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28 15:50:45

노태우 정부

노태우 정권에서 넘어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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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과천선 개통 ·우암 상가아파트 붕괴사고
별도 문서가 없는 평가 및 논란은 해당 주제 관련 문서를 참고
노태우 개인과 관련된 문서는 틀:노태우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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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ffffff><colbgcolor=#0A84E9> 제6공화국
노태우 정부
盧泰愚 政府 | Roh Tae-woo Government
파일:0104201711091334457753831011653.jpg
▲ 대한민국 제13대 대통령 노태우 취임 선서
1988년 2월 25일 ~ 1993년 2월 24일
<rowcolor=#ffffff> 출범 이전 이후
전두환 정부 문민정부
대통령 노태우 ,/ 제13대,
국무총리 이현재 ,/ 서리 (1988.2.25.~1988.3.1.),
이현재 ,/ 제20대 (1988.3.2.~1988.12.4.),
강영훈 ,/ 서리 (1988.12.5.~1990.12.25.),
강영훈 ,/ 제21대 (1988.12.16.~1990.12.26.),
노재봉 ,/ 서리 (1990.12.27.~1991.1.22.),
노재봉 ,/ 제22대 (1991.1.23.~1991.5.23.),
정원식 ,/ 서리 (1991.5.24.~1991.7.7.),
정원식 ,/ 제23대 (1991.7.8.~1992.10.7.),
현승종 ,/ 제24대 (1992.10.8.~),
여당

파일:민주정의당 글자.svg
,(~1990.1.22.),


[[민주자유당|
파일:민주자유당 글자.svg
]] ,(1990.1.22.~1992.10.5.),
1. 개요2. 슬로건/국정지표3. 외교/국방4. 사회5. 경제6. 평가7. 논란8. 국정지지율9. 주요 사건10. 인사11. 관련 문헌12. 둘러보기

[clearfix]

1. 개요

노태우 정부1987년 12월 16일 대한민국 제5공화국 시대에 치러진 마지막 대통령 선거이자 대한민국 제6공화국 첫번째 정부 출범을 앞둔 제13대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된 노태우가 이끌었던 정부이다. 제6공화국의 초대 정부로 1988년 2월 25일 출범해 1993년 2월 24일까지 5년간 존속하였다. 이후 김영삼 정부 때 정부의 명칭을 문민정부로 지칭하였고 그 이후의 정부도 이런 방식으로 이름을 붙이게 됨으로서,[1] '대한민국 제6공화국(약칭 6공)'은 좁은 의미로는 노태우 정부만을 의미하기도 한다.

1980년대 자체였던 전두환제5공화국과 진정한 1990년대를 열었다고 평가되는 김영삼문민정부와 대한민국 헌정사상 최초로 평화적 여야 정권교체를 했던 김대중국민의 정부 사이에 끼어 언급이 뜸한 시기기도 하다. 전두환 정부와 비교해 큰 사건과 사회적으로 눈에 띄는 시대상이 드물기도 하다.[2] 1961년 5.16 군사정변 이후 이어진 군사 정권을 종식시키고 민간인의 문민정부로 넘어가는 과도기에 해당한다.

노태우 정부는 민주주의 선거를 통해 당선된 대통령으로 구성한 정부이자, 정부 구성 과정에서 부정선거 · 초법적 임기연장 · 쿠데타 등의 방법이 동원되지 않았고, 무엇보다도 제6공화국의 민주헌법 아래에서 정당하게 구성되었기에, '제도상 완벽한 민주공화정부'였다.[3] 동시에, 대통령이 12.12 군사반란의 주역인데다가 전두환의 2인자인 제5공화국의 핵심인물이기 때문에, 인사상으로는 명백한 군사정부의 잔재였다.[4] 즉 노태우 정부는 '제도상으로는 민주정부, 인사상으로는 군사정부 후신'이라고 할 수 있다.

