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의 대외 전쟁·분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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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전의 일부 | |||
날짜 | 1946년 12월 19일 ~ 1954년 8월 1일 | ||
장소 |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주로 통킹 | ||
결과 | 베트남 민주 공화국, 베트민의 승리 | ||
영향 | 제네바 회담 개최 베트남의 분단 베트남 민주 공화국, 베트남국, 라오스 왕국, 캄보디아 왕국의 독립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해체 프랑스 식민지 전역에 독립운동 발발 | ||
교전 국가 및 세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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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원 국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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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휘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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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전쟁 지도 |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식민정책을 포기하지 않기로 결정한 프랑스 제4공화국이 베트남의 공산주의 독립운동 단체 베트민 및 이웃나라들의 반군과 벌인 전쟁. 베트남 독립전쟁이나 프랑스-베트남 전쟁이라고도 불린다. 베트남에서는 항불전쟁(Cuộc kháng chiến chống Pháp) 또는 간단히 항불(Kháng chiến chống Pháp)으로 부른다.
2. 배경
2.1. 프랑스 식민지와 제2차 세계 대전
자세한 내용은 베트남/역사 문서 참고하십시오.19세기 이래 베트남은 라오스, 캄보디아와 함께 프랑스의 식민지로서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또는 인도차이나 연방이라고 불리고 있었다.
프랑스의 식민 정책은 '문명의 전파'를 표방했기에 비교적 다른 열강의 식민지 정책에 비해 비교적 유화적인 태도를 보여주었지만 프랑스와 베트남의 관계의 본질은 결국 프랑스가 베트남을 경제적으로 착취하는 것이며 본국에서 임명해 식민지로 오는 관리들의 수준이란 뻔한 것이었기에 이상과 달리 실제 통치는 혹독하였다. 게다가 어찌보면 당연하겠지만 프랑스도 독립운동 세력들에게 군대를 앞세워 혹독하게 진압하는 바람에 반감이 더욱 쌓여만 갔다.
1930년 무장봉기는 주로 통킹지역과 안남 북부에서 전개되었다. 프랑스는 이 봉기를 진압하기 위해 전투기까지 동원했다. 그 결과 수많은 베트남 사람들이 진압하는 프랑스군에 의해 사망하였고 실패로 끝났다. 이후 베트남 독립운동의 주도권은 공산주의 세력으로 기울어졌는데 그 중심에는 프랑스 공산당과 러시아에서 공산주의 사상을 배우고 온 호찌민이 있었다.
제2차 세계 대전 발발과 함께 프랑스 본토가 나치 독일에게 점령당하고 괴뢰정부 비시 프랑스 정부가 들어서게 되고 비시 정부는 총독부에게 일본군 주둔을 허용하며 사실상 일본 제국에 의해 점령당하면서 인도차이나의 운명은 일본 제국과 비시 프랑스가 손을 잡는 최악의 형태로 마무리된다.
독립 운동이 거세지면서 베트남의 공산주의자와 민족주의자는 서로 손을 잡고 베트남독립동맹(越南獨立同盟), 즉 베트민(월맹)을 결성했다. 그리고 이들은 한때 이념 대척점인 미군의 군사 지원을 받아 일제와 싸웠다.[8]
일제는 나치의 패전이 가까워지자 명호작전으로 인도차이나 지역의 비시 프랑스군을 격파하고 응우옌 왕조의 마지막 황제였던 바오다이를 내세워 괴뢰국인 베트남 제국(1945년 3월 11일 ~ 1945년 8월 23일)을 성립해 비시 정부와 자유 프랑스 모두의 뒤통수를 치며 독립을 지지하는 척하는 쇼를 벌였으나 베트남인 그 누구도 믿지 않았다. 결국 일제의 패배와 함께 베트남 제국도 무너지며 베트남은 무주공산이 된다.
일제가 패망하자 베트민의 호찌민은 기민하게 행동하여 바로 다음날인 8월 16일 전국 국민회의를 주최해 주석으로 선출되었다. 이어 8월 25일 임시정부를 수립했고 9월 2일 자신이 쓴 독립선언문을 발표하고 공산주의 국가인 베트남 민주 공화국의 건국을 선포했다. 호찌민은 자신이 세운 공산주의 국가인 베트남 민주 공화국을 미국 정부가 지지해 줄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오산이었다.
사실 식민지에 부정적인 인식을 가지고 있던 미국은 처음에는 베트남의 독립을 지지했고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프랑스가 다시 베트남을 식민지로 유지하려 하자 처음에 미국은 이에 반대의사를 표명하기도 했다.[9] 그러나 미국이 원했던 독립국 베트남은 공산주의 국가는 아니었다는 점이 호치민의 판단하고 달랐으며 2차 대전 당시 프랑스의 지분이 적긴 하지만 노르망디 작전을 위시한 프랑스 수복 작전때 임시 프랑스 정부 아래에 있던 레지스탕스들의 활약도 있었던데다가 프랑스가 전쟁 상처만 치료하면 다시 강국이 될 여지가 있었기에 프랑스의 눈치를 본 것도 있다. 2차 세계 대전 때 미국과 소련이 연합하기는 했지만 이것은 파시스트 국가인 나치 독일과 일본 제국에 맞서기 위한 일시적인 것이었을 뿐 그들은 서로의 체제를 전혀 인정할 생각이 없었다. 제2차 세계 대전 때 미국이 베트민을 지원한 것도 일본과 맞서 싸우기 위한 목적 때문이었을 뿐이다. 호찌민을 지원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은 호찌민과 실제로 활동하기도 했던 CIA의 전신인 OSS 정도였다.
결국 2차 대전이 끝나자마자 미국과 소련이 전세계를 둘로 갈라먹는 냉전 시대로 접어들었고 당장 유럽에서는 소련의 군사적 개입으로 동유럽이 줄줄이 공산화되었다. 중앙유럽까지 파고드는 공산화의 물결에 미국과 서유럽 국가들은 크게 위협을 느꼈고 결속력을 강화했다. 한편 서방권 국가들 중에서 프랑스의 경우 제2차 세계 대전 초기에 본국이 독일한테 항복해서 비시 프랑스라는 괴뢰국 상태에 있다가 노르망디 상륙 작전 이후 독일군이 프랑스에서 완전히 물러나고 나서야 임시 프랑스 정부가 들어섰지만 자유 프랑스도 급하게 재건된 군대라 장비와 장구류 부족으로 인해 영향력이 거의 전무했다. 당연히 국가의 위신은 나락에 떨어질 수밖에 없었고 미국과 영국 도움으로 상임이사국 차지한 것에 굴욕을 느낀 프랑스는 미국과 애매한 태도를 취하며 공산권 국가들과 가장 친하게 지냈기 때문에 미국은 프랑스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처음에 미국은 베트남의 독립을 지지했으나 프랑스가 베트남을 다시 식민지로 두려고 하자 결국 이를 방관했다. 베트남 입장에서는 일제가 패망하자 결국 바로 과거의 압제자 프랑스군이 돌아오게 된 것이었고 프랑스군은 처음에는 월맹을 압도하며 하노이까지 점령했지만 중공의 지원을 받기 시작한 월맹군과 민심장악 실패로 처절하게 패배, 결국 베트남 전쟁이라는 불똥을 미국에게 남기게 된다.
2.2. 2차 대전 이후
일본 제국이 2차 대전에서 패망하고 항복하자 호치민 휘하의 베트민은 8월 16일 총 봉기를 일으켜 8월 말쯤에는 북부 대부분을 장악하였다. 하지만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명목으로 북위 17도선을 경계로 베트남 남부에는 영국군, 북부에는 중화민국의 국민혁명군이 들어와 점령하였다.그런데 종전 이후 중국 대륙이 국공내전에 휩싸이게 되면서 국민혁명군이 베트남 북부에서 철수해 사실상 공백지대가 되어 버렸다. 이 기회를 포착한 호찌민은 전함 미주리호에서 있을 일본의 공식 항복 서명일에 맞춰 일본군을 본인들이 무장해제시키고 1945년 9월 2일 베트남 민주 공화국의 건국을 선포했다. 다만 후술할 이유로 인해 당시 베트남 민주 공화국은 미승인국 처지로 1950년이 되어서야 소련과 중국, 북한의 승인을 받을 수 있었다.
