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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단 기본 정보 | 팀 컬러 | 선수단 | 스타 플레이어 | 등번호 | 유니폼 | |||
{{{#!wikistyle="margin: -16px -11px" | 역사 | 우승 | ||
영구 결번 | ||||
일반 정보 | }}} | 1999 | ||
35 장종훈 | 21 송진우 | 23 정민철 | 52 김태균 | ||||
구단 역사 | 암흑기(5886899678) | 역대 트레이드 | 사건사고 | ||||
경기장 | 1군 대전 베이스볼 드림파크(가칭) · 청주종합경기장 야구장 | 2군 서산전용연습구장 이전 대전 한화생명 이글스파크 | |||
지역 연고 학교 | 북일고등학교 | 대전제일고등학교 | 공주고등학교 | 한국K-POP고등학교 | 대전고등학교 | 세광고등학교 | 천안상업고등학교 | 청주고등학교 | 강원고등학교 | 원주고등학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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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그레 이글스 | |
Binggrae Eagles | |
창단 | 1986년 3월 8일 |
모기업 | 한국화약그룹[1] |
연고지 | 대전광역시 (1986~1993) |
홈구장 | 한밭종합운동장 야구장 (1986~1993) 청주 야구장 (1986~1993)[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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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화 이글스의 빙그레 이글스 시절 내용을 정리한 문서.2. 창단
1군 리그 진입을 앞두고 충무체육관에서 치른 빙그레 이글스 창단식.[3] |
1986년 3월 8일 1군 리그 진입 창단식을 마치고 대전시내에서 펼친 카 퍼레이드. 뒤에 배성서 초대 감독과 노진호[4] 단장이 보인다.[5] |
한화 이글스가 1993년까지 사용한 팀명이자 7구단 시대를 연 구단이다. 1986년에 충청도를 연고로 하는 7번째 구단으로 창단되었다.
충청도를 연고로 했던 OB 베어스가 서울 입성 전 KBO와 약속했던 3년 간의 대전 생활을 마무리하는 1984년 즈음부터 제7구단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충청도에서 사업을 시작한 충청 출신 오너의 향토기업 중 한국화약[6]과 동아건설[7]이 각각 자신의 기업이 제7구단을 유치하기 위해 신경전을 벌이는 가운데 KBO 구단주회의에서는 이들에 대해 거의 거론하지 않고 가입금 30억원 제시[8], 대전구장 9천 석에서 2만 석으로 증설, 기존 6개 팀에서 10개 팀으로 증설, 85년부터 참가라는 조건을 내놓았다. 동아건설은 창단 신청을 철회하며 한국화약 쪽으로 주사위는 굴러왔으나 공식적인 입장은 밝히지 않으며 애매한 스탠스를 취했다. 사실 말이 가입금 30억원이지 인프라 구축에까지 들어가는 돈은 100억이 넘어감으로 한화그룹 입장에서도 여론을 신경쓰지 않을 수 없어 발표를 미뤘다. 김승연 한국화약그룹 회장은 서종철 당시 KBO 총재를 찾아가 가입금 문제에 대해 재고를 요청했으나 KBO 사무국과 구단 실행위원들은 물러설 수 없는 입장을 유지했다. 결국 신생팀을 프로야구라는 시장에 후발주자로 무임승차시키지 않으려는 기존 6개 구단의 텃세에 밀려 1985년 제7구단 합류는 물거품이 되었고 1985년 충청도를 연고로 하는 구단은 없게 되었다.
OB 베어스와 약속된 3년 간의 기간이 다 끝난 상황까지도 충청권을 연고로 할 제7구단 유치가 미뤄지자 1984년 10월 29일 안응모 충청남도지사는 제7구단의 조속한 창설을 요청하는 공문을 내무부에 접수했다. 1985년 2월에 치러질 제12대 총선을 앞두고 충청권에서는 '연고 구단을 서울에 빼앗긴 무능한 국회의원'들에 대한 성토 여론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공문을 접수한 내무부는 곧바로 KBO에 그에 대한 회신을 지시했다. 그러자 KBO는 '연말까지 희망 기업의 창단신청서를 접수하겠다는 내용'으로 회신했다. 그러면서 1984년 12월까지 한국화약과 농심, 한일합섬 등의 기업들이 창단신청서를 공식 접수하기 시작했다. 이로써 제7구단은 1986년부터 KBO 리그에 참가하는 것이 사실상 확정되었다. 그리고 1985년 1월 11일 KBO 이사회는 한국화약그룹의 창단신청을 수락하기로 결정했다. 문제점이 되었던 가입비 30억원 납부 조건은 한국화약측에서 직접 30억원 상당의 한국야구회관빌딩을 지어서 기부하겠다는 수정안을 내놓아 해결되었다.[9]
제7구단의 창단이 확정되자 한국화약그룹은 새 팀의 이름을 짓기 위한 대국민 공모를 시작했고, 상금 700만원을 내걸고 공모한 끝에 약 25,000명의 응모자들 중 약 10퍼센트에 해당하는 2,500여명이 중복 제안한 이름인 독수리를 뜻하는 '이글스'를 채택했다. 구단 운영을 맡을 그룹 계열사로는 유일한 일반소비재 생산업체인 빙그레제과가 결정되었고, 그렇게 1985년 2월 27일 제7구단의 이름은 '빙그레 이글스'로 확정되었다.
사실 빙그레 이글스는 처음부터 한국화약그룹 소속의 프로 야구단으로서 창단되었으나 당시까지만 해도 한국화약이 대중에 잘 알려져있지 않고, 아는 사람에게도 화약 제조 혹은 방위산업체 이미지가 강했으므로 일반 대중에게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도록 그룹 계열사 중 유일한 소비재(식품) 업체인 빙그레의 이름을 빌려 온 것이다.[10]
그리고 3월 8일에는 창단 사령탑으로 배성서[11] 전 한양대 감독을 선임했다. 한때 MBC 청룡 초대감독으로 거론되기도 했던 배성서 감독은 영남대와 한양대를 여러차레 우승으로 이끌며 지도력을 인정받았다. 한화그룹에서는 배성서 감독이 1974년 영남대 야구부 창단 감독을 맡아 단기간에 우승까지 이끈 경력을 높이 샀다. 배성서 감독은 1985년 6월 3일 부산 다대포 해수욕장에서 UDT 훈련교관 출신 박상조를 체력담당 코치로 선임해 5개월간 선수들을 혹독하게 훈련시켰다.
문제는 선수 수급이었다. 애초 기존 6개 구단은 빙그레에 적극적인 지원을 약속했지만 막상 창단 작업이 진행되다 하나같이 지원에 난색을 표한 것이다. 기존 구단들도 선수층이 두텁지 못한 실정인데다 신생구단에 대한 선수 지원이 강제가 아닌 권고 사항인 탓에 적극적으로 협력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것이다. 그 결과 1985년 4월말까지 빙그레가 확보한 선수는 고작 8명. 아마야구와의 마찰을 감수하고 영입한 신인 이상군, 민문식, 전대영과 삼성이 지명권을 양보해 데려온 이강돈, 강정길 그리고 롯데에서 트레이드해 온 이석규, 이광길, 김재열이 전부였다. 청백전은커녕 경기를 위해 필요한 한 팀의 최소 인원 9명도 채우지 못한 것이다.
다급해진 빙그레는 5월 8일과 9일 대전구장에서 신인 선발대회라는 이름으로 공개선수 모집에 나섰다. 이를 통해 홍순만(해태), 김호인(삼미)[12] 등의 프로 경력자를 포함한 10명의 선수를 추가적으로 확보할 수 있었다. 그리고 여기에 비교적 선수층이 두터운 편이었던 삼성으로부터 시즌 중 김한근과 박찬을 영입했고, 시즌이 끝난 뒤에는 김성갑, 성낙수, 황병일을 추가로 영입할 수 있었다. 다른 구단도 여기에 동참해 롯데는 투수 천창호를, OB도 김우열과 김일중을 빙그레에 보냈다. 해태 역시 팀내에서 자리가 없어진 유승안과 김종윤을 트레이드 형식으로 빙그레에 지원했다.
청보에서 재계약협상에 실패한 너구리 장명부가 건너왔다. 재일교포이며 난카이 호크스 2군 출신에 2군 올스타전 MVP 경력이 있는 고원부도 입단했다. 그리고 그 해 신인 드래프트에서는 대전고-고려대 출신의 이효봉을 지명해놓고 합류시키는데 실패했지만 특급 잠수함 한희민과 대졸 포수 최대어인 김상국을 지명해 어렵사리 주황색 유니폼을 입히는데 성공했다. 천신만고 끝에 1군 무대를 소화할 만한 최소한의 선수 구성이 완료되면서 1986년 3월 8일 대전 충무체육관에서 빙그레 이글스의 창단 행사가 열렸다. 프로야구 제7구단의 공식적인 첫 행보가 시작된 순간이다.