직선제 개헌 직후이자 제5공화국 말기인 1987년 12월 16일, 대통령에 당선된 노태우 정부는 여러 면에서 한마디로 격변기 정부이기도 하다. 상술했듯 1980년대에서 1990년대[5]로 넘어가는 과도기의 정부라 두 시대에 동시에 집권한 특별한 정부이기도 하고, 노태우 정부 5년 동안 세계는 냉전시대[6]에서 탈냉전[7]으로 바뀌었다. 노태우 정부 시절 동안 미국에서는 로널드 레이건 행정부, 조지 H. W. 부시 그리고 빌 클린턴 행정부까지 대통령이 2번 바뀌었으며 동독과 서독으로 나뉜 분단 국가 독일은 베를린 장벽이 붕괴하여 1990년 10월에 동서 통일을 이루었고, 냉전시대의 상징적인 나라 소련 역시 노태우 정부 시절에 붕괴하여 임기 마지막 해인 1992년에는 러시아 연방 체제로 바뀌었다.[8] 이처럼 여러 방면으로 역사적인 사건이 많이 발생했기 때문에 노태우 정부는 기존의 한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 넘어가는 매우 중요한 시기라고 볼 수 있다. 또한 김영삼 후보가 14대 대통령에 당선된 이후 노태우 전 대통령 임기 마지막 날인 1993년 2월 24일자《중앙일보》사설에 따르면 이 시기는 권위주의에서 민주주의로 가는 과도기였다고 평가했다.[9]

2. 슬로건/국정지표

  • 슬로건 - 보통 사람들의 위대한 시대
  • 국정지표
    • 민족자존
    • 민주화합
    • 균형발전
    • 통일번영

3. 외교/국방

1988년 서울 올림픽은 냉전체제 설립 이후 최초로 서방국과 공산국가 모두 참여하여 외교적 의미가 컸다. 1990년부터 공산권 붕괴가 가시화되자 기민하게 동구권과 소련, 중국 등과 수교를 추진하여 국제적 입지를 크게 넓힌 소위 북방정책[10]은 노태우 정부의 가장 큰 업적으로 평가받는다. 또한 1991년 대선 공약이었던 전시작전통제권 회수를 추진하여 문민정부 때 평시작전통제권을 환수하였다. 남북 고위급 회담을 통한 조율로 남북한의 국제연합 동시 가입을 성취한 것 역시 큰 성과. 다만 한일관계 훼손은 옥의 티로, 그 여파가 차기 정부까지 이어졌다가 차차기 정부에 들어서야 해소되었다.

4. 사회

취임 초기부터 임기 두달째인 1988년 4월 26일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집권 여당 민주정의당이 원내 과반수 확보에 실패하자 헌정 사상 첫 여소야대 정국이자 4 체제가 형성되어 여당/야당 내부에서 5공 청산과 관련하여 압박을 받았다. 여기에 노태우 본인이 자신의 친구이자 5공의 실세인 전두환과 5공을 수립한 핵심 측근이었다는 전력이 일종의 원죄로 작용하여, 집권 내내 지지도가 부족했던 노태우 정부는 대통령 주도의 힘있는 정책 드라이브를 펼 수 없었고 대통령의 권한도 이전보다는 많이 약해졌으며 대신 치안에 공을 들여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하여 내부적인 치안유지를 꾀하였다.

그러나 국내에 서서히 불어닥친 민주화에 대해 보수 기득권자들은 안 좋게 봤고, 집권 초엔 오홍근 테러사건 같은 백색테러가 주를 이뤘다. 1989년에 판세를 반전시킬 목적으로 공안 정국을 일으킨 것을 시작으로 세를 역전시키려 했고, 당시 재보궐선거에서의 참패로 궁지에 물려있던 통일민주당 김영삼민주정의당과의 차별화 문제로 골머리를 앓던 신민주공화당 김종필3당 합당을 하여 거대 여당인 민주자유당을 탄생시켰다. 하지만 개혁 정책이 크게 후퇴한 데다가 내각제 개헌을 둘러싼 당내 계파갈등과 연이은 날치기로 지지율은 낮았으며, 특히 1990년 5월 29일자 중앙일보에 '내각제 합의문서 작성'이 폭로되고 10월 25일 사본이 공개되면서 갈등이 더해졌다.

