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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고르노카라바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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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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킹스턴, 세인트앤드류, 세인트캐서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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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수엘라 국경지역 20km, 뚜마코 시, 바예델카우카주(칼리 시 제외), 아라우카주, 카우카주, 노르테 데 산탄데르 주, 안티오키아주 일부, 초코주 일부, 카케타주 일부
2024.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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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롬비아 국경지역 40Km 지역
2024.0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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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푸리막 주 : 안다우아이라스, 친체로스 지역
아야쿠초 주 : 라 마르, 우안타 지역
우앙카벨리카 주 : 츄르캄파, 타야카하 지역
쿠스코 주 : 라 콘벤시온 지역
후닌 주 : 사티포, 우안카요, 콘셉시온 지역
2017.2.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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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바논 남부 접경지역을 제외한 전 지역
레바논 전 지역 발령일 : 2023.10.19
레바논 남부 접경지역(4km) 제외일 : 2024.08.07
파일:모로코 국기.svg 모로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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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사하라모래방어벽 동쪽
2024.07.01
파일:모리타니 국기.svg 모리타니
파일:모리타니아 여행경보_2024.07.01.png
누악쇼트, 누아디브, 인시리, 트라르자 및 아다르(우아단까지 일부지역)를 제외한 전 지역
2024년 7월 1일
파일:사우디아라비아 국기.svg 사우디아라비아
파일:사우디아라비아 여행경보_2020.01.25.jpg
사우디-예멘 국경 인근 180km 지역 (슈케이크(Shuqaiq), 아브하(Abha), 카미스 무샤이트(Khamis Mushait)市 포함)
국경 인근 80km 지정일 : 2017.04.21
국경 인근 180km으로 확대 지정일 : 2019.07.03
파일:알제리 국기.svg 알제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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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경지역 (튀니지(테베사, 엘웨드 동부, 오아글라 동부), 리비아(일리지 동부), 니제르ㆍ말리ㆍ모리타니(타만라셋 남부, 아드라르 남서부, 틴두프 남서부))
기존 출국권고 발령일: 2016.07.29
6개주 산악지역(부메르데스, 티지 우주, 베자이아, 지젤, 부아라, 보르즈부아레리즈)에 대한 부분적 해제일: 2024.07.01
파일:이란 국기.svg 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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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스탄발루체스탄 주, 튀르키예ㆍ이라크 국경지역, 페르시아만 연안 3개 주(후제스탄, 부셰르, 호르모즈건(Hormozgan))
2019.12.03
파일:이스라엘 국기.svg 이스라엘-파일:팔레스타인 국기.svg 팔레스타인
파일:이스라엘 여행경보_2023.10.19.jpg
가자지구를 제외한 전 지역
2023.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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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북부 시나이 반도(1단계(다합•샴엘셰이크 지역, 카이로 등 나일강 유역 도시 지역, 마르트루~지중해 유역),2단계(서부 사막, 시나이 반도 남부 일부지역(성캐더린•타바)) 지역 제외), 리비아 국경으로부터 30km까지(국경도시 Salloum을 포함)
2023.08.04
파일:튀니지 국기.svg 튀니지
파일:튀니지 여행경보_2023.03.07.jpg
알제리 접경지역(까세린주 샴비산 일대 포함), 리비아 접경지역 및 크사르 길랜 이남 사막지역 전역
2023.03.07 }}}}}}}}}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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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제르델타 부근 8개 주 (에도/ 아남브라/ 델타/이모/ 아비아/ 바이엘사/ 리버스/ 아콰이봄) 및 아다마와/ 보르노/ 요베/ 바우치/ 카노/ 잠파라/ 플래토/ 나사라와/ 아부자/ 타라바/ 소코토/ 카치나/ 지가와/ 곰베 주
2019.06.13
파일:남수단 국기.svg 남수단
전 지역
2019.12.03
파일:니제르 국기.svg 니제르
전 지역
2023.0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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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지역
2015.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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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보 델가도 주
2019.01.02
파일:베냉 국기.svg 베냉
파일:베냉 여행경보_2022.04.14.jpg
북부 부르키나파소 접경지역 (Pendjari 국립공원 및 W 국립공원)
2019.05.13
파일:부룬디 국기.svg 부룬디
파일:부룬디 여행경보_2020.01.25.jpg
부줌부라市 제외 전 지역
2019.12.03
파일:부르키나파소 국기.svg 부르키나파소
파일:부르키나파소 여행경보_2022.04.13.jpg
와가두구, 보보디울라소 제외 전역
2020.09.15
파일:에리트레아 국기.svg 에리트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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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티오피아·수단·지부티 국경 25km 이내
2023.03.07
파일:에티오피아 국기.svg 에티오피아
파일:에티오피아 여행경보_2023.08.04.jpg
티그라이 주, 소말리 주, 베니샹굴-구무즈 주, 감벨라 주, 오로미아 주 일부 (East Welega, West Welega, Kelam Welega, Guji, Borena 지역), 암하라 주에서 티그라이주 30km 접경지역, 수단&에리트리아, 케냐&남수단 국경 10km 접경지역, 아파르주에서 티그라이주 10km 접경지역
2023.08.04
파일:중앙아프리카 공화국 국기.svg 중앙아프리카공화국
전 지역
2019.02.27
파일:지부티 국기.svg 지부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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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리트레아•에티오피아•소말리아 국경 10km 이내 접경지역
2022.08.22
파일:차드 국기.svg 차드
전 지역
2013.02.20
파일:카메룬 국기.svg 카메룬
파일:카메룬 여행경보_2022.11.29.jpg
노르드 주, 아다모와 주, 북서부 주, 남서부 주, 최북부 주
2022.11.29
파일:케냐 국기.svg 케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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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냐‧소말리아 국경 100km 이내 모든 지역, 나이로비 북부 이스트레이, 가리사
2016.0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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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코트디부아르 여행경보_2022.04.13.jpg
라이베리아ㆍ기니와 국경을 접한 서부 지역 (Denguele주, Montagnes주, Bafing주), 초로고(Tchologo) 및 붕카니(Bounkani) 주(州)
2021.04.23
파일:콩고민주공화국 국기.svg 콩고민주공화국
파일:콩고민주공화국220701발령.jpg
중앙아프리카공화국과의 국경 50km 이내 지역/ 바우엘레주, 오트우엘레주, 이투리주, 북키부주, 남키부주, 마니에마주, 카사이주, 카사이상트랄주, 카사이오리앙탈주/ 舊 탕가니카주 북부 지역 (일부: 루알라바주, 오트로마미주, 오트카탕가주)
기존 출국권고 발령일: 2018.08.27
특별여행주의보 발령일: 2024.0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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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트와라(Mtwara) 주(州)
2020.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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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중앙아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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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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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캅카스 지역 : 체첸, 다게스탄, 세베로오세티야(북오세티아), 카바르디노발카르(카바르티노-발카리야 공화국), 잉귀쉬(잉구세티아), 카라차예보체르케스카야(까라차이-체르케스), 아디게이(아디게야), 로스토프, 벨고로드, 보로네시, 쿠르스크, 브랸스크 주, 오룔 주 일부(샤블르키노, 드미트롭스크, 사스코보, 크로믜, 트로스나 5개 지역)
2023.02.15
파일:타지키스탄 국기.svg 타지키스탄
파일:타지키스탄221101발령.jpg
아프가니스탄 국경 지역
2011.0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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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레스트·고멜 지역 내 우크라이나 국경에서 30km를 제외한 전 지역
2022.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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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고르노-카라바흐 및 인근 7개 지역(아그담(Aghdam), 피줄리(Fizuli), 자브라일(Jabrayil), 장길란(Zanglian), 구바들리(Guabadly), 라친(Lachin), 켈바자르(Kelbajar)), 나흐치반 아르메니아 접경지역
2023.0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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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오세티아, 압하지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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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트로비차 북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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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라트주, 게가쿠니크주, 바요츠조르주, 슈니크주, 타부시주 (아제르바이잔 접경 10km 구간 제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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킬리스, 가지안텝, 샨르우르파, 마르딘, 시르낙, 하카리, 반, 비트리스, 시르트, 바트만, 디야르바크르, 빙골, 툰셀리, 엘라지, 시리아의 국경 10km 이내 지역 (하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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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푸아뉴기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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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던 하일랜즈 주, 헬라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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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September_2020_Nagorno-Karabakh_clashes_RU.png
소련 치하 나고르노카라바흐 자치주의 영역 1994년~2020년 아르메니아 치하 아르차흐 공화국의 영역[1] 2020년 전쟁 이후부터 2023년까지의 영역[2][3]

