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18-10-18 13:40:38

초한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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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 中國歷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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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
통일 진 초한쟁패기
초한 전쟁
楚漢戰爭
파일:external/img1.voc.com.cn/201208241746384344.jpg
시기 BC 206 ─ BC 202
장소 중국 전역
원인 진나라 멸망 후, 유방항우의 패권 전쟁
교전국 한(漢) 서초(西楚)
지휘관 유방
한신
장량
소하
조참
팽월
영포
번쾌
주발
왕릉
하후영
역상
관영
노관
기신
부관
근흡
항우
범증
계포
용저
종리말
장한
사마흔
동예
위표
환초
결과 한(漢)중국 통일
영향 전한 시대의 개막, 고대 중국 세계의 확립.

1. 개요2. 진나라의 통일, 그리고 붕괴3. 진승·오광의 난4. 패왕 항우5. 항우의 최후6. 토사구팽7. 결말8. 관련 어록9. 사건 목록

1. 개요

기원전 206년 진나라의 멸망 이후 유방의 한(漢)과 항우의 서초(西楚)가 대립한 끝에 기원전 203년 12월 항우의 패배와 죽음, 그리고 한나라의 천하 통일로 끝나는 전쟁. 초한쟁패(楚漢争覇)라고도 하며, 중국에서는 '초한상쟁(楚漢相爭)'이라는 표현도 많이 쓰인다.

당대 중국의 모든 세력이 얽혀들어간 그야말로 대전 중의 대전이며, 진나라 멸망 후 당대 최강자였던 항우는 여러 차례의 괴물같은 활약에도 불구하고 결국 패배자가 되었다. 이로 인해 유방은 평민 출신으로는 중국 역사상 최초로 황제의 자리에 오르게 되는 초유의 업적을 이루게 되었다.

워낙 항우와 유방의 존재감이 막대하여 그 두 명이 중국 땅을 갈라놓고 붙은 문자 그대로 2파전으로 이해하는 경우가 많으나, 실제로는 항우와 유방 외에도 여러 왕들과 독자 세력들이 존재하고 있긴 하였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그러한 군소 세력들도 모두 항우의 세력권 아래 있거나 유방에게 협력하거나 했기 때문에 양대 세력의 결전으로 보아도 큰 무리는 없다. 중국 역사상의 분열기는 많긴 하지만 이렇게 완전하게 양대 결전의 사례는 상당히 특이한 경우다.[1]

또한 항우와 유방은 출신 계급부터 해서, 정책에 대한 마인드, 특징적인 능력, 성격, 모든 것이 그야말로 완벽하게 다른 존재였다. 이 서로간의 강렬한 개성으로 인해 이 전쟁은 인기도 많은 편이며, 삼국지연의와 마찬가지로 초한지와 같은 소설이 존재한다. 또한 이러한 항우와 유방의 강렬한 개성, 그리고 한삼걸(漢三傑) 등의 존재로 인해 중국사의 여러 전쟁 중에서도 수많은 사람들에게 회자되는 대결이기도 하다. 특히 한국에서는 장기가 초한 전쟁을 다루었다.

다만, 초한 전쟁과 초한지 자체는 인지도가 높아도 정사 삼국지와 삼국지 연의에서 나타나는 이야기의 차이점에 대해서는 이제 많이들 알고 있는데 비하여, 실제 역사 기록상에 나타나는 초한 전쟁과 소설인 초한지의 내용에 대한 차이점은 모르는 경우가 잦다.

본 항목에서 다루는 내용은 실제 역사 기록상에서 나타나는 초한 전쟁에 관한 내용이다. 소설상의 내용은 초한지 항목을 참조하자.

2. 진나라의 통일, 그리고 붕괴

춘추시대(春秋時代)와 전국시대(戰國時代)의 대혼란을 겪은 중국은 마침내 (秦)의 손으로 인해 하나로 통일 되었다. 법가(法家)의 학문을 받아들이고 원교근공의 외교 정책을 받아들여 열국을 분열시킨 진나라는 백기, 왕전, 몽염 등의 장수를 앞세워 전쟁에서 압도적인 힘을 발휘했다. 기원전 230년에는 먼저 한(韓)나라를 멸망시켰고, 불과 10년밖에 안 되는 사이에 한(韓)나라 · 조(趙)나라 · 위(魏)나라· 초(楚)나라 · 연(燕)나라 · 제(齊)나라의 순으로 6국을 통일하였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Qinshihuang.jpg
시황제(始皇帝)
중국의 통일이라는 전대미문의 대업적을 이룬 진시황은 황제로 즉위하며 제국의 시대를 열었고, 군현제(郡縣制)를 실시하여 전국을 36개 군으로 하고 각종 통제 정치를 단행, 획일적인 문화를 창조하였다. 이른바 중앙 집권적 전제 군주제가 완성된 것이다.

