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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D6D1><colcolor=#000> 프랑스 왕국 루이 7세의 왕비 잉글랜드 왕국 헨리 2세의 왕비 엘레오노르 다키텐 Éléonore d'Aquitaine | ||
상상화[1] | ||
이름 | 프랑스어 | Éléonore d'Aquitaine 엘레오노르 다키텐 (아키텐의 엘레오노르) |
영어 | Eleanor of Aquitaine 엘리노어 오브 아퀴테인 (아키텐의 엘리노어) | |
출생 | 1124년경 | |
프랑스 왕국 푸아티에 | ||
사망 | 1204년 4월 1일 (향년 80세) | |
프랑스 왕국 푸아티에 | ||
재위 | 아키텐 공국의 여공작 | |
1137년 4월 9일 ~ 1204년 4월 1일 | ||
배우자 | 루이 7세 (1137년 결혼 / 1152년 무효화) | |
헨리 2세 (1152년 결혼 / 1189년 사망) | ||
자녀 | 마리, 알릭스, 기욤 9세, 청년왕 헨리, 마틸다, 리처드 1세, 조프루아 2세, 엘리노어, 조앤, 존 왕[2] | |
아버지 | 아키텐 공작 기욤 10세[3] | |
어머니 | 에노르 드 샤텔로 | |
형제 | 페트로닐, 기욤 |
[clearfix]
1. 개요
<colbgcolor=#FFD6D1><colcolor=#000> 영어 | Eleanor of Aquitaine 엘리노어 오브 아퀴테인 (아키텐의 엘리노어) |
프랑스어 | Éléonore d'Aquitaine 엘레오노르 다키텐 (아키텐의 엘레오노르) |
오크어 | Alienòr d'Aquitània 알리에노르 다키타니오 (아키텐의 알리에노르) |
중세 프랑스어 | Aliénor d'Aquitaine 알리에노르 다키텐 (아키텐의 알리에노르) |
라틴어 | Alienora 알리에노라 |
아키텐 공작령의 공작이자 프랑스와 잉글랜드 양국의 왕비였던 인물.
중세의 대표적인 여걸이자 당시 가장 영향력 있던 인물 중 한 사람. 프랑스 국왕 루이 7세와 결혼했으나 아들 없이 딸 둘만 낳고 이혼했고, 이후 잉글랜드 국왕 헨리 2세와 재혼해 리처드 1세, 조프루아 2세, 존 왕을 낳았다. 12세기 서유럽 역사를 이해하기 위해 반드시 알아야 할 인물 중 한 명으로 꼽힌다.
2. 생애
2.1. 초년기
엘레오노르는 아키텐 공작 기욤 10세와 샤텔로 자작 아이머리 1세 드 샤텔로의 딸인 에노르 드 샤텔로의 장녀이다. 형제로 페트로닐[4]과 기욤이 있었다. 출생 연도는 확실하게 알려지지 않았는데, 1300년경 리모주의 생마르시알 수도원에서 작성된 <노르망디 공작과 잉글랜드 왕의 계보>에는 1137년 아버지가 사망할 당시 13세였다고 기록했다. 이에 따른다면, 그녀는 1124년에 출생했을 것이다. 출생지 역시 분명하지 않은데, 학자들은 푸아티에 백작의 궁전, 보르도의 옴브리에르 궁전 또는 지롱드 남쪽의 벨랭벨리에에 있는 벨랭 성 중 하나일 거라 보는데, 다수의 학자는 노르망디 궁정에서 지내며 그녀의 후원을 받았던 노르만 시인 와스가 한 시에서 그녀의 고향이 푸아티에라고 밝힌 걸 볼 때, 푸아티에 백작의 궁전에서 출생했을 가능성이 높다.그녀는 유아세례를 받을 때 라틴어 'alia Ænor'(다른 에노르)에서 따온 Aliénor(엘레오노르)로 세례를 받았는데, 이는 그녀의 이름이 어머니 에노르를 본떴다는 걸 암시한다. 프랑스 북부에서 흔히 쓰이던 오일어에서는 'Eléanor'라고 쓰였고, 잉글랜드 왕국에서는 'Eleanor'로 일컬어졌다. 그러나 그녀를 다룬 연대기들은 그녀의 이름 철자가 매번 다르게 기재되었다. 그녀는 아키텐 일대에서 쓰이는 오크어에 속한 랑그도크어를 모어로 사용했으며, 프랑스 북부 지역과 벨기에 남부에 사용되던 중세 프랑스어인 랑그 도일어도 유창하게 사용했다.
그녀가 어떻게 교육받았는지는 기록이 미비해 분명하지 않으나, 당시 핀아모르(fin'amor)[5]의 발원지인 아키텐 궁정에서 라틴어, 음악, 문학, 승마, 사냥 등 세심한 교육을 받았고, 퐁트브로 수도원에서도 수도자들의 수준 높은 교육을 받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13세기 잉글랜드의 베네딕토회 수도사이자 연대기 작가 매튜 패리스(Matthew Paris, 1200 ~ 1259)는 엘레오노르가 동료 학생 중 한 명인 리샤르 애니멀(Richard Animal)에게 사파이어로 장식된 금반지를 선물했으며, 본인은 이 반지를 성 알반스 수도원 금고에서 목격했다고 주장했다.
2.2. 아키텐 여공작, 그리고 첫 번째 결혼
<colcolor=#fadb43> |
<colbgcolor=#810000> 첫번째 남편 프랑스 국왕 루이 7세 |
1130년 남자 형제 기욤이 요절하면서, 엘레오노르는 아키텐 공국의 추정 상속자가 되었다. 아버지 기욤 10세는 1136년 남자 후계자를 낳기 위해 코냑 남작 엠마 드 리모주와 두 번째로 결혼했다. 하지만 엠마는 기욤 10세가 이베리아 반도로 순례를 떠나는 동안 앙굴렘 백작 기욤 6세 타유페르에게 납치된 뒤 그와 결혼했다. 기욤은 순례를 떠나기 전에 보르도 대주교인 조프루아 드 라우루에게 두 딸의 양육을 맡겼다. 그러나 1137년 5월 말, 기욤 10세는 순례 도중에 병사했다. 그리하여 엘레오노르는 13세의 나이에 아키텐 여공작이 되었다. 2달 후인 1137년 7월 25일, 엘레오노르는 보르도 대주교 조프루아의 주관 아래 프랑스 국왕 루이 6세의 둘째 아들이자 추정 상속인인 루이와 결혼했다.
이 결혼의 기원에 대해서는 2가지 이야기가 전해진다. 하나는 기욤 10세가 자기 딸이 가신이나 이웃 영주에게 납치되어 강제 결혼할 것을 우려해, 죽기 전에 주권자인 프랑스 국왕에게 그의 자식과 자기 딸을 결합하자고 제안했다는 것이다. 또 다른 이야기는 루이 6세가 기욤 10세의 사망 소식을 듣고 아키텐 공국을 프랑스 왕령지로 삼을 기회라고 판단하고 주권자로서 후견권을 행사한 뒤 엘레오노르를 아들과 결혼시켰다는 것이다. 결혼식은 보르도의 생앙드레 대성당에서 열렸다. 투르의 연대기에 따르면, 두 사람은 조프루아 드 랑콩이란 귀족의 거점인 타일부르 성에서 며칠간 머무르며 첫날밤을 보냈다고 한다. 반면에 조프루아 드 비주아에 따르면, 그들은 상트에서 처음으로 함께 잤다고 한다.
1137년 8월 8일, 두 사람은 푸아티에의 생피에르 대성당에서 각각 아키텐 공작과 아키텐 여공작으로 즉위했다. 이때 체결된 조약에 따르면, 루이 7세는 아키텐 공작이라는 칭호만 채택하고 인장에 추가할 수 있었지만, 푸아투 백작이나 가스코뉴 백작의 칭호는 사용할 수 없었다. 또한 아키텐 공국은 프랑스 국왕의 왕령지에 포함되지 않고 엘레오노르가 여공작으로서 독자적으로 통치할 수 있으며, 루이 7세와 엘레오노르의 자식이 아키텐 공국을 물려받기로 했다. 얼마 후 이질로 고통받던 루이 6세가 8월 1일에 사망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루이 왕자는 프랑스 국왕 루이 7세로 등극했고, 엘레오노르는 1137년 크리스마스에 부르주에서 프랑스 왕비로 즉위했다.
