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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고귀한 베네치아 공화국[1] Serenissima Repubblica di Venezia Serenìsima Repùblega de Venèsia | |||||
국기 | 국장 | ||||
Pax tibi Marce, evangelista meus 평화가 그대에게 있으라, 나의 복음사가 마르코여! | |||||
1789년 베네치아 공화국의 영토[2] | |||||
697~1797 | |||||
성립 이전 | 멸망 이후 | ||||
동로마 제국 | 합스부르크 제국 | ||||
수도 | 베네치아 | ||||
정치 체제 | 귀족공화제 | ||||
국가 원수 | 베네치아 도제 | ||||
주요 도제 | 엔리코 단돌로 야코포 티에폴로 프란체스코 포스카리 프란체스코 모로시니 | ||||
면적 | 65,790km² (1789년) | ||||
인구 | 2,844,212 명 (1789년) | ||||
민족 | 이탈리아인 | ||||
언어 | 베네토어 이탈리아어 라틴어 | ||||
종교 | 가톨릭 | ||||
통화 | 두카트 | ||||
주요 사건 | [ 펼치기 · 접기 ] | ||||
국가 | Inno Nasionale Veneto | ||||
현재 국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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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탈리아 반도 동북부 해안에 존재했었던 공화국으로, 수도는 베네치아였다. 중세에 제노바 공화국과 함께 서유럽과 중동을 잇는 양대 해상 공화국[6]으로 군림했던 국가다.2. 상징
2.1. 국기
평시 국기와 전쟁 국기 |
평시 국기 |
전쟁기 |
베네치아 공화국의 상징인 사자는 기독교의 성인 중 한 명인 복음사가 마르코를 상징하는 '산 마르코의 사자'이다. 공화국의 국기는 이 산 마르코의 사자를 감싸는 6개의 테두리가 감싸져 있는 형태인데, 이는 베네치아 공화국의 행정구역인 '세스티에레'들을 상징한다. 이러한 형태의 국기가 최초로 사용된 예는 1200년대로 거슬러 올라갈 정도로 오래되었다.
평상시에는 산마르코의 사자가 펼쳐져있는 성경을 들고 있는 모습의 국기를 사용했다. 그러나 베네치아 공화국이 전시 상황에 돌입했을 경우, 사자가 성경을 왼발 밑에 내려놓고 대신 칼을 빼들고 있는 모습의 국기로 대체하여 사용했다. 성경에 적혀있는 문구인
"PAX TIBI MARCE EVANGELISTA MEUS"
는 라틴어 문구로, <마르코의 복음서>에 적힌 "평화가 그대에게 있으라, 나의 복음사가 마르코여"[7]
라는 뜻이다. 베네치아 공화국의 표어이자 역대 베네치아 라틴 총대주교의 표어였다.오늘날 이탈리아의 행정구역인 베네토와 베네치아는 이 베네치아 공화국의 국기에서 약간의 변형을 거쳐서 사용하고 있다.
3. 역사
3.1. 건국
베네치아 공화국의 역사는 5세기 고트족과 훈족 등 여러 이민족들의 약탈을 피해서 파두아, 아퀼레이아, 콘코르디아, 트레비소, 알티노 등지에서 온 고대 로마 출신 난민들이 베네치아 석호의 섬들로 모이면서 시작되었다. 초기 정착민들의 흔적은 토르첼로(Torcello), 이에솔로(Iesolo), 말라모코(Malamocco)섬에 정착한 흔적과 함께 동 시기에 건설된 산 쟈코모(San Giacomo) 성당에서 찾아볼 수 있다.이들은 원래 이 섬에 영구히 정착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섬 전체가 늪 수준의 습지대였기 때문에 주거 환경이 열악했고, 지대가 물러서 제대로된 건물을 지을 수 없었다. 그래서 고트족이 떠날 때까지 몇 년만 머물 곳으로 여겼다. 그러나 고트족은 서로마를 멸망시키고 아예 이탈리아에 정착해서 돌아갈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 이제 로마의 피난민들은 어쩔 수 없이 기한없이 머물만한 영구 정착지를 늪 지대 위에 건설해야 했다. 그들이 떠올린 방법은 물컹한 토층 아래 단단한 층까지 닿는 기다란 말뚝을 수직으로 섬 전체에 빼곡히 박는 것이었다. 이들은 이 어마어마한 육체 노동을 통해 말뚝을 박고 그 위에 석판을 깔아 비로소 건물을 지어올릴 지대를 마련할 수 있었다.
6세기 동로마 제국이 이탈리아 일대를 수복했을 때는 라벤나 총독부를 두어 통치했는데, 베네치아와 라벤나는 바닷길로만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에 베네치아는 자치적으로 운영되며 독자적으로 성장해나갔다. 이 때 랑고바르드족을 피해 온 난민들이 오랜 기간동안 더 유입되었다. 최초의 중앙 상임 통치 위원회(tribuni maiores)는 568년 시작되었다. 이 시기에 말라모코와 토르첼로 등 새로운 항구들이 여럿 건설되었고, 말라모코는 점차 이 지역 중심지가 되어갔다.
7세기 경에 규모가 발전해 자신들의 지도자를 선출하고 동로마 제국의 황제에게 자치를 인정받게 되었으며, 전하는 바에 따르면 697년에 최초의 베네치아 도제가 선출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1980년대 이후 학자들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최초의 베네치아 도제인 파올로 루치오 아나페스토 (697년 ~ 717년)와 라벤나 총독 파울로스는 동일 인물이었고, 이에 선출의 형식은 따랐으되 실제로는 아직 자치권을 인정받은 단계는 아니라는 추측이 있다. 그의 후임자는 본래 그 휘하 총사령관이었던 마르첼로 테갈리아노였다. 그러나 726년 성상 파괴령을 둘러싸고 동 • 서 교회간 논쟁이 일어나자 그레고리오 2세의 촉구에 반응하여 총독의 관할 지역 군인들과 주민들이 반란을 일으켜 총독을 살해했고, 그들 스스로 지도자를 선출하기로 한다.
처음으로 주민들에 의해 선출된 도제는 우르수스 (726년 ~ 737년)였다. 그는 레온 3세의 라벤나 정복을 지지해 군인과 선박을 지원했다. 이에 따라 교황은 베네치아에 각종 특권을 내려주고, 우르수스를 공식적으로 지도자로 인정하면서 "히파투스"라는 칭호까지 내리게 된다. 히파투스는 고대 로마 시대의 집정관(Consul)을 뜻하는 그리스어이므로 해당 지역의 통치권을 인정한다는 칭호라고 보면 된다.
751년경 랑고바르드족은 결국 동로마 제국의 라벤나 총독부를 무너뜨렸지만 베네치아 석호 지역은 남겨두고 있었다. 베네치아 석호 지역은 자치적으로 운영되고는 있었으나, 여전히 공식적으로는 동로마 제국령이었고, 주민들이 지도자로 선출하는 직위도 공식적으로는 동로마 황제가 임명한 총독이었다. 이때 총독은 말라모코 섬에 주재하고 있었고, 현재 베네치아로 알려진 리알토 지역은 그저 작은 섬에 불과했다. 랑고바르드족이 이탈리아 본토를 휘젓고 다니면서 이 지역으로 유입되는 난민들은 점점 더 늘어났고, 775년경에는 주교직이 신설되기에 이른다. 현재 베네치아 섬 동쪽 끝에 위치한 San Pietro di Castello가 당시의 주교좌였다.
한편 프랑크 왕국의 카롤루스 대제는 동로마 제국과의 세력 싸움의 일환으로 지금껏 그 어떤 민족, 그 어떤 나라도 별 신경 쓰지 않던 이 베네치아 석호 지대를 눈독들이기 시작한다. 그는 아들 피핀 카를로만을 시켜 배를 건조해 이 지역을 정복하는 일을 전담하도록 한다. 805년 베네치아 내부의 파벌 싸움 및 인접 도시 그라도와의 다툼으로 베네치아는 카롤루스에게 자신들을 보호령으로 삼아 달라고 요청했고, 이에 피핀이 베네치아를 장악하자 동로마 제국은 함대를 파견해 피핀을 몰아내고 베네치아를 수복하였다. 피핀은 이를 다시 수복하려 했지만 실패했고, 807년 임시 휴전 조약을 맺었다. 카롤루스에게 사신을 보낸 주모자들은 베네치아에 의해 동로마에 넘겨졌고 추방당했다.
