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19-07-06 11:37:54

태평천국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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太平天國之亂
Taiping Rebellion
(1851년 ~ 1864년)[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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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후 세력 범위를 나타낸 모습.[2]

1. 개요2. 배경3. 전개
3.1. 남경을 향해3.2. 북벌3.3. 서정
4. 몰락5. 트리비아
滅滿興漢 (멸만흥한: 만주족(청)을 멸하고 한족을 부흥시키자[3])
태평천국 운동의 표어. 이전의 백련교도의 난에서도 이 표어가 사용되었다.

1. 개요

청나라 말기에 일어난 농민 대봉기이자 신정국가[4] 태평천국 건국 운동. 청의 풍습인 변발을 거부하고 머리를 길렀기 때문에 당시 청나라에서는 장발적(長髮賊)이라고 불렸다.[5] 현재 중국에서는 반봉건주의 정신을 평가해 '태평천국의 난'이 아닌 "태평천국 운동"이라고 불린다.[6] 다만 영어로는 여전히 Taiping rebellion(태평천국의 난)이라고 불린다.

한땐 남경까지 점령하며 사실상 국가 체제로 중국 남부에서 크게 세력을 불려 14여년간 이어졌지만, 결국 청나라 휘하 증국번, 이홍장 등 한인 신사들이 만든 의병서방 세력과 연합해 난을 진압하였다. 하지만 이때 청나라 정규군은 제대로 활약하지 못해 그 위상이 크게 떨어졌고,[7] 그 결과 지방의 많은 기득권층들이 청 왕조로부터 등을 돌리는 결과를 만들어낸다. 즉, 외적으론 서구 열강들의 침탈에 시달리던 청에 내적으로 어퍼컷을 날린 사건.

2. 배경

태평천국의 건국자인 홍수전은 본래 광동성 하도(현 광저우시 화두구) 출신의 유생이었다. 중농층 집안의 아들로 태어났는데 다른 형제들보다는 낫다고 생각한 부모는 그의 학업을 지지해 주었다고 한다. 하지만 과거 시험에 여러 차례 낙방하고[8] 급기야 상심한 나머지 신경 쇠약에 걸리고 말았다. 그런데 꿈 속에서 한 백발의 신선이 나왔는데, 그(홍수전)가 자신의 아들이라며 "이 검으로 사악함을 물리치라"는 말과 함께 파사검(破邪劍,사악함을 물리치는 검)을 주었고 염라요로부터 세상을 정화하라는 계시를 받았다., 또 한 중년 남자로부터 요사스러움을 물리치는 도끼를 받았다고 한다.

홍수전은 예전에 서양인 선교사에게 받아두었지만 별 관심을 두지 않고 처박아 두었던 권세양언(勸世良言)[9]이라는 선교서를 읽고 자신은 조물주(造物主) 천부상제(天父上帝) 야훼의 둘째 아들이며 천형(天兄) 예수의 동생으로,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예수의 뒤를 이어 중국에서 태어난 제2의 천왕(天王) 메시아라는 교리를 세우게 된다. 이후 홍수전은 '배상제회(拜上帝會)'라는 종교 단체 겸 비밀 결사를 조직하고 농촌 지방 등을 중심으로 포교활동을 하였다. 권세양언의 기독교 교리에 중국 토착적 종교의 모습이 가미되어 일신교적 단체가 형성되었고, 공자상을 파괴하는 등 그 활동이 점차 과격해졌다. 이 과정에서 홍수전은 모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선 청 왕조를 타도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당연히 이걸 가만히 두고볼 수 없으니, 1850년 12월에 관헌과 관병, 민병대가 금전촌으로 들이닥친다. 그러나 배상제회 신교들이 이를 습격해 관헌과 관병 50여 명이 살해당한다. 이에 광시성이 총병(總兵, 현재의 소장) 주봉기(周鳳歧)를 사령관으로 하고, 부장(현재의 준장) 이극탄포(伊克坦布)를 선봉장으로 한 3천여 명의 토벌군을 보낸다. 그러나 1월 1일, 금전촌 전투에서 선봉이 풍운산과 석달개의 군사를 치던 중, 양옆으로 양수청과 소조귀의 군사들한테 공격받아 이극탄포를 포함한 300여 명이 전사했다.[10] 그리고 배상제회는 승전을 홍수전의 생일과 함께 축하했다.

결국 1851년 1월 11일, 홍수전과 상제회는 1만여 명의 규모가 되어 금전촌에서 마침내 태평천국의 난을 일으킨다[11]. 건륭제의 치세 말 대외 원정에서 시작된 재정 악화와 그에 따른 향촌 사회와 농촌의 붕괴, 이민족 왕조의 통치에 대한 불만, 아편전쟁 이후 청나라 정부의 정책에 대한 불만 등이 쌓이면서 많은 사람들이 태평천국의 난에 합류하게 되었다.