1. 개요2. 명칭3. 역사
3.1. 고대3.2. 중세·근세3.3. 근대·현대
3.3.1. 러시아 제국 치하3.3.2. 러시아 혁명 및 러시아 내전기3.3.3. 소련 치하3.3.4. 소련 해체와 1차 전쟁3.3.5. 2차 전쟁과 영토 분할3.3.6. 공세와 아제르바이잔으로의 통합
4. 기타5. 참고문헌

1. 개요

【언어별 명칭】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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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ccccc,#1f2023> 아르메니아어 / 아제르바이잔어 Լեռնային Ղարաբաղ[4] / Dağlıq Qarabağ[5]
레르나인 가라바그 / 다글르그 가라바그
페르시아어 ناگورنو قره‌باغ (Nāgorno Qarehbāgh)
나고르노 가레바그
러시아어 Наго́рный Караба́х (Nagórnyj Karabáx)
나고르니 카라바흐
영어 Nagorno-Karabakh }}}}}}}}}
나고르노카라바흐는 이란러시아 사이에 위치한 소캅카스 산맥의 산악지역이다. 최대도시는 한캔디(Xankəndi).

이 지역에 수립된 미승인국아르차흐 공화국과는 영토 범위에서 차이가 있었는데 소련 치하 나고르노카라바흐 자치주의 면적은 4,388㎢, 아르차흐 공화국의 면적은 11,458㎢였으며 2020년 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 전쟁 종전 이후에 3,170㎢로 축소됐기 때문이다.

2. 명칭

나고르노카라바흐라는 명칭은 러시아어 형용사형 표현인 '나고르노카라바흐스키(Нагорно-Карабахский)'에서 유래한 것이다. '나고르노'는 '산악'을 나타내는 형용사 '나고르니(нагорный)'에 삽간사인 -o-가 붙은 형태이다. '카라바흐'는 튀르크어로 '검다'라는 의미의 '*kara(아제르바이잔어로는 qara)'와 페르시아어로 '정원'을 의미하는 'باغ‎(bâğ, 아제르바이잔어로는 bağ)'가 합쳐진 조어이다. 관련 서적. 어원에 관련된 글.

엄밀히 말해 카라바흐라는 용어는 나고르노카라바흐뿐만이 아니라 아르메니아 남부의 장게주르(Զանգեզուր) 산맥에서 아제르바이잔 중앙을 관통하는 쿠라 강까지의 넓은 지역을 가리키는 말로, 아르메니아 남부 슈니크 주와 아제르바이잔 서남부 전체를 포괄하는 지역이다. 카라바흐의 경우 서쪽은 산악 지대, 동쪽은 평지대로 구성되며 나고르노카라바흐는 카라바흐 서쪽 산악지대 중에서도 동쪽 평지대와 맞닿아 있는 끝자락에 해당된다.

또 다른 명칭인 '아르차흐(Արցախ)'는 아르메니아어에서 유래하며 이는 동시에 대아르메니아 왕국을 구성하던 15개의 아슈하르(աշխարհ) 중 하나였다. 미승인국인 나고르노카라바흐 공화국은 2017년 2월 20일에 헌법 개정안 국민 투표를 실시해 대내외적인 공식 명칭을 아르차흐 공화국(Արցախի Հանրապետություն)으로 변경한 바 있다.

3. 역사

3.1. 고대

나고르노카라바흐에 대한 최초의 언급은 우라르투의 왕 사르두리 2세(기원전 764년 ~ 기원전 734년)의 비문에서 등장한다. 메디아, 아케메네스 왕조, 아르사케스 왕조 이후 기원전 189년에 나고르노카라바흐는 아르타셰스 1세(Արտաշես Ա)가 통치하는 아르메니아 왕국의 영토가 됐으며, 북부의 '우티크(Ուտիք, Utik)', 중부의 '아르차흐(Արցախ, Artsakh)', 남부의 '슈니크(Սյունիք, Syunik)' 지역에 걸쳐있었다. 당시의 나고르노카라바흐는 소아시아캅카스를 잇는 길목에 위치한 점과 평야지대를 끼고 있는 지리적 입지로 인해 이민족의 침략이 빈번한 지역이었다. 때문에 사산 왕조, 우마이야 왕조, 아바스 왕조의 지배 이후인 880년에 비로소 아르메니아인의 바그라투니 왕조가 세워졌다. 뒤이어 1000년에는 아르차흐 왕국(Արցախի թագավորություն)이 세워졌다.

3.2. 중세·근세

외세의 침략은 끊이지 않았고 셀주크 왕조, 조지아 왕국, 몽골 제국, 일 칸국의 일부로 속해있었다. 이런 과정 가운데 정착한 튀르크계와 선주민인 아르메니아계는 나고르노카라바흐에 뒤섞여 공존하게 됐다. 일 칸국이 존속하던 1261년에 아르차흐 왕국의 마지막 군주가 암살당하면서 뒤를 이어 하첸 공국(Խաչենի իշխանություն)이 세워졌다. 1214년에는 캅카스 지역의 고대국가였던 캅카스 알바니아 아란샤흐 왕조의 후손, 하산 잘랄 돌라(Հասան Ջալալ Դոլա)가 하산잘랄랸 가문(Հասան-Ջալալյաններ)을 창건해 하첸 공국을 통치했다.

1335년 일 칸국의 멸망 이후에는 추판 왕조, 잘라이르 왕조, 티무르 왕조, 흑양 왕조, 백양 왕조의 일부로 속해있다가 1501년사파비 왕조가 들어서면서 나고르노카라바흐는 대이란국의 카라바흐 속주(ولایت قره‌باغ, Velāyat-e Qarehbāgh)로 편입된다. 숱한 침략에도 오랜 명맥을 이어나갔던 아르메니아계 하첸 공국은 1603년에 함사 멜리크국(Խամսայի մելիքություններ)[6]으로 불리는 귤리스탄(Գյուլիստան, Gyulistan), 지라베르드(Ջրաբերդ, Jraberd), 하첸(Խաչեն, Khachen), 바란다(Վարանդա, Varanda), 디자크(Դիզակ, Dizak)의 다섯 왕국으로 분열됐고 지역의 군소 봉건 국가로 전락했다.

