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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격호

시게미츠 다케오에서 넘어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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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신격호
(1948~2011)
제2대
신동빈
(20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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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ffffff><colbgcolor=#E60012> 롯데 초대 회장
신격호
辛格浩 | Shin Kyuk-ho
파일:신격호회장.jpg
본명
(한국명)
신격호(辛格浩) | Shin Kyuk-ho
일본명 시게미츠 다케오[1]
[ruby(重光 武雄, ruby=しげみつ たけお)] | Takeo Shigemitsu
출생 1921년 11월 3일[2]
경상남도 울산군 삼동면 둔기리
(現 울산광역시 울주군 삼동면 둔기리)[3]
사망 2020년 1월 19일 (향년 98세)
서울특별시 송파구 풍납동 서울아산병원
국적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4]
본관 영산 신씨[5]
자 / 호 취광 (鷲珖) / 상전 (象殿)
직업 기업인
학력 언양공립보통학교 (졸업)
울산공립농업학교 (졸업)
와세다 실업학교 (졸업)
와세다 고등공학교 (화학과 / 학사)[6]
부모 아버지 신진수[7], 어머니 김순필[8]
형제자매 남동생 신철호, 신춘호, 신선호[9], 신준호
여동생 신소하[10], 신경애[11], 신경숙[12], 신정숙[13], 신정희[14]
배우자 노순화[사별]
시게미츠 하츠코[사실혼]
서미경[사실혼2]
자녀 장녀 신영자(1942 ~ )[A]
장남 신동주(1954 ~ )[B]
차남 신동빈(1955 ~ ) (손자: 신유열)[20]
차녀 신유미(1983 ~ )[C]
신체 174cm[22], A형
경력 일본 롯데 대표이사 사장 (1948 ~ 2009)
롯데제과 대표이사 사장 (1967 ~ 1978)
롯데그룹 회장 (1978 ~ 2011)
호텔롯데 대표이사 회장 (1998 ~ 2016)
롯데쇼핑 대표이사 회장 (1998 ~ 2017)
일본 롯데홀딩스 회장 (2009 ~ 2017)
롯데그룹 총괄회장 (2011 ~ 2018)
일본 롯데홀딩스 명예회장 (2017 ~ 2020)
롯데그룹 명예회장 (2018 ~ 2020)
종교 불교
1. 개요2. 어록3. 생애
3.1. 약력3.2. 출생과 도일(渡日)3.3. 롯데 창업과 한국 진출 성공3.4. 롯데판 왕자의 난3.5. 사망
4. 여담5. A급 전범 가문과의 연관 허위정보6. 가족관계7. 수상 경력8. 관련 문헌

[clearfix]

1. 개요

파일:신격호 사진.jpg

한국의 기업인.[23] 롯데그룹 창업주이자 초대 회장이다. 울산광역시 울주군 출신으로, 본관은 영산 신씨. 호는 상전(象殿), 일본 이름은 시게미츠 다케오(重光武雄).[24] 홀수 달에는 한국에서, 짝수 달에는 일본에 머물며 그룹을 경영해 '대한해협의 경영자'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 의외라면 의외로 1세대 재벌 총수 중 드문 자수성가형 기업가기도 했다.[25]

일본 경제가 한창 부흥한 1980년대 및 1990년대 시기엔 미국 포브스 선정 세계 3-4위 부자에 등극하기도 해서 한국인으로 역대 최고 부자 기록을 달성했다.[26][27] 1988년 기사 1993년 기사

2. 어록

(대한민국이) 외국 관광객들에게 언제까지나 고궁만 보여줄 수는 없지 않습니까. 세계 최고의 그 무엇이 있어야 외국사람들이 즐기러 올 것 아닙니까. 세계 최고 건물이란 것 자체가 자동적으로 좋은 광고선전이 되지요. 무역센터도 될 수 있고 위락시설도 될 수 있는 그런 건물을 지어야 합니다. - 서울롯데월드타워 시그니엘을 세우기 수십 년 전 인터뷰
롯데한국 사람들이 어떤 감정을 가지고 있나. 좋게 보고 있나 나쁘게 보고 있나.”(신 회장) “어린 시절에 롯데월드에서 즐겁게 놀았던 추억이 있습니다. 어린 시절의 추억이 롯데에 있습니다.”(기자) “사회봉사 하는 것 중에 가장 좋은 것은 회사를 운영하는 것이야. 회사를 많이 발전시켜서 종업원들을 많이 (고용하면), 그 사람들 실업자가 되지 않잖아.” - 생전 인터뷰
“나는 한국 사람이니까. 한국에 (투자를) 많이 했다. 한국도 일본처럼 발전할 것이라고 생각했지. 일본에 살고 있다가, 한국에 호텔이 많이 필요할 것이라고 보고 투자했지. 백화점도 하고. 그 (일본) 사람들 그때는 한국에 투자한다고 하면 이상하게 보았다고. 왜 한국에 투자하냐고 누가 물으면 나는 ‘한국이 많이 발전할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이야기했어. - 신격호 회장이 95세를 넘긴 후 생전 마지막 인터뷰
”언제까지 서울을 찾는 외국 관광객들에게 고궁만 보여줄 것인가? 숭례문 경복궁이 대한민국의 랜드마크가 될 수 있을까? 한국을 찾아오는 지구촌 시민 누구나 향유할 수 있는 공유 건축물, 세계적 명성을 가진 건축물이 있어야 관심을 끌 수 있을 것이다. 현대적인 문화 유산을 반드시 남기고 싶다. 롯데월드타워의 모든 기록은 역사가 될 것이다. 무엇보다 안전이 중요하다. 공간의 효율성 보다 구조적 안전성에 최우선을 둬 설계했다. 40층마다 대나무의 마디 역할을 하는 구조물을 설치했다. 진도 9도의 강진과 초속 80m의 바람에도 견디도록 했다. ’앞으로 지진이 나면 무조건 롯데월드타워로 대피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다. 롯데월드타워에 적용된 설계와 핵심 기술은 이전의 대한민국 건축사에서는 볼 수 없던 것들이 많다. 롯데월드타워 건설 현장은 매 순간이 새로운 시도였고, 모든 결과는 대한민국의 신기록이었다. 장부상으로는 회수 불가일지 몰라도 장구한 세월에 걸쳐 얻는 무형의 이익은 어마어마할 것이다. 서울의 품격을 높이고 대한민국의 국격을 높이는 데 일조한다면 그 가치는 돈으로 환산하기도 어렵지 않겠는가? 이 프로젝트는 사업으로 봐서는 안 되는 일이다. 나는 다만 타지에 가서 번 돈으로 한국에 좋은 건축물, 국제적 명물로 한국이 자랑할 만한 작품을 만들고 싶었다. 사람들을 행복하게 한다는 롯데의 비전을 품고 잠실벌에 우뚝 솟은 롯데월드타워는 이제 21세기 대한민국의 랜드마크가 될 것이다. 이 모든 것을 기꺼이 우리 국민과 고객 모두에게 ’가족이 함께 하루를 즐겁게 보낼 수 있는 공간으로 바친다.“ 동아일보 기사

3. 생애

파일:2001191759368510.jpg
젊은 시절[28]
파일:DD78DAE7-4939-47E0-AA11-9520FB57E47F.jpg
파일:신동주를 안은 신격호.jpg
파일:신격호 중년기.jpg
중년기
파일:external/www.iusm.co.kr/289977_110801_3813.jpg
2013년 5월 6일 고향 울산 둔기마을에서 사비로 여는 마을 잔치에서. 결국 이 마을 잔치가 생전 마지막 마을 잔치가 되었다.[29]

3.1. 약력

3.2. 출생과 도일(渡日)

1921년 11월 3일 경상남도 울산군 삼동면 둔기리(현 울산광역시 울주군 삼동면 둔기리)의 평범한 농가에서 아버지 신진수[30] 와 어머니 김해 김씨 김순필[31] 사이의 5남 5녀 중 맏이이자 장남으로 태어났다. 1935년 언양공립보통학교(현 언양초등학교)를 졸업한 뒤[32] 가정형편상 상급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농사일을 거들다가 큰아버지의 도움으로 울산농업보습학교 (현 언양중학교)에 진학했다. 1938년 졸업하면서 경남도립종축장의 기수보(技手補)로 취업했는데 주 업무는 양털깎기와 양돈 등이었고 박봉이었다. 반대하실 것 같아 아버지에게는 말씀드리지 않고 몰래 빠져나와 일본에 갈 결심을 했다. 형제가 열명이나 되는데 장남이었다.
신격호 회장: “그때 우리 고향 마을 (경상남도 울산군 삼남면 둔기리)의 노인들은 완고하셨어요. 젊은이들이 겨울에도 이용할 수 있는 동네 목욕탕을 만들려고 했더니 노인들이 저희들을 향해 고함을 치면서 「그런 미친 짓 하지 말라」고 하는 식이었죠. 젊은 사람들이 무엇인가 새로운 것을 해보자고 하니 노인들의 권위와 영향력이 손상된다고 생각한 것이지요. 이런 마을에 계속 남아 있다가는 발전이 없겠다고 생각해서 도일(渡日)한 것입니다. 그래도 내 고향 마을 울산 둔기리처럼 경치 좋은 곳은 없을 거요. 공기 맑지요. 호수도 있지” - 2001년 인터뷰
신격호 회장: “83~120엔을 가지고 일본에 갔어.[33] 처음에는 이 없잖아. 열심히 일했어. 여러 가지 일을 했는데, 짐을 내려 주는 트럭 조수도 2~3년 하고, 개인 전당포에 취업했어. 열심히 일했어. 전당포 주인에게 아들, 이 있었는데, 나중에는 나를 더 믿었어. 뭐든 열심히 하면 인재(본인을 인정해 주는 사람이라는 의미로 사용)를 만나게 돼. 사람이란 열심히 하면 처음에는 안 믿지만 1년, 2년, 3년 지나면 완전히 믿게 된다고. 조그마한 전당포에서 일했지만 아들이 있는데도 나를 믿더라고.” - 2017년 인터뷰

