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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신정변 武臣政變 경인의 난(庚寅亂) | 정중부의 난(鄭仲夫亂) | ||
<colbgcolor=#fedc89,#444444><colcolor=#670000,#FFCECE> 시기 | CE 1170년 10월 11일 ~ 10월 13일 (양력) [1] | |
장소 | 고려 개경 보현원[2] | |
성격 | 쿠데타 | |
원인 | 문신-무신 차별의 누적 | |
교전 세력 | 고려 왕실 (진압군) 패 | 무신세력 (반란군) 승 |
주요 인물 | 지휘관 의종 (고려 대왕) | 지휘관 이고 (견룡군 산원) 이의방 (견룡군 행수) 정중부 (응양군 상장군) |
고려 왕실 측 주요 인물 김돈중[3], 한뢰, 왕광취, 김석재[4], 조동희[5] | 무신 세력 측 주요 인물 채원[6], 이소응, 김광미, 양숙, 진준, 기탁성, 조원정, 이의민, 박존위, 이광정 | |
병력 | 불명 | 불명 |
피해 | 불명 | 불명 |
결과 | 고려 왕실의 반란 진압 실패. - 문신, 환관 대거 숙청. - 의종 폐위, 이의방 일파의 무신정권 장악. | |
영향 | 고려 왕실의 괴뢰화. 무신정권의 성립. (이고, 이의방, 정중부 연립정권) |
[clearfix]
1. 개요
武臣政變고려 의종 24년에 해당하는 1170년 8월에 고려의 무신들이 개경 인근의 보현원[7]에서 들고 일어난 군사 쿠데타. 당시 무신은 2대 군주인 혜종 왕무(王武)의 이름이었기 때문에 호신(虎臣)이라고 불렸다. 피휘에 대한 사항은 해당 문서 참조.
1170년이 경인년이기 때문에 경인의 난(庚寅亂)으로도 부른다. 경인년의 보현원 정변과 1173년 계사년에 일어난 김보당의 난(계사의 난(癸巳亂))을 합쳐 '경계의 난(庚癸─亂)'이라고 부른다.
이 사건으로 고려 왕조의 엘리트층과 지식인층은 살아남으려면 무신정권의 휘하로 들어가거나 지방으로 도주해야 했고 저항하면 그대로 숙청당해 고려를 지탱해온 엘리트층이 붕괴되었다.[8] 이후 무신정권은 중앙정부의 이권을 본인들이 독점하고 의도적으로 지방의 정규군을 해체하고 국력 증강을 방해하기 시작했다. 비록 명분이 적합지 않다는 문제점이 있다고 해도, 기존의 의종과 문신들이 사치향략에 빠지고 민생은 파탄지경에 이를정도로 무능하게 통치했기 때문에 민심이 용인한것이었지만, 정작 집권한 무신들이 고려의 폐단을 개혁하기는 커녕 자기네들끼리 권력다툼을 하는데 힘을 쏟으며 행정업무는 방기했으며, 그 영향으로 몇년이 채 되지도 않아 무신정변의 명분은 퇴색되었다. 결국, 고려는 이 사건 이후로 강력한 행정기반을 되찾지 못하고 혼란을 겪는다.
당시 상장군 정중부와 이의방, 이고 등의 무신들이 일으켰기 때문에 정중부, 이의방의 난 또는 무신의 난이라 부르는 경우도 있다. 참고로 정중부, 이의방의 난의 명칭의 경우는 그들 자체를 군인보단 권신으로 본다는 뜻이기도 했다. 특히 20세기까지는 무신란이라는 표현이 더 대중적이었다. 무신정권 당대에는 난이라고 부르지 않고 무인시대에서는 경인년 거병처럼 자기들끼리는 추켜세웠다.
동국통감에선 권신들이 연이어 집권했다는 평론만 있어서 아자겸의 난과 비슷하게 보고 무관과 문관의 경계가 뚜렷하지 않은 고려왕조의 특성상 무신의 난 무신란으로 인정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흔히 권문세가 시절을 고려판 세도정치로 보던 시각과 달리 고려판 세도정치가 시작된 첫번째 사건으로 보기도 한다. 아무래도 조선 태조인 이성계가 그들과 달리 야전형 군인이라 그들과는 확실한 구별이 필요했고 더욱이 이의방이 이성계의 조상인 이린이 형이며 방계조상이라 역적으로 몰리기 쉬워 군인이 아닌 신하로 규정했다.
또한 고려조차도 고려말 학자인 이제현은 그들의 행태를 주먹 바람 등으로 규정했다. 이제현은 그들을 요즘 말로 치면 군인이 아닌 신하도 아닌 깡패로 취급했다. 이유는 야전형 군인이자 송악의 상인이었던 고려 태조인 왕건도 그들처럼 역적으로 몰릴 수도 있었던 상황이었다
2. 원인
<rowcolor=#670000,#fedc89> 무신정변 3일, 100년간의 무신 정권이 시작되다 (2016년 6월 26일 방송분) | 무신정변의 배경 - 이의방과 이고, 정중부를 포섭하다 (2016년 6월 26일 방송분) |
<rowcolor=#670000,#fedc89> 6회 / 뺨 한 대로 시작한 쿠데타, 무신정변 (2022년 6월 1일 방송분) |
문신에 의한 무신 차별로 요약된다. 대표적인 사례로 직급도 낮은데다 어려도 한참 어린 문신 한뢰가 무신 고위직인 대장군 이소응의 뺨을 때린 일, 김돈중이 정중부의 수염을 태워서 화가 난 정중부가 김돈중을 때리자 그의 아버지인 김부식이 정중부를 매질하려고 했던 일 등을 들 수 있다.[9] 이 때문에 의종, 김부식, 김돈중, 한뢰가 무신정변의 원흉으로 거론된다.
그러나, 이 사건이 일어나기 이전부터 무신은 차별받고 있었다.
2.1. 차별받는 무신
고려시대 때는 군 지휘권이 문신에게 있었다. 전쟁 발발시 문신 정2품의 평장사를 상원수로 임명하여 총사령관 직을 맡겼고, 무신의 최고위인 상장군은 부원수에 임명되어 상원수의 지휘를 받는 위치에 놓였다. 한국사에서 유명한 서희와 강감찬도 군공으로 인해 장군이라 부르지만 실제로는 과거를 통해 관직에 입문한 문신이었다. 강감찬이 군 임무를 수행한 것은 거란족과의 전쟁 시기인 약 3개월 정도뿐이다. 여진 정벌에서 활약한 윤관 역시 문신 출신이었다.대중들에게는 흔히 여진 정벌과 동북 9성 개척으로 잘 알려져 있지만 오히려 고려사에는 학문적인 면에서 좋은 평을 내리고 있다. 윤관도 전쟁 도중에 유교 경전을 탐독했을 정도로 뼛 속까지 철저한 유학자였다. 묘청의 반란을 진압하고 삼국사기를 지은 김부식도 당연히 문신 출신이었다. 고려의 역사는 능력 있는 문신이 장군을 겸직하며 병법을 바탕으로 다양한 전략과 전술을 보여주었던 시대였다. 고려 전기는 문신들이 일반 군인들보다 탁월한 전략적 지식을 겸비했고, 반대로 무신들은 전술적으론 쓸모가 있지만 속된 말로 '글도 읽을 줄 모르는' 단순무식한 병대장 출신들이 대다수였던 시절이었다. 이 때문에 초기 무신들은 국가운영을 하는 역할이 아니었으므로 그렇게 큰 불만을 품지는 않았다.
