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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형/존폐 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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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사형제 존폐 논란
2.1. 사형제 관련 단체의 입장
3. 사형제 존속 관련 논거
3.1. 비용 문제3.2. 감정적인 이유3.3. 위하력이 강하다(범죄 억제력)3.4. 신중한 사형 선고3.5. 오판의 가능성에 대한 검토3.6. 집행인의 양심 문제3.7. 국민의 법 감정에 부합3.8. 헌법이 사형을 전제하고 있다
3.8.1. 헌법재판소의 합헌 결정
3.9. 죽음이라는 대체 불가능한 형벌3.10. 기타
4. 사형제 폐지 관련 논거
4.1. 흉악범에게 온정적인 처사라는 반론4.2. '종신형'이라는 대안의 존재4.3. 국가 형벌권의 한계 문제4.4. 생명권은 본질적인 기본권이다
4.4.1. 살인범의 생명이 보호되는 것은 모순인가?
4.5. 갱생과 교화의 부정4.6. 기대보다 낮은 위하력
4.6.1. 야수화
4.7. 오판의 가능성과 처형 후 불가역성
4.7.1. '현행범은 범인임이 확실하니 사형시켜도 되지 않느냐?'4.7.2. 진상 규명 불가능
4.8.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 제도4.9. 사람의 생명을 빼앗는다는 사람의 거부감4.10. 국가형벌권의 사유화 방지 문제4.11. 국민정서법 문제4.12. 형벌 무용론 문제4.13. 사형수와 세금 사용 문제4.14. 사형 집행의 형평성 문제4.15. 존폐는 결국 입법의 영역이다4.16. 범죄 발생에 대한 국가 및 사회의 책임
5. 기타 의견
5.1. 가석방 없는 종신형 도입5.2. 전범 등 아주 특수한 경우의 사형제5.3. 종교적 관점에서의 사형제도에 대한 비판5.4. 1심에서는 사형을 선고하지 않는 관점5.5. 대한민국이 처한 특수성에 기반한 논거5.6. 가중처벌로서의 사형5.7. 누범에 대한 사형
6. 참고 영상

1. 개요

사형이 존재하는 모든 국가에서는 사형제 폐지 여론이 존재하며, 반대로 사형을 폐지한 국가에서는 사형제 부활의 여론이 존재한다. 한국도 사형 제도에 대한 존치 의견과 폐지 의견이 대립하고 있다.

현대 대한민국에서는 사형 제도가 법정형으로서는 존재하나, 1998년 국민의 정부 출범 이후로 [age(1998-01-01)]년째 대한민국에서 사형이 집행되는 일은 단 1건도 없고, 국제적으로는 '실질적 사형 폐지국'으로 분류되어 있다.

2. 사형제 존폐 논란

"종요는 사형에 관한 조항을 가볍게 하고자 합니다. 그렇게 되면 월형이 늘어나게 되니, 이는 불구자를 일으켜서 내시로 삼고, 시체를 살려서 사람으로 만드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신의 어리석은 생각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대체로 오형은 과율에 기록된 것입니다. 사형을 감하는 것을 일등의 법으로 삼게 되면서 죽이지 않고 감형을 하게 된 것입니다. 이미 오래전부터 시행되었습니다만, 도끼 모양을 한 형구로 육형을 가한 후에 죄에 따라서 처벌을 하게 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습니다. 전시대에 어진 사람은 육형의 참혹함을 차마 보지 못해 폐지하고 사용을 하지 않았습니다. 사용하지 않게 된 지는 이미 수백 년이나 지났습니다. 지금 다시 시행하게 되면, 많은 백성들의 눈에 감형에 대한 조항이 오히려 제대로 인식되지 못할까 두렵습니다. 육형에 대한 소문은 이미 도적들에게나 널리 퍼져 있는 것이지, 옛날 사람들로부터 초래된 것은 아닙니다. 지금 종요가 사죄를 감해주고자 하는 것은 사형을 감하여 머리카락을 깎는 곤형이나 발을 바르는 월형으로 대신하자는 주장입니다. 죄를 감해주자는 의견을 싫어하는 이유는 시간이 지나면 오히려 범죄가 증가할 우려가 있기 때문입니다."('繇' 欲 輕減 大辟之條 以增益 刖刑之數 此 卽 起偃爲豎 化屍爲人矣. 然 臣之愚 猶有未合微異之意. 夫 五刑之屬 著在科律 自有減 死一等之法 不死 卽爲減. 施行已久 不待 遠假斧 鑿於彼肉刑 然後 有罪次也. 前世仁者 不忍 肉刑之慘酷 是以廢而不用. 不用已來 歷年數百. 今復行之 恐 所減之文 未彰於 萬民之目 而 肉刑之問 已宣於寇讎之耳 非所以來遠人也. 今 可按 '繇' 所欲 輕之死罪 使減死之髠·刖. 嫌其輕者 可倍其居作之歲數.")

이 말을 들고 황궁에 있던 모든 대신들은 모두 왕랑이 맞다고 여겼으나 조조는 아직 오와 촉이 평정되지 않았으므로 다시 불문에 부쳤다.(議者 百餘人 與'朗' 同者多, 帝 以吳·蜀未平 且寢.)
삼국지 Vol. 13』, 「왕랑전」

무려 1800년 전에 벌어졌던 사형제 폐지론과 반대론. 당시에도 치열한 논쟁이 벌어졌음을 다양하게 알 수 있다.
지난 2월 한국법제연구원이 발표한 ‘2015 국민 법의식 조사’에 따르면 ‘사형제 찬성’은 65.2%, ‘사형제 반대’는 34.2%로 두 배 가까운 차이를 보였다.#

이 사형제 존폐 논란에서 중요한 점은 사형을 법정형으로 규정할 것인가, 또는 집행까지 할 것인가에 따라 논쟁이 달라질 수 있는데 실질적으로 대한민국의 경우 1997년 12월 이후 사형을 집행하지 않고 있고, 실질적 사형 폐지 국가로 분류되는 만큼, 사실상 사형이라는 법정형을 규정할 것인가 아닌가로 볼 수 있다.

2.1. 사형제 관련 단체의 입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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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에서 사형은 대한민국 헌법 제110조에 의하여 간접적으로 그 존재가 인정되며, 이 조항을 근거로 헌법재판소1996년2010년 2차례에 걸쳐 사형제의 존재가 합헌이라고 판단했다. 특히 보성 어부 살인 사건을 심리하던 재판부가 낸 위헌법률심판의 판결인 헌법재판소 2010. 2. 25. 선고 2008헌가23 전원재판부에는 대한민국 헌법 제10조가 보장하는 인간의 존엄성, 즉 생명권과 대한민국 헌법 제110조의 사형 언급이 대치된다는 주장에 대해 고심한 흔적이 드러나는데, 결과적으로는 재판관 9명 중 5대4라는 숫자로 합헌으로 결정되었다.

2010년의 판결은 과거 정석범[1]이 낸 헌법소원이 7대 2의 압도적인 결과로 사형제 합헌 결정이 나왔던 헌법재판소 1996. 11. 28. 선고 95헌바1 전원재판부보다는 사형제 폐지론이 커진 것이다. 현재는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 사형제도폐지소위원회가 존속살해 강제추행 및 공중밀집장소추행의 공소사실로 공소제기되어 제1심 법원에서 사형을 구형받고 무기징역형 등을 선고받은 피고인[2]의 동의를 받아 낸 헌법소원이 2019헌바59로 접수되어 사형제에 대한 위헌소원이 진행중에 있다. 과거에는 헌법재판소 1993. 11. 25. 선고 89헌마36 전원재판부헌법재판소 1994. 12. 29. 선고 90헌바13 전원재판부에서 공개변론이 열렸다. 그 당시 공개변론(1992년 5월 12일)이 담긴 뉴스2009년 6월 11일 열린 공개변론을 담은 기사, 이번 공개변론 기사

이와 같은 추세가 지속된다면 미래에는 사형이 사라질 수도 있다는 견해가 있으나, 현재까지는 위 대한민국 헌법 제110조의 법적근거로 사형을 선고하는 것에 문제가 없다. 참고로 그 날 집행할 사형수가 2명 이상일 때는 사형장과 가까운 거실의 사형수부터 사형을 집행한다. 다만 1996년 합헌 의견을 낸 다수의 재판관 역시 “사형이 가진 위하(힘으로 으르고 협박함)에 의한 범죄예방의 필요성이 거의 없게 된다거나 국민의 법감정이 그렇다고 인식하는 시기에 이르게 되면 사형은 곧바로 폐지돼야 한다”고 한 점 등 법조계에서는 사형제 폐지론이 우세하다.

2022년 7월 14일에는 헌법재판소 대심판정에서 14시에 공개변론이 열렸다. 공개변론은 링크 참고 공개변론 이후 인터뷰 참고.
헌법재판소법 제47조
① 법률의 위헌결정은 법원과 그 밖의 국가기관 및 지방자치단체를 기속(羈束)한다.
② 위헌으로 결정된 법률 또는 법률의 조항은 그 결정이 있는 날부터 효력을 상실한다.
③ 제2항에도 불구하고 형벌에 관한 법률 또는 법률의 조항은 소급하여 그 효력을 상실한다. 다만, 해당 법률 또는 법률의 조항에 대하여 종전에 합헌으로 결정한 사건이 있는 경우에는 그 결정이 있는 날의 다음 날로 소급하여 효력을 상실한다.
만약 2019헌바59에서 사형이 헌법불합치 결정을 받으면 종전 선고였던 헌법재판소 2010. 2. 25. 선고 2008헌가23 전원재판부 다음날인 2010년 2월 26일 이후로 선고된 사형수들은 모두 사형 집행 대상에서 제외된다. 즉 2010년 3월 25일 사형이 확정된 영암 연쇄살인 사건의 이향열과 2010년 6월 10일 사형이 확정된 보성 어부 살인 사건오종근, 2015년 8월 27일 사형이 선고된 대구 중년부부 살인 사건장재진은 사형 집행 대상에서 제외된다는 이야기. 군형법에 의해 사형이 확정된 강화군 해병대 동료 총격 사건의 김민찬 상병이나 제22보병사단 총기난사 사건의 임도빈 병장 또한 마찬가지이다. 사형/국가별 현황/대한민국/사형수 참고.

국회에서 사형제 폐지 법안은 1999년 15대 국회에서 처음 발의됐고 16·17대에서는 과반수의 의원이 법안에 서명까지 했다. 하지만 법제사법위원회에서 논의조차 되지 못했다. 그나마도 상임위 법안소위에서 논의가 이뤄진 것은 17대와 18대뿐이다. 19대 국회에서는 법제사법위원회 차원에서 공청회까지 개최했지만 더 이상의 진전이 없었다. 20대와 21대 국회에서도 마찬가지.

인권단체와 종교단체들은 사형제를 폐지해야 한다는 기존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인권 선진국으로 나가기 위해서는 사형 제도가 반드시 폐지돼야 한다. 국가는 인권의 가장 기본권인 생명권을 직접 침해해서는 안 된다. 사형제 폐지는 사형수의 목숨을 살리자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존엄성과 인권을 존중하자는 것이다”라고 강조한다. 사형제 폐지론자들은 “사형의 범죄 억제효과가 불확실한 데다 오판 가능성이 있으니 감형이 불가능한 ‘절대적 종신형’으로 사형을 대신하자”고 한다. 군사정부 시절 사법살인으로 인한 폐해를 막자는 뜻도 포함됐다.천주교주교회의 '사형제 폐지' 입법 청원, 사형수 33명을 만난 법학자는 흉악범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게 과연 사형을 통한 죽음인지 의문이라고 밝혔다.JTBC뉴스사형수 33명을 만난 법학자..."그들이 죽음보다 두려워하는 건"

과거 7차례의 사형집행 유예(모라토리엄) 결의안 표결에 모두 기권했던 한국정부는 2020년 12월 16일 유엔 총회에서 채택된 사형집행 유예(모라토리엄) 결의안에 최초로 찬성했다. 다만 2021년 2월 법무부가 헌법재판소에 사형제도를 존치해야 한다는 의견서를 냈다. 국제엠네스티 한국지부

3. 사형제 존속 관련 논거

사형 집행을 안 하니까 흉악범이 너무 날뛰어요. 유영철강호순 이런 엽기적인 연쇄살인이 계속 나고... 또 이 사람들이 죽인 피해자들은 어떡하고... 교도소에서 국가에서 멀쩡히 앉아서 밥 먹여 주고 하는 게 옳습니까?
홍준표, 19대 대통령 선거 후보 토론 中
(가) 사형은 일반국민에 대한 심리적 위하를 통하여 범죄의 발생을 예방하며 극악한 범죄에 대한 정당한 응보를 통하여 정의를 실현하고, 당해 범죄인의 재범 가능성을 영구히 차단함으로써 사회를 방어하려는 것으로 그 입법목적은 정당하고, 가장 무거운 형벌인 사형은 입법목적의 달성을 위한 적합한 수단이다.
(나) 사형은 무기징역형이나 가석방이 불가능한 종신형보다도 범죄자에 대한 법익침해의 정도가 큰 형벌로서, 인간의 생존본능과 죽음에 대한 근원적인 공포까지 고려하면, 무기징역형 등 자유형보다 더 큰 위하력을 발휘함으로써 가장 강력한 범죄억지력을 가지고 있다고 보아야 하고, 극악한 범죄의 경우에는 무기징역형 등 자유형의 선고만으로는 범죄자의 책임에 미치지 못하게 될 뿐만 아니라 피해자들의 가족 및 일반국민의 정의관념에도 부합하지 못하며, 입법목적의 달성에 있어서 사형과 동일한 효과를 나타내면서도 사형보다 범죄자에 대한 법익침해 정도가 작은 다른 형벌이 명백히 존재한다고 보기 어려우므로 사형제도가 침해최소성원칙에 어긋난다고 할 수 없다. 한편, 오판가능성은 사법제도의 숙명적 한계이지 사형이라는 형벌제도 자체의 문제로 볼 수 없으며 심급제도, 재심제도 등의 제도적 장치 및 그에 대한 개선을 통하여 해결할 문제이지, 오판가능성을 이유로 사형이라는 형벌의 부과 자체가 위헌이라고 할 수는 없다.
(다) 사형제도에 의하여 달성되는 범죄예방을 통한 무고한 일반국민의 생명 보호 등 중대한 공익의 보호와 정의의 실현 및 사회방위라는 공익은 사형제도로 발생하는 극악한 범죄를 저지른 자의 생명권이라는 사익보다 결코 작다고 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다수의 인명을 잔혹하게 살해하는 등의 극악한 범죄에 대하여 한정적으로 부과되는 사형이 그 범죄의 잔혹함에 비하여 과도한 형벌이라고 볼 수 없으므로, 사형제도는 법익균형성원칙에 위배되지 아니한다.
헌재 2010. 2. 25. 2008헌가23

대부분의 찬성론자는 응보적 관점에서 사형제가 존치되어야 한다고 판단하고 있으며, 예방과 교화만이 형벌의 목적이라는 찬성론자조차 사형제를 폐지한다 해도 그에 따른 합당한 대안이 나오지 않았기에 사형제가 필요하다고 본다.

헌법재판소2008헌가23 판례에서 사형이 합헌이라고 결론 내린 바 있다.


3.1. 비용 문제

2023년 재소자 1명을 관리하기 위해 드는 연간 비용은 약 3100만원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는 재소자의 식비, 의복비, 의료비 등 직접 사용하는 금액과 교정시설, 인건비 등 간접 사용비를 합친 금액이다. 사형수는 독방 등으로 다른 재소자에 비해 관리되는 비용이 더 들어가지만, 교정본부는 대부분 항목에서 재소자별 비용을 다르게 책정하지 않는다. 사형수 연간 관리 비용은 최소 3100만원이라는 얘기다. 9급 공무원의 1년차 연봉이 2,831만 원임을 고려할 때, 사형수 수용비가 9급 공무원 연봉보다 더 많은 것이다. #

사형수 59명을 관리하기 위해 드는 연간 비용은 단순 계산 만으로 18억원이 넘어 가는 것이다.#

게다가 오원춘과 같은 무기수는 1,300여 명으로 매년 390억 원 이상이 든다.#

그렇다면 죄수들을 노역을 시켜서 생산품을 팔아서 예산으로 편입하면 되지않느냐는 주장이 있지만 모든 죄수들을 노역을 시킬 수가 없는 것도 현실이다. 가령 장애가 있다든지, 죄수의 나이가 고령자여서 현실적으로 일을 할 수 없는 경우라면 노역을 시킬 수가 없다. 따라서 만일 사형수가 장애인이거나 고령자가 된 경우 사형수를 구치소에 가둬놓고 평생 감시하든가, 특별사면이나 감경사면 등으로 석방할 수 밖에 없다.

그런데 또 석방하는 경우엔 경력단절전과, 노령의 나이, 장애 때문에 취직에 한계가 있기 때문에 정부에서 생활비를 지원해주지 않는 이상 사회에서 마땅히 할 일이 없으므로 범죄의 늪에 빠지게 되는데 그렇게 된다면 결국 피해자를 양산하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 그렇다고 이것을 예방하기 위해서 복지를 제공하자니 사면을 하지 않은 것만 못하므로 국가 입장에서는 난감한 상황인 것이다.

3.2. 감정적인 이유

인간은 합리적인 동물이 아니라, 합리화하는 동물이다.
- 로버트 하인라인
흔히 인간을 합리적인 동물이라고 말한다. 나는 평생토록 이걸 뒷받침할 만한 증거를 찾아 헤맸다.
- 버트런드 러셀

모두가 자신의 생각은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판단의 결과물이라고 생각하지만 사형제 존폐 논란이 정말 이성적인 계산으로 종결시킬 수 있는 논란이라면 이렇게 오래 논란이 지속되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는 사형제를 생각할 때 대부분 종교나 신념 같은 특정한 가치관이 있는 경우 또는 김대중 전 대통령이나 윤성여, 김신혜처럼[3] 억울하게 사형을 당할 뻔 한 적이 있다면[4] 그런 경험에, 사형을 앞두고 목을 밧줄에 거는 상상을 해보니 마치 내가 죽는 것 같아서 두려움과 분노가 일어난다면 그러한 감정에, 여자아이를 수차례 강간하고 갈기갈기 토막 내서 불태운 범죄자의 행각을 들으니 마치 내 가족이 당한 것 같아서 화가 난다면 그런 감정에 영향을 받아서 이성적이라고 주장하는 사고를 하게 된다. 인간의 절반은 감성이며 이것을 완전히 부정하고는 그 어떤 생각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안다.

사람을 죽이지 말라는 주장을 하는 사람이 왜 그런 주장을 하는 이유를 파고들어 보자. 만약 인간을 창조한 전지전능한 신이 존재하고 그 신이 직접 사람은 어떠한 경우에 있어서도 사람을 죽일 수 없다라고 명령하였다면 사형제조차 신의 명령에 반하는 행동이므로 사형제에 대답은 간단명료하겠지만 신의 존재가 증명되지 않은 상황에서 뜬금없이 신을 명분으로 사형제 폐지를 주장할 수만은 없으므로 지금까지 알려진 과학적인 지식을 바탕으로 사람을 죽이면 안 된다는 우리의 합의된 상식에 대해 생각해 보자.

인간은 진화를 거듭하면서 같은 종인 인간과 협력하고 공동체를 이루며 잘 살기 위해 다른 사람을 죽이는 행위에 거부감을 느끼도록 진화했다. 그 방식은 다른 사람이 죽는 것을 생각했을 때 마치 내가 죽는 것처럼 뇌가 공포를 느끼는 일종의 공감 행위이다. 그래서 사이코패스들은 이러한 공감이 없어서 사람을 죽이고도 괴로워하지 않는다 이야기한다. 결국, 어느 사형제 폐지론자의 "감정으로 사람을 죽이지 마세요"라는 말도 일종의 공감 행위, 즉 감정이라는 뜻이다. '인간의 생명권은 가장 중요한 절대적 가치이다'와 같은 수많은 멋지고 이성적이어 보이는 용어들로 포장했지만, 그 말의 원인을 추적하면 결국 살인자의 죽음에 공감한다는 의미다. 고로 사형반대 주장에도 그 사람의 공감하는 감정이 강하게 개입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감정배제론을 주장한 사람의 뜻을 우리가 전혀 모르는 것은 아니다. 흔하게 '감정적으로 하지 말아라'고 하는 말에 보통 함의된 뉘앙스는, 우리의 보편적이고 정상적인 감정을 완전히 제거하고 살라는 말이 아니라, 우리 본성을 완전히 마비시킬 정도의 공포나 분노 같은 순간적인 감정에 휩싸여서 행동하지 말고 사려깊고 본성에 부합하는 감정에 맞게 하라는 의미이다. 그럼 이제 우리는 자칫 위험할 수도 있는 감정과 정상적인 감정을 구분할 줄 안다. 그럼 다시 생각해보자.

피해자의 유가족을 애처롭게 생각하고, 잔인하게 강간당하고 살해당하는 장면을 내 가족의 일처럼 상상하는 것이 과연 잘못되었을까? 사형수의 죽음에 대한 동정심이나, 또는 범행 동기에 대한 공감이 과연 이런 감정보다 도덕적으로 정당하다고 볼 수 있을까? 만일 종교, 신념, 이성으로 이 논쟁을 중단할 수 없어서 피해자를 위한 감정과 가해자를 위한 감정 사이에서 결정해야만 사형찬반을 결정할 수 있다면, 찬성론자들은 피해자를 위한 감정을 선택하겠다는 것이다.

물론 찬성론자의 공감, 연민의 감정은 피해자를 위한 것이여야 되지, 절대 대중들의 가학심 투사가 되어서는 안된다. 사람들이 흉악범죄에 관심을 가지는 까닭에서는 절대 순수한 정의감뿐만이 아니라 관심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경향 또한 존재한다. 연구 결과에 따르면 극단적인 범죄는 실제적인 위험과 관계없이 흥미의 대상이 됨을 제시한다. 만약 이와 같은 경향으로 범죄를 바라보고도 피해자들을 위한 동정심이나 그들을 구제할 수 있는 방안에 집중하지 않으면, 이는 불순한 마음이라고밖에 볼 수 없다. 마찬가지로 다윈상에 나오는 사례를 보고 웃는 것도 이와 별 반 다를게 없다.

3.3. 위하력이 강하다(범죄 억제력)

일벌백계 하나(一)를 벌(罰)하여 백(百) 명을 경계(戒)한다
고사성어

형벌은 범죄자들에게 공포심을 심어주어 강력범죄를 예방한다. 이를 위하력이라 하며, 사형은 가장 강력한 위하력을 가진다. 게다가 실제 사형을 존치하는 선진국들은 전세계에서 가장 낮은 살인율 수치를 보인다. 대표적인 국가가 바로 싱가포르일본이다.

지표상으로 확인 가능한데 살인율(인구 10만 명당 발생하는 살인 횟수)에서 양국은 각각 0.1~0.2명, 0.2~0.3명대로 세계 최하위이다.# 사형 폐지국인 영프독(0.9~1.2명)은 물론 한국(0.6명)에 비해서도 유의미한 수준으로 낮다.[5] 그외에도 양국은 각종 중경범죄 지표에서 유의미하게 낮은 수치를 기록한다.

물론 범죄율에는 사형 외에도 상당히 많은 요인이 작용하기에 이러한 수치 지표를 반박할 수도 있겠지만 이는 온정주의/교화주의 측의 '엄벌주의/응보주의가 범죄율을 오히려 높인다'는 연구 결과 역시 마찬가지이다. 법 질서가 잘 잡히고 국민 소득이 높은 선진국의 경우 갱생이 불가능한 중범죄에 한해 일정 수준의 엄벌주의를 적용한 결과 살인율을 비롯한 각종 범죄율 지표에서 유의미하게 낮은 수치에 도달한 것이 싱가포르와 일본의 사례를 통해 확인된다.

또한 사형은 흉악범의 사회격리 효과로 인해서도 강력범죄 예방 효과가 있다. 모든 범죄자를 사형제의 대상으로 삼을 게 아니라 20명의 목숨을 앗아간 희대의 살인마 유영철같이 잘못이 명백하고 죄질이 나쁜 극악무도한 범죄자들에 한해서만이라도 이런 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의견도 이와 맥락을 같이 한다. 한편 한국의 사례로, 2012년 8월 20일 발생한 서울 광진구 30대 주부 살인사건의 범인 서진환전자발찌를 차고 있었음에도 "교도소 다시 가면 된다"는 심정으로 범행을 저질렀다고 진술해 단순히 징역형을 살게 하는 것만으로 재범률을 낮추고 범죄자를 교화할 수 있는가에 대한 의문이 생겼다. 그는 1990년부터 여성을 성폭행하여 7년 6개월 형을 선고받고 7년간 전자발찌 착용 명령을 받은 바 있다. 그는 이 외에도 성폭행 전과가 2개나 더 있었다고 한다. 이렇게 징역형을 두려워하지 않는 흉악범을 격리하는 수단으로 사형은 가장 효과적인 처벌이 될 수 있다.

범죄자 중 일부는 사형만을 두려워하여 사형만으로 예방할 수 있었을 범죄가 사형이 없을 경우에는 예방되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 극히 일부일지라도 이런 사례는 충분히 있을 수 있으며 범죄 동기가 원한에 의한 살인이든, 묻지마식 살인이든 간에 이러한 경우에는 오로지 사형만이 그 범죄를 미리 예방할 수 있는 방책이 된다.

1970년대에 미국의 학자 엘리치에 따르면, 사형 한 건당 평균적으로 8건의 살인 사건을 예방할 수 있었다고 한다.#

또한 국내에서 흉악한 사이코패스 범죄자로 꼽히는 사람중 한명인 강호순같은 경우에도, 사형시설이 없는 교도소에서는 교도관들의 지시에 불응을 하고 난동을 부렸으나, 2023년 법무부장관의 명령으로 사형시설이 있는 시설로 옮긴후에는 갑자기 태도가 돌변하여 조용히 지낸다고 한다.# 다시 말해, 평생 감옥에 살기로 되어있는 흉악한 사이코패스 범죄자 마저도 죽음을 분명히 두려워 할수도 있다는 것이다.