결국 양털 깎고 돼지 밥이나 주는 건 자신이 원했던 삶이 아니라고 생각한 신격호는 다른 길을 찾아보고자 부산부 남빈정(현 부산광역시 중구 남포동)과 지금의 중구 광복동[34] 일대에 머물며 사업가의 꿈을 키운다. 그러다 1941년 부인 광주 노씨 노순화(盧舜和, 1922. 8. 10. ~ 1951. 5. 16.)[35]와 둘 사이에서 낳은 딸인 신영자를 비롯해 가족과 고향을 모두 뒤로 한 채 성공하겠다면서 부산항에서 일본으로 떠난다. 사족으로 밀항이란 말도 있는데, 여러 기사에 의하면 아니다. 합법적 도일(渡日)이었고, 시모노세키(下關)항에 내린 후 당시 전시상황이다보니 특별고등경찰에게 붙잡혀 독립운동가공산당 스파이 아닌지 심문을 받았는데[36] 이게 와전된 모양. 그리고 이러나저러나 밀입국은 아닌 것이, 애초에 당시 한국은 일본이었다.(...) 따라서 밀입국이 아닌 그냥 단순한 행정구역 간의 이동으로 처리되었다.

도쿄에 도착해 일본으로 건너가 국민학교때 알던 친구의 하숙방에 얹혀 반년 정도 함께 살다가 한평반짜리 방을 하나 빌려 자취하면서 우유 배달 일을 하며 와세다실업학교[37] 고등부의 야간부 화학공학과에 적을 둔 뒤 낮에는 신문배달이나 우유배달, 공장 일 등 온갖 일을 병행하고 밤에는 학업을 이어갔다. 당연히 이방인인 그를 살갑게 대하는 사람은 드물었지만 묵묵히 견뎌냈다고 한다. 이 시절 전쟁으로 인해 일본의 청년들이 대거 징집되어 가는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공계 대학생은 징집 대상에서 제외됐기 때문에 징집은 되지 않았다.

고학을 하며 어렵게 생활하던 중 1944년 기회가 찾아왔다. 신격호는 당시 하나미츠 핫타로(花光八太郞)라는 사람이 운영하는 고물상과 전당포에서 일을 하고 있었는데, 신격호의 성실함을 눈여겨본 하나미츠는 그에게 5만엔[38]이라는 거금을 빌려주면서 자신이 구상하고 있었지만 실행하긴 망설이고 있던 공업용 윤활유(커팅오일) 공장을 차려보라고 권유했다. 물론 자선 사업은 아니었고, 수익의 3분의 2는 핫타로가, 3분의 1은 신격호가 갖는 조건이었지만 신격호에겐 기회는 기회였다. 그래서 이 돈으로 도쿄 인근에 커팅오일과 밥솥을 만드는 공장을 차려 운영하고 있었는데, 그의 공장이 폭격을 당해서(...) 완파되는 바람에 쫄딱 망했다. 다시 하나미츠에게 돈을 빌려서 윤활유 공장을 운영했지만 1년 반 후 또 미군의 폭격으로 망했다.
도쿄 와세다 유학 시절에 하나미쓰 (당시 60대) 일본인의 제의: “군수용 커팅오일이 품귀 상태이다. 자네가 공장을 차려 제조한다면 내가 출자하겠다. 수요처는 내가 주선해 주지” - 인터뷰

1945년 8.15 광복이 되었고, 일본이 항복하자 하나미츠는 시골로 내려간다며 신격호에게도 살 길을 찾으라 위로하고 거액의 투자금을 포기한다. 진짜 다시 밑바닥부터 시작해야 되는 절망적인 상황이었으나, 아버지 몰래 도일했는데 이대로 고향에 돌아가기엔 체면이 서지 않는다고 생각한 신격호는 죽을 때 죽더라도 하나미츠에게 빌린 돈은 갚고 죽자는 심정으로 일어섰다.
신격호 회장: 일 평생 고마움을 느끼고 있습니다. 벌써 20여년전 (1970년대)에 돌아가셨습니다. 전쟁이 끝나고 어떻게 보답할까 생각하다가 화장품사업을 벌여 1년반만에 6만엔을 모두 갚고 이자로 집을 한채 사드렸습니다. 사업을 한다기보다는 어떻게든 돈을 빨리 벌어 노인에게 보답하겠다는 마음뿐이었습니다. - 1993년 인터뷰

1946년 와세다대학의 전신인 와세다실업학교 고등과[39], 와세다고등공학교 화학공학과[40]를 모두 졸업한 뒤 다른 사람에게 돈을 빌린 후 이번에는 세탁비누, 세숫비누, 포마드 크림 등 유지류를 만드는 공장을 차렸다. 자신의 전공인 화학 전공을 살려 처음에는 허름한 공장 한켠에 커다란 솥단지 하나만 가지고 재료를 모아 한데 끓인 뒤 세탁비누, 세숫비누 등을 생산하는 가내수공업 형태로 시작했으나, 당시 전쟁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생필품이 매우 부족했던 시기였다 보니 신격호가 만들어 저렴하게 판매하는 비누나 화장품 등은 일본인들 사이에서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다. 다행히도 장사는 상당히 잘 되었고, 이후에는 큰 공장까지 차리게 되는 등 사업에 성공하게 되었다. 솥단지 하나로 시작해 1년 반 만에 하나미츠에게 빌린 돈을 모두 갚고 자신에게 돈을 빌려준 것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집 한채 분량의 이자까지 선물했다고 한다. 이후 1947년 신격호는 부모님이 계신 고향 집에도 자신의 근황을 알리는 편지을 보낸다.##

3.3. 롯데 창업과 한국 진출 성공

신격호 회장: “저는 먼저 우리나라 대한민국을 발전시키는 것이 우리 모두의 의무라고 생각합니다. 한국의 살길은 분명하지 않습니까. 석유를 전량 수입하고 식량의 50%를 수입하는 나라가 한국 아닙니까. 국토는 좁고 자원도 빈약하니 원료를 수입해다가 이것을 잘 가공하여 비싸게 팔아야 살 수 있는 나라입니다. 그러려면 기업인, 정부, 노동자들이 합심해야지요. 오손도손 열심히 일하는 방법밖에 없지 않아요. 좋은 제품을 만들려면 노사가 협력해야 하고 이것이 경쟁력인데 말입니다. - 2001년 인터뷰
“롯데 만들었잖아. 전부 만들었지. 롯데 이름도 내가 지었어.” - 2017년 인터뷰
일본의 미군정기 시기 신격호는 약간 남은 밑천으로 히카리 특수화학연구소를 차린다. 그리고 거기서 유지류나 특수고무 같은 물질들을 연구했는데, 당시 시판되고 있던 들을 죄다 사다가 한 번씩 다 씹어보고 각각의 껌들에 한두 가지씩 존재하는 장점들을 모두 집약해서 껌을 개발했다. 그런데 신격호가 이렇게 개발한 껌이 인기가 엄청 좋아서 과자점 주인들이 서로 납품하겠다고 신격호의 연구소 앞에서 새벽부터 줄을 섰다. 이에 신격호는 투자자를 모집해서 본격적으로 회사를 차려서 껌을 팔기로 했는데, 1948년 현 롯데그룹의 모체인 (주)롯데를 세웠다. 창립 시기 일본 정부가 불량식품 단속을 위해 제정한 '식품위생법'은 오히려 롯데의 성장에 원동력이 되어 주었는데, 단속 당시 롯데껌이 타 업체보다 품질이 앞서서 공신력이 높아졌기 때문이었다. 이에 1950년엔 신주쿠에 새 공장을 지었다. 롯데 창업회장인 신격호의 결단이 스노우볼이 되어 훗날 도쿄 한복판 신주쿠구 신오쿠보코리아타운이 되는 계기가 되었다. 도쿄 신오쿠보 한인촌

당시 일본 껌 시장은 판껌 선두주자였던 '하리스'가 장악하고 있었다. 이에 신격호는 주력 시장이던 풍선껌 외에 판껌 시장에도 진입해 1953년엔 하리스를 따라잡았고, 1960년대까지 미스롯데 선발대회(1953년)나 TV 광고 같은 홍보매체를 적극 활용해 일본 껌 시장점유율을 70%까지 올렸다. 하리스와의 승부에서 이길 수 있었던건 미국 리글리와 천연 치클을 50:50 비율로 확보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더 나아가 1962년에 스위스 초콜릿 장인 막스 브락크까지 스카우트한 후 초콜릿 개발에 착수해내 1964년 '가나초콜릿'을 선보였고, 1969년엔 캔디, 1972년 아이스크림까지 각각 손을 댔다. 더 나아가 롯데애드, 롯데부동산, 패밀리, 롯데리아 등 계열사 설립에도 힘을 기울였다.

한편, 신격호가 일본 시장을 장악하고 있을 무렵, 한국에서는 1945년 광복 후 일본과 단교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때부터도 사실 롯데는 한국에 진출해있었는데, 신격호는 자기 동생인 신철호를 시켜서 1958년 롯데화학이란 법인을 세운다. 그러나 1966년부터 신격호 회장과 신철호 사장이 불화를 겪으면서 롯데화학은 해산되고 만다.[41] 이후 1967년 4월 서울 용산구 갈월동에 오늘날 한국롯데의 모태격인 롯데제과가 다시 생겨나게 된 것. 이때 한국 투자에 일본 직원들은 반대도 했지만, 본인은 고향에서도 한번 사업을 해보고 싶었기에 투자를 결심했다고 한다.