고려시대까지 '무신'이란 체계적인 병법이나 거시적인 전략을 세울줄 아는 군인을 육성하는 것이 아니라, 경륜 있고 공이 많은 병사의 지위를 높여 부대를 통솔하게 하는 개념이었다. 이렇게 병력을 운용하는 방식이 가능했던 것은 고려시대 내내 전쟁이나 반란이 들끓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고려시대는 정점인 정3품 상장군까지 올라간 무관일지라도 자기 이름 석 자나 제대로 한자로 쓸 수 있으면 다행일 정도로 지식과 교양이 매우 부족했다. 오랜 경험과 노련함을 바탕으로 한 전술적 소양은 갖추었으나 그 뿐이었다. 군대의 최고위 직책쯤 되면 전장에서의 지휘뿐만 아니라 나라 안팎으로 정치적인 판단까지 내릴 능력이 있어야 하는데 체제 단위의 정식교육을 받지 못한 무신들은 이러한 직책을 맡을 만한 역량이 없었다.[10]
반면 문과의 경우 유교 경전[11] 뿐만 아니라 군사전법에 대한 체계적인 이해 또한 요구하였기에 문신들이 무신의 일을 할 수가 있었다. 실제로 고려시대 명장인 강감찬이나 윤관 같은 사람들은 전부 문신이었다.[12] 이러한 구조상 문신은 무신들의 위에 서면서 무신의 일도 할 수 있었지만, 반대로 무신은 글조차 제대로 익히지 못했기에 문신의 일을 할 수가 없었다. 이와 같은 현실은 무신에 대한 차별을 더욱 공고히하는 데 한 몫 했다.
물론 이것도 일종의 문민통제로 본다면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정작 고려 왕조는 사실상 이성계한테 멸망할 때까지 제대로 된 문민통제를 하지 않았다. 고려의 군주들은 몇 세대에 걸쳐서 이궁지쟁처럼 서로 카운터 펀치를 날리도록 문신과 무신에 잘못된 훈수를 두면서 그들을 통제하지 못했다. 이런 이유로 고려 왕조는 강해진 문신(문벌귀족)들을 견제하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무신들을 키웠다. 그리하여 전대 군주 대에서 무신의 권력이 강해졌다가 현임 군주에서는 문신들의 권력이 강해지는 식으로 양쪽의 대접이 나빠졌다 좋아지기를 반복하는 과정에서 문무 사이의 확고한 권력서열이 불분명해졌다. 거기다 점차 관료들에게 나누어줄 식읍 즉 토지가 부족해지자 고려 왕조와 문인들은 무신들 식읍과 녹봉을 줄이고 문신들에게 분배했는데 이는 무신들 불만으로 작용했다. 송나라는 비록 문치주의로 무신들 지위를 낮추고 지휘권을 문신이 통제했지만 대신 무신들에게 고액의 녹봉을 주는 것으로 무신들을 달랬지만 고려는 그러지 않았다. 물론 고려도 무학재라는 무신교육기관을 만들고 엘리트 무신들을 만들고자 했으나 문신들 반대로 취소되었다.후일 고려를 무너뜨리고 건국된 조선은 이를 인지하고 무과를 통하여 체계적인 교육을 받은 무관들을 배출하있고 무관들 움직임을 엄하게 통제하기는 하였지만 이들에게 지휘권과 발언권을 어느 정도 허용하면서 무관들 불만을 최소화 하였다. 거기다 조선의 순수 무신 품계는 정 3품이었지만, 문관 품계를 받아 그 위로 승진하는것도 가능했고 조영무와 같이 무신 출신 정승도 몇번 나왔다. 이 덕분에 조선은 고려와 달리 군인들에 의한 군사반란은 이괄의 난, 임오군란 두 차례에 불과하였다.
2.2. 문신과 무신의 갈등
초기에는 의종도 문벌 귀족 세력을 견제하고 무신을 중용하는 정책을 펼쳤다. 무신 정변의 주요 인물인 정중부, 이의방, 이고는 순검군, 견룡군(경룡군)이란 이름을 가진 일종의 군주 호위 부대 출신이었다. 역설적으로 이들이 군권을 장악하고 정변을 독자적으로 계획할 수 있던 것도 이 때문.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군주 호위 부대는 군주가 가장 신임하는 인물들로 채워지나, 동시에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그들이 후에 권신이 되는 것과는 별개로 임명 당시에는 권신과는 거리가 먼 인물들을 뽑는다. 이미 권세가 있는 이들에게 더 권세를 얹어주는 일은 평균적인 능력을 가진 왕만 되어도 당연히 하지 않는 일이다. 즉 이 당시 무신출신이 등용되었다는것은 세력의 추가 문벌귀족에 기울어져 있음을 드러낸다.당시 고려 무신들의 상황은 어려웠다. 고려의 여진 정벌에서 얻은 전공을 기반으로 무신들의 입지가 탄탄해지기는 했지만 이자겸의 난 직후의 척준경 일파 숙청과 묘청의 난으로 인해 입지가 꽤나 위태로워졌다. 이때를 틈타 기존의 문벌 귀족인 문신들은 무신들의 권력을 도로 빼앗으려 했다. 이로 인해 무신과 문신 간의 알력이 극심해졌고 정계는 혼란스러워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무신정변 직전까지 고려 무신들의 권위는 이전에 비해서 훨씬 더 개선된 편이었다. 고려의 여진 정벌, 이자겸의 난, 묘청의 난 등을 통해서 무신들의 중요성이 부각되고, 공을 세운 무신들이 많아지면서 오히려 무신들의 세력이 점점 더 비대해졌다. 무인들은 오히려 신분 상승의 기대를 품고 출세 욕구에 눈이 멀어 문신들에 대한 반감을 빌미로 이용해서 정변을 일으켰다는 해석도 있다. 실제로 고려시대는 신분 상승 가능성이 신라 시대보다 더 높았고 이 때문에 들고 일어난 노비들과 평민들의 반란도 꽤 많았다. 그리고 여기서 신분 상승을 꿈꿨다는 점에서 다시 드러나듯, 그렇게 강해진 권위도 여전히 문벌귀족에 비할바는 되지 못했다.
두 세력간의 알력다툼과 갈등이 강해지는 상황속에서 의종은 무신을 우대해서 불만을 해소한다거나, 아니면 거꾸로 아예 문신들에 힘을 완전히 실어주기보다는 두 문무 신료들 간의 알력을 적당히 이용해서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고 유지하는 것에만 급급했다. 더욱이 의종 말엽에는 거꾸로 무신들보다는 불만 많은 문벌귀족들과 환관을 우대하며 이들에게 정치에 간여할 수 있는 발언권을 줌으로써 의종은 즉위 초반에 자신이 직접 힘을 실어준 무신들에게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게 했다. 결국 무신들은 자신들과 반목하던 문신뿐만 아니라 군주인 의종에 대한 정치적 반감과 적개심까지 커질 수밖에 없었다. 의종이 질펀하게 놀았다는 기록처럼 지나친 사치와 향락으로 인해 일반 백성들도 의종에 대한 원성이 매우 컸으며, 일반 병사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특히 무신 정변 당시 일반 병사들이 무신들의 행위에 대거 동조하였고, 무신들은 이를 적절하게 활용함으로써 세력을 얻는 한편, 정변의 정당성을 확보하였다.
결론적으로 의종은 세력간의 갈등을 일으켜서 자신의 지위를 안정화시키는 스타일의 왕이었는데 서경 사건이 크게 터지면서 자신도 절제를 잃고 그런 왕을 두고 문신과 무신의 갈등은 커지면서 결국 한 세력이 사라지게 된 사건이다.