3.4. 신중한 사형 선고

한국 형법 제51조는 '형을 정함에 있어서는 다음 사항을 참작하여야 한다. 1. 범인의 연령, 성행, 지능과 환경 2. 피해자에 대한 관계 3. 범행의 동기, 수단과 결과 4. 범행 후의 정황.'라고 규정하고 있다. 구체적인 형사소송절차가 어떻게 진행되는지는 소송에 관여하는 자의 성실성에 좌우되는 문제이지만, 적어도 법령상으로는 범인의 연령, 성행, 지능과 함께 그의 성장환경과 생활환경 등에 대하여 반드시 고려할 것을 명하고 있다.

형사소송을 담당하는 법관과 검사들도 사형을 선고하거나 구형하는 기준은 사형이 가지는 의미를 충분히 이해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피해자 및 피해자 유족들에게 도저히 뉘우치는 빚을 인정할 수 없는 경우에 한정하여 사형을 구형하고 선고한다. 그러므로 흉악범을 만들어낸 사회가 그 책임을 다하지 않고, 사형수 개인에게만 책임을 전가한다는 식의 비난은 옳지 않다. 또한 경제적, 사회적 문제도 흉악범 발생의 원인 중 하나일 수 있지만 유사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 모두가 흉악범으로 전락하는 것이 아니라면 생계형 범죄나 정신병에 걸릴 수는 있어도, 쾌락살인, 묻지마 살인과 같이 흉악범 개인이 자신의 삶을 잘못 경영한 책임은 결코 가볍지 않다.

'죽일 생각은 없었는데 살인을 저질렀을 때' 과실치사나 상해치사, 폭행치사는 법정형으로 사형은커녕 무기징역조차 규정되어 있지 않다. 특가법 상의 상해치사(위험운전치사, 운전자 폭행치사, 교통사고도주치사)도 최대가 무기징역이고 실제로는 길어야 10년 정도다. '순간적인 충동으로 살인 고의가 발생하여 죽인 경우' 즉 격정 살인의 경우에는 피해자가 과다하게 많거나 범행수법이 지나치게 잔인한 경우가 아니라면 양형기준 범위를 보더라도 웬만해선 사형은 선고되지 않는다.

결국 사형 찬성론자들은 살인을 했다고 해서 모두 사형시켜야 한다는 주장을 하는 것이 아니라, 묻지마 살인범같은 영구적인 사회격리가 필요한 흉악범들은 사형시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사형조차도 두려워하지 않는 이들은 형벌부과의 목적인 범죄인 교화가 애초에 불가능한 존재다. 사형제 존치론 측에서도 모든 사형 집행을 활성화하자고 주장하는 경우는 소수이며, 이렇게 불가피하게 사형을 집행해야 하는 경우가 있을 수도 있으니, 폐지하지는 말자는 것이 주류다. 절대 중국처럼 갑을관계 살해나 밀렵, 마약범죄 등의 중범죄에 대해서 전부 사형시키자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게다가 현재 사형을 실시하는 일본조차 나가야마 기준을 적용한다.

3.5. 오판의 가능성에 대한 검토

오판가능성은 사법제도의 숙명적 한계이지 사형이라는 형벌제도 자체의 문제로 볼 수 없으며 심급제도, 재심제도 등의 제도적 장치 및 그에 대한 개선을 통하여 해결할 문제이지, 오판가능성을 이유로 사형이라는 형벌의 부과 자체가 위헌이라고 할 수는 없다.
헌법재판소, 2008헌가23

판결의 오판으로 인한 부작용을 지적하는 목소리가 크지만, 어차피 인간이 창조한 모든 문물은 완벽할 수 없다. 그럴 바에야 완벽함을 추구하되 당대의 모든 지식과 지혜를 모아 가능한 한도 내에서 사실관계를 파악하고 최대한 공정하게 재판을 이끌어나가려 노력해야 하는 문제이지,[6] 단순히 오판이 났다는 이유가 사형제 폐지의 논거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오판의 예시로 흔히 거론되는 인혁당 사건에 대해 사형제 찬성론자들은 인혁당 사건의 본질은 사형제 그 자체가 아니라 당시 사법부와 행정부의 권력 남용으로 무고한 사람들을 희생자로 몰아간 시대적 상황에 있다고 보고 있다. 러시아의 사례를 참고할 만한데, 러시아는 실질적인 사형 모라토리엄 국가임에도 불구하고 방사능 홍차로 대표되는 '정치 권력의 개입'의 의심되는 의문사들이 일어나는 것이 현실이다. 존치론자의 입장에서 사법살인은 사형제 그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입법부/사법부/행정부의 권력 남용의 문제이다. 이들이 타락했다면 러시아처럼 사형제 없이도 암살을 통한 사실상의 국가 주도 살인이 난무하는 것이다.[7] 정 반대의 예를 들자면, 매카시즘 시기 미국에선 매카시즘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억울한 고통을 받았지만 매카시즘 때문에 누명을 쓰고 사형당한 사람은 없었다. 미국을 (주마다 다르지만) 사형제가 있는 나라라고 친다면, 그런 매카시즘의 광기에도 불구하고 최소한의 민주국가로서의 개념이 남아 있어 매카시즘을 통한 사법살인은 일어나지 않은 것이다.

소위 사법살인으로 일컬어지는 거의 모든 사건은 수사기관과 사법기관의 실수에 기인한 것이라기보다는[8] 사형수의 범죄와 관련 없는 별개의, 예컨대 정치적인 목적을 추구하기 위해 악의적으로 조작된 사건들이거나, 수사 기관/사법 기관의 실수가 개입했다 하더라도 실수 그 자체가 크게 작용했다기보다는 그 실수를 은폐 또는 부인하기 위하여 악의적으로 조작된 사건들이다. 순수하게 오로지 인간의 실수로 인하여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불러왔다고 평가되는 경우도 드물거니와, 전혀 악의가 개입되지 않은 경우가 있다 한들 그런 경우는 인력만으로는 어쩔 수 없다. 더구나 과학수사가 나날이 발전하고 있는 오늘날에 오판 가능성은 점점 줄어들고 있는 반면, 범죄의 흉폭성을 억제할 방법은 별 차이가 없는 것이 현실이다.[9] 또한, 오늘날의 사형 선고는 연간 1건 미만으로 그 수가 극히 적다.[10] 사형수가 평균적으로 3.4명을 죽이는 등 흉악범죄자이며, 자신의 죄를 인정했기 때문에 군사정권 같은 구시대와 달리 오판의 가능성은 극히 낮다.

물론 옛날보다 현대의 범죄가 더욱 엽기적으로 변질된 것이 문제라고 보는 것은 잘못이다. 옛날에는 큰 문제가 아니었던 행동도 현재에 들어서는 범죄로 지정받는 경우가 늘어나고, 예전에는 미처 보도되지 못했던 범죄들도 자세히 알려지게 되면서, 현대의 범죄가 예전보다 흉포해지는 듯한 착각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오히려 지금은 범죄에 대한 관측방법만 늘어났을 뿐 실질적인 범죄율 자체는 생산적인 국가일수록 감소하거나 주변의 시선 때문에 소극적으로 변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올바른 분석이다.

3.6. 집행인의 양심 문제

사형을 선고하는 법관이나 이를 집행하여야 하는 교도관 등은 인간의 생명을 박탈하는 사형을 선고하거나 집행하는 과정에서 인간으로서의 자책감을 가지게 될 여지가 있다고 할 것이나, 이는 사형제도가 본래 목적한 바가 아니고 사형의 적용 및 집행이라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게 되는 부수적인 결과일 뿐이다. 물론 사형을 직접 집행하는 교도관의 자책감 등을 최소화할 수 있는 사형집행방법의 개발 등은 필요하다고 할 것이지만,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사형제도는 무고한 일반국민의 생명 보호 등 극히 중대한 공익을 보호하기 위한 것으로서 생명권 제한에 있어서의 헌법적 한계를 일탈하였다고 할 수 없는 이상, 이러한 공익을 보호하여야 할 공적 지위에 있는 법관 및 교도관 등은 다른 형벌의 적용, 집행과 마찬가지로 사형의 적용, 집행을 수인할 의무가 있다고 할 것이다. 따라서 법관 및 교도관 등이 인간적 자책감을 가질 수 있다는 이유만으로 사형제도가 법관 및 교도관 등을 공익 달성을 위한 도구로서만 취급하여 그들의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침해하는 위헌적인 형벌제도라고 할 수는 없다.
헌법재판소, 2008헌가23
집행인의 양심상의 문제에 대해서도, 전쟁대비집단 군대의 구성원인 군인을 생각해보자. 사형 집행인이나 교전 중인 병사나 공무를 집행한다는 점에서 동일하다. 대한민국 헌법 제103조는 '법관은 헌법과 법률에 의하여 그 양심에 따라 독립하여 심판한다.'라고 규정하고 있는데, 양심은 주관적 양심과 객관적 양심으로 구분된다. 헌법에서 말하고 있는 양심이란 법관 개인의 주관적 양심이 아니라 법관으로서 가져야 할 객관적 양심을 의미한다.

국가교정공무원인 사형 집행인은 법관이 아니지만, 공직자로서 그의 개인적, 주관적 양심에 상관없이 적법한 절차를 거쳐 사형이 선고된 범죄자의 사형 집행을 거부해서는 안 된다. 그렇지 않다고 주장한다면, 헌법과 법률에 의하여 정당성이 담보된 재판의 효력을 근거 없이 거부하는 것이 되고, 형법직무유기가 된다. 사실 이러한 국가 책임설은 반대파들도 부정하지 않는 요소다.

사형 폐지 주장 중에는 사형 집행인도 사람을 살해하는 데에 거부감을 느끼므로 사형을 폐지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 그러나 거시적인 정책과 미시적인 관점에서의 일개 개인의 내면적인 거부감을 동일 선상에 놓고 비교한다는 것 자체가 틀린 논리이다. 사형 집행인은 교도직 공무원으로서 본인이 교도직 공무원 시험에 응시하여 합격할 때에 최소한 이러한 인지를 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으며, 이 정도는 최소한의 직업적 각오이자 책임이라고 할 수 있다. 경찰에 지원하는 자가 강도와 맞설 각오는 없다고 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단순히 거부감을 느끼는 정도라면, 인간이라면 그럴 수 있겠으나 사형 집행인이 느낄 거부감 때문에 사형제를 폐지해야 한다는 것은 사형 집행인의 감정에 호소하여 폐지 주장을 하는 것과 같다. 이는 사형 폐지론자가 주장하는 감정에 호소하는 논리적 오류에 해당한다.

또한 사형 집행인이 느낄 거부감 때문이라면, 사형 집행을 대신할 사람을 구인할 수도 있다. 한국에서 사형수의 숫자는 극히 적은 반면에 대한민국 인구는 5000만 명이다. 1년에 사형 선고받는 사람은 극히 적다고 할 수 있으며, 사형수가 연평균 10명 정도 발생한다고 가정해도 사형수 1명당 1명씩의 사형 집행을 희망하는 사람을 구하려면[11] 충분히 구할 수 있다. 아니면 매번 그때마다 구하기가 복잡하고 번거롭다면, 아예 해당 작업만 수행하는 지원자를 선발해도 될 일이다.

또한 이러한 주장이 주관적 양심, 즉 사람들의 기준에 완전히 부합하지 않는 명령을 따르라고 요구하는 것은 아니다. 비록 무저항의 사람에 대한, 정당방위가 아닌 살해인 것은 맞으나 현대 사형 제도에 경우 능지처참과 같이 잔혹한 형벌을 고수하고 있지 않으며 사형수의 고통도 그리 길지 않다. 극단적인 전시 상황에서 군인들에게 요구될 수 있는 양민학살, 고문, 인체실험과 같이 저지르는 사람의 인격을 잔혹하게 만들거나 타락시키는 행위와는 거리가 멀다. 그리고 집행인의 손에 피가 묻는 것은 맞으나, 사형을 밥 먹듯이 집행하는 독재 국가가 아닌 이상 죄질이 무겁고 흉악한 범죄자에게만 집행된다. 이러한 행위가 사람의 영혼을 손상시킬 정도로 악한 행위인지는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3.7. 국민의 법 감정에 부합

사형제로써 본보기로 삼는다고 해서 사형 집행 과정을 생중계하자는 것이 찬성론 측의 주장은 아니다. 국민들에게는 흉악범이 잡혔고, 그에게 합당한 형벌이 부과되었으며, 적법절차에 따라 집행되었다는 사실만 알리면 족한 것이다. 이 정도로도 국민들의 사회질서의 견고함에 대한 신뢰는 유지된다. 실제로 대한민국유영철 등 흉악 범죄가 판을 침에 따라 사형 집행에 찬성하는 의견이 계속해서 우세하고, 법무부가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응답자의 64%가 '사형제 유지 및 집행'에 찬성한다고 응답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기사

이를 두고 "그래도 민주주의 국가인데 국민의 법 감정을 존중해야 하지 않겠나" 하는 의견도 있다. 물론, 정말로 이런 국민의 법 감정을 묻는 설문으로만 법을 굴려야 한다는 소리는 아니다. 정말로 국민 정서에 의한 법 집행을 그대로 법에 편입시켰다간 정말 극단적인 경우는 직장 상사나 정치인에 대한 극형 등의 법 집행도 국민 감정상 부합하므로 합법할 수 있다는 황당한 주장이 성립할 수도 있다. 심지어 최근에는 별거아닌 사건에도 사형하라는 댓글도 보이며 연예인이 연애를해도 그 상대방을 사형하라는 사람들도 있기에 실제로 적용된다면 말도 안되는 이유로 사형당하는 사람들이 매우 많아질 것 이다.[12] 실제로도 법 집행에서 국민 법 감정은 참고사항이지 절대적인 기준 같은 것은 아니다.

3.8. 헌법이 사형을 전제하고 있다

대한민국 헌법 제110조
④ 비상계엄하의 군사재판은 군인·군무원의 범죄나 군사에 관한 간첩죄의 경우와 초병·초소·유독음식물공급·포로에 관한 죄중 법률이 정한 경우에 한하여 단심으로 할 수 있다. 다만, 사형을 선고한 경우에는 그러하지 아니하다.

헌법이 스스로 사형의 존재를 전제하고 있으므로 사형은 헌법에도 부합한다. 또한, 단 한 번도 예외 없이 헌법재판소에서 사형에 대해 합헌 결정을 내렸고, 이는 헌정 사상 바뀐 적이 없는 사실이다.[13]

3.8.1. 헌법재판소의 합헌 결정

생명권 역시 일반적 법률유보의 대상이 되고 생명권에 대한 제한은 생명의 완전한 박탈을 의미한다고 할 것이므로, 사형이 최소한 동등한 가치가 있는 생명 또는 그에 못지 아니한 공공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한 불가피성이 충족되는 예외적인 경우에 적용되는 때에는 헌법 제37조 2항 단서의 규정이나 비례의 원칙에 반하지 아니하고, 또 사형은 현행 헌법이 스스로 예상하고 있는 형벌이라는 이유로 위헌이라고 볼 수 없다고 결정하였으며, 대법원도 같은 태도를 유지하고 있다.
헌법재판소 1996.11.28 95헌바1[14]

사형이 인간의 소중한 권리 중 하나인 생명권을 침해한다는 것 자체는 사실이지만, 그러한 사형을 선고받을 피고인 스스로가 다른 사람의 생명권을 침해했다면? 사형 폐지 주장은 범죄자는 사람의 생명을 침해하였어도, 범죄자 본인의 생명은 보호받아야 한다는 모순적인 결론에 이르게 된다.[15]

3.9. 죽음이라는 대체 불가능한 형벌

사형을 시행하는 것이야말로 사회로부터 영원히 격리시킬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가석방 없는 종신형으로도 격리할 수 있다고해도 흉악범임이 분명한 사형수가 사회로 나올 수 있는 여러 가능성을 굳이 남길 필요는 없다. 가장 확실한 방법이 있는데 조금이라도 불안정한 요소가 있을 수 있는 대안을 선택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사형수가 어느 날 갑자기 풀려나는 경우는 극히 없겠지만 교도소에서 모범수로 행동하든가 하면 특별사면을 받거나, 사형에서 무기징역, 무기징역에서 유기징역으로 감경사면을 받은 뒤 가석방을 통해 사회로 나올 가능성이 있다. 무기징역 항목을 참고해보면 알겠지만 해마다 수십 명이 무기징역을 받고도 이후 가석방을 받아 사회로 나오고 있다.[16] 이렇게 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인간의 본성때문이며, 사형수나 무기수라 하더라도 일말의 희망을 주어야만 수형 생활에 있어서 그들의 협조를 이끌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일부에서는 극악한 흉악범의 경우에는 심사를 통해 계속 가석방을 거부함으로써 영구적인 종신형을 유지할 수 있다고 주장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가능성만 높은 추측일 뿐이다. 왜냐면 법원에서 "가석방 없는 종신형임을 분명히 밝힌다"라고 판시했더라도 사면권은 대통령에게 있고, 또한 가석방 없는 종신형이 법령에 포함되어 있는 경우가 아니라면 이는 법령에 위반되는 판결이기 때문에 재심사유가 될 수 있고, 더 나아가 가석방 없는 종신형이 법령에 명백하게 명시되어 있지 않은 경우 이러한 판결은 대외적인 구속력이 없기 때문에 가석방의 집행기관은 이를 따를 의무가 없다.

특히 가석방은 행정기관 소관이고 선거마다 정권이 교체되는 행정기관 특성상 일괄적인 적용, 즉 이 사람은 무조건 가석방에서 제외한다는 명백한 기준을 세울 수 없기에 각각의 정부마다 가석방 기준이 제멋대로일 수밖에 없으며 얼마든지 흉악범을 특별사면, 감경사면 해주거나 가석방 해줄 여지가 계속 생기는 것이다. 게다가 이러한 가능성들을 모두 배제를 하더라도 이는 어디까지나 그 시점의 정부부터 이후 승계받는 정부 모두까지 국가가 일관된 입장으로 안정적으로 운영된다는 가장 불확실한 전제가 깔려있다.

만약 천재지변, 전쟁, 내란, 테러 등으로 나라가 혼란해지면 범죄자들이 교도소를 탈출할 가능성이 있고 21세기에 와서도 교도소 집단 탈옥이나 집단 탈출 사태가 전세계를 기준으로 보면 그리 드물지 않게 발생한다. 이러한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정도로 안정적인 국가는 북미나 서유럽을 제외하면 전세계에 사실상 없다고 봐도 좋다. 당장 대한민국만 해도 바로 북쪽에 세계가 경계하는 북한, 러시아, 중국이 붙어있다. 게다가 대한민국과 좀 떨어졌어도 중남미와 동유럽은 마피아의 영향력이 강한 곳들이다.

또한 사형 요구가 잇따르는 범죄는 꼭 살인죄만 있는 게 아니며,[17] 내란죄, 폭처법에 의한 범죄조직의 수괴 등등 살인 못지 않거나 경우에 따라서는 살인 이상으로 악랄한 범죄가 될 수 있는 범죄에 대해서도 사형이 규정돼 있다.

위에 열거된 범죄들 중 내란죄에 해당하는 자들을 사형하지 않고 평생 감옥에 가둘 때 발생할 수 있는 경우의 문제점은, 내란 수괴 쯤 된다면 자신이 내란 실행 당시 국가원수를 찍어누를 수 있는 권력을 가졌거나 아예 내란 수괴 본인이 곧 국가 원수인 경우가 100%일 것이다.[18] 이들이 만에하나 잔당들과 내통하거나 탈옥했을 경우 심각한 사회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19]

가석방 없는 종신형을 사용하면 어차피 좁은 감옥 안에서 크게 고통받기 때문에 괜찮다는 생각은 어디까지나 제3자의 시선으로 바라본 것일 뿐이다. 왜냐면 가석방 없는 종신형을 내렸더라도 인권이라는 그 취지를 생각해보면 그 범죄자에게 최소한의 인간대우는 해줘야만 하기 때문이다. 즉, '인권을 지킨다'는 가치와 '사형을 선고하지 않는다'는 가치를 계속 지키려면 사형받고 진작 없어졌어야 할 사람들에게 평생 인간대접을 해줘야만 한다. 그들은 살인이나 테러 등으로 타인의 최소한의 인권마저 무시했지만 그들이 수형 생활에 대해 인권침해 문제를 제기하고 그것이 헌법과 법률에 명시되어 있거나 명시되어 있지 않더라도 합리적이라면 사회는 이를 들어주어야함이 타당하다. 왜냐면 그들이 과거 무슨 짓을 했든 처벌로 인한 기본권 제한과는 별개로, 제한된 기본권 이외의 나머지 권리들은 그들 역시도 인간이고, 사회는 그들 또한 인권을 누릴 수 있다는 전제 하에 가석방 없는 종신형이라는 제도를 시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형을 내림으로써 그들에게 인간으로서의 책임을 지게 하는 것이 진정한 인권이라고 할 수 있다. 오히려 평생 가둬놓고 저염식이나 고염식을 주는 방법으로 직간접적인 고통만 주면 충분하다는 말은 눈치가 보여서 생명만 살려놓고 동물만도 못한 취급을 하는 인권 침해 행위이다. 사람으로 죽게 할 것이냐, 동물로 살게 할 것이냐의 문제에서 동물로 살게하는 것이야말로 사람의 가치를 지켜주는 방법이라는 모순된 말이 생기는 것이다.

그리고 국가의 형벌은 단순히 범죄자의 사회를 위한 격리뿐만 아니라 피해자의 원한을 국가가 대신 책임져줌으로써 사적제재와 복수의 연쇄를 막기 위함도 있다. 단순히 유가족이 사형을 주장할 권리는 없고 범죄자만 영구 격리시키면 사회로서는 가장 바람직하지 않냐는 주장은 지나치게 공리주의적인 발상이다. 사회가 한 사람의 생명을 빼앗는 것은 아이가 창문 깬 것처럼 단순히 복구 가능한 손실이면 사형을 선고하지도 않는다. 사형제는 범법자가 타인의 생명을 빼앗은 것과 같은 불가역적이고 중대한 손실을 사회에 끼쳤을 경우에 한해 사회가 판단할 수 있는 최후의 수단인 것이다.

3.10. 기타

간혹 반대론자들 중 무죄추정의 원칙 개념과 혼동하여 "누명을 씌워서 사형을 선고하기"에 대한 비판을 가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잘못된 것이다. 사형이든 징역형이든 벌금형이든 자격 정지형이든 기타 어떤 형벌이든 간에 무죄 추정의 원칙은 반드시 지켜져야 하는 대원칙이며, 이는 사형의 여부와는 무관하게 그 어떤 경우에도 반드시 지켜져야 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명칭이 같은 살인/폭력범죄라도 잔혹함의 정도에 따라서 형량의 높낮이가 결정된다. 잔혹한 살인의 형량을 높이는 것이 잔혹한 살인을 줄인다는 통계적 근거는 불분명하고 사실 고려된 적도 없다. 그렇다면 아무리 잔혹하게 살인을 했어도 모두 같은 처벌을 내려야 할까? 사형 폐지론을 외치는 사람들이라도 동의하지 못할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애초에 법은 과학도 숫자놀이도 아니다. 피해자가 따로 존재하지 않는 범죄는 단순히 범죄 발생률을 줄이는 것을 목표로 하는 것이 타당할 수도 있다. 하지만 피해자가 존재하는 범죄는 인간의 감정, 특히 피해자의 감정을 고려해야 한다. 피해자가 사망한 경우에는 피해자가 범행 당시에 느꼈을 고통의 크기 또한 고려되어야 한다. 상식적으로 사망한 피해자가 '범인은 나쁘지만, 그가 이렇게 된 것에는 사회의 책임도 존재하니 그를 계도시켜 사회로 돌려보내야 한다'는 생각을 하면서 사망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기본적으로 인간은 동물이다. 야생 늑대를 아무리 길들여도 인간의 손에 자란 개와는 본질적으로 차이가 있다. 마찬가지로 상당수 흉악범죄자들은 극도로 본능에 충실한 유전자를 타고난 데다가 미성년 시절 이를 바로 잡아줄 환경의 부재로 인해 형성된 강력한 반사회성으로 인해 타인의 아픔 등에 공감하는 능력이 크게 결여되어 있고 제멋대로인 정도가 차원이 달라서 뇌를 뜯어 고치는 기술이라도 있다면 모를까 재사회화도 불가능에 가깝다. 그들을 교화시키는 데 쓰일 자금이 있다면 피해자를 지원하는데 쓰는 것이 타당하고 효율적이다. 결국, 이들을 적절하게 도태시키는 제도가 필요하다. 그 제도로서 현실적으로 가능한 것이 전반적인 형량 강화와 사형제도이다. 하지만 형량 강화는 다른 수감자의 감화에 피해를 줄 가능성이 크며 다른 수감자에게 반사회적인 사상을 주입하거나 물들일 가능성도 크다. 최근 유럽의 이슬람 극단 테러의 주축이 교도소에서 급진화된 극단주의자들이었던 걸 보면 알 수 있듯이 그들은 살아있는 한 어떤 식으로든 사회에 악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다. 한마디로 흉악범죄에 대한 사형은 필요악인 것이다.

