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구성의 문제2. 독자들의 역사 인식과 독해 문제3. 역사 반영 오류
3.1. 각 화 오류
4. 이미지 출처의 미기재5. 주관적 해석6. 사용한 사료에 대한 미표기7. 잦은 지각3.1.1. 4화3.1.2. 34화3.1.3. 46, 47화3.1.4. 66화3.1.5. 77화3.1.6. 93~98화3.1.7. 특별편3.1.8. 127화3.1.9. 131화3.1.10. 134화3.1.11. 소현세자편3.1.12. 142화3.1.13. 149화3.1.14. 153화3.1.15. 156화3.1.16. 160화3.1.17. 163화3.1.18. 개천절 특집3.1.19. 178화3.1.20. 179화3.1.21. 197화3.1.22. 204화3.1.23. 213화3.1.24. 214화3.1.25. 215화3.1.26. 310화3.1.27. 322화3.1.28. 경술국치 특집3.1.29. 345화
7.1. 계속된 약속 어김
8. 내용 약속 어김1. 구성의 문제
만화에 그림이 거의 없고 라인 화면만 나오는데다가, 전체적인 구성 역시 만화라고 보기에는 부족하다는 비판이 있다. 이 때문에 비판하는 측에서는 웹툰이 아니라 "카톡 짤방"이라 부르며 폄하하곤 한다.작가 무적핑크도 이러한 비판을 인식했는지 점차 그림의 비율이 높아지고 있는데, 그나마 들어가있는 그림 마저도 만족스러운 퀄리티는 아니다. 현실적인 느낌을 강조하기 위한 것인지 그리기 귀찮았던 것인지는 몰라도 사진자료를 가져와 합성하는 일이 매우 많고[1], 조악한 퀄리티의 3D 자료를 몇 번이고 계속해서 사용하기도 한다. 심지어 직접 그리는 그림들마저도 스케치 수준이거나[2], 복붙해서 조금씩만 수정해가며 사용하곤 한다. 요약하자면 그림에 정성이 들어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선을 그릴 때 끝과 끝을 맞추지 않는 것은 물론, 채색이 선을 벗어나도 수정조차 하지 않는다. 기본적인 수정 작업조차 하지 않는, 어찌보면 하루 3컷 만큼이나 무성의한 작화라고 볼 수 있는데, 주 2회 연재임을 감안하더라도 프로 의식이 의심되는 수준이다.
무적핑크가 실질객관동화 시절부터 참신한 방식(심지어 그 참신한 방식도 네이버 웹툰 '칼부림' 14년 9월 17일자 연재분 특별편에 먼저 나왔다, 해당회차는 무료로 열람 가능)에 주력하여 웹툰을 만들어온 것은 사실이지만, 조선왕조실톡은 날로 먹으려는 게 너무 뻔히 보인다는 비판. 정성이 들어가지 않은 날로먹기를 참신한 시도라는 식으로 어떻게든 포장해보려 한다는 것이다. '사료 조사에서 시간을 많이 잡아먹을 수 있지 않느냐'라고 반문할 수도 있겠지만 참고하는 사료중 조선왕조실록이 대부분이고, 조선왕조실록은 국사편찬위원회에서 깔끔하게 정리해놓았기 때문에 자료를 수집하는데 큰 어려움이 없다.[주의] 역사 반영은 물론 작화에서도 넘사벽급의 퀄리티를 자랑하는 칼부림이 존재하기 때문에 사료 조사면에서 시간이 많이 소비된다는 것은 핑계에 가깝다. 게다가 후술할 역사 반영 오류가 적지 않게 나는 걸 생각하면...
다만 최근엔 이러한 비판을 수용한 것인지 여러 sns나 기타 모바일, 미디어 매체의 패러디를 이용하여 분량을 꽤 늘리고있다. 그래도 라인의 화면 분량이 압도적인 것은 변함없지만... 연재 초반에 비하면 훨씬 나아진 모습이다.
주제와 어긋난 내용묘사 또한 문제가 되고있다. 107회 "종이로 만든 갑옷"편에서는 조선의 종이갑옷에 대한 설명 대신 등장인물의 만담으로 대부분의 내용을 채우고 있으며, 심지어 역사에 기록된 일도 아닌 작가의 창작 만담이다. "종이갑옷에 대해 묘사할 거리가 없어 만담을 채워넣었다"라고 변명할 수도 있겠지만, 묘사할 거리가 없다면 다른 소재를 그리면 된다. 소재를 모으는 일 또한 웹툰 작가의 능력이며, 오히려 "소재덩어리인 조선왕조실록을 옆에 끼고도 만담으로 스토리를 채워야 할 만큼 스토리텔링 능력이 부족하다"라는 비판거리가 생길 가능성이 높다.
가장 중요한건 아무리 교육적인 웹툰이라지만 실질적인 재미가 떨어진지 오래라는 점이다. 이건 작가의 전작들에서부터 이미 보이던 징조.
2. 독자들의 역사 인식과 독해 문제
이것은 만화 자체의 문제는 아니나 독자들에게도 문제가 있다. 독해 수준이 낮거나 역사적인 사실에 대해 잘못 알고 있어 심지어 앞에 이미 나온 내용과도 다른 잘못된 역사적인 사실과 이를 이용한 국가적인 이야기가 베댓에 오를 때가 많다. 대표적으로 16화 <과거급제를 한 노비> 편에서 이미 과거는 조선의 천인을 제외한 모든 계층이 볼 수 있는 시험이라고 나왔으나 과거 시험이나 양반이 소재인 다른 화들의 배댓에는 과거는 양반만이 볼 수 있는 시험이었다는 내용이 많이 보인다. 이런 베댓들을 보고 다른 청소년들이 잘못된 역사적인 사실들을 배워갈 수도 있다. 그 외에 예송논쟁에 관해서 "상복 입는 사소한 문제로 물어뜯는 게 한심한 조선 수준"이라는 댓글들도 보인다.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예송논쟁은 단지 상복이 얼마냐가 중요한게 아니라 그 뒤에 있는 적통성 문제와 후기에 변화되어가는 사상적 문제가 결합된 정치적 논쟁으로 봐야하는데 단지 겉면에 내세운 상복 운운하는 것 자체가 수준이 떨어진다.[4] 웹툰의 연령층이 낮은 것을 감안하더라도 알려고도 안 하고 비난하는 수준은 받아들이기 어려운 수준. 이런 것에 대해 웹툰 내에서라도 어느 정도 설명이 되어야하지만 위와 같은 문제가 얽혀서...그 외에도 야사에서나 나올만한 얘기를 실은 경우도 많다. 가령 정순왕후와 정조의 대립이나 영조의 경종 독살설 등등
3. 역사 반영 오류
실제 한국사를 소재로 하는데 역사 반영 오류가 많다는 문제가 있다.[5] 웹툰 갤러리에서 정리한 역사 오류 목록 # 이 외에도 7번째 에피소드에서는 연산군일기를 연산군'실록'이라 표기하는 오류를 범하기도 했다.[6] 다른 만화도 아니고 한국사를 다루는 만화라는 점을 생각한다면 이는 심각한 문제라 할 수 있다. 특히나 조선왕조실톡의 경우 저연령층의 조회가 많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잘못된 역사를 가르칠 수 있다는 점 때문에 상당히 문제가 심각한 편. 게다가 네이버 웹툰 댓글란 특성상 제대로 토론을 하기가 힘들기 때문에 잘못된 속설을 알고 있다 하더라도 제대로 짚어주기가 힘들다는 부분을 감안한다면 가볍게 넘길 문제는 아니다. 네이버 웹툰에는 댓글의 답 댓글도 없고 댓글 검색도 되지 않으며 베스트 댓글에 오르는 것도 운과 흐름에 많이 달려 있으며 댓글의 추천 수 조작이 빈번히 일어난다.또한 《툰드라쇼 - 조선왕조실톡》 에서는 임금이 자신을 지칭할 때 '과인'이 아닌 '짐'을 쓴 적이 있다. 사실 과인 표현을 자주 쓰진 않았다. 자책하거나 겸손해야할 상황에서 주로 사용했고, 평상시에는 그냥 '나'를 뜻하는 '여(余)' 또는 '고(孤)'로 지칭했다. 하지만 짐은 황제만 쓸 수 있었기 때문에 확실히 틀렸다.
또한 조선왕조실톡의 사료 조사가 조선왕조실록이 아닌 리그베다 위키(엔하위키 미러)를 참조한 것 같다는 의혹도 제기됐었다.# 문종 문서를 토대로 반영한 것 같다는 지적. 위키위키는 특성상 신뢰성이 매우 낮다. 실제로 리그베다 위키를 참조했다면 이 카톡 짤방에서 편향된 역사 서술을 불러올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심각한 문제가 된다.[7]
이후 한 네티즌이 조선왕조실톡 18화의 '마노라'가 몽골어 기원이라는 것에 대해 무적핑크에게 메일을 보냈고 답장이 왔으나 이를 실록에서 참조하지 않았다는 것이 밝혀졌다. # 1, # 2[8] 국립 국어원의 답변을 따르면 '마누라'의 어원은 고유어로 추정된다는 답이 왔다. 이후 계속 이어지다가 결국 무적핑크는 그 네티즌의 메일을 수신차단했다. 물론 메일함 삭제를 이용한 편집이 가능하기에 정확한 차단 사유는 알 수 없다.