3. 정변
<rowcolor=#670000,#fedc89> 무신정변의 계기가 된 오병수박희 (2016년 6월 26일 방송분) |
정변 과정은 다음과 같다. 인종 재위기의 권신 이자겸이 왕위를 탐내면서 온갖 뻘짓거리를 하는 바람에 군주는 문신을 버리고 군인인 무신들에게 온갖 버프를 넣기 시작했다. 이자겸의 난을 토벌한 무신 척준경이 그 동안 금단의 영역으로 여겨지던 정2품 품계를 수여받는 초유의 상황도 발생했다. 하지만 이후 척준경이 숙청되면서 척준경에 동조했던 무신들도 더불어서 함께 대거 축출됐다. 척준경이 여진족과의 전쟁에서 큰 공을 세운 전쟁 영웅이다 보니, 이자겸의 난 당시 척준경에 동조한 무신들이 상당히 많았다. 축출 다음에는 또 묘청의 난으로 인해 서경에 기반을 두고 있던 무신들이 대거 숙청당하기도 했다. 이렇게 무신들의 세력이 약해지자, 다시 정치 세력도를 되찾아야 하는 김부식 등의 문신들은 대놓고 무신들을 호구 취급하면서 서로 싸움을 시작했고 무례한 행동을 서슴치 않았다. 그렇게 무신들의 분노 게이지는 서서히 차오르기 시작했다.
의종 때에 이르러서는 양쪽의 대립과 괴롭힘이 마침내 정점을 찍었다. 의종은 문신들과 마실 나가면서 허구한 날 호위군인 금군을 대동했고, 그때마다 동원된 무신들은 군주와 문신들이 술먹고 띵가띵가하는 꼴을 굶으며 지키기만 해야 했다. 가끔 그러는 것도 아니고 하루가 멀다고 이 난리를 쳐댔으니 무신들은 그야말로 환장하기 일보 직전이었다. 특히 의종은 무신들에게 관심도 없고 잘해주지도 않아 의종에 대한 불만도 커지고 있었다.
1144년에 고려사에는 섣달 그믐[13]에는 역귀를 쫓는 의식을 했는데, 각 신하들이 각자 일종의 장기자랑[14]을 했다는 기록이 있다. 서로 날뛰고 즐기는 중에 내시(內侍)[15]였던 김부식의 젊은 아들인 김돈중이 당시 견룡대정[16]이었던 무신 정중부의 수염을 촛불로 태워버린다.
정중부는 외모도 훤칠하고 명장 관우처럼 멋진 수염을 지니고 있었는데 그의 외모가 군주와 여러 대신들에게 주목을 받자 평소 무신을 만만하게 여기던 김돈중이 이를 시기하여 벌인 짓이라고 한다. 이에 문신들은 박장대소했고 당연히 분노한 정중부는 김돈중을 두들겨 팼는데[17], 문제는 김부식이 아들이 먼저 선빵을 날린 건 생각도 안 하고 아들이 맞은 것에만 격분해서 자기 가문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이고 인종에게 정중부를 고문해서 벌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인종은 그걸 냅다 허락한 것이다. 아무리 문신이 무신보다 위인 사회였고 김돈중이 폭행을 당했다고는 하지만, 이건 김부식과 김돈중이 해도해도 너무했던 것이다. 다만 인종은 정중부를 아껴서 은밀하게 도망다니도록 도와줘 실제로 처벌하지는 않았다. 그렇다고는 해도 이걸 지켜보던 무신들은 그야말로 어이없고 기가 찼을 것이 분명하다. 이 일로 정중부는 김부식 일가에게 크나큰 원한을 품었고, 결국 이 앙심은 무신들의 반란의 씨앗이 되고 말았다.
거기에 김돈중은 그것 말고도 무신을 물먹인 적이 있었다. 보현원 사건 3년 전인 1167년 연등회 날 밤, 본인의 실수로 근위병과 부딪쳤는데 하필 근위병의 화살이 의종의 수레에 떨어졌고, 밤에 군주 앞에 화살이 떨어지자 암살 시도로 착각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그런데 김돈중은 본인의 실수라는 것도 밝히지 않고 오히려 당시 근위병 무관에게 누명을 씌워 유배 보냈다.[18] 이때 유배 간 사람들이 견룡군과 순검군의 무관들로, 훗날 보현원에서 문신 학살에 가담했던 군대들이었다. 괜히 정중부 말고도 다른 무신들이 적극적으로 보현원 사건에 가담한 게 아니었다.
그리고 1170년 8월, 의종이 보현원에 왔다가 개경 흥왕사에 머물렀는데, 분노가 쌓일 대로 쌓인 정중부가 폭발하여 이의방과 이고에게 "다음에 임금이 연복정에서 궁으로 돌아가거든 그만 참기로 하고 만약 또 보현원(普賢院)으로 옮겨가거든 기회를 놓치지 말자!"고 했다. 그런데 의종은 다음날 보현원으로 출발하려고 하다가 무신들의 불만을 어렴풋이 느꼈는지 갑자기 출발 전에 오문(五門)에서 멈추더니, 오늘은 훈련하기 좋은 날씨라며 일종의 씨름인 오병수박희 대회를 열자고 했다. 이를 통해 무신들끼리도 특별히 즐기게 하고 상을 나눠주려는 의도였다. 수박은 당시에 현대의 태권도 격이었던 국가적 무술로, 이 행사는 일종의 무술 대련 및 시합 행사로 볼 수 있다. 군주제 체제에서 이런 무예 행사는 무신(군인)들의 사기를 북돋고, 군인이 군주의 눈에 띄어서 중앙 정계에 진출할 수 있게 되는 기회이기도 했다. 그래서 이런 행사는 인기가 꽤 있었고, 군주들도 이러한 행사를 적절히 활용해 군인들을 본인 편으로 만들려고 했다.
그런데 이때 결정적인 계기가 되는 사건이 일어난다. 고령의 종3품 대장군 이소응이 수박 경기에 참여했다가 지쳐서 중간에 빠져 쉬었는데, 갑자기 신참 문신인 기거주 한뢰가 튀어나와 오병수박희도 능히 하지 못하면서 대장군이냐며 이소응의 따귀를 때린 것이다. 이소응은 섬돌에 나가떨어져 뒹굴었고, 이때 의종과 문신들은 손뼉을 치면서 크게 비웃었고 좌승선 임종식과 이복기(李福基)도 곁에서 이소응을 마구 깠다.
당시 폭행당한 이소응은 종3품 대장군으로, 고려 시대의 종3품은 무신이 오를 수 있는 2번째로 높은 품계인데다가[19], 당시 나이가 60대였다. 당대의 평균 수명을 고려하면 당장 예편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고령의 노장이자 당시 무신들에게 존경과 예우를 받는 최고령 원로였다.[20] 반면 한뢰는 종 5품 기거주에 이전 정계 활동이 거의 없는 30대의 문관이였다. 현대로 치면 대통령이 직접 참관한 군단 체육대회에서 30대인 새파란 대통령 비서관이 60대인 중장의 뺨을 때리고 대통령과 관료들이 대놓고 중장을 비웃은 셈. 60대의 이소응이 젊은 무신들을 상대로 수박희에서 이길 가능성은 당연히 거의 없다. 한뢰가 그걸 생각했는지를 떠나 아무튼 뺨을 때렸다는 행위는 무신을 대놓고 모욕하는 것밖에 안 된다. 만약 이소응이 이겼다면 이소응에게 진 무신더러 저런 늙다리한테도 지다니 니가 그러고도 이 나라의 무신이냐면서 그의 뺨을 때렸을 가능성도 있었다.