4. 사형제 폐지 관련 논거

법이론적으로 보면 사형제도는 정당화될 수 있는 길이 없다. 이것은 단정적으로 말하더라도 큰 잘못이 없다. 지금까지의 학문적 성과에 의하면 사형의 이론적 정당성을 구하는 데 성공한 학자는 한 사람도 없다.
배종대, 『형법총론』, 홍문사, 2008, p.786
(…) 나라의 문화가 고도로 발전하고 인지가 발달하여 평화롭고 안정된 사회가 실현되는 등 시대상황이 바뀌어 생명을 빼앗는 사형이 가진 범죄예방의 필요성이 거의 없게 되거나 국민의 법 감정이 사형의 필요성이 없다고 인식하는 시기에 이르게 되면 사형을 곧바로 폐지해야 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형벌로서 사형이 그대로 남아 있다면 당연히 헌법에도 위반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ㅡ 헌법재판소. 1996, 11.28.선고., 95헌바1결정

헌법재판소1996년에 사형제를 합헌이라고 판시하면서도 동시에 장기적으로는 폐지가 더 바람직함을 시사했다. 즉, 헌법재판소 역시 사형제가 문제가 없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현실적으로 볼 때 부득불 그 필요성이 요청된다는 소극적인 입장만을 견지할 뿐인 것이다. 그리고 이후의 연이은 판례들에서도 헌재는 단지 과거의 동일한 판례만을 참조하는 방식으로 판단하고 있으며, 점차 전향적으로 폐지 쪽으로 입장을 변경하고 있는 추세이다. 다만 헌법해석에 의한 폐지냐 아니면 입법작용에 의한 폐지냐에 대한 의견의 대립이 아직 존재하고 있다.

4.1. 흉악범에게 온정적인 처사라는 반론

현대에 주로 쓰이는 사형인 교수형총살형은 주로 바로 급소를 끊거나 집행 시간이 짧은 방식이니 고통이라 해봤자 고작 몇 초 만에 끝나는 경우가 많아서 형벌의 색채를 많이 잃었고,[20] 아예 잃을 게 없다는 심리거나 사람을 계속 죽이고 싶어 하는 쾌락살인[21]을 행한 범죄자, 특히 사형을 두려워하지도 않고, 오히려 좋아하는 흉악범죄자(예를 들어 후술할 가나가와 마사히로)[22]들, 순교자, 열사가 되어 사회적으로 파장을 일으키고 싶어하는 확신범들에게 사형은 어찌보면 형벌로서의 기능은 떨어지고, 오히려 범죄자가 원하는대로 해주는 꼴이 될 수도 있으며 심지어 이승의 죗값을 제대로 치르지도 않은 채 영혼만 저승으로 도망칠 수 있도록 편안한 안식 시켜주는 꼴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엄벌주의 관점에서 봤을 때 범죄자가 원하는 사형보다는 범죄자가 끔찍히도 싫어하는 어두운 지하에서의 무기금고가 훨씬 효율적인 형벌이라 볼 수 있다.[23] 비록 위에서 제시한 환경과 똑같지는 않지만 흑돌고래 교도소ADX 플로렌스 교도소라는 예시가 있다. 이 교도소들이 얼마나 가혹한 곳이냐 하면, 이런 곳들에 수감되어 있는 흉악범들은 차라리 죽여달라고 진심으로 호소할 정도다. 사형이 아니라도 죽음보다 더 두려운 처벌을 구축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사실상 무기 고문이라는데 의의가 있다.

애초에 죽음이 두려우면 죽을 죄를 저지르지 않는다. 앞에서 언급한 흑돌고래 교도소를 지은 러시아가 방사능 홍차로 대표되는 밥 먹듯이 정치 살인이 일어나는 나라임을 고려해도 그렇다. 게다가 사형 집행인이 겪는 정신적 고통도 절대로 무시할 것이 아닌 게 엄벌로 유명한 사우디아라비아에서도 참수형이 점점 줄어드는 실질적인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사형 집행인이 겪는 정신적 고통이다. 범죄자를 고통스럽게 죽이려다 무고한 피해자를 양산할 수 있으므로 이러한 부작용까지도 고려해야 하는 것이다.

4.2. '종신형'이라는 대안의 존재

사형제를 반대하는 입장에서 가장 많은 지지를 받는 대안은 가석방 없는 절대적 종신형이다. 이미 UN1996년, 1998년 2차례의 보고서에서 사형제가 종신형보다 더 효과적으로 범죄를 예방할 수 있는 수단임을 증명하는 데 실패했다고 결론을 내렸다. 물론 사형조차도 두려워하지 않는 범죄자들은 사회로부터의 영구적이고 안전한 격리가 필요하다는 점과 형벌 집행 과정 자체가 피해자가 원하는 복수를 국가가 대신 해주는 것이라는 점은 사형제 반대 측에서도 당연히 동의한다. 문제는 '꼭 사형이라는 방법을 채택해야 할 합리적인 근거가 있는가'이다. 복수의 방법에는 사형만 있는 것이 아니다. 가석방 없는 종신형 제도 하에서도, 갱생의 여지가 없는 극악무도한 범죄자들을 사회로부터 아무 문제 없이 격리할 수 있다. 대개 한순간이면 더 이상 고통을 못 느껴버리게 되는 사형과 다르게 종신형은 감옥에 갇힌다면, 거기다 갇히는 곳이 독방이라면 아무리 흉악 사이코패스 범죄자라 한들[24] 육체와 정신 둘 다 엄청난 고통을 받게 된다. 감옥의 열악함과 많은 대화도 허용되지 않고 가만히 눕지도 못 하는 채로 24시간 내내 있는, 가히 5억 년 버튼의 현실판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 흉악범들은 생명은 붙어 있어도 평생 감옥에서 나가지 못하고 자신이 저지른 중범죄와 스스로 내쳐버린 갱생의 기회에 대한 대가를 톡톡히 받게 된다. 가장 좋은 예시로 사람의 정신을 표백시켜 버리는 ADX 플로렌스 교도소, 인간의 존엄성을 극한까지 깎아내려서 정신적인 타격을 주는 흑돌고래 교도소가 존재한다. 흑돌고래 교도소의 경우 너무 가혹해서 재소자들이 차라리 인권을 위해 사형을 부활시켜 달라고 건의를 할 정도니 말이다. 쉽게말해 살려는 드릴게병신을 만들어주마라고 이해하면 된다.

이처럼 사형제가 종신형의 보충성을 갖는 제도로서 이해가 될 때, 사형제는 그 존재의 가치를 잃게 된다. 사형제 찬성 측이 요청하는 모든 것, 즉 가석방 없는 무기징역 및 복수가 이미 종신형의 시행을 통해 충분히 만족될 수 있고 사형제는 단지 "저 놈은 그 생명을 아예 끊어버려야 한다" 라는 심리만이 더해졌을 뿐이다. 죽음으로 생명이 끝나는 단순한 행위보단, 사회보다 열악한 감옥에서 평생을 천천히 고통받으면서 죽어가게 하는 것이 피해자 입장에서도 울분이 더 풀린다.[25] 즉 사형이 없어도 종신형을 통해 사형으로 기대할 수 있는 이점들을 충분히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사형은 아무리 고통스럽다한들 그 고통이 대부분 오래 가지 않으며, 숨이 끊어지고 난 후에는 더 고통받을 수 없게 된다. 순간적인 감정에 휩쓸려 더 크게 벌할 기회를 놓치는 것이다.

당장 한국만 해도 무기징역이 존재하는데 연쇄살인범의 무기징역형을 가석방 심사 위원회에서 계속 기각해서 40년 뒤에 교도소에서 죽게 된다면, 사실상 가석방 없는 종신형을 사는 것과 마찬가지가 된다. 징역 상한 조정을 반대하는 쪽 논리도 이것이다. 무기징역이 없으면 100년이건 200년이건 필요하겠지만, 있는데 뭐하러 징역형을 더 늘리느냐는 것이다. 감옥이 더 편안한 생활이 많아 일부러 감옥에 가는 범죄자들이 많은 현실인데 반성을 하겠느냐는 문제가 있다해도, 사형제를 도입한다고 해서 범죄자들이 반성을 하거나 범죄율이 줄어들 것이란 보장도 없다. 사형제도에 찬성하는 사람들 중에서도 고통을 늘리는 것에 대해 인권을 이유로 반대하는 경우가 있지만, 죽이는 것은 고통을 주는 것에 비해 인권을 더 크게 침해한다. 또한 고통을 주는 것 또한 범죄자의 수명을 늘리는 방향(저염식, 지압판 등)으로 한다면 인권을 침해한다고 해석하기도 어렵다. 당장 감각을 차단하는 것으로도 사람의 정신을 충분히 박살낼 수 있다.

만일 대통령특별사면이라도 한다면 '영구적인 격리'가 깨지는 것 아니냐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사면권을 행사하여 사형수를 무기수로 감형해준 것은 사례가 있다. 대부분 정치범이거나(대표적으로 장면 부통령 저격사건의 범인들) 사형수 구명운동의 결과로, 한국에서 가장 최근의 사형수 감형은 노무현 대통령이 퇴임 직전에 한 것인데 본인이 사형 폐지론자였지만, 사형제 폐지를 이루지 못해서 일부 사형수 감형이라도 했다고 알려져 있다. 사형이 종신형처럼 굴러가게 된 현재는 사형수(사실상의 무기수인)를 특별사면하지 않고 있으므로, 종신형으로 공식적으로 대체된 이후에도 특별사면이 거의 없을 것이라 예상할 수 있는 것이다.[26] 정치범도 아닌 흉악범을 특별사면을 하면서까지 자기 지지율을 기어코 떨어뜨리려는 대통령이 과연 존재할지는 의문이다.

또한 몇몇 사람들은 사형제가 '복수'를 국가가 대신 해주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기도 한다. 그들의 입장에서 형벌은 그것이 중형이든 가벼운 형벌이든 교화와 더불어 사회의 안전을 위한 격리지, 복수는 피해자의 '권리'가 아니다. 예를 들어, 아이가 창문을 깼을 때 부모가 아이에게 벌을 준다면 그건 아이가 죄를 지었기 때문이 아니다. 이건 단지 동어 반복에 지나지 않는다. 아이가 다시 창문을 깨지 않도록 교육하는 것. 이것이 벌의 진정한 의미지 아이가 창문을 깨었다는 사실만으로 아이가 벌을 받는 것이 아니다. 극단적으로 말해서 다른 예비 범죄자가 없다는 가정 아래[27], 한 범죄자가 하루만 범죄를 저지르고 (감각은 느끼는 상태로) 영원히 잠에 든다면 범죄자를 교화시킬 가능성이 없으므로 벌을 주나 안주나 법의 의도로는 별 차이가 없다. 동시에 벌은 형법상 피해자의 권리가 아니다. 친고죄와 반의사불벌죄라는 예외를 제외하면[28] 아무리 합의가 되어 있다고 해도 형량은 존재하며 처벌이 내려지는데 이는 법이 가진 목적과 강제성을 잘 나타낸다.

4.3. 국가 형벌권의 한계 문제

국가가 가진 최고의 배타적 권력을 주권이라고 한다. 형벌권을 포함해 어떤 권한도 주권을 넘어설 수 없다. 이를 통해 국내 문제에 대하여 타국의 간섭없이 스스로 자유롭게 결정할 권한이 주어진다. 문제는 이러한 주권에 과연 어느 정도의 한계가 존재하는가 하는 점이다. 사형제 존폐 문제 역시 이와 관련되어 있는 문제들 중 하나이다. 즉, 국가는 주권이라는 최고권력을 근거로 공공복리와 사회정의를 위하여 자국 국민의 생명을 박탈할 수 있느냐는 문제로 귀결된다.

오늘날 민주주의 국가의 주권은 국민들로부터 나오는 것으로써, 국민 개개인은 주권을 직접 행사할 수 없지만 선거 또는 투표의 형태로 모든 국민의 주권이 하나로 모여 이를 정부 등에 위임함으로써 간접적으로 이를 행사하게 된다. 그리고 정부는 국민을 대리하여 온전하게 모아진 주권을 적법하게 행사하게 되는 것이다. 문제는 중한 범죄를 저지르고 사형을 선고받아 마땅한 범죄자들 역시 정부에게 주권을 위임한 국민들 중 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정부 그리고 사법부는 그들에게 주권을 위임한 국민들에게 주권의 이름으로 그들의 주권을 포함한 생명권을 강제로 박탈할 수 있는지는 논쟁의 여지가 있다.

이에 대해 긍정적으로 답변을 내놓는 국가들은 정부는 국민에게 정치적 위임을 받았을 뿐이기에 위임받은 이후에는 정부는 독자적 의지를 가지고 모든 국민이 아니라 국민 다수의 이익을 위하여 움직이며 그 결과에 대해서는 차후 선거 등을 통하여 정치적 책임을 지면 된다거나, 어떤 한 사람이 정부의 주권을 모두 가지는 것이 아니라 공평하게 나눠 가지기 때문에 그 구성원이 다수의 이익을 심각하게 훼손하는 행위를 하면 민주주의의 기념비적인 제도인 고대 그리스 아테네의 도편추방제처럼 그 구성원의 주권을 박탈 할 수 있을 뿐만아니라 사형집행도 가능하다는 등의 논리를 통하여 사형제가 문제가 없음을 주장한다.

그런데 현대의 다수 국가들은 이에 대하여 부정적으로 답하거나 아니면 판단을 보류한 채 사형의 집행 역시 보류하고 있다. 오히려 전체를 위해 사형제도를 유지하는 것이 전체주의적 발상이라고 볼 수도 있다.[29] 사형제도는 전체를 위하여 개인을 제거하는 것이라 전체주의적 요소를 내재하고 있으며, 역사적으로 보더라도 나치 독일과 같은 전체주의 국가에서 사형제도가 남용되었다. 다수의 현대 국가들[30]이 그 국민들의 상당수가 여전히 사형제에 찬성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폐지하고 있는 법적 및 정치적 이유는 바로 이 주권의 한계와 관련지어 생각해볼 수 있다.

생명체는 생명을 잃지 않으려 한다는 정의가 있으므로 국가에서 사형이라는 정의에 맞지 않는 행동을 굳이 보일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4.4. 생명권은 본질적인 기본권이다

대한민국 헌법 제37조
② 국민의 모든 자유와 권리는 국가안전보장·질서유지 또는 공공복리를 위하여 필요한 경우에 한하여 법률로써 제한할 수 있으며, 제한하는 경우에도 자유와 권리의 본질적인 내용을 침해할 수 없다.
인간의 생명권은 인간의 존엄성과 분리될 수 없는 기본권이며 모든 기본권의 전제가 되는 권리이다. 따라서 사형제도는 근본적인 윤리적 문제, 즉 모든 이에게 살인을 금지하면서 국가가 일정한 공익적인 목적을 달성한다는 명목 아래 법과 정의의 이름으로 살인행위를 한다는 윤리적인 모순에서 벗어날 수 없다. 아무리 훌륭한 사법제도를 갖는다고 하더라도 재판이 신이 아닌 사람의 영역에 속하는 이상 오판의 가능성을 절대적으로 없앤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국가가 이러한 사법제도의 불완전성에 대한 마지막 안전판으로서 비록 범죄자라 하더라도 우주보다도 중하다는 생명이 유지되도록 허용하는 것이 윤리적으로 책임지는 자세이다. 국제적으로도 이제 사형제 폐지는 시대의 대세이다. 결국 사형은 헌법과 국제인권규약 등의 정신에 부합하지 않으므로 폐지함이 상당하다.

국가인권위원회가 2008헌가23에서 밝힌 의견의 요지

비록 헌법이 생명권이라는 용어를 직접 언급하지는 않더라도 37조 1항에 따라 생명권은 당연히 헌법에 의하여 보장되는 기본권인데, 그 특성상 침해와 제한을 구별할 수 없다. 생명권을 빼앗는 것은 그 자체로 완전한 침해이다. 그런데 헌법 37조 2항은 자유와 권리의 '본질적인 내용'은 어떠한 경우에도 '침해할 수 없다'고 한다. 그렇다면 사형은 과연 헌법에 부합하는가에 대해 사형제 찬성론자들은 헌법에는 사형제가 명시적으로 정확히 표현되어 있기 때문에 문제가 없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생명권이 본질적인 권리가 아니라면 무엇이 본질적인가?'라는 근본적인 의문이 생긴다.

헌법재판소는 생명권에 대해서는 핵심영역설을 적용할 수 없고 상대설에 입각하여 제한할 수 있다고 판시한 바 있으나, 생명권을 제외한 나머지 모든 기본권에 대해서는 핵심영역설을 적용하여 본질적인 영역을(비록 기본권에 따라 그 영역의 정도는 다르지만) 절대 침해할 수 없다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앞서 찬성측에서 생명권에 대한 일부 제한이 불가능하다는 점을 언급했는데, 바로 그렇기 때문에 생명권에도 핵심영역설을 적용한다면 (핵심영역을 반드시 제한하게 되는) 생명권에 대한 제한은 반드시 위헌일 수밖에 없고, 그러므로 사형제도는 당연히 위헌인 제도가 되므로 헌법재판소로서는 핵심영역설을 적용할 수 없었던 것이다. [31]

나아가 생명권이 자유와 권리의 본질적인 내용이 아니라는 주장 역시도 받아들이기 어렵다. 헌법 규정 사이에는 엄연히 위계질서가 있으며, 이는 여러 헌법 조항에서도 도출할 수 있다. 예를 들어서 헌법재판소는 일반적인 재산권에 대한 제한 중에서도 토지에 대한 제한은 그 공공성을 감안하여 일반적인 재산보다도 더 많은 제한을 가할 수 있다고 판시한 바 있으며, 양심의 자유도 내적 자유인 양심형성의 자유와 외적 자유인 양심실현의 자유를 구분하여 전자는 절대적으로 침해할 수 없는 자유, 후자는 37조 2항에 따라 제한할 수 있는 자유라고 보았다.

그리고 그러한 헌법 조항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조항은 자유권적 기본권, 그 중에서도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선언한 제 10조를 "모든 기본권의 이념적 기초"이자 "그 종국적 목적"이라고 헌법재판소는 판시하였는데(2002헌마478), 생명권과 국가의 생명권 보호의무는 헌법 10조에 근거하고 있는데도 생명권을 가리켜 본질적인 기본권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은 위헌적이다.

또한, 사형제에서 문제되는 것은 기본권 보호의무를 지니는 국가가 국민의 생명권을 빼앗는 행위이지 사인이 타인의 생명을 빼앗는 행위를 국가가 처벌하느냐 처벌하지 않느냐가 아니다. 후자는 사인의 생명권 간의 기본권 충돌 문제가 될 뿐이다. 사형 찬성 측에서 제시한 산모의 건강을 위한 낙태, 전쟁에서의 적군 사살은 국가가 직접 생명권을 앗아가는 게 아니다. 이러한 생명권에 대한 침해가 인정되는 이유는 대개 동등한 생명권을 지키기 위한 긴급피난 내지는 정당방위로 해석해야 하며 이는 오히려 생명권이 본질적인 자유라는 점을 뒷받침한다. 상기 사례는 모두 산모와 아군(좁게는 자기 자신, 넓게는 본인이 속한 국가의 국민 전체까지)의 생명권을 지키기 위한 행위이며, 그 때에만 처벌받지 않을 수 있다. 다시 말해서 타인의 생명권을 침해하기 위해서는 오직 그에 준하는 최상의 기본권인 생명권에 대한 침해를 막기 위한 목적이 있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는 차라리 사인의 정당방위나 긴급피난에 대한 합리화로는 사용할 수 있을지언정, 피해자가 아닌 국가가 대신하여 생명권을 침해하는 것에 대한 합리화 논거로 쓰기는 어렵다.

4.4.1. 살인범의 생명이 보호되는 것은 모순인가?

일부 사형제 찬성론자 중에는 타인의 생명을 빼앗은 자의 생명이 보호되는 것은 모순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간혹 있는데, 이는 동해보복 사상에 터잡은 전근대적 논리다.

살인범을 똑같이 죽여야만 합당한 처벌이 된다면, 절도범에게는 절도범의 소유물을 똑같이 훔치고, 사기범에게는 똑같이 사기를 쳐서 같은 피해를 입혀야 하고, 불법촬영범에게는 똑같이 불법촬영을 해 줘야 하고, 상해범에게는 똑같이 피해자와같은 부위, 같은 수준으로 상해를 가해야 하고, 강간범에게는 똑같이 강간을 해 줘야 하고, 타인의 집을 불태운 방화범에게는 방화범의 집을 똑같이 불태워야 한다는 논리가 되고,[32] 살인범도 피해자를 어떻게 죽였냐에 따라 같은 방법으로 죽여야 한다는 논리가 되는데,[33] 현대의 선진 법치국가는 신체형을 부정하며 동해보복을 추구하지 않는다. 신체형은 안 되는데 사형은 된다는 것부터가 모순이거니와 다른 범죄와 달리 유독 살인에 대해서만 동해보복이 적용되어야 할 논리필연적인 이유가 없다.

타인의 신체를 절단한 자를 교도소에 아무리 오래 가두더라도 신체가 절단되는 것에 비할 바는 못 되지만 그것이 모순이 아니며 그런 이유로 상해를 마음대로 할 "권리"가 생기지 않듯이, 타인을 살해한 자를 똑같이 살해하지 않는 것 또한 마찬가지로 모순이 아니며 그런 이유로 살인할 "권리"가 생기는 것도 아니다. 이미 형법전에 사형을 두지 않는 많은 나라가 현실로서 그 점을 보여주고 있다.

더구나 사형을 시행하는 국가에서도 살인죄의 법정형에 사형만 있는 것은 아니며, 실제로 모든 살인범에게 사형이 선고되지도 않는다. 현재 한국 법원의 양형 태도를 보더라도 피살자가 3명 이상은 되어야 사형을 선고하고 있으며, 이는 사형이 집행되던 시절에도 마찬가지였다.[34] 일본도 나가야마 기준에 따라서 피살자가 1명인 사건에 대해서는 어지간히 심각한 가중사유가 없는 한 사형을 선고하지 않는다.

헌법재판소는 95헌바1 결정에서 사형이 최소한 동등한 가치가 있는 생명 또는 그에 못지 아니한 공공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한 불가피성이 충족되는 예외적인 경우에 적용되는 때에는 헌법 제37조 2항 단서의 규정이나 비례의 원칙에 반하지 아니한다고 판시했다. 그런데 이런 논리라면 타인의 신체를 상해한 자에게 그것과 똑같은 수준으로 상해를 가하고, 강간범이 똑같이 강간을 당하게 하는 형벌도 헌법 제37조 2항 단서의 규정이나 비례의 원칙에 반하지 아니한다는 결론에 이르는데, 입법자가 그런 형벌을 입법해서 위헌심판이 청구된다면 헌재가 마찬가지 논리로 합헌결정을 할 리가 없다. 왜냐하면 이 결정은 피해자가 당한 피해와 같은 처벌을 하는 방식이 정당하다고 인정한 것이 아니라 결과적으로 피해자가 당한 것과 유사한 방식이라고 해서 그런 형벌을 내리지 못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확인한 결정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관점을 달리 보면 범죄자에게 의도와 달리 오히려 사형제도가 피해자의 평등권을 무시하는 모순된 제도임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사형을 선고받는 경우 피해자가 여럿인 경우가 많은데 살인범은 여러 명의 생명권을 박탈한 대가로 자신의 생명권만 박탈당하면 된다. 이것은 살인범 1명과 피해자 다수의 생명권을 동일하게 본다는 점에서 모순된다.

이외의 경우를 생각해봐도 아무리 끔찍한 범죄를 저질렀을 때 그 대가가 그 범죄자 단 한명만의 생명권의 박탈로 끝나게 된다는 점에서 문제가 된다. 즉, 어떤 형벌을 가하든 근본적으로 형벌로는 피해자의 고통에 상응하는 벌을 가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이는 사형이라고 할지라도 그 예외가 아니다. 따라서 피해자의 고통에 대해서는 강한 형벌이 아닌 이와 별개의 다른 지원제도를 통해서 보상해야 한다는 것이 사형폐지론의 논리이자 이를 따라가는 근대 형법의 발전 방향성인 것이다. 따라서 "피해자를 위해서" 사형을 유지한다는 논리는 부적합하다.

4.5. 갱생과 교화의 부정

사형제는 단회적이고 철저하며 가장 극단적인 신체적 처벌로서, 범죄자가 참회할 기회를 국가라는 이름으로, 국가형벌권이라는 명분으로 영원히 박탈한다. 헌법은 기본권을 제한할 수 있다고 되어있을 뿐 제한하는 경우에도 자유와 권리의 본질적인 내용을 침해할 수는 없다고 되어있다. 하지만 사형제를 통해 사형집행을 하게 되면 사형수의 생명권이 일부 제한[35]을 받는 정도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온전하고 완벽하게 침해 당하게 됨으로서 참회할 기회조차 받지 못하게 된다.

다소 이상적이긴 하지만, 국가는 그가 갱생할 가능성을 부정해선 안 된다는 의견도 있다. 교화는 현대적 형벌체계의 지향점이다. 사형수가 갱생한다 하더라도 "악어의 눈물"이니 "사형집행에 대한 극도의 불안으로 인한 자기도피"니 하기도 하지만 이것도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한 예단일 뿐 사형수의 갱생여부가 거짓인지 여부는 그가 사회로 돌아가기 전에 장담할 수는 없고 갱생시점도 예단하기가 어렵다.

사형제도 찬성론 측에서는 범죄인에 대한 교화는 개선이 가능한 경우에 대하여서만 이룰 수 있을 뿐, 극악무도한 흉악범에 대하여서는 그 목적을 이룰 가능성은 없다고 한다. 하나 개선이 절대적으로 불가능한 범죄자가 있냐 없냐를 누구의 기준으로 판단할 것인지 여부는 어려운 문제다. 설령 절대적인 기준이 있을 수 있더라도 불완전한 인간이 이를 절대적으로 명확하게 판단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흔히 말하는 묻지마 범죄자는 절대 교화 불가한 살인마라고 하지만, 이들에 경우 의외로 사이코패스인 비율이 높지 않다. 일본의 묻지마 범죄자인 나가야마 노리오 또한 감옥에서 작가로 성장하였고, 만약 사형이 집행되지 않았으면 충분히 사회인으로 살 수 있었을 것이라고 미루어 짐작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국가는 모든 범죄인에 대한 개선 가능성이 있다고 보아야 하며, 범죄인에 대한 개선이라는 형벌의 한 목적을 결코 포기할 수는 없다고 할 것이다. 이와 같이 사형제도는 범죄자에 대한 갱생의 가능성을 포기하는 형벌이며 이를 존치하는 것은 형벌의 목적 중 하나인 개선의 목적에 반하여 그 정당성이 인정될 수 없다.