한편 남부의 영국군은 이 지역에 선거를 통한 독립을 지지하는 발언들을 자주 했지만 프랑스 영토였던지라 결국 프랑스에 돌려주고 돌아가 버렸다. 사실 영국은 인도 제국과 영국령 버마의 독립 요구에 시달리고 있어 훈수 둘 처지도 못 되었으며 병력 부족으로 비시 잔당들과 일본군 포로 일부까지 치안 유지에 동원한 탓에 깽판치던 국민혁명군보다 더 미움을 받았다.
이런 영국의 정책은 프랑스 제4공화국에게 다시 한 번 베트남을 식민지 영향 아래에 둘 수 있다는 착각을 주었는데 영국은 증가하는 민족주의가 주변의 인도나 버마의 영향력을 줄일 수 있다고 판단해 베트민과 협상을 하지 않고 계엄령을 선포하는 등 민주주의와는 거리가 먼 정책을 썼다. 이로 인해 영향력 있던 베트민과 협상 한번 하지 않고 들어간 프랑스는 베트남이 순순히 식민지가 될 것이라고 착각했다.
3. 전개
3.1. 독립전쟁
프랑스 제4공화국은 최초에 베트민이 수립한 베트남 민주 공화국을 정식으로 인정해 주는 듯했으나 곧바로 입장을 바꿔 베트민 주도의 베트남 독립국가 건설을 인정하지 않았고 종전 후 베트민 지도자 호찌민과 프랑스 사이에 맺어진 예비협정을 파기하며 북쪽으로 프랑스군을 진격시켰다. 1946년 11월 23일에는 하이퐁 항구에 프랑스 해군이 비행기 폭격을 동반한 함포사격을 가해 하루 동안 최소 6,000명의 베트남 시민이 사망했다.[10][11] 1946년 12월 19일, 호찌민은 프랑스군과의 전쟁을 선포했고 이것이 사실상의 베트남 독립전쟁인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의 시작이었다. 프랑스는 이 전쟁에 프랑스인 233,467명, 외인부대 72,833명, 북아프리카인 122,920명, 아프리카인[12] 60,340명 등 막대한 병력을 투입했다. 여기에 베트남인 병력[13]도 추가되었다.좀 더 구체적으로는 1947년에 CEFEO, 프랑스 극동원정군은 인도차이나에서 11만 5천명의 병력을 보유했다. 6.25 전쟁 등의 발발로 미국의 개입이 본격화되는 등 전쟁이 절정을 향해 가던 1951년과 1954년 사이에는 17만 5천명에 달했다. 이들은 5만 4천명의 프랑스 육군[14], 1만 8천명의 서아프리카인, 3만명의 북아프리카인[15], 2만 명의 외인부대원[16], 5만 3천명의 프랑스의 지휘를 받는 베트남인, 5천명의 해군, 1만명의 공군, 현지인 보조병 5만 5천명으로 구성되었다. 1953년부터는 바오다이 황제의 통치 하에 있던 베트남국의 군대인 베트남 국민군 15만명이 추가되었다. 인상적인 규모이지만 대게릴라전의 특성 등의 이유로 대부분의 병력은 방어적인 진지전 임무를 수행했고 1953년 기준으로 기동전에 투입 가능한 병력은 7개 독립여단[17]과 8개 공수대대, 소수의 강상 순찰부대로 국한되어 전체 병력에 비해 상당히 적었다. CEFEO는 기갑 전력 역시 갖추고 있었는데 예하 기갑기병 연대들은 주력 장비로 M5 스튜어트와 M8 스콧,M24 채피,M3 하프트랙,M29 위즐,LVT를 장비했다. M36 GMC와 M4 셔먼을 장비한 소수의 연대는 통킹에 주둔하면서 중국 인민해방군의 북부 인도차이나 침공을 경계하기도 했다.[18]
그리고 보응우옌잡[19] 장군이 이끄는 베트민군은 압도적인 프랑스군에게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은 후 북부 산악지역으로 패퇴하여 게릴라전으로 프랑스군과 싸우게 되었다.[20] 1947년 10월 프랑스군은 적의 심장부인 비엣박을 대대적으로 공격하여 호치민이 체포될 뻔하기도 했다. 이후 4년 동안 베트민은 소극적 게릴라 공세를 계속하며 그 사이 정치 운동을 통해 북부에서의 입지를 굳건히 다지고 민중의 압도적 지지를 얻는 데 성공했다.
반대로 프랑스는 알제리, 튀니지, 모로코, 세네갈, 마다가스카르 등 다른 프랑스령 해외 식민지에서의 독립 운동이 가중되면서 전력이 분산되기 시작했고 "전후 재건에도 사람이 부족한데 애먼 전쟁터에 젊은이들을 내몰아 또 죽일 거냐"는 국내 여론의 악화와 미국, 영국 등 여타 서방 국가들의 외교적 압력으로 서서히 베트남에서의 우위를 잃었다. 설상가상으로 하필 샤를 드골은 외아들인 필리프 드골을 베트남에서 잃을 뻔했다.
3.2. 베트남인들간의 내전으로 변질
그러나 1947년에 반전이 일어난다. 베트민은 원래부터 베트남 국민당 등의 북쪽 기반 비공산주의 정당들과 심각한 마찰을 빚었는데 1947년이 되자 그 외에도 베트민과 대 프랑스 공동전선을 펴던 호아하오교, 까오다이교 등에게 배신을 저지르고 그들의 주요 수장들을 납치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호아하오교의 교주 후인푸소가 사망했고 까오다이교의 군사 지도자 쩐꽝빈 역시 베트민에게서 배신을 겪은 뒤 공산주의를 적대하게 되었다. 당연히 이런 베트민의 배신은 베트남 전체의 내셔널리스트들에게 공분을 샀고, 그들은 전부 반공주의 노선을 탔다.이런 급격한 변화에 대해 프랑스의 대응은 상당히 영리했다. 원래 이들 남쪽 종교파 내셔널리스트들은 독립운동가로써 프랑스와는 적대관계였으나 당장 베트민이라는 새로운 비열한 원수를 목전에 둔 이들에게 유화책을 펴면서 협력관계를 제안한 것이다. 비록 이 협력관계는 마찰이 매우 심했고 서로간에 신뢰도 없었으나 어쨌든 프랑스는 베트남 전체의 공공의 적이라는 위치에서 벗어났고 당장은 영향력을 남겨둘 수 있게 되었다. 한편으로 까오다이교의 한 젊은 장교는 이러한 결정에조차 반발하고 스스로의 군사조직을 조직해서 베트민/프랑스 양쪽과 싸우면서 명성을 얻게 되었다.