2.3. 프랑스 왕비
연대기 작가 랑베르 드 와트렐로스(Lambert de Wattrelos)에 따르면, 엘레오노르는 자유롭고 쾌활한 정신을 가졌고, 대담하고 사치스러운 의복을 고수했으며, 부르주 태피스트리 작업장을 운영하고 음유시인들을 데려왔다. 그러나 이런 모습은 엄숙하고 경건한 태도를 강조하던 프랑스 궁정에서 높게 평가되지 않았다고 한다. 음유시인 마르카브루(Marcabru)는 왕비에 대한 사랑을 노래했다는 이유로 궁정에서 해고되기도 했다. 그녀는 남편의 친척들에게 궁정 질서를 흐트러뜨리는 요주의 인물로 간주하였고, 끊임없이 염탐과 중상을 당했으며, 연대기 작가들은 프랑스 북부의 성직자와 학자들과 남부의 세속적인 문화 간의 충돌을 꾸준히 언급했다. 그렇지만 루이 7세 본인은 엘레오노르를 존중해줬고, 그녀가 독자적으로 궁정을 세우는 걸 허용했다.루이 7세는 어린 아내를 대신해 아키텐에 대한 실질적인 통치를 행사했다. 1138년 자신에게 반기를 든 푸아티에에 무력으로 압력을 가해 복종시키고 주요 주민들에게 그들의 아이를 인질로 넘기라고 요구했다가 생드니 수도원장 슈제(Suge)의 조언에 따라 인질을 받는 걸 그만뒀다. 또한 자신에게 경의를 표하길 거부하고 아키텐 공작의 사냥 보호 구역에서 흰매를 사냥한 기욤 드 르제를 중범죄자로 간주하고 단호히 처벌했다. 1141년 봄 할머니 필리프 드 툴루즈로부터 물려받은 엘레오노르의 툴루즈 백국 계승권을 근거로 삼아 툴루즈, 루에르그, 알비, 아게네 및 쿠에르시 백작 알퐁스 주르댕을 굴복시키기 위한 원정을 단행했다. 그러나 승기를 잡지 못하고 고전하다가, 알퐁스로부터 앞으로 엘레오노르를 주군으로 섬기고 공물을 바치겠다는 약속을 받은 뒤 철수했다. 엘레오노르는 루이 7세에게 보답하기 위해 사라고사 타이파 압델말리크 이븐 무스타인이 1120년에 아키텐 공작 기욤 9세에게 선물한 암석 수정으로 조각한 꽃병을 선물했다. 이 꽃병은 현재 루브르 박물관에 전시되었다. 1137년부터 1152년까지의 기간 동안 아키텐에서 엘레오노르의 명의로 헌장 20개가 발행되었는데, 모두 통치 첫 10년간 발행되었다. 제2차 십자군 원정 이후 국내에 돌아와서는 그녀의 명의로 된 헌장이 발행되지 않았는데, 이는 부부 간의 균열이 심해져서 루이 7세가 아내의 명의로 헌장이 발표되는 걸 막았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성인이 되었을 때, 엘레오노르는 루이 7세에게 베르망두아, 아미앵, 발루아 백작 라울 1세 드 베르망두아의 결혼을 파기하고 자기 여동생 페트루페트로닐과 재혼하도록 강요하라고 요청했다. 그는 이에 따랐고, 페트로닐은 라울 1세와 결혼했다. 1143년 1월, 부르주 주교구 후보자 피에르 드 라 샤트르(Pierre de la Châtre)와 손잡고 자기에게 반기를 든 샹파뉴 백작 티보 드 블루아샹파뉴(Thibaud de Blois-Champagne)를 진압하러 출진한 루이 7세는 비트리앙페르투아(Vitry-en-Perthois) 마을을 공략했다. 왕의 군대는 민병대를 진압했고, 집들은 불에 탔으며, 불은 1,500명 이상의 주민이 피난처로 삼고 있던 인근 교회까지 번져 수많은 인명피해를 기록했다. 루이 7세는 이 일로 비난받았고, 교황청은 부르주 주교를 자기 마음대로 세우려는 루이 7세에게 분개해 파문을 선고했다.
1144년 6월 11일, 생드니의 새 수도원 봉헌식에 참석한 엘레오노르는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도와 면담했다. 당시 20살이었던 엘레오노르는 루이 7세와 결혼한 지 7년이 지나도록 임신하지 못했다. 베르나르도는 엘레오노르에게 남편과의 갈등을 완화하기 위해 더 나은 조언을 해달라고 요청하며, 남편을 공손히 대하면 언젠가 자녀를 낳았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또한 루이 7세는 그의 조언에 따라 샹파뉴 백작과 화해했고, 피에르 드 라 샤트르갸 부르주 주교에 선임되는 걸 받아들이는 대가로 새 교황 첼레스티노 2세에 의해 파문을 해제했다. 두 사람 사이의 첫째 딸 마리[6]는 이듬해인 1145년에 출생했고, 둘째 딸 알릭스[7]는 1150년에 출생했다.
2.4. 제2차 십자군 원정
1144년, 모술의 아타베그 이마드 앗 딘 장기가 에데사를 공략하고 에데사 백국 대부분을 장악했다. 이에 교황 에우제니오 3세는 2번째 십자군을 소집한다고 선언했다. 루이 7세는 1145년 크리스마스에 부르주에서 십자군을 이끌겠다고 서약했으며, 왕비 엘레오노르도 그와 동행하기로 했다. 1146년 3월 31일 부활절,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도는 베즐레에서 루이 7세와 엘레오노르가 참석한 가운데 수많은 군중 앞에서 설교해, 그들 전원이 십자군을 지겠다고 맹세했다. 생드니 수도원장 슈제가 왕이 없는 동안 프랑스 왕국의 섭정으로 선임되었다. 1147년 6월 12일 메츠에 집결한 프랑스 십자군은 보름스로 떠난 뒤, 육로를 따라 콘스탄티노폴리스로 향했다.엘레오노르가 원정대에 참석한 것은 뤼지냥 백작 위그 7세 드 뤼지냥, 아키텐 보안관 살데브뢰이 드 산자이, 프랑스 무관장 조프루아 드 랑콩 등 여러 가신의 자발적 참여를 유도하고 아키텐 부르주아들의 지원을 촉진하기 위한 정치적 목적이 있었다. 여기에 엘레오노르가 아직 그에게 남성 상속인을 낳지 못한 점이 고려되었고, 엘레오노르가 섭정 자리를 놓고 슈제와 경쟁하는 것을 미연에 방지하려는 목적도 있었다. 엘레오노르와 다른 고위급 십자군 영주 아내들은 엄청난 수의 수레가 있어야 하는 수행원들을 데려갔다. 이에 여러 성직자와 장성들은 너무 많은 수레는 호송 속도를 늦추고 공격 시 위험을 초래한다고 주장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147년 10월 4일, 프랑스 십자군은 출발한 지 5개월 만에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도착했다. 연대기 작가들은 엘레오노르가 동로마 제국의 궁정에서 동양적인 사치와 자유로운 궁정 분위기에 경이로움을 느꼈다고 서술했다. 그 후 프랑스 십자군은 1147년 10월 15일까지 사보이아 백작 아메데오 3세의 후속 부대를 기다린 뒤 아나톨리아 반도로 건너갔다. 그러다가 니케아에 이르렀을 때, 앞서 출발한 독일왕 콘라트 3세의 군대가 튀르크군에 참패한 뒤 남은 병력이 그들과 합세했다. 콘라트 3세의 군대가 참패한 것에 위협을 느낀 루이 7세는 내륙으로 이동하는 것보다는 좀 더 길고 안전한 해안 경로로 이동하기로 했다. 그러나 프랑스 십자군은 1148년 1월 6일 피시디아의 카드무스 산에서 튀르크군의 급습을 받았다. 프랑스군은 이 전투에서 큰 피해를 보았고, 루이 7세는 사력을 다해 항전한 끝에 사지를 겨우 빠져나갔다. 엘레오노르가 어느 부대에 있었으며, 튀르크군의 공세로부터 어떻게 탈출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루이 7세는 가까스로 잔여 병력을 수습한 뒤 안탈리아 항구로 가서 배를 타려 했지만, 그리스 선원들이 엄청난 가격을 요구한 데다 보트가 충분하지 않자, 자신과 엘레오노르, 그리고 기사단만 데리고 먼저 출발하기로 했다. 나머지는 육로를 통해 이동하다가 굶주림, 질병, 튀르크군의 끊임없는 공격으로 큰 피해를 보았다. 1148년 3월 19일, 안티오크에 상륙한 루이 7세는 푸아티에 백작 레몽의 환영을 받았다. 레몽은 장기가 살해된 뒤 장기의 아들 누르 앗 딘이 형제들과 내전을 치르고 있다고 전하면서, 이를 틈 타 알레포를 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금욕적인 성향의 루이 7세는 으스대는 성품인 미남자 레몽을 좋아하지 않아서 그의 계획을 따르길 거부하고 예루살렘으로 순례하기로 했다.
