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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박/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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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국민의 정부 시절

박근혜1998년 재보궐선거국회에 입성하긴 했지만 당시만해도 초선이었던데다가 20년 가까이 대중의 시선에서 벗어나 있던 상황이라 친박이라고 해봐야 극소수였고 정치세력화된 친박은 없었다. 당시 한나라당이회창이 주도권을 쥐고 있었고 박근혜는 이에 반발해서 2002년 대선 시기에 탈당하고 한국미래연합을 창당했지만 아무도 따라가지 않아 결국 다시 한나라당으로 복당했다.

2002년에 윤상현2002년 재보궐선거 공천에서 탈락했을 때 박근혜와의 만남을 통해서 친박계로 편입되었다. 이 시절 윤상현의 직업은 대학교수.

2. 참여정부 시절

박근혜가 네임드 정치인으로 대중의 전면에 나선 것은 바로 2004년 총선이다. 노무현 탄핵에 대한 역풍으로 한나라당이 비영남권에서 전멸할꺼라는 최악의 시나리오[1]가 공공연하게 나오던 시점에 대표 경선에서 승리한 박근혜는 천막당사를 치고 전국을 돌면서 잠재적인 보수 유권자들을 결집해서 121석[2]으로 선방하면서 대권주자로 급부상했고, 이때부터 "선거의 여왕"으로 불리기 시작한다. 박근혜는 일약 보수의 희망으로 떠올랐고, 수많은 국회의원들과 보수 유권자들이 몰려들면서 자연스럽게 친박계가 형성되었다.

참여정부 시절 친박의 주류로는 박사모대한민국어버이연합이 있었다. 이들은 박근혜 정부 집권기까지 꾸준히 박근혜를 지지하였다. 어버이연합은 2007년 한나라당 대선 후보 경선에서 박근혜이명박에게 패배하자, 당시 무소속이었던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에게 대선에 출마할 것을 요구했다. 친박의 원로 인사들은 주로 민정계공화계, 자유민주연합 출신과 민주자유당 - 신한국당 일부 계열 출신들이 대다수였다.

그런데 당시 경향신문이 ‘이회창 지지자가 많은 것으로 알려진 어버이 연합’이라고 자신들을 묘사하자 “우리는 박근혜 지지자가 많은 보수단체”라며 정정보도를 요구해 기사가 수정되기도 했다.

2007년 제17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한나라당 내 경선을 치르면서 친이친박이란 한나라당내 계파정치가 시작됐다. 당시 현직 대통령이었던 노무현 대통령의 지지율이 바닥을 치고 있었고, 고건 전 총리마저 불출마하면서 열린우리당[3]은 마땅한 대권후보가 없는 상황이라[4] 한나라당에서 대권후보로 확정되면 바로 대통령 직행이라는 생각에 한나라당 내 경선은 그만큼 치열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친이계 수장이었던 이명박 후보는 자수성가한 기업인 이미지로 다소 권위주의적으로 받아들여지던 박근혜 후보에 비해 일반 국민으로부터 호감을 사고 있었다. 대신 박근혜는 한나라당 당원들로부터 더 많은 지지를 얻고 있었다. 하지만 박근혜 후보가 전면에 나선 2007년 재보궐선거에서 한나라당 후보들이 무소속 후보들에게 줄줄이 패하며 당원들의 지지가 줄어드는 타격을 입게 된다.

이쯤 해서 이명박 후보의 요구로 여론조사 반영 비율을 크게 높인 경선을 하게 되었는데, 실제로 당원 투표는 박근혜가 근소한 차이로 이겼지만, 여론조사에서 이명박 후보가 크게 이겨서 대선 후보가 되었고, 제17대 대통령 선거에서 이명박 후보가 당선된다.

3. 이명박 정부 시절

이명박 대통령의 취임 이후 친이계가 당권을 잡았고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친박계 공천 학살'이 일어났다. 자세히는 2008년 친이계가 당권을 잡자 이방호 사무총장이 전면에 나서서 친박계를 대거 공천에서 탈락시킨 것이다. 이때 김무성, 이규택, 서청원, 홍사덕, 박종근 등의 친박 중진들이 친이계의 친박 중진들을 표적으로 한 철저한 공천 배제로 인해 아예 전멸당하다시피 했는데, 이들은 친박연대(서청원 주도)와 친박 '무소속' 연대(김무성 주도)로 흩어져서 상당수가 당선된다.

그 후 많은 친박계의 정치인들이 탈당해 무소속 출마하거나 당을 만들었다. 이때 박근혜는 '나도 속고 국민도 속았다'며 탈당한 사람들에게 살아서 돌아오라고 발언을 하기도 했다. 자유선진당에서도 친박 낙천자의 영입을 시도했지만 곽성문 한 명 밖에 못 얻고, 서청원홍사덕을 중심으로 한 상당수가 17대 대선 때 참주인연합으로 등록했다가 미래한국당으로 개명한 정당으로 들어가 친박연대로 다시 개명하는 신박한 정치 기획을 선보인다. 그리고 친박연대에 입당할 경우 복당이 힘들 것으로 판단한 나머지 세력은 김무성 의원을 좌장으로 한 일명 '친박 무소속 연대'를 결성하여 무소속으로 출마했다.

두 세력은 선거에서 연대를 하였고 친박연대는 비례대표를 8석, 지역구를 6석이나 얻는 선전을 거두었는데 친이 vs 친박 진검승부가 벌어진 영남권만 보면 당시 친이가 당권을 가진 한나라당이 압승하긴 했다. 친박연대는 지역구 대구 3석, 부산 1석, 경북 1석에 그쳤다. 나머지 1석은 경기. 그나마 친박학살을 주도한 이방호를 낙선시킨게 위안이었다.[5] 이 때 같은 친박 성향 단체인 박사모와 충돌이 일어나기도 했다.

문제는 참주인연합 때부터 빚만 있었는데 선거를 하려면 돈이 많이 들어 결국 공천헌금을 받게 되었다는 것. 과거에는 정치자금을 확보하기 위해 이런 식으로 '헌금'을 내고 공천을 받는 관행이 여야 막론하고 있었으나, 지금은 얄짤없이 공직선거법 위반이다.

결국 돈을 준 양정례, 김노식과 당 운영비를 요구한 서청원 대표가 기소되어 의원직을 잃었다. 친박 세력은 무소속 출마자를 시작으로 복당했으며 친박연대에는 비례대표만 남았다.

비례대표는 탈당하면 의원직을 상실하고, 그 의원직은 후순위 비례대표에게 승계되기 때문이다. 비례대표 승계규정도 남은 임기일 수라거나 꽤 복잡하긴 한데, 기본적으로 비례대표 의석은 사람이 아니라 당에게 있다는 것만 기억하면 된다.

그러나 2009년부터 한나라당이 다시 위기에 빠지기 시작하면서 친박계의 힘이 다시 세지기 시작했으며 2010년부터 2011년까지 원내대표부터 최고위원 등을 친박계가 장악하면서 친박계의 힘이 다시 강해진다.

제5회 전국동시지방선거를 앞두고 친박연대는 미래희망연대로 개명했으며 독자생존론과 한나라당 복당론의 갈등 끝에 지방선거에 불참하기로 되어 이규택 대표가 사퇴하고 미래연합을 만들었으며, 한편 친 박정희라는 친박연합이 생기기도 했다.[6] 이들은 놀랍게도 일부지역에서 당선자를 냈지만 이후 소리소문없이 자취를 감춘다.[7] 여튼 미래희망연대는 공천헌금에 대한 증여세 부과이 더욱 늘어났고, 결국 2012년 초 한나라당이 새누리당으로 개명하기 직전 합당한다.

결국 한나라당 내에서 마땅한 차기 대선 주자가 없던[8] 친이계는 점차 친박계에게 당권을 빼앗겼고, 2012년 열린 제1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이번에는 친이계가 공천학살을 당한다.(다만, 18대와 19대의 공천에서 친이계와 친박계가 공천 학살당한 양상에서는 다소 차이가 있었는데, 18대 한나라당 공천 당시에는 친박계의 중진들이 전멸당하고 초재선들만 공천을 받을 수 있었으며,(이후 살아남은 친박연대, 친박무소속연대를 통해 한나라당 복당) 19대 새누리당 공천 당시에는 친이계 초재선들이 대거 탈락하고 친이계 중진들은 무사히 공천을 받은 양상이었다. 아무래도 19대 새누리당 공천 당시에는 이명박이 현역 대통령인지라 친이계의 정치세력의 힘을 어느정도 남겨 놓을 수 있었던 듯 하다.) 이후 박근혜는 18대 새누리당 대선 경선에서 친이계/비박계 후보 7인과 경쟁하지만 별 어려움 없이 대선 후보에 선출되고 이후 대선에서도 당선된다.

4. 박근혜 정부 시기

18대 대선에서 박근혜 후보가 승리한 이후 새누리당은 대표에 황우여, 원내대표 이한구, 최경환, 사무총장에 홍문종 등 친박계 인사들이 핵심 요직들을 차지하며 당을 지휘했다. 그러나 박근혜 정부의 인기가 시간이 가며 떨어지고, 2014년 청해진해운 세월호 침몰 사고가 터지면서 친박계 일색의 국정운영 드라이브에 제동이 걸린다.

박근혜 대통령이 지방선거에 출마할 친박계 광역단체장 후보들을 대놓고 밀어 주고, 이례적으로 새누리당 전당대회[9]에 참석하여 친박계 서청원 의원[10]에 대한 지지를 암묵적으로 호소했음에도 불구하고 '박근혜 이후를 생각해야 한다'는 의식 때문인지 지방선거 후보 공천 과정에서 친박계가 상당히 밀려났으며, 당의 대표최고위원에도 비박계인 김무성 의원[11]이 당선되었다. 이때부터 친박계는 서서히 당의 주도권에서 밀려나기 시작한다.

