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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본주의/기독교/개신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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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오해3. 평가4. 한국 개신교 근본주의 역사
4.1. 미국 개신교의 발전과 몰락4.2. 복음주의의 퇴조와 세대주의
4.2.1. 신복음주의(Neo Evangelicalism)의 출현4.2.2. 근본주의와 자유주의의 대결, 그리고 몰락4.2.3. 근본주의와 초기 한국 개신교4.2.4. 자유주의 신학 논쟁과 근본주의화4.2.5. 박형룡과 박윤선
4.3. 일제강점기와 개신교4.4. 해방 이후4.5. 군사정권과의 유착
4.5.1. 군사정권과 개신교4.5.2. 유신 찬양4.5.3. 전두환의 대두 이후
4.6. 군사정권 이후4.7. 2000년대 이후
5. 같이 보기

1. 개요

개신교 근본주의(Protestant Fundamentalism)에 대해 더 자세히 설명하면, 1883년 미국 뉴욕에서 개최된 모더니즘에 대한 보수주의의 대응책으로 사경회가 나왔고, 이를 요약하여 워필드(B.B Warfield)의 주도로 《근본적인 것들(Fundamentals)》소책자가 나왔으며,[1][2] 1910년~1915년 보수적인 개신교 저술가들이 <근본들: 진리를 증언함> 같은 책자를 발간하였다. 그리하여 저널리스트 커티스 리 로우스가 1920년경 "근본인 것들을 지킬 수 있다면 목숨을 걸고라도 한판 붙을 작정을 하고 있던" 사람들을 가리켜 근본주의(fundamentalism)라고 부르면서 근본주의라는 용어가 처음 사용되었다. 그 뒤로 근본주의는 늘 아무 생각 없이 비판도 없이 교리만을 최고로 여기는 개신교의 한 형태를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

논쟁은 있지만, 일단 가장 확실한 정의는 성서무오설을 지지하며 성경에 쓰여진 글자 그대로의 문장과 교리를 신도들의 삶에 강요하고 현실 정치학문에 적극적으로 적용하려는 사상이다. 물론 완전축자영감설같은 명백히 반지성주의적인 성서무오설을 지지하지 않더라도, 헌법적이고 합법적인 수준에 위배되는 수준으로 교리를 신도와 비개신교 시민에게 적용하려 한다면 근본주의의 정의에 부합한다고 할 수 있다. 이들이 주로 주장하는 사상은 축자영감설성서무오설 문서 참조.

다만, 단순 기독교 보수근본주의라고 여기는 것은 상당수 사람이 저지르는 매우 위험한 착각이다. 20세기 초반 신학자 마틴 키티의 말대로 근본주의의 태동은 그 역사가 크게 오래되지 않았다. 구체적으로 19세기와 20세기 서유럽에서 준동한 자유주의 신학이 1·2차 세계 대전의 참상으로 인해 과학과 이성, 서구 근대 문명에 긍정적이었던 모더니즘의 몰락과 더불어 나란히 퇴장하면서, 자유주의 신학의 퇴조를 자신들의 승리로 착각한 근본주의자들이 성행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미국 남부에서 세력을 확장했고, 나중에는 국수주의반공주의까지 장착한 기독교 정치세력인 기독교 우파로 발전했다. 초기에는 윌리엄 J. 브라이언의 사례처럼 신앙적으로 근본주의였을 뿐, 세속 정치에 관해서는 되려 리버럴적 관점을 견지한 인물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수구성이 강화되고 세속적으로까지 보수 우파를 편드는 현상이 일어났다.

신정통주의 교회의 경우 정치적으로 보수를 지지하더라도 자유주의 신학과 유신론적 실존주의의 논조를 받아들여서 성서무오설에 부정적이며 진화생물학을 인정한다. 그러나 해외 신정통주의 교회의 경우 퀴어신학을 인정할 정도로 신학적으로 아주 진보적인 스탠스를 취하느니만큼, 국내에도 대부분 정치적으로 진보노선을 지지한다. 다만 근본주의 성향이 강한 국내의 개신교 분위기상 신정통주의 교단인 한국기독교장로회 역시 성서비평학에 근거해서 교리 해석에 아주 조심스럽게 접근하는 등 서구권의 신정통주의 교회에 비해 다소 보수적인 편에 속한다.

2. 오해

근본주의와 정통주의, 복음주의 사이에 대한 혼동으로 오해를 하기도 한다. 또한 신학적 보수주의를 '세속적' 성격의 정치적 보수주의나 극우와 동일시하는 오해도 존재한다. 통념과는 달리 근본주의 중에서는 성경에 근거해서 해방신학이나 기독교 사회주의 혹은 아나키즘적인 주장을 하는 경우도 있으며, 인민사원 집단자살사건도 정치적으로는 사회주의에 기반을 두고 있다.

한국 개신교가 전부 근본주의라는 식의 오해도 이를 분간하지 못해서 일어나는 경우가 많다. 사실 정통주의측에서"성서의 (맥락적 해석을 통한) 근본을 지키자"는 어휘를 즐겨 사용하기 때문에 근본주의와의 구별에 있어 주의를 요하며, 또한 개혁신학적 입장에서 한국교회의 샤머니즘적 기복신앙이나 대형교회의 문제를 비판하면서 예수의 가르침에 근본을 두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스스로를 근본주의라고 자칭하기도 한다.

근본주의에 대한 기준이 애매한지라 일각에서는 조금이라도 보수적인 교리를 내세우는 교단이나 교인들을 근본주의로 몰아세우고 구한말 한국에 온 외국인 개신교 선교사가 죄다 근본주의자였다고 주장하지만, 앞서 근본주의는 구한말이 아니라 1920년대에 발호하기 시작하여 1940년대부터 폭증한 걸로 본다.[3] 구한말 개신교 선교사들도 반개신교 커뮤니티나 리그베다 위키 등에서 묘사한 것과 달리 근본주의자들은 아니었다. 한국에 온 외국인 개신교 선교사들은 한국에 철저히 동화되고 한국 민족의 고통에 동감하려고 노력하였다. 또한 이들에게 신학을 배우고 제자가 된 목사들 중에는 박형룡처럼 정통주의와 근본주의 사이에 자리잡은 사람도 분명 있었지만, 보다 유연한 신학을 견지했던 사람들도 많았으므로 한국의 초기 개신교 목사 / 신학자들이 모두 근본주의자였다고만 볼 수 없다.

이를 보면 근본주의와 보수주의를 동의어로 보는게 얼마나 어처구니 없는지 알 수 있다. 한국 개신교가 보수주의와 근본주의의 영향을 함께 받은 것은 사실이나, 이 역시 1930년대부터 혼란스러운 시대 상황 등에 의해 노골화된 것이지, 구한 말부터 개신교가 근본주의적인 성향을 띄었다고 보기는 힘들다.[4] 보수주의는 성경을 위에 두긴 해도 각 교파마다의 교리문답이나 신앙고백서를 함께 중시하므로, 성경 외에는 다 배척해야 한다고 믿는 근본주의와는 다르다. 그래서 같은 개신교 안에서도 성경침례교와 같이 킹 제임스 성서를 유독 강조하는 교파들이 근본주의로 경도되기 쉬운 반면, 오랫동안 다듬어진 교회의 전통을 간과하지 않는 루터회성공회는 보수주의까지는 갈 수 있어도 근본주의로 가기는 어려운 것이다.

자유주의나 근본주의는 반대 진영에서 명명된 것이고 당시 자유주의자나 근본주의자들이나 정통주의자들이나 신정통주의자들이나 서로가 자신들을 진정한 복음주의자로 자처했으며 이 때문에 미국 현지에선 근본주의자들이 복음주의 용어를 쓰는것에 거부감을 느껴서 1960년대부터는 근본주의자들과 분리하여 복음주의를 내세우는 입장에서는 신복음주의라는 용어를 쓰기도 한다. 물론 근본주의자들은 이러한 신복음주의자들과 분명히 다르며 신복음주의에 매우 적대적인 태도를 보인다.

