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0-01-22 15:02:11

피에르 조제프 프루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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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erre-Joseph Proudhon(피에르 조제프 프루동)
1809년 1월 15일~1865년 1월 19일.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00px-Pierre_Joseph_Proudhon.jpg
“프루동은 우리 모두의 스승이다(Proudhon is the master of us all).” - 미하일 바쿠닌
“나는 가난하고, 가난한 자의 아들이다. 나는 가난한 이들과 일생을 보냈으며, 십중팔구는 가난하게 죽을 것이다.”
"내가 '노예제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받는다면 그리고 한마디로 답해야 한다면, '그것은 살인이다"라고 답을 할 터인데, 내 뜻은 즉시 이해될 것이다."

1. 생애2. 사상
2.1. 프랑스 혁명 비판2.2. 사유재산 제도 비판
3. 마르크스와의 비교4. 여담

1. 생애

스스로를 아나키스트라고 칭한 최초의 인물. 통 제조공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9세 때 목동이 되었다. 중등학교는 다녔으나 경제적 부담으로 대학 입학 시험(바칼로레아)를 볼 수 없었다. [1] 이 후, 인쇄소에서 기술을 배우면서 다양한 독서를 할 수 있었고, 라틴어, 그리스어, 히브리어를 독학하였다. 또한 많은 사회주의 지식인들과 친분을 쌓았다. 1838년 프루동은 장학금을 받아 대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는 《소유란 무엇인가?》(What Is Property?)에서 소유를 도둑질이라고 규정하였으며 《소유자에 대한 경고》로 인해 재판을 받았으나 석방되었다.

1848년 혁명 이 후, 국회의원으로 선출되었으나 〈민중〉(Le Peuple)지에 나폴레옹 3세를 비판하는 글을 썼다가 3년의 징역과 3,000프랑의 벌금을 선고받고 벨기에로 피신했다. 그는 파리에 돌아와 체포되어 생트펠라지 감옥에 투옥되어 1852년 석방됐다. 그는 생트펠라지에서 외프라지 피에가르(Euphrasie Piegard)와 결혼했으며 《혁명가의 고백》과 〈민중의 목소리〉를 썼으나 다시 기소되어 다른 감옥으로 이송된다. 그는 1858년 로마 가톨릭교회를 비판한《혁명과 교회의 정의론》으로 다시 3년의 징역과 4,000프랑의 벌금을 선고받아 브뤼셀로 피신하여 이때 톨스토이를 만난다. 1862년 그는 파리로 돌아와서 《소유의 이론》과《노동계급의 정치적 역량에 대해서》를 썼다. 그는 1865년 갑작스럽게 사망한다.

2. 사상

2.1. 프랑스 혁명 비판

당시 프랑스 대혁명을 왕정에 의한 1인 독재에서, 민주정에 의한 다수의 독재로 전환한 것에 불과하다며 비판하였다. 또한 정치제도에 대한 혁명은 이루어졌으나, 재산제도에는 손을 대지 않은 점에 대해서도 비판하였다.

2.2. 사유재산 제도 비판

"모든 사유 재산은 도둑질 한 것이다."

"모든 재산은 도둑질한 것"이라는 명언에서 볼 수 있듯이. 소유 자체를 죄악시하였다. 일체의 부는 노동자들에 의해 만들어 진 것이고, 이것이 누적되어 자본이라는 개념으로 발전했을 뿐, 거슬러 올라가면 자본은 몇세대에 걸쳐 내려오는 도둑질의 축적일뿐이라며 모든 재산을 사회에 귀속시킬 것을 주장하였다.

3. 마르크스와의 비교

여러모로 마르크스와 비교되는 점이 많다.
  • 프루동이 "빈곤의 철학"이란 책을 쓰자, 마르크스가 이를 비꼬기 위해서 "철학의 빈곤"이라는 책을 썼다.
  • 마르크스는 유복한 집안에서 자랐고, 귀족과 결혼했으나, 프루동은 가난한 제조공의 아들로 태어나서 재봉사와 결혼했다.
  • 마르크스는 정치적 동지 엥겔스의 후원을 받아서, 그리 생계에는 곤란을 겪지 않았으나, 프루동은 죽을 때까지 끼니 걱정을 하며 살았다.
  • 마르크스는 혁명에 의한 변화를 추구했으나, 프루동은 기존의 자본가 세력을 설득하여 제도적인 변화를 이끌어내고자 했다.
  • 마르크스는 혁명의 과정에서 무산계급독재가 필연적임을 주장하였으나, 프루동은 거의 모든 권위를 부정적으로 보았다.
  • 마르크스는 체계적인 이론 정립에 집착하였으나, 프루동은 자신의 이론에 체계를 만드는 것을 거부하였다.
  • 마르크스는 의외로 투옥된 적이 없다. 프루동은 말년 대부분이 수배기간 아니면 투옥기간이었다.
  • 프루동주의의 종착점은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이었다. 이는 바쿠닌에 의해 생디칼리슴과 표토르 크로포트킨의 무정부주의로 정리된다. 프루동은 정부를 없애고 협동조합에 의한 지도체제 구축을 바랬다. 문제는 이 때 발생했다. 노동자들의 협동조합 건설을 위해 막대한 자금이 필요했고 인민은행을 설립해야 했는데 이 인민은행을 만들기 위해선 역설적으로 이를 관리할 '국가'가 필요했던 것이다. 맑스는 이 점에서 프롤레탈리아 독재는 정당 중심이고 국가의 존재를 부정하진 않았다.

4. 여담

사실주의 화가인 귀스타브 쿠르베와 친분이 깊었다. 프루동 사후에 쿠르베는 프루동을 그린 두 점의 초상화를 그렸다.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소설 에서는 자신이 맡은 행성에 증오와 폭력을 퍼트리는 천하의 개쌍놈으로 고인모독행위를 당했다.

국내에서는 인기가 없는 사상가 취급을 받지만, 20세기 초반 식민지 조선에서는 제법 자주 언급되는 사상가였다. 당시 아나키즘이 엄청난 영향력이 있었기 때문에.
[1] 비슷한 시기의 사회주의자 카를 마르크스가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낸 것에 비하면 매우 대조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