빙그레 이글스 창단 멤버 | ||
감독 | 배성서 | |
코치 | 정연회, 이재환, 김윤겸 | |
투수 | 영입선수 | 성낙수, 김재열, 천창호, 임재준, 오문현, 장명부 |
신인선수 | 이상군, 한희민, 손문곤, 김연철, 민문식, 유해덕, 김일중, 박태준, 유해남, 조호표 | |
포수 | 영입선수 | 유승안, 김성호, 배원영, 홍순만 |
신인선수 | 김상국, 김종문, 강규원 | |
내야수 | 영입선수 | 황병일, 김성갑, 이석규, 이광길, 김한근, 박재천, 이근식 |
신인선수 | 강정길, 전대영, 김정태, 임순태, 김종수(1957), 김현택, 이군노, 송상진, 이정은, 김수길, 임학빈, 이영일, 장종훈[13] | |
외야수 | 영입선수 | 김우열, 박찬, 김호인, 이성수, 고원부 |
신인선수 | 이강돈, 장훈, 윤홍식 |
3. 1986 ~ 1987 시즌
3.1. 1986년
1986년 4월 1일 한밭종합운동장 야구장에서 빙그레의 역사적인 첫경기가 열렸다. 상대는 MBC 청룡. 경기내용은 절망과 희망이 교차했다. 개막전 선발로 내보낸 장명부가 5이닝 6실점으로 무너진 것은 절망적이었다. 하지만 6회부터 나온 한희민의 호투는 앞으로를 기대 하기에 충분했다. 게다가 빙그레 타자들은 하기룡, 김용수, 유종겸, 오영일, 김태원 등 주력 투수를 총동원 한 MBC를 상대로 막판 맹추격전을 벌었다. 빙그레로서는 7대8. 한 점 차까지 따라붙은 9회말 무사 2,3루에서 4,5번 타자 삼진과 범타로 물러난것이 아쉬웠다. 김종윤의 삼진에 이어 1사 2,3루에서 김상국이 날린 우익수플라이때 3루 주자 이군노가 청룡의 중계플레이에 홈에서 태그아웃되면서 경기는 그대로 끝났다. 다음날에도 청룡을 상대로 9회말 홈에서 주루사 2번을 당하며 3:2 1점차로 아깝게 패했다. 4월 3일 롯데 원정도 유승안의 4안타와 전대영의 최동원 상대 홈런으로 6회까지 7:3으로 이기고 있었음에도 손문곤의 3연속 볼넷과 구원등판한 장명부가 두 번의 밀어내기를 허용하며 7:7 동점이 되었고 결국 연장 11회에서 김용희에게 끝내기안타를 맞고 또 1점차인 7:8로 졌다. 창단 첫 승은 4번째 경기인 4월 5일, 청보 핀토스 인천 원정경기에서의 5대0 승리였다. 승리투수는 완봉승을 기록한 한희민이었다. 이강돈은 12타석 만에 첫 안타를 8회초 2점짜리 쐐기 홈런으로 만들어냈다. 첫 승 이후엔 7연패를 겪다 4월 16일 OB 베어스와의 홈경기에서 이상군의 2실점 완투승으로 5:2 승리를 거두며 홈경기에서의 첫 승을 올렸다. 6월 5일 부산 롯데 원정에서는 김정행에게 볼넷 4개만을 얻어내며 안타를 치지 못해 통산 2호 노히트노런을 헌납하기도 했다.그 해 빙그레는 전기리그 에서 12승 42패 후기 19승 1무 34패를 기록하며 중합순위 최하위(31승 1무 76패, 승률 0.290)에 그쳤다.[14] 경험부족과 세밀한 플레이 미숙으로 인해 29번이나 1점차 패배를 당한 게 뼈아팠다. 야심차게 데려온 장명부는 방어율 4.98에 1승18패라는 처참한 성적을 남기며 폭망했다.[15] 그나마 후기에는 청보를 제치고 7개 팀중에 6위를 차지한 것이 위안거리였다. 또 영건듀오 이상군(12승 17패 평균자책 2.43)과 한희민(9승 13패 평균자책 3.13)의 활약은 다음시즌을 기약할 수 있게 했다. 특히 19번의 완투와 함께 12번의 승리를 모두 완투승으로 장식했던 이상군은 6월 11일부터 29일까지 3경기 연속 무사사구 완봉승을 기록하기도 해 단순한 유망주를 뛰어넘어 리그를 대표하는 에이스급 투수로 올라서기도 했다.
하지만 대전이 한국프로야구 원년 우승을 경험한 도시였던 만큼 아무리 주어진 조건 안에서의 최선의 결과였으나 대전 팬들을 만족시킬 수 없었다.시즌 뒤 열린 신인 지명회의에서 빙그레는 2차 2번으로 대구상고-영남대 출신 외야수 이정훈을 얻는데 성공했다.[16] 1987년 드래프트부터 연고지역 1차 지명권이 팀 당 세장으로 줄어들었기 때문에 대구지역 연고팀 삼성이 류중일, 강기웅, 장태수를 지명한 탓에 놓치게 된 이정훈을 빙그레가 지명한 것이다.
3.2. 1987년
1987년 이정훈은 데뷔 첫 시즌부터 22경기 연속 안타 기록을 세우고 타격 3위에 해당하는 3할 3푼5리의 높은 타율에 리그 전체 안타왕에 해당하는 124개의 안타, 20개의 도루를 기록하는 뛰어난 활약으로 이글스 첫 신인왕에 올랐다. 이정훈과 함께 타선을 이끌었던 유승안은 팀내 홈런 1위를 기록하며 지명타자 부문으로 이글스 첫 골든글러브를 수상했다. 고원부는 지난해보다 업그레이드된 모습을 보이며 123안타와 타율 .324를 기록했다. 이강돈은 전해보다 부진했지만 구단 첫 사이클링 히트를 기록했다. 이해부터 이강돈-이정훈-고원부라는 막강한 외야 주전 자리가 1990년까지 지속되었다. 또한 고졸 연습생이었던 장종훈은 주전 2루수 이광길이 부상당하자 유격수 김성갑이 2루를 보면서 선발 유격수로 나오기 시작해 .270의 타율과 8개의 홈런을 치며 미래를 기대하게 했다. 또 마운드에서는 이상군이 18승 한희민이 13승을 따내며 첫해보다 한층 성숙한 투구를 선보였다. 그 결과 빙그레는 전기리그 24승 2무 28패로 청보에 7경기차로 한 계단 앞선 6위 후기에서도 23승 2무 29패로 청보와 공동 6위에 오르며 창단 2년 만에 탈꼴찌에 성공했다.창단 두번째 시즌을 마친 빙그레는 3년 계약기간이 끝난 배성서 감독과 재계약을 포기하고 OB 삼성을 거친 김영덕 감독을 새 사령탑에 선임했다. 김영덕 감독은 프로야구 출범 이전에 천안북일고등학교 야구부 감독을 지낸 인연이 감독 선임에 주요하게 작용했다. 여기에 1984년 롯데 우승을 일궈낸 강병철 감독이 타격코치로 가세했다. 각자 우승경험을 지닌 새 코칭스태프는 동계훈련 기간동안 빙그레 선수들을 혹독하게 담금질했다. 특히 항상 지적 되던 약점인 수비력과 주루 플레이를 집중적으로 가다듬었다. 이재환코치는 김대중, 이동석, 한용덕, 장정순 등 신예급 투수들을 짧은 시간 안에 마운드의 주력으로 끌어올렸다.
4. 1988 ~ 1992 시즌
초창기의 6개 구단에 비해 늦게 창단된 구단임에도 신인 선수들이나 타팀에서 전력보강 차원으로 영입한 선수들의 포텐셜이 폭발하면서 1988~1992년 5년동안 무려 4번이나 한국시리즈에 진출[17]하는 등 신흥 강호로 떠올랐다. 1993년과 1994년에도 각각 승률 0.500과 0.524를 기록했다. 1989년 올스타전에서 찍은 사진. 왼쪽부터 현역 시절의 유승안, 이강돈, 당시 신인이었던 송진우, 한희민.[18] |
빙그레는 창단 당시 6개 구단 보호선수 외 특별지명 선수들 중 삼성 라이온즈 출신의 선수들을 많이 지명했는데, 또 그걸 삼성이 웬만큼 다 수용했다. 그런만큼 당시 삼성이 선수층이 푸짐했던 관계로 넉넉하게 해줄 수 있던 여력도 있었고. 경북고, 대구상고를 중심으로 한 대구 팜은 1970~1980년대에 고교대회에서 엄청난 성과를 냈었고, 그에 비례하여 좋은 기량을 가진 선수들이 많았다. 빙그레 초창기에 대구 출신 선수들이 많았던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마침 단장도 그쪽 구단서 일한 데다 창단 감독도 그쪽 동네 사람이었다.[19]
특히 김영덕 감독의 지휘 아래 창단 2년 뒤인 1988년부터[20] 1992년까지 1990년 시즌을 제외한 KBO 한국시리즈에 4번 진출하였으며 1989년, 1992년에 페넌트 레이스 1위도 2번이나 차지했다. 순수 신생팀 기준 창단 이후 3시즌 만에 한국시리즈 진출은 KBO 신생팀 사상 최단 기간 한국시리즈 진출 기록이다. 그 다음이 창단 4시즌 만에 한국시리즈에 진출한 2003년의 SK 와이번스와 2016년의 NC 다이노스.[21][22]
1989년 한국시리즈 이후 준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리고 있는 송진우.[23] |
허나 한국시리즈에서 맞붙었던 상대가 의외로 강했기 때문에 결실은 맺지 못했다. 해태의 한국시리즈 우승 중 3번이 빙그레 상대였으며, 1992년에는 박동희와 염종석이 있던 롯데에 농락당했다. 사실 1992년 한국시리즈에서는 염종석보다 박동희의 활약이 더 컸었다. 염종석은 장어 먹고 탈이나 4차전에서 강판당하기도 했다. 참고로 1992년 정규시즌의 81승 43패 2무, 팀승률 0.651은 당시 정규시즌 최다승 신기록이었으며[24], 당해 정규시즌 2위였던 71승 54패 1무의 해태 타이거즈와의 게임차는 10.5 경기였다.[25] '92년 정규시즌 최종 순위표 또는 1992년의 정규시즌 최종순위 참조.