당연히 무신들이 그냥 넘어갈 리가 없었다. 정중부는 젊은 시절에 김부식 부자로 인해 수염이 탄 개인적인 굴욕 이후 이런 일에 매우 민감해졌고, 다른 견룡군, 순검군 군인들도 김돈중이 3년 전 저지른 누명 사건으로 문신들에 대한 반감이 극에 달한 상황이었다. 그래서 정중부의 분노는 폭발하여 한뢰에게 "네 이놈 한뢰야! 네가 비록 문관이라고는 하나 이소응 대장군은 너보다 연세도 많고 종3품으로 벼슬도 훨씬 위이거늘 너 따위가 어찌 이딴 짓을 할 수가 있느냐!"라고 소리를 질렀다. 문제는 이런 한뢰를 엄히 질책해도 모자랄 판에 의종은 오히려 정중부한테 "그런 일로 뭐하러 화내시오? 그만 진정하시오!"라며 한뢰를 두둔하는 방식으로 말하는 바람에 정중부와 무신들이 제대로 머리 끝까지 폭발하고야 말았다는 것이다. 일단 무신정변 자체는 의종이 보현원에 가기로 하면 일으키기로 모의했고, 실제로도 그 날 밤에 일어났으니 보현원 사건과 관계없이 정변은 일어날 예정이기는 했다. 물론 안 그래도 쌓일 대로 쌓였던 무신들의 불만을 의종이 제대로 폭발시켰고, 말 그대로 가뜩이나 짜증나서 울고 싶은데 뺨 때린 격이었으니 안 그래도 불만이 가득하던 무신들이 무신정변에 호응하는 계기를 마련해준 꼴이 되기는 했다. 사태를 지켜보고 있던 이고가 칼을 뽑아 정중부에게 눈치를 줬지만, 정중부는 그 자리보다는 군주가 보현원에 도착하거든 난을 일으킬 작정으로 만류하였다. 기록에서는 정중부는 "군주가 이대로 보현원으로 가는 게 아니라 대궐로 돌아간다면 그냥 우리가 참자!"라고 했다는데, 그게 진심이었는지는 모를 일이다. 당장은 승산이 부족하니 일단은 참고 기다리자는 것으로 넘어갔을 수 있다.
3.1. 끔찍한 살육이 벌어지다
<rowcolor=#670000,#fedc89> 무신정변 - 환관들의 반격과 진압 (2016년 6월 26일 방송분) | 실질적인 권력을 잡은 무신들 (2016년 6월 26일 방송분) |
경인정변
의종이 보현원에 도착하기 직전 이고와 이의방은 먼저 들어가 황명이라고 속이고 순검군의 병사들을 일제히 소집했다. 의종과 문신들이 보현원의 문 안에 들어가자 이고, 이의방이 이끄는 순검군의 병사들이 난입했고, 수박 대회에서 웃었던 임종식과 이복기가 그 자리에서 참살당하며 정변의 막이 본격적으로 올랐다. 호위하던 병사들도 사전에 정중부의 휘하에 있었던 터라 바로 순검군과 합세했다.
낮에 무신들에게 어그로를 잔뜩 끌어놓은 한뢰는 황급히 의종에게 다가가 군주가 앉는 어상 밑에 숨었다. 의종 앞에서 자제하던 무신들과 의종을 보좌하는 내시부 관원이 한뢰에게 나오라고 말했지만 한뢰는 의종의 옷자락을 붙들고 늘어졌다(...). 의종은 내시부의 관원을 시켜 무신들을 저지하려 해 봤지만 소용없었고, 오히려 그 관원들은 이고가 칼을 빼들어 그 자리에서 자비없이 죽여버렸다. 이 과정에서 지유(指諭) 김석재(金錫材)가 "감히 폐하의 앞에서 칼을 뽑았는가?"라고 소리치긴 했지만, 이의방이 인상쓰며 주둥아리 닥치라며 협박하자 죽기는 싫었는지 바로 버로우했다.[21] 의종 앞에서 한뢰를 죽여버린 무신들은 평소 원한이 있던 문신들을 찾아다니면서 죽이고 또 죽였다. 또한 당시 정중부 일파는 피아식별을 위해 우측 어깨를 내어 놓고 투구와 복두를 벗었는데, 만약 같은 복장을 하지 않았다면 무신까지도 짤없이 죽였다.
한편 무신들은 김돈중이 은근슬쩍 도망갔다는 사실을 파악했다. 만일 김돈중이 개경에서 태자를 옹립할 경우 더 골치 아픈 상황이 발생할지도 모른다고 걱정했다. 김돈중이 개경으로 가서 태자에게 알리고, 반란을 진압할 관군을 편성했으면 불과 소수의 근위대 인원으로 구성된 정변 주도 세력에게는 큰 위협이 되었을 것이다. 이의방이 "만약 정변이 실패로 돌아가면 나는 남녘으로 바다에 뛰어들던지 북방으로 거란 놈들에게 투신해 피하겠다."고 했을 정도. 그리고 발걸음이 빠른 자를 김돈중의 집에 보냈는데, 김돈중이 안 돌아왔다는 대답을 듣자 무신들은 성공했다고 안도하며 병력을 이끌고 개경으로 곧바로 직행했다. 감악산으로 도망갔던 김돈중은 자신이 데리고 있던 종자의 밀고로 인해[22] 추격해온 정중부의 부하들에게 동생 김돈시와 함께 붙잡혀서 처참하게 얻어맞고 처형되었으며, 후에 목과 사지가 절단된 채 저자거리에 매달렸다. 정중부의 젊은 시절에 원한이 있던 아버지 김부식은 이미 오래전에 고인이 된 상태였지만, 그조차도 묘가 헤집어져 부관참시를 당한 후 아들과 마찬가지로 그 토막난 유해가 거리에 매달렸다. 본인이 전세를 뒤집을만한 카드를 갖고 있었음에도 살리지 못해 그대로 죽은 조상과 비슷한 신세.
개성에 입성한 무신들은 궁궐로 가서 각 궁궐들을 장악하고 핵심 관료들을 모조리 붙잡아 살해했으며, 사병들을 풀어 문관의 관(冠)을 쓴 놈은 말단 관리까지 다 죽이라고 명령한다. 이 과정에서 문극겸[23] 등등 극소수의 운 좋은 이들을 제외한 문관 50여 명은 모조리 잡혀 죽었다. 의종은 뒤늦게 정신이 번쩍 들어 정중부에게 제발 그만 좀 하라고 말렸지만, 정중부는 "나라를 어지럽히는 간신배들을 무찌르고 있을 뿐이니 폐하는 신경쓰지 말고 그냥 계시기나 하시오!"라는 말로 일축하였다. 의종은 이들을 달래기 위해 이고와 이의방을 응양용호군중랑장(鷹揚龍虎軍中郞將)으로 임명하고 다른 상장군은 수사공 복야(守司空僕射)로, 대장군은 상장군으로 진급시켰지만 이미 열이 오를 대로 오른 무신들에게는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이후 무신들은 의종을 궁궐로 컴백하게 하였는데, 이 때 의종이 총애하던 내시부 관원 왕광취(王光就)가 반격을 시도했지만 하필 누설되어 왕광취를 포함한 20명이 효수된다. 이 때까지는 그래도 군주임을 감안해서 의종 포함 왕가 인물들에게는 최소한 터치를 하지 않았던 정중부였지만, 결국 선을 넘어 의종마저 협박해서 군기감(軍器監)이 되었고, 이후 정중부는 계속해서 자신의 직위를 높이는 일을 반복한다. 그러나 앞의 일로 인해 의종은 이미 무신들한테 신뢰를 단단히 잃은 상태라서 의종과 태자도 폐위시켜 추방하고, 태자의 어린 아들은 죽였다. 의종이 총애하던 궁녀가 도망가자 그녀마저 덤으로 죽이려 했으나 공예태후가 간청해서 살려주었고, 그 궁녀는 의종을 따라갔다.
병부시랑 조동희는 지방으로 가 있던 차에 개경에서의 소식을 듣고는 동계(東界)에서 군사를 일으켜 개경으로 오려고 했지만, 호랑이가 길을 가로막아 못 가던 중(...) 눈치챈 무신들의 기병이 와서 체포된다. 조동희는 앞서 탐라 봉기(양수의 난)를 수습했던 공이 있어 대신 귀양만 보내는 선에서 끝냈으나, 중간에 데려가던 자가 조동희를 죽이고 시체를 물에 처넣었다.