4.6. 기대보다 낮은 위하력

사형 찬성 입장에서 "사형을 통해 예비 흉악범들에게 본보기를 보여주어 범죄 발생률을 낮출 수 있다"라는 주장인 "사형제의 위하력(威嚇力)"이 있다는 주장을 할 수 있다. 이것은 시기상조의 논리, 응보의 논리와 함께, 적지 않은 사형 찬성론자들의 주된 논거 중 하나다. 이에 철학자 알베르 카뮈는 저서 《단두대에 대한 성찰》에서 대략 다음과 같은 논지로 응수한 바 있다.
"…사형이 본보기가 되기를 원한다면 더 많은 사진을 찍어서 보여주어야 할 뿐 아니라, 대낮에 콩코드 광장의 처형대 위에 단두대를 설치하고 전 국민을 초대해야 하며, 불참자에게는 사형 집행 장면을 텔레비전으로 보여주어야 한다. 사형을 집행당한 후의 신체 상태를 묘사하는 증언들과 의학 보고서들을 수천, 수만 부씩 인쇄해서 각 학교대학교에서 읽히게 해야 한다. 그렇게 하든지, 아니면 본보기 운운은 그만두든지, 양자택일해야 한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못하는 이유는) 사회가 그들 자신이 주장하는 것조차 믿지 못하기 때문이다…"[36][37]

그리고 사형이 경종이 되지 못한다는 역사적인 사례도 있다. 1760-1870년까지 영국에서는 판사 재량껏 형량을 조절하여, 단순 소매치기범에게도 사형을 선고할 수 있는 어이 없는 시기가 있었는데 잡범들을 매일매일 광장에서 공개교수형에 처해도 범죄율이 오히려 치솟는 막장상황이 계속된 바 있다. 정작 범죄율이 낮아지기 시작한 것은 1839년에 런던 경시청이 설립되고 체계적으로 순찰을 돌기 시작한 이후부터다.

사형 제도가 종신형보다 위하력이 더 높음을 반박할 수 있는 통계도 있다. 캐나다의 경우에는 사형 제도를 폐지한 후에 살인율이 44%나 감소하였다는 통계가 있다. 유엔의 특별조사보고서에서도 유엔조사보고서도 1988년, 2002년 두 차례에 걸처서 제출되었을 때 사형제도가 종신형과 같이 그 위하력이 떨어진다고 여겨지는 다른 형벌에 비해 큰 살인 억제력을 가진다는 것을 입증하는데 실패했다고 하였다. 유엔의 의뢰를 받고 연구를 주도한 로저 후드 교수는 사형제가 흉악범죄에 억제효과가 있다고 판단하는 것은 신중하지 않다고 밝혔다. 이처럼 범죄를 예방하는 변수는 수없이 많으며 사형 제도는 그 중에 하나일 뿐인 것이다. 사형 제도를 폐지한 후 강력범죄율이 올라간다고 해도 변수가 너무나도 많기에 과연 그것이 사형제도에 의한 것이라고는 확정할 수가 없는 것이다. 또한 사형제도를 폐지하고 강력범죄가 줄어든 통계들이 많이 존재하는 이상 통계적으로 위하력이 입증되었다고 할 수 없는 것이다.

범죄학자와 형법학자들도 사형이 두려워서 살인을 억제하려는 연쇄살인범은 없다고 주장하였다. 2008년 미국 형사법학자, 범죄학자를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도 사형제에 범죄 억제 효과가 없다는 답변이 88%였다.[38] 영국 옥스퍼드대학교의 법률학자인 로저 후드와 캐롤린 호일이 1988년부터 2008년까지 5차례에 걸쳐 작성한 보고서 또한 사형제도가 살인억제력을 갖는다는 가설은 신중하지 못하며 통계수치는 사형제도를 폐지하더라도 사회에 심각한 변화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하였다. 사형수 32명을 만난 김대근 형사정책연구원 연구실장도 사형수들 대부분이 범죄를 저지를 당시 형벌에 대해서 생각을 하지 않고 도주에만 집중했다고 한다. 이처럼 연쇄살인범들은 대부분의 경우 자신이 살인을 저지른 후 받을 처벌에 대해서 거의 생각하지 않는다. 증거를 인멸하려고 하고 도주를 하는 것에만 집중을 한다는 것이다.

수사망이 좁혀오자 자살을 해버리는 범인들도 있고, 이 경우 죽음보다 감옥살이를 더 두려워하는 범죄자도 있는 것이다.

사형제의 위하력 논리의 또 다른 문제점은, 그것이 그저 "사형제 자체의 위하력" 을 입증해 보이려는 데에만 집중할 뿐, 종신형과 같은 다른 형벌들과 비교했을 때의 '보다 현저히 높은 위하력'을 입증하려는 시도는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러한 맹점은 가석방 없는 종신형이라는 대안 논리에 의해 가장 크게 공격받게 되는 부분이다. 또한 위하력 논리는 그 위하력이 '얼마나 오래' 지속되는지도 설명해 주지 못한다. 일례로 20세기 초 영국의 사례를 검토한 연구자 Philips는 자신의 논문에서 "유명한 처형 후 감소되었던 살인사건은 5~6주 후 똑같은 비율로 다시 증가하였다" 라고 보고하기도 하였다.

위하력 논리의 문제점을 한 가지 더 들자면,[39] 궁극적으로 사형제는 중형벌에 대한 면역효과와 무감각성을 불러온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5,000만 원 이상의 뇌물을 수수하면 사형에 처한다고 할 때, 100억 원의 뇌물을 수수한 사람에게 그에 합당한 법적 평가의 차이를 나타내기는 불가능하게 된다. 결국 일정 수준 이상의 범죄에 대해서는 예방 효과를 기대하기 어렵게 되고, 입법자의 일시적 격정은 범죄의 위하력으로 이어지는 게 아니라 도리어 법에 대한 권위를 실추시키고 법질서의 안정을 해치게 되는 것이다. 또한, 위 예시의 100억 원 이상의 뇌물수수자는 사형당하는 것을 막기 위하여 100억 원을 이용하여 사람을 고용하는 등의 온갖 수단과 방법을 모색할 것이고 그로 인하여 더 큰 범죄와 피해, 불필요한 국가차원의 비용낭비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미국의 학자 셰링에 의하면 사형 집행과 사건발생 간의 관계에 대해 연구해보니 통계적으로 아무런 관계가 없었다고 한다.자료 아무런 양심의 가책도 없이 흉악 범죄를 저지르는 악인들은 정신이나 인격이 심각하게 뒤틀린 자들에게는 사형제의 위하력이 제대로 작용하지 않는다고 보는 것이다. 예를 들어 쾌락살인을 저지른 자들을 보면 기본적으로 윤리의식과 정상적인 판단력이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또한 이런 경우 조현병이나 왜곡된 성도착증을 함께 가지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헌데, 정상적인 판단력이 현저하게 떨어지는 사람들에게 "처벌받기 싫으면 살인하지 마라."라고 하는 위하력이 먹혀 들 수 있을까? 위하력은 정상인에게나 영향을 미치지 중증 정신이상자에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40] 한 예로, 미국의 유명한 식인 범죄자인 알버트 피시는 자신에게 사형이 집행되는 순간을 손꼽아 기다렸다고 할 정도니 말이다.

사형 제도가 위하력이 가석방 없는 종신형에 비해 위하력이 크지 않다는 수많은 연구와 통계들도 존재한다. 상반된 통계가 존재하는 것에 비추어 볼 때 살인율의 증가와 감소는 사회적, 경제적 상황과 수많은 요인들에 의해서 일어난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실제로 살인율에 미치는 요인은 매우 많으며 사형은 그 요인 중 하나일 뿐이다. 그 영향력이 얼마나 강한지도 밝혀진 적이 없다. 사형제도를 폐지한 후 살인율이 증가한 통계가 곧 사형제도의 폐지가 살인율의 증가와 인과관계가 존재한다는 것을 입증한다고 볼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사형제도가 가석방 없는 종신형보다 더 큰 위하력을 발휘한다는 주장은 타당하지 않다.

흔히 사형제 찬성과 관련하여 가장 많이 인용되는 연구로, 아이작 엘리히의 1975년도의 사형제가 가진 분석연구가 있다. 경제학자인 아이작 엘리히는 수십년간의 데이터를 바탕으로 기회비용의 측면에서 사형제가 잠재적으로 살인율을 낮춘다는 결과를 발표하였고 곧 이는 엄청난 반향을 일으키며 인용되었으며 사형제 찬성의 근거로 사용되었지만 사실 이 연구는 이후 데이터 분석과 관련하여 상당한 비판을 받은 연구이기도하다. 실제로 동년도에 엘리히의 데이터 분석의 허점을 비판한 연구가 바로 나오기도했고,자료 이후 엘리히도 지속적으로 자신의 연구를 옹호했지만 수십년간의 연구에서 위하력의 높고 낮음과는 별개로 사형제가 가진 억지력은 다른 여러 사회적 변인들에 비해 눈에띄게 큰 힘을 가지지 못한다라는 연구가 상당히 많이 나와있다.

오늘날에는 사형제의 위하력은 보편적으로 모든 사회에서 동일하게 적용되는 게 아니라 다른 사회적 변인들에 영향을 받아 그 수준이 크게 달라지는 경향이 있다고 보는 시각이 다수이며, 그만큼 사형제보다는 다른 사회적 변인들을 통제하는 것이야 말로 큰 의미가 있다고 본다. 이는 엄벌주의가 다른 사회적 개선노력을 낮춘다는 최근의 많은 범죄연구와 연결되어 사형제를 유지함으로써 대중이 많은 범죄문제가 해결될 것으로 인식하면서 실제 범죄율을 낮추는 다른 사회적 제도개선 투자에 관심을 낮춘다는 비판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미국에서는 범죄자에게 엄벌을 가하면 범죄율이 줄어들 것이라는 믿음 하에 엄벌주의를 유지했다가 범죄자의 재사회화 제도에 대한 지원이 크게 낮아져서 오히려 재범률이 크게 높아졌다는 연구, 시범적으로 재사회화 제도 지원을 높인 결과 재범률이 크게 감소했다는 연구도 많이 존재한다. 쉽게 말해 범죄는 범죄자 개인과 그 범죄자에게 직간접적으로 악영향을 끼친 사회 양쪽 다 문제인데 사람들이 범죄의 모든 원인을 범죄자 개인의 잘못으로만 몰고 가서 사회의 잘못된 부분에 대한 개선이 이뤄지지 않아 범죄 예방을 더욱 어렵게 만든다는 얘기다. 강건한 복지제도와 온건주의를 채택하는 노르웨이의 재범률이 낮은 것이 이를 증명한다.

당장 쉽게 비교를 해봐도, 사형제가 존재하는 일본과 사형제가 실질적으로 폐지된 대한민국은 둘 다 사형제 존재 유무와 별개로 세계에서 손꼽히는 치안천국 국가이다. 반면에 다수의 주가 사형제를 유지하고 있으며, 흉악범에게 중형을 선고하는 것으로 악명 높게 (대중들 사이에서) 인식되어 있는 미국의 경우 앞선 두 국가보다 치안이 상대적으로 나쁘다.

4.6.1. 야수화

어차피 사형당할 바에는 새끼 양보다 다 자란 양을 훔치는 게 낫다.
Might as well be hanged for a sheep as a lamb.
- 영어 속담
독을 먹으려면 접시까지
毒を喰らわば皿まで
- 일본 속담

바우어스와 피어스(Bowers and Pierce, 1980)의 연구는 1907년에서 1963년 사이의 뉴욕에서의 사형집행에 대한 분석을 토대로 사형이 오히려 살인을 증가시키는 효과가 있음을 밝혀내었다. 그들에 따르면, 사형직후의 첫 달에는 2건 이상의 살인이 발생하며, 사형집행 후의 2번째 달에는 1건 이상의 살인이 보통 예상된다고 한다. 다시 말해서 사형의 1건 집행은 3건의 살인을 발생시킨다는 것이다. 바우어스와 피어스(1980)는 이것을 사형의 야수화 효과(brutalization effect)라고 말한다.

이는 사형 집행은 잠재적 범죄자들에 대한 본보기로 기능하기보다, 범죄행위를 단지 "들키지 않도록" 수단과 방법, 비용을 가리지 않게 하도록 작용할 위험성도 있다는 뜻이다. 어차피 계획범죄는 들키지 않을 것을 상정하고 저질러지기 때문에 들킬 경우 무조건 사형 집행으로 이어진다면 피해자를 살해하는 것을 넘어서서 목격자를 향한 또 다른 범죄를 저지를 동기로 작용할 수 있고, 가능하다면 범죄조직을 구축하여 조직적인 범죄로 이어질 가능성도 있다는 것이다.

토머스 모어는 저서 《유토피아》에서, 사형을 비롯한 극형을 반대하며 바로 이 논리를 근거로 들었다. 그는 범죄자가 자신의 범죄를 은폐하기 위해 피해자는 물론 목격자까지 모두 살해하려 한다는 심리를 갖게 된다는 점을 경고했다. 다시 말하면, "걸리면 너도 이렇게 된다"라는 메시지가 범죄 억제력을 갖출 수도 있지만 "걸리면 큰일나는구나 그럼 수단과 방법, 비용을 가리지 않고 증거를 남기지 말고, 목격자(혹은 생존하였을 피해자)도 없애야 겠다."라는 심리로 이어지는 등 절대적인 억제력을 갖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이는 사형제 효용성을 옹호하는 주장의 치명적인 약점이 될 수 있다.

또한 위 속담들처럼, 작은 죄를 저지르건 큰 죄를 저지르건 어차피 죽는다면 바로 위 계획범죄와 맞물려서 더 큰 범죄로 이어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특히 '적어도 비 살인 범죄에 대한 사형은 폐지하자'는 측에서 이런 주장을 하는 경우가 많은데, 예컨대 만일 성범죄의 법정형이 사형이라면 단순 강간으로 끝났을 성범죄가 앞서 말한 이유로 살인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범곤 사건과 같은 경우라고 볼 수 있는, 잔혹한 범죄행각을 벌인 대량살인범은 어차피 죽을 각오로 저지르는 일이고, 자신이 체포될 경우 사형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는 걸 깨달았을 때는 이미 피해자가 사망했기 때문에, 막나가는 묻지마 살인범은 사형을 두려워하지 않게 된다. [41] 사형제도가 있고 집행까지 활발히 이뤄지는 일본에서는 잊을만 하면 묻지마 살인범이 살인을 저지른다. 2022년에 사형에 처해진 아키하바라 묻지마 대량살인범 가토 도모히로만 해도 자신이 저지른 죄가 발각될 경우 사형이라는 것을 몰라서 살인을 한 것은 아니며, 심지어 가나가와 마사히로사형을 당하기 위해 일부러 살인을 저질렀다.[42]미국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총기난사 사건 용의자들의 최후가 대개 자살인 것도 죽을 각오를 하고 저지르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런 사례들을 보더라도 사형은 범죄율을 낮추는 억제책으로서의 영향이 크지 않을 수 있다.

사형제 반대와 별개로 공개처형의 경우 경각심을 일깨우기는커녕 되레 범죄율을 증가하게 한다는 주장도 있다. 여기서는 사람들의 이목이 사형 집행에 쏠려 있는 틈을 타서 손쉽게 소매치기[43], 절도, 주거침입 등을 저지르기 때문이라고 한다. 여기까지 오게되면 사형제는 이제 경각심은커녕 일종의 퍼포먼스이자 쇼가 되는 셈이다.

4.7. 오판의 가능성과 처형 후 불가역성

1660년 경찰 조사에서 존 페리는 어머니, 동생과 함께 실종된 윌리엄 헤리슨을 살해했다고 자백했다. 살인 혐의로 법정에 서자 피고인들은 혐의를 강하게 부인했다. 다른 직접 증거는 없었다. 하지만 판사의 집요한 신문에 존은 다시 헤리슨 살인에 연관된 듯이 진술했다. 결국 존과 어머니, 동생은 모두 사형 선고를 받았고 형은 집행됐다. 2년 뒤 죽었다던 헤리슨이 살아서 나타났다. 영국 법률가 프리드리히 에드윈 스미스 버컨헤드가 소개한 자백이 거짓으로 판명된, 기록이 남아 있는 최초의 오판 사례다.(<더유명한 재판>, 1938)#
우리 법은 죄를 지은 사람을 처벌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죄를 짓지 않은 사람을 처벌하지 않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10명의 범인을 놓치는 한이 있더라도 1명의 억울한 사람을 만들어서는 안된다"는 말, 여러분도 한번 쯤은 들어보셨을 겁니다.
- 천원짜리 변호사 천지훈

오늘날 대표적인 사형 제도의 오판 사례로 거론되는 사건들은, 전근대적 원님재판의 피해자들이 아니라 다른 재판들과 같이 정당하고 치밀한 법적 절차를 밟은 결과로, 당시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이 합리적인 수순으로 사형이 선고되고 집행된 사례들이다. 과학기술이 고도로 발전하고 행정 제도가 탄탄한 현대 국가에서도 고의든 실수든 오판의 가능성은 있다. 애초에 형벌을 마련하고 부과하는 사법체계가 완벽할 수 없기 때문이다. 판사가 아무리 판결을 재고한다 하더라도 오판은 일어나며, 이를 전부 인공지능으로 대체해도 인간의 판결을 기반으로 학습한 이상 오판의 가능성 여지가 아예 없다고 부인하긴 어렵다.

특히 미필적 고의를 포함한 고의로 인한 사법살인과 달리, 과실로 인한 오판의 가능성은 제도의 정비만으로는 줄어들지 않는다. 예컨대 공무원의 실수로 피고인이 무죄의 증거를 제출했는데 피고인의 증거만 관리를 못해서 멸실되어 재판기록에서 소실된 경우라든지 제출에 방해를 받아서 제출할 수 없었던 경우와 같이 피고인에게 불리한 소송기록물만 있는 상태에서 판사가 이러한 사정들을 알지 못한 이상 유죄의 판결을 내릴수 밖에 없다. 이렇듯 재판 내에서의 억울하게 유죄가 나올 수 있는 여러가지 변수들이 있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제도의 개혁만으로 오판의 가능성이 낮게 유지되리라는 것은 어쩌면 순진한 생각일 수 있다. 법을 집행하는 것은 시스템이 아니라 결국 인간이다.

특히 사형 집행으로 인해 만일 생명을 잃은 사람이 후일 무죄임이 밝혀졌을 때 "당사자의 죽음" 이라는 사건을 돌이킬 방법이 없다는 치명적인 약점이 존재한다. 위의 찬성론에서 소개된 바와 같이, 사형 이외에 징역형 같은 형벌들 역시 "돌이킬 수 없는 결과" 를 가져오는 경우가 있지 않느냐고 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국내외의 유수의 형법학 저널들과 학회지에서 바로 그와 같은 특수한 사례들을 법리적으로 분석하는 논문들과 판례들이 수도 없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그리고 현실적으로, 그 모든 사례들을 검토한 형법학자들의 거의 대다수는 사형제의 "돌이킬 수 없는" 약점에 대해 전적으로 수긍하고 동의하고 있는 형편이다.

흔히 사법적 실수에 대한 조치로서 유족들에 대한 보상을 제공하고 한다지만, 중요한 것은 아무리 애써봤자 그 보상은 정작 피해 당사자에게는 결코 닿을 수 없다는 것이다.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혔다면, 피해자가 감옥에서 날린 세월은 돌이킬 수 없겠지만, 금전적인 보상으로 피해자에게 직접적인 보상은 가능하다. 허나 이미 죽은 사람에게는 부활을 시켜줄 수 있는 의학적 기술이 발전하지 않는 한 뭘 해주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묘지에 안치된 피해자를 뒤늦게 꺼내 보상이랍시고 국가차원에서 다시 장례식을 치러주고 양지바른 곳에 이장이라도 할 것인가? 게다가, 만약 죽은 이가 일가친척이 없는 무연고자였다거나 진실이 밝혀졌을 무렵엔 이미 가족들도 모두 죽은 뒤라 보상 받을 '유족'조차 없는 경우라면 누구에게 보상할 것인가? 결국 얼렁뚱땅 넘어가며 피해자는 정부에게 살해당한 것과 다를 바 없다. 수사기법 및 사법제도가 허술한 국가일수록 이 단점은 더욱 크게 부각되며 희생자도 늘어난다.

범위를 대한민국으로 한정하면 잘못된 사형 판결 및 집행에 대한 보상이 너무 적은 것도 문제가 된다. 형사보상제도[44]벌금형이나 몰수형과 같은 다른 형벌들은 후일 그것이 잘못되었음이 밝혀졌을 때 금전적으로 반환된다. 구금의 경우 최저임금의 5배 이하, 미결구금 포함, 기간중 재산상 손실 및 기회비용의 상실, 정신적 및 신체적 고통, 사법부 과실여부 고려, 벌금 및 추징금의 경우 기 징수한 금액에 보상결정일까지의 기간에 따른 법정이율을 가산한 금액 합산, 몰수의 경우 몰수물 반환 또는 보상결정시 시가 보상이 된다. 한편 징역의 경우 피해자가 그 동안 경제활동에 종사하지 못한 경제적 손실의 측면에서도 전부 계산하여 보상하게 되어 있다. 그러나 사형제의 경우 다른 이런저런 금전적 보상 외에 당사자의 생명에 대한 보상은 단지 3,000만 원 이하의 금액으로 정해질 뿐이다. 집행전 구금에 대한 보상금에 본인사망에 의한 재산상의 손실액 합산, 이후 다시 3,000만 원 이하의 법원이 인정하는 금액을 합산한다. 그나마 그것도 고인이 받아야 할 보상일 터이나, 정작 그 고인은 이미 세상을 떠나고 없다. 오랫동안 구금된 피의자에게 낼 보상금보다 사형시킨 후 낼 보상금이 더 싸기 때문에 돈 주기 싫어서 죽여 없앤다는 비판 역시 피할 수 없다.

간혹 사형이 아닌 다른 형벌 역시 오판이 있었을 때 피해를 완전히 보상할 수 없는 것은 마찬가지이므로 사형제의 "돌이킬 수 없음"을 이유로 사형제도에 반대하는 것은 모든 형벌권, 또는 사법권 자체를 부정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징역이나 금고 등의 자유형이나 벌금, 몰수같은 재산형의 경우 잘못되었음이 밝혀졌을 때 최소한의 수준까지는 무고한 피해에 대해 보상할 수 있는 여지는 있지만, 사형의 경우 그런 여지조차 전혀 없다.

찬성론에서는 사형 선고 자체가 극히 적고 신중하므로 오판의 가능성은 없다고 보아도 무방하다고 주장하나, 한국에서 사형 선고가 극히 적게 되는 이유 자체가 사형제가 사문화되었기 때문이다.[45] 심지어 그 적은 선고 중에서도 22사단 총기난사 사건의 임 병장처럼 오판의 가능성이 없다고 단정할 수 없는 사건이 있다. 국민의 요구에 따라 사형을 다시 집행한다면, 또 국민의 요구에 따라 사형 선고가 늘어나지 말란 법도 없다.

2000년대에는 무기수 김신혜 사건이 있었다. 피해자는 그녀의 친부였고 그에게 성추행을 당한 앙심과 보험금을 노려 살해했다고 발표됐는데 자세히 파고들면 여기에 의심스러운 부분도 많았고, 그녀가 범인이라는 결정적인 증거는 전혀(!)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무기징역을 판결받았다. 그녀는 15년 동안 살아서 버틴 끝에 박준영 인권변호사의 노력으로 2015년 11월 18일 재심결정이 내려졌다. 기존 판결에 오판의 여지가 있었음이 증명된 것이다. 만약 사형제가 유지되고 실행되었다면 그녀가 15년 동안 버틸 수 있었을까? 만약 사형제를 유명무실하게 하지 않았다면 그녀 역시 사형 판결을 받았을 가능성이 있다. 이 사건은 사형제 찬성론자들이 말하는 강압적인 군부독재 시대에 일어난 일도 아니다. 미국에서도 억울하게 죄를 뒤집어 쓰고 사형당한 사람이 여럿 있었다.

위의 것들과는 정반대로, 유죄는 맞으며 밝혀지지 않았던 또 다른 여죄가 뒤늦게 밝혀지는 경우도 있다. 바로 대한민국 최악의 미제 흉악사건이었던 화성 연쇄살인 사건. 마지막 사건 후 28년 만인 2019년에 특정된 피의자 이춘재는 다른 사건으로 무기징역형을 받고 24년째 수감 중이었고 DNA 감정으로 뒤늦게 미제사건의 범인임이 밝혀졌다. 그런데 그는 1,2심에서는 사형 선고를 받았다. 만약 사형이 확정되었다면 그는 연쇄살인범이라는 것이 묻힌 채 집행되었을 가능성이 높고, 그랬다면 화성 사건의 피해자 유족들과 담당형사들은 영원히 범인을 알지 못했다는 한을 품고 살아갔을 것이다. 사형 집행이 되지 않은 것이 진범을 찾는 데 큰 도움이 된 셈.