그러나 당의 원내대표는 여전히 친박계인 이완구 전 충남도지사[12]가 맡고 있었고, 박근혜 대통령의 인기가 아주 나쁘진 않아서 김무성 대표도 대표 취임사에서 "대통령에게 할 말은 하는 당대표가 되겠다"고 했던 것과는 달리 웬만하면 청와대와 친박계와 마찰을 빚지 않기 위하여 한 수 접고 들어가는 행보를 보이곤 했다. 이후 김무성 대표가 7.30 재보선과 4.29 재보선을 모두 새누리당의 승리로 이끌며 새누리당의 가장 유력한 대권 주자로 올라서고, 이완구 원내대표가 국무총리로 임명되면서 공석이 된 원내대표직을 두고 원조 친박이었다가 비박계로 돌아선 유승민 의원이 친박계 이주영 의원을 꺾고 당선되면서 본격적으로 탄력을 받은 비박계가 당을 주도하기 시작했다. 여담으로 이주영 의원은 원내대표 선거에 원내대표 후보로만 세 번 출마했는데 모두 졌다.

4.1. 성완종 리스트

게다가 경남기업의 창업주이자 새누리당국회의원이었던[13] 성완종 회장이 친박계 핵심 인사들에게 여러 차례 뇌물을 주었고, 2012년 당시 대선에도 본인이 부정한 대선 자금을 제공했다는 사실을 밝힌 후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린 성완종 게이트가 터지면서 친박계의 입지는 더욱 좁아졌다. 이 일로 국무총리에 오른지 얼마 되지도 않았던 이완구는 바로 국무총리직에서 떨어져 나갔고, 재판에서 유죄 판결까지 받게 된다.

4.2. 국회법 개정안 파동

그러나 이에 위기감을 느꼈는지 2015년 여야가 합의해 통과시킨 국회법 개정안에 대해 청와대가 거부권을 행사하고 박근혜 대통령이 국무회의에서 소위 '배신의 정치 발언'으로 대놓고 비박계인 유승민 원내대표를 직접 공격하자 상황이 반전되었다. 초반에는 친박계가 비박계에 비해 수적으로 열세였고, 유승민 원내대표(입법부)가 박근혜 대통령(행정부)에게 과도한 간섭을 받아 억울하게 당한다는 여론이 강했고, 김무성 대표도 사실상 유 원내대표를 지키려고 해서 친박계가 유 원내대표를 물러나게 할 뚜렷한 방법이 없었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김무성 대표가 청와대의 압력을 견디지 못해 점점 유 원내대표를 사퇴시키는 쪽으로 기울었다.

거기에 김태호, 이인제 등 비박계 중진[14]들이 여럿 동참하면서 결국 유승민 원내대표가 자진사퇴한다. 특히 이때 나팔수 역할을 자임한 김태호는 이후 대표적인 신박으로 불린다.

국회법 개정안 파동 이후에는 원내대표와 정책위의장에 비박계 인물들을 앉히는 대신, 공천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당 사무총장직[15]에는 친박계를 앉히기로 함으로서 친박계와 비박계의 갈등이 일단 보기에는 수면 아래로 가라앉은 듯 하지만, 두 번의 총선 정국에서 서로를 공천 학살했던 전적이 있는지라 이후 20대 총선에서 제3차 공천 학살이 일어나게 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었다. 그리고 결국은...

4.3. 제20대 국회의원 선거

2015년말부터 20대 총선 분위기가 치열해지기 시작하면서 그 유명한 진박이라는 개념이 나왔다. 진박이라는 말 자체는 조원진으로부터 나온 것인데, 그 전에 2015년 중반 박근혜의 말이 도화선이 되었다. 2015년 6월 25일 국무회의때 장관들 앞에서 박근혜는 "당선된 후에 신뢰를 어기는 배신의 정치는 안 된다"며 "국민들께서 이를 심판해주셔야 할 것이다"라는 발언을 했다. 이때부터 새누리당 내에서 대통령이자 친박의 수장이었던 박근혜의 눈치를 보는 분위기가 커지기 시작했는데, 그 이후 연말이 되어 치열한 공천 싸움이 시작되자 친박의 앞잡이라 불리던 조원진이 2015년 12월 19일 당시 박근혜와의 대척점에 섰던 원내대표 유승민의 지역구인 대구광역시 동구 을의 방촌시장을 찾아가서 유승민의 경선 상대인 이재만의 유세현장에서 지지연설을 하며 "지금부터 제가 가는 곳에 계신 분들이 진실한 박근혜의 사람들입니다."라고 말하여 "진실한"이라는 어휘를 썼다. 이것이 새누리당과 경상북도 지역에 크게 번지기 시작하며 "진실한 박근혜 사람"의 줄임말인 "진박"이 대형 정치이슈가 되었다. 공천을 노리는 예비후보들이 다들 조원진을 비롯한 친박계 핵심인사들의 지지유세를 받으려고 난리가 나고 박근혜와 한번이라도 찍은 사진을 자기 사무실 건물에 현수막으로 걸어놓는 등 온갖 "진박 증명을 향한 투혼"을 불태우기 시작했고, 상대 예비후보를 진박이 아니라고 공격하기도 하는 등 20대 총선 공천을 앞둔 여당은 진박 논란으로 불타오르는 숙명에 처했다.

공천심사위원장에 친박계 인사인 이한구 의원이 앉으면서 공천 과정에서 친박 대 비박의 힘싸움이 치열하게 벌어졌다. 공천살생부[16] 논란으로 비박계가 궁지에 몰리는가 하면, 뒤이은 친박계 윤상현 의원의 김무성 대표 욕설[17] 파문이 이어지며 다시 친박계가 뒤로 밀리는 등 일진일퇴의 공방전이 벌어졌다.

결론적으로 20대 총선에서도 친박에 의한 비박계 공천 학살이 일어났으며, 그나마 비박계 중 김무성 대표의 측근들은 살아남았지만, 나머지 친이친유를 비롯한 비박 인사들은 대거 탈락했다. 그나마 막판 김무성 대표의 당직인 파동으로 이재오, 유승민, 김영순 후보의 지역구들에는 새누리당이 후보를 공천하지 않았지만, 나머지 인사들은 얄짤없이 공천 학살을 당했다. 참고로 이런 행태는 대구광역시에서도 불만이 컸으며, 이를 안 새누리당은 사죄 퍼포먼스[18]를 했지만 이미 민심은 폭발할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결국 야권 분열로 완벽한 어부지리 상황이 조성되어 151석 이상은 기본이고 180석에서 운 좋으면 200석 이상까지도 가능하다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로 상황이 유리했던 새누리당은 친박과 비박의 공천권 다툼과 박근혜 대통령이 대놓고 친박을 지원하는 역대급 추태를 벌인 대가로 과반 의석(151석 이상)에 한참 못 미치는 122석을 얻는데 그쳤다. 일부 보수성향 무소속 후보들이 출마해 2여2야가 된 지역도 있지만, 현실은 텃밭인 PK조차 대거 내줬을 정도니 빼도 박도 못하는 대참패.

16년 만에 여소야대 정국이 되는 레벨을 넘어 급기야 100석 이상만 얻어도 성공이라고 했을 만큼 패색이 짙었던 더불어민주당에게 123석이나 내줘 원내 제1당 자리까지 빼앗기고[19], 김을동, 이인제 등 당 지도부 인사들과 오세훈서울시장, 김문수경기도지사 등 대선 주자급 후보들까지도 줄줄이 낙선하는 참사가 벌어진 건 .

야당이 국회 다수파가 되었으니 박근혜 정부가 추진해온 노동개혁, 테러방지법, 국정교과서, 위안부 합의안 등의 정책도 존폐 위기에 놓이는 새누리당과 청와대의 입장에선 그야말로 대재앙이 벌어지게 됐다. 노동개혁은 이견이 있지만, 테러방지법과 국정교과서, 그리고 위안부 합의안은 국민의당더불어민주당, 정의당의 입장이 크게 고치거나 폐기한다는 데 확실히 일치한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위 4가지 정책에 대하여 새누리당 지지층에서도 문제가 있다고 인식한다는 점이다.

사실상 새누리당의 총선 전 과정을 총괄했던 계파이니만큼 총선 패배의 책임을 져야하는 터라 잠시 몸을 추스리고 행동거지도 조심하는 듯 보였지만 비박계 공천 학살로 새누리당에서 친박계 수가 비박계보다 많아지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발생한지라 비박계가 다시 치고 올라오는 것도 녹록치는 않아 보인다. 그래도 일단은 원내대표 경선에서 중도 성향의 정진석 의원이 당선되긴 했지만, 정진석 의원이 비상대책위원회를 거의 비박계 중심으로 짜고, 혁신위원회 수장에 강성 비박계인 김용태 의원을 지명하면서 당권에서 밀려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을 느낀 친박계가 다시 들고 일어난다.

바로 2016년 5월 17일, 비상대책위원회와 혁신위원회를 인준받기 위해 열린 상임전국위원회와 전국위원회에서 친박계가 집단 불참한 것. 바로 전날엔 친박계 초재선 의원들이 김용태 혁신위를 재고해달라며 원내대표에게 집단성명을 내는 막장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주변 의원들에게 전화까지 돌려 회의에 참석하지 말라는 방해 행위까지 벌인 것으로 드러나 결국 상임전국위와 전국위는 의결 정족수 미달로 무산되는 사태에 이르고 만다.

이에 김용태 의원은 친박을 비토하면서 혁신위원장 자리를 사퇴했고, 비박계는 '친박계가 (당에 대한) 자살 폭탄 테러를 벌였다', '양아치 패거리 독재 정당'이라는 소리까지 하며 크게 반발하고 나서 새누리당의 계파 갈등이 최고조에 이르는 모양새다.