창덕궁이 나올 때마다 창덕궁 정전인 인정전 사진이 나오는데 인정전 용마루의 오얏꽃(李花)[9] 무늬 장식은 확실히 근대에 붙인 것이다. 현재 창덕궁은 대한제국 선포 후 서양식으로 고쳐져서 건물 장식 등이 작중 배경인 조선시대와는 조금 다르다. 그런데 지금 모습을 찍은 사진을 그대로 사용했기 때문에 발생한 문제인 듯하다. 경복궁 또한 현재 사진을 사용하는데 이것 또한 고종 때 중건한 것인지라 조선 초와는 많이 다르다. 그때 경복궁은 궁장 형식이 다르고, 청기와를 얹는 등 현재와 차이가 많았다.
- 왕들을 묘호로 부르는 것을 오류라고 주장하는 견해가 있으나, 이것은 작가가 첫 회 서두에서부터 일부러 그렇게 쓰겠다고 대놓고 선언한 것이므로, 서술방법의 적절 여부를 논할 수는 있어도, 오류라는 평가를 할 수는 없다.
3.1. 각 화 오류
☆ 이 항목에서는 역사 반영 오류 뿐만이 아니라 다양한 오류를 기술하였다.3.1.1. 4화
조선시대에 있었던 구휼(救恤)에 관련된 내용. 성종이 30살이 되도록 결혼을 못한 가난한 집안의 자손들에게 혼수비용을 대주고 경국대전에도 법으로 박아넣었다는 얘기가 나오는데 일단 틀린 것은 아니나, 해당 화에서 묘사한 것처럼 마냥 감동적이고 좋은 의미의 것은 아니었다.경국대전 예전(禮典) 혼가(婚嫁) 편에 의하면 조선에서는 혼인 연령을 남성 15세, 여성 14세 이상으로 정했고 양가 부모 중 한 사람이 숙질(宿疾)[10]이 있거나 나이가 50세가 되었는데도 자녀의 나이가 겨우 12세 이상이면 관아에 고해 혼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둘의 나이가 6살 차이가 나고 서로 결혼하기 원치 않는다면 혼인시킬 수 없었다.[11] 그리고 위혼망모율(爲婚妄冒律)이라는 것이 있었는데 혼인에 있어서 거짓을 행할 경우 대명률에 의거해 처벌할 수 있는 법이었다. 이 법에 의하면 결혼을 시키려고 나이를 속이거나 딸을 숨기거나 하면 처벌을 받는 것이었는데, 여성의 가문에서 거짓을 행할 경우 장(丈) 80대의 형에 처하며, 예물로 보낸 재물은 추징하여 돌려주었으며, 남성의 가문에서 행했을 경우는 죄의 등급을 1등급 가중하는 대신에 예물로 보낸 재물은 추징해 돌려주지 않았다.
그런데 부득이하게든 아니든 간에 혼기가 되어도 시집을 보내지 않을 경우엔 자동으로 위혼망모율에 저촉되기 때문에 처벌받을 수도 있었고, 성종 대에 혼인 문제에 관한 지적이 나왔기 때문에 국가에서 일부 지원하게 명문화 된 것이다.
이미 해당 화의 한 베댓이 비슷한 부분을 지적한 적이 있고 작가 자신도 문제점을 알았는지
3.1.2. 34화
간관의 상소에서 야구 이야기를 잠깐 풀었는데, "첫 타자가 삼진당하면 둘째 타자도 흔들리고, 결국 셋째 타자가 병살쳐서 게임 끝나는 거예요"라고 했지만 2번 타자가 어떤 식으로든 출루를 해야 3번 타자가 병살을 칠 가능성이 생긴다. 또한 야구가 1회로 끝날 것도 아니니 첫 이닝에 성적이 나빴다고 "오늘 경기 망했어"라고 단정지을 일도 아니다.[12] LG 트윈스의 팬으로 예명도 LG의 응원구호 "무적LG"에서 따왔다는 작가의 야구 지식이 의심되는 수준.3.1.3. 46, 47화
여러가지 문제가 복합적으로 나온다.
● 작가가 직접 그린 지도가 나오는데 명나라의 영토를 함경도와 만주, 연해주를 포함한 모든 북방 영토와 베트남 일대까지 포함시켰다.[13] 베트남은 위화도 회군이 벌어지던 1388년 당시에 쩐 왕조 치하의 독립국이었다. 쩐 왕조는 1400년에 마찬가지로 영락제에 의해 멸망했고 베트남에는 교지포정사(交趾布政司)가 설치되어 명의 지배를 받았다.
● 동북면에 대해 설명하면서 '잘 크는 것이라곤 어린아이들과 감자뿐' 이라는 표현을 썼는데 당시에 동북면에는 감자 같은 건 없었다(...). 조선에 감자가 유래된 건 1824년, 즉 순조 시기였다.
● 46화에서 우왕이 별 얼토당토 않는 이유로 이성계에게 시비를 걸고 경계하는 모습으로 그려지는데, 우왕이 통치 시기에 환락을 일삼은 것은 사실이나, 이성계 자신도 고려 왕실에 있어 위협적인 존재였던 것은 사실이다. 일단 이성계가 지휘했다는 사병집단인 가별초(家別抄)의 경우는 사병혁파가 이뤄지던 태종 시기에도 500호나 될 정도로 큰 규모였고 이성계 자신은 금오위상장군(金吾衛上將軍) 겸 동북면상만호(東北面上萬戶)으로서 거의 동북면의 봉건 영주와 다를 바 없는 존재였다. 거기다가 이성계와 그 가문은 동북면의 건주 여진들과도 우호적인 관계였기 때문에 우왕 입장에서는 이성계를 당연히 경계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우려대로 이성계는 위화도 회군 이후 왜구가 고려의 사방을 공격하고 있는 판에도 불구하고 수도 개경을 공격해 함락시켜 사실상 고려를 무너뜨렸다.
● 이성계가 4불가론을 얘기하며 콜레라를 언급하는데 위화도 회군 시절에는 콜레라가 존재하지 않았다. 콜레라는 인도 갠지스 강 일대의 오래된 풍토병이었으며 19세기에 전 세계적으로 퍼졌으며 조선에서는 콜레라를 '호열자(虎烈刺)'라고 불렀는데 콜레라를 의미하는 일본어 '호열랄(虎烈剌)'을 잘못 읽은 것[14]에서 유래한 것이다.
● 이성계가 4불가론을 할 때, 마지막에 왜적의 얼굴은 고니시 유키나가의 초상화를 가져다 썼다. 물론 시즌2의 임진왜란 때 고니시도 같은 얼굴을 썼다. 이를 볼 때는 설마 초상화의 주인을 몰랐을 리는 없고 아마 한국인들에게 임진왜란으로 잘 알려진 일본인중 한명이니 가져다 쓴 것으로 보인다. 여말선초의 왜적들은 쇼니 가문, 시마즈 가문들로 추측하는게 대세인데 왜 굳이 고니시를 썼는지 의문.
3.1.4. 66화
해귀(海鬼, 흑인용병)에 관련된 내용. 주로 노예무역을 주도했던 건 포르투갈이었고 그런 포르투갈과 노예무역을 했던 국가들은 대개 중-남부 아프리카의 왕국이나 부족들이었는데 해당 화에 묘사된 해귀의 고향은 어째 이집트에 있는 베두인 오두막 사진[15]을 사용했다. Pixers 사이트의 해당 사진의 원본 주소 베두인의 활동지역이 주로 아라비아 반도와 중동, 이집트 일대였으니 당연히 오류인 셈. 사진 속 엄마와 아기를 가리려고 팔 벌린 원주민 캐릭터를 그려넣은 건 덤. 아프리카 분위기를 내는 것에 열중해 정작 내용과는 영 딴판인 사진을 가져다 쓴 것으로 보인다.[16]
3.1.5. 77화
'인종, 중종이 붕어하자 즉위하다.' 라고 쓰는 오류를 범했다. 붕어(崩御)는 황제의 죽음을 가리키는 뜻으로, 태조부터 선조까지는 모두 제후가 죽었을때 쓰는 표현인 훙(薨)으로 기록되어 있다.[17][18][19] 이는 중국과 주변 국가 간의 철저한 책봉질서에서부터 비롯된 예법으로, 단순히 죽음을 지칭하는 같은 표현이라고 넘길 사항이 아니다. 오히려 198화에서 경종이 죽었을때, '전하 훙'이 실시간 인기 검색어 1위로 올라간 모습을 그리고 있는데, 이 또한 사실과 다르다. 명나라가 망한 이후인 인조부터는 훙(薨)이 아니라 왕(王)의 격식에 맞는 표현인 승하(昇遐)로 기록되어있기 때문 있다.[20][21] 작가가 조선왕조실록을 만화로 그리면서도, 심지어 매화 말미마다 정사기록을 소개하며 실록을 반영하는 것 처럼 하면서도, 정작 해당 파트의 실록을 참조하고 있는지 의심이 되는 부분. 하지만 역덕들의 관심이 식어서 그런지 지적하는 사람도 없었다.