그러나 1949년 제2차 국공내전이 마오쩌둥이 이끄는 중국공산당의 승리로 끝나자 북쪽은 완전히 공산주의자들의 우세로 돌아서게 되었다. 베트남 국민당의 후원자였던 중국국민당은 대만으로 쫓겨나고 대륙을 장악한 중국공산당은 베트민을 적극 지지했다. 1950년 1월 마오쩌둥의 중국은 호치민이 이끌던 베트민을 공식적으로 인정하면서 무기와 장비를 지원하고 베트남 국경지대 근처에서 베트민의 군사훈련을 지원해 줬다. 지원 규모는 출처에 따라서 다르지만 프랑스와의 전쟁 전 기간 동안을 종합하면 5개 보병사단과 1개 포병사단, 1개 고사포 연대를 무장시킬 수 있을 정도였다는 말도 있을 정도로 전폭적이었다.[21] 1950년 9월 중순 정규 부대를 창설할 정도로 강력해진 베트민 부대들은 국경지역 전체에 걸쳐 프랑스의 취약 시설에 대한 일련의 기습을 개시했다. 중월 국경지대 동 케에서 벌어진 전투에선 베트민군은 중국 공산당으로부터 지원받은 바주카포, 박격포, 무반동총[22]을 사용했을 정도로 중무장했다. 결국 프랑스군은 동케에서 300명 이상의 사상자를 내며 패퇴했고 동케 전투의 승리를 시작으로 베트민군은 홍 강 삼각주 지역 전체를 손에 넣은 뒤 1950년 12월 총공격 계획까지 세웠다.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 베트남인들간의 이념 싸움으로 변질되고 있음을 감지한 미국은 일단은 프랑스를 지지했으나 미국의 베트남에서의 궁극적인 목표는 공산주의와 식민주의를 모두 적대하는 '제 3의 길'의 정권 수립이었고, 이건 몇년 뒤 베트남 공화국 체제가 들어서고 나서야 실현되었다. 1949년 중국의 내전이 마오쩌둥의 승리로 끝나고 1950년 6.25 전쟁이 일어남에 따라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에 대한 물자 지원량은 늘어났고 6.25 전쟁 휴전 협정이 막 시작되던 1951년 시점에는 프랑스 전쟁 비용의 80%를 미국이 지원하게 됐다. 즉 미국은 전쟁에 군사를 파병하지만 않았지 사실상 전쟁에 개입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3.3. 북베트남에서의 프랑스의 군사적 패배
1951년 2월, 베트민은 공세 시기가 무르익었다고 판단하여 하노이 해방을 목표로 정규 사단들을 동원,전면 공세를 개시했다. 그러나 장 드라트르 드타시니 장군이 미리 하노이, 통킹만, 홍강 삼각주까지 연결된 드라트르 방어선을 구축하였다. 드라트르 장군은 미국으로부터 지원받은 네이팜탄을 사용하여 베트민군의 대대적인 전면 공세에 맞섰다. 베트민은 이 방어선에 철저히 막혀 도리어 수천명 이상의 큰 사상자만 남긴 채 하노이 함락에 실패했다.[23]그럼에도 베트민이 보유한 전력은 전쟁 초기에 비하면 급속도로 막강해진 상태를 유지했고 전면전에 준비되어 있었다. 중국공산당이 육성한 베트민 정규사단들은 3개 보병연대 체제에 1개 포병대대가 배속되는 3각 편제로 창설됐다. 4개 보병대대로 구성된 각 보병연대는 연대마다 4문의 75mm 포와 4문의 120mm 박격포를 연대 지원화력으로 갖추고 있었다. 사단 편제 창설 초기엔 12,000명이 넘었으나 전쟁 중반 이후부터는 1만명 선으로 정착되게 된다. 정원이 800명인 베트민 보병대대는 20정의 기관총,8문의 82mm 박격포,3문의 75mm 무반동총을 보유했다. 대대의 보병들은 개인화기와 바주카포로 무장했다.1951년 말 기준 베트민이 보유한 정규 보병사단의 숫자는 6개를 넘겼다. 같은 시기 독립연대 전력도 보유하고 있었는데, 대략 15개 선이었다. 베트민의 105mm 야포를 위시한 중야포와 중박격포,37mm 대공포와 대공기관총들은 별도의 편제인 제351포병사단이 관리했다.[24]
1952년 타시니 장군이 악화된 지병 때문에 프랑스로 귀국하면서 전세는 베트민 측으로 급격히 기울어졌다. 설상가상으로 프랑스는 15만명의 베트남군이 거의 쓸모가 없어[25] 19만의 프랑스군만으로 전쟁을 해야 했고 초반에는 어리버리하기까지 했던 베트민군은 전투를 통해 순식간에 정예로 탈바꿈하였다. 이후 프랑스군은 여기저기서 지속적인 피해를 입고, 미국의 전비 지원 삭감에 따른 재정부담이 가중되자 이를 감당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러[26] 8만의 병력을 철수시키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프랑스 내부에서도 점점 장기화되는 명분 없는 식민지 회수 전쟁에 극렬히 반발하고 비판하는 세력[27]이 점차 늘어났다. 탄약창에 사보타주가 발생하고 노동조합 등이 인도차이나로 가는 프랑스군 장비의 수송을 파업으로 거부하거나 인도차이나 주둔 병사들을 치료하기 위한 헌혈을 단체로 방해하는 등 프랑스는 자국민 다수에게도 전쟁이 왜 필요하고 이길 수 있는 전쟁인지에 대해 전혀 설득시키지 못하고 있었다. 전쟁 말기에는 인도차이나 식민지에서 프랑스로 귀환한 병사들에게 온갖 거센 비난과 돌과 계란이 날아드는 등 상당히 험악한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프랑스 내부의 거센 저항으로 정상적인 전쟁 수행이 어려워지자 극동원정군은 점점 미국의 원조에 의존하게 되었다. 미국은 중공과 소련의 막대한 원조를 받는 월맹군을 막기 위해 프랑스의 식민지 전쟁을 당장은 지원해도 종국적으로 베트남에 친미 독립 반공국가를 건설하겠다는 입장이라 프랑스의 본래 목적인 인도차이나의 재정복은 점차 달성에서 멀어지고 있었던 셈. 여기에 계속 발생하는 사상자에 충격을 받은 프랑스 의회가 대규모 징집병의 해외 파병을 금지시키고 유럽에서 냉전이 격화되자 유럽 방어를 위해 극동원정군에서도 병력이 차출되면서 상술되어 있듯이 병력 충원과 증원은커녕 감축을 걱정해야만 할 처지가 되었다.
디엔비엔푸 전투가 벌어진 해인 1954년 초의 전황도. 북부 베트남에서는 하노이 일대에만 간신히 포켓 형태로 점령지를 사수하고 중부 베트남까지 싹 밀린데다가 라오스와 캄보디아에도 월맹군 게릴라와 정규군이 점령지를 확보한 프랑스 극동원정군에게 절망적인 판도다.[28] 프랑스 제2제국의 베트남 정복 당시 가장 먼저 확보해 식민지배 기간 동안 거점 역할을 한 코친차이나 일대에조차 월맹군이 점령지를 가지고 있었다. 그나마 코친차이나는 상당 부분 쥐고 있기라도 하지 통킹과 안남은 하노이와 후에 일대의 좁은 지역을 제외하면 죄다 월맹군에 넘어간 셈이다. 베트민은 여전히 알보병과 포병으로만 구성되어 있었지만 공산권에서 원조받은 트럭 보유량이 1953년 말에는 600대 이상까지 올라가는 등 차량화까지 시도하게 된다.[29]
결국 1954년 프랑스군은 사단급 병력과 막대한 중장비를 아낌없이 투입해 마지막 반전을 노렸던 디엔비엔푸 전투에서마저 참패하고 위신을 있는 대로 깎아먹은 채로 베트민과 휴전 협정을 맺을 수밖에 없었다.[30] 56일간의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프랑스군은 2,000명~3,000명 수준의 전사자를 냈고 8년간의 전쟁에서 총 70,000명의 프랑스군이 전사했다. 베트민은 이보다 많은 사상자를 내고 있었지만 독립을 위해 이런 희생을 감당할 수 있었던 반면 프랑스의 입장에서는 아니었다. 결국 1954년 7월 21일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회담을 통해 양측은 휴전 협정을 맺게 되었고 북위 17도선을 경계로 프랑스의 남베트남과 베트민의 북베트남으로 나눠졌으며 8km DMZ가 설치되었다. 그리고 2년 내에 남북통합 선거를 실시한다는 합의를 하였다. 사실 베트민 입장에선 베트남 전 영토 75%를 장악하고 있었지만, 양보를 한 셈.