가끔 몰몬교도 근본주의가 아니냐고 하는데, 이들의 교리는 일반적인 장로회, 감리회, 침례회 등의 교리와 완전히 다른 점도 상당하기 때문에 근본주의라 볼 수 없다. 애초에 몰몬경의 존재 때문에 개신교에서는 이들을 이단 취급하고, 천주교에서는 아예 이교 취급한다. 또한 인터넷에서는 신사도 운동이나 통성기도 등도 근본주의에서 유래한 것으로 잘못 서술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근본주의가 아니라 오순절주의에서 파생된 은사주의라 부르는 것이며 한국에서 강경 보수 교단에 속했거나 대놓고 근본주의를 표방하는 교회들은 오히려 신사도 운동으로 대표되는 은사주의적 요소를 철저하게 배척한다.[5]

3. 평가

근본주의 신학은 이성을 완전히 버렸기에 신학적 성과를 얻을 수 없어 정통주의 신학에 크게 밀려버렸기에 한국에서는 '제대로 된' 근본주의 교단들을 찾기 힘들며, 나오는 사례들은 진짜 근본주의라기보다는 정통주의와 오순절 운동 등의 영향을 받은 강성 복음주의에 더 가깝다. 심지어 스스로 근본주의를 자처하는 경우에도 알고보니 강성 정통주의에 더 가까운 경우가 많다. 단순히 동성애와 진화론을 배척하고 과격한 행동을 보인다 해서 근본주의라 보는 것은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일 뿐이다. 진짜 근본주의는 천동설을 주장하거나 원주율 값을 3이라고 주장하는 등, 성경의 맥락이나 비유에 대한 이해가 없이 '문자 그대로' 성경을 해석한다.

외국도 마찬가지라, 제3세계권 등에서 성장세라는 개신교 교회들은 신복음주의나 오순절 계통이지 완전한 근본주의는 아니다. 실제로 남미 오순절주의는 해방신학을 지지했던 하층민들이 대거 옮겨가는 식으로 성장했기 때문에 생각보다 일부 사회 문제(경제적 문제)에 관해서는 진보적이다.

4. 한국 개신교 근본주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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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마르틴 루터장 칼뱅종교개혁, 개신교복음주의 발생: 루터와 칼뱅은 교회의 권위를 부정하고, 성경은 교회가 아닌 개인이 읽고 해석해야 함을 주장하였다. 예수를 믿고 진실되게 따름으로써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믿음을 널리 퍼뜨렸다. 이를 기쁘고 복된 소식이라 하여 복음이라 부르고, 이러한 소식을 널리 전하여 다 함께 구원받기를 추구하는 사상을 복음주의라고 한다.
  • 미국 복음주의 개신교 발전: 많은 유럽 개신교인들이 신대륙으로 이주하였다. 이들은 '직업적, 물질적 성공 또한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므로 죄가 아니다'라는 장 칼뱅의 주장을 바탕으로 다양한 직업 활동을 하여 부를 축적하였으며, 미국의 주요 세력으로 자리잡았다. 또한, 이들은 흑인인권운동, 여성인권 운동 등 사회 개혁 활동의 주체로서 활동하였다.
  • 자유주의 신학 발전: 이성을 중시하는 계몽주의의 확산에 의해, 성경을 교리적으로 받아들이기 보다 경험적 증거, 이성을 포함한 계몽주의 과학의 방법론을 통해 성경과 신학을 해석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발생하였다. 이를 자유주의 신학이라고 한다.
  • 복음주의 왜곡, 근본주의 발생(성서무오설, 축자영감설 등 주장), 자유주의 신학과 대립하다: 모든 사람이 자유주의 신학을 받아들인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에 대한 반발로 성서의 모든 내용이 사실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생겨났으니, 이들이 개신교 근본주의자들이다. 이들은 자유주의 신학과 대립하였으나, 여러 신학교에서는 자유주의 신학이 대세를 차지하게 되었고, 근본주의자들은 독립하여 따로 그룹을 형성하게 된다. 근본주의-현대주의 논쟁 이후, 미국 개신교계에서는 외방 선교를 강조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었고[6], 특히 근본주의 외국인 선교사들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 한반도의 개신교 전파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으므로, 한국의 개신교도 주로 근본주의적 성향을 띄게 되었다.
  • 개신교의 한반도 상륙 및 토속신앙 영향에 따른 기복신앙화: 19세기 말, 20세기초, 하술된 드와이트 라이먼 무디[7]의 영향을 받은 선교사들이 한반도를 비롯한 소위 제3세계로 퍼져나갔다. 한반도의 초기 개신교 전파는 평양 및 한반도 서북 지역에서 이뤄졌는데, 이들은 기존에 갖고있던 기복신앙도교적 사상을 개신교 교리와 결합하였다. 여기서 파생된 것이 통성기도, 새벽기도, 기복신앙이다. 이들은 한국 전쟁 당시 북한의 종교 탄압을 피해 월남하였으며, 북의 공산주의로부터 피난온 이들은 생존을 위해 반공을 기치로 삼아, 국가적 지원을 받아 크게 성장하였다. 이들은 군에 적극 지원하여 장교가 되었는데, 이들이 훗날 박정희를 도와 쿠데타를 일으키는 주역이 되어 제정분리마저 모호하게 만드는 결과적폐를 낳았다. 한편, 전쟁이 끝나고 생활고를 겪던 한국인들에게 이들의 사상이 급속히 확산되어 개신교 주류의 자리로 들어가게 되어, 흔히 생각하는 한국 개신교의 주요 특성이 나타나게 되었다.

이하 내용은 '근본주의 개신교'가 어떤 과정으로 생성되어 한국으로 넘어오게 되었는가 하는 것이다. 한국의 개신교가 어떤 역사를 가졌는지는 개신교/대한민국 항목 참조.

4.1. 미국 개신교의 발전과 몰락

한국의 개신교미국을 통해 들어왔다. 미국 개신교의 역사는 18세기 아메리카 식민지의 대각성운동(Great Awakening)[8]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이들은 복음주의[9]를 믿고 전하며 큰 세력을 형성하였다.

4.2. 복음주의의 퇴조와 세대주의

미국의 개신교는 초기에 노예 해방, 교도소 개선과 같이 사회개혁과 봉사를 지향하였다. 하지만 19세기 중반 이후 산업화에 따른 급격한 사회 변동으로 인해 교회를 중심으로 한 공동체 내부의 자발적인 개혁은 사실상 실행이 불가능해졌다. 교회를 배경으로 한 개신교 문화와 개념은 더 이상 개인과 사회를 지배할 수 없었다.

이에 따라 사회 개혁에 대한 관심은 점차 퇴조하였고 그리스도에 대한 개인적인 헌신과 개인의 성결만을 강조하는, 사회와는 단절된 순수 종교 차원의 운동만이 전개될 수 있었다.

이러한 복음주의의 변질은 개인의 도덕적 성결을 강조하기 위한 천년왕국 운동을 탄생시켰다. 이 당시 많은 종파들이 창립되었다. 몰몬교로 알려진 '예수 그리스도 후기 성도 교회', '제7일안식일 예수재림교', '여호와의 증인' 들이 이 시기에 설립된 종파들이다.

이러한 세대주의적(Dispensationalism) 전천년설에 기반한 천년왕국 운동은 당시 유행했던 성서대회(Bible conference)와 사이러스 I. 스코필드(Cyrus I. Scofield)의 관주성서(Scofield Reference Bible)[10]를 통해 미국 근본주의 개신교의 맹아가 되었다. 이 관주성서는 매우 평이해서 당시 200만부 이상 팔렸는데 당시 보수주의자들이 경계했던 인본주의적 자유주의 신학으로부터 보수 신학을 방어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여기에 나와 있는 세대주의자들은 바로 휴거라는 단어를 쓰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인간의 자유주의에 대해 매우 비관적인 입장을 취하며 그리스도의 왕국은 이 시대에 혹은 인류사에서는 결코 실현되지 않으며 인류 역사가 끝난 후에 존재한다는 입장이다. 세대주의자들은 창조 이후의 세계를 일곱 세대로 구분하여 마지막 세대인 7년에 걸친 전쟁과 대환난이 있은 후 예수 그리스도가 성서에 있는 문자 그대로 예루살렘에 왕국을 세우고 천 년 동안 다스리게 된다고 주장했다. 이들이 좀 더 심화 발전된 형태가 바로 신사도 운동이다.[11]

또한 당시 가장 유명한 부흥사였던 드와이트 무디(Dwight L. Moody) 역시 세대주의 운동에 힘을 실어주었다. 유명 목사들에 의해 힘을 받은 세대주의 운동은 19세기 말 미국제국주의적 대외 팽창 정책에 호응해 해외 선교 사업을 적극 지원하였고 이러한 선교 활동은 자발적인 학생 선교 운동을 촉발시켰다.