그리고 빙그레 자체도 페넌트레이스 때와는 다르게 한국시리즈에서는 약한 면모를 보였으며, 중요한 고비에서 치명적인 실책을 범하는 등 그 고비를 넘기지 못하고 무너졌다. 예를 들면 1989년 한국시리즈 2차전에서 장종훈의 알까기와 1991년 한국시리즈 3차전에서 송진우의 실책 같은 게 대표적이다. 그리고 2연속 준우승을 2번이나 달성한 팀이다. 그래서 최초의 한국시리즈 우승은 한화 이글스로 바뀐 후 1999년에 이루게 된다.
이강돈, 장종훈, 이정훈, 고원부, 강정길 등을 중심으로 하는 공격 야구를 펼쳤으며, 이는 한화그룹의 화약 제조업을 본뜬 다이너마이트 타선이라 불리며 빙그레 이글스의 상징이 되었다. 또한 이상군, 한용덕, 한희민, 송진우 등이 중심을 이루었던 투수진도 리그 상위권이었다. 한국시리즈 우승만 못했지, 사실상 이글스 프랜차이즈의 리즈 시절이다.
여담으로, 홈런왕 장종훈과 다이너마이트 타선의 영향으로 해태 타이거즈와 함께 당대 어린이 팬들이 많았던 팀이기도 했다.
4.1. 1988년
신인드래프트에서 투수 송진우와 장정순, 내야수 조양근을 지명했다. 하지만 송진우는 1988 서울 올림픽을 위한 국가대표 차출로 이 해에는 나오지 못했다.[26]개막전 MBC 청룡과의 2연전을 싹쓸이하며 좋은 출발을 했고 그해 4월 17일 해태와의 맞대결에서 이동석이 최강의 투수 선동열을 상대로 유승안 포수와 함께[27] 출루 2개가 수비 실책인 무사사구 노히트 노런을 달성했다. 실책만 아니었다면 KBO 최초로 퍼펙트 게임이 가능했다. 한희민은 팀내 최다 이닝인 188이닝을 맡아 16승을 올리며 에이스 역할을 했다. 에이스 이상군은 마무리로 투입되며 3번의 완투와 더불어 135이닝 10승 16세이브를 기록했다. 전해까지 한희민 이상군에 크게 의존했던 마운드는 이동석, 김용남, 김대중이 로테이션을 잘 돌아주고 재일교포 김홍명도 투수 운용에 힘을 보탰다. 장종훈은 생애 첫 두 자릿수 홈런(12개)와 83안타를 치며 생애 첫 골든글러브(유격수)를 받았다. 장종훈을 포함해 이정훈, 이강돈까지 골든글러브(외야수)를 수상했다. 한용덕은 연습생 배팅볼 투수 신분을 벗고 정식 선수로 등록되어 루키 시즌을 보냈다. 이들의 활약상과 함께 빙그레는 전기리그 34승 20패 승률 .630으로 선두 해태에 0.5경기차 2위를 차지하며 창단 3년 만에 포스트시즌에 진출했다. 후기리그에선 롯데와 함께 공동 3위(28승1무25패)를 기록했다. 통합승률은 62승1무45패로 해태에 이은 2위였다. 후기리그 2위팀이었던 삼성과 플레이오프에서 격돌하게 되었다.
안방 대전에서 열린 삼성과의 플레이오프 1차전에서 에이스 한희민의 완봉승으로 3:0 승리를 거뒀고, 2차전에서도 이상군의 호투와 고원부, 이강돈의 활약에 힘입어 9:3으로 연승에 성공했다. 대구에서 열린 3차전마저 선발 김대중의 완투승과 장종훈의 쐐기 2점 홈런으로 4:1 승리를 거두며 시리즈 싹쓸이로 창단 첫 한국시리즈에 올랐다.
창단 첫 한국시리즈의 맞상대는 2연속 우승에 성공했던 해태였는데 해태는 프로야구 최초로 30홈런을 친 김성한이 부상으로 시즌아웃되는 악재가 발생해서 해볼만 한 상대로 여겨졌다. 10월 19일 광주 1차전에서 해태는 에이스 선동열을, 빙그레는 노히트노런 주인공 이동석을 투입했다. 5회까지 무실점으로 잘 막았으나 6회 이순철에게 솔로포, 7회 한용덕이 서정환에 적시타를 내주고 2:0 영봉패를 당했다. 선동열이 8회 손가락 물집으로 마운드를 내려와 문희수가 등판했으나 공략하지 못했다. 다음날 2차전에서는 에이스 한희민을 내세워 이상윤의 해태를 상대했는데 조양근의 히드랍더볼로 5:6 1점차로 잡아야 할 경기를 놓치며 2연패했다. 10월 22일 홈에서 열린 3차전에서는 김대중을 올렸지만 1차전 세이브 투수 문희수에게 꽁꽁 틀어막히며 3:0 완패, 시리즈 전적 3패에 몰렸다. 다음날 4차전에서는 이강돈-유승안의 홈런 등 장단 20안타를 치며 해태에 14:3으로 대승을 거두며 창단 첫 한국시리즈 승리를 거둔다. 잠실로 장소를 옮긴 10월 25일 5차전은 이상군-한희민의 계투 작전으로 5:1 승리로 시리즈 전적은 2승3패가 되었다. 그러나 10월 26일 투수진이 결국 바닥난 빙그레는 이동석에게 팀의 사활을 걸었으나 결국 문희수가 나온 해태에 4:1로 패해 2승4패로 해태에 3연패를 허용하며 준우승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창단 3년차 한국시리즈 진출로 아직까지 순수 신생팀 중 최단기간 한국시리즈 진출 기록은 유효하다. 이에 가장 근접했던 팀은 2003년 SK와 2016년 NC의 4년차였다.
4.2. 1989년
신인드래프트에서 투수 진정필과 유격수 황대연, 3루수 강석천을 1차지명했다. 2차지명으로는 2루수 이종호, 투수 김락기, 포수 박선일 등을 지명했다. 지난해 중반 송일섭을 현금 트레이드 영입한 가운데 빙그레 원년 멤버인 이광근, 천창호, 김한근을 태평양으로 현금 트레이드로 이적시켰다. 지난해에 지명해놓고 국가대표 차출로 입단하지 못했던 송진우는 이 해부터 빙그레 유니폼을 입게 되었다.빙그레 원년부터 원투펀치였던 이상군과 한희민이 나란히 원투펀치로 활약했던 마지막 시즌이다. 이상군이 16승 5패 3세이브 방어율 2.57, 한희민이 16승4패 6세이브 방어율 2.50을 기록하며 각각 팀내 공동 다승 1위에 리그 전체 다승 공동3위로 마운드의 구심점이 되었다. 송진우는 선발과 마무리를 오가며 9승 10패 9세이브 방어율 2.81로 신인으로 준수한 성적을 기록했다. 김락기는 1989년 한해 반짝하며 8승에 방어율 2.67로 투수진의 한 축을 맡아줬다. 그 외에는 각각 7승과 6승을 올린 김대중과 김홍명이 있었고, 계투진에서는 한용덕, 진정필, 장정순, 이동석이 뒷심을 보였다.
타선에서는 고원부가 .327의 타율로 이글스 역사상 첫 타격왕이 되었다.[28] 유승안은 21홈런으로 팀 역사상 20홈런을 돌파한 첫 타자가 됨과 동시에 팀내 최다 홈런을 기록했고 85타점을 기록하며 이글스 역사상 첫 타점왕이 되고 포수 부문 골든글러브를 수상했다. 무엇보다도 1989년 5월 9일 당대 최고의 투수였던 선동열을 상대로 최초의 만루홈런을 기록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이강돈은 타율은 .295로 3할에 미치지 못했지만 137개의 안타로 리그 최다 안타를 기록하며 2년 연속 외야수 골든글러브를 수상했다. 이정훈이 어깨 부상으로 51경기 출장에 그쳤지만 이중화와 송일섭이 각각 .295의 타율과 25개의 도루[29], .330의 타율로 그의 자리를 잘 메웠다. 2루에서는 조양근이 20도루로 좋은 활약을 했다. 3루에서는 김성갑이 주전인 가운데 아쉬운 타율을 좋은 선구안으로 만회, 중심타선 앞에 주자로 출루를 많이 했고, 신예 강석천이 뛰어난 타격으로 호시탐탐 주전을 위협했다. 유격수 장종훈은 18홈런으로 리그 전체 홈런 4위에 오르며 활약했고 신인 황대연은 유격수 수비가 다소 불안했던 장종훈의 백업으로 뛰어난 모습을 보였다. 1루는 강정길과 전대영이 든든하게 지켰다. 팀 타율과 팀 OPS, 팀 홈런은 .276과 .757, 97개로 1위였다. 다만 투수력은 나쁘진 않았지만 방어율 3.50으로 태평양과 해태에 밀려 3위였다.
