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13 11:39:27

유지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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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소속 선수
<rowcolor=#FFFFFF> 포지션 이름 역할 등번호
- 김인식 감독 -
- 김윤겸 수석코치 -
- 유지훤 타격&수비코치 -
- 송진우 투수코치 -
- 김구라 단장 겸 해설 -
- 성승헌 캐스터 -
- 이찬원 캐스터 -
외야수 양준혁 선수 10
외야수 윤현민 선수 11
내야수 윤석민(타자) 선수 13
내야수 안경현 선수 16
내야수 채태인 선수 17
투수 이동현 선수 18
포수, 외야수 홍성흔
C
주장/선수 22
투수 윤석민(투수) 선수 24
포수, 내야수 최준석 선수 25
포수 현재윤 선수 27
투수 김환 중계/선수 29
내야수 박종호 선수 31
투수 송창식 선수 38
투수 니퍼트 선수 40
내야수 마해영 선수 49
투수 봉중근 선수 51
내야수 김태균 선수 52
외야수 이대형 선수 53
투수 유원상 선수 55
투수 이한진 선수 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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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지훤의 수상 경력 / 역대 등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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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두산 베어스 우승 엠블럼 V1.svg
KBO 리그 한국시리즈
우승반지
1982

파일:두산 베어스 우승 엠블럼 V2.svg파일:두산 베어스 우승 엠블럼 V3.svg파일:두산 베어스 우승 엠블럼 V4.svg
KBO 리그 한국시리즈
우승코치
1995 2001 2015

OB 베어스 등번호 6번
팀 창단 <colbgcolor=#c0281f><colcolor=#ffffff> 유지훤
(1982~1989)
임형석
(1990~1996)
쌍방울 레이더스 등번호 94번
팀 창단 유지훤
(1990~1992)
결번
OB 베어스 등번호 74번
결번 유지훤
(1993~1997)
김경문
(1998~2011)
두산 베어스 등번호 71번
강태정
(1998)
유지훤
(1999~2003)
김광림
(2004~2011)
한화 이글스 등번호 71번
이광길
(2001~2002)
유지훤
(2005~2009)
정민철
(2010~2012)
두산 베어스 등번호 74번
정명원
(2012~2013)
유지훤
(2014~2020)
김지훈
(2021~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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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image/117/2014/01/09/201401091654502226_1_59_20140109165504.jpg
유지훤
柳志烜 | Yu Ji-Hwon
출생 1955년 10월 4일 ([age(1955-10-04)]세)
부산광역시
국적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학력 대신초 - 대동중 - 대광고
포지션 유격수
투타 우투우타
프로 입단 1982년 OB 베어스 창단멤버
소속팀 철도청 야구단 (1974~1975)
상업은행 야구단 (1979~1981)
OB 베어스 (1982~1988)
지도자 OB 베어스 1군 수비코치 (1989)
쌍방울 레이더스 1군 수비코치 (1990~1992)
OB 베어스 1군 수비코치 (1993~1997)
두산 베어스 1군 수석코치 (1999~2003)
한화 이글스 1군 수석코치 (2005~2009)[1]
한화 이글스 재활군 코치 (2009)[2]
두산 베어스 2군 재활코치 (2014)[3]
두산 베어스 1군 수석코치 (2014~2015)[4]
두산 베어스 잔류군 총괄코치 (2016~2020)
프런트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 전력분석원 (2010)
병역 성무 야구단 (1976~1978)

1. 개요2. 선수 경력
2.1. 아마추어 시절2.2. OB 베어스
3. 지도자 경력4. 연도별 주요 성적5. 여담6. 관련 문서

[clearfix]

1. 개요

OB 베어스의 유격수, 한화 이글스의 코치, 두산 베어스의 코치이다. 또한 두산이 우승한 1982년 한국시리즈, 1995년 한국시리즈, 2001년 한국시리즈, 2015년 한국시리즈까지 모두 함께 했던[5] 베어스 영광의 산증인.[6]

2. 선수 경력

2.1. 아마추어 시절

본디 부산광역시 출신으로 박철순과는 어릴 적 한 동네에서 야구를 하며 형동생하던 사이라고 한다. 그러나 부산지역 네임드 고교에 들어가지 못한 뒤 서울 대광고로 진학했고, 이 후 실업야구 한국상업은행철도청 야구단을 거쳤다.