문화적으로도 집권초기에는 대통령과 정치인이 개그프로그램에서 소재로 쓰여지게 되었고, 가요, 소설, 만화, 영화 검열이 이전에 비해 완화되었으며, 뉴스비전 동서남북 및 MBC 리포트처럼 이전에는 나올수 없는 수위의 TV프로그램이 절찬리에 방송되었고, PD수첩도 이때부터 방송을 시작했을 정도였지만, 한편으로는 교육에 있어서 보수적인 경향이 거세져서 1989년에 전교조를 불법단체로 지정하고, 1990년대 초반 들어서 대부분의 중고등학교에서 교복이 재도입되었으며,[11] 즐거운 사라 음란물 지정 및 탄압 사건이 벌어진다든지 파업전야처럼 파업을 다뤘다는 이유로 상영이 불허되는 일이 벌어지는 등 등 보수적인 경향이 강해졌다. 즉, 박정희와 전두환때처럼 단순히 정권을 욕했다고 감옥같은데에다가 잡혀들어가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학생운동의 폭발력이 아직은 강했을 때라서 완전히 사라진것은 아니었다.

1990년 12월 내각제 지지자인 노재봉 총리의 취임 뒤 1991년에 낙동강 페놀사건이 터지고 수서 비리 등 부정부패 사건도 속출하다가 높은 물가상승률이 여전히 문제가 되어 1991년 광역의원 선거에서 민주자유당이 대패할 것으로 예측되었지만 강기훈 유서대필 사건[12]과 정원식 전 총리 계란 투척 사건으로 세를 역전시켰고, 투표율도 58%로 낮게 나오면서 선거에서 압승을 거두었다. 그러나 공천 과정에서의 내분이 벌어지고 각종 공작이 들통나며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자유당은 149석을 확보하는데 그치며 급속히 레임덕에 빠졌고, 이때를 기점으로 민주계의 수장 김영삼에게 실권을 넘기게 되었다.

언론자유화를 통하여 보다 자유로운 언론 보도가 허용되었다. 1987년 11월 28일 언론기본법을 폐지해 보도지침을 내리던 문공부 홍보조정실을 없애는 한편 프레스카드제와 1도 1지제를 폐지하고 언론사 설립요건을 완화시켜 언론사 수가 늘었으며, 각 언론사에 노조가 설립된 것도 노태우 정부 때였다. 언론 자유는 비약적으로 향상되었고, 이에 미국 프리덤 하우스가 1990년에 "언론 자유국" 이라는 지위를 부여하였다.[13] 그러나 3당 합당 직후에 서영훈 전 사장에게 압력을 가해 퇴진시키고 서기원 전 사장을 임명시킴으로써 KBS를 다시 친정부적인 성향의 언론으로 만든 일이나 우리가 남이가 사건과 강기훈 유서대필 조작 사건 등에서 보이듯 공작 정치가 자취를 감춘 것은 아니었으며 메이저 언론의 '자발적' 편향성도 존재했다.[14] 또한 조중동 같은 일부 메이저 언론들의 권력화도 심해져 1991년 강기훈 유서대필 조작 사건 당시에 주요방송사와 신문사에서 진상을 제대로 알리기보다는 물타기성 보도에 급급했었고, 1992년 14대 대선 당시에 KBS와 조선일보, 중앙일보, 서울신문에서는 '정주영 때리기' 보도를 노골적으로 진행하여 김영삼을 대놓고 밀어주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조선일보가 밤의 대통령이라는 별명을 완전히 굳힌것도 이때의 일로 1991년 분신정국과 1992년 양대 선거에서 조선일보가 김영삼을 노골적으로 지원하면서 김영삼의 대통령 당선에 기여해서, 영향력을 입증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영향력 자체는 대략 2002년 지방선거 즈음때까지도 이어졌다.

