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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사적 제132호 | |
<colbgcolor=#315288> 강화산성 江華山城 | |
소재지 |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국화리 산3번지 일원 |
분류 |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 성 / 성곽 |
면적 | 791\,740㎡ |
지정연도 | 1964년 6월 10일 |
제작시기 | 고려 시대 |
위치 |
<colbgcolor=#344c3c> 강화산성 전경[1] |
EBS 〈한국기행〉에서 제작한 강화산성 영상 |
[clearfix]
1. 개요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을 에워싸고 있는 조선 시대의 산성이다. 강화도호부의 읍성 역할을 했다. 1964년 사적 제132호로 지정되었다.2. 내용
2.1. 역사
13세기 몽골의 침입으로 고려의 백성과 국토가 유린되자 당시 무신정권 집권자인 최우는 1232년 수도를 개경에서 강화도로 옮겼다. 당시에 성은 흙으로 쌓았고, 강화산성은 내성·중성·외성으로 이루어져 있다. 중성은 내성을 지키기 위해 쌓았고, 외성은 1233년 강화도 동쪽으로 흐르는 강인 염하강을 따라 쌓았다.외성은 몽골군이 해전에 약한 것을 고려해 바다를 건너 공격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 지은 중요한 방어시설이자, 고려 조정이 강화도에서 39년간 육지로부터 물자를 지원받았던 곳이기도 하다.
원종 11년 개경으로 수도를 다시 환도하게 되면서 몽골과 고려의 강화조약의 조건으로 강화도에 지은 성을 모두 헐게 되었다.
이후 조선 시대 때 강화산성의 내성이었던 강화성을 다시 축조하였지만 병자호란 때 청나라 군대에 의해 다시 파괴당하였고, 조선 후기 숙종 3년에 성을 다시 보수하면서 모두 돌로 쌓고 넓혀 지었다.
2.2. 현황
현재 4개의 내성인 남문 안파루, 북문 진송루, 서문 첨화루, 동문인 망한루가 남았고, 비밀통로인 암문 4개 그리고 수문이 2개 남아있다. 그 외 중성과 외성은 대부분 밭이거나 담벼락보다 낮은 수준 정도로 남고 그 위에는 나무가 자라 가까이 보지 않는 이상 찾기 어려울 정도로 훼손됐다.3. 산성 모습
<colbgcolor=#344c3c> 동문 망한루[2] |
<colbgcolor=#344c3c> 서문 첨화루[3] |
<colbgcolor=#344c3c> 남문 안파루[4] |
<colbgcolor=#344c3c> 북문 진송루[5] |
<colbgcolor=#344c3c> 북문 내측 성벽[6] |
<colbgcolor=#344c3c> 성 안쪽에서 본 성벽 여장[7] |
4. 외부 링크
- 한국어 위키백과: 강화산성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강화산성
- 문화원형백과: 강화산성
- 답사여행의 길잡이 7 - 경기남부와 남한강: 강화산성
- 대한민국 구석구석: 강화산성
- 인천관광 100선: 강화산성
- 두산백과: 강화산성
5. 사적 제132호
강화읍을 에워싸고 있는 고려시대의 산성이다.
몽골의 침입으로 백성과 국토가 수난을 당하자, 당시 실권자인 최우는 1232년 강화도로 수도를 옮겼다. 왕궁과 성·관아 시설은 1234년 본격적인 공사가 시작되었다. 이 때 개경의 궁궐과 비슷하게 지어 산의 이름도 송악이라 지었다.
성은 흙으로 쌓았고, 내성·중성·외성으로 이루어져 있고, 내성은 주위 약 1,200m로 지금의 강화성이다. 중성은 내성을 지키기 위해 쌓았으며, 외성은 1233년 강화 동쪽해안을 따라 쌓았다. 이 외성은 몽골군이 바다를 건너 공격하지 못하게 한 가장 중요한 방어시설이자, 정부가 39년간 육지로부터 물자를 지원받았던 곳이기도 하다.
고려 원종 11년(1270) 개경으로 수도를 다시 옮기면서 몽골과 강화조약의 조건으로 성을 모두 헐게 되었다. 조선 전기에 내성이었던 강화성을 축소하여 다시 지었다. 1637년 병자호란 때 청군에 의해 다시 파괴당하였고, 숙종 3년(1677)에 성을 보수하면서 모두 돌로 쌓고 넓혀 지었다.
남문인 안파루·북문인 진송루·서문인 첨화루와 동문인 망한루가 있으며, 비밀통로인 암문 4개 그리고 수문이 2개 남아있다. 높은 곳에서 망을 보기 위한 장대와 성위에서 몸을 감추기 위한 여장 등의 방어시설도 갖추고 있었으나 여장은 모두 무너졌다. 현재 성의 동쪽 부분은 없어졌으나, 남북쪽 산자락은 복원 정비되어 있다.
조선 후기 병인양요·신미양요와 일본 침략에 의한 강화조약을 체결한 수많은 외세침략의 역사적인 현장이다.
몽골의 침입으로 백성과 국토가 수난을 당하자, 당시 실권자인 최우는 1232년 강화도로 수도를 옮겼다. 왕궁과 성·관아 시설은 1234년 본격적인 공사가 시작되었다. 이 때 개경의 궁궐과 비슷하게 지어 산의 이름도 송악이라 지었다.
성은 흙으로 쌓았고, 내성·중성·외성으로 이루어져 있고, 내성은 주위 약 1,200m로 지금의 강화성이다. 중성은 내성을 지키기 위해 쌓았으며, 외성은 1233년 강화 동쪽해안을 따라 쌓았다. 이 외성은 몽골군이 바다를 건너 공격하지 못하게 한 가장 중요한 방어시설이자, 정부가 39년간 육지로부터 물자를 지원받았던 곳이기도 하다.
고려 원종 11년(1270) 개경으로 수도를 다시 옮기면서 몽골과 강화조약의 조건으로 성을 모두 헐게 되었다. 조선 전기에 내성이었던 강화성을 축소하여 다시 지었다. 1637년 병자호란 때 청군에 의해 다시 파괴당하였고, 숙종 3년(1677)에 성을 보수하면서 모두 돌로 쌓고 넓혀 지었다.
남문인 안파루·북문인 진송루·서문인 첨화루와 동문인 망한루가 있으며, 비밀통로인 암문 4개 그리고 수문이 2개 남아있다. 높은 곳에서 망을 보기 위한 장대와 성위에서 몸을 감추기 위한 여장 등의 방어시설도 갖추고 있었으나 여장은 모두 무너졌다. 현재 성의 동쪽 부분은 없어졌으나, 남북쪽 산자락은 복원 정비되어 있다.
조선 후기 병인양요·신미양요와 일본 침략에 의한 강화조약을 체결한 수많은 외세침략의 역사적인 현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