정진석 원내대표가 칩거를 끝내고 김희옥동국대학교 총장을 위원장으로 하는 혁신형 비상대책위원회가 만들어지면서 새누리당의 내홍은 수습이 되어가는 듯 보였지만, 이 비대위가 탈당 무소속 의원들, 특히 유승민 의원까지 모두 복당시키기로 하자 여기에 친박계 의원들이 또다시 집단 반발을 일으키면서 아무는 듯했던 새누리당의 상처가 다시 벌어졌다. 다만 최경환 전 경제부총리와 함께 친박계의 좌장으로 불리는 서청원 의원이 비대위 결정에 따라야 한다는 의견을 드러내면서 혁신 비대위의 복당 결정을 친박계가 한 마음 한 뜻으로 반대하는 건 아니라는 걸 보여주었다.

아무래도 지난 전국위원회 무산 사태도 있고 하니 여론을 의식한 탓인 듯하다. 대신, 복당 실무를 처리했던 친이명박계 권성동 사무총장의 경질을 요구하고 있다.

친박계의 요구를 권 사무총장과 비박계는 안 된다고 버티고 있다가 결국 권 사무총장이 사퇴를 하기로 했다. 그런데 친박계인 김태흠 사무부총장도 함께 경질해달라고 요구하면서 봉합되나 싶었던 새누리당의 계파 갈등은 다시 벌어지고 말았다.

2016년 7월 18일에는 친박계의 핵심 멤버 중 한 사람으로 손꼽히는 윤상현 의원이 경기도 화성시 갑 선거구에 한 번 당선된 적이 있고, 고로 20대 총선에서도 이 지역에서의 출마를 준비하던 친이계 김성회 전 의원에게 전화를 걸어 '출마 지역구를 다른 곳으로 바꿔라. 대통령의 뜻을 내가 안다. 바꿔주기만 하면 '친박 인사'로 만들어서 본선 진출을 보장하겠다. 내가 별의별 것(약점)을 다 갖고 있으니 말 들으라'는 식의 협박과 회유를 한 것이 녹음된 녹취록이 언론에 공개되었다. 최경환 의원도 이 협박성 회유를 같이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때 경기도 화성시 갑 지역의 현역 국회의원은 친박계의 맏형인 서청원 의원이었다. 즉, 서청원 의원이 그 지역에서 당선되기 전에 이미 18대 총선에서 해당 지역에 당선된 적이 있었던 김성회 전 의원이 만에 하나라도 경선에서 서청원 의원을 이길까봐 출마 지역구를 바꾸라고 압박한 것이다.

결국 김성회 전 의원은 지역구를 바꿔 출마하였지만, 경선에서 패해 결국 20대 총선에 출마하지 못했다고 한다. 한편, 사건이 불거지자 친박계 이우현 의원은 "녹취는 남자 세계에서 가장 인간 쓰레기 같은 짓이다."라면서 되려 김성회 전 의원을 비난했다.[20][21] 지역구를 바꾸라고 한 것에 대해서는 “(공천 개입이 아니라) 능력이 안 되는 사람이 자꾸 나가려고 하니깐 그걸 옆 지역에 (출마하라고) 아마 최경환 선배나 윤상현 (의원이) 그렇게 양해를 구한 것”이라고 해명해줬다.

4.4. 8.9 전당대회

박근혜 대통령의 실정과 총선 참패, 공천 개입, 보도 개입 등 친박계의 삽질이 엄청난 상황 속에서도 2016년 8월 9일 새누리당 전당대회에서 이정현 의원이 당대표로 선출되고 최고위원 5명 중 4명을 휩쓰는 등 친박계가 예상 외의 압승을 거두었다.

사실 외부에서 아무리 욕을 먹고 삽질을 해도 일찌감치 비박은 4.13 총선때 공천 학살을 당하면서 소수파로 전락했고, 초선 친박 의원들의 대거 유입으로 친박이 과반수를 넘어 2/3에 이르는 당내 최대 계파가 된데다, 박근혜 대통령이라는 구심점이 있기 때문에 몇몇 중량감 있는 인사들이 대선 가도에 올인하느라 구심점 없이 지리멸렬한 비박을 압도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친박계의 당 장악으로 현시점의 새누리당은 심하게 말하면 박근혜 사당 수준의 인적 구성을 가진 거대 단일 계파 정당이 되었으며, 차기 대선 구도에서 유일하게 친박에 설 수 있는 후보인 반기문 사무총장의 대선 출마에 힘이 실리게 되었으며 개밥의 도토리 신세가 된 비박계의 분당 가능성 또한 제기되고 있다.

그렇게 당선된 새 당대표이자 계파 청산을 외쳤던 이정현 의원은 "대통령과 맞서는 게 정의라고 생각한다면 여당 의원의 자격이 없다"는 발언을 하는 등 비박계를 향한 견제를 오히려 강화해 이 대표가 말한 계파 청산이 비박 학살이 아니냐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그런 연유인지 친이계 좌장 이재오 전 의원은 총선 이후 새누리당으로 돌아가지 않고, 중도를 표방하는[22] 보수 정당을 따로 창설했다. 가칭 '늘푸른한국당'.

4.5.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그렇게 친박 위주로 당이 운영되던 찰나에, 2016년 10월 말 박근혜정부 최악의 흑역사인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터지며 친박은 계파 생존까지 걱정할 처지가 되었다. 지지층까지 박근혜에게 등을 돌리게 만든 범국민적 분노에 새누리당 친박들은 대부분이 모르쇠로 침묵하거나 최순실은 알았지만 이정도로 국정을 농단하는 인물이었을거라곤 상상도 못했다며 현실도피했다. 하지만 당연히 친박들은 최순실의 존재에 대해 알든 모르든 둘 다 큰 문제에 봉착했는데, 최순실의 존재에 대해 알았다면 그런 인물과 공조하는 대통령 후보자를 정당의 얼굴로 내세움으로써 국정을 농단한 것이고, 최순실의 존재에 대해 몰랐다면 자기 계파의 수장에 대한 신상정보조차 알아보지도 않고 대통령 후보자로 내세운 것이다. 즉, 이들은 무능하거나 박근혜와 최순실과 함께 국정을 농단한 공범이거나 둘 중 하나인 것이다.

게다가 박근혜의 대선을 도와줬다 이후 그녀에게 낙담하고 국민의당으로 자리를 옮긴 이상돈 의원조차 최순실의 존재를 알았다면서, 친박 의원들이 제17대 대선 당시에도 이명박 후보의 공세가 있었는데도 최순실을 몰랐다는 건 말이 안 된다면서 친박세력의 몰랐다는 변명에 대해 확인사살을 하였다. # 탈박인 전여옥 전 의원 역시 비슷한 취지의 발언을 했다.#

그런데 이 와중에도 일부 친박들은 정신 못차리고 대통령 옹호를 하려 했으나, 현실은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의 직격탄에 새누리당은 막대한 피해를 입었고, 심지어 2016년 11월 각종 여론조사 기관의 정당 지지도 조사에선 새누리당의 텃밭인 경상도에서조차 민주당에게 1당 자리를 내줬다. 그동안 박근혜와의 개인적 친분을 바탕으로 당을 사당화시키고, 안하무인식 갑질행태로 보수세력내에서조차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던 친박세력이 최대의 위기를 맞게 된 것이다.

비박 계열에서는 새누리당 지도부의 총사퇴를 요구했고, 친박계의 대통령 심복이라 불리는 새누리당 이정현 대표는 책임 추궁 이전에 일단 국정 수습이 먼저라고 주장하며 대표 사퇴를 미뤄 당내의 분열이 가속화되었다. 하지만 친박세력이 주도하는 새누리당 지도부의 총사퇴는 기정사실화된 것이나 마찬가지이기에 어느 시점에 총사퇴하느냐만 남았다. 게다가 친박세력의 구심점인 박근혜 대통령 또한 국정 동력을 완전히 상실해버린 허수아비가 되어버린 상황[23]이기 때문에 친박이라는 계파는 사실상 해산 수순을 밟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이 와중에 일부 친박계 의원들은 정신 못차리고 11월 5일 촛불집회 당시 골프를 치러가서 논란이 되었다. 골프 칠때 가명을 썼다는걸 보면 자기들도 논란이 될걸 알긴 안 모양이다.

2016년 11월 12일, 6월 항쟁 이후 최대집회인원인 100만 촛불집회가 열리며 성난 민심이 확인되자 비박계는 다음날인 13일 새누리당 비상시국위원회를 구성하기로 결의를 모으고, 친박계가 주축이 되어 있는 최고위원회는 조기전당대회를 밀면서 그야말로 한지붕 두가족 형태가 완벽하게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제 무엇이 되던, 누군가가 반드시 나가떨어질 처지다.

하지만 친박 정우택 의원은 김무성 전 대표가 박근혜 대통령의 탈당을 요구하자 이를 비판하는 등 아직도 정신을 못차리고 있다. 사실 탈당 뿐만 아니라 탄핵도 비박계들 사이에선 심심찮게 거론되는 상황.
2016년 11월 17일 특별검사&국정조사 법안이 국회 본회의에서 압도적인 표차로 통과되면서 친박과 박근혜정권은 점점 더 궁지에 몰리고 있다.

2016년 11월 19일에도 전국 각지에서 100만명에 이르는 촛불집회가 열리며 박근혜정권 퇴진을 외쳤다. 심지어 친박의 정치적 기반인 대구에서도 2만명에 이르는 집회인파가 모여 충격을 주었다. #

2016년 11월 20일 검찰이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관련 중간수사 결과를 발표했는데, 헌정 사상 처음으로 현직 대통령이 피의자 신분이 되었다. 이에 청와대와 변호인은 항변하며 스스로 약속했던 검찰의 대면조사 요구를 거부했고, 향후 중립적 특검에서 조사를 받겠다는 입장을 내놨다.