2.2. OB 베어스

파일:/image/100/2014/01/07/chang20140107141533_I_01_C_1_59_20140107141702.jpg
대광고를 졸업한 관계로 1982년 KBO 리그 출범 당시 서울 지역 선수로 분류되어 OB 베어스에 입단한다.[7]

OB에서는 타격은 떨어지지만[8], 안정감있는 수비로 2루수 구천서와 키스톤 콤비를 이뤘고, 1982년 한국시리즈 6차전에서 배대웅의 땅볼 타구를 잡아[9] 마지막 아웃 카운트를 잡은 바 있다. 그러나 의욕은 앞서지만 영민한 플레이와는 거리가 먼 선수였기 때문에 훗날 김광수 등이 성장하면서 주전 자리를 잃었고, 특히 해태 타이거즈와의 1987년 플레이오프 4차전에서 1점 차로 간신히 앞선 9회말 2사 3루 위기에서 김성한의 땅볼 타구를 몸개그하며 내야안타로 만들어 주는 바람에[10][11] 김성근한테 찍혀 1988년 말에 은퇴하게 된다.

3. 지도자 경력

은퇴 후 곧바로 지도자 생활을 시작하면서 OB 베어스의 수비코치로 1년간 있다가 김인식 감독의 부름을 받고 1990년 신생팀이던 쌍방울 레이더스 코치로 자리를 옮겨 1992년까지 수비코치로 재임하였다. 이 때부터 김인식의 최측근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감독교체의 여파로 쌍방울을 떠나 1993년부터는 다시 OB 코치로 돌아왔고, 1995년 시즌을 앞두고 김인식이 OB 감독으로 부임하면서 김인식과 재회, OB-두산 베어스의 수비코치와 작전코치를 거쳐 김인식을 보좌하는 수석코치까지 역임하였다. 그 와중에도 코치로써 재직하던 중 팀이 1995년 한국시리즈, 2001년 한국시리즈에서 우승컵을 들어올리면서 우승멤버가 되었다.

이후 1년간의 휴식기를 거쳐 김인식이 한화 이글스 감독으로 옮기자 동시에 한화 수석코치로 부임하며 김인식 사단의 주축으로 활동했다. 한 마디로 김인식의 남자.

그러나 많은 분들이 지적하시다시피 코치로서의 능력은 최악. 유격수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연습생 출신이던 김민호손시헌을 제외하면 1군 전력의 유격수를 못 만들어낸 것은 그렇다고 쳐도, 흔히 감독을 보좌해 팀 기강과 분위기를 장악해야 할 수석코치였음에도 불구하고 선수단 장악에 실패해 범죄두라는 오명을 썼기 때문.[12][13]

결국 2003 시즌 후 김경문이 두산 감독으로 부임하자 수비코치였던 양승호에게 수석코치 자리를 내주며 잘렸고, 2005년 김인식이 한화 이글스 감독으로 가면서 그도 한화로 옮겨 수석코치로 김인식을 보좌하였으나 김인식 재임 후반기에 팀이 슬슬 삐그덕거리며 암흑기에 접어들자 같은 김인식 라인이던 우경하 타격코치와 함께 철밥통이라며 까였고, 2008년에는 시즌 중에 들어온 노찬엽에게 3루 주루코치 자리를 넘겨준다. 2009 시즌 중에 재활군으로 좌천되더니 종료 후 김인식이 물러나자 그도 한화에서 물러났다.

이후에 쭈욱 야인으로 지내면서 잊히는 듯 했으나 2014년 2군 재활코치로 친정팀 두산 베어스에 11년 만에 복귀했다.# 그러다가 2014년 8월 11일 팀이 부진에 빠져들자 송재박을 대신하여 1군 수석코치로 올라왔다. 2015 시즌 김태형 감독이 선임되었음에도 수석코치로 유임되었다.

2015년 한국시리즈에서 두산이 극적으로 업셋 우승을 달성하면서 2001년 한국시리즈에 이어 14년 만에 다시 수석코치로 우승을 경험해 보게 되었다.

2016년부터는 잔류군 총괄코치로 보직을 옮겼다. 하지만 2020년을 끝으로 두산과 결별하기로 했다.

4. 연도별 주요 성적

역대기록
<rowcolor=#ffffff> 연도 소속팀 경기수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4사구 장타율 출루율
1982 OB 베어스 80 274 .252 69 14 2 4 38 29 12 17 .361 .295
1983 87 250 .212 53 8 1 0 18 24 3 15 .252 .256
1984 63 130 .208 27 1 0 3 20 13 2 7 .285 .246
1985 107 321 .209 67 9 4 3 35 32 5 24 .290 .262
1986 100 330 .270 89 8 2 2 37 31 8 25 .324 .321
1987 95 263 .205 54 9 3 0 18 29 3 22 .262 .265
1988 95 239 .201 48 5 3 0 21 15 5 19 .247 .259
KBO 통산
(7시즌)
627 1807 .225 407 54 15 12 187 173 38 129 .292 .276