시황제는 다시 몽염을 파견하여 북쪽의 흉노를 쫓아내어 만리장성을 구축하고 남쪽은 임효와 조타를 보내 광둥성(廣東省) · 광시성(廣西省)에서 베트남 북부까지 정복하였다. 진나라의 위명은 해외에까지 뻗쳐, 중국의 다른 이름을 지나(支那)[2] 혹은 진단(震旦) 등으로 부르게 되었는데, 이는 진(秦)이라는 음이 와전한 것이다.

그러나 진나라의 천하 통일은 곧 진나라의 멸망으로 이어졌다.

시황제의 거대한 대외 정책은 결국 국민의 부담이 되는 것이어서 말년에는 민심이 동요하자 극단적인 탄압 정책이 시작되었다. 또한 전국칠웅 중 진을 제외한 다른 여섯 나라는 모두 멸망하였지만, 망국(亡國)의 주민들은 눈을 시퍼렇게 뜨고 살아 있었고 진나라는 그들을 보듬아줄 어떠한 정책도 펼치지 않았다.

결국 이러한 온갖 부담 속에 백성들의 불만은 한계 수위까지 차오르고 있었는데, 시황제의 뒤를 이어 이세 황제로 즉위한 호해(胡亥)는 아버지 보다 더하면 더했지 못할건 전혀 없는 막장이었다. 호해는 정치는 조고(趙高)에게 맡겨둔 채 막장스런 생활만 즐겼는데, 그러는 사이에도 제국은 착실하게 무너지고 있었던 것이다.

3. 진승·오광의 난

"진승이 왕이 되어 초나라는 크게 일어날 것이다.(大興楚, 陳勝王)"
"공(公) 등은 모두 기한을 넘겼으니 참수를 당할 것이고, 가령 참수가 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수(戍) 자리 서면서 죽는 자가 열 명 가운데 진실로 여섯 일곱 명일 것이다. 또 장사(壯士)란 죽지 않는다면 그만이지만, 죽는다면 큰 이름을 드러내야 할 뿐이다. 왕(王), 후(侯), 장(將), 상(相)의 씨가 어찌 따로 있단 말이냐!"[3][4]

상앙(商鞅) 이래 진나라의 법치주의는 진시황의 시대에 이사(李斯)를 거치면서 절정에 달했다. 법률은 무엇보다도 가장 위였고, 이는 지나치게 가혹한 면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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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부들을 선동하는 진승
시황제가 죽은 이듬해인 기원전 209년, 하남성 출신인 진승(陳勝)은 자신의 동료인 오광(吳廣) 등 징용된 900여명과 함께 현재의 베이징 부근인 어양(漁陽)으로 향하고 있었다. 일행이 대택향(大澤鄕)에 이를 무렵, 마침 큰비가 내려 도로가 끊어지고 말았다. 이렇게 되자 별수 없이 발이 묶이게 되었는데, 당시 진나라의 법률로는 목적지까지 정해진 시간 안에 도착하지 못하면 무조건 목을 베어버리게 되어 있었으니, 어차피 도망쳐도 죽고 늦게 가도 죽게 되는 상황이 되자 진승과 오광은 결국 에라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인부들을 선동하기 시작했다. 진승은 장초(長楚)라는 국호를 세우고 왕위에 올랐다.

만일 그렇게 가혹한 법률이 없었다면 진승·오광의 난은 일어나지도 않았을 것이다.[5][6] 또한, 진나라의 지배력이 강고하다면 진승과 오광이 들고 일어났다고 해도 모기가 물어대는 수준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진승과 오광이 들고 일어서자 전국에서 이에 호응하는 움직임이 퍼져 나갔다.

당시 진나라 36개 군과 그 밑의 현에는 중앙에서 파견된 관리들이 있었다. 혹독한 관리들에게 고통 받던 백성들은 모두 들고 일어나 그들을 죽이고 난에 동참하기 시작했다. 반란군은 순식간에 어마어마한 규모로 불어났다.

그러나 진승은 결국 일개 농민 출신이었기 때문에 무수한 반군 세력을 통합하여 하나로 통솔할 수 있는 권위가 없었다. 육국의 후손들은 진승에게 굳이 복종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고, 부하들도 점점 진승을 이탈하게 된다.

결정적으로, 함곡관을 넘어 진나라의 수도 함양으로 진군하는 주문(周文)의 병력을 진나라의 명장 장한(章邯)이 격파하면서 진승의 지위는 크게 흔들리게 된다. 기세를 탄 장한은 대대적인 반격을 가하였다.

진승과 오광의 난은 결과적으로 진승의 죽음으로 좌절됐다. 하지만 이미 진 제국은 중국 전국의 통제력을 상실한 상태였다. 그리고 항우가 이끄는 초(楚)의 부흥군이 장한의 군대를 격파하면서 진은 멸망의 기로에 놓이게 된다.