810년 피핀은 코마키오의 선박을 빌려 베네치아를 공격했다. 당시 중심지였던 말라모코는 아드리아 해에 면하고 있어서 다른 항구를 사용해서 외양으로 나간 해군의 공격을 받기 쉬우므로 방어에 취약했다. 결국 베네치아인들은 말라모코를 버리고 리알토로 옮겨갔다. 프랑크군은 텅 빈 말라모코를 점령해 약탈하고 불태운 다음 베네치아군을 추적했으나 리알토 군도는 계속 저항했고 물길을 잘 아는 베네치아인과 달리 프랑크군은 얕은 석호 지대의 물길에 어두웠기 때문에 일부 선단이 좌초하고 만다. 공략에 시간이 걸리면서 케팔리니아 총독 파울루스가 지휘하는 동로마 제국 함대가 반격하자 피핀은 철수했지만 역병에 걸려 사망하게 된다. 812년 새로운 적인 불가르 제국을 견제해야 했던 동로마 제국과 아들과 군사를 잃은 카롤루스 사이에 강화 조약이 체결되는데, 베네치아 공화국은 동로마 제국의 속국으로 남고, 아드리아 해 일대 교역권을 인정받는 대신 카롤루스는 동로마 제국에게 제위를 인정받으며 단서조항으로 로마 황제가 아닌 그냥 황제로만 인정하는 선에서 동맹을 채결했다.
그리고 도제 아녤로 파르티차코 (811년 ~ 827년)는 도제의 주재지를 현재 베네치아 위치인 리알토로 옮기기로 결정하고 이곳에 최초의 두칼레 궁과 산 마르코 성당을 건설한다.
이렇듯 서로마 멸망 이후 각종 게르만 이주 세력의 각축장이 되었으며 카롤루스 대제의 정복을 거쳐 신성 로마 제국 소속이었다가 중세 성기(High Middle Ages) (11세기 ~ 13세기) 이후 하나 둘씩 정치적으로 독립하기 시작했던 다른 북이탈리아 도시 국가들과 달리, 베네치아는 애초에 로마 제국 자체의 인프라와 정통성을 비교적 잘 보존한 자치 공화국으로 시작했다. 즉, 북이탈리아의 대다수 지역들과는 달리 프랑크 왕국, 신성 로마 제국의 지배를 받았던 적이 전혀 없다. 이런 독자적인 역사적 기원은 먼 훗날 중세의 전성기를 거쳐 근세의 시련과 위기에도 베네치아 공화국이 열강들 사이에서 독립을 유지할 이데올로기적 원천이 되었다.
3.2. 동로마 제국의 패권 상실
동로마 제국의 지중해 패권 상실로 8세기 중엽에 이르면 베네치아는 북이탈리아에 남은 유일한 동로마의 거점이 되었다. 이때 베네치아는 친(親) 동로마, 친(親) 프랑크, 친(親) 랑고바르드, 완전한 자주국으로의 독립을 원하는 세력이 나뉘어 있었다. 이들은 끊임 없이 경쟁하여 세습 왕조가 창건되는 것을 막았다.베네치아는 이 시기부터 서서히 어촌에서 무역과 교역의 중심지로 탈바꿈 하였다. 조선업 또한 발전하여 후일 베네치아의 강력한 함대의 기반이 되었다. 한편 810년 프랑크의 피핀 카를로만과 전투하여 승리한 이후 베네치아는 사실상 독립하였다. 9세기 중반부터 베네치아의 해군력은 상당히 강해졌고, 이를 이용하여 이스트라 반도도 영향권 아래에 두게 되었다. 이 시기쯤 가면 베네치아 도제의 공식 명칭도 총독이나 공작에서 베네치아 도제로 공식화된다.
이후 10세기 말부터 내부분열이 완화되자, 베네치아는 아드리아 해로의 진출을 꾀하게 된다. 1000년 베네치아 도제 피에트로 2세 오르세올로(Pietro II Orseolo)는 크로아트 왕국과 아드리아 해에서 암약하는 슬라브 해적들을 때려잡으며 달마티아 일부를 차지한 이후 달마티아 공작(Dux Dalmatiae)를 칭했다. 1082년 베네치아는 동로마로부터 금인칙서를 받아내었고, 완전한 독립국이 되었다.
베네치아의 독립이 다른 북부 도시국가들에 비해 늦었던 이유는 아드리아 해 일대의 지리적인 특징에도 있었다. 아드리아 해의 양안, 즉 발칸반도와 남이탈리아를 모두 영토로 삼고 있던 동로마 제국은 베네치아가 약간이라도 반항할 낌새를 보이기만 하면 바로 해상 봉쇄를 시행하여 베네치아의 목줄을 죌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1071년 만지케르트 전투로 동방 방어선이 붕괴되어 동로마 제국의 발등에 급한 불이 떨어지고 동시에 로베르 기스카르가 이끄는 노르만 기사들이 남이탈리아를 장악하고 동쪽 그리스 본토를 넘보면서 베네치아에 신경 끌 여를이 없어지게 된 알렉시오스 1세는 그리스를 침공한 로베르 기스카르를 몰아내는데 베네치아의 지원을 받는 조건으로 각종 무역 혜택과 함께 베네치아 도제를 명목상 달마티아 공작으로 임명하면서 사실상 베네치아의 독립을 승인했다.
3.3. 십자군 전쟁
중세 성기에 베네치아는 동지중해의 무역을 지배하며 부를 축적했고 아드리아해 너머로 확장하기 시작했다.십자군 전쟁 기간에는 여러 십자군들을 해로로 운송해주고 더 나아가서 우트르메르의 십자군 국가들에게 보급품이나 해군력을 제공해 줌에 따라 상당한 정치적, 금전적 영향력을 얻게 되었다. 12세기 동안에는 베네치아에 대규모의 조선소가 건설되었다.
제4차 십자군 전쟁 때는 제위에 오르게 도와준다면 거금을 지불하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않은 동로마 황제 알렉시오스 4세를 징벌하기 위해 도제인 엔리코 단돌로가 직접 앞장서서 콘스탄티노폴리스 공격에 나서기도 했다. 이미 제4차 십자군이 콘스탄티노폴리스 내에 주둔해 있던 덕분에 어렵잖게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점령하는 데에는 성공했으나, 정교회 국가들로부터 어그로가 끌리게 되었고 심지어는 교황에게 파문까지 당하게 되었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무역이 많이 오가는 콘스탄티노폴리스 무역 지대에 라틴 제국을 세웠던 덕에 서유럽 경제의 중심지이자 동지중해 무역 독점 국가로 등극하면서 동지중해의 여왕이라고 불릴 정도로 엄청난 부를 과시하게 되었다. 또한 동로마 제국을 무너뜨리면서 크레타, 에우보이아 등 전략적 가치가 큰 영토들을 획득하게 되었으며, 이때 낙소스도 영향권에 두게 되었다. 1221년에는 몽골과도 무역 협정을 맺었다.
3.4. 제노바 공화국과의 전쟁
자세한 내용은 베네치아-제노바 전쟁 문서 참고하십시오.13세기 ~ 14세기에는 제노바 공화국과 4차에 걸친 전쟁을 벌였다. 1261년 라틴 제국이 니케아 제국에게 멸망하고 미하일 8세가 동로마 제국을 재건하자 베네치아의 소아시아와 흑해 무역은 큰 타격을 입었고, 베네치아의 빈 자리를 동로마 제국과 손을잡은 제노바 공화국이 빼앗으려고하자 양국은 동지중해에서 대립하기 시작하였다. 베네치아만큼의 해군 역량을 보유했던 제노바와의 전쟁이었기에 때로는 큰 패배를 겪기도 하였고, 특히 4차 전쟁에서는 제노바, 헝가리 왕국, 파도바에 의해 도시 전체가 봉쇄되고 제노바군이 도시 외곽까지 돌입하는 등 멸망의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물론 반격을 가해 재기에 성공했지만 휴전을 조건으로 많은 영토들을 잃고 말았다. 특히 헝가리에게는 달마티아의 대부분을 잃었다.