3.1.6. 93~98화
기본적으로 3층 구조인 판옥선에 망루도 없고, 서양 갤리선 마냥 노가 수평으로 되어서 2층의 창구멍에서 튀어나와 있는 등 조선수군의 대표 전함인 판옥선의 세부묘사가 엉터리로 되어있다.3.1.7. 특별편
'흙수저 소년의 꿈'이라는 제목으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인생역전을 묘사했다. 히데요시가 본인의 명예와 권력의 안정화를 위해 조선을 침공한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22]물론 해당화와 흡사한 의견이 없는 것은 아니다. 위키백과에서 얘기하는 히데요시의 조선 침략에 대한 '일반적인 분석'에 의하면 히데요시는 해당 화에서 얘기하듯 천황가나 그 분파도 아닌 천출 출신[23]이라 쇼군이 될 수가 없었다. 때문에 쇼군(정이대장군)이 되려면 그 이름에 걸맞게 옛 영토를 확보하고 오랑캐를 무찔러 승전한 뒤에 천황에 의해 쇼군직을 받은 뒤 자신의 막부를 구성하는 것 뿐이었다. 그를 위해서는 일본서기 등에서 이야기하는 남쪽(미나미), 즉 임나(任那)에 해당하는 조선의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를 정복하고 명나라를 침으로서 조건을 달성하려 했다는 것이다. 즉 전공(戰功)을 통해 쇼군직을 받으려 했다는 것. 더불어 새 영지들을 무사 및 영주들에게 하사함으로서 세력을 돈독히 하려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설명에도 헛점은 있는데, 일단 선조 24년(1591) 3월에 조선에 보낸 답서의 내용 중에 조선이 일본에게 입조(入朝)하고[24][25] 먼저 명을 쳐달라는 내용과 함께 정명가도(征明假道), 즉 '명을 치기 위해 길을 열어달라'는 말[26]을 넣었다는 것은 위키백과의 일반적인 분석에서 쇼군이 되기 위해 조선의 남도를 정벌해야 하는 히데요시의 행보와는 일치하지 않는다. 조선의 정복 자체도 결코 적지 않은 병력과 물자가 들어가는 일이었던데다 조선의 남부를 확보해 쇼군직을 얻는 게 목적이었다면 명나라를 운운할 필요도 없이 그냥 조선을 치고 얻었으면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개인의 명예와 권력의 안정화를 위해'라는 것을 대입하면 이야기가 좀 달라진다. 일단 히데요시가 올랐던 관백(関白)의 경우는 영외관인지라 품계 자체가 없는 매우 특수한 자리이며 천황을 대신해 정무를 본다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었다. 게다가 고셋케라 불리는 5가문 이외에는 취임할 수도 없어서 히데요시 또한 고노에 사키히사의 조카로 입양되어 임명될 정도로 취임 자체가 대단히 어려웠다. 또한 관백은 역임자의 직위에 따라 권위가 달라지는데 히데요시는 당시 태정관[27]의 정이위 내대신(内大臣)에 있었다가 1585 12월 25일에 최고직위였던 정이위[28] 태정대신(太政大臣)에 올랐다. 태정대신이 조선의 영의정과 동급이었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히데요시는 그야말로 조정을 틀어쥔 일국의 국왕에 가까운 권위를 쥐었던 셈이다.
이렇게 일본의 모든 정권을 손에 쥔 상황에서 히데요시는 굳이 쇼군직에 목맬 이유가 없었고 그러한 모습은 이미 선임자인 오다 노부나가 역시 마찬가지였다.[29] 정리하자면 히데요시는 이미 조정 내 최고위에 오른데다 관백과 태정대신에 오르면서 명분[30]마저 자기에게 유리했기 때문에 굳이 막부 최고직을 욕심낼 필요가 없었던 것.[31] 즉, 조선을 침공한 계기가 해당화에서 묘사하는 것처럼 히데요시의 정권에 대한 열망과 열폭이 아닌 건 분명하다.
게다가 조선 출정에 있어서 휘하 영주 및 무사들의 반대도 은근히 심했다. 소 요시토시나 고니시 유키나가, 이시다 미츠나리, 도쿠가와 이에야스 등이 대표적인 반대 입장이었다. 또 조선에 보낸 무례하기 짝이 없는 국서를 조선 뿐만이 아니라 태국, 류큐 왕국 등에도 보냈고 심지어 임진왜란 1년 전에 선교사 편으로 포르투갈령 고아의 총독에까지 서신을 보내 복종하고 공물을 보내라는 서신을 보냈고[32] 임진왜란이 벌어진 뒤 1년 후에 스페인령 루손의 총독에게까지 서신을 보내 조공하라고 협박까지 했다. 단순히 공을 세워 쇼군직을 얻기 위해 하는 행동치고는 과한 이상 행동인 것이다. 이러한 황당하고 어이없는 발언과 행위를 증거로 해서 '히데요시 노망설'이 등장하기도 했다.
사족으로 특별편이라고는 하나, 전편에서 히데요시가 고니시의 가족을 인질로 잡고 협박하는 악당처럼 묘사해 놓고 갑자기 히데요시의 과거사를 사용해 흙수저에서 성공한 인물인 것처럼 묘사하니 어째 기묘한 느낌(...)을 받지 않을 수 없다.
3.1.8. 127화
소현세자가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간 1637년 당시, 예친왕(睿親王)[33]이었던 도르곤의 나이는 대략 25살 정도였다. 상당히 젊은 나이였지만 후대에 남은 초상화는 그의 섭정왕 말년에 그려진 게 대부분이기 때문에 다소 이질감이 들 수는 있는 부분이긴 하다.
작가도 이러한 부분을 염려했는지 도르곤의 원래 초상화에 젊은 시절의 모습으로 나름 상상해서 덧그렸는데[34] 예상보다 훨씬 조잡하게(...) 그려졌다는 문제가 생겼다. 차라리 다른 화의 인물이나 같은 대의 인물이지만 초상화가 하나도 남지 않은 용골대처럼 아예 상상해서 그리던가 아니면 어차피 역사적 인물이니까 나이가 맞지 않더라도 초상화를 그대로 쓰고 당시 나이 등을 만화에 표기해도 됐는데 굳이 덧대어 그린 것이다. 도르곤의 원본 초상화를 보면 알겠지만 도르곤은 말년에 제법 턱수염이 풍성한 편이었는데 덧그리는 과정에서 이 수염을 지우지도 않았고 원본 초상화와 달리 상당히 굵은 선을 사용한 탓에 얼굴 부분만 도드라져서 굉장히 어색하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리고 진짜 도르곤의 초상화는 황당하게도 인조의 죽음에 대해 다룬 145화에서 청나라 사신의 얼굴로 사용되었다. 더 어이없는 부분은 인조가 죽은 해는 1649년이고 도르곤이 사망한 건 그 다음 해인 1650년이라는 점이다. 즉, 굳이 도르곤의 얼굴을 가져다 놓고 청나라 사신으로 칭할 필요 없이 그냥 도르곤이라고 해도 되었다는 점이다(...).
3.1.9. 131화
암행어사에 대해 다루었는데, 암행어사에 대한 갖은 속설(생존률 30% 등)에 대해 검수 없이 그대로 다루었다. 오류에 대해서는 암행어사 문서 참조. 게다가 시리즈물처럼 계속해서 소현세자와 관련된 내용을 다루다가 뜬금없이 암행어사에 대한 내용을 다뤘다.3.1.10. 134화
소현세자와 희빈 장씨의 5촌인 당숙이자 역관으로 활동한 장현(張炫)의 이야기인데 역사적 사실보다는 내용에서의 모순된 부분이 존재한다. 해당 화 마지막 부분에 동생 장형(張烱)에 대한 얘기가 나오면서 장현 자신이 태어날 조카들의 이름을 지어뒀다는 발언이 등장하며 여자아이가 태어나면 장옥정으로 지을 생각이라고 말하는 장면이 있다. 그런데 황당한 건 해당 화 마지막의 해설 부분에 존재하는 픽션 부분에 다음과 같은 언급이 되어 있다는 것이다.장현이 조카들의 이름을 지었다는 기록은 없다.
'장옥정'이라는 이름 역시 실명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장옥정'이라는 이름 역시 실명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희빈 장씨의 이름으로 알려진 '장옥정(張玉貞)'이라는 이름은 실록이나 승정원일기 등 사료에 없으며 인현왕후의 오라비인 민진원이 쓴 단암만록(丹巖漫錄)에 등장하나 해당 자료는 거의 야사로 취급되는데다 너무 서인 위주의 시각으로 기록되었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때문에 픽션 부분이 틀린 건 아니다. 그러나 해당 화에서의 묘사가 픽션 부분과 완전히 반대되는 게 문제(...).
