌린 뒤 오스만 궁정 관리들에게 뇌물로 바쳤다.
1591년 9월, 오스만 제국 파디샤 무라트 3세는 아론이 첫해에 60,000 새퀸을 제공하고, 전임자들보다 더 많은 공물을 매년 바치는 조건으로 그가 몰다비아 보이보드로 집권하는 걸 받아들이기로 했다. 이후 몰다비아 보이보드 페트루 6세 슈체아풀은 오스만 궁정에 의해 폐위되어 합스부르크 제국으로 망명했고, 아론이 몰다비아 보이보드로 등극했다. 그는 오스만 제국 관리들을 매수하기 위해 막대한 돈을 상인 및 채권자들로부터 빌린 터라, 이를 갚기 위해 몰다비아 국민들을 철저하게 수탈했다. 몰다비아 연대기에 따르면, 그는 돈을 뜯어내기 위해 농민들을 다양한 고문법을 도입했고, 세금을 내는 각 가족으로부터 소 한 마리씩 징수하는 "전례 없는 세금"을 만들었다고 한다.
한편, 아론은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예레미아스 2세 트라노스의 권고에 따라 몰다비아 내 가톨릭 신자들을 박해했다. 1592년 4월, 몰다비아를 가톨릭으로 개종하기 위해 보야르들을 포섭하고 예수회가 몰다비아에 선교단을 보내도록 주선했던 알바니아 출신 모험가 바르톨로메오 브루티가 긴급 체포된 뒤 처형되었고, 30,000 두카트에 달하는 전 재산이 몰수되었다. 이후 대부분 가톨릭 신자인 창고인이 정착한 사바오아니, 라카치우니의 재산을 몰수했다. 그해 5월 라푸슈나와 오르헤이에서 폭동이 발발한 뒤, 아론은 반역을 꾸민 궁정 신하인 로고테테 자하리아 바르르데아누와 보르니치 콘드라에 부시움을 처형하라고 명령했다. 이후 수체아바의 파르칼라브인 안드레이 코르코델을 체포하려 했지만, 안드레이가 오스만 제국 영토로 도망치면서 실패했다. 이후 몰다비아군을 이끌고 반란군 지도자 보그단 이오나슈쿠를 공격해 라우트 강변에서 격파했다. 보그단은 부상을 입은 채 체포된 뒤 수도원에 보내졌고, 추종자들은 신체 절단형에 처해졌다.
1592년 6월, 몰다비아의 여러 보야르들이 무라트 3세에게 아론의 심각한 폭정으로 수많은 이가 죽어가고 있다며, 아론을 폐위해달라고 요청했다. 무라트 3세는 그들의 요청을 수락해 아론을 폐위하고 알렉산드루 6세를 몰다비아 보이보드로 세우기로 했다. 그러나 알렉산드루 6세가 미처 몰다비아에 부임하기 전에, 자포로제 카자크의 지원을 받은 페트루 7세 카자쿨이 몰다비아를 장악했다. 이후 아론에게서 돈을 꼭 받아내야 했던 채권자들과 예니체리의 강력한 청원을 받은 무라트 3세는 1592년 8월 아론을 보이보드로 복위하기로 하고, 또다른 가신인 트란실바니아 공 바토리 지그몬드에게 페트루 7세를 축출하고 아론이 몰다비아 공국에 복귀하게 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1592년 10월, 아론은 바토리 지그몬드가 파견한 시브리크 가스파르의 헝가리군이 페트루 7세를 몰아내면서 몰다비아로 복귀했다. 그는 복귀하기 전에 신임하는 몰다비아인인 포스트엘닉 오페라를 파견해 이아시 궁정을 장악하도록 했다. 오페라는 아론에게 적대적인 보야르인 네스트로 우레체를 체포하려 했지만, 네스트로는 체포를 피해 폴란드-리투아니아로 도주했다. 이후 이아시 인근 숲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페트루 7세를 체포한 뒤 코를 벤 후 무라트 3세에게 보냈고, 무라트 3세는 페트루 7세를 갈고리에 꽂게 했다.