3. 전개

3.1. 남경을 향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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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천국은 그해 영안(永安)을 점령하고, 광서성을 중심으로 외세의 침투가 특히 심했던 후베이, 후난 등 창장강 유역을 중심으로, 빈농 및 일용직 노동자들을 합류시키고 그들의 지지를 얻어 세를 확대하였다. 영안을 버린 태평천국군은 북상하여 1852년 장사 공략에 실패했으나, 1853년에는 1월 우창(武昌)에 이어 기어이 3월 남경을 점령했다. 이후 난징을 천경(天京)으로 개칭, 수도로 삼았으며 화남 지방 대부분을 장악하고, 토지 제도의 개혁(천조전무 제도) 및 전족 등 악습 철폐, 남녀 평등[12], 사유 재산 금지, 아편의 금지 등의 사회 개혁을 내세워 높은 지지를 얻었다.

그러나 태평천국에서 실제로 이러한 개혁을 제대로 실시한 것은 아니다. 대부분의 점령지에서는 토착 지배 계급이 '투항'해서 지역적 지배 질서를 그대로 유지했으며, 토지 제도 개혁은 결국 본격적으로 시도되지 않았다. 계급 제도의 철폐를 주장하면서도 홍수전을 비롯한 노형제[13] 집단은 왕과 사실상의 귀족의 지위를 차지했으며, 청나라의 지배 계층 이상으로 많은 비빈[14]들을 거느렸다. 이러한 약점으로 인해 태평천국은 초기의 열정적 지지를 점차 상실하게 되었다. 더구나 미신 타파라는 명분 아래 농촌에 있는 사당과 유학자들이 조상신과 유교 현인들을 모시는 사당을 부수거나 점령지에 청나라에 협력한 부자들에게 약탈한 재물 일부를 나누어주는 것 외에는 당시 농민들이 간절히 원하던 토지 개혁을 하지 않고 오히려 태평천국 수뇌부와 그 친척들이 새로운 대지주로 농민들을 더 착취하였다. 이는 당연히 농민들의 지지를 상실하는 계기가 된다.
  • 1851년 1월 11일: 금전촌(金田村, 현 광시성 구이강시 구이핑시 진톈진)에서 태평천국의 난이 발생한다. 쉰장강 주요 포구인 강구(江口, 구이핑시 장커우현)를 점령하고, 천지회(훗날의 삼합회) 수적 두목인 나대강이 2천의 무리와 합류했다.
    이에 함풍제가 토벌 명령을 내려 광서제독(廣西提督)[15] 향영, 운남제독(云南提督), 귀주제독(貴州提督)들이 연합군 1만을 강구로 보낸다.
  • 3월 초: 태평군은 금전촌으로 후퇴한다. 그러나 이들을 추격하던 청군이 반격에 격파당하자 향영이 금전촌 주위 계평(현 구이핑시), 무선(현 라이빈시 우쉬안현), 상주(현 라이빈시 샹저우현), 평남(현 구이강시 핑난현)을 봉쇄한다.[16] 고립된 태평천국은 반년동안 세력을 키운다.
  • 8월 16일: 모든 물자를 챙기고, 금전촌을 불태우며 대장정을 시작한다.
  • 8월 20일: 평남에서 광서부제독 오란태의 부대를 대파하고, 뒤따라온 향영의 부대를 대패시킨 후, 배로 등(현 우저우시 텅현)을 거쳐 영안(永安, 현 우저우시 멍산현 멍산진)성 쪽으로 간다.
  • 9월 24일: 영안성을 공격해 다음날에 점령한다. 그리고 5왕 봉작 등 체계를 갖추어간다.
    그러나 평남에서 깨진 오란태가 4만 8천의 병력을 가지고 오고 있었다.
  • 12월 10일: 새상아를 흠차대신으로 하고, 향영과 오란태를 대장으로 한 청군이 영안성의 보급기지인 수두촌(水竇村, 현 멍산현 수이시우춘)을 공격한다. 소조귀가 맞서 싸우지만 패퇴한다.
    이로 청군의 영안성 포위 공격이 1852년 4월까지 계속된다.
  • 1852년 4월 5일: 밤에 태평천국은 몰래 빠져나오고, 이를 성공시키기 위해 남은 2천명은 전멸한다.
    그리고 오란태는 이들을 쫓았으나, 태평군의 매복으로 자신을 포함한 5천명이 전사한다.
  • 4월 중순 ~ 5월 중순: 광서성 성도 계림성을 공격했으나 실패한다.
  • 5월 23일: 흥안(현 싱안현) 점령.
  • 6월 3일: 전주(현 구이린시 취안저우현)성 점령. 원래는 방어가 견고해 돌아갈려 했지만 누군가가 쏜 포탄이 지나가던 풍운산한테 명중해서 공격해 점령하고 관민을 몰살시켰다.
  • 6월 5일: 배로 호남성으로 가던 중 사의도(蓑衣渡, 현 취안저우현 수오이두)에서 통나무들이 물길을 막아서 길이 막히게된다. 이때 강충원이 지휘하는 1500여 명의 강가군(江家軍)이 태평군을 공격해 배 300여 척을 잃고, 풍운산을 포함한 1만여 명이 전사한다.
  • 6월 12일: 원래 영주(현 융저우시)로 가려했지만, 청군이 배를 다 치워 도강을 못하게되자, 남쪽의 도주(道州, 현 융저우시 다오현)를 점령한다. 도주에서 머물며 세력을 복구한다.
  • 9월 12일: 소조귀가 침주(현 천저우시)에서 2천의 선봉대를 이끌고 호남성 성도 장사성에 오지만, 17일에 전사한다.[17]
  • 9월 27일 ~ 11월 말: 장사성을 공격했지만, 장사의 청군이 5만으로 늘어나자 호북성으로 향한다.
    가면서 익양(현 이양시)을 점령한다.
  • 12월 13일: 호북제독(湖北提督) 박륵공무(博勒恭武)가 도망쳐서 손쉽게 악주(현 어저우시)성을 점령하고, 배 5천여 척과 오삼계가 쓰던 무기들을 획득한다.
  • 12월 하순: 한양(漢陽, 현 우한한양구)과 한커우 점령
  • 1853년 1월 12일: 호북성 성도 무창(현 우창구)성을 점령한다. 장강의 상업 거점이라 많은 재화를 얻는다. 이때 세력은 55만.
  • 2월 3일 혹은 10일: 남경을 향해 떠난다.
  • 3월 19일: 남경성의 외성을 돌파한다. 다음날, 내성마저 동파해 점령한다.