그리고 더이상 버티지 못한 친박과 박근혜 대통령이 상의 끝에 2016년 11월 29일 질서있는 퇴진이란 명목 아래 국회에서 여야가 합의하면 그 일정에 따라 퇴진하겠다는 3차 대국민 담화를 발표했고, 새누리당은 2017년 4월 퇴진, 6월 대선을 당론으로 결정하였으나, 피의자 대통령의 시간끌기 개헌 꼼수라는 비판 아래 오히려 국민들 화만 돋구었고, 2016년 12월 3일엔 전국 232만명이라는 역대 최대 촛불인파가 몰리며 국민의 뜻이 대통령 즉각 퇴진에 있음을 만천하에 드러내었다.

그리고 비박이 탄핵 찬성으로 완전히 돌아서면서 결국 2016년 12월 9일 국회에서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이 찬성 234표, 반대 56표로 가결되었다.[24] 이는 중립성향 의원 뿐만 아니라 친박 의원 중에서도 일부가 박근혜 대통령에게 등을 돌린 압도적 찬성으로 친박 지도부는 여러모로 당내 주도권을 많이 잃게 되었다.

2016년 12월 11일, 한동안 잠잠하던 친박계들이 박근혜 탄핵 소추안이 9일 국회에서 통과된 이후, 회동을 갖고 친박 50명 심야 회동, 모임 결성…김무성 유승민과 결별선언을 하였다. 이 모임의 이름은 혁신과 통합 보수연합으로 공동대표로는 피닉제이인제 전 의원, 김관용 경상북도도지사, 정갑윤 국회의원이 맡기로 했으며 친박계 국회의원 51명이 참여한다. 현재 상황에서 친박이 이런 모임을 결성했다는 것은 난 탄핵 반대파라고 인증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점에서, 알아서 순장조로 들어간 거 아니냐는 분석이 나왔다. 일부 정치평론가들 사이에선 이들이 그나마 숨은 지지층이라도 기대하고 TK판 자민련을 노리고 있는 것 아니냔 분석도 나왔다.

혁신과 통합 보수연합의 긴급 회동에 참석한 명단은 아래와 같다. 관련기사. 시·도지사를 제외하고 지역이 표시되지 않은 의원들은 비례대표이다.

서청원(경기 화성 갑), 최경환(경북 경산), 조원진(대구 달서구 병), 홍문종(경기 의정부 을), 이장우(대전 동구), 윤상현(인천 남구 을), 김진태(강원 춘천시), 김태흠(충남 보령/서천), 정우택(충북 청주 상당), 유기준(부산 서구/동구), 원유철(경기 평택 갑), 김석기(경북 경주), 박완수(창원 의창), 정종섭(대구 동구 갑), 김정재(경북 포항시 북구), 최연혜, 이만희(경북 영천시 청도군), 윤상직(부산 기장군), 김순례, 민경욱(인천 연수 을), 강효상, 장석춘(경북 구미 을), 추경호(대구 달성군)), 백승주(구미 갑), 강석진(경남 산청/함양/거창/합천), 유민봉, 이종명, 이우현(경기 용인 갑), 박맹우(울산 남구 을), 이완영(경북 고령/성주.칠곡), 이헌승(부산 부산진구을), 김명연(경기 안산시 단원구 갑), 홍철호(경기 김포시 을), 윤영석(경남 양산시 갑), 조훈현, 곽상도(대구 중구/남구), 권석창(충북 제천 단양군), 윤재옥(대구 달서구 을), 성일종(충남 서산/태안), 김성원(경기 동두천 연천군), 박덕흠 의원(충북 보은/옥천/영동/괴산) // 김관용 경북지사, 유정복 인천시장, 서병수 부산시장 등[25]

2016년 12월 16일, 탄핵사태에 책임을 지고 사퇴한 정진석 전 원내대표를 대신할 새로운 새누리당의 원내대표로 친박계 정우택 의원이 당선되었다. 55표를 득표한 비박계 나경원 의원보다 7표 많은 62표의 신승으로, 국민의 신뢰는 잃어버렸지만[26] 여전히 당내 세력에선 우위에 있음을 보여줌으로서 비박계의 분당 속도도 빨라지는 것 아니냐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그리고 친박 원내대표 당선에 안도한(?) 이정현 당 대표와 친박 최고위원들은 동일 일괄사퇴했다.

그리고 결국 새누리당 분당 사태까지 이끌었다. 12월 27일에 비박계 29명이 집단 탈당함에 따라 의석수가 99석으로 떨어지는 바람에 무제한 토론도 못하는 상황이다.[27] 한마디로 야4당이 공조하면 어떤 법안이든 통과가 가능한 상황까지 몰렸다. 정우택 원내대표는 당을 수습하기 위해 인명진 비대위원장 카드를 꺼내들었지만 인명진 비대위원장을 비판하는 분위기이며 새누리당 내부의 강성 친박세력과 청와대도 인명진 비대위원장의 인적청산, 개혁정책에 반발하는 모양새이다.[28] 결국 이 추세가 지속될 경우 새누리당 붕괴는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며 마땅한 대선후보도 없는 상황이라[29] 당을 더 절망으로 몰아넣고 있다.

인명진 비대위윈장이 친박 인적 쇄신을 주장하고 실제로 이정현 전 대표와 정갑윤 의원이 새누리당에서 탈당 하기도 했으나[30] 서청원, 최경환 같은 친박 핵심 세력들은 탈당을 거부해 새누리당이 개혁보수신당에 이어 또 분열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5. 박근혜 파면 이후

2017년 3월 10일 대통령 박근혜는 파면됐다. 하지만 새누리당에서 개명한 자유한국당 안에서 친박은 여전히 영향력을 가지고 있고 삼성동계, 새누리당을 결성하는 등 친박 자체는 파면 전과 딱히 달라지지 않았고 계파 보스인 박근혜 전 대통령도 신분은 민간인이여도 친박의 등뒤에서 정치력를 가지고 있었다. 다만 박근혜 전 대통령 구속 이후에는 돌출 행동을 제외하고는 전면에 나서지 못하고 있다.

자유한국당 대선 경선에서 강성친박 김진태가 지지율은 홍준표에게 밀리지만 나름 선전하는 등 박근혜의 5% 콘트리트 지지층도 여전하다는 걸 보여주고 있다.

2017년 4월 재보궐선거 상주시·군위군·의성군·청송군지역구에 친박계 김재원 전 의원이 공천됐다. TK 지역에 농촌, 투표율이 낮은 재보궐선거인 만큼 보수후보에게 유리한 곳인데 만약 바른정당 후보에게 밀린다면 현 자유한국당과 친박의 가장 이상적인 목표인 TK판 자민련조차 힘든 일이 될 듯하다.

하지만 TK에서 전 지역을 석권함으로써 TK에서 자유한국당과 박근혜에 대한 동정은 변함이 없음이 확인되었다. 다만 득표율이 몇몇 지역을 제외하고는 40%대로 떨어진 상황이라 투표율이 실제로 높을 것으로 예상되는 대선에서는 이보다는 더 낮아질 것으로 예상되어 TK 지역에서도 자유한국당이 무작정 안심을 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제19대 대통령 선거 기간 동안에는 친박 세력들이 홍준표의 선거 운동을 도우면서 조용히 있었다. 바른정당 집단 탈당 사건이 터지고, 홍준표는 바른정당 탈당 의원들의 복당을 찬성했지만, 친박 세력들은 복당에 결사반대 하면서도 복당을 원하는 탈당 의원들에게도 큰소리를 치는 것을 보아 당내에서도 여전히 건재한 세력이라는게 증명됐다. 대선이 끝나고 당권을 장악하려 활동을 재개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대선 패배 이후, 홍준표가 바른정당 출신을 포용할 것을 선언하며 "친박들은 좀 빠져 줬으면 한다"라고 아예 대놓고 말하는 것을 보면 당 내의 권력이 빠르게 축소될 것이 높아 보이는 상황이다.

실제로 2017년 3월 10일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의 공범인 박근혜헌법재판소의 판결을 받고 대통령직에서 파면당하고 같은 해 11월 3일에 자유한국당 대표인 홍준표가 박근혜를 축출했다. # 다음 해인 2018년 4월 6일에 1심이 박근혜에게 징역 24년을 선고하면서, 박근혜를 비롯한 친박계들의 정치적인 재기 가능성은 사실상 영구히 사라져버렸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친박계 중진 중 한명이었던 최경환 의원이 경제부총리 재직 당시 특수활동비를 횡령했다는 혐의로 구속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제는 박근혜가 아니라 본인들 정치생명마저 위태롭게 되었으며 홍준표 대표와 지도부가 친박 척결에 대한 강력한 의지를 보이고 있어서 당내에서의 입지도 점점 좁아지고 있다.[31]

5.1. 2018년 제7회 전국동시지방선거 이후

그러나 제7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홍준표 자유한국당 대표를 포함한 비박계 지도부가 역대급 대참패를 해버리고, 박정희-육영수 부부의 출신지이자 친박 세력들의 정치적 성지나 다를 바 없었던 경상북도 구미시충청북도 옥천군에서도 구 새누리당의 후신이던 자유한국당이 패배하고 더불어민주당 소속의 장세용김재종시장군수에 당선되고 민주당이 의석이 차지하게 되면서 선거 패배에 대한 책임을 지고 홍준표를 포함한 당 지도부 전원이 사실상 사퇴함에 따라 앞으로의 차기 당권을 누가 가지느냐에 따라서 친박계의 운명이 결정될 것으로 보인다.