정중부와 무신들은 그러고도 직성이 덜 풀렸는지 아예 죽인 문관의 집들까지 일일이 다 철거하고 다녔다. 보다 못한 대장군 진준(陳俊)이 이것만큼은 아니라고 봤는지 "원수로 여기던 문관들은 이복기, 한뢰 등 수 명이었는데 이번에 죄없는 사람들까지 너무 죽였소. 집을 부숴버리면 그 가족은 어떻게 살란 말이오?"라면서 말렸으나, 이의방 등은 이 말조차도 기각하고 수많은 문관들의 집을 기어이 다 없애버렸다. 이때부터 무신들이 사적으로 원한이 있던 문신들의 집을 부수는 게 버릇이 되었다.
무신들은 이후 의종의 동생 익양공 왕호를 새 황제(명종)으로 옹립한다. 하지만 명종은 역시나 허수아비일 뿐 실권 대부분은 정중부를 중심으로 한 무신들에게 있었다. 의종의 별장들을 정중부, 이고, 이의방이 나눠가지기도 하고 명종이 즉위한 이후 무신들이 모여 살아남은 문신들을 모두 모았을 때 이고가 문신들을 모두 죽여버리자고 하기도 했지만, 정중부가 이를 만류한 적도 있다.
1172년에는 동북면 병마사였던 김보당[24]이 다시 의종을 왕위에 옹립하고 무신들을 살해할 계획을 세웠고, 거제도에 있던 의종을 데려오려고 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이것도 발각되었고, 무신들은 이의민 등에게 병력을 주어 보냈다. 김보당은 안북 도호부에서 잡혀서 고문받고 처형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문관 중에 누가 나와 공모하지 않았겠소?"라는 한 마디로 또다시 남은 문신들이 여럿 학살당한다.
김보당의 난으로 민심이 흉흉해지자 이준의(李俊義)[25], 진준, 김부(金富) 등이 정중부와 이의방에게 "하늘의 뜻은 알 수 없어 사람의 마음은 헤아릴 수 없는데, 힘만 믿고 정의에 입각하지 않는다면 문신들을 모두 죽여도 김보당이 또 나오리란 법이 없겠냐?"고 설득했고, 무신과 문신의 자녀를 결혼시키는 정책으로 문신들을 안심시키자고 하여 살육이 진정 국면으로 가게 된다. 하지만 결국 이의민 등이 동경(지금의 경주시)에서 의종의 척추를 꺾는 잔인한 방법으로 시해하고는 그의 시신을 버려버린다. 고려사에 따르면 큰 솥 안에 그의 시신을 담고는 곤원사 연못에 버려버렸다고 한다. 이에 누구도 의종의 시신을 꺼내려 하지 않았지만[26], 이를 안타깝게 여긴 부호장 필인이 몇몇 사람들과 함께 시신을 꺼낸 뒤 수습해 관을 짜서 물가 근처에 묻어주었고, 이후 의종 시해를 사주한 이의방이 사망하고 나서 동생 명종에 의해 희릉으로 옮겨졌다.
3.2. 후일담 - 무신정권과 권력자의 교체
1170년에 시작된 무신정변 이후 주동자들인 정중부와 이고, 이의방에 의해 무신정권이 유지되었다. 그러나 1171년에 이의방이 자신의 뒤통수를 치려던 이고와 그의 동료 채원 등을 싸그리 죽이고 자신의 권력을 강화해나갔다. 무신들의 실질적인 리더였던 정중부는 고속 승진하여 1173년에 문하시중까지 오르면서[27] 계속 무신들의 리더 및 집권자 역할을 하였으나, 한편으로는 세력이 강해진 이의방을 경계하기도 하는 등 무신 내에서도 자체 파벌이 만들어지면서 권력 다툼과 분열이 계속 일어나고 있었으며, 무신들도 자신들의 지독한 원수였던 문신들만큼이나 타락하여 탐욕을 절제하지 못하고 방탕한 생활을 즐기는데 급급했는데, 이 때문에 이들이 문신과 다를게 뭐가 있냐면서 국가적으로 큰 반감을 사게 되었다.고려 왕조와의 혼인을 획책하기도 할 정도로 야심이 커졌던 이의방은 1174년, 조위총의 난에서 패배하고 복귀하던 중 정중부의 아들 정균이 보낸 승려 종참 등에 의해 암살당했다[28]. 이후 정중부가 독주하는 세상이 오자 그의 아들인 정균 역시 방자한 생활을 하며 전횡을 부렸고, 공주를 본인의 아내로 눈독을 들일 정도로 막장 행각을 이어갔다. 결국 1179년에 새로운 인물인 경대승이 정변을 일으켜 정중부와 사위 송유인, 정균을 몽땅 죽이고 권력을 틀어쥐면서 고려의 무신 정권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게 된다.[29] 그러나 4년 만인 1183년에 경대승은 30세라는 젊고 아까운 나이에 갑자기 병으로 세상을 떠나고[30] 이듬해에 경대승의 위협으로부터 몸을 피해 고향 경주시로 오랫동안 낙향해 있었던 이의민이 다시 돌아와 권력을 잡으며 무려 13년 동안 집권해서 국정을 어지럽히고 사사로이 재물을 탐하고 권력욕에 취해 문하시중의 지위에까지 올라 전횡을 일삼는 등 오만 폭정들을 부린다. 하지만, 1196년에 최충헌의 일파에 의해 이의민 본인은 물론이고 아들들도 모두 한꺼번에 숙청한다. 이후로는 오랫동안 최충헌 일파와 그 후손들이 장기집권을 하면서 명종을 폐위하고 신종을 새롭게 황제로 옹립하면서 무신정권의 절정기를 맞이한다.
그러나, 1231년에 시작된 몽골 제국의 침략으로 인해 고려는 다시금 혼란으로 빠져들게 된다. 김준의 정변으로 몰락한 최씨 정권 이후로도 1258년에 등장한 김준과 1268년 김준을 죽이고 집권한 임연&임유무 부자가 있었지만, 원종이 무신들을 시켜서 임유무를 암살함으로써 마침내 1270년에 무신정권은 100년만에 공식적으로 막을 내리게 되었다.
3.3. 왜 왕이 되지 않았나?
이들은 왕을 여러번 폐위시키는 강력한 권력을 가졌지만, 왕이 되지 않았다. 그에 대해 다음과 같이 추론할 수 있다.- 이들은 강력한 권력을 가졌으며 최충헌 시기에는 매우 안정화 되지만 몽골 제국이라는 강력한 외세의 침입으로 선양할 시기를 잡지 못하였다.
- 무신들이 군주가 되어야할 정통성을 찾지 못했다. 기존 왕조를 몰락시키고 새 왕조를 수립하려면 그만큼 강력한 명분이 있어야하는데, 무신정변은 문신을 몰아낼 순 있어도 고려 왕조를 몰락시킬 명분은 충분치 않았을 수 있다. 왕건이 궁예를 몰아내고 고려를 창건한 것도 궁예가 관심법을 비롯한 전횡[31]을 일삼았고 이에 궁예 휘하 장군들이 비밀리에 모여 왕건을 새 왕으로 추대한다는 역성혁명이라는 명분을 만들어 주었기에 가능한 결과였다.[32] 이런 시대에서 한 무신이 아무런 명분도 없이 군주를 몰아낸다면 비슷한 힘을 가진 다른 무신들도 무력에 의한 제위 찬탈에 동참하여 단기간에 군주가 계속 바뀌는 대혼란이 벌어질 수 있다. 한 예로 로마 제국의 군인 황제 시대에는 49년간 18명의 황제가 교체되었다.