4. 패왕 항우

항우는 서초(西楚)의 패왕(覇王)을 자칭하며 팽성에 도읍을 두고 초 회왕 미심을 황제인 의제로 높였으나 진을 멸한 후에는 침현으로 추방 후 살해하였다. 항우는 각지의 유력자들이 세운 나라들을 초나라 아래에 편입하고 자신을 따라 함께 진나라를 멸한 장군들을 각지에 봉건하여 봉건제를 부활시켰는데, 봉건은 다음과 같이 이루어졌다. 세부 사항에서 보다시피 문제가 많은 조치였다. 항우는 주로 자신에 협력한 세력에 좋은 땅을 분봉했고, 자신에게 협력하지 않은 세력은 그 지방의 중심지에서 벽지로 쫒아냈기 때문에 봉건으로 인한 분쟁이 수없이 발생했다.
  • 한왕(漢王) 유방(劉邦): 한중, 파, 촉 일대. 수도는 남정.
  • 옹왕(雍王) 장한(章邯): 함양 이서. 수도는 폐구(지금의 싱핑 시 소재).
  • 새왕(塞王) 사마흔(司馬欣): 함양 동쪽에서 황하 사이. 수도는 약양.
  • 적왕(翟王) 동예(董翳): 상군(上郡) 전역. 수도는 고노(지금의 옌안 시 소재).

이상은 옛 진나라의 영역을 갈라 받은 제후들이다.
  • 대왕(代王) 조헐(趙歇)
  • 상산왕(常山王) 장이(張耳): 원래 장이는 진여(陳餘)와 함께 조헐을 조왕(趙王)으로 옹립하고 있었다. 그런데 항우는 장이가 자신과 함께 진을 공격한 공적이 있다 하여 조헐을 대왕으로 쫓아내고 장이에게 조나라 땅의 대부분을 주어 상산왕에 봉했다. 후(侯)로 격하된 진여는 이에 분노하여 장이를 공격하고 조헐을 다시 조왕으로 옹립한다. 결국 갈 곳 없던 장이는 유방에게 붙어버려서 유방의 패업에 큰 역할을 하게 된다.

이상은 옛 조나라의 영역을 갈라 받은 제후들이다.
  • 구강왕(九江王) 영포(英布): 구강, 형산, 임강은 오초(吳楚) 지역이다.
  • 형산왕(衡山王) 오예(吳芮): 영포의 장인.
  • 임강왕(臨江王) 공오(共傲): 영포의 부하.

이상은 서초패왕 항우와 함께 옛 초나라의 영역을 갈라 받은 제후들이다.
  • 요동왕(遼東王) 한광(韓廣): 원래 연왕이었는데 장도에게 밀려났다.
  • 연왕(燕王) 장도(臧荼): 항우를 따라 관중에 들어갔으며, 연왕 한광을 요동왕으로 몰아낸 다음 공격해서 완전히 멸망시킨다. 이후 한신에게 항복한다.

이상은 옛 연나라의 영역을 갈라 받은 제후들이다.
  • 교동왕(膠東王) 전시(田市): 원래 제왕으로 전영(田榮)에게 옹립되었으나 항우에게 교동왕으로 밀려났다. 이 조치에 분노한 전영은 항우 편을 드는 전시를 살해하고 자신이 제왕이 된다. 항우는 제를 공격해서 전영을 죽였으나 유방의 공격으로 제대로 진압하지 못했고 결국 동생 전횡(田橫)이 전영의 아들 전광(田廣)을 제왕에 모시고 끝까지 싸운다.
  • 제왕(齊王) 전도(田都): 항우에게 협력한 장군이라 제왕에 봉해졌다.
  • 제북왕(濟北王) 전안(田安): 제의 왕족으로 항우와 친했기 때문에 제북왕에 봉해졌다.

이상은 옛 제나라의 영역을 갈라 받은 제후들이다.
  • 서위왕(西魏王) 위표(魏豹): 사촌형 위구(魏咎)가 진승 오광의 난 때 위왕이 되었으나 장함에게 패배해 죽었다. 항우에게 협력하여 위왕이 된다.
  • 은왕(殷王) 사마앙(司馬卬): 하내(河內) 지방을 봉지로 삼아 은의 옛 수도 조가를 도읍으로 했다. 여담으로 하내 사마씨 일족, 즉 사마의의 조상이라고 한다.

이상은 서초패왕 항우와 함께 옛 위나라의 영역을 갈라 받은 제후들이다.
  • 하남왕(河南王) 신양(申陽): 낙양에 봉해졌다.
  • 한왕(韓王) 정창(鄭昌): 본래 한왕으로 봉했던 한왕 성(成)[7]이 유방과 친했기 때문에 성을 죽이고 자신의 부하 장수 정창을 한왕으로 삼았다.

이상은 옛 한나라의 영역을 갈라 받은 제후들이다.