3.4. 남베트남에서의 프랑스의 정치적 패배
일단 프랑스는 남베트남 쪽에서는 억압자에서 협력자로 변신하는 데 성공했기에 군대를 빼지 않아도 됐지만 베트남국의 주권을 제한해서 보호국으로 만든 것에 대한 민심의 반발은 컸다. 처음에는 베트남국의 기득권층이 친불 성향이 강했기에 영향력이 유지되었으나 이들 기득권층의 세력이 급속도로 줄어들고 급진 반공주의 연합조직 '혁명위원회'와 응오딘지엠의 정치적 동맹이 대두되면서 남베트남에서 프랑스의 입지는 급격하게 좁아지고 있었다. 양쪽 모두 반불 성향이 아주 강했기에 베트남 주둔 프랑스군 조직 FEC의 존재를 몹시 불편해했고 각종 프로파간다로 프랑스군을 비판하기에 이르게 되었다.[31] 총리가 된 응오딘지엠은 친불 세력들을 대거 숙청해 버리기도 했다. 결국 프랑스는 총선거의 행정업무를 돕고 선거 실시를 감독해야 하는 휴전협정 이행조차 방기하고 선거를 3개월 앞두고 철수해 버렸다. 남베트남에서도 프랑스의 영향력이 축출되어 버린 것.한편으로 이 혁명위원회는 베트민에게 배신당한 인사들이 주 구성원이었던, 따라서 베트민이 하는 말이라면 콩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안 믿을 만큼 베트민에 대한 불신감이 강했기에 총선거 자체가 베트민의 비열한 획책이라는 나름 합리적인 의심을 가지고 총선거를 반대했다. 응오딘지엠 역시 자신의 정치적 이익을 위해 총선거에 반대했고, 남베트남의 여론 역시 이에 호응해서 20만에 달하는 대대적인 반 총선거 시위가 55년에 사이공에서 열렸다. 결국 총선거는 남베트남 대부분의 거센 반발로 무마되었고, 대신 베트남 공화국 체제가 들어서면서 분단이 장기화된다.
이로 인해 이 인도차이나 전쟁은 2차 대전 당시 허무하게 본토가 함락된 사례, 그리고 학살과 추태로 얼룩진 알제리 전쟁과 함께 현대 프랑스군의 큰 오점으로 남았다.
전쟁 당시 프랑스 정부나 장 드라트르 드타시니 등 프랑스 극동원정군 사령관들은 자신들의 전쟁을 6.25 전쟁에 빗대며 구시대적인 식민지 전쟁이 아니라 최소한 반공을 위한 이념 대리전이라고 주장했지만 인도네시아 독립전쟁 등과 달리 공산주의 세력이 사회주의 국가들의 군사원조를 받으며 이전 종주국에 대한 무력투쟁을 이끌었다는 점을 제외하면 2차대전 이후 동남아시아의 식민지 전쟁에 가깝다는 걸 부정하기 어렵다.
차라리 몇 년 차이를 두고 폭발한 말라야 비상사태 때 화교 공산반군을 종국적으로 진압하는 데 성공한 영국에 비해도 한참 떨어지는 결과다. 최소한 화교들과 무슬림의 종교적인 차이 때문에라도 현지 화교 반군을 지지하는 대신 자치와 종국적으로는 독립을 보장하고 실제로 이뤄준 영국에 협조하기로 한 말레이인들의 지지를 얻어낸 영국에 비해 프랑스는 시대착오적인 제국주의 부활이라는 결함 많은 목적 때문에 식민지인 다수에게 반공주의자건 공산주의자건 전혀 지지를 받지 못했다. 군사적으로도 공산화된 중국 영토와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인도차이나 반도의 사정 때문에 월맹군이 야포와 대공포를 포함한 중화기를 갖춘 정규군으로 성장하는 것을 막지 못했으니 전쟁 목표부터 주변 여건까지 이러한 결과를 처음부터 예고하고 있었던 셈이다.
4. 전후
4.1. 남베트남의 대혼란
미국은 본래 베트남 지역의 독립에는 찬성이었지만 베트남이 공산화되도록 놔두면 인도차이나 반도를 넘어 자본주의 진영의 국가들이 하나 둘씩 공산화 되고 결국 미국마저 공산화될 것이라고 예상(도미노 이론)하고 있었고[32] 프랑스가 떠난 남베트남을 보호하는 데 적극적으로 나서게 되었다. 당시 미국 국방장관으로서 이 정책을 주장했던 사람 중 한 명인 로버트 맥나마라는 나중에 ''아무래도 그때 우리가 좀 미친 것 같았죠. 전혀 그럴 이유가 없었는데. 우리가 지레 겁을 먹은 겁니다." 라고 회고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미국은 1차 인도차이나 전쟁 초반에는 프랑스의 행동에 부정적이었으나 중국의 공산화와 6.25 전쟁의 발발로 냉전이 본격화되자 태도를 바꾸어 전비와 무기 대부분을 지원한다. 미국의 지원 액수는 1차 인도차이나 전쟁 전비의 78%에 달했다. 이때 지원한 물량이 전차 1,400대, 비행기 340대, 정찰보트 350대, 소총 24만 정에 탄약이 1,500만 발 등 사실상 사람 빼고는 미국이 전쟁했다고 봐도 좋을 정도이다. 이유야 물론 2차 대전의 영향으로 프랑스가 독자적으로 전쟁할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물론 나름 서방진영에서 구 식민 체제의 해체를 통해 공산세력과 맞서고자 했던 만큼 미국의 지원이 공짜는 아니고 남베트남을 독립시키는 조건이 붙어 있었지만 베트민 입장에서 보면 미국은 압제자 프랑스를 지원하는 명백한 적이었다.
그러나 사실 미국은 비시 프랑스/일본 제국이 베트남을 통치하던 시절에 OSS를 통해 호치민과 베트민의 독립 투쟁을 지원해 주었던 국가기도 하다. 2차대전 이후에도 호치민은 미국과의 우호관계를 이어가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했다. 세계 제일의 강대국으로 떠오른 미국의 지원을 등에 업어야 꿈에도 그리던 베트남 독립을 이룰 수 있고 이후에도 안정적으로 국가를 이끌 수 있다고 봤기 때문이다. 호치민은 미국에 우호적이면서 힘에 대해서 두려워 했고 후일의 통일 베트남도 미국을 상대로 한 전쟁은 식민지 해방전쟁과 동급으로 여기진 않고 남베트남 통일전쟁의 일환으로 해석한 걸 보면 미국과 프랑스는 확실히 구분한 듯하다.[33]
호치민은 2차 대전 때의 동맹관계를 떠올려서인지 미국의 해리 S. 트루먼에게 지지를 호소했으나 그것과 별개로 그 자신과 자신의 당인 베트남 공산당이 30년대 이래로 쭉 어떤 짓을 저질러왔는지를 생각해보면 오히려 신뢰가 얻기 힘들어서 말 그대로 헛된 기대일 뿐이었다. 베트남 공산당의 비공산주의 내셔널리스트 세력에 대한 탄압의 역사는 193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호치민은 그에게 붙은 일종의 '성자 신화'가 말하는 것처럼 같은 민족은 해치고 싶어하지 않는 순수한 인물이 절대로 아니었으며 오히려 사상적인 다원주의를 철저하게 배제하고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해 필요에 따라 자신의 모든요소를 총동원했으며 수틀리면 정적들을 무자비하게 탄압하는 정치적 괴물이자 독재자에 가까운 인물이었다. 독립 이전부터 말이다.[34] 그리고 미국 정부는 늦어도 1947년에는 이런 사정을 전부 파악하고 있던 걸로 보인다. 베트남에서 독립운동 세력은 베트민만 있던 게 아니고 북쪽에는 베트남 국민당(VNQDD)[35]나 대월당, 남쪽에는 종교파 세력 같은 다른 세력들이 즐비했다. 이들 대부분이 2차 대전 때는 찬드라 보스의 인도 국민군처럼 적의 적은 나의 친구 원리로 일본군과 협력했기에 미국의 편이 아니긴 했으나 종전 이후로는 이미 일본은 망했고 이들 비공산주의 독립운동가들은 더 이상은 미국의 적이 아니었다.[36] 이런 대체제들이 있던 마당에 철저한 독재정권으로 확인된 호치민과 베트남 공산당을 미국이 지지할 만한 이유는 단 1도 없었다.