- 군주가 되지는 않으면서 그저 최고 실권자로 있고 싶었다. 왕의 업무는 국정 전반에 걸쳐 굉장히 많기 때문에 전반적인 업무는 허수아비 왕에게 맡기되 필요한 부분만 간섭하는 것이 행정 경력이 전무했던 무신 입장에서는 나을 수도 있었다. 게다가 당시 무신들은 문맹이 많았다. 무신정권 수립 이후에도 문신을 완전히 몰아내진 못하고 하급 실무자들 중심으로 문신을 다시 등용해야만 했다.
다른 나라에도 역사적으로 이런 사례가 없지는 않았다. 고구려 말기의 연씨 정권이 있었고, 조선왕조에서는 세도정치가 있었고, 네팔 왕국에는 군주인 샤 왕조를 명목상 군주로 만들고 국가를 통치한 라나 가문이 있었다.[33] 베트남 후 레 왕조를 바지사장으로 내세우고 통치한 찐씨 정권과 일본 헤이안 시대 이후의 무가막부, 칼리프를 자신들의 수도인 카이로에 데려와서 허수아비로 옹립해 놓고 명목상 칼리프로부터 술탄에 임명받은 이집트의 맘루크 술탄이 있었다.
4. 후세 평가
무신정변 이후의 역사적인 변화점은 크게 3가지가 있는데 첫째는 국가의 전반적인 문과기풍과 지식 수준이 크게 퇴보했다. 이제현이 충렬왕과 문답할 때는 "글을 배울 곳이 없어 유학책 읽어야 할 사람들이 승려한테 글을 배운다."고 말하는 지경까지 이른다. 물론 최우 정권기에는 서방도 깔리고 이규보 같은 문인도 올라오고 상정고금예문 재판본 등 금속 출판물이 등장하는 등 아예 비문명 사회로 전락한 것은 아니지만 문(文)적 기풍과 지식이 크게 쇠퇴하고 남은 것 또한 정권에 종속되다시피 했다.두번째로 무신정변은 한국사에서 집권 계층이 완전히 바뀐 몇 안되는 사건이다. 여말선초부터 조선 시대까지 권문세족 - 사대부의 연결성과 훈구파 - 사림파도 서로 연결성이 있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한국사에서는 유례를 찾아보기 매우 힘든 사건이다.
세번째로는 무신정변 이후 고려의 군사력이 급속히 쇠퇴하여 이전처럼 수십만명의 병력을 뽑아내기 힘들어진다. 무신정변 이후, 한국 역사에서 가장 많은 횟수의 반란이 일어나고 정부는 몽골 제국의 침략을 사실상 방치했고 지방에 대한 지배권이 희미해지면서 국가 단위의 군사력 집중이 불가능해졌다. 무신정변을 일으킨 무신들은 고려 왕조를 꼭두각시로 만들어서 친목질로 관직을 돌려먹고 지방세력들이 반란을 일으키든말든 수도권에 숨어서 지방통치를 방관했다. 그래서 이전 여요전쟁 때는 수십만 단위로 동원하던 군사가 이후에는 많아봐야 만 단위고 보통은 천 단위 정도로 폭삭 줄어들었다. 이후 몽골의 침략, 원나라에 속박, 여말의 혼돈 등으로 고려 왕조는 34대 475년으로 만족해야 했다. 가해자들 또한 의종과 마찬가지로 금나라가 자신들과 내통하는 조위총의 난이 발발함에도 쳐들어오지 못할 정도[34]로 국제적인 정세가 고려 역사상 가장 좋았고 의종같은 고려 역사상 충혜왕에 버금가는 암군이 쫓겨났고 내정을 관리할 환경도 매우 좋았으나 민생의 개혁은 뒷전이었다.
한국의 군사정권은 쿠데타로 집권한 자신들을 정당화할 명분으로 무신정변을 차별받는 군인들의 정당한 궐기로 포장하였다. 1980년대 중순 국민학교 사회 교과서에서는 삽화로 문신들은 의종과 마셔라 부어라하고 무신들은 더운 여름에 중무장 상태로 경비나 서고 있는 그림으로 불만을 가질 만한 묘사를 한 적도 있다.[35][36] 1990년대 문민정권이 들어선 이후부터는 그런 정치적인 묘사는 점점 줄어들었다. 여담이지만 하나회 숙청 당시 군부내에 반발세력들이 고려 시절 무신정변이 왜 일어났는지 아냐고 문민정부를 협박을 했지만 김영삼 대통령이 개가 짖어도 기차는 간다며 역관광을 시켰다.
현재에는 이제현과 동국통감에 여러 사관 등의 평을 근거로 이의방과 정중부와 이의민과 최충헌 등을 무관으로 인정하지 않았고 일부 무신정권을 세운 역적들로 인해 군인 전체에 대한 비하로 자칫 이어질 가능성이 커서 이들을 권문세족과 세도정치의 권신 같은 신하들로 규정해 박서와 김경손과 김방경 같은 충신들만 무관으로 인정하는 추세에 있다.
이런 무신정권이 백년이나 지속될 수 있었던 이유는 당시 동아시아의 국제정세가 무신정권에 도움을 준 측면을 부정할 수 없다. 당시 국제정세가 금-남송이 서로 대치하는 형국이 지속되면서 금나라는 온 신경을 남송에 집중하면서 자연히 한반도 문제는 뒷전으로 밀려났다. 그래서 무신정변으로 고려 정부의 수뇌부가 갈려나가도 금나라는 방관 할 수 밖에 없었다. 또한 금나라 입장에서는 무신정변으로 세워진 괴뢰정부와 대립했을 경우 오히려 무신정변을 일으킨 주동자들이 금나라와의 관계를 끊고 남송과 손을 잡고 금나라를 공격 할 수도 있어서 금나라한테만 손해였다. 또한 멸망한 요나라, 북송의 잔당들이 반란을 일으키는등 갈등요소가 많아 내부적으로 불안정한 요소가 많았다. 심지어 폭군이었던 희종(금), 해릉양왕의 폭정으로 금나라도 혼란했다. 세종(금)이 성군이었다고 한들 이를 전부 수습하기도 힘들었다. 결국 금나라는 무신정변으로 세워진 정통성 없는 괴뢰정부를 인정할 수 밖에 없었고 이는 무신정권이 장기적으로 존속하는 계기를 마련하고 또한 무신정권의 집권자들이 고려 국왕들을 자기 마음대로 갈아치울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37]
5. 관련 인물
5.1. 무신
5.2. 문신
5.3. 고려 왕실
5.4. 환관
6. 기타
- 1170년 고려에서 무신정변이 일어나고 15년 뒤 공교롭게도 일본에는 1185년 가마쿠라 막부가 세워지면서 무신정권이 들어섰다. 다만 현재 일본 역사학계는 가마쿠라 막부 이전의 헤이케가 세운 로쿠하라 정권도 과도기적인 무사정권으로 보고 있는데 헤이케가 세운 로쿠하라 정권의 성립은 고려의 무신정변보다 3년전의 일이다. 오히려 기존 정부에 들어가서 실력자가 되어 관직을 독점한다는 점은 로쿠하라 정권이 한반도의 무신정권과 닮아있다.[38] 그렇지만 한반도 무신정권은 지방세력의 도전이라고 볼 수 있는 조위총의 난이라는 내전을 막아내어 한반도 무신정권의 역사는 계속해서 개경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게 된다. 하지만 일본의 로쿠하라 정권은 지방세력이었던 미나모토 가문과의 내전이었던 겐페이 전쟁에서 패배하여 완전히 몰락하고 말았다. 이후 미나모토 가문이 자신의 근거지인 가마쿠라에 새롭게 막부를 설치함으로써 지방정부 중심의 새로운 형태의 막부체제로 개편하게 되는 것이다.