탄탄한 야수와 투수의 뎁스로 인한 뛰어난 투타 밸런스에 힘입어 빙그레는 프로야구의 첫 단일리그 체제에서 120전 71승 46패 3무, 창단 첫 페넌트레이스 1위[30]와 첫 6할 승률을 달성했고, 2위 해태와는 5.5경기의 차이를 보였다. 상대전적이 가장 강했던 MBC 청룡을 상대로는 16승1무3패로 압도했다.
그러나 이 해 PO 일정이 좀 묘했는데, KBO가 짜 놓은 PO 일정은 10월 14일부터 10월 21일까지였고, 한국시리즈는 10월 26일부터 11월 3일까지였다. 즉, PO가 5차전까지 가도 PO 승자는 5일을 쉬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1위팀은 경기 감각적인 면에서 불리할 수 있었다. 과거와 다른 단일시즌의 특성을 고려하지 않은 것인데, 이 때문에 해태는 2위로 올라가 경기 경험을 쌓고 한국시리즈에 임하면 불리하지 않다고 자신하고 있었다. 마침 PO 상대도 돌풍을 일으키며 올라온 태평양 돌핀스였고, 태평양은 이미 준PO에서 삼성과의 혈투 속에 그 해 19승을 거둔 박정현이 부상으로 이탈하는 등 투수진을 소모한 상황이었다. 해태는 가볍게 태평양을 3:0으로 스윕하며 올라갔지만, 그 속에서 타선이 생각보다 터지지 않는 것은 걱정거리였다. 반대로 빙그레는 껄끄러운 해태가 올라왔고, 경기 감각이 걱정되었지만 그래도 그 해 가장 강력했음은 누구도 부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 우려했던 경기 감각이 시리즈 내내 빙그레의 발목을 잡고 말았다.
10월 26일 홈에서 열린 1차전에서 원투펀치 중 하나인 이상군을 내보낸 가운데 이강돈이 선동열을 상대로 홈런을 기록하며 4:0 승리로 기분좋게 시작하며 이번에는 작년의 준우승을 설욕하는 듯 했다. 다음날 해태는 조계현, 빙그레는 한용덕이 선발로 등판했는데 빙그레는 1회초 선제 실점 이후 1회말 단숨에 4점을 내며 1:4로 역전했다. 2회초 해태에 1점을 허용했고 3회초에도 1사 만루를 허용했으나 백인호의 타구는 유격수 방면으로 이지땅볼 병살타구가 되어 위기를 넘기는듯 했으나... 유격수 장종훈이 알을 까고 말았다. 이 통한의 알까기로 그대로 동점을 허용했고, 이어지는 찬스에서 희생플라이가 나오며 간단히 역전당하고 말았다. 결국 2차전은 장종훈의 실책으로 분위기가 완전히 급락하며 신동수-이강철을 공략하지 못하고 6:4로 져 시리즈의 전체 승기를 잡을 수 있었던 경기를 어이없게 날리고 말았다. 10월 29일 광주에서의 3차전은 에이스 한희민을 등판시켰으나 지난해 한국시리즈 MVP 문희수에게 7이닝 무실점으로 끌려가고 8회 주루사와 9회초 마무리 선동열 상대 무사 2,3루의 절호의 찬스를 놓치며 2:0으로 패해 시리즈 전적에서 1승2패로 역전당했다.
다급해진 빙그레는 다음날 4차전에서 1차전의 영웅 이상군을 3일만 휴식시킨 상황에서 선발로 내세웠지만 무리수였고 결국 김정수가 등판한 해태에 홈런 4방(한대화, 이순철, 김성한2)을 얻어맞고 6:2로 패해 1승3패가 되어 벼랑 끝에 몰렸다. 5차전에서 한희민이 나왔지만 한희민은 시리즈 도중 부상으로 제 컨디션이 아니었고 3회까지 백인호에게 2루타와 스퀴즈 번트를 허용하며 4:1로 끌려갔다. 4회말 빙그레가 찬스를 잡자 해태는 끝판왕 선동열을 등판시켰고 결국 5:1로 패하며 빙그레는 한국시리즈를 1승4패로 마치며 2년 연속 준우승을 기록하여 해태의 한국시리즈 4연패의 제물이 되었다.[31]
4.3. 1990년
1990년 신인지명회의에서 1차지명으로 지명할 수 있는 선수가 3명에서 2명으로 줄어든 가운데 빙그레는 북일고 투수 김성한과 동국대 내야수 지화동을 지명했다. 2차지명에서 드래프트 풀이 굉장히 나빴던 가운데 1라운드에서 진상봉만 들어오게 되었다. 손문곤과 조용호는 신생팀인 쌍방울로 떠났다.전년도 유일한 6할 승률을 기록한 페넌트레이스 우승팀답게 이 해 페넌트레이스도 상당기간 선두를 지켰다. 한국시리즈 4연속 우승팀 해태가 이전보다 다소 부진한 출발을 보냈고 줄곧 5할 승률 근처에 머물러있던 반면 빙그레는 개막 4연승으로 초반부터 선두로 치고 나갔다. 6월초 꼴찌까지 내려갔던 LG 트윈스가 1달 간 파죽지세의 상승세로 빙그레로부터 선두자리까지 빼앗고 빙그레는 삼성에도 2위 자리를 내주며 3위가 되었으나 7월 20~22일 더블헤더 포함 대전구장에서의 LG와의 4연전에서 모두 싹쓸이하며 LG에게 대전구장 19연패[32]라는 악몽을 안기고 선두를 탈환했다. 8월에는 삼성에게 잠시 선두자리를 빼앗기기도 했으나 삼성이 LG, 해태와의 경기에서 주춤하면서 선두를 탈환했다. 잔여경기가 불과 18경기만 남은 1990년 9월 6일 시점에서 빙그레는 14경기만 남은 2위 LG에 4경기차, 15경기 남은 3위 삼성에 5.5경기차, 20경기 남은 해태에 7.5경기차로 빙그레의 2년 연속 페넌트레이스 우승은 대부분 기정사실화하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난데없이 언론을 통해 김영덕 종신감독 계약설이 불거지면서 팀 분위기가 급격하게 어수선해졌다. 종신계약설로 인해 김영덕 감독과 강병철 수석코치와 사이가 벌어져 시즌 종료 후 강병철은 롯데 자이언츠의 감독으로 떠나게 되었다.[33] 9월 7~9일 LG에게 1승2패를 기록하며 3경기차로 좁혀졌고, 삼성에게도 1승2패를 기록한 사이 LG가 태평양에 스윕하며 12경기 남은 9월 13일 시점에서 빙그레는 LG에 1경기차까지 좁혀지게 되었다. 9월 14~17일 LG가 휴식일을 가진 사이 해태와의 홈 4연전이 페넌트레이스 우승의 최대 분수령이었는데 여기서 4경기를 모두 패하게 되며 LG에 1위 자리를 내주고 도리어 3위 해태에도 1경기차로 쫓기는 2위로 추락했다.[34] 9월 18~20일 태평양과의 4연전에서 첫날 더블헤더 2연승에도 불구하고 2연패해 2승2패에 그치며 삼성에 1승2패를 기록한 LG를 넘어 선두를 탈환하는데 실패했고 9월 21일 삼성전에서는 3:5로 패하며 삼성에게 순위를 뒤집혀 4위까지 추락하기에 이른다. 9월 22일 삼성전에서 4:2로 이겨 3위를 탈환하고 선두 해태를 반 경기차로 추격했지만 해태가 6경기 남은 가운데 빙그레는 잔여 2경기만 남아 페넌트레이스 우승 가능성은 희박해졌다. 9월 23일에도 삼성을 8:1로 이겼지만 1경기 남은 가운데 선두를 탈환한 LG에 반경기차로 뒤쳐졌다.
결국 9월 28일 최종전인 태평양전에서 0:4로 패했고 결국 페넌트레이스를 68승 2무 50패 승률 .575로 3위로 마감했다. 어수선한 가운데 치른 삼성과의 준플레이오프에서는 1차전 홈에서 이만수에게 7회 결승홈런을 허용하며 2:0으로 패배, 대구에서 열린 2차전은 한용덕을 이어 마무리로 나온 한희민이 9회말 김용철에게 동점홈런, 이만수에게 끝내기 홈런을 허용하며 4:5 패배 허무하게 2전 전패로 포스트시즌에서 광탈하고 말았다. [35]
지난해 유격수 골든글러브를 받았던 장종훈은 더 성장하며 28홈런으로 아직까지 깨지지 않은 유격수 홈런왕에 올랐고, 91타점으로 단일 시즌 최다 타점 기록을 세우며 타점왕에 올랐다. 그리고 .545의 장타율로 장타율 1위를 기록하며 타격 3관왕(홈런, 타점, 장타율)이 되었다.[36] 2년 연속 유격수 골든글러브는 당연지사. 2년 연속 외야수 골든글러브의 주인공이던 이강돈은 146안타와 81득점으로 안타 1위(2년 연속), 득점 1위가 되었고, 한대화, 노찬엽과 마지막까지 타격왕 경쟁을 했으나 해태의 최종전에서 5타수 4안타를 기록한 한대화에게 0.00007의 차이로 타격왕을 내줬다. 그래도 3년 연속 외야수 골든글러브를 수상하는데 모자람이 없었다. 지난해 부상으로 부진했던 이정훈은 117안타와 22도루로 살아나며 2년 만에 외야수 부문 골든글러브를 수상했다. 지난해까지 김성갑의 백업이었던 강석천은 데뷔 첫 100안타와 함께 태평양전에서 팀의 2호 사이클링 히트를 쳤고 16개의 도루와 24개의 2루타(리그 전체 2위)를 기록하며 맹활약했다. 주전 포수가 유승안에서 김상국으로 넘어가는 시점이었는데 포수와 지명타자를 오간 유승안은 14홈런으로 마지막 불꽃을 장식했고, 주전포수 자리를 차지한 김상국은 커리어 최고였던 .287의 타율과 함께 10개의 홈런, 8할대의 OPS로 타격에서도 좋은 활약을 보였다. 하지만 지난해 타격왕 고원부는 .253으로 부진한 시즌을 보냈다.