거기에 이춘재 연쇄살인 사건에서는 수사기관의 강압과 고문으로 인해 거짓 자백을 하게 되면서 억울하게 사형당할 뻔한 사람도 있었다. 그, 윤성여는 결국 1심에서 사형을 선고받았지만 항소심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어 확정. 교도소에서 20년을 살고 모범수로 감형되어 나왔다. 당시 상황과 해당 사건의 흉악성을 보면 사형이 확정되었을 경우 집행될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다행히 그는 출소후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으나 억울한 20년 옥살이를 했고, 심지어 생명을 빼앗길 뻔했다. 체모 조사라는 당시에는 최첨단 기법[46]을 사용하여 윤성여를 진범으로 확정했지만, 결국 진실은 '누명'이었던 것이다. 마찬가지 논리로 현재 과학적이라고 판단되는 수사기법도 오판의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게 사형 폐지론의 이유 중 하나이다. [47]

'법 집행 후 되돌릴 수 없으니 오판의 가능성을 염두에 두어 사형은 하면 안된다고 주장하는데, 이 논리에 따르면 오판의 피해자가 노환이나 병으로 이미 사망했을 경우, 국가가 그 책임은 어떻게 지는가?'라고 물을 수도 있겠다. 그러나 이는 설령 판결로 인한 억울함과 스트레스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사망의 가장 직접적인 원인은 당사자의 건강 상태에 있지 국가에 있는 것이 아니기에 과실치사로조차 여길 수 없으며, 예측 불가능한 자연적인 사고에 불과하므로 법적 비난 가능성이 없어 국가의 책임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고 간단하게 반박할 수 있다. 도의적인 책임과 법률상의 책임에는 차이가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경우도 결국 사형제가 가장 중요하고 존엄한 사람의 생명을 박탈한다는 점, 그리고 그 생명은 절대 되돌릴 수 없다는 점에서 차이가 나는 점을 부정할 수는 없다. 당연히 사형이 아닌 다른 처벌에 의해 무고한 피해자가 감옥 안에서 사망하거나 세월을 잃는 등의 경우가 발생하고 국가가 이에 대해 책임을 지기 어려운 경우가 발생한다. 그러나, 피해자가 사망하기 전에 무고함이 밝혀지면 그것이 피해자의 성에 차지 않을 수는 있더라도 최소한의 보상과 명예회복이 가능하고 무고함이 빠르게 밝혀지면 어느 정도 정상적인 삶을 회복할 수 있지만 사형은 일단 실시되면 이후에 무고함이 밝혀져도 그 피해자에게 그 어떠한 보상도 불가하다. 다시 말해, 사형제가 실시되던 아니던 양쪽 모두 무고한 피해자가 발생하고 불가역적인 피해가 발생할 수 있으나 사형제가 없었을 때 무고한 피해자가 조금이라도 보상받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사람의 목숨을 앗아가는 사형제의 불가역성의 정도가 훨씬 높을 수밖에 없다는 것.

4.7.1. '현행범은 범인임이 확실하니 사형시켜도 되지 않느냐?'

오판의 가능성을 논할 때 반박 혹은 절충안(?)으로 자주 나오는 주장이지만, 이 또한 문제가 많은 주장이다.

첫째로, 오로지 현행범인지 아닌지에 따라서만 판결 결과가 달라지게 된다. 예시를 들자면, 유영철은 현행범으로 체포되지 않았다. 즉 현행범만 사형하자는 기준에 따르면 유영철보다는 죄가 가벼운 사람이 단지 현행범이라는 점 때문에 사형을 당하게 되는 일이 일어날 수 있게 된다. 또한 이러한 논리는 무죄추정의 원칙 및 책임주의라는 형법의 대원칙에 어긋나게 된다. 사형이라는 극형을 선고하는 것은 행한 범죄의 중대함에 따라 결정되어야 하지, 증명 정도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유죄이지만 범인인지 확신은 못 하니 사형은 안 내리고 징역을 내리겠다'고 해서는 안 되고 명확히 입증한다면 죄의 중대함에 따라 형을 내리거나 확신을 못한다면 무죄가 선고되어야 한다. 참고

둘째로, 오판은 무죄를 유죄로 판결하는 경우뿐만이 아니다. 사건 경위를 잘못 판단하거나 형량을 잘못 재단하는 것도 오판의 범위이다. 다시 말하자면 현행범이라 해도 범인임이 거의 확실한 것 뿐이지, 설렁 사형을 인정한다 가정해도 사형을 받을 정도로 악독하고 참작 사유가 없는 범죄인지도 확실하다고 할 수 없다.

이 '무죄는 아니라 해도 사형까지 갈 죄는 아니었는데 사형을 선고하는 오판이 일어날 수 있다'는 딱히 현행범에 관해서가 아니더라도 오판 가능성을 논할 때 생각해볼 만한 문제이다. 실제로 재심에서 이 부분이 인정된 판례가 있는데, 원충연 반혁명 사건이다. 사건 당시에는 쿠데타 모의로 인한 유죄가 인정되어 사형이 선고되었으나, 이후 이루어진 재심에서 쿠데타를 모의한 것은 인정되나 사형은 지나치다는 논리로 징역 15년이 선고되었다. 이 사건에서는 원충연이 실제로 복역한 기간이 15년 정도였기에 이후 문제가 안 된 것이지, 만약 사형이 집행되었다면 무죄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억울한 죽음을 당한 사례로 남을 뻔했다.

재심에서 인정된 것은 아니지만 논란이 있는 사례로 제22보병사단 총기난사 사건이다. '있지도 않은 괴롭힘을 핑계로 개인의 망상으로 끔찍한 범죄를 저지른, 사회에 나가서도 그러한 범죄를 서슴치 않을 사람'으로 규정하여, 그 동안 사형 판결 기준으로 내세우던 '교화의 가능성이 없고 사형밖에 답이 없다고 누구나 인정할 때'까지 어겨가며 사형 판결을 내렸으나, '괴롭힘이 아니라고 어떻게 단정할 수 있는가' '군대가 책임지지 않기 위해 임 병장에게 모든 책임을 전가했다'는 비판이 끊이지 않는다. 다만 이 사건은 피살자가 한두 명도 아니고 5명이나 되었기 때문에 사형이 불가피했었을 수도 있다는 점은 감안해야 한다.

4.7.2. 진상 규명 불가능

(전략) 강도 살인 용의자로 재판에 회부된 작자가 있었다. 그 작자는 절규했다.
"나는 범인이 아니란 말이에요. 우연히 그곳을 지나가다가 사체에서 손목시계를 훔친 것뿐이에요."
"흠, 당신 주장에 따르면 진범은 따로 있으니 조만간 체포되든지 자수하든지 할 거라는 말이오?

지금으로서는 그럴 가능성이 전혀 없다. 하늘의 도움도 거기까지는 미치지 못한 것 같다. 정말 무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호시 신이치, '표리(表裏)'[48]

이춘재 연쇄살인 사건을 예로 들면, 아이러니하게도 진범인 이춘재가 다른 죄로 무기징역을 받아서 사형을 면했기 때문에 진상이 밝혀질 수 있었다. 즉, 만약에 이춘재가 사형을 당했더라면 위 이야기의 절도범처럼, 죄 없이 잡혀온 윤성여가 범인으로 몰려 사형당했을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4.8.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 제도

사형 제도에 찬성하는 자들은 사형 제도의 효과만을 설명할 뿐, 정작 사형 제도로 인한 문제점에 대해서 책임지려고 하지 않는다. 죽은 사람을 되살리는 건 불가능하지만 억울하게 사형으로 죽은 사람 대신 경제적 활동(생산, 소비)을 할 사람을 사회에 내놓는 걸 국가와 국민이 책임지고 감수해야 한다면, 이걸 국가와 국민이 쉽게 받아들이기는 어려울 것이다.

'형벌이 약해서 범죄가 늘어나면 이건 어떻게 책임질 것인가?'라는 반론도 있지만, 인권 선진국들은 나름대로 국가와 국민들이 그거에 대해 책임지려고는 하고 있다. 그리고 대한민국에서 채택한 대륙법은 형벌보다는 교화가 목적이다.

4.9. 사람의 생명을 빼앗는다는 사람의 거부감

씨발... 우리는 그냥 망나니였어...
집행자》 中. 국가에서 사형 특별 수당으로 주는 7만원을 받고 집어던지며

아무리 범죄자가 극악무도한 짓을 했다 해도 한 사람으로서 다른 사람의 목숨을 빼앗는 것에 대한 거부감으로 반대하는 사람도 있다. 죽을 짓을 한 범죄자라 해도 그 범죄자의 목숨을 앗아가야 하는 사형 집행인은 또 뭔 죄란 말인가. 이것은 사형 집행인에게 또 하나의 폭력이 되는 것이다.[49]

'아사형(굶겨서 죽이는 것)을 내리면 되지 않나?'라는 생각이 들 수 있지만, 현대 사회에서 쓰기엔 너무나 비인도적이게 길고 고통스러운 방법이다. 그 사람이 죽음에 이를 때까지 최소 2주 이상을 기다리는 동안의 정신적 고통이 다른 사형법에 비해 덜할 것이라고 장담할 수 없다. 오히려 짧은 시간 만에 죽는 사형법에 비해 더욱 오랫동안 고통받을 수 있다.[50]

이에 대해 법을 집행하는 사람으로서의 '의무'를 들기도 하지만, 아무리 법적 의무라고 해서 그로 인한 정신적인 후유증이 덜어지는 것은 아니다. 사형 참관 경험이 있는 사람의 경험담을 들어보면 사형집행장은 눈 앞에서 한 사람이 밧줄에 목이 걸린 채 매달려 죽어가고 있지만 손을 쓸 수 없으며, 모두가 그 사람이 ‘언제 숨이 끊어지나’에만 관심을 가지는 "인간성이 완벽히 상실된 공간"이라고 한다. 실제로 프랑스 혁명 시기 단두대 도입에 반대하던 민중[51]을 설득한 논리도 여기에서 근거했다. 사형집행인도 사람인지라 옛날 방식을 고집하면 늘어나는 사형 수요에 의한 스트레스를 감당 못한다는 것.
의무과장이 내려가서 절명하기를 기다렸다. 보통 10분에서 13분이면 숨을 거두는데 여자들은 몸집이 가벼워 더 오래간다고 했다. 집행 교도관들이 휘장 속에서 하는 말이 밖으로 들렸다. 한 직원이 ‘갔어?’라고 말하니, 다른 직원은 ‘오래가’라고 답한다. 조금 있다가 ‘가버렸어?’라고 하니, 다른 직원은 ‘아직 멀었어’라고 한다. 모두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
문장식 목사, 1991년 12월 17일 시어머니와 남편 살인교사범[52] 강영리의 사형 집행 때 있었던 일을 묘사하며.(출처: <아! 죽었구나 아! 살았구나>)
보통 10여분이 지나면 사람의 목숨이 끊어진다. 의사의 사명은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것일 텐데 사형장 입회의사인 의무관은 사형수가 목숨 끊어지기만을 기다리면서, 그 10여 분조차도 지루해 하는 것 같았다.
죽는 시간만을 확인해야 하니 참으로 못할 짓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그 의무관의 입장이나 사형장 입회하고 있는 우리나 별로 다를 바가 없는 것 같았다.
문장식 목사, 1995년 11월 2일 지존파 두목 김기환의 집행 때 있었던 일을 묘사하며.(같은 책)

교도관은 참여하고 싶지 않아서 아내의 임신이라든지 부모의 병환, 꿈자리 등을 내세워 서로 미루고, 휴가를 내는 경우도 있고 양심의 가책 때문에 사표를 내거나 정신질환에 시달리기도 하며(기사) 심지어 집행 장면이 잊히지 않아 마약에 빠진 사람도 있다. 국가의 명령에 따라 사형을 집행했을 뿐이라지만, 당사자에게 내 손으로 살아있는 사람의 목숨을 끊었다는 자책은 평생을 따라다닌다. 이는 글자 그대로의 의미로, 일본의 교도관 출신 변호사 노구치 요시쿠니는 자신이 단 한번 사형집행에 참여해봤지만 "아래를 보면서 ‘지금 내가 이 사람을 도와주면 살 수 있을 텐데. 일이지만 내가 누군가를 죽였다’는 느낌이 들던 사실을 50년이 넘게 지나도 잊지 못한다고 증언했다. 형법에 의해 교수형을 집행할 경우, 사형수의 눈이나 얼굴을 가리는 것도 사실은 집행자들을 위해서다. 죽어가는 이가 절명하며 짓는 마지막 눈빛이나 얼굴을 그대로 지켜보는 것보다는 안 보는 것이 당연히 정신적 충격 면에서 낫기 때문이다. 게다가 교수형에서 집행 스위치 1개를 1명이 누르는 게 아니라, 3개 스위치 중 하나만 동작하는 스위치이고 나머지는 동작하지 않는 스위치를 설치한 후 교도관들이 위 3개를 동시에 누르는 방식으로 집행하는 것 역시 이들의 스트레스를 덜어주는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덜어준다'고 서술한 것은 집행관의 형 집행으로부터 오는 스트레스를 확률적으로 분산시키기 때문이지만, 결국 근본적으로는 "우리 셋 중 누군가가 죽였다=내가 죽였을 수도 있다" 라는 심리는 남아있기 때문에 죄책감을 완벽히 가려주진 못하기 때문이다.

이것 때문에 사형 집행 때 그 사형판결과 집행을 만들어낸 검사, 판사, 법무부장관이 직접 사형을 집행[53]해야 한다는 주장도 간간히 나오고 있다. 예를 들어 창작물 속이기는 하지만, 미국 드라마 ‘왕좌의 게임’ 속 스타크 가문의 경우, 사형을 선고하는 자가 그 사형을 집행해야 한다고 가문의 조항으로 남아있다. 즉, 사형을 판결하고, 집행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자가 사형수의 목숨을 거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사형 자리에는 집행하는 교도관만 있는 것이 아니다. 검사와 검찰청 서기관, 교도소장, 교도관, 의사, 종교인 등 40여 명이 직·간접적으로 참여한다. 집행에 참여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스스로의 양심과 무관하게 살인행위에 관여한다는 데서 오는 괴로움이 상당하다고 한다. 기사 이는 일본도 마찬가지라서 사형집행자에 대해서 조명하기도 했다.##

종교계에서도 비슷한 이유로 사형제를 반대하는 경우가 많다. 그리스도교, 특히 천주교가 신학적으로 사형 반대를 강하게 주장하지만[54], 개신교는 분파마다 다르다. 일부 그리스도인은 예수가 사형제의 희생양인 것을 삼아서 사형제에 반대하기도 한다. 특히 개신교 내 진보파는 사형제 폐지 운동에 적극적이다. 물론 사형제는 성경적이라면서 사형제 폐지에 반대하는 개신교 보수파와 전통 가톨릭 내 목소리도 만만하지 않다. 사형제 폐지에 반대하는 측에서는 사형제 폐지는 '흉악범을 처형하라'는 신법(神法)을 폐지하는 큰 죄악이라고 주장한다. 한편 불교에서는 당연히 소중한 인간의 생명을 거두어가는 비인도적 행위에 반대한다는 이유로 사형제에 반대한다. 이 경우 상당히 철학적인 관점인데, 인간으로서 다른 인간을 죽일 권리가 과연 있느냐는 것이다. 일부 기독교인은 '사람을 죽이는 것은 신만이 행할 수 있는 고유 권한인데, 감히 인간이 인간을 재단할 수 없다'는 논지로 사형제에 반대하는 경우가 있다. 진보적 신앙관을 가진 사람 뿐만 아니라 보수적 신앙관을 가진 사람 중 일부도 그런 입장을 보인다.
코미카도: 생명은 그 자체에 주어진 권리입니다. 그것을 빼앗는 자는 혹여 국가라고 하더라도 살인자입니다.
다이고: 당신이 사형 폐지론자라니 의외로군.
코미카도: 아뇨, 반대하지 않습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살인에는 살인. 훌륭한 제도죠. 그저 사람들 모르게 조용히 처리하는 것이 비열하다고 하는 것뿐입니다.
다이고: 그렇다면 벌건 대낮에 죽이라는 건가?
코미카도: 그렇습니다. 푸른 하늘 아래 시내에 끌고 나온 다음 기둥에 매달아 화형에 처한 후 모두 한 번씩 찌르고 목을 매달아 만세삼창하는 것이 훨씬 더 건전합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어리석은 국민들은, 스스로가 살인자가 될 각오 따윈 없습니다. 자신들은 밝은 곳에 있으면서 누군가가 어둠 속에서, 사회에서 없애주기를 기다립니다. 그렇게 되면 더 이상 사형에 대해 생각하지 않아도 되고 이 세계가 건전하다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죠, 아닙니까?
-<리갈하이> 9화 中

이러니 저러니 해도 결국에는 누가 피를 묻힐 것이냐는 것은 변하지 않는다.[55] 가해자의 천부인권, 신앙심 이전에 우리 누구에게 누구를 죽이라고 강요할 권리가 있는지 물어보아야 한다. 우리의 강요로 누군가를 죽여야 하는 사람이 당하는 피해는 어떻게 할지 논의가 필요하다. 가해자를 죽이라고 소리치던 사람들은 결국에는 가해자의 목이 떨어진 후 사라진다. 하지만 그 시체의 뒤처리와 사람을 죽여야 했던 사형 집행인의 고통은 고스란히 그들의 몫이 되어 남는다.[56] 심지어, 자신이 죽인 그 사람이 알고보니 무고한 사람이었다면 더더욱 문제가 커진다. 실제로 사형 집행 경험이 있는 교도관들은 종교에 빠지며 괴로워하거나, 교도관 동료들과 연락을 끊고 잠적해 버리거나, 심지어 집행 사실이 알려져 파혼을 당하는 등 많은 고통을 겪는다고 한다. #

국가적인 일이라고 해서 전쟁과 비교되는 일이 있는데, 베트남 전쟁, 이라크 전쟁 등을 보면 병사들의 처지는 비참하기 그지없다. 마치 부속품처럼 버려진다. 그리고 영화에서는 영웅적 행위라고 나오는 2차 대전 참전 병사들이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에 시달리는 다큐멘터리가 나오기도 한다.[57] 사형 집행인도 그렇게 되지 않으리라는 법이 없다. 망나니라는 단어 자체가 사형집행관을 일컫는 의미이다. 만화 이노상에서 주인공이 외마디 외치는, "왜 우리를 업신여기는 거냐?"는 말처럼. 과연 속칭 대의와 정의를 위해 악인을 처벌하는 사형 집행인이 일반 대중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지고 있는가. 사형 집행 사실이 밝혀져도 이들이 아무렇지 않게 사회와 동화될 수 있을까? 만약 이를 숨긴다면 죄를 짓지도 않았는데 왜 사형집행인인 것을 숨겨야 하는가? 이는 모순이다.

결국 사람을 죽인다는 행위 자체를 대다수가 거부하고 있다는 결론이 나온다. 사회 다수가 하고 싶지 않은 끔찍한 짓을 소수에게 시키는 폭력이 될 수 있다.

전쟁은 국위선양과 방어라는 명분이 존재한다. 그래서 오랫동안 전쟁은 무용담과 신화 그리고 현재는 거대 미디어에서 다루어져 왔다. 하지만 사형 집행인은 똑같이 정의를 구현하지만[58] 한번도 그들이 마치 영웅처럼 구현된 적이 없다. 고작해야 공포스런 캐릭터나 천시받는 인물로 그려질 뿐이다. 이것이 군인과 사형 집행인의 극명한 차이다.

결국 사형 집행인은 사람의 생명을 빼앗고 싶지 않은 본능과 저 놈은 죽여야 한다는 모순된 감정이 충돌할 때 이를 대신 해결해주는 사람들이다. 문제는 그들이 그것을 과연 원하는가, 그리고 우리가 그들은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일 수 있는가이다. 하지만 오랫동안 동서양을 막론하고 사형집행인은 정의를 행함에도 천시되고 멀리하고 싶은 사람들로 분류되었다. 사형 집행을 한 사람이라는 이유로 파혼당한 교도관의 사례가 이를 반증한다. 과연 우리는 그들에게 우리 대신 피를 묻히라고 강요할 수 있을까? 만약 그럴 수 있다고 대답한다면 우리는 우리를 대신해 정의를 행하는 동시에 스스로 피를 묻히는 그들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59]

물론 사형집행인을 전문적으로 뽑고 막대한 돈을 주고 이를 시행하는 방법이 있긴 하다.[60] 다만 이 경우처럼 할지는 의문이다. 출처 그리고 이는 감정적 오류가 아니라 지키기 위해 죽여야 하는 것은 정당방위이다. 문제는 영원히 가두는 방법이 존재하는 차악이 존재한다. 그렇다고 피해자에게 죽이라고 하는 것은 복수라는 혹은 피해자에게 피를 묻히는 폭압에 가깝다.[61] 그렇다고 사이코패스를 뽑아 이들에게만 맡기기도 어렵다.[62] 즉, 이런 모순이 가득한 일을 누군가에게 시키는 것이 사형집행인이고 오랫동안 사형집행인은 천한 신분에 맡긴 이유다. 만약 사형집행인을 지정하고 이들을 뽑는다면 한 가지 알아야 하는 것은 사형이 아니라 이들에 대한 대우다.

이런 까닭으로, 사형제의 찬반을 넘어 사회는 사형집행인을 예전처럼 망나니 취급하는 게 아니라 같은 사람으로서 소방관이나 경찰관처럼 힘든 일을 해내주는 직업이라는 것을 인지해야한다.

4.10. 국가형벌권의 사유화 방지 문제

사형의 근거를 유족의 감정에 둘 경우, 상당한 논리적 모순이 나타날 수 있다. 예를 들어 고아라 부모와 형제도 없고, 결혼을 하지 않아서 배우자와 자녀도 없고 내성적인 성격이라 친구도 전혀 없는, 아주 외롭게 살던 무연고자가 살해당했다면 '피해자를 위해 슬퍼하거나 화내 줄 사람이 단 하나도 없으니 상관없다'는 논리를 내세워 가해자를 감형해도 된다는 소린데 이게 말이 되는가?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피해자의 유족 유무라는 우연한 사정에 의하여 동일한 범죄를 두고 처벌이 달라지는 것인데 과연 그것이 법적인 정의의 실현인가?

또한 유족들이 슬퍼하지 않는다면 가해자는 사형을 받지 않아야 하는가? 피해자가 항상 선량한 사람은 아니다. 매우 극단적으로 예를 들자면 피해자가 알고 보니까 경제적으로도 무능하고 늘 술에 취해 가족들을 패던 인간쓰레기여서 유가족이 슬퍼하지 않거나, 오히려 "더 이상 맞을 일이 없어 다행이다."라고 생각을 하거나, 극단적으로는 살해해주었기에 가정폭력에서 해방될 수 있어서 고맙다.라고 말한다면 그 살인범은 결과론적으로 가정폭력에 시달리던 가족들을 구원했으니 칭찬받을 사람일까?

구의동 고3 존속살인 사건의 경우를 보면, 범인은 아동 학대가 원인이라고 주장했고, 증언에 나선 피해자의 가족들 역시 마찬가지로 살인 피해자인 어머니를 비난하고 범인을 옹호했다. 이에 따라 법관은 징역 3년이라는 지극히 가벼운 형벌을 내렸고, 징역 15년으로 항소한 검찰의 시도는 기각당했다. 이 경우 유족이라 할 수 있는 남은 가족은 어떤 이유가 있어서건 가해자인 범인을 옹호하며 피해자를 비난했다. 물론 이 사건의 경우 피해자의 유족이 곧 가해자의 가족이기도 한 특이한 사건이라서 이들이 가해자의 편에 서서 반응했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항상 사형의 근거를 '유족의 감정'에서 찾을 수는 없다는 예는 될 수 있을 것이다. 유족들이 피해자에게 불리한 증언을 한 것이 가해자의 편에 섰기 때문이라는 가정 자체가 편견이라고 볼 수도 있는 것이다.

또한 모든 유족들이 가해자를 원망하고 증오할 거라는 것도 편견이다. 인천 강화군 친누나 살인사건의 경우를 보면 부모는 친딸이 친아들 손에 살해당해 억장이 무너지는 상황에서 '죽인 이도 내 자식, 죽은 이도 내 자식'이라 통곡하면서도 아들의 선처를 바래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기도 했고[63] 서초동 세 모녀 일가족 살인사건의 경우도 유족들인 가해자 처가 식구들이 '한때나마 가족이었다'는 이유로 범인인 남편이자 아버지를 동정하는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좀 더 극단적인 사례를 가정해 보면 위의 사례처럼 한 가족 내에서 문제가 생겨[64] 범죄가 일어났을 때나, 유족이 막장 부모 or 패륜아, 불효자라서 오히려 합의금을 조건으로 선처해 준다고 한다면? 그리고 그것이 크게 작용해서, 해당 범죄자는 결국 원래 마땅히 받아야 했을 벌보다 훨씬 가벼운 처벌을 받았다면?[65][66] 원칙적으로 '유족의 감정'에 사형의 근거를 둔다면 이렇게 논리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상황이 나타나게 된다. 실제로 피해자 가족 중에서도 사형제에 반대하는 사람들도 있다고 한다. '우리의 이름으로 죽이지 말라' 참고. 물론 다 그런 것은 아니겠으나, 어쨌든 참고할 만한 사실.

또한 복수심이라는 것이 과연 가해자가 생명을 잃는 것으로 채워질지도 의문이다. 이는 특히 살인 범죄에서 극명한데, 이것이 확실히 증명되지 않으면 사형제는 (약간 다른 의미로) 역시 부적절한 형벌이 된다. 간혹 가해자가 처벌을 받지 않으려고 자살해버리거나 검거 또는 도피 과정에서 사고사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 경우 피해자의 유족들은 분통을 터뜨리나 그 감정이 갈 곳이 없곤 하다. 물론 전자의 경우는 처벌도 안 받고 비겁하게 도망쳐버렸다는 데 대한 분노도 있지만, 분명 가해자는 더 이상 '멀쩡히 같은 하늘을 이고 살면서 내가 낸 세금으로 편하게 잘 먹고 잘 지내는' 것은 아니다. 어찌보면 목숨으로 그 죗값을 치른 것인데도[67] 피해자 측의 고통은 해소되질 못하는 것이다. 설사 가해자가 엄청난 죄책감을 느껴 "스스로 죄값을 치르겠다"며 자살했다고 해도 말이다. 어쨌든 죽은 피해자가 되살아나진 않으니까.