3.3. 근대·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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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52년에 세워진 이래로 카라바흐 칸국의 왕궁이던 샤흐불라그 성채(Şahbulaq qalası)

1747년 아프샤르 왕조나디르 샤가 암살당한 이후 정치적으로 혼란한 상황에서 캅카스에는 칸국들이 난립했다. 그 가운데 아제르바이잔인 사르잘르자반시르(Sarıcalı-Cavanşir) 씨족이었던 패나핼리 한 자반시르(Pənahəli xan Cavanşir)는 카라바흐 칸국(Qarabağ xanlığı)을 세웠다. 아제르바이잔계 카라바흐 칸국과 아르메니아계 다섯 멜리크국은 이란 내에서 준독립적인 위상을 유지하면서 서로 간에 대립을 이어갔다. 이러한 상황에서 러시아 제국은 캅카스 산맥을 넘어 남하했다. 이를 이른바 '그레이트 게임'이라고 한다.

3.3.1. 러시아 제국 치하

1804년부터 1813년까지 발발한 러시아-페르시아 전쟁과 더불어 러시아 제국은 1805년에 카라바흐 칸국을 사실상 점령했다. 1813년 전쟁의 결과로 굴리스탄 조약이 체결됐다. 이 강화조약으로 카자르 왕조는 나고르노카라바흐를 상실했다. 1822년에 카라바흐 칸국과 다섯 소왕국은 해체돼 러시아령 캅카스 부왕령의 옐리자벳폴 현으로 편입됐다.

이 시기 캅카스의 인구구성은 외부세력의 개입에 의해 여러차례 뒤바뀌었다. 중세에 튀르크인이 캅카스 이남으로 이주하면서 해당 지역은 원주민인 아르메니아인, 쿠르드인, 유목민인 아제르바이잔인들이 뒤섞여 사는 곳으로 바뀌었다. 예를 들어 나고르노카라바흐에 속한 슈샤(Şuşa)는 원래 아르메니아인들이 드문드문 거주하는 황폐한 지역이었으나 카라바흐 칸국이 새로운 수도로 건설한 도시였다.[7] 이 도시에는 아제르바이잔계, 아르메니아계, 쿠르드계가 공존했다. 또한 오늘날 아르메니아 수도인 예레반은 튀르크계, 페르시아계 무슬림이 과반이었다. 아제르바이잔인들은 주로 유목 생활을 하거나 도시에 거주했고, 아르메니아인들은 주로 농촌에 거주했다.

물론 이러한 공존은 긴장 상태를 수반했다. 카라바흐 칸국의 지배세력인 아제르바이잔계와 피지배세력인 아르메니아계가 서로 충돌을 벌였고, 그 결과 18세기 말에 이르러 카라바흐 일대는 아르메니아계가 오스만 제국 등 다른 지역으로 피난하여 급격히 공동화되었다. 이후 러시아 제국이 이란과의 전쟁에서 승리하여 캅카스 이남을 정복하자, 다른 지역으로 피난했던 아르메니아계가 다시 카라바흐 일대로 재이주하였다. 동시에 아제르바이잔계가 이란 등지로 피난하여 카라바흐의 아르메니아계 비율이 다시 높아졌다.

예를 들어 1836년 러시아의 인구조사에 따르면 나고르노카라바흐에 속한 슈샤의 인구는 시아파 무슬림이 남성 3175명, 여성 3196명, 도합 6371명이었으며, 아르메니아인 인구는 남성 3133명, 여성 3222명, 도합 6355명으로 거의 1:1 비율이었다.[8] 카라바흐 칸국을 무너뜨린 캅카스 총사령관 알렉세이 예르몰로프(Алексей Петрович Ермолов) 러시아 제국 육군 보병대장이 1823년에 수행한 카라바흐 지역의 인구조사에서도 총 20,095가구가 거주하는 해당 지역에서 15,729가구(78%)가 아제르바이잔인과 타트인이며, 4,366가구(22%)가 아르메니아인이라고 기록하고 있다.[9] 이 조사에서도 슈샤는 27.5%(421명)만이 아르메니아인이었고, 나머지 72.5%(1,111명)는 아제르바이잔인이었다. 하지만 50년 뒤인 1886년 인구조사에 따르면 슈샤 인구의 56.7%(15,188명)가 아르메니아인이었다.

1836년 러시아 인구조사 결과를 토대로 나고르노카라바흐가 아제르바이잔인 다수 지역이었다는 주장이 있지만, 이 주장의 근거인 해당 인구조사는 카라바흐 전 지역, 즉 쿠라 강과 아라스 강 사이를 일컫는 보다 넓은 영역을 대상으로 치른 것이다. 오늘날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이 영토 분쟁을 벌이는 나고르노카라바흐 일대, 즉 카라바흐 서부의 산악지대는 여전히 아르메니아계가 절대다수를 차지했다. 함레트 사르키샨(Համլետ Սարգսյան)에 의하면 1823년 당시 나고르노카라바흐에는 36,500명이 거주했으며, 이 중 84.6%(30,800명)는 아르메니아인, 14.7%(5,400명)는 타타르인(아제르바이잔인), 0.7%(300명)는 쿠르드인이었다. 특히 나고르노카라바흐의 농촌 주민 28,200명 중 97.5%(27,500명)는 아르메니아인, 2.5%(700명)는 타타르인(아제르바이잔인)이었다.[10]

물론 계속돼 오던 아르메니아인과 아제르바이잔인 간의 대립은 더욱 격렬해졌다. 제정 말기였던 1905년부터 1906년 동안 아르메니아인-아제르바이잔인 학살(Հայ-թաթարական ընդհարումներ / Erməni-azərbaycanlı qırğınları)[11]로 불리는 조직적인 학살과 무력충돌이 상호 간에 자행됐다. 최종적으로 러시아측이 카자크 기병을 비롯한 병력을 투입해 소요사태를 진압했다. 하지만 러일전쟁의 패전과 연이어 발생한 피의 일요일 사건으로 당시 극심한 혼란을 겪고 있던 러시아 중앙정부는 이 사건을 제대로 수습하지 못했다. 결과적으로 아르메니아인과 아제르바이잔인은 1920년대에 국가를 건국하기 이전부터 이미 감정의 골이 깊어질 대로 깊어진 상태였다.

3.3.2. 러시아 혁명 및 러시아 내전기

1917년 2월 혁명으로 러시아 제정이 붕괴하고 동년 3월 9일조지아·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을 아우르는 자캅카스 특별위원회가 설립된다. 이는 10월 혁명 중인 11월 11일에 세워지는 멘셰비키계 연합 임시정부인 자캅카스 위원부로 이어지게 된다. 제1차 세계 대전 중이던 1918년 4월 22일에 자캅카스 위원부는 자캅카스 민주 연방 공화국으로 독립했지만, 지속해서 침공을 해오는 오스만 제국에 대한 의견 차이, 그리고 1918년 3월 30일부터는 이른바 '3월 학살(Mart soyqırımı)'로 불리는 볼셰비키아르메니아 혁명연맹[12] 주도의 학살 행위가 발생했기에 결국 동년 5월에 해체된다. 이러한 민족 갈등은 서로 간의 영토를 넓히기 위한 충돌로도 이어졌다. 가령 아르메니아는 자캅카스 민주 연방 공화국에서 독립한 아제르바이잔계 아라즈 튀르크 공화국(현 나흐츠반 자치공화국)을 침공하기도 했으며 1918년부터 소련에 의해 공산화된 1920년까지 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 전쟁이 발발했다.