롯데제과에서 신격호 본인은 사장을 맡았고, 회장엔 한국은행 도쿄지점장을 지내며 친분을 맺어왔던 유창순 전 경제기획원장을 추대했다. 다음해 1968년에 두번째로 부산 거제동 출장소를 열어 사업을 확장했으며 롯데제과는 이미 일본에서 성공한 경영 노하우를 바탕으로 당시 해태제과, 크라운제과, 동양제과가 장악하고 있던 한국 제과 시장에서 빠르게 성장한다. 1970년에는 껌과 과자 포장 은박지 생산을 위해 동방알미늄을 인수하여 '롯데알미늄㈜'으로 사명을 변경했다.
신격호 회장: “맨 처음 우리 (대한민국) 정부에선 날 보고 정유공장을 지어달라고 했다가 걸프가 등장하자 종합제철소를 부탁했습니다. 저는 1년 반 동안 일본 내 후지(富士)제철소의 도움을 받아 설계도를 만들었습니다. 연간 100만t 생산 규모로 설계하여 총 투자가 1억 달러가 소요될 계획이었습니다. 그중 3000만 달러는 제가 출자를 하고 나머지 7000만 달러는 일본에서의 차관 등을 통하여 건설하는 것으로 하였습니다. 그런데 나중에는 정부가 알아서 하겠다고 하더군요. - 2001년 인터뷰
사실 잘 안 알려진 내용이지만, 신격호는 처음 한국에서 중공업 사업을 그것도 큰 규모로 하고자 했다고 한다. 황각규 부회장 말에 따르면 1960년대 후반 제철 사업을 하기 위해 50명으로 태스크포스(TF)를 꾸린 적도 있었고, 실제 정부에 제철 사업 제안도 했으나 포항제철에 몰아줄 생각을 하던 정부는 이를 거절했다고 한다. 이후 역사는 '순수한 애국심'에서 그가 제철사업을 포기한 것으로 묘사하고 있지만, 이때 협상을 진행한 측근이 2018년 밝힌 바에 의하면 제철사업 진출을 포기했던 진짜 이유는 당시 정부로부터 리베이트를 요구받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래서 이 인사가 자신이 정부로부터 받았던 리베이트 금액 등을 신 회장에게 전했는데 당시 신격호는 "난 그런 식으로는 안 해."라며 이를 거부해 무산되었다고 한다.

신격호 회장은 1963년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박정희 장군을 만났을 때 깊은 인상을 받았다. 박정희 의장은 일본의 경제통계를 자세히 인용해 가면서 어떻게 하면 일본의 선진 경제로부터 도움을 받을 것인가 하고 고민하는 모습이었다. 신격호 회장은 「군인이 어떻게 저렇게 경제문제와 통계를 잘 파악하고 있을까」란 생각이 들면서 「저런 사람이 지도자로 있는 한국에는 투자해도 안심이다」란 판단이 서더란 것이다. 당시 일본에서 이미 부자가 된 신 회장은 자신의 모국 투자는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신뢰감에서 출발했다는 점을 여러 번 강조했다.
신격호 회장: “박정희 대통령이 나를 청와대로 불러 관광공사가 운영하고 있는 반도호텔과 워커힐이 적자가 크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운영을 민간이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하시면서 인수할 것을 요청하셨습니다. 저는 호텔경영에 대해서는 경험도 없었고, 생각도 한 적이 없었기에 반도호텔만을 인수하기로 하였습니다. 그것을 계기로 새 호텔을 짓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38층짜리 호텔을 한창 올리고 있는데 대통령 경호실에서, 호텔에서 청와대가 보이게 된다면서 18층까지만 지으라고 했습니다. 38층을 기준으로 하여 만들고 있는 건물을 어떻게 반 토막낼 수가 있겠습니까. 기술적으로 불가능했지요. 그래서 제가 청와대와 당시 국무총리에게 진정을 하여 본 계획대로 38층짜리를 만들게 되었습니다.” - 인터뷰
롯데는 한동안 껌과 제과 관련 사업에만 집중하던 상황이었는데, 롯데가 다른 사업에 진출한건 한 사건 때문이었다. 신격호 회장은 자신이 호텔업을 처음부터 생각해낸 것이 아니고 박정희 대통령이 권했다고 말했다. 당시 서울에는 호텔이 없던건 아니지만 수지 타산이 맞지 않다고 여겼는지 민간 대기업이 제대로 진출하진 않았다보니 딱히 고급호텔이 없어 국빈들이 방한했을 때 묵을 만한 장소가 마땅치 않았다. 그런데 1970년 서울시의 대대적인 부정식품 단속 결과 롯데제과 껌에서 쇳가루가 검출되었는데, 당시 정부는 이를 구실로 일본에 거주하고 있었던 신격호 회장을 호출해 호텔 사업과 관련해 일종의 딜을 한다. 1970년 11월 13일 정부가 롯데제과에 3개월 제조 정지 명령을 내린 날 박정희는 도쿄에 머물고 있던 신격호를 청와대로 불러 서울에 호텔을 지어 호텔사업을 하면 롯데제과의 정지 처분을 해결해 주겠다고 제안했던 것이다.

사실 시기를 보면 당장 응했다고 보긴 뭐하지만, 어찌됐든 신 회장은 1973년 '호텔롯데'를 설립했고, 정부는 롯데호텔 부지 마련을 위해 정부 소유의 반도호텔과 국립중앙도서관을 신 회장에게 매각했다. 1974년 정부의 반도호텔 민영화 공개입찰에 롯데가 단독 입찰하여 낙찰받게 된다. 국립중앙도서관은 이후 남산 어린이회관(현 서울특별시교육청 교육연구정보원 건물)으로 이전했다. 이 과정에서 정부는 외자도입법에 근거해 신 회장에게 세금을 면제해 주었다. 신 회장이 일본에 거주지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42] 그리하여 1979년에 '롯데호텔 서울'을 준공했다. 신 회장은 롯데호텔 건설 중에 롯데호텔 옆에 백화점을 짓겠다는 아이디어를 냈다. 당시 정부는 도심 과밀화 억제 정책을 강력하게 실시하고 있던 때라 백화점 허가가 어려웠으나 외국인 투숙객을 위한 쇼핑 시설을 건설한다는 명분으로 허가를 받았고, 이후 설계를 변경하여 당초 허가 때보다 훨씬 크게 지어 롯데호텔과 동시에 롯데쇼핑센터를 완공했다. 롯데호텔과 롯데쇼핑을 건립하면서 롯데는 제과업에서 유통업, 서비스업으로 사업영역을 확장해나간다.

한편 제조 정지 위기를 넘긴 롯데제과 역시 일본에서 성공한 노하우를 바탕으로 쭉쭉 성장하여 제과 시장의 최강자로 자리잡았다. 아울러 인수합병을 통해 식품업의 규모를 확장했다. 1974년 칠성한미음료(현 롯데칠성)를 인수했고 1977년엔 삼강산업(현 롯데푸드)을 인수하였으며 1978년 롯데유업까지 세워 종합 식품사업군을 구축시켰다. 한편, 1973년에는 일본 파이오니아사와의 합작으로 롯데파이오니아를 세워 카세트, 오디오 등 음향 기기를 생산했다. 1980년 출시한 오디오 파이오니아는 큰 인기를 얻었다. 80~90년대 대한민국에서 오디오붐이 불면서 각 가정마다 고가 오디오를 1대씩 장만하는 것이 유행했는데[43] 롯데 오디오는 인켈에 이은 국내 2위의 오디오 생산 업체였고 그 뒤를 태광, 아남 등이 이었다.

신격호가 1978년 그룹회장으로 오른 후 위와 같은 과정을 거쳐 초창기 식음료사업군 중심에서 서비스 산업 중심으로 점차 바뀌었다. 이와 별개로 당시 일본에 사둔 땅들의 가격이 거품이 끼면서 급등해서인지 80년대 중반 한땐 포브스지 세계 부자 순위에 랭크된 적도 있었다.[44] 1997년에는 차남 신동빈 호남석유화학 부사장이 한국롯데 부회장이 되면서 2세 승계작업[45] 도 점차 속도를 더해갔다. 또 무차입 경영을 고수해 IMF 외환위기 역시 비켜나갔다.