솔즈베리의 존에 따르면, 엘레오노르는 삼촌인 레몽에게 친근함을 느꼈고, 루이 7세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랑그도크어로 레몽과 긴 대화를 나눴다. 그녀는 남편에게 레몽의 요청에 따르자고 설득했지만 남편이 들어주지 않자, 삼촌을 도와주지 않겠다면 자신은 가신들과 함께 안티오크에 남겠다고 선언했다. 두 사람은 열흘간 말다툼을 벌이다가, 루이 7세가 야간에 예루살렘으로 떠나버리자, 엘레오노르의 아버지 기욤 10세의 전 고문이었던 기사 티에리 갈레랑의 강력한 권고에 따라 엘레오노르도 뒤따라갔다고 한다. 당대의 몇몇 연대기 작가들은 안티오크 사건에 관해 이야기하지 않는 것이 낫다고 밝혔는데, 이는 이 사건이 모든 사람에게 알려져 있고 특정 동시대인들의 평판을 손상할 가능성이 있다는 걸 암시한다. 프랑스 섭정 슈제도 루이 7세에게 "폐하와 왕비 전하에 대해 좋지 않은 소문이 돌고 있으니, 언행을 조심하십시오."라고 충고하는 서신을 보내기도 했다.
티레의 윌리엄은 이 사건을 더욱 노골적으로 기록했다. 그는 레몽이 십자군을 조종해 알레포를 포위하도록 유도하려 했으며, 엘레오노르를 유혹해 루이 7세가 자기 말을 따르도록 권고하게 했다고 주장했다. 13세기 중반에 활동한 연대기 작가들은 티레의 윌리엄이 기술한 이 구절을 근거 삼아 그녀가 삼촌과 불륜 관계를 맺었다고 주장했다. 헬리난드 드 프로이드몬트는 엘레오노르가 "왕비라기보다 창녀처럼 행동했다"라고 비난했으며, 또 다른 연대기 작가들은 그녀가 십자군 원정을 떠나는 동안 레몽 뿐만 아니라 외삼촌인 라울 드 페이(Raoul de Faye), 살라흐 앗 딘 유수프, 푸아티에 주교 질베르 드 라 포레, 아키텐 무관장 살데브뢰이 드 산자이 등과 불륜 관계를 맺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현대 학계에서는 엘레오노르가 불륜을 일삼고 레몽에게 현혹되었다는 주장은 강력한 위세를 떨친 여성에 대한 중세 연대기 작가들의 전형적인 모함일 뿐이라고 간주한다. 일부 학자들은 엘레오노르가 레몽을 옹호한 건 자신을 도울 수 있는 가족 중 유일하게 강력하고 인정받는 공작인 그의 지지를 얻어서 루이 7세로부터 독자적인 입지를 다지려 했을 거로 추정한다.
아무튼 예루살렘으로 향한 루이 7세는 프로방스에서 도착한 십자군을 보충받은 뒤 예루살렘 왕국의 우방이었던 다마스쿠스를 공격했지만 누르 앗 딘이 파견한 군대에 격파되었다. 그 후 1149년 부활절까지 예루살렘에서 머무른 뒤 시칠리아 왕국을 경유해 프랑스로 귀환하기로 했다. 해상으로 이동하던 중, 엘레오노르가 탄 배는 시칠리아 왕국과 동로마 제국간의 해전에 연루되어 동로마 제국군에 잠시 억류되었다가 3주 만에 신원이 확인되면서 포텐차로 옮겨졌고, 거기서 시칠리아 함대와 조우했다. 이때 그녀는 삼촌 레몽이 1149년 6월 29일 이나블레 전투에서 누르 앗 딘에 맞서 싸우다가 전사했고, 그의 머리와 오른팔이 바그다드에 있는 칼리파에게 보내졌다는 참담한 소식을 접했고, 레몽을 돕지 않았던 남편에 대한 강한 반감을 품었다.
그 후 시칠리아에서 남편과 재회한 뒤 몬테카시노의 베네딕토회 수도원에 들른 후 프랑스로 향하는 여정을 이어갔다. 1149년 10월 9일, 두 사람은 투스쿨룸에서 교황 에우제니오 3세를 만났다. 이때 그녀는 자신과 남편은 10촌 지간으로 근친혼이 명백하니 결혼을 무효로 처리해달라고 강력히 요청했다. 교황은 두 사람과 별도로 길게 이야기하면서, 다시 함께 생활할 것을 촉구하며 더 이상 친족 문제에 대해 생각하지 말라고 요청했다. 두 사람은 일단 화해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고, 교황이 그들을 위해 준비한 방으로 인도되었다. 아마도 이때 둘째 딸 알릭스가 잉태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2.5. 루이 7세와의 결혼 무효와 헨리 2세와의 결혼
<colcolor=#fadb43> |
<colbgcolor=#810000> 두번째 남편 잉글랜드 국왕 헨리 2세 |
프랑스로 돌아온 엘레오노르는 1151년 1월 13일 결혼 무효를 강력히 반대하던 생드니 대주교 슈제가 사망하자 재차 결혼 무효론을 제기했다. 그러던 1151년 8월 말 또는 9월 초, 앙주 백작 조프루아 5세와 아들 헨리 플랜태저넷이 노르망디를 놓고 루이 7세와 갈등을 벌인 끝에 평화 회담을 시작하기 위해 파리 궁정에 찾아왔다.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도의 중재에 따라, 헨리는 벡생 공국을 루이 7세에게 넘기는 대가로 노르망디 공작으로서 루이 7세에게 경의를 표했다. 이때 엘레오노르는 9살 연하인 헨리에게 호감을 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13세기 연대기 작가들은 헨리가 파리 궁정에 있을 때 엘레오노르와 간통했다고 주장했지만, 현재 중세 학자들은 중상모략으로 간주한다.
1151년 말, 루이 7세와 엘레오노르는 아키텐으로 함께 여행했다. 그들은 리모주에서 함께 크리스마스 성회를 열었고, 1152년 초 생장당젤리로 갔다. 그 후 루이 7세는 아키텐을 떠났지만, 엘레오노르는 아키텐에 그대로 남았다. 1152년 3월 18일, 루이 7세는 오를레앙 인근의 보장시에서 의회를 소집한 뒤 사흘간 논의한 끝에 3월 21일에 엘레오노르와 자신이 10촌 지간이라는 이유로 결혼 무효를 선언하도록 했다. 그러면서도 엘레오노르와의 사이에서 낳은 두 딸이 합법적인 자식으로 남도록 했으며, 엘레오노르의 영지를 상속받을 권리도 인정받도록 했다. 엘레오노르는 아키텐 여공작으로 군림할 수 있지만, 두 딸의 결혼 대상은 루이 7세의 선택에 맡겨야 했다.
보장시에서 의회가 열리는 동안, 루이 7세와 엘레오노르는 보장시에서 몇 킬로미터 떨어진 타베르 마을에 함께 머물렀다. 그러다가 결혼 무효가 확정된 뒤, 루이 7세는 파리로 돌아갔고, 엘레오노르는 푸아티에로 이동했다. 이때 블루아 백작 티보 5세와 헨리 플랜태저넷의 동생 조프루아가 도중에 그녀와 결혼하려고 납치를 시도했지만, 사전에 경고받은 엘레오노르가 다른 길로 돌아가면서 실패했다. 8주 후인 5월 18일, 엘레오노르는 푸아티에로 찾아온 헨리와의 결혼을 전격으로 발표했다. 당시 헨리는 19세였고, 엘레오노르는 28세였으며, 두 사람은 8촌 지간이었다. 뉴버그의 윌리엄은 이 결혼은 기밀이 새지 않아야 할 필요성 때문에 그들의 계급에서 기대했던 것보다 덜 엄숙하고 신중하게 이뤄졌다고 밝혔다.
루이 7세는 이 소식을 듣고 격노했다. 프랑스 왕국 내 영지의 소유자인 엘레오노르가 자신의 동의 없이 결혼을 감행했고, 헨리와 엘레오노르는 8촌 지간이기에 역시 근친혼이었다. 그리고 헨리가 엘레오노르와 결혼하면서 아키텐 공작이 되었으니, 루이 7세와 엘레오노르 사이의 두 딸인 마리와 알릭스가 어머니의 영지를 상속받기 곤란해진 것도 루이 7세의 분노를 살 일이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헨리는 기존에 가지고 있던 노르망디 공국, 앙주 백국에 이어 아키텐 공국까지 확보하면서, 프랑스 왕실보다 훨씬 더 큰 영토를 소유하게 되었으니, 자칫했다간 프랑스 왕국의 주권이 헨리 쪽으로 넘어갈 수도 있었다.