황제가 경찰권을 군벌과 폭력단에게 공식적으로 팔아넘겼다고 할 정도로 세계사에 유례가 없는 부패의 극을 달리던 바오다이 황제가 통치하던 베트남국은 쿠데타에 이은 1955년 10월 26일의 국민투표로 무너지고 베트남 공화국(남베트남)이 성립되었다. 대통령으로 선출된 응오딘지엠(Ngô Ðình Diệm, 고딘디엠으로 자주 잘못 불림)은 나름대로 능력은 있었는지 일본군이 물러간 초기에 호찌민이 응오딘지엠에게 자신과 손을 잡자고 제안한 일도 있었다.
정권 초기에는 정부에 저항하는 폭력단 빙쑤옌을 효과적으로 토벌하고 80만에 달하는 피난민의 재정착을 완수하는 등 능력을 발휘하기도 했다. 그러나 응오딘지엠은 집권 1년도 지나지 않아 정치적 동맹 세력들을 배신하고 숙청하는 북쪽의 베트민이 10여년 전에 저질렀던 짓과 별로 다를 바도 없는 일을 저질렀다. 여기에 응오딘지엠 본인도 군사적으론 무능했기 때문에 지엠에게 배신당한 종교파 세력이 가진 군사조직이 와해된 상황에서 공화국 정규군이 이들 지역을 장악하는 데도 실패해 힘의 공백이 발생했고 결국 몇 년 뒤 베트콩의 침투가 본격화되면서 문제가 심각해졌다. 정치적으로도 정치적 기반인 지주 계급의 눈치를 보다 토지 개혁에 실패하며 국민 대다수인 농민들의 신임을 점차 잃어갔고 미국의 원조로 눈먼 돈이 넘쳐나면서 정권은 급속도로 부패하기 시작했다. 지엠의 일족들이 국가 요직은 물론이고 경제권까지 독점했고 미국 원조금은 경제 개발에 돌려지지 않고 사치품 수입에 낭비되었다. 예컨대 베트남은 농경국가인데 농업용 비료 수입에는 고작 200만 달러를 쓰면서 사치품인 양담배 수입에 650만 달러를 쓰는 행태를 보여줬다. 이러한 행태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늘어나자 동생인 응오딘뉴가 두목인 비밀경찰을 조직하여 사람들을 마구 투옥시켰다. 말그대로 "신악(新惡)이 구악(舊惡) 뺨친다"는 상황이 되었던 것이다.
이런 막장성으로 기껏 안정되었던 치안도 도로 악화되고 국민들이 등을 돌리며 응오딘지엠 정권은 파국으로 치닫게 되고 결국 이는 공산당의 세력화를 불러왔다. 1960년 12월에는 흔히 베트콩으로 불리는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N.L.F)이 결성되었다.
이 와중에 남베트남에서는 불교계의 뚝드리꽝 스님 등이 모여서「구국(救國) 평화 회복 및 반(反)부패 운동 세력」이라는 단체를 결성해 활동하고 있었다. 이 산하에 사이공 대학 총학생회, 시민단체들이 연합하여 일종의 시민연대를 구성하고 반부패 운동에 나섰다.
남베트남 사람들은 이 반부패 운동에 참여하는 데 좌, 우익을 가리지 않았다. 목사, 승려, 학생 등 남베트남 국민들은 한데 뒤섞여 반전운동, 인도주의 운동, 순화운동 등 정권 타도를 외치며 반정부 시위를 벌였다. 문제는 당시 국가 상황이 여러 면에서 최악에 가까워지고 있어 좌익과 우익 인사들이 서로 반목하다 급기야 서로를 향해 테러와 암살을 행했다. 반공(反共)을 외치고 나라를 위기에서 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우익 인사들은 어느 날 갑자기 시체로 발견됐다.[37] 반대로 공산주의를 주장하는 좌익 인사도 사실상 마찬가지였는데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에 대응책으로 만들어진 수많은 관변단체들도 똑같은 방식으로 대응한 것이다.
상황이 이렇게 되니 일반 시민들 사이에서는 좌익이나 우익이나 똑같은 놈들로 보일 뿐이고 누구라도 좋으니 제발 나라를 좀 평화롭게 해 달라고 호소하는 상황에 이르게 되었다. 사이공의 대학생들도 초기에는 평화주의적 노선을 견지했으나 상황이 파국으로 치닫자 결국 나라를 버렸다. 온 나라가 불교 신자, 가톨릭 신자, 사회주의자, 자본주의자, 극좌/극우 등등으로 갈기갈기 찢어져 끊임없는 시위가 벌어졌다. 결국 남베트남은 국가 내부의 부패가 심각해지며 내부 불만이 심화되어 치안이 악화되었고 좌익과 우익은 이념적 유혈갈등을 마구 일으켰으며 각 계층의 사람들이 마구 반목하며 남베트남 국민들의 삶을 나락으로 떨어뜨렸다.
특히 부패한 응오딘지엠 정권은 불교도를 공공연하게 탄압했다. 물론 불교계도 부패했고 여러 문제가 많았지만 천여 년이 넘도록 불교를 많이 믿어 온 베트남 여론은 이런 탄압을 환영하지 않았다. 국교나 다름없는 불교를 탄압하곤 정작 가톨릭을 내세우고 부패한 모습을 보이니 이런 여론의 분노를 지지삼은 남베트남 불교계는 남베트남 지엠 정권의 존재 자체를 인정하지 않으며 전쟁이 심화되며 사람들이 마구 죽어가기까지 해 극도로 격렬한 반정부 시위에 나섰다. 불교계는 이미 남베트남이라는 국가에 소속된다는 소속감도 잃어버린 것이다. 심지어는 불교계 군벌 및 장교들마저 응오딘지엠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였으며 미군 철수 이후 남베트남 주요 도시가 차례차례 넘어가는 상황에서도 징병 반대 시위를 대대적으로 벌였고 정부는 이들의 요구를 받아들여 신병 징집을 중단하겠다고 선언했다. 불교도 시위가 이렇게 격해지며 경찰로는 감당조차 못해 군대까지 동원하는 판국에 이르렀음에도 대통령은 공산주의자 탓이라는 헛소리만 거듭하고 있었다.
이 불교도 시위 와중에 저명한 승려인 틱꽝득의 소신공양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다.[38] 결국 군부에서 공개적으로 쿠데타를 거론하기까지 했는데 대통령 영부인 역할을 하던 응오딘지엠의 제수(응오딘누의 아내) "마담 뉴(Madame Nhu)" 쩐레수언이 베트남의 고승 틱광둑의 소신공양 사건을 두고 불타게 놔두고 박수나 칩시다(Let them burn and we shall clap our hands)"라고 말했다. 거기에 덧붙여 "중들이 바베큐를 더 한다고 하면, 제가 기쁜 마음으로 휘발유와 성냥을 지원할게요(if the Buddhists wish to have another barbecue, I will be glad to supply the gasoline and a match.)"라고 했다.[39] 또 "중놈들이 한 게 뭐 있나요? 기껏해야 자기네 하나를 바베큐로 만든 게 고작이죠... 그 바베큐요? 자기 만족일 뿐이죠, 게다가 수입 휘발유를 썼잖아요"라고 했는데 이 막말은 미국 CBS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나왔다. 위에서 보듯이 영어 자막을 달고 미국에서도 방송되었고 이 막말을 본 존 케네디 미국 대통령도 황당해했다.# 원래 베트남은 불교가 국교이다시피 할 정도로 국민들의 상당수가 독실한 불교도인 나라다. 이런 곳에서 집권 세력이 종교적 편견에 찌들어서 불교를 맹목적으로 탄압하고 비하하면서 극소수인 카톨릭 교도들에만 온갖 이권을 안겨주니 당연히 온 국민이 분기탱천할 수밖에 없다.