1980년대에는 전두환 당시 대통령 권유로 한국 투자를 늘렸으며 1990년대에는 와세다 동문이기도 한[46] 김영삼 당시 대통령과도 관계를 유지했다. 일본식 기업풍토에 안정적인 현금흐름과 시장지배력을 중시하는 재일교포 특유의 경영행태도 나름 회자되었다. 덕분에 IMF 직전까지 롯데는 국내 대기업 순위에서 10위 안팎을 머물고 있었는데, IMF 위기 속에서 살아남으면서 2000년대 들어 5위권까지 치고 올라간다.[47]

2007년엔 일본 (주)롯데를 '롯데홀딩스'로 출범시켜 기존 계열사들을 '투자법인'으로 만들어 사업부를 신 법인에 넘겼다. 2009년에는 신동주 사장을 일본 롯데 부회장으로 승진시켰고, 2011년에는 신동빈 부회장을 회장으로 승진시키며 자신은 '총괄회장'으로 추대됐다. 2013년 12월 골절상 이전까진 구순이 넘은 나이에도 현역으로 활동했다. 2000년대에도 작업복 차림으로 영업이 끝난 백화점이나 마트 등을 둘러보고, 담당자에게 세부적인 관리내용을 전화 등으로 묻는가 하면 거동이 불편해지기 전 한국과 일본을 오가는 비행기도 민간 항공사 1등석을 혼자서 탑승했다. 2011년 롯데월드타워 공사현장에 직접 나타나기도 했다.#

신격호는 '은둔형' 경영 스타일로, 얼굴(스타 경영자)보다 그룹 실적이 우선이다라는 신조로[48][49] 언론 노출도 꺼려서 인터뷰나 재계 모임에도 참석을 잘 안 했다.[50] 심지어 그룹 내에선 신년 하례식, 그룹 사장단 회의, 전략 결정 회의체도 각각 꾸리지 않았으나, 2007년에야 사장단 회의를 열기 시작했다. 그래서인지 롯데 자이언츠 팬북이나 계열사 사사 등지에 쓰이는 사진은 거의 20여 년 동안[51] 변하지 않았고, 이는 계열사 대표들에게도 영향을 미쳤는지 계열사 경영자들도 노출이 드문 편이었다.# 또 어떤 사업이든 간에 '친정 경영'을 우선시한 탓에 타 대기업과 달리 상대적으로 계열사 CEO들의 권한이 낮았다고 한다.

언론 주목을 싫어하던 신격호도 후술된 왕자의 난을 거치며 말년은 꽤나 시끄러웠는데, 작고 3년전인 2017년 6월 24일 오전 일본 롯데홀딩스는 도쿄 신주쿠 하쓰다이 본사에서 주주총회를 열고 임기가 만료된 신 총괄회장을 새 이사진에서 배제한 인사안을 의결했다. 이에 따라 신 총괄회장은 1948년 (주)롯데라는 이름으로 일본에서 롯데그룹을 창립한 지 약 70년 만에 롯데그룹 경영에서 완전히 손을 떼게 됐다. 명목상 명예회장직을 대신 받게 되었지만 사실상 불명예 퇴진이나 다름없었으나 끝까지 예우했다. 그리고 2020년 사망 전 거의 100세까지 경영에 관여한 대단한 기록을 세웠다.

3.4. 롯데판 왕자의 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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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 앞으로 후계자는 어떻게 결정하실 생각입니까. 장남 신동주씨는 일본의 롯데, 차남 신동빈씨는 한국의 롯데를 맡기로 되어 있다는 이야기는 사실입니까.
신격호 회장: (2000년대 초반 인터뷰) 내가 아직 10년은 더 할 거요(웃음)[52] 동빈이는 미국 컬럼비아 대학교를 졸업한 뒤 노무라 증권에 들어가 영국에서 오랫동안 근무해 영어도 곧잘 하고 우리말도 합니다. 동주는 미쓰비시에서 일한 적이 있지요.[53]

2015년 7월 28일 신격호는 일본 롯데홀딩스 회장직에서 전격 해임되고 총괄회장에서 명예회장이 되었다.[54] 27일 장남인 신동주 전 부회장이 한국롯데 몰래 롯데가(家) 인사 여럿과 함께 일본에서 자신을 제외한 차남 신동빈 회장을 포함 여섯 명의 이사들을 해임하려고 했다가 이사회에서 제동을 건 것이다. 한마디로 장남 신동주 전 부회장이 고령의 아버지 신격호 총괄회장을 등에 업고, 차남 신동빈 회장 체제를 무너뜨리려 쿠데타를 기도했다가 실패한 것이 된다.

문제는 장남 신동주가 처음에 해임했던 인물들에 포함된, 일본 롯데홀딩스 부회장 쓰쿠다 다카유키가 예전에 신격호 총괄회장으로부터 "잘 부탁한다"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는 점. 그런 쓰쿠다를 신격호+신동주가 다시 해임했다는 것은 신격호 회장이 판단력이 흐려진 상태에서 장남에게 설득 당한 것이 아닌가 하는 기자들의 분석이 있다. 하여 차남 신동빈 측에서는 곧바로 반격에 나섰다는 것.

이 때 니혼게이자이 신문 등 일본의 경제지들은 "시게미쓰 일족의 난"이라는 헤드라인을 붙였다.[55]기사 또한 당시 롯데 자이언츠 구단주 대행이던 신동인[56] 역시 신동주의 쿠데타에 가담했다는 게 알려지면서 롯데 자이언츠 팬들은 환호성을 질렀다는 후문이 있다.

하지만 2015년 5월 22일 롯데월드타워를 방문하여 건설보고를 받는 모습을 밀착취재한 기사들만 봐도 노병용 롯데물산 사장과 무리 없이 대화했다고 하거나 건설에 대한 매우 상세한 사항을 물어보며 현장의 상황을 살폈기에 위의 신동주 쿠데타, 신격호 노환설을 부정하는 경우도 왕왕 있다. 무엇보다도 신격호는 꾸준히 신동빈을 밀어주고 있었는데 이제와서 끈 다 떨어진 신동주를 다시 당긴다는 건 아귀에 맞지 않는다. 오히려 신격호가 신동주를 이용하여 양국 회장급에 취임한 신동빈에게 어떤 제스처를 취하며 권력의 운용과 책임에 있어서 무한대로 자유로운 상왕으로서의 포지션을 취하려고 했는데 신동빈의 갑작스러운 제스처에 당해 권력없는 태상황이 되어 버렸다고 분석하는 경우도 있다.

어쨌든 이로 인해 본인은 1948년 회사 설립 이후 처음으로 일본롯데의 경영 일선에서 물러난 것으로 보이고 신동빈 체제가 확고하게 굳어질 것으로 보인다. 귀국 때 엄청난 취재진이 몰려 곤욕을 치렀다.

그런데 2015년 7월 30일 신동주 부회장이 일본롯데에 대해 주주총회 소집을 요구했고 그 골자가 신격호 회장의 복위(+ 신동주 부회장의 복위)라고 한다. 신동빈 회장은 펄펄 뛰는 중이라고. 또한 신동주 측에서 "아버지 신격호 역시 신동빈+쓰쿠다를 그만두게 했다"라며, 이와 관련한 신격호의 (일본어) 육성 녹음 파일을 공개하면서 상황이 묘연해지고 있다. 신격호가 이전에 쓰쿠다에게 "잘 부탁한다"라고 한 것은 "(그만두고 나서도) 다른 데 가서 잘 하라"는 덕담이었다는 것이다. 기사. 신동빈 쪽에서는 "롯데 경영 전반에 있어 아버님(신격호)의 의중이 중요하긴 하지만, 신동빈+쓰쿠다 해임 지시는 제대로 된 절차 없이 이루어진 것이므로 따를 수 없다"며 맞서는 중이다. 신격호의 장녀 신영자는 신격호+신동주에 가세하는 양상이다. 하지만 2011년에 신동빈을 한국 롯데 회장에 임명해 놓고 그런 적이 없다고 하는 등 기억력에 문제가 있는 모습을 보여 정말 신격호가 판단력에 문제가 없는 것인지도 의심되었었다.

2015년 8월 2일 신동주 부회장이 인터뷰에서 한 발언에 따르면 6월달에 롯데그룹의 중국 진출 과정에서 손해가 발생한 것에 대해 신동빈 회장을 추궁하던 중 격노하여 뺨을 때렸다고 한다.# 결국 8월 28일에 있던 일본 롯데홀딩스 주주총회에서 신동주 측의 안건이 죄다 부결됨에 따라 1차 표결은 신동빈 측의 승리로 끝나고 말았다.

2015년 10월 15일 둘째 아들 신동빈이 집무실에 CCTV를 설치하여 신격호 명예회장이 직원들의 감시에 놓이게 되자 즉각 철수를 요구하였고, 10월 16일 장남 신동주와 직원들이 집무실에 진입하여 신격호의 거처를 탈환하였다.(...) 개막장이 따로 없다. 이후 한국 언론과 인터뷰 하였는데 고령이라 귀가 잘 들리진 않았지만 인터뷰도 아주 똑바로 하고 의사표시도 분명하게 하는 걸로 봐선 그간의 정신이상설은 모두 근거없는 헛소문임이 거의 확실해젔다. 롯데그룹의 언론플레이가 의심되는 상황. 이 인터뷰에서 다시 한번 장남 신동주에 대한 지지의사를 확고히 하였다. 기사, 기사2.

2016년 2월 12일, 신동주는 신격호가 경영관 분쟁과 관련해 인터뷰하는 동영상과 친필 서명이 들어간 일본어 문서를 공개했다. 일본말로 진행된 해당 인터뷰에서 신격호는 “당연히 장남인 신동주 전 부회장이 후계자가 되어야 한다”고 했다. 또 신동빈을 롯데에서 추방해야 한다는 내용도 남겼다. 문서는 2015년 12월 30일자 서명이 있었다. #

하지만 2016년 3월과 6월에 두 차례에 걸친 일본 롯데홀딩스의 주주총회에서 또 다시 신동주 측의 안건은 죄다 부결되면서 신격호의 롯데그룹 자체의 장악력이 이제는 떨어진 것이 아니냐는 소리가 나오고 있는 실정이며 2016년 6월 29일, 신격호 회장이 2010년부터 치매약을 복용했다는 언론 보도가 나왔다. 기사.

보도의 출처는 롯데그룹이 아닌 신동주 SDJ코퍼레이션 회장 측으로 알려졌으며, 현재 진행중인 롯데그룹의 각종 비리 의혹 문제에 자신들이 휘말릴 수 있음을 우려한 신격호 회장과 신동주 측이 각종 수사를 피해가기 위해 뒤늦게 기존의 주장을 뒤집은 것으로 보인다.