3.2. 북벌

또한 태평천국 내에서는 전쟁 방향을 두고 함풍제가 있는 북경을 공략해서 전쟁을 끝내자는 북벌(北伐)론과 우선적으로 장강을 따라 거점을 확보하는 서정(西征)론이 대립했는데, 실권자인 양수청은 북벌과 서정을 동시에 하기로 결론을 내리고 1853년 5월, 북벌군 지휘관에는 임봉상이개방을, 서정군 지휘관에는 익왕 석달개를 임명해서 보냈는데, 안 그래도 청나라에 비하면 병력이 열세인데 거기가 병력을 분산시키는 실수를 범한 것이다. 서정은 석달개의 지휘하에 증국번의 상군과 장강 일대에서 일진일퇴를 거듭하며 거점을 점차 확보해나가고 있었지만, 북벌군이 문제였다. 청군 근왕병들이 몰려있는 북경을 공략하면서 불과 2만명의 군대만 보냈는데, 사실상 자살하라는 것과 다름없었다. 물론 북경을 전격적으로 기습해서 함풍제를 제거하면 수뇌부가 사라진 청나라는 와해되겠지만, 이를 감안해도 북경을 공략하기에는 턱없이 적은 병력이었다. 초기에는 이러한 핸디캡을 우회기동으로 극복하며 빠르게 북상하였지만, 북경에 가까워질수록 우회할 수 있는 지역이 점점 좁아졌으며, 화남과 달리 화북인들은 태평천국군에 비협조적이었다. 결국 1853년 10월, 천진 인근에서 청군에 패하며 후퇴했다. 그러나 북쪽까지 올라오는 동안 주변의 청군을 제압하지 못했기 때문에 적진 한복판으로 들어온 격이었고, 후퇴하던 도중 정해에서 몽골 친왕 승격림심[18]과 흠차대신 승보가 이끄는 청군에 포위되어 이듬해까지 농성한다. 태평천국군 상당수가 겨울에도 상대적으로 따뜻한 화남 사람들로 이뤄졌으며, 익숙하지 않았던 화북지방의 추위로 인해 동사자까지 속출한다. 한편 양수청은 북벌군을 구하기 위해 원군을 급히 파견했지만, 이 역시 청군에 패했다. 북벌군은 승격림심과 승보의 불협화음을 틈타 청군의 포위망을 뚫고 빠져나오는데 성공했지만, 이내 하북성에서 청군 추격대에 포위된다. 임봉상과 이개방은 1년 이상 농성을 하다 결국 1855년, 청군에 붙잡혀 처형당한다.[19]
  • 5월 8일: 북벌군 출발
    원래는 대운하를 타고 갈려 했으나, 양주 쪽의 강북대영(江北大營)[20] 때문에 우회기동으로 진격.
  • 5월 28일: 안휘성 봉양(현 추저우시 펑양현) 점령.
  • 6월 9일: 박주(현 보저우시) 점령.
  • 6월 18일: 허난성 개봉 점령
    그 후 황하를 건너려 했지만, 청군이 배를 다 치웠다. 그러나 어찌어찌해 2주에 걸쳐 도하 성공.
  • ~ 9월 1일: 심양(현 자오쭤시 친양시)성을 공격했으나, 점령 실패 후 서북쪽으로 이동한다.
  • 9월 12일: 핑양 점령
  • 9월 14일: 산시성 홍동(현 린펀시 훙둥현) 점령
  • 10월 2일: 형대 점령
  • 10월 4일: 석가장 점령
  • 10월 7일: 후퉈강 도하.
  • 10월 11일 ~ 19일: 허베이성 심주(현 헝수이시 선저우시)에서 교전, 점령.
  • 10월 23일: 헌(현 창저우시 셴현) 점령.
    이후 청군은 보정의 수비를 강화했지만 오히려 북벌군은 천진 쪽으로 갔다.
  • 10월 27일: 정해(현 징하이구)와 독류(独流, 현 두류현) 점령
  • 11월 7일: 양류청(杨柳青, 현 양류칭진)을 지나 톈진 진입을 시도하지만 실패.
    그 후 정해에서 농성하게 되는데, 그동안 청군이 공격해왔다. 그러나 다 패배하고, 특히 12월 23일에는 대패하게 된다. 이로 승격림심과 승보가 서로를 비협조하게 된다.
  • 1854년 2월: 정해 탈출
    하지만 연진(连镇, 현 창저우시 둥광현 리안첸진)에서 포위당한다. 이들을 구출하기 위해 1만의 원군이 파견되고 양수청은 성 점령하지 말고 구출만 해오라고 한다.
  • 3월 30일: 원군이 임청(현 랴오청시 린칭시)에 도달해 2주 간의 공방전 후 점령하지만, 승보에게 포위되고 만다. 바보들도 아니고 결국 포위망 돌파하다가 대부분 죽어 일부만 천경으로 돌아온다.
  • ~ 1855년 3월: 농성을 하지만, 결국 함락된다. 임봉상은 자결에 실패해 처형된다.
  • 1855년 6월: 이개방은 북경으로 압송되어 능지형을 당해 죽는다. 이로 북벌은 완전히 실패한다.

