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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KBO 리그의 유명한 저주 중 하나이며 김성근이 감독직을 맡았다가 물러난 후 그 팀이 암흑기에 빠지는 것을 일컫는 말인 김성근의 저주에 대한 각 구단별 사례 및 전반적인 원인을 분석한 문서이다.2. OB 베어스: 57853
김성근 재임 기간: 1984년~1988년(5년)2.1. 경질 과정
OB 베어스 원년부터 김성근 감독은 투수 코치로 함께 했고 김영덕 감독의 삼성 이적 후에도 구단주 등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았지만, 프런트와의 갈등은 굉장히 심각한 수준이었다. 특히 가장 큰 문제는 김성근 감독이 박용곤 회장 등 그룹 수뇌부와 직접 의논해서 일을 처리하는 것에 대한 프런트의 반감이었다.당시 OB 프런트는 당시 프로야구 프런트 중 가장 일을 열심히 하는 축이었으며,[1] 김성근 감독이 수뇌부와 바로 연계해서 일하는 것에 대해 사실상 서포트만 하는 들러리가 된다 생각하며 이 구도를 타파하려는 의지가 더욱 강할 수밖에 없었다. 대표적인 사건이 1986년 플레이오프 직전 가을 야구 보너스 문제를 두고 선수단과 프런트의 대립이었는데, 당시 선수단은 아예 훈련장을 이탈하였고 프런트는 전원 임의 탈퇴를 선언하겠다는 강대강 대립이 지속되었다.[2] 결국 김성근 감독의 중재로 이 문제를 해결하기는 하였으나 이 과정에서 다시 또 수뇌부의 힘에 의지하면서, 오히려 김성근 감독에 대한 프런트의 반감은 더욱 커졌다.
이는 1987년 김성근 감독의 입원 사건 때 본격적으로 표면화되었다. 1987년 플레이오프 당시 4차전의 아쉬운 역전패와 5차전 패배로 해태에 한국시리즈 입성 기회를 내주면서, 평소 건강이 좋지 않았던 김성근 감독은 강한 스트레스를 받고 급성간염에 걸려 입원하였다. 당시 김성근은 보름 이상 입원해 있었으나 박용민 단장, 경창호 이사는 물론 구단 직원 중에서 문병온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심지어 선수들의 문병조차 구단에서 막았다는 이야기까지 나왔다. 여기에 미국에 지도자 연수를 갔던 이광환이 1988년 귀국하면서 상황이 더욱 악화되었다.[3] 프런트에서는 이광환을 2군 감독에 임명하면서 대놓고 후임자로 키운다면서 언급하였으며, 이광환의 요구에 따라 2군에 세탁기를 도입해주고서는 정작 김성근이 1군에 도입해달라는 요구는 무시하는 상황까지 이어졌다. 여기에 OB 프런트는 노골적으로 OB맨들을 코치로 기용하면서[4] 정작 코치진을 이끄는 김성근 감독에게는 통보하지 않는 등 김성근 감독을 없는 사람 취급하기 시작했으며, 급기야 88년 시즌 도중 구단 사무실에서 감독 신임 투표를 부치고 팬들에게 ‘김성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식의 질문을 하고 다닐 정도로 몰아내는 것을 거의 공식화하고 있었다.
결국 1988년 시즌 종료 후 계약이 종료되자, 김성근은 박용곤 구단주와의 독대 이후 사퇴를 결정하였다. 재계약 제의를 안했다는 이유만으로 경질, 해고라는 표현을 쓰는 경우도 있지만 정확히 말하자면 계약 만료가 맞다. 원년 코치로 2년, 감독으로 5년, 총 7년 동안 전 구단 유일하게 원년부터 코칭 스태프를 지켰던 유일한 원맨팀의 쓸쓸한 마지막이었다. 김성근 감독의 공식 결별 선언 이후 OB 베어스의 행보는 마치 정해진 것처럼 일사천리였다. 9월 8일 MBC와의 시즌 최종전. 이날 김진욱의 완봉 역투에 힘입어 OB는 김감독의 고별전을 1:0으로 승리했으며, 바로 다음 날인 9월 9일 OB는 이광환 2군 감독의 1군 승격을 공식 발표했다.
2.2. 암흑기의 원인
2.2.1. 선수단 혹사 여파
김성근의 저주에서 항상 빠지지 않고 나오는 요소. 실제로 김성근 시기에는 투수 혹사가 분명 존재했다. 그 중에서도 가장 크게 혹사당했던 인물은 윤석환. 1984년 신인 시즌에 한국 최초의 마무리로 기용되었던 윤석환은 그해 100경기 중 57경기에 출전하였으며(전체 1위), 146이닝이라는 살인적인 이닝을 소화하였다. 신인 때의 성적이 워낙 화려해서 상대적으로 부진, 또는 이미 망가졌다고 착각하는 경우가 많지만, 1985년과 1987년에도 100이닝 이상을 소화했다.[5]다만 현대 야구 기준에서는 혹사가 맞긴 한데, 시대적인 흐름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 1984년 200이닝 오버의 선수는 자그마치 6명으로 당시 OB를 제외한 모든 구단에서 200이닝 오버의 선수가 나왔다.[6] 심지어 해당 선수들이 선발로만 200이닝을 채운 것도 아니고, 선발과 구원을 닥치는대로 나왔다는 것이 더 충격. 즉 당시 프로야구에서의 에이스란 팀에서 최소 200이닝 이상[7]을 소화해주어야 하며, 선발이든 구원이든 팀이 위기에 터지면 언제든 등판해서 위기를 끝내는 선수를 부르는 이름이었다.
오히려 당시 OB는 이러한 야만의 시대를 조금이나마 끝냈던 팀이기도 했다. 에이스였던 계형철의 이닝은 174⅔이닝으로 리그 9위이였고, 29경기 출전 중 단 한 경기를 제외한 모든 경기가 선발 경기였다. 또한 윤석환은 57경기 중 53경기를 불펜으로 출전, 아직 중무리 수준이긴 하지만 사실상의 전업 마무리 시대를 열었던 선수였다. 즉 당시 OB는 로테이션의 개념과 마무리라는, 아직 라루사리즘에 미치는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투수 분업화를 전 구단에서 가장 먼저 실천한 구단이었으며, 그 결과 규정 이닝 소화 선수 중 방어율 상위 10걸의 절반인 5명[8]이 OB 선수로 채워질 정도의 강력한 투수 왕국을 구축하였다.
김성근 감독과 비교, 이광환 시대가 온 이후라고 딱히 선수들의 이닝 수가 줄어들거나 하지도 않았다. 1989년 김진욱은 1988년보다 약 20이닝 가까이 많은 158⅓이닝을 소화했고, 방어율도 3.10에서 3.35로 높아져 큰 차이를 보이지 않았다. 장호연은 25이닝이 더 많은 171이닝을 소화했고, 방어율은 3.95에서 3.47로 오히려 떨어졌다. 시즌 12경기가 늘어났다고는 하지만 혹사가 줄어들었다고 할 정도의 지표는 전혀 나타나지 않았던 것. 동시에 그 정도 혹사가 가능했다는 것은 누적된 피로는 있을지라도 분명히 망가졌다는 신호가 나올 정도의 시기는 아니었다는 소리이기도 하다.
애초에 당시 야구는 에이스를 비롯한 투수의 혹사는 기본이고 선수들의 선수 수명 자체가 짧던 시기였다. 심지어 선수들 대부분이 대졸 이후 입단하는 것을 감안하면, 25살 전후 입단하여 5년 정도 활약한 다음 노장이 되어 은퇴를 기다리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즉 윤석환이 당시 에이스들 기준으로 선수 수명이 상대적으로 짧았던 것은 사실이나, 시대적 특성을 감안하면 그렇게까지 활약이 적었다고 말하기도 어려운 것 또한 사실이다.
2.2.2. 신인 육성 실패
오히려 진짜 문제는 혹사가 아니라 신인 발굴 실패였다. 에이스급 선수들이 노장으로 넘어갈 무렵에는 그를 대신할 신인들이 들어와 이닝을 그만큼 또 소화해줘야 했는데, 당시 OB는 이러한 세대 교체가 제대로 이뤄지지 못하였다. 김성근 재임 5년 동안 OB 베어스의 주전 선수들은 대부분 기존부터 주전이었던 선수들이 많았다. 야수 김경문, 조범현, 신경식, 구천서, 유지훤, 양세종, 윤동균, 김광수, 박종훈, 한대화, 김우열과 투수 황태환, 박철순, 계형철, 박상열, 장호연, 강철원이 그들이다. 김성근 감독 첫해인 1984년 신인 윤석환, 김진욱, 최일언 투수 3인방과 외야수 김광림이 데뷔 첫해부터 주전을 차지했지만, 그 첫해를 제외하면 나머지 네 시즌 동안 주전으로 성장한 신인이 없었다.그나마 김형석(85년 입단)과 박노준(86년 입단)이 1군에 기용된 신인이었지만, 김형석은 주전과 백업을 오가며 김성근 시절에는 확실히 주전을 차지하지 못했다. 박노준은 김성근 시절에 투타 겸업으로 기용되며 집중력 결여와 혹사로 결국 재능을 꽃피우지 못하고 선수생명이 단축된 사례다. 박노준은 데뷔시즌인 86시즌에 타자를 겸하면서도 투수로 선발과 구원을 가리지 않고 마구잡이로 굴려지며 33경기에 등판해 110⅓이닝을 던져 5승 6패 7세이브(3위)를 거두는 혹사를 당했다. 하지만 바로 다음해에 혹사의 여파로 부상을 당했고 그 와중에도 김성근에 의해 굴려지며 ERA가 6점대로, 그 다음해는 18점대로 치솟아 결국 투수로는 더이상 쓸 수 없는 수준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타격 부문에서도 대타로만 기용되며 이도저도 아닌 선수가 되고 말았다.[9]
다만 이것이 김성근의 실책이냐고 물으면 약간 묘한 부분이 있다. 이는 이 시기 신인 드래프트의 독특성을 이해해야 하는데, 이 시기 프로야구 선수는 지금과 같이 선망받는 직업이 아니었다. 여기에 한국 특유의 학벌 문화까지 겹쳐서, 고교 선수들은 졸업 후 프로가 아닌 대학 진학을 훨씬 선호하는 경향이 강했다. 심지어 대학 졸업 후에도 프로야구 선수보다는 그 학벌을 이용한 직장인으로 가는 경우가 많았다. 게다가 당시 특성상 기존의 야구 리그였던 실업야구에서 선수를 지목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 선수들은 오히려 직장에 남게 되면 보직 로테이션으로 해당 직장에서 계속 직업을 유지할 수 있었기 때문에 역시 또 프로야구를 기피하였다. 즉 신인 드래프트에서 열심히 지목해도 상당수의 선수가 입단 자체를 안 해버리는 경우가 허다했는데, 1985-1987년 사이 드래프트에 선발된 총 217명의 선수 중 미입단 선수가 1/3이 넘는 76명에 달했다.