2017년 6월 2일, 신격호는 대법원으로부터 한정후견인 판정을 최종적으로 받게 되면서 사실상 본인이 제대로 의사결정을 할 수 없음[57]이 확정되고 말았다.#

그리고 2017년 6월 24일 일본 롯데홀딩스 주주총회에서 자신의 이사직 재선임안이 통과되지 않음에 따라 결국 회사의 경영일선에서 모두 물러나고 말았다. 4차에 걸친 신동주 vs 신동빈의 싸움은 신동빈의 완승으로 끝나게 되었고, 신격호는 자신이 세운 기업의 경영 일선에서 불명예 퇴진하게 되었다.#

3.5. 사망

파일:신격호 롯데 명예회장 영결식.jpg
2017년 5월 3일 잠실 롯데월드타워를 다녀간 걸 끝으로 공식 석상에서 자취를 감췄고, 명예회장 추대 후 조용히 여생을 보내다 2020년 1월 18일 밤 병세가 위독해져 서울아산병원 중환자실에 입원했고 다음날인 1월 19일 오후 4시 29분 경 노환으로 타계했다. 향년 98세.[58] 참고로 위 사진의 맨 앞에 신격호의 영정을 들고 있는 사람은 신격호의 장손이자 신동주의 장남인 신정훈이고 뒤에 있는 사람은 신동빈의 장남인 신유열이다. 신동주가 신동빈보다 훨씬 결혼을 늦게 해서 신정훈이 신유열보다 더 어리다.

2020년 1월 22일 롯데콘서트홀에서 영결식을 치르고 신격호 회장이 평생의 꿈으로 생각했던 롯데월드타워를 한 바퀴 돌고 난 뒤 고향인 울산광역시 울주군 선영[59]에 안치됐다.

1세대 재벌 중 마지막까지 생존해 있던 신격호 회장이 별세하면서[60] 대한민국 10대 재벌의 1세대 경영인 시대는 완전히 막을 내리게 되었다.

2020년 6월 일본 도쿄에 사무실 금고에서 신격호 회장이 2000년 3월에 작성한 것으로 알려진 유언장이 발견됐다. 이 유언장에는 신동빈 회장을 후계자로 한다는 내용이 담겼다. 유언장은 일본 법원에서 상속인들의 대리인이 모두 참석한 가운데 개봉됐다.

4. 여담

  • 롯데의 명칭은 괴테의 소설인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의 등장인물인 샤롯데를 자신의 이상형으로 보고 그렇게 지었다는 설이 있다. 애초에 로테(Lotte)는 독일어권에서 샤롯데(샤를로테)의 애칭(nickname)이기도 하고, 실제로 괴테 소설에서도 이러한 애칭이 등장한다. 다만 이에 대해선 약간의 이설도 있는게, 신격호가 츄잉껌 시장에 뛰어든 1948년 당시 츄잉껌의 주 소비계층인 청년층, 특히 젊은 여성들 사이에선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 큰 인기를 얻고 있었다고 한다.[61] 또 현대식 츄잉껌을 처음 만들어 낸 Wrigley[62]사가 맨 처음 내놓은 츄잉껌이 두 종류였는데 하나는 여성을 타겟으로 한 Vassar, 그리고 다른 하나는 일반시장을 타켓으로 한 Lotta였다. 따라서 마냥 창작물 캐릭터가 이상형이라서 회사 이름까지 그렇게 지었다기보단 최초의 츄잉껌 이름 + 당시 큰 인기를 얻고 있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의 여주인공 '샤롯데' = 롯데(Lotte)가 더 설득력이 있어보인다. 실제로 롯데의 각종 건물, 브랜드, 온갖 서비스 명칭엔 늘 샤롯데가 붙는다.[63] 다만 롯데그룹 내에서도 디테일까지 챙기지는 않는지, 대학생 취업설명회에서 담당자는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 나오는 샤를로테에 신격호 회장이 크게 감명받아 회사 이름을 지었다"라고 뭉뚱그려 언급하는 것을 볼 수 있다.
  • 샤롯데에서도 알 수 있듯 젊은 시절, 문학을 좋아해서 서점가에 가 책도 제법 읽어 작가가 되고 싶어했다고도 전해진다.[64] 하지만 현실은 먹고 살아야 하는 처지였기에 꿈을 접고 여러 일을 하다가 주변으로부터 얻은 신뢰를 바탕으로 사업을 꾸리게 된 것.
  • 신격호의 국적은 미스터리였다. 때문에 복수국적자로 분류되기도 했으나, 2000년 조갑제와 한 인터뷰에 따르면 신격호 본인이 직접 "나는 일본인으로 귀화한 적이 없고 (본인의 일본 이름인 시게미쓰 다케오는) 일제시대 창씨개명한 것을 그대로 쓰고 있을 뿐"이라고 밝혔다. 그 외 한 언론사가 입수한 일본 롯데 계열사의 대주주 목록을 보면 신격호와 시게미쓰 다케오가 함께 병기되어 지분을 보유하고 있었다고 한다. 일본에서 사업을 하다보니 일본 귀화 제안도 제법 받았지만 거절하고 끝까지 한국인으로 남았다고 한다.
  • 1920년대에 태어난 사람답게 남성중심적인 사고를 보유하였다. 장녀인 신영자에게 작은 계열사조차 주지 않았고 외손녀인 장선윤 호텔롯데 상무가 하버드 대학교에 합격하자 "여식아가 뭔 하버드고..."라며 의아해하였다. 그래도 여동생이나 고모에게 경제적인 도움을 많이 주었다. 반대로 차남인 신동빈은 양성평등에 동의하는지 여성 인재 채용을 적극적으로 장려한다.
  • 롯데 자이언츠의 팬들에게는 그렇게 좋은 이야기를 듣지 못했다. 과거 롯데의 야구단 운영 사례를 보면 "짠돌이"라는 별명이 자동적으로 붙을 정도로 투자에 인색했고[65] 구단에 대한 인색한 지원이 결국 성적 부진으로 연결됐다는 비판도 있었다. 더구나 매년 팬북에는 20년 가까이 같은 프로필 사진을 붙일 정도여서 야구단에 관심은 있냐는 비판이 따랐다. 자이언츠 특유의 운영 방침이나 프런트의 각종 병크를 생각한다면 신격호의 야구단 운영에 대해 폄하하는 의견이 많다. 그러나 자이언츠 야구단의 역사 전체를 놓고 보면 상당히 긍정적인 역할도 했다. 일본 롯데 오리온즈 운영 경험을 바탕으로 한국프로야구가 출범하기 전인 1970년대 실업야구단 롯데 자이언트를 창단하며 야구의 프로화를 먼저 지향하기도 했고[66] 한동안은 야구에 대해 상당한 관심을 기울였다고 전해진다. 다만 시간이 갈수록 신격호 스스로 야구에 대한 관심이 뜸해지고 측근이나 부하들이 자행한 엉뚱한 행동들로 구단이 망가져서 문제가 되었다.
  • 다른 재벌들에 비해서는 이 다소 많은 편이었다고 알려져있다. 잠이 적다고 알려진 기업인들과 달리[67] 신격호는 보통 아침 8시에 기상하고 9시에 아침식사를 하였다고 한다.
  • 신격호가 여러 실패를 딛고 결국 성공한 재벌이기 때문인지 롯데그룹은 입사시험을 위한 면접과정에서 신격호의 이력을 묻는 질문을 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신격호의 공과는 사람들마다 평이 다르겠지만, 창업자로서 가지는 노력과 끈기/도전정신 등은 높이 평가받을 만하다. 다만 한국의 경우 1980년대 이후에는 재무관리와 금융체계의 발전으로 투자안 평가 및 대출이 산술적으로 진행되고 사업 실패시 재기할 수 없을 정도로 가혹한 청산이 이루어지기에 신격호처럼 실패 후 다시 돈을 빌려 사업을 반복하는 경영자가 되는 건 거의 힘들다. 신격호의 실패와 재도전에는 수요초과와 경제 급성장이라는 시대적 특성도 한몫했다. 물론 그렇다고 무조건 운빨이라고 폄하할 것도 아닌게, 무일푼 신격호가 그 많은 돈을 빌린 건 물론 운도 있었겠지만, 멸시와 편견에 시달리던 식민지 조선인임에도 일본인이 한번도 아니고 두번이나 돈을 빌려줄 만큼[68] 그가 성실도와 신뢰감을 쌓았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것도 미군 폭격으로 공장이 날라가서 사실 도움도 안되고 빚만 남겼지만, 그래도 그 과정에서 사업 수단을 익혔을 것으로 보인다.
  • 2013년까지 매년 5월 고향인 울산광역시 울주군 삼동면 둔기리를 찾아 마을잔치를 열었다. 생가가 있던 이 마을은 1970년 울산공단의 용수공급을 위한 대암댐 건설과 함께 수몰되어 지금은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곳이 됐다. 작은 마을을 이루고 있던 주민들은 집과 전답을 버리고 인근의 도시로 떠나거나 울산에서 하층민으로 전락했다. 이 소식을 전해듣고 신격호는 1971년부터 마을 이름을 따 '둔기회'를 만들고 자비를 털어 해마다 주민들과 그 가족들을 불러[69] 마을 잔치를 열었다.# 그리고 이들을 위해 롯데그룹 내 취업 자리도 마련해주었다는 도 있다. 수몰된 고향을 그리워하며 어쩔 수 없이 흩어진 친척들에게도 관심을 쏟았다고 한다.
  • 그러나 본인의 뜻과는 반대로 그룹에서는 형제 간의 분쟁이나 아들들의 분쟁이 제법 일어났다. 이어오던 마을 잔치는 2014년 세월호 참사가 일어나자 애도를 위해 중단하였고 원래 마을 잔치를 열려고 했던 잔치 비용 전액은 세월호 희생자들에게 기부되었다. 이후 2015년에는 더 이상 마을 잔치를 열지 않는다고 롯데 측에서 밝혔다. 이유는 해마다 늘어나는 잔치 참석 인원들로 인한 교통 불편을 주변 주민들이 호소했기에 받아들였다는 것. 그래도 고향에 투자는 계속 될 것이라고 한다.# 다만 2015년 기사에 따르면 신격호 회장이 이미 당시 기준 3년 전부터 이곳을 잘 찾지 않았고 이후부턴 아들들도 잘 보이지 않았다고 하는걸 봐서 건강 문제 등으로 신격호 회장의 관심이 식어버리자 자연스레 아들대에 와선 멈춘 것으로 보인다.#
  • 본인부터가 재일교포다 보니, 일본에 있던 재일교포들도 제법 후원했던 것으로 보인다. 일단 교민회에서 조치훈의 형[70]과의 인연으로 조치훈을 후원하기 시작해 20년 이상 후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장훈도 후원을 받았다고 한다. 그 외에도 유학이나 사업 등으로 일본에 온 한국인들도 큰 인연도 없는데 한국에서 왔다고 도와준 일이 꽤 있었다고 한다.#
  • 일각에서는 롯데가 범삼성가범현대가 같은 재벌들과는 달리 의료기관을 운영하지 않는 이유로[71] 신격호 회장 본인부터가 원체 병원 갈 일이 없어서라고 회자되기도 했다. 그러나 속칭 왕자의 난 이후 신병 이상에 관한 이야기들이 언론 보도로 흘러나오기 시작했고, 결정적으로 롯데 측 핵심 관계자의 증언을 소스로, 2010년대 초반에 알츠하이머 치매 진단을 받았으며, 치료제를 복용하기 시작한지 오래되었다는 보도가 나오기도 했다. 다만 이후의 신격호 명예회장의 인터뷰를 보건대 이 주장은 롯데그룹의 언론플레이일 가능성이 농후해졌다. 기사.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따르면, 1950년 재일 한인 1세 신격호가 신오쿠보역 근처에서 롯데제과 공장을 설립하자, 일본 (전국) 각지에서 일거리를 얻고자 한인들이 모였다고 한다. 즉, 도쿄도 신주쿠구에 대한민국 뉴커머들의 코리아타운 신오쿠보가 형성되는데 일부 영향력을 끼친 셈. 물론 오늘날 신오쿠보의 모습은 항목에도 있듯 21세기 한류붐 이후 생긴거라 직접적 연관성은 없긴 하다.
  • 북한에도 사업 진출할 의향이 있었다고 한다. 특히 호텔 사업에 관심이 많았다고 하는데, 이유는 남한에 투자할 때랑 비슷하게 고향이라서 그렇단다. 물론 실제 고향은 울산이지만 분단 이전 세대라 그런지 북한 지역도 다 고향이라고 생각하는 모양. 다만 독재 국가라 투자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고 하면서도, 자기가 북한 가서 10년 지도하면 남한 따라잡을 수 있다는 농도 했다.
  • 2021년 11월, 롯데 측은 그의 탄생 100주년을 맞이하여 롯데월드타워 1층에 '상전 신격호 기념관'을 열었는데, 내부에는 신격호 창업주가 생전에 쓰던 집무실 집기, 낡은 구두 등 유품 등이 전시되어 있다.
  • 2024년 5월 3~5일에 국립극장에서, 신격호의 삶을 다룬 뮤지컬 '더 리더'(The Reader)가 무대에 오른다. 이는 문학적으로 재해석한 낭독 콘서트의 형식을 따른다.