정치공학 측면에서는 일본 자민당의 사례를 참고, 3당 합당이 이뤄지며 민주자유당이 거대 여당으로 재탄생하여 민주당계 정당들과의 양당 경합 체제가 자리잡았다. 말이 양당 경합체제였지 이 당시에는 민자당과 민주당계 정당의 체격차이가 컸다. 14대 총선때도 민주당이 선전했지만 1당은 민자당이었다. 다만 3당 합당 이후로도 민자당의 지지율이 압도적인것은 아니었는데, 이는 기존 3당의 지지층이 하나로 온전히 묻혀지기보다는 꼬마민주당이나 통일국민당, 신정치개혁당 등 제3지대 정당으로 빠져나가는 경향이 2010년대 초반까지 지속되었기 때문이었다.[15]

5. 경제

노태우 정권하에서 연평균 8.5%의 고속성장을 누렸고 1988년의 서울 올림픽 개최는 발전한 한국을 전 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으며, 경제호황과 노조설립, 최저임금제 신설, 노사분규 등의 영향까지 겹쳐 매년 임금수준이 급속히 향상되며 웬만큼 산다하는 중산층 정도면 자가용 1대 정도는 보유하는 것이 일반화되면서 자동차 수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게 되었고,[16] 그로 인해서 주요 대도시 지역에서의 주차난 문제나[17], 귀향길 고속도로 정체 문제가 본격화되었을 때이기도 하며, 해외여행도 이 시기부터 자유화되었다.[18] 한국이 '중진국의 최대'에 진입한 것도 노태우 정부 시기인 1991년이다.[19]

다만 경제성장률이 높았던 것과는 별개로 경제성장 폭이 일정하지는 않았으며 1989년에 3저 호황이 종료되면서 성장률이 6.9%로 떨어지기도 했고, 1992년도에 성장률이 6%대로 떨어지는 악재도 있었다. 그렇지만 문제점이 없던 건 아니라서, 주택 값 폭등문제와 급속한 물가 상승과 같은 문제점이 있었다. 특히 부동산 상승은 3저 호황이 1987년도부터 시작되었고, 200만 호 택지 공급사업이 큰 영향을 주었다는 평인데 당시 3저 호황에 따라 시중에 유동자금이 크게 증가하면서 부동산으로 많은 자금이 쏠렸으며 더군다나 서울특별시뿐만 아니라 서울특별시 인근 지역의 부동산 가격도 신도시 건설에 따라 투기 자금들이 대거 투자처를 찾아 농어촌에 가까웠던[20] 이들 지역으로까지 몰려들면서 부동산 가격이 폭등해버렸다. 정부의 주택사업이 1기 신도시 분양 이전까지 크게 힘을 못썼다. 1991년 중반기를 기점으로 1기 신도시 아파트가 대량으로 공급되며 부동산 가격이 하락세에 접어들기 이전까지 연 20%대의 상승률을 기록했으며 물가상승률 또한 시중에 자금이 넘쳤던데다가 부동산값 폭등의 영향과 맞물려서 연 평균 7%대 수준을 기록했으며 특히 1990년과 1991년에는 물가상승률이 9%, 체감물가는 그 이상 올랐기 때문에 노태우의 지지율이 낮은 이유가 되었다.

연 평균 18.7%의 임금상승률에 비하면 물가상승률이 낮은 편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부동산 가격 상승과 그에 따른 전월세비 인상으로 인해서 체감 물가 상승폭은 높았던 것이 문제였고(1987년부터 1990년까지 3저 호황과 임대차법 개정 등의 영향으로 전세비가 연 20%씩 폭등했으며 지역에 따라 전세값 상승률이 연 60%까지 달한 경우도 있었을 지경이다.)[21] 이러한 전월세비 상승으로 체감 경제성장률은 생각만큼 높지는 않아서 노태우 정부의 인기가 낮은 또 하나의 원인이 되었다. 다만 이때의 부동산 값을 잡을려고 이런저런 대책들을 내놓다보니 그 가운데서 토지 공개념 등 진보적인 정책들이 부동산 정책에 적용되었고, 그것이 효과를 보면서 김영삼 재임기까지 부동산 가격이 안정되는 계기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다소 아이러니함을 느낄수 있다.