고려의 무신정권은 여몽전쟁으로 인해 1270년 100년 천하로 멸망했지만, 가마쿠라 막부는 원나라의 일본원정을 막아내면서 오히려 권위가 커져 천황을 밀어내고 일본 전국을 장악했다. 그러나 이것이 시발점이 되어 가마쿠라 막부 역시 1333년에 멸망한다.[39]
7. 매체
- 무인시대: 드라마 시작부가 무신 정변에서 명종의 등극까지의 전개를 다루고 있다. 2화 마지막에 이의방이 왕광취의 목을 내던지면서 의종에게 "황제는 폐위되셨소이다!"라고 외치는 장면은 워낙 박력이 대단하다 보니 컬트적인 인기를 끌었다. 무인시대의 무신 정변 파트는 초반 치고는 상당히 복잡한 전개를 보이는데, 무신들이 문신들을 쳐죽이고 의종을 폐위시켰다는 뼈대에, '소장파와 노장파 무신간의 대립', '차기 군주를 누구로 세울 것에 대한 논란', '이고와 이의방의 대립', '무비와 정중부와 이의방 간의 밀거래' 등, 온갖 갈등 요소들이 얽히고설킨다. 덕분에 극 초반 치고는 숨막히면서도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는 전개를 보인다. 무인시대에서의 보현원 사건은 한겨울에 벌어진 것으로 묘사되며 드라마 도입부에는 아예 눈보라가 몰아친다. 하지만 실제 사건은 가을인 음력 8월에 벌어졌다. 촬영 스케줄 때문에 어쩔 수 없었던 것 같다. 그나마 날씨 묘사는 사건 전개에 별다른 관계가 없으니 심각한 고증오류 정도는 아니며, 오히려 1화 최초반 장면에서 세차게 몰아치는 눈보라 때문에 오들오들 떨며 의종의 마차를 인솔하는 무신들, 마차 안에서 편히 앉아서 따뜻한 술과 청산유수하며 시가(詩歌)로 희희낙락하는 군주와 문신의 방탕함 아첨으로 응수하는 환관의 간사함과 극명하게 대비되어 배경 설명에 힘을 실어주어 역사 지식이 전무한 사람으로서도 상황을 이해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되었다. 또한 이 눈속에서의 행차 장면은 무인시대 드라마의 시작과 끝을 모두 장식한 장면이다.
- 역사가 술술
[navertv(3911081)] - 천일야사
- 한국사 편지 2: 후삼국 시대부터 고려 시대까지: 무신 드립 짤의 원조가 나왔다.
- 한국사 RPG - 난세의 영웅: 고려후기편 초반에서 무신에 대한 차별대우로 반란을 일으키는 내용이 나온다.
- who? 묘청, 김부식 편: 링크
8. 관련 문서
- 무신 드립: 2018년 후반부터 제목 낚시 아재개그가 유행하기 시작했다. 자궁문신이라고 제목을 쓰고는 무신들이 문신을 학살하는 그림을 올리면서 "자, 궁에 있는 문신들을 죽여라!!!!"라는 낚시글이 종종 올라왔다. 여기에 힘입어서 문신들에게 AK를 쥐여주는 합성 짤방도 올라왔다. 자세한 건 문서 참고.
- 무신정권
- 강조의 정변
- 김훈·최질의 난
- 임오군란
- 반란
- 쿠데타
[1] 음력 기준 8월 30일 ~ 9월 2일[2] 2021년 기준, 북한 황해북도 장풍군에 해당되는 지역 남단에 위치했던 사찰.[3] 좌승선[4] 金錫材[5] 병부시랑[6] 순검군 산원[7] 오늘날의 북한 장풍군 남단에 있었던 사찰. 강원도 춘천시 북산면의 청평사라고 알려져 있어서, 드라마 무인시대에서도 그렇게 자막이 달려 나왔으나 사실이 아니다. 조선 시대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 12권 '장단도호부' 편에 보현원에 대한 설명이 나와 있고, 의종이 자주 찾아 연회를 베풀었으며, 정중부가 문신들을 모두 죽였던 절이라고 명기되어 있다. 다만 이 춘천 청평사도 고려 시대에 건립된 절이고 이 절 역시 '보현원'이라고 불리기도 했기 때문에 혼동한 것으로 보인다.[8] 예외적으로 문극겸처럼 무신을 하대하지 않았거나 왕에게 간언을 했던 문신들은 참화 속에서도 살아남았다.[9] 다만, 김돈중이 정중부의 수염을 태운 사건은 무신정변보다 26년전에 있었던 사건이다. 물론, 이 일을 계기로 정중부가 김동중을 비롯한 문신들에게 엄청난 원한을 가지고 있었기에 무신정변의 트리거가 된 사건은 맞다.[10] 다만 이러한 이유로 고려시대의 무관을 단순히 '싸움 잘해서 올라간 싸움꾼'으로 일축하는 건 지나치게 단순할 뿐 아니라 부당한 이해다. 전시의 최고지휘권이 문신에게 있는 건 맞지만 군대는 평시에도 돌아가야 하며, 오히려 평시에 전투력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이 들어가야 전시에 제 소임을 다할 수 있다. 아무리 사령관이 천하명장이라도 진법 훈련이 제대로 안 되어있거나 골골거리는 병사를 데리고 자신의 전술적 구상을 제대로 펼 수는 없다. 그리고 이 '평시에 전투력을 유지하는 노력', 즉 병사들을 부대별로 배치하고, 체력과 무술을 단련시키고, 진법과 행군을 훈련해 길이 들게 만들고, 군의 사기를 유지하고, 병사들과 얼굴을 익히며 지휘에 대한 신뢰를 주는 것은 무관들의 일이었다. 군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현대군의 장교라는 연대장이나 대대장이 하는 주요 업무도 결국 이것이다. 이것을 '아무 싸움꾼이나 할 수 있는 일'이라고 하는 것은 조직운영에 대한 극도로 천박한 이해다. 요컨대 고려의 무관들이 현대군의 고위 장성만한 능력이나 권한이 없는 것은 맞지만 한 부대의 엄연한 리더였으며, 문신 사령관의 전술을 현실에 구현할 수 있는 군대의 역량을 길러내는 것과, 사령관의 의지를 실현하는 손발로서 실전에서 병사들을 독려하고 목숨 걸고 싸우는 것은 무관들의 몫이었다. 게다가 위에도 나오지만 상장군이나 대장군 등 고위 무관은 상원수가 아닐 뿐 그 버금인 부원수거나 적어도 상원수의 측근 참모로 종군했다. 즉 이들은 작전에 대한 결정권이 없을 뿐이지 작전을 기획하는 회의에는 당연히 참여해서 발언을 했다. 이들은 엄연히 한 군영의 최고위 간부들이었지 단순히 까라면 까야 하는 병사 대장이 아니었다.[11] 고려 시대의 유학은 조선 시대의 주자학과 거리가 멀었고, 동아시아의 유교 경전은 현대 공무원 시험 과목으로 치면 정치학, 행정학 등의 행정 과목이었다.[12] 한편 조선시대에는 무과시험은 하도 많은 인원을 뽑아서 '만과(萬科)'라는 비아냥도 들었지만, 선발 과정 자체는 체력 및 무술검정과, 병법서 및 유교 경전에 대한 교양 지식을 두루 테스트하여 무관도 엘리트 관료로서의 소양을 갖추도록 했다. 그래서 말단 병졸로 시작해서 공을 세우고 올라온 이른바 '특채'가 아닌 시험을 거친 무관은 글을 모를 수가 없었다. 