3.3. 서정

다만 갑작스런 북벌에 놀란 청 조정이 급히 북경으로 병력을 재배치하는 동안 석달개의 서정은 점차 증국번의 상군을 밀어붙이며 그럭저럭 성공을 거둔다. 후퇴하는 와중에 증국번은 자신의 불효와 불충을 탓하며 장강에 몸을 던졌으며, 부하들이 급히 건져내서 목숨은 부지한다. 이 소식을 들은 함풍제는 증국번을 신임하게 되며, 훗날 태평천국 진압에 중요한 역할을 맡긴다. 아무튼 패퇴를 거듭하던 증국번은 남창(南昌)에 고립되는데, 양수청이 석달개에게 귀환 명령을 내리면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난다. 천경 바로 옆에 자리잡던 청군 부대인 강남대영과 강북대영을 제거하기 위함이었다. 태평천국으로서도 수도 바로 옆에 적군이 있는 상황은 매우 위협이었기에 제거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결국 양 대영은 태평천국의 공세에 무너졌다. 비록 북경공략은 실패했지만, 서정을 통해 장강 유역의 영토를 상당수 확보한데다 눈엣가시 같던 강남, 강북 양 대영을 물리쳤기에 겉보기에 태평천국은 전성기가 시작되는 것처럼 보였다.
  • 5월: 증천양뢰한영이 지휘하는 2~3만 병력의 서정군 출발.
  • 6월 10일: 안경 점령.
  • 6월 24일: 강서성 성도 남창성에 도착해 3개월 간 공방전을 벌이지만, 하필 두 왕을 보내버린 강충원이 지키고 있는데다가, 병력 부족으로 실패하고 호북성으로 간다.
  • 9월 말: 석상정위준(위창휘의 동생)이 구강을 점령한다.

4. 몰락

그러나 내부에서는 점차 먹구름이 드리우기 시작했다. 천왕(天王) 홍수전 아래의 다섯 왕인 동왕(東王) 양수청(楊秀淸), 서왕(西王) 소조귀(蕭朝貴), 남왕(南王) 풍운산(馮雲山), 북왕(北王) 위창휘(韋昌輝), 익왕(翼王) 석달개(石達開) 등은 각각 독립적인 지지 기반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내분기 이전에 서왕 소조귀와 남왕 풍운산은 호남 지역 공략전에서 전사했으니, 천형(예수)의 대행자(천형하범)를 자처했던 소조귀(1852년 9월)와 초창기 홍수전 대신 조직을 구축했던 친족 풍운산의 죽음(1852년 6월)은 양수청을 제어하지 못하게 된 원인이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재상을 겸임한 양수청은 스스로 신탁을 받는 방식[21]으로 배상제회의 신도를 끌어모았기 때문에 이들에 대한 영향력이 절대적이었고, 이를 바탕으로 홍수전과 대등한 지위에 서려고까지 했다.[22] 더는 두고볼 수 없었던지, 홍수전은 북왕 위창휘와 연왕(燕王) 진일강(秦日綱)를 은밀히 불러 양수청을 제거할 것을 명령했고, 1856년 9월 2일, 북왕부와 연왕부의 군대가 동왕부를 기습해 양수청을 살해했으며, 이를 천경사변(天京事變)이라고 한다.