제노바와의 전쟁을 겪은 후 베네치아는 섬 주위에 육상 영토를 확보할 계획을 세웠다. 베네치아 인근 육상 국가인 파도바가 제노바 편을 들면서 순식간에 도시가 고립되었던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4차 베네치아-제노바 전쟁이 끝난 뒤 베네치아는 평화적인 합병 또는 술수를 통해 롬바르디아 내륙으로 진출해 1405년 파도바를 정복하는 등 본토 속령들을 넓혀 나갔으며, 1402년에는 밀라노까지 영향권 하에 넣게 되었다. 1410년 베네치아의 함대는 3,300척 규모에 달했으며, 헝가리가 쇠퇴하면서 달마티아도 다시 회복했다.
한편 팔레올로고스 왕조의 기치 아래에서 부활한 동로마 제국은 다시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고 그 틈을 타서 튀르크족이 아나톨리아 서부로 들어와 동로마령 아나톨리아를 갉아먹기 시작했다. 그리고 1299년에는 오스만 1세가 오스만 베이국을 세우고 동로마 제국의 잔여 아나톨리아 영토를 잠식해 나가기 시작했다.
3.5. 오스만 제국과의 대립
소아시아 북서부의 조그마한 세력에 불과했던 오스만은 건국 이후 동로마의 영토를 조금씩 잠식하더니 발칸반도 일대가 내전과 계승분쟁, 자연재해 등으로 혼란스러운 틈을 타 다르다넬스 해협을 건너 유럽까지 진출하였고 발칸 반도와 아나톨리아를 아우르는 강력한 세력으로 성장했다. 오스만 입장에서 볼 때 자신들의 앞바다인 에게 해와 동지중해 일대의 헤게모니를 쥔 베네치아는 눈엣가시같은 존재였고, 이후 베네치아와 오스만은 동지중해의 패권을 두고 수백년간 충돌하게 되었다.물론 1396년 오스만이 십자군을 격파한 니코폴리스 전투 당시 베네치아는 대 오스만 십자군을 지원하고 있었고, 1413년부터 1419년까지 에게해와 마르마라해 일대에서 베네치아와 오스만 해군 사이에 일련의 교전이 벌어지는 등 이전에도 두 세력 간에 대결은 있어 왔다. 그러니까 베네치아와 오스만과의 본격적인 충돌은 1423년 테살로니키 공성전부터였다. 1422년 오스만 군이 동로마령이었던 테살로니키를 포위하자 위기에 빠진 동로마는 베네치아의 지원을 받는 조건으로 테살로니키를 베네치아에 넘겼는데, 자신들이 포위하는 사이 테살로니키가 베네치아 땅이 된 사실을 모르고 있었던 오스만은 나중에 사실을 알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동로마와 베네치아가 맺은 조약이 무효라고 주장하며 테살로니키에 대한 포위를 풀지 않았다. 결국 수년간의 포위 끝에 1430년 베네치아는 테살로니키를 포기하게 되었고 테살로니키는 이때 오스만의 영토가 되었다.
오스만 술탄국이 동로마 제국을 공격한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 때, 베네치아는 대규모 함대를 편성해 지원군을 파견했다
베네치아 구원 함대가 제때에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도착했다면 오스만 함대의 포위를 풀었을 가능성이 많았다. 당시 오스만은 육상 강국이었지만 해군은 연안해군 수준이었다. 차라리 당시 오스만 출신 해적들이 출전하는 게 나았을 정도였으므로 해전이 벌어지면 베네치아측의 승산은 충분했다. 그렇게 되면 공방전 전체의 흐름에 큰 영향을 줄 수도 있었다. 물론 오스만 술탄국이 에게 해와 마르마라 해 사이에 위치한 다르다넬스 해협의 양쪽 해안에 요새를 세웠기 때문에 베네치아 구원 함대가 접근하기 어려웠을 것이라 보기도 한다. 그러나, 공방전 초기이기는 했지만, 제노바의 함선 3척과 크레타에서 군량을 구입하고 돌아가던 동로마 함선 1척 등 4척이 오스만 함대의 포위를 뚫고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입성하기도 했다. 물론 오스만 요새의 대포에 맞아 적잖은 타격을 입었겠지만, 접근 자체가 불가능인 상태는 아니었으므로 베네치아 구원 함대가 적시에 개입했다면 전쟁의 흐름을 바꿀 가능성이 높았다. 한편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베네치아 거류구는 베네치아 공화국의 깃발을 내걸고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에서 최후까지 싸웠다.
사실 메흐메트 2세가 이끄는 오스만군은 베네치아 단독으로 육상전을 벌이기에는 너무 강대했다. 육군의 규모가 비교적 작은 편인 베네치아는 도시국가치고는 큰 영토를 이용해서 1만단위의 육상 병력을 동원할 수 있겠지만 그것만 가지고는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성전에 참가했다고 해서 베네치아 혼자서 로마의 멸망을 막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이 때의 동로마 제국은 이미 군사적 방파제로서의 역할을 완전히 상실한 상태였고, 그저 콘스탄티노폴리스와 펠로폰네소스 반도 일부만 가지고 있었고 수도를 제외한 나머지 영토들은 직접 지배가 아니라 황족이 다스리는 신하국 영토였던 비참한 상태라서 오스만 술탄국에 외교적으로 빌붙으며 간신히 생명만 유지하고 있던 불안한 상태였다. 장기적으로 로마의 멸망을 막으려면 다른 서유럽 국가들의 협조가 필요했을 것인데 당시 서유럽은 동유럽에 눈을 돌릴 상황이 되지 못했으므로 동로마 제국의 멸망은 필연적이었다.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 이후 베네치아는 일단은 동로마 제국 시절의 무역특권을 어느 정도 유지하였으나, 오스만 제국과 동지중해의 제해권을 두고 충돌하게 되면서 이 특권을 잃게 되었다. 하지만 베네치아는 적은 영토를 가지고도 발칸반도와 소아시아, 서아시아 일대를 세력권에 넣었던 오스만 제국과 수백년을 싸웠다. 베네치아가 도시국가치고는 당시 유럽의 중소급 국민국가에 가까울 수준의 큰 영토를 가지고 있고 인구도 식민지와 본토 속령까지 다 합쳐서 1557년에는 215만 명에 도달하였으며 경제력과 도시화율도 높긴 하지만 그 정도 가지고는 오스만 제국과 정면승부하기에는 부족한 것을 감안하면 매우 놀라운 일이다.
이는 오스만 제국을 창건한 투르크인이 본래 유목민족이어서 바다에 강하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그러나 이마저도 오스만 제국에 케말 레이스라는 걸출한 해군 지휘관이 등장하고, 셀림 1세의 치세 (1512년 ~ 1520년)에 오스만이 직속 함대의 수를 늘리며 북아프리카의 바르바리 해적들을 해군으로 끌어들이는 등 해군을 크게 강화하면서 유명무실해진다.
1463년 오스만 제국은 아테네의 튀르크인 지휘관에게 속해 있던 알바니아인 노예가 베네치아령으로 도망간 사건을 빌미로 베네치아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베네치아는 알바니아와 헝가리, 백양 왕조 등과 동맹을 맺고 오스만에 대항하였으나, 육지에서 강력한 면모를 보여주는 오스만군을 당해낼 순 없었다. 네그로폰테와 모레아, 알바니아 일대가 오스만의 공세에 무너지면서 결국 1479년 베네치아는 패배를 인정하게 되었다. 네그로폰테와 렘노스, 알바니고, 달마티아 일대를 오스만에게 넘긴 베네치아는 배상금과 연공까지 지불하기로 했다.
1499년 오스만은 베네치아를 상대로 다시 전쟁을 걸어왔다. 케말 레이스가 이끄는 오스만 해군의 맹활약으로 이번 전쟁에서도 베네치아는 패배하고 말았다. 1503년 오스만과 조약을 체결한 베네치아는 알바니아의 거점인 두라초, 그리고 모레아 반도의 코론과 모돈을 오스만에게 할양하였다. 이렇게 베네치아는 4차 십자군 후부터 유지되고 있던 동지중해에 대한 독점적 지배권을 상실하고 말았다. 물론 독점적인 지배권을 상실했다는 것이지 동지중해에서의 베네치아의 영향력은 1669년 크레타 공방전이 끝난 후 크레타의 상실 이전까지는 유지되고 있었다.