주식시장은 정권초기에 활황세를 보였지만 1989년 3월 31일에 종합주가지수(현재 코스피 지수)가 1000선을 돌파한 이후에 하락세로 반전되자 여러가지 부양책을 내놓았지만 실패하고 1992년 8월에는 450선까지 내려갈 정도로 주가가 약세를 보였기 때문에 주식투자자들에게 평가는 별로 좋지는 못했다.

1986년 전두환 시기부터 시작된 미국의 수입개방은 갈수록 강해졌고, 노태우 정부 역시 전임 정권처럼 저항 없이 무조건 시장을 개방시켰다. 이미 수입 농수산물부터 무차별적으로 들어오는 바람에 국내 농민들을 벼랑까지 몰아넣었고, 뒤이어 지적소유권, 통신시장, 금융시장까지 문을 열어젖혔고 관세율까지 내렸다. 이에 따라 1981년 74.7% 및 24.9%였던 수입자유화율와 관세율이 1989년 6월 기준 94.7%와 12.7%로 바뀌어 선진국 수준과 비슷해졌다. 다른 한편 1988년 수입감시제도를 없애고 1989년 3월 특별법에 따라 수입규제를 완화시키기도 했다. 물론 정부도 수입자유화 및 시장개방 확대에 대해 국민여론을 고려해 일부 품목 개방을 저지하려 했으나 미국이 1989년 '슈퍼 301조'를 동원하며 한국을 우선협상대상국으로 지정해 지적소유권, 농산물, 서비스업 등 산업 전반을 개방하라고 했으나, 5월 정부는 농산물, 국산화 정책, 외국인 투자분야 등에 양보하며 '우선협상대상국'에서 제외됐다. 11월 GATT BOP원용조항[22] 졸업 후 GATT 11조[23] 이행국이 되어 농산물 88.5%, 공산품 99.9%로 각각 증가했다. 더 나아가 외환 및 금리자유화에 따라 금융시장에도 개방이 이루어져 1988년 외국계 보험회사 합작사 및 현지법인도 허용되었다. 1988년 12월 '자본시장 국제화 계획'을 단계적으로 추진하여 1992년 1월에는 외국인에게까지 주식시장을 개방했다. 영화산업 역시 1988년 미국의 요청에 따라 외국영화 직배제를 허용해 외국 영화사 현지법인 설립을 허용시켰다.

노태우 재임기의 분기별 실질경제성장률은 다음과 같다. 최고치는 16.5%, 최저치는 4.0%이다.
분기 실질경제성장률
1988년 1분기 16.5%
1988년 2분기 8.4%
1988년 3분기 10.6%
1988년 4분기 12.9%
1989년 1분기 5.0%
1989년 2분기 7.8%
1989년 3분기 6.9%
1989년 4분기 8.3%
1990년 1분기 10.0%
1990년 2분기 10.9%
1990년 3분기 10.5%
1990년 4분기 8.2%
1991년 1분기 11.4%
1991년 2분기 11.8%
1991년 3분기 9.8%
1991년 4분기 10.3%
1992년 1분기 8.6%
1992년 2분기 7.7%
1992년 3분기 4.9%
1992년 4분기 4.0%

6. 평가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노태우 정부/평가 문서
번 문단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7. 논란