조선왕조실록에 '나오는 글을 모른다', '글을 아느냐' 등의 말은 진짜 글을 몰라서 그런 경우보다는 '학문이 깊지 못하다', '유학(=왕에 대한 충성심)적 수양이 제대로 갖춰져있냐' 라는 뜻이다.[13] 제석(除夕).[14] 잡기(雜技)라고만 되어 있다. 일반적으로는 귀신쫓는 춤 같은 것을 췄을 것이라고 추측한다.[15] 고려의 내시와 조선의 내시는 전혀 다르다. 고려의 내시는 엄연한 문관으로 군주의 최측근 역할을 맡은 문관들이었으며, 다른 관직을 지닌 자가 겸임했다. 고려 중기까지는 유력 귀족 자제들이 주로 맡았으며, 이를 환관이 맡게 되는 것은 원간섭기를 거쳐 가며 원나라의 영향을 받으면서다. 그래서 고려 초중기를 배경으로 한 사극에선 내시에게 수염이 있다. 간단히 이야기해 이 당시의 내시는 환관과 다르며, 고환이 있고 성기능도 멀쩡했다.[16] 견룡군에 속한 종9품 무관.[17] 물론 정중부도 그가 알고 보니 김돈중이었다는 것을 알고 당황했고, 문신들한테도 무신 주제에 감히 문신을 함부로 여긴다면서 한 소리 들었다.[18] 게다가 추가로 애꿎은 대령군의 종 나언 등이 암살범으로 몰려서 참수당한다. 김돈중은 죽기 직전에 이 일을 이야기하며 본인 때문에 죄 없는 자들에게 화가 미쳤으니 본인이 죽는 것도 당연하다고 유언처럼 말했었다.[19] 가장 높은 품계는 정3품 상장군.[20] 당장 아버지가 대장군이면 그 자식들은 귀족 무관으로 쳐 줄 정도였다. 아버지가 대장군이라 그 영향으로 출세가도를 달린 인물들이 이의방, 경대승, 최충헌으로, 무신집권 다섯 중 셋이 무려 대장군의 아들인 덕에 명문가 취급 받았었고, 정권을 차지하는데 기반이 되었었다. 그런 대장군을 모욕한 것이니 병졸들까지 분노가 폭발한 것은 두말하면 잔소리다.[21] 드라마 무인시대에선 아예 이의방이 김석재를 발로 까버렸다.[22] 김돈중에게 걸린 현상금이 탐나서 배신했다.[23] 운이 좋게도 이 해 의종에게 바른말을 했다가 미운털이 박혀 좌천되었는데, 이것이 의도치 않게 호재가 되었다는 설과 혹은 특유의 강직한 성격 덕분에 정변 주도자들도 그만큼은 유일하게 좋게 봐서 특별히 살려준 것이라는 설이 있다. 물론 굳이 그런 구실이 없더라도 문극겸은 평소에도 무신들을 차별하거나 비하하지 않고 자신과 동등하게 대해 주었기 때문에 원한을 산 적도 없고 악감정도 없어서 굳이 죽일 이유가 없었다.[24] 문신이었지만, 의종의 실정에 비판적이었기 때문에 무신 정변 때에는 표적이 되지 않아 무사했다.[25] 이의방의 형.[26] 지나가던 한 승려가 솥을 발견했는데, 그 승려는 솥만 가져가고 시체는 도로 버렸다. 정황상 이 승려도 의종한테 어지간히 불만이 많았던 것으로 추정된다.[27] 이 때문에 이의방의 집권기를 정중부의 집권기에 포함시키기도 한다.[28] 이후 조위총도 윤인첨에 의해 살해되었다.[29] 이 과정에서 경대승의 부하들인 허승과 김광립도 본인들의 상관인 경대승을 등에 업고 개차반스럽게 행동했고, 결국 이들도 경대승에 의해 죽었다.[30] 하지만 경대승은 다른 무신들과는 달리 개념인이라서 백성들에게 인망이 대단했기에 다른 무신들이 죽었을 때 백성들은 좋아서 춤을 췄지만, 경대승이 죽었을 때는 백성들이 많이많이 슬퍼했다.[31] 권세를 혼자 쥐고 마음대로 다루는 것.[32] 그것도 궁예가 후고구려의 건국자이자 초대이자 유일한 군주였기 때문에 궁예가 세운 후고구려는 궁예 외의 정상적인 군주나 궁예 이전 정상적인 군주가 없었기에 후고구려 자체가 답이 없다는 결론으로 쉽게 귀결이 가능해서 왕건이 비교적 쉽게 건국할 수 있었다. 그런데 무신정변의 주된 동기와 명분 등등은 의종 대 문신들의 전횡, 넓게 봐도 그 선대인 인종 대의 문제점에서부터 시작되므로 태조 왕건 때부터 제16대 예종 때까지는 그럭저럭 괜찮은 시대였다는 평이 군과 관은 물론이고 민간에서도 있었다.하다못해 후대의 이성계도 우왕과 창왕이 왕씨가 아니라는 억지 논리로 역성혁명을 일으켜 즉위했는데 이를 두고도 비판이 따라붙는데 제도적 모순은 있을지언정 묘청의 난 진압 이후 그나마 안정가도를 돌아가던 고려 정국을 난투극의 소용돌이로 불러일으킨 이들을 지지해 줄 세력권이 얼마나 될 지는 의구심이 들 정도.[33] 라나 가문은 트리부반 군주가 왕정복고를 단행하여 왕권을 되찾아온 1950년까지 이런 식으로 통치했다. 일본 막부보다 거진 100년은 더 갔다.[34] 조선 말기에 일어난 임오군란의 상황과 비교되는 대목으로 무신정변이 일어난 시기에는 금나라와 남송이 서로 대치하는 상황이라서 군대를 함부로 한반도로 투입하는게 힘들었던 반면에 임오군란이 일어난 시기에는 청나라가 대륙을 완전히 통일한 상태였고 양자강에 할거하던 태평천국마저 패망한 상태라서 한반도에 군대를 투입할 수 있었다.[35] Why? 한국사 시리즈에서는 굶으며 경비를 서고 있는 무신들이 주인공들에게 무신들은 승진에 제한이 걸려있고 군대의 지휘권이 없다는 등의 차별대우를 말하거나 내시가 된 주인공들이 음식을 나르면서 피곤하다고 하자 경비서던 무신들이 우리만큼 피곤하겠냐고 하고 강마루가 연회음식의 일부를 빼돌리면서 이거라도 먹을라며 가져다주지만 다음 장면에서 문신들을 바래다 주라고 하는 모습이 나온다.[36] 물론 엄연히 따져서 이런 묘사들은 위에서 서술되었듯이 전부 사실이긴 했다. 무신들이 쫄쫄 굶으면서 경비 선 것도 사실, 각종 차별대우를 받은 것도 사실이다. 다만 이후 무신들이 정권을 잡고 보인 만행이 한층 더 문제였을 뿐이다. 상술한 Why 시리즈에서도 무신들의 차별 대우를 묘사하면서도, 이후 정권을 잡은 무신들의 사치와 부정부패도 그대로 묘사하며 그걸 지켜보는 백성들이 "저놈들도 결국 똑같은 놈들이었다"라며 학을 떼는 장면을 삽입했다.[37] 실제로 강조의 경우 현종을 옹립한 권력자였으나 거란의 개입으로 인해 잡혀가서 죽었다.[38] 헤이케 로쿠하라 정권은 1167년 ~ 1185년 불과 18년만에 멸망했다.[39] 우연인지 모르겠지만 가마쿠라 막부 멸망 하고 고려 또한 충혜왕 이후 부터 점점 막장이 되었으며 그 결과 41년후 1374년 공민왕이 암살 당하고 1388년 우왕, 1389년 창왕이 폐위되면서 참살당했고 공양왕도 결국 폐위되면서 가마쿠라 막부가 멸망하고 59년뒤 1392년 조선이 건국되었고 이듬해 일본 역시 남북조가 통일이 되면서 무로마치 막부가 정식으로 출범한 해였다.[40] 무신정변의 무신은 武臣이며 육십갑자의 무신은 戊申이다.[41] 무신정변이 일어난 해의 60갑자는 경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