루이 7세는 헨리를 응징하기로 마음먹고, 스티븐 왕, 스티븐 왕의 아들이자 불리뉴 백작 외스타슈 4세, 샹파뉴 백작 앙리 1세, 페르슈 백작 로베르와 연합했다. 여기에 헨리의 동생 조프루아도 가세했다. 그는 헨리가 자기에게 돌아가야 할 영지까지 독점했다고 주장하며 앙주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이후 전쟁이 발발했고, 샹파뉴의 앙리 1세와 페르슈 백작 로베르가 노르망디 국경지대의 요충지인 뇌프마르세쉬르를 접수했다. 여기에 루이 7세는 아키텐 공국으로 곧장 진군했으며, 스티븐 왕은 템스강 계곡에서 헨리에게 충성하는 주요 요새인 월링포드 성을 포위했다. 헨리는 이에 대응해 아키텐에서는 농성을 고수해 루이 7세와의 전면전을 회피하는 한편, 노르망디 국경 수비를 강화해 적군이 더 이상 침투하지 못하도록 했다. 여기에 벡생을 습격해 약탈을 자행했고, 앙주로 진군해 조프루아의 주요 성 중 하나인 몽소르를 점령했다. 이후 루이 7세가 병에 걸려 철수하자, 조프루아는 어쩔 수 없이 형과 평화 협약을 맺었다.
1153년 11월 6일, 헨리는 월링포드 조약을 체결해 스티븐 왕에 의해 잉글랜드 왕국의 상속인이 되었다. 1154년 10월 25일에 스티븐이 사망하자, 헨리와 엘레오노르는 잉글랜드로 가기 위해 바르플뢰르 항으로 향했지만, 그곳에서 폭풍과 역풍으로 인해 영국해협을 건너기까지 한 달 이상 기다려야 했다. 12월 8일 마침내 잉글랜드에 도착한 두 사람은 1154년 12월 19일 웨스트민스터 대성당에서 캔터베리 대주교 테오발드에 의해 잉글랜드 국왕과 왕비로 즉위했다. 1154년 8월, 헨리 2세와 프랑스 국왕 루이 7세는 평화 협약을 체결했다. 당시 레온 왕국과 카스티야 왕국의 국왕 알폰소 7세의 딸 콩스탕스와 재혼한 루이 7세는 그때까지 사용하던 아키텐 공작 칭호를 포기하기로 했고, 헨리 2세는 아키텐 공작으로서 루이 7세에게 경의를 표하고 공물을 바치기로 했다. 이리하여 잉글랜드의 국왕이 잉글랜드는 물론이고 원래부터 갖고 있던 프랑스 내의 노르망디와 앙주, 거기에 결혼으로 아키텐과 푸아티에 등의 방대한 영지를 가지게 되었다.
2.6. 잉글랜드 왕비
엘레오노르는 잉글랜드 왕비가 된 뒤 공식 문서에 "Alienor Dei Gracia Regine Anglorum"(엘리노어, 신의 은총으로 잉글랜드의 왕비)이라고 서명했으며, 헨리 2세로부터 여러 장원과 도시를 받으면서 왕국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 중 한 사람이 되었다. 그러나 헨리 2세의 통치 기간에 그녀에 대해 알려진 바는 비교적 적다. 연대기 작가들은 그녀가 왕과 함께 있을 때를 언급하는 것 외에는 그녀에 대해 거의 언급하지 않았고, 단지 서신, 헌장, 정부가 발간한 공식 문서를 기반으로 한 행적만이 전해진다.엘레오노르는 1153년부터 1157년까지 5년간 잉글랜드 궁정에 머무르며 윌리엄, 헨리, 마틸다, 리처드를 잇달아 낳았다. 하지만 부활절이나 크리스마스 궁정과 같은 의례 행사에 왕과 함께 참여할 뿐, 헨리 2세가 직접 통치를 행사할 때 큰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했다. 다만 헨리 2세가 스코틀랜드 국경에서 피레네 산맥에 걸친 광대한 영역을 자주 여행했으며, 전임자들보다 훨씬 오랫동안 잉글랜드를 비웠기에 그가 궁정을 비운 대부분의 시간 동안 섭정을 맡았다. 때로는 헨리 2세의 여정에 함께 하기도 했지만, 혼자서, 또는 자녀들과 함께 광활한 영지를 직접 여행하기도 했다.
1158년, 헨리 2세는 루이 7세가 지난해에 세 번째 딸 마르그리트를 낳으면서 남성 상속자를 낳을 수 없을 듯해 보이자, 아들 헨리를 마르그리트와 결혼시켜서 종국에 프랑스 왕위를 자기 가문의 소유물로 삼을 계획을 세웠다. 그는 그해 8월에 프랑스로 가서 루이 7세와 협상했고, 어린 마르그리트를 결혼할 나이가 될 때까지 돌보기로 했다. 그 후 헨리 2세는 4년간 잉글랜드로 돌아오지 않았고, 엘레오노르는 1158년 9월 23일에 잉글랜드에서 네 번째 아들 제프리를 낳은 뒤 얼마 지나지 않아 헨리 2세와 합류했다.
헨리 2세는 전통적으로 아키텐 공국의 가신이었지만 당시엔 아키텐으로부터 사실상 독립했던 툴루즈 백작령도 아내 엘레오노르의 권리를 내세워 복속하려 했다. 헨리는 먼저 툴루즈 백작 레몽 5세의 정적인 바르셀로나 백작 라몬 베렝게르 4세와 동맹을 맺었고, 1159년에는 툴루즈 백작을 폐위하기 위해 침략하겠다고 위협했다. 루이 7세는 헨리 2세가 남프랑스 전역을 석권하는 걸 절대로 바라지 않았기에, 여동생 콩스탕스를 레몽 5세와 결혼시켰다. 이후 헨리 2세가 툴루즈를 침공했지만, 루이 7세가 툴루즈를 방문했다는 소식을 접하자, 자신의 주권자인 루이 7세와 직접 교전하기엔 시기상조라고 여겼기에 주변 마을들을 약탈하고 케르시 지방을 점거하는 것으로 만족하며 철수했다.
이후 툴루즈를 둘러싸고 헨리 2세와 루이 7세간의 갈등이 고조되었다가, 군사적으로 열세한 루이 7세가 1160년 헨리 2세에게 먼저 사절을 보내 평화 협약을 맺자고 제안했다. 이 조약은 청년왕 헨리와 마르그리트의 약혼과 벡생 백작령 거래를 재확인했으며, 청년 왕 헨리가 루이 7세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것이 포함되었다. 그 후 두 번째 아내 콩스탕스가 사망하자, 루이 7세는 블루아와 샹파뉴 백작의 자매인 아델과 세 번째로 결혼했다. 여기에 엘레오노르의 딸들을 아델의 형제인 블루아 백작 티보 5세와 샹파뉴 백작 앙리 1세와 약혼시켰다. 그는 이를 통해 헨리 2세와 동맹을 맺었던 블루아 백국과 샹파뉴 백국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일 계획이었다. 이에 분노한 헨리 2세는 1160년 11월 청년왕 헨리와 마르그리트가 각각 5살과 3살밖에 안 되었음에도 교황 특사들을 협박해 그들을 즉시 결혼시키고 벡생 백작령을 압수했다.
이후 양자 간의 전쟁이 벌어지는 동안, 엘레오노르는 노르망디에 머물렀고 1161년 9월 노르망디의 돔프롱에서 두 번째 딸 엘리노어를 낳았다. 1162년 교황 알렉산데르 3세의 중재 하에 헨리 2세와 루이 7세간의 평화 협약이 체결된 뒤, 1163년 1월 25일에 남편과 함께 잉글랜드로 돌아왔다. 1165년 2월, 헨리 2세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1세와 동맹을 굳건히 하기 위해 두 딸 마틸다와 엘리노어를 프리드리히 1세의 친족과 결혼시키고자 유럽 대륙으로 돌아왔다. 엘레오노르는 5월 1일에 헨리 2세와 합류했고, 헨리 2세가 2주 만에 잉글랜드로 돌아간 뒤 앙주와 멘에서 섭정으로 활동했으며, 10월에 앙제에서 또 다른 딸인 조안을 낳았다.
이후 헨리 2세와 엘레오노르는 서로를 거의 보지 않았다. 엘레오노르는 앙제에 남았고, 헨리 2세는 1165년 크리스마스에 그녀와 함께하지 않고 1666년 3월에 프랑스로 건너가 부활절까지 그녀와 함께 있었고, 그녀는 이때 마지막 아이인 존을 임신했다. 그 후 엘레오노르는 잉글랜드로 돌아갔고, 1166년 크리스마스에도 두 사람은 다시 떨어져 지냈다. 자연히 크리스마스이브에 존이 태어났을 때 헨리 2세는 그녀 곁에 없었다. 2년 연속 크리스마스를 함께 하지 않은 것에 대해 여론이 좋지 않자, 헨리 2세는 1167년 9월에 엘레오노르르 앙제로 불러서 그해 크리스마스를 함께 보냈다. 이 해 그녀는 당시 11살이었던 마틸다를 유럽 대륙으로 데려와서 훨씬 나이 많은 작센 공작 하인리히 사자공과 결혼시켰다.