1918년 나고르노카라바흐는 명목상 아르메니아 제1공화국아제르바이잔 민주 공화국의 영토 주장에 각각 포함되어 있었으나 실질적으로는 예레반, 바쿠 중 어느 곳과도 유기적으로 연결되지 않은 지역 자치가 시행되고 있었다. 이 지역은 오스만 제국과 아제르바이잔의 양면공세에 일시 함락되었다가, 동년 11월 오스만 제국이 1차 세계 대전 패전으로 캅카스에서 철군하면서 지역 의회의 권한을 회복한다.

1차 세계 대전이 종료된 후 패전국 처분을 위한 회의가 열리기까지 이 지역을 지배한 것은 영국군이었다. 승전국들은 모든 정치적 문제를 회의에서만 합의하기로 하였고, 그 때까지 회의 주제에 오르는 모든 지역들에 대한 정치적 변동사항을 동결하기로 하였다. 이 조건에 따라 영국군은 아제르바이잔 민주 공화국과 협력해 슈샤에 위치한 아르메니아계 카라바흐 의회의 독자주의적 행보를 제지하고 장게주르에 주둔한 안드라니크 오자냔(Անդրանիկ Օզանյան) 등 아르메니아계 군벌을 일소하기로 한다.

1919년 1월 안드라니크 오자냔 반군은 슈샤에 입성하여 정치 세력화를 기도하였으나 윌리엄 몽고메리 톰슨(William Montgomerie Thomson) 영국군 사령관은 무력 집행 의사를 보이고 이들에게 경고하여 장게주르로 돌려보낸다. 반란군은 자신들이 오스만 제국에 맞서 싸웠으니 연합국의 잠정적 일원으로서 유리한 대우를 받을 것으로 보았으나 영국군이 배신하였다고 여겼다. 하지만 승전국과 직접 충돌하는 것은 이들의 계산에 없었고, 반군은 종국적으로 해산되며 수장 오자냔은 파리로 망명한다.

베르사유 조약에 이어 1919년 8월 영국군은 캅카스에서 철수한다. 영국군이 임명한 호스로브 배이 술타노프(Xosrov bəy Sultanov) 카라바흐 총독은 1920년 2월 19일 나고르노카라바흐의 아르메니아인 의회에 아제르바이잔의 지배를 따르라는 최후통첩을 보낸다. 하지만 러시아 적백내전의 향방에 촉각을 곤두세운 아제르바이잔은 술타노프 총독에게 이 최후통첩을 집행할 충분한 병력을 제공해 주지 못한 상태였고, 나고르노카라바흐 측은 술타노프 총독의 최후통첩에 거절 서한을 보낸다. 1920년 3월 22일 밤, 나고르노카라바흐의 아르메니아인들이 반란군을 조직하고 봉기하였을 때 아제르바이잔은 급히 대규모 병력을 소집하여 카라바흐로 파병해 진압을 시도한다.

아제르바이잔군이 카라바흐로 몰려간 틈에 러시아 볼셰비키는 1920년 4월 27일 빈집이 된 바쿠를 점령하고 아제르바이잔 민주 공화국을 전복시킨다. 술타노프 총독 또한 권한을 잃고, 나고르노카라바흐 진압 작전도 무위로 돌아간다. 1920년 3월 말에서 4월 말에 걸친 나고르노카라바흐 봉기 진압 작전 문제는 이렇게 아제르바이잔 민주 공화국의 손을 떠난다. 아르메니아에서는 이 교전과 유혈 진압 사태를 슈샤 학살(Շուշիի ջարդեր / Şuşa qətliamı)이라고 부른다.

나고르노카라바흐 분쟁에 급격히 시선이 쏠린 아제르바이잔을 손쉽게 점거한 볼셰비키는 아제르바이잔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을 세우고 이제는 자신들의 땅이 되어야 할 나고르노카라바흐 문제를 정리하기로 한다. 바쿠의 신생 소비에트 정부가 가장 먼저 취한 조치 중 하나는 나고르노카라바흐 지역에서의 아르메니아 군대의 철수 요구였으며, 이것이 이행되지 못할 시 아제르바이잔은 이를 아르메니아 제1공화국과의 전쟁 상태로 간주하기로 한다는 내용의 전문을 예레반으로 발신한다. 아르메니아 제1공화국은 볼셰비키 진주로 강화된 아제르바이잔 SSR과 대화하는 대신 모스크바에 사절단을 보냈고, 1920년 8월 10일 아르메니아는 소련과 나고르노카라바흐 및 그 주변지역의 소유권 문제 해결에 대한 최종적 결론이 나기 전까지 소비에트 정부의 나고르노카라바흐 지배를 인정한다는 내용의 협정을 체결한다. 하지만 곧이어 9월 24일 튀르키예 독립 전쟁 아르메니아 전선이 열리고 12월 2일 아르메니아 제1공화국이 볼셰비키의 침공으로 멸망하면서 이 협정은 의미가 사라진다.

3.3.3. 소련 치하


러시아인 가수 사샤 카라바흐(Саша Карабах)의 곡 "아, 카라바흐여"(Эй, Карабах, 1992). 본명은 알렉산드르 코레뉴긴(Александр Коренюгин)이다. 코레뉴긴은 러시아군 소속으로 1989년부터 1990년대 중반까지 카라바흐 지역에서 질서 유지군으로 복무하였으며, 이 시절 경험을 노래한 앨범을 발매하여 가수로 데뷔하였다.
3.3.3.1. 이오시프 스탈린 시대
1920년 소련은 아제르바이잔 민주 공화국아르메니아 제1공화국을 순차적으로 침공하여 아르메니아 SSR아제르바이잔 SSR을 설립한다. 소련은 두 민족의 영토 분쟁을 틈타 이 두 나라를 손쉽게 접수할 수 있었지만 이들이 자신의 것이 되었을 때 그 관할 영토를 중재하는 데 있어서는 성공적이지 못하였다.

아르메니아SSR이 설립된 첫 날인 1920년 12월 3일, 바쿠로부터 나고르노카라바흐, 장게주르, 나흐츠반을 아르메니아 땅으로 인정한다는 전문이 날아온다. 이는 레닌 시대 소련의 이념인 공산주의 동무들 사이에 국경이란 의미가 없다는 것을 선전하는 한편 아르메니아가 볼셰비키를 호의적으로 대하도록 하기 위한 조치였을 것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이오시프 스탈린과 그의 신임을 받는 아제르바이잔 볼셰비키 지도자였던 내리만 내리마노프(Nəriman Nərimanov)의 생각은 달랐고, 아제르바이잔 SSR은 이 전문을 곧바로 부인하며 세 분쟁지역에 대한 소유권 주장을 재확인한다.

1921년 6월 12일 러시아 공산당 캅카스 지국에서는 "아제르바이잔 SSR 혁명위원회의 결정과, 아제르바이잔 SSR 및 아르메니아 SSR의 동의에 따라 나고르노카라바흐를 아르메니아 SSR에 통합시킨다."라는 결의안을 채택한다. 블라디미르 레닌의 영토 분쟁 해결 방식은 이러하였는데, 일단 분쟁이 발생한 지역에 광범위한 자치권을 부여하고 지역 인민위원회를 소집해 이들의 투표로 분쟁을 결론짓는 것이었다. 이 결의안 채택 과정에 배석해 있던 아제르바이잔 SSR 대표 중 한 명인 내리마노프는 이에 격분하여 이의를 제기하고, 7월 4일에 중앙위원회를 개최해 투표로 결정하게 된다.