5. 항우의 최후

한과의 전투에서 언제나 승승장구했음에도 불구하고 신안대학살 등으로 민심을 잃는 등 정치에 있어서는 무지렁이에 가까운 처신과, 적들이 입을 모아 비웃을 만큼 심각했던 인사 쪽 능력 탓에 숱한 부하들이 이탈하여 유방 밑에서 항우에게 칼을 겨누고, 소하의 필사적인 보급과 팽월의 유격전으로 악착같이 버티는 한나라에 결정타를 날리지 못한 채로 실속없는 승리만 쌓아가는 도중 별동대로 출발한 한신이 북방을 모조리 평정해버리고 말았다. 결국 광무산 대치에 이르러서는 군량은 바닥을 드러내는데 적은 약해지긴커녕 오히려 천하에 항우의 적만이 남게 된 상황이 되어버리자 스스로 더는 전쟁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고 좌절한 항우는 유방 못지않은 원수지간이었던 제나라와 동맹을 맺거나, 한신을 회유하려 해보거나 유방과 화평하려 하는 등 뒤늦게 외교적 수단을 시도해봤지만 전부 실패하고, 해하 전투에서 연합군에 패배한 뒤 한군이 초나라 노래를 부르는 심리전을 피자 그나마 남아있던 군사들도 동요를 일으키고 뿔뿔이 흩어지고 만다. 항우는 그렇게 모든 것을 잃고 도망가는 신세가 된다.

이후 그때까지도 자신을 따르는 수십여 명의 초군과 함께 계속 도망쳐 오강 나루에 도착하지만 다시 고향에 돌아갈 면목이 없다는 이유로 다시 강동에서 군세를 일으켜 재기하자는 권유를 물리치고 자살한다. 항우의 패배는 한이 중원의 패자가 되었음을 의미했다. 얄궂게도 초나라가 항복하는 와중에 한때 항우의 봉토였을 뿐인 노나라만이 끝까지 유방에게 저항했으나, 항우의 수급을 보여주며 항우를 노왕으로서 안장할 것을 약속하자 결국 항복하였다. 마침내 긴 싸움을 끝낸 유방은 여러 가지 감정이 북받쳤는지 항우의 장례식에서 울었다고 한다.

6. 토사구팽

항우가 봉건한 왕들 가운데 회남왕 영포, 형산왕 오예, 연왕 장도는 유방에게 투항했다. 초한 전쟁 과정에서 유방은 유력한 군벌들을 왕으로 봉건하였는데, 초왕 한신, 양왕 팽월, 조왕 장이, 한왕 한신 등이었다. 이렇게 천하에는 유방을 포함하여 8명의 왕이 있게 되었는데, 고제 5년(기원전202년)에 다른 7명의 왕이 유방에게 황제의 존호를 바치는 형식으로 유방의 우위를 인정하게 된다. 굵은 글씨가 유방에게 황제의 존호를 바쳤던 7왕이다.
  • 초왕(楚王) 한신(韓信): 제왕(齊王)에서 바뀌어 봉해졌다. 기원전 201년 회음후로 격하되고, 기원전 196년 진희의 반란에 연루되어 사형에 처해진다.
  • 회남왕(淮南王) 영포(英布): 구강왕(九江王)에서 봉국의 이름이 바뀌었다. 한신, 팽월이 차례차례 숙청되자 기원전 195년 반란을 일으켰다 진압당해 사망한다. 그러나 유방 또한 영포 진압전 때의 부상으로 그해 사망한다.
  • 양왕(梁王) 팽월(彭越): 기원전 196년 진희의 반란에 연루되어 사형에 처해진다.
  • 한왕(韓王) 한신(韓信): 유방이 처음으로 봉한 제후왕. 원래 전국시대의 옛 한나라 땅에 세워졌으나, 태원을 한국으로 개칭한 다음 옮겨 봉해졌다. 영내로 침입한 흉노와 화친을 시도하였으나 이것이 한 제국의 의심을 사게 되자 오히려 흉노로 투항하게 된다. 한나라를 공격하다가 회음후 한신과 똑같은 196년에 전사한다.
  • 조왕(趙王) 장오(張敖): 초한 쟁패기 중에 왕위 계승을 받은 드문 사례로[8] 2대 조왕. 조경왕 장이의 아들이며 유방의 딸 노원공주(魯元公主)와 결혼하여 유방의 사위가 된다. 기원전 200년 유방이 흉노에게 참패하고 돌아올 때, 식객 관고(貫高)가 유방을 암살하려는 음모를 꾸민 것에 연루되어 선평후(宣平侯)로 강등당한다. 딸 장언(張嫣)은 혜제의 황후가 되었고, 아들 장언(張偃)은 여태후 시기에 노왕(魯王)에 봉해졌으나 여씨 일족이 몰락한 뒤 열후로 강등되었다. 여담으로 장오는 이 때 유방에게 자신의 측실인 조미인(趙美人)을 바쳤는데, 조미인은 유방의 아이를 임신하게 된다. 유방은 경포를 제압한 뒤 조미인에게서 얻은 아들 유장(劉長)을 회남왕으로 봉한다.
  • 연왕(燕王) 장도(臧荼): 기원전 202년 유방에게 반란을 일으켰다가 유방이 친정하여 정벌당한다. 그 아들 장연(臧衍)은 흉노로 도주했다. 유방은 친구 노관을 연왕에 봉했다.
  • 연왕(燕王) 노관(盧綰): 기원전 202년 장도를 대신하여 연왕에 봉해진다. 기원전 195년 흉노와 손잡은 것이 발각돼 흉노로 망명한다.
  • 장사문왕(長沙文王) 오예(吳芮): 형산왕(衡山王)에서 바뀌어 봉해진다.(유방을 옹립할 당시에는 항우에게 형산왕의 자리를 빼앗겼다.) 민월을 평정하러 가다가 병사한다. 아들인 오신(吳臣)이 장사왕의 지위를 이었고, 반란을 일으켰다 패배한 영포를 속여 죽음에 이르게 했다. 장사국은 이성 제후국 가운데서는 유일하게 존속하여 오예의 후손이 봉해졌는데, 기원전 157년 오차(吳差)가 자손이 없어서 죽을 때까지 존속한다. 여담으로 오예의 무덤은 나중에 손권에게 도굴된다(...).