1167년 12월 엘리노어는 잉글랜드에서 옮길 수 수 있는 재산을 모아 여러 척의 배에 태워 아르장탕으로 옮겼다. 그곳의 왕실에서 크리스마스를 축하한 뒤, 그녀는 고향인 푸아티에로 떠났다. 헨리 2세와 그의 군대는 루이 7세에게로 충성을 바꾸겠다고 위협한 뤼지냥 가문의 성을 공격하기 전까지 그녀와 함께 갔다. 그 후 헨리 2세는 아키텐 외곽에서 통치하면서, 지역 군사 사령관인 솔즈베리 백작 패트릭을 그녀의 보호 관리자로 남겨 두었다. 그녀는 1173년까지 푸아티에에 머물렀고, 이는 헨리 2세가 가신들이 계속 반란을 일으키고 있는 아키텐을 통제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그 후 엘레오노르와 헨리는 5년여간 별거 생활을 이어갔다. 이에 대해 세간에서는 헨리 2세가 여러 정부와 불륜을 맺으면서 엘레오노르의 질투심이 폭발한 데서 비롯되었다는 소문이 떠돌았다. 실제로 헨리 2세는 아내에게 전혀 충실하지 않았고 난잡한 관계로 유명했으며, 결혼 생활 내내 다른 사생아를 두었다. 엘레오노르 본인은 이에 대해 모호한 태도를 취한 것으로 보인다. 가령 훗날 요크 대주교가 될 제프리는 헨리 2세의 사생아였지만 헨리 2세가 합법적인 자식으로 인정했고, 웨스트민스터에서 엘레오노르의 보살핌을 받으며 자랐다. 엘레오노르는 아키텐에서 질서를 회복하는 데 성공했고, 다양한 영지에서 섭정으로서 무난하게 통치했으며, 왕비로서 의무를 잘 수행했다. 하지만 그는 이제 더 많은 자녀를 낳을 수 없을 정도로 나이가 많이 들었고, 헨리 2세는 그녀를 더 이상 가까이할 필요가 없다고 여겼던 것으로 보인다.
역사가들은 오랫동안 엘레오노르가 음유시인들에게 후원자로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현재 학계에서는 그녀의 후원자로서의 역할이 과장되었다고 본다. 엘레오노르의 의뢰로 집필되었다거나 엘레오노르의 후원으로 간주한 작품들은 실제로는 그녀에 대해 거의 언급하지 않았으며, 헨리 2세의 헌장에서 엘레오노르와 함께 언급된 유일한 음유시인은 1170년 보르도에서 열린 탄원 당시 마르상의 공동 영주인 아르노 길헴 드 마르상 뿐이었으며, 그나마도 이 탄원은 음유시인으로서가 아닌 로크포르와 몽가이야르 영주로서 행한 것이었다.
하지만 당대의 여러 작가가 그녀에게 작품을 헌정한 건 사실이다. 대표적으로 노르망디 궁정에서 활동하던 음유시인 와스가 1155년경에 집필한 로만 드 브뤼트(Roman de Brut)[8]를 그녀에게 헌정한다고 밝힌 사례를 들 수 있다. 후대의 연대기 작가 마리 드 프랑스는 그녀를 아서왕 전설에서 아서왕의 정처인 기네비어와 연관시키기도 했다.
엘레오노르가 1168년부터 1173년까지 푸아티에에 머무는 동안 기사도와 음유시인 문화를 진흥하는데 크게 기여했다는 이야기가 오랫동안 회자하였지만, 실제로는 이를 입증할 증거가 없다. 12세기 후반의 문헌 작가 안드레아스 카펠라누스의 <궁정 사랑의 기술>에서는 엘레오노르가 루이 7세와 자신의 딸 마리, 나르본 자작부인 에르멩가르드, 플란데런 백작부인 이자벨 및 여러 여성과 함께 연인들의 다툼을 듣고 낭만적인 사랑의 행위를 중심으로 한 법정 문제를 논의했다고 밝혔다. 그는 약 21건의 사례를 기록했는데,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은 결혼 생활에서 진정한 사랑이 존재할 수 있는지에 대한 여성들에게 제기된 문제였다. 그러나 그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증거는 없다. 마리는 어머니가 아버지와 자신을 배신했다고 여겨 헨리 2세와 엘레오노르에게 매우 적대적이었기에, 그녀의 궁정에 찾아간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을 것이다.
2.7. 대반란과 15년간의 감금 생활
1173년 2월 21일, 헨리 2세와 엘레오노르는 몽페랑에서 열린 막내 아들 존과 모리엔의 앨리스의 약혼식에 참석하고자 오랜만에 한자리에 함께 했다. 그러나 이 행사는 헨리 2세와 아들 청년왕 헨리 사이에서 권한 위임을 놓고 공개적인 갈등이 일어나면서 망쳐졌다. 그 후 청년왕 헨리는 파리로 망명한 뒤 루이 7세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고, 뒤이어 조프루아 2세와 리처드 1세도 루이 7세와 손잡고 아버지를 상대로 반기를 들었다. 후대의 연대기 작가들은 엘레오노르가 아들들의 반란을 부추겼다고 밝혔다. 뉴버그의 윌리엄은 파리에서 "프랑스 왕의 조언에 따라 사방에서 아버지에 대한 악을 꾸민 어린 헨리는 비밀리에 아키텐으로 갔는데, 그곳에서 그의 두 어린 동생인 리처드와 제프리가 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었고, 그녀의 묵인으로 그들이 그에게 가담하도록 부추겼다"고 밝혔다. 호베덴의 로저는 엘레오노르가 어린 아들들을 프랑스로 보냈고 그들의 형은 아버지인 왕에 대항하여 그와 함께 가담했으며, 젊은 헨리와 그의 형제들은 봄에 파리로 돌아왔고 엘레오노르는 가신들에게 그녀의 아들들을 지원하도록 지시했다고 설명했다.반란의 배경에는 여러 원인이 있었다. 청년왕 헨리는 공동 왕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실질적인 권력이 없으며, 부하들에게 급료를 지급할 돈을 제대로 확보하지 못하는 현실에 강한 반감을 품었다. 또한 전직 가정교사인 토머스 베켓의 죽음에 아버지의 책임이 크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아버지의 후원으로 브르타뉴 공작이 될 예정인 조프루아 2세도 1171년 브르타뉴 공작 코난 4세가 사망했지만, 아직 코난 4세의 딸 콩스탕스와의 결혼이 거행되지 않아서 영지가 없어서 재정적으로 어려움이 많았다. 엘레오노르 역시 자기를 푸아티에에 보내둔 채 더 이상 찾지 않고 권력을 위임하지도 않는 헨리 2세에게 강한 불만을 품었을 것이다.
1173년 4월, 엘레오노르는 아들들과 합류하기 위해 파리로 여행을 떠났다. 그러나 샤르트르에서 체포된 뒤 루앙에 있는 헨리 2세에게 끌려갔다. 헨리 2세는 체포 사실을 공개적으로 발표하지 않고 그녀를 감금했고, 그다음 해 동안 그녀의 행방은 알려지지 않았다. 이후 청년왕 헨리와 루이 7세의 군대가 노르망디를 침공했지만, 뚜렷한 성과를 거두지 못하다가, 헨리 2세의 반격으로 패퇴했다. 그 후 헨리 2세는 그들과 겨훌 휴전을 맺은 뒤 1174년 5월에 푸아티에에 입성하여 딸 조안과 다른 귀족 여성들을 데리고 노르망디에 있는 그의 요새로 돌아갔다. 1174년 7월 7일, 플란데런 백국이 프랑스에 호응하여 잉글랜드를 침략할지도 모른다는 정보를 입수한 헨리 2세는 엘레오노르, 반란에 유일하게 가담하지 않은 존, 조안 및 다른 여인들과 함께 바르플뢰르에서 사우샘프턴으로 항해했다. 엘레오노르는 그곳에서 알려지지 않은 감금 장소로 옮겨졌다.
1174년 9월 30일, 아들들의 대반란을 진압한 헨리 2세는 몽루이에서 아들들을 사면하고 전쟁 전의 현상 유지를 기반으로 한 관대한 조약을 체결했다. 반면, 엘레오노르는 헨리 2세의 남은 생애 동안 잉글랜드의 여러 지역에 갇혀 지냈다. 그녀가 어느 곳에 감금되었는지는 연대기에서 확인할 수 없지만, 12세기에 작성된 재무부 재정 기록은 윌트셔의 러저셜 성, 버킴엄셔, 버크셔, 노팅엄셔의 여러 주택이 언급되었다. 엘레오노르는 오래도록 감금되었지만, 엄밀히 말해 죄수 취급당하는 건 아니었다. 수입은 박탈되었지만, 철창에 갇힌 건 아니라 가택 연금 상태에 놓였고, 시간이 지나면서 인근을 산책할 수 있을 정도의 자유를 누릴 수 있었고, 1176년 이후에는 부활절 같은 특별한 날에 석방되어 아들들과 재회한 뒤 도로 가택 연금되곤 했다.