특히 OB는 가장 불리한 케이스였다. 이 시기에도 명실상부한 대기업이었던 삼성, 연고지 충성도가 굉장히 높았던 해태와 롯데, 그리고 대중적 인지도가 높았던 MBC는 상대적으로 지목 후 입단하는 선수들이 많았던 반면, OB는 안 그래도 떨어지는 인지도에 초창기 충청에서 서울로 연고지를 이전하는 과정까지 있어 지역에 뿌리내리지도 못하였다.[10] 그 결과 1985년부터 1987년까지 3년 동안 입단한 선수는 고작 15명[11]으로 전 구단을 통틀어 최하였으니 그 풀 자체가 너무 작았던 것. 심지어 만년 꼴찌팀이었던 삼미-청보보다도 입단자 수가 적었다. 그나마 지목율이 높았던 1984년의 신인들은 1군에서 꽤 많이 활약했던 것을 감안하면,[12] 즉 애초에 키울 선수 풀 자체가 너무 좁았기 때문에 육성에서의 실패라고 말하기도 어려운 부분이 있다.
2.2.3. 코치진의 급격한 변화
김성근과의 갈등 과정에서 OB 프런트는 김성근 색채를 지우기에 집중했고, 그 과정에서 OB맨 출신의 코치진 구성에 집중하였다. 당시 코치진을 보면 원년 타격코치인 이광환이 감독을 맡고, 플레잉 코치를 겸업한 박철순과 윤동균이 각각 1군 투수코치와 타격코치를, 바로 전년에 은퇴한 유지훤이 1군 수비코치를 맡았다. 1982년 우승 멤버이자 1985년 은퇴했던 이홍범이 1군 트레이닝 코치를 맡았으며, 2군 또한 원년 주포였던 김우열이 타격코치를 맡았다. 즉 2군 감독 대행 겸 투수코치였던 이선덕[13]을 제외한 전원이 OB에서 프로야구를 시작한 멤버로 구성되었다.이는 당시 기업 문화와도 연관성이 깊은데, 1997년 외환 위기 이전까지의 기업 문화는 지금처럼 스카우트 등의 이직이 잦지 않고 한번 그 기업에 들어가면 평생을 함께 하는 가족 같은 문화가 일반적이었다.[14] 이런 시각에서 처음부터 OB에서 성장한 선수들을 중심으로 코치진을 구성하겠다는 생각은 완전히 틀린 것이라고만 볼 수는 없는 부분이었다.
1988년 8월27일. 서울올림픽 개막을 앞두고 그리스에서 채화한 성화가 제주에 도착하던 날이었다. 그날 아침 OB 김성근 감독은 부산 플라자호텔 커피숍에서 박용민 단장과 마주앉았다. 두 사람의 표정에는 침통함과 분노가 교차하고 있었다.
"당신 떠나기로 했다며? 신문보고 알았어."
"신문을 보지 않더라도 벌써 다 알고 계셨잖습니까. 경이사한테서 보고받았을 텐데요."
"……음. 떠나기로 했으면 누구누구 데려갈 텐가?"
"제가 데려가면 안되는 사람은 누굽니까?"
"아무도 없어. 괜찮아. 데려가고 싶은 사람 있으면 아무나 다 데려가. 아무나 다 데려가도 돼. 그 대신 오늘 선수들 앞에서 당신이 떠난다는 얘기를 하겠나?"
감독이 떠나겠다는 말을 공식으로 하라는 것은 김독과 프런트의 싸움에 눈치를 살피고 있는 선수들을 더이상 동요시키지 않겠다는 얘기였다.
"하죠. 하겠습니다."
그것으로 대화를 마친 박용민 단장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커피숍을 떠났다. 김성근은 이글거리는 눈길로 박용민의 뒷모습을 쫓고 있었다.
- 이종남 칼럼, 김성근의 굿바이 OB, 1995
"당신 떠나기로 했다며? 신문보고 알았어."
"신문을 보지 않더라도 벌써 다 알고 계셨잖습니까. 경이사한테서 보고받았을 텐데요."
"……음. 떠나기로 했으면 누구누구 데려갈 텐가?"
"제가 데려가면 안되는 사람은 누굽니까?"
"아무도 없어. 괜찮아. 데려가고 싶은 사람 있으면 아무나 다 데려가. 아무나 다 데려가도 돼. 그 대신 오늘 선수들 앞에서 당신이 떠난다는 얘기를 하겠나?"
감독이 떠나겠다는 말을 공식으로 하라는 것은 김독과 프런트의 싸움에 눈치를 살피고 있는 선수들을 더이상 동요시키지 않겠다는 얘기였다.
"하죠. 하겠습니다."
그것으로 대화를 마친 박용민 단장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커피숍을 떠났다. 김성근은 이글거리는 눈길로 박용민의 뒷모습을 쫓고 있었다.
- 이종남 칼럼, 김성근의 굿바이 OB, 1995
당시 OB 프런트는 기존 코치진을 모두 정리할 생각이었고 김성근 또한 자신과 손발을 맞췄던 멤버를 유지하고 싶다는 생각에 당시 OB 박용민 단장과 독대했고, 박용민 단장의 동의 아래 김성근은 어차피 밀려날 코치진 중 자신과 함께 할 만한 코치들과 함께 태평양으로 이적했다. 당시 김성근과 함께 이동한 인물이 신용균 수석코치, 최주억 작전코치, 박상열[15]에 프런트의 정진구 차장(현 한국여자야구연맹 회장)[16]이었다. 또한 당시 현장을 떠나 있던 이근식, 이종도를 불러들였으며, 은퇴 후 OB 구단 직원으로 일하고 있던 김대진까지 새로운 코칭 스태프에 포함시켰다. 이것이 오늘날 소위 감독들의 코치 사단의 원조라 불리는 김성근 사단의 시작이었다.
물론 단장의 동의 아래 이루어진 것인 만큼 김성근의 잘못은 아니었다.[17] 하지만 그러기에는 너무 급격한 변화였다. 감독이 바뀌더라도 코치진이 어느 수준은 유지되면서 서로 전수하는 과정이 있었다면 좋았겠지만, 기존 코치진이 모조리 물갈이되면서 선수단이 적응하기는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심지어 가장 중요한 1군 투수 코치와 타격 코치는 정작 박철순, 윤동균이 플레잉 코치로 활동하였다. 플레잉 코치는 보조 수준에서 그쳐야 하는데 이들이 메인이었던 것이다.
여기에 더 겹친 것이 이광환 감독의 플레이 스타일이었다. 이광환 감독은 자율야구의 대표 주자이며 미국 지도자 연수까지 다녀오며 그러한 성향이 더욱 강화되었다. 안 그래도 김성근과 극과 극의 차이를 보이는 스타일의 감독이었는데, 심지어 이광환은 감독은 팀을 이끄는데 집중하고 코치들이 전문 코치로서 활동 영역을 보장받아야 한다는 주의였다. 이에 따라 이광환은 사장, 김성근은 가정교사라는 기사도 후에 나온 바 있다. # 여기에 인체 생리학에 기반을 둔 타격 이론, 휴식의 필요성 강조 등, 당시 이광환의 시각은 현대 야구에 가장 가까운 선구자적인 마인드였다.
하지만 시대적으로도, 팀적으로도 이러한 시스템을 소화하기에는 당시 한국 프로야구는 아직 발전이 더뎠다. 그나마 미국 야구를 경험해본 박철순 정도를 제외하면 지옥훈련에서 갑작스럽게 주어진 자율에 선수들은 적응하지 못하였다. 한국에서는 엘리트 스포츠는커녕 기업에서조차 전혀 없었던 문화였기 때문. 선수들은 갑자기 주어진 쉬는 시간 동안 뭘 해야 할지 몰랐고, 심지어 이광환이 팀의 큰 그림을 그리는 동안 세부적인 지도를 해줘야 하는 투수 코치와 타격 코치는 죄다 플레잉 코치였기에 자기 일 하기에도 급급했다. 그 결과 당시 OB 베어스는 연패와 연승을 거듭하는 기복이 심한 팀이 되어버렸고,[18] 1990년 이광환 감독의 도전적인 시도는 실패로 끝난 채 중도 경질되었다.