이로서 한 제국이 성립하게 되지만, 이런 제후왕들은 하나하나 토사구팽당하고, 유방은 제거한 제후 대신 친척인 유씨로 제후를 교체한다.
  • 초원왕(楚元王) 유교(劉交): 유방의 동생으로 형제 중 막내. 기원전 201년 초왕 한신이 회음후로 격하되면서 초나라 서쪽을 받고 초왕이 됐다.
  • 형왕(荊王) 유고(劉賈): 유방의 사촌 형. 기원전 201년 초왕 한신이 회음후로 격하되면서 초나라 동쪽을 받고 형왕이 됐다.
  • 오왕(吳王) 유비(劉濞): 유방의 조카로 아래 나오는 대경왕의 아들. 기원전 195년 형왕 유고가 영포에게 살해당해 옛 형나라 땅을 받고 오왕이 됐다.
  • 대경왕(代頃王) 유희(劉喜): 유방의 작은형. 별명은 유중(劉仲). 다른 동성 제후왕과 달리 이성 제후왕을 대신해서 봉해진 것이 아니고, 기원전 201년 한왕 한신과 함께 흉노 방비를 위해 봉해졌다.
  • 제도혜왕(齊悼惠王) 유비(劉肥): 유방의 서장자. 기원전 201년 한신의 옛 제나라에 봉해졌다.
  • 조은왕(趙隱王) 유여의(劉如意): 유방의 서자. 처음에는 흉노의 침입을 받고 달아난 큰아버지 대경왕 대신 대나라에 봉해졌다, 기원전 198년 유방 암살에 연루된 조왕 장오 대신 조나라에 봉해졌다.
  • 대왕(代王) 유항(劉恒): 유방의 서자. 기원전 196년 진희의 난이 평정되면서 대나라에 봉해졌고 한신의 한나라까지 아울러 받았다. 후의 한문제.
  • 양왕(梁王) 유회(劉灰): 유방의 서자. 기원전 196년 죽은 팽월 대신 양나라에 봉해졌다. 시호는 공(共)이고, 조나라로 옮겨졌기에 조공왕(趙共王)이다.
  • 회양왕(淮陽王) 유우(劉友): 유방의 서자. 팽월이 죽으면서 회양군을 받아 회양왕이 됐다. 시호는 유(幽)이고, 조나라로 옮겨졌기에 조유왕(趙幽王)이다.
  • 연영왕(燕靈王) 유건(劉建): 유방의 서자. 기원전 195년 흉노로 달아난 노관 대신 연나라에 봉해졌다.
  • 회남여왕(淮南厲王) 유장(劉長): 유방의 서자. 기원전 195년 죽은 영포 대신 회남국에 봉해졌다.

한고조가 죽을 때까지 남았던 유씨가 아닌 제후왕은 인구도 적고 민월, 남월에서 완충지 역할을 하던 장사국의 오예(吳芮)뿐이다. 한편 한나라에 형식적으로 복속된, 한족이 아닌 월족(越族)이 세운 이민족 왕조도 있다. 물론 이 왕조는 유씨가 아니다.
  • 민월왕(閩越王) 무제(無諸): 지금의 절강성 남부. 월족(越族)의 왕으로 항우가 왕으로 봉해주지 않아 유방을 지원했기 때문에 왕으로 봉해졌다. 자손은 동해왕(東海王), 동월왕(東越王) 등으로도 봉해졌다.
  • 남월왕(南越王) 조타(趙佗): 지금의 복건성과 베트남 북부 지역. 조타는 본래 진나라의 장수였으나 남월족과 동화되어 남월왕을 자칭하였다. 베트남의 왕조로 여겨진다.