웨일스의 제럴드에 따르면, 헨리 2세는 1175년 교황에게 자신이 엘레오노르와 근친 관계인 점을 이유로 결혼을 취소해달라고 청원하는 걸 진지하게 고려했다. 그는 이 문제를 더 논의하기 위해 11월 1일 윈체스터에서 교황 특사 피에르론 추기경과 만났지만, 피에르론이 강하게 반대하면서 무산되었다. 1176년 초, 헨리 2세는 엘레오노르에게 픙트브로에서 수녀가 되라고 권고했다. 그러자 그녀는 루앙 대주교에게 청원했고, 루앙 대주교는 그녀가 수녀가 되기를 거부하는 걸 지지했다. 이에 헨리 2세는 다시 한번 교황이 결혼 무효를 선고하기를 청원하려 했지만 무산되었다고 한다.
1176년 또는 1177년, 헨리 2세의 정부 로자먼드 클리퍼드가 옥스퍼드셔의 고드스토에서 사망했다. 헨리 2세는 수도원에 무덤을 세웠고 그녀를 추모하고자 수도원에 기부했다. 후대에서는 엘레오노르가 로자먼드를 독살했다는 이야기가 창조되어 수 세기에 걸쳐 더욱 정교해졌으며, 오랫동안 사실처럼 여겨졌다. 그러나 이를 뒷받침할 동시대 증거가 없기에, 학계에서는 그녀에게 나쁜 이미지를 심어주기 위한 중상모략으로 간주한다.
엘레오노라가 감금되어 있던 세월은 아들들과 반항적인 가신들(특히 아키텐) 사이에서, 때로는 아들들끼리, 때로는 아버지와 아들들 간의 거의 끊임없는 전쟁으로 점철되었다. 상황은 1180년 9월 18일에 병약한 루이 7세가 죽고 그의 아들 필리프 2세가 왕위를 계승하면서 더욱 복잡해졌다. 필리프 2세는 헨리 2세와 그의 아들들 간의 갈등을 계속 부추겨서 장차 프랑스에서 축출하는 걸 숙원으로 삼았다. 1183년 6월 11일, 청년왕 헨리가 퀘르시의 마르텔에서 이질에 걸려 사망했다. 일설에 따르면, 청년왕 헨리는 어머니를 석방하고 아내 마르그리트를 부양해달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헨리 2세는 웰스 대주교 토머스 아그넬을 엘레오노르에게 보내 아들의 죽음을 알리게 했다. 수년 후인 1193년, 그녀는 교황 첼레스티노 3세에게 아들 헨리에 대한 기억 때문에 실로 괴로웠다고 토로하는 서신을 보냈다.
청년왕 헨리의 죽음과 며느리 마르그리트가 가져온 지참금을 보호하고자 하는 헨리 2세의 바람 때문에, 그는 마르그리트의 이복형제인 필리프 2세와 갈등을 벌였다. 필리프 2세는 노르망디와 잉글랜드의 특정 영지가 마르그리트에게 속한다고 주장했지만, 헨리 2세는 그것들은 한 때 엘레오노르에게 속했으며, 그녀의 아들이 죽으면 그녀에게 돌아갈 것이라고 반박했다. 헨리 2세는 엘레오노르가 분쟁 지역에 나타나는 것이 정치적으로 편리하다고 여기고, 1183년 늦여름에 그녀를 노르망디로 불렀다. 이후 그녀는 가택연금을 받긴 했지만, 수입을 정상적으로 받을 수 있었다. 6개월간 노르망디에서 보낸 엘레오노르는 1184년 초 잉글랜드로 돌아갔고, 그녀의 딸 마틸다와 사위 하인리히 사자공이 프리드리히 1세에게 추방된 뒤 윈체스터와 버컴스테드에서 그녀와 함께 지냈다. 그 후 엘레오노르는 때때로 헨리 2세와 함께 여행을 떠나기도 했지만, 대체로 감시를 받으면서 조용히 지냈다.
2.8. 리처드 1세 치세기
엘레오노르는 헨리 2세와의 사이에서 아들 다섯과 딸 셋을 낳았는데, 그중 삼남 리처드를 무척 사랑했다. 연대기 작가들은 그녀가 다른 아들들에게는 "사랑하는 아들"이라고만 불렀지만 리처드만은 "매우 사랑하는 아들"이라 지칭했으며, 종종 그를 "위대한 사람"이라고 불렀다고 밝혔다. 리처드 역시 그녀를 하느님 다음으로 신뢰했다고 한다. 역사가들은 엘레오노르가 남편 헨리 2세와의 사이에서 채우지 못한 애정을 리처드에게 쏟는 것으로 대신했다고 추정한다. 디케토의 랄프는 이에 대해 이렇게 평했다.지금껏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없어 모두 궁금해했던, "깨어진 동맹의 독수리가 세 번째 둥지에서 기쁨을 찾으리라."라는 멀린의 고대 예언이 사실이었음을 보여주었다. 사람들은 엘레오노르를 프랑스와 잉글랜드 두 왕국 위에 말 그대로 날개를 활짝 펴고 있었기 때문에 독수리라고 불렀다. 엘레오노르는 일찍이 결혼 무효를 통해 프랑스인 일가와 결연이 깨어졌고, 헨리 왕은 그녀를 옥에 가둠으로써 또다시 결혼의 연이 깨어졌다. 삼남 리처드는 엘레오노르의 세 번째 둥지이며, 또한 모친의 이름을 드높여 크나큰 영광을 돌리게 될 아들이다.
디케토의 랄프
디케토의 랄프
1189년 7월 6일 헨리 2세가 아들 리처드 1세와 필리프 2세의 공세에 쫓기다가 시농에서 병사한 뒤, 리처드 1세가 잉글랜드 국왕에 선임되었다. 그가 왕이 된 직후 내린 첫 번째 병령은 윌리엄 마셜을 잉글랜드로 보내 당시 65세였던 엘레오노르를 가택 연금에서 풀어주라는 것이었다. 잉글랜드에 도착한 윌리엄 마셜은 그녀를 감시하던 자들이 이미 소식을 접하자마자 그녀를 풀어줬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 후 그녀는 여전히 프랑스에 있던 리처드가 부여한 섭정권을 맡았다. 그녀는 곧장 웨스트민스터 대성당으로 가서 새로운 왕을 대신해 영주와 성직자들로부터 충성 서약을 받았다. 리처드 1세는 1189년 8월 13일 바르플뢰르에서 포츠머스로 항해해 열광적인 환영을 받았고, 그곳에서 윈체스터로 가서 엘레오노르와 재회했다.
1189년 9월 3일 웨스트민스터 대성당에서 엘레오노르와 동생 존이 참석한 가운데 대관식을 치른 리처드 1세는 오랫동안 계획했던 제3차 십자군 원정에 착수했고, 11월에 출진할 때 엘레오노르를 섭정으로 지명하고 더럼 주교이자 대법원장 휴 드 퓨세와 법무장관이자 엘리 주교 윌리엄 드 롱샴을 그녀의 조언자로 세웠다. 1190년 2월 2일, 엘레오노르는 노르망디의 뷔르샤토에서 합류한 뒤 노낭쿠르에서 열린 가족회의에서 국왕이 없는 동안 잉글랜드 행정을 위한 준비를 논의했다. 리처드가 출발할 때 엘레오노르는 존을 잉글랜드로 보낸 뒤 본인은 나바라 왕국으로 여행을 떠났고, 팜플로나에서 리처드의 새로운 약혼자로 삼을 베렝겔라[9]와 만났다. 이후 그녀를 시칠리아로 데려왔고, 1191년 3월 레지오에서 리처드와 재회했다.
이후 베렝겔라는 리처드의 여동생 조안의 보살핌을 받았고, 엘레오노르는 4일 만에 귀국길에 올라서 4월 14일 로마에 들러서 새 교황 첼레스티노 3세를 만나 윌리엄 드 롱샴을 교황 특사로 삼고, 루앙 대주교 월터 드 쿠탕스를 잉글랜드 대리인으로 세우는 걸 허락받았다. 1191년 6월 24일 루앙에 도착한 뒤 그곳에서 통치를 시작했다. 그녀는 리처드의 이름으로 프랑스 내 영지를 통치했고, 월터 드 쿠탕스가 잉글랜드 왕국을 통제했다. 그녀는 공식 문서에 "엘레오노르, 신의 은총으로, 잉글랜드의 왕비"라고 서명했으며, 'teste me ipsa'(내가 직접 증언한다)라는 문구를 덧붙였다. 그녀는 섭정으로서 무난한 통치를 보였고, 백성들은 왕이 오랫동안 부재한 상황에서도 생업을 이어갈 수 있었다.