1921년 7월 4일 열린 회의에서의 투표 결과는 이전의 결의안과 마찬가지로 아르메니아 SSR의 승리로 귀결되었다. 아제르바이잔 SSR 대표 내리마노프는 이에 다시 불복하며 이 사안을 캅카스 지국에서 러시아 공산당 중앙위원회로 이관할 것을 요구한다. 캅카스 지국은 이에 동의했고 다음날인 7월 5일, 와병 중이었던 레닌의 대리로 스탈린이 참석한 가운데 트빌리시에서 회의가 다시 열렸다.

7월 5일 회의가 어떻게 진행되었는지에 대하여서는 그 1차 사료가 오늘날까지 공개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알 수 없다. 확실한 것은 표결이나 번복 사유에 대한 설명 없이 스탈린의 의견에 따른 공산당 성명문이 발표되었다는 것이다.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
Proceeding from the necessity for national peace among Muslims and Armenians and of the economic ties between upper [mountainous] and lower Karabakh, of its permanent ties with Azerbaijan, mountainous Karabakh is to remain within the borders of the Azerbaijan SSR, receiving wide regional autonomy with the administrative center at Shusha, becoming an autonomous region.
무슬림과 아르메니아인 사이의 국가적 평화 및 아제르바이잔과 영구적인 관계를 갖는 카라바흐 고지대와 저지대의 경제적 유대의 필요성에 따라 나고르노카라바흐는 아제르바이잔 SSR의 영토로 잔류하며, 폭넓은 자치권을 부여받아 슈샤에 행정 중심지를 둔 자치구역이 된다.

공식적으로 이유가 설명되지 않은 이 괴상한 중재를 두고 당대로부터 오늘날까지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 양쪽의 학자들을 포함한 많은 사람들의 견해가 있다. 튀르키예와의 우호관계 확립, 반볼셰비키적 성향[13]을 보인 아르메니아인들에 대한 보복,[14] 순순히 말을 듣지 않는 아르메니아SSR의 복종을 이끌어내기 위한 월경지의 인질화, 아제르바이잔의 불충에 대비한 내부의 "제5열" 기도[15] 등 당시 시대 정황을 반영한 다양한 견해 중 무엇이 사실과 부합하는지에 대해서는 회의 관련 1차 사료에의 접근이 오늘날까지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명확히 규명할 수 없다.

어쨌든 이러한 결정은 아제르바이잔의 대승리이자 아르메니아의 대패가 되었다. 아르메니아인들은 굉장한 불만을 가졌겠으나 스탈린 시대에는 관련 정치인들이 죄다 숙청되면서 공식적인 이의 제기를 하지 못하였다. 아르메니아측의 공식적인 반발은 스탈린의 철권통치가 해빙기를 맞는 니키타 흐루쇼프 시대에 시작된다.

나고르노카라바흐 자치주는 명목상 아제르바이잔에 속해 있었으나 소련 최고 소비에트의 중재가 없으면 본국인 아제르바이잔의 지시를 거의 따르지 않으며 독자적으로 행동하려 하였다. 나고르노카라바흐는 1963년, 1965년, 1975년, 1977년 등 여러 차례에 걸쳐 아제르바이잔과 소련이 자신들의 거주지역에 투자를 하지 않고 토착기업들을 빼앗아 간다는 내용의 탄원을 넣었지만 이는 모두 무시되었다. 이 시기가 되면 시베리아 유전 개발로 아제르바이잔 또한 모스크바의 관심이 시들어 가며 경제적으로 쇠락하기 때문에 꼭 아제르바이잔이 일부러 그랬다고 단정하기에는 무리가 있겠으나, 어쨌든 이 당시 나고르노카라바흐 주민들은 대개 돌집을 짓고 외국인노동자 생활을 하며 입에 풀칠을 하는 궁핍한 삶을 살았다. 그리하여 아제르바이잔 치하에서의 민족적 컴플렉스와 경제적 박탈감은 이들의 독립 욕구에 부채질을 했다 할 수 있겠다.[16]
3.3.3.2. 글라스노스트의 혼란
1985년 미하일 고르바초프 서기장은 흐루쇼프 시대부터 이어지는 만성적 경제난을 해결하기 위해 페레스트로이카라 알려진 재건 정책과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글라스노스트라 알려진 개방 정책을 추진한다. 하지만 고르바초프의 이러한 방향성은 그동안 억압되어 있던 소련 내부의 다양한 논제들을 수면위로 끌어올림과 동시에 캅카스에서는 민족 갈등의 재점화를 낳으며 고르바초프가 당초 상정하지 않았던 심각한 문제들이 발생한다.

1987년까지 이 문제는 서명운동과 청원운동 등 정치행위에 그치는가 싶었으나 1987년 10월 사태 악화의 첫 원인들 중 하나가 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예레반에 아제르바이잔(나고르노카라바흐 자치주 바깥이다) 협동농장에서 아제르바이잔의 지배에 불복종한 아르메니아인들이 린치당했다는 뉴스가 퍼지자 예레반의 아르메니아인들이 대대적으로 들고 일어나고, 아제르바이잔에 적대감을 보이는 수천의 시위대가 거리를 뒤덮는다.

1988년 2월 나고르노카라바흐 자치주의 수도인 스테파나케르트에서 아르메니아인들은 나고르노카라바흐를 아르메니아에 합병할 것을 청원하는 시위를 벌인다. 나고르노카라바흐 자치주 소비에트는 이를 결의하였고 아르메니아 SSR로 병합되기 위해 소련 최고 소비에트에 청원을 넣는다. 같은 시기 예레반에서는 나고르노카라바흐의 병합을 원하는 민족주의적 시위와 총파업이 벌어졌다. 이러한 사태를 진압하기 위해 소련군이 파견되었으며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의 관계는 순식간에 악화일로로 치달았다. 양국은 각자의 영토에서 포그롬의 물결을 일으켰고 쌍방간의 민족 추방이 이어졌다.

아르메니아의 영토 할양 요구로 아제르바이잔에서는 여러 차례의 민족 박해가 이루어졌는데, 이 중 가장 특기할 만한 사건은 아제르바이잔의 숨가이으트(Sumgait)에서 발생한 반아르메니아인 포그롬이었다. 아제르바이잔 청년 2명이 나고르노카라바흐 자치주 외곽에서 아르메니아인들에게 살해당했다는 뉴스가 바쿠에 퍼지면서 여러 도시에서 산발적인 폭동이 발생했는데, 그 중 숨가이으트에서는 2월 27일에서 29일에 걸쳐 아르메니아인 주거지구에 대한 파괴행위가 일어난다. 이 도시에서의 폭동으로 발생한 총 32명의 사망자 중 26명은 아르메니아인이었으며, 이에 따른 수백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그 다음으로 간자에서 발생한 1988년 11월의 반아르메니아인 폭동을 꼽을 수 있다.

1988년 6월 15일 아르메니아 최고 소비에트는 나고르노카라바흐 병합을 승인하는 투표를 진행한다. 아제르바이잔 SSR은 다음 날 즉시 나고르노카라바흐를 포기할 의사가 없음을 천명하였으며, 1988년 7월 소련 정부는 아르메니아측의 나고르노카라바흐 할양 요구를 거부한다. 이로부터 2개월 뒤인 1988년 9월, 스테파나케르트에서 안티아제르바이잔 포그롬이 발생해 수도부의 아제르바이잔인들이 박해받고 모두 추방된다. 소련 정부는 이를 해결하기 위해 1989년 1월 나고르노카라바흐 자치주를 모스크바 직할령으로 조정하였으나 아르메니아의 총파업과 두 민족의 쌍방 충돌은 멈추지 않았다. 소련군은 1989년 5월 스테파나케르트에 기갑 부대를 배치해 이를 진압해 보려 했으나 그 마저도 소용이 없었다.