그외에도 중원땅에서 왕으로 임명된 이성왕 공신이 한명 더 있었으나 이 공신은 유방에게 왕으로 임명되기 무섭게 왕위를 포기하고 유방과 여후 사이에 난 노원공주에게 하사받은 영토를 바쳐서 토사구팽을 피하고 고향에서 편안한 여생을 보냈다.

7. 결말

위에서의 설명도 그렇고 항우 항목을 봐도 그렇지만 항우의 행적은 통치자로서 볼 때 안 좋은 점만 다 모아놓았다. 사실상 군주로서는 폭군 중의 폭군으로 결국 그것이 그대로 돌아와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지만 항우는 죽을 때까지 자기가 잘못한 것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했고 하늘 탓만 했다. 그리고 당대는 물론 후대 사람들도 항우가 진 건 항우 자신의 잘못 때문이라고 까고 있다. 영원히 고통받는 항우

항우는 멸망하고, 이성 제후왕들의 세력도 한풀 꺾여 한제국이 성립되었다. 하지만 사실 새롭게 성립된 한 제국은 오히려 과거의 진제국보다 매우 허약한 국가가 되어 있었다.

진 제국의 멸망으로 통치 체계가 파괴되었고, 전란과 학살로 상당한 수의 인구가 소멸했으며 중국을 떠나 해외로 이탈한 인구도 상당히 많을 것으로 추측되는데 실제로 사기 조선 열전을 보면 연나라제나라, 조나라 출신 유민들이 조선으로 이주했다는 기사가 나오며, 덕택에 그동안 연나라와 진나라에게 눌러지냈던 고조선이 그 덕을 톡톡히 보며 연나라 시절에 상실당했던 영토도 상당수 회복하며 세를 다시 떨치게 되면서 중흥기를 맞았다. 위진남북조시대고구려가 대대적으로 영토를 확장해나가며 비록 고국원왕 때같이 굴욕을 당했던 시절도 있었지만 전성기를 누렸던 것과 비슷한 이치다. 또한 조선의 체제가 위만조선으로 바뀌게 된 계기도, 이 유이민 세력 중 위만 세력을 조선이 흡수하고 위만 세력이 조선의 정권을 차지하면서 벌어진 일이었다.

전국시대-진나라 시기의 인구는 2천만으로 추산되는데, 진승·오광의 난을 시작으로 초한 전쟁이 종결되는 10여 년 동안의 전란 사이에 사라진 인구는 그 가운데 70%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그 결과 한고조 치세에서 인구는 고작 500만 명 정도로 추산되고 있다.#[9]

여기에는 물론 전란의 영향도 있겠지만, 항우가 저지른 잔혹한 학살이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는데, 신안대학살 등 기록에 명확하게 남은 숫자만 합쳐도 당시 인구의 수% 정도는 항우의 주도 아래 학살되었다고 볼 수 있다. 중국의 인구는 항우가 정권을 잡은 뒤 격감일로를 걷고 있었다. 기록이 부족해서 그렇지, 신안대학살 같은 만행을 저지른 것을 보면 항우는 거의 전국시대백기 같은 수준으로 각지에서 학살을 자행한 것으로 보이는데, 그나마 백기는 병사가 될 수 있는 젊은 장정을 대상으로 학살을 자행했지만, 항우는 더 잔인해서 마을을 점령하고 민간인도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학살했다. 그나마 백기는 장평대전의 고고학적 유물 발굴 결과 전사자를 학살자로 부풀려 과장했거나, 혹은 학살이 있었더라도 수십만에 달하는 학살은 없었으리라고 보는 의견이 대두되고 있다. 더군다나 항우처럼 작정하고 학살을 하지 않았을 뿐이지, 유방도 팽월을 이용해 전쟁 내내 초나라 후방 지역을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으며 지속적으로 곡식을 약탈했다. 그나마 한군이 지켜낸 관중에마저 대기근이 돌았으니, 그야말로 안전한 곳이 단 하나도 없이 천하가 시체로 가득한 인외마경이었다.

초한 전쟁은 비록 짧은 기간이긴 했지만 이전 시대의 중국에서 그 전례를 찾아볼 수 없었던 잔혹한 학살이 마구 벌어진 시대였다. 심지어 전란이 격심했다는 춘추전국시대마저도 민간인이 사는 성읍, 그것도 항복한 성읍을 상대로 무자비하게 학살을 벌이는 일은 극히 드물었는데, 상식적으로 학살은 무의미하게 인구를 소진시키고 국력을 낭비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춘추시대에는 패배한 나라도 쉽게 멸망시키지 않고 신사적으로 벌어지던 전쟁이, 전국시대에는 서로의 나라를 짓밟고 멸망시키게 되었고, 초한 전쟁에서는 감정적 대립으로 무자비하게 민간인을 학살하는 지옥도가 도래한 것이다.