3.6. 이탈리아 반도 북부 진출
베네치아는 제노바와의 전쟁 이후 도제 미켈레 스테노의 정책아래 육상으로의 확장을 시도했다. 트레비소(1389년)를 시작으로, 베로나(1405년), 파도바(1405년), 롬바르디아의 브레시아(1426년), 베르가모(1428년)까지 진출하여 밀라노 공국과 접하게되었으며, 16세기 이후 해상 영토의 상실을 만회하기 위해 진출 방향을 이탈리아 반도 내부로 돌려 베로나, 파도바 지역을 베네토로 칭하고 볼로냐 등 로마냐 지역에 베네치아 속령을 설치했다. 이런 식으로 형성된 영토를 본토 속령이라고 불렀다.교황 율리오 2세는 베네치아에게 볼로냐 지역의 반환을 통보했으나 베네치아는 거절하였고 갈등이 촉발되었다. 1508년 12월에 교황이 주도하여 프랑스, 스페인, 신성 로마 제국 등과 캉브레 동맹을 결성하면서 베네치아를 압박했다. 율리오 2세가 오스트리아 대공국, 카스티야 연합 왕국-아라곤 왕국, 프랑스를 끌어들여 결성한 캉브레 동맹과 벌인 1509년 5월 아냐델로 전투에서 베네치아는 처참히 패배하고 그동안 얻은 이탈리아의 영토를 다 토해냈다.
그후 스페인과 합스부르크 세력에 의해 북이탈리아 영토를 잃은 데 불만을 품고 있던 프랑스와 다시 동맹을 맺은 베네치아는 1515년에 이르러 아냐델로의 패배로 인한 피해를 만회하고 영토를 회복하였다. 하지만, 그 이후 북이탈리아에서 더 이상 영토를 크게 확장하지는 못 했다.
3.7. 몰락
동로마 제국의 멸망 이후 코스탄티니예 무역 경로를 독점하게 된 오스만 제국에 의해 동지중해 독점 패권을 잃게 되고, 16세기 초에는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대서양을 이용하는 무역 루트를 개척하면서 전통적인 베네치아 무역의 영향력은 감소하기 시작했다.그간 베네치아가 독점해오던 향료가 포르투갈에 의해 더 싼 가격으로 유럽에 들어오기 시작하자 1521년에는 포르투갈에게 그 향료 전량을 구매하겠다고 절박하게 부탁했으나 당연히 거절당했다. 향신료가 유럽에서 부와 패권을 좌지우지했던 시대에서 포르투갈이 들여온 향신료를 싸게 사서 되팔겠다는 것은 포르투갈에게 부와 패권을 도로 내놓으라는 의미다. 포르투갈의 입장에서는 미쳤다고 자신들에게 온 부와 패권을 베네치아에게 넘겨줄리가 없고, 자기들이 그냥 팔면 되는 걸 굳이 베네치아를 통해 팔 이유도 없었다.
하지만 곧 오스만 제국이 인도양 함대를 창설하여 포르투갈을 견제하기 시작한 데다 인도인들의 저항도 있어, 알렉산드리아-베네치아를 통한 향신료 교역은 다시 증가했다. 포르투갈 측 첩보 문서에 그냥 인도를 포기하고 베네치아에서 향신료를 사는 게 이익이라고 쓰여 있기까지 했던 시기도 있었다. 그리고 범선 시대에 아프리카를 왕복해야 하는 비용은 절대 적지 않았던 만큼, 동지중해 무역은 여전히 수익성이 있었다. 당시 베네치아는 바다에서 여전히 매우 강했고, 갤리가 사용되던 1600년대 전까지는 유럽 최강의 해군국 중 하나였다. 다만 베네치아가 오스만이랑 정치적으로 대립하는 중이였고 동지중해 무역도 네덜란드라는 효율적인 상인 국가가 등장하면서 채산성이 떨어지며 막을 내리게 되었다.
1571년 베네치아는 스페인, 교황령과 함께 신성 동맹 함대를 구성하여 레판토 해전에서 오스만 해군에게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영토면에서는 오히려 키프로스를 상실하면서 레판토에서 오스만의 수염을 태우는 대신 한쪽 팔을 뽑혔고 전염병으로 도시 인구의 30%가 죽어나가기까지 했다.
그리고 레판토 해전 전후로 나폴리 왕국과 관계가 나빠져 곡물을 수입할 수 없게 되자 식량 확보 문제가 닥치기 시작한다. 당시 나폴리는 스페인 합스부르크 왕조에서 파견한 부왕(副王), 즉 총독이 다스리고 있어서, 사실상 스페인 영토였다. 그리고 신성동맹을 결성했을 당시만 하더라도 스페인과 베네치아의 이해관계가 어긋나고 있었기 때문에, 나폴리와의 사이도 틀어지는 게 당연지사였지만 막상 당해보니 타격이 장난이 아니었다.
따라서 어쩔 수 없이 오스만 제국과 무역 협정을 체결하기 된다. 이런 과정에서 당시 콘스탄티노폴리스 주재 베네치아 대사는 오스만 제국의 재상이었던 소콜루 메흐메트 파샤에게 앞서 말한 수염을 태우는 대신 한쪽 팔을 뽑혔다는 비야냥까지 듣게 된다. 다만 그는 본래 전쟁에 반대하는 입장이었던 데다 레판토에서 패한 책임을 자신에게 묻는 관료들이 있었기에, 본심보다 조금 강경한 발언을 한 것 같기도 하지만 그걸 감안해도 상당히 굴욕적인 장면이었다.
그러나 당연할 수도 있지만 기독교 국가들, 특히 스페인은 엄청나게 반발했다. 이후로 지브롤터 해협을 못 건너게 되어 주요 수출 대상이었던 잉글랜드에 가지 못하게 되었고, 외교 관계가 나빠져 조선소에 필요한 나무를 충분히 공급하지 못하게 되었다.
설상가상으로 레판토에서 패한 오스만 제국이 서지중해로의 진출을 포기하는 대신 해적들에게 더 큰 힘을 실어 주어 진출을 방해하기로 결정해 베네치아의 청년들이 선원이 되는 전통을 유지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점점 고립되어가던 베네치아는 교황과의 다툼 끝에 파문까지 당하고 말았다. 이후 베네치아는 예전의 부와 힘을 잃게 되었다. 그래도 1600년 베네치아 공화국의 수도였던 베네치아의 인구는 14만명에 달할 정도였고 이후에도 한동안 무역 대국으로 행세했으나 오스만 제국에 의해 무역 거점들을 하나둘씩 빼앗겨나가는 사태까지 해결하지는 못했다.
17세기에는 베네치아 최후의 무역 거점인 크레타를 두고 무려 20년 넘게 오스만 제국과 싸웠다. 이 전쟁에서 오스만은 수많은 병사와 무기로 크레타를 맹공격했지만, 베네치아는 당대의 부국답게 엄청난 보급으로 치열하게 항쟁했다. 이때 베네치아측 사상자는 3 ~ 6만, 오스만측 사상자는 무려 12 ~ 24만에 달했다. 하지만 결국 이 전쟁은 양국의 재정을 파탄 상태로 만들었고, 더 이상의 전쟁은 조국에 해가 된다고 판단한 베네치아 수비대 측 사령관 프란치스코 모로시니 (1619년 ~ 1694년)가 1669년에 항복함으로써 크레타는 오스만 제국에 넘어가게 되었다.
이 전쟁에서 양국은 엄청난 자금을 썼는데, 항복 당시 베네치아 공화국이 크레타 1년 방어에 사용한 자금은 이미 베네치아의 1년 세입을 초과했다. 이후 모로시니는 2차 빈 공방전에서 오스만이 패배하자 결성된 신성 동맹에 베네치아가 참가하자 복귀, 베네치아군을 이끌고 그리스에서 오스만군과 싸웠으며 1688년에 도제로 선출되었고 1694년에 사망했다. 1699년에 신성 동맹이 승리하면서 체결된 카를로비츠 조약에서 베네치아는 크레타를 수복하지 못했지만 보상으로 펠로폰네소스 반도 남부에 있는 모레아와 일부 영토를 오스만에게 할양받았다.
그 후 베네치아는 모레아를 다시 오스만에게 잃었지만 본토 속령에서의 농업, 무라노 섬의 유리공예와 가공기술, 그리고 관광업으로 국가를 유지했다. 베네치아는 자신들의 앞마당이라 할 수 있는 아드리아 해에 다른 세력을 들이지 않는 데 주력했고, 1716년 코르푸 섬을 성공적으로 방어하며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다. 결정타는 당시 불었던 태풍으로 오스만군이 심각한 피해를 입었고 퇴각하게 된 것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3년 후, 극강의 방어력을 보여준 코르푸 섬의 요새는 낙뢰가 화약고 위로 떨어져 대파되었으나 섬 자체는 계속 베네치아가 가질 수 있었다.