소련은 나고르노카라바흐와 아르메니아인들을 달래기 위해 자치권을 확대하고 체포된 나고르노카라바흐 분리주의자 일부를 석방하며 ANM(Armenian National Movement) 활동을 합법화한다. 고삐가 풀린 아르메니아인들은 같은 해 1월부터 직할령으로 나고르노카라바흐를 지배하던 모스크바 인사들의 6인위원회를 전복시킨다. ANM은 모스크바가 임명한 인사들을 무력화하고 8월 16일 불법 선거를 통해 78명의 국회의원을 선출하고 자체 민병대를 조직하기 시작한다.

지속되는 할양 요구와 분리주의적 준동, 자치주측의 불법적인 자체 선거 행위에 아제르바이잔은 1989년 8월 아르메니아SSR에 대한 보이콧을 선언하고 아르메니아SSR과 나고르노카라바흐 자치주를 연결하는 철도를 봉쇄한다. 이 조치는 아제르바이잔 인민전선의 활성화를 불러왔고, 이들은 나고르노카라바흐에 대한 모스크바의 명목상의 직할통치에 대하여 반발했다.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 모두가 모스크바의 통제를 따르지 않게 된 이상, 이는 소련 당국이 바라지 않는 일이었다. 이로부터 3개월 뒤인 1989년 11월 모스크바는 나고르노카라바흐 직할 통치를 철회하고 행정권을 자치주 당국에 반환해 아제르바이잔 공산당의 호의를 이끌어내었다.

1990년 1월 소련군은 12,000명의 병력을 대동하여 인민전선 분쇄와 폭동 진압을 위해 바쿠를 공격한다. 아제르바이잔인들은 포그롬으로 아르메니아인 68명 가량을 죽였고, 소련군은 이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잔혹한 무력을 행사하여 100명 이상의 비무장 아제르바이잔 민간인을 죽인다. 1월 13일부터 이틀간 벌어진 폭동으로 추산 5만 명 전후의 바쿠 거주 아르메니아인들이 도시를 떠난다. 인민전선의 저항은 1월 20일까지 이어졌으며 소련군은 이를 무력으로 진압하고 바쿠에 계엄령을 선포한다. 아제르바이잔에서는 이 시기 소련군의 바쿠 민간인 학살에 대하여 검은 1월이라는 이름을 붙여 희생자들을 기린다.

같은 시기인 1990년 상반기동안 아르메니아는 소련군에 대항하는 독자 군대를 비공식적으로 설립하여 나고르노카라바흐를 장악하고 나흐츠반 자치공화국을 침공해 민간인 사상자를 발생시킨다. 여러 민병대가 난립한 가운데 가장 거대한 세력은 5000명 규모의 ANA(Armenian National Army)였다. 아제르바이잔의 수도인 바쿠가 소련군의 탄압에 시달리는 가운데 이들은 아제르바이잔의 영토를 마음껏 휘젓고 다니며 역량을 키울 수 있었다. 하반기에 이르면 나고르노카라바흐가 아닌 아르메니아 SSR부터가 소련으로부터의 독립을 요구하기 시작하는데, 고르바초프는 휘하 공화국들의 자치권 확대와 소련의 유지를 골자로 하는 신연방조약을 짜기 시작한다.

그리고 1991년 8월, 모스크바 보수파들의 쿠데타가 무산되며 소련 공산당 기능이 정지한다. 이로부터 한 달 뒤인 1991년 9월, 소련의 영향력이 사라진 이 지역에서 나고르노카라바흐 자치주는 공화국 설립을 선언하고 자신들이 더이상 아제르바이잔의 관할 아래 있지 않음을 선포한다. 아제르바이잔은 2개월 뒤인 1991년 11월 나고르노카라바흐의 자치주 지위를 폐지하며 이에 반발한다.

1991년 12월 10일, 나고르노카라바흐 자치주 소비에트는 아제르바이잔을 배제한 일방적인 독립 국민투표를 진행한다. 인구의 20%를 차지하는 아제르바이잔인이 보이콧한 가운데 99.98%의 찬성률로 자치주는 독립을 결정한다. 그리고 1991년 12월 26일, 소련이 해체된다.

참고자료 :
- Human Rights Watch/Helsinki, <Azerbaijan : Seven years of conflict in Nagorno-Karabakh>, New York : Human Rights Watch, 1994
- Michael P. Croissant, <The Armenia-Azerbaijan conflict : causes and implications>, 1998

3.3.4. 소련 해체와 1차 전쟁

파일:나고르노카라바흐.png
1989년의 나고르노카라바흐 민족 분포. 붉은색이 아르메니아, 푸른색이 아제르바이잔인이다

아르메니아가 점령한 나고르노카라바흐 지역의 지도와 설명(위키백과)

1992년 1월 18일 나고르노카라바흐 자치주가 전년도 9월과 12월의 독립 선언 및 국민투표에 이어 정부를 수립하고 건국을 선포함으로써 아제르바이잔은 이를 부인하고 1992년 1월 31일부터 아제르바이잔군나고르노카라바흐 민병대 사이의 전면전인 제1차 나고르노카라바흐 전쟁이 벌어진다. 다만 이 전쟁의 기간을 따질 때 그 시작은 1988년으로 잡는다.

결과적으로 아제르바이잔은 전쟁에서 패했고 1994년 5월 12일키르기스스탄에서 비슈케크 협정이 조인돼 정전(停戰)이 성립된다. 하지만 유엔 안보리의 만장일치 결의로 여러 차례 이 지역이 아제르바이잔의 고유 영토로 귀속됨을 천명한 부분이 정전협정에도 고스란히 반영되어 나고르노카라바흐 공화국(아르차흐 공화국)은 막대한 영토를 실효지배하게 되었음에도 독립국으로 국제사회에 인정받지 못한다. 어쨌든 나고르노카라바흐 공화국은 국제법상(de jure) 아제르바이잔 공화국에 속하여 그 존재가 부인되었으나 사실상(de facto) 독자적인 국체를 유지하여 2023년 멸망에 이르기까지 실질적인 독립을 누린다.

3.3.5. 2차 전쟁과 영토 분할

파일:나고르노.png
아르메니아 & 아르차흐 공화국은 진한 녹색과 파란색 부분을 상실하였다. 보라색 라츤 회랑이 본토와 아르차흐를 이어줄 뿐이다.

2016년 나고르노카라바흐 충돌이 있었고, 2020년 9월 27일 나고르노카라바흐에서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 간에 대대적인 2020년 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 전쟁이 발발했다. 여기에 튀르키예나 이란같이 이웃한 지역 강국들은 물론, 프랑스, 러시아, 미국과 같은 강국들도 관여해 상황이 매우 복잡하게 진행됐다. 결국 10월 들어서 아르메니아의 필사적인 저항에도 불구하고 제공권을 장악한 아제르바이잔이 연전연승으로 유리해지면서 조금씩 영내로 진격했고 결국 11월 10일 러시아의 중재 아래 아르메니아가 평화협정을 가장한 사실상의 종전선언을 하면서 전쟁은 아제르바이잔의 승리로 끝났고, 나고르노카라바흐 남부 지방은 아제르바이잔의 통제 아래 놓이게 됐다. 뿐만 아니라 기존에 주둔하던 아르메니아군은 나고르노카라바흐 지역에서 완전히 추방되면서 아르메니아는 이 지역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어려워졌다.