창단 이후 굳건한 에이스로 활약했던 이상군은 많은 이닝을 소화하며 혹사당한 여파로 이해 6승에 그치며 부진했다.[37] 그와 원투펀치 파트너였던 한희민이 방어율이 4점대로 상승했지만 12승과 157이닝으로 여전히 선발의 한 축을 맡아주고 있는 가운데 배팅볼 투수에서 정식 선수 전환 이후 2년간 2승-2승을 기록했던 한용덕이 팀내 최다승인 13승, 최다이닝인 171이닝을 소화하며 에이스로 성장했다. 개인 첫 100탈삼진도 달성하며 전성기의 신호탄이 되었다. 입단 2년차인 송진우는 마무리 투수 역할에 주력하며 방어율 1.82(2위)에 11승 7패 27세이브를 기록, 구원(구원승+세이브 수 기준) 부문 1위를 차지하며 빼어난 활약을 펼쳤다. 김대중 대통령(당시 총재)과 한자까지 이름이 똑같았던 동명이인인 김대중[38]은 커리어 유일한 10승을 기록하며 마운드의 한 축을 맡아줬다. 이해 선발진은 한용덕, 한희민, 김대중, 이상군으로 주로 꾸려지고 그 뒤에는 선발진인 김홍명과 김락기 등이 뒤를 이었고, 계투진은 이동석-장정순으로 나름 입지를 다졌다. 한편 대어급 신인으로 각광을 받은바 있던 이효봉은 부상으로 인해 7경기 출장에 4점대 방어율에 그치며 입단 1년 만에 유니폼을 벗었다.
4.4. 1991년
종신감독 파문 이후 김영덕 감독과 불화가 있었던 강병철 수석코치가 롯데 자이언츠 감독으로 돌아갔고, 주로 수비코치를 맡았던 이희수가 수석코치로 이동했다.1차 지명으로 유승안의 은퇴를 대비하여 포수 유망주였던 북일고의 양용모를 뽑았고, 2차 지명에서는 1라운드 김인권, 2라운드에서는 임주택을 뽑았다. 한편 강석천의 성장으로 주전에서 다소 밀린 김성갑은 태평양 돌핀스로 현금 트레이드로 이적했다.
지난해 홈런왕 장종훈은 유격수에서 1루수로 포지션 변경을 했고 타격은 더욱 폭발하며 지명타자 골든글러브와 함께 타격 5관왕에 올랐다.[39] 또한 21개의 도루를 기록하며 이글스 프랜차이즈 역사상 처음이자 1989년 해태 김성한에 이어 프로야구 사상 2번째 20-20 클럽에 가입했다. 이 때의 활약으로 이승엽의 등장 전까지 홈런타자는 장종훈이라는 인식이 박히게 되었다. 이정훈은 타율 .348의 타율로 타격왕과 외야수 골든글러브를 수상했으나 경쟁자였던 롯데 장효조를 방해하기 위해 추악한 고의사구를 내줘 김영덕 감독은 거센 비판을 받았다.[40] 고원부가 김영덕 감독과의 불화로 출장 기회가 줄어든 가운데 주전 중견수로 출장한 이중화는 커리어 첫 3할 타율과 20도루로 커리어하이 시즌을 보냈다. 장종훈과 함께 1루수와 지명타자를 오간 강정길은 커리어 첫 두자리수 홈런(13개)과 2할 8푼대 타율, 5할대 장타율로 커리어하이를 썼다.[41] 당초 장종훈의 백업 유격수였으나 장종훈의 포지션 이동으로 유격수 주전을 차지한 황대연은 16개의 홈런과 8할대 OPS로 맹활약했다. 주전 2루수 전대영은 커리어 첫 3할과(.313) 6년 만의 두 자릿수 홈런(11개)으로 활약했다. 주전 3루수와 주전 포수인 강석천과 김상국도 각각 WAR 3.23과 3.61을 기록, 좋은 모습을 보였다. 다만 지난해 안타 1위를 기록했던 이강돈은 타율 .265로 부진한 시즌을 보냈다.
송진우는 이해 방위병으로 복무하며 184.1이닝 소화와 함께 11승 10패 11세이브 11완투(완봉 1) 방어율 2.78을 기록했고, 지난해 에이스로 부상한 한용덕은 방어율 2.23을 기록하고 12번의 완투(완봉 4)와 함께 팀내 승리 1위인 17승을 따내며 에이스의 모습을 유지했다. 지난해까지 주로 계투진에 있던 장정순은 선발 로테를 돌며 10승 7패와 2점대 방어율(2.95)을 기록했고, 그외엔 잠수함 듀오 한희민-김대중이 8승, 진정필이 4승을 올렸다. 이해 신인이었던 김인권은 선발과 불펜을 오가며 143.1이닝을 소화했고 방어율 2.95에 8승이라는 준수한 성적을 기록했으나 이해 당한 혹사로 인해 이 해를 마지막으로 좋은 모습을 보이지 못하다가 3년 만에 방출당했다. 원년 에이스 이상군은 혹사 여파로 11점대 방어율에 37.2이닝에 그치며 부진했다.
개막전 상대는 신생팀 쌍방울 레이더스였다. 송진우를 내세운 빙그레의 손쉬운 승리가 예상되었으나 의외로 쌍방울에 11대0으로 대패하며 창단 첫 승리의 제물이 되고 말았고 위닝시리즈까지 헌납했다. 그리고 지난해 꼴찌팀과 6위팀이던 OB전과 롯데전까지 연속 스윕패를 기록하며 8연패 수모를 겪었고 개막 후 10경기에서 1승9패라는 저조한 성적으로 충격의 최하위로 추락했다.
하지만 다이너마이트 타선과 함께 재정비에 성공하며 4연승과 6연승을 연달아 기록하며 5할승률을 회복, 상위권으로 도약했고 삼성과 함께 2,3위를 다투면서 2위와 8~9경기차로 앞서있었던 해태가 8월 들어 잠시 주춤한 사이 3경기차까지 추격에 성공했다. 하지만 해태가 다시금 연승에 성공하며 승차가 다시 벌어졌고 삼성이 부진하며 72승5무49패 승률 .591, 해태에 7경기 차이의 2위로 플레이오프에 진출했다. [42] 1년 전 준플레이오프 상대였던 삼성이 준플레이오프에서 롯데를 꺾으며 1년 만에 재회했다.
플레이오프에서 1,2차전 한용덕의 완봉승과 연장 10회 김상국의 끝내기 희생플라이로 2승을 거두며 유리한 고지를 점했고, 3차전 김성길이 역투한 삼성에 1패를 허용했지만 4차전에서 7회에만 8득점으로 다이너마이트 타선이 폭발하며 10:3 승리를 거둬 3승1패로 2년 만에 한국시리즈에 복귀했다. 이번에도 상대는 지난 두 번의 아픔을 안겼던 해태였다. 빙그레의 다이너마이트 타선은 분명 강력했지만 한희민과 이상군이 하향세에 들어서 한용덕과 송진우가 버티는 모양새라 마운드의 높이는 확실히 해태보다 약했다. 게다가 플레이오프에서도 생각보다 시원한 경기를 펼치지 못했기 때문에 해태의 우세가 예상되었다.
광주에서 열린 한국시리즈 1차전에서 에이스 한용덕을 선동열에 붙이지 않기 위해 한희민을 선발투수로 내보냈는데 선동열에게 4점을 뽑으며 끈질기게 괴롭혔지만 마운드의 약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4:9로 졌다. 그리고 정작 에이스 한용덕을 내보낸 2차전에서는 해태 선발 김정수를 공략해 2점을 뽑고 일찍 강판시켰지만 후속 투수인 이강철을 전혀 공략하지 못했고 3회말 한용덕이 이건열에게 동점 홈런을 허용해 2:2가 된 뒤 5회말 2사에서 한용덕이 이건열에게 백투백 역전 홈런을 맞고 뒤이어 올라온 김인권까지 난타당하며 6실점으로 빅이닝을 허용해 2:11로 완패했다. 홈에서 열린 3차전 2회말 1점으로 1:0으로 이기고 있었고 송진우가 8회 2사까지 퍼펙트를 기록하고 있었지만 퍼펙트-노히트노런-완봉이 차례로 깨진 끝에 결국 장채근에게 역전 2타점 2루타, 윤재호에게 3루타를 허용했고 뒤이어 올라온 장정순도 이건열에게 쐐기 적시타까지 내주며 4:1 역전패로 시리즈 전적 3전 3패가 되었다. 4차전에서는 이틀 쉰 한용덕을 선발등판시켜 7회까지 2:0으로 앞섰고 8회초 3:2 역전 허용 뒤 8회말 강석천의 홈런으로 경기를 3:4로 재역전시켜 드디어 시리즈 1승이라도 챙기는 듯 했으나 구원으로 나온 한희민이 장채근에게 동점 적시타를 허용하고 3루수 실책에 이순철에게 결승타를 내주며 5:4로 역전패했고 결국 시리즈 4전 전패로 안방에서 해태의 우승을 지켜보는 치욕을 겪게 되었다.