사실 희빈 장씨의 이름이 장옥정이라는 내용이나 장현 자신이 5촌 조카의 이름을 미리 지은 듯한 묘사는 굳이 넣을 필요가 없고, 없다해도 내용에 지장을 주지는 않는다. 어차피 최근에서야 드라마나 매체를 통해 유명해진 장옥정이라는 이름보다는 꾸준히 불려온 장희빈이라는 별칭이 더 알려져 있고 굳이 사실이 아닌 부분을 사실처럼 묘사한 건 과장 내지는 왜곡의 영역에 포함되기 때문이다. 게다가 장현이 10대밖에 안 된 사촌이 미래에 낳을 조카들의 이름을 미리 정해둔다는 점 또한 너무 억지스러운 묘사다. 아마도 장현의 5촌 조카가 장희빈이라는 점을 부각하기 위한 장치로 보이나 별로 적절치 못했던 셈.
덤으로 장현이 소현세자에게 장형의 사진을 보여주며 남동생이라고 하는 장면도 있는데 엄밀히 말하면 사촌남동생이다. 그 부분에 대해선 '기록에 있는 것' 부분에 적혀 있긴 한데 만약 독자들이 그 부분을 읽지 않고 바로 다음화로 넘어갈 경우 장현과 장형이 친형제 사이라고 오해할 가능성이 생길 수 있다.
3.1.11. 소현세자편
※ 암행어사에 대한 내용을 담은 131화 제외한 127-141화에 관련된 내용이다.- 소현세자와 병자호란 관련 부분은 전적으로 인터넷발 소현세자 긍정론에 기대어 이뤄지고 있다. 시헌력은 소현세자가 아니라 청나라에 보낸 사신을 통해 접했고 들여왔음이 인조실록에 떡하니 적혀있다.
- 138화에서 인터뷰하는 한 시민이 세자전하라고 하는 오류가 났다.
3.1.12. 142화
군호를 지을 때 적자녀(대군, 공주)는 좋은 글귀나 뜻을 따서 지어주고, 서자녀(군, 옹주)는 지명으로 지어준다고 묘사했는데 오류다. 세종 때부터는 중국의 예에 따라 대군이든 군이든 왕자들에게 군호를 지어줄 때는 특정 지역의 옛 명칭이나 이칭을 따서 지어줬으며, 이를 읍호(邑號)라 한다. 예시를 몇가지 들면 이렇다.- 수양대군(세조): 황해도 해주시의 옛이름
- 해양대군(예종): 경남 남해군의 옛이름
- 진성대군(중종): 경남 진주시의 이칭
- 창녕대군(연산군 차남): 경남 창녕군
- 덕흥대원군(중종 7남): 충남 천안시의 이칭
3.1.13. 149화
대동법 추진 과정에 있어 김육vs부패한 관리들이라는 전형적이고 잘못된 선악구도를 잡았다. 실제로 김육은 조정 내에서 인신공격을 당한 적이 없다시피 하며, 오히려 그의 정책을 비판하는 사람들도 김육의 안민, 충 등의 사람됨은 칭송했다.3.1.14. 153화
상투에 관한 내용인데 정수리의 머리 일부를 밀고 상투를 묶는 '배코치기'가 마치 조선시대 상투의 전형인 것처럼 묘사해 놨다. 그러나 상투 문서에도 나와 있듯이 조선은 엄격한 유교국가였기 때문에 신체발부 수지부모가 나름 엄격히 지켜지고 있었으며, 때문에 배코치기는 흔하게 이뤄지는 게 아니었고 설령 하더라도 동전 크기 정도에서 손바닥의 절반 정도의 면적만을 밀었기 때문에 해당 화에서 묘사된 것처럼 거의 반 민머리가 되는 것도 아니었다.[36] 게다가 너무 길면 관례를 지키기 위해 부득이하게 머리털을 자르기도 했고[37] 혹은 상투를 2개로 묶는 '쌍상투'라는 방식 또한 있었기 때문에 배코치기는 말 그대로 선택사항에 불과했다.배코치기는 주로 일반 백성들 사이에서 이뤄졌으며 유교 관념이 일반 백성들보다 훨씬 엄격했던 사대부나 왕실에서는 배코치기가 거의 이뤄지지 않거나, 하더라도 티가 나지 않게 했다. 때문에 사극에 빠진 여학생이 진실을 깨닫는(...) 장면에서 사극에 등장하는 왕이나 무사의 상투가 너무 심한 배코치기 식으로 묘사되거나 사관들의 관모를 벗겨서
3.1.15. 156화
비전문가의 한계를 명확히 드러냈다.인조처럼 자신보다 한참 어린 계비를 맞이한 조선 왕들은 또 있다. 51세에 19세의 인목왕후 김씨와 재혼한 선조, 41세에 16세의 인원왕후 김씨와 재혼한 숙종, 무려 66세에 15세의 정순왕후 김씨와 재혼한 영조, 33세에 13세의 순정효황후 윤씨와 재혼한 순종 등이다.
왕비는 단순히 왕의 배필이 아닌 내외명부를 총괄함은 물론, 왕의 사후 권력의 핵심중 하나였다. 그래서 내명부의 수장인 왕비의 자리를 오래 비워둘 수 없었다. 극단적인 예로 계유정난의 원인 중 하나가, 왕(단종)이 어리다는 것과 어린 왕의 뒤를 봐줄 대비나 대왕대비의 부재였다. 단종의 어머니 현덕왕후 권씨와 할머니 소헌왕후 심씨가 모두 세상을 떠난 뒤였고, 아버지 문종과 할아버지 세종이 새 왕비를 책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3.1.16. 160화
송준길의 얼굴이 들어가야 할 부분에 송시열의 초상이 들어갔다. 정확히 얘기하자면 송준길의 얼굴로 사용된 초상화는 18세기 조선 후기 문인이자 화가인 김창업(1658∼1721)이 그린 것으로서 현재는 '제천의병전시관'에서 관리 중이다. 동아일보 링크 충현서원에서도 해당 초상화를 송시열로 보고 있다. 아마도 작가는 동춘당에 대한 내용이 담긴 다음 블로그에서 자료를 찾은 거 같은데 해당 초상화가 송준길이라고 주장하는 곳은 이 블로그 하나 뿐이다. 즉, 작가는 자료에 대해 교차 검증도 없이 무단으로 게재한 셈이다.3.1.17. 163화
이른바 기별(奇別)[39]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렸던 조보(朝報)에 관한 내용. 해당 화의 픽션 부분에 '기별 시스템이 정착한 것은 성종대'라고 되어 있는데[40] 태종 시기에는 조보와 비슷한 역할을 한 '비목(批目)', 즉 이조나 병조에서 인재를 추천하면 임금이 직접 재가하고 의견을 달아 의정부로 보내는 형태의 제도가 있었고 아래와 같은 일도 있었다.태종 13년(1413년) 12월에 사헌부에서 의정부의 이방녹사(吏房錄事)[41]를 탄핵한 일이 있었는데[42] 그 사유가 '16일에 있었던 아조(衙朝)[43]에서 아방녹사가 분발(分發), 즉 조보를 발행하기 전에 관리들에게 미리 돌리던 게 늦는 바람에 당상관들이 3엄(三嚴)[44]이 끝난 이후에야 입궐해버린 일이 터졌기 때문이었다. 해당 기사 }}}||
그리고 '한양 사는 꽃님'과 '나주 사는 옥이'가 대화하는 장면과 기별에 세종이 "수락상에 고기가 적다"고 분노한 사건에 대해 실려있는 것으로 묘사되었는데, 잘못된 묘사다. 우선 조보(기별)는 승정원[45]에서 작성했는데 승정원 특유의 속기용 초서체를 사용했기 때문에 읽는데 대단한 애로사항이 많았다. 사대부조차도 읽는데 난항을 겪었으니 사대부 이하의 사람들은 누군가가 조보를 해석해 읽어주지 않으면 알기도 어려웠다.
게다가 조보가 읽기 힘든 문자 등을 편집하는 과정을 거쳐 인출(印出)된 뒤 민간에 퍼진 것은 선조 10년(1577년) 정도의 일이다. 그나마도 약 3개월이 지나고 나서 선조가 눈치를 채는 바람에 근절되었다. 또한 조보는 조정과 멀리 떨어진 지방관들에게 조정의 상황이나 임금의 지시 등을 알리는 역할도 도맡았기 때문에 고기의 양이 적어 임금이 분노한 일같은 지방관청에서 굳이 알 필요가 없는 너무 시시콜콜한 부분은 조보에 기재되지도 않았고 조보를 발행하기 전에 사전 검토를 해서 불필요하거나 과하다 싶은 내용들은 빼기도 했다. 빼라고 지시했음에도 조보에 그대로 실었던 것은 굉장히 드문 경우에 해당한다.