18세기 베네치아의 바이올리니스트인 안토니오 비발디의 전기를 보면 비발디가 활약하던 당시의 베네치아는 쇠퇴 국면에 처해 있었다는 표현이 굉장히 많다. 17세기 이후로 전쟁이 자주 일어났기 때문에 전쟁 고아가 급증했고, 천주교 사제 시절 비발디의 주 업무가 이런 고아들을 돌보면서 바이올린을 가르치는 일이었다.
3.8. 멸망과 그 이후
3.8.1. 멸망 후의 베네치아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자, 베네치아의 마지막 도제가 된 루도비코 마닌은 오스트리아를 따라 대불동맹에 가담했다. 그러자 1797년 당시 북이탈리아에 깊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던 합스부르크 제국을 저지하기 위해 나폴레옹이 이끄는 프랑스군이 북이탈리아를 침공하여 이탈리아 원정을 감행했다.결국 베네치아의 이탈리아 반도 쪽 영토가 나폴레옹의 프랑스군에게 점령당하자, 마닌과 베네치아 정부가 항복하면서 베네치아 공화국은 멸망했다. 나폴레옹은 베네치아에 입성할 때, 베네치아를 관통하는 거대한 Z자 (혹은 S자) 형태의 대운하를 보고 경탄하여 극찬했다고 하지만 개인적 감상과는 별개로 베네치아에 대한 처분은 가혹했다.
이탈리아 전쟁 결과 맺어진 캄포포르미오 조약(1797년)으로 프랑스는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를 포함한 라인 강 서쪽의 신성 로마 제국 영토를 얻고 북이탈리아에 프랑스의 괴뢰국인 치살피나 공화국과 리구레 공화국을 세우는 대신 보상 차원에서 베네치아 공화국 영토 대부분을 합스부르크 제국에 할양했다. 단, 베네치아 공화국의 영토 중 브레시아는 치살피나 공화국에, 이오니아 제도는 프랑스에게 할양되었다. 그리하여 베네치아는 합스부르크 통치 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멸망할 당시였던 1800년경의 베네치아의 인구는 140,000명으로 과거보다 늘어나지는 않았지만 여전히 상당한 인구였다.
이후 1805년 나폴레옹이 아우스터리츠 전투에서 오스트리아를 박살내고 체결한 프레스부르크 조약으로 다시 베네치아를 넘겨받아 이탈리아 왕국에 편입시켰다. 나폴레옹의 몰락 이후에는 "롬바르도-베네토 왕국"이라는 이름으로 오스트리아의 지배를 받게 되며 1848년에 다니엘레 마닌이 1848년 혁명을 기회삼아 독립운동을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마닌은 사후 베네치아 시에 동상이 세워졌다. 결국 1866년 신생 이탈리아 왕국으로 이양되었다.
3.8.2. 멸망 후의 베네치아 해군
멸망 당시 베네치아의 해군력은 전성기의 모습을 완전히 상실해서, 전투함이라고 부를 수 있는 함선이라곤 갤리선 7척을 포함한 11척에 불과했다. 이 때문에 프랑스군이 압류한 함선이라곤 조선소에서 건조 중이던 프리깃 2척이 전부였다. 이 프리깃 2척은 나중에 이집트 원정에서 나폴레옹이 프랑스 본국으로 탈출할 때 사용한 선박이기도 하다.남은 해군 인프라는 오스트리아 제국이 고스란히 흡수하여 황제군 해군을 만드는 데 써먹는다. 황제군 해군은 훗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해군이 되어 이탈리아의 통일을 방해하게 된다. 당시 오스트리아 해군은 이름만 오스트리아 해군이었을 뿐, 절대 다수가 베네치아에서 만들어진 함선들과 베네치아인 장교, 베네치아인 선원들로 구성되었다.
반면 오스트리아 해군과 경쟁하던 이탈리아 왕립 해군은 과거 베네치아와 경쟁하던 제노바 공화국 해군을 기반으로 한다. 정확히 말하자면 1815년 사르데냐 왕국이 제노바를 집어먹곤 그 인프라로 사르데냐 해군을 세웠고, 이탈리아 통일 때 양시칠리아 왕국 해군까지 흡수해 만들어진 것이 이탈리아 왕립 해군이다. 결국 베네치아와 제노바의 라이벌 관계가 오스트리아 해군과 이탈리아 해군의 경쟁 관계로 계승된 셈이다.
제국 해군에 짙게 남았던 베네치아의 유산은 1848년 혁명 이후 오스트리아 해군 내에서 잠재적 위험요소인 이탈리아계에 대한 숙군과 독일화의 바람이 불면서부터 본격적으로 제거되기 시작했고, 1866년 이탈리아가 롬바르디아-베네치아 왕국을 탈환할 때 같이 이탈리아의 품으로 돌아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국 해군 내에는 오스트리아 연해 지대와 달마티아 왕국 출신 이탈리아계 장병들이 상당히 많았고 오스트리아가 이탈리아를 상대로 대승을 거두었던 리사 해전 당시에도 제국 해군은 베네토어로 명령을 내리고 만세를 외쳤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4. 정치 체제 및 조직
15~18세기의 베네치아 공화국의 정부 조직 |
또 명색이 '공화국' 이라는 간판을 건 이상[8], 베네치아는 이념적으로는 도시를 시민들의 공공재산으로 여겼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자면 베네치아 공화국은 현실은 소수의 가문이 통치하는 과두정적 요소가 많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네치아 공화국이 이념적으로는 많은 시민들의 (최소한 당시의 기준으로는 '많은') 정부와 주권에 대한 참여를 지향하는 체제이긴 했다.
대공의회(Mazor Consegio)의 회원들이 투표를 통해 국가원수인 베네치아 도제를 선출했으며, 일단 선출된 도제의 임기는 종신이었다. 하지만 실제 국가의 최고 권력은 도제와 그 보좌관 6인, 그리고 임기 1년의 위원 10명으로 구성되는 10인 위원회(Consejo de i Diexe)에 있었으며, 도제도 10인 위원회 내에서는 다른 위원들과 동등하게 단 1표만을 행사할 수 있었다. 심지어 제55대 도제인 마리노 팔리에로는 1355년 4월 자신에게 권력을 집중시키려는 친위 쿠데타를 일으키려다가 10인 위원회에게 체포되어 도제 직을 박탈당하고 사형당했다. 이러한 정치형태로 인해 피렌체 공화국처럼 특정 가문이 사실상 도시 권력을 장악하는
시뇨리아(Serenissima Signoria) 역시 국가 권력의 중추를 담당했다. 오죽했으면 도제의 장례식날에서조차 공화국 시민들이 상복도 입지 않고 도제는 죽었지만 시뇨리아는 살아있다며 노래할 정도였다. 이 시뇨리아는 10인 위원회와는 별개로, 도제와 그 보좌관 6인, 그리고 40인 위원회의 지도자 3인으로 구성되어 대평의회에서 10인 위원회의 위원 10명과 함께 총 20개의 권좌에 도제를 중심으로 앉아 대평의회를 주도했다.
베네치아 도제는 동로마 제국의 봉신으로서 달마티아 공작을 겸하고 있었다. 실제로 8세기 ~ 9세기까지 베네치아는 명실상부한 동로마의 위성 국가였으나, 9세기 이후 아랍과 노르만의 침입으로 이탈리아 남부의 동로마 거점들이 무너지자 베네치아는 명목상의 봉신으로만 남게 되었다. 하지만 이 지위는 베네치아가 서유럽 세력, 특히 교황청, 신성 로마 제국 등으로부터 정치적, 종교적 독립을 지키는 적당한 명분은 될 수 있었다. 베네치아는 강력한 상업을 통해 이룬 재력과 군사력 및 서유럽 최고의 외교력으로 이것을 충분히 활용했다. 그 이외에도 공화국의 전성기 시절에는 도제가 사실상 베네치아의 식민지였던 그리스의 크레타 섬에 세워진 명목 상의 동군연합 왕국인 칸디아 왕국의 국왕을 겸직했고, 역대 도제들은 오스만 제국의 침공으로 인해 크레타를 영구히 상실하게 된 17세기 중엽까지 칸디아 국왕을 칭했다.