이 과정에서 양수청에게 원한[23]이 있던 위창휘는 양수청과 그의 가족, 부하, 동왕부 병력 2만명을 학살하고, 이를 만류하던 석달개 역시 의심하며 마찬가지로 석달개의 가족, 부하를 학살하고 익왕부도 쑥대밭으로 만든다. 석달개는 겨우 피신해서 살 수 있었다. 이에 경악한 홍수전은 위창휘를 제지하려고 했으나 오히려 위창휘가 홍수전을 핍박하고 전횡을 일삼았다. 이에 위협을 느낀 홍수전은 위창휘의 부하인 연왕 진일강을 포섭해서 그를 처형했다. 이 과정에서 동왕부 병력의 최후를 기억하고 있던 북왕부 병력과 천왕부-연왕부 병력 간의 시가전이 벌어지고, 홍수전은 이 사태를 진정시키기 위해 진일강에게 도성을 어지럽혔다는 죄목으로 처형한다. 그리고 홍수전은 사태 수습을 위해 양수청이 죽은 것이 아니라 성경에 나오는 엘리야처럼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아 승천했다고 발표한다. 시가전까지 벌이고 수만명이 학살당했는데 믿을 사람이 있었을 리가...

천경사변이 종료된 후, 피신했던 석달개가 돌아오고 태평천국은 안정을 되찾는 듯 보였지만, 양수청, 위창휘를 숙청한 홍수전이 1857년에 인척인 홍인발, 홍인달을 안왕과 복왕에 봉하고 권력을 나누어주어 홍씨 가문의 친정 체제를 세우면서 태평천국의 내분은 더 악화되었다. 특히 인척들에게만 권력을 나누어준 것도 문제인데, 하필이면 이들이 모두 무능하고 부패한 이들이었던 것. 그리고 이들은 인망 있고 자기 세력도 상당한 석달개를 심하게 견제하고 시기했는데, 결국 이들의 시기를 견디다 못한 석달개가 10만의 대군을 이끌고 이탈해버리는 바람에 태평천국의 역량은 훨씬 더 약화되었다. 또한 같은 해에 홍수전은 군사, 행정 업무를 몽득은에게 맡겼는데 몽득은도 무능한 인물이었다. 한마디로 총체적 난국이었던 것.

홍수전과 그 형들의 시기를 이기지 못해 천경을 탈출하듯 빠져나온 석달개는 쓰촨성()으로 진출하여 그곳에 거점을 만들려고 했다. 석달개는 양광, 호광, 운귀, 사천 지역을 휩쓸면서 청군을 격파하고 농민 봉기를 촉발시켰다. 그러나 정예 병력을 이끌고 이탈한 까닭에 태평천국 본국의 군사적 역량이 떨어져서 여러 전투에서 태평천국이 밀리게 되는 원인을 제공한데다가 석달개의 군대는 본국과 멀리 떨어졌기 때문에 지원을 받을 수가 없어서 산적처럼 생활해야 했다. 결국 1863년, 사천성 대도하에서 석달개와 그의 군대는 사천 총독 낙병장이 이끄는 청나라 군대에게 전멸당하고 만다.[24] 태평천국의 초창기를 이끌었던 집단 지도 체제가 붕괴하는 순간이었다.

반면 청나라는 초반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화북에서 숨을 고르며 진영을 가다듬었고, 한인 출신의 신사층 증국번등을 중심으로 조직한 한족 자위 집단(단련이라 부른다.) 연합체인 상군(湘軍)이 조직되면서 태평천국군에게 전세가 불리하게 전개된다. 그리고 상군을 모티브로 삼아 회군이라는 부대를 만들게 되는데, 이 회군을 지휘하여 훗날 정계의 스타로 떠오른 인물이 바로 유명한 이홍장이었다.

그리고 태평군의 북벌이 태평천국의 쇠퇴를 부르고 태평군이 상군과 회군에게 격퇴당했다는 말이 있는데, 사실 이개방, 임봉상 등이 이끄는 북벌군과 싸운 군대는 승격림심과 승보가 이끄는 팔기, 녹영 주력군과 각 성의 지방군들이었다. 게다가 북벌군은 하남, 직예성(지금의 하북성)을 공격해서 청 조정이 군사적 역량을 하남, 직예 방어에 집중하게 하고[25] 남쪽의 서정군에게는 신경쓰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 덕에 서정군은 1854년 말부터 석달개의 원군과 합류하여 증국번의 상군을 격파한 뒤, 무창[26], 구강, 안경을 차지하고 안휘, 강서, 호북의 대부분을 장악할 수 있었다. 그리고 1856년에 양수청이 지휘하는 천경의 태평천국군이 청의 강북 대영과 강남 대영을 격파하여 태평천국은 매우 유리한 상태에 있었으며 태평천국의 북벌에 영향을 받아 하남의 염군이 봉기하여 청군을 괴롭혔다. 따라서 북벌은 상당한 성과가 있었고 태평천국의 쇠퇴를 불렀다고 말하기 어렵다.