그러나 1191년 말 리처드 1세와 함께 십자군 원정을 떠났던 필리프 2세가 프랑스로 돌아오면서 상황이 복잡해졌다. 필리프 2세는 리처드 1세의 명예를 훼손하려 했고, 리처드 1세와의 약혼이 깨진 뒤에도 여전히 엘레오노르의 보호를 받고 있던 이복동생 아델의 귀환을 강하게 요구했다. 그러던 1192년 초, 필리프 2세는 잉글랜드에 있던 존에게 땅을 내주고 아델을 결혼시키게 해줄 테니 리처드 1세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키라고 권유했다. 존은 이에 따라 윌리엄 드 롱샴을 포섭해 반란을 일으키려 했다. 이 상황을 감지한 엘레오노르는 2월 11일에 잉글랜드로 돌아갔고, 그해 대부분을 교회 분쟁을 처리하고 롱샴과 존의 야망을 억제하는 데 소비했다.
1192년 말 살라흐 앗 딘 유수프와 평화 협약을 맺은 리처드 1세는 귀국 길에 올랐다가 1193년 1월 오스트리아 공작 레오폴드 5세에게 체포되어 뒤른슈타인성으로 끌려갔다. 레오폴드 5세는 황제 하인리히 6세와 필리프 2세에게 이 사실을 알렸고, 하인리히 6세는 1193년 2월 리처드 1세를 트리펠스성으로 옮겼다. 필리프 2세도 레오폴드 5세가 정의를 이뤘다며 찬사를 보냈다. 루앙 대주교 월터 드 쿠탕스가 프랑스 왕궁에 심어놓은 첩자로부터 아들이 감금되었다는 소식을 접한 엘레오노르는 극도로 분노했고, 레오폴드 5세를 파문하는 것 외에는 별다른 조치를 하지 않는 교황청에 강력히 항의하는 서신을 보내기도 했다.
1193년 3월 23일, 리처드 1세는 슈파이어에서 열린 신성 로마 제국 법정에 기소되었다. 죄목은 시칠리아를 점거하려 한 무력 행위, 키프로스 정복, 코라도 암살 배후였다. 하인리히 6세는 이탈리아 남부의 권위를 주장하기 위한 군자금으로 사용할 목적으로 리처드의 보석금으로 15만 마르크를 선고하였고, 이는 잉글랜드 연간 소득의 2~3배에 달하는 금액이었다. 한편, 존은 리처드가 잡힌 틈을 타 용병 부대를 이끌고 런던으로 진격하여 섭정 위원회에 복종을 요구하였고, 형에 대한 흉흉한 소문을 일일이 열거하며 설득했다. 그러나 호응을 받지 못하자, 왕이 되기 위해 내전을 단행했다. 여기에 필리프 2세도 직접 출진하여 노르망디를 침공하는 등, 상황은 갈수록 악화했다.
1193년 4월, 엘레오노르는 존을 설득해 휴전 협정을 맺는 데 성공했다. 그 후 리처드 1세로부터 서신을 받았는데, 그 편지에는 황제가 요구한 몸값을 가능한 한 빨리 마련해달라고 촉구하는 내용과 자신은 하게나우로 이송되어 좋은 대우를 받고 있다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엘레오노르와 그녀의 자문 위원들은 즉시 잉글랜드 주민들에게 세금을 거둬들인 끝에 10월에 10만 마르크 중 첫 번째 할부금을 지불했고, 나머지는 12월에 지급되었다. 1193년 12월 독일로 출발한 엘레오노르는 1194년 1월 17일 슈파이어에 도착했다. 그녀는 그곳에서 필리프 2세와 존 왕자가 리처드를 구금하는 대가로 그녀보다 더 높은 가격을 제시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이에 그녀는 연례 공물을 포함한 추가 제안을 했고, 하인리히 6세는 2월 4일에 리처드 1세를 석방하기로 했다. 엘레오노르는 리처드 1세와 재회의 기쁨을 나눈 뒤 쾰른을 거쳐 안트베르펀에 이른 뒤, 프랑스군을 피하고자 상트에서 트렌케머호를 탔고, 3월 12일 샌드위치 항에 상륙한 뒤 1194년 3월 23일에 런던에 개선해 시민들의 환영을 받았다.
리처드 1세는 런던에 입성한 뒤 존의 지지자들을 숙청하고 두 번째 대관식을 치렀다. 이후 세금을 다시 거둬서 군자금을 모은 뒤, 필리프 2세를 응징하고자 노르망디로 진군했다. 얼마 후 파리로 도주했던 존이 찾아와서 용서를 빌자, 엘레오노르는 리처드에게 존을 용서해달라고 청원했다. 이에 리처드가 존에게 말했다.
"두려워하지 말라. 너는 사악한 동료들의 꼬임에 넘어간 어린아이일 뿐이다. 너의 조언자는 응당 대가를 치를 것이다."
2.9. 말년
리처드 1세가 필리프 2세와 전쟁을 치르는 동안, 잉글랜드 섭정은 대법원장 휴버트 월터가 맡았고, 72세의 엘레오노르는 퐁트브로로 은퇴해 그곳의 수도원을 주거지로 삼았다. 1199년 4월 6일 리처드 1세가 41세의 나이로 전사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엘레오노르는 당시 브르타뉴에 있던 존에게 조속히 그곳을 떠나라는 서신을 보냈다. 리처드 1세는 생전에 조카 아르튀르 1세 드 브르타뉴를 후계자로 고려했지만, 죽기 전에 존을 후계자로 선언했다. 하지만 존이 죽는다면, 아르튀르가 잉글랜드 국왕이 될 수 있었다.필리프 2세는 앙주 가문 간의 내전을 유도하기 위해 12세의 아르튀르를 잉글랜드 국왕으로 지지한다고 선언했고, 아르튀르는 1199년 5월 필리프 2세와 접견한 뒤 프랑스 내 영지의 주권자로서 경의를 표했다. 브르타뉴군은 앙제를 점령했고, 앙주, 멘, 투렌이 뒤따라 아르튀르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그러자 엘레오노르는 영지 전역을 돌면서 귀족들에게 존을 주권자로 받들라고 호소했고, 노르망디와 푸아투, 아키텐 귀족들은 엘레오노르의 뜻을 받아들였다.
이후 앙주, 메인, 투렌의 세네샬 기욤 드 로슈의 중재로 존 왕과 아르튀르 1세 간의 화해가 이뤄졌지만, 1199년 9월 말 아르튀르가 파리로 이동한 뒤 잉글랜드 왕위를 노렸다. 그러던 1200년 5월, 필리프 2세는 존 왕과 협상한 끝에 르굴레 조약을 체결했다. 이에 따르면, 필리프 2세는 20,000 마크 상당의 자금을 받는 대가로 존 왕이 노르망디 공국, 앙주 및 아키텐 공국 등 유럽 대륙 영주권을 가지는 걸 인정하며, 존 왕은 아버지 헨리 2세의 손녀인 카스티야의 블랑슈의 지참금을 위해 부르주, 이소둔, 그라카이 등 베리 영지를 필리프 2세의 아들인 루이 왕자에게 양도하고, 그 대가로 필리프 2세는 브르타뉴에 대한 권리를 포기하고 아르튀르 1세는 존 왕에게 경의를 표해야 했다.
그 후 퐁트브로 수도원으로 돌아간 그녀는 수년간 조용히 지냈다. 그러던 1202년 4월, 필리프 2세는 존 왕과의 평화 협약을 깨고 아르튀르를 다시 지원하기로 했다. 아르튀르는 필리프 2세의 노르망디 원정에 참여했고, 구르네앙브레이를 공략한 후 필리프 2세에게 기사 작위를 받았고, 필리프 2세의 딸 마리와 약혼했다. 여기에 필리프 2세로부터 브르타뉴 공작, 앙주 백작, 멘 백작, 투렌 백작, 푸아투 백작으로 선포되었지만, 앙주, 멘, 투렌, 푸아투를 장악하려면 그곳에 주둔한 친 존왕 파벌을 물리쳐야 했다.
1202년 8월, 아르튀르는 할머니 엘레오노르를 인질로 삼기 위해 그녀가 있던 퐁트브로르 진군했다. 이 소식을 접한 엘레오노르는 루덩 인근의 미르보 성으로 피신했고, 아르튀르는 미르보 성을 포위했다. 그녀는 항복하라는 요구를 거부하고 존에게 구원을 요청했고, 존 왕이 급파한 브람버 제4대 영주 기욤 3세 드 브리우즈가 역습을 가해 적군을 물리치고 아르튀르를 생포했다. 기욤 3세는 아르튀르를 팔레즈에 가뒀다가 다시 루앙 탑으로 이송했다. 그러다가 아르튀르는 돌연 실종되었고, 존 왕은 아르튀르의 누나 엘레오노르를 생포해 잉글랜드로 끌고 간 뒤 브르타뉴를 장악했다.