3.1.18. 개천절 특집
고조선과 조선의 국호에 대한 에피소드를 담고 있는데 이성계의 터전이었던 화령(和寧)에 대해서 명나라가 무너뜨린 원나라의 수도, 카라코룸의 행정구역. 명나라에게는 모르도르나 다름없는 곳이라고 적어놨는데 엄연히 말하자면 틀린 설명이다. 사실 아래의 지도를 봐도 금방 알 수 있는 부분.1294년의 원나라 행성 중 일부 |
즉 카라코룸, 중원의 한족들이 화림(和林)이라고 부른 곳은 영북행성(嶺北行省)에 속해 있었으며 화령 지역[46]은 1258년에 원나라가 직접 통치하게 되면서 요양행성(遼陽行省)에 포함되었기 때문에 화령은 결코 카라코룸의 행정구역이 될 수 없다(...). 차라리 화림과 화령의 '발음의 유사성'을 이유로 들었다면 제법 그럴싸한 설명이 됐을 수도 있다. 화림(카라코룸)은 중국식 발음이 흐어린(Hélín)이고[47] 화령은 중국식 발음이 흐어닝(héníng) 정도가 된다.[48] 즉 고려를 계승한 신생 제후국이 국호로 화령을 할 경우 명나라로선 치가 떨리는 원나라의 옛 근거지 화림(카라코룸)을 계속 떠올려야 했기 때문에 차라리 아무 것도 연상되지 않으면서도 의미도 괜찮은 '조선'이라는 국호를 순순히 허락한 것이라고 생각해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차라리 이 편이 아예 다른 행정구역 소속인 곳들을 마치 한 소속인 양 잘못 설명하는 것보다는 훨씬 매끄러운 설명이 될 수 있다.
3.1.19. 178화
장영실이 완성한 자격루에 엎어져 있는 장면에 세종대왕 때의 자격루가 아닌 보루각 자격루의 사진이 사용되어 있다.3.1.20. 179화
김만중이 한글로 소설을 집필한 것을 "교육부장관이 라이트노벨을 쓴 격"이라고 했는데 완전히 잘못된 내용이다. 첫번째로 김만중은 꾸준히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온전히 표현하는데 한자만으로는 부족하며, 우리글이 수단이 될 때 그 효과가 충분하다"고 주장했으며 당시 양반계층에서도 그 주장을 어느정도 수용하는 분위기였으므로 한글로 쓰였다하여 가볍게 취급되지는 않았다. 이는 윤선도의 시만 봐도 알 수 있다.3.1.21. 197화
공교롭게도 4화 '행복한 메리 구휼스마스' 에서 다룬 솔로의 혼인에 대한 내용과 동일한 내용을 다루고 있다.솔로로서 '대전 박 상궁'이라는 인물을 등장시키는데, 상궁은 내명부 소속의 궁인(宮人)으로서 결혼이 절대 불가능했다. 심지어 천재지변이 일어났을 때 출궁 당하는 일은 있어도 이들을 혼인시키는 일은 없었다. 그 예로 태종 시기에 우정승이었던 조영무(趙英茂)가 출궁한 여인을 첩으로 맞이했다가 사헌부의 공격을 받기도 했다.[49] 때문에 이야기에 걸맞은 소재의 인물을 잘못 선정한 셈이다.
3.1.22. 204화
갓 태어난 사도세자를 아끼는 영조에 관련된 일화를 다루고 있다. 내용 자체에는 큰 이상이 없지만 소소한 부분에서 논란이 될 소지가 있다.논란이 있는 장면이다. 사진자료에 '호포제 1', '호포제 2' 라는 이름의 파일이 있다. 물론 호포제는 조선 말인 흥선대원군의 섭정 시기에 시행되긴 했지만, 저 당시에는 조세 개혁안이 말 그대로 우후죽순으로 등장했던 시기였다. 흥선대원군 이전인 숙종 시기에 남인 계열의 인물이었던 윤휴(尹鑴)가 국역의 부과대상에서 양반이 제외되어서는 안된다고 주장하기도 했고, 서인 계열의 권신이었던 김석주(金錫胄)의 경우에는 양반에게도 군포를 부담하는 유포론(儒布論)이 좌절되자 유포론을 대폭 수정해 개개인(人身)이 아닌 가호(家戶)의 단위로 군포를 부담하게 해야 한다는 '호포론(戶布論)'을 내놓기도 했으나 모두 권신들과 양반들의 반대에 부딪혀 좌절되었다. 즉, 저 장면을 '영조가 호포제를 실시했다'가 아니고 '호포제도 고려 대상에 있었다'고 보면 크게 문제될 구석은 없다. 태그도 '세금개혁안'이 아니던가.
여담으로 영조가 실시한 개혁 정책은 군역을 대신해 바치게 했던 군포를 2필에서 1필로 줄인 균역법이다. 그러나 균역법은 결국엔 실패했다. 애당초 이 정책은 양반 지주들의 납세를 종용하기 위해 군포 납세의 기준을 가호가 아닌 토지의 결(結, 넓이)로 잡았고, 군포를 줄인 대가로 발생하는 손실을 지주들에게서 '결손미(結作米)'라는 이름의 쌀로 거둬들여서 떼우려 했다. 그러나 결코 바보가 아니었던 지주들은 자기들이 내야 할 결손미를 자신들이 고용하고 있던 소작농들이 내게 했다. 결국 균역법은 의도는 좋았지만 자유농민의 대다수가 몰락해 소작농이 된 상황이었기 때문에 힘든 백성들에게 별 도움이 되지는 못했다.
3.1.23. 213화
조선의 무역 효자 상품이었던 홍삼에 대한 이야기. 해당 화에서는 마치 홍삼의 개발이 숙종-영조 시기에 홍삼 무역에 매진한 백성들이 손해를 감수하기 위해 개발된 것처럼 묘사하고 있는데 사실이 아니다.북송의 사신인 서긍(徐兢)[50]이 집필한 고려에 대한 기행문인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 23권 잡속(雜俗) 토산(土産) 편에 아래와 같은 기록이 있다.
人參之榦。特生,在在有之。春州者。最良。亦有生孰二等。生者。色白而虛。入藥則味全。然而涉夏。則損蠹。不若經湯釜而孰者。可久留。舊傳形匾者。謂麗人。以石壓去汁作煎。今詢之。非也。乃參之孰者。積垜而致爾。其作煎當自有法也。
(인삼의 줄기는 한 줄기로 나는데 어느 지방이고 있으나 춘주(春州)[51] 것이 가장 좋다. 또 생삼(生蔘)과 숙삼(熟蔘) 2가지가 있는데 생삼은 빛이 희고 허(虛)하여 약에 넣으면 그 맛이 온전하나 여름을 지나면 좀이 먹으므로 쪄서 익혀 오래 둘 수 있는 것만 못하다. 예로부터 전하기를, 그 모양이 평평한 것은 고려 사람이 돌로 이를 눌러 즙을 짜내고 삶는 때문이라 하였지만, 이제 물으니 그것이 아니다. 찐 삼의 뿌리를 포개서 만들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고, 그 달이는 데에도 마땅한 법이 있다.)
(인삼의 줄기는 한 줄기로 나는데 어느 지방이고 있으나 춘주(春州)[51] 것이 가장 좋다. 또 생삼(生蔘)과 숙삼(熟蔘) 2가지가 있는데 생삼은 빛이 희고 허(虛)하여 약에 넣으면 그 맛이 온전하나 여름을 지나면 좀이 먹으므로 쪄서 익혀 오래 둘 수 있는 것만 못하다. 예로부터 전하기를, 그 모양이 평평한 것은 고려 사람이 돌로 이를 눌러 즙을 짜내고 삶는 때문이라 하였지만, 이제 물으니 그것이 아니다. 찐 삼의 뿌리를 포개서 만들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고, 그 달이는 데에도 마땅한 법이 있다.)
즉 홍삼 자체는 이미 고려 때부터 숙삼(熟蔘)이라는 이름으로 만들어져 왔다는 얘기다. 사실 이 부분은 한국담배인삼공사 사이트에 들어가도 나오는 내용이다. 해당링크
조선 시대에는 일반적인 삼(수삼), 쪄서 말리는 홍삼, 겉껍질을 벗기거나 혹은 그냥 말린 백삼(白參) 등 다양한 인삼에 대한 가공법이 존재했고, 그 중 조선에서 가장 인기가 있던 게 바로 백삼이었다. 그러나 중국에서 기름진 음식을 먹은 후 백삼을 섭취하면 위통(胃痛)을 일으킨다는 잘못된 정보[52]가 나돌아다니는 바람에 인삼 무역에 타격을 받게 되었고, 그에 대한 대비로 기존에 존재한 홍삼의 개발이 더 활발해진 것이다.