태평천국의 쇠퇴는 상술한 대로 1856년 9월에 양수청이 숙청당하는 것으로 시작하는 지도자들의 내부 분열이 주요한 원인이었고 이로 인해 1856년 12월에는 무창을 빼앗겼다. 그리고 다음해인 1857년 여름에는 석달개가 이탈하고 천경이 다시 포위당했다. 1858년부터 태평천국은 수세로 전환했고 이전보다 세력이 줄어들어 서정군이 점령한 구강도 빼앗기고 장강의 통제권마저 증국번에게 넘겨주었다. 그나마 태평천국에 이수성, 진옥성 같은 뛰어난 인재들이 등장하여 분전한 덕분에 세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리고 태평천국에는 내부적인 문제가 계속 발생했다. 태평천국의 중앙 정부와 지방의 관계에 이상이 생긴 것이다. 이수성을 비롯한 태평천국의 군 지휘관들은 중앙에 있는 홍인발, 홍인달 형제와 몽득은을 불신하고 경멸했으며 이들의 전횡에 불만을 터뜨렸다.[27][28] 상황이 이렇다보니 태평천국은 중앙 정부와 지방의 군 지휘관들간에 소통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전선의 군 지휘관들끼리 상호 지원과 연합 작전을 하는 방식으로 세력을 유지했다. 태평천국의 내부 분열이 있기 전까지만 해도 동왕 양수청[29]이 군사 작전과 보급을 통제했지만 이 시기부터는 중앙과 지방이 완전히 따로 놀게 된 것이다. 다행히 1858년 9월에는 안휘 북부에서 상군을 격퇴하고 11월에는 안휘성 삼하에서 이수성, 진옥성의 태평군이 상군과 격돌해 상군 지휘관인 이속빈과 증국번의 동생 증국화를 패사시키고 상군 정예를 궤멸시켜 증국번에게 큰 피해를 입혔다. 12월에는 강북 대영을 궤멸시켜서 안경과 천경의 안정을 되찾고 교통로를 확보했다.

1859년 4월에는 홍수전의 동생 홍인간이 홍콩에서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간왕에 봉해지고 자정신편을 저술해 개혁을 시도했다. 하지만 태평천국의 개혁은 제대로 이뤄지지 못했다. 그 이유는 1860년에 태평군이 장강 북쪽의 청군을 격파해 군사적 압박에서 벗어나긴 했지만, 개혁을 보조할만한 경제적 근거지를 확보하지는 못했고 장강 중류에서 버티고 있는 증국번의 상군을 완전히 몰아낼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안휘의 염군과의 연계도 불안정했다. 그리고 진보적인 지식인이기는 했어도 기본적으로 낙하산이었던 홍인간은 이수성 등 당시 태평천국 실력자들과의 대립도 심했기에 내부에서 제대로 된 도움도 받지 못했다.

더군다나 서양의 열강도 '상승군' 과 '상첩군' 이라는 이름의 군대를 조직하여 청나라를 지원하였다. 서양에서는 처음에는 중국에 기독교 국가가 세워진 것에 대해 호의적인 입장이었지만, 태평천국은 농민 공산주의적 이념을 바탕으로 반외세를 외쳤으며 실제로 상하이닝보 등의 유럽 각국의 조차지를 공격하는 등 서양에게 적대적인 태도를 보였다. 특히 난징조약으로 자국 수출품의 주시장인 장강 유역을 얻었던 영국 등은 이 지역을 태평천국이 차지한 것을 우려해 본격적으로 청조를 지원했다. 게다가 처음에는 기독교 국가라고 생각해 난징에 초대받았지만 알고보니 이건 뭐 기독교 껍데기만 뒤집어 쓴 사이비 종교가 아닌가.

결국 1864년 6월 1일 홍수전이 사망한 뒤[30] 1달만에 천경이 함락 당했으며, 태평천국의 잔존 세력인 뇌문광이 도적떼의 연합체인 장낙행의 염군(捻軍)과 연합해 4년간 청에 저항하지만 결국 이홍장과 좌종당의 상군에게 진압되는 것(1868년)으로 태평천국의 난은 끝이 나게 된다. 그러나 안그래도 국가 막장·멸망 테크를 타던 청조는 이를 계기로 그 취약함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특히 청나라의 정규군으로는 태평천국군을 상대할 수 없었다는 사실이 입증되었으며, 청 왕조에 대한 민심 이반은 가속화되었다.

이 사건으로 최소 2천만 명의 사람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며 이는 인류사에서 가장 많은 사망자를 낸 사건들 중 적어도 5위 안에 드는 수준이다.[31] 당시 청나라에서 실시했던 인구 조사가 불안정했기 때문에 정확하지 않을 가능성은 있으나 대부분의 추정치가 2천만에서 3천만을 웃돌며, 이는 태평천국이 국민 전체를 대상으로 군사 훈련을 실시하는 등 청나라와 태평천국 양쪽의 국민 대부분이 참가한 총력전이었다는 사실과, 제1차 세계 대전에 비해 전쟁이 지속된 기간이 길다는 것, 양측의 국민에 대한 학살이 빈번했다는 것, 청나라를 제외하고 여러 열강들 또한 잔당 소탕전을 비롯한 토벌에 참여한적이 있다는 사실 등으로 설명된다.