복음주의 학생 운동 쪽에서도 이 때문에 두 쪽이 나는 경우가 많다. 가장 대표적인 케이스가 사회 참여를 가지고 논쟁을 벌였던 한국기독학생회(IVF)의 6개대 지부 탈퇴 사건. IVF에서는 사회 참여 운동을 주장하며 떨어져 나간 한기연을 완전히 흑역사화 하고 있고 한기연은 자신들이 진짜 복음주의 운동이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한기연은 간통 사건 때문에 또 두 쪽이 나버렸다.

세대주의자들은 나이아가라 대회에서 프린스턴 신학교 신학자들을 초빙하여 입장을 발표하게 했는데, 당시 프린스턴 신학교는 성서의 권위와 영감을 옹호하는 보수 신학의 메카였다. 이들은 세대주의자들의 주장에 일부 찬동하지 않는 부분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공동의 적이었던 찰스 다윈진화론자유주의 신학의 공세에 맞서기 위해 근본주의 5개 신조를 수용하는 동맹을 기꺼이 맺었다. 신학자들의 궤변술과 세대주의자들의 몸빵이 결합된 근본주의 세력은 더욱 확장되었다. 그리고 결과는 같은 기독교내 타종파 박해와 천주교를 음해하는 만행으로 이어진 것이다. 근본주의는 교황짐승으로 주장하던 중세 16세기 인물들의 주장을 그대로 답습할 수 밖에 없으나 온건한 개신교인의 경우는 그것을 대놓고 설파하거나 선동하지 않는다. 그러나 근본주의는 사회에 해악을 끼치고 있다.

태동 과정을 보면 어째 이슬람 근본주의, 이슬람 극단주의. 와하비즘, 살라피즘과 비슷한 경향을 보이는데... 문제점 역시 비슷하다.(...)

4.2.1. 신복음주의(Neo Evangelicalism)의 출현

미국에서 근본주의가 확산됨에 따라 교회 내 반지성적 풍토가 생기자 이에 대한 자성 및 반발로 신복음주의가 등장하였다. 자유주의를 사탄의 궤계로 믿었던 근본주의자들과 달리 쌍방간의 인격적인 소통을 중시하였으며, 이들의 생각은 칼뱅의 적응론과도 상통하는 면이 있다. 기치는 보수적인 신학과 개방적 태도 함양.[12]

4.2.2. 근본주의와 자유주의의 대결, 그리고 몰락

근본주의자들은 '포스딕 사건' 을 통해 자유주의자와 본격적으로 맞붙게 된다. 침례회 출신의 자유주의 신학자이자 저명한 설교가인 해리 포스딕(Harry E. Fosdick)은 뉴욕 제일 장로교회 초청 목사로 활동하면서 1922년 6월 '근본주의자들이 승리할 것인가' 라는 설교를 통해 근본주의자들을 자극했다. 그는 자유주의자들도 기독교인임을 강조하는 한편 근본주의자들의 편협과 불관용을 비판했다.

하지만 당연히 근본주의 목사들이 "기독교자유주의는 양립할 수 없다"면서 자유주의 신학의 주관성과 비성서적 이론전개를 비난하고 나섰고, 보수파들은 장로회 총회를 통해 포스딕에게 장로교회 교리에 맞는 설교를 하도록 압력을 넣었다. 결국 포스딕은 "그렇게 할 수 없다"며 목사직을 사임하였다.

이 당시 자유주의와의 대결의 시대에 근본주의자들을 대표하는 신학자는 존 그레셤 메이첸(John Gresham Machen)이었다.[13] 그는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신약과 해석학을 가르쳤는데 보수 신학과 "하나님이 성서 저자의 손을 붙잡고 직접 성서를 썼다"고 보는 축자영감설의 본거지였던 프린스턴 신학교는 1914년 J. 스티븐슨이 학장으로 취임한 후 상황이 바뀌기 시작하였다.

당시 교단에서는 교단이 정한 근본주의 5대 신조를 목사 안수의 필수적인 고백으로 받아들일 수 없으며 신학사상과 교리 해석에 관용을 베풀 것을 요청하는 '어빈 선언' 이라는 운동이 일어났는데 스티븐슨 학장은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이를 수용하였다. 이에 메이첸은 보수적 교수들을 규합해 반대 투쟁을 전개했지만 결국 밀리게 되었고, 이에 메이첸은 프린스턴에 사표를 내고 웨스터민스터 신학교를 개설, 강의를 시작했다. 메이첸은 북장로교회마저 자유주의자들이 지배하게 되자 지지자들과 교회들을 규합하여 1936년 정통 장로교회를 설립함으로써 교단 분열을 감행했으며 이후 이탈과 분리근본주의 운동의 특징으로 인식되었다. 이 운동을 주도한 메이첸은 당시 한국에서 유학 온 박형룡과 박윤선[14]을 가르쳤고 두 사람은 귀국 후 한국 보수신학의 거물로 성장했다.

그리고 근본주의자들은 자유주의 신학 뿐만 아니라 다윈의 진화론과도 논쟁을 벌임으로서 화려한 자폭의 대망을 장식하게 된다. 이들은 다른 진화론 반대 그룹들을 모아 반진화론 연대체를 만들었고 공립학교에서 진화론을 가르치지 못하게 막는 입법 활동을 전개했다. 이후의 전개 과정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버틀러 법스코프스 재판을 참조.

이 재판의 결과로 근본주의는 "사회적으로 논란만 일으키는 사람들"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스코프스 재판에서 처절하게 발린 근본주의자들은 이후 자유주의자들과의 정면 대결을 피하고 부흥회 개최, 성서 학교 설립, 해외 선교사 파송 등을 벌이면서 개척 교회 성장에 주력하거나 새로운 교파를 만들었다.

그리고 이들의 근본주의 수출로 인해 한국기독교(개신교) 근본주의가 탄생하게 되는 비극적 사태가 벌어진다. 하필이면 한국에 들어온 선교사들 중 일부가 이 근본주의 성향이 강한 선교사들이었던 것. 하지만 한국 인구의 절반 정도가 종교를 딱히 믿지 않는다는 점과, 불교 신자들도 적지 않다는 점을 고려해볼 때, 한국에서도 기독교 근본주의가 사회를 장악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당장 이들은 상당수의 무신론자들이나 비기독교 신자들한테 광신도라고 거센 비난을 받고 있으며, 그나마 세속주의적인 기독교인들만 어느정도 받아주는 편이다. 사실 최소한 어려서부터 기독교를 믿는 가정에서 자라거나 아니면 뭔가의 계기로 갑자기 기독교에 심취 된 경우가 아닌 이상, 근본주의는커녕 보수적인 기독교 골수분자를 이해하기도 상당히 어려운 편이다.

한국뿐이 아니라 서양에서도 대략 1985년 이후에 태어난 밀레니엄 세대로 오면서 종교를 가지지 않는 젊은이들도 점차 늘어나고 있고, 또 기독교를 믿더라도 세속주의에 근거하는 청년들이 늘어나고 있으므로 앞으로 근본주의가 사회에 큰 영향력을 행사할 가능성은 과거보다도 더더욱 희박하다. 사람들의 일반적인 성격이 한번 자유의 맛을 제대로 알게 되면 더 이상 어느 특정한 사회적 틀에 너무 구속 당하려고 하기 싫어하는 본심이 있어서 앞으로도 근본주의나 골수분자들이 획기적으로 늘기는 어려워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꼭 근본주의가 아니더라도 서양에서 기독교 보수주의 노선이 강한 집안의 경우 자녀들이 성인이 되어 기독교적 가치관이 완벽히 굳어질 때까지 인기있는 대중음악이나 영화, 일본 만화, 일본 애니도 시청하지 못하게 하며 오직 기독교와 관련된 내용만 보도록 철저하게 지시하는 어른들도 있다. 그리고 사춘기가 되어 자녀들이 이성에 눈을 뜰 시기가 오면 특히 남자들의 경우 철저하게 운동을 많이 시키는 방향으로 나가며 성인물이나 감정적인 연애에는 절대 손대지 못하게 통제한다. 물론 기독교를 믿더라도 좀 세속적인 집안은 의외로 음악이나 영상매체는 물론이고 자녀들의 연애에 대해서도 더 관대한 편.