4.5. 1992년
1차 지명으로 아마야구 최대어였던 북일고-동아대의 투수 지연규를 선택했다. 92학번 팜은 황금세대로 불렸는데 김영덕 감독은 공주고의 박찬호와 대전고의 정민철을 꼭 잡길 원했으나 박찬호는 한양대 진학을 선택했고 정민철이 고졸 자유계약으로 빙그레에 입단했다. 2차지명은 죄다 망픽이었다. 유망주 김일혁은 소리소문없이 사라졌고, 2차 1순위로 지명된 지연규와 같이 동아대에서 뛰던 투수 김재성도 좋은 활약을 보여주지 못하고 은퇴한다. 유승안은 은퇴했고 고원부는 현금트레이드로 OB 베어스로 이적했다.3번이나 한국시리즈 우승에 도전했으나 실패했던 빙그레는 더 강해졌다. 고졸신인 정민철이 들어와 마운드에 큰 힘을 보탰고, 지난해 부진했던 이강돈도 부활했다. 그리고 91년에 타격 5관왕을 차지했던 장종훈은 .299라는 타율로 타율이 약간 떨어졌지만, 지난해 자신이 세운 신기록인 35개의 홈런을 뛰어넘어 41개의 홈런[43]을 때려내면서 프로야구 첫 40홈런 시대를 열었다. 타점 역시 지난해의 114개를 뛰어넘은 119개의 타점으로 신기록.[44] 득점도 104개를 넘어 106득점으로 최다득점 신기록을 세웠다. 지난해 .348의 타율로 타격왕을 차지했던 이정훈은 이해에도 .360의 고타율로 2위인 롯데 박정태의 .335를 넉넉하게 따돌리며 통산 2번째이자 2년 연속 타격왕 타이틀을 지켰다. 또한 25홈런에 21도루로 지난해 장종훈에 이어 프로야구 역대 3번째이자 팀 역대 2번째 20-20 클럽에 가입했다. 이강돈은 129안타와 .320의 타율로 전년도의 부진을 씻었다. 강정길은 타율이 .263에 그쳤지만 14홈런 63타점으로 한방 능력을 보여주며 장종훈의 뒤를 받혔다.
투수진도 훌륭했다. 송진우는 막판까지 이강철과 다승왕 경쟁을 벌이다 19승으로 다승왕[45]에 올랐으며, 17세이브를 곁들여 36세이브포인트로 구원왕까지 석권했다. 고졸신인 정민철은 195.2이닝을 던지면서 2.48이라는 수준급 평균자책점을 기록. 14승으로 팀의 또다른 기둥이 되었다. 지난해 프로 첫 10승을 거뒀던 장정순은 14승을 거두었다. 90년 13승, 91년 17승으로 팀의 에이스 자리를 차지했던 한용덕은 186.1이닝을 소화하며 2.99라는 좋은 방어율을 보여줬으나 승운이 매우 나빠 9승 11패를 기록했다. 원년에이스 이상군은 2년 간의 부진을 딛고 전천후로 출격하며 10승을 기록해 재기에 성공했다. 이들의 활약에 힘입어 빙그레는 3.68의 팀방어율로 8개구단 중 유일한 3점대 팀방어율을 기록했다. 유일한 아쉬움은 또다른 원년에이스 한희민이 2승에 그친 것 정도였다.
개막 후 40경기에서 빙그레는 팀 역사상 최다 연승인 14연승을 기록하며 32승1무7패로 승률 8할이 넘는 압도적인 성적을 기록했다. 하지만 해태에 한때 상대전적 3승12패로 밀리고 두 달 가량 주춤하며 해태와 롯데의 추격을 허용했고 해태를 상대로 한때 선두 자리까지 내주기도 했다.[46] 하지만 선동열의 어깨 건초염 부상으로 투수진 뎁스가 얇아진 해태는 추격에 힘이 부치기 시작했고 롯데 역시 무리하게 순위경쟁에 나서기보다는 포스트시즌에 대비하려는 모습을 보였다. 빙그레는 8월을 기점으로 시즌 초반의 페이스를 되찾으며 이글스 역대 최다승, 최다승률인 81승2무43패 승률 .651로 2위 해태에 10.5경기가 앞선 압도적인 1위로 페넌트레이스를 마쳤다. 3위였던 롯데가 준PO와 PO에서 삼성과 해태를 격파하며 빙그레의 한국시리즈 상대가 되었다.
정규리그에서 6승12패로 열세에 있던 해태가 탈락하고 13승5패로 압도적 우위에 있던 롯데가 체력을 소모하면서 한국시리즈에 오르자 대부분의 사람들은 빙그레의 우승을 예측했다. 롯데가 17승의 고졸신인 염종석과 또다른 17승 투수 윤학길을 앞세웠다고 하지만 19승의 송진우, 14승의 정민철과 장정순, 10승의 이상군, 9승의 한용덕으로 이어지던 빙그레의 마운드보다는 약했으며, 타선에서도 롯데가 남두오성으로 불리는 5명의 3할타자, 즉 전준호, 김응국, 박정태, 김민호, 이종운을 앞세워 팀타율 0.288의 고타율을 기록했지만, 역시 수위타자 이정훈을 비롯해 이강돈, 홈런왕 및 타점왕 장종훈, 강정길 등으로 이어지는 빙그레의 다이너마이트 타선과 비교해 볼때도 약간 열세였다. [47] 다만 빙그레는 126경기에서 실책을 132개나 기록한[48] 부실한 수비가 약점으로 지적되었고 이는 한국시리즈 향방에 결정적으로 작용하고 말았다.
1차전에서 에이스 송진우를 내보내며 플레이오프의 역적이었던 박동희가 나온[49] 롯데에 기선제압을 시도했다. 그러나 1회초부터 송진우가 번트 수비 상황에서 주루 방해 판정을 받으며 흔들리기 시작해 무사 1,2루에서 폭투와 김민호에게 적시타를 얻어맞으며 끌려갔고 3회초 4실점, 6회엔 이종운에게 쐐기 2점 홈런을 맞으며 막판 맹추격에도 8:6으로 패하고 말았다. 2차전도 롯데는 윤형배를 내세워 버리는 게임으로 운영했고 빙그레는 고졸 에이스 정민철을 내세웠는데 이 경기도 예상외로 8회까지 0:0의 투수전으로 전개되다가 9회초 송진우가 4연속 피안타로 난타당하고 한용덕이 분식을 저지르며 3실점했고 9회말 1사 1,3루에서 올라온 윤학길을 공략해 2점을 쫓아갔으나 결국 2:3으로 패해 송진우는 2패를 기록하고 시리즈 전적 2전 2패로 몰리게 되었다. 사직구장에서 열린 3차전에서 3:3 동점 상황에서 송진우가 역전타를 허용해 3패 위기에 몰렸지만 9회초 완투승을 눈앞에 두었던 윤학길에게 지화동이 동점 적시타, 임주택이 내야안타로 결승타를 만들어내며 5:4 역전승에 성공해 시리즈 1승을 거뒀다. 고졸 루키 정민철과 염종석이 맞대결했던 4차전은 0:5로 끌려가던 경기에서 6회초 염종석에게 3점을 뽑아 3:5로 추격했으나 염종석을 구원등판한 박동희에게 틀어막히다 8회말 1점을 더 실점했고 9회 2점을 득점했으나 끝내 동점은 만들지 못하고 5:6 1점차 패배로 시리즈 전적 1승3패가 되었다. 잠실에서 열린 5차전은 1회초와 3회초 롯데에게 2점씩 내주며 4:0으로 끌려갔고 승부처라고 판단한 롯데 강병철 감독은 4회부터 1, 4차전에서 활약한 박동희를 구원등판시켜 빙그레의 타선을 2점으로 차단했다. 결국 빙그레는 롯데와의 한국시리즈에서 허무하게 1승4패로 물러나고 말았다.
시즌 내내 위엄을 보였던 다이너마이트 타선은 홈런 하나도 기록 못한 채 침묵하고, 에이스 송진우는 분전했으나 김영덕 감독의 무리한 기용이 겹쳐 부진했으며, 그 대신 팀의 유일한 약점이던 불안한 수비가 발목을 잡았다. 결국 이때 우승을 하지 못한 후 이정훈, 장종훈, 이강돈, 강정길 등 주축 멤버들의 전성기도 끝남과 동시에 빙그레의 리즈 시절도 끝나고 말았다.