만약 황교안, 이완구 같은 친박계 성향이 강한 인물이 차기 당대표나 비대위원장이 된다면 친박계가 다시금 살아남을 수도 있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사실상 차기 총선에서 친박계가 공천 학살을 피하기는 굉장히 어려울 것이다. 반대로 친박계가 다시 당권을 가져온다면 비박계가 역으로 공천 학살을 당할 수도 있다. 일단 김무성은 차기 총선에 이미 불출마를 선언했다.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물론 친박계가 설령 당권을 차지한다 한들 미래가 그리 밝지는 않을 듯 하다. 아직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일어난지 2년이 채 되지 않은지라 친박계가 당권을 차지할 시 오히려 자유한국당에 대한 혐오 정서만 더 키울 가능성이 크다.[32]

하지만 문제는 태극기 부대에서 활동하던 사람들이 책임당원으로서 자유한국당 쪽으로 대거 가입하고 있다는 점인데, 이 때문에 자유한국당은 쇄신 딜레마에 직면한 상황이다. #

그와 별개로 한국당의 일부 친박계에서는 '신당창당론'이 나오고 있다고 한다. #

박지원 민주평화당 의원이 12월 6일 ‘국정농단’ 사건으로 구속기소된 박근혜 전 대통령의 구속만기 시점인 내년 4월, 자유한국당이 ‘친박당’과 ‘비박당’으로 쪼개지는 분당(分黨) 사태를 맞게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

한국당 원대 경선 '친박계의 설욕'…범친박 결집에 나경원 압승
나경원 압도적 표차 당선에… 범친박 빠르게 결집

그러나 2018년 12월 11일, 자유한국당 원내대표 경선에서 친박의 지원을 받은 나경원이 당선되어 분당 가능성은 다행히 낮아졌다. 또한 나경원이 원내대표에 당선되는데 범 친박 세력이 결집하여 압도적인 당선을 시켜주면서 친박은 죽지 않았다는 것을 다시금 입증하였다. 다만 나경원 역시 박근혜의 석방은 당이 과거로 역행하는 일이라며 석방에 반대하는 입장을 보였다. 이후 나경원은 친박, 비박 책임 공방을 하지 말고, 당내 계파 갈등을 종결해야 한다고 호소하며 친박에 대한 청산을 원천 봉쇄하고 있다.[33]

한편 친박 중에는 '탄핵백서'를 만드려는 움직임이 있다. 친박 "탄핵백서 만들겠다…김무성·유승민 반드시 포함"

5.2. 2019년 2.27 전당대회 이후

2.27 전당대회에서 친박계로 분류되는 황교안국무총리새로운 당대표로 선출되었는데, 첫 인선에 대해 친박 색채가 강화되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문화일보 조선일보 연합뉴스1 연합뉴스2

뿐만 아니라, 리얼미터 여론조사 결과 자유한국당 지지층[34]과 보수층[35]에서는 ‘극우세력을 포함한 보수통합’이 절반 이상의 대다수로 나타나면서, 비록 박정희-육영수 부부의 출생지이자 친박의 정치적 성지인 구미시옥천군작년 지방선거에서 더불어민주당에게 빼앗겼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기세가 죽지 않았음을 보여주었다.

황교안號 요직 장악한 '통합과 전진', 친박계 전면 배치되나
황교안 체제 친박의 귀환…세불리기 포석두나
한선교·추경호·민경욱… 친박색 짙게 바른 ‘황교안 한국당’

전체적으로 이번 2.27 전당대회친박의 귀환으로 평가받는 분위기이다. # 실제로 전당대회 이후 확실히 친박계들이 전진배치되는 상황으로 더불어민주당정의당에서는 자유한국당이 다시금 도로 친박당으로 되돌아갔다고 비판하는 양상이다. 참고로 김무성 같은 비박계들 또한 친박 중심 인사에 불편한 감정을 드러내는 상황이다. 김무성, 황교안 ‘친박 중심’ 인사에 “아쉬운 감 있다” 어찌되었건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 이후 밑바닥까지 떨어졌던 친박계들은 이번 2.27 전당대회에서 자신들이 밀어준 황교안 전 총리가 당 대표로 당선됨에 따라 다시금 부활의 발판을 마련할 수 있게 되었다. 적어도 내년에 있을 21대 총선에서 공천 학살을 피할 가능성이 매우 높아졌다는 점에서 최악의 상황은 피했다고 평가할 수 있겠다. 한국당 '총선 공천' 주도할 핵심 요직에 친박 전진배치

6. 21대 총선

황교안자유한국당의 당 대표로 취임되면서 친박들의 세력이 강해지고, 비박계들이 위축되는 것 같아 보였다. 그리고 새로운보수당유승민이 합당을 하려고 협상을 시작했을 당시에도 황교안을 필두로 한 친박들은 유리한 고지에 있어 보였다. 실제로 언론에서도 유승민, 정병국을 필두로 한 친유계들이 선거를 위해 굴복했다는 식으로 묘사하기는 했다.

그런데 막상 통합하려고 하는데 친박계 정치인들이 통합을 반대하는 모습을 보였다. 특히 김진태, 정종섭, 정태옥 등이 강력하게 반대하는 모습을 보였고, 일각에서는 우리공화당과의 합당까지 고려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래서 황교안을 포함한 자유한국당 내 지도부들은 큰 난항을 겪었다. 그런데 동구 을에 출마를 하려는 유승민 국회의원이 출마를 포기하기로 하고, 새로운보수당자유한국당의 통합을 진행할 것이라고 하였다.

이 때문에 통합한 이후 잠시나마 통합 대상으로 거론되었던 우리공화당에서 반발을 하게 되었다. 특히 조원진의 경우 미래통합당을 배신자당이라면서 합당하지 않겠다고 하였다. 그러자 박근혜 전 대통령은 자신의 이름을 팔아서 정치하려는 가짜 친박 정치인에게 철퇴를 내렸다. 친박(親朴)이란 용어를 사용하지 말라는 메시지를 유영하 변호사를 통해 보낸 것이다. 이로 인해 박 전 대통령을 마케팅의 수단으로만 이용해온 가짜 친박은 물론 박 전 대통령을 지근거리에서 보좌했던 실제 친박계 인사들도 친박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못하게 됐다.[36] 대다수는 공천 과정에서도 많이 탈락했고, 반성 차원에서 불출마를 선언한 의원도 많았다. 유기준, 정갑윤, 원유철, 한선교 등은 불출마했다.

대표적인 친박계 인물들이 이번에 본선조차 가지 못하는 경우도 많았다. 김재원의 경우도 자기의 지역구였던 상주시·군위군·의성군·청송군의 경선에서 패하고, 개편된 군위군·의성군·청송군·영덕군의 당내 경선에는 참여하지도 못하고, 반강제적으로 서울 중랑구 을 선거구 경선에 참여하게 되고 그 결과, 친유 성향의 윤상일 전 국회의원에게 밀리게 되었다. 자유한국당 강효상 한미정상통화 외교기밀 유출 사건에 휘말리게 된 강효상 비례대표 국회의원[37]도 세간의 기대와 달리 달서구 병이 아닌 서울 중구·성동구 갑에서 친이, 친유 성향인 진수희보건복지부장관에게 밀렸다. 민경욱의 경우도 민현주인천 연수 을에 공천된 것으로 인해 컷오프 되다가 경선으로 다시 공천하기로 하다가 우여곡절 끝에 막장공천으로 인해 공천되었다. 김석기의 경우도 경주시에서 컷오프 되다가 다시 공천되었다.

비어있는 군위군·의성군·청송군·영덕군에서는 친이, 친유 성향의 김희국 전 국회의원과 친박 성향의 천영식 전 청와대 홍보기획비서관이 경선을 치르기로 했는데, 친이, 친유 성향인 김희국이 결국 승리하게 되었다. 그게 의의가 있는 것이 이제 그 보수적인 경북 북부에서도 친박이 통하지 않는 다는 것을 의미하게 되는 것이다. 경상북도 내에서는 비슷한 사례가 두 번 또 나타나는데, 동구 갑, 동구 을의 사례이다. 단, 이 지역들은 경북 남부다.

동구 갑정종섭 전 행정안전부장관이 친박의 책임을 거론하며 불출마를 선언했다. 이 선거구에 도전하게 되는 인물이 류성걸경북대학교 경제통상학부 초빙교수와 이진숙대전MBC 대표이사다. 그런데 이진숙정종섭의 지원을 받는 인물이라서 경선에서 이진숙이라는 개인보다는 류성걸정종섭의 대결로 보였다. 친이, 친유 성향의 류성걸친박 성향인 정종섭의 지원을 받는 이진숙의 대결이었는데, 결국 류성걸 예비후보가 압도적인 표차로 이진숙을 꺾고, 본선에 진출하기로 하였다.

동구 을유승민 전 새누리당 원내대표 또한 새로운보수당자유한국당의 통합, 미래통합당 창당을 위해 불출마를 선언했다. 이 선거구가 많은 관심을 가진 이유가 유승민의 불출마 선언 전 자유한국당에서 친박 성향의 도태우 변호사, 김영희 전 육군 중령, 김재수농림축산식품부장관, 김규환 비례대표 국회의원이 도전하게 되는데다, 윤창중 또한 유승민낙선시키기 위해 도전하겠다고 하고, 홍준표 또한 이 선거구를 고르기로 했다.

그런데 유승민이 불출마하는 대신 친유 성향의 강대식 전 대구 동구청장이 출마하기로 선언했다. 그래서 경선을 치르기로 했는데, 1차 경선에서 도태우 변호사, 김규환 국회의원이 떨어지고, 강대식 전 대구 동구청장과 김재수 전 농림축산식품부장관이 살아남았다. 그런데 2차 경선에서 친유강대식김재수를 57.3%의 지지율로 꺾고, 본선에 진출하기로 했다. 홍준표컷오프 이후 수성구 을을 골라서 출마하기로 하고, 윤창중은 계속 동구 을에 출마하기로 하였다.