4.2.3. 근본주의와 초기 한국 개신교

1930년대 미국에서 쇠퇴하기 시작한 근본주의적극적인 해외 시장 개척을 통해 한국에서 화려하게 부활하였으며, 이는 선교사들과 미국에서 유학한 신학자들의 역할이 컸다. 해외 선교에 가장 적극적인 세력은 앞서 설명한 학생자원운동이었으며, 구한말 선교사들의 상당수가 이 학생자원운동의 영향 아래 놓여 있었다.[15] 특히 새뮤얼 오스틴 모펫(Samuel Austin Moffet, 한국명 마포삼열)으로 대표되는 장로회 선교사들은 거의 모두가 근본주의 또는 복음주의 신학의 세례를 받았다. 모펫은 평양신학교숭의여학교를 설립했고, 숭실학교 교장도 지냈다.

이들에게 큰 영향을 미친 학교는 이미 자유주의자들이 접수한 프린스턴이 아니라 매코믹 신학교였다. 매일 찬송가를 부르고 성경을 읽고 기도로 수업을 시작했으며, 학장과 교수들이 주일학교의 교사가 되어 오후 예배를 진행하는 전형적인 미션스쿨이었다. 이 신학교는 철저한 보수주의와 청교도적 엄격성, 경건성이 특징이었다. 이들은 초기 한국 개신교의 성격을 결정하는데 지배적 역할을 하였다.

새뮤얼 오스틴 모펫은 1901년 평양신학교를 설립해 1907년 평양 대부흥운동을 이끈 많은 교역자들을 양성하였다. 이 외에도 초기 한국에 파견된 다양한 교파의 선교사들이 있지만 근본주의 신학교 출신들이 주도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대체적으로 근본주의와 경건주의, 성결주의 등으로 분류할 수 있다.

당시 조선에서 미국계 선교사들의 통제는 매우 철저했으며, 종교 엘리트 집단인 목회자 양성 과정에 대한 절대적인 권한이 선교사들에게 위임되어 있는 상황이었다.

여기까지는 특별한 사고는 벌어지지 않았다. 저들의 의도는 어찌되었건 배재학당, 경신학교, 연희전문학교, 숭실학교, 이화학당, 배화학당, 숭의여학교, 정신여학교, 호수돈여학교 등등 수많은 학교들을 설립한 건 분명한 공로로 인정해줘야 할 것이다. 문제는 1930년대 한국에서도 감리회를 통해 유입된 자유주의 신학 논쟁이 벌어진 이후였다.

4.2.4. 자유주의 신학 논쟁과 근본주의화

논쟁으로 인한 선교사들의 분열은 해방 후 한국 개신교계의 분열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당시 교파별 과다 경쟁을 막기 위해 지역별 분할 선교를 하였는데, 지역에 따라 교파가 갈린 것이다. 함경도 출신들은 자유주의 신학 논쟁으로 대한예수교장로회(예장)에서 갈라져 나와 한국기독교장로회(기장)를 설립하게 된다.

한편 근본주의적인 선교사였던 새뮤얼 오스틴 모펫은 1934년 장로회 선교 50주년 기념 연설에서 갈라디아서 1장을[16] 인용해 다음과 같이 한국 개신교의 신앙 수호를 호소하였다.
조선 모든 선교사가 다 죽고, 다 가고, 모든 것을 축소한다 할지라도 형제여! 40년 전에 전한 그 복음 그대로 전파하자. 변경치 말고 그대로 전파하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 새뮤얼 오스틴 모펫의 연설 내용 중 발췌

이후 활발하게 추진된 기도 모임과 성경 공부는 19세기 말 근본주의 신학을 정립했던 미국의 나이아가라 성서 대회를 본뜬 것으로 초기의 부흥운동을 촉발시키며 이후 한국 개신교들의 근본주의 성향을 형성하는 데 밑바탕이 되었다. 이같은 경건주의 신앙운동은 감정적이고 주관적인 체험 중심의 반이성적 경험주의와 반지성주의로 흘렀으며 그대로 한국 개신교들의 신앙 형태로 고착화되었다.

4.2.5. 박형룡과 박윤선

하지만 이들의 현대 한국 개신교들에 대한 영향력이 간접적인 것이라면, 오늘날 한국 개신교에 근본주의 신학과 배타적 전투성을 형성하는 데 가장 큰 영향을 준 인물은 미국의 근본주의 항목에서 잠시 등장하였던 박형룡박윤선이다.

메이첸이나 반 틸과 같은 개신교 근본주의 신학자들을 사사한 박형룡은 자신의 신학적 입장을 하나님의 주권과 성서의 권위에 대한 강조, 인간의 전적 타락, 하나님의 무조건적 예정, 제한 속죄, 불가항력적 은혜 등을 준수하면서 청교도적 신학의 특성과 경건이 어우러진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한편 박윤선은 박형룡의 제자이며 1934년부터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유학하였다. 그는 주석학자로 유명했으며 설교 예화 등이 포함된 알기 쉬운 주석으로 인해 난해한 교의 신학을 가진 박형룡보다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특히 박형룡은 자신의 스승과 마찬가지로 평생 자유주의 신학과 투쟁을 하였으며 한국 개신교의 근본주의화를 적극적으로 추진한 장본인이라고 할 수 있다.

박형룡은 1934년 열린 제23차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때 제소된 창세기 모세 저작 부인 사건여성의 권리 재판을 해결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 사건은 김영주와 김춘배 2명의 목사가 각각 설교와 기고문을 통해 "창세기모세의 저작이 아니며, 교회에서 여자는 조용히 해야 하고 여자를 가르치지 말라는 것은 2000년 전의 일개 지방 교회의 교훈과 풍습이요 만고불변의 진리는 아니다" 라고 주장한 것에서 촉발되었다. 여기서 박형룡은 이 주장을 자유주의 신학의 영향을 받아 해석된 것이므로 성서무오설축자영감설에 근거해 처리해야 한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결국 재판정은 박형룡의 의견을 수용하여 두 사람을 소환해 주장을 철회하게 하였다. 교회에서 여성의 권리와 같은 근대적 상식 또한 치죄와 배제의 대상이 된 것은, 박형룡이 주축이 된 한국 개신교 주류교단의 광적인 복고적 순수주의에 대한 선망과 모방의 산물을 증명해준다.

다만 박형룡과 달리 박윤선은 근본주의라고까지 보기 힘들다. 학생신앙운동 문서에서 알 수 있듯 반 틸이나 클라스 스킬더 등을 통해서 직, 간접적으로 네덜란드 개신교의 영향도 받았기 때문이다.

4.3. 일제강점기와 개신교

일제 식민치하의 한국의 개신교의 역사는 박해와 고난 그리고 흑역사로 취급되는 신사참배와 친일반민족행위자 양면으로 볼수 있다. 구한말 인구 1%의 불과한 개신교세였지만, 일제강점기 초기 1911년 105인 사건 체포자 120여명 중 98명이 개신교인이었고, 1919년 3.1 운동 때는 민족대표 33인 중 개신교 대표가 16인이었다. 독립운동가를 보더라도 안창호, 김구, 김규식, 조만식, 여운형 등 독립운동가들 중에는 개신교인이 많았는데, 이는 현대 대한민국 기독교 세력의 성장에 가장 큰 원동력이 되었다.