3.1.24. 214화
● 해당 에피소드에 서유기 관련 내용이 잠깐 등장하는데 사오정의 모습이 왠지 일본의 캇파처럼 묘사된 것 처럼 보인다. 같은 곳에 연재하고 있는 이말년 서유기에서 사오정의 모습을 모래 요괴로 제대로 묘사한 것과는 대조적이다.● 조선왕조실톡에서는 만화 제일 하단에 '기록에 있는 것'이라는 부분이 있어 실제 기록 일부를 수록해 놓는데 사도세자가 한 말이라고 써 놓은 게 가관이다.
판타지에서도 배울 바가 많다. 봄날 겨울밤, 병과 외로움을 치료하고 소일하는 데 도움이 되리라.
해당 발언은 사도세자가 해당 본문에도 나오는 『지나역사회모본(支那歷史繪模本)』의 서두에 쓴 말이며, 실제 기록은 아래와 같다.
其事之不贯可智矣 凡一券之內表歷代可足春日冬夜 求病求寂 一助消日也[53]
(그 일들이 가히 지혜로움을 이루지 못한다 하겠느냐.[54] 무릇 한 권 안에 여러 시대가 드러나니 족히 봄날, 겨울밤에 병과 고독함에서 구하고 소일하는데 도움이 되리라.)
(그 일들이 가히 지혜로움을 이루지 못한다 하겠느냐.[54] 무릇 한 권 안에 여러 시대가 드러나니 족히 봄날, 겨울밤에 병과 고독함에서 구하고 소일하는데 도움이 되리라.)
즉, 책 내용 자체가 온갖 중국의 기담들을 모은 것이라서 판타지라고 해도 크게 문제되진 않으나, 그걸 '기록에 있는 것'에 그렇게 외래식으로 기재를 해놨다는 것.
3.1.25. 215화
사도세자에 대해 잘못 알려진 대표적인 사례인데, 작가의 말에서 '사도'라는 호(시호)가 '불쌍하고 슬프다' 라는 뜻이라고 써놨다. 물론 사도라는 글자 자체는 '생각하며 슬퍼한다'는 뜻이 맞긴 하다. 하지만 시호 자체는 그런 의미와는 관련없고 시호를 정하는 '시법(諡法)'에서 나온 것이다.追悔前過曰思. 思而能改.
(추회전과왈사. 사이능개)
이전의 과오를 뉘우침이 '사(思)'이다. 잘 생각하여 능히 과오를 고칠 수 있었던 것이다.
(추회전과왈사. 사이능개)
이전의 과오를 뉘우침이 '사(思)'이다. 잘 생각하여 능히 과오를 고칠 수 있었던 것이다.
세자 본인이 자신의 죽음으로서 과오를 뉘우쳤다고 '판단'한 것은 영조와 조정이며 세자가 죽을 때의 나이가 28세 정도로 비교적 이르기 때문에 시법에 걸맞은 시호를 내린 것이지, 영조가 자신이 죽음으로 몰고 간 세자를 슬퍼하며 만든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3.1.26. 310화
조헌이 유배를 떠나며 임진왜란 때 만난 의병 동기랑 같이 브런치를 먹는 장면이 나왔다. 정작 조헌은 임진왜란 이전에 유배를 갔고, 임진왜란 당시 전사했으니 완벽한 오류.3.1.27. 322화
152화와 같은 주제를 똑같이 올렸다. 둘다 장마가 주제일 뿐만 아니라, 숭례문의 화로 비를 막는다는 것까지 똑같다.3.1.28. 경술국치 특집
한일합방조약으로 나라를 잃었다는 소식을 들은 백성들의 대화 속에, 당시에는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3.1운동이 언급되었다. 이 내용은 오류 확인 뒤 헤이그 특사 파견으로 인한 고종황제의 퇴위 소식으로 변경되었다.[56]또한 최근 있었던 안 좋은 일들로 인해 눈물을 흘렸다는 백성들의 대화 중에, 이토 히로부미가 총에 맞아 눈물을 흘렸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기쁜 소식으로 인해 눈물을 흘렸다기엔 개연성이 안맞는다.
3.1.29. 345화
내용이 끊겨버렸다. 뿐만 아니라 몇몇 조선왕조실톡 책을 본 독자들은 "조선왕조실톡 7권에 나온 에피소드와 완전히 똑같다"고 의문을 제기하기도 했다.4. 이미지 출처의 미기재
최근 웹툰계에서 가장 큰 이슈거리는 트레이싱과 무단 이미지 사용 등을 들 수 있는데, 조선왕조실톡에서는 때로는 작가 자신의 그림보다도 사진에 더 의지하는 경우가 종종 보인다. 그러나 위에서도 언급이 되었듯 작가 자신이 컷에 들어가는 사진 자료의 사용권을 구입하여 쓴다고 밝히고는 있으나[57] 사용권을 구매한 유료 이미지라 하더라도 2차 창작물인 웹툰의 형식으로 배포되기 때문에 복제권[58] 내지는 저작권 전부를 이양받지 않은 이상은 출처의 표시가 반드시 필요하다.저작권 법 제 37조 '출처의 명시'에서 출처 명시에서 예외되는 사항은 아래와 같다.
- 시사보도를 위한 이용(26조)
- 영리를 목적으로 하지 아니하는 공연, 방송(29조)
- 사적이용을 위한 복제(30조)
- 도서관 등에서의 복제(31조)
- 시험문제로서의 복제(32조)
- 방송사업자의 일시적 녹음, 녹화(34조)
조선왕조실톡의 경우는 시사보도, 방송자료도 아니고, 엄연히 공적인 영역(다수가 구독)이며 도서관, 시험문제로서 복제되는 것도 아니고 작가 자신이 웹툰을 올림으로서 영리를 얻기 때문에 위의 영역 중 단 하나에도 속하지 않으며 때문에 저작권법에서 자유롭기는 어렵다.
또한 작가가 직접 그 이미지를 그대로 쓰는 것이 아니라 편의에 따라 수정을 가하고 있기 때문에 더더욱 저작권법을 위반할 가능성이 농후하다. 92화인 '거짓말과 정유재란' 편에서는 부산 왜성으로서 구마모토 성(熊本城)을 사용하고 있는데[59] 이 이미지 역시 하늘, 구름, 나무 등을 삭제하고 성의 이미지만을 사용하였으며 왜군과 기치를 그려넣었다. 비슷한 경우는 89화 '도와줘요 명나라' 편에 등장하는 자금성 역시 마찬가지다.
92화의 원본
포토리아의 원본(92화)
89화의 원본
포토리아의 원본(89화)
이 부분에 있어서는 작가가 출처를 기입하거나 특별히 신경을 쓸 필요가 보이지만, 전혀 그런 움직임이 보이지 않고 있다. 그러나 사용된 이미지는 저런 스톡 이미지 사이트의 특성상 RF(로열티 프리) 이미지이기 때문에 작가가 정식으로 구매, 라이센스를 취득했다면 출처를 기재할 필요가 없다.[60] 예를 들면, 디자이너들이 광고 또는 디자인물을 제작할 경우 사용된(구매한) 이미지를 표기 할 필요가 없는 이유와 동일하다.
해당 웹툰의 이미지 사용에 대한 포토리아의 공식적인 답변이 나왔는데 아래와 같다. 판단은 각자 개인의 몫.
Q. 포토리아에서 구매한 사진에 그림을 덧대어 그리거나 사진 중 일부를 수정하거나 해서 웹툰으로 올려도 기본 라이선스를 구매한 것이니 별 문제가 없는 건가요?
A. Fotolia 사용약관 2조에 의하여 기본라이선스로 콘텐츠 구매시 보조적인 용도로 웹툰에 이용가능하며, 콘텐츠의 수정이 가능합니다. 오프라인으로 출판되는 경우 인쇄물 수량은 50만회까지입니다. 저작권(Copyright) 정보는 반드시 표시되어야하며, 저작권(Copyright) 정보는 해당 콘텐츠 자체 내, 콘텐츠 주변 공간 및 콘텐츠 참고 페이지 등에 표시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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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웹툰의 경우는 업로드로서 작가에게 수입이 발생하는 걸로 아는데 포토리아에서 구매한 사진을 웹툰에 삽입해서 업로드 하면 기본라이선스 제한사항에서 '3.2 웹사이트에 사용'[61]과 '3.3 소셜 미디어에 사용'[62][63] 등을 어기는 거 아닌가요? 정확히 어떻게 적용이 되는지 알고 싶습니다.
A. Fotolia 의 콘텐츠는 웹사이트에서 사용가능하지만, 제3자가 저작물을 다운로드하여 재사용할수 없도록 모든 합리적인 조치를 취해야합니다. 더불어, 소셜미디어에 사용시, 저작권 정보가 저작물에 보이도록 내재되고 당사의 크기 제한을 준수해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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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주관적 해석
조선왕조실톡은 대체역사물이나 퓨전사극이 아니다. 역사의 기록을 작가 나름대로 해석하여 각색을 섞어낸, 엄연한 역사교육 웹툰인 것이다. 하지만 최근 들어 스토리가 진행되고, 등장인물이 각자의 고유한 캐릭터성을 갖추게 됨으로써 작가의 주관적 해석이 너무 강하게 들어간다는 비판이 거세지고 있다.역사적으로 논란이 되는 인물의 좋은 점, 비극적인 점만을 그려내어 편향된 관점을 유도하는 일이 많고, 검증되지 않은 사건들에 야사와 개인해석을 섞어 그려내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예를 들면 남이) 또한 특정 인물의 외모 묘사를 미형으로 그리거나(예를 들면 조광조, 광해군) 감동적인 묘사를 넣어 "이 인물은 착하다", 혹은 "이 인물은 불쌍하다"라는 작가의 주관을 서슴없이 내비치기도 한다.