결국 소신공양 사건 1달 후인 1963년 11월 미국의 방관[40] 하에 쿠데타가 발발해 응오딘지엠은 동생과 함께 가톨릭 성당으로 숨으려다 체포, 사살당했다. 쿠데타 세력 내에서도 응오딘지엠의 처리에 관해서는 의견이 대립했지만 해외 추방으로 의견을 모아 지시를 내렸으나 그때는 이미 사살당한 뒤였다. 이에 어쩔 줄 몰라하던 군부는 미국에 응오딘지엠이 자살했다는 거짓 보고를 올리기도 했다. 한편 쩐레수언은 그 때 딸과 미국에 있었고 다른 자식들이 먼저 로마로 망명하여, 로마로 따라가 살다가 병사했다. 죽음을 목전에 둔 그녀는 조국에서 죽게 해 달라고 베트남 정부에 간청했지만 거절당했다.
하지만 이것은 혼란의 1막에 불과했다. 지연, 학연, 종교와 미국과의 연줄로 분열되거나 난마처럼 얽힌 남베트남 군부는 갑자기 손에 떨어진 권력에 어쩔 줄 몰라 했으며 지엠 정권 추종자를 모조리 축출한 정치 공백에 권력의 맛을 본 군인들의 야욕에 의해 쿠데타가 쿠데타를 부르는 막장에 빠진다. 이때부터 1975년까지 무려 다섯 차례의 쿠데타가 일어났다. 이 와중에 응웬 까오 끼 전 부통령은 티우 대통령 제거를 위한 쿠데타를 계획했으나 내부분열로 실패하는 사건도 벌어졌다. 그럼에도 종교인들은 미국의 대월 방위공약을 철석같이 믿고 더 이상의 북베트남군 공세는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결과적으로 남베트남은 매우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 쿠데타와 부패가 횡행하고 우익, 좌익 할 것 없이 폭력을 휘두르며 대놓고 정부를 부정하는 시위들이 벌어지는데 정부는 손놓고 있고 간첩과 게릴라(빨치산)들이 영토 내에서 활개를 치고 돌아다니는 상황이었다.
4.2. 북베트남의 통일 정책
한편 북베트남은 달랐다. 호찌민은 베트남 공화국 성립 직후 군사회의에서 "10년이 걸리든 20년이 걸리든 우리는 베트남을 통일한다"고 결정했다. 이미 남북으로 갈라지기 이전부터 각지에 추종세력과 무기를 은닉해 두었고 COSVN(남베트남 해방사령부)를 조직하여 후일 호찌민의 후계자가 되는 레주언이 그 수장이 된다.휴전선 형성 이후 북베트남에서는 인민재판을 빙자한 대규모 숙청을 단행해 반대자들의 씨를 말려버렸다. 우선 60만에 달하는 가톨릭 신자들이 대거 월남하는 사태가 벌어졌는데 호찌민과 북베트남이 그들을 서구 제국주의자들의 앞잡이로 의심했던 것도 있다. 하지만 베트남의 가톨릭 세력은 종교와 무관하게 독립운동을 지지했던 세력들도 적잖게 있었지만 그들 또한 터무니없는 누명을 뒤집어쓰고 고향에서 쫓겨난 셈[41]이었다.[42] 그리고 사실상의 전시체제 선언인 1953년 농업 강령을 선포했다. 이 과정에서 집단농장화를 무리하게 추진했는데 이에 반발하는 농민들을 군대를 동원하여 무자비하게 탄압했다. 1956년 말 호찌민의 고향이기도 한 응에안(Nghệ An) 성(省)에서 일어난 대규모 봉기[43]가 휴전선에서 동원된 정규군 사단에게 무너지며 일단락되었다.
결국 이 2차 토지개혁 기간 중 학살된 농민의 수는 1만~5만여명으로 추정되며[44] 북베트남 사회에 크나큰 충격을 주었다. 이 때문에 한때 공산당 내부에서 호찌민에 대한 비판이 가해졌으며 호찌민 이하 공산당 간부들이 집단농장화 정책에 대한 자아비판을 해야 할 정도였고 이 때문에 남베트남과 미국의 북베트남에 대한 불신이 깊어졌으며 미국이 총선거를 씹은 중요한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소련, 중국 같은 공산주의 대국들은 호찌민의 리더십에 의문을 표하기도 했으나 다행인지 풍년이 계속되었고 경제원조도 효율적으로 사용되어 체제와 경제 모두 안정권에 들어간다. 굳이 토지개혁의 성과물이라고 하자면 최소한 먹고사는 문제가 해결되고 대량의 아사자가 발생하지 않았다는 점일 것이다. 다만 공산주의적 농업 방식은 이러한 막장 결과를 안겨준다는 것을 보여준 사례가 되었다.
어쨌거나 토지정책의 오류로 인민군이 나서야 할 정도로 심각한 농민반란까지 이어지자 프랑스와의 투쟁을 주도한 호치민과 보응우옌잡 등의 기존 지도부는 책임을 지고 잠시 1선에서 물러나 남부 베트남 출신 공산주의자들인 레주언 등의 신진 지도부에 권력을 이양했다. 레주언은 자신들의 양보가 일시적일 거라는 북부 출신 기존 지도부의 예상을 깨고 베트남 민주 공화국을 빠르게 장악한다. 남부가 기반이라 자본주의 남베트남 정권이 존속하면 지지 기반을 상실해 공산당 내부의 권력투쟁에서 크게 불리해지는 사정상 새 지도부는 총력을 다해 무력통일 정책을 추진했고 협상의 여지는 있을 수 있다고 본 호치민과 보응우옌잡 등의 구파를 밀어냈다.
응오딘지엠 정권의 부패가 표면화되자 COSVN은 남베트남 여기저기서 준동을 시작해 1961년에는 미국 추산 30만 명의 군세로 확대되었다. 남베트남 정부는 미국의 지원으로 소위 "전략촌 계획"을 추진해 이에 대처하려 했으나 정부의 부패와 미국의 어리버리함으로 인해 그에 지원된 돈은 권력자의 뒷주머니만 채워줬고 지원된 미제 무기는 베트콩의 무기고가 되는 역효과만 낳았다. 남베트남군은 게릴라조차 감당할 여력이 되지 않아서 1963년의 압박 전투는 2,000명의 정부군이 200여 명에 불과한 베트콩 게릴라에게 처참히 당하는 졸전을 벌였고 이는 결국 미군이 베트남에 본격 개입하게 되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5. 기타
전쟁 이후 베트남은 독립전쟁에 참여한 군인들과 그 가족들을 독립 초반부터 연금이나 집을 지불하는 방식으로 대접하고 있으며, 2005년 혁명유공자 우대에 관한 국회 상무위원회의 법령(PHÁP LỆNH ƯU ĐÃI NGƯỜI CÓ CÔNG VỚI CÁCH MẠNG CỦA UỶ BAN THƯỜNG VỤ QUỐC HỘI, 이하 혁명유공자법)을 제정했다. 법령 전문 한국어 번역[45] 참고자료 1 참고자료 22018년 개정 법안에 따르면 월마다 지불되는 연금이 한국 돈으로 4만 ~ 28만 원이나 일반적으로는 8만 원 안팎 수준이고,[46] 2010년 기준 전국적으로 160만 명[47]이 혜택을 받고 국가유공자들을 위한 수당을 위해 지불한 돈이 20조 베트남 동[48]에 달했다고 한다.