그러나 1930년대 다수의 독립운동가들이 변절하면서 개신교인들 역시 결국 그러했다. 처음엔 신학교 폐쇄 등의 소극적인 저항에서 자발적 친일반민족행위자 목사들과 현실주의에 타협한 대다수의 변절 목사들이 1938년 신사 참배를 찬성하는 결의를 한 것이었다. 천황현인신으로 신격화 섬기는 것은 교리상 명백한 우상숭배요 식민 강점기 하의 신성모독이었으나, 대부분의 변절자들은 해방 후에도 회개했다며(...) 별다른 비판 없이 그 지위를 유지했다. 다만 여기서 개신교가 흑역사요 치욕이라는 점에서는 기독교 내외가 모두 같은 평가이나 가톨릭1936년 5월 18일교황청의 지시로 일찌감치 굴복했고, 불교계는 친일반민족행위자 승려와 일본 승려가 교단을 장악한데다가 교리상 마땅히 충돌점도 없어서 별 비판 없이 넘어갔다. 오로지 개신교들이 친일에 앞장서서 신사 참배를 독려했다는 건 명백한 역사 왜곡이다. 최후까지 저항하지 못한 측면은 오십보 백보이지만, 오로지 개신교만이 신사 참배를 했다는 건 정도를 지나친 비판. 오히려 개신교는 그중 가장 마지막까지 저항했으니, 적어도 이 부분에서 다른 종교보다 잘했으면 잘했다고 할수 있겠지 못했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신사 참배는 근본주의 일색인 조선 개신교에서 엄청난 사건이었다.[17] 전시 동원 체제로 치닫던 1930년대 후반 정세에서 식민지 당국과 조선 개신교는 충돌할 수밖에 없었으며, 이 일로 인해 조선 개신교의 절대적 지주였던 서양인 선교사들이 강제 추방되고, 적지 않은 조선의 엘리트들이 실형에 처해졌다. 물론 주기철 목사처럼 끝까지 저항하다 끝내 순교한 사람들도 있었고, 일부 근본주의라 해도 정말로 양심을 가진 교회들은 대놓고 맞서기도 했다.[18]

문제는 저항세력에서부터 예수천국 불신지옥 교리가 정착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처음에 이 교리를 설파한 목사는 최봉석(최권능)이었고, 그 이후로 서북계 근본주의 목사들에게 예수천국 불신지옥 교리가 기본적으로 탑재되었다. 신사참배 강요 시국에서 예천불지 교리는 강력한 반대 근거였으니 어쩔 수 없는 비극이었다.

한편 이 당시 신사 참배를 거부했던 극소수의 목사들과 성도들이 기존 교단을 나오거나 옥살이 이후 억울하게 제명당하는 일이 있었는데, 주기철 목사의 순교 정신을 이어받아 고려신학교를 기반으로 한 예장고신 교단을 만들게 된다.

그리고 본격적인 문제는 해방 이후에 나타나기 시작한다.

4.4. 해방 이후

신사참배 거부 건으로 투옥되었다가 해방 직후 출옥하게 된 이른바 '출옥 성도' 계열 인물들이 교계 정화를 부르짖으며 기성 교단에 회개할 것을 요구했는데, 이로 인해 그 동안 은폐되어 왔던 트라우마가 해방과 거의 동시에 터질 위기가 도래하게 되었다.

기성 교단에서 이에 대해 선택한 방식은 2가지였는데, 우선 대한예수교장로회(고신)을 위시한 '출옥성도파'[19]를 철저하게 탄압하고 신학교 교육 과정에서도 조직적으로 은폐 및 왜곡[20]하면서 스스로의 치부를 덮는 데 급급했다.[21] 이 때문에 한국 개신교 역사에서 스스로 평가하는 것조차 '해방과 동시에 본격적인 타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고 논한다. 그렇다고 고신 교단 쪽에서도 순수하게 신앙의 힘으로 저항한 건 아니어서, 계속되는 박해에 견디기 위해서라는 명목 아래 근본주의로 재무장하면서 시대상의 발전을 따라가지 못하는 등[22] 제대로 된 대체제로서의 역할을 하지 못하게 되었고, 그렇게 피해자도 가해자도 모두 일찌감치 양극단에 갇히면서 이 때부터 개신교 근본주의라는 멸칭을 얻게 될 씨앗이 심어졌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게 되었다.

그 다음으로는 새로운 타겟, 다시 말해 '물리쳐야 할 외부의 악마'를 재설정했다. 자신들의 타락을 얼치기 악마의 모습으로 규정하고, 그것과는 비할 수 없는 진정한 악의 축을 만들어냈던 것인데, 그것이 바로 공산주의김일성 휘하 세력들이었다. 개신교/대한민국 문서에도 나와 있듯이 북한은 정말 철저하게 종교를 탄압했고, 한국 개신교는 김일성에 의해 탄압받은 서북 출신 교인들의 체험을 집단기억화하여 건국 이념을 '기독교 정신으로 세워진 민주주의공화국'으로 잡는데 성공한다. 이때 월남한 서북 출신 개신교인들은 영락교회를 중심으로 뭉첬고 서북청년단등 개신교 극우 조직들을 만들어 제주 4.3사건 때 무자비한 학살을 자행했다. 또 그리고 일제강점기 아래 공산주의를 말세의 징조로 해석해 왔던 이데올로기 이론[23]을 체계적으로 발전시켜 반공주의를 체화하였다.

덧붙여 한국 전쟁을 겪으면서 손양원 같은 온건파 지도자들이 죽자 개신교계의 주도권은 온전히 근본주의자들이 장악하게 되었고, 이 시점부터는 공산주의와의 전쟁을 십자군 전쟁과 거의 동일선상의 '거룩한 영적 전쟁'으로 규정하게 된다. 그렇게 50년대 반공주의를 통해 이승만에 협조하고 교회 분열에 큰 역할을 했던 근본주의자들은 독재정권과 손을 잡는 데 전혀 주저함이 없었고, 아래쪽에 언급할 내용과 같이 박정희전두환으로 이어지는 군사정권에도 어렵지 않게 협조했다.[24]

미국에서 보수적인 신학을 공부하고 돌아온 박형룡은 신정통주의를 용납하지 않았다, 그래서 대표적으로 거론되는 사건이 예장과 기장의 분리가 있다. 1947년 장로회 총회 때 조선신학교 학생 51명이 "김재준이 교장으로 있는 조선신학교가 성서무오설을 비판하고 성서의 권위를 파괴했다"고 주장하면서 "서울에 정통 신학교를 세워달라"고 탄원했다. 이에 박형룡을 비롯한 평안도 출신 근본주의 목사들은 1948년 6월 새로운 신학교를 설립하였고 직영 신학교 승인을 받았다. 이후 이들은 대구시에 새 신학교를 세우는 과정에서 날치기 총회와 불법적 설립을 통해 조선 신학교 출신들을 배제하였고 1952년 김재준을 면직 처분하고 "조선신학교 출신 교역자의 채용 금지"라는 결정을 내렸다.

이에 반발한 김재준과 김재준을 지지하는 인사들은 장로회 총회로부터 분리되어 나왔고, 이들이 1954년 따로 설립한 교단이 바로 대한기독교장로회다. 현재는 한국기독교장로회로 명칭을 바꿨다. 이 교단이 모체가 된 학교가 바로 조선신학교(한국신학대학교)인데 이것은 오늘날 종합대학으로 존재하고 있는 한신대학교다. 현재 한신대에 진보적 학자들이 포진해있는 역사적 이유가 여기에 있다.

반독재민주화 운동에 헌신했던 문익환, 문동환 목사 형제나 민중신학자 안병무, 서남동, 진보적 경제학자이자 언론인으로 명성이 높았던 정운영 교수 등이 모두 한신대 교수 출신이다. 게다가 한신대 신학과 학생회는 각종 진보 집회에 '민족한신 통일신학' 이라는 깃발을 들고 나타나곤 한다. 그런데 근본주의자 입장에서는 "이러한 자유주의자들이야말로 일제강점기 신사 참배에 적극적이었다"는 말을 하며 반격의 수단으로 삼기도 한다.[25]

이들의 분열은 끝이 아니었는데 WCC, 에큐메니컬 문제로 장로회가 합동/통합으로 분열된 역사를 가지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외국에서 들여온 교단이나 자정적으로 생긴 교단이 한국 개신교의 좋은 영향을 주는 것도 아니었는데, 일례로 1950년대 한국 루터교회의 시작도 성서무오설을 받아들이고 자유주의 신학을 배척한 미국 미주리대회(missouri synoud)의 선교였고, 문선명, 김백문같은 이단이 들끓던 시기였다. [26]

4.5. 군사정권과의 유착

누구나 자기를 지배하는 권위에 복종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주시지 않은 권위는 하나도 없고 세상의 모든 권위는 다 하느님께서 세워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로마서(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 13장 1절

이 구절로 설명 가능하다. 실제로 군사정권 시절에는 이 구절을 인용해서 "독재에도 순응해야 한다"는 성명서를 낸 적도 있다.
우리의 불의가 오히려 하느님의 정의를 드러낸다고 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렇다면 우리에게 진노를 내리시는 하느님을 옳지 않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사람의 생각으로 하는 말이지, 절대로 그럴 수 없습니다. 사실 그렇다면 하느님께서 어떻게 세상을 심판하시겠습니까? 또 "나의 허위가 오히려 하느님의 진실을 더욱 드러내고 하느님의 영광에 보탬이 된다면 왜 내가 죄인으로 단정을 받아야 하느냐?" 하고 물을 수도 있겠습니다.