8. 국정지지율

8.1. 한국갤럽

파일:대한민국 대통령기.svg노태우 대통령 직무 수행 평가
한국갤럽
{{{#!wiki style="margin:0 -10px -5px;min-height: 26px"
{{{#!folding [ 1년차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선거 득표율
제13대 대통령 선거
36.6%
조사 기간 긍정 부정
1988년 2월-1988년 5월
29%
46%
1988년 5월-1988년 8월
57%
16%
1988년 8월-1988년 11월
53%
25%
1988년 11월-1989년 2월
41%
27%
이 자료는 한국갤럽에서 자체적으로 조사한 노태우 대통령 국정운영 평가 분기집계 결과임.
조사 방법을 비롯한 자세한 내용은 한국갤럽 홈페이지와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홈페이지를 참고할 것.
}}}}}}}}}
{{{#!wiki style="margin:0 -10px -5px;min-height: 26px"
{{{#!folding [ 2년차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조사 기간 긍정 부정
1989년 2월-1989년 5월
45%
25%
1989년 5월-1989년 8월
28%
41%
1989년 8월-1989년 11월
26%
45%
1989년 11월-1990년 2월 미조사
이 자료는 한국갤럽에서 자체적으로 조사한 노태우 대통령 국정운영 평가 분기집계 결과임.
조사 방법을 비롯한 자세한 내용은 한국갤럽 홈페이지와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홈페이지를 참고할 것.
}}}}}}}}}
{{{#!wiki style="margin:0 -10px -5px;min-height: 26px"
{{{#!folding [ 3년차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조사 기간 긍정 부정
1990년 2월-1990년 5월
28%
40%
1990년 5월-1990년 8월
18%
62%
1990년 8월-1990년 11월
28%
55%
1990년 11월-1991년 2월
25%
54%
이 자료는 한국갤럽에서 자체적으로 조사한 노태우 대통령 국정운영 평가 분기집계 결과임.
조사 방법을 비롯한 자세한 내용은 한국갤럽 홈페이지와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홈페이지를 참고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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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사 기간 긍정 부정
1991년 2월-1991년 5월
12%
40%
1991년 5월-1991년 8월 미조사
1991년 8월-1991년 11월
1991년 11월-1992년 2월
15%
41%
이 자료는 한국갤럽에서 자체적으로 조사한 노태우 대통령 국정운영 평가 분기집계 결과임.
조사 방법을 비롯한 자세한 내용은 한국갤럽 홈페이지와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홈페이지를 참고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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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사 기간 긍정 부정
1992년 2월-1992년 5월 미조사
1992년 5월-1992년 8월
12%
56%
1992년 8월-1992년 11월 미조사
1992년 11월-1993년 2월
이 자료는 한국갤럽에서 자체적으로 조사한 노태우 대통령 국정운영 평가 분기집계 결과임.
조사 방법을 비롯한 자세한 내용은 한국갤럽 홈페이지와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홈페이지를 참고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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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주요 사건

9.1. 1988년

9.2. 1989년

9.3. 1990년

9.4. 1991년

9.5. 1992년

9.6. 1993년

10. 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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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총리 겸 경제기획원장관 <colbgcolor=#ffffff,#1f2024><colcolor=#0A84E9> 나웅배조순이승윤최각규
국토통일원장관 부총리 겸 통일원장관 이홍구홍성철최호중최영철
외무부장관 최광수최호중이상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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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육부장관 체육청소년부장관 조상호김집정동성박철언이진삼
농림수산부장관 윤근환김식강보성조경식강현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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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처장관 조경식허남훈권이혁이재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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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관련 문헌

  • 노태우 회고록(전 2권) - 노태우 저. 조선뉴스프레스. 2011.
  • 한국 현대사 산책 1980년대편: 광주학살과 서울올림픽 3~4권 - 강준만 저. 인물과사상사. 2003.
  • 한국 현대사 산책 1990년대편: 3당합당에서 스타벅스까지 1권 - 강준만 저. 인물과사상사. 2003.
  • 남산의 부장들 - 이도성 저.
  • 실록 민주화운동: 우리 강물이 되어 2권 - 유시춘 외 공저. 경향신문사. 2005.
  • 다시쓰는 한국현대사 3권 - 박세길 저. 돌베개. 1992.
  • 진단 제6공화국 - 이한열기념사업회 편. 두리. 1991.
  • 6공화국 언론조작 - 김종찬 저. 아침. 1991.
  • 한국현대사 이야기주머니 3권
  • 청와대 비서실 4권 - 오병상 저. 중앙일보사. 1995.
  • 실록 청와대: 적과 동지 - 조명구 저. 한국문원. 1995.