놀라운 것은 내분에도 불구하고 태평천국군은 청나라에 끝까지 저항했는데, 그 이유는 청나라는 태평군이 항복해오는 족족 처형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포로가 된 태평군은 용서가 아닌 청군에 의한 학살이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거기다 항복하거나 포로로 잡힌 사람이 태평군 지휘관이면 반드시 능지처참으로 처형했다.[32] 사실 청나라도 전쟁에서 항복을 받아주지 않으면 적이 죽기살기로 싸우기 때문에 전쟁을 오래 끈다는 것을 알았고 실제로 14년 이상 끌었지만, 태평천국 점령지에서 만주족 학살이 자행되었던터라 이에 대한 보복 차원으로 항복을 받아주지 않은 것이다.[33] 결국 태평천국의 지휘관과 병사들은 살기 위해 필사적으로 저항했으며, 여의치 않으면 청군에 잡히기 전에 집단 자살하기도 했다.

그러나 청은 태평군에서 항복해 온 장국량을 중용한 바 있고, 이수성은 청군에 항복한 태평군 집단을 진압한 전례가 있으므로, 전부 다 죽여대는 전멸전이었다고 결론 짓기에는 무리한 측면이 있다.

5. 트리비아

이 사건을 배경으로 하는 영화로는 2007년작 명장, 드라마로는 TVB에서 제작한 태평천국(1988년), CCTV에서 제작한 태평천국(2000년)이 있다. 물론 드라마인만큼 내용은 적당히 걸러보자

훗날 쑨원의 개혁 운동에도 영향을 주었으며, 중국 공산 정권에서는 최초의 반제 반봉건적 농민 운동으로 일찍부터 굉장히 높게 평가했다. 무신론이 주류 아니었나 그래서인지 중국 근현대사에서 가장 연구가 활발한 분야로 관련 논문만 수만편이 넘는다. 공산권 논문은 제대로 된 논문이 아니라고 근거 없이 폄하하는 사람도 있지만 실제로는 각주 등 갖출 것을 다 갖추고 분량도 충분한 관련 논문이 수만편이 넘는다. 이는 관심이 많아서이기도 하지만 중국이 워낙 학술인력이 많기 때문이기도 하다. 덕분에 국내 연구자들이 석, 박사 논문을 쓸 때 잘 선택하지 않는 분야이기도 하다. 농담이 아니라 논문만 읽다 대학원 졸업하는 일이 생긴다.

세계 역사상 3번째로 많은 사망자를 낸 전쟁이다.[34] 1위는 볼 것도 없이 제 2차 세계 대전이고[35], 2위는 몽골 제국의 침략 전쟁[36].