5. 1993 시즌
5.1. 1993년
신인드래프트에서 1차지명으로 대전고-한양대를 나온 특급 좌투수 구대성을 뽑았다. 2차지명으로는 허준, 지화선, 이민호 등을 뽑았다. 그 외에는 공주고 출신의 투수 노장진이 원광대학교 합숙훈련 중 뛰쳐나와 빙그레 이글스에 계약금 4천만원에 입단했다. 조양근은 LG 트윈스의 투수 이국성을 상대로 트레이드되었다. 원년 에이스 한희민은 송진우 밀어주기와 관련된 구단과의 마찰로 삼성 박철희와 트레이드되어 이글스를 떠났고 김대중과 김홍명은 은퇴했다.1992년 우승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치자 빙그레는 1993년 주축 선수들의 노쇠화와 부상 문제를 겪으며 결국 몰락하게 된다. 시즌 전부터 이정훈과 장종훈은 동계훈련에서 각각 발목 부상과 무릎 부상을 당했고 이정훈은 부상에 신음하며 단 41경기 출장에 그쳤고 장종훈도 시즌 중 잔부상에 시달리며 투고타저를 감안하더라도 이름값에 걸맞지 않는 17개라는 저조한 홈런 기록으로 마쳤다. 강석천은 부상 여파로 76경기만 출전해 .249의 타율에 9홈런에 그치며 부진했다. 이강돈은 타율 .233으로 커리어로우를 찍었다. 다이너마이트 타선의 구성원이었던 김상국과 강정길은 각각 1할대 타율과 6홈런에 그치며 부진했고 팀컬러였던 다이너마이트 타선은 물타선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50]
투수쪽에서는 방위병이었던 정민철이 13승 3패의 방어율 2.24의 빼어난 피칭을 보였고 한용덕이 2.98의 방어율에 10승을 거뒀고, 이상군도 승수는 7승으로 적었지만 2.52라는 좋은 방어율을 보였다. 하지만 지난해 선발과 구원을 오가며 혹사당한 송진우는 72.2이닝 7승 7패 8세이브에 3점대 방어율로 어중간한 시즌을 보냈다. 특급 신인이라던 구대성은 아마야구에서의 혹사여파로 6경기에만 출장해 별다른 도움이 되지 않았다. 투수난에 시달린 빙그레는 삼성 이상목을 상대로 백업포수 박선일을 내주는 트레이드를 했다.
비마저 독수리를 버리는가비로 인한 불운도 심했는데 태평양과의 개막전에서 장종훈의 홈런으로 경기에서 앞서나갔으나 우천 노게임을 당하며 불운이 시작됐고 이후 LG와 OB전에서 앞서던 경기를 우취당한 뒤 더블헤더 편성 경기에서 패배하기도 했다. 7월 13일 잠실 OB 원정경기는 일기예보를 통해 서울에 비가 거세게 내린다는 소식을 듣고 대전에 머물러있다가 경기를 개시한다는 소식에 부랴부랴 짐을 꾸려 경기 시작 30분 전 겨우 도착했고 결국 OB의 에이스 김상진에게 완봉승을 헌납하며 0대1 영봉패를 당했다. 그 다음날에는 4:2로 이기던 경기에서 우천 노게임이 되었으며 15일 더블헤더에서는 결국 두 경기 모두 패배해 OB와의 잠실 3연전에서 스윕패를 당했다.#1 #2 6월 2일에는 대전구장에 비바람이 몰아쳐 조명탑이 기우는 바람에 두 달 동안 청주에서만 홈경기를 했는데 이 때문에 방위병이었던 정민철이 청주 홈경기에 출전할 수가 없었다. 휴가를 얻어야만 갈 수 있는 '가깝고도 먼 홈구장'이 되었다. 빙그레 입장에서는 원수같은 비가 아닐 수 없었다.
8월 승패마진 -15까지 추락하였으나 9월 한 달동안 무서운 뒷심을 발휘하여 기어이 최종전에 승패마진을 0으로 맞추는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6월~8월 중순까지 워낙 부진했기 때문에 순위를 뒤집기는 어려웠고, 결국 4위 LG와 4.5게임 차 5위로 시즌을 마감하였다. 6년만에 포스트시즌 진출이 좌절되고 말았다.[51]
그러나 몰락했어도 5할 승률은 고수하였으며,[52] 이글스는 88~94까지 7년 연속 5할 승률 이상을 달성하게 된다. 이후 이글스는 1994년부터 한화 이글스로 이름을 바꾸었는데 1999년 한국시리즈 우승의 주역인 1996년 신인 4인방이 등장 때까지 이렇다 할 선수를 배출해내지 못했다.
그리고 몰락과 동시에 모기업인 한화그룹이 2세 오너 체제로 재편되면서 상속 분쟁으로 인해 빙그레가 한화그룹에서 이탈하여 자연스럽게 야구단 운영에서 손을 떼게 되었고 형제간의 재산분할로 인해 그룹인 한화는 장남 김승연에게, 빙그레는 차남 김호연에게, 그리고 제일화재(現 한화손해보험)는 장녀 김영혜 쪽으로 넘어가게 된다. 사실 2세 오너의 경영은 1980년대부터 이미 하고 있었다. 창업주 김종희 회장이 1981년에 갑작스럽게 타계했었기 때문이다. 이 시기의 재편은 그룹 구조의 재편이었다.
이후 1993년 11월 1일부로 한화 이글스로 구단명이 변경되어 1994년 시즌부터 한화 이글스라는 이름으로 리그에 참가하게 된다. 프로야구 첫 700승을 달성하며 유종의 미를 거둔 김영덕 감독은 현장에서 물러나 은퇴했고,[53] 후임 감독으로 강병철 감독을 선임하면서 새롭게 출발하였다.
이후 모든 역사에 대해서는 한화 이글스쪽을 참고할 것.
6. 마스코트
파일:빙그레 이글스 마스코트.jpg |
1991년 한국시리즈를 앞두고 출시된 빙그레 이글스 전화카드[54] |
7. 광고 출연
김영덕, 유승안 , 이강돈, 이상군, 한희민이 한양화학 골드륨 CF에 출연했다.8. 빙그레 이글스 역대 성적
우승 | |
| 준우승 |
포스트시즌 진출 | |
포스트시즌 진출 실패 |
연도 | 정규시즌 순위 | 최종 순위 | 구단명 | 경기수 | 승 | 무 | 패 | 승률 |
1986 | 7위/7팀[55] | <colbgcolor=#0066b3> 7위 | 빙그레 이글스 | 108 | 31 | 1 | 76 | 0.290 |
1987 | 6위/7팀[56] | 6위 | 108 | 47 | 4 | 57 | 0.454 | |
1988 | 2위/7팀[57] | 준우승 | 108 | 62 | 1 | 45 | 0.579 | |
1989 | 1위/7팀 | 준우승 | 120 | 71 | 3 | 46 | 0.604 | |
1990 | 3위/7팀 | 3위 | 120 | 68 | 2 | 50 | 0.575 | |
1991 | 2위/8팀 | 준우승 | 126 | 72 | 5 | 49 | 0.591 | |
1992 | 1위/8팀 | 준우승 | 126 | 81 | 2 | 43 | 0.651 | |
1993 | 5위/8팀 | 5위 | 126 | 61 | 4 | 61 | 0.500 | |
이후 역사는 한화 이글스로 |
[1] 창단 당시부터 구단의 소유주는 한국화약그룹이었고 빙그레 역시 이 때는 한국화약그룹의 계열사였다. 옛 빙그레 유니폼에 '화약가족'이라는 패치가 붙은 것이 그 증거. 빙그레가 구단 명칭으로 등장한 이유는 아래 소개 부분에 서술돼있다. 공교롭게도 구단 명칭이 바뀐 시점에 모기업 명칭도 한국화약의 줄임말인 한화로 바뀌었다.[2] 제2홈구장.[3] 출처 : 한화 이글스[4] 중앙일보 기자 출신으로 중앙일보 스포츠 담당 기자 중 최고참인 체육부장까지 지낸 인물. 한국체육언론인회 회장을 맡을 만큼 스포츠 담당 기자 중에서는 가장 큰 어른으로 꼽힌다. 1982년 삼성 라이온즈 창단 당시 부단장으로 부임했고 훗날 삼성 라이온즈 단장을 역임했다. 그리고 빙그레 이글스 창단 준비 과정에서 빙그레 초대 단장으로 부임했고 여러모로 유명한게 선수들 중 이정훈, 이강돈을 영입하며 또한 삼미와 청보에서 뛰던 장명부를 영입을 하는 등 선수보는 것도 탁월했다. 팀 명칭이 한화 이글스로 바뀌기 전까지 단장을 맡았다. 단장직에서 물러난 뒤에는 한국스포츠TV의 야구 해설위원으로 활동했다.[5] 출처 : 스포츠서울[6] 김종희 창업주와 김승연 회장이 나란히 천안 출신으로 북일고등학교 야구부를 운영하여 충남야구 발전에 기여했다는 점을 내세웠다.[7] 과거 대한통운 야구단을 이끈 경험, 프로야구 초창기 '파랑새존' 스폰서십을 진행한 점, 대전 출신 최원석 회장이 탁구 등 스포츠에 많은 투자를 한 것을 내세웠다.[8] 야구회관을 건립하기 위한 목적이다.[9] 사실 30억원이라는 현금 납부가 부담스러워서 토지 매입과 계열 건설사를 통한 현물 납부를 택했지만 서울 강남구 도곡동 땅값이 크게 오르며 30억원보다 훨씬 상회하는 가입비를 낸 셈이 되고 말았다.[10] 두산그룹이 프로야구단 창단 당시 OB맥주의 인지도를 활용과 홍보를 위해 구단 명칭을 OB 베어스로 했던 것과 같은 이치다.