5. A급 전범 가문과의 연관 허위정보

기자:일본인 부인의 삼촌이 2차 세계대전 패전 때 미조리 함상에서 항복문서에 서명한 시게미츠 외무대신이며 회장께선 부인 家門으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만.


신격호 회장: 그것도 오해예요. 집사람은 외무대신 시게미츠와는 아무 상관이 없어요. - 인터뷰
첫번째 부인과 사별한 후, 신격호 회장의 둘째 부인이자[72] 신동주, 신동빈의 어머니인 시게미쓰 하쓰코(결혼전 이름: 다케모리 하츠코[73])가 태평양 전쟁 시기 일본 외무대신[74]을 지냈던 A급 전범 시게미쓰 마모루조카라는 설이 한동안 떠돌았다.[75] 즉, 이 설이 맞다면 신격호는 그의 조카사위란 소리.

다만 2020년대 기준에선 여러 정황을 모아보면 사실이 아니다. 왜냐하면 롯데도 공식적으로 부인했고, 언론도 구체적인 정황이 없다고 보는 경우가 대다수이며, 심지어 이 설을 처음 제기했던 작가도 관련 내용을 오보라고 수정했기 때문이다.[76]

일단 2015년 오마이뉴스 기사에 따르면 신격호 회장의 일본 이름인 '시게미츠 다케오'의 성 시게미츠는 일제강점기 시절 창씨개명하면서 쓴 이름으로, 실제 본관인 '영산 신(辛)씨' 일가가 지난 1940년 일제 창씨개명 당시 대부분 '시게미츠(重光)'로 성을 바꾼 사실을 확인했다고 한다.[77] 신 회장이 일본으로 건너간 시점이 1941년인 걸 감안하면, 두 번째 아내인 다케모리 하츠코씨를 만나기 훨씬 전부터 '시게미츠 다케오'란 일본 성과 이름을 썼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롯데그룹도 이전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다가, 경영권 분쟁으로 한국내 여론이 악화된 2015년 들어 조선일보가 관련 얘기를 기사로 쓰자 이후 사실무근이라며 정정보도를 신청하는 등 공식적으로 부인했다. 하츠코씨의 결혼 전 성은 '다케모리'로, 결혼 후 남편 신격호의 일본 성을 따랐을 뿐, 일본 외상 시게미쓰 마모루 집안과는 무관하다는 것이다. 롯데그룹 홍보담당자는 2015년 <오마이뉴스>와 한 전화 통화에서도 "하츠코씨 쪽에 직접 확인했더니 시게미쓰 가문과 아무 관련이 없다고 했고 일본 현지 시게미츠 가문 관련 단체에도 확인했지만 관련이 없었다"고 주장했다. 또 하츠코 본인은 평범한 집안에서 자랐다고 한다.

전범 가문 연관설이 처음 등장한 것은 1998년에 출판된, 언론인 출신 정순태 씨가 쓴 책 '신격호의 비밀'[78]이란 책이었는데, 2015년 조갑제닷컴에서 이 책을 <거인의 황혼>이란 제목으로 바꿔 재발간하면서 해당 내용은 작가가 오보라고 인정했다며 삭제했다고 밝혔다. 심지어 '신격호의 비밀'에서도 저자 정순태는 울산 삼동초등학교에 답사 갔을 때 봤던 졸업생 목록에 '중광무웅'(시게미츠 다케오)이라는 이름이 있었다며, 이 설이 카더라 수준임을 밝혔다고 한다. [팩트체크]"신격호는 일본 A급 전범 사위다?"…'가짜뉴스!' #

6. 가족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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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번째이자 유일한 정식혼 부인인 노순화는 1922년 8월 10일 태어나 1951년 5월 16일 28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1942년 장녀 신영자를 낳았다.

이후 오랜기간 공식적인 부인 역할을 한 두번째 배우자 시게미츠 하츠코(결혼전 이름: 다케모리 하츠코)는 정식혼이 아닌 사실혼으로, 처음엔 동거로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만남 시기에 따라 본처가 한국에 버젓이 있는데 새로운 여자와 가정을 이룬 불륜일 수도 있고, 아님 사후 만난 것일수도 있다. 둘 사이에 아들 2명이 있는데, 신동주(시게미츠 히로유키)와 신동빈(시게미츠 아키오)이다. 신동주가 1954년 1월생인걸 보면 최소 1953년엔 이미 사실혼이었다는걸 알 수 있다.

그러다 1980년대 들어 아역배우이자 1972년 초대 미스 롯데 출신 서미경과 중혼적 사실혼 관계를 맺었다. 말이 좋아 중혼적 사실혼이지 여긴 빼박 불륜이다. 둘 사이에 낳은 딸이 신유미.[79] 참고로 서미경과 신격호 나이 차이는 무려 38세였다. 딸 신유미는 1983년생인데 태어났을 당시 신격호의 나이는 만 62세였다. 그래도 1988년 호적에 올리긴 했다.

형제도 여럿인데 5남 5녀(10남매) 중 신격호가 장남이며, 2남 신철호는 주식회사 마로 회장, 3남 신춘호농심그룹[80] 회장, 4남 신선호는 일본 산사스 사장, 5남 신준호푸르밀[81] 회장, 여동생 신정희는 동화면세점 사장이다. 기타 가족 관계에 대한 내용은 범롯데가 참고.

7. 수상 경력

8. 관련 문헌

  • 신격호의 도전과 꿈: 롯데월드와 타워 - 오쿠노 쇼 저 / 오현정 역. 나남. 2020.
  • 열정은 잠들지 않는다: 한계를 넘어 더 큰 내일로(롯데그룹 창업주 신격호 회고록) - 롯데지주 저. 나남. 2021.