로마서 13장 5~7절

사실 위의 구절들은 모든 권력을 하느님께서 세우셨기 때문에 그들에게 순종하여야 하지만, 그 뜻에서 벗어나 잘못된 행동으로 나라를 그르치는(정확히 말하자면 '그리스도의 공동선'에 벗어나는) 권세에는 항거해야 한다는 메세지를 전달하는 것으로 해석되기도 한다.[27]

이 때 한국의 개신교는 급속한 기독교 파시즘 현상을 겪었고, 이것이 21세기에까지 계속 이어지는 본격적인 기독교 우파화의 출발점이 된다. 근데 웃긴 점은 정작 그렇게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정권의 독재를 정당화했던 사람들이 자기와 성향이 안 맞는다는 이유로 김대중, 노무현, 문재인 등에 대한 비방과 막말은 오히려 정당화하고 있다.
무엇보다 구약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왕정제를 도입하려 하려 하자 하느님이 왕정제를 직접 반대[28]하는 내용이 있다.
사무엘은 이렇게 일러주었다. "왕이 너희를 어떻게 다스릴 것인지 알려주겠다. 그는 너희 아들들을 데려다가 병거대나 기마대의 일을 시키고 병거 앞에서 달리게 할 것이다. 천인대장이나 오십인대장을 시키기도 하고, 그의 밭을 갈거나 추수를 하게 할 것이며 보병의 무기와 기병의 장비를 만들게도 할 것이다. 또 너희 딸들을 데려다가 향료를 만들게도 하고 요리나 과자를 굽는 일도 시킬 것이다. 너희의 밭과 포도원과 올리브 밭에서 좋은 것을 빼앗아 자기 신하들에게 줄 것이며, 곡식과 포도에서도 십분의 일 세를 거두어 자기의 내시와 신하들에게 줄 것이다. 너희의 남종 여종을 데려다가 일을 시키고 좋은 소와 나귀를 끌어다가 부려먹고 양떼에서도 십분의 일 세를 거두어갈 것이며 너희들마저 종으로 삼으리라. 그 때에 가서야 너희는 너희들이 스스로 뽑아 세운 왕에게 등을 돌리고 울부짖겠지만, 그 날에 주께서는 들은 체도 하지 않으실 것이다.

사무엘상 8장 11~18절

위 구절은 왕정제의 왕이 권력을 휘두르며 국민들을 부려먹을 것이라며 반대하는 구절이다. 권위주의 정부라고 왕정과 다르겠는가? 이는 모든 독재정에 적용될 수 있는 내용이다.

4.5.1. 군사정권과 개신교

박형룡을 사사한 김준곤은 풀러 신학교에서 CCC 운동을 접하고 1958년 귀국하여 한국 CCC를 창립했다. 당시 이화여자대학교(감리회) 제7대[29] 총장이던 김활란서울여자대학교(장로회) 제1대 학장이던 고황경 등의 후원으로 학원 전도에 성공한 그는, 한국 개신교회의 지도적 위치를 확보하게 되었다. 참고로 김활란, 고황경 모두 1930년대부터 노골적인 친일 활동을 펼쳤으며 이에 대해 한 번도 반성한 적이 없다. 친일인명사전에도 수록되었다.

한편 이 시기 미국 복음주의를 도입하고 확산하는데 앞장섰던 김준곤과 김장환조용기와 함께 60년대 말부터 1980년대까지 반공과 안보를 내세워 민주화 운동을 용공 세력의 준동이라고 비난하면서 군사독재를 옹호하는 역할을 했다.

김장환은 한국 개신교계의 지도적 인물 중에서 가장 극우적이면서 가장 친미적 성향의 인물로 평가된다.그가 사장으로 있는 극동방송은 2004년 5월에 가정의 달 특집으로 고문 기술자였던 이근안을 옹호하는 휴먼 다큐멘터리를 내보내거나 2006년 극동방송 창립 50주년 행사 때 당시 전두환 대통령을 공식 초청하거나 하였다.

또 김준곤은 1966년 미국 조찬 기도회를 모방해 '밤낮 없이 일하시는 대통령' 을 위해서 기도한다는 명분으로 '대통령 조찬 기도회' 를 주관했다. 그는 이 자리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이룩하려는 나라가 속히 임하길 빈다"고 기도했고 이듬해인 67년에는 "우리나라의 군사 혁명이 성공한 것은 하나님이 혁명을 성공시켰기 때문"이라며 노골적으로 독재정권을 찬양했다. 하지만 CCC 소속 중에서도 이런 흑역사를 모르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다.

김준곤과 조용기는 1969년 8월 15일 김재준, 박형규 목사, 함석헌 등 개신교 진보인사들이 박정희 정권의 3선 개헌을 반대 운동을 하는 성명을 내자 9월 2일 박형룡, 김유찬 등 242명의 개신교 보수인사들과 함께 '개헌 문제와 양심 자유 선언' 을 발표하면서 진보인사들의 선언을 "순진한 성도들의 양심에 혼란을 일으키는 선동적 행위" 라고 비난하고 교회는 정치적 문제에 중립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들은 9월 5일 '대한 기독교 연합회'라는 단체 명의로 발표된 '개헌에 대한 우리의 소신' 이라는 성명에 서명하면서 3선 개헌을 지지해 자신들의 정치적 중립 입장을 뒤집기도 했다.

1972년 발표된 10월 유신으로 박정희 정권과 진보 개신교 세력 간의 갈등이 커지고 1973년 남산 부활절 연합예배 때 반정부 유인물 배포 사건이 발생하자, 김준곤은 교계 보수인사들을 규합해 유신의 앞날을 축복하는 열린 제 6회 국가조찬기도회를 개최했다. 이 자리에서 김준곤은 "유신은 실로 세계 정신사적 새 물결을 만들고 신명기 28장[30]에 약속된 성서적 축복을 받은 것" 이라고 설교했다.

반정부 유인물 배포 사건은 위수령과 10월 유신 이후 유신체제에 정면으로 도전한 최초의 행동이었다. 현직 목사와 학생들이 내란 예비 음모 혐의로 구속된 이 사건은 개신교계에 큰 충격을 던졌다. 사건이 발생한 이후 기독교장로회와 NCC는 즉각 모임을 갖고 성명을 내는 등 대책 활동에 들어갔는데, 단순히 이들의 구명 운동에 그치지 않고 정치적 상황에 대한 개신교계의 인식을 재고시키면서 민주화 인권운동으로서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다.

4.5.2. 유신 찬양

그런데 1975년 김장환박정희 정권이 인민혁명당 사건, 긴급조치 9호 선포, 미국인 조지 오글 목사와 시노트 신부 강제 추방 등으로 국제 여론, 특히 미국 내 여론이 악화되자 미국을 방문해 "목사 중에 구속된 사람은 그 사람이 순수 복음을 전하는 목사가 아닌 정치 목사" 라는 입장을 밝히기도 했다.

이에 질세라 김준곤도 1975년 5월 서울 정동 CCC 대강당에 학생 1,000여 명을 동원해 반공 구국 기독 학생운동 특별 기도회를 열어 "나라를 위해서는 순국을, 주님을 위해서는 순교를, 공산주의자들의 무력 도발에는 육탄으로 맞서는 의지를 가지고 반공의 면역체가 되고 전도의 새 종족이 될 것" 을 다짐했다.

조용기도 같은 해 6월장충체육관에서 '민족복음화와 국가안보' 라는 제목으로 대중 집회를 열어 유신 지지 집회를 개최했다. 이처럼 조용기, 김준곤, 김장환 등은 자신들의 영향력을 활용해 민주화 운동을 용공 세력으로 비난하는 대규모 부흥 집회를 개최하면서 박정희 정권의 유신 체제를 옹호했다.

4.5.3. 전두환의 대두 이후

5.18 민주화운동 직후 전두환 위원장을 위한 조찬기도회를 열었다.

전두환최규하의 손을 빌어 스스로 대장 계급장을 단 바로 다음날인 1980년 8월 6일 아침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 서울 에메랄드룸에 교단의 총회장급 목사 23명이 자리를 함께 했다. 개신교를 대표하는 목사들이 한자리에 모인 셈이다. 조찬예배가 열렸고, 방송사들도 현장 중계에 나섰다. 제목은 ‘전두환 국보위상임위원장을 위한 조찬기도회’. 청와대 입성의 길목에서 대민선전을 목적으로 준비한 일종의 ‘기획행사’였던 것이다.