사형된 범죄자의 피해자 가족도 다를 거라는 보장이 없다. 예컨대 어느 살인 범죄에서, 피해자가 잔혹하게 살해당했다고 하더라도 고인이 저승에서 원하는 것은 범인을 잡아죽이는 것이 아니라 남겨진 가족들이 슬픔을 딛고 다시 살아가는 것인지도 모르는 것이다.[68]
복수심은 건강에 좋다! 하지만, 복수가 다 이뤄지고 나면 어떨까? 아마 숨어있던 고통이 다시 찾아올 걸?
올드보이, 이우진

가해자의 죽음에 아주 잠깐 통쾌함을 느껴봤자 어차피 그것은 오래 못 가 사라지고, 곧 "아, 죽은 우리 ○○는 돌아오지 않는구나"는 뼈아픈 사실을 깨닫고 다시 상실감에 사로잡힐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흉악범죄에 희생된 이들의 유가족이 겪는 고통은 정말 겪어보지 않은 이들의 상상을 초월한다. 유영철에게 가족 세 명을 잃은 유가족의 증언을 빌자.
처음엔 모든 것이 두려웠다. 원한에 의한 범행인지 돈을 뺏기 위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누군가에게 잘못한 일은 없는지 애써 기억을 더듬어 보기도 했다. 길을 나설 때마다 온몸이 떨렸다. 살인범이 곁에 있지는 않은지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도 가족을 잃었다는 사실을 떠올리곤 이내 길바닥에 주저앉았다. 두려움은 슬픔으로 바뀌었다. 음식도 먹지 못했고 잠도 들지 못했다. 밤마다 한강을 찾았다. 다리 위에서 몇 시간씩 시커먼 물을 내려다보며 우두커니 서 있었다. “이제 그만 뛰어내리자, 아니 조금만 더 시간을 두고 생각하자.” 하루에도 수만 번씩 삶과 죽음을 넘나드는 고통이 이어졌다. 울고 소리를 지르다 아침 햇살을 맞는 일이 반복됐다.
(중략)
9개월이 지난 뒤 유영철이 잡혔다. 이 연쇄살인마가 자신의 가족도 죽였단다. 한편으로 안도감이 들면서도 한편으로 “왜 우리 가족이 이 고통을 받아야 하나” 하는 분노가 커졌다. 화가 치밀 때마다 성경을 베끼기 시작했다. 구약성경을 세 번 썼고 구약과 신약을 합쳐 한 번 썼다. 대학노트 20여 권이 쌓였다. 그제서야 아주 조금 마음이 가라앉았다. 출처
이때까지만 해도 범죄 피해자에 대한 배려나 지원이 너무나 부족해[69] 이분은 온집안에 낭자한 살해된 가족들의 혈흔을 유족인 그 본인이 직접 닦아야 했는데, 그래서 '가족의 말라붙은 핏자국은 눈물로만 닦을 수 있다'는 말도 했다.

이런 고통이 고작 가해자의 죽음 정도로 사라질 수 있을까? 잃은 가족이 돌아오는 것도, 그들이 겪은 일이 사라지는 것도 아닌데? 사형 집행을 해본 교도관도, 가해자가 사형당했다고 피해자와 가족들의 고통이 나아지는 것은 아니었다며 자신이 직접 봐온 경험을 통해 증언했다. 심지어 피해자 유가족이 사형제 폐지 운동가가 된 사례도 있다. 가해자가 사형당한 후 그것이 자신의 상황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아서였던 경우, 좋은 변호사를 쓰면 판결이 달라지는 걸 보고서 '인간이 만든 제도에 완벽한 것은 없다'는 환멸을 느낀 경우,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겪은 입장에서 다른 가족이 그런 일을 겪지 않길 바란다. 사형은 우리 가족을 되살릴 수 없고, 폭력을 지속할 뿐이다'라고 주장하는 경우 등이 있다.

가해자의 악행이 도를 넘거나 피해자가 너무나 참혹하게 살해당한 경우 애초에 유족들이 통쾌함 자체를 느끼지 못 하는 경우도 있다. 루마니아의 독재자였던 니콜라에 차우셰스쿠가 총살당했을 때 거리에서 그의 죽음을 기뻐하는 시민들에 섞인 한 여성은 울음을 터트리면서 "도대체 왜 차우셰스쿠를 그렇게나 쉽게 죽인 거냐? 사람이 겪을 수 있는 모든 고통들을 천천히... 그리고 영원히 겪게 해야지!"라고 했으며, 안드레이 치카틸로에게 살해당한 피해자의 유족 중 한 명은 그가 총살형에 처해졌을 때, 너무 편하게 죽인다며 "내 아들과 많은 피해자처럼 산 채로 찢어 죽여야 했어!"라고 불만을 표했다고 한다. 대한민국의 사건을 봐도 (아직 실제 집행되지는 않았지만) 안양 초등생 유괴 살인 사건의 정성현도 사형을 선고 받았지만, 피해자 중 한 명의 아버지는 '가해자가 사형을 당한다고 한들 우리 딸이 돌아오느냐'고 울분을 터뜨렸다고 하며, 결국 슬픔을 견디지 못하고 건강을 해쳐 5년 뒤 세상을 떠났다. 이러한 예시를 통하여 알 수 있는 건 피해자들은 피해를 받지 않는 것이 가장 좋으며 피해를 받더라도 원래대로 회복할 수 있는 것이 그 다음, 피해를 받았고, 원래대로 회복할 수는 없지만 법률에 따라서 피해를 상쇄할 정도의 배상받는 것이 세번째, 이마저도 어렵다면 법률에 따라 범죄자를 처벌하는 것을 차선책으로 생각하는데, 가해자를 사형하더라도 결국 피해자는 원래대로 회복할 수 있는 것도, 배상을 현실적으로 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니므로 피해자 측에 전혀 위안과 도움이 되지 못할 수 있다.

그리고 오판에 의한 결과와 합해서 보면 더 끔찍한데 피해자 유족들이 범인이라고 사형을 주장해 사형을 시켰는데 알고 보니 진범이 따로 있었고 억울하게 죽게 만든 사람에 대한 처벌이 사형이라면 피해자 유족들도 그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가 문제가 된다. 이렇게 되면 누명을 쓰고 억울하게 사형당한 사람의 유족들은 결국 진범 외에 '엉뚱한 사람을 죽인 책임'을 묻기 위해 또 누군가를 사형시키려고 할 수 있으며 이 경우 사형을 집행한 사람이야 시키는대로 한 것뿐 그 사람의 잘못을 묻긴 어렵겠지만 사형을 선고한 판사와 사형을 구형한 검사, 사형을 선고해달라고 한 유족들 또한 사법살인을 한 가해자가 된 피해자가 된다. 특히 피해자의 유족이야 선고한 것도 집행한 것도 아니지만 최소한 수사기관과 사법기관은 피해자의 진술과 증거를 바탕으로 판단할 수밖에 없다. 이 경우 피해자는 사법기관을 이용한 살인의 간접정범 내지는 교사범이 된다.

또한 무엇보다도 이미지상 '본인이 피해자를 낳은 상황'이 된 만큼 가족을 잃은 피해자인 유족들이 또다른 가해자로 몰려 결국 피해자인데도 비난을 받으며 세상의 눈초리 속에 다시 한 번 가슴에 대못이 박히는 비참한 신세로 전락하는 비극을 낳을 수 있다. 가상의 예시로 7번방의 선물에서 경찰청장이 딸의 죽음에 분노해 무고한 용구를 협박해 사형당하게 만들었고, 실제 사례로 조지 스티니 사건에서 피해자 유족들은 사형을 당한 스티니가 사실 무고했고 진범이 따로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인지부조화를 일으키며 '14세 아이를 사형시킨 것은 논란의 여지가 있다 하더라도, 조지 스티니가 유죄라는 믿음은 변치 않는다'고 주장해 손가락질을 받은 사실이 있다.

자, 생각해보자. 이런 식의 사건이 벌어졌을 시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특히 피해자의 유족들이 여럿이라면 여럿이 사형을 당할 수도 있는 문제이다. 즉, 사람 하나 잘못 잡았다가는 여럿이 피보는 사태로 이어질 수 있다. 이 사태를 만든 제3의 인물이 있다면야 제3의 인물에게 책임을 물으면 그만이고[70] 피해자 유족들의 판단력을 흐리게 만든 피해자를 죽인 진짜 범인이 있으면 더 심각한 사태를 만들었으니 진짜 범인을 사형하는 것으로 어느정도 원혼이라도 달랠 수 있겠지만 그것마저 불가능하면 자칫 여러 집안 전체가 싹 다 날아가는 상황이 될 수도 있다. 물론 이렇게 되면 긍정적으로는 최소한 판사는 함부로 사형을 선고할만한 용기를 못낸다는 것도 불가능하진 않다. 자기가 오판을 내렸다가 목숨으로 책임져야 한다면 함부로 사형선고를 내릴 수 없을 테니까. 하지만 피해자의 유족의 감정에 따른다면 그것도 다 소용없는 일.

무엇보다 사적보복은 범죄자가 교도소에서 출소했을 경우, 혹은 범죄자가 아직 검거되지 않았을 때에만 가능한 이야기다. 이미 여기서부터 말이 안되는 게, 감옥에서 출소하지 않고 종신형을 선고받았다면 사적보복은 차단된다. 물론 한국처럼 우발적 살인이었고 진심으로 뉘우치고 있다는 말을 지어내며 감형해버리고 살인자가 출소한 뒤 피해자의 가족에게 보복성 범죄를 저지르면 어떡할 것이냐고 반론을 제시할수도 있지만, 그건 한국의 법이 이상한 것이지 사형제 폐지를 주장하는 사람이 이상한 것이 아니다. 반대로 생각해서 사형제도가 여전히 존재하고 실질적으로 시행되고 있는 나라에서, 살해혐의로 재판을 받게된 피고인이 사회적으로 힘이 있는 사람이라 무난하게 풀려나버리거나 감형을 받아서 몇년 살다 나와버리면, 결정적으로 사형은 사적보복을 방지하는데 있어서 아무 도움도 되지 않는다. 한마디로 그런 불합리한 요소를 없애거나 법을 뜯어고쳐야 할 문제이지 사형제도가 사적보복 차단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은 아니라는 얘기.

또한 사적 보복을 차단해야 한다는 이유로 사형을 해야 한다는 논거를 극단으로 몰고 갈 시에는 모든 범죄자를 사형시키거나 감옥에 영원히 가두어야 한다는 말도 안 되는 결론도 정당화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범죄 피해자'들을 생각할 때 '선량하고 순한 양과 같은' 완전히 무고한 사람들의 이미지, 죽은 가족과 친구를 두고 울부짖는 사람들의 이미지만 생각하지만 유영철이나 강호순 같은 갱생의 여지가 털 끝만큼도 없는 살인범이 범죄의 피해자가 되지 않을 거란 보장도 없다.[71] 예를 들어서 술집에서 시비가 붙어서 한 쪽이 주먹으로 몇 대 얻어맞았다고 가정하자. 이 경우 가해자는 일반적인 폭행죄로 취급되며 사형당하는 일은 거의 없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그런데 폭행 피해자 측이 아까 말한 것처럼 '극악무도한 싸이코패스이고 또라이'라서, '나는 저놈이 죽지 않는 이상 절대로 분이 풀리지 않는다! 저놈을 사형시켜라! 그렇지 않다면 내가 저놈을 죽이겠다'고 길길이 날뛴다면, '사적 보복의 차단'을 이유로 그 폭행범을 사형시켜야 하는가? 이렇게 말할 경우 사형제 옹호론자들은 '그건 섀도 복싱에 불과하다'고 하겠지만, 그런 식으로 따지면 '정당한 피해자(유족)의 감정'과 '부당한 피해자(유족)의 감정'은 무엇으로 판단할 수 있는가?

4.11. 국민정서법 문제

사형제도를 찬성하는 입장에서 드는 근거로 '죽일 놈은 죽여라'는 대중의 보복심리가 있다고 주장하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이러한 관점이 공적인 법률집행에서 주류가 되면 곤란하다. 국가는 사적제재를 대행해 주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기관이 아니며,[72] 국가에게 개인의 보복심리를 대변할 것을 요구할 때 그것은 사법의 탈을 쓴 인민재판이 된다. 게다가 신성한 법정은 눈 깜짝할 사이에 정치판이 되어버린다. 사법부는 법적인 마음을 갖추고 공평무사한 객관성으로 사건을 심리하고, 가해자의 기본권의 일부를 제한하는 방법으로 응분의 대가를 치르게 하며, 피해자의 아픔을 위로하고, 손상을 입은 사회 전체의 질서와 공익을 회복하는 역할을 담당하는 기관이다. 사법부가 객관성을 갖추고 개입하는 시점에서, 사법부는 이미 "개인의 보복을 대행하고 있다" 라는 의미에서 한참 벗어나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형벌 대중주의(Penal Populism)는 다른 한편으로 "국민의 법 감정" 에 기초하고 있는데, 문제는 이 법 감정이라는 것이 그 규모는커녕 실체조차 명확하지 않다는 것이다. 사형 집행을 전후하여 몇 차례의 국민의식을 설문조사한 사례는 있으나 이것만으로 법 감정의 실체가 드러났다고 할 수는 없다.[73] 오히려 사형이 실제로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거의 알기 어려운 일반인들에게 제도의 찬반을 문의할 경우, 대체로 사형제도가 마땅히 구현하고자 하는 의미에 집착하여 이에 찬성하게 된다.[74] 즉 사형제도의 특징과 성격, 그것이 갖는 헌법정신과의 관계 및 형벌로서의 법적 위상 등을 고찰하지 못한 채로 사형제가 추구하고 지향하는 이상적 목표만을 기준으로 찬성하는 경향이 있다. 게다가 그런 설문조사는 평소에는 하지도 않다가 꼭 흉악범 때문에 사회가 뒤숭숭할 때에만 실시하는 바람에 반쯤은 의도적으로 편향(bias)이 발생하게 된다.

응보의 논리를 살펴보면, 사형제의 시행을 통해 인간의 원초적 욕구인 보복감정을 충족시켜 해당 범죄자의 생명권을 박탈하는 방식으로 사회의 정의를 실현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이 역시 문제가 있는 주장이다. 보복감정을 충족하는 것이 과연 사회의 정의를 실현하는 것과 완벽하게 등치되는 것이라고 단언할 수 있는가? 보정적 차원에서의 시정적 정의(是正的 正義)에 입각할 때 사형은 정의롭다고 보기 어려운 것이다.[75]

사형제 존치론자들이 주장하는 응보를 통한 정의의 실현은 응보가 곧 동해보복이라고 봄으로서 나오는 것이다. 인간의 생명을 잔인하게 살상하였으니 흉악범에게 그로 인해 발생한 법익침해의 정도와 동일한 수준의 처벌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응보를 통한 정의의 실현 또한 인간의 존엄성과 가치를 비롯한 헌법에서 보장한 기본권의 본질적 내용을 침해하지 않는 방법을 통해서 이루어져야 한다. 강간을 저지른 범죄인에게 똑같이 성적자기결정권을 박탈시키지 않고 징역형을 선고하는 것은 응보는 동해보복이 아니며 인간의 존엄성과 가치의 본질적 내용을 보장하기 위함이다. 다수의견 측의 주장은 강간을 저지른 범죄자가 똑같이 강간을 당하게 하는 것이 법익침해의 정도가 작은 징역형보다 더 큰 응보의 효과를 나타내니 헌법에 위반되지 않는다는 위험한 주장으로 귀결될 수 있다. 인간의 생명을 살상한 것에 대한 응보로서 그 범죄인의 생명을 박탈해야 한다는 주장은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며 인간의 존엄성을 말살시키던 함무라비 법전의 시절로 퇴보하자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보아야 한다.

무엇보다 보복의 대행이 형벌제도의 목적 중 일부임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복수심이라는 사적인 감정을 충족시켜줘야 한다는 의미가 될 수는 없다. 감정은 지극히 사적이고 개인적인 것이므로 공적, 객관적이어야 하는 법 집행의 목적이 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처벌이 피해자나 주변인의 감정 충족을 목적으로 한다면, 위에서 거론된 바와 같이 피해자와 유족간의 관계에 따라 비슷한 죄질의 살인범이라도 처벌 수위가 달라져야 한다는 이야기인가?

다소 극단적인 사례이기는 하지만 이런 경우도 가정해 볼 수 있다. 위해의 고의가 전혀 없는 과실로 피해자가 사망한 경우, 더 나아가 피해자의 과실이 사고의 원인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경우라 하더라도, 피해자의 유족은 가해자에게 지극히 큰 분노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경우에도 '유족의 감정을 충족시키기 위해' 가해자를 사형에 처해야 하는가? 예를 들어, 단순한 교통사고로 피해자가 사망한 경우라 하더라도 피해자측 유족들은 가해자를 죽이고 싶다고 생각할 정도로 분노할 수 있으며, 이런 감정 자체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설령 피해자(사망자)측에게 상당한 과실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피해자의 유족 입장에서는 당연히 (부분적인)가해자에게 분노를 느낄 수 있다. 그렇다면, 사망자가 발생한 교통사고에 대해서도 사형으로 처벌해야 하는가? 사형의 근거를 유족의 감정에 두는 사고방식에 따르면 '그렇다'는 대답이 나와도 이상하지 않을 것이다.

4.12. 형벌 무용론 문제

사형제가 억제책이 되지 못한다고 해서 사형을 폐지해야 한다면, 똑같은 맥락에서 다른 형벌들도 범죄를 일소하지 못하니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이냐고 되물을 수도 있다.[76] 이것은 상당히 교묘한 반박이다. 반대론자들은 "사형제의 실시와 범죄율 추이 사이에는 상관관계가 존재하며, 여기에 사형제를 유지해야 하는 근거가 있다" 고 주장하는 찬성론자들의 논리가 제기되었을 때 이에 대한 반박을 제시하고 있을 뿐이다.

만일 찬성론자들이 "사형은 범죄예방이 아닌 사회정의를 바로세우기 위해 존재한다" 고 하는 중인데 반대론자들이 "사형제는 범죄예방효과가 없으니 폐지되어야 한다" 고 말하고 있다면 해당 반박이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사형제를 통해 법을 무서워하게 하여 범죄를 잠재울 수 있다는 식의 주장은 인류 역사에 드문 논리가 전혀 아니고, 근본적으로는 찬성론자들이 범죄예방효과가 있다고 주장하는데서 오는 것이다. 이는 어떤 것이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므로 이에 대한 입증 책임은 기본적으로 존재를 주장하는 측인 찬성론자들에게 있다.
"...국가가 인간 생명을 말살할 권리를 가질 수 있는 유일한 윤리적 근거는 그 권리가 타인의 생명을 보호하거나 존립시키기 위해 필요 불가결하다는 전제 하에서만 가능하다. 그러므로 극형이 잠재적 범죄자에게 억지효과를 발휘한다고 믿는 사람들에게는 위 논리를 증명해야 할 의무가 있다..."
- 한인섭, 〈사형제도의 문제와 개선방안〉, p.8

반대론자들은 사형제가 범죄의 억제책이 되지 못하기 때문에 사형을 폐지하자는 게 아니며, 사형제가 범죄의 억제책이 되지 못하고 더불어 사형제를 폐지해야 할 여러 다른 이유가 있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반대론자들의 자료들을 살펴보면 흉악범죄에 대한 위하력과 사형제 존폐의 문제를 별개의 것으로 취급하고 있으며, 찬성론자들에 대해서도 이 문제를 그렇게 다루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을 자주 볼 수 있다.

4.13. 사형수와 세금 사용 문제

사형수에게 들어가는 세금이 아깝다는 주장이 있다. 사형수들이 먹고 자고 입고 하는 것 모두 결국 국민이 내는 세금이니 사형수들을 빨리 집행해 버리면 그만큼의 세금을 아낄 수 있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이에 대한 반론이 존재하는데, 사형 집행에도 생각보다 돈이 적지 않게 들어간다(식비만 1인당 약 7200만 원). 법치국가에서는 사형 집행을 위한 절차도 밟아야 하기 때문에 이에 대한 비용도 상당하다. 또한 사형집행에 관여하는 사형집행관이나 종교적 예식을 치르는 목사, 스님과 같은 사람들의 트라우마를 해결하기 위한 비용도 상당히 많이 들어간다. 또한 비용 문제는 차치하더라도 사형 집행의 절차라는 것은 말 그대로 마지막의 마지막이므로 생각보다 그렇게 간단하지 않고 시간도 많이 걸린다. 만약 사형집행 절차를 단순화하거나 사법 체계를 축소하게 된다면 무고한 피해자가 나올 수도 있다.

한편으로 아무리 자신이 죽어 마땅한 죄인이라는 것을 알지만, 자신의 의지도 아니고 국가와 법의 이름 아래 강제로 죽음을 당하고 싶어하는 사람은 없으므로 사형수는 죽음을 면하기 위해 계속 재심을 청구하면서 엄청난 법정 비용이 소모되며 실제 집행까지 상당한 시간이 걸릴 수 있다. 예를 들어 미국에서는 티모시 멕베이(오클라호마 연방청사 테러범)나 존 앨런 무하마드(워싱턴 연쇄저격범)처럼 죄질이 극도로 흉악하고 판결에 있어 증거가 명백하며 국민들의 적극적인 사형 집행 요구가 있는 경우를 제외하면 사형 선고가 있은지 보통 수십년 후 사형이 집행되는 경우가 많다. 게다가 사형수가 죽고 싶다는 의지를 보여도, 대한민국[77] 등 국가 차원에서 강제로 3심까지 하는 국가도 존재한다. 미국에선 주마다 다르지만 사형 선고를 받더라도 법적으로 구제 절차와 지연 수단이 많아 집행으로 이어지기 전까지 상당한 시일이 소요되는 게 현실이다. 이 때문에 천인공노할 범죄를 저지르고도 30, 40년 동안 감옥에서 지내다 자연사하는 경우도 있다. 이에 가석방 없는 종신형을 도입하여 생명은 살려 주고 대신 영구 격리시키는 게 사형보다 훨씬 비용절감이 크다고 한다.

즉, 사형제를 존치하고 집행하더라도 '자유형에 비해 세금이 덜 들어가기는커녕 오히려 비용이 더 발생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사형을 집행당해 마땅한 인간이라 하더라도 별 특별한 이유 없이 단순히 비용문제를 들어 그를 사형시켜도 좋다고 하는 주장은 물질만능주의의 인상을 줄 수 있어 인간의 존엄성과 가치를 헌법상 국민의 기본권들 중 최상위에 놓는 우리 헌법의 취지와 상당히 모순적이므로 사형제 존치를 주장하는 측에서도 섣불리 받아들이기가 힘들다.

그리고, 이런 경제적 논리라면 그냥 국적을 박탈하고 가족관계등록부를 직권 폐쇄 및 모든 재산을 몰수한 다음 강제추방형으로 집행하는 게 행정비용 절감의 측면만 놓고 보면 가장 저렴하다. 무주지에 떨궈버리든, 구명조끼만 입혀서 포인트 네모 가운데 던져놓든 말이다. 미필적인 고의라는 면에서 생명권을 직접 박탈하는 사형과 크게 다를 바 없으나 사형집행에 실패해도 죽을때까지 직접 사형을 집행하는 게 거의 대부분인 사형제도와 다르게 남극 한복판이나 모래사막뿐인 비르 타윌, 아무것도 없는 공해상의 암초나 무인도에 던지거나 극단적으로는 우주공간으로 사출하거나 태평양 바닷물에 구명조끼만 입혀 던져놔도 생존 가능성이 완전히 0%는 아님으로 "직접적"인 생명권 침해는 아니라고 할 수 있겠다. 극단적으로는 국제적으로 여러 나라들끼리 합심해서 소말리아나 마다가스카르 일부 지역처럼 주권조차 제대로 행사되지 못해서 사실상 무정부 상태라 봐야 하는 통제불능인 지역에 모아두고서 무법지대에서 알아서 살으라는 방법도 생각해 볼 수는 있다. 실제로 19세기까진 이 방법을 즐겨 썼고, 경우는 좀 다르지만 호주는 예산 부족을 이유로 범죄자도 아니고 엄연히 자국민에 준하는 대우를 하라고 국제법상으로 지정된 난민에 대해서도 파푸아 뉴기니 수용시설로 보내서 이짓거리를 하고 있다. 실질적으로 뉴기니 정부는 그 많은 난민에 대한 관리와 통제, 배급을 할 능력이 없지만 중앙정부가 제 기능을 못하는 전형적인 후진국 답게 돈만 받아먹고 아몰랑 하고 있다. 그 결과물으로 뉴기니 난민수용소는 완벽히 통제불능이 되었으며 식량 구하려고 부족전쟁하는 원시사회마냥 허구한 날 생계형(!) 살인, 방화, 약탈이 일어나는 배틀로얄 실사판이 된 적이 있다고 한다. 물론 국제사회와 저런 꼬라지 보고도 난민 받기 싫어서 방치하냐며 그럴거면 차라리 난민심사 엄격히 하고 받지 말라고[78] 욕을 잔뜩 처먹은 호주는 이 개판을 지켜보지 못했기에 참다참다 마침내 칼을 빼들었고, 요즈음은 그래도 텐트 하나씩 던져주고 굶어죽지 않을 만큼의 식량과 식수"만" 준다곤 한다. 수용소 생활임은 여전하지만.

물론, 단일국적 자국민에 대한 국적 박탈 및 추방이 국제법상으로 지양되는 행위라는 점은 있지만, 말레이시아와 같이 실제로 행하는 국가들도 엄연히 있고, 어디까지나 주권 행사기 때문에 비판은 할 지언정 막을 수 없다. 그리고 어디까지나 "생명권의 보호"와 "행정비용의 절감" 이라는 측면만 놓고 보면 이게 가장 우월하다.