전쟁을 배경으로 한 창작물로 월맹군과 프랑스군의 혈전이던 디엔비엔푸 전투를 소재로 다룬 도널드 플레젠스 주연 전쟁영화 디엔 비엔 푸가 1992년에 개봉했다. 탄탄한 고증과 사실적인 전장 묘사로 수작이라는 호평을 들었다.
최근에는 프랑스 감독인 에릭 종카의 TV 영화 '화이트 솔저'가 개봉했다. 특이하게도 본래 프랑스군이었으나 베트민에 전향해서 프랑스와 싸운 프랑스인이 주인공이다.[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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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독립 직후 설립된 반프랑스 성향의 라오스 임시정부. 그러나 친프랑스 성향의 라오스 왕국이 먼저 라오스를 장악하며 쫓겨났다. 이후 임시정부가 해체되고 파테트라오라는 군사조직으로 재탄생했다.[2] 캄보디아의 독립 운동 단체.[A] 국공내전으로 인해 1949년까지 중화민국이 프랑스를 지원하다가 중국이 공산화된 후 중화인민공화국이 베트남을 지원하기 시작했다.[A] [5] 인도차이나 식민지 현지에서 차출한 병력이다.[6] 베트남 정부 측 추산이다. 프랑스는 17만 5천~30만 명 정도로 추산한다.[7] 이 중 프랑스인은 20,685명. 북아프리카와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출신 병력이 전쟁 내내 다수가 동원되어 사상자를 냈다.[8] 미국은 일본을 견제한다는 명목으로 지원했다.[9] 실제로 중국이 공산화되는 1949년 이전에는 인도차이나에서 프랑스군이 2차대전 당시 획득한 미국제 무기와 차량의 사용을 금지하는 등 제재 조치도 있었다. 중국 공산화와 6.25 전쟁 발발 기점으로 프랑스의 식민지 전쟁 지원으로 방향이 바뀌게 된다.[10] 자료의 출처는 D.F Fleming, The Cold War and Its Origin이고 이 자료는 리영희가 쓴 전환시대의 논리에도 나온다.[11] 100명 미만에서 2만명까지 여러 의견이 있지만 서구 학자들은 대체로 6천명 이상으로 본다.[12] 중앙아프리카 공화국 대통령으로 훗날 재임하는 장 베델 보카사가 극동원정군의 일원으로 참전한 경력이 존재한다.[13] 형식상으로는 베트남국의 군대였지만 실질적으로는 프랑스군 산하의 보조군이었다.[14] 비시 프랑스 정권 치하에서 독일의 외인부대에 가담하는 등 부역자 중에서도 죄질이 악질적이라 40년대 후반까지 형무소에서 복역하던 이들도 일부가 비밀리에 특채되어 전장에 투입되기도 했다.[15] 알제리 등 북아프리카 출신 대원들은 인도차이나 전쟁 이후 말로가 좋지 못한 경우가 적지 않다. 고향으로 복귀한 후 일부는 알제리 민족해방전선으로 전향해 프랑스군에 맞서거나 또 다른 일부는 프랑스에 저항하지 않고 살다가 프랑스의 철수 이후 프랑스군에서 복무하던 전적이 문제가 되어 현역 시절 수여받은 훈장을 강제로 삼키는 등의 고문을 당하고 처형되는 등 많은 수가 인도차이나 전쟁 이후에 무슨 선택을 했건 고통스러운 말년을 보내야 했다.[16] 독일 국방군과 무장친위대, 이탈리아 왕국군에서 복무한 독일인과 이탈리아인 등과 동유럽이 소련에게 점령당하면서 나라 잃은 부랑아 신세가 된 폴란드인 등이 프랑스 외인부대에 투신하는 경우도 있었다. 포로가 된 외인부대의 몇몇 독일인 대원들은 입대를 원하지 않았는데 2대전 이후 강제로 프랑스군에 편입되었다며 베트남 인민군 포로 심문자들에게 털어놓기도 했는데 정확한 진위 여부는 불명. 열악한 포로수용소 생활을 몇년씩 해야 했던 타 프랑스군 포로들과는 대조적으로 이런 독일인들은 바로 동독으로 송환된 경우도 있다.[17] 1차 인도차이나 전쟁 당시 CEFEO의 이 편제를 기동단(Groupes Mobiles)이라고 불렸다. 2차대전 당시 미 육군의 여단급 임시 전투부대인 전투 사령부# 편제에 영향을 받은 여단급 편제다. 3개 차량화보병 대대를 근간으로 포병,기갑 전력과 공병,통신부대,의무 부대가 지원 제대로 배속되었다. 총 정원은 3천명에서 3천 5백명 사이 선이었다. 장 드라트르 드타시니 장군이 재임하던 시절 1949년 이후 강화된 베트민의 전면 공세에 대응해 창설되었다.[18] 오스프리 맨앳암즈 프렌치 인도차이나 전쟁 1946-1954 출처[19] 흔히 이름의 끝 글자를 따서 "잡" 장군이라고 불리는 사령관[20] 중국의 공산화로 인한 중국공산당의 본격적인 개입 때까지 프랑스군의 압도적인 우위 때문에 현지에서 노획한 소량의 무기만 가지고 싸워야 했다. 베트남 북부도 기계화부대가 활동하기 힘든 험준한 산맥과 현지인도 쉽게 통과하기 어려운 빽빽한 산림지대라 프랑스군의 소탕전에도 불구하고 계속 싸울 수는 있었다.[21] 중국공산당이 6.25 전쟁에 참전하면서 대량의 소련제 무기 구매로 필요가 없어진 잉여 노획 무기들을 대량으로 제공했다. 120mm 박격포 같은 비교적 최신 무기들도 함께 넘겨줘서 월맹군 사단의 화력 지원을 당담하게 됐다.[22] 이 장비은 원래 미국이 국민당군을 지원하기 위해 준 장비인데 중국 인민해방군이 국공내전에서 이긴 후 노획한 장비들을 베트민에게 넘겨주었다. 그야말로 서방의 무기로 공격한 셈.[23] 그에 비해 총공세시기 프랑스군은 400명의 전사자와 1,200명의 부상자가 나오는 선에서 그쳤다.[24] 오스프리 맨앳암즈 프렌치 인도차이나 전쟁 1946-1954 참조[25] 이게 당연한 게 형식상으로 독립한 베트남국의 국군 간판을 내걸고 모집했는데 실질적으로는 식민지 시기처럼 프랑스 장교들의 지휘를 받았다. 병사들의 사기나 의욕이 생길래야 생길 리가 없었을 것. 보응우옌잡 장군은 이들이 지역과 지형에 익숙하고 민간인 구역에 침투한 베트민 요원들을 색출하는데 탁월해 적지 않은 골칫거리였다고 술회했다.[26] 당시 사진들을 보면 분명 프랑스군인데 무기나 기타 장구류가 미제인 게 대부분이다. 미국에서 원조받은 장비가 없으면 보병 무장도 어려운 상황이었다는 뜻.[27] 애초에 2차대전 당시 서방세력에서 가장 큰 피해를 입은 나라가 프랑스였는데 전쟁 끝난지 단 2년만에 이 늪에 가까운 전쟁에 뛰어든 것이 컸다. 게다가 당시 프랑스는 독일에게 지배당하며 착취받으면서 다시 제 국가를 찾기 위해 레지스탕스로 뛴 인물들이 많았기에 오히려 월맹을 동조하는 사람도 많았고 이중 전선에 있던 일부 프랑스 군인들은 월맹이 불어로 전향하라는 멘트에 흔들려 탈영 후 항복한 뒤 월맹군이 되어 조국이었던 프랑스군을 공격하기도 하였다.[28] 파테트 라오 등의 반불 공산주의 무장단체들을 월맹군이 지원하면서 전쟁 후반부터는 라오스로 확전이 이뤄진다. 의용군 형식의 월맹군 파병과 현지 공산군 육성 모두 있었다. 