[11] 처남이 있는 미국으로 이민가려던 차에 빙그레 감독으로 선임이 되어 결국 부인과 아들만 미국으로 보내고 기러기 아빠가 되었다.[12] 현 KBO리그 비디오판독센터 단장.[13] 입단 당시 연습생이었다.[14] KBO 역대 최저 승률 4위 기록이다. 이보다 더 승률이 낮은 팀은 전설의 82삼미(0.188), IMF로 전력이 없다시피 한 99쌍방울(0.228), 백골퍼의 02롯데(0.265) 뿐이다.[15] 7월 26일에는 MBC 청룡과의 경기에서 판정에 불만을 품고 고의 끝내기 보크를 저지르는 등 감정을 다스리지 못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개막전부터 개인 15연패로 단일시즌 최다연패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이에 근접했던 투수가 2017년 14연패의 kt 돈 로치.[16] 사실 빙그레가 이정훈을 지명할 수 있었던 것은 상당한 천운이자 전략적 행동의 결과였다. 자세한 내막은 이정훈 항목 참조.[17] 같은 기간 동안 한국시리즈 3회 우승팀인 해태 타이거즈보다도 많다.[18] 출처: 한화 이글스[19] 덧붙여서 한국화약그룹의 김승연 회장과 삼성그룹의 이건희 회장의 오너들끼리도 친분이 두텁다는 점 또한 한몫했다.[20] 1988년 포스트시즌은 신생팀이 창단 후 처음으로 나간 포스트시즌 시리즈에서 승리를 거둔 역대 최초 사례였다. 역대 신생팀의 창단 첫 포스트시즌 도전 사례 중 시리즈 승리를 거둔 것은 1988년 빙그레의 플레이오프 승리와 2003년 SK 와이번스의 준플레이오프 승리 뿐이다. 나머지(1996년 쌍방울 PO, 2013년 넥센 준PO, '14년 NC 준PO)는 모두 첫 도전에서 실패했다.[21] MBC 청룡의 역사를 그대로 이어받았은 LG 트윈스가 1990년에 한국시리즈에 진출해 우승까지 차지 했지만 한국야구에서 창단은 순수 창단 말고도 인수 때에도 창단이라고 하는 등 범위가 매우 넓다. 그래서 순수 신생팀이 아니었으므로 LG는 여기에 해당되지 않는다.[22] 또한 SK는 2000년 초에 해체된 쌍방울 레이더스 출신 선수들이 주축이 되어 창단했기 때문에 엄밀히 말해 순수 신생팀이라 보기는 어렵다.[23] 출처 한화 이글스[24] 현재 단일시즌 최다승 기록은 2016년 두산 베어스의 93승이다.[25] 승차만 보면 굉장히 독주했을 것 같지만 실상은 아니었다. 5월까지 14연승에 8할 승률로 우승을 예약하는 듯 했지만 연승 후유증과 함께 두 달 가량 고전하며 해태, 롯데의 추격을 허용, 8월까지는 나름 해태, 롯데와 치열한 경쟁을 펼쳤다. 롯데가 3위가 굳어지자 주축들을 빼고 해태가 막바지 부진하면서 승차가 크게 벌어졌다. 해태전은 한때 상대전적에서 3승 12패까지 밀리기도 했었다.[26] 2000 시드니 올림픽부터 프로야구 선수들이 뛸 수 있었다.[27] 1984년 방수원의 첫 노히트노런 때 포수이기도 했다.[28] 그러나 타격왕 경쟁 과정에서 김영덕 감독이 경기장에서 계산기를 쳐 가면서 타석 출장 여부를 결정하는 '타율 관리'로 인해 언론과 야구팬의 비판을 받기도 했다.[29] 그 중 21연속 도루에 성공했다.[30] 원년 구단을 제외하고, 1군 진입 후 최단기간에 페넌트레이스 1위를 차지한 팀(4시즌만에 기록)이기도 하다. 두 번째로 빠른 기록이 kt wiz의 7시즌.[31] 단일리그 체제 이후 한국시리즈 역사에서 정규시즌 우승팀이 2위팀에게 업셋을 당한 최초의 시리즈였다.[32] 아직까지도 깨지지 않는 특정팀 상대 한 구장 최다연승/연패 기록이다.[33] 원래 강병철 감독은 김영덕 감독과 나름 사이가 좋은 편이었고 1987년 10월 입단 당시 '차기 감독'을 약속하고 강병철 감독을 데려온 김영덕 감독으로서는 자의든 타의든 자신이 감독을 계속할 경우 강코치와의 의리를 저버리는 결과가 되기 때문이었는데 하필 재계약을 앞두고 이런저런 말이 나오자 구단 간부는 김영덕, 강병철과 함께 회장실을 찾았다. 5명이 모인 자리에서 김승연 회장은 “감독 더 하시오”라고 했다. 이 말이 종신감독으로 둔갑했다.[34] 이때 1위 LG에서 4위 삼성까지의 승차는 불과 2.5경기였다.[35] 이때 주전 유격수 장종훈의 부상으로 황대연이 아닌 북일고 이종호가 출장했다.[36] 득점과 사사구에서도 2위였다.[37] 방어율은 3,13으로 준수했으나 부상으로 인해 86.1이닝밖에 먹지 못했다.[38] 이로 인해 광주 무등 야구장에 가면 원정팀 선수임에도 불구하고 해태 홈팬들의 열렬한 환호를 받았다.[39] 장종훈은 한국프로야구 최다안타(160개), 최다홈런(35개), 최초 100타점(114타점), 첫 100득점(104득점)을 기록하며 한국프로야구사를 다시 써내려갔다. KBO 최초의 3할-30홈런-100타점을 기록한 주인공이 됐다. 장타율도 .640으로 1위였다. 출루율은 .450으로 2위였는데 1위는 이정훈과 타격왕 경쟁에 나섰던 롯데의 장효조였다.[40] 김영덕 감독은 삼성 시절에도 이만수의 트리플크라운을 위해 타격왕 경쟁을 펼치던 롯데의 홍문종에게 9연속 고의사구를 내줘 기록을 방해한 바 있다. 또한 한국시리즈 상대를 고르기 위해 고의로 져주면서 빈축을 사기도 했다.[41] 보통 장종훈보다 뒤에 배치되어 장종훈을 넘었다고 안심할 때 한방을 날렸다.[42] 서울의 두 팀인 LG와 OB를 상대로 모두 14승씩 거두며 28승1무7패를 거뒀으나 신생팀인 쌍방울과 중하위권에 그친 태평양에 10승8패에 그친 점이 아쉬웠다. 하지만 이해 해태는 빙그레전 8승3무7패의 근소한 우세를 포함해 전구단 상대로 상대전적 우위를 기록했고 순위경쟁팀이던 삼성에는 14승4패로 압도했다.[43] 1998년 42홈런을 기록한 OB의 타이론 우즈에 의해 경신되었다.[44] 이 기록은 1999년 123타점을 기록한 이승엽에 의해 경신되었다.[45] 해태 이강철과 공동 18승으로 다승 공동 1위였던 상황에서 당초 최종전에서 이강철과 송진우가 맞대결하며 다승 1위를 겨룰 예정이었다. 그런데 최종전 한희민이 멀쩡하게 잘 던지고 있는데 김영덕 감독은 느닷없이 한희민을 강판시키고 송진우를 등판시켜 안전하게 시즌 19승째를 기록하게 최소 다승 공동1위를 확보하게 했다. 이에 해태도 다음날 이강철을 선발등판시켜 공동 다승왕을 노렸으나 장종훈에게 시즌 41호 홈런을 얻어맞고 패전투수가 되어 송진우는 단독 다승왕에 올랐다. 이게 빌미가 되어 시즌 후 투수 골든글러브 자리는 롯데의 염종석에게 돌아갔다.[46] 1992년 6월 12일이다.[47] 특히, 공격면에서 롯데는 팀내 최다 홈런타자가 16개의 홈런을 때린 김민호였을 정도로 장타보다는 연속안타를 위주로 한 기동력 있는 공격을 앞세웠다면 빙그레는 일발 장타를 기대할 수 있는 장종훈 등이 버티고 있어 화력면에서도 우세였다.[48] 주전 유격수 황대연이 군문제로 팀을 이탈했고 이종호와 지화동, 조양근이 2루를 번갈아 맡았다.[49] 롯데의 강병철 감독은 애초 이 경기는 버릴 생각이었다.[50] 이정훈의 부상으로 기회를 잡은 진상봉이 10홈런에 타율 .279를 기록하고, 지화동의 동생 지화선이 .277의 준수한 타율을 보여주기도 했다.[51] 2022년의 NC와 비슷한데, NC 역시 시즌 초반에 부진하였고 후반기 뒷심을 발휘하여 5위 KIA를 추격하였으나 순위를 뒤집지 못한 채 6위로 시즌을 마감하고 만다.[52] 그러나 다른 일면에는 쌍방울과 태평양의 이중 동네북으로 인해 다른 팀들의 승률이 올라간 원인도 있다. 이글스는 이해 쌍방울에게 14승4패를 거두며 완전히 압도했으나, 태평양에게는 8승3무7패로 호각이었다. 중반까진 4위권이었으나 6월 10연패를 찍고 대전구장을 강풍 때문에 쓸 수 없어 방위병 정민철이 청주경기에 출장이 안됐다. 1993년의 빙그레는 짝수개 구단 체제 단일리그에서 승률 5할을 달성하고 포스트시즌 진출에 실패한 첫 사례였다.[53] 이후 야인으로 있다가 잠시 LG 트윈스의 투수 인스트럭터와 2군 감독으로 활동했던 걸 제외하면 사실상 은퇴했다.[54] 참고로 상대팀인 해태 타이거즈 전화카드도 있었다.[55] 전기 7위, 후기 6위[56] 전기 6위, 후기 공동 5위.[57] 전기 2위, 후기 3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