저연령층이 많은 네이버 웹툰 유저의 특성상 이런 작가의 표현법은 왜곡된 역사인식을 심어줄 위험성이 크지만, 팬덤도 작가 본인도 딱히 신경쓰고 있지는 않은 듯.
6. 사용한 사료에 대한 미표기
제목 자체가 조선왕조실톡인데다 엄연히 역사를 다루며 사료를 바탕으로 제작되기 때문에 실제 참고한 기록물이 무엇인지 표기하는 게 중요한데 그러한 초창기에는 어느 정도 지켜지다가 후반부로 갈수록 점차 지켜지지 않고 있다. 웹툰의 사료 사용이 해당 화의 테마를 중심으로 전개되고 공식 기록인 조선왕조실록이나 승정원일기 말고도 다른 기록물이나 특정 인물들의 저서, 심지어 민간설화까지 차용하고 있기 때문에 중간중간이나 혹은 '기록에 있는 것'에 반드시 출처 표기가 필요하나 전혀 그런 게 없다. 그렇기에 독자들이 제목이나 내용만 보고 여타 저서나 민간설화에서 가져온 것임에도 불구하고 실록의 기록으로 오해할 가능성이 크다.7. 잦은 지각
최근 들어 심각해지고 있는 문제점 중 하나. 한 주 걸러 한 주 지각하는 건 예삿일이고, 2주일을 연속으로 지각하는 경우도 보인다. 이렇게나 잦은 지각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작가도, 담당자들도 어떠한 언급도 해명도 하지 않은 채 버티고 서있다.앞서 서술했던 작가로서의 프로의식 부재가 낳은 문제점 중 하나로, 한 두번이라면 모를까 몇번이나 연속되는 지각에는 변명을 할 수가 없다. 프로라면 계약에 명시된 만큼 일을 해낼 실력이 있어야 하고, 불가피한 상황으로 인해 마감을 지킬 수 없는상황이라면 체력을 회복하기 위해 휴재를 하거나, 최소한 독자에게 양해를 구하는 것이 옳은 일일텐데 무적핑크 작가는 독자와 네이버 웹툰 팀과의 약속을 계속해서 어기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떠한 반응도 보이지 않은 채 계속 지각 중이다. 물론 네이버 측에서 무적핑크 작가를 갈구고 있기야 하겠지만 독자들로서는 이 작가가 왜 늦는지조차 알 수 없으니 그저 답답할 노릇.
11월 12일 일요일분은 오후 2시 반이 되어도 올라오지 않을 지경으로 늦고 있기에 댓글창도 그 얘기로 가득하다.
7.1. 계속된 약속 어김
그런데 무적핑크 작가의 인스타그램 게시물에서 한 팬이 조왕톡 복귀 여부를 묻자 답글로 올해 안에 좋은 소식을 들려주겠다고 한 것을 보아 2020년 안에 복귀할 듯 했으나 결국 복귀하지 않았다. 이와 함께 작가가 주 2회 연재 2개를 병행할 만큼 건강을 끌어올리고 있다고 답한 것을 보아 건강이 아직은 다 회복되지는 않은 것 같다.[64]8. 내용 약속 어김
지난 4월 22일 무적핑크는 301화를 연재했지만, 1달이 지난 이 시점에서 대한제국 이야기는커녕 유배, 발렌타인 데이, 갑질 등 사회를 풍자하는 화를 올렸다. 고, 순, 임시를 끼얹는 거라 했지만[65] 10개를 올렸음에도 언급이 없었다. 특히 갑질은, 실록에 없는 픽션이라 더 분노를 사고 있다. 그리고 내용의 양과 우려먹기까지 나오기 시작했다.[1] 사진 위에 그림을 덧그리는 방법을 주로 사용하는데, 작가의 페이스북에 올라온 글에 따르면 사진들은 전부 사용권 구매가 가능한 사이트에서 직접 돈 주고 구매해서 쓰고 있다고 한다.[2] 28회 '두 명의 이순신'편의 마지막 삽화를 보면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림이 크로키 수준이다. 조급한 상황을 표현한 것이라 변명할 수도 있겠지만, 이 정도로 난잡한 선은 아무리 좋게 봐줘도 정성이 들어간 그림으로 봐줄 수가 없다. 삽화를 자세히 보면 손떨림 보정을 넣었을 때 나타나는 삐침선이 보이는데, 이건 선을 별 생각없이 쓱쓱싹싹 그려냈다는 말이다.[주의] ...고 되어있는데 사실 무적핑크는 기사에서 밝힌 바로 실록과 함께 조선시대 4대 기본 사서(史書)로 불리는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일성록(日省錄)을 참고 한다고 한다.[4] 다만 시작은 진짜 그랬다. 그래도 그때는 "1년복 입어야 합니다." "아니요 3년복 입어야 합니다." 이 정도였지 "송시열은 선왕의 적통을 부정한 자" "너님들 강퇴" 이정도 수준이 아니었다. 외려 윤선도의 상소가 일을 적통 문제로 키운 면이 컸다. 물론 그 전에도 송시열이 체이부정을 말하는 등 징조가 있었다. 애초에 1년복과 3년복은 예법에 따른 차이이니 진작부터 예고된 일이었다.[5] 애매한 부분이긴 한데 작중 위화도 회군 파트에서 이성계가 "내 고향(함경도)은 산세가 험하고 추워, 잘 크는 것이라고는 어린아이와 감자뿐이다"라고 회상하는 장면이 나온다. 문제는 지극히 당연한 이야기지만 감자는 아무리 빨라도 19세기는 되어야 조선에 들어오는 데다가 애초에 이 때는 감자는 커녕 콜럼버스가 태어나기도 전(감자는 남미 원산)이라는 것. 물론 이 만화는 애초에 21세기 드립으로 도배되어 있는 만화인만큼 현대드립이라고 하면 문제는 안 되기에 비판거리까지는 아니지만, 이 장면은 이성계의 1인칭 시점에서 진지하게 독백하는 부분이었고 21세기 드립이라는 느낌이 전혀 안 드는 부분이었다. 진짜로 작가가 14세기에 감자가 있는 줄 알고 그렸다고 오해할 여지가 강하다는것.[6] 이후에 별다른 사과문이나 오류정정 공지없이 작가의 말과 해당내용이 수정되었다.[7] 엔하위키 이래로 몇몇 편집자의 성향이 꽤 강하게 드러나는 것이 역사 관련 문서다. 틀렸다고 대놓고 수정하기는 애매하지만, 그렇다고 그냥 두기에는 너무 일방적인 문서가 많다. 문종의 경우는 정통론 문제 때문에 세조를 비난하기 위해서, 단종을 높이는 과정에서 함께 과하게 호평받는 경향이 있다. 단적으로, 해당 기사가 완전히 없는 기사냐하면 그건 아닌데, 실록에서 왕과 왕족을 다룬 묘사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어렵다. 그러면서 세조나 태종 등 관련 표현은 승자의 기록이라고 무시하는 것이 또 이중잣대라...[8] 작가의 답장에는 16화라고 나와 있으나 원래는 18화다.[9] 이화(李花)는 자두(오얏)꽃을 의미하며, 조선 왕실의 문장(紋章)이다. 조선 왕실이 이(李) 씨이기 때문. 배꽃을 가리키는 이화는 '梨花'라고 한다. 이화학당, 이화여자고등학교, 이화여자외국어고등학교, 이화여자대학교의 이화가 바로 '梨花'.[10] 오래된 병[11] 그렇지만 마냥 좋은 건 아니었다. 혼가 편에는 여성이 시부모를 만날 때 술 1동이와 안주 5그릇을 준비하고 여자 노비 3명과 종 10인을 데리고 가야만 했다. 가난한 백성들 입장에선 택도 없는 일이었다.[12] 심지어 9회말 2아웃까지 패하다가 배트 한번 잘 휘둘러서 그대로 역전승하는 경우도 야구에선 흔하며, 무려 13점차로 밀리는걸 추격해서 동점으로 끝낸 사례도 있다.[13] 명의 영토는 요동까지였다.[14] 剌(열)을 刺(자)로 잘못 읽었다. 비슷한 사례로 드라마 드라마 기황후에서 '탑랄해(塔剌海)'를 '탑자해(塔刺海)'로 읽었다.[15] 정확히는 사진을 프린팅한 비닐 재질의 벽화다.[16] 저 벽화의 경우 가격이 £15(15 파운드, 약 2만 1,900원 정도)인데 과연 그것을 구매해서 사용한 것인지 사이트에서 사진만 퍼온 것인지 미심쩍은 부분이 있다.[17] 인종실록 권2 인종 1년 7월 1일 '辛酉朔卯時, 上薨于淸讌樓下小寢.[18] 중종실록 권105 중종 39년 11월 15일 '酉時, 上薨于歡慶殿小寢.'