하지만 상술했듯이 반대로 죄수를 먹여살리는 쪽이 사형시키는 쪽보다 비용이 많이 들 때도 있기에 많은 논쟁이 필요한 주제이다.

4.14. 사형 집행의 형평성 문제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잊는 사실이 있는데 사형수의 범죄가 악독하고 세력이 클수록 역으로 사형시키는 것을 더 어렵게 만든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국가의 원수나 주요 인물로서 대규모 살인을 저지른 독재자 등의 범죄는 그 스케일이 단순 연쇄살인범은 따위로 만드는 수준의 큰 범죄자이기 마련이다.[79] 그러나 그럴수록 범죄자 지지자의 반발이라는 정치적 이유 때문에 사형을 어렵게 만든다. 예를 들어 사담 후세인의 사형은 무리해서 집행한 끝에 이후 이라크는 엄청난 후폭풍에 시달렸다.[80] 하물며 통일 이후 세계 최악의 지도자로 꼽히는 김정은조차도 처형이나 종신형은 커녕 국제재판에 넘기기도 어렵다는 예측이 나오며[81] 이는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일으킨 블라디미르 푸틴에 대해서도 동일하다. 실제로 태평양 전쟁의 명백한 전범인 쇼와 덴노는 그를 처형하면 일본을 다루기 어려워진다는 이유로 불기소 처분되었다. 피노체트도 재판없이 6년간 가택연금만 당했고, 호네커도 솜방망이 처벌만 받고 칠레로 축출되었다. 내란죄와 삼청교육대로 학살을 저지른 전두환은 사형판결 후 아예 항소심에서 무기로 감형까지 되었다가 사면까지 받는다. 그 사면도 다분히 정치적인 이유로, 당시 치열한 대선 경쟁이 벌어졌던 이회창 후보와 이인제 후보의 전두환 사면 공약에 김대중 후보도 정치적으로 철천지 원수인 전두환을 사면한다는 공약을 내세우기 이르는 코미디가 벌어진 것이다.[82] 이런 악독한 범죄자들을 사형시키려면 패망한 나치독일, 일본제국처럼 그 세력이 확실히 일소되거나 지지기반이 완전히 사라져야만 하는데, 이런 상황이 잘 나오질 않는다.[83]

거대 범죄조직이나 광신적 사상 추종자들의 우두머리급 죄수의 경우도 그렇다. 이런 부류의 경우에는 사형시킬 경우 그 추종자들에게 순교로 비춰져 오히려 그 활동을 부추길 우려가 있다. 실례로 알 카에다옴진리교 등을 들 수 있다. 아사하라 쇼코의 경우에는 결국 사형이 집행되긴 했지만, 옴진리교 끄나풀들이 전부 씨가 마를 때까지 내버려 둘 수밖에 없었다. 도쿄 지하철 사린 사건이 1995년에 일어났는데 아사하라 쇼코를 2018년 7월 처형할 때까지 23년이나 걸렸다. 이 정도면 세금이 아깝다는 주장도 의미가 없어지는 수준이다.[84]

간첩의 경우에도 사형시키기에는 곤란한데 김신조김현희 등의 경우 반국가단체가 낳은 인물이며, 또한 이들로부터 기밀을 얻고, 역으로 이들을 이용하여 심리전을 해야 되는 입장이라서 쉽지가 않다. 이와 같은 간첩은 투항 이후 일정기간 복역하다가 사면받고 일반시민으로 살아가고 있다.[85]

결국 이런 죄수들은 차라리 엄중한 감시하에 영구히 가둬두는 쪽을 택하는데, 이 경우 다른 일반 사형수들과의 형평성 논란이 일어나기 쉽다. 전자는 '정치적 보복'이니 말할 것도 없고, 후자에 속하는 거대 범죄조직의 죄수의 경우 사형제가 있다면 더더욱 죽어 마땅한 사람들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위와 같은 이유 때문에 오히려 죽이기 어렵다는 딜레마에 처해서 사형제의 의의가 퇴색된다. 오히려 이런 문제를 들어 사형집행을 그냥 다 보류시켜버린 한국이 이 점에서는 낫다고 할 수 있는 셈이다. 참조: 정신이상자를 사형시켜서는 안 됩니다.

4.15. 존폐는 결국 입법의 영역이다

사형제도를 법률상 존치시킬 것인지 또는 폐지할 것인지의 문제는 사형제도의 존치가 필요하거나 유용한지 또는 바람직한지에 관한 평가를 통하여 민주적 정당성을 가진 입법부가 결정할 입법정책적 문제이지 헌법재판소가 심사할 대상은 아니다.
2008헌가23

헌법재판소는 사형제도에 대하여 합헌 결정을 내렸지만, 이를 반드시 존치해야만 한다는 입장은 아니다.

4.16. 범죄 발생에 대한 국가 및 사회의 책임

공권력을 행사하여 범죄좌인 한 사람의 생명을 뺏는다는 것은 결국, 국가가 정의의 편에 서서 일방적 심판을 벌이겠다는 것인데, 그 '정의로운' 심판을 내리는 국가가 범죄자의 범죄행위에 대하여 '일말'의 책임도 없다고 할 수는 없다.

물론 어떤 사람이 악마와 같은 짓을 벌였고, 싸이코패스이고, 갱생이 불가능한 존재일 수 있다. 하지만 그러한 살인충동을 일으키는 악마적 존재가 탄생한 배경에는 (찬성론자의 의견에 따라) 그 범죄자가 가진 악마적 유전자가 한 축을 담당한 동시에, 또 다른 한 축으로 '악마적 유전자의 발현'이라는 측면이 별도로 존재한다. 범죄유발율이 높은 유전자를 보유한 것과, 그러한 유전자를 실제로 발현시키는 것은 구별해서 살펴보아야 할 문제이다. 실제로 범죄자(싸이코패스)의 뇌는 일반인의 뇌와는 구조적으로 다르지만, 그러한 '문제적 뇌'를 가진 모든 사람이 살인자나 범죄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유전적 요소 위에 환경적 요소[86]가 결합되었을 때 비로소 엽기적 살인자가 탄생하게 된다. 역으로 말하면 '문제적 뇌'를 가졌더라도 인격이 형성되는 아동기 시절에 충분한 정서적 안정과 타인과의 바람직한 교류를 건전하게 경험한다면 오히려 그러한 범죄적 문제가 터지지 않고, 오히려 사회적으로 큰 공헌을 하는 인물이 될 수도 있다. 일례로, '문제적 뇌'를 연구하여 밝힌 제임스 팰런 교수는 정작 본인 역시 그러한 뇌를 가졌다는 걸 알고 한 동안 충격에 빠졌었다고 한다.[87][88] 즉, 같은 유전자를 가졌는데 한 사람은 악마가 되었고 한 사람은 교수로서 사회에 공헌한 것인데, 이것은 환경적 차이에 따른 결과이다. 그러면 그 '문제적 환경'을 제공한 책임자는 그들의 부모 이전에, 기본적인 민생환경을 책임지는 사회와 국가이다.[89]

즉, 이런 관점에서 볼 때 그 '악마적 존재'에게 그러한 유전적 요소가 '발현'될 만한 환경을 마련해준 것은 다름아닌 '국가'이며 '사회'이다. 사회제도적으로 손길이 닿지 않아 학대가 이루어진 그 장소에, 유전적 요소가 결합되었을 때 싸이코패스적 범죄자가 탄생한 것인데, 유전과 환경이라는 두 양 축에서 '환경'이라는 큰 축을 제공해버린 또는 그러한 '열악한 환경'을 방관해버린 국가가 '사형'이라는 '극단적 처벌'을 내리는 게 정의롭냐는 것은 둘째치고서라도 과연 타당하냐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사형 찬성론자들의 흔한 주장인 "왜 내 세금으로 흉악범죄자를 먹여 살려야 하느냐?"에 답하자면, 그러한 존재가 탄생한 것에는 사회와 국가에도 책임이 있기 때문에 그 책임분을 세금으로써 감수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또한 그러한 악마적 범죄자를 '그저' 처단하는 것은 국가가 '문제가 되는 환경 제공'이라는 실책을 마주하지 않고자 회피하는 꼴이 되는 것이며, 만약 그 국가적 실책과 책임을 담담하게 지려 한다면, 오히려 그러한 악마적 범죄자들을 '살려두고'[90] 연구 및 분석하여, 사회적으로 그러한 유전자가 발현되지 않도록 사회질서를 정책적으로 바르게 수립하는 것이 바람직한 길일 것이다. 이러한 국가적 책임의 관점에서 다시 말하자면 "왜 내 세금으로 흉악범죄자를 먹여 살려야 하느냐?"라는 질문은 사형 폐지론자들에게 던질 것이 아니라, 보편적 복지 및 한 개인의 정서적 안정을 포함한 기본적인 민생 안정의 책무를 수행하지 못하여 그러한 범죄자를 양성하는데 일조한 대한민국 정부의 책임을 지적하기 위해 던져야 하는 질문이라고 볼 수 있다. "대체 보편적 민생과 복지를 책임질 국가는 뭘 했길래, 이런 식으로 내 세금을 나가게 하느냐?" 정도의 의미이다.

이런 점에서 사형제 찬성론자들이 주장하는 '사회와의 영원한 격리'를 위하여서도 '사형'만이 능사가 아니라, '가석방 없는 종신형'이 오히려 더 적절한 수단이 될 수 있다. 공권력으로써 '사형'을 집행하는 행위에 대하여는 국가에 대한 책임공방 및 정의공방이 펼쳐질 가능성이 존재하기 때문이며, 반면 '가석방 없는 종신형'의 경우, 사회와의 영원한 격리 뿐 아니라, 그저 '살려둠'으로써 얻을 수 있는 장점 또한 취할 수 있기 때문이다.[91]

5. 기타 의견

5.1. 가석방 없는 종신형 도입

사형을 폐지한다면 그대로 상대적 종신형을 최고 형벌로 할지, 아니면 절대적 종신형을 만들어 사형의 대체 형벌로 할지도 논할 거리가 된다. 현재 한국에서는 절대적 종신형으로 대체하자는 주장이 더 큰데, 가석방 없는 진정한 의미의 종신형이 없으니 어쩔 수 없이 사형제를 유지해야 한다는 의견을 가진 사람이 꽤 많으며, 사형 반대 측에서도 형벌 중 생명형을 반대하는 것이지 자유형을 반대한다는 것은 아니므로 이 스탠스인 사람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실제로 단순히 사형 찬성/반대로 여론을 조사했을 때는 언제나 찬성 쪽이 높았던 것과는 반대로, 사형을 대체할 수 있는 적절한 형벌을 도입하면서 사형을 폐지하는 경우로 여론조사를 시행했을 경우에는 폐지 찬성 쪽이 유의미하게 높아졌다.

가석방 없는 종신형 도입 중에서는 러시아흑돌고래 교도소처럼 사형을 하지 않는 대신 사형에 맞먹는 고통을 주는 종신형을 도입하는 방안도 있다. 러시아 법무부는 이런쪽으로 아주 발달되어 있어서 흑돌고래 교도소를 만들어서 거기 수감되는 죄수는 흉악범 아니면 아예 수감시키지 않고 이는 다른 슈퍼맥스급 교도소와는 다르다. 당연히 흑돌고래 교도소는 가석방이 없으며 중요한 것은 교도관이 수감자에게 구타 가혹행위를 자행하는 게 그냥 일상생활인 곳이다.

다만 절대적 종신형 자체는 그 또한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는 제도이다.
  • 1) 국가가 생명권 박탈을 하지 않은 점, 그리고 오판이 밝혀졌을 때 되돌릴 수 있을 가능성이 사형보다는 높은 점은 사형제보다는 낫지만, 사형제 폐지론의 논거로 드는 다른 논리 대부분에는 절대적 종신형 또한 걸린다.[92]
  • 2)형량 인플레가 상당히 일어난 상황에서, 절대적 종신형이 가석방 가능 무기징역을 대체하면서 형량 인플레를 부채질한다.
  • 3) 이미 가석방 심사 요건을 까다롭게 관리하고 있기 때문에, 영구 격리가 필요하다면 그냥 가석방 허가를 내주지 않으면 그만이다 정도이다.

복역기간 20년이 지나면 가석방 심사가 가능한 종신형과 가석방 없는 종신형을 절충하여 가석방 허용 최소 복역기간을 50년으로 크게 늘리는 강화된 종신형을 도입하자는 의견도 있다.#

5.2. 전범 등 아주 특수한 경우의 사형제

평시에는 사형을 존치하지 않더라도 전시와 같이 사회가 제 역할을 하기는커녕 오히려 존립의 위기에 처해 있는 극단적으로 불안정한 상황에서는 사형이 정당화된다는 주장도 있다. 실제로도 평시에는 사형을 폐지하되, 전범 등 극히 예외적인 경우는 사형을 선고할 수 있는 나라도 있다.[93] 이는 엄밀한 의미에서는 결국 사형제에 찬성하는 의견에 해당한다.

물론 그런 극단적인 상황이라도 사형은 정당화될 수 없다는 주장도 있다. 오히려 그런 상황일수록 오판이나 악용이 일어나기 쉽기도 하다.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서 반전 시위대에게 러시아가 사형을 재개할 수도 있다고 협박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 의견은 일관되게 사형제에 반대하는 의견에 해당한다.

군형법 상의 사형제의 경우, 평시에 한해서라면 사형 폐지론자 대다수가 일관되게 반대한다. 군형법의 적용 대상인 군인과 군무원에 대해서만 민간인과 다르게 사형이 정당화될 근거가 약하기 때문이다. 특히 징병제 국가의 경우,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강제로 '사형을 선고받을 수 있는 신분'이 되는 문제까지 있다. 실제로도 군형법에만 사형제가 있거나, 군인 사형수만 사형을 집행하는 나라는 없다. 미국 같은 경우는 연방정부와 일부 주정부는 사형을 집행하는 와중에 오히려 군인에 대해서만 사형 집행을 60년 가까이 중단하고 있는 상태이고, 대한민국도 군인에 대한 사형 집행이 중단된 것이 1986년 이후로, 민간인의 경우인 1997년보다 10여 년이나 이르다.
대한민국 헌법 제110조
비상계엄하의 군사재판은 군인·군무원의 범죄나 군사에 관한 간첩죄의 경우와 초병·초소·유독음식물공급·포로에 관한 죄중 법률이 정한 경우에 한하여 단심으로 할 수 있다. 다만, 사형을 선고한 경우에는 그러하지 아니하다.

사형제의 합헌성을 논할 때 등장하는 헌법 110조 4항을, 모든 경우에 사형을 허용하는 것이 아니라, 군사재판에서만, 혹은 비상계엄하의 군사재판에서의 사형만 허용하는 것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94] 이 경우는 단계적 폐지 주장에 가깝긴 하나, 넓게 보면 이 경우에 들어갈 것이다.

5.3. 종교적 관점에서의 사형제도에 대한 비판

1995년 살인과 특수강간 등의 혐의로 기소되어 사형을 선고받은 흉악범 한 명이 사형제도에 대한 헌법소원심판을 청구하였고 헌법재판소는 사형제도는 합헌이라고 결정하였다. 당시 조승형 재판관은 김진우 재판관과 함께 사형제도가 위헌이라는 소수의견을 냈으며 그 과정에서 종교적 관점에서의 반대론을 제시하였다.
사람은 창조주에 의하여 피조된 신비스러운 존재이며 사람의 생명은 창조주 다음으로 가장 고귀하고 신성한 것이므로, 사람의 생명을 박탈하는 일은 창조주만이 가능할 뿐 창조주가 아닌 사람은, 그 어떠한 권위를 가지고서도, 사람이 만든 어떠한 법과 제도를 통하여서도, 불가능하다고 할 것이다. 만약 이것이 가능하다면 이는 창조주의 권위보다 더 큰 권위를 찬탈하는 것이 되며 창조주의 구원(救援)을 거부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람의 생명에 대하여서는 부정적인 어떠한 사회과학적 평가나 법적인 평가도 허용되어서는 안된다고 할 것이며, 이와 같은 평가로 세워진 사형제도는 허용될 수 없다고 할 것이다(사형제도의 존치론자중 혹자들은 성경 창세기 9장 6절[95], 출애굽기 21장 24-25절[96]의 성구를 인용하고 있으나, 이 성구들은 보복의 관념을 어느 경우라도 정당화한 것이 아니라 신체에 한하여 보복이 가능함을 말하는 보복의 한계를 정한 것이라 보이며 생명에 대한 보복이 가능함을 정한 성구라고는 이해되지 아니하므로 그들의 인용은 일고의 가치도 없다).
95헌바1

5.4. 1심에서는 사형을 선고하지 않는 관점

미국에서 사법거래를 통해 흉악범들 중 상당수에게 이런 방식으로 자백을 받아내어 종신형에 처하는 경우가 많다. 국가 입장에서는 범인을 확실하게 잡을 수 있고 유럽으로 도주한 범죄자도 인도 받을 수 있고, 재판 비용을 줄이게 되는 이점이 있고, 흉악범 입장에서는 목숨을 건질 수 있어 이득이다. 하지만 피해자의 경우 이 의견을 동의하지 않는다. 또 사형을 우려한 피의자가 자신이 저지르지도 않은 죄를 뒤집어쓸 가능성이 있다.

5.5. 대한민국이 처한 특수성에 기반한 논거

  • 사형 찬성
국제사회 차원에서의 불이익과 관련해서 현재 법체계는 다르지만 일본과 마찬가지로 사형제를 존치시키고 여전히 시행 중인 미국의 경우, EU를 포함, 무려 100여 개 국가와의 범죄인 인도조약을 체결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것이 순수한 인권증진을 위한 노력이 아니라 인권을 내세운 국제적 힘의 관계, 정치논리이며 인권의 이름으로 보기 좋게 포장된 유럽의 내정간섭, 신제국주의라 비판하기도 한다. 순수하게 인권 증진을 도모하는 차원에서 이러한 국가 간 불이익을 준다고 한다면 미국의 국력이 일본보다, 그리고 EU 자체보다 상대적으로 강력하다해서 다른 기준을 적용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또한 북한과의 체제경쟁 시 경제력뿐만 아니라 민주주의와 인권이 한국의 정체(政體)로서 사형 집행의 부활이 체제경쟁에 매우 불리하게 작용할 것이란 주장에 대해서도, 인권과 결부시켜 볼 때 사형 집행의 법리적 타당성에 대해 법학자들 간에 찬반양론이 갈려 어느 한쪽이 완전한 우위를 점하고 있지 않는 상황인데, 단순히 집행을 한다는 결과만 보고 그것이 본질적으로 엄청난 인권과 민주주의의 후퇴를 일으킬 것이라 단정 짓는 것 역시 섯부른 예측이라고 본다. 아래의 EU와의 관계 때문에 사형이 불가능하다는 주장은 사실과 다른 부분이 있다.#
  • 사형 반대
국제사회의 비난이나 국격 추락은 둘째 치더라도, 특히 유럽연합국가들은 그 어떤 범죄자라도 사형을 선고당할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는 범죄자가 유럽 연합으로 도주한 경우 절대 타국으로 인도하지 않도록 되어 있다. 그러니까 사형을 집행할 경우, 범죄자들이 유럽으로 도망가도 잡을 방법이 없게 되는 것이고, 이는 일본의 현실이기도 하다. 일본은 대한민국과 미국 단 2개의 국가와만 범죄인 인도조약을 맺고 있는데 비록 섬나라라 국외로 탈출하는 것이 쉽지는 않지만, 외국, 특히 유럽으로 도주하면 해당 국가와 공조하기가 어려워 수사하기가 굉장히 난감한 상황이다. 거기에 유럽과는 한-EU FTA를 체결할 때 유럽으로 도망간 사형이 선고될 수 있는 범죄를 저지른 범인을 대상으로는 범죄인 인도조약에 따라 국내로 송환된 범인에 한해 사형집행을 하지 않는다는 약속을 했기 때문에 이들을 대상으로는 집행을 재개하기 어려운 상황인 것도 사실이다. 또, 북한과의 숙명적 체제경쟁이 이어지고 있는 상황을 보는 관점에서 이제 한국은 경제력만으로 정당성을 주장하기는 어려운 21세기에 살고 있으며 남북 외교전에서 한국이 정당성을 지니는 것이 인권과 민주주의인데, 사형 집행이 부활할 경우 유엔은 물론 국제적으로도 인권 퇴보라는 지적이 이어질 것이고 이는 남북관계에서 국제 외교상 우위를 점하는데 걸림돌이 될 가능성이 높다. 위에서 불가능 하진 않다고 주장하는데 막상 사형시켰다가 EU와의 관계가 악화된다면 그뒤에는 짧은시간내에 되돌릴 수는 없으며 그게 얼마가 되건 악화될 것은 불보듯 뻔한일이다. 일단 사형시켜보고 EU가 어느 선까지 관계를 악화시킬지 운에 맡기자는 식이라면, 국가 단위의 일로 그런 도박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5.6. 가중처벌로서의 사형

법정 최고형을 종신형으로 규정하되 탈옥, 수용시설 내 추가범행 등등 종신형을 이미 선고받은 상태에서 또 다른 범죄를 행했을 경우에만 사형을 집행하는 절충안을 생각해볼 수도 있다. 물론 이 의견을 원론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사형 존치에 가깝다.

5.7. 누범에 대한 사형

끔찍하고 잔인한 범죄를 저질렀다고 해서 바로 사형시키는 것이 아니라 처벌을 받았음에도 반복해서 범죄를 저지르는 자에 대해서 사형을 집행하는 것. 달리 말하면 국가에서 여러 번의 교화 기회를 주었음에도 행실이 달라지지 않는 자에 대해 사형을 실시하는 방안이다. 이 때는 판사가 사형을 선고는 하되, 실제 집행은 정신과 전문의 등 관련 전문가로 이루어진 별도 기관을 통해 교화가능성을 판단하여[97] 교화가능성이 거의 없음을 확인받은 후 집행하는 식으로 시행할 수 있다.

이 경우 자기가 저지르지 않은 범죄로 사형을 선고받더라도 실제론 그 이전부터 범죄를 저질러왔고 앞으로도 범죄를 저지를 가능성이 높은 자가 사형을 당하는 셈이므로, 범죄와 평생 연관이 없는 무고한 시민이 억울하게 범죄자로 몰리거나 가해자가 된 피해자 문서처럼 살해 피해자한테 피해를 받던 사람이 우발적으로 복수를 했다고 해서 사형을 당할 일은 극히 드물어질 것이다. 그리고 반복적으로 범죄를 저지른 자에 대한 사형이므로 재범률 감소에도 도움을 줄 여지가 있다.

하지만 범죄를 저지를 가능성이 높은 자가 사형을 당하는 셈이므로 범죄와 평생 연관이 없는 무고한 시민이 사형을 당할 일이 드물어질 것이라고 한 것은 나만 억울하게 사형당할 일 없으면 상관없다라고 하는 것과 다름이 없으며,[98] 사회에서의 격리는 종신형으로 충분히 가능하다는 반박이 적용될 수 있다.

6. 참고 영상

사형제도에 관한 법륜스님의 입장. 역시 위의 동영상과 같이 보면 좋다.

2013년 1월 22일, MBC 100분 토론에서 <사형死刑, 그 끊이지 않는 논란>이란 부제로 사형제 존폐에 대한 토론이 있었다. 패널 모두 법학자 및 법조계(전원책) 인사여서 그런지 사형에 대한 법리학적 해석이 주를 이룬다. 본 토론의 쟁점을 정리하자면 사형제가 과연 범죄의 일반예방적 실효성이 있는가의 여부와 사형과 정의의 관계에 대한 법리학적 고찰을 중점적으로 토론하였다. 중곡동 주부 살인 사건 피해자의 남편을 사전 인터뷰한 내용도 들을 수 있어 범죄피해자 유가족의 심정도 일정부분 참고할 수 있다.