2022년 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 국경분쟁 때에는 나고르노카라바흐에서는 큰 충돌이 없었다.

3.3.6. 공세와 아제르바이잔으로의 통합

2023년 4월 니콜 파시냔 총리는 아르메니아가 아제르바이잔의 영토 보전을 완전히 인정한다며 사실상 나고르노카라바흐에 대한 아르메니아의 영유권 주장을 포기하는 발언을 했다.# 5월에도 파시냔 총리는 나고르노카라바흐를 포함한 아제르바이잔의 영토 보전을 인정할 준비가 됐다고 발언했다.#

2023년 아르차흐 분쟁의 결과 2023년 9월 20일 아르차흐 방위군이 해체되는 것으로 휴전협정이 이루어졌다. 아르메니아는 이 문제에서 완전히 빠지게 되었고, 현지 주민들은 잠재적인 인종청소 가능성을 피해 본국으로 떠나기 시작했다.# 30일 기준 12만명 중 10만명 이상이 떠났다.

9월 28일 아제르바이잔은 아르차흐 공화국 대통령의 국가 소멸 법안 서명을 이끌어냈다. # 이로써 미승인국 아르차흐는 2024년 1월 1일부로 소멸하며 아제르바이잔으로 실질적인 통합 절차를 밟게 된다.

9월 29일, 아제르바이잔 경찰이 수도 한캔디(스테파나케르트) 시가지를 완전히 장악, 이후 한캔디에서 행정업무를 시작하면서 아르차흐 공화국은 예상보다 빨리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현직 대통령인 삼벨 샤흐라마냔은 소수 일행과 잠시간 더 잔류하여 전투 사상자 및 유류 폭발 사고 사상자 뒷수습 등에 참여하기로 하였으나 후술할 아르차흐 수반들이 대거 체포되는 상황을 피하고 라츤 회랑을 통과하여 아르메니아에 도착한 것이 밝혀졌다.

아제르바이잔인들이 카라바흐에서 인종청소를 당하고 바쿠로 이주한지 30년 남짓 된 시점인지라 아직 상당수의 1세대 실향민들이 그대로 살아 있는데, 아제르바이잔은 폐허가 된 옛 도시들을 재건하고 실향민의 귀향과 재정착을 지원하는 등 수복지구에 대한 재건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아르메니아가 30년 넘게 점령하던 나고르노카라바흐 자치주 바깥의 아제르바이잔 영토는 역사성과 무관하게 그저 아르메니아가 나고르노카라바흐 자치주를 보호하기 위한 완충지대에 지나지 않아 재건이나 재정착 작업이 진행되지 않고 전쟁 당시 폐허가 된 채로 그대로 방치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아제르바이잔에서는 방송사 AZ TV를 통해 라츤 검문소를 통해 아르메니아로 떠나는 아르메니아계 시민들의 인터뷰를 취재해 방영하였다. # 아르메니아는 아제르바이잔에 인종청소 혐의를 씌우기 위해 외교전을 벌였으며, 아제르바이잔은 여기에 대해 출국 경로가 계속 열려 있었으며[17] 나가는 사람들이 아제르바이잔에 적대적이지 않음을 선전하고자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인터뷰 전문
(영상 1분 7초부터)
리포터: 어디에서 오십니까?
남자1: 한캔디에서요.
리포터: 어디로 가십니까?
남자1: 아직은 모르겠습니다.
리포터: (작게들림) 아직은 모르겠다라... 그렇다면 왜 이곳을 떠나시는 겁니까? 누가 내쫓았습니까?
남자1: 아니요. 다들 가니까 나도 가는 것이지요.

(1분27초)
리포터: 본인의 의지로 가시는 것입니까? 아니면 누가 선생님을 여기서 내쫓았습니까?
남자2: 아니오, 우리 스스로 가고 싶었습니다.

(1분41초)
리포터: 어떤 문제를 겪으시진 않으셨는지요?
남자3: 아니오 아니오 모든 것이 제대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리포터: 이렇게 될 것을 예상하셨습니까?
남자3: 길이 열려있으니 모든 것은 잘 돌아가고 있는 것이지요. (리포터) 잘 가십시오 / 남자3: 고맙소

(1분53초)
리포터: 1990년대 이전에 그곳에서 아제르바이잔인들도 아르메니아인들과 함께 살았던 시절을 기억하십니까?
남자4: 우리는 늘 그들과 함께 잘 살았지요. 전혀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때 저는 운전기사였는데 바쿠에도 있었습니다. 거기서 농산물들을 가져왔지요.
리포터: 아제르바이잔인들과 카라바흐의 아르메니아인들이 다시 함께 살 수 있기를 희망하시는지요?
남자4: 보세요. 우리는 (그것을) 이루어야 합니다. 이전처럼 이제부터는 다 같이 살아야합니다.

(3분), 이 부분은 아제르바이잔어로 진행됨
리포터: 한캔디에서 여기로 오시는데 어떤 어려움은 없었습니까?
남자5: 아니오 아니오 모두 정상적이었습니다.
리포터: 한캔디에서 몇 년이나 사셨습니까?
남자5: 1975년부터요.

(3분24초)
리포터: 그들(아제르바이잔 국경수비대)이 여러분들을 어떻게 대했습니까?
남자6: 보통으로요.
리포터: 전부 일반적이었습니까? 여러분들께 물을 주었습니까?
남자6: 예
리포터: 왜 이 지역을 떠나시는 겁니까? 여러분을 강요한 자들이 있습니까?
남자6: 아니오. 저는 수술을 받아야 합니다.
리포터: 수술후 돌아오실 겁니까?
남자6: 당국이 허락한다면 돌아올겁니다.
리포터: 아제르바이잔 정부는 머물고 싶어하는 이들에게 허락을 합니다.
남자6: 기쁜 마음으로 돌아오겠습니다.

(3분53초) 이 부분은 아제르바이잔어로 진행됨.
리포터: 뭐 하러 가시는겁니까?
짐말을 끈 남자: 나는 안 떠나요. 도움이 필요하다고 해서 가는 중입니다. (...) 내 동생이 도와달라고 해서
리포터: 머무실겁니까 아제르바이잔에?
짐말을 끈 남자: 정말로, 도망 안간다니까요
리포터: 형제분은 왜 안 오신대요?
짐말을 끈 남자: 그는 예레반에 있어요. (...) 말도 여기에 있고, 형제 몇명도 이쪽에 있는걸
리포터: 형제가 몇이에요? 그는 아르메니아 국적인가요?
짐말을 끈 남자: 네네
리포터: 선생님은 카라바흐에서 살고 계셨고요?
짐말을 끈 남자: 나는 다샬트(Daşaltı)에서 살았습니다. 슈샤구에서요.
리포터: 그럼 그 후 돌아오시는거지요?
짐말을 끈 남자: 그럼요 돌아올겁니다 여기로.