참석한 목사들은 전두환을 위해 기도했다. 유대민족을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으로 인도하는데 최선봉에 섰던 “여호수아 같은 인물이 되게 해달라”고 입을 모았다. 또 전두환을 향해 “이 어려운 시기에 막중한 직책을 맡아서 사회 구석구석에 존재하는 악을 제거하고 정화할 수 있게 해준 데에 감사하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내란과 살인을 저지른 범죄자를[31] ‘사회악 제거하는 의인’이라고 추켜세우다니. 한국인도 아닌 미국인 오대원(David E. Ross) 선교사[32]가 민주화 시위 중 쫓기던 학생들을 자주 숨겨주다 전두환 정권에 의해 강제 추방된 것과 대조적으로, 한국을 대표하는 개신교 원로들이 내란죄의 수괴에게 교회의 존속을 위해서건, 그릇된 정치사상에 입각해서건 스스로 면죄부를 선사한 것이다.

4.6. 군사정권 이후

1990년대 이후 충현교회의 장로였던 김영삼이 대통령에 취임한 이래 노골적으로 정치적인 친보수 성향을 표방하였다. 이 때부터 민주자유당-신한국당-한나라당-새누리당-자유한국당-미래통합당으로 이어지는 세력을 추종해왔다.

1992년 제14대 대통령 선거 당시 여의도순복음교회 담임목사였던 조용기는 설교 시간에 "김영삼 장로를 지지하여 청와대찬송가가 울려퍼지게 하자. 그동안 청와대에서 너무 오랫동안 목탁 소리가 들려왔다. (가톨릭 신자였던) 김대중 후보가 당선되면 청와대에 김수환 추기경이 자주 들어온다"고 말했다가 선관위로부터 경고를 받았다.

그런데 정작 김영삼 이전의 대통령들 가운데 불교신자인 대통령은 노태우 뿐이었으며, 그렇게 목사들이 돌아가며 찬양하던 박정희는 아이러니하게도 무교(無敎)였다. 다만 육영수 여사가 불교 신자여서 불교에 우호적인 편이긴 했다.[33] 전두환도 퇴임 후에 백담사로 유배되고 나서야 불교에 귀의했지 재임 중에는 가톨릭 신자였다. 즉 한마디로 조 목사가 개소리를 한 것이다.(...)

실제로 김영삼이명박[34]은 재임 시절 공개적인 친 개신교적 행보로 여러 구설에 올랐다. 1997년 대통령 선거 때는 유력 후보였던 김대중, 이회창 모두 가톨릭 신자였기 때문에 노골적으로 한쪽을 지지하지는 않았다. 대신 김한식이라는 목사가 출마했지만 개신교 측에서는 별다른 관심조차 갖지 않았다.

4.7. 2000년대 이후

누구나 자기를 지배하는 권위에 복종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주시지 않은 권위는 하나도 없고 세상의 모든 권위는 다 하느님께서 세워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13장 1절 (공동번역성서)
2000년대 이후 김대중-노무현으로 이어지는 민주당계 정권을 거치면서 이들은 보수적인 입장을 내걸고 반대하기 시작한다. 특히 노무현 정부에서 이런 보수 개신교의 세력 기반의 하나인 사립학교를 개혁하려고 했기 때문에 더욱 이들은 민주당 정권에 적대적이었다. 군사정권 시절에는 위의 로마서 구절을 근거로 민주화운동등의 시위를 부정하던 기독교 지도자들이 사학법 저지를 위해 삭발 시위를 하는 자가당착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하였다.

기독교 우파를 표방하는 보수적인 개신교의 한국기독교총연합회은 민주당 정권과 대립하였으며 이는 2007년 제17대 대통령 선거 정국에서 소망교회 장로였던 이명박에 대한 노골적인 지지로 나타난다. 김홍도 같은 막장적인 목사뿐만 아니라 비교적 정치적 발언을 삼갔던 하용조 목사까지도 노골적으로 설교 시간에 이명박 지지를 외쳤다.

이들의 보수적인 입장은 계속되고 있으며 수도 이전 문제, 4대강 문제, 주5일 근무제, 무상급식, 박근혜 탄핵 반대 집회, 차별금지법 통과, 퀴어문화축제 등과 같이 첨예한 이슈에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차별금지법 통과, 퀴어문화축제 등은 종교적인 이슈이다. 특히 동성애 문제는 성경을 쓰기 시작한 시점부터 지금까지 진보 측과 첨예하게 맞붙고 있다.[35]

종교인 과세 문제를 두고 정부에 격렬히 반발하고 있다. 세금도 안 내겠다는 태도에 격분하는 일반 시민들이 많다.

'반기독교'가 본격적으로 대두되기 시작한 것도 바로 이 시기이다. 본래 반기독교는 2004년 즈음부터 현재까지도 존재하며 수많은 반기독교 사이트의 근본이 되는 다음 카페에서 사용되었다. 당시 지금과 똑같이 반기독교인들은 개신교, 천주교를 가리지 않고 모조리 싸잡아 적대했는데, 반기독교가 나오게 된 정치적·사회적 사건들과 대부분 관련이 없었던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측에서 일반화하지 말라고 항의했고, 이러한 항의가 받아들여지면서 반기독교는 자연스럽게 개신교를 특정하는 개념으로 뜻이 바뀌었다.

이후 약 2007년까지 비기독교인들이 개신교를 비난하였으나, 2007년 개신교 장로이면서 종교편향적 행보를 보이던 이명박 당시 서울시장이 대선후보로 나서면서부터, 아고라, 한토마 등 포털 사이트의 정치방 등에서 개신교를 정치집단으로 해석하며 정치적인 의미까지 섞이게 되었다. 이명박에 반대하는 진영에서는 이명박을 지지하며 우경화 행보를 보이던 개신교도 곱게 보일 리 없었고, 이 때문에 개신교를 대적하는 반기독교적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그러던 것이 시간이 지나면서 개신교의 각종 사건사고와 맞물려 부각되며, 정치성향과 상관없이 대부분 사이트에서 반기독교는 반개신교의 동의어로써 반기독교=반개신교가 되었다. 이렇게 형성된 반기독교=반개신교라는 인식은 현재까지도 대중적으로 유효한 편으로 받아들여진다.

2020년부터 터진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 관련 개신교 사건 사고 사태 및 사랑제일교회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 집단 감염 사건은 집회 모임으로 방역을 소홀히 하여 코로나 19 확산에 일조했던 일부 교회의 행태로 인해 개신교의 인식을 크게 실추시켰다.

2024년, 한국 개신교계는 포괄적 차별금지법 입법 저지를 위한 10.27 한국교회 연합예배로 매스컴의 중심에 섰다.