그리하여 몰다비아 보이보드에 복위한 아론은 라레슈티, 클리마우티, 자바데니 등 자기에게 반항적인 보야르들의 영지를 몰수했고, 동부 카르파티아에서 저항을 벌였던 보야르 바르티치를 처형했다. 이후 몰다비아에서 반가톨릭 정서를 부추겼으며, 몰다비아로 이주한 후스파를 인정하고, 페트루 6세 슈체아풀 치세 때 폐쇄된 모라비아 형제단 교회를 재건했다. 1593년 1월에는 대놓고 가톨릭 탄압을 천명하고 예수회를 추방했다. 몰다비아에서 활동하던 잉글랜드 선교사 토머스 월콕스는 본국에 이러한 움직임이 "폐하(엘리자베스 1세)의 장수와 번영을 위해 매일 기도하는" 다양한 몰다비아 개신교도들을 기쁘게 했다고 보고했다.
이렇듯 자기에게 반항하는 보야르들을 숙청하고 반가톨릭 정책을 지속적으로 추진하던 아론은 오스만 제국에 막대한 공물을 내놓아야 하는 상황에 염증을 느끼고, 그들로부터 독립하기로 마음먹었다. 1594년, 교황 클레멘스 8세의 주도로 오스트리아 대공국, 교황령, 스페인, 페라라 공국, 만토바 공국, 토스카나 대공국이 가담했다. 이후 트란실바니아 공국의 바토리 지그문트가 가담하자, 아론도 9월 16일에 신성 동맹에 가담하기로 했다. 왈라키아 보이보드 미하이 2세는 이웃한 두 공국이 신성 동맹에 가담하자 자기도 가담하기로 했다.
1593년 11월 13일, 이아시와 부쿠레슈티에서 오스만 제국에 대항하는 봉기가 발발했다. 레반트계 유대인 채권자들은 돈을 주겠다는 아론과 미하이 2세의 꼬드김에 넘어가 두 도시를 방문했다가 모조리 살해되었다. 이후 미하이 2세는 8,000 장병을 이끌고 왈라키아 남쪽의 도나우강 일대에 설치된 오스만 요새들(지우르지우, 투르누, 하르쇼바, 실리스트라)를 연이어 공격해 심한 파괴를 자행했고, 이를 응징하기 위해 쳐들어오던 오스만 제국군을 스타네슈티 마을 인근의 파디나[1] 세르파테스티에서 궤멸했다. 아론 역시 트란실바니아의 헝가리인, 루마니아인과 함께 오스만 제국을 상대로 전쟁을 개시해 1594년 3월 체타테아 알바, 이스마일, 킬리야를 점령했고, 도브루자에서 크림 칸국의 타타르군을 격파하고 오블루치아를 점령했다. 아론은 이 승리를 통해 통치권을 도브루자 북부 전체로 확대했고, 많은 전리품을 확보했다.
그러나 1595년 5월 3일 또는 5월 4일, 아론은 트란실바니아 공 바토리 지그몬드로부터 오스만 제국에 대항하는 군사 작전을 논의하자는 초청장을 받고 그곳으로 향했다가 긴급 체포되었다. 바토리 지그몬드는 아론이 신성 동맹을 이탈하고 무라트 3세와 단독으로 평화 협약을 맺으려 했기에 자기가 손을 썼다고 주장했지만, 대다수 연대기 작가들은 아론이 바토리 지그몬드에게 충성 서약을 하기를 거부했기 때문이라고 추정했다. 이후 빈슈 데 조스의 마르티누치 성에 투옥되었고, 1597년 6월에 독살당했다. 이후 슈테판 8세 라즈반이 트란실바니아군에 의해 몰다비아 보이보드에 선임되었다. 아론의 유해는 알바 율리아의 비하이 비테아줄 교회에 안장되었다. 그러나 1600년 9월 20일, 미라슬라우에서 미하이 2세를 격파한 게오르게 바스타의 군대는 알바 율리아에 입성한 뒤 미하이 2세의 추종자들에 대해 약탈과 보복을 자행하면서, 아론과 여러 보야르들의 뼈를 파내어 없애버렸다.
아론은 생전에 왈라키아 보이보드 페트루 2세의 첩이었던 스탄카 또는 술타나와 결혼했다. 스탄카는 페트루 2세와의 사이에서 왈라키아 보이보드 직위를 여러 차례 노렸던 마르쿠 세르셀을 뒀다고 전해지나, 아론과의 사이에선 자식을 낳지 못했다.
[1] Padina(지붕)는 일반적으로 언덕 꼭대기에서 땅이 침하되면서 형성된 원형 또는 길쭉한 함몰 모양의 구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