2.3. 결론
OB 이광환 체제의 실패는 지나치게 급격한 변화, 그리고 정작 그 과정에서 핵심이 될 코치진을 제대로 정비해주지 않은 구단의 실패였다. 그 와중에도 1989년의 성적을 보면 그 와중에도 어느 수준의 성과가 분명히 나타나고 있었으나, 정작 그것을 볼 수 있는 시야는 갖추지 못했던 시기였다. 혹사를 논하지만 정작 1989년 투수진의 활동을 보면 주력 투수가 바뀌었을 뿐, 이닝 소화나 방어율 등에서 그렇게 추락했다고 보기도 어려웠다.즉 혹사 때문에 망가진 팀이라기에는 충분한 여력이 남아 있었으며, 실제로 반전 가능성 또한 보여줬다.초창기 투수진들이 혹사 과정에서 노쇠화된 것 또한 사실이며, 1980년대 신인들이 제대로 성장하지 못하면서 구단을 이끌 선수들이 부족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혹사는 오히려 타 구단 대비 적은 편이었고, 육성 실패만을 책임으로 몰기에는 애초에 타 구단 대비 신인 풀 자체가 굉장히 얕았다. 이는 1988년 지명부터 점차 미입단 선수들이 줄어들면서 조금씩 해소되기 시작했고, 조금씩 선수가 쌓이기 시작한 90년대 초중반에 비로소 암흑기를 탈출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차라리 그 과정에서 이광환에게도 김성근 때와 같이 신뢰를 주고 묵묵히 지켜보았다면, 어쩌면 1994년 LG 신바람야구는 OB에서 먼저 시작될 수도 있었을 것이고 암흑기 또한 더 빨리 종결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정작 이광환 때는 그런 기회를 제대로 주지 않고 고작 2년도 채 안 되는 임기 끝에 경질아 결정되었고, 심지어 이광환 다음인 이재우에게도 임기는 제대로 보장되지 않았다. 결국 암흑기를 종결한 것은 임기를 제대로 보장해준 윤동균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오히려 이때의 가장 큰 문제는 김성근도, 이광환도 아니라 구단의 조급증이 구단을 망쳐놓은 것에 가까웠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3. 태평양 돌핀스: 5682
김성근 재임 기간: 1989년~1990년(2년)3.1. 경질 과정
김성근의 태평양 돌핀스 시대는 부임 과정부터 삐걱거렸다. OB 베어스 당시 프런트와 다양한 부분에서 충돌했던 김성근은 부임 전부터 21개 사항을 제시하며 이를 들어주지 않을 시 부임하지 않겠다며 강하게 나갔다. 이중 대표적인 내용은 구단이 선수나 코치에게 직접 연락하지 말고 감독을 반드시 통할 것, 코칭 스태프는 물론 구단 프런트까지 감독이 선임할 수 있도록 할 것,[19] 그리고 팀 순위에 따른 팀 보너스를 의무화할 것 같은 내용 등이 들어 있었다.[20]하지만 그런 과정을 거쳤음에도 김성근 감독은 구단 프런트와 갈등을 빚었는데, 심지어 당시 갈등한 인물은 OB에서 본인이 데리고 왔던 정진구 운영차장이었다. 프런트 직원 또한 자신이 임명했으니 당연한 것. 당시 최대 갈등은 선수단 훈련 수당 지급 문제였는데, 김성근은 태평양 감독으로 부임한 직후 정신력을 개조해야 한다면 실시하고자 했던 혹한기 지옥훈련 실시를 주장했다. 그러나 구단측은 이런 혹한기 지옥훈련 성과에 대해 회의적으로 예측하였고 결국 훈련을 반대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그러나 김성근은 선수들에게 훈련비를 각출해서 극기훈련을 강행했다.
다만 명분상으로는 훈련 성과에 대한 의문이었지만, 훈련 수당 문제는 구단에서는 굉장히 민감한 문제였다. 당시 혹한기 극기훈련은 비시즌 활동중지 기간에 이뤄진 것이었기 때문에 규정상 구단에서는 월급이나 수당을 줄 수 없었다. 프로야구는 2월부터 10월까지가 공식적인 활동 기간이고 연봉은 이 기간에 한정하여 분할 지급되는 것이 현재까지의 원칙이다.[21] 당시 수당지급 문제는 이런 법적인 문제까지 얽혀 있었기 때문에, 구단으로서는 단순히 당장 나가는 돈 문제를 넘어서 결코 수용할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의외로 태평양에서의 경질 과정은 프런트와의 충돌보다도 김성근 본인의 책임이 컸다. 당시 삼미 시절의 에이스였던 임호균이 1988-1989년 통틀어 1승도 올리지 못하는 등 노쇠하면서, 구단과 임호균 본인 또한 은퇴를 확정지은 상황이었다. 임호균 본인이 먼저 은퇴를 결심하고 해외 연수까지 추진하고 있었는데, 이를 김성근이 노련한 리더가 필요하다는 이유로 붙잡은 것이다.[22]
당시 김성근 감독은 "임호균이 5승을 하지 못하면 사임하겠다"는 내용의 각서를 쓰면서까지 임호균의 은퇴를 막으려 하였는데, 그전까지 쌓였던 감정도 안 좋았거니와 이미 정해진 상황을 되돌리려는 김성근 감독에게 반발한 프런트는 여기에 '선발로 5승'이란 단서를 달았다. 한국 프로야구에서 이런저런 각서 사건[23]에 휘말려서 좋은 결말이 한 번도 나온 적이 없었듯이 이때도 마찬가지였다. 저 과정에서 프런트와 완전히 사이가 틀어진 김성근은 임호균을 단 한 경기도 선발 출장시키지 않았다.[24] 당연히 선발승도 0승. 여기에 태평양의 순위도 5위로 하락하면서, 김성근 감독은 계약 기간을 못채우고 잘리게 된다.
사실 여기에는 의심스러운 부분도 있었다. 1989년 포스트 시즌의 돌풍으로 당시 김성근 감독은 몸값이 상한가를 치면서 여러 팀의 러브콜을 받고 있던 시절이었다. 따라서 이 당시에도 김성근 감독이 팀을 옮기기 위한 꼼수로 각서를 작성한 건 아니냐는 소문이 무성하였으며, 실제로 삼성그룹 수뇌부가 김성근이 삼성의 정신력을 개조할 적임자로 보고 후임 감독으로 내정했다는 소문도 나돌았다. 어쨌든 이 각서 파동으로 김성근 감독은 경질되었고, 소문이 사실이건 아니건 며칠 후 김성근 감독은 삼성 라이온즈 감독으로 부임하였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김성근 감독은 OB 시절 경력까지 합해 프런트와 대립하는 감독으로 이미지를 굳힌다.
3.2. 암흑기의 원인
3.2.1. 선수단 혹사 여파
OB 시절의 혹사는 사실 시대적 특성과 수치 등을 보면 애매한 부분이 많지만, 태평양 시절은 시대적 상황을 감안해도 명백한 혹사가 맞았다. 1989년 박정현은 38경기 25선발 242⅔이닝을 던졌으며, 최창호는 38경기 29선발 223⅓이닝을 던지며 이닝 수 리그 2위, 리그 4위를 기록하였다.[25] 팀을 이끌어야 할 태평양 신인 3총사는 결국 박정현, 정명원은 1992년, 최창호는 1993년 완전히 퍼져버렸다. 결국 이들은 정동진의 과감한 결정에 따라 1993년 사실상 시즌 아웃을 결정하고, 주축 선수들을 모조리 수술대에 보낸 끝에 재활에 성공, 1994년 돌풍을 일으켜 인천 연고 프로야구 팀 역사상 최초로 한국시리즈에 오르게 된다.다만 이 혹사의 책임을 김성근 시기에만 볼 문제인지는 조금 의문이 있다. 김성근 시기에 혹사가 벌어진 것은 분명 맞긴 한데, 김성근이 물러난 1991년 박영길 감독은 80년대 빅볼 야구를 표방하던 감독이었음에도 혹사가 전혀 줄어들지 않았던 것. 1991년 박정현은 30경기 25선발 184이닝을 기록하였으며, 최창호는 45경기 28선발 233⅓이닝을 소화하며 김성근 시댕에조차 나오지 않았던 이닝 소화 리그 1위를 기어코 기록하였다. 정명원도 49경기 5선발 132이닝을 기록하며, 김성근 시대에 결코 뒤지지 않는 혹사를 기록하였다. 즉 정동진의 결정이 과감했고 그 결과 암흑기를 극복했던 것은 분명 사실이지만, 그건 정동진의 결정이 대단했던 것이고 태평양의 혹사 문제는 김성근이 나갔다고 하여 전혀 바뀌지 않았다는 것.
즉 1992-1993년 태평양의 추락은 혹사 영향으로 팀을 이끌어야 할 투수진이 붕괴한 것이 맞긴 하다. 다만 그 문제는 김성근의 단독 행동이라기보다는 김성근-박영길에 이어지는 혹사의 연속성까지 총 3년의 혹사를 봐야 한다는 것. 심지어 이러한 혹사가 태평양에서만 독특하게 일어난 것 또한 아니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이 책임을 김성근이라서 팀이 망가졌다, 혹은 박영길이 팀을 망가뜨렸다 식으로 해석하는 것은 무리한 해석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3.2.2. 억지 빅볼의 결말
태평양의 가장 큰 문제는 타격이었다. 김성근의 영향으로 스몰볼 중심의 운영이 되었다는 편견이 있으나, 애초에 태평양에서는 김동기와 김경기 정도를 제외하면 그만한 수준의 장타자를 찾을 수 없었기에 김성근 부임 이전부터 스몰볼 위주의 운영이 진행될 수밖에 없었다. 스몰볼의 대표적인 데이터인 희생번트 수에서 1988년 태평양은 96개로 롯데에 이은 2위를 기록했다. 김성근이 부임한 1989년에는 전체 1위를 기록했으나 개수는 99개로 큰 차이를 보이지 않았으며, 오히려 1990년에는 84개로 롯데 119개, 해태 95개에 이은 3위를 기록했다. 정작 박영길 감독을 영입하며 빅볼을 표방했던 1991년 희생번트 기록조차 85개로 역시 리그 3위를 기록, 적어도 번트만 보면 김성근 감독이 있던 시절과 없던 시절의 태평양 타선은 유의미한 변화가 없었다.오히려 김성근 시대 일어난 큰 변화는 번트보다는 도루로, 1988년 83개로 리그 최하위였던 도루가 168개로 2배 이상 증가해 리그 2위를 기록했다. 해태에서 쫓겨나듯 트레이드된 원조 도루왕 김일권이 김성근 감독의 강훈을 통해 독기를 되찾으며 62도루로 리그 도루왕을 차지했고, 이광길 17도루, 홍문종 16도루, 이선웅 11도루 등 주력 타자들 대부분이 언제든 뛸 준비를 하며 부족한 장타율을 메우는 형태의 야구가 이뤄졌다. 이처럼 증가한 도루 수는 박영길 감독 시절인 1991년까지 유지되며 태평양 공격의 핵심이 되었다.