12.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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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인물 전두환 · 김영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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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3990><colcolor=#FFFFFF> 역사 역사 · 3당 합당
전당대회 민주자유당/역대 전당대회
선거 1991년 지방선거 · 제14대 국회의원 선거 · 제14대 대통령 선거 ·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
비판 및 논란 군 부재자투표 부정 폭로 사건 · 초원복집 사건
대통령 노태우 · 김영삼
집권정부 노태우 정부 · 문민정부
관련 단체 여의도연구소
민주정의당 · 통일민주당 · 신민주공화당 · 신한국당 · 한나라당 · 자유한국당
기타 국제민주연합
관련 틀 역대 사무총장 · 역대 원내총무 · 역대 정책위원회 의장 · 제14대 대통령 후보 경선 · 제13대 국회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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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김대중 정부 - 국민의 정부, 노무현 정부 - 참여정부.[2] 물론 1988 서울 올림픽의 성공적인 개최와 이 여파로 1989년 이후 시행된 해외여행 전면 자유화, 탈냉전을 대비한 북방외교, 무엇보다 정치인 풍자 허용 등은 큰 변화를 보여주는 시대상이다. 문화적으로는 서태지와 아이들의 데뷔가 매우 큰 변화를 몰고 왔지만 당시는 임기 막판인데다가 지지율 10%대레임덕 신세였고, 무엇보다 92년 대선을 바로 앞둔 시기로서 현직 대통령보다는 대선 후보에 관심이 쏠릴 때라 가요계의 변화는 노태우 정부가 아닌 문민정부 시절의 상징으로 간주된다.[3] 민주국가 여부를 결정하는 건 '어떤 체제(특히 헌법)인가'이지 '누가 집권했는가'가 아니다. 민주적 헌법이 보장되고 있다면 대통령이 반란군 출신이든 반란군 딸 출신이든 국민이 뽑은 민주정권이다. 반대로 헌법이 권력분립을 부정한다면 높은 지지율의 독립운동가 출신 대통령이 이끄는 문민정부라도 그냥 독재정권이다.[4] 그래서 인사상 신군부의 잔재를 주목하는 쪽에서는 제5.5공화국이라는 멸칭으로 노태우 정권을 불렀다. 더 나아가 NL 운동권으로부터는 전임 정권처럼 '반통일 세력' 내지 '미국의 꼭두각시'라는 공격을 받았다.[5] 1990년대 초반까지 집권했으며 사실상 1980년대의 연장선으로 봐도 무방하다.[6] 제2차 세계 대전부터 1991년 12월 소련 붕괴까지.[7] 일명 팍스 아메리카나 시대이며 기간은 좁게 잡으면 소련 붕괴 직후인 1992년부터 2008년 세계금융위기까지며 일부 의견이지만 넓게는 2021년까지로 보는 시각도 존재한다.[8] 여담이지만, 1990년 12월에 한국과 소련이 수교하면서 노태우가 소련 시절 모스크바 대학교에서 연설을 한 적도 있다.대한뉴스 제1832호[9] 정확히 보자면 혼합 체제에서 민주주의로 가는 단계[10] 서독동방 정책에서 이름과 콘셉트를 따 왔다.[11] 다만 이 당시에는 교복이 대세가 되는 것은 이 당시의 학부모들과 교사 사이에서 사복을 입는게 돈이 많이 든데다가 교복을 입는 것이 학생지도에 도움이 된다는 이유로 교복을 부활시키자는 여론이 강했기 때문이기도 했고, 전교조가 탄압받고, 학생운동가들이 노태우 정권과 여전히 대립하던 시절이라서 교육계에서 자유주의보다는 권위주의적인 교수법을 고수하던 교육자들의 목소리가 커졌기 때문이었다. 