5. 같이 보기



[1] 『기독교의 역사』(티모시 존스)[2] 그러나 워필드를 근본주의자로 여기면 심히 곤란하다. 워필드가 주장한 성서무오설은 성서가 인간의 영향 또한 받았다고 견지하는 조심스러운 성서무오설이지, 성서무오설 문서에 묘사되는 극단적인 성서무오설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철저한 개혁주의자였다. 그저 용어의 시초로 생각하면 편하다.[3] 알리스터 맥그래스 <기독교 그 위험한 사상에 대하여>[4] 사실 한국 개신교의 신학적 보수 편향성에는 박형룡 목사의 책임이 크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보수적 편향성이지, 박형룡 목사의 영향을 받은 보수 교단들이 근본주의자들이라고 본다면 심히 곤란하다.[5] CCM이 신사도주의의 영향을 받은 것은 사실이나 현대적인 찬송가이기에 주류 개신교가 CCM을 배척한다고 본다면 심히 곤란하다. 통성기도 또한 예배 시간에 진행하는 경우가 있으나 방언을 비롯한 신비주의적 태도를 굉장히 경계한다.[6] Fundamentalist–Modernist controversy, 영어 위키 항목 참고[7] 1837~1899. 미국의 개신교 운동가이자 근본주의 형성에 결정적인 공헌을 한 부흥 설교자였으며, 그의 설교에 의해 서구권에서 대규모 선교운동이 일어난다. 지금의 시각으로는 그의 설교에 의해 파견된 선교사들의 일방적인 선교 풍토의 문제점이 바로 드러나지만, 당시에는 실험적인 면이 강했다. 뿐만 아니라, 선교사들의 이 신앙은 누구도 가기 꺼리던 나라들까지 진출하게 했고, 서양철학 및 과학과 의학을 통해 약소국들의 민생 발전을 가져오기도 했다. 더불어 그들이 파견된 국가들은 대부분 서양 및 일본에 의해 침략당한 지역이었으며, 그 참상을 목격한 선교사들 중엔 독립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이들도 있었다. (물론 제국주의에 편승한 이들도 많았다.) 문제는 한국 보수 개신교 교단들의 전반적인 선교에 대한 인식이 여기서 조금도 발전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물론 선교사로서 외지에 가보면, 사람 사는 것이 그렇듯이, 문화와 종교, 역사를 심사숙고하여 활동하는 이들이 대다수이긴 하나, 그들 역시 한국에 본부를 두고 있는 선교단체와의 소통에 어려움을 겪는 일이 다반사이며, 특히 일부 극렬 선교 단체들의 폭압적 행태는 도를 넘어선지 오래다. 한국 사회가 가진 선교에 대한 일반적인 인식은 사실 이 일부 단체들(정말로)의 영향이 큰데, 그 이유는 이들이 선교지에서나, 한국 사회에서 워낙 시끄럽게 떠들고 다닐 뿐 아니라, 그만큼 큰 사건을 주렁주렁 달고 다니기 때문이다. 많은 대형교회 목사들도 이 단체들에서 공부하고 있고, 이들을 지원하는 등 적극 후원하거나, 최소한 용인하고 있다.[8] 대각성운동이란 1720~1740년대 사이에 일어난 대부흥운동으로 하나님이 자신들에게 특별한 목적을 부여해 주었다는 커다란 자각과 함께 신세계에서 일체감을 갖게 되었다는 의미에서 위와 같은 이름이 붙여졌다.[9] 복음주의란 '우리는 죄인이어서 원래 영원히 고통받을 운명이지만, 예수님께서 이 땅에 내려와 고난을 받음으로써 우리의 죄사함을 받을 길을 열어주셨다'는 복된 소식을 기쁘게 생각하고 널리 알려야만 한다는 사고방식이다.[10] 현재에도 옥스퍼드 대학교 출판부가 펴내는 스코필드 주석 성경이 아직도 출판되고 있다.[11] 정확히는 미국 근본주의+세대주의에 기반한 변종 분파를 칭한다. HIM 등 신사도 교회의 메인 스트림은 후천년설에 가깝다.[12] 우리나라에도 꼭 진보적 기독교인은 아니더라도 이들과 비슷한 생각 가진 이들이 많아지고 있다. 교회에선 문제아 취급을 많이 받고 있긴 하지만, 작은 교회들을 중심으로 목회자들의 풍토도 바뀌고 있다. 보수교단일 경우, 교단의 지역 모임에서 왕따당하는 건 덤. 국내 교단 중 이쪽에 가장 가까운 곳으로는 장로회의 합신 교단이 있다.[13] 근본주의 기독교의 고전인 <기독교와 자유주의>를 저술한 사람이다. 한국 기독교에도 기독교 변증 고전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14] 박윤선의 경우 화란개혁주의의 영향도 받은지라 근본주의 노선이라 보기는 어렵다.[15] 이들 모두가 근본주의 성향이 강하게 드러나는 것은 아니다. 이들 중에는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처럼 신자 비신자 모두의 존경을 받는 사람도 존재한다. 단 언더우드 역시 자신이 믿는 선교 방식에 대해서는 타협이 없었으며, 반 가톨릭 성향 역시 강했다.[16] 1장 6절에서 9장까지[17] 또한, 반기독교계 좌파세력들이 기독교를 친일종교라고 몰아붙이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18] 성결교단과 침례교단은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교회를 폐쇄당했다. 그 외에도, 교단의 결정을 따르지 않고, 신사참배를 거부하다가, 많은 교회와 기독교계 학교가 폐교를 당하기도 했다.[19] 신사 참배 반대 순수신앙파 장로교인들을 의미한다.[20] 아예 '출옥 성소들의 광적인 활동과 테러 행위'가 있었다며 날조된 교육을 하는 곳들도 있을 정도이며, 엔하위키 시절부터 본 문서에 '광적인 활동'에 대한 서술이 지속적으로 유지되어 왔다.[21] 고신대학교를 제외한 상당수의 신학교의 교회역사학에서 고신 교단에 대한 교육을 전혀 하지 않으며, 상당수의 일선 교회에서도 고신 교단이 아닐 경우 관련 정보를 성도들에게 전혀 가르쳐 주지 않는 것으로 악명 높다. 이러한 정보 은폐가 어찌나 심각한지, 아예 자체적으로 자료를 정리하고 홍보하는 역사편찬위원회를 고신 쪽에서 따로 꾸려야 했을 정도다.[22] 아직도 여성 목사의 안수를 금지하는 교단 중 하나인데, 이는 성서무오설의 잔재 중 하나이다.[23] 미국식 극우 개신교의 영향을 크게 받았던 한국 개신교이기에, 당연히 공산주의를 '사탄의 세력'으로 규정한 이데올로기 이론도 거의 그대로 흡수했다.[24] 이는 김수환 추기경을 필두로 해 군사정권에 저항해 왔던 가톨릭과 반대되는 행보였다.[25] 자유주의자들은 과거 친일 행적에 적극적이었던 파벌을 기반으로 하고 있어서, 이를 덮기 위해 급진적 성향을 많이 채택했다. 그러다 보니 지나친 친북 성향을 나타내 다른 의미로 많은 문제를 일으켰다. 근본주의자들이 '적의 적은 우리 편' 논리를 일본 제국이나 독재정권에 대입한다면, 이쪽은 북한에 대입해서 사고를 일으키는 것이다. 문익환목사의 무단 방북 사건이 대표적.[26] 《한권으로 읽는 한국 기독교의 역사》. 류대영.311~317p[27] 아이러니하게도, 근본주의 종교인들과의 토론과 논쟁에서 일반적인 상식보다도 더욱 결정적이고 유용하게 반박할 수 있는 것이 바로 그들의 경전 구절이다. 수많은 저자가 여러 시대에 걸쳐 저술한 것이 전승되며 변화했기 때문에 종교 경전은 앞뒤가 안 맞는 구절이 서로 엇갈리는 일이 많다. 종교 근본주의의 약점은 바로 이런 점에서 나온다.[28] 정확히는 하느님이 반대한 내용을 사무엘이 사람들에게 전하는 것이다[29] 이화학당 설립자인 메리 스크랜튼부터 헤아려 제7대. 김활란은 이화학당 대학과 졸업생이자 이화여자전문학교 최초의 한국인 교장이며, 해방 후 이화여전을 이화여자대학교로 개편하여 총장이 되었다.[30] 신명기 28장 1절부터 19절 내용을 말하는 것 같다. 참고로 신명기 28장 1절은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그의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이다. 그런데 언제 박정희하고 여호화가 같은 존재가 된 건지?[31] 그것도 대량살인. 즉 학살이다. 다시 말해 전두환은 사실상 전범으로 분류만 안 되었을 뿐 영락없는 B급 전범이었다. (한국 전쟁이 아직 끝나지 않았으므로 전쟁 중인 것으로 간주될 수 있으며, 이에 따라 광주에서의 학살 역시 전쟁 범죄로 볼 수 있으므로.)[32] 데이빗 로스라는 본명보다 오대원이라는 이름으로 더 유명하다. 한국 예수전도단을 창립한 미국 남장로회의 선교사. 추방 조치는 90년대에야 복권되어 현재는 샌프란시스코에 거주하며 통일운동에 매진 중이다.[33] 어디까지나 우호적인 편이었다는 거지 박정희 본인은 종교에 별 관심이 없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학생 때 가톨릭 미션스쿨을 다닌 영향으로 가톨릭 세례를 받았지만 지금은 무교다.[34] 이명박은 재임 시절 속칭 고소영 라인만 일방적으로 우대했는데, 그 고소영 라인이라는 게 고려대학교, 소망교회, 영남 지역 출신자들이다. 이쯤되면 친 개신교적 행보가 극에 달한 수준이다.[35] 동성애 문제는 진보적인 입장을 가진 한국기독교장로회 측에서 찬성과 반대 입장이 첨예하게 갈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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