그러나 진짜 문제는 박영길 감독 부임 후 빅볼을 추진하며 취한 조치였다. 박영길 감독은 삼성 라이온즈의 타격코치와 감독 시절 팀타율 1위를 기록하며 국내 최고의 타격 이론 전문가로 부각되었고, 태평양 부임 후에도 김성근이 7.5m로 높혀놓은 도원구장의 펜스를 5m로 내리는 등 강도 높은 조치를 취하였다. 그러나 정작 팀 홈런은 1989년 55개, 1990년 47개와 비교했을 때 1991년 51개로 전혀 변화가 없었던 반면, 피홈런은 1989년 49개, 1990년 59개와 비교했을 때 1991년 100개, 1992년 125개로 두배 이상 증가했다. 즉 팀 개선을 표방하였으나 정작 맞지 않는 옷을 입은 결과로 이어진 것이 부진의 근본적 원인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3.2.3. 모기업의 지원 부재
태평양 그룹의 실세였던 신동관 수석부회장은 프로야구가 그룹의 이미지 개선과 인지도 증가에 효과가 있다는 점을 깨닫고 야구단 창단에 의욕적으로 참여했고, 초기에는 야구단에게 많은 지원을 해줬다. 애초에 김성근 선임 과정에서 김성근의 21개조 요구 사항을 모두 들어준 것이 대표적. 하지만 1989년 좋은 성적을 거두자마자 본격적으로 문제들이 터져나오기 시작했는데, 그 시작은 연봉 협상이었다. 당장 최창호, 정명원, 김동기 등 주축 선수들이 지루한 연봉 싸움으로 전지훈련에 참가하지 못했다. 여기에 임호균 은퇴를 둘러싼 각서 파동까지 터지면서 신동관을 비롯한 구단의 의욕은 점차 감소하고 있었다. 이 와중에 김성근 감독은 마지막 한 방울까지 짜내며 버텼지만, 4강은 너무도 멀리 있었다. 5할에 가까운 승률(0.496)을 기록한게 기적에 가까울 정도였다.특히 제일 큰 문제는 관객층이었다. 태평양은 화장품 회사인 만큼 주 고객층이 여성이었던 반면 당시 야구판의 주요 관객은 남성이었고, 심지어 1990년대에는 남성 화장품 시장도 아직 형성되기 전이었다. 즉 들이는 돈에 비해 인지도나 이미지 개선에 썩 도움이 되는 상황도 아니었는데, 오히려 논란만 계속 일어나는 판국이었다. 그 결과 신동관은 야구단에 대한 관심을 점차 끊었고, 1990년대 초에 높아진 농구 열풍에 편승하여 원래 자신의 주력 분야였던 여자 농구 쪽에 다시금 집중하기 시작했다.[26]
모기업 실세였던 신동관의 관심이 약해지면서 구단에 대한 지원 또한 점차 약화될 수밖에 없었다. 신인 유입을 제외하면 1990년부터 이미 외부 유입은 김성갑, 김재박, 김용국, 이길환, 오영일 등 한때 활약했다고는 하나 은퇴를 앞둔 선수들 정도로 팀 전력에 딱히 큰 도움이 되지 않는 유입만 있는 상황으로 이어졌다. 윤덕규 정도의 예외가 있었다고 하지만 그조차도 이광환 감독과의 불화로 반쯤 방출된 선수를 데려온 것일 뿐이다. 물론 이 시기 트레이드라는 것이 전력 강화보다는 눈밖에 난 선수들을 밀어내는 용도로 활용되는 것이 일반적이긴 했지만, 은퇴자들의 마무리 팀으로 전락했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제대로 된 팀 분위기가 아니었다는 것은 알 수 있는 부분.
3.3. 결론
1989년 신인 3총사의 혹사는 선수 개개인에게는 안타까운 일이지만, 당시 시대적 상황을 고려하면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 혹사는 김성근 감독의 책임이 굉장히 큰 건 사실이지만, 이후 박영길 감독 때도 계속 이어지며 딱히 단일 책임을 물기는 어려운 사안이다. 또한 부족한 타격을 보완하고 우수한 투수력을 강화하기 위해 펜스를 높였던 김성근의 전략은 효과적이었으며, 오히려 안 맞는 팀에 억지로 타격 강화를 시도하려다 펜스를 낮추면서 피홈런만 늘린 박영길의 실책은 태평양 암흑기의 큰 원인 중 하나로 작용하였다.하지만 정작 큰 문제는 다른 것에 있었다. 임호균 각서 파동은 어떤 의미에서는 김성근 본인의 혹사 이상으로 김성근이 태평양 구단에 저지른 가장 큰 문제였다. 선수들 연봉 협상에서 일어난 문제점도 그럴 수 있고, 그전 훈련 수당 문제와 관련하여 프런트와 충돌했던 것 또한 구단의 경쟁력 강화를 위해서는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사건이었다. 그러나 임호균 각서 파동은 당장 김성근의 주장처럼 임호균이 강제로 은퇴당하는 상황도 아니었고, 팀의 정신적 지주를 유지시키겠다는 김성근의 고집으로 일어난 사건이었다. 그렇기에 실상이 어떤지 확실치 않음에도 김성근이 일부러 잘려서 삼성으로 넘어가려 했다는 의심을 받는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불필요한 충돌은 그래도 김성근에 대해 나름 전폭적으로 지원해주었던 태평양 프런트와의 갈등, 나아가 태평양 구단이 야구단에 대한 흥미를 잃는 계기로까지 이어졌다. 태평양이 그 이후 지원이 이후 쌍방울 사례처럼 엄청나게 하락한 것은 아닌 만큼 이것이 암흑기의 절대적 원인이라고까진 할 수 없겠으나, 태평양 암흑기에 대해 김성근 감독의 책임이 있다면 오히려 혹사보다도 이 사건이 더 큰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4. 삼성 라이온즈: 25664
김성근 2년 재임: 1991년~1992년우선 김성근의 삼성 시절은 이만수, 강기웅, 류중일 등 기존 선수들과의 대립이 있었다. 김성근은 이만수 등 기존 선수들의 기량을 탓하면서, 기필코 우승을 하겠다는 명분으로 구단에 대체자원의 영입을 요청했고, 우승을 작정한 구단은 김성근의 요구를 모두 수용하여 현금트레이드 등으로 영입한 베테랑 선수 7명을 포함하여 무려 15명의 선수를 보강했다. 그리하여 신경식, 조범현 같은 자기 제자들을 대거 영입되었다. 문제는 이들은 이미 기량이 쇠퇴해서 타팀에서 방출되거나 은퇴를 종용받던 선수들이었다는 점이다. 결국 김성근의 영입선수은 대부분 실패하여 팀 전력에 별다른 보탬이 되지 못했고, 팀 체질 개선에 실패했다.
게다가 김성길, 류명선, 오봉옥 등의 투수 혹사 문제까지 있었다. 특히 김성길 혹사는 엽기적인 수준으로 36살 노장 투수를 14번의 선발 등판을 포함해서 중간계투 겸 중무리 겸 패전처리로 마구잡이 등판시켜서 57경기 188이닝을 던지게 했다. 그리고 김성길은 구위가 확연히 떨어져서 다음해에는 거의 배팅볼러로 전락해버렸다. 투수혹사가 일반적이던 당시에도 김성근 감독의 김성길 기용을 정면 비판하는 신문기사가 나올 정도였다. 심지어 당시 유망주 투수던 허삼영을 집중적으로 혹독하게 훈련시켜 선수 생활을 일찍 마감[27]하게 만들기도 했다.
즉 기존 선수와의 불화+선수영입 실패+투수혹사라는 3콤보가 합쳐져서 세대교체 실패와 팀케미스트리 악화를 불러왔으며, 최종적으로 팀을 556이라는 역사상 최악의 암흑기로 몰아넣었다.
김성래, 성준, 김상엽 등 주력 선수들의 부상과 부진이 있었더라도 자기와 연관있는 선수들만을 기용하는 김성근의 운영 방식은 큰 비판을 받았으며, 해임 이후 삼성은 우용득 취임 직후 김성근 커넥션을 정리하게 된다. 조범현은 김성근이 해임된 1992년 시즌이 끝나고 방출되며, 신경식, 김성길은 정영규를 상대로 쌍방울로 트레이드 됐다. 그 결과 93년 삼성은 부상 선수들의 부활과 양준혁, 박충식 등 신인 플레이어들의 활약으로 준우승을 차지했으나, 김성근 재임 기간동안 실패한 세대 교체 문제 등이 문제되어 94년~96년에 삼성은 556의 침체기를 보내게 되었다.
이후 96년 백인천이 취임하면서 삼성은 대대적인 리빌딩을 단행했다. 이 무렵, 백인천은 기존의 노쇠한 김성래, 강기웅과 이종두, 김성현, 박선일을 정리하고, 이승엽, 김한수, 김태균, 정경배 등 젊은 선수들을 기용했다. 흔히 이만수도 이때 버려졌다고 인식하는 경우가 많지만, 백인천은 백업포수, 지명타자, 대타, 대수비로 이만수에게 기회를 줬다. 이만수가 방출당한 건 백인천 감독이 물러난 1997년 시즌 후다. 이 무렵
결과적으로 김성근 시절의 삼성은 올드팬들에겐 556 암흑기보다도 더 야구보기 싫었던 시절로 기억되는데, 투수 혹사는 혹사대로 시키고 본인 사단만 기용했으며 성적은 성적대로 못냈기 때문. 과장이 아니라 정말로 올드팬들에게는 김성근이 선동열 보다도 못한 놈취급을 받고 있다. 선 감독은 그나마 2회 우승이라는 결과물이라도 어찌어찌 있었으나, 김 감독 시절은 세대 교체 실패+팀케미스트리 악화+팬심 악화+영 좋지 않은 성적이라는 콤보로 인해서 평가가 매우 박하다. 자세한 것은 김성근/지도자 경력 참고.