저스툰에 연재하는 굽시니스트본격 한중일 세계사 만화에 관련 내용이 자세히 나온다.그 만화 연재 이후 본 문서의 내용이 급격히 풍성해졌다


[1] 완전히 진압된 건 1868년이다.[2] 지도에는 상하이를 점령한 것처럼 나타나지만 1860년, 1862년에 상하이를 공격한 태평천국군은 청군과 열강의 연합으로 두번 모두 실패했다.[3] "排滿興漢:배만흥한"이라는 표어도 사용됐다. 이 경우에는 밀칠 배(排)자로, 만주족을 배척하고 한족을 흥하게 한다는 의미가 된다.[4] 동양사에선 특이하게도 기독교 신앙을 바탕으로 했다.[5] 한족 고유의 묶는 머리(속발)는 실전된 상태였기 때문에, 그냥 산발로 길렀다. 어찌보면 안습[6] 당시 태평천국이 공산주의적 가치를 지향하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7] 엎친데 덮친 격으로 제2차 아편전쟁이 이 기간 사이인 1856~1860년이었다. 덕분에 영국 상대하느라 청나라는 반란군을 5년 가까이 진압도 못하고 방치해버린다.[8] 사실 본인이 훗날 남긴 시들을 보면 낙방되는 게 정상이긴 했다.[9] 인쇄업자이자 최초의 중국인 목사 양아발(梁阿發)이 지은 책[10] 이는 태평천국군의 군사적 정점이라 할 수 있는 석달개의 전략이었다.[11] 때문에 금전기의(金田起義) 라고도 한다.[12] 태평군에 여군부대인 여영이 편제되어 있었으며 야사에 따르면 여군 지휘관은 서왕 소조귀의 아내이자 홍수전이 여동생으로 인정한 홍선교였다. 또한 여성에게도 과거가 허용되어 부선상이 중국 역사상 유일하게 장원에 급제하기도 했다.[13] 처음 거병 때부터 홍수전을 추종했던 광서성 출신들[14] 문제는 태평천국 수뇌부가 미인들을 강제로 공출한것이다. 특히 수많은 처녀들이 끌려가지 않으려고 얼굴에 흙이나 숫검댕을 바르면서까지 저항해서 여군을 동원하여 강제로 목욕시켰을 정도다. 태평천국이 본래 내세운 구호가 남녀 평등이었는데, 권력을 잡자 저 따위 일을 하니 민심이 동요하게 되었다.[15] 제독은 현재의 중장~대장급[16] 지도로 보면 북쪽의 산지를 제외하고 포위된 상황[17] 여담으로 시체는 포로를 통해 묻힌 장소를 알게된 청군에게 훼손됐다.[18] 성씨에서 보듯이 칭기즈칸의 직계 후손이다.[19] 이후 승보는 10배의 병력임에도 진압이 늦어진 것에 대한 책임으로 파면되지만, 빽있던몽골귀족이었던 승격림심은 포상을 받는다.[20] 1853년 3월에 기선이 건설한 요새[21] 즉, 하느님이 양수청의 몸을 빌어서 명령을 했던 것이다(천부하범). 명목상의 왕은 하느님의 대리자인 홍수전이었지만 양수청의 몸에 하느님이 강림했다면 꼼짝 없이 쩔쩔매었고, 실제로 하느님이 현현한 양수청 밑에서 무릎을 꿇고 죄를 빌었다는 기록도 있다. 천부하범은 양수청이 창조한 것은 아니고 이전부터 광서성에서 무당에게 신이 빙의하여 사람들에게 말하는 방식의 신앙이 있었던 것을 양수청이 살짝 변질해서 써먹은 것이다. 태평천국의 핵심 집단인 광서성 출신의 노형제 집단은 무당의 신내림에 익숙한지라 자신의 몸에 신이 내려왔다는 양수청의 말에 믿음을 가졌다.[22] 기껏 하느님의 말씀을 대신 전한다는 게, '왜 천왕 홍수전에게는 만세를 부르고, 동왕 양수청에게는 구천세를 부르느냐. 동왕에게도 만세를 불러라'(이것이 터진 게 핍봉만세 사건이다.) 따위의 속보이는 것이었으니…#[23] 위창휘는 지주, 석달개는 부농 출신이었고 양수청은 숯구이 출신이었으나, 양수청은 종교적 권위를 이용해 위창휘와 석달개에게 모욕을 자주 주었다. 서정군과 합류해 원정 중이었던 석달개는 사정이 좀 나았지만 동왕 양수청을 보좌해 국정에 참여하고 있던 위창휘는 늘 양수청에게 괴롭힘을 당했으며 홍수전까지 위창휘에게 잔소리를 하기도 했다.[24] 안내인의 배신으로 2천 병력과 함께 절벽에 고립되었는데, 석달개는 자신의 부하들이라도 살리기 위해 스스로 낙병장에게 투항하였다. 그러나 낙병장은 무심하게도 석달개의 병력을 공격하여 몰살시켰고, 석달개 역시 포로가 되어 6주 후 능지형을 당해 죽는다. 이떄 석달개는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태연하게 능지처참에 임하였고, 산채로 칼질당하는 동안 단 한차례의 신음도 내지 않았다고 한다.[25] 태평천국의 북벌은 기습적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강남의 태평천국군이 하남, 산서, 직예를 공격하고 있다는 소식은 청 조정 입장에서는 경천동지할 일이었다.[26] 태평군은 거병 초기에 무창을 점령했으나 곧장 포기하고 남경으로 향했다. 서정군이 이 시기에 다시 빼앗은 것.[27] 태평천국 최후의 명장이자 충신이라 불리는 이수성만 해도 아예 자신의 파벌을 만들어 홍씨 파벌에 맞섰다는 평가가 있을 정도. 다만 홍수전에 대한 충성심은 대단했기에 난 말기에 홍수전을 버리고 도망치거나 아예 독립할 수도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남경으로 와 최후까지 싸웠다. 결국 홍수전이 사망한 후에도 홍수전의 아들을 대피시키려다 생포되어 처형당했다.[28] 북벌군을 이끌었다 전사한 이개방 역시 이들 형제와 몽득은을 싫어했었다. 예전부터 이들에 대한 평가가 좋지 않았던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29] 양수청은 무학의 숯구이 출신에 무자비하고 독선적인데다 각 왕들과 갈등을 벌이고 주요 인사들까지 그에게 불만을 갖고 있을 정도로 문제 인사였다. 그러나 양수청은 정치와 행정에서는 대단한 능력을 보여주었고 정보 기관을 운용해 태평천국의 발전에 기여했다. 1854년에 태평청국이 금지하고 요마로 간주한 유학을 태평천국의 이념에 어긋나지 않는 선에서 활용하는 정책을 실시해 지식인 계층을 흡수하려한 것도, 1856년에 있었던 청의 강북, 강남 대영을 격파한 것도 그의 지휘 아래에 이루어진 것이었다.[30] 자살설, 병사설이 있다. 병사설의 안습한 최후는 홍수전 문서 참고.[31] 1차 세계 대전보다 많은 사상자를 낸 사건 중에선 의심의 여지 없는 1위인 2차 세계 대전을 제외하면, 몽골 제국의 정복 활동, 유럽의 아메리카 식민지화, 명, 청 교체기 등이 추정치에 따라 순위가 달라진다.[32] 물론 예외도 있는데 이수성의 경우, 증국번의 호의로 능지형이 아닌 참형으로 죽었다.[33] 실제로 청나라는 한족이 만주족을 비판하거나 상해를 입히는 행위를 반역에 준하는 중죄로 다스렸다.[34] 약 2,500만 명[35] 약 7,840만 명[36] 약 4000만 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