북구 갑 선거구에서도 이부망천을 터뜨려서 제7회 전국동시지방선거의 참패를 유도한 정태옥이 컷오프를 당하고 대신 양금희를 공천하였다. 정태옥은 이에 반발하여 무소속이라는 신분으로 출마하기로 결정하였다.[38]

그런데 반대로 친박 신인들이 공천을 받은 사례도 존재한다. 황교안, 친박, 친황에 의해 친유 출신의 민현주를 컷오프하고 민경욱을 공천한 사례 이외에도 생각보다 많은 편이었다. 대표적인 사례는 여주시·양평군에서 발생했다. 상도동계, 남원정, 친이, 친유 출신 중진인 정병국 국회의원을 컷오프하고 그 자리에 황교안친박, 친황 출신인 김선교를 공천하는 모습을 보였다. 황교안은 본인의 대권에 방해가 되는 정병국 국회의원[39]을 컷오프하고 그 자리에 정병국과 대립한 김선교를 단수공천하는 선택을 했다.

심지어 박근혜와 유일하게 접견 가능한 변호사이자 자필 옥중편지를 들고 미래한국당에 비례대표 출마선언을 한 유영하 변호사조차도 아예 탈락했다. 유영하는 심지어 20대 총선때 옥새런에 이은 2번째 공천 거부를 당한 셈.

7. 21대 총선 이후

친박 이름을 달고 탈당한 조원진, 홍문종, 서청원 등은 분열로 인해 친박 비례 정당만 3개가 되었고, 결국 비례 표를 다 갈라먹으면서 3% 달성에 실패하며 전부 낙선했다. 조원진은 본인 지역구인 달서구 병에서 미래통합당 후보인 김용판은 물론이고, 더불어민주당김대진에게도 밀리며 낙선하게 된다. 물론 다시 재기는 불가능하다고 봐야한다. 미래통합당 대표였던 황교안종로구에서 이낙연 더불어민주당 후보에게 낙선하게 되면서 대표직에서 사퇴하였고, 무소속으로 서울특별시영등포구 을에 출마한 전 대표 이정현도 아무런 바람도 일으키지 못하고 낙선했다. 정우택도 지역구를 살짝 옮겼지만 역시나 낙선하였다. 강성 친박으로 유명한 김진태춘천시에서 보수 후보로서 처음으로 낙선했고, 민경욱도 컷오프와 부활을 두 번 반복하는 해프닝 속에서 출마했으나, 유력 좌파 후보가 둘인 유리한 구도에서도 패하며 낙선하였다. 유정복, 이장우, 김선동 등 다른 친박들도 죄다 낙선했다. 게다가 강대식에게 대결하겠다며 선거에 출마한 윤창중은 낙선하고 강대식은 압도적으로 당선되었다.

그리고 이부망천의 당사자인 정태옥대구 북구 갑에서 현역 국회의원임에도 49%를 얻은 미래통합당 후보인 양금희는 물론이고, 더불어민주당 후보인 이헌태에게도 밀렸다. 그 것도 20대 총선 당시 권은희보다도 더 적게 받은 편이다.[40] 게다가 정태옥은 복당도 거의 힘든 상황이다. 그렇다고 대구광역시장으로 출마하기에는 권영진곽상도 등 타 후보들과도 경쟁해야된다.

그나마 살아남은 인물 중 친박 핵심은 윤상현. 공천 탈락 후 탈당하여 당선되었고, 2번 연속 무소속 당선을 이루었다.[41] 박대출도 보수세가 강한 진주시 갑에서 다시 당선되면서 3선 중진에 이름을 올렸다. 김태흠도 출구조사에서는 패하는 것으로 나왔으나, 실제 투표에서는 결국 다시 당선되면서 역시 3선 중진에 이름을 올렸다. 성일종, 이만희, 서병수도 살아남아 친박의 명백은 유지하게 되었으나, 구심점은 사실상 없는 상황이다. 그리고 황교안정병국을 컷오프하고 공천한 친박인사인 김선교도 당선되었다.[42]

서병수윤상현이 유력 정치인으로 살아 남았으나, 서병수는 당내 최다선이면서도 70줄이 다 되었기에 조용히 국회부의장 쪽으로 선회할 가능성이 적지 않고, 성일종은 20대 임기 중에 국회에서 친박과는 관련없는 오히려 좋은 행보를 보여주면서 친박 세력과 점점 멀어져갔고[43], 윤상현은 기존의 돌격대장 혹은 저격수 친박들처럼 상대에게 막말을 쏟아내고 박근혜 석방만 외쳐대는 정치인이 아니었다보니, 핵심 친박이면서도 당내의 주류 친박들과는 다른 길을 걸어왔다는 점에서 구심점이 되기에는 미묘하다.[44] 결국, 김태흠이 구심점, 곽상도가 돌격대장 정도로 유지되는 선에서 그칠 텐데, 이렇게 되면 사실상 친박은 힘을 다 잃은거나 마찬가지고, 그 댓가로 친박 세력에 대해서 선거 참패의 책임을 묻고 심판이 이루어질 수도 있어서 미래가 굉장히 어둡다.[45]

결국 통합당 원내대표 선거에서도 강성 친박인 김태흠이 출마를 접으면서 친박의 몰락은 기정사실화가 되었다. 권영세가 원내대표에 도전하고, 이종배도 주호영의 러닝메이트로 출마하기는 했는데, 양 쪽 다 파트너가 친이계 핵심 출신인 조해진, 주호영인 걸 감안하면 사실상 단독 영향력은 상실했다고 봐도 무방하다.

현재 원내대표 선거에서 친박으로 분류되지만 사실상 비박계인 권영세[46]가 패배하고, 친이계주호영이 승리한 상황으로써 친박 세력은 더 약화되었다.

거기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8.15 광복절 문재인 정부 규탄 집회에서 집단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 감염이 일어나고 미래통합당의 지지율이 크게 하락하면서 보수 세력들도 친박과 극우를 비난하였고, 나아가 여론도 극도로 악화되었다.

2021년 4월 기준으로 친박계는 국민의힘 내 주류에서 멀어져갔다. 2021년 재보궐선거에서 국민의힘은 친박 극우 세력들을 철저히 배제하는 선거 전략을 짰고, 이는 제대로 먹혀들어 중도층, 특히 2030 남성들의 지지를 이끌어 내는데 성공했다. 친박이 없어서 선거에서 완승을 거둘 수 있음이 증명된 만큼, 앞으로 국민의힘 내에서 친박의 위세는 고개를 들지 못할 정도로 약화될 것으로 보이고 실제로 그렇게 되어가고 있다.

이렇게 단일대오로서의 친박이 사실상 무너졌음에도 그 구성원들은 주기적으로 탄핵 부정발언을 일삼으며 안 좋은 쪽으로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하고 있다.[47]

이어 2021년 원내대표 경선에서 친박 계파의 후보로 나선 김태흠 의원이 2차 투표에까지 올라가는 등 원내에서는 친박, 친황의 영향력은 여전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즉, 원내에서 1/3이 친박 후보인 김태흠을 지지한 셈이다. # 물론 그렇다고 해서 친박의 미래가 밝은 것은 절대로 아니다. 제22대 총선에서는 일부 지역구 관리를 잘 하거나 중앙에서 긍정적인 평을 듣는 후보 외에는 컷오프 될 가능성이 높다.

8. 국민의힘 제1차 전당대회

2021년 전당대회에서는 당대표에는 이렇다한 후보를 내지 못하고, 최고위원에 '친박의 브레인'이라고 불리는 김재원이 출마했다. 일단 3선 후보이기는 하나 대경권 후보라고 하기는 인지도가 낮은 상황이다.

또한 박근혜 게이트 당시 박근혜 변호인 도태우 역시 출마하고 있다. 도태우제주 4.3 사건에 대한 강경 발언을 도사리지 않고 있고, 이준석의 당선을 방해하려고 나경원, 주호영 단일화를 적극적으로 언급하고 있다.[48]

이들이 나서고 있고 이들이 이준석의 당선을 방해하거나 견제하고 있기에, 이들의 당선 여부 및 향후 행보가 주목받게 되었다. 전당대회 결과 도태우 후보는 낙선하였으나 김재원 후보는 최고위에 입성하게 되었다.

그런데 김재원이 당선되면서 친박은 명맥을 유지하게 되었다. 그리고 정미경과 같은 친황 정치인도 당선되었지만, 정미경친박은 아닌지라 큰 영향은 없다.

이후 대선 국면으로 넘어가면서 김재원은 이준석을 적극적으로 비판하는 입장을 취하는 반면, 정작 이준석은 부산지역 친박 핵심인 서병수를 선거관리위원장에 앉히려고 하는 등 이합집산이 이루어지는 모양새다.

9. 박근혜 사면 이후

이후 박근혜가 사면된 이후에 국민의힘 내에서 집단적인 움직임은 크게 두드러지고 있지는 않다. 이준석과 윤석열 간의 내부 갈등이 커지면서 친박은 단지 反이준석 포지션 정도에 머무를 뿐, 아젠다를 선도하지는 못하는 상황. 김재원 역시 김종인을 적극적으로 모셔 오려고 와인을 사들고 자택까지 찾아갈 정도로 주류 친박의 행태와는 크게 다른 모습을 보였다. # 조원진 정도가 우리공화당 타이틀로 대선 출마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제20대 대통령 선거에서 친박 성향의 후보는 조원진, 옥은호, 김경재가 있다. 다만 옥은호는 부정선거 의혹을 알리는 데 집중하고 있어서 친박 성향임이 거의 드러나지 않고 있다.

2022년 3월 2일, 박근령이재명 지지선언을 했다. #

제20대 대통령 선거 친박 후보를 자처한 조원진이 2017년에 비해 거의 반토막 난 처참한 득표수를 보여줬다.

정작 박근혜가 있었던 보수정당인 국민의힘에서는 박근혜를 감옥 보냈던 윤석열이 출마해서 당선된 점은 아이러니한 점이다.