베네치아 공화국의 정부 조직에는 위의 대공의회와 10인 위원회 및 시뇨리아 외에도 다양한 목적으로 운영되는 행정조직들이 있었다. 여타 중세 유럽의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베네치아 공화국의 행정조직들 또한 중세 중기를 기점으로 폭발적으로 신설되기 시작했다. 이탈리아어 위키백과 베네치아 공화국 정부
5. 영토
베네치아 공화국의 영토는 3가지로 구분된다. 도시국가치고는 매우 커서 영토를 모두 합산하면 중세의 유럽 중간급 국가 수준의 영토를 자랑했던 베네치아 공화국 답게 도시국가의 특징과 국민국가의 특징이 섞인 것이 특징이다.5.1. Dogado
베네치아 공화국의 본토. 베네치아의 주요 지역과 석호 및 늪지대와 포강과 이손초강의 하구등을 포함하는 지역이다. 예시베네치아 정부의 직할 통치가 이루어졌으며 베네치아의 중심지역을 제외한 다른 곳은 포데스타(podestà)라고 불리는 총독과 비슷한 고위 직책을 가진 사람이 보통 16개월 정도의 임기를 가지고 부임해서 통치한다.
5.2. Stato da Mar
베네치아 공화국의 해양 식민지. 이스트리아, 달마티아, 베네치아령 알바니아, 이오니아 제도, 펠로폰네소스 반도, 크레타 섬, 키프로스 등을 포함하는 해양 거점이다. 예시베네치아 공화국이 아드리아해를 석권하기 시작할 무렵부터 동부 지중해의 제해권을 쥘 때까지 항로와 무역로의 중간 거점 역할로 점령한 지역이며 통치 방식은 다양했으나 보통은 베네치아 본토에서 파견된 총독 역할을 하는 고위 관료가 현지의 지도자 역할을 수행했다.
오스만 제국이 확장되기 시작하면서 하나둘씩 빼앗기다가 베네치아 본토와 가까운 일부는 Domini di Terraferma 에 편입된다. 그래도 아드리아해 입구 근방의 작은 섬등을 비롯하여 예전의 동부 지중해 해양강국의 파편이라고 할 수 있는 약간의 영토들은 베네치아 공화국의 멸망시까지 잔존하였다.
5.3. Domini di Terraferma
베네치아 공화국의 이탈리아반도 방면 영토. 주로 베네치아 주변의 베네토를 중심으로 한 지역을 말한다. 예시보통 본토 속령이라는 뭔가 모순된 명칭으로 불린다. 베네치아와 베네토는 원래 같은 지방이었으며 중세 초기의 혼란 때문에 분리된 것에 가까워서 인종이나 언어가 동일하며 풍습도 비슷하므로 식민지라고 보기에는 곤란하다는 특징을 가진다. 하지만 베네치아 공화국의 입장에서는 본토는 Dogado만 해당되므로 속령이 맞기 때문에 (이탈리아)본토의 (베네치아)속령이라는 말을 줄여서 본토 속령이라고 한다고 이해하면 쉽다.
서로마 제국이 멸망하고 동로마 제국이 이탈리아반도에 대한 영향력이 축소되는 등 혼란스런 중세 초기가 지나간 이후 베네치아 본토의 배후를 지키는 목적과 본토를 부양할 목적으로 주변 영토가 필요해서 점령하기 시작한 것이 본토 속령의 본격적인 시발점이었다. 실제로 베네치아-제노바 전쟁 기간중에 베네치아 인근 육상 국가인 파도바가 제노바 편을 들면서 순식간에 도시가 고립되었던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통치 방식은 베네치아의 직할 통치와 현지에 잔존한 원래 통치 조직의 결합이며 베네치아 정부의 명령을 따른다는 전제 아래서 현지의 통치 조직중 일부가 제한된 지방자치 방식으로 운영되며 현지의 관습법도 일부는 통용된다.
1289년부터 시작된 본토 속령은 1509년에 최대 영토를 기록하였으며 이탈리아 북동부의 대부분과 이스트리아 반도와 달마티아 해안지역을 포함하였으며 인구도 약 1,800,000명을 기록하여 당시 베네치아 본토의 인구였던 약 150,000명의 12배를 넘어갔으며 무역로와 제해권을 상실하기 시작한 베네치아 공화국 후반기의 중요한 경제 거점으로 자리잡는다.
이탈리아 반도의 싸움에 휘말려서 일부 잃기도 하고 Stato da Mar의 일부 지역이 편입되기도 하는 등 변화가 있었으나, 베네토 지역 대부분은 멸망할 때까지 베네치아령이었다.
6. 베네치아인
베네치아인들은 자신의 국가에 대한 자부심이 굉장히 강했다고 한다. 이 때문에 라이벌이었던 제노바 공화국이 쇠락하면서 코르시카 섬을 프랑스에 넘길 때, "우리 공화국에서는 상상도 못할 일" 이라며 그들을 비웃기도 했다.[9]그러나 이러한 자부심이 도시국가라는 특성과 결합하면서 도시국가 치고는 매우 넓은 영토를 소유했음에도 불구하고 베네치아 본토의 사람들과 다른 사람들을 차별하는 근거로 작용하였다. 따라서 개국 초기에 편입한 달마티아인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식민지의 주민들을 가혹하게 대했다. 그리고 달마티아인을 차별하지 않은 이유도 개국 초기에 자다르를 비롯한 달마티아 해안지역을 일찍 편입한데다 본토 속령인 베네토 주와 인접한 관계로 달마티아인들이 봉기라도 일으키는 날에는 본토가 위험해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달마티아에서 징발할 베네치아 공화국 해군을 위한 인력이 필요했기 때문인 것도 있었는데, 무슨 이유를 대더라도 베네치아 본토인들이 자비롭기 때문은 결코 아니었다.
베네치아 공화국의 식민지인 차별이 얼마나 심각했는지 키프로스인이 몰래 오스만 제국의 쉴레이만 1세에게 찾아가 키프로스를 정복해 달라 요청했고, 키프로스가 함락당할 때 기독교도들이었던 키프로스인들이 이교도인 오스만 제국군을 환영할 정도였다고 한다. 이런 현상이 키프로스만의 문제는 아니라서 Stato da Mar를 구성하는 현지 주민들은 크레타 섬이나 모레아 지역 같은 중요 지역만 따져본다고 해도 사실상 노예에 가까운 취급을 받고 있었다[10]. 베네치아 공화국은 식민지를 효율적으로 활용은 했지만 민심은 전혀 얻지 못했던 것이며 지속적인 반란에 시달렸다.
이러한 차별은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베네치아 본토인 섬 위의 도시에 사는 사람들과 이탈리아 본토에 사는 사람들 사이에도 존재했다. 덕분에 본토 속령의 면적이 넓어지고 인구도 베네치아 본토의 10배가 넘어가는 상황에서도 본토 속령의 인구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다. 심지어 본토 속령의 중요도가 높아지면서 베네치아 공화국의 후기에 가서는 베네치아 출신이 아닌 본토 출신의 귀족이 도제가 되자 망조라며 불안해하기도 했다. 베네치아인들의 우월주의는 이와 같이 식민지와 속령 주민들의 반발을 사 문제가 되기도 했다.
베네치아 본토의 도시내에서도 차별이 심했는데, 도시 거주자중 실제로 시민권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은 10%도 안되었고, 다수는 외국인 노동자나 노예였다. 그 위에는 주변 지역이나 외국에서 이주해온 상공 이민자들이 있었는데 특히 독일계 이민자들은 주로 베네치아의 모직 작업장에서 생활했다고 한다. 그 위에는 관료로 선출될 수 있는 소수의 시민권자들이 존재했다. 계급 피라미드의 맨 위에는 베네치아의 핵심 가문들이 모여 만든 대평의회(Maggior Consiglio)가 자리했으며, 이 대평의회에 참여할 수 있는 권리는 일부 가문에 제한돼 상속되었는데 이들은 전체 인구의 3% 정도인 소수였다. 악명높은 유대인 게토도 베네치아가 원조였다.