이처럼 김성근의 삼성 시절은 전형적으로 김성근 스스로가 자초한 저주였다. 삼성에서 경질된 후 김성근을 찾는 팀이 아무도 없어 한동안 야인생활을 전전해야만 했다는 사실을 보아도 삼성 시절 김성근에 대한 평가가 당대에도 얼마나 나빴는지를 알 수 있다.
여담으로 이런 팀꼬라지를 3년 내내 본 산증인은 다름아닌 콩동님. 그리고 위에서 언급했듯이 허파고도 이때 많이 배웠다.
5. 쌍방울 레이더스: 해체
김성근 4년 재임: 1996년~1999년삼성 감독에서 경질된 후 이제 야구계에서 은퇴한 것으로 여겨지던 김성근이 돌아오게 된 것은 김성근과 친분이 깊었던 일본통 이용일 쌍방울 구단주 덕분이었다.
쌍방울 시절은 그의 팬덤에 의해 김성근의 능력이 최고로 발휘되었던 시기였다고 칭송되던 시절이다. 하지만 2016년 김성근 재임시절(1997년) 쌍방울 레이더스의 팀연봉총액이 리그 전체 1위였다는 사실이 새롭게 발굴되면서 쌍방울 시절의 재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다. 이제는 '헝그리 정신'으로 포장되었던 쌍방울 돌격대의 이미지가 많이 퇴색된 상태. 그래도 96년은 연봉 하위권이기는 했다.
1997년 모기업이 어려워지는 상황 속에도 김성근의 계속된 요청으로 쌍방울은 전력을 강화하며 페이롤 1위를 찍었고, 결국 이것이 쌍방울 모기업에도 부담을 주었다는 평가다. 1997년 재정위기를 겪던 모기업 쌍방울은 결국 1997년 10월 14일 부도처리된다.
그러나 모기업이 부도가 났지만 김성근이 언플한 것처럼 모기업이 구단에 대한 지원을 거의 끊은 것은 아니었다. 1998년 쌍방울 레이더스의 예산은 페이롤 1위를 찍었던 1997시즌에서 비해 20% 삭감된 선에서 결정되었다. 지나치게 높아진 페이롤을 줄이기 위해 고액연봉 선수들을 타팀으로 트레이드로 보냈다. 그러나 선수유출만 있었던 것은 아니고 젊은 선수들을 지속적으로 충원했다. 투타의 핵심인 김기태와 김현욱은 여전히 98시즌에도 쌍방울 소속으로 뛰었다. 이 둘이 트레이드된 것은 1998년 시즌이 끝난 후다.
이 와중에도 김성근 감독은 김원형 빈볼 사건, 마운드 높이 시비 등 지속적인 사건사고를 일으키며 야구팬들의 비난을 받았고 팀 사기는 더욱 저하되었다.
마지막 시즌인 1999시즌 쌍방울의 상황이 더욱 악화되었다고 하지만 사실 쌍방울 구단은 외국인 용병으로 마이클 앤더슨, 제이크 비아노를 영입하는 등 나름 팀 재건을 위해 노력을 기울였다. 몸값 비싼 김기태와 김현욱이 나갔지만 젊은 선수들을 대거 충원했다. 현대로 팔았던 김광림이 현대에서 방출당하자 다시 영입하기도 했다.
1999시즌 쌍방울이 2할대 성적으로 주저앉은 것은 김성근 체제 4년 동안 누적된 혹사와 마구잡이식 운용의 후유증이 곪아 터진 측면도 적지 않다. 1999시즌엔 남아있던 주축선수들이 줄줄이 줄부상을 당해 전열을 이탈하고 말았다. 조원우, 조규제, 김광림 등이 줄부상 당하며 전열에서 이탈했다. 조원우는 1999시즌에 자신의 커리어 하이를 기록하며 팀내 최고 타율을 기록하고 있었는데, 김성근 감독 특유의 강훈련을 받던중 부상을 당하여 시즌아웃되었다. 이후 조원우는 2000년부터 복귀하여 선수 생활을 계속했으나 다시는 예전만큼의 타격을 보여주지 못했고 결과적으로 이 부상은 조원우의 커리어에 영향을 주게 되었다.
김성근의 첫 외국인 용병이었던 두 투수는 김성근 용병 잔혹사의 시발점이 되었다. 두 외국인 투수는 시즌이 시작되기도 전부터 김성근 특유의 기싸움으로 스프링캠프에 제외되는 등 불협화음이 일어났고, 투구폼 교정 등으로 마찰을 빚기도 했으며, 시즌 후에도 2군 강등을 반복하는 등 잡음이 끊이질 않았다. 앤더슨의 경우 전년도에 LG 트윈스에서 마무리로 뛰며 20세이브를 돌파하며 가능성을 보였고 쌍방울에서도 시즌 초반 호투하며 좋은 성적을 거두었지만 김성근 감독이 이유없이 2군 강등과 1군 복귀를 반복하자 불만으로 표출하며 훈련에 무단 불참했다. 이에 김성근 감독은 앤더슨의 퇴출을 지시했고 앤더슨은 구단 사장에게 직접 전화해 억울함을 호소하기까지 했다. 결국 구단이 나서 중재하면서 사태는 수습되었지만 이후 앤더슨의 성적은 급격히 나빠졌다. 비아노는 시즌 시작 전부터 스프링캠프에 제외되더니 시즌 후에도 2군 강등과 1군 복귀를 반복하며 역시 좋지 않은 성적을 보였다.
1998년 12월 KBO에서는 김기태와 김현욱의 현금트레이드를 승인하면서 쌍방울에게 구단 유지를 위해 1999시즌 전반기 66경기에서 최소 승률 3할을 맞추라는 조건을 내걸었다. 전반기를 3할 승률로 마치기 위해 조바심이 나있던 김성근은 1999년 6월 18일 남은 다섯 경기를 모두 이겨야 전반기 3할을 달성할 수 있는 상황에 처했다. 그날 경기에서 패색이 짙어지자 김성근 감독은 초유의 심판 폭행 사건을 일으키고 만다. # KBO는 김성근 감독에게 12경기 출장정지 및 벌금 200만원의 중징계를 내렸고, 쌍방울은 0.237의 승률로 성적으로 전반기를 마치게 된다. 결국 쌍방울 구단은 김성근 감독이 출장정지 징계 중이던 7월 올스타전 기간에 그를 경질했다.
결국 역대 최다패와 한 시즌 최소 관중의 굴욕을 맛본 쌍방울은 2000년 2월 해체의 운명을 맞이, 3월 SK 와이번스로 재창단하며 인천으로 연고를 정하면서 전주와 군산과는 영원한 작별을 고하게 되었다.
6. LG 트윈스: 6668587667
김성근 1년 재임: 2002년김성근의 저주와 LG 막장 운영의 합작품. 팀이 아무리 망가지더라도 재건하는데 5년이면 충분하다. 5년동안 세대 교체를 못하거나 유망주들을 키우지 못한 것도 결코 작지 않다는 점. 삼성만 봐도 2556을 하면서 재건하고 강팀이 되었으며 역대 막장 감독 명단을 봐도 재건이 안된다면 그 후임도 막장 감독인 경우가 많다. 대표적으로 암흑기 시절 롯데가 있다. LG의 비밀번호가 모두 김성근 탓으로 돌리는것은 김성근의 안티라고 보는 게 맞고 5년은 김성근의 책임, 그 이후는 이순철을 포함한 후임 감독들의 책임으로 봐야 한다.
정식 감독은 2002년으로 1년이지만 감독대행으로 2001년을 뛰면서 투수 혹사 논란이 있었는데 2001년은 신윤호가 144이닝(선발4)을 뛰며 성적으로는 이승엽을 밀어내고 MVP를 받을 뻔 했으나 이승엽에게 인기에서 밀려서 1차 투표에서 이겼지만 2차 투표에서 패배했다. 2002년엔 이동현을 순수 불펜으로 124이닝+가을야구를 던지게 하면서 엄청난 혹사를 했다. 결국 이 두 투수는 김성근 시절이 커리어 하이가 되어버렸고......
2002년 한국시리즈에서 삼성 라이온즈와의 맞붙어 2승 4패로 준우승을 거둔 LG 트윈스. LG 프런트는 준우승을 거둔 김성근 감독을 경질한다. LG 구단이 김성근을 경질한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신바람 야구"를 캐치프레이즈로 내건 LG 구단과 대놓고 번트와 잦은 투수 교체를 가져오는 극단적인 스몰볼 야구를 추구했던 김성근의 야구관이 서로 상충되었다는 점을 꼽을 수 있다. 게다가 김성근 부임 기간 동안 LG의 성적도 딱히 신통치 않은 상황이었다. 김성근이 부임하기전 LG 트윈스는 8년 동안 단 한번을 제외하고 계속 4강에 진출했고 우승과 준우승도 몇 차례 거두었다. 2001년은 초기에 이광은 감독의 책임이 있다쳐도, 2002년은 시즌초 최하위를 전전하다가 후반기에 반등에 성공해 극적으로 4위로 포스트시즌에 진출했다. 시즌 초반에 보여준 극도의 부진 때문에 경질설이 나돌기도 했다. 김성근과 프런트 간의 갈등도 한 원인이었다. 2001년 시즌 후 최종준 단장이 물러나고[28] 유성민 단장이 부임, 2002년에 90년대 전성기를 이끈 단장 출신 어윤태가 사장으로 들어오며 본격적인 갈등의 싹이 트기 시작한다.
2002시즌 팀이 극도의 부진에 빠지며 최하위권에 머물자 어윤태 사장은 1994년 우승의 주역인 이광환을 차기 감독으로 내정하고 김성근을 정리하는 작업에 들어갔으며, 시즌 중 김성근을 해임하려 했다. 그러나 여름부터 팀이 반등하면서 극적으로 4위를 차지하면서 경질 타이밍을 놓쳐버렸고 결국 한국시리즈 준우승 후 김성근을 해임하게 된다.