또한 여학교에서는 매일같이 옷을 고르는게 귀찮다는 이유로 차라리 교복을 입는게 낫다는 식의 여론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전반적인 학생들의 여론은 착용하기 불편허다는 이유로 교복재착용에 부정적인 편이었는데, 학부모와 교사들의 뜻에 따라 억지로 재도입된 감이 있었으며, 또한 막상 교복을 재도입했더니 학부모들 사이에서 교복의 가격이 비싸서 사복 입는 것보다 나을게 없다는 여론이 퍼졌음에도 정작 교복 재도입을 주도한 교육계에서 상당 기간 동안 교복의 개선 및 교복 재자율화에 대해 계속해서 뭉갰기 때문에 현재에 이르렀다.[12] 후에 조작으로 밝혀짐.[13] 프리덤 하우스는 노태우 정부 시기부터 세계의 자유에서 한국의 등급을 '부분 자유'에서 '자유'로 향상시켰다.[14] 실제로 명절 때만 되면 여당 정치인들과 정치부 기자들에게 명절선물로 용돈을 주었다고 전해지며, 이를 토대로 메이저 언론에서 정부여당에게 유리한 보도를 하게 이끌었다고 전해진다. 심지어 궁핍한 야당 정치인들에게도 일정 수준의 용돈을 주기도 했다고 한다. 더군다나 3당 합당 이후로 술값과 택시비를 잘 쏘기로 유명한 김영삼이 민자당에 합류하면서 효과는 배가 되었다. 김영삼 장학생 얘기가 괜히 나온 게 아닌 것이다. 여담이지만 당시 유력 대권주자였던 김대중을 비판하거나 마타도어하는 기사가 많이 나왔던 이유 중 하나가 기자들에게 한 턱 쏠 때 꼼꼼하게 계산하면서 술값과 차비를 내주는 습관때문이었다고 한다. 뭐, 김대중의 측근 인사중 하나였던 박지원은 기자들에게 술값과 차비를 펑펑 싸주어서 대중적인 인기는 없어도 기자들에게 인기가 높았지만 말이다.[15] 이들 지지층들이 1960년대 이전 출생자들에게 2/3 이상을 차지하는 수준으로 완전히 결합된것은 2012년 총, 대선때부터였다. 물론 1960년대생 통일민주당 지지층들은 강남권과 영남권 일대를 제외하면 대부분이 민주당계 정당으로 수렴하는 경향을 보였다. 586 세대와 X세대에서 민주당계 정당의 지지가 압도적이게 된것은 국민의 정부때부터였다.[16] 특히 1987년도에는 승용차 등록대수가 84만 대로 자가용 보유가 아직은 소수계층의 전유물이었던 데 반해서 1992년에는 346만 대까지 증가했다. 승합차나 버스, 트럭까지 합한 총 자동차 대수는 520만 대를 기록한다. 1992년 당시 50대 후반 이상의 노인들은 자가용이 거의 없는 것을 감안하면, 절반 정도의 가정에서 자가용이 있게 된 것이다.[17] 물론 이때의 주차난에는 당시 전철망이 그리 잘 깔려있지 않고, 주차장 시설도 늘어나는 수요에 비해서 많이 부족하다 보니 수요분산이 덜 되었던 것도 있기는 했다. 1기 지하철 건설계획으로 서울에 4개 정도의 지하철망, 부산은 1개 정도의 지하철망이 깔려 있었기는 했지만 당연히 이것만으로는 많이 부족했기 때문이다.[18] 그 이전에는 대부분의 국민들은 경제적인 사정도 되지 않았을뿐더러 해외로 출국하는 것을 여러가지 이유를 들어서 규제했기 때문에 해외여행을 다니기가 힘들었다. 또한 1989년에 해외여행이 자유화가 되기는 하였지만 당시 대다수의 국민들에게는 여전히 그림의 떡이었다.[19] 이때 한국의 GDP 규모가 처음으로 15위 안에 들었고, 인도호주의 GDP를 처음으로 추월했다.[20] 당시 1기 신도시 건설지역이었던 분당, 일산 등은 농촌지역이나 소규모 마을에 지나지 않았다.[21] 덕택에 PD수첩 1회 주제도 집값과 전월세값 폭등으로 인한 자살행렬에 대해 다루웠다.[22] 만성 경상수지 적자로 수입제한토록 한 조항.[23] 수출입 수량제한 철폐.[24] 여당 참패로 여소야대.[25] '대우그룹노조협의회'의 준말.[26] 라디오는 1월, TV는 12월에 이뤄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