[1] 일제강점기 이후로는 대한민국 국적을 취득하여 사실상 일본 국적이었던 적이 없다 보니 법적인 본명이었던 적은 반강제로 창씨개명 했을 때 한정이다. 따라서 엄연히 통명이다.[2] 음력 10월 4일. 주민등록상으로는 1922년 11월 22일 생이지만 실제로는 1921년 11월 3일에 태어났다. 당시는 일제강점기가 시작된지 이미 12년이 지난 상태였고, 신격호는 인생에서 약 23년동안 일본제국의 영토 조선 출신 일본인 2등국민으로 살았던 셈이다.[3] 인근의 하잠리, 조일리와 함께 영산 신씨 집성촌이다.[4] 종종 일본 국적 소유자로 오해받곤 했으나, 생전 일본 국적이 아닌 일본 특별영주권을 소유하고 있었다. 물론 일제강점기인 1921년생이므로 1945년 8.15 광복까지 일본 제국 국적을 소유한 적은 있다고 할 수 있다.[5] 초당공파(草堂公派) 27세 ○호(浩) 항렬.[6] 1940년대에 와세다대학(早稲田大学) 이공학부 연구과에 합병된 와세다대학의 전신인 와세다 고공(高工)화학과 야간부 및 와세다실업학교 졸업. 구체적으로는 와세다실업학교에서 현재로 고교학력에 준하는 자격을 얻고 전후 와세다대학에 합병된 와세다고등공학교에서 화학과를 졸업하였다. 따라서 고교 및 대학 모두 와세다 출신인 것이다.[7] 辛鎭洙. 1902. 8. 25 ~ 1973. 6. 16.[8] 金順必. 1904. 2. 12 ~ 1952. 10. 26. 김해 김씨다.[9] 辛宣浩. 1934년 12월 28일생이다. 일본 산사스식품공업 사장을 역임했다.[10] 辛小荷.[11] 辛敬愛.[12] 辛敬淑.[13] 辛貞淑.[14] 辛貞姬.[사별] 盧舜和. 1922. 8. 10 ~ 1951. 5. 16. 광주 노씨 노희규(盧熙圭)의 딸이다. 젊어서 사별하긴 했으나 유일한 정식 혼인 관계이다.[사실혼] 重光初子. 1930년 8월 10일생이다. 혼전성은 '다케모리(竹森)'신격호 롯데 총괄회장 부인 시게미츠 하츠코 법률혼 아닌 사실혼 관계.[사실혼2] 미스 롯데 출신 배우. 10대 후반부터 이미 신격호가 스폰서라는 소문이 무성했으며, 83년에 일본에서 낳은 딸을 88년 신격호의 호적에 입적하면서 불륜 관계가 공식적로 확인 되었다. 신격호와는 무려 38살이나 차이가 난다. 신격호의 장녀보다 17살이나 어리고, 현 롯데 회장 신동빈보다도 4살이 어리다. 참고로 서미경에 대한 신동빈의 호칭은 '아버지 여자 친구'. 서미경에 대한 신격호의 애정은 각별해서 일본 롯데홀딩스의 지분을 신격호 일가 중에서 가장 많은 6.8%를 가지고 있으며, 둘의 불륜 관계는 신격호가 사망할 때까지 수십 년간 지속되었다.[A] 노순화 소생.[B] 시게미츠 하츠코 소생[20] 신동빈은 시게미츠 하츠코 소생이며 손자 신유열은 시게미츠 마나미 소생.[C] 내연녀 서미경 소생. 참고로 신격호 나이가 나이다보니 이복언니 신영자와는 무려 41세(...) 차이가 난다.[22] 젊었을 때 기준. 신격호는 1921년생으로 이 나이대 남성의 평균키는 대략 163-164cm 정도였기에 현대 기준으로는 180 중반 정도의 장신이라고 할 수 있다. 나이가 들면서 170cm로 줄어들었다. 참고로 동생 신철호, 신춘호도 키가 180cm로 장신이며, 아들 신동주신동빈도 각각 177cm, 180cm로 큰 편이고, 손자 신유열은 190cm의 어마어마한 장신이다.[23] 일본으로 귀화한거 아니냐고 오해받기도 하지만, 1945년 광복 이후엔 한국 국적을 쭉 유지했다.[24] 당연한 얘기지만, 신격호에게는 전술했듯이 일본 국적이 없기 때문에 '시게미츠 다케오'가 법률상 본명은 아니다. 다만, 신격호는 일본 특별영주권이 있기 때문에, '시게미츠 다케오'가 일본법에 따라 등록된 통명일 수는 있다. 다만 이 경우에도 일본 내에서 통용되는 재일한국인의 일본식 씨명을 증명서 및 각종 사업 서류 등에 대용 혹은 병기해 주는 것에 불과하고, 그의 유일한 본명은 한국 성명인 '신격호'가 된다.[25] 1세대 재벌 중 윗세대에서 크게 물려받은거 없이(아예 거지였다고 보긴 힘든게, 당시엔 초등학교만 졸업해도 학력으로 중상위권이었다) 밑바닥부터 시작해 재벌 위치까지 성장한 사례는 정주영과 신격호가 대표적이다. 다만 일본에서 기업을 키웠던 신격호에 비해 한국에서 재벌 신화를 쓴 정주영이 인지도로나 규모로나 앞서는 부분이 있다보니 오늘날 대한민국 자수성가 재벌하면 정주영부터 기억되는 일이 잦다. 그 외 자수성가형 기업가는 아무래도 1세대 재벌 체제에서 벗어난 영역이라 할 수 있는 IT, BT, 문화 업계 등에서 주로 찾아볼 수 있다.[26] 참고로 세계 랭킹은 아니어도 IT 재벌로 성공해 일본 최고 부자에도 오른 바 있는 손정의는 재일 한국인이었지만 일본국적을 취득해서 현재는 한국계 일본인이다. 물론 귀화 이전에도 사업가로 이름을 날리고 있긴 했다.[27] 사실 그 당시 롯데가 일본에서 중견 대기업 수준이었던걸 고려하면 신격호가 세계 3-4위 부자가 된다는게 뜬금포긴 하다. 유일한 변수는 당시 거품이 심하게 낀 도쿄 땅값 덕분에 일본 부동산을 많이 사둔 신격호가 반짝 급상승했던 것인데, 본인 역시 인터뷰에서 "옛날부터 일본에 부동산을 많이 갖고있는데 땅값이 올라 그런 것이지 무언가 과대평가한듯 합니다. 아직 계산해본 적도 없고 세계에는 우리보다 몇 배의 부자들도 있습니다."라면서 겸손하게 얘기하며 크게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주장했다. 반대로 말하면 일본 버블 경제가 사라지자 신격호의 자산도 다시 줄어들었다. 그렇지만 일시적으로라도 한국인 사상 최초로 세계 5위 이내 부자가 된 것은 유의미하다.[28] 제법 미남이란 것을 알 수 있다.[29] 참고로 뒤에 마스크를 착용한 남성은 장남 신동주. 뒤에서 모자 쓴 여성은 며느리 조은주. 오른쪽이 장녀 신영자.[30] 辛鎭洙, 1902. 8. 25. ~ 1973. 6. 16.[31] 金順必, 1904. 2. 12. ~ 1952. 10. 26.[32] 학업성적은 57명 중 42등이었다고 한다.(...) 역시 돈 버는데 학업성적이 꼭 직결되진 않는 모양.[33] 당시 면서기 두달치 월급.[34] 일제강점기 당시에는 부산부 변천정(弁天町)·금평정(琴平町)·서정(西町)·행정(幸町) 등으로 나뉘어져 있었다.[35] 노희규(盧熙圭)의 딸이다.[36] 아니라고 했음에도 다짜고짜 얻어맞았다고 한다. 그래서 혹자는 신격호가 일본으로 결국 귀화하지 않은게 이때 일본에서의 첫 기억이 안좋게 남아서 그런거 아니냐는 추측도 한다.[37] 현재는 와세다대학 부속고등학교와 함께 와세다대학 내부진학이 가능한 일관제 학교 중 한 곳이기 때문에 편차치가 75에 달할 정도로 들어가기 힘든 명문학교다.[38] 당시 회사원 월급이 약 80엔 정도 되던 시절이었고, 지금 가치로 무려 3억엔 정도 된다. 원화로 환산하면 30억원 정도의 큰 돈을 빌려준 셈.[39] 고교 학력 취득.[40] 화학공학 학사 취득. 첫째 아들은 영향을 받았는지 타대에서 경영공학을 졸업했다.[41] 덕분에 오늘날 롯데화학은 롯데그룹에서 아예 흑역사 취급되고 있는 모양. 물론 신격호가 화학 사업 자체를 포기한 건 아니어서 나중에 호남석유화학을 인수해 롯데케미칼로 굴리기 시작했고 이 사업은 21세기에도 롯데그룹의 숨겨진 캐시카우로 굴러가고 있다.[42] 신격호의 막대한 자산을 일부라도 한국에 묶어둘 요량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사실 신격호 입장에선 정 뭐하면 한국 사업 손 털고 일본으로 돌아가면 그만이었기에 정부도 꽤나 애간장이 탔던 것으로 보인다.[43] 당시 오디오는 자동차에 이어 두번째로 비싼 소비재였다.[44] 사실 이 당시 신격호가 세계적인 부자가 된 이유는 기업 매출 측면의 성공이라기보단 당시 사두었던 비교적 시골(?)이었던 도쿄 땅들이 일본 부동산 버블 때 최고의 알짜 땅으로 올라서면서 부동산 재벌이 되었기 때문도 있었다. (롯데의 부동산 안목은 한국에서도 제법 유명하다.) 당시에는 도쿄에 있는 부동산을 다 팔면 미국 전체 부동산을 살 수 있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일본 부동산 가격이 거품이 끼어 천정부지로 뛸 때였다. 