아제르바이잔이 나고르노카라바흐 지역을 수복한 후 아제르바이잔 경찰은 호잘르구에 위치한 아르메니아인들이 두고간 대마밭에서 공식 기자회견을 진행했다. 브리핑에서 아제르바이잔 내무부 언론부장 엘샤드 하즈예프(Elşad Hacıyev)는 "그동안 범죄정권(아르차흐)은 우리의 땅에서 마약성 농작물을 재배해 아시아, 유럽 등등 여러 국가들에 공급했다."고 비판했다. 아제르바이잔은 2020년 전쟁 당시에도 나고르노카라바흐가 세계 마약공급처임을 주장해왔었다. 아제르바이잔 국영방송사인 AZ TV는 그 면적이 100 헥타르에 달한다며 해당 지역에 가서 이를 방영했다. 또한 한캔디의 식량으로 가득찬 창고를 공개하며, 나고르노카라바흐 공화국 당국은 주민들을 일부러 굶기고는 아제르바이잔이 비인도적으로 주민들에게 갈 물자를 막았다고 주장했다며 이를 비난했다. 이에 따라 아제르바이잔 당국은 이러한 아르차흐 고위공직자들의 기소 및 처벌을 준비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아르차흐의 전직 대통령이었던 아르카디 구카샨, 바코 사하캰, 아라이크 하루튜냔 3명과 다비트 이슈하냔 전 아르차흐 국회의장을 2020년 전쟁 당시 갠재, 배르대를 향한 민간지역 포격 혐의, 마약재배혐의, 내란혐의 등으로 기소, 체포하여 바쿠로 압송하였다.

한편 아제르바이잔 외교부는 비무장과 아제르바이잔에 대한 적대행위 및 선동을 하지 않겠다는 서약을 받는 조건하에 나고르노카라바흐 내외로부터 유입된 아르메니아인 민병대원 수천명을 석방하고 아르메니아로 돌려 보냈음을 아르메니아 외교부에 통보하였다. 아르메니아인들을 필요이상으로 자극하지 않음으로써 나고르노카라바흐 지역과의 통합 문제를 원만하게 추진하는 것으로 방침을 정한 것으로 보여진다.

10월 15일, 일함 알리예프 아제르바이잔 대통령이 한캔디에 도착해 아르차흐 대통령궁에 아제르바이잔 국기를 게양하였다.##

2024년 4월, 나고르노카라바흐에 남아있던 아르메니아 교회외 문화재 10여개가 철거 및 파괴된 것으로 나타났다.#

2024년 6월, 나고르노카라바흐에 주둔하고 있던 러시아 평화유지군이 철수했다.#

4. 기타

여러 부분에서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전 독일 영토였었던 동프로이센과 비슷한 부분이 있는 지역이다.[18]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 독일과 폴란드 사이에 끼어 있는 고립된 역외 영토라는 점 때문에 양국 간 분쟁의 소지가 되어오다 동프로이센은 제2차 세계대전 말기 구 소련과 폴란드에 각각 북남으로 분할, 합병되어 각각 북부는 러시아, 남부는 폴란드의 영토가 되었고, 나고르노카라바흐는 2020년에 있었던 제2차 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 전쟁과 그 이후인 2022년과 2023년에 두 차례에 있었던 아제르바이잔과의 국경분쟁에서 패함으로서 아제르바이잔의 땅으로 편입되었는데, 두 지역 모두 독일과 아르메니아가 영향력을 잃고 패배하자 현지에서 거주하던 독일계와 아르메니아계 주민들 대부분이 당시에 아제르바이잔과 구 소련, 폴란드로부터 보복을 받거나 보복을 피하기 위해 고향을 떠나 아르메니아와 독일 본국으로 탈출해 실향민으로 전락해버린 것도 비슷하다.

5. 참고문헌

  • 장병옥. (2008). 나고르노-카라바흐 분쟁의 원인에 관한 연구. 국제지역연구 12(1), pp. 301–326.
  • 동북아역사재단. (2009). 엇갈린 국경, 길 잃은 민족들 : 러시아와 동유럽의 사례 (pp. 151–183). 서울: 동북아역사재단.
  • 강윤희. (2019). 러시아와 세계정치(세계정치 30) (pp. 120–177). 서울: 사회평론아카데미.


[1] 샤후먄구(Շահումյան շրջան), 마르타케르트구(Մարտակերտի շրջան) 일부, 마르투니구(Մարտունու շրջան) 일부는 아제르바이잔측에서 괴이괼구(Göygöl rayonu), 고란보이구(Goranboy rayonu), 태르태르구(Tərtər rayonu), 호자밴드구(Xocavənd rayonu)로서 통제해왔다.[2] 하얀색 부분이 아르차흐 공화국이 실효지배했었던 구역이다.[3] 2023년 10월부터는 아르차흐가 소멸하여 아제르바이잔에 흡수되었다.[4] [lɛrnɑˈjin ʁɑɾɑˈbɑʁ\][5] [dɑɣˈlɯɣ ɡɑˈɾɑbɑɣ\][6] 함사(Խամսա)는 아랍어로 '다섯을 의미하는 '함사(خمسة)', 멜리크(Մելիք)는 아랍어로 '왕'을 의미하는 '말리크(ملك)'에서 유래한다.[7] 당시에는 패나하바드(Pənahabad)로 불렸다.[8] 위 수치는 Акт, Собранные Кавказской Археографической Комиссией, Tom 2, No: 1437, Tbilisi, 1868를 재인용함.[9] 위 수치는 Описание Карабахской Провинции, составленной 1823 году, Тифлис, 1866를 재인용함.[10] 위 수치는 Население Нагорного Карабаха за 100 лет(1823-1923 гг.), 2016을 인용함.[11] 해당 사건은 러시아어로는 '아르메니아인-타타르인 학살(Армяно-татарская резня)'이라고 하는데, 당시 러시아어로는 아제르바이잔인을 자캅카스 타타르인(Закавказские татары)으로 지칭했기 때문이다.[12] 일반적으로 다슈나크당(Դաշնակցություն, Дашнакцутюн)으로 알려져 있다.[13] 아르메니아 SSR 설립 직후인 1921년 2월 18일 볼셰비키 정권에 대한 반발로 제1공화국 관료와 군부가 반소 폭동을 일으켜 예레반을 점거하고 독립을 선포한 일이 있었다. 같은 시기인 3월 16일 소련은 모스크바에서 튀르키예와 우호조약을 체결하였고, 반란은 4월 2일 증원된 붉은 군대가 예레반에 재입성하면서 진압되었다.[14] 우평균, 나고르노 카라바흐(Nagorno-Karabagh) 분쟁의 갈등 양상과 국제 개입중 "II-1. 나고르노-카라바흐에 대한 관할권 결정 과정"(민족연구, 2013), 97.[15] The Armenia-Azerbaijan conflict : causes and implications by Croissant, Michael P., p.19~20, 1998[16] Gha-ra-bagh! by Mark Malkasian, p.25~26,1996[17] 당시 라츤으로의 입국은 실질적으로 계속 막혀 있었다. 다만 군사분쟁 중인 적국에 입국 루트를 열어 주는 것부터가 정상적인 일은 아니며, 외국인에게 아무 주권 국가나 입국 가능한 자유 따위는 당연히 없다.[18] 두 지역 모두 역사적으로 독일계와 아르메니아계의 강역권이었음에도 구 소련 시기와 전간기 당시에 아르메니아, 독일 본국과 앙숙이던 이웃나라의 영토(폴란드, 아제르바이잔.)를 사이에 두고 라츤 회랑과 폴란드 회랑으로 영토가 분리되어 있었던 역외 영토의 모습을 띄고 있던 점이 비슷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