김성근의 후임으로 2003시즌 자율야구의 달인이자, 1994년 우승의 주역인 이광환을 감독으로 다시 영입했지만 6위를 기록했다. 시즌 후 이광환 감독은 2군 감독으로 내려가고 수석코치 이순철이 감독으로 승격되었다.
LG 프런트는 2003년~04년 팀의 핵심 선수였던 이상훈, 유지현, 김재현을 이적 혹은 은퇴를 시키면서 정리하게 되었다. 팀의 프랜차이즈 스타를 강제로 은퇴시키거나 김재현 각서 파동으로 인해 2004년 시즌 후 FA로 풀린 김재현을 SK 와이번스로 보냈으며 프랜차이즈 스타 이상훈 역시 SK로 트레이드된 후 본인에게 보장된 6억원까지 포기하면서 갑자기 은퇴했다.
2005년 LG는 3년 연속 6위라는 성적을 기록하게 된다. 2006년에는 창단 첫 꼴찌를 기록하며 이순철 감독이 사퇴했다. 이후 김재박 감독을 영입하면서 2007 시즌에 5위로 올라왔다. 2008년 LG는 창단 이래 최저 승률과 팀도 2번째 꼴찌를 기록하고 말았다. 2009년 초반에는 2위로 올라가 김성근의 저주가 풀리나 싶은 듯 했지만 주전 포수인 김정민의 부상 이후 결국 7위로 내려가고 말았다.
그리고 2010년에는 박종훈의 LG가 김성근의 저주를 푸나 싶었지만 초반부터 안 좋은 일만 겹치면서 현실은 시궁창. 결국 2010년 시즌도 6위로 가을야구는 완전 실패. 게다가 2011년에는 초반 1~2위로 잘 나갔고 4위로 떨어졌을 때에도 5위와 8게임차였음에도 불구하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낙하하며 포스트시즌 진출에 실패하고 박종훈 감독이 시즌 도중 사퇴하며 기어이 666858766이라는 새로운 기록을 세우고 말았다. LG 팬들은 박종훈 감독의 사퇴 후, 김성근의 저주는 김성근 감독만이 깰 수 있다며 마침 2011 시즌 중 SK에서 경질당한 김성근 감독을 모셔오자고 쌍마에서 릴레이를 펼쳤으나 결과는 김기태 수석코치의 감독 승격. 그리고 2012 시즌에도 전력 유출을 겪으며 가을야구에 실패 6668587667이라는 10년의 암흑기를 맞이하고 2013 시즌이 돼서야 비밀번호를 끊어내고 가을야구에 진출했다. 그리고 2014년에는 16년만에 2년 연속 가을야구 진출을 이루어냈다. 2015시즌은 시즌 내내 말아먹는 바람에 다시 암흑기가 찾아오나 했지만 리빌딩을 천명한 2016년에는 시즌 중반 8위까지 떨어졌다가 후반기 무서운 상승세로 2년만에 가을야구에 복귀했다.
대망의 2023년, 김성근 체제에서 이룩한 2002년 한국시리즈 준우승 이 후 김성근의 저주와 함께 지속된 21년의 아픔을 페넌트레이스 우승 + 한국시리즈 우승과 함께 날려보냈다!!
7. SK 와이번스: 22655651
김성근 5년 재임: 2007년~2011년김성근이 집권하고 있던 시절에도 사실 혹사 후유증이 심각하게 나타나고 있었다. 특히 김성근 감독 재임 3년차인 2009시즌은 주전 선수들이 줄부상을 겪었다. 시즌 중반부터 박경완, 김광현, 송은범이 차례로 부상으로 시즌 아웃되었고 채병용도 부상에 시달리고 있었지만 김성근 감독이 출장을 강행시켰다. 이처럼 주전 선수들이 줄부상을 당하는 상황 속에서도 SK의 워낙 두터운 선수층 덕분에 잇몸으로 버티며 2위로 시즌을 마감할 수 있었다. 전임 감독이나 후임 감독을 결코 칭찬하는 법이 없었던 김성근이었지만 SK에서 만큼은 전임 감독이었던 조범현이 어린 선수단을 잘 조련시켜놔서 자신이 팀을 정상으로 이끌 수 있었다며고 칭찬한 적이 몇번 있었다.
이듬해인 2010시즌 김성근은 전년도에 우승에 실패한 탓인지 독기를 품고 선수들을 굴리기 시작했다. 아직 부상에서 제대로 회복하지 못한 김광현과 박경완 등을 땡겨 쓰며 굴린 결과 정상을 탈환에 성공했지만 이듬해에 그 후유증은 제대로 나타났다.
계속된 쥐어짜기의 결과 선수단의 노쇠화와 혹사 후유증은 더욱 깊어져 재임 5년차인 2011년에는 팀이 총체적 난국으로 빠져들기 시작하던 시기였다. 김성근의 쥐어짜기도 효과가 없어서 시즌 내내 3위권 싸움을 하며 SK왕조 시절도 이제는 저물어간다는 얘기도 흘러나왔다. 시즌 중간에 김성근 감독이 경질되고 엄청한 후폭풍에 휩싸였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이만수 대행이 팀을 반등시켜 2위로 시즌을 마감하게 된다.
그러나 특별한 전력보강 없이 선수단의 노쇠화가 계속되었고, 김성근이 저지른 혹사는 군데군데에서 아픈 비수가 되어 날라왔다. 당장 2009년 전천후로 투입되어 133이닝을 던지는 등 무지막지하게 굴려진 전병두는 이후 당겨쓰기 등으로 인해 어깨 부상이 더욱더 심해지며 2011년 말부터 1군에서 자취를 감췄고,[29] 채병용과 고효준은 30세가 될때까지 군문제도 해결 못하다가 군 팀 입단 가능 나이가 넘어버리며 뒤늦게 공익으로 병역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떠났으며, 윤길현은 상무 입대에 성공했지만 혹사의 여파로 인해 토미 존 서저리를 받고 아예 국군수도병원으로 전출되어 재활에 전념해야 했다. 사실 김성근은 본인이 감독으로 있는 동안 선수들 군문제를 절대로 처리하지 않는다. 군대 가야 할 연령대가 넘어도 어지간해선 보내지 않으며, 수술이 필요한 선수도 최대한 다 재활로 묶어버린다. 전자의 대표적인 케이스가 채병용과 고효준이고, 전병두가 2009년 이미 수술소견이 나왔으나 김성근이 지정한 병원에서 재활소견이 나온 뒤 2010년 5월 복귀한 것이 후자의 단적인 사례. 한화에서도 똑같이 그 짓을 하려고 하자 선수 본인이 감독과 야구 못하겠다고 은퇴를 선언하는가 하면, 다른 팀에서는 선수를 공짜로 주워가기도 하는 등 막장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한화가 이미 선수단의 군문제로 오랫동안 시름을 겪은 팀이라는 점.
그리고 왕조의 핵심 불펜으로 살려조 못지 않고 마구잡이로 굴린 이승호와 정대현은 이미 김성근 후반에 노쇠화 징조가 뚜렸했지만 아랑곳 하지 않고 뽑아먹을 수 있을 때까지 뽑아 먹었다. 이들은 김성근이 경질된지 얼마 안되어 FA로 타팀으로 떠나버렸고 거기서 고장나 버리고 말았다.
타선에서도 박재홍, 김재현 등이 은퇴수순을 밟거나 이호준과 정근우같이 FA로 팀을 떠났고, 미래를 위한 유망주를 키우지 않는 김성근의 극단적인 성향 속에서 권용관과 최동수 등 미래와 맞바꾼 노장선수가 트레이드로 오는가 하면, 반쪽짜리 역할만 강요당하던 모창민과 이재원이 2010년 말 김성근을 따돌리고 구단과 상의해서 미래를 위해 군야구단에 입단해버리는 사태가 벌어진 상태였다. 그리고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지만 2009년 이후 SK 2군 내부에서는 김성근에 대한 불만이 쌓였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김성근 감독이 SK에서 물러난 이후 이만수 체제 하에서 SK는 그 후폭풍에도 불구하고 2012년까지 2년 연속 준우승을 하며 연착륙에 성공한다. 그러나 2012시즌 초 일시적으로 6위까지 떨어졌을 때 역시 김성근 감독이 떠나니 별 수 없다는 김성근 팬들의 비아냥을 받았고, 또 밖에서도 김성근 원더스 감독이 이만수 감독과 SK 프런트를 맹비판하면서 어려운 시기를 보내기도 했다. 그러나 8월말 다시 2위로 치고 올라가자 김성근팬들은 부자는 망해도 3년 먹을 양식은 있다면서 김성근 감독님이 강팀으로 만들어 놓고 간 덕분에 이만수 감독이 2년 연속 준우승을 차지할 수 있었다고 태세를 전환했다(...).
이처럼 외부 전력보강도 없고 유망주의 1군 정착도 더디고 선수단 평균연령만 높아지던 2013시즌에는 이만수 감독의 운영능력까지 한계에 부딪히며 6위로 시즌을 마감했다. 그러자 김성근 감독팬들은 드디어 김성근의 저주가 본격적으로 나타난다면서 반색했다.
2014시즌에는 더욱 답이 없는 상황에 처하며 시즌 중반 한때 8위까지 떨어지기도 했다. 그러자 김성근의 저주가 고착화되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가 나타나기도 했다. 그러나 시즌 막판에 엄청난 경기력을 보여주며 LG와 치열한 4위 경쟁을 벌였으나 아깝게도 포스트시즌 진출에는 실패하고 5위로 시즌을 마무리했다. 게다가 리빌딩의 전조까지. 아무쪼록 김성근이 쏟아부은 저주를 잘 막아내는 SK의 모습이다.