진 제국의 멸망과 그로 인한 국가 시스템의 붕괴 탓으로, 기근도 여기에 겹쳐서 전 중국의 민생이 처참한 상태로 추락했다. 초한 전쟁 말기에 이미 전란의 폐해가 확연히 드러나게 되는데, 진나라의 본거지로서 풍요로운 생산력을 자랑했던 관중 땅이 전란과 기근이 지속된 끝에 급기야 소하가 보통은 병역 의무를 짊어지지 않던 노인, 청소년까지 징병해서 긁어모은 병력을 유방에게 지원군으로 보내야 했을 정도로 황폐화 되어버렸던 것이다. 게다가 문제는 관중 지방은 여전히 그나마 상황이 나은 지방이었다는 것이다. 직접적으로 학살에 노출된 다른 지방은 말할 것도 없다.

결국 전쟁이 끝난 뒤 경제와 민생 상태는 최악이었다. 사마천사기에도 전한 초에는 장군들조차 이 없어 를 타고 다녀야 했다는 증언이 기록되어 있을 정도. 유방이 진평에게 3만 호가 넘는 크고 좋은 땅을 내렸는데 그간 하도 사람들이 도망가고 죽어서 막상 남아있는 백성들은 기껏해야 5천 호 수준밖에 안 되었다는 일화도 있다. 진말의 혼란과 초한 전쟁은 중국에 막대한 피해를 남겼으며, 겨우 성립된 한 제국은 경제적으로나 군사적으로나 매우 허약한 국가였다. 결국 북방의 흉노에게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으며 한고제 유방은 흉노에게 참패하여 조공과 인질을 바치고 굴욕 외교를 감수해야 했다. 따지고 보면 위만조선도 한나라가 허약했기 때문에 적극적인 확장을 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당연한 얘기긴 하지만, 당초 약속했던 것과 달리 악법삼장 외의 다른 법을 진짜로 다 밀어버리지는 않았다. 한나라의 법률과 제도는 많은 부분이 진나라를 거의 그대로 계승한 것이었다.[10] 대신 조세법의 경우 징수액이 너무 많고 애매모호하다는 식으로 몇 번에 걸쳐서 뜯어고쳤다고도 하고,[11] 융통성 따윈 없던 진의 가혹한 법률과 달리 한고제는 비교적 유연한 통치를 펼치고 수시로 사면령을 내리는 것으로 가혹한 처벌로 고통받는 사람을 줄였으며, 진대와는 달리 전국적인 사업을 자제하였다. 도가의 무위사상을 바탕으로 백성에게 휴식을 주고 정부의 개입을 최소화함으로써 인구와 경제의 자연 회복(증가)를 기대한 것인데, 한고제의 뒤를 이은 여후 [12]혜제소제까지 이 정책의 기조가 이어지면서 생산력이 서서히 증가했다. 당대만으로는 도저히 회복되지 않을 정도로 피해가 심각했던 것이다. 조참의 일화에서도 엿볼 수 있는, 진나라의 제도를 계승하되 도가의 황로 사상에 의거한 국가 운용은 이후 한무제 때까지 전한 정치의 기반이 되었다.

진나라 시기 일시적으로 강고하게 구축되었던 군현제 역시 붕괴, 군국제로 후퇴했으며 군현제 복귀는 한무제 시기까지 기다려야 했다.