엘레오노르는 퐁트브로로 돌아간 뒤 수녀가 되기로 마음먹고 베일을 썼다. 그 후 2년간 수녀로 지내다가 1204년 3월 31일 또는 4월 1일에 8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사후 퐁트브로 수도원 지하 납골당에 리처드 1세와 헨리 2세의 관 사이에 안장되었다. 프랑스 혁명 시기에 수도원이 약탈당할 때 무덤이 파괴되었고, 유해는 유실되었지만, 나중에 그녀의 석관을 비롯한 무덤들이 복원되었다.
3. 가족
3.1. 자녀
자녀 | 이름 | 출생 | 사망 | 배우자 / 자녀 |
루이 7세 (Louis VII of France) | ||||
1녀 | 샹파뉴 백작부인 마리 (Marie, Countess of Champagne) | 1145년 | 1198년 3월 11일 | 샹파뉴 백작 앙리 1세 슬하 2남 2녀[10] |
2녀 | 블루아 백작부인 알릭스 (Alix, Countess of Blois) | 1150년 7월 혹은 8월 | 1197년 혹은 1198년 | 블루아 백작 티보 5세 슬하 4남 3녀 |
헨리 2세 (Henry II of England) | ||||
1남 | 푸아티에 백작 기욤 9세 (William IX, Count of Poitiers) | 1153년 8월 17일 | 1156년 | |
2남 | 청년왕 헨리 (Henry the Young King) | 1155년 2월 28일 | 1183년 6월 11일 | 프랑스의 마르그리트 슬하 1남 |
3녀 | 작센 공작부인 마틸데 (Matilda, Duchess of Saxony) | 1156년 6월 | 1189년 6월 또는 7월 | 하인리히 사자공 슬하 3남 1녀[11] |
3남 | 리처드 1세 (Richard I) | 1157년 9월 8일 | 1199년 4월 6일 | 나바라의 베렝겔라 |
4남 | 브르타뉴 공작 조프루아 2세 (Geoffrey II, Duke of Brittany) | 1158년 9월 23일 | 1186년 8월 9일 | 브르타뉴 여공작 콩스탕스 슬하 1남 1녀 |
4녀 | 카스티야의 왕비 레오노르 (Eleanor, Queen of Castile) | 1161년 | 1214년 10월 31일 | 알폰소 8세 슬하 1남 4녀[12] |
5녀 | 시칠리아의 왕비 조반나 (Joan, Queen of Sicily) | 1165년 10월 | 1199년 9월 4일 | 구기에르무 2세 |
툴루즈 백작 레이몽 6세 슬하 2남 1녀 | ||||
5남 | 존 왕 (John) | 1166년 12월 24일 | 1216년 10월 19일 | 글로스터 여백작 이사벨라 |
앙굴렘 여백작 이자벨 슬하 2남 3녀[13] |
4. 여담
- 엘레오노르의 아들 리처드 1세와 함께 3차 십자군에 참여한 프랑스의 필리프 2세는 그녀의 전 남편 루이 7세의 아들이지만, 엘레오노르 본인의 아들은 아니다. 루이 7세가 엘레오노르와의 혼인이 무효화된 뒤 샹파뉴의 아델(아델라)과의 사이에서 얻은 아들. 애초에 루이 7세와의 사이에서 아들이 태어났다면 이혼(혼인무효)도 없었을 것이고, 그 아들이 아키텐 영지를 상속했을 것이기 때문에 카페 왕조가 헨리 2세, 리처드 1세, 존 왕과 그렇게 싸워댈 필요도 별로 없었을 것이다.
- 엘레오노르 본인에게는 딸과 아들이 각각 5명씩 있었는데, 그 중에 딸 둘은 루이 7세와의 사이에서, 나머지 8명은 모두 헨리 2세와의 사이에서 본 자식들이다. 아들들 중 첫째 기욤은 3살 무렵에 죽었고, 실질적 장남 청년왕 헨리는 아버지에게 반란을 두 번이나 일으켰다가 실패하고 결국 반란 중에 병으로 사망한다. 리처드 1세는 정식 아들 없이 사망,[14] 4남 브르타뉴 공작 조프루아 2세는 아들이 있었지만 그 아들이 자식 없이 할머니보다 일찍 사망[15], 그 많은 아들 중에 오직 존 왕만이 혈족을 남겨 플랜태저넷 왕조가 장수할 수 있도록 했지만, 지지리도 못나서 프랑스 내 영국 영지를 대부분 날려먹는 실지왕이 되어버렸다.
- 로빈 후드를 다루는 작품 중 로빈 후드의 활동 시기를 헨리 2세 시대로 설정하는 작품에서는 로빈 후드를 사면해주고 아들 리처드 1세와 연결해주는 조력자 역할로 등장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로빈 후드의 활동 시기를 리처드 1세 ~ 존 왕 시대로 늦춰 잡는 작품들에서는 잠시 등장하거나 아예 등장하지 않는다.[16]
- "십자군에 참가했다."는 사실 때문에 각종 중세 문학에서 살라흐 앗 딘과의 염문설이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역사 기록에선 이에 대한 증거는 없고 애초에 살라딘은 당시 10살 소년에 불과했다.
- 《문명 6》에서 잉글랜드와 프랑스를 선택할 수 있는 지도자로 등장했다. 문명 6/등장 문명/영국 & 문명 6/등장 문명/프랑스 참고.
- 명배우 캐서린 헵번은 엘레오노르 다키텐의 실제 직계 후손이다.# 또 헵번은《The Lion In Winter(1968)》에서 다키텐을 연기해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 엄연한 실존인물이지만 전설 상의 존재인 멜뤼진이 그녀의 정체라는 설을 담은 기사문학도 있었다. 자세한 건 해당 문서 참조.
[1] 후손의 외적 특징에 비추어 실제로는 어두운 계열의 머리색으로 추정된다.[2] 마리와 알릭스는 루이 7세와의 사이에서 둔 딸들이며 나머지는 헨리 2세와의 사이에서 둔 자녀들이다.[3] 족보 상으로 카를 대제의 증손자인 신성 로마 황제이자 이탈리아 왕국(신성 로마 제국)인 루도비코 2세의 딸인 에르멩가르다의 10대손으로 카를 대제의 14대손이 된다[4] 1125 ~ 1152, 베르망두아. 아미앵, 발루아 백작 라울 1세 드 베르망두아의 부인[5] 이상적인 기사가 예의 바르고 공손하며 정직하게 고귀한 신분의 여성을 사랑하는 내용을 담은 중세 서사시.[6] 1145 ~ 1198, 샹파뉴 및 브리 백작 앙리 1세의 부인[7] 1150 ~ 1197, 블루아, 샤르트르, 샤토둔 백작인 티보 5세 드 블루아의 부인[8] 몬머스의 제프리가 라틴어로 작성한 브리타니아 열왕사를 노르만-프랑스어로 번역한 저서[9] 나바라 왕국의 국왕 안초 6세의 딸.[10] 샹파뉴 백작 앙리 2세 등[11] 오토 4세 등[12] 베렝겔라, 포르투갈의 왕비 우라카, 프랑스의 왕비 블랑슈, 아라곤의 왕비 레오노르, 엔리케 1세[13] 헨리 3세 등[14] 정실 부인 소생이 아닌 내연녀와의 사이에서 낳은 사생아 아들이 한 명 있었다. 이 사생아가 리처드 1세의 사후 어떻게 되었는지 구체적인 기록은 없다.[15] 리처드 1세 사후 왕위를 주장하며 작은아버지인 존 왕과 싸우다가 심지어 할머니인 엘레오노르를 공격하는 패륜까지 저질렀지만 결국 패배하여 포로가 되었고 이후 행방이 묘연해진다.[16] 케빈 코스트너의 의적 로빈후드에서는 리처드 1세로 노년의 숀 코너리가 등장하기 때문에 엘레오노르가 아예 등장하지 않고, 러셀 크로우의 로빈 후드(2010년 영화)에서는 원로 배우 아일린 앳킨스가 역을 맡아 죽은 리처드 1세의 유해를 맞이하는 장면이나 존 왕을 꾸짖는 장면에 잠시 등장한다. 디즈니의《로빈 훗》에선 직접적인 등장은 없어도 언급상으로만 아주 잠시 지나가듯이 나오긴 한다. 정확히는 이름은 언급되지 않은 채, 존 왕 본인이 "엄마는 언제나 리처드 형님만 귀여워하셨지."라는 등의 언급으로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