이후 유영하박근혜의 후원을 받으며 대구광역시장 후보로 경선에 출마했다. 박근혜가 직접적으로 정치력을 행사하려 하는 구도이나, 경선에서 18%의 초라한 합산 득표율을 기록했다.[49] 여기서 유영하나 김재원이 홍준표를 이겼다면 달라졌겠지만, 사실상 국민의힘 내에서 박근혜의 정치적 영향력은 소멸했음이 증명되었다. 아울러 그녀의 명에 따라 상명하복식으로 이루어지던 친박의 의사결정 시스템도 완전히 와해된 것으로 보인다. 박근혜가 영향력을 행사 했다면 김재원-유영하 간에 내부 교통정리가 쉽게 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친박 후보인 김진태가 강원도지사 경선에서 승리해 아직 영향력이 일부 존재한다고 보긴 한다.

10. 제8회 전국동시지방선거

강원도지사 후보에 김진태, 충청남도지사 후보에 김태흠, 대전광역시장 후보에 이장우, 인천광역시장 후보에 유정복이 공천되고 4명 모두 당선됨에 따라 친박의 명맥이 이어지게 됐다.[50] 그러나 정작 박근혜가 직접 밀어준 유영하 예비후보는 비박계 홍준표 의원에게 밀려 낙천됐다.

국민의힘 창당과 윤석열 정부 출범 이후 박근혜 전 대통령은 사면이 되었을 뿐, 특별한 이슈가 되지 못하는 상태이다. 국민의힘의 온건보수화와 새롭게 등장한 친윤[51] 세력으로 인해 현 시점에서 해당 계파의 의미는 간판만 유지될 뿐 사실상 사라졌다 봐도 과언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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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국민의힘 3차 전당대회 이후

국민의힘의 3차 전당대회에서 과거 핵심 친박계이자 자유한국당의 대표였던 황교안이 대표 후보로 나왔으나, 천하람에게도 밀리는 4위로 낙선하고 말았다. 이로써 친박극우계는 이준석계보다 당 내 장악력이 약해졌다는 것만 증명하고 말았다. 다만 황교안에게 완벽하게 친박들이 뭉쳤다고 보긴 힘들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황교안은 박근혜의 탄핵 당시 미온적한 태도로 일관했고, 자유한국당 대표 시기에도 박근혜를 크게 옹호한 적은 없었다.[52] 오히려 4.15 총선에서 압도적으로 패하고 몰락하자 친박과 부정선거를 믿는 극우층 팔이를 한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박근혜 정부 시절 경제부총리를 역임하였고 친박계의 좌장이라고 불리는 최경환이준석을 비롯한 비윤계와 회동을 가진 모습이 포착되며, 친박계가 비윤세력과 연합하여 부활을 노리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예측이 나왔다. 그러나, 양쪽 모두 이러한 의견에 대해 단순 식사자리일 뿐이라며 부정적인 입장을 밝혔다.

그런데 오히려 김기현의 박근혜 생가방문 후 박근혜가 국민의힘을 총선때 도와준다고 말한 것에 따라 # 친윤과 연합 또는 흡수 가능성이 커졌다.


