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8d0000><colcolor=#fff> '''''' | |||
출생 | 1594년 | ||
사망 | 1612년 7월 (향년 18세) | ||
드네스트르강 | |||
재위 | 몰다비아 보이보드 | ||
1차: 1607년 10월 ~ 11월 | |||
2차: 1607년 12월 ~ 1611년 11월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8d0000><colcolor=#fff> 부모 | 아버지: 이에레미아 모빌라 어머니: 초모르타니 엘리자베타 | |
형제 | 알렉산드루 7세 모빌라, 치아나, 마리아, 예카테리나 | ||
가문 | 모빌라 가문 | ||
종교 | 기독교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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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몰다비아 공국 제45대 보이보드.2. 생애
아버지는 몰다비아 공국 제41대 보이보드 이에레미아 모빌라이고, 어머니는 르비우 인근 로즈나에 대규모 토지를 소유한 헝가리계 트란실바니아 귀족 초모르타니 토마시의 딸인 초모르타니 엘리자베타였다. 1606년 7월 10일, 아버지 이에레미아 모빌라가 이아시에서 사망했다. 그는 사망하기 전에 아들 콘스탄틴 모빌라를 후계자로 지명했지만, 이에레미아 모빌라의 동생 시미온 모빌라는 이를 인정하지 않고 정변을 일으켜 콘스탄틴을 추방하고 몰다비아 보이보드에 선임되었다.1607년 9월 14일, 시미온 모빌라가 사망했다. 이후 시미온의 아들 미하이 2세 모빌라가 9월 24일에 몰다비아 보이보드에 선임되었다. 이에 콘스탄틴의 어머니 엘리자베타는 폴란드의 여러 지역에서 30,000명의 군인으로 구성된 군대를 모은 뒤 1607년 10월 몰다비아로 진군해 미하일 2세 모빌라를 축출했다. 미하이 2세 모빌라는 11월에 반격해 이아시를 탈환했지만, 그해 12월 프루트 강 인근의 슈테파네슈티에서 콘스탄틴 모빌라와 엘리자베타를 지지하는 군대에게 결정적으로 패배했다.
이리하여 미하이 2세 모빌라는 축출되었고, 콘스탄틴 모빌라가 몰다비아 보이보드로서의 입지를 굳혔다. 하지만 아직 어렸기에, 어머니 엘리자베타가 섭정을 맡았다. 엘리자베타는 자신을 '몰다비아의 귀부인(Doamnă a Țării Moldovei)'이라 칭했으며, 가톨릭 수도자들에게 선물을 보내는 등 가톨릭 신앙이 몰다비아에서 번창하도록 강력히 지원했다. 한편, 시미온 모빌라의 미망인이자 미하이 2세 모빌라의 어머니인 마르게리타는 남은 아들들과 함께 트라고비슈테로 피신한 뒤 다시 또다른 아들 가브릴 모빌라, 모이세, 이온과 함께 트란실바니아로 망명했다.
1610년, 트란실바니아 공 바토리 가보르가 몰다비아와 왈라키아를 상대로 공격적인 정책을 취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이에 엘리자베타는 왈라키아 보이보드 라두 10세와 우호 관계를 맺었다. 1610년 12월 20일, 바토리 가보르가 이끄는 용병들이 왈라키아로 쳐들어와 5일간 샤라 바르세 일대를 약탈한 뒤 눈덮인 카르파티아 산맥을 건너 왈라키아 본토로 진입했다. 미처 군대를 모집하지 못한 라두 10세는 트라고비슈테를 떠나 몰다비아로 피신했고, 바토리 가보르의 용병들은 왈라키아를 잔인하게 약탈했다. 한편 라두 10세는 몰다비아의 로만에서 군대를 끌어모은 뒤 복수전을 준비했다.
1611년 3월, 오스만 제국이 바토리 가보르를 압박해 트란실바니아로 돌아갸게 한 뒤 라두 9세를 보이보드에 복귀시켰다. 그해 6월, 라두 10세가 몰다비아 공국의 지원에 힘입어 라두 9세를 축출하고 보이보드에 복위했다. 1611년 9월, 오스만 제국군이 라두 9세를 왈라키아 보이보드로 복위하기 위한 대대적인 공세를 단행했다. 라두 10세는 몰다비아로 퇴각하려 했지만, 9월 30일 바카우 인근 숲에서 추격대에 따라잡혀 가을비로 인해 진흙에 갇힌 대포와 보급품이 담긴 마차를 전부 잃었고, 숙련병 상당수와 주력군의 퇴각을 확보하기 위해 스스로 희생한 폴란드 흉갑기병들도 상실했다.
가까스로 몰다비아로 망명한 라두 10세는 엘리자베타와 콘스탄틴 모자에게 오스만 제국에게 등을 돌리고 신성 로마 제국의 봉신이 되라고 설득했다. 오스만 제국 궁정은 이에 대응하기 위해 콘스탄틴을 슈테판 9세 톰샤로 교체하기로 했다. 엘리자베타와 콘스탄틴은 오스만 제국을 피해 호틴 요새로 철수한 뒤 폴란드군의 보호를 받았다. 이후 콘스탄틴은 폴란드군과 처남들의 도움을 받아 상당히 큰 군대를 모은 뒤, 1612년 7월 이아시로 진군했다. 슈테판 9세 톰샤는 이에 맞서 오스만 제국군과 크림 칸국이 파견한 타타르군의 지원을 받았다.
1612년 7월 3일 ~ 13일, 콘스탄틴 모빌라는 프루트 강둑에 있는 사스 호른 전투에서 참패했다. 그 직후 타타르군에 체포된 그는 인근 여관으로 끌려가던 중 드네스트르강을 건너다가 익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