[19] 폐위된 연산군은 사(死), 광해군은 졸(卒)로 기록되어 있다.[20] 경종수정실록 권5 경종 4년 8월 25일 '乙未丑刻, 上昇遐于環翠亭. 內侍乘屋復, 乃擧哀.'[21] 실록청이 아닌 조선총독부 이왕직(李王職)에서 편찬한 고종실록, 순종실록에서는 다시 훙(薨)을 쓰고 있다. 일제가 대한제국황실을 이왕가(李王家)로 격하시켰기 때문.[22] 이 부분은 기록에 있는 것 부분에도 등장한다.[23] 심지어 무사 가문이 아니다.[24] 여기서 히데요시의 좁은 시야가 드러나는데 '먼 지방 작은 섬도 늦게 입조하는 무리는 허용하지 않을 것(遠方小島在海中者 後進輩不可作容許也)'이라는 말을 넣었다는 것이다. 조선이나 명은 이미 봉건제 사회에서 벗어난지 오래되었기 때문에 저런 표현은 일본이 그만큼 주변국의 상황을 읽는 능력이 딸린다는 의미가 되기 때문이다.[25] 그나마 소 요시토시가 너무 침략의 의도가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히데요시의 국서를 임의 수정해 어감을 바꿨다.[26] 원래 히데요시가 보낸 국서의 뉘앙스는 '정명향도(征明嚮導)' 즉, 명을 치기 위해 조선이 일본에 항복하고 길을 안내하라'는 의미에 가까웠다고 한다.[27] 사법·행정·입법을 관장하는 당시 최고의 국가기관이다. 발해나 고려처럼 당의 3성 6부제의 영향을 받은 기구.[28] 정일위는 보통 생전에 받기 대단히 어려웠으며 오다 노부나가와 히데요시 모두 1900년대나 돼서야 받을 수 있었다.[29] 이 양반은 한술 더 떠서 조정에서 주는 내대신 자리를 거절하자 조정에서 필사적으로 끌어들이려고 정이대장군(쇼군), 관백, 태정대신 중 하나를 골라서 주겠다는 이른바 '삼관추임문제'가 발생하기도 했다. 물론 이후 노부나가가 죽으면서 흐지부지 되었다.[30] 사실 천황가는 쇼군들이 세운 막부 정권들에 시달린지 오래였기 때문에 히데요시의 막부 개창을 환영하는 입장이 아니었다.[31] 실제로 메이지 유신 시절에 천황을 모시고 쇼군직을 탐내지 않았다는 상당히 높은 평가를 받았다.[32] 출처: 한국사 오디세이 3.[33] 청나라가 건국되면서 공적에 따라 화석친왕(和碩親王)에 봉해졌고 이후 예친왕이라는 칭호로 불려졌다. 실록 등에서는 도르곤을 구왕(九王)이라고 표기하는데, 이건 그가 9번째로 왕위를 받았던 것에 기반한 것이며 공적으로 인해 봉해진 예친왕이 아닌 순번의 의미가 큰 구왕으로 표기한 것은 청에 대한 조선 정부의 작은 보복이라 생각할 수도 있는 부분이다.[34] 34화에서도 작가가 태조의 초상화에 덧대어 그린 적이 있는데 이 경우에는 그다지 어색하지 않게 그려진데다 즉위 초의 초상화와 제법 비슷하기도 했다. 무인 시절의 이성계 또한 제법 잘 나온 편.[35] 심지어 수양대군은 머리 수에 빛날 양으로 해석해 가상의 후궁이 쿠데타 일으킬 이름이라고 깠다. 작가는 세종대왕의 아들 담양군을 "맑고 따뜻한 사람"이 아니라 전남 담양군이라고 예를 들었는데, 수양대군도 담양군과 비슷한 작명 사례이다.[36] 그런 형태는 몽골이나 거란족에 가깝다.[37] 물론 그 머리털을 버리는 게 아니라 소중하게 보관했다.[38] 이와 비슷한 오류는 작가의 차기작인 삼국지톡에서도 등장한다.[39] 기별이라는 말 자체는 이미 '소식'이라는 의미로 쓰이고 있었다. 태종 당시, 조말생이 전 부윤(府尹)이었던 안우세(安遇世)를 문초했을 때 안우생이 '이런 좋지 않은 기별을 어떻게 주상께 바로 아뢰겠습니까(如此不好奇別, 卽聞于主上乎)라고 답한 것이 대표적인 예.해당기사[40] 아마도 이번 화는 경남대학교 신문방송정치외교학부 김영주 교수가 쓴 「필사조보의 기원, 명칭, 폐간시기, 기문기사 성격과 민간인쇄조보를 중심으로」를 많이 참고한 것으로 보인다. 해당논문[41] 의정부 소속으로서 문서의 작성 및 각 부서로의 전달을 담당했다.[42] 이 시기가 의정부를 혁파하고 육조로 업무를 이관시키던 시기였다.[43] 1달의 6일인 아일(衙日/정무보고일)에 임금과 신하들이 모여 정무보고를 받는 것을 말한다.[44] 임금이 행차하거나 큰 행사를 치를 때 관료들에게 준비하라고 울리는 북소리. 간격을 두어 총 3번 쳤다.[45] 그 이전에는 예문춘추관(藝文春秋館)에서 작성했던 것으로 보인다. 세조 시기에 승정원으로 명칭이 개편되었다.[46] 이 당시엔 화주(和州)로 불렸다. 오늘날의 함경남도 금야군.[47] 카라코룸을 중국어로 옮기면 哈拉和林(합랍화림)이 되고 발음은 '칼라허린(hālāhélín)' 정도가 된다.[48] 당시 근고한어 발음은 현대 표준중국어 발음과 약간의 차이가 있는데 아쉽게도 이 문서에서는 현대 표준중국어 발음을 그대로 사용하여 발음의 유사성을 설명하였다. 조선이 건국되기 대략 70년 전인 1324년에 편찬된 중원음운(中原音韻)에 근고한어 발음이 정립되어 있으므로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하다.[49] 물론 공신이었던 조영무를 태종이 감싼 덕에 처벌받지 않았다. 한술 더 떠서 태종은 '헌사가 비록 죄를 청하더라도 내가 따르지 않을 것이니 경은 근심하지 말라' 라는 말까지 했다.[50] 당시 북송은 휘종이 통치하고 있었다.[51] 오늘날의 강원도 춘천을 가리킨다.[52] 물론 기름기가 많은 음식을 너무 많이 섭취하면 소화계통에 문제가 생겨 복통이나 소화불량, 설사가 생길 수 있고 한방에서는 이렇게 복통이나 급체가 발생한 경우에는 인삼의 복용을 금하고 있긴 하다. 또한 "차가운 것을 자주 마시면 몸이 쉽게 늙는다"는 중국 전통의학의 잘못된 관점으로 인해 당시 중국에서 인삼에 대한 과도한 남용이 있지 않았나 생각해 볼 수 있다. 사실 조선에서도 병만 났다 하면 인삼부터 챙겨 먹는 '인삼만능주의'가 유행하고 있었다.[53] 贯의 경우는 갓머리가 있다. 다른 글자일 수도 있으니 참고 바람.[54] 저서의 이야기들이 지혜를 이루는 데 도움이 된다는 말이다. 즉 교훈이 된다는 얘기.[55] <한어대사전> "年中" 1.卽中年, 壯年.[56] 당연히 베댓에 이 부분을 지적하는 글이 여럿 올라왔는데, 오류 수정 이후 오히려 베댓들이 틀렸다는 댓글이(심지어 업로드 3년 후에도) 달리는 촌극이 벌어졌다.[57] 아마도 포토리아로 여겨진다.[58] 저작권법 제 16조에 '저작자는 저작물을 복제할 권리를 가진다'라고 명시되어 있다.[59] 물론 왜성이 남부 곳곳에 지어졌지만 급조된 성격이 강해 거진 조선의 성곽과 시설 등을 재활용한 경우가 많다고 추정된다.[60] 단, 사이트상에서 표기한 몇가지 제한사항은 예외.[61] 본 계약에 반대되는 내용이 있더라도, 저작물을 웹사이트에 사용 또는 전시하는 것과 관련하여 사용자는 웹사이트 방문자가 저작물을 다운로드 또는 재사용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모든 합리적 조치를 취해야 한다.[62] 저작물을 소셜 미디어 사이트(사회적 상호작용과 관련되어 컨텐츠를 공유하도록 허용하는 웹사이트 및 응용 프로그램)에 게시할 수 없으나 다만 저작물에 '소셜 미디어 지원' 표시가 있다면 가능하며 이 경우 해당 저작권 정보가 저작물에 보이도록 내재되고 이는 당사의 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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