[1] 김영삼대통령이 자택에 찾아온 상도동계 인사들한테 "갱상도 말고는 다 떨어질끼다"라고 일갈했다는 에피소드가 있다.[2] 당시 선거직전 언론에선 영남과 기타 몇몇 지역구에 비례대표 합쳐서 80석 수준으로 예상했다.[3] 얼마 지나지 않아 대통합민주신당으로 흡수된다.[4] 당시 고건 전 총리가 불출마 선언을 하면서 여권에선 비노인 정동영과 실세총리 이해찬, 후일 참여계의 수장이 되는 유시민이 대권 전면에 나서게 되었다. 하지만 당시 이해찬은 잦은 골프 회동 때문에 민심이 좋지 않았고, 유시민은 당내 계파가 약했기에 결국 호남 출신의 정동영이 대선후보가 되었는데, 때문에 사실상 친노의 지원을 받지 못한 반쪽짜리 대선후보가 되고 말았다.[5] 당시 친박계의 분노가 어느 정도였나면, 친이계 이방호를 떨어뜨리겠다고 친박계가 대놓고 민주노동당의 강기갑 후보를 지원하였다! 결국 이방호는 178표차이로 낙선한다.[6] 참고로 친박연합의 대표는 박정희의 조카인 박준홍이었는데, 이후 비리가 드러나 나가리되었다.[7] 참고로 미래희망연대는 지방선거에 불참하였다. 그래서 이 두 당이 약간의 반사이익을 본 것.[8] 김태호김문수, 임태희, 정몽준 및 친이계의 좌장 이재오까지 나섰지만 모두 박근혜에게 압살당했다. 이후 김태호는 친박계로 전향했다.[9] 전당대회에서 대표최고위원과 최고위원을 선출한다.[10] 2002년 5월부터 2003년 초까지 한나라당 대표최고위원을 지내기도 했었다. 과거에는 박 대통령보다도 훨씬 높은 서열에 있기도 했다.[11] 한때는 친박계 좌장으로 불렸으나 세종시 수정안 논란 때 수정안을 지지하며 미묘한 사이로 벌어졌고, 19대 총선 때도 낙천하며 갈라졌다. 그나마 대선 동안엔 다시 힘을 합쳤으나, 대선 끝나고 다시 갈라져 완전히 비박계의 대표가 되었다.[12] 지역구 부여, 청양[13] 사실 성완종은 자유선진당 출신 인사이다. 합당 과정에서 이인제, 이명수 등과 같이 합류했다.[14] 더군다나 김태호 최고위원은 친이 출신이며, 이명박 정부 시기에 국무총리까지 될 뻔했던 인물이다.[15] 정당 사무총장은 자금과 인사 관리를 담당하기 때문에, 공천에 영향을 주는 모든 부분에 영향력을 끼친다. 황진하 의원은 이 시기까지는 친박이었지만, 결국 얼마 못 가서 비박으로 갔다.[16] 비박/친이/친무 인사들인 이재오, 유승민, 김세연, 김학용, 박민식, 김성태 등이 포함되었으며, 역대급 반전으로 친박계 중진인 서청원이인제가 포함되어 있었다고 한다.[17] 사석에서 "김무성 그 새X 죽여버려야 한다." 같은 발언을 했다 녹취록이 언론에 공개되었다. 그것도 총선을 한 달 앞둔 시점에서 말이다.[18] 원래 20대 총선의 새누리당 전략은 대통령의 국회심판론이었다. 박근혜 대통령이 일처리를 쉽게 할 수 있도록 국회를 심판해서 새누리당으로 국회의원을 몰아달라는 이야기. 이게 20대 총선 말기로 가면서 친박 VS 비박 대립이 너무 커져서, 친박과 비박의 사죄와 타협을 통한 반성의 정치로 변한다. 국회심판론과 비교하면 천지개벽급.[19] 후에 새누리당을 탈당해 무소속으로 당선된 유승민, 주호영 의원 등이 일괄 복당하면서 원내 제1당 자리를 되찾았다. 하지만 2016년 12월 27일 비박들이 대거 탈당하면서 99석, 두 자릿수까지 줄어들었다.[20] 협박이라는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 되려 '녹취를 한 쪽이 나쁘다'는 적반하장의 태도를 보이는 것이 몹시 어처구니없게 보일 수도 있겠으나, 사실 이런 수법은 특정 집단(예를 들어 새누리당의 주된 지지기반인 보수적 성향의 고연령층)에서는 상당히 잘 먹혀들어가는 수법이다. 사회의 공적 윤리보다는 자신이 속한 집단의 내적 논리와 이해관계, 권력관계에 더 민감하고, 합리성과 도덕적 원칙에 따라 문제를 해결하기보다는 힘 있고 빽 있는쪽이 유리하다는 식의 사회상에 익숙한 사람, 그리고 특히 그런 사람들 중에서도 자신이 속한 집단에서 영향력이 강한(또는 스스로 강한 영향력을 가져야 한다고 믿는) 사람들의 경우 이런 태도를 보이는 경우가 많다. 말하자면 내부고발자에 대해 그 내부고발의 진실성이나 공익성을 젖혀두고 "배신자가 나쁘다" 식의 언플을 벌이는 것과 유사한데, 의외로 이런 논리가 종종 통한다. 당장 홍준표유승민에 대하여 살인자보다 배신자가 더 나쁘다는 어처구니없는 공격을 가함으로써 표를 끌어모으려 했던 것을 생각해 보자.[21] 게다가 여기서 문제가 된 '녹취'의 경우, 그런 고연령층에서 특히 혐오의 대상이 되는 경우가 많다는 점을 생각해야 한다. 스마트폰 등을 통해 필요한 경우 언제 어디서나 녹취, 녹화를 할 수 있는 기술 기반에 익숙하지 못한 탓에 전혀 생각도 하지 못하다가 불이익을 당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 것. 물론 녹취나 녹화때문에 곤란해 지는 경우 십중팔구 자기 딴엔 잘못을 저지르고도 별 탈 없이 지나갈 줄 알았는데 증거가 남아 문제가 되는 것이긴 하지만... 사람 마음이란게 자기 잘못에 대해 합리적으로 반성하기보다는 '녹취만 안 됐으면 아무 일 없었는데' 식의 원망을 하기가 더 쉬운 탓이다. 이 때문에 고연령층에서는 녹취나 녹화 자체에 거부감을 가진 이가 적지 않다. 과거 새누리당이 녹취자료를 증거자료로 쓸 수 없게 하는 법(녹취 자료의 참여자 전원이 동의하지 않으면 증거로 쓸 수 없게 하는 법)의 입법을 주장한 데는 이런 이유가 있는 것.[22] 이재오 전 의원은 과거 운동권의 거물로서 한땐 진보정당인 민중당의 주축 당원인 적도 있었다. 그러다 YS정권 시절인 1996년 신한국당에 들어와 보수세력이 되었다.[23] 애초 이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여야에서 나온 거국중립내각안 자체가 여/야를 막론하고 국회의원들이 박근혜 대통령을 국가운영의 주체로 전혀 생각하지 않겠다는 것을 노골적으로 보인 것이다. 심지어 하야/탄핵 소리까지 심심찮게 나오는 판국. 그리고 이루어진다.[24] 재미있는 점은 전체 300표 중 234표는 78% 수치인데, 이는 전날 발표한 모 여론조사의 탄핵찬성비율 78%랑 일치한다. 그래서 국회가 민심을 따른 것이란 얘기가 나왔다.[25] 홍준표 경남도지사도 참여했다는 기사가 있었으나, 본인이 오보라고 부정했다.[26] 심지어 당 사무처의 신뢰도 잃어버렸다. 친박 억지 충원 논란이 일어난 윤리위 문제로 당 사무처 직원들이 지도부 즉각사퇴를 요구하며 10년만에 파업에 돌입했기 때문.[27] 국회선진화법에 의해 무제한 토론을 하려면 의원 100명 이상의 동의가 필요하다.[28] 새누리당을 열렬히 지지하는 박사모와 같은 친박 극우단체는 차라리 이석기, 김제동에게 당 대표를 시키라며 반발하고 있다. 김진태, 이우현과 같은 강성 친박들과 청와대인명진 비대위원장을 탐탁치 않게 보고 있다.[29] 황교안, 이인제, 김관용 카드가 있긴 하지만 셋 다 반기문에 비하면 파괴력은 한참 떨어지는 상황이다. 그나마 여권 잠룡으로 뽑히는 유승민, 남경필, 원희룡, 정병국 같은 경우 새누리당을 탈당하여 개혁보수신당으로 합류한 상황이다.[30] 사실 이정현이 친박이라고는 하지만, 친박에서는 비주류 인사이다. 서청원, 최경환 같은 다른 친박과는 따로 노는 편. 동교동계의 박지원을 생각하면 쉽다. 그리고 지역구와 출신지도 당의 사지 중의 사지이자 민주, 진보 계열 정당의 성지 중의 성지인 호남(전남 순천)이라 당에 남아 있으면 정치 생명이 끝장날 공산이 크기 때문에 운신의 폭을 그나마 넓히기 위해 탈당했다고 볼 수 있다.[31] 지금 당장 친박을 척결하기는 어려울 수 있으나 2년 뒤 있을 다음 총선 때 친홍 - 친무에 의한 이른바 '공천 학살'이 벌어질 가능성이 컸다.[32] 애초에 지선에서 자유한국당이 참패한 이유는 비박계가 당권을 잡았기 때문이 아니라, 비박계이긴 하지만 정작 전 정권의 과오에 대해 제대로 반성하는 모습 없이 은근슬쩍 이를 감싸려나 들고, 계속되는 막말과 현 정권에 대한 발목잡기로 일관한 결과 세간의 인식이 현재의 자유한국당을 친박 세력과 다르지 않게 보았기 때문이다. 즉, 친박계가 당권을 잡는다는 건 이런 공공연한 사실을 사실상 공식화하는 것이나 마찬가지고, 당연히 세간의 인식은 더더욱 땅을 칠 수밖에 없다.[33] 말이 계파 갈등을 용납하지 않는다며 아름답게 들리는 거지 사실상 친박에 대해 추궁하거나 청산을 해야 한다는 의견들조차도 계파 갈등으로 싸잡아 취급하고 있다.[34] 1위 보수통합 54.7%, 2위 중도확장 14.8%[35] 1위 보수통합 50.5%, 2위 중도확장 12.2%[36] 참조.[37]강효상친박보다는 친홍에 더 가깝다. 유사한 사례가 송언석 국회의원이다.[38] 만일 권은희류성걸 의원처럼 대구 북구 갑으로 다시 복귀한다고 하더라도 이상길, 권은희양금희가 경선에서 붙을 가능성이 높다. 이 사례에서도 정태옥은 컷오프가 된다. 어찌되건 정태옥에게는 미래통합당 이름으로 재선에 도전하는 것은 불가능한 셈이다.[39] 일단 상도동계 출신인데다, 이명박 정부 시절 문화체육관광장관을 역임한 친이계 핵심인사, 남원정, 친유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중진 정치인으로 언급된다. 정병국이 5선이라는 점과 경기도지사에 도전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당 대표 및 총리대통령을 노릴 수 있는 상황이다. 게다가 유승민이라는 유력 대선주자와 가까운 관계를 유지한 상황이고, 원희룡과도 친하다.[40] 단, 권은희는 그래도 대구창조경제단지칠성동, 침산동, 고성동 등 도심개발을 성공하는 등 지역구 관리도 준수했고, 논란이 없었다. 그러나 정태옥은 지역구 관리를 못했다며 북구 갑 주민들에게 부정적인 평가를 받았고, 이부망천 등 논란거리가 많았다. 단순히 못했다는 수준이 아니라 대경권을 지역구로 둔 대한민국 국회의원 중 꼴찌 수준의 공약이행률을 보여주었다. 지역구 주민 입장에서는 정태옥이 차라리 아예 없는 것이 나은 상황이었다. 권은희친유계를 의도적으로 컷오프하는 사태로 인해 부당하게 컷오프 당했으나 정태옥친박 행위, 지역구 관리 미비, 그리고 결정적으로 이부망천으로 컷오프당한 것이다.[41] 그러나 윤상현은 현재는 탈박 행보도 보이는 등, 진성 친박으로 보기에는 애매해졌다.[42] 그러나 여주시·양평군경기도 치고 60% 중후반의 득표율로 국민의힘 정병국 국회의원을 당선시킨 곳인만큼 보수세가 강한데, 김선교본인이 자초한 논란들로 10% 미만으로 격차를 줄여버렸다. 더 충격적인 것은 상대는 외지인인 최재관이었다는 점과, 미래통합당 창당 이후에는 김선교 지지율과 최재관 지지율이 동률이었다는 점이다. 게다가 정병국이 5선 할 동안 쌓아놓은 지역 내 지지기반은 약화되었고 김선교정병국을 비하한 결과 그는 정병국의 지지를 받지도 못했고, 당협위원회 내 갈등은 더 심해졌다. 물론 현재는 정치자금법과 공직선거법 위반으로 국회의원직 상실형을 받을 가능성이 높아졌고, 지역구 내 평이 매우 나쁜 편에 속한다.[43] 결정적인 게 문재인 정부에서 다소 친화적인 반응까지 보였다. 의정 연설에서도 악수를 한 장면이 포착되었다던가, 해외 순방까지 따라간 걸 보면 사실상 친박 아이콘에서 탈출했다는 분석까지 따라오고 있다. 현재는 비박계로 분류된다.[44] 특히, 친박계에서 배신자라고 낙인찍고 민주당 못지않게 막말을 퍼붓는 대상이던 유승민에게 "탄핵의 강을 건널테니 돌아오라" 라고 한 사람중에 하나가 바로 윤상현이다. 윤상현 본인도 "나는 홍준표 때도, 황교안 때도 열심히 했고 그때마다 친홍, 친황이라더니 왜 또 친박이라고 컷오프를 시키냐?"라면서 반박한 걸 보면 알겠지만, 현재는 친박색이 짙지 않다. 여전히 박근혜를 언급하는 등 아주 친박이 아니라고 할 수는 없지만, 어쨌든 따로 움직이는 친박에 가깝다고 봐야 한다. 애초에 당내 주류 친박 핵심이었으면 윤상현이 컷오프 될 일은 없었을 것이다. 게다가 윤상현은 보수 성향의 후보가 둘로 나뉘어지는 상황에서 당선되었고, 국회에서는 몰라도 지역구민들에게는 호평을 받는 상황이다.[45] 그런데 그 곽상도조차도 김종인의 박근혜 대통령의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에 대한 사죄에 동의하면서 오히려 친박으로부터 배신자라고 욕 먹는 상황이다.[46] 사실 권영세도 초선때부터 친박과는 거리가 멀었고, 남원정소장파와 가까웠다. 게다가 친박, 친이 간 갈등을 중재하는 역할을 많이 했고, 친박으로 분류될 때도 유승민과 같이 온건파 수준이었다. 단지 박근혜 비대위 시절 사무총장과 주중대사를 역임하면서 친박으로 분류되었다. 현재는 친박보다는 친박과 반대되는 유승민, 정병국과 더 가깝다. 21대 총선 당시에도 유승민에게 가장 먼저 지원을 요청했고, 현재 채용한 비서도 김영삼의 손자이자, 정병국 비서실 인턴을 한 김인규이다.[47] 미래통합당이 국민의힘으로 다시 태어난 이후 박형준, 유승민, 오세훈 등이 사면론을 꺼내들기는 하였으나 사면이라는건 그래도 그 대상이 죄가 있음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그러나 아예 한술 더 떠서 탄핵 자체를 부정하는 발언을 국민의힘 출범 이후 공개적으로 한 의원은 서병수만이 유일하다.[48] 조대원 외에는 최고위원 후보자 중 대경권 기반 후보는 이 둘이 유일하다.[49] 제8회 전국동시지방선거/광역자치단체장/경선 참조[50] 이들 중 김진태를 제외한 3명은 친윤이고, 김진태는 친윤의 황상무 전 앵커에게 밀려 컷오프됐다가 단식투쟁이라는 강력한 카드와 이준석 대표의 재경선 결정으로 구사일생하여 100% 자력으로 공천을 받은 비윤이다.[51] 비박과 친박 구도를 초월하여 새롭게 등장했다. 여러 계파들의 일부가 친윤으로 뭉치고 나머지 계파 구성원들은 반윤으로 형성되었다. 친박 역시 윤석열의 정계 입문 이후 친윤과 반윤 둘로 갈라진 상태이다. 가령 친박계였던 서병수김용판은 반윤 기조를 보이고 있다. 하기사 김태흠 말마따나 계주는 감옥 갔다왔고 총무도 존재하지 않는 구심점이 없는 상태이니.[52] 그도 그럴 것이 탄핵이 된지 불과 몇년밖에 지나지 않은 시점에, 자신이 보수의 최강 대권주자로 여겨지는 상황에서 굳이 박근혜를 옹호할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