2015시즌에는 프로야구계에 복귀한 김성근 감독의 한화와의 대결로 주목을 받기도 했다. 한화와의 첫 시리즈에서 스윕패를 당하며 3패를 깔고 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이후 김성근의 막장 운용과 투수진의 과도한 혹사에 대한 후유증이 나타나면서 한화에게 연일 위닝시리즈를 가져오고 마지막 시리즈에선 스윕까지 가져오는데 성공했다. 결국 한화는 SK에게 11년 연속 상대전적 열세를 허용하고 말았다. SK는 결국 가을DNA 버프로 인해 후반기에 치고 올라가 5위로 포스트시즌 막차를 타는데 성공, 한화와 김성근이 그토록 앵무새처럼 부르짖던 5강행을 빼앗고 가을야구를 하는데 성공했다.
2016년에는 시즌 전 FA 선수 유출로 불안하게 시작하더니 정작 시즌 들어서는 안정적인 4위 자리를 지켜내나 싶었지만 막판 9연패로 추락하면서 가을야구 실패하면서 노리타들의 조롱을 받았다.
트레이 힐만이 이끌게 된 2017년엔 지독한 불펜 불안으로 인해 후반기 추락을 경험하기도 했지만, 토미 존 수술로 재활에 들어간 김광현 없이도 문승원, 박종훈 등이 선발진 안착에 성공하는등 성과가 있었고 어찌어찌 5위로 마감하면서 일단은 가을야구는 성공했다.[30]
2018년에는 완벽하게 빅볼로 팀컬러가 바뀌면서 김성근의 색을 완벽하게 지웠다. 그리고 14.5게임차를 뒤집고 2018년 한국시리즈를 제패하면서 김성근의 그림자에서 완전히 벗어났다. 염경엽 감독 1년차인 2019년 후반기부터 팀이 무너져내리기 시작하고 2020년에는 팀의 존속조차도 의심스러울 정도의 경기력을 보여줬지만, 이건 김성근의 저주와는 거리가 먼 이야기. 차라리 김성근의 수제자인 양 자칭하고 다니는 염경엽이 만들어 낸 또다른 저주에 가깝다.
8. 한화 이글스: 39AAA98(진행 중)
김성근 3년 재임: 2015년~2017년저주를 선불로 받은 것도 모자라 경질되는 순간까지 받아낸 사례로 이유야 당연히 저주를 받은 팀 중 김성근 재임기에 유일하게 포시 진출에 실패한 팀(678)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김성근이 잘린 후 이상군 감독대행을 거쳐 한용덕 감독의 철저한 관리야구와 선수 잠재력 극대화로[31] 전반기 단독 2위에 6위와 승차만 봐도 가을야구를 사실상 확정하면서 김성근의 저주를 막았다. 최소 5년은 KT와 꼴지 경쟁을 해야 할 것으로 봤던 예상과는 완전 다른 결과로 한용덕 감독을 명장 반열에 올려놓았다.
한화의 기대 이상의 성적에 노리타들이 양훈을 버리고 이성열을 데려오며 큰 그림을 그렸다느니 김성근이 승부욕, 악바리를 심어주고 가서 이제서야 터졌으니 한용덕이 김성근의 유산을 받았다는 온갖 개드립을 치고 있을 정도다.
그리고 놀랍게도 한용덕 감독은 시즌 최종전 NC전에서 78번째 승리를 수확하며[32] 자력으로 준플레이오프 진출을 확정지었다. 허나 일부 삐딱한 야구팬들은 여전히 김성근 명장설을 주장하면서 1승 3패로 넥센에게 패배하자 이제는 단기전에 안 맞는 감독이라고 까고 있다. (...)
하지만 완전히 그 저주를 종식시키는 건 불가능해서 당장 팀 내부의 베테랑들이 버텨야 한다고 주문을 걸고 있다. 2014년~2016년 동안 외부 FA 7명을 영입하는 과정에서 유망주들이 다 빠져나가서 주전과 백업간의 격차가 매우 커진데다 중간 세대가 단절되어 있어서 2019년을 기약할 수가 없다고 내부 FA 내야수 송광민(35)? 외야수 이용규(33), 최진행(33)에게 통보하였다.
게다가 2019년 시즌에 삐걱거리는 것을 보면 유망주 트레이드에 대한 피해가 없다고 볼 수 없다. 다만 투수진이 문제라기 보단 타선이 문제라는 점에서 한용덕 감독의 베테랑들과 불화와 합 작품이라고 볼 수 있겠다
아무튼 2019년은 9위로 마쳤고 이와 동시에 단장 자리에 계약이 끝난 박종훈 대신 정민철을 새롭게 앉혔는데, 정민철은 단장이 되자 장시환-지성준 트레이드로 엄청난 비판을 받았으며 2020년 시즌에 한용덕의
그리고 2020년 한화는 10월 22일, 5경기를 남겨둔 채 트래직넘버가 소멸되어 10위로 시즌을 마감하게 되었다.
결국 2021년은 시즌 전부터 리빌딩 시즌임을 선언했고, 전년과 같이 꼴찌로 마감했다. 그래도 내야진은 주전이 얼추 갖춰졌고, 투수진에서도 김성근 감독 시절 혹사로 인해 어깨 관절와순 손상[36] 진단을 받고 수술을 받은 김민우가 155⅓이닝 14승을 기록하며 부활하는데 성공했고 강재민 등의 불펜 자원을 발굴하는 등 김성근의 저주를 털어낼 준비를 하는 시즌이 되었다.
하지만 2022년 역시 최하위를 기록했다.
2023년에는 9위를 기록했다.
9. 그 외
김성근의 추종자들이 곧잘 하는 소리가 김성근의 스몰볼은 팀 사정상 어쩔 수 없이 하는 거고 강타자들을 많이 보유한 팀이었다면 10년 롯데 같은 타격야구를 했을지 모른다는 소리다. 이 소리는 그의 마지막 팀인 한화 이글스의 팀 컬러와 2018년 한용덕 감독이 빅볼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는 점에서 반박 가능하다. 물론 실제로 전력이 약한 팀을 맡았던 적도 많았지만 이건 앞뒤 안 재고 이 팀은 골 많이 넣으니까 공격축구한다하는 것과 똑같은 소리다. 무리뉴 시절 첼시는 득점력도 리그에서 손꼽힐 만한 팀이었지만 아무도 무리뉴보고 공격축구한다고 하는 사람은 없다. 공격야구, 수비야구를 가르는 건 단순히 득점력이나 타율이 아니라 감독의 팀 운영 방법론과 육성과정을 모두 포괄하는 개념이다.그리고 이건 빅볼이 아예 불가능해서 스몰볼을 하거나, 어정쩡한 빅볼보다 스몰볼이 이기는데 효율적이라는 전제를 깔고 가는 소리다. 그런데 타고투저인 2010년대의 KBO에서 이건 그냥 멍멍이 소리고, 어설픈 팀배팅 하려다
김성근은 삼성, SK(직전 2005시즌 홈런 2위, 타율 3위), 쌍방울(직전 1995시즌 타율 4위) 등 타격이 좋은 팀을 가지고도 스몰볼을 버리지 않은 감독이다. 프로스포츠에 조금만 관심있는 사람이면 할 수 있는 소리가 아닌 게 감독의 취향이란 건 팀 옮긴다고 바뀌는 게 아니다. 그 부분에서 좀 더 발전해갈 순 있어도 성향이 바뀌는 감독은 없다.