[1] 1993년에 여자 초등생을 강간하려다 미수에 그친 뒤 목 졸라 살해하고 시신을 장작더미에 내던진 뒤 불태운 잔인한 살인범이다. 이전에 일어났던 유치원생 2명에 대한 혀 절단 사건의 범인인 12살 초등학생에게도 범행을 사주한 것으로 알려져 1심에서 사형을 선고 받았지만, 2심에서 혀 절단 건은 무죄가 되어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다. 1999년에 교도소에서 난동을 부리기도 했다.[2] 인천지방법원 부천지원 2018. 12. 28. 선고 2018고합158, 159(병합), 200(병합), 2018전고8(병합) 판결, 서울고등법원 2019. 5. 16. 선고 2019노203, 2019전노14 판결, 대법원 2019. 8. 14. 선고 2019도7463, 2019전도66(병합) 판결 기사 위헌법률심판 제청신청에 대해 재판부가 “사형은 가장 강력한 범죄 억지력을 갖고 있다”며 위헌법률심판제청 신청을 기각하자 직접 헌법소원을 청구한 것이다.[3] 둘 다 무기징역을 받긴 했지만 판결 당시 한국은 실질적 사형 폐지국이 아니었고, 때문에 지금보다 사형 선고가 많았다. 그렇기에 간발의 차이로 사형 판결을 면했다고 볼 여지가 충분히 있다.[4] 굳이 사형이 아니어도 좋다. 억울한 누명을 쓰고 처벌을 받았거나, 징계를 받은 것도 포함이다.[5] 단적으로 1950~60년대 초까지만 하더라도 0점대 살인율을 유지하며 당대 최고의 치안을 자랑한 영국은 1965년 사형 폐지 이후 그 수치가 점차 증가하더니 1970년대 이후에는 살인율이 1명대를 상회하고 지금까지 그 추세가 이어진 반면 196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3명대 이상의 상당히 높은 살인율을 보인 일본은 경제 발전과 사형 집행을 비롯한 강력한 법 조치가 결합된 결과 현대에는 0.2명대라는 세계 최저의 살인율을 자랑하는 국가가 되었다.# 이는 실제 일본 내 사형 옹호론자들의 논리이기도 하다.[6] 멀리 갈 것 없이 사형보다 급이 낮은 형량을 가하는 범죄조차도 재판이 열린 자리에서 바로 형량을 선고하는 것이 아니고 수차례의 재판과 수많은 증거자료와 진술자료의 검토과정을 거친다.[7] 러시아는 아예 사법살인이라고 부를 수조차 없다. 사법살인이라고 하려면 형식적으로는 사법적 절차(재판)를 거쳐야 하는데, 러시아의 소위 '방사능 홍차'는 재판조차도 안 하기 때문이다.[8] 실제로 영국에서 티모시 에반스(Timothy Evans, 1924~1950)라는 남성이 경찰의 부실한 수사로 자신의 아내와 13개월 딸을 살해했다는 누명을 쓰고 처형당한 후 3년 뒤인 1953년에 진범이 밝혀진 사건이 발생했는데, 이 사건으로 영국에서는 사형제에 대한 인식이 악화되어 결국 1965년에 아예 사형제를 폐지해야 했다.[9] 과학수사에 사용되는 비용이 변수로 작용할지 모르지만 이마저도 기술 발전의 영향으로 비용이 점점 줄어드는 추세다.[10] 2012년 기준 살인사건은 1,029건 발생하였다.[11] 비용적인 면에서 사람을 구하고, 그 사람에게 사형 방법을 제대로 교육하는 교육 비용 등 세금은 다소 들 수 있다.[12] 이게 적용되면 농담으로 테교 폭파시키고싶다. 라고 했는데 사형이 집행될 수도 있다.[13] 95헌바1, 2008헌가23[14] 이재상 형법총론 §40 15[15] 생명을 침해한 경우 뿐만 아니라 국가를 외국에 팔아넘기거나 반역을 저지르는 경우 등도 해당될 수 있다.[16] 이를 절대적 종신형과 상대적 종신형으로 나누면 된다는 주장이 있지만 애초에 무기형이라는 뜻 자체를 생각해보면 의미가 없는 주장이다. 무기징역 참조.[17] 다만 이 '요구'라는 것이 극단적으로 나타나는 경우 생계형 절도, 성희롱 등등 살인에 비해서는 훨씬 잡범 수준인 경우에도 사형을 요구하는 비난이 있기에 주의해야 한다.[18] 아주 대표적인 예시로 전두환하나회가 있다. 전두환은 전자와 후자 모두에 속했다.[19] 이 부분 때문에 미국의 경우 사법거래로 사형을 받을만한 인물들이 사형되지 않는 경우가 있어 이러한 인물들을 ADX 플로렌스 교도소라는 특급 교도소에 수감시킨다. 한국의 경우 비슷한 경북북부교도소(청송교도소)가 있다.[20] 그렇다고 능지형같은 걸 도입하는 건 인권전반적으로 후퇴해야 가능해진다.[21] 삶의 의미를 살인으로 얻었고, 이후에 살인을 저지르지 못하게 되자 빨리 자신을 사형시켜 달라고 탄원서를 내다가 끝내 스스로를 살해해 버린 정남규가 그 예.[22] 실제로 일부 사형수들은 의외로 사형제를 원하는 편이며 가석방 없는 종신형은 더 끔찍하다고 여기는데#, 해당 기사는 가석방 가능한 무기징역으로 대체하자고 주장한다. 아이러니하게도 가석방 없는 종신형을 통해 사형보다 더한 형벌을 내릴 수도 있다는 것이다.[23] 빛을 충분히 주지 않아 생긴 생리학적 변화와 자아성취감의 거세를 통한 지독한 외로움과 무력감, 그리고 이러한 환경에서 죽을 때까지 살아야 하는 것을 형벌로 내리는 것이다.[24] 애초에 사이코패스는 상대의 감정을 못 느끼는 거지, 자신의 감정도 못 느끼는 것은 아니다. 다만 타인에 대한 공감 능력이 희미하다는 점 때문에 성격이 이기적으로 되기 쉬운 편이다.[25] 말마따나 죽으면 더 이상의 벌을 내릴 수도 없다.[26] 과거에 사형수의 감형이 있던 시절에도, 감형을 했다고 문제가 된 경우는 거의 없었다. 감형하면 심한 반발이 있을 것 같은 사형수는 처음부터 감형을 안 했기 때문이다.[27] 다른 예비 범죄자가 있다면 그도 범죄를 저지를 수 있으므로 본보기로 벌을 주어야 한다. 이는 벌의 역할 중, 악행의 예방에 해당한다.[28] 다시 말하지만, 이 쪽이 예외다.[29] 같은 취지: 문광삼(2015), 헌법학, 제2판, 삼영사. p. 342[30] 대부분 정부-국민 관계가 피위임자-위임자 관계의 특성이 강한 유럽 선진국들이다. 이에 반해 사형제를 유지하고 있는 국가(예를들어 중국)들의 정부-국민 관계가 보호자-피보호자 관계의 인상이 강한 것과 비교해볼 만하다.[31] 더 구체적으로는, 이러한 논리에 따라 위헌성을 판단할 경우 사형제도를 언급하고 있는 헌법의 규정 (제 110조) 자체가 위헌적이라는 결론을 도출할 수 있는데, 헌법 규정이 위헌적이라는 것 자체가 모순적일뿐더러 설령 그렇다 해도 헌법 규정 자체에 대한 위헌 판단은 헌법재판소의 위헌심판이 아니라 개헌을 필요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헌법재판소로서는 위헌성을 섣불리 긍정하기 어렵다.[32] 방화범의 집이 없다면 똑같이 처벌할 방법이 없다.[33] 칼로 베어 죽였다면 똑같이 칼로 베는 방식으로 사형을 내리고, 폭탄 테러로 죽였다면 그 테러범을 폭탄으로 터트려 사형을 집행하고, 불을 질러 죽였다면 화형을 시키는 등.[34] 단적으로 경찰청 사람들만 봐도 살인범이 유기징역으로 복역하다가 출소해서 재차 범죄를 저지르는 에피소드가 수두룩하게 나왔다.[35] 가령 심장이나 폐 기능을 일부 제거한 다음 생명유지장치를 설치한다면 생명권의 제한이라 볼 여지가 있겠지만 심장과 폐, 뇌 기능을 제거한 뒤 생명유지장치도 설치를 하지 않는다면 이는 침해로 볼 여지가 있다.[36] 움베르토 에코가 에세이집 '세상의 바보들에게 웃으며 화내는 방법'에서 이를 보충하는 주장을 한 바 있다. 위하력을 위해 사형제의 존치를 주장한다면, 그 위하력을 극대화하기 위한 사형 집행의 공개에도 동의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느냐는 것.[37] 공개처형이 이러한 논리에서 이루어진다. 공개처형이 남아있는 나라가 있는데, 대표적인 나라로 중국이 있으며, 중국은 실제 사형 장면을 TV로 생중계하기도 한다. 2008 베이징 올림픽을 계기로 공개처형을 중단했던 중국 정부가 2020년에 공개처형을 집행하고 TV로 생중계했고, 중국 내에서도 논란이 되었다. #[38] Do executions lower homicide rates?: The views of leading criminologists - Michael L. Radelet & Traci L. Lacock, North Western University)[39] 이하 한인섭, 〈사형제도의 문제와 개선방안〉, p.15[40] 선량한 일반인은 사형제가 없어도 이성이 날아가버릴 정도로 극악한 상황에 처하지 않는 이상 흉악 범죄를 저지르지 않는다. 게다가 선량한 일반인이 그 정도로 극악한 상황에 몰렸다면 문화나 사회에 심각한 문제가 있는 것이다.[41] 예로부터 전쟁에서도 항복하면 목숨만은 살려주겠다는 제안을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42] 실제로 그의 변호인이 사형에 반대하는 논리는 '사형은 그에게 포상'이라는 논리였다.[43] 우스개소리로 소매치기범에게 본보기를 보이려고 소매치기에도 사형제의 범위를 넓혔더니 공개처형장에 군중이 있는 곳에서도 소매치기가 발생했다고 하는 이야기가 있다.[44] 출처 《신형사소송법》, 신동운, p.1535.[45] 대한민국 사법계 역사를 살펴보면 형벌을 논하기 전에 무죄추정의 원칙부터 어겨졌던 사례가 많다. 사법불신/원인 문서 참조.[46] 당시에는 최첨단이라고 여겨졌으나 이후로는 단 한 번도 사용되지 않는 등 지금 시선으로 보면 부정확한 방법이다.[47] 가령 진짜 살인범인 B씨가 미리 챙긴 무고한 A씨의 지문을 도용한 실리콘이나 머리카락을 덕지덕지 묻혀놨다고 가정하면 현재의 과학수사기법에 따르면 피의자는 B씨가 아닌 A씨가 될 가능성이 높다.[48] 사형 이야기는 아니지만, 진범이 사고사하는 '천벌'을 받는 바람에 애꿎은 절도범이 강도 살인범으로 몰린 상황이다.[49] 사형제의 문제 중 하나가 바로 누가 사형을 집행할 것이냐는 것이다. 만약 역설적이게도 사형 집행인이 사이코패스, 소시오패스 같은 사람이라면 사형을 집행하면 큰 문제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적을 죽이지 않으면 자신이 죽는 전쟁터에서 의무적으로 적군을 죽여도 외상 후 스트레스장애에 걸리는데, 직업적으로 사형을 집행하는 것은 무고한 교도관이다. 결국 사형은 생명 존중 이전에 누가 손에 피를 묻히느냐는 점이 문제가 된다. 피해자(유족)가 하면 사적 제재가 될 것이고, 제3자가 자원하면 살인이나 마찬가지인 것이 되어버린다.[50] 또한 아사형도 사형수가 죽기 전 칠 몸부림과 이후 사망한 사형수에 대한 것도 수습해야 하는 데 그걸 교도관에게 강요할 수 있는가라는 의견과 충돌한다.[51] 한번에 끝내면 사형수가 고통을 덜 받는다는게 가장 큰 이유였다.[52] 남편이 잦은 외도를 하자 이에 앙심을 품고 지인들을 돈으로 매수, 시어머니를 두 번이나 교통사고로 살해하려 하였으나 부상만 입고 생존하여 실패하자 타깃을 바꾸어 남편을 교통사고로 살해했다.[53] 굳이 이렇게 해야 한다면 검사가 사형을 집행하도록 하는 것이 가장 알맞을 것이다. 형벌을 집행하는 것은 검찰청의 상위 기관인 법무부이며, 형벌과 보안처분의 집행에는 검사가 관여하는 일이 많기 때문이다.[54] 사형제에 반대하는 것이 현대 가톨릭의 주류 의견이다. 낙태와 다르게 교리상으로 사형제 찬성을 원천 봉쇄한 정도는 아니라는 것이 기존의 입장이었지만, 2018년 가톨릭 교리서가 개정되면서 낙태와 마찬가지로 원천 반대라는 입장으로 바뀌었다.[55] 이는 사형 집행인의 대한 진정한 물음이다. '죽여라'가 아니라 '너가 죽여라'가 맞는 말이다. 다수가 결국 소수에게 '저 놈을 죽여라.'라고 강요하는 것과 진배없기 때문이고 누군가는 사형수를 죽여야 한다.[56] 하나 예를 들자면 교수형이 집행되는 만큼 가해자가 정말로 죽었는지 확인해야 하고, 교수형을 당하면 탈분을 한다.[57] 윤리와 도덕 수준이 높아진 현대에 이르러서야 군인들의 PTSD 문제가 조명되고 있는데 사형 집행인의 PTSD 문제는 그런 것도 없다.[58] 물론 사형을 당하는 사람은, 극소수 억울한 사람이 아니고서야 범죄자가 맞을 것이다. 대중을 대신해 이들을 죽이는 것은 확실히 정의실현이라 할 수 있다.[59] 몇몇 기록에도 사형 장면을 재미있게 보는 인간은 있어도 이를 집행하는 자들을 차별없이 대했다는 기록은 별로 없다. 단적으로 작위와 봉급까지 받는 샤를 앙리 상송이 어떤 취급을 받았는지 알면 좋다. 결국 사형 집행인을 그냥 살인자와 동급으로 본다고 하면 크게 다를 것이 없다. 한번 사형 찬성자에게 물어보라, 아무렇지 않게 그들을 받아들일 수 있냐고 확실히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게다가 현대에는 과거에 비해 생명 윤리 의식이 높아져서 사람이 아닌 가축을 죽이는 도축조차 거부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적지 않은데 형별의 집행이라지만 사람을 죽이는 사형에 조금의 거부감도 느끼지 않을 수는 없을 것이다.[60] 사우디아라비아는 사형제를 아직 유지하고 있는 나라이자, 참수형을 공식적인 처형 방법으로 삼는 유일한 나라로, 전문 사형집행인을 고용하여 극진한 대우를 해 준다고 한다. 그러나 경력이 20년이 넘는 집행인 '무함마드 사아드 알 비쉬'는 오로지 넷째 아들만이 참수형 집행인이 되고 싶다고 하여 견학을 가거나 참수검을 갈고 있다고 하며, 참수형이 총살형으로 대체될 경우를 대비해 사격 훈련도 병행한다고 한다.[61] 영화 <바람의 검심>에서 켄신이 시시오가 점령한 마을을 해방했는데 시시오 일당에게 형을 잃은 소년에게 복수하라며 칼을 지어주는 어른이 나온다. 어른이 대신 복수해줘도 될 것이나 굳이 아이에게 살인을 강요한다. 이러자 켄신이 나서 이를 막고 이런 행위를 잘못된 것이라고 말한다. 비록 상업 영화지만 피해자 가족에게 복수를 강요하는 것이 얼마나 끔찍한지 알 수 있다.[62] 오랫동안 사형의 논의가 오가는 것은 인간이 가진 기본적인 살인의 대한 거부감이고 양심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결핍되고 쉽게 살인하고 싶은 자에게 일을 맡긴다는 것은 결국 살인을 방조하는 결과일 뿐이며 만약 이들이 살인에 중독된다면 단순 사형 집행으로 끝나지 않을 수 있다.[63] 처음엔 부모로서 심정이 어떻겠냐며 동정하는 분위기였으나, 결국 다들 '아무리 산 사람은 살아야 한다지만....', '저렇게 감싸기만 하니 아들이 고작 잔소리 했다는 이유로 자기 친누나를 죽이고 태연히 여친이랑 여행가는 놈이 되지!', '죽은 사람만 억울하다'며 혀를 찼다. 결국 부모의 탄원이 어느 정도 받아들여져 형량에 참작되긴 했으나, 죄질 자체가 너무 안 좋아 중형을 피할 수는 없었다. 최종 결과는 징역 30년.[64] 편애라든가 가정폭력 등.[65] 실제로 비슷한 일이 일어난 바 있다. 살인이 아니라 강간 사건이었지만. 밀양 여중생 집단 성폭행 사건에서, 가족을 버린 채 집을 나가 살던 피해자의 아버지가 사건 후 갑자기 나타나 미성년자인 피해자의 법정대리인 자격으로 피해자의 의사와 무관하게 멋대로 합의한 뒤 합의금 5천만원을 받아 챙겼다. 당시 성범죄는 친고죄였기에 이로 인해 수십 명에 달하는 가해자들 중 많은 이들이 무죄로 풀려나거나 '공소권 없음' 처분을 받았고, 제대로 된 처벌을 받은 이들은 극소수뿐이었다. 게다가 합의금으로 받은 그 돈조차 아버지가 다 차지한 뒤 개인적으로 탕진해버려 피해자 본인에게는 거의 돌아가지 않았고, 결국 피해자는 어떤 적절한 치료도 받지 못했다. 실로 막장.[66] 또 비슷한 사례로, 부모 같지도 않은 인간들이 자식의 죽음에는 눈 하나 까딱 않고 보상금만 받아 챙겨가는 일들이 대형사고가 날 때마다 빈발하고 있다. 천안함 피격 사건에서 어려서 자식을 두고 집을 나갔다가 자식이 죽자 장례식조차 참석하지 않고 몰래 돈만 수령해간 신모 상사의 생모, 정모 병장의 생부라든가. 이들의 경우 국민성금은 분노한 여론에 의해 받지 못했고 군인연금은 포기했으나 결국 보상금의 절반, 억대가 넘는 돈을 받아내 챙겨갔다. 경주 마우나리조트 붕괴사고 때도 비슷한 일이 일어난 바 있다. 막장 부모라면 자기 자식이 죽어도 신경쓰지 않고 자신의 이득만 우선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는 실제 사례들이다. 이런 사례로 인해 이혼만 했을 뿐 자식을 잘 챙겼던 부모가 오해를 받는 불행한 일도 일어났다. 세월호 참사 유가족 중 가장 유명한 인물 중 한 명인 김영오 씨는 비록 이혼해 딸들과 따로 살았지만 어려운 형편에도 양육비를 최대한 꼬박꼬박 보내고 고인이 된 딸을 포함한 자녀들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음에도, 이런 선례 때문에 '버렸던 자식 팔아 돈 더 받으려고 쇼한다'는 식의 억울한 오해를 받고(특히 일베저장소 측에게) 욕을 먹었다.[67] 사형이나 무기징역이 나오는 범죄는 소수이다. 살인을 저질렀어도 몇년~몇십년 살다 결국 나오는 범죄자도 많다. 그런데도 자살한 경우, 범죄자는 감옥살이가 싫고 전과자로 눈총받으며 일자리도 구하기 힘들게 살아갈 출소 이후의 생활이 막막해져서 저승으로 도피했다고 볼 수 있다.[68] 창작물에서 복수귀에게 상대방이 이렇게 힐난하는 사례도 많이 있다. 주요 레퍼토리는 "네가 이런다고 해서 먼저 떠난 ○○○가 하늘나라에서 기뻐할 것 같아?" 같은 식. 대표적 사례로 호러스 워필드가 있다.[69] 범죄피해자 보호법이 제정된 것이 2011년이다. 그 이전까지 사법기관은 자신이 처벌해야 하는 가해자에게만 관심이 있었고, 피해자는 그저 증인이나 참고인이었을 뿐 지원이나 보호의 대상이 아니었다. 특히 살인 범죄는 피해자가 이미 죽고 없으니, 피해자 본인도 아닌 그 가족들에게 공권력이 관심이 있을 리 만무했다.[70] 이 경우엔 피해자의 유족들은 "오판한 인간들에게 속은 건데 어떻게 잘못을 물을 수 있겠냐?" 라는 옹호론이라도 들을 수 있다. 단, 그렇다고 해도 진짜로 단지 속은 것뿐이라는 누구나 인정할만한 증거와 정황의 입증이 있어야 가능하다.[71] 악랄하고 사악하고 평소 행실이 아주 개차반인 사람일지라도 교묘한 말솜씨에 속아 사기를 당하지 말란 법도 없고, 강호순, 유영철, 조두순이라도 힘 세고 무기 든 여러 남자들과 정면으로 싸운다면 별 수 없이 일방적으로 구타당하다 쓰러질 뿐이다. 다시 한 번 말하자면 그들이 '살인사건 피해자'가 절대로 되지 않으리란 법이 없다. 실제로 제프리 다머연쇄살인마로서 극악무도하기 그지없는 가해자였지만, 본인도 또다른 살인범 크리스토퍼 스카버에게 살해당하면서 마지막에는 피해자로서 최후를 맞았다.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수감 중 동료 재소자에게 두들겨 맞아 숨진 것.[72] 한인섭, 〈사형제도의 문제와 개선방안〉, p.7 이하도 함께 참조.[73] 이덕인, 〈사형제도의 정당성에 대한 비판적 검토〉, 한국형사정책학회, 2011, p.9[74] 조준현, 〈사형제도 존폐논쟁의 현황과 전망 - 이념논쟁과 국민정서〉, 《형사정책연구》 17권 2호, 2006, p.21[75] 이덕인, 동 논문, p.16, 각주 43.[76] 이러한 논자들의 예로는 정웅석&백승민, p.682 등. 다만 이들의 경우도 위하력이나 응보의 논리 대신 주로 시기상조의 논리를 채택하고 있을 따름이다.[77] 대한민국 형사소송법 제349조(상소의 포기, 취하) 검사피고인 또는 제339조에 규정한 자는 상소의 포기 또는 취하를 할 수 있다. 단, 피고인 또는 제341조에 규정한 자는 사형 또는 무기징역이나 무기금고가 선고된 판결에 대하여는 상소의 포기를 할 수 없다.[78] 그러면 골치아픈 난민 안받아도 되니 호주 입장에서는 개꿀인거 아닌가? 할 수 있지만 EU와의 외교 및 무역에서 선진국 대우 및 요즈음에는 기본적으로 체결하는 최혜국 대우를 박탈할테니, 그렇게 받기 싫으면 받지 말라는 형태였다. 즉 사실상의 국제제재.[79] 연쇄살인범이 많아봐야 백여명 을 살해하는 수준이지만, 독재자는 백 명은 그냥 넘고, 심지어는 수백만명을 직간접적으로 죽일 수 있다.[80] IS를 후원하는 세력에는 사담 후세인이 이끄는 바트당 잔존세력이 있으며, 사담 후세인의 사형이 수니파의 어그로를 크게 끌었다.[81] 김정은의 사형 혹은 무기징역 → 구 북한 정권의 두목인 김정은이 당했기에 구 북한 정권의 군부 실무진의 불안감 증폭 → 소요 혹은 내전. 쉽게 말해 북한 군벌들이 하나회 같은 것을 조직해 제2의 5.16 군사정변을 일으킨다는 것. 물론 이는 어디까지나 외부 개입 없이 평화통일이 이뤄졌을 때의 이야기다. 물론 무력통일이라도 김씨 일가가 전쟁통에 죽지 않는 한 청산이 힘들 것으로 보여진다.[82] 만일 사형을 집행했다 쳐도 정치보복에 의한 희생양으로 비춰져서 거의 광신도 수준으로 떠받들며, 일베, 틀튜브, 박사모5.18 민주화운동 왜곡 세력도 지금보다 훨씬 떳떳하게 518에 대한 폄훼를 저지를 수 있었을 것이다. 다만 1심에서만 사형이 선고되었고 2심에서 무기로 감형된 후 확정되었으니 사면이 없었어도 사형집행을 할 일은 없었을 것이다.[83] 사형제를 통한 인류자기가축화가 그저 가설에 머무르는 이유 중 하나다. 형벌은 실력 행사 행위인 만큼 힘의 논리에서 자유롭지 못하기에 형벌을 선고받은 주체가 형벌을 집행하는 주체보다 막강한 권세를 가진 경우엔 얼마든지 무마가 가능하고 오히려 이를 역으로 이용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84] 그렇다고 체포하는데 오래 걸렸냐면 그렇지도 않다. 3월 20일에 사건이 발생하고 두달만인 5월 16일에 체포했다.[85] 그래서 독재국가에서 '간첩 혐의로 사형당했다'는 것은 사실상 숙청에 가깝다.[86] 특히 유년 및 아동기 시절의 학대적 경험[87] 실제 그 교수의 가계도를 따라 올라가다 보면 역사적으로 유명한 살인마가 나온다고. 다만 차이점은 본인은 행복하고 충만한 유년시절을 보냈다고 한다.링크[88] 이건 역사적으로 유명한 경우라서 알 수 있는 것이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가계에서 흉흉한 인물이 나오면 족보에서 파내는 것이 보통이라 어떤 가계든 조상들 중에 흉흉한 인물이 있었을 가능성은 꽤 높다고 볼 수 있다.[89] 실제로 사회적 법망이나 손길이 닿지 않는 지역의 범죄율은 당연히 높다.[90] 용서하자는 것은 아니다. 다만 처벌로서 '사형'을 택하는 것이 부적절하다는 의견이다. 예컨대, 대안책으로 '가석방 없는 종신형'이 더 적절해 보이는 것이, 실제 이를 통하면 사회와의 영원한 격리로서 2차범죄의 재발방지가 되며, 그들의 유전자가 발현된 경위를 시간을 두고 연구해볼 수 있으며, 또한 '단지 살려둠'으로써 국가적 실책에 대한 책임을 몸소 지는 책임 있는 국가로서의 모습을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91] 물론, 그러한 흉악범죄자를 다루어야 하는 교도관의 고충은 더해질 수 있겠지만, 이는 국가적 책무라는 부분에서 관리시스템을 갖춰 더 효과적으로 대응해야 할 문제이다. 국가적으로 해야하는 일을 단지 더 힘들어진다는 이유만으로 하지 말자고 할 수는 없는 일이다. 국가로서 일정부분의 책임 지는 모습을 보이자는 것이며, 차후에 그런 일이 없도록 국가적 발전을 위한 정책수립에 활용하자는 취지이다.[92] 예를 들어 여전히 갱생과 교화를 부정한다는 점은 똑같다.[93] 대표적으로 아돌프 아이히만을 처형한 이스라엘이나 브라질 등이 있으며 현재는 평시, 전시 사형을 모두 폐지한 유럽 국가들도 전시범죄에 한해서는 오랫동안 사형을 명문상으로 남겨두었다.[94] 2019년의 헌법소원도 이 부분을 지적하면서 2010년도의 합헌 판결이 문제가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 외에도 이러한 주장을 하는 경우가 있다. #[95] 사람은 하느님의 모습으로 만들어졌으니 남의 피를 흘리는 사람은 제 피도 흘리게 되리라.[96] 24.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25. 화상은 화상으로, 상처는 상처로, 멍은 멍으로 갚아야 한다.
[97] 국립법무병원에 이 판정 업무를 맡길 수도 있겠다.[98] 사법살인까지 하려던 것은 아니었지만, 이러한 인식을 악용하여 마약 전과가 있던 사람에게 마약범죄 누명을 씌우려고 했던 사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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