5. 여담

  • 원년 당시 그를 기준으로 OB의 고참/후배 라인이 갈라졌다고 한다.
  • 90년대 이후의 야구팬들은 그를 모르거나, 알더라도 베어스의 코치로만 접해서 원년 시절을 포함한 그의 선수 시절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의 이름을 유지현의 오타로 착각하는 경우도 있을 정도.
  • 안 좋은 쪽으로 두 개의 기록을 가지고 있었다. 하나는 앞에서 언급한 83년 47타석 연속 무안타, 다른 하나는 86년 기록한 시즌 31실책.
    • 연속 타석 무안타 기록은 염경엽51타석 연속 무안타를 기록하면서 깨졌다. 무안타 기록 갱신되기 전까지 계속 따라다니는 꼬리표로 인해 꽤나 스트레스 받은 듯 하다. 기사[14]
    • 또한, 단일 시즌 최다 실책도 현재 키움 히어로즈의 내야수 김혜성이 2021년 10월 14일 NC전에서 32개째를 기록하면서 깨졌다.[15]

6. 관련 문서



[1] ~7월 27일[2] 7월 28일~[3] 8월 10일~[4] 8월 11일~[5] 2016년 한국시리즈2019년 한국시리즈 때도 베어스 유니폼을 입고 있었지만 1군 코치가 아니었다. 그래도 베어스 유니폼을 입고 통산 6번의 한국시리즈 우승을 모두 함께 한 선수단 내 유일한 인물이다.[6] KBO 차원에서 수여하는 우승반지는 2000년부터의 일이고, 구단 자체 제작도 1994년의 LG가 최초이다. 원년 시절의 우승반지는 30년이 지난 2011년에서야 뒤늦게 만들어져 받게 되었다.[7] 비슷한 케이스로 배명고를 졸업한 박철순도 OB의 지명을 받는다.[8] 1983년 전설의 47타수 연속 무안타의 한국기록을 세웠다. 2015년 손시헌이 이를 경신. 한때 이승엽 오푼이 시절, 2009년 진갑용의 43타석만의 안타, 이대형의 2010 시즌 등 타자들이 무안타 행진을 이어가면 슬그머니 언급된다.[9] 홈플레이트 앞을 맞고 마운드 쪽으로 크게 튄 타구였는데 박철순이 이 타구를 잡으려고 펄쩍 뛰다가 주저앉고 그 뒤에 들어오던 유지훤이 잽싸게 대시하면서 타구를 잡으면서 OB의 원년 우승 영상에 늘 등장하게 된다. 박철순은 이 순간 이후 고질적 지병이던 허리 통증이 극심해지게 된다.[10] 이보다 앞선 9회초 1사만루 찬스에서도 주루 실수로 역전의 빌미를 만들기도 했다. 전설의 타이거즈야사시TV에서 김일권도 이 장면을 회상했다. 당시 2루 주자로 있으면서 구천서의 우전안타 때 홈으로 달렸는데, 3루코치가 1루주자인 이승희를 보고서 멈추라고 하는 것을 잘못 듣고서는 다 들어온 홈에서 3루로 다시 돌아가는 바람에 아웃된 것. 게다가 1루주자 이승희도 무리하게 3루까지 뛰다가 아웃.[11] OB는 이 경기를 내준 충격으로 다음 플레이오프 5차전마저 내주어 결국 한국시리즈 티켓을 해태에 넘겨주고 말았다. 그 후 OB는 1990~1991년 2시즌 연속 꼴찌를 포함해 5년 동안 포스트시즌 진출이 좌절되었고, 오랫만에 포스트시즌에 진출했던 1993년 이듬해인 1994년에는 윤동균 감독이 불명예 퇴진하는 등 숱한 내홍을 겪다가 1995년에야 비로소 원년 이후 13년만에 1995년 한국시리즈에서 V2에 성공한다.[12] 실제로 유지훤 코치가 수석코치로 재임하던 시절이던 1999년에는 플레이오프 기간 도중 내야수 김민호가 대전 시내 모 나이트클럽에서 폭행 시비에 휘말렸고, 2000년에는 강혁이 음주운전 사고를, 2003년에는 정수근과 한태균이 하와이 스프링캠프 도중 캠프를 이탈해 현지인과 폭력 시비가 붙어 미국 법정에 서는 등 선수단 내 다사다난한 사건사고가 많았다.[13] 다만 이것은 당시 감독이었던 김인식 감독 특성상 자유분방한 분위기를 형성해 자율적으로 풀어주는 스타일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의견이 있다. 실제로 정수근도 은퇴 후 유튜브 방송인 박명환야구TV에서 김인식 감독 재임 시절 두산의 덕아웃 분위기가 자유분방하고 화기애애하게 돌아가는 편이었다고 증언하기도 했다. 덕분에 후임 감독이던 김경문 감독이 전임 감독이던 김인식 시절의 자유분방한 팀 컬러를 바꾸고 선수단을 장악하기까지 꽤나 고생했다고 전해진다.[14] 기사를 보면 알겠지만, 한편으로는 무안타 기록을 다른 관점에서 해석하기도 하였다.[15] 김혜성은 시즌 끝날때까지 3개를 더 추가하여 35개로 시즌을 마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