10. 관련 문서
[1] 대졸 신인들이 입단 첫해부터 1군에서 맹활약하는게 당연시되고 2군은 1군에서 못뛰는 잉여들끼리 연습경기나 뛰던 시대, OB는 이 시기 2군에서의 육성 시스템까지 구성하며 타 구단보다 육성 등에 대해 크게 신경 쓰는 팀이었다.[2] 당시 OB 베어스뿐 아니라 구단 대부분은 선수들과 프런트간의 대립이 굉장히 심각하였다. 기본적으로 한국 프로야구는 3S 정책에 따라 정부의 강압에 의해 시작되었고, 정부의 압박에 따라 대기업들이 비용을 차출하는 팻 스포츠 형태로 구단들이 창설되었다. 그러다 보니 딱히 이익이 되지 않는 스포츠 사업에 어떻게든 돈을 쓰지 않으려는 의지들이 강하게 반영되었고, 야구라는 종목이 비용 지불이 원체 많은 종목이다 보니 갈등이 더욱 심각하였다. 이런 대립이 극단적으로 나타난 사례가 1986년 OB 선수단 이탈 사태였고, 비슷한 사건으로는 그 이전인 1984년 일어난 해태 타이거즈 불고기 항명 사건이 있다.[3] 이후 LG 때 이런 대립이 다시 반복되었던 만큼 둘의 사이가 좋지 않은 것으로 오해하는 이들도 많으나, 사실 둘의 관계는 굉장히 좋은 편이다. 단지 김성근 감독이 한국 야구 초기 관리야구의 대표 주자였다면 이광환은 자율야구의 대표 주자로 이후 한국 프로야구의 양대 흐름을 대표하는 인물이었던 만큼 야구관에서의 차이가 굉장히 컸다.[4] 대표적으로 원년 OB의 주포였던 김우열이 우타자 전문 타격 코치로 임명되었다.[5] 사실 좀 웃기는 것 중 하나가 이 시즌들의 성적을 부진하다고 까지만, 신인 때 기록이 아웃라이어인 것이지 원래 소화해야 할 이닝 수준으로 내려간 것이다. 아니, 심지어 그조차도 현대 야구 기준으로는 혹사인 것. 혹사는 객관적인 수치인 이닝, 경기수, 투구수를 기준으로 측정해야 하며 혹사에 따른 성적 하락도 통계를 근거로 판단해야 한다. 당시 윤석환의 성적 하락은 분명 나타나고 이건 혹사의 지표로 볼 수 있지만, 해석에 따라 소포모어 징크스 등으로 해석할 수도 있는 문제였다.[6] 롯데 최동원 51경기 20선발 284⅔ 이닝, 삼미 장명부 45경기 25선발 261⅔이닝, MBC 오영일 40경기 23선발 239⅔이닝, 삼성 김일융 38경기 23선발 222이닝, 삼성 김시진 39경기 26선발 215이닝, 해태 이상윤 40경기 18선발 211⅔이닝[7] 1984년 당시에는 팀당 100경기를 치렀다. 즉 전체 약 900이닝 중 200이닝이니, 한 선수가 팀 이닝의 최소 2할 이상을 소화해주어야 한다는 뜻이다.[8] 장호연 1.58, 계형철 2.06, 박상열 2.57, 윤석환 2.84, 최일언 2.84[9] 박노준의 실패는 사실 김성근만의 잘못이라고 보기는 어려운 것이, 김성근이 이도류 기용을 제안하기는 하였으나 박노준 스스로도 이도류에 대한 욕심을 버리지 못했다. 박노준 스스로도 당시 자신은 혹사를 당했다고 인정하였으나, 김성근과의 사이가 나쁜 편은 아니었다. # 오히려 사실상 퇴물 취급을 받던 박노준을 마지막까지 기용했던 것이 김성근 당시 쌍방울 감독이었고, 이후 SK의 김성근 경질 사태 당시 가장 SK 프런트를 비판했던 인물 또한 박노준이었다.[10] 만약 충청에서 뿌리를 내렸다면 상황이 좀 달랐을 수도 있다. 충청 연고를 확정짓고 들어간 빙그레는 같은 시기 26명이 입단하며 전 구단 중 입단자 수가 가장 많았다.[11] 게다가 1987년 1차 지명한 조재환은 해태에 지명권을 양도했으니, 실질적으로는 14명이었다. 심지어 1985년 지목된 김영신이 1년만에 자살하면서 그 수는 더욱 줄어들었다. 같은 기간 빙그레 입단 선수가 26명, 삼성에 입단한 선수가 23명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절대적인 수가 너무 적었다.[12] 어처구니 없는 것은 KBO 초창기 드래프트 중 1984년 드래프트 신인 풀이 가장 허약했다고 평가받고 있다는 것이다. 1983년 드래프트는 실업야구 출신 국가대표 선수가 쏟아져나왔으며, 1985년에도 류중일, 강기웅, 이정훈 등 풀이 굉장히 좋았다고 평가받았다.[13] 원년 삼미의 투수 코치 출신으로 1984년부터 OB 투수 코치로 활동하였다.[14] 김영신의 자살에는 오히려 이런 문화가 해가 되었다. 가족이라는 인식 아래 한 팀에 몸을 담으면 평생을 가야 한다는 인식이 강했고, 트레이드 등은 오히려 해당 선수를 구성원에서 쫓아내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이러한 문화가 이어진 게 선수협을 구성하려 했던 최동원을 롯데에서 트레이드로 쫓아낸 사건. 김영신이 입단했을 당시 OB는 이미 김경문, 조범현이란 두 포수가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는 상황이었던지라 김영신의 운신의 폭이 굉장히 좁았고, 심지어 그나마 받은 기회조차 제대로 활약하지 못하면서 이대로 아무것도 못하고 파묻혀 죽겠구나 하는 생각이 결국 한 선수를 죽음으로까지 이끌었다.[15] 당시 박상열은 코치진이 아니라 현역 선수였으나, 구단의 정리 대상에 포함되어 있었다.[16] 정진구 차장은 OB 베어스 회식 자리에서 벌어진 김성근 유임 투표 때 김성근의 편을 들었던 유이한 인물이기도 하였다.[17] 오히려 김성근은 당시 자신을 따라오려던 윤동균을 거부하였다. 거부의 사유 또한 구단이 OB맨들로 팀을 만들려고 하는 중이니, 구단과 사이가 좋은 윤동균은 남아 있는 것이 남을 거라는 조언. 실제로 윤동균은 바로 플레잉 타격 코치로 기용되었으며, 1991년 8월부터 OB 베어스의 감독으로 취임하여 활약하였다.[18] 그 과정에서 이광환 특유의 자율야구가 어느 정도 긍정적 영향을 준 부분이 있었다. 개막 10경기에서는 1승 9패로 최하위를 다투다가 여름 시즌이 되니 연승으로 5할 승률을 넘어서며 3위까지 올라간 것. 즉 휴식을 통한 체력 비축이 가장 체력이 부족한 여름 시즌 비로소 효과를 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다만 코치진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으니 위기의 자력 해소가 불가능했고, 결국 다시 연패를 겪으며 5위로 추락하였다.[19] 코칭 스태프는 이광환, 김우열 등 OB 시절 김성근을 몰아내는 과정에서의 선임 과정을 보면 이해할 수 있지만, 구단 프런트는 확실히 과한 요구이긴 하였다. 다만 당시 태평양은 야구단 경험이 전무했던 것, 그리고 오히려 꼴찌팀이었던 삼미-청보의 잔재를 청산하기 위해 새로운 프런트와 코칭 스태프를 구성하고 싶었던 만큼, 이 조항은 태평양 입장에서도 환영하는 입장이긴 하였다.[20] 이는 1986년 가을 야구 당시 선수단의 항명 소동을 겪었던 경험에 기인하였다. 당시 가을 야구에 대한 보너스를 요구했던 선수단이 플레이오프를 앞두고 훈련장을 이탈하였으며, OB 구단은 전원 임의탈퇴까지 이야기하며 강대강 대치를 치렀다. 심지어 중재를 섰던 감독에 대한 반감이 커지면서 김성근 경질의 원인으로 이어졌던 것은 덤.[21] 이는 사실 일종의 편법이다. 1년 내내 임금을 주면 근로자로 구분되기 때문에, 현행 노동법상 퇴직금 지급 의무와 4대 보험 의무 가입 의무가 발생한다. 나아가 법리상 근로 계약 중단 없이 2년 이상 계약이 지속될 경우 무기계약직 전환되어 해고가 제한되는 노동법 법리까지 인정받기 때문에, 선수단 인원 제한이나 임의 탈퇴 같은 제도까지도 근본적으로 다시 써야 한다. 1982년 프로야구의 출발 때부터 구단이 지출해야하는 노동법상 선수의 권리와 복지에 들일 돈을 주지 않기 위해 정부와 프로야구협회가 선수들의 의사와 상관없이 규약을 만들어 쓴 것이 지금까지 이어진 것이다. 이에 따라 법적으로 프로야구 선수들은 개인사업자로 분류되고 매년 10개월짜리 고용 계약을 받은 뒤 2개월 동안 서류상 실업자로 지내다가 재취업하기를 반복한다.[22] 김성근 감독은 이 당시 일을 회상하며 임호균이 구단에 의해 강제 은퇴당하는 상황을 막으려 했다고 주장하였으나, 임호균의 증언으로 이는 사실이 아니고 임호균 스스로 은퇴하려 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23] 장명부의 승수에 따른 연봉차감 각서, 당시 고관절 질환을 앓았던 김재현 각서 사건 등[24] 아예 출전시키지 않은 것은 아니고, 중간계투로 7경기 등판, 승패 없이 평균자책점 4.60의 성적만 남겼다.[25] 다만 이런 엄청난 혹사에도 이닝 소화 1위 기록은 롯데 윤학길의 38경기 30선발 250이닝이었다.[26] 신동관 회장은 1982년부터 1983년 실업여자 농구연맹 회장직을 수행하는 등 본래부터 여자농구 쪽 활동에 주력하다가, 그 경험을 토대로 야구단 운영을 맡았던 케이스였다. 이후 신동관 부회장은 1995년 한국여자실업농구연맹 회장에 선출되었다.[27] 1995년 은퇴 이후 허삼영은 프런트를 거쳐 삼성 라이온즈 감독이 되었다. 이 때의 경험을 토대로 선수 혹사를 최대한 지양하고 있다.[28] 사실 최종준 전 단장은 이광은과의 학연이 있었다. 하지만 부진하자 김성근에게 힘을 실어주었고, 이광은을 쳐냈다.[29] 결국 5년간 1군에서 사라지며 재활만 해오다가 2016년 9월 은퇴를 선언했다.[30] 이후 감독이 된 염경엽은 강속구가 있는 문승원을 시즌 중 불펜으로 돌리고 싶은 유혹이 있었을텐데 꾸준히 선발 로테이션을 돌게 해준 힐만에 감사 인사를 표했다.[31] 대표적으로 3년 내내 밥값을 못했던 송은범.[32] 사실 같은 시간 펼쳐진 3위 경쟁팀 넥센과 삼성과의 경기에서 넥센이 대패하면서 이미 3위는 확정된 상태였다.[33] 이 정도면 내부적인 육성 문제를 검토 해 봐야 할 지경이다. 한대화/2012년 문서와 5886899678 문서에도 나와있듯 2군 구장이 건립된 게 2012년(...)일 정도로 한화는 육성의 ㅇ자도 모르는 팀이었고, 체질 개선을 10년동안 현장을 떠나있던 김응룡이 겨우 시도할 정도로 소위 '리빌딩' 자체에 관심이 없었다. 이러한 문제는 일단 감독으로선 실패했으나 프런트 직원로서는 성과가 있는 박종훈이 2017년 단장으로 오면서 하나하나 풀어가고 있으니 최소 3~4년은 더 지켜봐야할 것이다.[34] 6월 5일 내야수인 노시환을 9회초 크게 지는 가운데 투수(!)로 내보내면서 비판 여론이 더 커졌다.[35] 노리타들은 2020년 한화의 붕괴가 한용덕 감독의 잘못된 시즌 운영-정민철을 위시한 프런트의 잘못으로 몰아가지만, 그렇게 된 원인은 김성근의 지분이 결코 적은 것이 아니다. 김성근 재임 3년간 유망주였던 노수광, 오준혁, 최영환, 김민수, 조영우 등 FA 보상선수나 트레이드, 편법적인 육성선수 전환 등으로 인해 떠나면서 현 한화의 문제점인 80년대 후반~90년대 초반 중간 선수층의 부재가 심해졌기 때문이다.(이 중 노수광은 이태양과의 트레이드를 통해 돌아온다.)[36] 류현진이 2015년에 수술한 그 부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