8. 관련 어록

"내가 군사를 일으킨 이래 지금으로서 8년이 되었다. 그 동안 몸소 70여 차례의 전투를 치렀고, 내 앞을 가로막은 자들은 모조리 목을 베어 죽였다. 나의 공격을 받은 성들은 모두 항복을 하였고, 나는 지금까지 한 번도 싸움에서 진 적이 없어 이로써 천하를 제패했다. 그러나 오늘 내가 졸지에 이곳에서 곤궁한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이것은 하늘이 나를 망하게 하려는 것이지 내가 싸움을 잘하지 못해서 지은 죄가 아니다."
항우
"한신, 소하, 장량 이 세 사람은 실로 인중호걸(人中豪傑)들이라고 할 수 있다. 내가 천하를 차지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 세 사람을 능히 부릴 줄 알았기 때문인 것이다. 항우는 그나마 있었던 범증(范曾) 한 사람도 제대로 쓰지 못했기 때문에 나에게 사로잡히게 된 것이다."
한고제
"항우는 현능한 사람들은 시기하고 재능 있는 사람들은 미워하며, 능력 있는 사람들은 의심하여, 싸움에서 승리했음에도 그 공을 다른 사람에게 돌리지 않고, 땅을 얻어도 나누지 않아 그 이익을 같이 누리지 않음으로 인해, 항우는 천하를 잃은 것인가 합니다."
왕릉
"참으로 애통하구나! 어린아이와 함께 일을 도모했으니 일이 이루어 질 수 있겠는가? 항왕으로부터 천하를 뺏어갈 자는 필시 패공(沛公)일 것이다. 그때가 되면 여기 있는 우리들은 그의 포로가 되고 말리라!."
범증
"항우는 스스로 공로를 자랑하고 그의 사사로운 지혜만을 앞세워 옛 것을 따르지 않았으며 패왕의 업을 이루었다고 하면서 무력으로 천하를 다스리려했다. 이에 5년 만에 나라는 망하고 그 몸은 동성(東城)에서 죽었으면서도 여전히 자기의 잘못을 깨닫지 못한 것은 참으로 그의 허물이라고 하겠다. 「하늘이 나를 망하게 한 것이지 내가 용병을 잘못해서 지은 죄가 아니다.」라고 말했으니 어찌 그가 황당무계한 사람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사마천
어떤 사람이 나에게 묻기를, "초가 해하(垓下)에서 패하여 바야흐로 죽게 되었는데, 말하기를 '하늘아!' 라고 하였다니, 믿겠습니까?" 이에 대답하였다. "한은 여러 정책을 다하였고, 여러 정책은 여러 명의 힘을 다하게 하였지만, 초는 여러 정책을 싫어하고 스스로 그 자신의 힘을 다하였던 것이오. 다른 사람을 다하게 하는 사람은 이기고, 스스로 다하는 사람은 지는 것인데, 하늘이 무슨 까닭이겠소."
양웅[13]

항우: "내가 진 건 다 운이 없어서다."
한고제, 왕릉, 범증, 사마천, 양웅: "어유, 그러셨어요?"

9. 사건 목록



[1] 다른 예를 찾자면 국공내전이 있다. 실제로 마오쩌둥이나 장제스를 유방이나 항우에 비유하는 경우도 있다. 다만 국공 내전도 만주국을 비롯한 일제의 존재가 중국사 다른 시대보다 훨씬 컸기 때문에 삼파전의 양상을 보이기도 했다.[2] 지금의 차이나라는 발음의 기원[3] 권중달의 자치통감 1권. pp403[4] 이 왕후장상 영유종호라는 문장은 일반 민중에게, 특히 난을 일으키는 민중에겐 하나의 캐치프레이즈로 작용했다. 우리나라에서도 유명한 고려 무신정권 때의 만적의 난에서도 이 말이 나오는 것을 보면 한반도로도 전래되었음을 알 수 있다.[5] 하지만 반대되는 자료도 존재하는 것이, 당시에 살았던 진 하급 관료의 무덤에서 발견된 죽간에 수록된 것은 이렇다. "부역에 징발된 인원이 도착하지 않으면 담당자에게는 2갑의 벌금. 3일에서 5일까지 늦으면 견책. 6일부터 10일까지는 1순의 벌금. 10일을 넘기면 1갑의 벌금." 참고로 갑이 순보다 높은 단위다. 이상을 볼때, 보통 알려진 것처럼 진의 법률은 수틀리면 사형이라는 단순한 것이 아니라 당시에는 나름 고도의 체계를 갖춘 것으로, 후대의 곡가필을 감안한다면 죽지는 않아도 높은 벌금을 물 수 없었든가, 분위기를 보아하니 반란이 되겠다는 진승 오광의 판단이 앞섰다는 가능성도 열어둘 수 있겠다.[6] 아래 주석에도 언급하지만, 한대의 법률은 진의 그것을 큰 차이 없이 계승한 것으로, 단지 법가 대신 도가를 표방한 무위지치의 통치로 좀 더 느슨한 적용을 행한 것이다. 진의 멸망 원인은 단순히 가혹한 법률과 그에 대항한 민중이 아니라, 고대 국가의 제한된 통치력과 고작 15년의 기간으로는 분리되었었던 전국 400년의 세풍을 수습할 수 없었으며 이를 보듬을 정책 또한 미비했음이 더 큰 이유일 것이다.[7] 한왕 신의 숙부[8] 다른 하나는 서초 측의 2대 임강왕 공위.[9] 사실 이런 경우는 70%가 모조리 절멸했다기 보다는 전후 한나라의 행정력에서 이탈한 인구가 대다수 였을 것이다.[10] 전근대 시대에는 진과 전한의 차이점을 강조했지만, 진의 재평가와 함께 발굴 자료를 바탕으로 한 연구에서는 진과 전한의 통치 체계가 큰 차이가 없다는 견해가 다수 나타나고 있다.[11] 유방은 당초에는 기존의 15분의 1로(...) 토막내려고 했다는 듯. 평민 시절에 얼마나 이를 갈았으면...[12] 취소선 그어 놓긴 했지만 사실 여후 맞다(...)[13] 양웅은 한나라 시대의 인물로 당시에 박학하다고 소문이 난 인물이었다. 이 평론은 양웅의 저서인 법언(法言)에 실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