월맹군은 소수민족들과 라오스 민간인도 철저히 조직해 현지 자국군의 병참 지원 등에 동원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29] 오스프리 맨앳암즈 프렌치 인도차이나 전쟁 1946-1954 참조[30] 디엔비엔푸 진지는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전체로 놓고 봐도 프랑스가 가장 난공불락을 자신하던 핵심 요새에 월맹군이 큰 사상자에도 불구하고 기어이 함락시키자 공포감마저 확산된다. 프랑스 극동원정군은 디엔비엔푸는 수송 인프라가 열악한 라오스 국경지역이라 수송기를 동원할 수 있는 진지의 공수부대가 제한적인 공세는 쉽게 떨쳐낼 수 있을 거라고 예상했다. 공산군이 지역에서 사용할 수 있었던 인프라가 워낙 부족해서 충분한 병력과 화력을 동원할 수 있을 거라고 보지도 않았는데 실제 전투에서는 베트남 인민군이 압도적인 수적 우위와 화력 우위까지 확보해서 프랑스 극동원정군이 진심으로 경악한 것. 투자한 방어전력이 부족한 것도 아니었는게 프랑스 극동원정군이 전차 공수까지 할 정도로 방어 전력에 막대하게 투자한 사례가 전쟁 전체로 봐도 몇 없다.[31] 심지어 남베트남인들의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적대감을 이용해서 '프랑스인이 베트민과 협력하면서 뒷통수를 친다'는 삐라가 퍼지기도 했다.[32] 여기에서 알아야 할 것은 이때는 6.25 전쟁이 정전된 지 얼마되지 않은 시점이라는 것이다. 더구나 6.25 전쟁은 종전도 아닌 정전으로 끝난 상태였기 때문에 미국의 입장에서 볼 땐 아시아에서의 공산주의 확산이 일어날 가능성이 크다고 보고 있었는데 이때 베트남이 등장한 것이다.[33] 호치민은 2차 인도차이나 전쟁 때는 노년에 정치권력 역시 남부 상경파 레주언에게 양도한지 오래라 사실 이렇다 할 만한 영향력을 발휘하는게 불가능하기도 했다.[34] 사실 공산주의가 현실에 정착하게 된 사건인 러시아 혁명이 어떻게 진행되었나를 보면 이후 세계 각지의 공산주의 지도자들이 이처럼 폭력적이고 독재적인 성향을 띄는 것은 필연적인 게 대부분이었다.[35] 사실 베트남 국민당은 이전에 베트민과 교류했던 것을 통해서 1946년 베트민이 주도하던 연립정부에 참여하였지만 얼마안가 베트민의 견제와 뒤이은 탄압과 숙청으로 인해 오래 못 갔다. 이후 친불파와 베트민에 시달리다가 제네바 협정 후 남베트남 정부에 합류하여 자매정당이던 대월국민당과 함께 야당으로써 활동하였으나 끝내 자신들의 정치적 역량에 대한 한계로 인해 소수정당에 머물렀고 남베트남이 패망한 후 미국으로 망명했다.[36] 또한 프랑스 역시 찬드라 보스의 부하들을 체포해서 재판에 넘겼던 영국 당국과는 달리 종전 이후에는 이러한 반공주의 독립운동가들에게는 비교적 호의적으로 대했던 편이다.[37] 1973년까지 연 평균 무려 840명이나 암살을 당할 정도였다. 대통령이 총리로 지명하려 했던 유명한 반공 지도자 웬반홍, 사이공 대학의 우익 학생 지도자, 그리고 반공을 주장하는 언론인들이 쥐도 새도 모르게 암살되었다.[38] 당시 이 광경을 촬영한 사진이 미국 랩 메탈 그룹 Rage Against The Machine의 데뷔 앨범 표지로 쓰이기도 했다.[39] Tragedy of Vietnam, Patrick J. Hearden, p83[40] 단순 방관이 아니라 사실상의 주도에 가깝다. 왜냐하면 미국은 응오딘지엠을 그냥 놔둘 경우 남베트남은 몰락한다는 결론을 내렸고 따라서 CIA 가 당시 유력한 남베트남 장군들과 비밀리에 접촉하며 '쿠데타 일으켜도 미국은 개입안한다' 는 언질과 함께 쿠데타 세력을 포섭하는데 쓸 공작 자금까지 제공했기 때문이다.[41] 다만 인구 다수인 불교도랑 갈등을 빚었다든지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응오딘지엠이 가톨릭을 우대하던 남베트남의 경우가 있어서인지 북베트남 여론도 가톨릭교도 추방에 반응이 나쁘지 않았다.[42] 토지개혁시기 북베트남에 있던 가톨릭들이 탄압받았던 건 사실이지만 북베트남 정부가 종교의 자유를 금하지는 않았다. 당시 북베트남에 있던 150만명의 가톨릭교도들 중 90만명의 가톨릭교도가 북베트남에 남았다. 북베트남 정부와 호찌민은 그들에게 "부당하게 대우하지 않겠다."고 가톨릭교도들 앞에서 종교의 자유를 약속했다. 그 결과 가톨릭 교도들로 새로운 친정부 연락위원회가 구성되었고 월남한 주교들을 대체할 새로운 주교들이 임명되었으며 1954년 말에는 가톨릭 사제를 양성할 신학교까지 문을 열었다. 1955년 6월에는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고 교회 내부 문제에 대하여 바티칸의 권위를 인정한다는 정부의 포고까지 나왔다. 다만 북베트남 정부는 가톨릭교도가 정부 정책에 반대하는 선전물을 배포하는 것을 금지했다. 출처는 호치민 평전 p712[43] 성을 거의 장악했다.[44] 그런데 문제는 베트남의 남북 분단 이후 숙청되거나 처형당한 사람들에 대한 통계가 없어서 아직도 찾을 수 없다. 그래서 이를 두고 호찌민 빠와 까가 심각하게 대립하고 있다. 한 쪽에서는 그렇게 많이 안 죽이고 부패한 사람들만 처벌했다, 한 쪽에서는 냅다 많이 죽였다 등등.[45] '베트남의 보훈제도 및 국가유공자 지원 법률 현황'이라는 제목의 논문이다.[46] 여담으로 베트남에서는 1인당 월 소득이 7만 8천 원(시골 기준)/10만 4천 원(도시 기준) 미만이면 빈곤층으로 분류된다. 베트남의 빈곤 가구는 2022년 기준 197만 가구, 빈곤율은 7.5%라고 한다. 참고자료[47] 당시 베트남 인구가 8741만 명이었다. 인구의 무려 2% 가량이 국가유공자와 그 가족으로써 혜택을 누리는 셈.[48] 당시 한국 환율로 환산하면 1조 2400억 원 수준이다. 어림잡아 1년 동안 1명당 77만 5천 원(약 683달러)이 지불했다는 것이다. 절대 액수로만 보면 적어 보이지만, 당시 베트남은 1인당 GDP가 1684달러(당시 환율로 191만 원)에 불과한 최빈국이었다. 덤으로 2010년 기준 도시 가구는 월 50만 동(26달러) 미만, 시골 가구는 월 40만 동(20.5 달러) 미만이 빈곤선이었다는 것과 비교하면 연금을 제대로 준 셈이다.(덤으로 당시 베트남의 빈곤 가구는 330만 가구, 빈곤율은 약 15%에 달했다고 한다.) 참고자료[49] 실제로 공산주의 계열 프랑스인들이 월맹군과 인도차이나 공산당에 협조하는 실 예가 있었다. 영화는 극동원정군 병사의 전향을 다루지만 전시에 소집된 인도차이나 공산당 당대회에서는 라오스 공산당과 태국 공산당 뿐만 아니라 프랑스 공산당도 초청받았다. 월맹군에 협조하면서 극동원정군 병사 포로들을 심문하고 고문하던 일을 맡다 전후 사면받은 프랑스인 공산주의자의 존재도 확인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