반대로 말하면 거품이 꺼지자 신격호 자산도 줄어들었지만. 신격호 본인도 본인 자산 잘 모른다고 땅값 때문에 과대평가된 것 같다고 크게 개의치 않았다.[45] 당초에는 신격호 회장이 일본롯데를 신동주 사장에게, 한국롯데를 신동빈 부회장에게 물려주려고 했으나, 일본에서 부동산 거품이 빠져나가고 되려 외환위기를 버텨낸 한국롯데의 규모가 일본롯데보다 훨씬커지면서 상황이 꼬여버렸다. 그리고 신동빈의 부회장 승진 당시 70대 후반이었던 신격호 회장도 100살까지 장수하면서 총괄회장 같은 자리를 만들어 스스로 오르게 된다. 게다가 지분구조를 제대로 정리조차 안 해서 꼬인게 많았다.[46] 1994년 와세다대학교에서 명예법학박사를 받았다. 물론 그 외에도 미국, 러시아, 프랑스, 대만 등 각종 지역 대학에서 문학, 정치학, 철학, 인문학, 법학 명예학위를 받았다.#[47] 여담으로 일본롯데는 한국롯데에 비하면 중견기업 정도로, 지분구조와는 별개로 롯데의 매출 본진은 한국이다. 2010년대 기준 양쪽의 매출은 20배 이상 차이가 난다. 참고로 일본에서 성공한거로만 치면 신격호 회장의 롯데보단 손정의 회장의 소프트뱅크가 훨씬 더 성공했다. 참고로 손정의 회장은 1990년 일본으로 귀화하긴 했지만, 이전에도 사업가로 꽤 이름을 날리고 있었다.[48] "기업 경영자는 업적이 모든 것을 말한다. 경영자의 사생활을 일부러 공개하는 것은 쓸데없다. 회사 PR엔 돈을 아끼지 않지만 경영자 자체를 PR하는 것에는 의문을 갖고 있다. 업적이 좋을 땐 자기 PR을 관대하게 봐줄지 모르겠으나 반대의 상황이면 오히려 상품 이미지에 악영향을 준다."[49] 롯데측은 이를 두고 "한두 사람의 공이 아닌 조직 전체가 만들어낸 힘이 바탕이 됐기 때문"이라고 포장설명한다.[50] 이는 그의 스타일에 더불어, 한일 양국에서 활동한 기업가란 미묘한 특성도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보인다. 실제 그는 롯데의 정체성을 묻는 말에 한일 반반이라고 하며, 롯데가 한국에서 일본 기업으로 취급받아 이미지가 나빠지진 않는지 꽤나 궁금해했던 것으로 보인다.[51] 1990년대 이전까지 공개된 사진에선 입을 굳게 다물었으며, 예외적으로 2009년 발간된 <롯데쇼핑 30년사>에선 그래도 근래 찍힌 사진을 썼다.[52]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53] 여기에서도 학력과 경력이 더 우수한 동생 신동빈을 이미 후계자로 미리 정한 것으로 보이는 대목이다. 2000년 3월 작성한 유언장에서도 신동빈을 후계자로 한 것이 드러났다.[54] 애초에 이전에 '명예회장'이라는 직함을 거부하고 '총괄회장'을 맡았던 것 역시 끝까지 경영을 직접 하겠다는 신격호의 현역 의지 때문이었다 #[55] 야마사키 토요코의 유명 소설 화려한 일족을 패러디한 것이다.[56] 신격호의 5촌 조카. 신동주, 신동빈의 6촌 형이다.[57] 다만 성년후견이 아니라 한정후견이라서 경영 같은 중대한 결정만 못 할 뿐이지 일상적인 의사결정은 가능한 모양이다.[58] 세는나이로는 100살에 사망했다.[59] 이 선영에는 신격호 회장의 부친 신진수 씨의 묘소도 있는데 1999년 유해 도굴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유해 도굴 사건에 대한 현장검증 때 신준호 푸르밀 회장의 장남인 신동학이 찾아와 도굴범을 폭행하기도 했다.[60] 1세대 재벌 총수로 분류되는 인물은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주, 구인회 LG그룹 창업주, 최종건 SK그룹 창업주-최종현 SK그룹 2대 회장 형제 등이 있다. (물론 더 이전도 있긴 하지만, 이쪽들은 또 친일 경력이랑 연관이 되는 경우가 많아서 묘하다. 물론 허만정, 유일한 등처럼 모범사례도 있다.) 1907년 생으로 가장 나이가 많았던 구인회 회장이 1960년대 말에 가장 먼저 별세했고 최종건 회장이 1970년대에, 이병철 회장이 1980년대에, 최종현 회장은 1990년대에, 정주영 회장은 2000년대에 별세했다.[61] 같은 패전국인 독일의 작품이라는 점도 한몫 했다고 한다.[62] 시카고 컵스 구단을 소유했던 것으로 유명하다.[63] 과거 언론에서는 첩 서미경 씨를 신격호 회장의 샤롯데라 많이 불렀다.[64] 일본에 간 조선인들은 힘든 현실로 인해 소설을 읽고 자신이 직접 쓰고 싶다는 마음에 문학가를 동경하는 경우도 있었다.[65] 최동원 90만원 사건이나 강병철 감독이 이희수 코치의 계약금을 언급한 이른바 '과자값 사건'이나 이대호의 일본 진출 이전 시절 연봉과 관련된 구단과의 분쟁 등이 대표적으로 드러난 사건들이다.[66] 실업 시절 롯데 자이언트는 오늘날 롯데 자이언츠의 모태 역할을 했다. 만약 신격호가 한국에서 실업야구단을 창단하지 않았다면 자이언츠 프로야구단은 없었을 수 있었다는 해석도 있다.[67] 다만 이는 세간의 낭설도 많다. 대표적인 케이스가 현대그룹 정주영 회장인데, 9시 뉴스를 본 직후 잠에 들어서 새벽 4시쯤에 일어난다고 하지만 이 경우만 따져도 6시간 이상은 잔다는 소리고, 최불암이 정주영에게 직접 "4시간만 잔다는 기사가 있던데 사실입니까?"라고 물어보니 정주영 왈 "이봐요. 나는 기운이 매우 센 사람인데도 8시간 안자면 일을 못해요. 앞으로 잠 적게 자고 일한다는 놈 있으면 병자 아니면 사기꾼이니까 그런 사람이랑 장사하면 안돼"라고 발언했다고 한다.[68] 물론 수익도 나누는 공동사업이긴 했다.[69] 다만 잔치가 열린 마을 사람들 중에선, 수몰된 마을 사람들만 초청하지 말고 우리도 초청 좀 해주지 하는 볼멘소리도 있었던 모양이다.[70] 아마 조상연을 가리키는 것일 수도 있다. 조치훈이 개명하기 전의 이름이 바로 조풍연.[71] 다만 현재는 큰 규모는 아니더라도 호텔롯데 산하 롯데의료재단에서 성남시 소재의 보바스기념병원과 용인시 소재의 보바스어린이의원을 인수하여 운영하고 있다. 하지만 병원을 인수한 시기가 2017년으로 다른 재벌가의 병원들과 비교하면 상당히 늦은 시점이다.[72] 사실 상기되어있듯 정식혼이 아니라 사실혼이었다.[73] 시게미츠 하츠코의 성 시게미츠는 다케모리 하츠코가 결혼하면서 남편인 신격호의 시게미츠 성을 따라쓴거다. 이에 대해 친가쪽이 아니라 외가쪽이라 성이 다른거 아니냐는 의문을 제기할 수 있지만, 후술되어있듯 양쪽 다 관계를 부정했다.[74] 한국으로 치면 외교부장관.[75] 근데 이게 설령 사실이라 치더라도, 삼촌과 조카는 별개의 인격체긴 하다. 시게미쓰 마모루도 1957년 사망했다.[76] 다만 작가가 직접적으로 밝힌 게 아니라, 건강을 이유로 언론 인터뷰를 사양해 조갑제닷컴을 통해 간접적으로 밝힌거긴 하다.[77] 당시 신(辛)씨들이 많이 시게미츠(重光)로 개명했는데, 중광(重光)으로 성씨를 바꾼 가장 큰 사유는 바로 고갑자에서 찾아볼 수 있다. 10간 중 하나인 辛에 대응하는 글자가 바로 중광(重光)이기 때문이다.[78] 해당 책이 발간되자 신격호 본인은 롯데그룹 홍보담당 임원들을 질책해 책을 전량 수거토록 해 오늘날엔 레어템이 됐으며, 1999년 선친 묘소 도굴사건 당시 범인이 해당 책을 읽고 범행에 참고한 게 알려져 화제가 되기도 했다.[79] 일본 국적자로, 남편도 시인인 일본인이라고 한다.[80] 신춘호 롯데공업 사장이 1960년대 라면사업에 뛰어들자 신격호 회장이 회사 말아먹을 짓이라며 반대해서 둘 사이가 완전 벌어졌다고 한다. 이후 롯데라면으로 성공해서 회사 이름을 농심으로 바꾸고 독립했으며 그 이후로는 아버지 제사도 따로 지내는 등, 이제는 완전히 남남으로 생각했을 정도의 사이고 신격호 회장이 별세하고 나서도 신춘호 회장은 신격호 회장의 영결식에도 참석하지 않아 죽어서도 사이가 좋아질 수 없게 되었다.[81] 신격호와 1990년대 부동산 소유권 분쟁으로 재판까지 갔으나 패하자, 롯데우유를 가지고 독립했다. 이후 푸르밀로 사명을 변경했다. 어째 몇몇 형제들과는 사이가 영 좋지 않았던 모양. 그래도 여동생들은 예뻐했다는거 보면 그나마 잘 지낸 모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