종합하자면 베네치아인들의 애국심 덕분에 키오자 전투 같은 상황에서 평범한 시민들이 나라에 돈을 기부하고 군에 입대해 결국 승리한 원동력으로 작용하는 이점이 존재했으나 자부심에 따른 심각한 차별조치는 충분히 본토의 주민으로 융합될 수 있었던 본토 속령의 주민들까지 따로 놀게 되는 원인으로 작용하여 국민국가로 발전할 수준의 영토와 인구를 보유했지만 도시국가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한 채 마지막 순간에 나폴레옹에게 멸망당하고 끝내 재건하지 못했던 원인 중 하나가 되기도 했다.
오스만 제국과 오랜 세월동안 대립관계였지만 오스만 황제의 후궁들 가운데 베네치아 출신도 있었다고 전해진다. 셀림 2세의 애첩인 누르바누 술탄[11]과 무라트 3세의 애첩인 사피예 술탄이 이들이라고 하는데, 오늘날에는 누르바누의 경우 유대계라는 주장도 있는데다가 사피예는 알바니아 출신이라는 학설이 유력하다. 하지만 누르바누는 기록에 따라 베네치아를 싫어했다고도 하지만 오스만 제국 내 베네치아 상인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고도 하며, 사피예의 경우, 확실히 친베네치아적이어서 콘스탄티노폴리스 주재 베네치아 대사가 본국에 "이 여자를 잘 구슬리면 우리 공화국에 유리할 듯 합니다."라는 식의 보고서를 써 보내기도 했다.
참고로 공화국의 재기를 주장하는 정당의 조사에 따르면 독립을 원하는 주민의 수가 무려 89%라고 한다. 위 투표는 온라인 투표라서 실제 여론과는 어느 정도 차이가 있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그럼에도 베네토 지역이 다른 북부 지역에 비해서도 독립을 원하는 목소리가 강한 것은 사실이다. 물론 이탈리아 정부가 허락해줄 리는 없겠지만 만에 하나 경제난이 심화되어 주민들의 반발이 현재보다 과격해진다면 몇 세기만에 부활하는 공화국을 볼 지도 모를 일이다.
7. 무역
자세한 내용은 베네치아 공화국/무역 문서 참고하십시오.8. 여담
- 《로마인 이야기》의 작가이자 로마 제국 빠순이로 유명한 시오노 나나미가 고대 로마 제국 다음으로 편애하는 국가로,《바다의 도시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공화국의 통사를 쓴 적도 있다. 또한 다른 중세 지중해 관련 책에서도 베네치아 이야기는 빠지지 않고 나오며 비중이 상당히 높으며, 베네치아에 맞섰던 제노바 공화국이나 비잔티움 제국, 오스만 제국 등은 밑도 끝도 없이 까내려져 있다. 특히 비잔티움 제국을 '로마도 아닌 주제에, 로마 제국 행세를 한다'는 식으로 까내리는데, 비잔티움 제국의 원래 이름이 로마 제국이고 익히 알려진 이름은 19세기에 고대 로마와의 구분을 위해 임의로 붙인 것에 불과하다는 점을 생각하면[12], 생각 이상으로 그녀의 역사 지식이 일천한 것을 알 수 있다. 그나마 로마가 아니라는 근거라도 나름대로 갖추었다면 모를까 무지와 편견 외에는 근거라고 할 만한 것이 없으니, 읽다 보면 기가 차는 정도가 아니라 웃음도 안 나올 지경.
- 진지하게 베네치아사를 읽고 싶다면 존스홉킨스 대학의 F. C. Lane 교수가 쓴 《Venice: A Maritime Republic》을 읽어 보는 것도 좋다. 시오노 나나미도 이 책에서 도움을 많이 받았다고 하며, 내용도 한 권에 베네치아사의 많은 것을 담고 있다. 흠이라면 한국어로는 번역이 안 되어 있다는 것과 페이퍼백판은 인쇄 상태가 그리 좋지는 않다는 것이다.
- 베네치아 공화국의 수호 성인은 복음 사가 마르코이지만 원래부터 그런 것은 아니었고, 아마세아의 성 테오도로를 수호성인으로 모셨다. 당시 성 마르코의 유해는 알렉산드리아에 있었는데 알렉산드리아가 이슬람의 손으로 넘어간 이후, 베네치아의 상인들이 유해를 돼지고기 사이에 숨겨서 밀수해 왔고, 그 이후 성 마르코에게 봉헌된 산 마르코 대성당이 지어졌다. 그 과정에서 베네치아의 상징 역시 성 마르코의 상징인 사자로 정해졌다.
- 1104년 경에 아르세날레 디 베네치아[13]라는 지금으로 치면 군수 조선 복합산업단지라고 할 수 있는 시설을 만들고 운영했다. 이곳을 통해 베네치아는 함선과 무기의 규격화, 표준화 등을 이룩했다. <문명 6>에 베네치아 군수창고라는 이름의 불가사의로 등장한다. 이 '아르세날레 디 베네치아'는 오늘날에는 이탈리아 해군 기지와 베네치아 비엔날레 전시장, 고선박 보존 시설 등으로 활용되고 있다.
- 대체역사물에서는 제4차 십자군 원정의 주범 + 원 역사의 승리자 포지션이라는 위치를 담당해서인지 좋은 꼴을 보이는 경우가 거의 없다. 동로마에 역으로 당해 흡수당해버린다던지, 줄을 잘못 서서 멸망만 피했지 사실상 도시국가도 아닌 일개 소도시로 전락한다던지 아니면 몽골이나 오스만으로 대표되는 제3자에게 멸망당하거나 코가 꿰이던지... 그나마 동롬회귀나 죽왕, 임꺽정은 살아있다처럼 수혜를 보는 경우도 있지만 극소수에 불과하다. '용병대장과 성녀'에서는 아예 싸그리 털어버리고 섬을 이루는 나무 기둥들까지 뽑히며 완벽하게 삭제당했다.
- 현재의 베네토 주와 베네치아 시의 상징은 베네치아 공화국때부터 내려온 '성 마르코의 사자'이다. 베네치아 상인들이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 있었던 성 마르코의 유골을 모셔와[14]
그들의 부를 한껏 자랑하며 지은산마르코 대성당에 안치하고, 그 후 성 마르코를 공화국의 수호성인으로 모시며, 그의 상징인 사자를 도시 곳곳에 세웠다. 헌데 여기서 단순히 유해를 모셔온 것으로 도시의 자랑을 삼은 것이 전부가 아니라 조금 더 재미난 이야기가 숨어있는데...
총대주교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동방의 정교회에 4명의 총대주교좌가 있고, 서방의 가톨릭에는 1명의 총대주교좌, 즉 로마 교황이 있다. 하지만 서방의 가톨릭에도 명목상의 총대주교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베네치아 총대주교이다. 베네치아 총대주교가 생기게 된 배경을 파고 들어가면, 베네치아 근방의 아퀼레이아라는 고대 도시가 있는데, 여기가 지금은 별볼일 없어보여도 로마 제국 시대에는 제국 내 5대 도시, 이탈리아 반도 한정 2대 도시에 버금가는 대도시였다. 그러던 중 6세기 경 아퀼레이아와 이스트리아 반도 일대의 주교들이 로마와 단성론 문제로 불화를 겪으면서 아퀼레이아 대주교가 총대주교를 자칭하게 되었다. 이때 거의 비슷한 시기에 이탈리아에 랑고바르드족이 쳐들어오자, 아퀼레이아 시민과 총대주교는 트리에스테 앞바다의 작은 섬 그라도로 피신하게 되었다.[15] 이후 8세기 경 이탈리아의 권력자들에 의해 로마와 화해를 하고, 로마 교황이 화해의 의미로 교황의 상징인 '팔리움'(Pallium)을 건네게 되면서 상징적으로 총대주교좌로 인정받게 되었다. 이후 아퀼레이아 총대주교는 그라도 총대주교가 되었다가, 이미 잊혀진 고대 도시와 임시방편의 피신지였던 작은 섬마을에서 벗어나 일대의 가장 강력한 도시국가가 된 베네치아에 총대주교좌를 옮기게 되었다. 당연히 총대주교좌 성당은 베네치아의 명물인 산 마르코 대성당이었다. 이렇게 해서 베네치아 총대주교가 아직도 명예직으로써 유지되고 있다.
이때 흥미로운 사실은, 아퀼레이아에 처음 교회를 만든 이가 성 마르코이고, 베네치아를 처음 세운 이들은 랑고바르드족에게 쫓겨 도망친 아퀼레이아 유민들이었다는 것이다. 동•서 가톨릭 5대 총대주교 중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의 초대 주교가 성 마르코라고 알려져있는데, 그 유해가 알렉산드리아에 모셔져 있다가, 베네치아로 옮겨져 왔고, 그걸 기념하기 위해 대성당을 지었는데, 거기에 성 마르코가 또 달리 세운 교회에서 내려온 (명목상) 총대주교좌가 그 대성당으로 온 셈이다. 그리고 베네치아 총대주교좌의 성도들은, 마르코가 이탈리아 반도에 세운 초기 교회 성자들의 후손들이고. 이 사실을 아마도 알고있었던 당시 베네치아 상인들이 목숨을 걸고 성유물을 훔쳐서라도 가져온 것이 아닐까 예상된다.
9. 연표
연도 | 상세 |
425년 | 베네치아 건설 |
697년 | 건국 (베네치아 도제 선출) |
742년 | 말라모코 천도[16] |
810년 | 프랑크 왕국 vs 동로마 제국 |
828년 | 성 마르코 유해 밀반입 |
887년 | 나렌테[17]에 패배, 아드리아 해 통행료 납부 |
996년 | 연공 납부 중단 |
1000년 | 나렌테 격파, 아드리아해 장악 |
1082년 | 알렉시오스 1세의 <금인칙서>[18], 무역특권 |
1099년 | 산 마르코 대성당 축성 |
1104년 | 아르세날레 디 베네치아(베네치아의 무기고) 건설 |
1110년 | 십자군 전쟁 참전 |
1117년 | 헝가리 왕국에게 달마티아 상실[19] |
1171년 | 마누일 1세의 베네치아 상인 추방, 전쟁 |
1182년 |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라틴인 학살 |
1202년 | 제4차 십자군 원정, 자라 함락 |
1204년 |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 |
1211년 | 크레타 획득 |
1256년 ~ 1270년 | 1차 제노바 전쟁 (승리) |
1271년 | 마르코 폴로의 여행 (~ 1295년) |
1284년 | 두카트 금화 주조 시작, 2차 제노바 전쟁 (~ 1299년, 무승부) |
1298년 | 쿠르촐라 해전 |
1310년 | 10인 위원회 발족 |
1348년 | 흑사병 |
1350년 ~ 1355년 | 3차 제노바 전쟁 |
1377년 ~ 1381년 | 4차 제노바 전쟁 |
1380년 | 키오자 해전 |
1386년 | 코르푸 획득 |
1405년 | 베로나, 비첸차, 파두아 획득 |
1409년 | 달마티아 획득 |
1420년 | 아퀼레이아, 두라초 획득 |
1426년 | 브레시아 획득 |
1453년 | 동로마 제국 멸망 |
1454년 | 로디 평화조약 |
1463년 ~ 1479년 | 1차 튀르크 전쟁 |
1470년 | 네그로폰테(에우보이아) 상실 |
1489년 | 키프로스 획득 |
1495년 | 브린디시, 오트란토 등 아풀리아 해안 획득[20] |
1499년 | 크레모나 획득, 2차 튀르크 전쟁 (~ 1503년) |
1509년 | 아그나델로 전투 |
1514년 | 리알토 대화재 |
1534년 | 프레베자 해전 |
1537년 ~ 1540년 | 3차 튀르크 전쟁 |
1569년 | 5개 은행 파산, 무기고 화재 |
1570년 ~ 1573년 | 4차 튀르크 전쟁 |
1571년 | 키프로스 상실, 레판토 해전 |
1575년 ~ 1577년 | 역병 |
1591년 | 리알토 다리 완공 |
1605년 | 성무중지령[21] |
1615년 ~ 1617년 | 우즈코키 해적과의 전쟁 |
1630년 ~ 1631년 | 역병 |
1645년 ~ 1669년 | 5차 튀르크 전쟁 |
1669년 | 크레타 상실 |
1684년 ~ 1699년 | 6차 튀르크 전쟁 |
1687년 | 모레아 재정복, 아테네 일시 점령 |
1714년 ~ 1718년 | 7차 튀르크 전쟁 |
1715년 | 모레아 상실 |
1785년 ~ 1786년 | 바르바리 해적 소탕전 |
1796년 | 비첸차 등 육지 영토 상실 |
1797년 | 나폴레옹의 진군, 멸망 (10/18) |
[1] 가장 고귀한이라는 명칭은 국가의 주권을 의미하며 유럽 여러 국가의 호칭이었다. 대표적으로 제노바 공화국과 베네치아 공화국이 가장 고귀한 공화국이었으며 현재는 산마리노가 유일하게 가장 고귀한 공화국이라 불리는데, 산마리노의 정식 국호는 그냥 산마리노 공화국이라서 가장 고귀한 산마리노 공화국은 어디까지나 별칭이다. 해당 공화국의 국가 원수는 가장 고귀한 자(Most Serene Highness)라고 호칭한다. Serene의 뜻이 고귀와 함께 고요가 있다 보니 이를 가장 고요한 공화국으로 오역하기도 한다.[2] 이 지도가 보여주는 시기에는 크레타섬을 비롯한 동지중해 곳곳의 섬을 거의 모두 상실하고 육지 영토만 남은 시기이다. 해양국가로서의 전성기때의 베네치아 공화국은 말 그대로 동지중해의 여왕이었다.[3] 베네치아는 동로마 제국의 알렉시오스 1세로부터 이 금인칙서를 받아내며 사실상의 자치국으로 떨어져 나갔다.[4] 베네치아는 헝가리 왕국-크로아티아 왕국의 지그몬드와 맞서 싸워 승리했고, 이 조약으로 발칸반도 서부 지역에 대한 독점적 권리를 인정받았다.[5] 나폴레옹은 북이탈리아에 괴뢰국들을 세우는 대신 합스부르크 제국에게 보상 차원에서 베네치아를 넘겨주었다.[6] 해양 공화국, 상인 공화국이라고도 한다.[7] 당대 국기의 판본에 따라 문구의 끊기는 지점이 조금씩 차이가 있다. 이는 베네치아 공화국의 국기나 국장뿐만 아니라 모든 산 마르코의 사자가 나타나는 회화/조각에서 모두 제각각으로 표현된 것을 볼 수 있다.[8] 군주가 없는 나라라면 공화국이라고 할 수 있지만, 공화국이라고 반드시 군주가 없는 것은 아니다. 다만 군주를 두고 공화정을 지향한 국가도 있다[9] 그러나 코르시카 섬을 팔아치운 제노바도, 그리고 그 제노바를 비웃은 베네치아도 나란히 프랑스에 의해 멸망당했다. 바로 코르시카 출신으로 프랑스 장군이 된 나폴레옹에 의해.[10] 베네치아 공화국 정부는 크레타 섬에 사는 베네치아 시민이 가톨릭을 버리고 그리스 정교로 개종할 경우, 시민권을 강제로 박탈한다는 법을 만들었을 만큼 자국민이 크레타 주민들한테 동화되는 것을 엄격히 막았다. 또한 베네치아의 식민지였던 크레타 섬은 농산물 생산 능력이 풍요로웠으나, 정작 그 농산물을 생산하는 크레타 주민들은 농산물 대부분을 베네치아 정부한테 수탈을 당했기 때문에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사람들이라고 불렸을 만큼 비참한 삶을 살았다.[11] 레판토 해전에서 베네치아 함대를 지휘한 사령관이자 베네치아의 국가원수로 선출된 세바스티아노 베니에르의 혈육이라고 한다. 다만 오스만 제국이 부리는 해적들이 납치한 것이라, 누르바누가 황후가 되는 과정에서 세바스티아노가 관여한 바는 없었다.[12] 비슷한 예로, 아즈텍 제국의 진짜 국명 역시 멕시코인데, 19세기에 역사학자들이 신생 독립국인 현대 멕시코와의 구분을 위해 붙인 이름이 아즈텍이었다.[13] 영어식으로는 아스날 오브 베니스, 즉 '베네치아의 병기창'이라는 뜻이다.[14] 현재 기준으로는 도굴이 맞다. 하지만 당대에는 이민족에게 훼손되어가는 성자의 유물을 몰래라도 옮겨오는게 당연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15] 이때 다시 그라도 총대주교가 생기기도 한다.[16] 원래 중심지는 헤라클레아[17] 크로아티아계 슬라브 해양 세력[18]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무역 특권 장악[19] 1171년에 회복[20] ~ 1530년[21] ~ 1606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